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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예언의 씨가 마르고(1권) (1/13)

1장 예언의 씨가 마르고

마침내, 대지를 부수며 세계를 파멸로 이끌던 악룡을 베어냈다. 그는 바위보다 단단한 비늘을 박살 내고 용암처럼 뜨거운 살점을 갈라 드래곤 하트를 파괴했다.

풍요로운 대지를 다스렸던, 그러나 이제는 재앙이 되어버린 신은 그렇게 세계를 건너온 용사의 손에 쓰러졌다.

‘이제 집으로 갈 수 있어.’

오랜 시간 품어온 작은 소망.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기쁨이 용사를 가득 채웠다. 세계를 구해냈다는 환희보다 더욱 큰 기쁨이었다.

그는 이제 이 고난의 보상을 받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 직후,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면 찰나였던가. 그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

악룡에 의해 반쯤 녹아내리던 갑옷 대신 비단 안에 솜을 기운 따듯한 침의를 입고, 금사와 은사로 아름다운 무늬가 수 놓인 침상에 뉘어져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집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일어나다가 침상 옆 인기척을 느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영웅이시여.”

약간 앳된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긴장했는지 조금 떨렸다. 갓 성인이 된 듯한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청년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잠시 넋을 잃었다.

청년은 왜인지 물기 어린 연갈색 눈동자로 흐린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당신을 모실 시종, 테오입니다.”

* * *

한때 황제가 거했던 천공성(天公城)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도. 무명 공국이라는 지명답게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도시의 시장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넓은 모자에 베일을 두른 남자를 흘끗거렸다. 평민이라기엔 범상치 않은 차림이었다. 앞은 보이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베일은 불투명했으나 남자의 걸음은 머뭇거림 없이 매끄러웠다.

시장은 시끄러웠고,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녔고, 한곳에서는 흥정을 벌이다 싸움이 일어났다. 새벽부터 나와 좌판을 벌인 장사꾼들은 피곤을 잊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손님들은 어떻게든 싸고 좋은 물건을 고르려 눈에 불을 켰다.

이곳은 사람의 삶이 맞부딪히는 작은 전쟁터였다.

그는 소란스러운 시장의 전경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바람이 피어오르더니 시장 거리를 한바탕 휩쓸었다.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이곳을 임시 신역으로 선포한다. 신역의 백성들은 모두 평화를 따르라.”

남자의 말에 돌연 모든 전쟁이 멈췄다. 싸움이 없어졌고, 피로와 빈곤이 잊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사람들이 이유 없이 서로에게 친절했으며, 이 모든 평화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복작복작한 시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그를 행인들은 자연스럽게 피해갔다. 흘끗거리는 시선도 훨씬 줄어들었다. 그가 신역을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증거였다.

신역(神域). 세계와 분리되어 신이 영향을 끼치는 장소. 고작 인간에 불과한 그가 신의 권능을 부렸다.

그는 거리를 가볍게 거닐며 통제력을 시험했다. 자유의지를 완전히 억제하지 않아 사람들의 행동은 어색하지 않았다.

“후우.”

준비를 모두 끝낸 그는 옷매무새를 꼼꼼히 정리했다. 질 좋은 시종복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품이 넉넉한 검은색 상의에 통 넓은 팔목과 허리는 푸른 천으로 조여서 조금 가냘파 보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틈에 서니 머리가 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키가 컸고 어깨도 넓었다. 거기에 어깨 위로 베일이 드리우니, 아무리 기척을 지워도 스치는 시선마저 빼앗을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한참 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약속 시각에 겨우 맞춰 천공성으로 향했다.

주인이 떠났음에도 신역은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사람들을 통제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진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즐겁게 웃었으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들도 가사를 잊은 노래의 음률을 흥얼거리며 뛰어다녔다.

이윽고 시장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한 명은 조금 전 모습에서 두툼한 외투를 걸친 베일의 남자였다. 그는 사방을 경계하면서 자기보다 세 걸음 앞에 있는 사람을 주시했다.

베일의 남자가 주시하는 자, 그 다른 한 사람은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가 정말 수도야, 테오? 진짜 많이 바뀌었다!”

호기심과 그리움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런 생기와는 다르게 빛바랜 회색이었다. 눈동자와 비슷한, 오랜 시간 바래고 바랜 느낌의 회색 머리카락을 바람이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 세계의 무엇과도 다른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정말 평화롭구나. 다들 행복해 보여.”

뒤따라가던 베일을 쓴 시종, 테오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안심했다. 남자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며칠 내내 동분서주했다. 성에서 가깝고, 적당히 사람이 모이고, 안전이 보장된 거리를 찾는 게 이렇게나 까다로울 줄은 몰랐다.

“저기 봐, 테오. 채소가 정말 싱싱해 보여. 달걀도 참 신선한 것 같아. 저 음식점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네! 저런 맛있는 먹을거리 덕분에 여기 사람들이 다 활기찬 건가?”

그래도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 쓴 보람이 있었다. 테오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구매하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예산은 충분히 준비했으니 편히 고르십시오.”

“여기는 성도 아닌데 좀 편하게 말하면 안 될까? 아티팩트도 사용했잖아.”

“안 됩니다.”

정확히 세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는 테오를 보며 남자가 서운해했다. 테오는 언제나 그에게 철저히 예의를 지켰다. 그 이유를 그저 영웅을 향한 존경심 내지 투철한 직업 정신 정도로 이해한 남자가 성큼성큼 테오에게 다가갔다.

테오는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기척을 죽이는 아티팩트 때문에 그를 감지하지 못한 사람들과 계속 부딪혔다. 그가 멈칫한 틈을 타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팔을 잡았다.

“영웅님.”

“제발. 님 자 떼라고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름 불러줘. 여기 바깥이잖아, 응?”

3년 넘게 불리는 호칭임에도 남자가 민망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자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이안 님. 손을 놓아주십시오.”

이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거늘, 테오는 늘 이안의 부탁에 약했다.

“여기 사람 많아서 길 잃을 것 같길래. 혹시 아파? 불편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예법에…….”

그렇지 않다는 말만 골라 들은 이안이 뒷말은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팔을 잡아당기는 힘은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정도였으나, 테오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직 2월이라 두툼한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에 신경을 온통 빼앗긴 채였다.

이안은 테오를 옆에 끼고 열심히 시장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깨어나고 처음으로 성 밖으로 나온 이안에게는 모든 것이 색달랐다. 그는 아티팩트 덕분에 편하게 테오에게 조잘거렸다.

“제국이 건재할 때는 화폐 단위가 황가의 성을 살짝 변형한 ‘파넷’이었다면서? 이제는 왕이 바뀌었으니까 천공의 이름에서 따올 줄 알았는데, 그냥 동전 몇 개라고 하네.”

“천공은 왕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국 이름도 버리게 하고 성의 신하들에게 군림하는 게 딱 왕인걸? 아, 저기서 과일 조림 판다. 먹어볼래? 아니, 난 돈이 없구나. 혹시 사 먹어도 돼?”

잔뜩 들뜬 이안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테오는 이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동전 주머니를 내주었다.

