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4. 그때와는 다른 선택 (14/18)

Chapter 14. 그때와는 다른 선택

서현국의 사신들이 여국에 도착한 것은 예정된 열흘보다 빠른 엿새 뒤였다. 말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둥근 바퀴가 달린 수레, 그것도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온 것이라, 여국이 애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북방의 기술이 우수하다고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책에서만 봤던 전차(前車)를 눈앞에서 보게 된 관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서현국에서 환영에 대한 답례로 준비한 철과 무기들 역시 밤에도 번쩍번쩍 빛이 날 만큼 화려했다. 옷차림은 또 어찌나 다른지. 겨울이 와도 비단옷을 고수하는 여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짐승의 털로 만든 겉옷을 걸치고 있으니 이제 막 도착한 사신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납득될 정도였다.

한때는 여국의 속국에 불과했던 서현국이 주변 소국 몇을 통일하더니, 이제는 감히 등허리가 저절로 굽어질 만큼이나 대국이 되어 버렸다. 황궁의 양반들이 너도나도 그들을 보겠다고 까치발을 들면서 궁 안을 바삐 돌았다.

남녀 구분 없이 대등하게 등용한다는 서현국의 소문 역시 사실이었던지 사신의 절반이 여자였다. 만백성이 꿈에서나 그리던 나라가 여국을 방문했으니 민가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황제의 행태 역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데, 차라리 서현국의 국경을 넘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여 관원들이 백성들을 진압하는 소동도 일었으나, 시도는 끊이질 않았다. 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간관들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이 손을 잡아야 할 이웃 나라와 그들이 믿고 따라야 할 황제에 대한 논책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됐다.

한편, 중추관의 관료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상관(上官)들은 황제를 모시고 서현국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제1궁 외명전(外明殿)으로 향했다.

“황제 폐하 납시옵니다.”

조촐한 호령과 함께 황제가 외명전에 입장했다. 그에 따라 삼십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그 앞에 허리를 숙였다. 황제가 착석하자 일제히 고개가 들린다. 그들은 황제의 피폐한 몰골에도 사사로운 언급 없이 준비해온 선물을 선보였다.

“창검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나이다. 검으로는 서현국에서 제일인자가 제작한 흑검(黑劍)이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 특별히 명일(明日) 연회를 마련했으니 편히 즐겨주시게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황제는 고개를 까닥하며 여전히 무릎을 꿇지 않은 사신들을 찬찬히 훑었다. 여인인 자가 자그마치 절반인 십오라. 황제의 시선이 저절로 굴곡진 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태도를 알아차린 환관이 몇 번이나 헛기침하였지만 음흉한 시선이 사라지지 않으니, 난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두 나라의 문화와 제도가 다르기로서니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차리지 못한다니. 황제를 근심하는 내관들의 깊은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 황제의 입에서는 다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짐이 귀인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네.”

이미 한 시진 전에 여국에서 마련한 답례품을 서현국의 서장관(書狀官)에게 건넸다. 황제가 지밀에서 색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외교를 담당하던 관원들이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했던 덕택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선물이라니. 지켜보는 내관들의 등줄기가 오싹했다.

“여국의 사람 천 명을 서현국으로 보낼 것이다. 쓰임은 춘왕(瑃王)에게 맡기도록 하지.”

사신들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칭제(稱帝)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대등한 두 나라가 만났을 때는 칭호를 같게 해야 함이 마땅한 것을. 황제는 저를 ‘짐’으로 자칭한 것으로도 모자라, 서현국의 임금을 두고 ‘왕’이라 호칭하였으니 더 볼 것도 없이 속국 취급을 한 것이다.

그에 참다못한 정사(正使)가 과묵했던 입을 열었다.

“공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순 외명전에 정적이 흘렀다. 내관들의 이마에 땀이 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꿎은 허벅다리를 세게 꼬집었다. 공녀라는 것이 무엇인가. 속국, 혹은 패전국이 모국이나 승전국에 바치는 여자 노예가 아니던가. 그 말을 해석하면 자연스레, 여국이 서현국의 속국이 되어 버리니 입장이 참으로 난처했다.

그러나 황제는 조금 전까지도 약에 취해 있었기에 정사(正使)의 비꼬임을 알아차릴 리가 만무했다. 풀린 두 눈이 어딜 보고 있는지 초점도 맞지 않아 난잡하다. 그런데도 황제의 태도는 총명을 가장하여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은 비단 환관들뿐만이 아니었다.

“남녀 오백 쌍을 말하는 것이라네. 마침 인구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 않은가.”

황제의 대답에 정사(正使)가 굳어진 입가를 간신히 풀었다. 잡곡들만 내어 주기에 단교까지 마음먹고 있나 하였건만, 썩 마음에 드는 답례품이었다.

“궁인들에게 백성들의 외모를 선별하여 차출하도록 하였으니, 조만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추운 산간지대인 북방과 달리, 비교적 따듯한 남방국에서 미인이 잘 난다는 소문이 익히 퍼져 있었다. 또한, 그중에서도 여국이 특별히 우수하니, 사신들의 기대치도 높아져만 갔다. 기분이 좋아진 사신들이 허리를 다시 깊이 숙여 황제에 예를 다하니, 초조해하던 환관들도 겨우 땀을 닦을 수 있었다.

외명전의 인사치레는 수월하게 지나갔다. 고작 남자 노예 한 명을 서현국에 보낼 구실로 생각한 답례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으니 황제의 입지도 바로 섰다. 이제 남은 것은, 십사문책이었다. 황제의 입이 다시 까드득 비틀린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황좌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욕망이 크게 번식해 나갔다.

* * *

삭막했던 궁궐이 분주해지면서 웃음소리가 늘어났다. 특히나 서현국의 사신들이 묵는 별궁에서 들려 오는 궁인들의 목소리가 활기찼다. 문화가 달라서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다 보니, 궁인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화통한 것 같았다. 사사로운 것으로 걸고넘어지는 황가의 사람들과 달리 사신들은 저들을 존중해주니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직 직접 사신들을 마주한 적은 없으나, 혼란스러운 마음에도 은근한 기대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황제가 어제 정오, 남녀 오백 쌍을 답례품으로 하사하겠다고 결정하였으니 그 무리 가운데 수오를 넣을 수 있는 것도 확실해졌다.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더 나은 삶을 선물해 줄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부율을 밀고할 증거를 찾는 것밖에 없었다. 그 후면 수오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죄책감이 나를 계속해서 망설이게 했다.

“공주마마. 오늘 밤 연회에서는 부율 님과 함께 입장하셔야 합니다.”

궁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사신들을 환영하는 황가의 연회가 열린다. 당연하게도 나는 부마의 옆자리에 줄곧 앉아 시간이 가길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일부러 부율을 피해 왔지만, 이제는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마.”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에 마련된 욕탕으로 향한다. 추운 밖과 다르게 안쪽은 뿌옇게 김이 서려 있다. 뜨거운 물에 담그자마자, 팔과 다리를 씻는 궁인들의 손이 분주하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머리카락을 노려보다가, 문득 위를 바라보았다.

겹겹이 쌓아 올린 나무 천장 틈새로 아주 작게, 푸른 하늘이 보였다. 궁궐에 갇힌 몸을 조롱하는 것 같아 아찔하다. 곧,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내가 부율을 버리고도 행복할 수 있을까.

* * *

시간이 흘러, 깨끗했던 하늘에 먹물이 들었다. 푸르스름한 구름이 밤하늘 군데군데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아하니, 주색을 펼치기 가장 적당한 날이리라.

옷차림 역시 연회에 걸맞게 새로이 단장했다. 소의 겉으로 옅은 분홍빛이 도는 배자를 걸치니 안색 역시 화사해 보여 억지로 분을 칠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몸은 가벼웠으나, 다만 머리가 무거웠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후들후들 떨렸다. 의식하지 않고 나아가기를 반복하지만, 누각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벅벅 뛰었다.

잠시 뒤, 멀리서도 뚜렷한 인상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남청빛 머리카락, 단단한 허리와 널찍한 어깨. 장신(長身)의 사내가. 나의 시선을 느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끝은 이미 내게로 향해 있었다.

“공주마마.”

밤중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나긋하다.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좋을 만큼.

“부율…….”

그의 이름을 담자, 그제야 박동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을 따르는 소리 외에는 적막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에 옆에 있던 궁인들도 숨을 죽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짓 없이 참으로 맑은 말이었다. 그는 굳이 손을 내밀어, 나의 걸음을 재촉한다. 덩달아 부끄러워진 나인들이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한 걸음, 또 그다음 한 걸음. 그에게로 가까워질 때마다 돌길을 밟는 발소리가 경쾌하다. 그러다 거리가 좁아졌을 때, 그가 참지 못하고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았다.

“나는 네가 올 때까지 조금도 참지 못하겠구나.”

“아…….”

“어서 내 손을 잡거라.”

끝내 서로의 발끝이 닿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이 아릿하다. 오늘이 마치 마지막일 것만 같아 그의 손을 쉬이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잡으면, 놓아줄 수 있을까.

“…….”

결국은 그를 놓아줄 수 없을 것만 같은데.

