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전생 (부율)
“하아, 아… 흑.”
숨이 가빠지고 무릎 아래가 시려 온다. 얼음처럼 굳은 땅바닥을 힘없이 달리면서도,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황제를 믿을 수 없었다. 수오를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귀를 닫고, 황제를 멀리했다면 더 나았을까. 답답한 가슴은 후회를 해보지만, 속 시원히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내가 가야 하는 곳,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제 한 사람뿐이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사색이 되었느냐.”
허겁지겁 방문을 연 나를 본 부율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황급히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갔다. 곧 힘이 풀린 다리가 맥없이 부스러진다. 그는 차가운 내 몸뚱이를 끌어안고 놀란 숨을 골랐다.
“어찌 된 것이냐.”
단지 물음일 뿐인데도, 목소리가 위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호흡은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안심됐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 내 안에서 끓어 넘치던 죄책감이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동안 많이 지쳤던 걸까.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더는 고통스럽기 싫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쉬이…. 내게는 말해도 괜찮다.”
그의 손가락이 나의 아픈 등허리를 전부 감쌀 때,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희열에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전과 너무도 다른, 안락한 선택을.
“도와줘요…….”
나는 그에게 애원한다. 고백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매만지며 간청했다.
“제발 그 사람을… 살려 주세요…….”
그의 눈이 커다래진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 무엇보다 수오를 사랑하고 있음이, 그에게 어떤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지 나는 모른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는지도 몰라.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척을 하고 있다. 나의 이기심으로 그를 이용하고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는 항상 커다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으니까. 나는 그 달콤함에 기대야 했다. 그건 내가 선택해본 적 없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질 거야. 전과는 다르게 아프지 않아도 될 거야.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린다. 그는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를 사랑하니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 확실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바싹 다가가 이야기를 고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얼마 안 가, 나를 보며 웃었다. 선선한 얼굴에 그만 넋이 나가버린다. 시간은 급급한데, 그와 나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일정했다. 그러다가 한 번에 다다른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 약을 내게 다오.”
나는 황제에게 받은 해독약을 품에서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생기 있는 얼굴이 되어, 금세 나를 쓰다듬었다.
“잘 선택하였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지고, 그의 혀가 내 윗입술을 핥고 빨아들인다.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그의 성기가 어느새 우람해져 있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다. 제 안에 놓인 것을 바라보며 흡족해한다. 그가 바라고 바라던 것이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는 자를 통해 이 약을 전달하겠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거라.”
“부율…….”
마른 가지처럼 축 처져 있던 손발이 활기를 되찾아, 그의 어깨를 한껏 끌어안았다. 그를 배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을까. 혹은, 이제 수오를 살릴 수 있다는 환희였을까.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집스레 잡고 있던 죄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고맙구나.”
그의 몸에 얼굴을 묻은 탓에, 더 이상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기뻐하고 있음을. 내가 그에게 숨겨왔던 비밀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너는 이제…….”
그런데 무슨 변덕이었을까. 그가 흘리듯 내게 속삭이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의 턱 끝을 살폈다. 좀 더, 나는 좀 더 그의 표정을 봐야 했다. 본능적으로 위화감이 든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저 깨달았을 뿐일까.
“어디로도… 나를 떠나갈 수 없어.”
이윽고 보인 그의 두 눈동자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눈빛이 아닌 것처럼 탐욕스러웠고 집념에 가득 차 있다. 그 두 눈은 잠시 뒤 나에게로 향했다.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소리 없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다. 나를 가두고, 작게 명령한다. 두려움에 떨어도 이젠 소용이 없었다. 집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넌 나를 선택했어.”
내가 그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왔으니까. 이제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 * *
석 달 후.
겨우 겨울이 지나 봄이 된 날, 대관전(大觀殿)에서 새로운 왕을 알리는 즉위의례가 열렸다. 수도의 귀족들은 한자리에서 축하하기 위해 궁으로 모였고, 지방 향리들은 곡창을 풀고 소를 잡아 소박하게나마 잔치를 벌였다. 이웃 소국들은 앞다투어 조공을 보내왔으며, 덕분에 음식과 비단, 금화들이 끊이지 않고 궁 안으로 들어왔다. 풍성하고 유족하다. 부족함 없으나 뽐내지는 아니했고, 소란스럽지 않으나 만인의 웃음이 낙낙하였다.
그런데 이번 즉위의례에서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서현국에서 춘왕이 직접 사람을 써 축의를 보내왔다. 서신과 함께 무기와 철이 한가득이었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깨닫고 있었다.
부율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서현국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늘 이 자리에서 칭제(稱帝)를 포기하게 되리라는 것도.
“춘왕께서 직접 내리신 교서(敎書)입니다.”
의식은 상왕이 세자에게 왕권을 물려주며 내리는 전위교서(傳位敎書)를 반포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전대 황제가 대탄 당하여 처형된 지금, 의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서현국의 사신 정 문관이 춘왕의 교서를 부율에게 직접 전달한 것이다.
“학황(學皇)이 평소에도 부덕하고 백성들에게는 비열하기 그지없어 보고도 못 본 척, 보지 못했음에도 아는 척을 하여 나라의 온 백성을 괴롭게 한 죄가 있음은 명백하다. 하오나, 유(柔)의 권문세족이 그를 대신하여 하늘의 부름을 받았으니, 숙질과 병폐를 물리침에 힘쓰고 겸손하고 기량이 담백하니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새로이 천자가 되기 마땅하다. 짐이 일심정념(一心正念) 하여 여국의 태평성대를 보살필 것을 약조하느니라. 중외 대소신료들도 이 지극한 뜻을 깨달아 한마음으로 받들어 두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도록 하라. 유(柔)의 부율이 오늘로써 일국의 왕이자 양국의 기둥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이다.”
참석한 관료들과 귀족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서 있다. 무능한 전대 황제가 나라를 어수선하게 하고 백성을 가난하게 한 죄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제 욕심으로 서현국을 이용한 부율의 탓일까. 그러나 침울했던 자들은 고개를 들어 새로운 황제, 아니 임금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대륙을 통일하는 것에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떠오르는 대국인 서현국을 모국으로 삼았으니 이인자의 자리였으나 안정적이었고 평화로웠다. 적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좌(御座)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으시옵소서.”
의례는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일국의 임금으로서 최고 권위의 자리에 오른 부율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눈이 백관들 사이를 틈틈이 뒤졌다. 그러다 곧 군중 속의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
부율이 폐위된 학황의 거짓 딸이자 이제는 죄인이 된 나를 주시한다. 선선한 날씨임에도 주르륵 땀이 흘렀다.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그때, 백관들의 사배례가 시작됐다. 모두가 막 왕이 된 부율에게 집중하고 있을 무렵 나는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갔다. 손등의 살결을 뜯으며 초조하게 입술을 베어 물었다. 벌써 석 달이 지났다.
“…….”
부율이 내게 약속한 대로, 수오는 무사히 살아 있는 걸까.
* * *
즉위의례가 끝난 뒤, 부율은 내가 있는 혜영전으로 걸음 했다. 앞으로 내전에서 지내게 되는 부율과 달리 나는 여전히 내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혜영전에 있었다. 그 누가 전대 황제의 딸을 고깝게 볼 수 있을까. 가짜라고는 하나, 모두에게는 이미 진짜로 알려져 있었다. 부율은 내게 사약을 내리거나, 귀양을 보내야 함에도 나를 궁에 두고 있다. 원성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율의 집착도 깊어지기만 했다.
“누룩.”
금빛 곤룡포를 입은 부율의 모습이 사뭇 어색하다. 하지만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고 애틋했다.
“곧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궁 안이기는 하였으나, 취급은 죄인보다도 못하다. 세간에서 나오는 말들로 인해 부율이 즉위하는 날까지도 나는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부율은 날 이곳에서 빼내 주기로 약조했었다. 그렇다면 난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럼 저는…….”
“중궁전으로 가게 될 거다.”
눈이 커진다. 부율이 나를 중궁전으로 보낸다는 말은, 곧 나를 그의 아내로 새로이 취한다는 말이 된다.
“하, 하지만 혼례는 무효가 됐잖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조차 제대로 뱉어 내지 못했다. 우리의 혼인은 학황이 무너지면서 무효가 됐다. 관료들이 한목소리로, 폐위된 학황의 딸을 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여국이 칭제를 포기한 지금, 황후가 아닌, 왕후로서 부율의 옆자리에 있게 되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부율이 하는 말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지 알고 있다.
“관료들은 날 절대…….”
궁에 있는 그 누가 극악무도했던 전대 황제의 딸을 떠받들려 할까. 하지만 부율의 눈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얼마나 나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가 나를 붙잡는 것이. 그래서 내가 궁 밖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까 봐.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줄곧 수오를 만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궁을 나가…….”
“부마와 공주의 혼례가 무효가 된 것이지.”
그때, 그가 급한 손짓으로 내 허리를 감쌌다. 의례 중 피운 향초의 냄새가, 그의 넓은 가슴에 연하게 스며있다.
“우리의 혼인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니야.”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조급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 손등에 닿은 그의 맥박이 강렬했다.
“헌데 어찌 그리 울상이느냐.”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던 걸까. 빠르게 뛰던 가슴이 점점 공포 속에 작아져 갔다.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 그 말이 주는 위압감이 부율 앞에 있는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넌 나를 선택했어. 누룩.”
“아……!”
그가 축 늘어져 있는 내 손목을 확 잡아당겨, 그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호박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거칠게 빛나고 있다. 그의 눈을 보면 발끝부터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딴 놈한테 빼앗기지 않아.”
너무도 확고한 눈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한 선택이 그를 좇는다. 헤매다가도 더는 머물 곳이 없게 만든다.
“너는 내 옆에서, 이 나라의 지어미로 죽을 것이다.”
손목을 붙잡았던 손이, 드디어 내 턱에 다다른다. 그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술을 삼켰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의 옷깃에 묻은 독한 향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시 그 검은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기 때문일까.
* * *
툭. 툭.
