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극락 (18/18)

Chapter 4. 극락

평소 때와 같이 서점에 들러 책 표지를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하면 책을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지루하던 나날을 보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구실이기도 했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그 날도 똑같았다. 단지 서점을 나가서 벌어진 일이 비일상적이었다는 점만 빼면.

‘헌책방’

노란 배경에 새빨간 글씨로 크게 써진 간판이었다. 정체를 드러내는 수단이 너무 노골적이고 확실해서 오히려 수상하게 느껴졌다. 매일 드나들던 서점 골목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한참을 생각해 보지만, 기억에 없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허름해 보이기도 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 혼자만 덜렁 영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가게 문고리에 손을 뻗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한 번도 이런 모험을 한 적은 없었는데.

딸랑.

문을 열자 구석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울었다. 문이 닫혀도 종은 어디엔가 계속 부딪혀 소리를 냈다. 가게 안쪽도 으슬으슬해 보여 그냥 나갈까 하는데, 벽면 전체에 붙은 책장이 눈에 띄었다. 꽤 낡은 책들이 있는 것 같아 흥미가 돋았다. 여기서는 내가 그동안 찾지 못했던 책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연한 기회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책장 속 책들을 훑기 시작했다.

옛날 책들이라 그런 걸까. 책을 꺼내 겉표지를 살펴봐도 제목이 쓰여있지 않은 경우가 다수였다. 그나마 제목이 있는 것들은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검은 책을 발견했다. 이 역시 표지에 제목이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책을 펼쳤고, 빠르게 첫 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을 넘기는데 얼굴이 점점 새빨개져 간다. 어째서 이런 책이 헌책방에 버젓이 있는 걸까. 친구들에게 이야기로만 들었지 직접 읽은 적은 없었던 BL 소설인 것 같았다.

창부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런 남자 주인공을 사들인 귀족의 이야기였다. 꽤 오래전에 쓰인 책 같은데, 그 당시에도 이런 책이 팔렸던 걸까. 나는 아득해지는 숨을 고른 뒤 간신히 책을 덮었다.

“학생 거니까 가져가요.”

책장에 책을 넣기 전, 갑자기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여자가 나를 지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함부로 책을 만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손짓을 하며 책을 가져가길 재촉했다.

“책 주인들이 빨리 안 나타나서 곤란하던 참이었어. 한 권이라도 없애야지.”

“책… 주인이라고요?”

“그래요. 나 참, 자원봉사도 아니고 보관 비용은 누가 내.”

그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가져가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빈 책장에 놓았다. 이걸로 된 걸까. 그녀가 들어간 방향으로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BL 소설은 처음인데.”

나는 괜히 낯뜨거워진 마음에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내가 이 책 주인이라는 걸까. 그런 알 수 없는 기묘함을 남겨둔 채 집으로 향했다.

* * *

“와…. 미쳤어, 진짜.”

그 낡은 책을 절반쯤 읽어 내려가던 때였다. 친구 말이 맞았나 보다. BL 소설 중에 순애물은 희귀하다고 하더니 이 소설도 야한 책이었다. 창관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손님과의 정사는 물론이고 귀족 남자와의 아찔한 애무 장면도 있었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시종은 그런 주인의 행위에 묵묵히 입을 다물며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세상에. 내가 이곳 시종이었다면 매일 들려 오는 신음에 완전히 질려버렸을 텐데.

“내가 다 피폐해지는 것 같네.”

나는 대강 뒷부분까지 빠르게 읽은 뒤, 책을 덮었다. 굳이 결말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 귀족 남자와 잘 되는 내용일 것 같았다. 불을 지른 남자가 남자 주인공을 수도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혼례를 올린다. 얼핏 봤던 구절에 주인공이 매일 누군가를 그리워했다는 묘사가 있었지만, 자세히 읽어 보지는 않았다. 그 낡은 책을 침대 밑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다시 참고서를 펴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주인공이 그리워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던 걸까. 그리고 귀족 남자가 꾸었다는 그 악몽이란 건 대체…….

“안 돼! 수능까지 이제 며칠도 안 남았어.”

나는 퉁퉁한 두 뺨을 찰싹 때리며 책 내용을 지워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책을 꺼내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낡은 책은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대학에 합격한 뒤 양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이사 갈 때까지도 그렇게 책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잊어 갔다.

* * *

“정말 따로 나가 살겠다고? 이런 조그만 오피스텔로?”

“네. 이제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지금 뭐라고?”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이렇게 반응할 때마다 온몸이 흠칫하며 긴장한다는 것을 안다. 그도 그런 나를 알기 때문에 더 매섭게 대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예전처럼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 있어야 하는 자식이라는 형태는 이제 끝이 났으니까.

“당신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

“아빠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너.”

그가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스무 살이 된 올해, 그 역시 고작 서른네 살이었다. 이런 관계를 과연 부녀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젠 그의 관심과 구속이 지긋지긋했다.

“…후. 딱 졸업할 때까지만이다. 휴학은 허락 못 해. 4년 뒤에는 무조건 내 집으로 들어와.”

“…….”

“그리고 방학하면 오피스텔 비워 두고 집으로 들어와.”

낮아진 목소리가 그가 화를 꾹꾹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반항하면 그가 정말로 화를 내버릴 것 같아, 결국 토를 달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가 내게서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들이지 마.”

