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수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궁녀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움찔거리는 어깨와 그녀의 손가락이 더불어 맞닿는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내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떠들썩한 웃음소리도, 술상에 겹쳐지는 술잔 부딪히는 소리도. 지금 이 순간, 모든 게 믿어지지 않는다. 수오가 내 앞에 있다. 이건 꿈일까.
변한 것이 없어. 처음부터 그는, 항상 내 앞에 서면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어느 것 하나도, 입술 색 하나까지 내가 알던 그인데.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뼈마디조차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크기 그대로인데.
“죽은 것이 아니었더냐…….”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찌하여 네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수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우리는 제자리를 찾은 듯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줄곧 쓸쓸하기만 하였던 가락지가 그의 피부에 덮여 따듯한 온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애틋한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밖에서 소란이 나기 시작했다. 침입이 시작된 것이다. 곧 이 연이 들이닥치고 나를 바깥으로 끌어낼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살육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수오도 마찬가지였다.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수오…….”
내가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도, 그는 내 두 손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반정을 막을 방법. 문득, 가슴팍에 묻어 놓았던 은장도가 떠올랐다.
“…….”
침입이 일어나기 전에, 소란을 만들면 곧 들이닥칠 일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율에게까지 전해질 만큼 커다란 소동. 그를 포기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가 아끼는 것을 부수는 것에 있었다.
“공주마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궁녀들이 하나둘 곁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겉섶을 벗어 밑가슴 아래에 있는 은장도를 꺼내 모두에게 보였다.
“공주마마! 어찌……!”
술잔을 기울이던 양반들이 그대로 멈추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적막이 깨지며 소란이 일었다.
“공주마마! 위험하옵니다!”
“누가 좀 어서 말리시게!”
“아니 되옵니다, 공주마마! 멈춰주시옵소서!”
칼집을 뽑고 시퍼런 날을 손목에 가져다 댔다. 안쪽에서 나는 궁녀들의 비명을 눈치챈 이 연이 옥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의 다급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었다.
“공주마마!”
일자로 그어진 상처로 피가 금방 솟구쳤다. 잔으로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내 피였다. 적주보다 더 새빨간 것이 잔과 그 주변 음식으로 뚝뚝 떨어져 흐른다. 그러나 그 끔찍한 광경이 익숙한 장면인 것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충분히, 깊게 그었을까. 이 모든 것을 멈출 수 있을 만큼, 깊숙이? 깨어나면 그 답을 알까. 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 살점을 지혈하는 남자가 보였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수오를 다시 만나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부율은 오율궁에서 황제의 친좌(親座)에 앉아 관료들을 바라봤다. 거나하게 취한 인물들이 있고, 그 와중에 수를 짜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모두 한결같이 준비된 여인들을 탐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 든 것은 제각기였다. 이중 누가 선정의 연통을 받았을까. 사배(賜杯)가 오가는 와중에도 부율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때, 자시를 울리는 황종(皇鐘)이 울렸다. 부율은 긴장한 눈빛으로 내관들을 살폈다. 환관 용우영이 편문(便門)을 열면 애첩 소월의가 황제를 모시고 데려갈 것이다. 마비산이 들어간 술을 거푸 열댓 잔씩 마셔댄 황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내전으로 향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삼문이 동시에 닫히고 연회가 열린 세 곳에서 피바람이 불 것이다.
부율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궁 밖으로 나갔을 때, 곧 연궁부터 엄문(掩門)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연궁의 포진을 알리는 봉화가 보이지 않는다. 창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바깥 상황을 돌아봐도, 폭풍전야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이 연의 휘하에서 작전이 실패했을 리가 없다. 그리 굳게 믿고 있는 부율조차도, 반 시진이 지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황제는 내전 안으로 들어가, 몽롱해지는 약 기운을 느낄 무렵이었다. 그때가 되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어의를 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장군 서 철휘가 닦아 놓은 그 길 위에서, 선정의 지시로 무언가 다른 변수가 생기게 된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부율 그 자신의 안전 역시 장담할 수는 없었다.
“헉, 헉……!”
그런데 그때였다. 열린 금문 사이로 뛰어오는 환관 셋이 보였다. 부율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무슨 일이십니까. 태감.”
모두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태감 채춘은 오늘 연회에서 연궁을 관리하기로 한 환관이었다. 부율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곳도 아니고, 누룩이 있는 연궁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부율의 손과 다리가 무너질 것처럼 휘청했다.
“공주마마께서 크게 다치셨네!”
쿵.
채춘의 말과 동시에 부율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런 부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오율궁 대신들도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채춘은 이미 어의가 연궁에 들었다 하였지만, 부율의 귀에 그런 소식들이 들릴 리가 없었다. 이 연은 어디 있는 걸까. 부율이 혼란을 가다듬지 못하는 동안, 대신들이 채춘에게 물었다.
“어찌 다치신 겐가?”
“그것이…….”
이어지는 채춘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는 양반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해 갔다. 부율의 표정이 완전히 굳는다. 가쁜 상황 속에서 그런 부율의 변화를 눈치챈 대신들은 한 명도 없었으나, 부율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안쪽에서부터 부스러진다. 그가 계획한 모든 일들, 모반을 꿰었던 최초의 이유까지. 그의 마음이 죽을 것처럼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비키거라.”
낯선 음성이 채춘의 위로 드리워진다. 그때, 채춘의 옆에 있던 다른 환관들이 슬며시 문 뒤로 비켜섰다. 주변 시선에 의해 그제야 위를 올려다본 채춘의 어깨가 뒤로 넘어갔다. 내일이면 부마도위에 오를 부율이 그의 앞에 서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새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보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부율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버텨냈다. 부율은 그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공주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삼문은 닫히지 않았으며 봉화 역시 켜지지 않았다. 역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의관으로 급히 향하는 부율의 바쁜 발걸음에 정해진 시간이 어그러지며 새벽빛이 찾아왔다. 아침이 찾아올 동안 황궁의 관료들은 긴장한 채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 * *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줄곧 알고 있던 향기. 그리워했던 살결, 그 피부에 잠시나마 입술을 맞추면, 볼을 비비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 있어.’
그가 말한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서로의 옆을 지킬 것이다. 그만큼 원망도 깊어진다. 내가 보고 있는 만큼 그 역시 보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서로 같은 곳을 보고 있고,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했다. 지독하게 반대의 감정이 깊게 뻗쳤다.
‘도망가지 마.’
그러니까, 그가 경고한다. 이미 감정에 베어 버린 정도만큼이나 도망갈 곳은 없으리라고.
‘여길 봐.’
바라본 그의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숨을 알고 있다. 그가 작게 내쉬는 한숨조차 알고 있는데, 나는 그를 모른다. 그의 얼굴을.
‘…아.’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였을까. 내가 품었던 마음은 누구에게로 향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뒤를 돌아본다. 한없이 길게 늘어져 있는 어둠이 나를 삼킬까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가보지 않은 길에 호기심이 일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둠이 가시기 전에,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서로를 품에 안기 전까지 나는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을까. 답답한 가슴이 찢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 깨어날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다른 이야기를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너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너를 괴롭히는 것처럼.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때,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부르는 소리일까.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며칠씩이나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것처럼 갈증이 났다.
“…아, 읏.”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사납게 긁혀져 나왔다. 소리를 내려 할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그만큼 물이 절실했다. 그 순간,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다가 입술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물을 적신 수건이었다.
“어,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축축이 젖은 물수건 아래로 맑은 이슬이 떨어진다. 나는 물을 삼키며 갈증을 해소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궁녀와 남자가 들어왔다.
“공주마마. 눈을 뜨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렵게 눈을 떠 앞을 보자, 백포(白布)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내의원에서 온 어의였다. 궁녀가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있는 동안, 그는 내 앞에 앉아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잔무늬들이 아른거리던 눈앞이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그는 잠시 뒤 내 손목을 가져다 진맥을 짚었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제야 궁녀의 숨이 가벼워진다.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던 걸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주마마. 기억이 나시옵니까.”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손목을 긋기 전 마지막 순간, 내가 본 얼굴을 확신할 수 없었다. 헛것을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내가 본 것이 정녕 그였을까.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바싹 일렁이다가 금세 사라지기라도 한 듯, 애가 탔다.