망연히 눈앞에 있는 꽃병을 손가락 끝으로 두들겼다. 금요일이라 사람이 많이 모인 가게 안인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다른 생각이 났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귓속이 적막하기까지 했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저 멍하니 앉아 꽃병에 있는 푸른 잎사귀를 바라봤다. 청록색의 옅은 색감. 하늘보다 짙고 물감보다는 연하다. 그 아이의 눈동자 색깔도 분명 이러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주 작은 소리였다. 주변 소음을 비집고 간신히 귓가에 꽂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맑았던 하늘이 곧 비를 쏟아낼 것처럼 습하다. 그의 짙은 눈썹이 먹구름과도 같이 점점 더 아래로, 드리워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호기심이 든 것뿐일 것이다. 전공생도 아닌데, 수업에 집중하고 있던 그 모습이. 내게 말을 걸어 주었던 청량한 목소리가. 길고 얇게 흔들렸던 그 속눈썹이…. 몽상이 든다. 꿈을 꾸는 것처럼 그의 수려한 미모가 아른거렸다. 그런데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음 주에 우리 3주년이야.”
눈이 커다래진다. 넋을 놓고 있던 모습을 들킨 것보다도, 그와의 기념일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당황해서 손을 꼼지락거려도, 그는 언제나 단단히 붙잡아 준다. 지난 3년 동안 그래왔듯이.
“아버지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아.”
마음속에 덩어리져 있는 추악한 마음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난 이미 너와 결혼할 거라고 말씀드렸어.”
“…….”
조용히 침묵을 고집한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화려한 상상을 한다. 그 속에서는, 그저 얼굴에 그쳤던 눈길이 입술로 가더니, 금세 밑으로… 밑으로 떨어진다. 나는 어느새 그 아이와 나쁜 짓을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아직도 고민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싫은 거야.”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붉은 두 뺨이 화끈해진다. 속마음을 들킨 듯 아찔했다. 그는 내가 해버린 상상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과제… 가 너무 많아서. 안 그래도 어려운 수업인데.”
“어떤 건데?”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서둘러 수업 내용을 생각해 내고, 교수님의 목소리 너머 글자를 떠올렸다. 온통 난잡한 것들로 칠해져 있던 머릿속이 그제야 깨끗해졌다.
“동양 철학 수업인데, 오늘 배웠던 게 윤회설… 일 거야. 아마.”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내용이 어그러져 기억나는 건 조각조각 흩어진 내용뿐이다. 어기적거리며 말을 흐리는 나를, 그는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내 볼을 잡아당긴다.
“집중해야지.”
“응. 당연하지.”
기계적인 내 대답에도,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나를 본다. 차를 마시고, 접시 위에 올려진 과자를 손에 든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은, 힘이 들어가 있는 그의 손등이었다. 굵게 선 핏줄이 그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한테 집중해.”
드디어 그의 입이 열리고, 나를 보는 시선이 차가워진다. 어깨가 경직된다. 나도 모르게 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토록 상냥하고, 자상한 그를 나는 어째서인지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그는 당황한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 손길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없어.”
“어……?”
그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풀려 있었다. 공허해 보이기도, 슬퍼 보이기도 한다. 나를 직시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환영을 보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줄곧 그는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난 놓치지 않아.”
나는 떠올렸다. 언젠가 그가 내게 말해 주었던 악몽 속에서, 우리가 어땠었는지. 그는 그가 아닌 괴물을 보았다고 고백했었다. 그 검은 세상 속에서 했던 악행은, 더는 그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고. 그러나 지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퍽 말도 안 되는 것을 생각하고 만다.
“두 번 다시는 빼앗기지 않아.”
우리가 지금 그 악몽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 * *
“헉, 헉…….”
꿈에서 깨어난다. 검은 세상이 다시 나타난 지도 벌써 열흘째였다. 언제나 등을 적시는 불쾌한 땀이, 잠에서 깨어날 때 드는 극심한 두통이 나를 시들게 만든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여도 갈증은 여전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올라오는 역한 느낌은 피비린내와도 비슷했다. 헛구역질을 해보지만, 비린내를 게워낼 수는 없다. 피가 솟구쳐오는 것 같은데도, 뱉어 낼 수 있는 것은 찬 공기뿐이었다.
“윽, 하아…….”
나는 옆으로 몸을 말고, 이불을 당겼다. 무섭고, 두려웠다. 시선들이 항시 쫓아다녀 더는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내저어 봐도 두 다리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같은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 다다르면 언제나 괴물과 마주했다. 그가 웃는다. 나를 보았다는 희열에, 언제나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공포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익숙한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 따듯했던 보금자리가 내게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수오…….”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뱉자, 그리움에 사무쳐 가슴이 저렸다. 여러 번 가슴을 두들겨 숨을 토한다. 노을빛이 스며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한밤중을 홀로 보냈다. 그러다 문밖에서 소리가 들린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톡.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고 있는 등불이 방 안으로 내리쬐어 똑바로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겨우 눈꺼풀을 올리고, 애써 초점을 맞추고 나서야 문밖의 소란을 인식할 수 있었다.
태감을 비롯한 나인들 여럿이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다, 대청 바닥에 일제히 몸을 접고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나는 열린 문틈으로 처마 끝을 바라봤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희미한 종소리를 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마.”
태감의 호명이 알 수 없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학황이 퇴위한 뒤로 누구도 나를 그리 부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궁전으로 모시겠나이다.”
그제야 부율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가 나를 다시 아내로 취할 것이라는, 아니. 나를 왕후로 만들어 그의 곁에 둘 것이라는 말을. 여미었던 매듭이 아차 하는 순간, 풀리고 만다. 나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차가운 바람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유대로 나는 움직여야만 했다.
이제는 임금이 된 부율의 말을 결코, 거역할 수 없을 테니까.
* * *
나인들을 따라 중궁전에 다다르자, 부율이 이미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밤공기가 사뭇 차가웠을 텐데도, 그는 묵묵히 나를 기다렸던 것 같다. 이 순간에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끝까지 나를 눈에 담았다.
“자고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거리가 가까워지자, 부율이 성급한 손길로 나를 붙잡았다.
“오늘 낮에 간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임금의 자리에 올라, 비어 있는 왕후와 후궁들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게 당연함에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가 다른 여자를 본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하다.
“나더러 서현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라더군.”
“…….”
어쩌면 예상하였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국인 서현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한다면 여국에게도 좋은 조건이었다. 진짜 공주라면… 그가 권력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빨라지는 고동을 애써 외면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젯밤에 내린 비 때문에 질어진 땅바닥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쉰다. 스스로 심어 놓은 감정의 정체를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그게 낫겠어요.”
참 모질게도, 의도하지 않은 말이 앞으로 나가 버린다.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곧 그의 팔에 강하게 힘줄이 돋았다. 붙잡힌 팔목에 피가 통하지 않아, 보랏빛으로 어그러져 갔다.
“네 정녕 내가 이곳으로 널 부른 이유를 모르는 것이냐.”
“읏…….”
아팠다. 그러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부율의 눈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 신음조차 내기에 조심스러웠다.
“난 지독히도 너 하나만을 원하는데.”
“아…….”
“넌 그런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구나.”
그는 아픔을 참고 있는 나를 보며 작게 이를 갈았다. 뾰족한 칼날이 수십 번 이 몸을 찔러 온다. 그가 나를 향해 쏟아내는 감정이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슬아슬한 거리가 그의 애타는 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는 이곳에서 잠들 거라.”
부율은 급기야 내 허리를 그의 품 안에 가두었다. 등불 밑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멍하게 시선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등을 매만지려 했던 손은, 그러나 허무하게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그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중궁전에 계속 머물게 되면, 더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수오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돼버린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마냥 그리워하는 나날들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나는 그를 밀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나를 붙잡을 수 없도록 거리를 둔다. 부율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막연히 상상만 해볼 뿐이다.
잠시 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멀어져 가는 나를 또렷이 바라본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온 부율의 목소리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정녕 이리도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무슨 말인지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무관들에 의해 무릎이 꿇려졌다. 더러운 흙바닥에 치맛자락이 금세 흙투성이가 된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부율을 올려다봤다.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혹은 울고 있는 걸까. 그의 마음이 나로 인해 검게 물들어 간다.
“네가 날 받아들이기 전까지, 내가 똑똑히 가르쳐주마.”
부율이 쓰러진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귓가에서 낮게 미소 지었다.
“이미 넌 이곳에 갇힌 지 오래라는 것을.”
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이 아까 전 내가 그에게 보였던 차가운 태도인 것 같아 가슴이 저미어 들었다. 다른 것은, 그가 다시 나를 보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선도 무관에게로 향했다. 곧 부율이 그 사내들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투옥하여라.”
모래에 쓸린 무릎이, 무관들에게 끌려가 붉은 생채기를 토해낸다. 지독히도 맑은 목소리가 결국 화살촉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부율의 등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간절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끌려가는 나를 지켜만 본다. 한결 그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마치 나를 가두는 게 처음부터 정답이었다는 듯이.
* * *
해옥서의 독방에 감금된 지 이틀이 지났다. 투옥을 명령했던 부율의 태도는 진심이었는지, 여타 죄수들이 받는 취급과 다를 바 없는 나날에 몸이 바싹 타들어 가기만 했다. 설익은 잡곡과 일정 시간이 될 때마다 지급되는 물 한 통. 죄인인 공주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매섭기만 했다. 이 궁 안에서 그동안 부율이 얼마나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만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나를 연민했으며 보듬어 주었다. 그 따듯했던 품속을 생각해 내자 이제는 눈물이 나왔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가슴이 허한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도 나를 찾아 주지 않아서일 것이다. 나는 창살 너머 등불을 바라봤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거나, 해옥서의 문이 열리면 저 등불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불씨는 흔들리지 않고 미미하기만 했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어떤 것도 기대되지 않았다.
끼익.
그런데 그 순간, 멀리서 해옥서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등불을 바라봤다. 미약하기만 했던 불씨가 불어오는 바람에 꺼질 듯,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율…….”