이안은 여러 과일을 꿀에 졸인 간식 두 접시를 사서 테오에게 하나 들려주었다. 나무 그릇에는 나무 스푼도 함께 들어 있었다.

테오는 이안이 과일을 먹기 전에 그릇을 빼앗았다. 그리고 스푼으로 뒤적이며 내용물을 면밀히 살펴본 뒤에야 돌려주었다.

잠시 뚱하게 있던 이안이 테오의 베일을 슬쩍 걷었다.

“아티팩트 있으니까 베일 걷어도 괜찮지 않을까?”

테오는 자신이 언짢아하지는 않는지 살피는 회색 눈동자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희뿌연 연갈색 눈동자를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굴린 그는 과일 조림을 한 입 먹었다. 베일을 모자 위로 꼼꼼하게 고정하던 이안이 활짝 웃었다.

“어때? 맛있어? 이거 동녘 지역 과일이라서 많이 못 먹는 거래. 올해 태풍이 거기로 간다잖아.”

“맛있습니다.”

“다행이다. 아직 겨울인데 이렇게 단 과일이 어떻게 나왔나 몰라. 여기에 [비닐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겨울에도 맛있는 과일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고. 여기에는…… 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이안이 몹시 안타까워했다.

“아! 또 잊어버렸다! 되게 자연스럽게 되물어봤는데…….”

“단어가 길어서 단번에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뭐 있겠어.”

씁쓸하게 웃는 이안의 모습에 테오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시종으로서 선을 넘는 위로를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안은 과거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용사였다. 그러나 재앙인 악룡을 죽인 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백 년간 잠들었다 깨어났다. 그가 왜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아무도 모르며, 돌아가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

“지명이나 이름도 아닌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니. 도대체 어쩌다 원래 세계의 기억까지 잊어버리게 되었는지…….”

씁쓸해하던 이안은 자신 때문에 테오까지 풀이 죽자 일부러 쾌활한 어조로 말을 돌렸다.

“옛날에는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제국이 세워지지도 않았을 무렵에는 이런 시장에도 예언자가 참 많았어. 염원초를 만들거나 아이들에게 좋은 예언을 해주었지. 이 세계를 끌고 가는 주요한 힘이 바로 예언이니 말이야. 수많은 인과의 흐름이 예언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했어.”

“전에 말씀하신 게 기억납니다. 강력하지만 절대적인 힘은 아니라고 하셨죠.”

“맞아. 그래서 적절히 이용하면 꽤 도움이 됐어. 유용한 예언은 이루고, 불리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게 까다로웠지만.”

이안은 간단하게 설명하고 끝냈으나 테오는 그가 얼마나 힘들게 세계를 구했는지 알았다. 이안의 고난을 떠올리자 테오의 가슴속에 천 갈래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이안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언은 일종의 염원이라고 할 수 있어. 상반되는 예언이 있다면 더 큰 염원이 이루어지는 거지. 그래서 절대적인 힘이 될 수 없는 거야.”

“그 힘으로 이 세계를 구하셨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언제나 그랬듯 건조한 어조였으나 이안은 테오가 진심임을 알았다. 그는 표현이 많지 않을 뿐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매번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칭찬에 목깃만 늘리며 헛기침했다.

“많은 사람이 세계를 구하고 싶다고 염원한 덕이지. 나는 조금 보탰을 뿐이야.”

테오는 반박할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중 무엇도 꺼낼 수 없었다. 다만, 듣기에 따라 조금 빈정대는 것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참 겸손하시군요.”

“겸손까지야. 그저 사실인걸.”

이안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했기에 테오는 과일 조각을 삼키며 타는 속을 달랬다. 그런 테오의 속을 짐작도 못 하는 이안도 열심히 과일을 먹으며 시장을 구경했다.

그들 옆으로 아이들이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뛰어갔다. 그러다 한 아이가 넘어지려고 하자 이안이 순식간에 움직여 잡아챘다.

“으앗!”

“조심해야지. 괜찮아?”

“네에.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넘어질 뻔한 아이를 챙겨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안이 문득 중얼거렸다.

“나도 집 가고 싶다.”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 움찔 놀라 테오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시종 테오가 그런 말을 들으면 몹시 안타까워하며 속앓이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테오는 못 들은 척 다 먹은 접시를 챙겨 가게에 반납한 후, 물장수에게서 물을 받아 왔다. 그러곤 색과 냄새를 살피다가 한 모금 머금고 별다른 문제 없는지를 확인했다. 이안이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그는 손수건에 물을 묻혀 끈적끈적해진 이안의 손에 쥐여주었다.

“물 정도는 그냥 편하게 마셔도 되지 않아?”

테오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목이 마르시면 따로 챙겨 온 수통을 드리겠습니다. 물맛이 별로더군요.”

“그게 아니라, 시장에서 아무나 사 마시는 물인데 누가 독을 넣었을까 싶어서.”

“천공 각하께서 하명하신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안은 테오가 기미를 볼 때마다 온몸이 가려운 사람처럼 굴었다. 테오는 이안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지만, 과일 조림을 다 먹자마자 내린 베일 덕분에 들키지는 않았다.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음, 아니. 오늘은 충분히 놀았어. 해도 지고 있으니 이만 돌아가자.”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천공성으로 돌아갔다. 수도 중앙에 위치한 천공성은 시장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더 먼 시장을 찾아볼 것을. 테오는 자신을 끌고 가는 이안을 보며 살짝 아쉬워했다.

그는 성문 앞에 도착해서야 이안에게 잡힌 팔을 풀었다. 이안도 테오가 많이 봐줬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들은 다시 세 걸음 떨어진 채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 영웅님! 드디어 성 밖에 다녀오신 겁니까?”

“어머, 이 시간까지 나와 계시고. 정말 재밌으셨나 봅니다.”

일을 끝마치고 성에서 나가던 귀족 관료들이 이안에게 한마디씩 말을 붙였다. 작위는 없지만 천공의 엄명으로 어느 귀족보다도 귀한 대우를 받는 영웅은 천공성의 유명 인사였다.

처음에는 천공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접근하는 이가 많았으나 이안도 나름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았다. 거기에 천공이 집권 초반에 패악을 부리며 삿된 접근을 막은 터라,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은 정말로 영웅을 존경하거나 이안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뿐이었다.

“이제 퇴근하는 거예요? 가서 저녁 맛있게 먹어요!”

기분 좋게 외출을 마친 이안은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이 끝나 돌아가는 이들에게 내일 보자는 다정한 인사말을 건네고, 근처까지 온 사람들과는 가벼운 잡담도 나누었다.

테오는 이안의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을 알기에 내버려 두었지만,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시장만큼은 아니지만 궁내에도 변수는 많았다. 그 모든 변수를 통제하면서 이안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테오의 일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여러 내성 중 이안에게 배정된 영웅성으로 돌아갔다. 본성인 천공성과 가장 가깝지만, 본성에 둘러싸인 위치에 있다 보니 들어가는 길은 꽤 한적했다.