“공주마마와 부마 부율 님이 도착하셨나이다.”

닫힌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부터 문이 활짝 열린다. 어둑한 바깥과는 달리 누각 안채에 자리한 조명이 눈부시리만큼 환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본다.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슬퍼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본 미소는 환상이었던 것인지, 그의 입매가 초라하게 닫혀 있다.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줄곧 염려했던 사람은 그가 아닌 수오라는 것을. 같은 궁 안에 살며 그를 일부러 피해 온 것을, 그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내려, 다시 나를 본다. 호박색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그 눈이 내게 호소하는 듯하다.

‘나를 봐다오.’

깊고 깊어, 푹 빠져들 것만 같다. 눈동자 색이 달빛과도 닮아 있어 더욱 아름답다. 우리는 서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쳤다. 그저 조용히 만나지 못했던 날들만큼 서로를 담는다. 준비된 자리에 앉자,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따듯하고 풍만한 느낌이라 더욱 사무친다. 내가 그를 어찌해야 할까. 어찌해야, 이토록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부마는 벌써 공주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때, 황제의 말이 연주되는 선율을 가르고 삐죽 튀어나왔다. 신하들은 웃고, 황후와 빈첩 마저 미소를 띠었다.

“…이리 애틋한 사이니, 서로에게 비밀은 없을 것 같군.”

그러나 황제의 말에서 날카로운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나뿐이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실이 된 마냥 어질어질하다. 황제는 소리를 높여 더 크게 말했다.

“어디 그 비밀 하나. 이 자리에서 말해 보아라. 공주.”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입꼬리는 더욱 세차게 일그러진다. 어느새 가락 소리마저 잠잠해지고, 잔이 부딪치는 소리 역시 멈추었다. 황제가 그 틈에 술잔을 높이 들어 크게 외쳤다.

“혹시 아느냐. 여기 있는 귀인 모두가 놀랄 만한 비밀이면, 내 네게 상을 내릴지.”

모두가 놀랄 만한 비밀. 황제의 말을 들은 서현국 사신들의 눈에도 호기심이 서렸다. 호령 공주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하니 안줏거리로 이보다 더 흥을 돋는 것이 더 있겠으랴. 하지만 농담처럼 받아칠 수 있기는커녕 몸이 얼어붙는 것 같으니 시간이 독처럼 느껴졌다. 한편, 경직된 공주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더욱 쌩쌩하기만 하다.

“긴장하였구나. 정말 큰 비밀이라도 있…….”

“제가 말해 보겠습니다. 폐하.”

웃음소리가 떠들썩한 가운데,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틈 사이를 비집는다. 이제 모두의 눈이 부율에게로 향했다. 내 옆에 강직하게 앉아 있는 그의 옆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황제에게 고했다.

“마마와 저는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약속이라?”

“예. 혼례를 올리기 전 한 약속이니 혼전약조입니다.”

여국의 궁율(宮律)을 모르는 사신들을 제외하고 황가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혼전약조는 주로 황제와 그의 후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궁에서의 자리가 확고한 황후와 달리 후궁은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후처가 되기 전 황제에게서 약조를 받아낸다. 가족들을 위한 고기와 곡식, 혹은 값비싼 패물까지.

부율이 말하는 혼전약조란 그런 것들이었다. 혼인 후 약해질 첩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간청에 가까운 거래. 갑과 을의 위치가 명백한 약속.

“처음 듣는 이야기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둘만의 비밀이었으니까요.”

황제는 언짢은 기색으로 부율을 응시했다. 보는 사람이 있는 만큼 성을 내거나 호통을 칠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음은 분명했다. 반대로 부율은 여유롭게 황가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호기로운 표정에 남몰래 얼굴을 붉히는 후궁들의 모습이 보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고개를 돌렸지만, 잔상은 오래갔다.

“말해 보아라.”

내키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궁금했던 황제는 결국 부율을 재촉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할까. 심장 소리가 점차 커졌다.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목소리가 감미롭다. 눈을 감고 들으면 금세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낮은 목소리. 딱 좋은 울림에 긴장도 점차 풀려간다. 그때, 부율의 손이 내 손목을 타고 올라와, 팔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프다고 신음이 나올 정도의 세기. 입술을 꾹 물고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미소 지었다.

“공주마마는 첩을 들이시지 않을 겁니다.”

정사(正使)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듯 밝아졌다. 안 그래도 후처 제도가 없는 서현국에서 여국을 그동안 불쾌하게 여겼었다는 것을 안다. 그만큼 부율의 발언에 황가의 사람들이 제각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저들끼리의 약속이라면 상관없지만, 연회에서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정치적 발언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거늘. 난처한 귀족들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부율은 거침이 없다.

“또한, 앞으로 마마께서 들르시는 모든 장소는 제게 보고될 겁니다.”

이미 그가 내게 감시를 붙여 놓았다는 것을 아는 내게는, 놀랄 것이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나를 이용해 부율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는 충분히 자극될 만한 이야기였다.

“부마가 투기하고 독점욕을 세우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황제의 입꼬리가 서서히 비틀린다.

“황제가 아니고서야.”

수군거림이 단 한 순간에 멈춰 버린다. 기둥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내관들의 목구멍도 바싹 마른다. 황제의 의도가 뚜렷하다. 새로운 황좌에 부율을 내세우자는 관료들의 외침을 서현국의 사신들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까막눈이 아닌 이상 모두가 알 수밖에 없다. 황제가 부율을 경계하고 있다. 그를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신이 죄를 지었나이다. 폐하.”

부율의 고백에 황제의 두 눈이 커다래진다. 그러나 죄를 지어 처분을 구하는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맑고 담담하다.

“허나 마마께서는 이제 저를 더 따르려고 하니, 제가 황가의 귀중한 것을 빼앗고 말았군요.”

그때, 부율이 고개를 숙여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맞추어진 두 입술이 따듯하고, 부드럽다. 그저 입술만 맞대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곧이어 그의 두툼한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서로의 입술을 빨아들이는 색정적인 소리와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귓가에 계속 남아, 그를 붙잡고 만다. 하지만 곧 끝난 짧은 입맞춤. 황제의 두 눈이 노랗게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인연이란 무릇 하늘이 내린 것이니, 신분의 높고 낮음이 무엇 중하겠습니까.”

모두가 정적을 표하는 틈에서, 정사(正使)가 입을 열었다.

“어여삐 여기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신분이 뚜렷이 나뉘어 있는 이곳 여국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부율 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다. 날짐승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보다도, 숨기는 것이 많이 께름칙한 눈이었다. 황제의 앞에 이리 당돌하게 맞설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새삼 서현국의 힘을 가늠토록 하는 대목이었다.

“…글쎄요.”

부율은 그녀의 말에 잠시 문 쪽을 힐끗했다. 그쪽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돌아본다. 서늘한 눈 밑에 불안감이 서려 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손이 다시 한번 나를 꽉 붙잡는다.

“그렇다고 천한 노비를 마치 정인처럼 가엾게 여기는 것은…….”

“읏…….”

“안 될 것 같은데.”

부율의 커다란 손에 핏줄이 선다. 그에게 붙잡힌 팔이 부스러질 것처럼 비틀린다. 그런데도 그저 신음을 참고 그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다. 가슴이 다시 답답해진다. 몇 번을 죄를 토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봐도, 사라지지 않는다. 죄를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며 괜찮다고 몇 번을 다독였던 것은 나이기에, 변명을 꺼낼 수조차 없다.

“그렇군요. 여국은 아직 노비 제도가 있었지요.”

정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에 사신들이 웃으며 술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쨍하게 부딪히는 술잔들이 어지럽다.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일까. 주변이 전부 빙빙 도는 것처럼 속이 매스꺼웠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는 눈을 감고 여전히 거센 부율의 손힘을 견뎌 낸다.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었다. 감정에 휩싸이고 포기하길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나 가끔 울컥 치밀어 오는 욕심이 괴롭다. 조금 전, 정사가 내뱉은 말이 귓가에 욍욍 울린다.

내가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고, 그가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것들이 현실이 될까. 그 현실이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쳐야 하는 것이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어 나를 쭉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의 말처럼, 그래.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연회는 자정을 넘겨 달이 가장 푸르게 보이는 때에 끝났다. 부율은 궁으로 돌아가는 나를 붙잡아 산책을 권했다. 그와 마주한 것이 오랜만이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인들을 모두 물리고 나를 배연교(配連橋)로 데려갔다. 잔잔했던 호수의 표면이 쌓인 눈으로 얼어 있었다. 그러나 깊은 물길 속에서는 잉어 서너 마리가 짝을 지어 헤엄치고 있다. 달빛이 호수 속을 비추어,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아늑하고 넉넉했다.

“부인.”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 하늘 위의 달처럼 은은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꼭 이렇게 불러 보고 싶었다.”

손이 닿는다. 그의 온도는 싸늘한 날과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뜨거웠다. 따듯한 품속에 안겨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맞은 체온. 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다 그저 그를 받아들인다.

“누룩. 아느냐.”

그가 내게 묻는다. 나를 향하는 눈길이 애처로이 선선하다.

“나는 이제 꿈을 꾸지 않는다.”

“…….”