“며칠이 지났나요.”
“아…. 닷새이옵니다. 공주마마.”
닷새. 나는 궁녀의 도움을 받아 안침(安枕)에 기대어 앉았다. 바깥이 조용했다. 선선해지기 시작한 저녁 즈음이었다. 결국, 반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이곳 연궁에 그 어떤 피비린내도 진동하지 않았다.
“혼례는 미뤄졌습니다. 마마께서 회복하신 뒤에…….”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왜였을까. 그녀의 입술이 잠시 떨리다가 꾹 다물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폐하로부터 기별이 있으실 겁니다.”
그 옆에 있던 어의가 그녀의 말을 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공주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방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허황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쓸쓸하게 비어 있는 네 번째 손마디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옥가락지가 사라졌다. 대신 손목이 하얀 면포로 싸매어져 있었다. 여러 겹으로 꽁꽁 싸매어진 면포 안에 붉은 자국이 보이는 걸 보니, 얼마나 피를 쏟았는지 알 수 있었다. 충분히 깊이 베었구나. 희미한 만족감을 뒤로하고,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연회에 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사대부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아니요.”
나는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이불을 쥐어 잡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추비관에서 온 노비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시전에서 사무(私貿) 한 노예들 말씀입니까.”
“네.”
정말 그였을까. 확신을 얻기 전까지 다시 기대를 품고 싶지 않았다. 울컥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꿋꿋이 참고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연궁에서 있었던 일로… 현재 전원 추비관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
살아 있다. 수오가, 이곳 황궁에 있다.
“연궁에 있던 노예들도…….”
“네. 추비관에 한 명도 빠짐없이 감금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뛰었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그가 발을 내디디면 닿을 거리에 나와 함께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그간 내 안에서 곪아 있던 이 죄책감을 전부 다 없앨 수 있을까.
“…공주마마.”
그때, 상기되어 있는 내 얼굴을 알아차린 궁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새벽이 되면 은밀히 그곳을 드나드는 자가 있다고 하옵니다.”
그녀가 고하는 말이 사실인지 어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윽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가냘프던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면 문빗장이 열려 있을 것이고 감시하는 자들도 잠이 들어 있을 겁니다.”
수오를 만날 수 있다. 그를 만나면 이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안개가 잔뜩 낀 하늘에 노을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는 저녁 무렵이었다. 엉망으로 칠해진 눈이 다시 희망을 좇기 시작했다.
* * *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여서는 아니 되고 발걸음을 늦추는 비단옷은 고이 접어 두어야 했다. 대신 얇은 무명을 걸치고 쓰개치마를 그 위에 뒤집어썼다. 늘어져 있는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목도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발목이 가벼웠다. 한 발짝씩 내딛을수록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어서,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과 그 향내를 맡고 품에 안아 나의 수오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떨리는 마음으로 뛰어왔을 터인데 막상 추비관의 문이 보이자 몸이 어기적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다 말라 꾹 다물어도 아랫입술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얼어 있었다. 몸이 차갑고 손끝이 아렸다. 저 안에 수오가 있다. 근데 왜.
“…….”
설마 나는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차마 문고리를 열 힘이 없었다. 궁녀의 말대로 문빗장이 열려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도 거처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나는 억지로 손을 재촉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제멋대로 꺾이고 뒤로 빠지길 여러 번, 드디어 추비관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공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고왔던 새벽의 찬 공기에서 자욱한 안개로. 그만큼 알 수 없는 향내가 관내에 퍼져 있었다.
“아, 으…, 핫…….”
“헉…. 헉…….”
가까이서 남녀의 신음이 들려 왔다. 나는 어지러운 몸을 간신히 벽까지 끌고 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시야가 점차 빛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동공이 커지며 시야가 넓어졌고, 그사이에 희미하게 껄떡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둘, 셋… 아니, 자그마치 열 명이 넘는.
“나으리… 아, 흐윽!”
“헉, 헉. 씹년. 입 닥치거라.”
“살려 주세요. 나리. 제발, 아흑!”
“더 벌려. 보지 구멍 주제에! 씹.”
“아아악!”
나는 소리가 새어 나오려고 하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뒤로 물러났다. 추비관의 방은 이보다 더 많았다. 아마 여기저기서 들려 나오는 신음 역시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이리라. 노예로 팔려 온 여자들과 적삼을 두른 관료들이 바닥에 넓적이 누워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액 냄새와 땀 냄새가 한데 뒤섞인 불쾌한 향이었다.
“네 년들은 보지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는 줄 알아라. 크윽. 어차피 죄인인 것을.”
“흑, 흐윽…! 저는 아무 짓도…!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존귀하신 마마께서 스스로 손목을 그었겠느냐? 이런 썩을 년이!”
짝. 짝. 짝.
휘날리는 매질의 뒤를 이어 처절한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곳은 짐승들의 소굴이었을까.
“헉, 헉. 똥구멍도 구멍이라고 제법 먹을 만 하구나.”
“나리, 윽. 윽!”
손이 턱, 바닥을 날카롭게 스치며 떨어졌다. 이 방에서 들리는 남녀의 신음과 다른 소리가 우연히 귓가에 들어왔다. 그건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남자가 남자를 범하는, 질척이는 교합의 소리였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참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떨려 말을 듣지 않았다. 이곳을 나가야 했다. 다시는 끔찍한 광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미온한 죄악감이 움직이는 발걸음을 조여 오는 것 같았지만, 떠나는 움직임을 완전히 옭아맬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시 문고리를 잡는데, 잔인하게도 그가 떠올랐다.
눈물이 덜컥 차올랐다. 무서웠다. 그 역시 이토록 끔찍한 공간에서 지내 왔던 것일까. 나 때문에, 내가 한 선택으로 그들이 벌을 받는 만큼 나의 수오 역시 이곳에서…….
손이 문고리를 떠나, 다시 벽을 짚는다. 수오를 구해야 한다. 이성을 잃고 노비들을 강간하는 것들로부터 그를 지켜야 한다. 궁실 문을 전부 다 열어 보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유난히 조용한 방앞에 서서 숨을 죽였다.
“읏…….”
이곳에 그가 있다면, 나는 과거와 달리 도망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아끼는 것을 잃는 그 처참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아도 될까. 겁쟁이 같은 생각이 여린 몸을 크게 뒤흔드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체를 확인하려는 찰나, 단단한 팔에 의해 몸이 으그러지며 그 안에 갇힌다.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남자의 입꼬리가 빛 쪽으로 당겨 올라갔다.
“많이 늦었구나.”
달이 등잔 밑으로 들어가 아주 희미한 빛밖에 남지 않은 밤하늘. 우리는 아주 낮은 달빛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헐레벌떡 그를 껴안고 흐느꼈다. 정말 그였다. 수오였다.
“수오 님……!”
그를 이제 무어라 불러야 할까. 혹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고 헛된 상상을 품은 지 벌써 1년이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나는 다시 그의 종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귀속되어 그가 하는 명령이면 무엇이든 따르는 맹종의 여인으로. 그의 앞에서는 풀 하나 함부로 꺾지 못하는 나약한 생명으로.
그의 품은 차가웠다. 하지만 생자의 체온이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온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필사적으로 그에게 안겼다. 꿈은 아니겠지. 이곳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지옥인 것은 아니겠지.
“그동안 너무 많이…….”
감정이 북받쳐 올라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슬픔이 목구멍을 턱하고 가로막는 것 같았다. 분명 기쁨이 섞여 있을진대, 눈물을 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살아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토록 그리운 것을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도 내 마음과 같을까. 나를 그리워했을까.
나는 충혈 되어 울긋불긋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마지막에 우리가 나누었던 그 애틋한 시선을 다시 실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의 눈이 어두웠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울분이 가득했다.