날이 저물어 쌀쌀해졌기에 본성과 복도로 연결된 정문으로 가던 참이었다. 천공의 지시로 사치는 일절 없이 검소하게 꾸며진 내원을 지나가려는데 한 무리의 병사와 딱 마주쳤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상자들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중 상자 하나에 여러 병사가 달라붙어 있었다. 힘 좋은 장정들이 용을 쓰는데도 상자는 땅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시종이 나서서 길 정리를 하겠지만 이안은 그런 예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병사들에게 직접 물었다.

“뭘 옮기고 있는 거야?”

그제야 이안과 테오를 발견한 병사들이 송구스러워하며 답했다.

“이전 황가의 재산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몰락한 황가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특별히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도 아니었으나 전 세계의 귀하고 값비싼 물건은 언제나 그들에게 진상되었기 때문이다.

황가를 증오한 천공은 황궁을 제외한 그들의 재산을 조금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귀물들이 함부로 시중에 풀리면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정 기간을 두고 조금씩 처분하는 중이었다.

이안은 안타까운 눈으로 황가의 재산을 살폈다. 오래전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바로 초대 황제였다. 그녀의 후예가 이렇게 패가망신해 버린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황제의 폭정 때문에 천공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들은 걸 미루어 결국 자업자득이었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구나. 그런데 저건 뭐길래 그러고 있는 거야?”

이안이 땅에 반쯤 박힌 기다란 철제 상자를 가리키자 병사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용물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한데 옮기던 중 갑자기 무게가 늘어나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무게가 늘어나? 신기한 물건이네. 내가 도와도 될까?”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이안은 슬쩍 테오 눈치를 살폈다. 불경하게도 윗전 앞에서 팔짱을 낀 그는 딱히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할 테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병사들도 테오 눈치를 보며 창백해졌지만, 이안은 상자에 척척 다가갔다. 반쯤 체념한 기색이긴 해도 테오가 말리지 않으니 제 뜻대로 할 생각이었다. 이안은 상자를 붙잡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어어?”

“뭐, 뭐지?!”

“이거 엄청…….”

병사들이 당황하고, 이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테오는 팔짱을 풀고 믿기 어렵다는 듯 한 걸음 다가갔다.

“이거 엄청 가벼운데?”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바닥에 반 정도 묻혀 있던 상자가 쑥 뽑혀 나왔다.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상자 무게만 느껴질 정도로 가벼웠다.

이안은 상자의 밑바닥이 안에서부터 눌린 것처럼 우그러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크기를 보아하니 검 같은데. 열어봐도 되지?”

감히 영웅님께서 하고 싶다는 데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굳이 찾자면 테오가 종종 직언을 하긴 하나,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철컥, 끼이이-

오래된 상자 안에는 예상대로 장검이 들어 있었다. 은백색의 곧은 검신에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검 자루는 깔끔한 검은색이었다. 화려한 모양은 아니었으나 식견 없는 사람이 보아도 보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검 자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느껴졌다.

명검을 알아본 한 병사가 외쳤다.

“요, 용살검(龍殺劍)!”

“뭐라고?”

“용살검입니다! 초대 황제 때부터 내려온……!”

황가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 그들 앞에 있었다. 7년에 한 번 돌아오는 추룡제(墜龍祭) 때만 선보이는 보검.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악룡을 베어내 떨어뜨린 구세의 상징. 하늘에서 내린 용사가 직접 사용했다는 그-

“그……?”

“어, 어어어?”

잔뜩 흥분했던 병사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검이야.”

이안이 그리운 눈으로 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루키오 그 녀석, 내 검을 그렇게 탐내더니만 잘 챙겨두었구나.”

초대 황제의 존명을 친구 부르듯 언급하는 그를 보며 병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는 800년 전 세계를 구한 영웅이었다. 천공에 의해 반강제로 주입되던 존경심이 진심으로 타올랐다.

이안은 병사들의 열렬한 눈빛을 깨닫지 못한 채 말했다.

“그런데 용살검이 뭐야, 용살검이. 이 녀석 이름은 ‘미리내’야.”

이안이 제대로 된 검명(劍名)을 부르는 순간, 검이 잘게 떨리며 기괴한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검을 꽉 쥐었으나 진동과 함께 손바닥을 들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테오가 달려와 손을 쳐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검, 미리내는 한참을 그렇게 진동하다가 천천히 진정했다.

“자네들은 다른 물건부터 옮기게. 이건 내가 천공 각하께 말씀드려 따로 처리하겠네.”

병사들은 조금 망설였으나 천공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영웅님의 시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안과 테오에게 경례한 뒤 값비싼 짐을 챙겨 들고 내원을 떠났다.

이안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 검에 자아가 있습니까?”

“음……. 영혼 같은 게 깃든 건 아니지만, 나와 함께 여행하면서 자주 공명했었어. 의사소통 같은 걸 주고받곤 했지. 혹시 나를 알아본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용살검, 아니, 미리내 정도 되는 명검은 주인을 스스로 정하기도 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제대로 된 검명도 말씀하셨고요.”

“그런데 왜 그런 통증이…….”

이안은 다시 한번 검을 쥐어보았다. 아까보다는 약해졌으나 닿은 부분이 욱신거렸다. 이대로는 검을 쓰기 어려웠다.

“내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나를 잊었나?”

“그건 아닐 겁니다. 영웅님 오시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다가 영웅님 손에 들렸잖습니까. 게다가 이름에 반응하여 진동했고 말입니다.”

“그럼…… 내가 약해졌기 때문인가? 미리내를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는 여정 막바지에 다다른 서른 살의 육체였는데, 지금은 그만큼 단련되지 못한 스물일곱의 육체니까.”

그럴듯한 의견에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다음 작게 속삭였다.

“게다가 그때는 신에 가까운 격을 갖추셨다고 하셨지요. 안타깝게도 아직 그만한 격을 되찾지 못하셨으니 그 또한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테오는 미리내에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두었다.

“병사들이 미리내가 담긴 상자를 옮기던 도중 갑자기 무거워진 것도 영웅님께서 가까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미리내를 상자에 담아주시겠습니까?”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한테 부탁할 때 일일이 죄송하다고 할 필요 없어. 그냥 고맙다는 말이면 충분해.”

“유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대답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고쳐지질 않으니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미리내를 상자에 옮겨 담았다. 그 정도만 하는데도 손이 저려서 몇 번이나 주물러야 했다.

테오는 이안의 손을 흘끗 보고는 상자를 들었다.

“묵직하긴 하지만 들 만하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래라면 천공 각하의 명에 따라 처분해야 하지만 영웅님의 물건이니 결정해 주십시오. 이대로 천공 각하께 가져갈까요?”

이안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돼? 미리내로 수련하면 굉장히 도움 될 것 같아.”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 일단 천공 각하께 보고하겠습니다.”

이안에게 상자를 건넨 테오가 바닥에 쭈그려 앉았던 이안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이안이 눈을 굴리다가 슬쩍 제안했다.

“나도 같이, 갈까? 어떤 분인지 한번 뵙고 싶은데.”

“기회가 되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먼저 처소로 돌아가 주십시오. 저는 보고 후 가겠습니다.”

테오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안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 움직였다. 황가의 유일한 유산인 천공성으로 들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천공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텅 빈 집무실 책상, 테오는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가 손을 대충 휘젓자 한줄기 바람이 불더니 집무실 등불이 켜졌다.