“너를 만나고 네가 떠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는 자문했다. 답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보고 달빛에 비춘 입술을 욕심낸다. 그의 눈에 열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렇게 내 눈앞에 있는 너는, 너무도 뚜렷한데.”

그의 손끝이 턱 밑을 스쳐 지난다. 간지러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이윽고 그의 손길은 목선을 타고 내려가, 동여맨 저고리 매듭에까지 떨어진다.

“…언젠가 나를 떠나갈 것만 같아 무섭구나.”

그는 매듭을 풀지 않고, 그대로 저고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 젖가슴을 찾았다. 놀라서 뒷걸음질을 쳐보지만, 그는 놓치지 않고 나를 끌어당겼다. 새벽녘 인적이 없는 배연교일지라도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인들이 언제 우리를 찾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추위 속에 단단히 선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

“난간을 잡거라.”

그의 눈이 잠시 배연교로 향한다.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다. 그는 그 순간에서도 내 젖을 놓아주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볼록 튀어나온 정점을 비비고 짓눌러, 결국 내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게 했다.

“다리 벌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내 치마폭을 펼쳤다. 곧바로 속곳이 벗겨지고 찬 공기 밖으로 음모가 드러났다.

“나중에는 털을 다듬어 보지가 더 잘 보이게 할 것이다.”

“아… 읏…….”

그가 손으로 음모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겨우 음핵을 찾았는지 손가락으로 그곳을 문지른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아 보지만, 거칠어지는 숨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혀를 내밀어, 내 음핵을 핥았다.

“웁… 으으……!”

“다리를 벌려야 양옆에 움푹 파인 곳까지 빨아줄 수 있지 않겠느냐.”

“싫어… 싫어요…….”

반사적으로 나온 싫다는 말에, 부율이 미간을 좁혔다.

“보짓살이 푹 젖어 있는데 무엇이 싫다는 것이냐.”

“아… 앙……!”

그가 강제로 내 다리를 벌리고, 혀를 깊숙한 곳까지 집어넣었다. 음핵과 그 옆으로 갈라진 주름까지 축축해져 갔다. 혀가 움직이며 내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수치스러움에 몸이 비비 꼬였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그는 그런 나에게 더 자극을 받아 손가락 하나를 구멍 속에 집어넣었다.

“아아으……!”

끝내 참아 왔던 숨이 토해진다.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신음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부율은 비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내 앞부분을 빨았다.

“음…. 하아, 보짓물이 내 입안으로 뚝뚝 떨어지는구나.”

“읏! 그만… 그만…. 아아!”

이윽고 손가락이 둘로 늘어나, 좁은 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린다. 그는 웃음을 흘렸다.

“그 새끼가 네 보지를 어떻게 빨아 주었는지 말해 보아라.”

그는 보지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휘저으며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가 꾸물거리고만 있자 손마디를 전부 쑤셔 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네 입으로 상세히 고하여라.”

“으흐읏……!”

“그 노예 새끼가 네 더러운 보짓물을 어떻게 게걸스레 빨아 들이켰는지 말이다.”

두꺼운 세 손가락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움직였다. 허벅지 안쪽으로 미끈한 애액이 쉴 틈 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놓치지 않고 끈적한 물을 혀로 닦아 냈다.

“네 닳고 닳은 여기에 혀도 집어넣었느냐. 응?”

그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구멍이 물을 뿜으며 시종 움찔댄다. 나는 몽롱한 의식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아…. 느낌이 너무… 아흐……!”

“그놈이 혀로 속살을 긁어 준 모양이구나.”

“아… 아흑!”

그의 세 손가락이 한꺼번에 구멍 속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두툼한 혀가 질 속으로 들어왔다. 단단히 세운 혀끝이 질 주름을 돌아다니며 예민한 곳을 자극했다. 난간을 붙잡고 쓰러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좀처럼 견딜 수 없었다. 눈이 풀리고 음탕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입안이 온통… 하, 네 보짓물로 가득해.”

“제발… 아으윽!”

“그 새끼도 이 물 보지 맛을 잘 알고 있겠구나.”

감미로웠던 목소리는 어느새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내 아랫배를 꾹 누르며, 혀로 내 소음순을 깊게 빨았다.

“하아…. 아랫배가 따듯해진 것을 보아하니, 좆물을 뿌려줄 때가 된 모양이야.”

나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 그래도 지대가 다른 곳보다 높아 궁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이곳에서 추삽질을 하게 된다면 지나가던 나인들이 알아차릴 수도 있다. 혹은 잠이 오지 않아 밤 산책하러 나가는 궁의 관료들까지도 우리를 볼 것이다. 이곳은 싫었다. 이제는 모두에게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덜덜 떠는 것이 가여워 보이는구나.”

“부, 부율… 님.”

“그런데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 줄도 모르고.”

“아…….”

그의 손이 내 목으로 뻗어 온다. 가늘게 떨리는 내 목을 붙잡고, 그가 내 뒤에 섰다.

“바람을 피운 것이 누구였더라.”

“윽!”

그가 마구잡이로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엉덩이 둔덕 사이로 자지를 끼워 넣었다.

“볼기짝 뒤로 빼.”

“으으…….”

“자지 넣어야지.”

흥분한 그의 음성이 귓가에 깊숙이 박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엉덩이를 뒤로 뺐다. 딱딱하게 선 귀두가 금방이라도 보짓살을 가르고 들어올 것만 같아, 가슴이 뛴다. 그러나 그 아슬아슬한 거리에도 그는 참지 못했다.

“젠장. 어서.”

그가 결국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내 엉덩이를 내리쳤다. 찬 바람에 엉덩이가 오들오들 떨리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엉덩이를 움직여 자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조준했다. 그러자 차가운 자지 끝이 음문에 파묻히며 안쪽으로 쑥쑥 들어왔다.

“아… 으으응!”

“크윽!”

그가 아찔한 신음을 내지르며 본능처럼 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저고리를 뜯어 가슴을 찬 공기 중으로 드러나게 했다. 젖꼭지가 순식간에 딱딱해지고 뭉친다. 그는 바싹 선 젖꼭지를 사정없이 문지르며 자지를 움직였다.

“하아, 윽. 언젠가 관료들에게도 네 젖을 보여 줄 것이다.”

“아… 아아…! 아흑……!”

“이 젖꼭지를 한 번이라도 빨아 보려고 혀를 내미는 자들이 무성하겠지.”

싫다. 싫은데, 그의 굵은 성기에 어쩔 수 없이 늘어지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좋았다. 쾌락이, 모든 것을 지배해 갔다.

“허나 이 젖통은 내 것이다. 네 보지도 네 목구멍도 혀도 전부.”

그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으며 나를 가뒀다. 더 거센 힘으로 자지를 밀어 넣었다. 종이쪽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흩날렸다. 동시에 젖가슴도 갈 방향을 잃고 출렁거렸다.

“흑…! 아흑!”

“하아, 뜨겁게 조이는구나. 잘 풀어진 보지라 그런지 쑥쑥 잘 들어가.”

그의 음모가 엉덩이에 비벼진다. 성기는 질 속을 좌우로 돌아다니며 가장 예민한 곳을 찾으려 아우성이었다. 그러다 어느 한 곳, 중간에 갈고리처럼 불쑥 튀어나온 살점을 꾹꾹 누른다. 고개가 젖혀지고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치모에 엉덩이를 비비며 재촉했다.

“좀 더…. 아아, 더……!”

“크윽. 그리 보채지 않아도……!”

그의 움직임 거세진다. 이제 멈출 수 없었다. 거의 짐승처럼 서로를 탐한다. 다른 이의 시선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격렬했다.

“아, 읏. 보짓속에 이제… 큭, 정액을 뿌려주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것인지조차 흐릿할 때 그가 초조해하며 내게 속삭였다. 그렇게 몇 번 더 성기가 내 안을 들락날락하더니, 이윽고 뿌연 액체를 흩뿌렸다. 걸쭉한 농도의 정액이 뱃속에 가득하다. 그가 나를 돌려세워, 내 입술을 가득 삼켰다.

“…누룩.”

아직도 몸이 달아 있어, 그의 체온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마치 어린 애처럼 보챘다. 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차라리 호수 밑으로 가라앉고 싶다고 청했다.

“오르고 싶은 자리도 오직 너뿐이고.”

그의 입술이 달에 푹 절인 것처럼 달콤하다. 말을 할 때의 목소리도 애절했다. 어떤 것 하나도 빠짐없이 어여쁘지 않은 곳이 없다.

“가지고 싶은 것조차 너뿐이니.”

젖은 몸을 그가 기꺼이 품에 안는다. 그의 어깨너머로 찰랑거리는 호수가 보였다. 얕은 얼음이 깨져있어, 그 안에 담긴 물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날아들었다.

“다시는 너를 잃지 않아.”

작은 얼음 조각들은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결국에는 녹아 사라질까.

“…더 안기거라.”

작게 울리는 음성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가 알고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난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꼭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부율…….”

짙은 어둠이 와주길 바랐건만, 허연 달빛 아래 뜨거워진 두 몸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때, 호숫가의 잔물결이 고즈넉이 남녀를 비춘다. 부율과 나.