멀리서 다가오는 향기로, 부율이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창살로 바싹 다가가,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청포(靑袍)를 걸친 부율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단정하고 견고한 몸이 다시금 내 눈앞에 바로 섰다.
“고작 이틀뿐인데 이리도 야위어져 있어서야.”
“부율 님…….”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이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구나.”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맞췄다. 나를 보고 야위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 역시 수척해져 있었다. 무엇을 염려하느라 잠도 이루지 못하였는지 목소리 역시 푹 잠기어 있다.
“밥은 남긴 것 같구나.”
“흑, 흐윽…….”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다시 내게 다정해졌다. 나를 이곳에 감금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상냥하다. 나는 철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주먹만큼의 빈틈이 있었으나 곧 창살에 어깨가 걸렸다.
나는 간절히 그를 바랐다. 뻗은 내 손을 잡아주기를, 그래서 내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손을 잡기는커녕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독방을 살폈다. 키우는 짐승의 축사를 살피는 주인의 모습처럼 꼼꼼하고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름 괜찮구나.”
따듯한 목소리였지만 뱉어 내는 말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나는 소매 끝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더 선명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지금의 그라면 나를 꺼내 준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이제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혹은, 나를 포기해 주지는 않을까.
“어, 언제쯤…….”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살이같이 겨우 내뱉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부율의 미간이 좁혀지고, 마치 나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나는 좀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언제쯤 나갈 수 있어요……?”
“…….”
그는 말없이 눈물 자국이 선명한 내 두 뺨을 살폈다. 그가 나를 연민해주기를 바랐다. 불쌍히 여겨 주고 나를 보살펴 주기를 바랐다. 다시 원래의 그로, 나를 사랑하고 한없이 양보해 주었던 그로 돌아와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차갑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던 공간은 이제 쓸쓸한 온도만이 남아 있다.
시야 속에 잡히는 것은 더는 그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시야에는 그의 사타구니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끝까지 올려서야, 겨우 그의 턱이 보였으니까.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 넌 이곳을 나갈 수 없어.”
“하, 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필요했다. 그의 손길을 원했고, 나를 보살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가 노리는 것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는 듯, 입매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고개를 더 가까이 들이밀거라. 뺨이 창살에 닿을 때까지. 옳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창살에 가까이 다가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고간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순간 아찔하여 고개를 뒤로 내빼려고 했지만, 그의 텁텁한 시선이 정수리에 꽂혀있는 걸 알고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는 되려 짜릿한 쾌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기다려라.”
이윽고 부율이 바지 매듭을 풀어낸다. 포에 감추어져 있던 우람한 물건이 쇠창살에 닿았다. 끝에는 맑은 선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어 먹음직스럽게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의 것을 바라보기만 한다.
“꽤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아…….”
“전부 삼키거라.”
부율이 다물어진 내 입술에 귀두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창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 뒤통수를 쥐었다.
“벌려.”
“아, 우붑……!”
그의 살덩이가 불시에 입안으로 들어왔다. 크고 단단했다. 그만큼 목 안쪽에 닿는 부분이 많아 구역질이 나왔다. 첨단에서 흐르는 물은 끈적하고 양이 많았다. 입안 가득 채워지는 불편함에 헐떡거리며 거친 숨이 나왔다. 나는 계속해서 물을 꿀떡 삼키며 그의 기둥을 빨았다. 이렇게 하면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더 열심히 머리를 움직였다.
“하아…. 이제 일어서서 엉덩이 내밀어.”
“아……!”
그가 내 머리채를 잡고 뒤로 당겼다. 푹 박혀 있던 성기가 갑작스레 빠져나가고, 침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이 눈앞에 보일 뿐이다. 부율은 내 몸을 강제로 돌렸다. 곧 엉덩이에 매끄러운 살덩이가 닿더니, 끝이 질 속으로 들어왔다.
“아흑……!”
“큭. 엉덩이 더 가깝게 대.”
그는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작정한 듯이 거친 움직임으로 구멍 속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비하지 못한 질 속은 건조하고 마른 상태였다. 뻑뻑한 느낌에 성기가 빠듯하게 들어왔지만, 부율은 상관하지 않고 반복해서 귀두를 넣었다가 빼내었다. 이윽고 귀두에서 흐르는 물이 붉은 속살을 전부 적시기 시작한다. 그제야 입구가 뻐끔거리며 물을 내쏟았다.
“하으… 아응, 하으읏……!”
“하아, 크윽. 이제 스스로 움직여 보아라.”
부율은 움직임을 멈추고 손가락 끝으로 내 척추를 느릿하게 훑었다. 솜털이 오르면서 몸이 뜨거워져 갔다. 이제 급한 것은 나였다. 질척질척한 아랫구멍이 그의 두툼한 물건을 요구하고 있다.
“아, 으응… 핫, 응…….”
나는 조금씩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의 귀두를 품었다가, 다시 빼내길 반복했다. 부율은 감탄했다. 윤기가 흐르는 기둥이 보지 속살에 들어갔다 빠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여러 번 신음을 뱉어 냈다.
“네 구멍이 내 것을 오물거리며 잘도 먹어 치우는구나. 이런데도 내 아내가 되길 거부한다고. 감히 네가.”
부율은 성난 손길로 손가락 하나를 항문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마디를 더 깊게 욱여넣었다. 알 수 없는 쾌락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허리를 세웠다. 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가락을 두 개까지 늘렸다.
“구멍 두 개가 벌렁거리며 음탕한 소리를 내고 있지 않으냐. 엉덩이 똑바로 움직이거라.”
“하, 으으응…! 하, 으흐으윽! 아……!”
부율의 두꺼운 물건에 익숙해진 음부가 바르르 떨리며 물을 쏟아냈다. 덕분에 그의 것이 수월하게 움직이며 맑은 거품을 냈다.
그가 손가락에 잔뜩 애액을 묻히더니 다시 항문을 쑤셨다. 온 구멍에서 그가 풍기는 짐승의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그 향에 취해 눈이 풀린 채로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아… 앙! 하으응… 하, 으으……!”
“하, 윽. 이제 무릎 꿇고 앉아. 어서.”
부율이 급한 목소리로 내게 명령했다. 나는 절정의 끝자락에 다다른 몸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침과 선액으로 눅눅해진 그의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참을 수 없어 혀를 내밀고 애타는 눈길로 그것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내 입에 넣어주기는커녕 벌게진 내 뺨에 귀두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흣… 아, 제발…….”
“내 좆만 탐하고 나를 버릴 생각이었느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허면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내가 네게 다 내어준다고 하여도 내 옆에 있기가 그리 싫은 것이냐.”
아니었다. 부율을 원하는 마음이 단지 성욕뿐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고백을 하기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정인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라 미칠 것 같을 뿐이었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을 해야, 일그러져 있는 마음이 풀릴 것만 같다. 수오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내 선택이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감히 나를 거부할 처지인 것 같으냐.”
“아흑……!”
귀두에서 뿌려진 물로 질척해진 뺨을, 부율이 솟아있는 성기로 내리쳤다. 제법 꼿꼿이 서 있는 첨단에 맞은 볼살이 얼얼했다. 그런데도 넓어진 우물은 물을 뚝뚝 내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거칠게 다루어질수록 마음은 편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수동적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그를 따르고, 의지하면 나의 선택도 언젠가, 무뎌지게 될 테니까.
“혀 내밀어.”
부율의 말에 나는 재빨리 혀를 내밀고 그의 요도 주변을 핥았다. 그는 넣지 않은 채로 내 혀끝을 만끽했다.
“하아… 크… 흣. 이제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서 안쪽까지 빨아.”
“아, 우… 음, 하… 음.”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귀두 끝의 작은 구멍을 혀끝으로 촉촉이 적셨다. 철창을 짚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정성껏 그의 것을 핥기만 한다.
“젠장. 하…….”
부율이 신음하며 손으로 자신의 뿌리를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혓바닥을 길게 쭉 내밀어 그의 귀두가 매끄러워질 수 있도록 도왔다. 정액을 완전히 분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하, 으, 크윽… 하, 윽……!”
그러나 부율은 좀처럼 정액을 내지 않았다. 참고 있는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눈이 차가운 바닥에 쏠렸다.
“죄인이 사람처럼 먹으면 안 되지.”
그가 눈을 번뜩 뜨며, 귀두를 아래로 향하게 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도 알 수 없어 괜히 불안해졌다. 그때, 그가 웃으며 옥 안 바닥에 정액을 뿌렸다.
“이런. 아깝게도.”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점액을 바라봤다. 오래도록 쌓여 있던 정액 색은 맑다기보다 농축돼 비릿한 향을 냈다. 부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 내 머리카락에까지 정액을 분출했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바닥이 더러워졌구나. 깨끗이 치우거라.”
그의 미소가 삐뚤어져 있다. 나를 보는 얼굴이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좀처럼 혀를 내밀기 꺼려졌다. 그는 느린 내가 답답했던지 창살 틈으로 내 어깨를 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죄인이면 죄인답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어떤 말을 해도, 혹은 눈물을 흘리더라도 봐주지 않을 것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눈빛에는 알게 모르게 광분한 마음이 뒤섞여 있어 미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를 거부할 수 없다. 그의 앞에서 나약한 모습으로, 이렇게 무릎을 꿇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
“옳지.”
나는 혀를 내밀고 그가 흘린 씨물을 핥았다. 맛을 느끼지 않기 위해 숨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정액을 삼켰다. 이제는 그가 나를 용서해 줄까. 혹시나 하는 희망에 머리카락에 붙은 정액마저 핥아 먹었다. 혓바닥에 몽글하게 달라붙는 끈적한 식감이 역했다.
“하, 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부율의 시선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다녔다. 내가 전부 다 먹어 치울 때까지 이 시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나는 입안에 남은 정액을 꿀꺽 삼켰다.
“내가 준 것들은 전부 다 널 위함이다.”
부율의 목소리가 이제야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나를 만지는 손길도 안락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눈을 감으며 그의 손이 나를 감싸는 걸 느꼈다. 고민해야 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넌 나만 따르면 돼. 내 아내가 될 거니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말은 곧 주문처럼 뇌리에까지 깊이 박혔다.