“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를 품에 안고 보듬어 줄 줄 알았던 눈이 전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 광기가 나의 빗장뼈를 스치고 있다는 것을 왜 뒤늦게 깨달은 걸까.
“아윽!”
그 서늘한 눈이 내 어깨에 파묻히더니, 그대로 이를 내어 나를 깨어 물었다. 그의 사나운 숨결이 가까이서 들렸다. 바닥에 누워 약에 취해 간음하는 남자처럼, 흥분에 젖어 있었다.
“누야.”
그의 손이 내 배꼽 위로 올라오더니 금세 통통하게 오른 젖가슴을 쥐어짠다. 고통에 신음하자 그가 파리하게 웃었다. 한낱 꿈틀거리는 벌레를 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필 몸이 동할 때 찾아오다니 너도 참 운이 없는 계집년이로구나.”
“그게 무슨…….”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그가 튀어나온 앞섶을 내 배에 문질렀다. 커져 있었다. 천을 뚫고 나올 듯이 그의 성기가 이미 우람해져 있었다.
“어째서…….”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줄곧 바라보는데, 그의 손이 어느새 내 옷 속으로 쑥 들어왔다. 차가운 손이 내 젖꼭지를 매만졌다. 젖살에 파묻혀 있던 꼭지가 대뜸 솟아오른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톱으로 있는 힘껏 긁었다.
“아……!”
관료들이 피운 향내 때문일까. 그래서 그의 눈이 매서워 보였던 걸까. 쌓여 있는 흥분을 풀기 위해서?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을 것을.”
그가 비소했다.
“네가 살아 있을 거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 바보 같아.”
원망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버렸다고. 불길 속에서 저를 혼자 내버려 두었다고.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다시 멀어진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세게 당겼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머리카락이 전부 뽑힐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의 증오 어린 눈빛에 가슴이 뜯긴다. 수오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한참 노려보다가 나를 벽으로 밀쳤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아픔보다도 그의 몸에 닿을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 괴로웠다.
“그때는 도망가려 했던 것이냐.”
풀린 매듭 위로 커다란 귀두가 튕겨 올라왔다. 맑은 선액이 요도 밖으로 철철 흘렀다. 그는 기둥을 잡고 축축한 끝을 내 배꼽 아래에 문질렀다.
“그래서 손목을 그은 것이냐.”
치마가 거친 손에 의해 올라간다. 그는 마른 소음순을 가르며 성기를 욱여넣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숨 한 번 내쉬지 못하고 그렇게 남근이 내 안을 찢었다.
“아으… 으윽!”
여린 살점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귀두가 끝까지 들어온다. 그는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아무런 표정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그에게 붙잡힌 허벅지가 벽과 부딪혀 폭력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제법 큰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들려 오는 난교의 소리에 파묻힌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저 성욕에 눈이 멀어 부푼 성기를 구멍에 박아 넣는, 그런 무의미한 동작을.
“흑…! 악……!”
그는 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엉덩이를 쥐고 귀두를 삽입했다. 갈고리 같은 그것이 여린 살점을 모조리 긁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 냈다. 그의 단단한 복근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쯧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세게 쳤다. 살점이 휘청거릴 정도로 아픈 매질이었다.
“아흑!”
이건 사람이 아니라 들짐승이었다. 그가 시선을 피하는 내 턱을 붙잡고 서서히 목을 조여 왔다. 더는 반항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제야 울컥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를 그리워했음에도 기억을 잊고 싶었던 이유.
나는 아직도 그를 원망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만……!”
손이 그의 뺨을 날카롭게 스쳤다. 네가 밉다. 함께 할 수 있는 정성스러운 시간을 전부 엉망으로 해쳐 놓은 네가 참 미웠다. 몸을 파는 것으로 나를 기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네가 미웠다. 그런데 왜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 네 눈에 흐르는 눈물처럼 왜 맑고 선명할까.
“하하하…….”
그의 웃는 얼굴이 처참하다 못해 일그러졌다.
“그 눈빛.”
내 안에서 그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숨이 막혔다. 그에게 잡힌 목덜미가 점점 싸늘해져 간다. 쫙 벌려진 구멍은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역시 넌 날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
그의 힘줄이 울긋불긋 더 험악해져 간다. 살기 위해 벌려진 입이 우스웠다. 그는 울부짖는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자궁 밑까지 성기를 박았다.
“아, 욱… 아, 아…악!”
거친 벽에 부딪힌 허벅지에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렀다. 그는 핏물을 손에 묻히더니 그대로 내 입술에 손을 집어넣었다. 역한 피비린내와 그의 물이 뒤섞인 더러운 맛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기를 움직였다. 착, 착. 흥분으로 커다랗게 부푼 음낭이 구멍 밑을 때렸다.
“아, 아악… 흑!”
날카롭게 선 이빨이 흔들리는 젖을 아득 깨문다. 잇자국만큼 피가 맺힌다. 그는 그조차 핥으며 내 젖꼭지를 씹었다. 욕망이 일었다. 나는 성기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더, 더 안쪽으로. 가지 마. 나를 떠나지 마.
“…천박한 년.”
그의 눈이 번뜩였다. 움직이지 말아야 했을 것을.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그가 나를 바닥에 깔아뭉갰다. 그렇게 벌어진 엉덩이 틈새로 몇 번이고 성기를 문지르더니 보지 속으로 그의 귀두가 쏙하고 들어왔다. 뼈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엉망으로 들려 왔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올라온 목선을 혀로 핥았다.
“아흑! 아! 악……!”
“이 헐거워진 보지를 꿰매 다시 작게 만들어야 할까.”
“싫…! 아… 학!”
“딴 새끼가 들락날락했을 더러운 보지 구멍이지 않으냐.”
낄낄 웃는 그의 음성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몸은 미칠 듯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를 갖고 싶어 안달했다. 좀 더 깊숙이 이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이런 내가 미친 것일까. 그를 내 것으로 가두고 싶다. 고통은 쾌락이 되어간다. 내가 그에게 사로잡혀 있는 만큼이나.
하지만 그는 손을 뻗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내 손을 짓이기고 뒤에서 무참히 범할 뿐이었다.
“하, 으…… 으읏……!”
“더 조여. 시시하구나.”
내 안을 가득 침범하는 두꺼운 흉기와 다르게 그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오줌 줄기처럼 선액이 질질 흘러 질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숨을 가다듬고 조용히 나를 흘겼다.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절정에 다다르는 몸뚱이가 혐오스러웠다.
“…그래.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그가 내 엉덩이를 찰싹 휘갈기더니 허리를 들게 했다. 천장 위로 솟은 엉덩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의 앞에서 덜덜 떨렸다. 가여운 마음이라도 들면 멈추어줄까 싶어 보지 구멍을 벌름거리는데,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이제 더는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빡빡하기만 한데 그가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진창을 구르며 별의별 것을 보았지.”
“자, 잠깐…….”
“여자의 구멍은 남자의 것과 달리 주먹 하나가 다 들어가더구나.”
오싹한 소름이 전율처럼 스쳤다.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바닥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눈치를 챈 그가 내 뒤통수를 억세게 눌렀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목에 감긴 면포가 거추장스러운 사슬이 되어 관절 마디마디를 구속했다.
그러는 동안, 네 번째 손가락이 질구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최대한 손을 나란히 해 내 구멍을 벌리는 것에 집중했다. 끔찍한 형벌 속에서 그가 드디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했다. 깨끗하고 화려했던 미소. 그러나 나의 그리웠던 정인의 모습을 닮은 그는 악령의 눈을 하고 있다.
“그놈 자지가 아무렴 주먹보다 크진 않았을 진데.”
“아, 안 돼… 헉……!”
“무엇을 더 쑤셔 박았길래 이리 넓어질까.”
그가 기어이 손가락을 모으며 손허리뼈까지 구멍 속에 집어넣었다. 절로 비명이 나오고 눈물이 터졌다. 어떻게든 빼내어 보려 허리를 비틀어 보지만, 오히려 탄력을 받아 손이 쑥쑥 나갔다 들어왔다.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이었다. 작열하는 것처럼 뜨거웠고 하복부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의 아랫도리는 흥분해 껄떡대며 침을 질질 흘렀다.