바람이 불어, 물결이 더욱 출렁거린다. 흔들린다. 그에 대한 내 마음도, 동시에 흔들렸다.

* * *

부부의 궁으로 마련되어 있던 혜영전에서도, 줄곧 별궁에서만 머물렀던 부율이 그날 처음으로 본궁에 머물렀다. 마치 정말 부부가 된 것처럼 그는 내 이부자리를 덥혔고 넓은 가슴으로 나를 이끌었다.

“좀 더 가까이 오거라.”

“너무 가까워요…….”

나지막이 그에게 불평해 본다. 그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내 코를 약하게 쥐고 뗀다.

“바람이 차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내 마음이 아프니 그렇다.”

능청스레 구는 그를 두고 잠시 표정을 찌푸려 본다. 야외에서 싫다는 나를 붙잡고 제 욕심을 욱여넣은 사람이 한순간에 또 다정히 변하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옳지. 이제 따듯해졌구나.”

그의 품에 폴짝 안기자, 그의 입가가 화사해졌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짧게나마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작은 빛에 의존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아주 작게, 사뿐하다. 나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불필요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짙게 스며드는 죄책감을 간신히 무너뜨리며, 이 순간을 버텨냈다.

“내가 너를 떠나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있느냐.”

“…….”

“없다면, 언젠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다오.”

그가 고개를 숙인다. 코와 코가 맞닿아, 더욱 가까워졌다.

“너는… 슬퍼할까.”

그가 나를 떠나는 것.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줄곧 내 옆에 있었고, 뒤를 돌아보아도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것이 나는 꽤 괴로웠다. 도망치지 못하는 운명에 사무친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나를 떠난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

무덤덤한 가슴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믿기에 그러한 것일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뛰고 있다. 살아 있다. 그가 내 앞에, 여기 이 세상에 있었다.

“나를 위해 울어줄까…….”

그는 자조했다. 생각에 빠진 것처럼 얼굴에 진 그늘이 씁쓸해 보이기까지 하다. 무엇을 고민하는 걸까. 그의 깊은 마음을 알 길이 없어 가슴이 아팠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걸까. 알고 나면, 그의 감정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오늘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구나.”

말이 없는 나를 끌어안고, 그는 읊조렸다. 내 등을 토닥인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치 위로인 것처럼. 그가 나를 위해 대신 아파하고 내 격통을 알아주는 것처럼 순수하다.

“너는 나를 버릴 테지만, 결국 난 꿈에서도 너를 보고 싶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울음에 잠겨있는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아니다.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을 알면 화들짝 놀랄까 두려워진 나는 오늘도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끌어당긴다. 강한 몸으로 언제나 나를 찾아왔다. 안기면 이렇게 따듯할 것을 알기에 서글프다. 나의 정인이 나를 부르는 곳. 그곳으로 향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지만 너는 좋은 꿈만 꾸거라.”

이마 위로 그의 손이 다가와 풀싹 주저앉는다. 환한 달빛에도 그의 손바닥 아래 어둠이 졌다. 포근하고, 잠이 쏟아졌다. 그는 다시 내 등을 두들겼다. 톡, 톡. 아기처럼 잠이 든다. 오랜만에 쉽게 잠에 빠졌다.

* * *

‘…줘.’

누군가 말을 한다. 물 속인 것처럼 주변이 정신없이 윙윙거리는데도, 남자의 목소리만은 뚜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봐줘.’

나는 눈을 떴다. 몸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처럼 시야가 깨끗해진다. 맑아진 두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전혀 달라진 배경. 우리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왜 그렇게 멍해.”

장난스레 그가 내 코끝을 잡아당긴다. 약하게 살짝. 그리고는 다시 놓는다.

“내가 하려는 말, 알고 그러는 거야?”

나는 그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익숙했지만 어딘가 다른 분위기. 그러나 똑같았다. 꿈속일까. 다시 전생을 보고 있는 걸까.

“난 역시 여러 번 생각해봐도…….”

운을 띄운 것은 그였다. 나는 그가 다음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대답할 나의 말도, 알고 있었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

정해져 있는 각본처럼,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금은 놀란 듯 내게서 멀어졌다. 그와 함께 살 수 없어. 그를 놓아줄 수도, 떠날 수도 없다. 이기적인 나는 여전히 똑같은 선택을 한다.

“싫은 거니?”

그가 조금은 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그가 내 손목을 휘어잡는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나보다 더 아플 테니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상처를 외면하고 말 테니까. 그는 나를 벽으로 몰고, 넌더리가 난 듯 이를 갈았다.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그 새끼 때문이지.”

물러날 길 없는 곳에서, 나는 고작 눈을 감는 것으로 회피해 버린다. 다시 물에 잠긴다. 깊게, 깊게 내려간다. 이윽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가 사라졌다. 안심한다. 그러다가, 환한 빛이 내 이마 위로 내리쬐었다. 눈이 부셔, 눈을 뜰 수밖에 없다. 아침이 왔다. 나는 다시 돌아왔다.

아니,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하아…. 하아…….”

온몸이 땀에 젖어, 불쾌했다. 몸을 일으켜 옆을 바라봤다. 그가 있었다. 내 옆에 곤히 잠들고 있는 그는 내가 일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아…….”

나는 그때에도 그와 함께 있었다. 언제나 그 옆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꿈꿨다. 더 설레는 것. 더 달콤한 것을 좇으며 그를 밀어내는 것에 바빴다. 그러면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어.

“아… 일어난 것이냐.”

그가 조금씩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찬찬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깨끗한 얼굴. 짙은 선. 늠름한 생김새가 여전하다. 여전히 나의 연인. 나의 옆자리. 나의 것.

“…….”

그러나 이제는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 *

내전의 등불이 모두 꺼지고, 오로지 길목을 비추는 횃불만이 빛을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현국의 사신들이 입궁한 지도 어느덧 사 일이 지났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던 용장군의 무관들도 점점 순찰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이 연은 그 틈을 타, 정사(正使)와 만났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반겼고, 자신의 거소로 안내했다. 이윽고 방 안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조심스러워, 그녀는 문 앞으로 얇은 비단을 펼쳤다. 바깥에서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도록 그렇게 그들을 감추었다.

“보내주신 서한은 춘왕께도 전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연은 눈앞의 정사를 꼼꼼히 살폈다. 다부지다기보다는 유연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만 같은 칙사였다. 올곧고 밝은 기운이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자신이 믿고 섬기는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조건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만나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걸까. 이 연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황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라.”

이 연의 질문에 그녀의 입꼬리가 사선으로 올라갔다.

“황제라는 칭호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이죠.”

이 연의 이마에 땀 줄기가 흐른다. 긴장한 그에 반해, 정사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춘왕께서도 다행히, 우리와 같은 생각이십니다.”

그녀는 담뱃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습하고 들이마시자 연초가 자작하게 타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은 금세 아득한 연기로 가득해진다. 익숙지 않은 독한 담배 향에 이 연이 몇 번 헛기침한다. 그러나 향기에 익숙해지고 매웠던 향이 은은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사수(射手)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수라면…….”

“화승총을 잘 다루는 자입니다.”

이 연의 입이 벌어진다. 화승총이라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무기였다. 간혹 서현국에서 들어오는 그림으로 작게나마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국은 절대 서현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 아찔한 힘의 격차를 직접 듣자, 이 연의 어깨가 굳어져 갔다. 그녀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손에 땀이 배어났다.

“춘왕께서는 봄이 돌아오는 때, 칭제를 발표하실 겁니다.”

연초는 어느새 절반 이상 타들어 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새하얀 연기도 점점 짙어져 간다. 숨을 토해낼 때마다 열기가 함께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늘 아래 두 명의 황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칭제를 포기하시길 바라시는 겁니까.”

“네. 춘왕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반역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씁쓸한 조건이었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아직은 두 나라의 힘이 각기 다른 곳에서 뛰어나나, 결국 무기와 이동 수단에서 여국을 훌쩍 뛰어넘은 서현국에 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전쟁을 해 보았자, 굶주리고 피를 보는 자는 백성들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약한 무기를 들고 나라를 대신하여 싸워야 하는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 이 연은 눈을 감았다. 답은 정해져 있다. 부율은 기꺼이 칭제를 포기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연은 물었다. 그녀와 손을 잡으면 가장 큰 아군을 얻게 되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위험이 따랐다. 아직 인구 문제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서현국인 만큼, 전쟁에는 예민했다. 만약 황제가 이 상황을 눈치채고 전쟁이라도 선포한다면, 그녀로서도 궁지에 몰린다.

그래서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자칫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상황이 생긴다면 뒤로 물러날 것이 뻔하니까.

“기다리십시오.”

담뱃대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계획은 모두 머릿속에 있었다. 그녀가 춘왕의 허락에 따라 사신들 틈 속에 명사수를 끼워 넣은 것도, 답례품이라고 하고 궤짝 속에 화승총을 숨겨 온 것도 전부 계획대로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주군을 황제로 만들어 줄 부율과 이 연은,

“지금부터는 말을 가장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누구도 믿어서도,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이제 궁 안에 있는 자들은 두 무리에 불과하다. 현 황제를 따르는 자와 새로운 임금을 만드는 자. 그러나 누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는 여전히 비밀스럽다. 그렇기에 확실히 피를 보기 전까지 부율은 부율 그 자신만 믿어야 하고 계속해서 서로를 의심해야만 한다.

