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진실 (8/18)

Chapter 8. 진실

부율이 선물해 준 옷을 입고 지낸 시간이 한 달이 지났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우리는 같은 이불 속에 있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잠을 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데도 누군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나는 언제나 문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같이 걷지 않겠느냐.”

오늘은 그가 아침부터 내게 말을 걸었다. 내게 향해 있는 그의 손바닥에는 긴장한 듯 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또 저 손을 무엇이라 변명을 할까. 내가 손을 잡으면 이유 없이 웃고 말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더냐. 손을 잡는 게 싫은 것이면…….”

“별로 생각이 없어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부시게 예쁜 날이었다. 그래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쉬거나 생각을 비우면 수오 님이 완전히 내 곁을 떠나갈 것 같았다. 나를 원망할 것 같았다.

“혹시 몸이 무거워지거나 속이 불편하다거나…….”

“아니에요…….”

부율의 입이 다물어진다. 그가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알고 있다. 수많은 정사에서 그는 내 안에 사정했었고, 아이가 들어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내 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등을 돌렸다. 그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부탁이다.”

“…….”

“같이 걸어다오.”

그가 이번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초조하게 나를 볼 뿐이다. 처음이었다. 언제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날 감시하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가 내게 거리를 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가 가져다 놓은 신을 신고 그의 옆에 섰다. 그의 옆모습을 힐긋 쳐다봤다. 나 역시 바랐던 것일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뭉그러졌다. 햇빛 때문이야. 아니, 날이 너무 좋아서 바람이 따듯해서 그래. 하지만 그럴수록 가슴이 조여 왔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나는 줄곧 땅에 시선을 둔 채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걸었다.

“내가 많이… 서툴렀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어디선가 잔잔한 시냇물 소리가 들려올 때쯤, 부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람에 금세 흩날려 간다. 들리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거리.

그러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무엇이… 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묻고 만다. 그러자 부율이 걸음을 멈춰 섰다. 나도 그의 뒤에서 숨을 죽였다. 그가 등을 돌렸지만 몸은 긴장한 듯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난 꿈속에 빠져 있었어.”

“…….”

“줄곧, 네가 그녀처럼 떠날 것이라고… 사라져 버릴 거라고 여겼어.”

부율이 내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예전처럼 그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변한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딘가 변하고 있었다.

“현생은 다를 것이라 여기고 있었으면서도, 널 다르게 보지 않았다.”

부율이 조심스레 내 소매를 끌어당긴다. 어느새 그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너무도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그와 나밖에 이 세계에 남지 않은 것 같이 고요했다.

“그래서… 내가 너를 힘들게 했구나. 네게 못 할 짓을 했어.”

그의 말은 고백과도 같았다. 그는 처음 내게 마음을 전했던 순간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설마 진심인 걸까. 그가 내게 진심을 말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그걸 기대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으마. 네가 날 떠나지 않게 노력하마.”

그는 급한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손을 잡지 못했다. 손끝과 손끝이 부딪히더라도 철저히 거리를 지켰다.

“그러니까 내가 달라질 수 있도록… 지켜봐다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전히 나는 수오 님이 그리웠고, 그 없이는 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부율의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토록 질긴 인연이 있을까. 그가 전생에 내게 어떤 사람이었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불안했다. 그가 정말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것 같아 걱정됐다.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그래서 물어야 했다. 그의 의도를. 계획을. 두렵더라도 나는 그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소설 속에서 부율은, 수오 님을 수도로 데려간 뒤 그의 첩으로 삼았었다. 창부인 자를, 그것도 남자인 그를 정실로 앉히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율은… 여자인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일까.

그때, 부율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나는 너를… 내 아내로 취하고 싶다.”

스치기만 했던 두 손가락이 맞닿는다.

“네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한량으로 보았겠지. 창관에서 나를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허나…….”

그의 말이 다급해진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눈앞에 섰다. 코와 코가 거의 맞닿을 만한 거리. 그의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너 외에 다른 여자는 보지 않겠다고 약조하마. 내가 널 배신할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맹렬한 맹세. 그가 선뜻 내게 약속을 말한다. 만일 내가 그를 사랑하고 우리가 평범한 연인 사이였다면, 이 고백을 반갑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을까. 나는 속으로 시위를 한다. 답답하고 처참한 기분으로.

그가 복잡한 내 눈을 알아차렸는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나는 상상한다. 그와 함께 하는 삶을. 그의 말대로 부율의 아내가 되어 이대로 귀족의 신분으로 사는 삶을. 하지만 여지없이 그가 떠올랐다.

내 가슴을 수시로 난도질하는 수오 님이. 그의 얼굴이 생기가 넘쳤다가도, 일그러진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기도 했다가, 불길에 휩싸이며 나를 걱정한다. 아니, 우리를 걱정한다. 내게 가지 말라고, 손짓한다.

“나는 수오 님을 사랑해요…….”

그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운명이 바뀌어 부율이 수오 님이 아닌 나를 욕망하고, 나를 취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니었다. 부율과 나의 인연은 과거일 뿐이었다. 나는 전생에 자살을 선택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부율을 떠났다.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다.”

그러나 부율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나를 보는 또렷한 저 두 눈은 여전히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나를 붙잡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갈망하고 있다.

“그저 내 옆에 있기만 하거라. 그자를 상상하며 나를 안아도 욕심부리지 않으마. 내 아내로 살아다오.”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는 소설 속 부율은 반항하는 수오 님을 강제로 첩으로 삼고, 매일 밤 수오 님을 품었으며 결국은 도망가지 못하게 두 손과 두 발을 포박했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 내가 아는, 나와 전생의 연인이었던 부율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알던 소설 속의 부율을 믿어야 하는 걸까.

“…내게 선택지가 있는 건가요.”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있다 하면 내게서 멀어질 것이냐.”

그의 대답은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는 내 반응에 조급해진 것인지 결국 거리를 좁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두 손이 내 팔을 감쌌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혹여 불쾌해하진 않을까, 얼굴에 홍조를 띠며.

“…부탁이야.”

“아…….”

“내 곁에 있어 다오.”

내 곁에 있어 줘. 제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과거의 연인을 불러들인다. 나는 겁이 나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목소리조차 똑같은 걸까. 꿈속에서 내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던 그 남자와. 내가 상처 주었던, 결국은 떠날 수 없었던 간절했던 그 남자와.

“차라리…….”

비겁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줄도 모르고, 나는 태연하게 남자를 보았다. 그가 기대하고 있는 만큼 나는 안으로 썩어들어 갔다.

“말하지 말지.”

아마도 나는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내가 선택조차 하지 못하게… 가둬두지 그랬어요.”

절망이 가득한 저 두 눈을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내뱉은 말의 의미가 이토록 매섭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더는 내게 묻지 말아줘요.”

부율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저릿한 마음이 피부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구나. 미안하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 이대로라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도리어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게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는 듯 그의 전부를 내비쳤다.

“돌아가자꾸나.”

땀에 밴 손바닥이, 다시 내게로 향한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그의 온도가 피부에 스며든다. 도망가고 싶다거나, 피하고 싶은 느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평온한 감각이었다.

“…….”

“…….”

침묵 속에서 우리는 굳이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걸음 속도에 맞춰 사락 고개를 숙이는 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새로 신은 신이 말썽을 부리더니 기어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추락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가 간신히 내 허리를 붙잡았다.

“아……!”

“여긴 땅이 거치니 조심해야 한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느냐?”

몸을 지탱하기 위해 짚은 곳이 그의 가슴팍이었다. 그 덕에 심장이 뛰는 그의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뗐다. 하지만 아직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은 그대로 그에게 떨어졌다.

“윽!”

완전히 엎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쓰라린 구석이 아예 없었다. 눈을 떠 아래를 내다보니, 그가 내 아래에 깔려 신음을 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등이 땅에 박힌 돌덩이들에 닿아 있었다. 나는 놀란 나머지 그의 허리를 감쌌다.

“괘, 괜찮아요?”

보기에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그가 억지로 입술을 당기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괜스레 오기가 생겨난 걸까.

“왜 그렇게…….”

이유를 몰랐다. 이 남자가 내게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

“도대체 왜…….”

“누룩.”

그가 내 목을 끌어당긴다. 부드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네가 무엇이 되었건. 설령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이윽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귓가에 닿고, 숨결이 하나가 된 것처럼 가까워졌을 때 그가 말했다.

“네가 좋을 뿐이다. 너를 원할 뿐이야. 이유 따윈 없어.”

사랑이란 건.

“그러니까 네 말대로 묻지 않으마.”

잔인하다.

“앞으로도 너를 이렇게 안고 싶으니까.”

남자의 가슴 근처에서 박동이 미약하지만 빠르게 울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사실, 내 심장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 * *

황궁 제2궁 중제연(中諸演).

“공주를 닮은 것들을 모조리 끌고 오라 했더니 어디 기생년들만 데려왔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의 눈이 어두워 감히 공주 저하와 빼닮은 용안을…….”

“변명은 집어치우라. 모두 태워 없애.”

“하, 하오나 폐하……!”

“네 놈마저 목숨을 잃고 싶으면 어디 더 지껄여 보아라.”