* * *
갇혀 있는지 닷새가 지났다. 부율은 내가 왕후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날 이곳에서 내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망설이고만 있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수오를 꼭 봐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어쩌면 억지스러운 고집을 부리고만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부율은 오늘 밤도 어김없이 해옥서를 찾았다. 또 창살 너머로 그의 커다란 덩어리를 받아내야 하는가 싶었는데, 그가 품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오늘은 산책하러 나갈 것이다.”
그의 말에 기뻐서 광대가 올라갔다. 안 그래도 온종일 딱딱한 바닥에 누워있거나 앉아만 있어 온몸이 찌뿌둥한 터였다. 이 퀴퀴한 냄새에서 벗어나, 드디어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나는 문이 열리고 나서도 구석에서 그가 손을 내밀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교육에 익숙해졌는지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는 흡족한 듯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열쇠 외에도 다른 것이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네 목에 이걸 채워야겠구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가 가져온 것은 짐승 우리에나 있을 법한 목줄이었다. 두껍고 투박한 가죽끈이 얼키설키 뒤섞여 있어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싫은 기색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부 벗거라.”
그의 손끝이 내 저고리를 헤집었다. 조금씩 속살이 드러나더니 이내 옷이 젖가슴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놀라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지만, 그는 한없이 단호하기만 했다.
“네가 이리 나온다면 내가 널 밖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치스러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돼버린다. 나는 저고리를 벗고, 이내 치마저고리마저 아래로 끌어 내려 그가 시킨 대로 알몸이 되었다. 그가 씩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검은 손길이 음흉하기 짝이 없다.
“이제 목줄 차례다.”
새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내 몸을 휘어잡으며, 그가 내 목에 줄을 두른다. 빡빡하게도,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법한 틈만 남겨둔 채 세게 매듭지었다.
“나가자꾸나.”
그렇게 그와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 * *
청화루(靑化樓).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될 날씨라, 어느새 바깥은 따듯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웠던 옥과는 달리 상쾌하고 신선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풀의 향기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불안한 시선은 그치지 않는다. 나는 그와 보폭을 맞추는 내내 주변을 훑어보며 발걸음을 떼야 했다.
벌거벗은 채로, 목줄이 채워져 부율의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꼭 마당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의 보폭이 넓어 다리를 길게 뻗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럴 때마다 허벅지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덥지도 않은데 땀이 나고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좀 쉬자꾸나.”
다행히도 전각에서 부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월대에 올라 답도 옆에 앉을 생각인지 그의 눈이 평평한 자리를 찾았다. 이윽고 그가 자리를 찾아 무릎을 굽혔다. 나 역시도 그 옆에 앉기 위해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그런 날 보며 비소를 흘렸다.
“너는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야지.”
“어찌…….”
“어떻게라니.”
그가 내 어깨를 누르더니, 기어이 그의 발밑에 스러지게 했다. 나는 돌바닥에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웃으며 목줄을 잡아당겼다.
“윽……!”
“이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꼭 암캐같이 보이는구나.”
그는 일부러 발끝을 움직여 내 음부를 지그시 눌렀다. 수치스러워 눈물이 나왔다. 몸은 그의 짓궂은 장난을 버텨낼 수 없을 만큼 나약해져 있었다.
“자, 다리 사이로 들어오너라.”
부율은 다리를 벌리고, 내가 그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틀어 그의 중심에 들어갔다. 이윽고 그가 내 턱을 붙잡고 벌린 입술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핥아.”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는 일부러인 듯 손가락을 난잡하게 움직여, 내 턱 밑으로 침이 줄줄 떨어지게끔 했다. 마치 개가 주인을 핥다가 침을 흘리는 것처럼 더럽고 추잡해져 갔다.
그의 손가락은 이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손끝이 목젖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나는 뒤늦게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 순간, 부율이 뒤통수를 확 낚아챘다.
“얌전히 있어야지.”
“아… 우, 우끅… 하, 읏…….”
고통스러웠다. 그의 손톱이 날카로워서 뭉툭한 귀두가 입속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욱 괴로웠다. 하지만 부율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며 단지 신음밖에 내지 못하는 날 보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젖꼭지가 커져 있구나. 고작 내 손을 빨면서도 좆을 상상한 것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부율은 무심히 반대편 손으로 내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비소했다.
“이것 보아라. 내가 빨아주지도 않았는데 딱딱해져 있구나. 잡아당기기라도 하면 자지러지겠지.”
“…으, 아흐으응……!”
그는 보란 듯이 내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일그러져가는 내 표정을 즐겼다. 젖꼭지 주변이 빨개지고 부어올랐다. 그는 아예 떨어지는 내 침을 손가락에 묻혀 젖꼭지를 희롱했다.
“아흥…! 아, 아파… 요, 하윽!”
“아프다면서 엉덩이가 들썩이는구나. 아느냐. 지금 네가 내 발에 보지를 문지르고 있다는 거.”
처음에는 부율의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의 발에 자위하고 있었다. 싫은데, 멈출 수 없었다.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질리면서도 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갖고 싶다면 달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아, 우… 하으… 제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작게 애원해본다. 하지만 좀처럼 쑥스러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부율은 이죽대며 내 엉덩이를 내리쳤다.
“내 허락할 테니, 이제 그만 무릎 위로 올라오거라.”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곧 그의 양손이 잔뜩 부어오른 내 엉덩이를 쥐어 잡는다. 그 차가운 온도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이 이상 좋은 것은 없다고 느껴질 만큼 넋이 나가버린다.
“아… 부율 님…….”
“그게 아니지.”
곧 뜨거운 그의 물건이 안쪽으로 침입한다.
“서방님이라 불러야지.”
나는 헐떡이며 그의 몸을 껴안았다. 두껍고, 가득 들어찬다. 나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정신없이 그를 불렀다.
“서… 하윽, 서방님…. 하, 으으응……!”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은 구멍이야. 하, 큭. 아무리 넓혀놔도 이리 쫄깃하니 맛이 좋아.”
그의 지저분한 말에도 쉽게 흥분해 버린다. 그에게 길들여진 몸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완전히 푹 빠져 버린다. 그때, 그가 목줄을 위로 당겼다. 가느다란 목이 줄을 따라 올라가며, 숨구멍이 막혔다. 나는 끅끅대며 그를 붙잡았다.
“네 목숨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 끄… 으… 흣.”
“그래야 네가 날 더 무서워할 것이 아니냐.”
얼굴에 피가 몰리고 목 아래가 새하얗게 질려있을 즈음, 부율이 목줄을 놔주었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보지 구멍이 쪼그라들고 엉덩이 밑으로 애액이 흥건했다. 나는 목이 조이면서도, 쾌락을 좇고 있던 게 분명했다. 부끄럽고 까마득하다.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걸까.
“하아. 윽. 네 안에 쌀 것이다. 다리 더 벌리고, 하, 옳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를 따라 다리를 좌우로 넓게 벌린다. 그는 통통하게 오른 내 허벅다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성기를 박았다. 빠르고, 깊숙이 내 안을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절정에 다다랐다. 이윽고 부율 역시 내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더니, 벌컥 씨물을 쏟았다.
“크윽!”
“하아아아응… 하읏!”
정액이 죽처럼 늘어져 그의 기둥을 타고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마저도 아까워 나는 엉덩이를 비벼가며 후희를 만끽했다. 부율은 그런 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입술을 맞춰왔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응시했다. 바람은 여전히 따듯했고, 우리의 몸은 식지 않고 같은 온도를 유지했다. 아득하나 애절하다. 그의 분노는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고, 나를 보는 눈이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말해다오.”
읊조리는 떨림이, 살결에 간지럽게 닿는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단둘만 존재하는 공간인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그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곧 불안한 목소리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입술을 열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사랑일까. 이 마음이, 정말 그가 만족할 만한 사랑인 걸까.
“…그럼.”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물음에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원망이 배어 있었다.
“그놈은 사랑하는 것이냐.”
그의 말이 가슴 한켠을 몇 번이고 두들기는 것 같았다. 씁쓸하고 아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볍다. 깊이 쑤시는 고통이 아니라, 잠깐 스치고 마는 그런 자국일 뿐이다.
“…그저.”
하지만 좀처럼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사한지만 알고 싶… 어요…….”
부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를 가늠했다. 나는 그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는 그 눈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답을 알려 주면 내 곁에 있을 것이냐.”
부율의 물음은 단조로웠다. 가벼이 내게 묻는 말일까. 이 기회를 놓치면, 내가 앞으로 수오의 소식을 듣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하지만 앞으로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막막하게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럴게요.”
나는 차악(次惡)을 선택했다. 그의 집착에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쳐서 그저 수오의 소식만큼만 바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부율을 향한 마음이 깊어진 것일 뿐일까. 어떤 것도 확신할 자신이 없다. 그런 스스로가 밉기만 했다.
“알게 되면, 난 널 더 구속할 것이다.”
부율은 자조했다.
“네가 날 떠나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니까.”
불안이 엄습해온다. 그의 공허한 말이 불길한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의 입 밖에서 나오는 잔악한 것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약은 건네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
“네가 날 찾은 그날 밤, 아는 자를 시켜 밀살(密殺)하였지.”
내가 믿고 있던 세상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멈춰 있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가 속한 공간은 일그러져 보이기만 하다.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흔들리는 소리만이 감각 속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쓰러질 수 없다.
“날 원망하거라. 하지만.”
“…….”
“날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그가 나를 끝까지 쫓아와 붙잡을 테니까. 몇 번이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다시는 저 밑으로 가라앉지 못하게 끌어 올릴 테니까.
* * *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열었다.
나는 그때, 어질러진 거실을 보고 숨도 쉴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였을까. 수십 번 자문해 봐도 짚이는 곳은 없었다. 도둑이 들었던 걸까. 창문을 열어 놓고 학교에 간 걸까. 그런데 그때,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 사람이 있었다. 섬뜩한 마음에 신발장 옆에 걸려 있는 우산을 들었다. 이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무기가 될만한 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급하게 손에 잡히는 것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맞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던 때였다. 그때, 익숙한 인영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째서……?”