“차라리 그놈 목적이 네 몸이었다면 나았을 것을.”
“수, 수오… 님, 제발……!”
“그런 것이었다면 구멍을 헐게 해 영영 쓰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의 손이 살점 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쑥하고 빠져나간다. 붉은 속살이 그의 피부에 찰싹 붙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짙은 어둠이었다. 달빛조차 그림자를 피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헉… 아으으읏…….”
의식이 아주 잠시 끊기고 만다. 소리가 웅웅 울리고, 최음의 향기가 더는 나지 않았던 짧은 시간. 하지만 수오는 기절한 나를 깨우기 위해 뱀처럼 내 몸을 탔다. 축축한 혀가 젖꼭지를 간질이고, 깊게 빨아 들이킨다. 허리 아래가 얼얼해 어떤 것도 자극이 될 수 없었는데, 그가 내 몸 위를 올라탄 사실만으로 눈이 떠졌다. 다시 들어온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알싸하고 뜨거운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순간, 집착하는 자는 누구일까. 처참한 분노마저 저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렇다면 가장 미친 자는 우리 둘 중 누가 될까.
“나를 보아라.”
“하아…. 하아…….”
정면에서 마주친 두 눈은 전부 노여움으로 그득하다. 똑같은 감정이다. 우리는 서로를 안달 난 것처럼 노려봤다. 그건 절정의 표정이었고 혐오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 조용한 틈새를 타고 입술이 열렸다.
“왜… 왜 그랬어요…….”
주변의 서성이는 신음이 저물어 가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빛이 새면 이곳을 나가야 한다. 음에 취한 양반들조차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훑어볼 시간대였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어야 했다.
“왜… 내게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내가 그를 원망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납치하고 종노릇을 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를 만나길 간절하다가도 무서워진 이유는 나를 상처 준 그가 밉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랐잖아.”
“…….”
“나도 수오… 너와 같은 걸 원했을 뿐인데.”
처음부터 그를 줄곧 원해왔다. 열두 살에 낯선 집에 들어와, 눈치를 보며 날마다 주눅 들어 살아야 했던 나는 유일하게 반짝이는 그를 선망했다. 그런데 왜.
“나는 한 번도… 네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어.”
담벼락 밑에서 울부짖는 소년의 틀어진 얼굴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화향관에서 발견한 그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처가, 아직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가 탄다. 내가 너를 보듬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그 지옥으로부터 너를 구해낼 수 없었다는 악몽이 계속 나를 좇아왔다. 그건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허탈함, 나를 두고 다른 것을 선택했다는 배신감. 그럼에도 소유하고 싶은 연정.
결국,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는 것을, 그의 눈에 비친 나를 보고 깨닫는다.
“…….”
그가 멈칫한다. 다문 입술이 열리고, 숨을 깊게 들이킨다. 흔들리고 있었다. 원망에 잠겼던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잠시 있던 혼동은 금세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가 말했다.
“아기씨…….”
나는 그 말에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가슴에 묻었다. 우리는 돌아왔다. 예전으로. 하지만 이미 커져 버린 몸은 욕망에 일어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언젠가 사그라들 수 있을까. 그러나 언제나 해가 지면 다시 짐승의 몸이 된다.
그때, 추비관에도 해가 밀려 들어왔다. 밀회의 시간은 끝이 났다. 낮이 되면 우리는 각자가 낯선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서문편전(西門便殿).
“공주가 의식을 되찾았다고.”
나른한 음조는 황제의 입에서 나는 물음이었다. 그에 정 청지 환관이 꿀꺽 침을 삼켰다. 공주가 쓰러지고 닷새 동안 온 조정 안에서 음침한 소문이 들렸다. 공주가 황제의 고문으로 미쳤다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할 정도로 심신이 상했다느니. 황제와 관련되지 않은 소문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노예 중 정인을 발견해 혼례를 늦추기 위해서라는 괴상한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에 감금되다시피 생활해온 공주였기에 관료들은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가 왜 손목을 그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궁녀들 역시 최대한 쉬쉬하고 있으니 진실을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의식은 찾았으나… 아직 어떤 말씀도 없으신 상태입니다.”
황제는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크게 한숨 쉬었다.
“미친년 하나 때문에 계획이 전부 어긋나는구나.”
“소, 소신의 충이 부족하여 미처 공주마마를…….”
“되었다. 가장 빨리 혼례를 올릴 수 있는 날짜가 어찌 되느냐.”
황제는 발목을 까닥거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최근 들어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정이 흉흉하고 민가 역시 살려 달라는 비조가 나오니, 태평성대는커녕 망국지음(亡國之音)이 파다했다. 어서 부율을 부마도위에 올려 황제로서 입지를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을, 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불만을 쏟는 대신들의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조정이 들썩이고 있사오니 달포는 기다리는 것이…….”
“달포? 지금 네 정녕 나와 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주,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달포씩이나? 황제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때까지 고아인 계집을 계속 연궁에 넣어 두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혼례를 올리면 가장 남문과 가까운 구석진 신방을 내어 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혼례를 강행하자니 고관대작들의 상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술원성 역시 제 아들이 미친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소문만큼은 꺼릴 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했다.
“일삭(一朔)이 지나기 전에 혼례를 준비하여라. 그리고…….”
“예. 하명 하시옵소서, 폐하.”
“그년한테 배정한 궁녀들은 물려도 된다.”
순간 정 청지는 당황했지만,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아무리 어여삐 여기지 않는 자식일지라도 유일한 천자였다. 공주가 반푼이라는 소문만 없었어도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제법 있었을 터. 외국과 달리 여국에서 여자 황제가 탄생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한 처사였다. 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그저 명에 따라 그녀를 돌보았던 수족들을 자르는 수밖에.
“아, 그러고 보니.”
이를 까드득 긁던 황제가 자세를 바꿔 의자에 바로 앉았다. 본래 허리가 굽어 있어 강직하게 서진 않았으나,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묘한 기류가 편전에 흘렀다. 황제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기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내관들을 전부 훑었다.
“서 철휘는 어찌 되었느냐.”
황제의 눈언저리가 험악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곧장 정 청지에게 향했다.
“지단(肢端)을 잘라 협박하여도, 음식을 주며 어르고 타일러 보아도 그대로입니다.”
“죽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
“숨기는 것을 보아하니 도모한 것은 혼자가 아닌 듯합니다.”
그럼 그렇지. 용장군의 군장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주가 쓰러지는 사달이 나던 때, 왜 하필 그자가 내전을 정리했을까. 경계를 서던 무관들을 무르게 하면서까지 내전을 서성였던 이유. 황제의 친위군이라는 이름 때문에 수상하다 여기는 자는 없었던 것 같지만, 황제는 그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일이 너무도 딱 맞아떨어졌다. 평소 복잡한 일은 질색하는 황제였지만 본능적으로 이 일이 제 목숨줄과 연관되어 있다고 직감했다.
“그자를 어찌할까요. 폐하.”
“이제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서 철휘가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면, 본보기로 만천하에 황제의 뜻을 알릴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 죽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은밀히 모반을 꾸미고 있는 그 자이니까.
“목을 쳐내 시신을 궐문에 걸어 모두에게 알리라.”
“…….”
“서 철휘와 관련된 자는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정 청지를 비롯한 내관들은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웠다. 서 철휘는 가문 대대로 대장부 집안이었다. 황제의 친위대를 이끌고 전쟁이 나면, 선두에 서기도 하였다. 서 철휘의 죽음은 곧 가문의 멸족. 황제는 오래도록 황실에 지낸 한 가문을 박살 낼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명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하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반대를 꺼낸 환관들은 없었다. 조정의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역모를 꾸미는 자를 색출하는 난장(亂杖: 신체의 부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 매로 치던 고문)이 시작됐다.