공주가 궁을 떠난 그때부터 황제의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미 도성 안에 그의 난폭한 기질을 모르는 자가 없었으나 생사람을 잡아다 죽여 버리는 잔혹성은 그의 수발이 아닌 이상 숨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10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제 손으로 유일한 피붙이인 공주를 말려서 죽여 버린 것이.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제는 공주가 태어난 날 받은 신탁을 줄곧 맹신하고 있었다. 저의 피붙이가 자신을 끌어 내리고 황궁을 장악할 것이라는 검은 수복을 입은 자의 말을. 모든 종교를 금하고 절과 사찰을 모조리 불태워 승려들을 핍박했던 자신의 아비와 달리 그는 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래서 공주가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할 때부터 어미에게서 떼어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문을 했다. 가끔 연례행사가 있을 때는 공주를 어미에게 보냈지만, 공주가 자신이 고문한 것을 고할까 두려워 그녀의 나이 열 살이 됐을 무렵부터는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그녀를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게 만든 이후부터 황제의 취미가 더욱 악독해졌다. 그 어린 것을 강간하고 재미로 유두를 잘라냈으며, 심심할 때면 무반들을 불러 딸을 짓밟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배에 피멍이 새겨지고,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갈려질 때까지 황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중에 자신의 딸이 그를 완전히 홀리게 했다고 믿기 시작했었다. 악령이 씌어 자신을 악랄하게 만든 것이라고. 아직은 어리지만 커서 민중의 앞에 나아갔을 때 모두를 패악하게 만들 자가 바로 이 공주라며.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자신의 환상에 미쳐 사는 황제가 기어이 공주를 죽이게 될 줄은. 정확히 말하면, 온갖 고문과 폭행에 견디지 못한 그녀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뒤늦게 후회를 하고 공주를 치료해 되살리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공주와 술원성의 남아, 부율 사이에 약조했던 혼인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공주는 신탁의 말대로 황제를 무너뜨릴 악의 근원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황제는 여전히 그리 믿고 있었다. 결국은 그녀 때문에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게 되지 않았던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고 숱한 관리들에게 존경받는 부율이란 자를 부마도위에 올려야 그가 관리로 나가는 길을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래야만 그가 역모를 꾸밀 통로를 차단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더는 부율과 연을 이어줄 자신의 딸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황제는 고뇌했다. 어떻게 하면, 다시 공주를 되살릴 수 있을지. 아니.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간을 속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 나날들을 속수무책으로 보내고 있을 때, 바로 선정이 황제를 찾아왔다. 그의 앞에 공주와 꼭 빼닮은 여아를 내보이며,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를 했다. 황제는 그날 그 아이를 두고 선정과 거래를 했다. 이 아이가 성년이 되는 날 자신에게 데려오면 삼대를 황궁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고 싶은 자신과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도 황궁에 살고 싶던 남자의 의도는 정확히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선정은 황제가 마련한 거소에서 남몰래 아이를 공주로 키우며 그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철저히 감금해 왔었다.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흑. 흐윽! 여기로 오면 돈을 준다고 했잖아요!”

“이거 놔! 미쳤어, 당신들!”

“죽기 싫어! 죽기 싫어요, 폐하! 용서해 주세요!”

시끄럽군. 황제는 작게 중얼거리며 병사들의 손에 사라지는 여자들을 쳐다봤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애꿎은 기생년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매번 창고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대신들의 눈을 어떻게 속여야 하나 고민했던 그였다. 선정이 키워냈던 그 여자를 1년 전에 데려올 수만 있었어도.

왜 하필 자신과 약속했던 그 날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분통해서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은 일들 때문에 술원성의 가문에게는 약속한 날이 지나도록 서간 한 통 보내지 못했다. 황제는 노여워했다. 제 처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흉인 죽은 공주를.

“선정 그자는 왜 짐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냐.”

“폐, 폐하. 그것이…….”

“계시백이 그자 밑에서 그년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 않았더냐.”

“어, 어젯밤 서간을 받았습니다만… 그것이…….”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오, 오늘 말씀드리려고 했…….”

“당장 고하라!”

품 안에서 서간을 꺼낸 환관이 쭈뼛거리며 황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내용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그 여자의 마지막 행적이 우적(雨赤)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적이라면 얼마 전 대형 화재 사고가 있던 곳이 아니던가. 보고를 들은 황제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다. 처음 머릿속에 든 생각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 여자는 화재로 죽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헌데…….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선정이라는 자가 알현하길 청하나이다.”

황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정이라면 자신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는 재빨리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신하를 두고 크게 손짓을 해 보였다. 어서 빨리 그자를 자신의 앞에 대령하라는 의미였다.

“늦은 시간 송구하나이다. 금(金)의 선정이 폐하를 뵙사옵니다.”

신하의 뒤에서 등장한 선정은 사뭇 간소한 차림으로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소 같았으면 황궁의 도에 맞지 않는 선정의 차림새를 지적해야 함이 옳았으나, 황제는 다급하게 그를 재촉할 뿐이었다.

“찾은 것이냐. 내 아직 술원성에게 말하지 못했네. 당장이라도 혼례 준비를…….”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제 딸을 찾지 못했습니다.”

벌써 몇 번째 하는 실망인가. 황제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라면 자신과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 여식이라도 공주로 내세워 결혼을 시켜야 할 판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속셈이 있었다. 자신의 딸과 닮은 여아를 다시 제 딸로 들여 그때 만끽했던 쾌락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이다. 특히나 남의 여자가 된 그녀를 아비 행세를 한답시고 먹음직스럽게 먹어 치우는 더러운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 되겠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제가 이런저런 욕망을 상상하고 있는 한편, 선정의 옆에 있던 그의 신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수양딸로 삼았던 선정이라고 해도 공주로 키운 그녀를 ‘제 딸’이라 칭한 다라…….

“오늘 이렇게 폐하를 찾아뵌 것은 약조를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키지 못한다?”

“이제는 그 아이를 찾는 것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황제의 입에서 커다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제 발로 자신에게 딸을 바치겠다고 찾아온 놈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만 1년이 다 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쉽게 포기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입매를 굳혔다.

“계시백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자는 아직도 수색하고 있는 듯한데.”

“오늘 아침 제게 찾아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허…. 그게 정녕 사실이냐.”

“소인이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허…….”

자신의 욕망만 돌보기 급급했던 황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했다. 어젯밤 황궁으로 도착한 계시백의 서간.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 곧바로 선정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신하들이 제각기 의아한 눈초리로 선정을 쏘아보았지만,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누구도 입술을 함부로 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선정이었다. 전대 황후의 외가(外家)가 아니던가. 비록 그녀의 죽음으로 몰락 가문이 되었다고 한들, 선정에게서 풍기는 위협적인 태도는 감히 그런 척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다시 계시백을 만나 봐야겠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선정의 눈이 똑바로 황제에게 향했다. 핏빛으로 어두운 눈동자 색 때문인지 도무지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선정의 말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하고 바로 친가로 향하는 걸 보았습니다. 일 석은 걸릴 것입니다.”

“…내게 말도 없이 가다니 희한한 일이다.”

“그에게는 제 밑이 익숙해졌나 봅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나이다.”

선정이 황제의 앞에 깊이 허리를 숙인다. 그 단단한 가슴이 제법 땅에 닿을 듯이 아래로 향했다. 황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그 여자를 놓칠 수는 없다.

“내 직접 조사하겠다.”

“…….”

그 순간, 선정의 입가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네에게는 나중에 다시 연통을 넣지.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

“…뜻 받들겠나이다.”

선정은 조용히 황제의 말에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는 문으로 향하는 선정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추다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선정이 거짓을 고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명예와 부를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는 그가 그녀를 숨기고 있을 리 없다. 쌓아왔던 가문의 덕을 전부 무너뜨려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면 저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

중제연의 문이 닫히고, 더는 선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황제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 궁녀들을 불렀다. 조정을 돌보지 못하고 민심을 사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두가 황제를 그리 생각하듯 신하들의 한숨 소리는 궁 밖에서도 끊이질 않았다.

* * *

황궁을 나서면서 선정은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억눌러야만 했다. 충동적인 알현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자신도 놀랄 만큼 대담한 행동을 해 버렸다. 그것도 황제를 상대로. 하지만 그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선정은 오늘 아침 일을 회상했다. 계시백이 자신을 찾아와 드디어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말했을 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러 버렸었는지.

“믿어지십니까. 부율 님이 공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부율이라면 황제께서 말씀하셨던 정혼자 말입니까.”

“맞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선정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부율이 그 아이를 데리고 수도로 왔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만큼 우연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을에 화재가 난 날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럴싸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가령 부율이 그날 그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던가.

“공주님의 거처를 파악했으니 당장 황제 폐하를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뭐라 말할 겁니까?”

“뭐라 말하다니…….”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나 선정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그 역시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다시 묻는 저의가 의문스러웠다.

“당연히 공주님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당장 공주님의 거소를 황궁으로 옮겨야…….”

“아까부터 공주님이라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선정 님. 당연히 공주님은 공주님…….”

“틀렸습니다. 그 아이는 제 아입니다.”

선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검을 빼 들어 순식간에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눴다.

“무, 무슨……!”

“많이 고민했습니다.”

선정의 음조는 잔잔하고 단조로웠지만, 칼끝에 모인 남자의 핏방울을 보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목구멍에 걸린 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그 아이를 이대로 내 품에서 떠나보내도 되는지… 말입니다.”

선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아아. 그런데 안 되겠더군.”

“진, 진정하십시오. 황제 폐하가 허락하지 않으실 겁…….”

“그 아이의 거취를 아는 건 당신과 나 둘뿐입니다.”

선정의 마지막 말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토록 앞뒤 가리지 않고 말을 하는 성격이었던가? 제아무리 무반을 지냈다 한들 7년 전 공주를 키우면서부터는 관직에서 내려온 자였다. 그런 그가 검을 빼내 들고 황제 폐하의 수족인 자신에게 협박을 가한다? 아니. 어쩌면 이건 협박이 아니라…….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계시백.”

푸욱. 날카로운 칼날에 남자의 목이 너덜너덜 뜯겨 나간다. 피를 최소화하기 위해 바로 급소를 찔렸건만 한이 맺힌 남자의 목덜미에서 폭포수같이 핏덩이들이 떨어져 내린다. 선정은 혀를 찼다. 검을 잡지 않은 지 몇 년이 됐다고 그새 티가 난다. 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으리라.

선정은 그녀를 아직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비록 황제에게 갖다 바칠 여식으로 거둬들였으나, 그건 자신이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그녀를 제 자식으로 삼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며 함께 했던 나날 동안 선정은 달라졌다. 그녀에게 부성애를 느꼈고, 그녀와 평생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황제를 알현해 그녀의 거취를 숨긴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제 하나였다. 무슨 연유이든 부율과 함께 있는 제 자식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였다. 황제의 눈을 피해… 그녀를 다시 제 딸로 키우는 방법. 선정에게는 길이 필요했다. 그의 소유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법한 묘안이 말이다.

* * *

“누룩. 길 잃지 않게 조심하여라. 내 뒤에 딱 붙어 있어.”

나는 부율의 말마따나 아이처럼 그의 뒤를 촐랑촐랑 따라갔다. 항상 어둡고 좁은 시장만 보았던 내게, 부율이 보여준 수도의 장터는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니 많이 놀라웠다. 이리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던가. 새삼 내가 알고 있던 소설 속 세계와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를 절감하고 만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부율이 갑자기 멈추며 내게 보여준 것은 열쇠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구리로 만든 열쇠가 아니라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보아하니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부부 사이에 요새는 이것이 필수라 들었다.”

“필수……?”

“그래.”

싱긋 웃는 부율의 뒤로 상인이 고개를 내민다. 그는 장사할 생각에 신이 난 건지 잽싸게 물건을 우리 앞으로 들이밀었다.

“정조대 보시는 거요?”

상인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정조대라면 그곳에 채우는 잠금쇠…….