“…….”
그였다. 나의 연인이자, 줄곧 결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순간부터 우리는 되돌아갈 여지 없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가 내 집에 있었다.
“…아, 왔어?”
“왜, 왜 네가 여기 있어.”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현관문 비밀번호도 바꿨는데, 그가 어떻게 집 안에 들어온 걸까. 온갖 의심이 오가고,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린다. 그에게서 처음 느끼는 공포심에 이대로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그것도 환하게.
“내 애인 집을, 내가 못 와?”
너무나 태연한 그의 말에 우리가 헤어졌는지 혼동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헤어졌다. 가지 말라고 울며 무릎 꿇는 그를 끝내 모른 척하며, 나는 죽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더럽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 추악해서.
하지만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이런 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나가줬으면 좋겠어.”
“내가 왜.”
“왜라니 그야…….”
“넌 내 건데 내가 왜.”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점점 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등 뒤로 현관문이 닿았다. 이대로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은근슬쩍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그가 내 손목을 아프게 낚아챘다.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무, 무슨 말이야……?”
“네가 또 그놈한테 갈 수 있을 것 같냐고.”
그의 눈초리가 날 아프게 쏘았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다. 이제껏 알고 지냈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거.”
그가 주머니 속에서 콘돔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걸 자세히 본 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갔다.
“나랑 할 때 쓰는 거랑 다르잖아.”
“아… 그건… 그러니까…….”
“그 새끼랑 할 때 쓰는 거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불안해서 두 다리가 흔들거린다. 나쁜 것은 모두 다 나였다. 두 사람 사이를 가지고 놀고, 멍청하게 들키지 않을 거라 안심하고 있었다. 인정하는데도, 내 마음이 휘청거린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는 그와 헤어진 이후로는 그 남자를 찾아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제자리. 죄책감으로 그저 같은 일상 속을 반복해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돈다.
분명 서랍장 속 깊숙한 곳에 숨겨놨었는데. 그가 내 방을 전부 다 뒤지기라도 한 것일까.
“두 좆 비교해 가며 바람피우니까 좋았어?”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는 헛웃음을 쳤다. 마치 내 말이 그에게 전혀 가닿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거짓말인 것처럼.
“내가 그동안 너무 봐줬던 거지.”
“아…….”
“내가 너한테 너무 잘해 줬었던 거야.”
내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힘이 더 거세져만 갔다. 팔뚝에는 힘줄이 솟았고,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제야 내가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어떻게 하면 돌아올래.”
“제발 이러지 마. 제발…….”
“내가 너한테 어디까지 보여줘야 해. 내 마음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냐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간절한 물음에도 겁에 질려 버린다. 이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는 사라졌다. 그저 동물처럼 소유욕을 드러내고 욕망을 분출했다. 그의 속마음 저 밑에 있던 검은 욕망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다.
“…아니면.”
그때, 그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또 죽이면 되는 건가?”
“무슨 소리를…. 누, 누구를…….”
“……넌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나를 끌어당겨, 그의 품에 들어가게 했다. 커다란 손아귀에 허리가 단번에 잡혀버린다. 그는 이를 갈며 내게 은밀히 속삭였다.
“내가 이랬던 게 처음인 것 같아?”
처음이었다. 처음이어야 했다. 그가 말한 꿈은 전부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더 끔찍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더욱더 잔인하게, 내 귓가에 입술을 얹었다. 그 나긋한 목소리가 꿈속에서 보았던 환청처럼 깊이 울려 퍼진다.
“네가 날 떠나고, 내가 널 붙잡은 게. 이제 몇 번째인지 샐 수조차 없어.”
그는 아직도 꿈속에 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내게 말하고 있다. 강요하고, 그를 바라보라고 소리친다.
“이젠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그의 얼굴이 괴롭게 무너져 내렸다. 충혈된 눈이 나를 음산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어둠이 드리워졌다. 내가 그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넌 나를 선택해야 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 걸까.
* * *
“중전마마.”
벌써 상참(常參) 시간이 되었던 걸까. 밤을 지새운 탓으로 시간관념이 무덤덤해져 있었다. 그러나 중궁전에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보며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와 단장할 준비를 하니 어쩔 수 없이 채비를 할 뿐이다. 모든 게 귀찮고 나른했다.
“이제껏 저는 왕후가 상참에 참석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마마.”
“…….”
“분명 마마께서는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당겼다. 하지만 금세 굳어져 내려앉았다. 왕과 그 밑의 선택 받은 문무백관만이 참석하는 조회를, 부율이 궁령(宮令)을 바꾸어 왕후까지 자리하는 것으로 공포했다. 뒤에서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은 불만을 품고 그런 왕을 지적했지만, 그 누구도 상소를 올리는 자는 없었다. 그만큼 그의 권력이 날로 세지고 있다. 서현국의 춘황조차 부율을 깊이 신뢰하고 있어,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져 갔다.
이제는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율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확고해져 가고 있으니까.
“모시겠습니다. 중전마마.”
사뿐히 발을 내디뎌 화려한 꽃신을 신는다. 이제는 어색하지도, 거북스럽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간다. 이 모든 안락한 생활과 떠받들어지는 상황들이. 그러나 언제나처럼 부율을 보면 나는 굳어 버리고 만다. 그 아픔을 상기하고 말았다. 수오가 이 세상에 없다는 그 잔인한 사실을 악몽과도 같이 매일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중전마마 납시옵니다.”
중궁전에서 중제연까지 멀지 않은 거리 동안 생각에 잠겼었는데, 내관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정신이 든다. 부율은 중제연의 어좌에 앉아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건 여느 때처럼 그가 나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어서 내 옆에 앉거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그는 서둘러 나를 재촉했다. 이틀 전 고뿔에 걸렸다는 핑계로 어젯밤도 잠자리를 피해 왔다. 그가 내게 집착하고 있음을 아는 나인들은 초조해하는 부율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만다.
“백관들은 이제 고개를 들어도 좋다.”
내가 자리에 앉기 전까지 부율은 백관들의 허리가 조금도 세워지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고 나서야 부율의 긴장이 풀어진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흑마포(黑麻布) 차림의 신하들을 쭉 훑었다.
“보고하시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례가 시작되자, 앞줄에 있던 대사농(大司農)부터 보고를 이었다. 부율은 백관들의 말을 신중히 듣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틈이 생기면 내 손을 꽉 끌어 잡았다. 그러다 내가 슬그머니 손을 빼려고 하거든 피할 수 없게 손목을 꽉 눌렀다.
“…이상이옵니다.”
말을 마친 대사농이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분명 눈초리를 들어 올렸을 때 부율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중전의 생각은 어떠하오.”
부율의 눈은 이제 나를 향했다. 생각을 전할 이가 중제연 안을 가득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봤다.
“경들의 말이 어려웠으면 내가 해석하지.”
“…전하.”
“그러니 이리로 더 가까이 오십시오.”
나의 말 한마디를 간곡히 기다리고 있는 얼굴들이 보인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이 상참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깝도록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흡족해하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백성들의 치기가 날로 거세져, 도적질을 일삼는다고 하오. 엄중히 다스리면 좋으련만 자칫 그놈 식구들도 굶어 죽기 십상이니…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저는 그저…….”
“불쌍한 도적놈들을 그냥 놓아주는 게 낫겠소. 그렇지 않으면…….”
그때, 부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내 귓불을 냅다 깨물었다.
“아흣……!”“벌을 내려야 할까.”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저히 앞을 볼 수 없었다. 모두가 우리 둘을 보고 있는데, 그의 손길은 배려 하나 없이 거침없기만 했다.
“오늘 밤은 벌 받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중전.”
“읏…….”
“내가 쌓인 게 많아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거든.”
그의 손이 가슴과 허리 사이,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매끄럽게 비집고 들어왔다. 일순 궁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숨을 한 번에 들이마시고는 내쉬지를 못한다. 백관들의 다리 사이에 옷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저,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때, 가운데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상이 우물쭈물 목소리를 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처럼 떨리기 그지없었지만, 최연소로 벼슬에 오른 자인만큼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상참에서 그리도 나, 낯부끄러운…….”
“…….”
부율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재상은 그 매서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 아직 혈기왕성한 자들이 많사옵니다. 부, 불경한 일을 사, 상상이라도 하면…….”
“그래서 경의 말뜻은 즉…….”
부율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내 중전을 범하고 싶다는 말이로구나.”
“마, 말도 안 되는 말씀이옵니다. 전하!”
“하하……. 말도 안 된다, 라.”
재상이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치기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율에게 선처를 바랐다. 그러나 부율의 얼굴은 굳어 있어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악하게 미소가 싸늘해졌다.
“중전.”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위험하리만큼 바싹 날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턱 끝을 바라봤다. 부율은 그런 내 입술을 불시에 훔치며,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신하들에게 들킨 것 같습니다.”
그의 웃음 뒤로 날 용서하지 않겠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나는 등골을 바싹 세우며,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얼마 뒤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결국 그가 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전, 네가 음탕한 암캐라는 걸.”
부율의 눈동자가 짙게 달아올랐다. 흥분과 광분이 섞인 눈가가 나를 또렷이 노려봤다. 밤이 되면 도덕이 어그러지며 부율을 더 미치게 할 것이다. 그에게 교육받은 몸이 그의 위험 신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 * *
그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상참이 열렸다. 후좌(后座)에 앉아, 여느 때처럼 백관들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제 있던 상참에서 실언을 한 재상이 보이지 않았다. 부율을 바라보니,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경들에게 특별한 것을 제안할까 하는데.”
부율이 참석한 문무관들을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감히 누가 임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모두 그저 고개를 바싹 숙이고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들이 후사 걱정을 하지 않았느냐.”
부율의 눈이 유독 내시부의 상선에게 향해 있었다. 그에게 시달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눈빛이 불만스러웠다.
“후궁 간택을 열라고 소란들이었지.”