* * *
흉흉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었다. 공주의 혼례 전날, 용장군의 서 철휘가 역모를 일으키려다 실패했다고. 평소 황실과 친분이 두터웠던 대장군 가문이었기에 극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헌부(司憲府)의 관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연회에 있었던 궁실 사람들의 바깥출입을 엄격히 금했으며, 반대로 귀족들의 입궁을 불허했다. 부율과 아버지 역시 그 어명을 받고 입궁하지 못했다. 서찰도 주고받을 길이 없으니 황궁 안에서 완전히 고립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추비관의 노예들도 조사를 명분으로 관료들에게 낮이면 태형을 받았고, 밤이면 능욕을 당하였다. 무엇이 잔인한 걸까. 반정이 일었으면 파리 목숨처럼 죽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 때문에 지옥에서 살고 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들을 위해 밤이 오지 않길 빌었지만, 야속하게도 해가 저물어 갔다. 하늘을 보고 아쉽게 헤어졌던 수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옷을 허겁지겁 들고 추비관을 빠져나왔을 때는 새벽 그을음이 벌써 처마 아래까지 내려갔을 무렵이었으니까. 다시 그리웠다. 그가 무사한 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이 지긋지긋한 궁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사방이 가로막힌 것처럼 막막했다. 보이는 것이 그대로 펼쳐지지 않으니,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부율이 걱정되었다. 그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만큼이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옆으로 몸을 웅크리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애끓는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뉜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몸이 그 사람으로 오랫동안 덧칠해진 까닭일까. 분명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었다. 떨리던 감정도 전부 욕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가슴이 아릿할까.
툭.
그때였다. 문이 멋대로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녘에 궁녀가 나를 찾아올 리는 없었다. 어명으로 시중을 드는 궁녀의 수도 줄어든 참이었다. 어의도 낮이면 돌아간다. 나는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사람의 그림자가 올곧게 서 있다.
“…아.”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침상을 밟고, 그의 다리가 내 무릎 사이로 들어온다. 유난히 밝은 달빛 아래에 푸른 눈이 나를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한구석 미운 곳 하나 없이, 가슴이 떨릴 만큼 청아하다.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기다려 왔던 농후한 향이 입가를 덮고 몸이 하나가 된 듯이 겹쳐졌다. 그의 머리카락이 귀에 닿아 간지러웠다.
“아기씨.”
“어떻게 여기까지…….”
“…빗장문이 열린 틈을 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너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도망 나온 것을 본 무관이 그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오는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그를 어찌해야 할까. 이토록 간절하게 나를 만나러 와준 그에게,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온몸을 그에게 맡기고,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르는 행위를 겹 하여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따스했고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입맞춤 후에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예전 일을… 전부 기억해 낸 것입니까.”
그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웠던 기억과 사랑스럽던 과거의 기억까지 전부 다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도. 그가 나 때문에 얼마나 망가졌던 것인지까지. 그 무서운 기억 속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애석하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그를 꿈꾼다.
“그렇다면 말해주시겠습니까.”
그가 애타는 손길로 내 턱을 그의 쪽으로 당겼다.
“그때 내가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예전으로 돌아간 듯 어려 보인다. 소년인 것처럼, 그때의 원초적인 감정으로 나를 본다. 서로를 마주 본다. 이 순간만큼은 우리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다.
“…너는 너무 깨끗해서.”
입을 열자, 해야 할 말을 깨닫는다. 그가 처음부터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왜 그토록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내 안 깊은 곳에 있던 추한 마음의 정체를 애써 감추지 않고 꺼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혹여 더럽혀질까 두려웠어.”
열두 살, 그가 내게 티 없는 얼굴로 내 생일을 말해 주었을 때부터 그를 원했다. 매일 내 옆에 있기를 은밀히 소원했고, 나를 위해 순수한 모습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그때와 같아.”
기억을 잃고 화향관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날, 소감은 열두 살의 그 기억과 퍽 닮아 있었다. 무척이나 깨끗하여, 나의 허름한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난잡한 곳, 더러운 소리 사이에서 저 혼자만 밝고 맑게 빛나던 사람. 그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그 아찔한 감정이란, 외사랑이었던 것을. 그의 손길에 닿은 수많은 외간 것들을 증오하고 있던 것뿐이었음을.
“사랑해…….”
입술로 머금고 있기에 힘겨운 말을 터트렸다. 점점 짙어져 오는 달빛 때문인지 그의 푸르름이 그을려 갔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손발이 마비된다. 그는 말없이 나를 이불에 쓰러뜨리고 부드럽게 내 위에 올라탔다. 위와 아래. 나뉜 경계선을 누가 먼저 넘어 들어올까.
“그런데 왜…….”
이윽고 그의 손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다. 얼핏 본 그의 눈동자에 파도가 드리워진 것처럼 출렁였다.
“나를 두고 간 겁니까.”
원망 어린 숨결에는 더 이상 따듯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학적인 비틀림만이 멋대로 그의 입술을 움직였다.
“그놈과 함께.”
나는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를 두고 간 것이 아니라고. 줄곧 그를 그리움 속에서 그려 왔다고.
“아…….”
하지만 내 손은 허공에서 그대로 바닥 아래까지 추락했다. 내가 과연 그의 앞에서 부정하며 그를 다시 갈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를 기다리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 불길 속에서 간절히 아기씨를 불렀습니다.”
“수오…….”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계속 기다렸어.”
그의 눈이 슬픔에 잠겨 물기로 촉촉해진다. 하지만 시선은 그 슬픔보다 강렬하여 나를 강하게 내리쬔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이 아득하여 숨이 턱 막혔다. 이윽고 그가 나약해진 내 팔을 한 손으로 짓눌렀다. 그는 내게 거짓이라도 좋으니 달콤한 변명을 바라고 있다.
“아기씨는 나를 정녕 한 번도…….”
“…….”
“찾지 않은 것입니까…….”
그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가까이 닿았다. 단단했던 몸이 그제야 무겁게 내 위로 무너져 내린다. 울적해진 아이처럼 그는 내게 가만히 안겼다.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눈물이 하염없이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오…. 수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숨죽인 얼굴이 마치 1년 전 그곳에 두고 온 광경인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의 호흡을 확인하고, 그가 내 옆에 살아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에게 애원했다. 가슴은 그가 흘린 눈물로 뜨겁게 발화했다.
“그날, 당신이 내게 물었지.”
기적처럼, 그가 내 부름에 응답해준 것일까. 나를 꽉 안으며 다른 온도였던 체온이 겹쳐지며 같아진다. 그는 조용히 내게 읊조렸다.
“언제부터 당신을 마음속에 품었느냐고.”
볼에 닿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은은하다가 가볍게 내게서 멀어졌다. 그는 아래로 내려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 아찔한 감각에 순식간에 골짜기가 젖어 들어갔다.
“당신이 처음으로 달거리를 한 날, 당신은 나를 가장 먼저 찾아와 내 품에 안겼어.”
그의 말에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난다. 아침에 일어나 치마에 덜컥 묻어 있는 핏물을 보고 헐레벌떡 그에게 뛰어갔다. 일하러 나가는 그에게 안기며 그의 품에 왈칵 눈물을 적시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놀란 숨을 참으며 나를 진정시키려 애썼고, 뒤늦게 달거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능숙하게 새 치마를 꺼내 주었다. 여종을 시켜 내가 목욕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아픔에 바닥을 긁던 내게 쉬지 않고 달군 돌을 날라 주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새빨개진 그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바보같이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수오…….”
“내가 깨끗하다고 했습니까. 아니. 그날 이후 노심초사하며, 아기씨만 생각했습니다. 스스로에 구역질이 날만큼이나.”
그때, 그의 손이 치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지만 아기씨가 나를 경멸하고 외면했을 때, 비로소 희열이 차올랐습니다. 내가 드디어 너를.”
그는 이미 푹 젖어 있는 내 속곳을 확인하고는 냉소했다.
“꽤 지독한 방법으로 취해도 된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속살로 파고든다. 간밤의 상처가 아물기 전인데도 그의 손톱 안쪽까지 끈적한 애액이 달라붙었다. 그는 베개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나를 보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쫙 벌리고 그의 것이 더 굵게 들어오길 갈망했다.