“부인분 것을 보시는 거라면 요새 이게 제일 잘 나간다오.”

예상대로 상인이 가져다 보인 것은 여성기에 채울 수 있는 잠금쇠와 열쇠였다. 형태조차 보기 민망해 자연스레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른 매대에 놓인 물건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은 호신용 칼이었다. 나는 모두가 내게 집중하고 있지 않은 때, 몰래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부율은 여전히 내 옆에서 열심히 상인이 늘어놓은 정조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걸 채우고도 밖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가?”

“암요. 하지만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셔야 하오. 소변을 눌 곳이 신통치 않으니까.”

“집에만 있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요. 요강이 있으니 보는 사람도 없고 잘만 쌀 것이오.”

“그럼 내 아내는 집에만 있어야 하겠군.”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부율을 쳐다봤다. 그는 그런 내 표정이 반갑다는 듯 되려 환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나를 바깥에 데리고 나와 끌고 다니는 남자의 속셈이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그새 삐졌느냐.”

“전혀요…….”

가게를 나가면서 부율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려 묻는다. 그에게 삐진다는 감정을 가진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고개를 팍 숙이며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마음을 대변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집으로 가지 않겠느냐.”

“네. 갈게요.”

“아니. 내 본가로 말이다.”

부율과 함께 있으면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주로 인상을 찌푸린다거나, 입술을 꾹 다문다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남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본… 가요?”

“그래. 네 신분을 증명할 것들은 전부 준비되었다.”

그가 말하는 증명이라는 것은 내가 바로 불이 난 곳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지방 귀족이라는 것을 꾸며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준비가 됐다는 말은 그럴싸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걸까. 부율은 때맞춰 내 앞에 신분 패를 내놓았다.

“네 진짜 적(籍)을 찾기 전까지다. 그때까지만 사람들의 눈을 속이자꾸나.”

“…….”

이걸 받으면 결국은 내가 그를 선택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네…….”

힘없는 내 대답에도 그의 표정이 한껏 밝아진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듯 몇 번이고 방방 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주변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기침을 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기쁘다. 매우 기쁘구나.”

마음이 복잡해진다. 본심을 숨기며 간신히 내뱉은 대답임에도 부율은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다. 사실은 그저 방법을 모를 뿐인데. 남자를 떠나, 어떻게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저곳으로 더 걸어가 볼 테냐. 호연에는 이것 말고도 신기한 것이…….”

내 눈치를 살피느라 무거웠던 그의 입이, 담았던 봇물이 터져 나가기라도 한 듯 가벼워졌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부율이 가리킨 어떤 것도 아니었다.

“저건…….”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나무로 된 창살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며칠씩 굶은 사람들처럼 가끔가다 행인들이 던져주는 물통을 필사적으로 집기 위해 창살 너머로 손을 내뻗었다. 시장을 구경 나온 여식들과 그의 종들은 더러운 꼴을 보았다는 듯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부율은 내 손끝이 가리키는 것을 정확히 응시했다. 속닥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율은 사뭇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노예 시장에 나갈 상품들이구나.”

“상품……?”

“그래. 포주들이 가끔 성질을 잡는다고 저렇게 길거리로 내보이기도 한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이었다. 부율이 그런 나를 보곤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안절부절 해하며 다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누룩. 넌 절대 노비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이 세계의 신분 제도에 대해 박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1년간 지내면서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평민과 노비가 있고, 그 위에는 일반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양반과 관리들이 있었다. 나는 아마 그중 평민이나, 노비였으리라. 혹은 단지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으니 신분조차 주어지지 않은 역할일 수도 있었다. 중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가슴이 답답했다.

“이놈은 내일 성노예로 팔릴 놈이니 미리 잘 봐두시오! 어미는 기생방 출신에 아비 또한 도망친 성노예 출신이니……. 허허. 이보다 출생이 음탕한 노비 놈은 없을 것이라!”

금세 사람들 앞으로 등장한 상인이 창살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인다. 숙덕대던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상인의 손끝에 닿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

남자는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나는 몰려든 사람들을 뚫고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의 머리카락 색은 어딘가 그을린 듯 회색빛이 감도는 검은색이었다. 그는 불안한 듯 몸에 붙어 있는 털이란 털은 전부 다 집어 뽑고 있었다. 눈썹과 풍성했던 머리숱. 선명했던 이목구비가 남자의 자해로 사라져 간다. 그는 수오 님과 달랐다. 전혀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푸른색의 눈.

내가 사랑하는 수오 님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한 색채였다.

“이거…….”

나는 품에 있던 작은 과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잠시 나를 경계하다가 이내 허겁지겁 내 손에 든 것을 뺏어 든다. 그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그의 눈에서 수오 님을 연상할 수 있을 뿐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그의 입술, 그 목소리, 나를 만지던 그 새하얀 피부… 손길…….

“…읏.”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사라져 버린 걸까. 마치 생생한 꿈을 꾸고 깨어난 뒤에도 그 꿈을 좇는 사람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부율이 내 손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성노예가 갖고 싶은 것이면 마련해 주겠다.”

“그게 아니…….”

“그게 아니면 첩이라도 들이고 싶은 게냐? 양반이라고 해도 지아비의 허락 없이는 들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게냐.”

그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실망한 그의 입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나서서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떤 말로 변명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첩을 들이지 않을 건데.”

“네……?”

“나는 들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또 어이없기도 해서 그의 눈을 피해 버렸다.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예전에 느꼈던 공포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덤덤해져 간다.

“네가 들인다면 나는, 하아…….”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다 말고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되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구나.”

남자는 내 손을 잡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를 보며, 문득 그의 귀가 참 빨갛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나쁜 성정은 아니었던 건가. 나는 소설 속 부율이 어땠는지를 한참 되짚어 보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고여있던 눈물은 감쪽같이 말라 있었다.

* * *

호연의 끝자락에 있던 은거지를 벗어나 도착한 부율의 본가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커다랬다. 아니, 웅장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가옥들보다 폭이 훨씬 넓은 담 때문인지 눈에 더 띄었다. 자연스레 위축된 어깨가 절로 내려앉는다. 부율이 내 어깨를 감싸지 않았더라면 고개마저 숙어졌을 것이다.

“드디어 오셨군요. 부율 님. 별가에선 푹 쉬셨습니까.”

“이 연.”

문지방을 넘자마자 부율의 앞에 한 남자가 선다. 그는 날카로운 눈을 하고 나를 힐긋 훑었다. 그러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계집… 아니, 여자분을 데려오셔서 놀랐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려다가 말고, 다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과하다 싶으리만큼 화려한 비단옷을 보고 조금 누그러지기라도 한 걸까. 내 복장을 본 남자의 호흡이 다소 정돈되었다.

“사내일 거로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곳에 계셨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부율은 내 손에 들린 신분 패를 이 연이라는 남자에게 건넸다. 그것을 본 남자는 동요를 숨기는 것처럼 얼굴을 굳혔지만 커진 눈은 감추지 못했다.

“…호연까지 향리의 여식이?”

“창관에 불이 난 것은 알 것이다.”

“예. 여기까지도 소식이 파다했습니다. 헌데…….”

“내가 그 창관에서 구한 분이시다.”

“예?”

남자의 동공이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커졌다.

“제게는 불이 나기 전에 별가로 오셨다고…….”

“거짓이다.”

“허……!”

나는 초조하게 부율의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그의 손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 밉기도 했지만, 기어이 그의 본가까지 들어온 저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앞에 있는 남자에게는 내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질 만도 하니, 절로 숨이 가늘어졌다.

“대감님이 황궁에 계신 게 차라리 천만다행입니다.”

“아버지가?”

“네. 어젯밤 급히 궁에 불려가셨습니다.”

“…….”

부율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그도 잠시 연이라는 남자가 그에게 날 선 질문을 던진다.

“이 처자 분은 어쩌시려고요?”

“정식으로 혼인을 올릴 때까지 이곳에 머물 것이다. 혼례가 끝난 뒤에는 나와 함께 출가할 것이고.”

“예? 잠시만요.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혼례… 그러니까 아내로 맞으신단 말입니까?”

“그래.”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연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깊이 팬다. 그러나 부율은 그런 남자를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내 등을 감싸며 발을 재촉했다.

“연방(緣房)에 묵게 할 것이다.”

“율. 그건 안됩니다.”

남자의 다급해진 말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부율을 향한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태도에도 부율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릴 뿐 고함을 치지 않았다.

“스승이었다 해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하아… 이런 제자를 둔 제가 바보 천지지요. 안 그렇습니까.”

“뭐. 굳이 네 입으로 그리 말한다면 부정은 하지 않겠다.”

부율보다 단지 서너 살쯤 위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스승이었다고. 조금 색다른 이야기에 잠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다시 시선을 내렸다. 어차피 관심 가질 일은 아니었다.

“꿈속의 여자한테 줄곧 꽂혀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남자는 길게 말을 늘여놓다가 나를 흘끗 보고는 뒷말을 흐렸다. 부율은 더욱더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청산유수처럼 입을 연다.

“드디어 만났거든. 내 운명의 짝을.”

“허!”

딱 벌어진 남자의 입이 황당무계하게 보일 만큼 그는 놀랄 기색이 역력했다. 부율은 그 얼굴에 자신이 한 말이 민망했음을 깨달았는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한테는 돌아오시면 내 직접 설명할 테니 그리 알아둬라.”

지금도 굳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남자를 향해 부율이 무심하게 말을 던진다. 어떤 것도 내 의지가 아닌 전개들이 펼쳐지는 동안, 나는 화려한 가옥 주변으로 눈을 돌리며 앞으로의 나날들을 걱정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 스승일 때 몽둥이를 들어야 했던 것을…….”

부율의 빠른 걸음과 함께 멀어지는 남자의 입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고충에 공감이라도 갔던 걸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 *

나는 연방에 들어와서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연방(緣房)은 그의 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랑방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부율에게 중요한 손님이 있을 때 내어 주던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그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하니 싱숭생숭해진 기분도 한몫했다.

그저 소설 속 등장인물로 생각하고, 정해진 결말로 치닫는 인물이라고 생각만 했는데 이제야 그를 실감 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그에게는 지난 세월의 추억이 있었다. 내게는 고작 1년뿐인 이곳이 그에게는 삶이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그가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

“…….”

문에는 그가 걸어 잠그고 간 자물쇠가 있다.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던 것을 보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한다. 나를 불안해했다. 내가 그를 떠날까 봐, 허황한 연인을 찾아 도망갈까 봐.