“밤은 짧습니다.”

그녀는 나직이 소리를 읊었다.

“그러니 해가 뜨면 최선을 다해 숨으십시오.”

곧 자그맣게 흔들리고 있던 등불이 완전히 꺼지고, 비단 천이 곱게 접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서현국의 사신들이 궁에 머문 지 어느덧 닷새였다. 색색이 고운 음식, 다채로운 향기가 수라간을 쉴 새 없이 채웠고, 후원에는 언제나 삼삼오오 사람이 있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라도 온 듯 활기찼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풍경과 웃음소리들.

부율은 그런 내 곁에 다가와 소리 없이 허리를 감쌌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우리는 다른 온도였다. 하지만 살결이 맞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같아진다.

“오늘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갈 곳이요…….”

나는 얕게 그의 말을 반복했다. 부율은 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게 했다. 애가 타듯이 눈빛이 서글프다. 입을 맞추려는 듯 턱을 당겨보지만, 내가 피할 것을 알고 그는 잠시 뒤 손을 뗐다. 그러다 나를 본다. 언제나 그랬듯, 따듯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의 소매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은 짧고, 의미는 없었다. 나를 데려가는 곳이 어디인지,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게 단조롭게, 그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그는 땅거미가 올라오는 밤이 되어서야 나를 밖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 빠르다. 주변을 지나치게 살피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가 사람이 없는 길로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곳이다.”

나는 눈을 크게 컸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어 선 곳은 서현국의 사신들이 묵고 있는 궁궐 앞이었다. 여전히 조용했다. 정리된 것 같이 깨끗한 길 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밤길을 미리 막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부율을 바라봤다. 그가 나를 데리고 온 이유. 이제 하나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율 님.”

그때, 궁 문을 열고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연회에서 본 남자였다. 날카로운 인상, 고집스레 휘어진 입매, 다부진 몸. 그리고 그을린 듯한 피부까지. 문관이라기보다 무관이 어울릴 듯한 남자는 역관의 위치로 입궁한 자였다.

“이쪽입니다.”

남자는 우리 둘을 은밀히 궁 안으로 안내했다. 부율의 숨소리가 사뭇 가팔랐다. 좀처럼 침착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지, 내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남자를 따라가 들어간 방안은 노란 등불로 환했다. 안석(案席)에 앉자, 남자는 가장 먼저 나를 눈으로 흘겼다.

“…결국 데려오셨군요.”

그는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꺼림칙한 눈치였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내 아내는 믿어도 된다.”

“아내, 라.”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가 날 보며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황제로부터 어떤 제안을 들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나는 눈을 피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비소했다.

“재미있군.”

남자는 팔걸이에 기대어 몸을 비스듬히 했다. 그의 눈이 나를 훑는다. 부율은 남자의 시선이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유난히 뜨거웠던 탓일까, 얼굴이 붉어져 갔다. 놓아주었으면 하는데, 살결이 계속 달라붙는다.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여 본다.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이 연에게 들었다. 계획이 있다면서.”

“…예. 그 이야기를 전해 드리기 위해서 오늘 부율 님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투명해져 갔다. 내게도 보일 만큼 선명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눈을 돌리고, 등불을 바라봤다. 내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 하지만 황제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이었다. 자유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한 이유는 무얼까.

“말해 보아라.”

“허나 그 전에…….”

남자의 눈초리가 끈질기게 나를 좇아왔다. 나는 침을 삼켰다.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초조하다.

“저 여자를 믿을 수 있는지 시험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남자는 손목까지 내려온 소매를 위로 걷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부율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이 올라갔다.

“어떤 시험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여인의 마음이란 무릇 몸이 달아오르면 진실을 말하는 법입니다.”

남자의 눈이 내 가슴에 닿았다. 크게 부풀어 올라, 비단으로도 가릴 수 없는 젖가슴을 몇 번이고 노려본다. 이윽고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보여 주시지요.”

그저 객기에 불과한 한 것일지 모른다. 나를 데려온 부율에 대한 저항심에서였을까. 그러나 부율은 남자를 향해 비웃을 뿐, 내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뜨겁게 조여 온다. 그러다가, 허리에 있던 손이 점차 옆 가슴으로 올라왔다.

“사내 역시 몸이 들뜨면 입이 가벼워지지.”

부율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느새 커다란 손이 내 젖가슴을 쥐고 있었다. 약하게 반항해보지만, 그는 나를 꽉 붙들고 하찮아할 뿐이었다.

“나는 내 아내를 괴롭힐 것이니…….”

그가 내 젖꼭지를 가볍게 튕겼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남자의 목울대도 밑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어디 그 가벼워진 입으로 말해 보아라.”

싫었다. 또다시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부율은 작은 반항조차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양손으로 내 젖을 바득 쥐었다.

“흐윽……!”

“꼭지가 얼마나 섰는지 궁금하구나.”

부율은 겨우 가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모조리 끌어 내려, 남자의 앞에 내 젖가슴을 보였다. 크게 출렁거리는 젖을 보는 남자의 눈에 동요가 보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날짜는 열흘 뒤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공기가 이렇게 더웠을까.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다리가 축 늘어졌다. 부율은 아예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뒤, 손으로 젖꼭지를 집었다. 그리고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내듯 양 젖꼭지를 쭉쭉 잡아당겼다.

“아흐으응……!”

“열흘 뒤면 사절단들이 돌아가는 날이로구나.”

부율은 몸을 배배 꼬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말투로 읊조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정반대로 더욱 난폭해져만 갔다.

“하윽…! 싫… 아아……!”

부율의 손안에서 젖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남자가 연신 그 젖통을 바라봤다. 오로지 우유를 흘리기 위해 존재하는 암소처럼 젖이 이리저리 휘둘린다. 두 남자에게, 전부 다 보여 지고 있다.

“황제가 호위를 물리고 내전에서 나오는 건 그때뿐이니까요.”

남자는 자세를 고쳐 더 편안하게 앉았다. 이윽고 도포로 가려져 있던 남자의 다리 사이가 보였다. 천이 빠듯하게 울어져 있다. 귀두 모양으로 볼록했다.

“시간은?”

부율은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답을 기다리기는커녕 벌린 입술로 내 젖꼭지를 물었다. 할짝거리며 마른 젖을 침으로 적셨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벌벌 떨었다. 손가락이 볼품없이 쭈뼛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신음했다.

“흐… 으읏… 응…….”

“시간은…….”

남자는 뜸을 들이며 젖이 빨리는 광경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나는 남자의 눈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흰 벽에 남자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가 가랑이 사이를 내놓고 은근히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 것도, 전부 다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남자의 말에 부율이 내 치마를 걷어 올렸다. 말려볼 새도 없이 남자의 앞에서 속곳이 드러나고 말았다.

“제발 그만……!”

나는 부율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이대로는 전부를 보이게 되고 만다. 하지만 부율은 단호한 입술로 나를 혼냈다. 이를 세워 젖꼭지를 자근자근 씹었다. 내가 아픔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내 속곳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 헉!”

“많이도 젖었구나.”

부율이 손을 꺼내 남자의 앞에 젖은 손가락을 보였다. 남자는 감탄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리 물이 많은 여인은 처음 봅니다.”

제발 보지 말아줘. 필사적으로 손을 허우적대며 음부를 가려보지만 이미 속곳은 부율의 손에 걸려 있었다. 가릴만한 것이 없었다. 상체를 숙여 젖가슴이 안 보이게 해 보지만, 남자는 뱀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내 몸을 쳐다봤다.

“아내분이 부끄러움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날 보며 비웃었다. 부율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꽃이 핀 나를 보며, 음탕한 숨을 내쉰다.

“시간은… 정오입니다.”

그때, 부율의 손이 내 엉덩이 밑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기를 다루는 듯이 나를 그의 무릎에 눕히고, 내 다리를 억지로 벌렸다.

“화승총을 다룰 줄 아는 것이냐.”

차가운 질문과는 다르게 부율의 자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숨소리도 퍽 거칠었다. 그러다 그의 긴 손가락 하나가 보지 속에 들어왔다. 푸욱 박히는 소리와 함께 물이 찰랑거렸다.

“하으으읏……!”

“백발을 쏘면 구십 구 발은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얕은 곳을 희롱하던 손가락이 점차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러다 곧 마룻바닥에 물이 툭툭 튀었다.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로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몇 개를 넣으면 꽉 찰 것으로 보이냐.”

부율의 짓궂은 물음에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 둘… 펴낸다. 곧 네 손가락이 펴졌다.

“넷은 넣어야 우물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웃었다. 좌우로 쫙 벌려진 내 두 다리를 보며 열기 띤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보지 속에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오고, 다시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는 호숫가를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팔딱였다. 그러나 그 가여운 모습도 부율에게는 어여쁘게 보였던 걸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달랜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곧바로 네 번째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허… 윽……!”

“쉬이. 견디거라.”