“그리도 너를 욕망했어.”
“하… 으응! 아흐응……!”
벌써 세 개의 손가락이 보지의 안쪽 끝까지 들어와 있었다. 아랫배가 꽉 죄는 감각에 발가락 끝이 발발 떨리며 위로 솟구쳤다. 그는 내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제압한 뒤 한꺼번에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 순간, 요까지 물이 후두두 떨어지며 그의 손바닥이 웅덩이졌다.
“뒤돌아.”
“아흑!”
그가 내 허리를 들어 곧장 이불에 엎어지게 했다. 언덕처럼 솟아 있는 두 볼기에 두 차례 손바닥을 휘갈겼다.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들렸고, 그 틈에 그가 보지 구멍을 더 크게 벌렸다.
“이렇게 커진 구멍에 자지를 박으면 헐렁해서 아무 느낌도 없을 겁니다.”
“아흐윽! 아니야……!”
“그러니 좆 대신 이걸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끝이 뭉툭한 나무 막대기였다. 끝으로 갈수록 두꺼워져서 마지막에는 그의 남근보다 커다랗게 보였다. 그는 비소를 흘리며 보지 속에 막대를 쑤셔 넣었다. 살점이 아닌 딱딱한 이물질이 들어오자 속살이 놀라 경련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가장 두꺼운 마지막 부분까지 막대기를 밀어 넣었다.
“이곳 양반들 취미가 이리 더럽습니다.”
“아아아흑……!”
“마음에 드십니까. 더 꽉 무십시오.”
“흑, 싫어. 수오. 하아악……!”
눈물로 애원하는 나를 외면하며, 그가 무자비하게 뒷문에 손가락을 넣었다. 몇 번 가늠하며 휘젓는 것 같더니, 그대로 귀두 끝을 들이밀었다.
“뒷구멍에는 직접 좆물을 뿌려 드리겠습니다.”
“헉…! 아… 악……!”
그의 끝부분이 단번에 뒷구멍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탄식하며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결국, 흥분에 못 이긴 그의 거친 몸이 나를 더욱 깔아뭉개며, 안쪽으로 침입한다. 온몸이 발발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 세우고 있던 무릎이 털썩 무너져 내렸다.
“윽……!”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가던 구멍이 제법 잘 늘어납니다. 그놈이 가르쳐준 겁니까.”
“아… 학……!”
힘겨워 발악하는 내게 그가 손바닥을 재차 휘두른다. 뒷구멍이 사정없이 벌어지는 와중에 볼기마저 눈물이 날 만큼 뜨거워졌다.
“엉덩이 세워. 뿌리까지 한 번에 박아 넣어 줄 것이니.”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하는 행동은 전부 아픈 것뿐이었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성가시다는 듯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내 아랫배를 부여잡았다.
“느껴집니까.”
“아… 으으……!”
“자지가 네 내장을 비집고 껄떡 껄떡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일부러 불끈대는 성기를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감각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헛구역질을 해대는 내 뒤통수를 부여잡고, 천장을 향해 끌어 올렸다.
“내 좆이 아기씨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윽… 끅…….”
“그래도 꾸역꾸역 받아들이다 보면 아기씨도 쌀 수 있을 겁니다.”
“아아아… 욱…!”
“너는 여러 자지를 받아들인 음탕한 년이 아닙니까.”
그가 불쾌하다는 듯 자지 끝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아랫배가 불룩해지면서 내장이 부풀어 오르는 역한 감각이 들었다. 나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난폭한 정욕을 거부하기 위해.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내 엉덩이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내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고 내 목덜미를 한 손으로 쥐며 힘을 주었다.
“헉… 윽……!”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어딜 도망가려고.”
세워진 엉덩이가 점점 그의 몸에 눌려 납작해졌다. 그는 내 안에 뿌리마저 욱여넣고 꽉 조이는 내장을 만끽했다.
“드디어 전부 들어갔… 크윽. 뒷구멍이 내 자지 모양만큼이나 늘어났습니다.”
그의 음모가 내 엉덩이골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없이 내 살 속에 파묻혔다. 그만큼 그는 내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얼키설키 얽힌 그물망처럼 뒷구멍의 근육들이 그의 자지를 꿀꺽 삼키고 있다. 싫다. 아프기만 한 정사임에도 귓가에 그의 신음이 들려 오면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쉬이…. 옳지.”
“흑… 윽……!”
그는 여전히 내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은 채 천천히 허리를 당겼다. 그 굵은 뿌리가 조금씩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더니 얼마 안 가 다시 내장으로 힘겹게 침입했다.
“하, 큭! 풀어 주지 않아도 뒷문으로 잘도 질질 싸는구나.”
그가 매섭게 내 엉덩이를 내리쳤다. 너무나도 큰 고통에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조용히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아… 윽, 명기로구나. 자지를 꽉 조이는 것이 어디서 배워 먹은 건지 화가 날 정도야.”
“흑, 흐윽…….”
“부율이 그리 가르쳤습니까? 누룩, 대답해.”
철썩, 철썩. 그가 손을 높이 들고 양쪽 볼기를 세차게 내리쳤다. 더는 엉덩이에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엉덩이로는 부족한 모양입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부족하지 않다. 계속해서 안쪽을 파고드는 커다란 살덩이가 부족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때리기 좋은 곳이 볼기짝만 있는 것은 아니지.”
기어이 그가 자지를 삽입한 채로 나를 돌려 눕혔다. 그의 시선이 펑퍼짐하게 퍼져 있는 젖살에 모였다. 다시 그의 손바닥이 천장 위로 높게 뻗쳤다.
“아흑!”
찰싹. 젖살이 그의 손바닥에 의해 커다랗게 출렁였다. 그 음탕한 광경에 그가 짧게 감탄했다.
“쓸모없이 커다란 젖통이 요란스레 흔들리고 있잖아. 남자를 제법 동하게 해. 당신이.”
“싫… 하아아윽!”
다시 수차례 매질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젖에 빨갛게 그의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그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미친 눈을 하고 그 붉은 자국을 노려보았다.
“젖꼭지는 어찌해 주어야 할까. 똑같이 때려줄까, 그렇지 않으면 빨고 씹어줄까.”
“흑… 아파. 제발… 수오……!”
“아기씨가 아프다고 싫다고 하는 소리가 듣기에 참 좋습니다. 내 멋대로 너를 강간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 샘솟지 않습니까.”
“흐윽…! 아악……!”
그가 손톱 끝으로 젖꼭지를 살살 뭉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랫도리를 더 밀어붙이며, 젖을 냉큼 삼켰다.
“아… 아응……!”
젖은 혓바닥이 돌기 주변을 끈적하게 어르더니 잇새로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쾌락과 고통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그의 귀두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다리를 오므렸다. 이 이상 커지면 뒷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다리를 거칠게 벌렸다.
“아흐으으윽!”
“보지에 물린 장난감도 같이 움직여 주어야 얌전히 있을 겁니까.”
그는 화를 냈다. 자신의 아래에 깔린 주제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주제에 반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일까. 혹은 내가 그를 배신했기 때문에?
“다리 쫙 벌려. 그래야 네 보지도 적셔 주지 않겠습니까.”
“허… 억……!”
그가 억지로 벌린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보지에 박혀 있던 막대기 끝을 잡고 위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그저 박혀서 덜렁거리고 있던 막대기가 보지 속으로 푹푹 박히더니 기이한 쾌감마저 들었다.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바싹 마른 불모지가 축축이 젖어 물을 쏟아 낼 때까지 빠르게 막대기를 쑤실 뿐이었다.
“아, 하, 하앙…! 아아아앙……!”
“발딱 선 꼭지도 빨아달라고 애원하는 겁니까.”
그는 젖동냥하는 아기처럼 허겁지겁 내 젖꼭지를 삼켰다. 그곳에서 즙이 나올 리가 없는데도 온통 아프게 꼭지를 빨고 씹었다. 그러면서도 보지 속에 박힌 막대기를 움직이는 통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발정기에 오른 암캐처럼 헉헉대며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얼마 뒤 찰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보지 밖으로 물줄기가 줄줄 흘렀다.