나는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을 보았다. 그곳에 몸을 비추어 본다. 노랗게 뜬 불 등 때문에 소매를 걷은 팔에도 주황빛 색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빛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작은 칼날을 꺼내 들었다. 낮에 시장에 갔다가 상인이 보지 않은 틈을 타 몰래 훔쳐 온 호신용 칼이었다.

“…수오 님.”

드디어 조용해진 공간에서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도 내 귓가에만 들릴 뿐이다. 나는 작게 안심했다. 나를 해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수오…….”

그가 그리웠다. 그래서 이리도 악독한 마음이 드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그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이토록 끔찍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실은, 벗어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혼례를 올리자는 약속조차 잊히길 바랐다. 그만큼 마음이 아팠으니까. 혼자 살아남아 그의 결말이 되어야 했던 남자와 함께 있다는 것에 죄악감을 느꼈으니까.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내가…….

“흑…. 으… 흑…….”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칼날을 든 손은 겁쟁이처럼 흔들렸다.

“아. 으… 으…….”

공포가 온몸을 굳혀 온다. 그 날카로운 것이 피부 겉면에 푹 박히고, 이슬방울처럼 피가 맺힐 때도 두려움이 정신을 지배했다. 핑 도는 머릿속에서 수오 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수오 님…. 아…….”

응답은 없었다.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 그가 죽었다는 매서운 예감만이 붉은 피처럼 내 팔을 휘감는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 검은 세상이 나타날까.

아니면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 * *

빛이 겨우 새어 나오는 장막을 향해 수많은 손이 가지런히 뻗친다. 눈동자가 모두 메말라 있었다. 며칠을 굶은 자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이 진정 사람이었음이 맞는가. 그저 물 한 모금, 어떤 부스러기라도 탐하듯 나약한 입들이 꾸역꾸역 벌려진다. 빛에 구원이라도 바라는가. 모두의 숨소리가 그 작은 구멍 밖으로 씨익, 씨익 거세게 새어 나온다.

“우라질.”

장막이 걷히며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온다. 그에게 역시 죽음의 냄새가 났다. 허기져 있었고, 작은 몇 푼에 허덕이는 자였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불길을 먼저 발견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작은 마을에 난 거센 불을, 그는 놓치지 않고 기회로 삼았으며 이토록 많은 사람을 돈을 들이지 않고 저의 재산으로 훔쳐 올 수 있었다.

“화상이 심하고 병든 자들은 때려죽여. 아끼지 말고. 값어치 떨어지는 것들이니까.”

한탕을 노리던 조력자들이 망설임 없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몸의 절반이 흉측한 화상 자국들로 가득한 여자. 머리 반쪽의 가죽이 벗겨져 기절한 채 몸을 오돌오돌 떠는 남자. 그중에는 악취가 난 채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열 살 남짓한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너. 너. 너.”

조력자들의 손끝에 의해 선택받은 자들의 목숨이 픽, 픽 사라져 간다. 누군가의 지아비였으며 아내였고, 친우였으며 자녀였던 자들이 잿가루 가득한 불쾌한 공기 중에서 연기처럼 없어졌다. 생명이 너무 쉬웠다. 이들을 납치하고 포승줄에 매고 가두어둔 자들이 손쉬운 처리 방법에 낄낄댄다. 시체들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차곡히 쌓여갔다.

“이놈은 남창 새끼인 것 같은데?”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이 그들의 눈에 밟혔다. 그저 은색 빛인 줄만 알았는데 햇빛에 반사되자 제법 말도 안 되게 예쁜 보라색으로 변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본 그들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바지 섶이 불룩해진 자들도 있었다.

“처음 불났던 창관에서 난 놈 아냐?”

“이런 걸 가져온 놈도 대단하네. 어떻게 그 불길 속을 들어갈 생각을 했는지 몰라.”

“우라질. 입 닥쳐. 역시 색기 하나는 끝내주네.”

처음부터 창관에 눈독을 들였던 남자의 눈가가 흥분으로 붉어진다. 안 그래도 창관의 담이라도 넘어 이놈을 강간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자였다. 운이 좋게도 불이 나 소란이 일었고 그 틈으로 이놈을 구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등 뒤로 큰 화상을 입었지만 창놈을 팔아 돈을 벌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가 씰룩 올라갔다.

“옷 좀 벗겨봐. 상태 좀 보게.”

남자의 외모에 넋이 나간 듯 침을 줄줄 흘리던 남자들이 허겁지겁 손을 뻗어 남자의 몸을 더듬는다. 원래 목표였던 옷을 벗기는 것 따위에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이 우라질 것들이!”

상품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사내 한 명이 소리를 질러서야 남자들의 손이 그칠 수 있었다. 그때, 남자의 옆구리를 살피던 남자가 심각한 표정을 한다.

“상처가 심하잖아. 젠장 맞을.”

“치료도 안 하고 여기다 둔 거야?”

“화상이 곪아서 완전히 문드러졌는데?”

얼굴이 멀쩡하여 상처가 없는 줄 알았는데, 뒤집어 보니 옆구리와 이어진 등 쪽에 화상 자국이 심했다. 제때 치료를 받지 않아 고름이 찼고 흉측한 색이 되어 있었다. 가망이 있을까. 다행히 그는 희미한 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죽을 듯이… 하지만 어둠에 익숙했다는 듯 뚜렷이 살아 있었다.

“이딴 걸 보고 서겠어?”

한 명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젓는다. 두툼하게 차올랐던 바지 섶도 어느새 펑퍼짐하게 밋밋해졌다.

“얼굴은 멀쩡하니까 입에 넣고 싸면 되잖아.”

하지만 대다수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눈동자가 홀린 듯 풀려 있었다.

“좋다. 의원을 불러. 나머지 놈들도 구분해서 모아 놓고. 기운을 차리기 전에 한 번 더 제대로 묶어놔.”

장막이 완전히 벗겨졌다. 작은 감옥 같은 나무 창살 사이로 상품들을 밀어 넣고 운반할 준비를 마쳤다. 그중 최상급이 될 것들만 가려 치료를 할 준비를 한다. 빛은 언제 사라질까. 남자들은 밤을 기다렸다. 게 중 그들의 부인되는 여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모두의 마음이 한곳으로 쏠렸다. 보랏빛 머리카락. 곱고 새하얀 피부. 붉은 입술을 한 화향관의 창부에게.

잔악한 시간은 유난히도 느리게 흘러간다. 그 창부의 푸른 눈이 그곳의 까만 어둠처럼 더럽혀져 갈 때까지…….

* * *

눈이 부셨다. 아직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눈꺼풀에 내려앉는 햇살이 제법 여름 티를 냈다. 낮이 길어졌다. 달빛이 가시기도 전에 해가 떠오르다니. 아직 어둠에 익숙한 몸은 삐걱거리며 간신히 깨어난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 연이었다. 그는 묵묵히 나를 응시했다.

“아…….”

팔에 감긴 천을 보고 나서야 어젯밤 내가 한 짓을 깨달았다. 이 사람이 감아 준 걸까. 천에 약간의 피가 묻어 있는 걸 제외하고는 그다지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저린다. 내가 바랐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남자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청량한 목소리에 깔린 낮은 비웃음에 그의 태도가 부율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율 님이 그리 문 앞을 서성거리는 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

“다 큰 성인 여자를 데려온 것으로 모자라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진정 저질이지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천을 감아준 것에 대한 감사라도 전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를 보는 남자의 무심한 표정에, 그 정적 사이로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듣기에도 나약한 말이 흘러나왔다. 남자 역시 답답해 보였다.

“소저를 혼내는 것이 아닙니다. 부율 님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 하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조차도 의심스러우리만큼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칼을 훔쳤고, 그 칼로 팔을 그었다.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편안함마저 들기까지 했다. 나는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걸까.

“부율 님은 관에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러니 제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남자의 미간이 걱정스레 좁혀진다. 처음 느꼈던 냉정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부율 님은 어렸을 때부터 악몽을 꾸셨습니다. 꿈속에서 묘령의 여인이 자꾸 자신을 떠난다고 말씀하셨죠.”

“아…….”

묘령의 여인이라면 꿈에서 본 그 전생을 말하는 것일까.

“그 때문인지 집착이 꽤 강하신 편입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그의 집착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성격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소설 속 묘사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소저가 마음에 든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힘드실 겁니다.”

“…….”

“더구나 혼례를 올린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저도 예상하긴 어렵습니다.”

남자는 부율의 어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혀를 둘렀다. 지금껏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 역시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여태껏 나와 그가 같은 전생을 보고 있다는 것으로 그 모든 억지를 끼워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제는 흐릿했다. 그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정말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과 상관없이. 그저 나를.

“저를… 보내 주실 건가요?”

내 질문에 남자는 곤란한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마 아직은 안 될 겁니다. 아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왜죠?”

“부율 님이 진심이신 거라면 소저를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게…….”

“영리하신 분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소유욕으로 보여도… 언젠간 크게 번질 겁니다.”

남자는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숨겼다. 나 역시 되묻지 않았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체념하게 되는 걸까. 지금껏 마음대로 이루어진 일이 몇이나 있다고 내 주제에 기대했던 걸까. 한심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부율 님은 어차피 공주님과 혼인하셔야 하니 상황을 보고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주님… 이요?”

“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어명 하신 일입니다.”

“…….”

그의 가문이 황궁과 가깝다는 묘사는 소설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공주와의 혼약도,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조금만 견디십시오.”

남자는 다시 내 팔목으로 눈을 돌렸다.

“힘이 없으셔서 깊게 찌르지 못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남자에게 동조했다. 두려움이 이겨버렸다. 아쉬움과 함께 무덤덤한 시선이 뒤에 남는다.

“아, 그리고 팔 뒤에 희한한 반점이 있더군요.”

남자가 직접 팔을 구부리며 시늉을 해 보인다. 나도 그렇게 해 보라는 의미인 것 같기에, 무의식중에 그를 따라 팔 뒤를 내보인다. 그러자 정말 남자의 말대로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었다.

“혹시 암시장에서나 파는 약을 드신 겁니까?”

“네?”

“위험한 약물을 한 자의 몸에서 그런 반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 지금일까. 순간순간 기억이 사라졌던 때가 왜 하필 남자의 말과 함께 되살아난 것일까.

“이걸 드시면 조금 나을 겁니다.”

남자는 내게 약이 든 함을 건넸다. 안을 열어보니 정(錠)으로 된 것들이 열 개정도 들어 있었다.

“피에 섞인 독을 빼는 해독약입니다. 어떤 약을 드신 건지 몰라 확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기분은 나아지실 겁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여전히 그가 건넨 약들을 보며 망설였다.