부율은 일부러 모았던 손가락을 하나둘 펴내며, 보지 구멍을 넓혔다. 아랫배가 뜨거워지며 음부가 얼얼했다. 남자는 아예 자세를 틀어 내 보지를 자세히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싫어. 보지 마. 손을 뻗어 너덜너덜해진 소음순을 가려보려 하지만, 그때마다 부율이 내 귓불을 씹었다. 앙칼진 신음이 터져 나온다. 두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또다시 푹, 푹 손가락이 들어온다. 뒤로 조금 빠졌다 싶으면 또 깊숙이 박히며 내 안을 휘저었다. 부율은 그렇게 한참 동안 날 가지고 놀다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자세히 계획을 말하거라.”

“으음…….”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내 보지를 응시한다. 부율의 손가락에 달라붙어, 끈덕지게 늘어지는 붉은 속살을 보며 여전히 감탄을 놓지 못한다.

“아직… 아내분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보지 속에 손가락들은 쉬지 않고 내 안을 파고든다. 그때 부율의 중지가 돋아나 있는 돌기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자지러지며 침을 질질 흘렸다.

“으… 흐윽… 아흐윽…….”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침을 흘리며 절정을 맛보고 있는 내게 싸늘한 시선을 던진다. 벌레 보듯 우습게 보는 듯한 눈초리였지만 그만큼 발정 난 얼굴이었다. 자신의 커진 자지를 침이 나오는 입 구멍에 박아 넣어 철저하게 숨구멍을 막아 버리고 싶어 했다.

“…저는 이 여인이 얼마만큼 부율 님의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부율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며 찰박거리는 젖은 보지를 가볍게 때렸다. 벌어진 보지는 다물 생각을 안 하고 두꺼운 것을 기다렸다. 자지를, 먹고 싶어 했다. 추잡하고 더러운 감각이었다.

“저 여자는 당신을 위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습니까?”

“…….”

부율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바라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어지지 않는 쓸쓸함이 있었다. 공감할 수 없는 무언가. 그가 나를 바라지만 나는 그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이 눈동자에서도 보였다. 정적은 칼처럼 무서웠다. 온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찬 공기가 방안을 배회했다. 갈 곳 없이 머무르며 부율을 점점 미치게 했다.

“글쎄….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을까. 너는.”

차가운 손이 내 입술을 매만진다. 두려웠다. 다정한 얼굴이 아닌, 다시 광인의 얼굴을 하는 부율은 전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나를 낮잡아 봤다.

“내가 네게 명령하면, 저자의 자지도 삼킬 수 있겠느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가 내게 묻는 말이, 그저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어떤 의미도 없이 나를 떠보기 위한 말이라는 것도. 하지만 좀처럼 침착해지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어째서?

“…저는.”

나는 어째서, 그의 말에 반발하고 싶은 걸까. 다른 사람의 것은 싫다고. 그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너를 믿길 바라면 저자의 자지를 입에 물어라.”

그와 어떤 마음으로 몸을 섞었던 것일까.

“싫어요…….”

힘없는 말이 흘러나온다. 더 크고 확실하게 그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사랑을… 해서?

“변덕이 심하구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부율.”

그제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너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아…….”

“네가 갔던 곳을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가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향했는지. 그리고 내 마음이 어디까지 어떻게 기울었는지. 가슴이 조여 왔다. 죄책감은 짙어지고 그를 보는 시야가 금세 눈물로 흐릿해졌다.

“정말 빌려주실 겁니까. 아끼던 것이 아니셨습니까.”

남자는 실실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굳혔다. 발기된 남자의 물건이 더욱 천장 위로 솟아오른다. 처음 보는 남자의 것을… 삼키라고. 그런 건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부율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부율이 내 턱을 아프도록 쥔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버림받은 기분이 드는 걸까.

“이리 오십시오. 부인.”

부율은 나를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코끝에 남자의 성기가 닿았다. 그는 바지를 끌어 내려 맨 살덩이를 꺼냈다. 구릿빛 피부색과 같은 가무잡잡한 성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아…. 좋은 냄새.”

남자는 내 머리카락을 쥐고 코로 향기를 흡입했다. 허리를 움직여 내 팔뚝에 성기를 문지르기도 했다. 나는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참고 부율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무표정으로 이 모든 행위를 전부,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아… 싫, 하윽!”

무자비한 손길이 내 뒤통수를 가득 쥔다. 근육이 잔뜩 붙은 커다란 팔뚝이 아래로 짓누르자, 더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곧추선 자지 끝에 입술이 닿았다. 계속 버티며 입술을 꽉 다물어 봤지만, 남자가 내 목덜미를 쥐고 꽉 누르는 탓에 입이 자꾸만 벌어졌다. 싫다. 나는 고개를 저어가며 끝까지 저항했다.

“싫어……!”

“하아, 젠장.”

남자가 욕지기를 뱉고 나를 놓아줬을 때였다. 갑자기 부율이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커다란 몸이 내 뒤를 완전히 덮쳤다. 엎드린 자세로 신음을 뱉는데, 부율의 손이 내 엉덩이로 올라왔다.

“이 여자가 얼마나 내 것인지 알고 싶다고 했느냐.”

“아……!”

바지 매듭이 풀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 가 소음순에 굵은 성기가 닿았다. 앞으로 기어 부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남자의 농익은 성기가 눈앞에 있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손쓸 새도 없이 부율이 내 볼기짝을 벌리고 발기한 남근을 욱여넣었다.

“똑똑히 보여 주지.”

“하으윽……!”

부율의 성난 움직임에 남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곧 남자가 자신의 물건을 잡고 스스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퉁퉁 부어오른 내 엉덩이에 가 있었다. 수치스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소리가 줄곧 따라다녔다. 남자의 헐떡이는 신음이 역겨우리만큼 노골적이었다.

“으, 크윽…. 하, 윽.”

부율은 뒤에서 내 젖을 쥐고,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살점이 끈덕지게 그의 기둥에 달라붙었다. 그의 것이 전부 다 나가 구멍 안이 텅 빌 때면, 물이 새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 점점 방의 공기가 더워져 갔다. 숨이 모자랐고, 자꾸만 갈증이 났다. 그런 나를 알아차린 걸까. 부율이 내 고개를 억지로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우웁……!”

“하아…. 입 벌려.”

거친 추삽질과는 다르게 그의 혀는 부드러웠다. 갈증 난 입안이 폭 적시어진다. 나는 그의 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핥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그와 단둘이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나를 안아주고 있는 것이 그저 기쁘기만 하여, 몸이 실컷 달아오른다.

“넌… 나의 것이다.”

“아흐응… 아, 흐읏……!”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

부율은 가볍게 내 목을 쥐고, 더 거칠게 박아 넣었다. 피가 머리끝으로 몰려 이젠 이곳이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계까지 도달했다. 나는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쾌락의 정점까지 가버렸을 때, 남자도 힘차게 정액을 내뿜었다. 그중 일부가 내 머리카락에 들러붙었다. 낯선 정액 냄새에 참담해진다.

“크윽!”

곧이어 보지 속에도 부율의 정액이 흩뿌려졌다. 온몸이 남자들의 씨물에 의해 더럽혀지는 감각. 나는 풀린 눈으로 부율을 바라봤다. 그는 나를 끌어안아 내 머리카락에 묻은 정액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내 몸을 닦아 주었다. 나는 선뜻 그에게 내 온몸을 맡길 뿐이다. 이런 건 이상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처럼 나를 통제한다.

“…과연 잘 알았습니다.”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선뜻 미소를 흘린다. 그는 너저분해진 바지를 끌어 올려 몸을 단정히 했다.

“열흘 뒤 정오입니다. 궤짝에 담긴 답례품 속에 총기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건넬 때 제가 그곳에 숨어 있다가 발사할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저와 정사(正使), 그리고 부율 님과 이 연, 이 외에는 부인밖에 없습니다.”

“좋다.”

부율은 내게 옷을 입히며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남자에게 알렸다. 머릿속이 온통 몽롱하고 온몸이 젖어 있다. 흥분했던 것일까. 혹은 그저 끔찍한 시간에 불과했던 걸까. 확실한 것은, 아팠던 가슴이 잊히지 않는다. 그 아릿한 감정.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강렬한 감정에서 나는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누룩.”

문밖을 나서며, 부율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네게 묻지 못했던 말이 있다.”

뜨거웠던 몸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싸늘해지는 것인지. 혹은 그의 매서운 시선에 주눅 들어 차가워지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는 나를 끌어안아, 외간 남자의 향이 묻은 내 몸을 빨아 들이킨다. 자신의 불뚝 튀어나온 성기를 내 아랫배에 비비면서, 질투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단순히 미친 것일 뿐일까. 하지만 나직한 목소리에 묻어 나온 분노를, 나를 드디어 알아차렸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의 어깨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날리고 있었다. 내 맨살에도 툭툭 떨어진다. 정말 눈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눈물일까.

“…….”

“나를 사랑하느냐. 누룩.”

처절하게, 그가 묻는다. 비로소,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공포 속에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나를 잃을까, 혹여 내가 떠날까 전전긍긍하며 나를 눈에서 떼어 내지 못하였던 두려움. 그리고 흘러넘치는 사랑이 끝내 보답받지 못할 것이라는 고독. 그 순간, 나는 울컥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듣고 싶구나. 너는…….”