“…주,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신하들이 눈치껏 부율에게 사죄를 고해보지만,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던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기만 했다. 아이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제각기 권력에 맞는 여인을 찾아 부율의 옆에 앉히려는 심산이었을까.
나는 차라리 그가 다른 여인을 취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그런다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로부터 영영 해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경들에게 오늘 그 걱정을 덜어 주려고 해.”
부율의 입술이 일직선으로 확고하게 그려졌다.
“여기 있는 중전이 내 씨를 어떻게 담는지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저, 전하……!”
문무관들이 사색이 된 눈으로 하나같이 부율을 쳐다봤다. 불경스러운 시선들에 부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수록 내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상궁은 이리로 와, 중전의 옷을 벗기시게.”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부율의 손을 잡고 당혹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고개를 저어 그가 눈치채주기를 바랐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리고 왜 하필 이 많은 백관들 앞에서여야만 하는 것인지.
“어서.”
하지만 부율은 멀리서 주춤거리는 상궁을 재촉할 뿐이다. 나를 외면하고, 내 손을 밀쳐내며 행동을 고집했다. 그런 모습들을 눈에 담은 상궁은 어쩔 수 없이 후좌에 앉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완곡한 손으로 홍의(紅衣)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자, 잠깐……!”
결국, 겉옷이 힘없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나간다. 얇은 속저고리와 치마만이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릴 뿐이었다.
이제 부율은 상궁을 뒤로 물리고, 직접 손을 움직였다. 순백의 저고리를 이리저리 헤집어 붉은 젖가슴을 힘겹게 꺼낸다. 매듭으로 꽉 모인 두 젖은 누가 봐도 색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아직 총각인 백관들, 부인을 둘 셋이나 둔 판서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나는 하얗게 질려, 두 눈을 꼭 감았다. 모두가 반라가 된 내 몸을 보고 있다. 두 뺨은 붉기만 하고 그들의 하반신은 뜨거워져 가고 있었다.
“치마는 스스로 내리지. 중전.”
“저, 전하. 제발 부탁입니다. 이러지 마시…….”
“중전이 얼마나 내 것을 맛있게 먹는지, 후사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곧 부율의 인내심이 끊겼다. 그는 막무가내로 나를 붙잡고, 내 치마를 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고작 음부를 가리기에도 작고 얇은 속곳이 드러나니,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곳을 쳐다본다.
“흑… 안 됩니다. 안 돼… 아!”
“젖어 있는데. 중전.”
불시에 부율의 손가락이 속곳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음핵을 스치니 절로 허리가 휘어졌다. 곧 부율이 속곳에서 손가락을 꺼내 신하들 앞에 내보였다.
“나의 중전은 이리 시도 때도 없이 물을 질질 싸는구나. 기특하지 아니한가.”
“아… 저, 전하…….”
백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고간을 가리기 급급했다. 그러나 시선만은 일정하게 부율의 손끝으로 향했다. 애액이 줄줄 흐르고 있는 그 음탕한 모습을 마음껏 관찰하며 나신의 나를 겁간하는 상상을 해댔다.
“경들이 말해 보시게.”
부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젖가슴을 덥석 쥐었다.
“이처럼 물이 많이 나오는 여인을 본 적 있는가.”
그리고 양손으로 내 젖을 주물럭거리며 튀어나온 유두를 손끝으로 튕겨냈다. 내가 울면서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벌리자, 백관들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커졌다. 이제는 튀어나온 하복부를 가릴 생각은커녕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때 침묵을 깨고 가장 어린 백관 하나가 입을 열었다. 부율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훑었다. 삐죽삐죽 더듬거리는 행세가 가엽단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물이 덜 든 시중이었다.
“여, 여인이 저토록 많은 물을 내는 것은 처음 보았사옵니다. 전하.”
부율은 대담한 시중의 말에 소리 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율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눈빛은 궁폐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무릎 위로 올라오거라. 중전.”
부율의 명령이 떨어졌다. 평소보다도 단호하고 거칠어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양손으로 젖가슴을 가리고 간신히 그의 무릎에 앉았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율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다음, 손을 다시 속곳 안으로 넣었다.
“질척하기도 하지. 다리를 더 벌려 보아라.”
“으… 흐읏, 싫어. 아, 안… 돼… 흣!”
그를 미워하고 있다. 그가 원망스럽다. 그런 표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아랫구멍은 본능적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이윽고 부율의 중지가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이런. 손가락이 끊어지겠구나.”
“아… 아흐… 으응…….”
“좀 더 힘을 빼야지. 그래야 내 자지까지 먹지 않겠느냐.”
나는 입을 벌리고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모두가 내 벌려진 보지를 염탐하고 있다. 누군가는 은근슬쩍 포(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으며, 다른 누군가는 겉옷 위로 성기를 매만졌다.
그때, 두 번째 손가락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헐떡이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으응… 하, 하앗… 아읏!”
쾌락에 정신이 팔린 나를, 부율을 비롯한 백관들이 음흉하게 쳐다봤다. 특히 부율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다른 손으로 내 항문을 쑤셨다.
“아… 헉!”
“여기도 젖어 있구나.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응?”
부율은 비소를 흘리며, 빠르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내장이 전부 딸려 나오는 느낌과 함께 손가락이 위아래로 들락날락했다.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고, 가득 차는 느낌이 든다. 나는 부율의 무릎 위에서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그 아찔한 맛을 음미했다.
“그런데 젖을 빨아줄 입이 없어 심심하겠어. 중전.”
“아, 전하… 하으, 아흐읏……!”
“경들 중 중전의 유두를 빨 자가 있느냐. 원하는 자는 손을 들 거라.”
망측한 임금의 질문에 감히 손을 들어 올리는 사내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차츰 지나자, 그들의 눈에 갈등이 번지기 시작했다. 감히 하늘 위에 있던 왕후의 젖꼭지를 빨아 볼 수 있다니. 그들의 발기한 성체가 꺼덕거리며 안달했다.
“저, 전하…….”
그때,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당상관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부율이 흥미로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오거라.”
부율의 허락에 사내가 며칠씩 굶은 사람처럼 조급하게 내달렸다. 이윽고 그의 밝은 눈동자에 붉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비친다. 그는 황홀하다는 듯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주, 중전마마…. 아…….”
“아, 흐으읏……!”
커다란 두 손이 물컹거리는 젖가슴을 사정없이 주물럭거린다. 외간 사내의 손에 커다란 젖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흐느적거렸다. 당상관의 눈 밑이 시뻘게졌다. 상당히 흥분한 듯 재빨리 입을 벌렸다.
“아흐으으응…! 아아……!”
남자의 입에 발기한 유두가 삼켜진다. 나는 다리를 덜덜 떨며 쾌락에 눈물을 터트렸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모두의 앞에서 신하에게 범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불쾌해서, 몸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아, 음… 하아, 발딱 서 있습니다. 마마의 유두가…….”
“흐윽…! 아흐… 하으읏!”
“혀로 빨면 움찔거려서는… 이렇게 음탕할 수가.”
연신 불순한 말을 내뱉는 사내를 밀쳐내고 거부해야 옳은 것인데, 어찌 된 것인지 몸은 더 그를 원하고 있다. 부율이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채고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더 빠르게 손가락을 구멍 속에 넣다 빼었다.
“아흑! 아흐응! 하으으앙……!”
“여길 건드려 주면… 하하, 좋아하던데. 중전.”
부율이 내벽 한쪽에 튀어나와 있는 돌기를 건드렸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돌더니, 빠르게 절정에 달아오르고 만다. 호흡하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구석에 있던 환관들도 얼굴을 붉힌 채 벌름거리는 보지 속을 지켜봤다.
“하하하…. 중전.”
부율이 내 귓가에 은밀히 속삭인다. 이미 나른해진 몸은 이제 어떤 짓을 당해도 좋다는 듯이 풀어져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 두 다리를 그의 허벅지 바깥에 걸치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저놈이 네 보지를 어떻게 빨지 궁금하지 않으냐.”
“아…….”
“뒷구멍에는 자지를 넣어줄 테니, 앞 구멍은 저놈 혀로 즐기거라.”
어느새 부율의 성기가 우람해진 채로 내 음부를 희롱했다. 이제 당상관은 젖꼭지에서 입술을 떼고 내 항문을 쳐다보았다. 곧 자지로 처참히 막혀버릴 작은 구멍을.
“아, 큭!”
곧 남근이 힘겹게 항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내 보지 속에 길게 세운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발가락이 달달 떨릴 만큼 처음 맛보는 감각이었다. 아랫배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보지 속을 헤집고 다니는 부드러운 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몸은 완전히 망가져 갔다.
“하아앙…! 아, 아흐으응……!”
“하아, 좁아도 너무 좁다. 보지 구멍보다 물이 적어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는구나.”
부율이 뒤에서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불평을 했다. 그러면서 보지 살을 구석구석 핥고 있는 자신의 신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몸은 질투하면 할수록 커졌다. 기둥에 단단히 붙어있는 혈관들도 징그러우리만큼 벌떡거렸다.
“하, 크… 읏. 내 아내의 보지 맛이 그리도 훌륭하더냐.”
부율은 거친 목소리로 당상관에게 물었다. 줄곧 보지 맛에 열중하고 있었던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풀어진 눈으로 부율을 쳐다봤다. 그러나 이미 색에 미쳐 있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물맛이… 맛있습니다. 제 아내 보지 물보다도 더…….”
“어지간히도 푹 빠진 모양이군.”
부율은 성이 난 물건을 그대로 내 안에 꽂으며,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퍽퍽 박히는 박자에 이대로 안쪽이 헐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하아, 젠장. 젠장…….”
부율은 욕지거리를 반복하며 더욱 거칠게 나를 안았다. 급기야는 보지를 빨고 있는 당상관을 발로 찬 뒤, 나를 바닥에 쓰러트린다. 그가 내 뒤를 순식간에 덮쳐 왔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좁은 뒷구멍 속에 자지를 욱여넣었다.
“네 암캐 보지가… 여럿을 홀리는구나. 중전.”