“그럼 부율 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오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방에서 떠났다. 그때까지도 내 시선은 줄곧 한곳에 꽂혀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약을 취한 것인지도 알 수 있는 걸까. 불길한 것이 뱀의 혀처럼 목을 옭았다. 약이 식도로 넘어갈 때까지도, 기이한 소름이 계속해서 나를 뒤좇아왔다.

* * *

그날 밤, 나는 꿈에서 내 몸만 한 공간에 갇혀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일부인데도 나의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 감각이 계속됐다. 몸을 구부려도 구부러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먼 곳에 있는 그림자에 초점을 맞췄다. 힘없는 팔이 맥없이 접혔다. 그런데도 역시 감각이 없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약효는 여전한 것 같구나.

그 그림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수오 님이었다. 나는 접힌 팔을 펴, 최대한 앞으로 뻗어 보았다.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멀게만 보였는데 그의 얼굴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그는 내가 보이지 않는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하나 더 먹는다 하여 나쁠 것은 없으니.

그의 손에 약을 싼 포(包)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능숙하게 벗겨 내며 누군가의 입에 넣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있는 그림자를 자세히 보기로 한다.

무엇 하느냐. 어서 삼키지 않고.

…수오야.

여자였다. 그녀는 그제야 남자를 알아봤다는 듯이, 간절히 손을 뻗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쉬이…. 아기씨.

그런 그녀를 달래며, 잔혹하게 미소하는 수오 님이 보였다.

곧 잊혀질 것입니다.

여자는, 나였다. 수오 님이 약을 주고, 달래고 있는 상대는 울고 있는 나였다. 혼란스러웠다. 그가 내게 약을 준 적이 있었던 걸까.

그때, 눈앞이 온통 검게 변했다. 눈을 깜빡이며 어떻게든 안개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시야가 환해졌다. 익숙한 방이 바깥에 있었다. 그리운 향기가 코끝에 들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수오 님의 방이었다.

미치겠구나. 좁아. 이렇게 좁을 줄은… 하아.

그날은, 분명 백준이 왔던 날이었다. 수오 님과 함께 정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남자를… 나는 질투 했었다. 그래서 수오 님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었던 걸까. 기억이 희미했다. 하지만 수오 님과 질척이는 성교를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방에, 분명 누군가가…….

그만…….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삐죽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문으로 도망치다가 말고, 의식을 잃고 기절했다. 첫 경험의 난폭한 아픔이 그녀의 정신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 뒤에 있던 수오 님은 여자의 뒤를 붙잡고, 다시 제 것을 쑤셔 넣었다.

큭…. 하, 누룩…….

여자는 나였다. 수오 님은 기절한 나를 붙잡고 몇 번이고 정액을 쏟으며, 내 몸을 유린했다. 온몸이 충격으로 오슬오슬 떨렸다. 여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제 몸을 멋대로 희롱하는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시, 싫…! 아……!

정사는 남자의 욕구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이런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랫도리가 부서질 듯 아픈데 남자는 거칠게 여자를 탐했다. 그러다, 정사의 마지막에 남자가 아까처럼 약이 든 포(包)를 꺼내 들었다. 여자의 입안이 약으로 가득 차자, 그녀는 다시 쓰러졌다. 수오 님이 넋이 나간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광기에 찬 눈초리였다.

너를 연모하고 있다…. 누룩.

진실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그에게 안기길 청하기 전부터, 나는 그에게 안겼었다. 그만두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어냈었다. 충격으로 가득했던 눈이 혐오감으로 물들었을 때도 수오 님은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쌓아온 성욕을 풀기 위해 나를 그의 품 안에 가두며 엉망이 될 때까지 허리를 움직였다.

“으… 윽.”

곧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신음했다. 괴로운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라,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몰라 질척거렸다.

누룩.

꿈에서 깨기 전, 다시 수오 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그게 이제 아기씨의 이름입니다.

그의 모습은 내가 아는 수오 님보다 조금 더 어렸고, 조금 더 대담했다. 머리는 더 짧았으며 몸은 더 단단했다. 입고 있는 옷이 노비들이 입을 법한 얇고 담담한 무명천이라 그런 건지 내가 아는 그보다 더 거칠어 보이기까지 했다.

같이 도망가는 겁니다. 저와 함께…….

그가 웃는다. 알 수 없는 기억이 멋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괴로웠다.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몸은 익숙한 믿음을 짓누른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감각이 생생했다.

수오 님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는 아릿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무서웠다. 수오 님. 아니…….

수오, 그자가.

* * *

“신하 술원성, 황제 폐하를 뵈나이다.”

황제와의 독대에도 술원성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자신의 군주와 마주했다. 격조한 사이 황제의 얼굴이 더 그늘져 보인다면 착각일까. 술원성을 보는 황제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혼례는 미뤄야겠네.”

황제의 말이 떨어졌다. 술원성의 미간에도 작은 주름이 진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직접 들으니 그 사정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황송하오나, 이유를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사옵니까.”

“공주가 병상에 있네.”

거짓이었다. 황제도 알았고, 술원성도 알고 있었다. 같은 곳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곳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 술원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아들이 관직에 오를 나이가 많이 지났습니다.”

“흠.”

황제의 한숨으로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술원성은 자신의 고집스러운 아들을 떠올리며, 어떤 것에 도박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가문을 위해서 부마의 삶을 살기를 밀어붙였지만, 이리도 혼례가 늦어진다면 그로서도 재고의 여지가 생긴다.

“지금이라도 부마도위를 포기하고 관직에 올라 황궁에…….”

“절대 반년은 걸리지 않을 거네.”

술원성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은 황제의 입가가 단호해진다. 하지만 실상은, 초조했다. 스물여덟이면 관직에 오르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었다. 만일 그가 오랜 친우 가문이었던 황가를 배신하고 반란을 도모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다.

“부율은 나의 하나뿐인 사위가 될 것이다. 짐이 약속하지.”

내실 없는 달콤한 약속.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고 저버리기에 술원성은 가문의 오랜 역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원칙과 규범. 그의 머릿속에 황제의 사람이길 포기하는 선택지란 추호도 없었다.

“뜻 받들겠나이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오랜만에 궁에 머물다 가게. 내 궁녀들도 빌려줄 테니.”

“…황공하옵니다. 폐하.”

희정궁(熙政宮)을 나서는 술원성의 옆으로 관내(官內)들이 붙었다.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술원성은 제 아들이 공주와의 혼인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례가 늦어진 만큼, 그 시간 동안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술원성은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사라진 가짜 공주로 인해 난잡해진 황궁의 내실을.

* * *

“누룩. 네게 보여줄 게 있다.”

소름 끼치는 기억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부율이 들뜬 얼굴을 하고 나를 재촉했다.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부율이 내 팔을 가볍게 붙잡는다. 순간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부율은 나를 그의 마당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복사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복숭아다. 혹시 좋아하느냐.”

“…….”

복숭아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맛은 알고 있었지만,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 이 연이 준 해독약을 먹은 뒤 조금씩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지만, 기억의 흐릿한 부분은 여전히 뿌옇게 번져있는 채였다.

“따볼 테냐.”

나는 대답 없이 상기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것을 긍정의 표현으로 이해한 것인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 어서.”

“아, 저……!”

그가 그대로 내 팔을 잡아당긴다. 어느새 그에게 붙들린 손에 솜털이 부드러운 복숭아가 만져졌다. 그대로 툭, 하고 돌리자 잎사귀와 함께 복숭아가 내 손으로 떨어졌다.

“옳지. 내가 본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잘 따는구나.”

…그런 칭찬은 필요 없는데. 나는 무심하게 그를 흘겨본 뒤 내가 딴 복숭아를 쳐다봤다. 아까는 몰랐는데, 제법 맛있어 보인다.

“잠시 이리 다오.”

부율이 내가 들고 있던 복숭아를 빼앗아 자신의 옷 소매 안쪽에 여러 차례 문질렀다. 이윽고 만족스럽게 닦였는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시 복숭아를 건넸다.

“자.”

나는 잠시 망설이다 남자가 건넨 복숭아를 받았다.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난다. 어서 한 움큼 베어먹길 바라는 듯이.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입을 크게 벌려 복숭아를 베어 먹었다. 과즙이 입안 가득 들어왔다. 복숭아의 맛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달고, 물이 많았다.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부율의 입매가 양옆으로 올라갔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음이 흘렀다. 그때,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았다.

“어여쁘다.”

“아…….”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 사이에 생긴 잠깐의 정적을 즐기고 있다는 듯이 입가를 화사하게 풀었다.

“손목에까지 복숭아 물이 떨어지는구나.”

부율이 아깝다는 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그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흘러내리는 농밀한 복숭아즙을 부드럽게 핥았다.

“읏…….”

아무것도 아닌데도. 단지 끈적한 물을 닦아내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혀에 익숙해진 몸이 완전히 녹아 버렸다. 뺨이 뜨거워진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여름의 풍경이, 웬일인지 더 푸르렀다.

“너는… 아름답구나.”

부율의 말이 완전히 내게 닿기 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단지 그의 뒤로 복숭아 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애달팠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그래서 멍하니 그 잎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완전히 다른 곳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복숭아 먹고 싶다.”

나는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복사나무 아래에 두 남녀가 서 있다. 아직 소녀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그보다 조금 큰 소년이 보인다. 소녀의 머리 위에 있는 화려한 나비 모양의 장신구가 그녀가 귀족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단단한 골격과 달리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기씨가 따보세요.”

“…….”

여자의 표정이 금세 뾰로통해진다. 덕분에 옆으로 늘어진 볼살이 앙증맞았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작은 불만이 생긴 것인지 그녀는 남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저건 너무 위에 있어서 키가 안 닿잖아. 난 안 되는데. 오라버니가 나 대신 따주지…….”

“저, 오라버니 아니에요. 아기씨.”

따끔하게 혼내는 듯한 남자의 말에 여자의 손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끝내 손안의 소매는 놓지 못한다. 그걸 아는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여자를 달랬다.

“귀족은 한낱 종한테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안 돼요. 그냥… 수오라고 불러요.”

그의 이름을 듣자 겨우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수오 님이었다. 스물세 살의 창부로 살던 남자가 아닌, 어린 노비 신분인 소년이었다.

“나 귀족 아닌데…….”

“아기씨.”

“나는 고아잖…….”

“아니에요. 나리께서 아기씨를 수양딸로 삼으셨으니 아기씨도 똑같은 귀족이에요.”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 눈빛은 수오 님이 내게 보였던 것과 닮아 있었다. 따듯하고, 온화한…….