나보다도 훨씬 커다란 몸이 소리 없이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이곳에 쓰러져,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할 것 같은 어린아이처럼 휘청거린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안아도 안아도, 그저 잠시 버티는 것일 뿐 그를 완전히 감싸줄 수는 없었다.

“나를 떠나려 하는 것이냐.”

그의 물음에, 순식간에 머릿속에 이야기들이 감돌았다. 내가 들은 이야기들, 말들, 목소리들. 흩날리는 눈처럼 하나같이 흩어져, 나를 괴롭게만 한다. 황제의 커다랗고 희번덕거리는 눈이. 나를 기다리며 애타게 사랑을 말하는 정인의 눈이. 그리고…….

여기 내 앞에 서,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의 눈이 나를 재촉한다.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어?

“저는…….”

그때, 크게 바람이 불었다. 목소리가 잠기고, 내뱉으려는 말이 덩어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들었을까.

“…….”

부율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눈이 쌓이기 전에, 그리고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꼭꼭 숨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서로에게 말이 없었다. 누구도 다시 그 말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지금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진실일까 봐.

* * *

혜영전 본궁에 대사헌 선정이 찾아왔다. 궁녀들이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환관들도 그 앞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령 공주와 대사헌의 관계를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수군거렸다.

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이유. 나조차도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괜히 쭈뼛한다. 이윽고 방안에 그가 들어서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지난밤, 그에 대한 나쁜 악몽을 꿨었기 때문일까. 가슴이 답답하고, 불쾌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러나 손끝이 짜릿하고 아랫도리가 젖어 들어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를 앞에 두고 불온한 상상을 한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부율과 드디어 합방하였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건넨 첫마디는 부율에 관한 것이었다. 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귀까지 벌게지는 것 같다. 몸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아, 네…….”

“불편한 건 없으십니까. 따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율과 한 방에 같이 지내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으레 부부라면 모두가 하는 것을 할 뿐이니까. 그러나 나를 살피는 아버지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매섭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착각해버릴 것 같이.

“매일 밤 비명이 난다고 들어, 이 아비는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시뻘게진 두 뺨을 가리려 하였다. 매일 밤 비명이 난다는 말이 어떤 것인 줄 알고 내게 하시는 말일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그럼 다행입니다.”

다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려고 하여도, 나를 시종 감시하는 듯한 그의 눈길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사춘기 소녀처럼 아버지의 커다란 몸을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문관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고 계십니까.”

“문관… 이라면.”

“사헌부의 집책실(集策室)입니다.”

그곳은 십사문책이 행해지는 곳이었다. 황제의 행실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실책을 비판하여 규탄하는 것. 황제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온갖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곳.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두려움이 세간에 보이면 보일수록 그가 내게 건넨 달콤한 제안을 들킬 것만 같아 아슬아슬했다. 어리석게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고민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누구도 몰랐으면 바랐다.

“아마도 황제는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겁니다.”

“…….”

목이 탔다. 그 포악한 황제가 정말 황좌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황제가 내게 한 제안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시야가 아득해져 갔다.

“결과는 대탄 쪽으로 기울 것이고, 그리되면 황제도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그 시기가 봄이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를. 왜 하필 나여야만 했는지. 그리고 부율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지 않으면, 아버지의 눈이 섬뜩하게 보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서웠다. 이제는 사헌부를 지휘하는 대사헌이 된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라에 소란이 일면,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따님.”

“…….”

“입궁한 서현국의 사신들이 가장 노리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나는 부율과 이 연을 머릿속에 그렸다.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은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현국의 정사와 사수를 이용해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다. 사건을 계기로 혼란스러워진 여국을 서현국의 춘왕이 돌보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부율이 황좌, 아니 왕좌에 오를 것이다. 칭제를 포기하는 대신 부율이 얻는 것은 여국의 전부였다. 거둬들이는 곡식들은 모두 그의 지휘 아래 관리될 것이고 여국의 모든 백성이 그의 발아래에 무릎 꿇을 것이다.

그 대가는, 서현국의 사신들이 노리는 것. 여국의 최고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조차 알지 못하는데, 아버지 앞에서 솔직해질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 없었다. 왜일까.

“대국인 여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결국은 통일을 이룰 속셈입니다.”

아버지의 담담한 말은 내 귓가에 가시가 돋친 듯 뚜렷하게 들렸다. 잃는 것이 무엇이고, 얻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하다. 황좌를 노리는 손들에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무엇일까. 그 날카롭게 선명한 두 눈이 그가 또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국이 서현국에 먹히기 전에, 나라의 기강을 단단히 하고 반격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숨결이 들릴 만큼 가깝다. 나는 떨리는 두 손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르팍을 세게 쥐어야 했다. 익숙지 않은 거리. 그러나 꿈에서 본 것처럼 너무도 분명하다. 내 몸이 그에게 발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더러운 욕정이, 그 악몽에서만큼이나 커다랬다.

“이 아비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눈빛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린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고, 그가 맹수처럼 나를 응시했다. 무서웠다. 곧바로 잡아 먹힐 것만 같이,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다.

“황제가 따님을 찾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는 내 앞에 앉아,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내 두 손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나를 구속한다. 거리는 아까보다 더 좁혀졌다. 입술과 입술이 닿을 것처럼 위태롭다. 그의 눈이 내 입술로 향했다.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다시 뒤로 물러섰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아비에게 털어놓으십시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들어오고, 나를 어루만진다. 아버지가 딸에게 할 수 있을 법한 행동에도, 아찔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궁지에 몰린 작은 짐승처럼 커다란 그의 몸을 애타게 쳐다보기만 한다. 이제 그만…. 더는 견디기 힘들다고 애원한다.

“아버지…….”

입술이 바싹 말랐다. 머릿속에 파묻힌 생각들이 고통스럽게 섞인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어째서 알아야만 하는지 반발하고 싶다. 벗어나고 싶고, 혼자이기에 잔인했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알고서도, 나를 놓아주는 걸까.

혹은 내가 덫에 걸려들기까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따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떠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내쉬어졌다. 가팔랐던 호흡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려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망설이는 것일까.

나는, 정말 이곳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 * *

그날 밤, 부율은 새벽이 되기 무섭게 바깥으로 향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계획을 완벽히 하기 위해 발걸음이 바쁘다는 것도. 나는 찬 공기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스며든 달빛에 의존해 옷을 갈아입고 신을 갈아신었다. 혼자가 된 지금에서야 수오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단지 그뿐인데, 죄를 짓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아, 하아…….”

누가 볼까 두려워 걸음이 빨라졌다. 어젯밤 바깥에서 비틀어져 있는 그를 스쳐 지나가듯 보았지만, 그 거무스레한 상처들이 잊히지 않는다. 무서웠다. 그가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를 곧 잃을 것만 같아서 초조했다. 하지만 오늘 낮에 황제가 그를 추비관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부율의 죄를 고하지 않는 나를 보며, 그가 수오와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겠다고 은밀히 속삭인 결과였다.

수오를 볼 수 있다. 그를 만나, 우리는 사랑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 그저 피하고 싶을 만치 고통스럽다.

나는 곧 추비관의 문을 열었다. 어떤 온기도 없이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수오의 인영이 보인다. 그가 비틀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상처를 치료받은 것인지 몸에서 독한 약초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깨끗하다. 나는 그를 품에 안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여야만 했다. 그는 말없이 내 등을 꽉 끌어안는다. 다른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던 이 풍족한 마음이, 곧 저무는 달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더욱 애절했다.

“누룩…….”

그는 추위에 떠는 내 두 팔을 잡고, 나를 그의 품에 담았다. 온기가 전부 다 전해질 리가 만무한데도, 작은 따듯함마저 소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지 서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영영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에게는 모르는 답이 내게 있는데 나는 그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하는 말이 사실이냐.”

그가 묻는다. 황제가 그에게 서현국으로의 이주를 약속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궁을 나가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럼… 나와 함께 가는 것이냐.”

“…….”

그는 서현국으로 가, 이곳에서의 자취를 지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그런 그를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답이 느려진다. 부율을… 그의 계획을 밀고해야만 가능한 미래였다.

“수오…. 나는…….”

그때, 수오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고, 뒤이어 혀가 들어온다. 향이 짙다. 익숙했고 내가 바랐던 단 한 가지였다.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더 강렬하게 몸을 부딪쳤다. 수오는 그런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었고 조심스러웠다. 이 순간이 우리의 처음인 것처럼, 한없이 다정하게.

“괜찮아.”

곧 몸이 떨어지고, 그는 나를 달랬다. 눈에 고인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내 손을 잡았다. 내가 아는 수오였다. 처음 낯선 집에 와 불안해하는 나를 보살펴 주었던 수오. 그 깨끗하고 맑은 아이가 계속 내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달라진 게 없음을 실감한다. 그때와 똑같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이, 나는 그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내 눈앞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그의 그림자에도,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다.”

“수오…….”

“기다릴 겁니다. 아기씨.”