“그게 무슨…….”

“난 경고했어.”

협박이었다. 장학금을 내주는 것도, 수천만 원의 보증금을 건네준 것도 그였으니까. 그는 나를 마음대로 조종했다.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움켜쥐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그가 오피스텔을 나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공포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더 최악이었던 것은, 내가 그를 남자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읏…….”

나는 붉어진 내 몸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그의 몸이 나를 삼키는 상상이 불쑥 떠오른다. 그날은 최악의 이사 날이었다.

* * *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이 기억난다. 양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 병원의 원장이 신년회를 열었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 초대된 한 정치인의 아들이었다. 화려한 파티가 어울리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능숙하게 회장을 돌아다니는 부류였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남자친구예요?”

그는 멀리서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는 양아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남자친구라니.

“아뇨. 양아버지예요.”

“아, 그렇구나.”

나는 도리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 말을 한 번에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은 말도 안 된다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봤는데.

“이런 건 달라지지 않는구나.”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싱긋 웃으며 내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그 미소에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정신없이 그를 바라봤다. 이런 두근거리는 감정은 처음이었다.

“근데 우리 전에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요.”

그 뜬금없고 서투른 권유에, 나는 처음부터 깊이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년회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수다스럽게 떠들어 댔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약속을 잡아 만났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와 나는 연인이 되었다.

“궁금한 게 있어.”

언젠가, 그가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직 만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을 때 일이었다.

“요즘 신경 쓰이는 남자 없어?”

“응?”

“그냥 막 눈길 가는 그런 놈.”

그답지 않게 내게 추궁을 하는 것 같아 귀엽게 보였다면 이것도 중증일까.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없어. 난 오빠밖에 없어.”

“정말?”

“응. 정말이야.”

당연하지. 이렇게 완벽한데. 중얼거리는 나를 보는 그의 입가가 느슨해진다. 기쁘게도 활짝 웃었다, 그는. 그 얼굴이 어여뻐 나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두 사람의 온기가 주는 따스함에도 그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 묻기도 전에,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나, 악몽을 꿔.”

“무슨?”

“네가 나를 떠나는 꿈.”

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그 꿈을 상기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도대체 몇 번째일까. 우리.”

“율아……?”

“이젠 세는 것도 지쳤어.”

그는 뜨거워진 이마를 내 어깨에 파묻었다. 열이 나고 있잖아. 내가 놀라서 그에게 묻자,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더욱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젠 어떤 게 현실이고 악몽인지 모르겠어…….”

그는 눈을 감았다. 악몽을 보고 있는 걸까. 혹은 나와 함께 있는 걸까.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호흡을 느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동안 그렇게 멈춰 서 있었다.

* * *

“이번 주 주제 어려웠니?”

D-가 적혀진 리포트가 책상 위에 놓인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교수님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나를 연신 쳐다봤다.

“이번 장학금에 널 추천하려고 했는데, 이런 성적이면…….”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다들 불교 철학은 친숙해서 괜찮다고 했는데.”

특별히 교수님의 수업이 어려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한 탓이 컸다. 자꾸만 그 남자가 눈에 밟혔으니까. 전공생이 아닌 그가 유독 내가 듣는 수업에 들어오니까. 그래서 그랬던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이유를 변명이랍시고 뱉어낼 수는 없었다. 감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

“내가 수업에서도 말했다시피 연(緣)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거라서,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뿐이야.”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수실에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둔다.

“다시 공부해서 제출해.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야.”

책은 리포트 주제였던 윤회설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책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교수실에서 나왔다. 그 길로 빠르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설마,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게 될지는 몰랐는데.

“아, 저기요.”

그는 날 발견한 게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푸른 눈이 유독 휘청거리며 동요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 역시 그랬다. 사람을 보고 이런 감상에 젖은 적이 있었을까. 그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나는 책을 펴는 것도 잊고 넋을 놓아 그를 바라봤다.

“드디어 찾았다.”

“네… 네?”

“우리 아는 사이죠.”

“그야 수업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어디서 본 것 같고…….”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처럼 팔짱을 꼈다.

“또 앞으로도 보게 될 것 같아서.”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서성였다. 그러다 새하얗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 손에 사로잡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볼썽사나운 생각을 하는 내게 놀랐다.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나는 언제나 이랬다. 안절부절못했고, 도망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그를 발견하는 게 운명이었던 것처럼.

“저기…….”

나는 그를 올려다본다. 커다란 키와 단단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여린 얼굴. 청년이라고도, 여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눈코입이 금세 시야 속에 들어온다. 참을 수 없어진 손가락 끝은 그에게 닿기 위해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 순간,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아…….”

푸른 눈이 나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다. 그제야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수오…….”

한 번밖에 들은 적 없었고, 그조차도 헷갈렸던 이름이 명확해진다. 확신을 갖고 읊조린 이름. 내 부름을 들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또다시 만났다는 것을. 이 아름다움으로부터 피할 길은 없을 것이라고.

이곳은 현실도 지옥도, 혹은 악몽도 아니었다.

“그리웠어.”

내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세계. 그렇다면 이곳은…….

“누야.”

극락일 수밖에 없다.

극락의 BL 소설 [외전]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