“기다리세요. 따드릴 테니까.”

“응…. 고마워. 오라… 아니, 수오야.”

소녀의 말에 남자는 잠시 미소 짓더니 바로 일어나 복사나무에 다가갔다. 그는 커다란 키를 이용해 금방 가장 높이 있는 복숭아를 따내더니 곧장 그녀에게 건넸다. 복숭아를 받아든 그녀의 입매가 고와진다. 그 늘어지는 웃음을 본 남자의 얼굴도 덩달아 화사해져 갔다.

“정말 맛있어!”

커다란 미소. 올라간 광대. 햇살에 비춰 뽀얘진 소녀의 피부를 본 그의 두 뺨이 뜨겁게 붉어진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 뜬금없는 자극에 놀란 남자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아, 너무 빨리 드시진 마세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복숭아를 입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가 정신없이 복숭아를 베어 물고 있을 때, 그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수줍은 시종의 스치듯 미약한 말이 그대로 바람과 함께 떠밀려 갔다. 흐릿한 시야도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눈앞의 선명해진 부율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억 속의 그 소녀처럼 복숭아를 베어 물어 과즙이 입안에 도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의 소년이 아니었다. 달라진 풍경, 달라진 시간 속에서, 부율은 걱정스레 나를 살폈다. 그 어설프고 행복했던 시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혹시 맛이 없는 것이냐?”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눈시울을 붉게 적셔, 그대로 두 뺨에 흘러내렸다. 부율이 당황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 반동으로 손에 있던 복숭아가 또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은 것이냐! 내가 잘못했다. 이리 맛없는 것을 내가…….”

“아니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 맛있어요…….”

그저 단 향기가 떠나지 않는다. 내 곁을 계속 감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복숭아… 고마워요.”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목소리에서 울리는 의미가, 향과 함께 아득해져 간다. 부율은 내 눈물이 그칠 때까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되찾는 것이 이리도 잔인한 일인 것을, 왜 몰랐을까. 그저 소설 속이라고 믿었던 1년의 시간이 사실 거짓이었다면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선명한 것은 나와 그의 이야기였다. 전생을 기억하고 그의 시종으로 지낸 지난 1년 동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그의 첫 시작…….

바로 그가 나의 가장 가까웠던 친우이자, 나의 노비였다는 사실이었다.

* * *

가끔 꿈에서 온기를 느낄 때가 있었다. 사람의 체온만큼 따듯한 깊이에 피부처럼 옅은 보드라움. 사람이 그리웠던 어린 시절에 나는 그렇게 환영을 보곤 했다. 자고 있는 나를 누군가 정성껏 쓰다듬어주는 장면을. 그 장면은 이따금 괴롭게 다가와, 꿈에서 깨어나 보면 베개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아쉬웠다. 더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정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그때. 내게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어째서 이토록 차가운 걸까. 왜 나는 언제나 혼자여야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런 내게, 하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그가 다가왔다. 그는 내가 본 누구보다 순수한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해 웃었다. 처음으로 가슴이 우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깨어난 외로움에 울고 마는 그런 애처롭고 꼴사나운 감정이 아니라, 너무도 따듯해서 울고 마는.

“자, 생일 선물.”

그는 줄곧 방에만 있는 내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선물을 건넸다. 나와 같은 또래쯤으로 보이는,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은 그 낡은 포장에도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마구간에서 주워온 것으로 보이는 건초가 작은 상자를 매듭짓는 끈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소년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비밀이라고 말했다. 이건 아직 내가 그를 이곳의 노비인 줄 모르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열어 보세요.”

나는 그의 말대로 종이를 열심히 뜯었다. 얇은 선지에 불과한 포장지가 금세 찢어진다. 그 안에는 구슬이 있었다. 얼마나 광이 나게 닦은 것인지 놀랄 만큼 반짝이는 작은 구슬이. 눈이 커다래진다. 너무 예뻐서, 혹은 내게 선물을 한 소년이 기뻐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서글퍼졌다. 그건 내가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저기… 하지만 저는… 생일이 아닌데.”

소년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반말과 존대가 섞인 내 말에도 그는 반달 눈을 했다. 나는 그의 가족이 아닌데. 단지 새로이 끌려온 이곳에서 같이 사는 사람일 뿐인데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선물도 줬다. 소년을 향한 호기심이 처음으로 들끓었다. 그는 엉망이 된 선지와 건초를 그의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해맑게 웃었다.

“작년 이맘때에 왔으니까, 오늘이 생일이에요.”

그 말이 얼마나 제멋대로인 말인지도 모르고 나는 소년을 따라 웃었다. 아하하.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조금 더 웃는데, 그가 다시 날 보며 말했다.

“내년에는 더 반짝이는 걸 드릴게요.”

그 영롱한 말을 몇 년이고 간직하게 될 줄은 그때에는 몰랐다. 단지 소년의 얼굴이 너무나 어여뻐서, 그 미소가 가을날의 단풍과도 어울려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순수했다. 아무것도 모를 무렵의 우리는 누가 봐도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했던 이상이 깨어졌다. 우리는 달라졌다.

“오라버니.”

나는 그를 가족처럼 대했고, 그는 언제나처럼 내게 미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음, 저기… 아기씨. 그리 부르지 마세요.”

“어… 왜……?”

당황스러웠다. 그는 언제까지고 차가운 이곳을 따듯하게 만들어 주는 나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처음으로 거부했다. 벌써부터 동그란 눈 밑에 울적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 역시 당황했는지 서둘러 내 앞에 서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그의 어른스러운 표정에 심장이 뛴 것은 왜였을까. 장난기 어린 소년이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우리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저는 노비니까… 요.”

“노비……?”

그때는, 노비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노비. 우리 사이에는 선이 있잖아요.”

“선이라니…….”

“저는 아기씨를 지켜 드려야 해요. 세수를 도와드려야 하고, 밥도 차려 드려야 하고, 방 앞도 지켜야 하고…. 하지만 아기씨는 저를…….”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이 걱정인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뒷걸음질 치며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지끈. 가슴이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아찔해졌다. 하지만 나는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와 똑같이 웃어 보였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무 다정하게 대하면 안 돼요.”

매일 숨을 쉬는 공기가 이토록 무겁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을까. 겨우 열네 살이었던 내게 그가 던진 말은 너무도 무거웠다. 가혹했고 청천벽력같은 말이기도 했다. 그는 내 오라버니가 아니다. 이제 막 깨달은 사실 앞에서 나는 아직 어렸고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욕심이 컸다.

그는 충격받은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을 했다.

“안 그러면 내가 착각해버릴 것 같아.”

* * *

열여섯 살의 가을이었다. 그가 내게 선을 그은 후로 우리는 잠시 어색했지만, 그어놓은 선만큼 우리는 평범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른 시종들을 대하듯, 그를 대하려 노력했고 자연스레 오라버니라는 호칭도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멋대로 정한 내 생일 날이 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 앞을 살폈다. 역시나 작고 보잘것없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너무 기뻐서 입이 주체하지 못하고 옆으로 크게 늘어진다. 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와 상자를 풀었다.

그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연보라색의 구슬이었다. 해에 비추어 보자 반짝반짝 빛나며 은빛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세 개의 구슬 옆에 두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내게 구슬을 선물한 지 벌써 4년째였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한 것은 그와 내가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는 것이었다. 주로 그는 바깥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따금 그가 청소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올 때면 반가워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행복했다. 더 많은 구슬을 가지고 싶었다. 그에게 더 보채고 싶었다. 떼를 쓰고 싶었다. 더 어리광을 부리자. 바보처럼 그때는 달콤한 꿈을 꾸었었다.

그날은 더 특별히, 유난히도.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

해진 무명옷을 바느질하던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떴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 가옥에서 한 발짝도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왜 그래선 안 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내가 이곳에 입양된 것과 엇물려 함께 따라오는 규칙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를 이용해 밖에 나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생일이니까, 그가 내게 부여해 준 나의 생일날이니까 조금은 도와주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그러다 곧 입이 열렸다.

“물론이요. 아기씨.”

분명 동요하고 있음이 분명할 텐데도 그는 용감한 척 내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는 삯바느질을 멈추고 금방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게 손짓했다.

“이거 입을 수 있어요?”

그가 내게 건넨 것은 집에 있는 노비들이 입을 법한 누렇고 얇은 소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당장 입고 있는 옷을 벗으려는데…….

“아기씨!”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옷고름에 간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훈계했다.

“방에 들어가서 입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 들어가서 그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다 입고 나오자, 그가 나를 데리고 노비들만 안다는 낮은 담벼락으로 갔다.

그가 먼저 담 위에 올라가서 나를 담 위로 끌어 올려 주자 바깥세상이 눈앞에 드러났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푸르고 울창한 숲길은 지루한 가옥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런 날 보며 그가 미소 지었다. 발이 땅에 닿자, 그가 주변을 살피면서 나를 길 위로 이끌었다.

“시장으로 가봐요.”

“응!”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 좋았다. 아니, 그와 함께라면 마음이 멋대로 설레었다. 시장에 도착하자, 내가 입양되기 전에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시골 인심과는 다르게 경쟁을 하며 퍽 매정했고, 그럼에도 진귀한 것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먹을거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내 눈빛을 알아챘는지 그가 금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서 오래 기다린 후에야 음식을 만드는 상인과 대면할 수 있었다.

“뭘 드릴까?”

상인의 말에 그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홀린 듯 손가락으로 나무 막대기에 둥실둥실 떠 있는 새하얀 과자를 가리켰다.

“저거.”

“설탕 과자요?”

“응!”

내 대답에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사실 그가 사주는 것은 무엇이든 좋았다. 그런 내 마음을 들킨 건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는 듯 그가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씨처럼 귀여운 모양이라서요.”

두 볼이 붉어졌다. 칭찬일까. 내가 귀엽다니.

“두 막대 드릴까?”

상인의 물음에 그가 주머니를 살핀다. 쨍그랑 동전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작게 들렸다. 상인이 눈치껏 하나의 막대를 내게 건넸다.

우리는 과자를 받아 들고 시장에 흔히 너부러져 있는 목제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있잖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직 베어 먹지 않은 과자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먹구름처럼 커다랗게만 보였다.

“구슬… 많이 비싼 거였어?”

그의 주머니가 비어 있는 이유. 나는 그게 궁금했다.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는 신분이라는 것을, 내가 귀족이 되었고 그가 줄곧 노비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혹시 그는 매년 내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서 그동안 무리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질문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아기씨.”