똑똑똑. 불을 켜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노크했다. 테오는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손을 휘둘러 문을 열었다. 화려한 복식의 여자가 환히 웃으며 들어왔다.

“데이트는 잘하고 오셨습니까, 각하? 제 아티팩트는 도움이 되셨는지요.”

“데이트 아니고 외출이오. 아티팩트는 잘 사용했소만.”

시종복을 입은 테오의 말이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모쪼록 다음에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제 실력은 각하께서도 충분히 아실 터이니 요청만 하신다면 어떤 아티팩트라도…….”

“클로이.”

테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네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니다.”

그러자 클로이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왜? 왜 아니지?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매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클로이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아니, 그렇잖아. 너만큼 영웅님께 헌신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잘못된 전승 바로잡아 업적 알려, 성 하나를 통째로 줘, 심지어 직접 시중까지 들지……. 물론 영웅님께서 눈치가 조금 부족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네 얼굴이면 충분히 통할 텐데!”

“내가 하는 일에 네 사감을 집어넣지 마라.”

“아까워서 그렇지, 아까워서. 난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보거든.”

클로이가 테오의 베일을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테오가 매섭게 손을 쳐냈지만, 클로이는 여전히 마냥 예쁜 동생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테오는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그딴 이상한 노래가 퍼지는 걸 막지 않은 건가? ‘천공 연가’라고?”

“어, 어엇?”

“시장에서 아이들이 부르는데 가사가 정말 가관이더군.”

클로이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막지 않았다는 게 다 티가 났다. 테오는 그녀를 힐난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아직도 그 노랫말을 떠올리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공께서는 매일 밤 영웅님을 찾아가.’

‘영웅님이 행복해지도록 안아주시네.’

‘영웅님 행복은 나라의 행복, 영웅님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니-’

‘천공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는구나.’

사전 답사 때 이 노래를 들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테오는 치를 떨며 아이들의 노래에서 가사를 빼버렸다.

“그, 그게 나는 분명 네가 말한 대로 의뢰를 넣었거든? 분명 처음에는 점잖은 가사였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와전될 줄은…….”

“난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든 적 없다. 다 영웅의 업적이니 분명 그걸 강조했을 텐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사로 바뀐 거지?”

“아, 그게 문제였니……?”

난 또 교합을 은유하는 가사 때문인 줄 알았네. 클로이는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이 속 모를 친우에게 그가 애써 무시하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야 백성들에게는 천공 각하께서 성군이시니까. 이만큼 평민의 안위와 행복을 챙기는 군주가 또 있었겠어?”

“평민 챙긴 적 없어.”

“그래. 다 영웅님을 위해서였겠지만, 결과적으로 평민도 덕을 보았지. 게다가 천공의 권능을 생각하면 이만한 태평성대가 또 없잖아.”

무명 공국을 다스리는 다섯 공작 중 하나인 천공. 모든 공작의 지위는 같으나 백성들에게 천공은 특별했다. 심지어 같은 공작인 클로이조차 천공을 왕처럼 여겼다.

테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날 믿지 마라. 너무 의지하지도 마.”

“알았어.”

“새로운 음유시인을 수배해라. 천공이 아닌 영웅의 업적을 제대로 노래하도록 해.”

“명 받듭니다요.”

클로이가 장난스럽게 절을 한 뒤 방에서 나갔다. 테오는 혀를 차며 의자에 기대곤 느릿한 손길로 베일을 벗었다. 환한 불빛이 테오의 수려한 얼굴을 비췄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청초한 선을 그렸다. 끝이 둥근 콧방울과 깊은 눈매가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곧은 콧대와 입매는 다부졌다. 곱상한 인상과는 다르게 집요하고 섬뜩한 빛을 띠는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굳게 감겼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눈 아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을 감고 의자에 더욱 몸을 기대자 테오의 이마에 황금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졌다. 잠시 그렇게 쉬면서 그는 신역으로 지정한 영웅성에 이안이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도 용살검은 무사히 넘겼군.’

공들여 세운 계획의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그러나 테오는 쉽사리 기뻐하지 않았다. 한 번의 성공으로는 그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겨우 만족할 것이다.

천공이 눈을 번쩍 떴다. 부드러운 연갈색이 아닌 창천(蒼天)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자신의 계획을 되새겼다.

모든 계획은 천공의 손안에서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했다.

* * *

당연하게도 천공은 이안의 요청을 곧바로 수락했다. 거기에 건강에 좋은 온갖 산해진미를 보내주면서 수련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전했다. 다만, 용살검-미리내를 다루는 것에 염려를 표했다.

“천공 각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리내에는 매우 강력한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신화 때문에 영웅님께서 미리내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으실 것 같으시답니다. 따라서 미리내 수련은 가급적 참관인을 두고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참관인 누구?”

“접니다.”

그럴 줄 알았는지 이안이 피식 웃었다. 영웅성에 거주하는 사람은 이안과 테오뿐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천공이 오직 영웅 한 사람을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영웅성은 옛 황제궁 일부를 허물어 지은 아담한 성이었다. 다른 성에 비해 아담한 것이지 이안 혼자 살기에는 너무 드넓었다.

성 관리와 경비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 외에는 누구도 배치하지 않았으니, 사교성 좋은 이안이 사람을 그리워할 만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부분만 보고 일각에서는 천공이 영웅을 견제하여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물론 그렇게 착각할 법도 하지만, 일단 이안부터가 동의하지 않았다. 이안은 천공성에서 그 누구보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천공의 보호가 좀 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바쁜데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나야 수련이 일이지만 너는 네 업무가 있을 텐데.”

“제 일은 영웅님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한 반응 그대로 나왔다. 테오와 알고 지낸 지 햇수로 4년째. 어지간한 논리가 아니고서야 테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안은 괜히 힘 빼지 않기로 했다.

이안이 영웅성에서 침실보다 오래 머무는 연무장은 말 그대로 영웅 맞춤형 공간이었다. 온갖 마법진을 바르고 발라 안전이 보장되었으며, 오러 수련실도 따로 있고, 머무는 동안 자가 치유력도 향상됐다.

이 연무장 덕분에 이안은 실전 없이 개인 훈련만으로 과거의 무력을 많이 되찾았다. 다만 악룡을 잡았을 때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윽! 이런…….”

이안이 미리내를 떨어뜨리며 아쉬워했다. 제대로 붙잡을 수조차 없어 저릿저릿한 손이 벌벌 떨렸다. 그는 양손과 미리내를 번갈아 보다가 테오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고마워.”

“무리하지 마십시오.”

수련을 시작한 지 열흘째. 이안은 아직도 5분 이상 미리내를 붙잡지 못했다.

“몸 상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과거의 나에게 질 수는 없지.”

“무리하셔서 어디 한 군데 상하시면 천공 각하께서 노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테오가 음울하게 말했다.

재작년, 무리하게 오러 수련을 하다가 탈진한 이안 때문에 천공성이 발칵 뒤집혔었다. 천공 테오는 크게 노하여 영웅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시종 테오를 벌해야 했다.

그 벌 중 하나가 72시간 영웅 시중이었는데, 이안은 그런 게 부담스러웠기에 오늘 수련은 이만 마치기로 했다.