“아, 아아앙, 하으으응……!”
“음탕한 년. 쑤셔 주고 빨아주면 그저 좋아하지.”
그가 굵은 막대기 끝마저 전부 보지 속에 집어넣더니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마주 본 그의 눈빛이 서늘하다. 땀에 젖어 헐떡거리는 나를 보는 그의 눈이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잘 빨 수 있게 두 손으로 젖통을 모아.”
“아, 흐으…….”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쾌락에 감긴 몸뚱이가 저절로 그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말랑한 두 젖무덤이 어느새 한데 모였다. 젖꼭지가 천장을 향해 나란히 발기한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두 젖꼭지를 가득 베어 물었다.
“아아아…! 수오……!”
그는 탐스러운 과일을 탐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혀를 움직였다. 나는 그가 만족하게끔 가슴을 더 안쪽으로 모았고 그는 말랑한 속을 파고들며 쪽쪽 소리가 날 때까지 빨았다.
“하, 으으응……!”
그의 허리 짓이 빨라진다. 뒷구멍으로 성기가 고집스레 들어오며 끝없는 통로 속을 더욱 깊이 탐했다. 애액과 요도 액으로 축축이 젖은 음낭도 구멍 밑을 난폭하게 퍽퍽 쳐댔다.
“그놈 자지로는 한참 부족했던 모양이야. 보지로 즙을 내며 기뻐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룩… 음탕한 년.”
“아아아…! …헉, 아흐윽!”
어느새 뒷구멍이 그의 뿌리를 완전히 삼킬 만큼 풀어져 있었다. 그 굵은 몸통이 단번에 박혀도 걸리는 곳 없이 쑥쑥 들어왔다. 그의 요도에서도 이제 맑은 물이 아닌 풀죽처럼 묽은 즙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가 잠깐씩 자지를 바깥으로 꺼낼 때마다 미처 소화하지 못한 뿌연 것이 뒷구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성기가 들어올 때면, 즙들이 꿀쩍거리며 속살로 스며들었다.
“아흑……!”
그가 나를 완전히 짓뭉개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했으며, 아랫배를 의도적으로 누르며 그의 자지가 지나다니는 통로를 조이도록 만들었다. 죄가 너무도 깊었다. 서로의 가슴이 찢겨 그곳에 오래도록 움튼 죄의 흔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크흑!”
그의 정액이 끝내 내 안에서 발하고 만다. 새하얗게 덩어리진 씨물은 멀리 쏘아졌을 뿐만 아니라 구멍 안쪽에 덕지덕지 붙어 항문을 완전히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의 아랫도리는 줄어들지 않고 더욱 불끈 커졌다.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나를 망가뜨리려고 했다.
“내 위로 올라타.”
그가 명령과 함께 내 젖을 쥐어짰다. 비음과 함께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따라 허리가 곧추세워진다. 그가 이불에 눕고, 나는 그의 물건을 뒷문으로 받은 채 그의 골반 위에 앉았다.
“읏… 수오…….”
“움직여. 내가 쌀 때까지 할 것이니 게으름 피우지 않은 편이 좋을 겁니다.”
그의 강압을 못 이기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보지만, 그의 것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구멍이 아파 멈추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그가 손을 뻗어 젖가슴을 늘이고,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젖꼭지를 바득 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하, 하아… 앗! 아윽!”
“이래선 밤을 새우겠어.”
그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 매서운 질책이 무서워 몸이 덜덜 떨리는데도, 좀처럼 허벅지가 펴지지 않는다.
“움직여.”
“아흐으윽!”
날카로운 손이 다시 젖가슴에 날아들었다. 단지 어둠의 탓일까. 붉게 충혈되었던 유륜이 그림자처럼 져 가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를 떨며 어떻게든 젖을 감추려 하는 날 보고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가 보란 듯이 다시 양손으로 젖꼭지를 꼬집었다.
“흑… 으흑.”
“아기씨. 움직이지 않으면 젖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길 원하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에 의해 일그러져 가는 가슴이 아픈 것인지, 그의 자지에 범해지는 구멍이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움직일게. 제발…. 흑…….”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나의 바람이 그에게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깨달았지만 이렇게 매번 그에게 매달리고 만다.
“아… 욱…….”
허벅지를 조금씩 들어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절반만 들어와 있던 그의 물건이 점점 속살을 파고들어 온다. 고통에 눈살을 찌푸려 보지만, 그는 웃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 그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하다. 이렇게 잔혹한 밤인데도, 깨끗하다.
“하아, 윽. 그래, 그렇게…….”
“흐…읏, 아읏……!”
아찔한 감각.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그는 나를 지옥 속으로 끌고 간다.
“아기씨…….”
그의 손이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으로 간다. 잦은 떨림 속에서 그가 숨을 토해 낸다. 나의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이 형편없는 쾌락 속에 그는 무엇을 좇고 있는 것일까.
“나는 당신을… 증오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내 몸을 사정없이 무너뜨린다. 차라리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이렇게 한평생 묻고 있을까. 그러면 외사랑 같은 이 처연한 마음도 숨겨질까.
“네가 원망스러워.”
비수 같은 그의 말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껴안는다.
“수오. 하지만 나는…….”
손을 잡고, 그의 온기를 찾으려 한다. 그를 떠나지 못해. 그를 풀어줄 수 없다. 칠흑같이 서글픈 밤. 어쩌면 빼앗고 달려드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에게 고백한다.
“너를 원해…….”
그는 스러진 나를 가득 안고, 허리를 세워 구멍 속에 남은 자지를 밀어 넣었다. 흐느끼는 나를 알아차린 걸까. 그의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위로일까. 그렇지 않으면 연민일까.
그는 알까. 우리의 현실은 깜깜한 밤중에 내리는 거친 빗줄기처럼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서로에게조차 안식처가 되어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놓아줄 수 없다. 내 가슴을 난도질하며 갈기갈기 찢는 그의 손길에도, 그를 사랑한다. 연모하는 마음이 닳고 닳아 무뎌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에게 소유되고 싶다. 끔찍한 괴물들이 서로를 탐하는 곳, 이곳은 지옥일까.
혹은 극락일까.
* * *
역모가 실패한 지 열흘이 지났다. 서 철휘의 잘린 목이 궁궐 앞 창살에 걸려 전시된 것도 이틀이었다. 선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의 딸 아이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부율 그자가 그토록 바보 같은 짓을 벌일 줄이야. 내전에 들어갈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그는 딸이 있는 연궁으로 달려갔다.
선정은 혀를 둘렀다. 부율과 자신 역시 황제의 명으로 당분간 입궁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현 사태를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쉬운 길은 없다. 반정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더 위험한 길을 걸어가야 했다.
“혼례 날이 미뤄졌습니다.”
선정은 애써 차분한 어조로 부율에게 일렀다. 황궁에 사는 관료들마저 역적으로 의심받고 있는 지금, 공주와 부율의 혼례가 진행될 리 없었다. 일삭은 지나야 황제로부터 새로운 전언이 있을 것이다.
“이제 혼례식을 노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일삭 후 혼례를 올리게 되더라도, 전처럼 그 날을 노려 모반을 꾸미는 것은 위험하다. 황제의 심기가 날로 날카로워져 가고 있었다. 경계가 심해질 것이다.
“기회는 혼례를 올린 후 보름 뒤입니다.”
“왜 보름 뒤지?”
부율은 선정의 거침없는 구상을 단박에 끊었다. 부율이 누룩과 거짓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그는 이미 황제의 사람이 돼 버린다. 누룩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공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녀를 알아보는 관료들이 많아질 것이고, 조정이 시끄러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들 모두를 단칼에 처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성이 새로운 부마의 탄생을 경하하고, 황제가 방심하고 있을 때.”
“…….”
“바로 그때뿐 입니다. 부율 님이 폐하의 목을 칠 유일한 기회는.”