“왜……?”

“그런 싸구려, 싫으셨죠. 이제는 보석이 갖고 싶으실 나이신데…….”

찌르르 가슴이 아팠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가 주는 거라면 어느 것이든 기쁘기만 한데. 세상에 이런 감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벅차오르기만 했다. 그런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나는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과자를 양 볼 가득 입에 넣었다. 그래도 금방 혀에 녹아 버렸지만, 그의 입가가 다시 올라가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어느새 나보다 먼저 어른이 돼 버린 그가, 넓은 어깨에 올곧은 몸의 그가 내 앞에서 수줍게 떨며 말했다.

“태어나줘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낯선 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벌게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얼른 과자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머, 먹어봐.”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게 하필이면 소낙비가 뚝뚝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당황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냥 떠 있는 줄만 알았던 검은 구름에서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과자가 비에 젖어 크기가 놀랄 만큼 줄어들어 갔다. 동그랗던 흰 과자가 금세 조그마한 설탕 결정이 되어 내 손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아까워.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작아진 결정들을 핥아먹었다.

“아기씨!”

그가 냅다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일순 정적이 든다.

“아, 죄, 죄송…….”

그의 귀가 시뻘겠다. 나는 당황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천막 안으로 이끌었다. 다시 멀어진 그와 나의 거리에서 나는 내 발만 쳐다보며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 눅눅한 것도 맛있어…….”

그가 사준 거니까.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 변해도, 변함없이 그것을 좋아할 것이다.

“좋아해.”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뺨이 조금 붉어진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은 나인데, 혼란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좋아하는 게 정말 과자뿐이었을까. 이런 감정은 무엇일까.

“…돌아가요. 아기씨.”

그 나지막한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려 한참을 말없이 숲길로 걸어 들어갔다. 어째서 북적한 시장과는 거리가 먼 은둔지에 그리도 커다란 가옥이 있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얌전히 그의 등 뒤를 따라 걸었다.

또다시 갇히게 되는 걸까. 언제까지 그 집에서 외톨이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귀족과 고아의 사이에서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구속된 삶에 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어쩐지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하늘을 원망하기도 전에,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줄기들이 퍽, 퍽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아기씨!”

가랑비 젖듯 소매와 어깨 부근에만 떨어졌던 비가 이제는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놀란 그가 허겁지겁 나를 잡아 바위 밑으로 밀어 넣었다. 제법 동굴처럼 보이는 바위 더미 사이에서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그는 가장 먼저 나를 살폈다. 젖어서 한껏 헤집어진 머리카락과 어깨에 고스란히 쌓인 빗줄기들. 그리고 젖은 옷이 내 살결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

그는 한동안 멍하니 내 몸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무의식인지 입을 벌렸다. 동공이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

“수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사뭇 쌀쌀해진 가을날 장대비를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걱정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거기 서요. 아기씨.”

그는 조용히 나를 거절했다. 곧이어 그의 고운 입에서 처음 듣는 욕지거리가 들려 왔다.

“젠장…….”

거친 그의 말투. 나는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 줄 알고 뒷걸음질했다. 그는 한참을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다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갔다.

“안에 있어요. 아기씨.”

“수오야…….”

화가 난 걸까.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주눅이 든 나는 그를 말리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리어 그런 내가 걱정이었는지 초조해하며 말을 이었다.

“아기씨. 마른 바닥 위에 앉아 계세요. 더 젖었다간 감기에 걸리실 거예요.”

“하지만……!”

답답했다. 왜 빗속에 혼자 서있는 건지. 나를 걱정하는 주제에 왜 자기 몸은 저리도 챙기지 않는 것인지 애가 탔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그는 한참이나 나와 거리를 두었다. 결국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나서야, 그가 다시 바위 밑으로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가 비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빗줄기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읏…….”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넘어지려는 그를 재빨리 부축했다.

“하아…….”

맞부딪힌 맨살이 뜨거웠다. 나는 재빨리 그를 마른 바닥 위에 눕히고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비에 젖은 몸이 온통 차가운 것과 달리 이마가 불덩이였다.

“수오야.”

이런 적은 처음이라 불안하고 무서웠다. 언제나 커다란 오라버니처럼 나를 보호해 주던 그가 한없이 약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고인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그동안 선물 사려고 조금 무리를 했나 봐요.”

그는 붉어진 내 눈을 흘깃 보더니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하염없이 그의 두 뺨으로 눈물 줄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흑. 흐윽…….”

그가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눈가에 닿았다.

“…어디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이 없을까.”

그 담담한 어조에서 이제껏 듣지 못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리도 낮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나는 홀린 듯이 그의 가슴팍을 봤다. 천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달라붙어 윤곽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사주고 싶은데.”

그의 음성이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푹 젖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는, 그를 보면 이상한 상상을 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 유리구슬보다 더 반짝이는 거.”

그는 곧 입술을 다물었다. 동시에 비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벌써… 그쳤구나.”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의 말대로였다. 짧은 시간의 유희가 끝이 났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요. 아기씨.”

그때, 분명 그가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의 차분한 말에 잊혀 버린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의 옆에 섰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걷기만 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까 전 듣지 못했던 그 말, 다시 물어봐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수십 번쯤 들었을 때, 갑자기 앞에서 걸어가던 수오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수, 수오야.”

당황한 두 눈이 빠르게 기댈 곳을 찾았다. 그때 커다란 나무 밑이 보였다. 저곳이라면 아직 비에 젖지 않았을 것이다.

“아기씨. 전 괜찮…….”

힘없는 수오의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 이렇게나 차가워져 있는데 괜찮을 리가 없다. 나는 서둘러 그를 나무에 기대게 한 뒤 몸을 뒤덮을 만한 것을 찾았다. 적어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를 따듯하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그러나 좀처럼 보이지 않아 허둥대고 있는데, 갑자기 수오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아……!”

충동적인 행동이었을까. 그래서 이토록 서투르게 몸이 그의 앞으로 쓰러진 것일까. 서로의 콧등이 우연하게도 부딪히고, 그의 약한 숨결이 뺨을 스쳤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내 감정을 들키지 않길 바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연약하게 내쉬는 가느다란 숨결도 좋으니, 그를 좀 더 품속에 끌어안고 싶었다.

“아기씨…….”

그 순간,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사실은 이대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매만지는 것도, 간지럽게 내 귓가에 읊조리는 것도 전부 다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아찔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떠 그 푸른 눈을 바라봤다. 열이 퍼진 듯 뜨거워진 눈이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손길을 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아…….”

“…….”

“미, 미안해.”

생각보다 매정하게 나간 손에 서둘러 수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초조해져서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수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요. 아기씨.”

그저 힘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싸늘해진 말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물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와 내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 * *

그 날 이후 그와 나는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완전히 어른이 되어 나의 키를 훌쩍 넘었고, 앳된 볼살이 쭉 빠져 갸름한 턱이 되어 있었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마당에서 소일거리를 하는 그를 몰래 훔쳐보며 시간을 세는 일이 많아졌다. 어쩌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열여덟이 된 나는 요령이 생겨 몰래 밖을 나가기도 했으며, 모두가 잠이 든 새벽에 홀로 정원에 들어가 몽상에 잠기기도 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였다.

“예쁘장해서 언젠가 내 그리될 줄 알았지. 쯧.”

그날도 잠이 오지 않아 밤에 몰래 마당에 나와 있을 때였다. 일을 끝내고 무료했던 노비들이 한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비가 남창이었다지.”

“어미도 기생이었다던데!”

“그래서 얼굴이 고왔던 거구만.”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예감이 이상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빠르게 뛰었다.

“그렇다고 몸을 파나?”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이상했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 위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놓인 것처럼 발이 점점 흙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통 검은 시야 속에서 오히려 평화를 느끼며 어렵게 발을 떼었다. 악몽 같은 기분은 잠자리에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혔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조금 전에 들었던 노비들의 말을 잊으려 했다. 그저 사춘기의 기분일 것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온몸이 끈적하게 찝찝한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서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꼭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귀를 틀어막고 지낸 지도 며칠, 열여덟 살의 생일이 다가왔다. 문을 열자, 마룻바닥에 작은 함이 놓여 있었다. 그 함은, 내가 이제껏 받아 왔던 종이 상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뻐하기도 잠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바깥은 조용한데 어째서 그 찌꺼기 같은 목소리들이 들리는 걸까. 나는 홱홱 고개를 젓고는 함을 열었다. 안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가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가락지를 꺼내 들어 재빨리 맞는 손가락을 찾았다.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겨우 들어가는 반지가 이토록 애틋할 수 있을까. 아까 그 부정적인 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금세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수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커다란 행복을 느꼈다.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를 연모한다. 이 마음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나는 서둘러 바깥에서 그의 모습을 찾았다. 이 반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성년이 된 나이에, 그가 준 반지의 의미가 퍽 궁금해졌다. 설레어서, 몸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세상에나. 이런 감정을,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수오는?”

참을성이 사라진 나는 다른 노비를 붙잡고 그의 행방을 물었다. 나이가 어린 여종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종일 누워 있어요.”

“왜? 어디가 아파?”

“저, 그게…….”

그녀의 얼굴이 조금 노래지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가 바닥을 향한다. 그녀는 땅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지금은 찾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저에게 더 물을까 두려웠는지 여종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재빨리 사라졌다.

혹시 그가 가락지를 산다고 또 무리한 걸까. 스며드는 긴장감을 물리치고자 씩씩한 걸음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데, 노비가 말했던 그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용기는 없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내 발을 옭아매고, 그에게 가지 말라고 한다.

“…….”

그런데 왜였을까. 진실은 끔찍한 괴물의 모습을 하는 줄도 모르고 하필 그때 그의 순수한 미소가 떠오르다니.

그날 밤, 나는 그의 방을 찾아갔다. 사실 방이라고 할 것도 없이 노비들이 성별을 나누어 한데 모여 자는 뒷간 같은 공간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씻지 않아 나는 듯한 냄새가 지독해 피해 갔던 기억이 있다. 식구들이 쓰는 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빛 하나 없는 그곳을 어슬렁거리며 나는 그의 그림자를 찾았다. 하지만 까만 어둠에 가려 그의 모습을 찾기 쉽지 않았다.

“수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포기하고 뒤로 돌아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희미하게 신음이 들려 왔다. 그가 알려 줬던 노비들만 사용한다던 높이가 낮은 담벼락 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다. 나는 왼쪽으로 돌아 소리가 났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선급으로 돈을 받았으면 내가 원하는 때에 다리를 벌려야 할 거 아니야!”

“읏.”