‘테오랑 같이 노는 거면 상관없지만, 얘는 진짜 일만 하니까……. 나 때문에 고생 안 하도록 조심해야겠네.’

이안은 상자에 돌려놓은 미리내를 테오에게 건넸다. 검집이 유실된 터라 함께 있던 상자에 계속 보관하는 중이었다.

“자. 오늘 미리내 수련은 그만할 테니까 너도 가서 좀 쉬어.”

“영웅님께서 쉬지 않으시면 저도…….”

“천공께서 다른 수련까지 지켜보라고 한 거 아니잖아. 너 고생하지 않도록 조심할게.”

조금 고민하던 테오는 이안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상자를 가지고 떠났다. 이안은 곧장 무거운 장검을 들고 수련을 재개했다.

기본적인 내려치기, 베기, 찌르기를 각각 천 번씩. 검끝이 흔들리면 셈하지 않았다. 무거운 검과 가벼운 검, 중간 검으로 바꿔가며 횟수를 채우고 나서야 기초 훈련이 끝났다.

예전부터 이안은 기초 수련과 깨끗한 검로, 단단한 하체를 중요시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디서 읽었던 것 같다.

‘강해지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막연한 느낌으로 시작한 수련이었다. 3년이 넘도록 큰 진전은 없었으나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시종 테오 또한 단 한 번도 보채거나 회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천공에게 건의해 수련을 지원해 주었다.

‘강해지면 미리내를 쓸 수 있어. 즉, 미리내에 기록된 신화를 볼 수 있는 거야. 분명 과거 내 행적이 기록되었겠지.’

이안은 팔굽혀펴기 자세를 취한 후 하체를 위로 띄워 몸을 일직선으로 곧게 폈다. 전신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깊게 호흡했다.

‘강해져서 기억을 되찾으면, 집으로 돌아갈 거야.’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리움은 남아 있다. 돌아갈 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그곳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알 길은 없으나 돌아갈 이유로는 충분했다.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지? 돌아가면 내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겠지?’

이안은 두 눈을 감았다. 땀이 뚝뚝 흘렀으나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 * *

어렴풋이 남은 기억에 따르면, 이안은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마법 대신 다른 학문이 발달했는데 그건 기억하지 못했다. 그곳은 몬스터가 없었으나 인종이 많았고, 세계는 크게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었다. 옛 제국이자 지금은 천공이 거하는 무명 공국이 모든 문명의 중심인 이 세계와는 달랐다.

그런 세계에서 왔기 때문인지 이안은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몸을 잘 쓰고 검도 잘 다루었으나 이 세계 검사들은 대부분 느끼는 오러도 힘겹게 익혔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오러를 깨우치고 나서는 오러를 검에 담는 소드마스터의 경지까지 비교적 쉽게 올랐다. 마스터라는 칭호를 얻은 오러 사용자가 전 세계를 따져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른 성취였다.

그렇게 3년간, 분주하게 키워온 실력을 갖추고도 이안이 미리내를 다루기 위해 걸린 시간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손이 약하게 저렸지만 검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악룡을 잡을 당시 몸 상태를 떠올리며 수련에 박차를 가한 보람이 있었다.

이안은 이제 미리내를 휘둘렀다. 미리내는 수련용 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단순히 검의 질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자아까지는 아니어도 생각할 줄 알고, 감정을 표현할 줄 아니 오랫동안 찾지 않은 주인에게 서운함을 마음껏 표현했다.

“미리내야, 내가 일부러 널 안 찾은 게 아니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절대로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무게 바꾸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응?”

미리내가 웅웅 울었다. 미리내와 이안이 공명하면서 검명의 의미가 읽혔다.

-싫어.

“아니이! 내가 강해져야지 널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거 아니야.”

웅웅-

-적응해.

“야!”

이안은 버럭 소리쳤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테오를 보고 입을 가렸다. 드물게 크게 뜨인 테오의 눈을 보니 민망함이 밀려왔다.

“미안. 미리내가 도통 말을 안 들어서.”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테오에게 미리내와 티격태격하는 꼴을 한두 번 보인 것도 아니라 더 민망했다. 그가 보기에는 혼자 검 잡고 헛소리하는 거로 보였을 테니까.

이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오는 그를 기다렸던 용건을 꺼냈다.

“남녘 지역에 재해가 발생하여 천공 각하께서 출정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부득이하게 제가 각하를 수행하게 되어 오늘은 자리를 비울 것 같습니다.”

“어, 오래 걸려?”

“오늘 중에 끝날 것 같습니다. 다른 시종들을 불러놓았으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이안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테오가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없이 혼자 수련하려니 그건 그거대로 허전할 것 같았다.

테오가 떠나고 난 뒤 이안이 중얼거렸다.

“나도 참 간사하네.”

우우웅.

-무슨 소리?

“수련할 때 테오가 지켜보면, 엄청 잘하고 싶어져서 부담스럽기도 했거든. 그런데 막상 테오가 없으니까 왠지 기운 빠지고 아쉽고 그래서. 혹시 나 관중이 있어야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나?”

-그건 아닌데, 여전히 눈치가 없는 듯.

“여기서 눈치 얘기는 왜 나와?”

미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은 조금 투덜거리다가 그냥 열심히 수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상하게도 미리내가 더는 장난을 치지 않아 훨씬 수월하게 기초 훈련을 끝냈다.

“오늘 뭔가 느낌이 좋은데?”

느낌에 따라 수련량을 정하는 건 좋지 않지만 오늘은 정말 좀 달랐다. 기초 수련 외에도 체력 단련까지 끝냈는데 아직 수련 시간이 남았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미리내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순식간에 검에 몰입하자 저리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검에 오러를 집어넣었다. 마스터를 증명하는 검기는 아직 시도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러를 조금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검의 강도는 배로 뛰었다.

“좋아. 미리내야, 이대로 조금만 더…….”

욕심내지 않고 딱 그 상태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미리내의 검신에 새겨진 글귀 중 하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읽을 수 없던 그 글귀가 읽혔다.

[예언의 씨가 마르고]

글귀의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이안의 눈앞에 어떤 기록이 펼쳐졌다.

* * *

햇볕 한 조각이 가볍게 흩날렸다. 이안은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좇다가 이내 정정했다. 햇볕이 아니라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이었다.

이 세계에서 금발은 꽤 흔했다. 이안이 악룡을 물리치려고 사방을 쏘다닐 때도 금발을 상당히 많이 봤었다. 하지만 저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 감상이 누군가의 비명에 의해 순식간에 흩어졌다.

“아아아악!”

“끄윽, 흡…….”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천공성인 옛 황제궁의 외원에 수십 명의 사람이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목이 떨어진 시체가 곳곳에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삼키게 하며 애원을 토해내게 하는 이는 금발의 주인이었다. 이상하게 얼굴만 선명치 않게 지워진 남자는 미리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미 피를 잔뜩 머금은 미리내로 누군가를 지목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이 잔뜩 뒤섞인 것처럼 웅웅 울렸다.

“내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제대로 된 예언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으으으…….”