“아으! 하으으! 아하아응……!”
“오늘로써 모든 게 확실해졌어.”
부율의 미소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널 어찌 다뤄야 할지 확신이 드는구나. 누룩.”
말을 끝낸 부율이 내 엉덩이를 잡고, 폭력적일 만큼이나 자지를 깊숙한 곳까지 박아 넣었다. 나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끅끅대며, 그 커다란 물건을 몸으로 받아냈다. 얼마 안 가 내벽이 진동하더니, 다시 절정에 다다르고 말았다.
“아… 우… 하으…….”
뒤로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게 했다. 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쏟았다. 부율은 그런 날, 다시 처음부터 열 띠게 만든다.
“하아, 크윽.”
그의 숨도 눈에 띄게 가빠져 갔다. 뒷구멍을 찌르는 성기가 부르르 떨며 이곳저곳을 헤집는다. 그는 난폭해진 손길로 내 팔뚝을 붙잡았다. 감춰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그가 허겁지겁 내 입술을 삼켰다.
“우… 웁!”
“하아…….”
바닥에 거친 결들이 등을 전부 긁어놓았을 텐데, 어째서 그의 입술은 이리 곱기만 할까. 나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들며 그 넓은 등을 껴안았다. 곧 부율이 다급한 소리를 내며 내 안에 벌컥 정액을 토했다.
“하, 크흑!”
부율은 마지막까지도 내 허벅지를 들어 올려 남김없이 끝물을 쏟아냈다. 질척한 정액이 직장을 한가득 메웠다. 이물질이 내장을 돌아다니는 듯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그의 흥분한 얼굴뿐이었다. 색스럽게 나를 노려보는 호박빛 눈동자가, 유난히 두려웠다.
“…하아.”
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축축한 성기를 포자 속에 집어넣고 매듭을 묶었다. 그러나 아직 줄어들 기미가 없는 남근은 천장 위를 빳빳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멍한 상태에 있는 백관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경들에게 묻겠다.”
직급의 위아래 할 것 없이 싸늘하게 식은 임금의 말에 모두 숨을 죽인다. 미처 쏟아내지 못한 정액 냄새가 신하들에게도 나는 듯했다. 그런데도 부율은 저열한 미소를 띠었다. 마치 모든 것을 계획해 놓은 듯이.
“내게 후궁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느냐.”
고개를 숙인 신하들의 목젖이 아래로 내려간다. 긴장한 탓으로 뒷덜미에는 땀이 났고 손톱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답을 잘못한다면, 임금의 눈 밖에 날 것이 뻔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서, 서현국의 일부일처(一夫一妻)처럼 여국도 이제 법령을 바꾸는 것이 어떠한지…….”
“소인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전하.”
“소인도…….”
살기 위한 목소리들이 궁 안에 울려 퍼졌다. 부율은 그들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경들의 마음은 내가 잘 헤아렸네. 헌데…….”
그때, 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후세를 보려거든 중전이 나를 거부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을 가늠했다. 민첩하고 또렷하다. 얼키설키 꼬아진 두 사람의 눈초리가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부터 중전은 중궁전 안에서만 생활함이 어떠한가.”
부율이 내명부를 맡은 관료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사내들이 어깨를 움찔 떨며 당장에 무릎을 꿇었다.
“주, 중전마마의 중궁전 밖 출입을 엄금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나이다. 전하.”
“소인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나이다. 전하.”
외척의 힘이 없는, 가짜 허울을 쓴 중전에게는 힘이 없다. 나는 겨우 몸만 가린 채, 나를 보는 음탕한 시선들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부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의 권력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반해 나는…….
“지금 당장 중전을 중궁전으로 데려가 걸쇠를 단단히 잠가라.”
“예, 전하.”
이곳에서 지독히도 혼자였다.
* * *
“하아… 하, 으…흥!”
“벌써 지친 것이냐. 보지가 흐물거리는구나. 좀 더 조여. 아직 네 번밖에 싸지 않았다.”
“으… 흑… 제발… 제발……!”
“어리광부리지 말아라. 임신이 되려면 정액을 잘 받아먹어야지.”
잔인한 밤이 계속됐다. 부율이 나를 중궁전에 감금한 지 달포째, 그는 매일 밤 이곳에 묵었고 나를 강간하다시피 범했다. 중궁전 벽을 타고 새어 나오는 비명에도 나인들은 후사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부율의 권력은 날로 견고해지고 있다. 왕후를 노예처럼 다루는 그의 유별난 성벽도 신하들에게 칭송받을 만큼, 모두의 눈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 전하…. 살려 주세요… 하으응……!”
“단둘이 있을 때는 서방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싫다면 어디…….”
부율이 내 뒷덜미를 핥으며 귓가에 바싹 붙었다. 이윽고 끈적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꼴릴 듯한데.”
그는 내 울음에 더 흥분한 것인지 크게 부푼 성기를 깊숙이 박았다. 나는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제는 자아가 사라진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읏! 주인… 주인님… 아흐윽!”
“암캐가 오늘따라 내 말을 잘 듣는구나. 너 역시 임신하고 싶은 것이냐.”
“임신… 하으응! 임신시켜 주세요… 아흣, 주인님……!”
망측한 신음이 무의식중에 터져 나온다. 부율은 그런 비천한 내 모습에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나락으로 떨어진다. 절정도 죄의식도 함께 바닥까지 추락했다.
“아흐으으으윽!”
“씨물을 하, 큭. 보지 속에 잔뜩 뿌려줄 테니 구멍 더 벌려. 옳지…….”
나는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그가 움직이기 편하게 좌우로 소음순을 벌렸다. 붉은 속살이 꽃처럼 벌어지며 자지를 반겼다. 그는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개처럼 나를 끌었다. 퍽. 퍽. 부딪히는 음탕한 소리가 귓가를 희롱하며 이곳 중궁전에 널리 퍼진다. 바깥을 지키는 무관들이 얼굴을 붉히며 발기할 정도로, 교성은 짐승들의 짝짓기처럼 유별났다.
“아흐윽! 아아아앙…! 하읏!”
“씹맛이 과연… 아, 크윽!”
부율은 포효하며 내 등으로 무너졌다. 커다란 그의 몸이 나를 완전히 뒤덮었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지속된 성교로 인해 보지 속은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그의 성기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액을 한껏 쏟아낸 뒤에는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제발… 이제는… 아!”
“아직 부족해. 젠장.”
네 번의 사정. 그리고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절정 속에서 나는 절망했다. 부율은 빨갛게 부어오른 내 유두를 다시 손으로 집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나는 절규에 가까운 신음을 내며, 그를 말린다. 그러나 두꺼운 몸은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이제는 한계였다.
“아, 으… 읏…….”
눈이 감기고 온통 시야가 검게 변했다. 부율이 쉴 틈 없이 나를 범하는 동안 나는 어젯밤과 같이 기절을 하고 만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면, 그가 마지막 사정을 끝내고 내 보지를 닦아주고 있었다. 온몸에 피멍이 든 것처럼 뻐근하고 저린다. 더구나 그의 손이 맨피부에 닿기만 하면 후유증인 것처럼 깜짝 놀랐다.
“잘 참았다. 기절한 네 보지를 괴롭히는 것도 강간하는 것 같아 짜릿하더구나.”
“…….”
나는 이제 어떤 감정도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 그의 노예가 된 것처럼, 아니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된 것처럼 달고 짜거나, 자극적인 감정들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다. 가끔 창이 난 벽에 기대어 옛날 일을 회상할 때 눈물을 흘리는 정도였다.
내가 선택한 길 외의 다른 길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몰랐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가 먹물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건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죄책감이었다.
“누룩. 어딜 보고 있는 것이냐.”
그의 눈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내 눈초리가, 기분이 상했던 걸까. 혹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걸까. 그가 초조하게 질문한다. 나는 그의 위를 넘어 오른다. 그리고 바닥에 눕혀진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 내게 남은 것은 이제 이 아름다움밖에는 없었다.
“부율…….”
감탄했다. 청색 빛깔의 고운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흩날려 있어,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형형했다. 그 옛날 수오와 함께 밤별 놀이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참… 이처럼 고왔었는데. 환하게 피어오르는 별과 함께 그의 눈이 날 보며 간절하게 떨렸을 때, 우리는 완벽히 함께였는데…….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위로 뜬 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또다시 묻는다. 그러나 온통 내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다. 그날의 아름다움. 그날의 정취. 그때의 향기…. 그리운 것들이 이곳 궁이 아닌 과거에 흩뿌려져 있으니 주워올 수도, 마음에 담을 수도 없다. 다만 추억이 그곳에 있었다. 그와 나의 것들이.
“…너는 이제 나를 떠날 수 없는데.”
“…….”
부율은 자조했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정사를 나눌 때는 그렇게 강했던 사람이 내게 사랑을 물을 때는 한없이 약해졌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이다가도 나는 멀어진 정인을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가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 감정일까.
“이제 그때처럼 끔찍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부율의 눈가가 순식간에 그렁그렁해졌다.
“너는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은 걸까. 누룩…….”
나는 가녀린 몸을 지키지 못하고 그대로 부율의 가슴으로 스러졌다. 피부가 닿아, 온기가 전해졌다. 따듯하고 아늑하다. 나는 그의 품에서 자문해 보았다. 행복일까. 이게 그가 내게 바라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내가 괴물처럼 보이느냐.”
부율은 재차 내게 물었다. 쓰러진 나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두 뺨은 눈물에 젖어 연해져 있었다. 흐릿한 그의 두 눈동자에, 어떤 표정도 없는 내가 비쳤다. 이렇게 잔인한 얼굴이 또 있을까.
“…괴물.”
나는 그가 뱉은 말을 읊조렸다. 그가 내게 말해 주었던 악몽에서 나타나는 괴물. 그리고 내가 보았던 검은 세상 속의 그 괴물은 똑같은 사람이었을까.
“연모하고 있어요.”
나는 그를 감싸 안았다. 불안함에 떨고 있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맨피부로 받아 냈다. 이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다.
“…사랑해요.”