다시 그의 입술이 나를 찾았다. 등 뒤로 벽이 닿았다. 그와 나 둘이서 하나가 된 것처럼 붙여진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를 더 몰아세워,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벽에 붙는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눈은 생기를 되찾았다. 달아오른 그의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한참을 말없이 탐색하다가,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각오하십시오.”

나는 예전보다 가늘어진 그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내 귓가에 머문다. 그는 속삭였다. 청아하고 구슬픈 목소리. 나를 휘두르는 유일한 음조.

“다시 만났을 때는 영원히 내게서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수오를 바라봤다. 푸른 눈빛에 더는 슬픔이 없다. 욕망에 치우친 아슬아슬한 죄목이 그의 몸에 새겨져 있다. 다시 나를 얽매어 온다. 죄어 온다. 여전히 까마득했다. 나는 이 순간을 묻는다. 가슴 깊이 새기고 기억한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그를 전부 가지기에는 내게 남은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 * *

십사문책의 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튿날 뒤면 관료들의 상소문이 줄을 이을 것이다. 대론하고 규탄한다. 황제의 측근들을 막론하고 백성들마저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서현국의 사절단도 제 나라로 돌아가, 여국의 현실을 춘왕에게 보고하겠지. 황제는 무너질 것이다. 새로운 황제를 찾는 목소리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버틸 수 있을까. 새것을 향해 빗발치는 아우성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제는 발악하고 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나를 이용해 전세를 역전시킬 방법만을 궁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새로운 황제. 부율을 향한 관료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그대로 부숴버릴 묘책을.

“왔느냐.”

연회가 열렸다. 아주 작은 연회였다. 호연 유명 기루의 기생들과 창부들을 모아 황제는 나를 불렀다. 벙어리 금 내관이 어지러이 놓인 술잔을 한쪽으로 치운다. 지금 이 장소에서 나오는 말이 기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기대하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이기도 했다. 내 입을 열고, 그의 자리를 보전할 유일한 만찬이었다.

“마시거라.”

내 옆에 앉은 창부가 술잔에 청주를 부었다. 코끝을 쏘는 향이 독하다.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의 눈이 줄곧 내 손끝으로 향해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성… 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그 쓴 술을 한 번에 들이부었다. 금세 기침이 나왔다. 창부는 재빨리 손수건을 펼쳐 내 입가를 닦았다. 약하게 밀쳐 보지만, 손길은 여전히 색스러웠다.

“성월아.”

황제는 기생의 이름을 다정히도 불렀다. 나신의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벌렸다. 황제는 기뻐하며 그녀의 정리된 음모를 매만졌다. 이윽고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응, 폐하…….”

그녀를 따라 껄떡이며 발기하는 황제의 성기가 역겨웠다. 헛구역질을 삼키기 위해 눈앞의 술잔을 들었다. 곧 창부가 내 무릎 위로 손을 얹어온다.

“공주마마. 기쁘게 해드리겠나이다.”

나는 그의 손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바라는 것이 이런 거였을까. 내가 그와 함께 쾌락에 빠져 무심코 부율의 죄를 말하는 것을?

“즐겨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주.”

황제가 거부하는 날 보며 비웃는다. 그러면서 수염 자국이 난 턱을 기생의 음부에 들이밀었다. 거친 턱이 물을 뿜는 보지에 비벼진다. 여인은 연신 성은이 망극하다며 꺄르르 웃었다. 듣기 싫은 음탕한 소리. 그러나 귀를 막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하아, 하아…….”

일각도 지나지 않아 황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엇 하느냐. 공주를 벗기지 않고.”

황제의 명에 쭈뼛하던 창부가 내 팔목을 쥐었다. 그를 재차 밀치지만, 이번에는 힘이 달랐다. 끈덕지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어이 매듭이 풀리고, 커다란 손에 허리가 잡힌다.

“마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이 옆구리를 오르락내리락 희롱했다. 술기운이 돌아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데, 갑작스러운 애무에 의식이 까마득해져 갔다.

“즐기거라. 정인이 너를 완전히 잡아먹기 전에.”

나는 황제를 노려보았다. 흐려지려는 시야를 가까스로 바르게 하여, 그가 앉아 있는 황좌를 두 눈에 담았다. 휘황찬란하지만 곧 시들어버릴 금붙이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한 시진 뒤, 서현국으로 갈 첫 번째 하사품이 옮겨질 것이다.”

황제는 따가운 내 눈초리를 반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눈이 동그랗게 휘어졌다. 그가 말하는 하사품이라는 것이 결국 수오를 뜻하리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믐달이 뜨는 내일이면, 네 정인은 서현국에 있겠지.”

“…….”

황제는 여인을 내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무거운 걸음걸이마다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수오가 정말 이곳을 떠난다. 드디어 자유가 되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서현국에서 살아갈 것이다. 가슴이 설레었다. 줄곧 그의 행복을 빌었고, 불행해 보이는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내 탓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짧은 순간, 그의 미소를 기억 속에서 꺼낼 수 있었다. 아름다워. 하지만 앞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선택은 하였느냐.”

황제의 물음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무도 몰래 품어 왔던 마음이 있다. 갈팡질팡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도 유난히 떠오르던 의문이 있었다. 나는 선택을 내리면서 끊임없이 의심했다. 옳은 결정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꿈을 꾸어 과거에 내가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 알게 되면 한결 편해질 수 있을까. 그때 내린 선택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나는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얼굴에 고민이 가득하구나.”

“폐하…….”

“허나 걱정하지 말아라.”

아이를 달래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황제의 말이 다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바로 내 앞에 있다. 나를 마주 보고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기꺼이 그 고민을 덜어 주겠노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황제의 저의를 가늠하려고 애를 쓰지만 읽히지 않았다.

그때,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을 앞세웠다.

“네 정인에게 독약을 먹였다.”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리 원망치 말아라. 해독약이 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켜 눈앞의 황제를 붙잡았다. 그의 소매를 끌어당겨 애타는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수오에게,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에게 그저 농락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내게 거짓을 약조한 것일까. 수오를 보내 주겠다고, 수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여봐라. 가져오너라.”

황제는 큰 소리로 기둥 뒤에 있던 금 내관을 불렀다. 그는 다소 불편한 걸음으로, 어기적거리며 황제에게 다다랐다. 이윽고 품 안에 있던 유리병을 황제에게 건넸다.

“이것이 해독약이다.”

황제의 손에 들려있는 유리병 속에, 감청색 액체가 넘실대고 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황제에게서 유리병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지 앉아서 나를 응시한다. 눈이 벌게져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나를, 진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닷새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허나 그 뒤에는…….”

“…….”

“피를 토하고 죽겠지.”

담담한 어조였다. 그저 벌레를 죽이는 것보다 간단한 것처럼, 아무 거리낌이 없는 말투였다. 그래서 더 거짓처럼 느껴지는 걸까. 유리병 속에 쏟아질 듯 한가득 출렁거리는 물이 정말 해독약일까. 아니. 애초에 황제가 수오에게 독약을 먹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해독약은 그거 하나뿐이니 잘 간직하거라.”

“어째서…….”

황제는 나를 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금 내관에게 명해 중제연의 문의 걸쇠를 단단히 잠그게 시켰다.

그 두꺼운 잠금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황제가 내게 원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은 한 시진 뒤에 열릴 것이다.”

그는 기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녀의 음부를 벌리고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창부도 어느새 내 허리를 다시 감쌌다.

“그동안은 마음껏 먹고, 즐겨도 된다.”

창부의 손은 뱀처럼 내 치마 속에 들어와, 마른 속살을 휘저었다. 움찔하며 저항해 보지만, 손목이 금세 사내의 손에 잡혀 버린다. 황제는 우뚝 솟은 성기를 기생에게 박았다. 허릿짓이 요란하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섬뜩한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긴다. 나는 팔을 뻗어 문 쪽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면 문관에 가서 고하거라.”

손이 문고리에 닿기도 전에, 창부가 나를 끌어당겼다. 점점 멀어져 갔다. 한 시진 후면, 수오가 궁을 떠날 텐데. 이 해독약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궁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부율이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낱낱이, 말이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 * *

“헉, 헉…….”

중제연의 문이 열린 것은 정확히 선발대가 하사품을 들고 떠난 한 시진 뒤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외명전을 찾았다. 하지만 선발대로 뽑힌 사신들은 이미 궁을 빠져나가고 난 뒤였다. 수오는 궁궐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끼워져, 서현국으로 가고 있을 테였다. 황제가 말한 시간은 오로지 닷새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독이 그의 온몸에 퍼져, 장기가 망가지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손에 든 해독약을 바라본다. 수오에게 전해야만 한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에게 자유를 찾아 주고, 행복하게 해 주어야 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수오…….”

욕심을 부려본다. 혹시나 하는, 막막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런데도 나의 욕심대로 전부를 가질 수 없었다. 나는 허상을 보았다. 꿈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조차 헛된 것을 쫓았다. 그것이 얼마나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원해왔었는지.

눈을 감았다. 다시 시야가 검게 흐려졌다. 줄곧 피해 왔던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어둠 속에 숨어 그때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건 공포였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끝없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가야 할 곳으로 걸었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극락의 BL 소설 [본편]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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