“네놈은 부녀자에 대한 거짓 예언으로 가정을 파탄 내고 그녀의 전남편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의혹을 받았구나. 이렇게 사기꾼이 많아서야 나라가 바로 서질 않겠어.”

남자가 미리내를 들이밀자 거짓 예언한 예언자가 혼절할 것처럼 쓰러졌다. 남자는 미리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예언자 얼굴 위로 뚝뚝 떨구었다.

“자. 마지막으로 한번 제대로 예언해 보아라. 내가 네놈을 죽일 것 같으냐, 살릴 것 같으냐?”

예언자는 겨우 몸을 추슬러 앉고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예언 도구 중 하나인 카드 뭉치를 꺼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카드를 섞고 내려놓고 뒤집던 그가 밝은 얼굴로 외쳤다.

“사, 살려주-”

“틀렸다.”

미리내가 예언자의 목에 틀어박혔다. 예언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사방을 적시자 주변 예언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시끄럽다.”

남자가 일갈하며 다시 다른 예언자를 미리내로 가리켰다. 이안은 직감적으로 저 남자가 예언자들을 살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리 여섯을 베어낸 뒤 남자가 그다음으로 가리킨 사람은 아주 늙은 예언자였다. 그녀는 제법 인자했을 법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다른 예언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태도였다.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3황자 전하.”

이안의 예상대로, 남자는 초대 황제인 루키오의 후예였다. 루키오는 자신의 금빛 머리카락과 벽안이 대대로 내려왔다고 자랑한 적 있었다.

“이렇게 될 일이었지. 자네 점괘에는 안 쓰여 있던가?”

“예언이나 점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가장 가능성 큰 방향을 일러줄 뿐.”

“그 가능성이 인간의 염원을 불러일으키고, 염원은 예언을 현실로 만들지. 대예언자 에스겔라, 자네는 스스로 예언한 최악의 가능성을 뒤엎으려 했으나 염원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예언이 실현된 소감이 어떠한가?”

에스겔라의 주름진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전하께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이유를 압니다.”

“그래? 처음으로 예언이 없는 의견을 내놓는군. 말해보게.”

“전하께서는 황가의 그 누구보다도 강한 예언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신 것이겠지요. 다른 예언자들을 없애 예언을 독차지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그 말에 3황자가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퍼지며 괴기스럽게 울렸다. 심약한 예언자 몇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맞았다. 상으로 자네는 마지막에 베겠다. 제자들이 죽는 모습이나 구경하도록.”

3황자는 더는 예언을 요구하지 않고 쉼 없이 미리내를 휘둘렀다. 묶이지 않았던 터라 예언자들이 도망가거나 반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미리내는 3황자가 원하는 만큼 날카로웠고, 아무리 피를 덧발라도 무뎌지지 않았다.

마침내 에스겔라 혼자 남았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악을 썼다.

“예언을 독점한다고 해서 당신의 태생 예언이 바뀔 것 같습니까! 모든 예언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 같습니까!”

3황자가 그녀를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미리내가 에스겔라를 관통했다.

* * *

이안은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번쩍 떴다. 기록은 길었으나 실제 시간은 아주 짧았는지 순간 어지러웠다. 미리내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는 서둘러 빛나는 부분을 살폈다.

[예언의 씨가 마르고]

글귀는 빛과 함께 흐릿해지더니 곧 완전히 지워졌다. 이안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되뇌었다.

“예언의 씨가 마르고…….”

이 글귀와 글귀에 담긴 내용은 관련이 있는 듯했다. 3황자라는 사람이 미리내를 들고 예언자 수십 명을 몰살했으니까.

이안은 미리내가 대량 학살에 쓰였다는 것과 주동자인 3황자가 자신보다 미리내를 더 잘 다루는 듯한 모습에 불쾌감을 느꼈다.

“이 기록 진짜야? 아직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에 3황자가 너를 가지고 예언자들을 학살했어?”

그가 속삭였으나 미리내는 답하지 않았다. 기록의 진실을 알고 싶지만, 미리내와 항상 공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이안은 답답했다.

‘일단 방금 본 것은 신화가 아니야. 천공이 말한 강력한 신화가 이런 것일 리 없어.’

이안은 미리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리내의 앞뒷면에는 읽을 수 없는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앞면의 글자가 더 오래된 것 같았다.

사라진 ‘예언의 씨가 마르고’는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앞면과 뒷면은 글자의 형태 또한 달랐다. 앞면은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새로운 글자였으나, 뒷면은 이 세계의 문자와 유사했다. 다만 읽을 수 없을 뿐이었다.

새겨진 시기와 글자의 형태가 다른 앞면과 뒷면. 전혀 다른 기록이 남았을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뒷면의 글귀에서 신화가 아닌 기록을 보았으므로 앞면이 강력한 신화의 기록일 것이다.

‘뒷면에 남은 글귀는 네 문장이야. 이건 대체 누가 남긴 것일까?’

신화란 신의 행적을 기록한 모든 것이다. 단순히 종이에 적는다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남긴 기억이나 상황, 그 자체에 가까웠다. 뒷면의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고는 하나 이렇게 생생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는 신화에 버금가는 과정이 필요할 터였다.

신의 행적은 신화로 기록되고, 인간의 행적은 역사로 기억된다. 이것이 신화가 아닐지언정 비범한 인간의 역사임은 분명했다.

‘3황자, 에스겔라, 예언자들……. 복식을 보면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분명 아는 사람이 있겠지.’

이 기록의 진실, 기록을 남긴 이유, 볼 수 있었던 조건. 누가 어떻게 미리내에 기록을 새겼으며, 어째서 미리내는 그것을 허락했는지.

풀어야 할 의문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늘었다. 이안은 일단 가장 밑바탕이 되는 사건이 진실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황제궁 외원에서 벌어진 데다가 무려 대예언자까지 죽은 학살 사건이니 유명하겠지? 테오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간편하지만 출정 다녀오면 굉장히 피곤해하니까…….’

이안의 얕고 넓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유능한 사람은 역시 테오였다. 그러나 출장으로 피곤할 그에게 물어보려니 좀 그랬다.

‘공작님들 중에서는 동녘 공작님이 가장 편하지만 천공에게 말할 가능성이 가장 커. 괜히 천공 귀에 들어가면 귀찮아질 것 같단 말이지. 제일 똑똑해 보이는 북녘 공작님은 좀 불편하고.’

미리내에 신화가 새겨져 있다고 말해준 천공이 이 기록을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천공은 굉장히 유능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도 괜히 기록 얘기를 했다간 미리내를 다시 가져갈 수도 있으니……. 역시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겠다.’

벌써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그 사람이라면 아직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이안은 미리내를 상자에 넣어두고 영웅성에서 빠져나갔다.

* * *

천공성에 세 면이 감싸인 영웅성은 가장 큰 정문이 천공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정문으로 나가면 무조건 천공성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테오가 사용인 전용 통로는 못 쓰게 했기 때문에 혼자 다닐 때는 대체로 후문을 이용했다.

영웅성의 후문은 아름다운 후원으로 이어지는데 더 멀리 가면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그 숲의 끝자락에 성벽이 있고, 성벽을 넘으면 수도의 골목이 나온다.