연정일까. 아닐까. 원망일까. 증오일까. 혹은 애정일까.
“누룩…….”
정답은 그의 얼굴에 있다. 나의 감정을 샅샅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도 명확했다.
“나도 널 사랑하고 있다.”
행복하지도 들뜨지도 않게, 그저 고독한 얼굴.
“네…….”
오늘도 나는 눈을 돌린다. 쓸쓸하기 그지없는 그의 외로움을 보살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그 아이를…….
“사랑해요.”
이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 * *
처음부터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해 애썼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혼자 살아남아서 다른 곳에 가보았자 어차피 똑같은 결말일 것 같았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마치 정해진 세계인 것만 같다. 마지막 선택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오지만 결국 불행한 것은 똑같은 쳇바퀴 같은 삶을 보내는 것 같았다. 정답이었던 걸까. 혹은 그저 내 망상에 불과한 걸까. 확실한 것은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강의를 끝마치고 곧바로 온 것인지 정장 차림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하긴, 허물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나는 탁상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가 신발을 벗기까지 기다렸다.
“병원장님 호출 때문에 조금 늦었구나.”
“괜찮아요.”
담담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렇듯, 성인이 된 몸으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어딘지 어색했다. 이제 더는 놀이동산에 함께 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둘 사이를 오해받을 테니까.
“그래. 그동안 내 전화는 왜 피한 거니.”
“…….”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를 보는 시선이 퍽 날카롭다. 날 걱정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본래 차가운 성정인 그가 고작 입양 딸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어렸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사이가 돼 버렸는데.
“가까이 와. 옆에 앉아도 좋고. 아니, 무조건 옆에 앉아.”
그가 소파 옆자리를 두드리며 나를 부추겼다. 넓은 소파가 아니기에 함께 앉아야 할 자리가 좁아 보였다. 하지만 일단 물잔을 내려놓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이건, 조금 위험하다.
“곧 졸업이구나. 이제 그만 들어오는 게 어떠냐.”
“어디로… 요.”
“내 집으로.”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가끔 그는 이렇게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대부분은 좋은 사람으로 가장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지만, 이젠 그것조차 버거울 만큼.
하지만 의문이 든다. 왜 내게 굳이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병원에서 고아로 있던 내 모습이 줄곧 생각나서? 애초에 내가 불쌍했기 때문에 수련의 시절밖에 안 됐을 때 학생인 나를 입양한 걸까.
그렇다면 왜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대신 곧바로 이혼한 걸까. 내게 엄마라는 존재를 안겨주기보다 왜 나를 홀로이게 내버려 둔 걸까.
“설마 전에 말한 남자친구랑 결혼이라도 한다는 건 아니겠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초조하게 발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손을 확 끌어 잡는다.
“안 돼.”
“…읏.”
아파. 아프다고. 찌푸려진 내 얼굴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나를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분노한 얼굴이었다.
“넌 아직 내 딸이야.”
예전에는 그의 딸이라는 어감이, 뿌듯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부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나이 차이는 이제 좀처럼 우리가 부녀지간이라는 것을 어색하게 했다. 그가 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식 없이 홀로 살아서일까. 아내도 없이 외로워서? 나는 질린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벗어나고 싶어. 그런데 왜 이토록 숨구멍이 보이지 않는 걸까. 나를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아.
“…아, 미안하구나.”
그가 내 손목을 놓은 것은, 내 손이 이미 새하얗게 질렸을 때였다.
“내가 어떻게 살든 그건 내 자유예요.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나를 키워준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니란 것쯤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차가운 말을 내뱉어도,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참 많이 좋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고, 그것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뜨겁고 볼썽사납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알겠다. 하여튼 오늘은 이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어.”
내게서 멀어진 그가 서류 가방 속에서 약통을 꺼내 내게 건넸다.
“네가 부탁한 수면제야. 내성 없는 거니까 오늘 밤부터 숙면할 수 있을 거다.”
나는 곧장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벌써 삼 일째 잠을 자지 못해 몸이 엉망이었다. 이젠 정말 잠이 필요했다.
“난 이만 가볼 테니 침실에 가서 눕거라. 금방 잠이 올 거야.”
“…운전 조심하세요.”
그가 서류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방문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의 말대로 급격히 피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면제가 이렇게 효과가 좋았던가. 조금도 생각할 틈 없이 곧장 시야가 불투명해진다.
“아… 읏…….”
온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 그런데 완전히 잠에 빠지기 전에, 불현듯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야 하는지 고민하던 그때, 방문이 열렸다. 동시에 의식이 나가버린다. 꿈이 보였다.
누군가 나를 만지는, 그런 역겨운 꿈.
* * *
침대가 눅눅했다. 에어컨을 틀어 놓지 않아 흘린 땀 때문일 거로 생각했는데, 희미하게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손등에 스치는 것이 차가웠다. 그렇다면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제야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몇 시간을 잔 걸까. 나는 졸린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뻐근했던 눈덩이가 올라가면서, 눈앞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 큭. 하아, 하아…….”
나는 내 안을 파고들며 신음하는 그를 보고, 얼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내가 깨어난 걸 눈치채고는 손바닥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두 알을 먹였어야 했던 걸, 깜빡했구나.”
“아… 우… 웁!”
“기다려.”
그가 한쪽 손을 뻗어 탁상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가져온 주사기를 손에 넣는다. 그는 능숙하게 공기를 빼내고, 그 뾰족한 끝을 내 목에 가져다 댔다.
“혹시 몰라 가져왔는데 잘 됐구나.”
“웁! 흐우웁……!”
“그리고 정액은 네 안에 싸줄 테니까 안심해.”
싫어. 싫어. 이런 건 말도 안 돼. 나는 저항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내가 그를 밀쳐내기도 전에, 목덜미에 차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널 정말 결혼하게 둘 것 같았니?”
“아, 웁… 하…….”
“임신한 몸으로 어디 한 번 할 수 있는지 시도는 해봐. 아마 힘들 거다.”
다시 잠에 빠져든다. 지독하게도 빠르게. 그러나 집념에 가득 찬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반복됐다. 이제 알겠다. 이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어디로 가든, 누구를 선택하든.
나는 불행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 *
“우욱!”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겨우 화장실에 다다랐다. 한 달 이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정신이 피폐해져만 갔다. 이게 제대로 된 삶일까. 이게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수오가 왔다 간 집안은 황폐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한바탕 싸움을 벌였고, 그는 나를 다시 난폭하게 안았다. 설마, 그가 내 집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는지는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정당했다. 내가 그를 여러 번 배신했기 때문에. 아니…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이렇게 돼 버린 게 내 잘못이야?
“하아, 하아…….”
나는 거울을 봤다. 그곳에 비친 내 모습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땀에 절고 푸석하게 붙어 있는 머리카락, 어딘지 음침해 보이는 눈 그늘. 내게 집착하는 남자들에게 유린당한 몸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내가 싫었다. 증오했고 원망했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도 깨끗한 거지. 왜 나만 이렇게 된 거지?
그를 사랑하는데, 반대로 끔찍이도 싫어했다. 나만 이렇게 되는 건 억울해. 너의 아름다움이 나를 좀먹고 있다. 너를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었어. 그를 포기했다면 이렇게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았을까. 내가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이다. 내게 집착하게 했고, 나를 쫓게 했다. 우리는 악몽 속에 있다. 그것을 누군가는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
토사물을 쏟은 변기 옆 세면대에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결과가 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들어 올렸다. 결과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절망적이다.
“흑… 하읏, 으흑……!”
그리고 더 절망적인 것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 남자에게 유린당한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는 밑바닥을 긁으며 꺽꺽 눈물을 쏟아냈다. 더는 희망이 없었다. 죽고 싶을 뿐이었다. 입 밖으로만 냈던 습관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는 이제…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 으윽… 하으윽!”
울분을 전부 다 토해내도, 깊이 있는 감정 찌꺼기까지는 배출할 수 없었다. 나는 준비한 날붙이와 함께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아…….”
욕조에 몸을 누이자, 몸이 따듯해졌다. 편안하고 안락했다. 가슴까지 잠기는 핏물이 혐오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괜찮았다. 이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세계는 곧 사라질 것이니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데 호흡이 가빠져 오자 눈물이 다시 울컥 쏟아졌다. 무서웠다. 사실은 죽는 것이 너무 무서워. 누군가 다시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그때, 도움의 손길을 바랐다. 사실은 살고 싶다.
나는 구원을 바라고 있을 뿐이야.
달칵.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오였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를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해.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와 함께 있고 싶다. 이곳이 설령 지옥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를 선택하고 싶었다. 함께 무너지고, 추락한다. 그런 삶조차 의미 있게 느껴질 만큼 나는 그에게 미쳐 있었다.
“수, 수오야… 도와줘. 살려 줘…….”
“…….”
그런데 그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꾹 다문 입술이 사뭇 매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정신이 몽롱했다. 그런데도 나는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붙잡았다.
“꺼, 꺼내줘. 119 불…….”
“하하…. 수오라고?”
뒷덜미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차갑다. 나는 희미했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나른한 기분 속에서, 눈앞의 그가 선명하게 보였다.
…수오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내가 아니었어.”
“아…….”
“그러니까 널 살려 줄 수야 없지.”
섬뜩한 눈초리가 나를 끝까지 쫓아와 핏물로 물든 내 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같이 죄를 지어야 하니까.”
“무, 무슨 말을 하…….”
“우린 여기서 죽을 거야.”
그의 눈이 욕실을 훑는다. 그러다 내가 썼던 날붙이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널 가지기 전까지는, 몇 번이고 반복될 거야.”
“유, 율아…. 제발…….”
“그러니까 다음에 깨어나면 반드시 날 선택해.”
빨갛게. 빨갛게. 점들이 눈에 튀고, 몸에도 흥건하다. 피로 웅덩이진 바닥을 보고 이제는 눈이 감겼다. 아득하다. 다시 검은 세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곳이 악몽이었다면 이 검은 세상은 대체 무얼까. 똑같은 악몽일까. 반복일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현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