하지만 선정은 단호했다. 초야의 밤을 치르고, 혼례 전후 의식이 끝나는 시점. 일곱 날 이상이 소요된다. 그렇다면 보름 뒤는 모든 의례가 끝나고도 남을 시간. 황제가 부율의 권력을 경계하고 손을 쓰기 전에 끝내기 위해서라면 정확히 보름 뒤에 다시 반정을 일으켜야 했다.
“…너, 달라졌군.”
부율은 조용히 선정의 얼굴을 살폈다. 날카로이 그어진 눈썹과 위로 솟은 눈매. 그리고 묘하게 비틀린 입까지, 부드러움을 모방하던 전과는 달리 상당히 인상이 달라졌다. 서 철휘의 실패 때문일까.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부율은 전보다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제게 숨기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 저가 눈치챌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어찌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을까. 부율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부율의 대답과 함께 선정의 입술이 다시 흐트러진다. 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부율은 속으로 혀를 둘렀다. 선정은 평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누룩이 제 손목을 그은 순간부터, 그 자신도 모르게 안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딸에 대한 걱정일까. 역모의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그렇지 않으면, 누룩을 향한 욕망이 실현되지 못함에 분한 걸까.
“입궁은 언제부터 할 수 있지?”
“입궁은…….”
부율의 물음에 선정이 잠시 입을 다문다.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룩이 연궁에 계속 있는 한, 황제는 분명 자신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황제에게 의지할 자는 선정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조만간 소식이 있을 겁니다.”
선정은 미소 지었다. 초조해하는 부율을 앞에 두고, 여러 수를 재는 것만큼 희열에 차오르는 일은 없었다. 이 자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최악의 계획을 알아차릴 수 없는, 가엾은 생쥐 꼴이니까.
* * *
정인을 잃고는 달이 초연한지, 해가 초저녁의 노을과 닮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슴 속 멍울을 지니고 살아, 몸이 이토록 가벼웠는지 느끼지 못했다.
그를 되찾고는, 저물어 가는 노을도, 떠오르는 태양도 눈에 들어오고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삶이 내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내 옆으로 되돌아왔다.
“…….”
나는 잠이 들어 있는 그의 옆얼굴을 훔쳐본다. 손을 뻗어 그의 숨결을 확인하고 안도를 한다. 창문 너머의 타오르는 빛은 더 이상 불길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태양에 불과했다. 우리는 안전했다. 우리의 공간, 이어진 두 손이… 이제 영원히 함께일 것이라는 듯이.
나는 그의 어깨를 보듬었다. 이 안타까운 인연의 끝이 지금이 아니길 바라면서, 좀 더 이어지길 바라며 그를 바라본다. 잠시 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이 간절한 마음이 같아지길 원한다.
“…수오.”
작은 부름에 잠에서 깬 걸까. 그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침 인사라도 하듯 서로의 이마가 천천히 부딪힌다.
“아기씨.”
그는 미소 지었다. 잠결이었을까. 아주 잠시 예전으로 온전히 돌아온 듯한 기분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먼저 그의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 역시 나와 똑같은 것을 느낀 것일까.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감싼다. 완전히 하나가 된다. 따로 떨어져 있던 몸과 몸이 그리웠다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더욱 달라붙어 그칠 줄을 몰랐다.
“응…….”
“하아…….”
줄곧 이 향기를 그리워했다. 어렴풋이 기억나지 않던 그의 모든 것이 넘실대며 내 안을 가득 채워갔다. 우리는 입을 맞추었고, 지나간 시간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손을 맞잡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를 알고 싶다. 내가 알고 있던 수오가 맞는지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욕심이었을까. 그의 윗옷을 벗기는 성급한 내 손을 그가 돌연 붙잡는다. 당황한 숨결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나왔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만…….”
그는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증거로 그의 손이 흔들리고 있다. 나를 외면하는 그 시선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어째서…….”
어젯밤 나의 몸을 탐한 것은 그의 눈이었으며, 손길, 몸짓이었다.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었다. 그를 안고 그의 것을 손에 넣으며 쾌락을 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새기고 싶었다. 기억 속에 희미해진 아름답던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다. 하지만 내 욕망 어린 눈길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연약해진 입술 사이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흉측할 겁니다…….”
그의 손이 나를 막아 내고 있었지만,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아픔까지 보듬어 주길 원한다. 그리고 똑똑이 바라봐 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가 그토록 나의 의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사랑받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의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손가락을 끼우며, 자그맣게 입술을 내렸다. 그의 부드러운 손등에 작은 입술 자국이 새겨진다.
“아…….”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외면할까 두려워.”
“그렇지 않아.”
“…당신이 떠날까 무서워.”
그는 내 등을 꽉 끌어안았다. 흐트러져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햇살에 비쳐 반짝인다. 가녀린 눈썹도 정갈하다. 반듯한 모양의 입술도, 거칠게 솟은 콧등도. 그런데 어찌 상처라고 지독하고 흉측하게 여길 수 있을까.
“보여줘…….”
나는 그를 알아야 했다. 내가 그에게 범한 실수와 상처를 눈으로 보고 아파야 한다. 죄책감과 연민 속에 나는 그를 재촉한다. 그의 손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와 다시 눈을 마주친다. 그건 더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너는… 나를 견딜 수 있느냐.”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있는 이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놓지 않는다. 그 역시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견딜 수밖에 없다.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너의 전부를… 가지고 싶어. 수오.”
손길이 그의 가슴팍을 스친다. 연꽃 같던 그의 윗옷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속에, 그의 상처가 있었다. 가슴 아래에서부터 허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연약한 피부에 난폭하게 붙어 있는 그의 상처들이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더듬었다. 더는 피부라고 느껴지지 않는 시린 감촉.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을 나는 전부 다 훑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더러운 창관에서도 유일하게 순수하게 빛이 났던 사람. 나를 보는 눈길에 서먹함 없이 따스함이 있었던 사람. 나를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다시 환하게 웃던 잔인한 사람. 아름답다. 내가 느끼는 그의 전부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사랑스럽다.
“누야. 나는 두려웠다. 불이 너를 집어삼킨 것이 아닐까, 너무 무서웠어.”
비명이 들리던 작은 공간. 픽픽 쓰러져 가는 사람들. 불길이 치솟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그 날. 수오 님은 그때를 생각하며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이 내 턱을 감싸 어르며, 기억을 부정한다. 나를 잃었던 것일까. 그가 나를 그 불길 속에서 놓쳤던 것일까 두려워, 그때 그 불안을 상기한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그런 죄책감과 상실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연회에서 너를 본 날, 드디어 모든 것이 이해되었지.”
1년 동안 품어온 그리움은 증오가 되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가 되는 것은 왜일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이토록 잔인하게 맺어질 것을 미리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작했을까. 아니,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공주 행세를 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을 것이다.”
“…….”
“그놈과 혼례를 약조한 것이냐.”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사람과 약속을 했다. 혼례뿐만 아니라, 그 옆에서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전생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가 수오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원망과 증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졌다. 사랑을 받으며 익숙한 습관처럼 일상을 보내는 것이 수오를 잊게 했다. 하지만 잊었던 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를 만나고 깨닫는다. 나는 잊지 못하였다. 추억을 붙들고 그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를 다시 만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사람과…….”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이 초조해 보인다. 먹먹해진다.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그는 나를 떠날까.
“혼례를 올리기로 했어…….”
잔잔하던 순간이 단숨에 무너져 내린다. 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렇구나.”
사뭇 어두워진 목소리에 주눅이 든다. 내 턱을 어루만지고 있던 그의 손이 점점 굳어진다. 단단해지고, 힘이 들어간다. 그것이 내 목을 죄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래. 일이 참 재미있게 되겠구나.”
“아…, 수오… 읏.”
눈을 떠 그의 미소를 본다. 그 싸늘하게 요동치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늘어난 보지를 그놈이 얼마나 눈치챌 수 있는지 기대가 돼.”
열에 차 있는 그의 입매를 보고,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게 틀어지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