아직 안전상의 이유로 천공성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을 무렵, 이안은 이 숲을 쏘다니며 답답함을 풀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데 마땅한 대화 상대는 테오밖에 없어서 외롭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산책을 가장한 주변 지리와 탈출 경로를 탐색하던 중 만난 사람이 있었다.

“세레나! 오늘도 이 시간까지 책 읽어?”

“실내에서는 정숙해 주세요, 영웅님.”

세레나가 소심하게 이안을 흘겨보았다. 이안은 씩 웃으며 살금살금 그녀에게 다가갔다. 보닛으로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린 그녀가 펼쳐놓았던 두꺼운 책을 탁 덮었다.

그녀는 영웅성의 남서쪽에 있는 작은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이 아직 황궁이었다면 냉궁이라 불렸을 만한 허름한 저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곳을 자료보관소라고 설명했었다. 비록 첫 만남이 좋지는 않았으나 이안은 종종 이곳을 찾아와서 세레나와 대화했다.

세레나가 머무는 서재를 제외한 모든 방의 문은 언제나 잠겨 있었다. 그는 사용인 한 명 없이 혼자 사는 세레나가 일종의 좌천된 게 아닐까 추측했다.

“찾고 싶은 자료가 있는데 알아봐 줄 수 있을까? 가급적 천공께는 비밀로 하고.”

“뭐, 뭔데요?”

“3황자가 예언자들을 학살한 사건.”

안 그래도 하얗던 세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안은 그 반응에 당황해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레나는 숨고 싶은 것처럼 양손으로 보닛을 꽉 눌렀다. 안 그래도 마주하기 힘들던 눈동자가 완전히 가려졌다. 그녀가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건은 왜 조사하시는 거죠?”

“자세히 설명하자면 긴데…….”

“요약 부탁드립니다.”

“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보네.”

세레나는 바들바들 떨며 온몸으로 긍정했다. 이안은 그녀가 정말로 기절할까 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으면 자료만 찾아주지 않을래? 금방 보고 돌아갈게.”

그러나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안이 재차 부탁하려는데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어, 없어요.”

“뭐라고?”

“그 사건 기록, 없어요. 목격자가 없어서…….”

이건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이안은 미리내에 그 사건이 기록되었으니 당연히 다른 기록물도 남아 있을 거라 유추했다. 그런데 목격자가 없어 기록도 없다면…… 미리내에 기록을 남길 만한 사람은 3황자뿐이라는 뜻이다.

“정말? 기록된 게 전혀 없어?”

“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기록이 없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이안이 아는 세레나는 예민하고 겁이 좀 많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정도가 과했다. 세레나가 심호흡하며 간신히 말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금언령이 내려졌지만 그 시기에 황궁에 있었던 사람은 다 알아요.”

“하지만 황족은 천공께서 다 죽이셨다고…….”

이안이 말끝을 흐리자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3황자가 천공 각하세요.”

이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공이 황자라고? 그럼 자기 가족을 제 손으로 다 죽인 거야?”

세레나가 괴로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 각하께서 황가를 멸족하시고 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하신 다음에 행하신 게 예언자 축출이었어요. 당시 거짓 예언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한 자들만 골라 몸소 처형하셨지요. 그 과정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요.”

“대예언자도 축출 대상이었어?”

“에스겔라 님도 아시나요? 그분은 아마 본보기였을 거예요. 모든 예언자의 스승과도 같은 분이셨으니까요. 어쨌든 그 뒤로 직업적인 예언자 활동은 금지됐어요. 천공 각하께서 그렇게 명하셨거든요.”

그러면서 세레나는 몇 번이나 당부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데 가서 그 사건 언급하시면 안 돼요. 저도 영웅님이라 금언령을 깨고 말씀드린 거예요. 영웅님 말고 다른 사람이 금언령을 어기면 천공 각하께서 노하실 게 분명해요.”

이안에게 천공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백성을 잘 돌보는 선한 왕이었다. 천공 덕분에 편안하게 생활했고, 얼마 전에 간 시장에서도 평화로운 백성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이 왕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에서도 겸손함이 느껴졌다. 그러니 학살 기록에서 본 3황자와 성군인 천공을 연결하기 어려울 수밖에.

“태생 예언은 뭐야? 처음 듣는데.”

“공국이 아직 제국이던 시절, 예언자들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주는 예언이에요. 평민들에게는 복을 기원해 주는 쪽이었지만, 귀족이나 황족에게는 인생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예언이었죠.”

“3황자, 그러니까 천공의 태생 예언을 에스겔라가 주었어?”

“황족의 태생 예언은 여러 예언자가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내용은 말씀 못 드려요. 제 목이 달아나고 말 거예요.”

“그럼 안 되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황자의 예언을 알고 있어?”

대비하지 못한 질문인지 세레나가 화들짝 놀라며 보닛을 매만졌다. 그녀는 그냥 고개를 떨군 채 질문을 무시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이안은 많이 묻지 못해 아쉬워했으나 더는 세레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세레나는 이안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꽉 묶은 매듭을 풀고 보닛을 벗었다. 진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쏟아졌다. 보닛으로 가리는 게 가장 안전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쓰고 있자니 너무 답답했다.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한 세레나가 오른쪽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녀의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는데 미묘하게 양쪽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가 더 옅은 물빛이었다.

세레나가 잠시 눈가를 더듬다 눈을 감고 쉬자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 부분부터 온몸으로 소름이 쫙 끼쳐서 세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쿵! 뒤로 밀린 의자가 넘어지며 큰 소리가 났으나 세레나는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고개를 돌려 바람의 출처를 찾았다. 어느새 문가에 이안의 시종, 테오가 서 있었다.

“대답은 잘해줬소?”

세레나는 침착하려고 애썼으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반응은?”

“혼란스러워하더군. 천공을 아주 좋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네 계략이 잘 먹혀서 기쁘겠구나.”

“누님의 사견에는 관심 없소. 대담 기록이나 주시오.”

세레나는 이안과의 대화를 빈 종이에 그대로 적어 테오에게 건넸다. 테오는 길지도 않은 기록을 몇 번이나 꼼꼼히 살폈다.

“다음에 또 황가와 연관 있냐고 물으면 시녀였다고 하시구려. 이 반응은 너무 어색하군.”

“언제까지 속일 셈이냐.”

테오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세레나는 가슴을 치며 토로했다.

“이유도 모른 채 네 기행을 돕고 있잖느냐. 그분을 또다시 속이는 것 같아 답답하단 말이다.”

“재밌구려. 언제부터 영웅을 그리 신경 쓰셨소?”

“네가 그런 걸 보여주었으니 측은지심이 생겨나는 게 당연하잖느냐! 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야!”

세레나가 파르르 떨며 외치자 테오는 낮게 웃었다.

“빨리 끝내고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것은 아니고?”

“…….”

“누님, 언제나 이기적으로 사셨잖소. 이제 와서 염치 챙기지 마시오.”

테오의 손짓에 바람이 움직였다. 바람은 세레나를 스쳐 그녀 뒤에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세레나는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기록 관리 잘하시오.”

“……어서 가거라.”

세레나는 테오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테오와 함께 들어왔던 바람이 완전히 흩어지고, 백리안으로 그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긴장을 풀었다. 오른쪽 눈에 끈질긴 환상통이 일었다.

“나는 정말…….”

세레나는 손바닥으로 오른쪽 눈, 백리안을 지그시 누르며 울음을 삼켰다.

* * *

테오는 백리안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비소를 삼켰다. 가엾은 그의 누이는 여전히 그때의 악몽을 꾸는 모양이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에게 비애와 혐오를 동시에 느끼며, 그는 시종의 모습을 한 채 연무장에서 이안을 기다렸다.

이안은 겸사겸사 산책도 하려는지 복귀가 늦어졌다. 그가 보이지 않는 순간순간이 괴로웠으나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테오는 미리내가 든 상자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미리내는 이제 테오의 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신화가 미리내에 기록된 신화와 상극인 탓도 있으나, 애초에 이안의 검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되찾았으니 다른 이의 손에 들리기 싫어했다.

주인을 되찾은 성검의 기쁨과 이안을 다시 만난 자신의 기쁨 중 어느 것이 더 클지 테오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황가를 향한 증오만큼은 동일했기에 잠시나마 천공이 성검을 쥐고 휘두를 수 있었다.

천공과 성검은 나름대로 이해관계가 잘 맞는 괜찮은 파트너였다. 둘은 분노로 공명했었다. 그 분노의 대상이 일치했을 때는 놀라울 정도의 합을 보였다.

그러나 이름을 되찾은 미리내는 더는 분노하지 않았고, 주인의 손길에 마냥 행복해했다. 테오만이 여전히 분노와 증오 속에서 홀로 불타올랐다.

“앗, 벌써 온 거야? 피곤할 텐데 나 기다리고 있었어?”

드디어 이안이 왔다. 테오는 무심결에 미소 지었다. 기쁜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계속 기다렸어, 이안.’

테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반드시 너를…….’

* * *

잠깐 떠올랐다 사라진 테오의 미소에 이안은 눈을 비볐다. 고운 얼굴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테오는 감정 표현이 많지 않았다. 그와 3년이 넘도록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박장대소는커녕 웃음소리조차 들은 적 없었다. 이런 작은 미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오랜만에 웃는 모습 보니까 좋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 어쨌든 웃으면 좋지. 자주 좀 웃어라.”

이안은 자신의 얼굴근육이 조금 어색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작년 말부터 묘하게 우울해하던 테오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보기 드문 미소를 보니 괜히 마음이 술렁거렸다. 겨우 저 비현실적인 외모에 적응했는데, 잔잔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격이었다.

‘우와아, 심장 엄청 빠르게 뛴다.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정말 적응하기 힘든 외모라니까.’

단순히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안은 미처 몰랐다. 살짝 상기된 뺨을 문지른 그가 미리내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믿기 어려울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든 믿겠습니다.”

한결같은 반응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연무장 한쪽 구석에는 테오가 종종 앉아서 서류를 보는 테이블이 있었다. 테오는 빠르게 차까지 준비해 경청할 준비를 했다. 그는 유능한 시종이자 좋은 청자였다.

이안은 언제나 알맞은 온도의 차를 마시며 자신이 본 기록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래서 천공은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

“어째서입니까?”

“사람들의 입을 막으니까.”

“그럼 그전까지는 위험하지 않은 사람 같았습니까?”

이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날 많이 좋아한다고는 생각했지.”

“큼.”

차를 마시던 테오가 헛기침하자 이안이 서둘러 해명했다.

“그러니까 영웅을 엄청 좋아한다고. 나한테 준 성도 영웅성이고, 내 업적을 알리는 데 동분서주하잖아.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고마운 사람이었지.”

“……부담스러우셨습니까?”

“아직도 적응이 안 돼. 내가 한 일에 비해서 좀 과하게 해준달까?”

테오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계속 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영웅을 엄청 좋아하는 건 테오도 마찬가지였기에 반박이 돌아올까 긴장했던 이안은 안도했다.

“보통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잖아. 그런데 좋은 사람이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니 많이 놀랐어. 언제든 이 호의를 거두고 무섭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네가 보는 천공은 어떤 사람이야? 넌 직접 만나본 적 있잖아.”

이안은 테오가 세레나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주저하거나 답변을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공은 상당한 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권력의 정점이었으니까.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미리내를 손에 쥐어 사람들을 학살할 수 있는 존재가 천공이었다.

그러나 테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천공께서는 절대로 영웅님을 해칠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영웅님께서 미리내로 그분을 찌르셔도, 영웅님을 향한 호의는 거두지 않으실 겁니다.”

몹시 태연하고도 더없이 확신에 찬 대답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말았다.

테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반짝이는 밀빛 눈동자에 대고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차마 따져 물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는 그렇게만 대꾸해 버렸다.

“저나 다른 사람들에게 여쭈셔도 원하는 대답을 얻기는 힘드실 겁니다. 두려운 나머지 잘못된 답을 주거나 일부러 악의적인 정보를 흘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그러니 그저 영웅을 좋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위험하다는 정도로 알고 계십시오.”

“일단 알았어. 하긴, 직접 만난 적도 없는데 남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지. 나는 언제쯤 천공을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이안이 입을 다물자 테오는 찻잔을 정리했다. 테오는 언제나 이안을 존중했으므로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억지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은 갑작스럽게 티타임이 끝났다.

‘만약 궁금해하면 나도 그냥 물어봤을 텐데.’

어느새 밤이 깊어져서 이안은 방으로 돌아갔다. 끝까지 수행하려던 테오도 겨우 돌려보냈다. 그는 깨끗하게 씻은 뒤, 차마 묻지 못한 의문을 가진 채 침대에 누웠다.

‘천공은 왜 나에게 그 기억을 보여준 걸까? 그리고 다른 기록은 또 어떤 내용일까?’

미리내는 황가의 보물이었고, 천공은 3황자였다. 그리고 예언자 학살의 목격자는 주동자인 3황자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미리내에 기록을 새겼을 리 없다.

게다가 병사들은 천공의 명령으로 황가의 보물을 옮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안이 우연히 미리내를 되찾은 게 아니라, 천공이 미리내를 돌려주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보통 좋아하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나? 근데 왜 나를 피하지. 혹시 서른 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이안은 기록 속 모습을 토대로 천공을 상상해 보았다.

키는 꽤 컸고 자세가 올곧았다. 금빛 머리카락은 목의 중간에서 뚝 끊겼으며 피부는 희었다. 옷을 겹겹이 입어서 몸의 윤곽이 흐릿했으나 검을 다루는 모습에서 상당한 무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을 다루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는데…….’

얼굴은 온통 희뿌예서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변조된 것처럼 잡음이 섞여 나왔는데, 아마 기록할 때 처리했을 것이다. 다만 말의 어조가 우아하면서 굉장히 딱딱했다.

3황자다운 기품을 가졌으나 잔혹하다. 가족의 부정을 참지 못할 정도로 정의로운 것인지, 가족을 내칠 정도로 냉정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영웅을 흠모한다면서, 약한 이안은 절대 만나지 않는다.

천공은 쉽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더 강해지면 다른 글귀도 보고, 천공도 만날 수 있겠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갈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안은 비몽사몽 중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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