짙은 덤불에 가려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덩치가 커다란 한 남자가 누군가를 겁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일순 두려움에 잠겨 뒷걸음을 쳤지만, 뒤이어 들려 오는 음성에 발이 굳어 버렸다.

“이거 놓으세요.”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그의 목소리였다.

“씹. 잔말 말고 허리 빼.”

남자의 험악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수오가 그의 말을 따르고 있다. 잔혹한 것들이 귓가에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틀려. 그 사람들 말은 거짓말이야…….

“으윽!”

“입 다물어!”

궁금해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잔혹한 장면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나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붙잡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서둘러 등을 돌려 도망쳐 나왔다. 꿈일까. 악몽일 거야. 하지만 내 뒤를 쫓아오는 무수한 소리는 잔악한 진실들을 뱉는다.

“윽!”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까진 살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분명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가 않다. 가슴이 검게 타들어 가서 몸에 난 상처가 아픈 줄도 몰랐다. 간직했던 마음도 문드러져 갔다. 끝이었다.

“흑. 흐윽…! 아악!”

그제야 지르지 못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소리를 지르며 그를 탓하고 싶었다. 남자의 얼굴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흑. 아, 흐으윽…….”

어렴풋이 느꼈었다. 그가 나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모든 게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가 추악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 * *

그가 다시 내 방에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아기씨. 선물은 확인해 보셨어요?”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살폈다. 덧난 상처가 그의 오른쪽 뺨에 울긋불긋 붙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기씨.”

그의 미간이 걱정스레 구겨진다. 그때, 그가 평소처럼 내게 다가와 내 손등에 손을 얹었다. 흠칫하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갑자기 일주일 전 봤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가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내쳤다.

“아…….”

그는 텅 빈 눈으로 내쳐진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만지지 마…….”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더러웠다. 내게 보였던 순수가 더는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절망에 가까운 두 사람의 숨소리가 조용히 낮게 퍼진다. 이대로는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내 마음이 완전히 바닥을 길 것 같았다.

“아기씨.”

그가 읊조리는 나를 부르는 음조도.

“도대체 왜…….”

아무것도 모른다며 상처받은 눈을 하는 표정도 전부다.

“역겨워.”

“네……?”

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그는 미약한 힘으로나마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처럼 깨질 듯이 떨고 있는 어깨가, 안쓰럽고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남자들한테 몸을 파는 게… 네 방법이었어?”

그의 두 눈이 아찔하게 핑 돌았다. 이렇게 그를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못난 말들이 쏟아져 버린다. 나는 함을 꺼내 그 안에서 그가 선물해 준 가락지를 집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이딴 거나 주려고?”

그가 아랫입술을 필사적으로 깨문다. 어떤 신음도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저 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풀어나가는 그의 어조가 왜 이리 공허한 걸까. 애초에 그는 나를 좋아하긴 했을까. 이 선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구차한 마음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잔혹한 말이 튀어나왔다.

“다신 내 방에 들어오지 마.”

“…….”

아니야.

“이젠 널 보고 싶지 않아.”

아니야.

“더러워.”

가시처럼 세운 벽이 그를 향한 진심을 가로막는다. 그의 묵묵했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올려 나를 응시했을 때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원망으로 가득했다. 얇은 수면인 줄 알았던 그의 어둠이 심해처럼 깊게, 깊게 내려갔다.

“…내가 더럽군요.”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인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품에 넣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는 소망이었다.

“이 감정도 분명 더러운 거겠죠.”

그가 묻어 왔던 고백을 털어놓듯 허탈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지 못하고 애꿎은 치맛자락만 만졌다.

“가보겠습니다. 아기씨.”

수오가 멀어져 간다. 그런데도 손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나간 텅 빈 방에서 그제야 이 애타는 마음의 정체를 깨닫는다. 나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안겼다는 그 끔찍한 사실에, 나는 터져버린 것이었다.

* * *

다시 혼자가 됐다. 모진 말들로 그를 내 울타리에서 내쫓고 난 뒤부터는 그를 몰래 훔쳐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소 형식적인 인사와 습관적인 시중뿐. 어색해진 그와 나 사이에 침묵보다 가벼운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더는 웃음이 없었다. 더는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내막을 모르는 시종들이 가끔가다 내외한다고 떠들썩하게 웃어댔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열아홉 살이 됐다.

“아기씨. 주인님 오셨습니다.”

나는 방을 두드리는 시종에게 알겠다고 말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얼마 뒤,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엉터리 같은 부름에도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 역시 그와 눈을 맞추며 그를 끝까지 응시했다. 짙은 검은 머리카락과 뚜렷한 눈매.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나 미간을 좁히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섬세한 턱선 때문에 과거 칼을 잡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끔 소매로 비치는 탄탄한 근육질에 그가 예전에 무반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 남자를 줄곧 아버지라고 부르며 다시 버림받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하지만 열네 살을 넘길 때 즈음, 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삼십 대인 이 남자와 나의 적은 나이 차이에, 그가 아버지라기보다는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아인 나를 데려왔을 때와 똑같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나를 정말 딸로 생각하고 있을까. 다만 그는 형식적인 호칭으로 나를 딸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요새 잠을 못 잔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비 된 자로서 하염없이 걱정됩니다.”

그의 눈썹이 가라앉는다. 어쩐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부정하려 했지만, 그가 내 앞으로 더 다가왔다. 내 눈 밑에 드리워진 검은 자국에 눈치를 챈 것인지 입가가 퍽 내려갔다.

“밥도 남기더니 잠도 자지 않는 겁니까.”

이토록 그가 가깝게 다가온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의 눈빛이 어두웠다. 정말 걱정이라도 하는 것인지 붉은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따님.”

“네…. 아버지.”

“오늘 밤은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그때, 그의 등 뒤로 문이 열리더니 시종이 찻주전자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둘 사이에 놓인 작은 탁상에 향기가 짙은 차가 오른다.

“잠을 자게 해주는 찻잎입니다.”

시종이 낮은 자세로 방을 나가자, 그가 직접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옅은 붉은 빛의 차가 그와 닮은 느낌인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드세요.”

“네. 아버지.”

차는 달콤한 맛이 났다. 뒷맛이 씁쓸하긴 했지만, 전부 다 마시기에 무리 없이 넘어갔다. 나는 비워 낸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미소조차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를 보면 나는 언제나 이랬다.

“따님.”

그가 나를 부른다. 귀를 울리는 낮은 음성에 몸이 움찔하고 떨린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밑으로 향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몸을 단정히 하셔야 합니다.”

그의 올곧은 입술이 작게 일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의아한 그의 말에도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비에게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굳은 손에 선명한 핏줄이 굵게 떠오른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느라 싸늘해진 공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절대 허락하지 마십시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몽롱한 기운이 온몸을 나른하게 했다.

“네…. 아버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이부자리에 쓰러졌다. 눈이 감겼다. 점점 숨소리가 옅어졌다. 손에 묵직한 돌들이 올라왔다. 아니, 돌이 아니라.

사람이었을까.

* * *

아버지의 방문 후 들려 오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내가 곧 출가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애초부터 나를 거둬 키운 것이 혼인을 위한 것이라는 뒷이야기들과 함께, 나는 더 내려갈 길 없는 커다란 구렁텅이에 빠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꼭두각시 딸에 불과한 내가 이제 와서 거부할 권리가 있을까.

나는 경대 밑에 숨겨 놓았던 옥색 가락지를 꺼냈다. 1년 전 그렇게 바닥에 내던졌던 가락지를 주워 줄곧 간직해 왔다. 이제 이런 추억 따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매끄러운 표면을 매만지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둘러 가락지를 숨겼다.

“아.”

수오였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섰다. 일순 얼굴이 얼어 버린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이 내가 알던 그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훌쩍 커버린 키는 고사하고, 몸에 붙은 마른 근육들까지. 그는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완전히 남자가 되어 있었다.

“사실입니까.”

“수오야.”

그가 물었다. 나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선다. 무엇을 묻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성 난 사람처럼 내게 다가왔다.

“혼인하신다고요.”

나도 모른다. 내 처지에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식구들에, 나를 피하는 시종들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니, 고아였던 내가 무엇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처지를 모르는 수오는 기어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버리실 생각이셨습니까.”

울부짖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거칠게 뱉어져 나왔다.

“왜 아무 말도 못 하시는 겁니까.”

그의 어깨를 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거센 움직임과 함께 흔들렸다. 그에게 붙잡힌 팔이 이렇게 애틋할지 몰랐다.

나는 그제야 그가 그 바위 아래에서 나에게 등을 돌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감정으로부터, 이 느낌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에게 보여선 안 된다. 들켜선 안 된다.

“이거 놔.”

우리는 애초에 이어질 수 없었으니까.

“소름 끼치니까.”

마음과는 상관없는 말이 그에게 그대로 꽂힌다. 그는 아픈 표정을 했다. 그와 나는 지독한 병에 걸려 있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병. 내 생각이 그에게 결코 전해지지 못하는 병.

“하하…….”

그는 공허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 서려 있는 광기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믿는 것에 사로잡혀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를 얼마나 아프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독기는 두 사람이 만든 상처 속을 비집고 자라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기씨.”

그의 집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 * *

내가 그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 냈던 1년 전 그날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걸까. 아니면, 그와 사랑에 빠졌던 어린 시절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던 걸까. 그가 내게 거친 말을 한 이후부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여전히 방에 갇혀 있는 나를 보며 안심했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변해갔다. 밤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몸 군데군데 상처가 짙어졌다. 나는 여전히 묻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석 달째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다시 내 방을 찾아왔다. 혼인 이야기일까. 긴장한 탓에 목구멍이 턱턱 막혀 오는 갑갑한 기분에 몇 번이고 가슴을 두들기다, 그제야 문을 열었다. 붉은 눈이 나를 조용히 훑었다. 적막은 그가 내 방 안에 완전히 들어오고 난 뒤에 더 심해졌다.

“종놈들이 헛소문을 퍼뜨린 모양입니다.”

그는 단호하고 짧게 말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말이었지만 분노라고 착각해버릴 것도 같았다.

“출가는 없습니다.”

출가가 없다는 건, 혼인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기쁘지가 않은 걸까. 결국,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신세였다. 지난 7년간 나는 아버지인 그에게 반문하지 못했다. 어째서 나를 방 안에만 가두어 두는 건지. 어째서 식구들이 사는 곳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지.

“딸을 모르는 곳에 내보낼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그는 언제나 나를 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작 내게 이름을 지어준 적은 없었다. 나는 텅 빈 내 존재에 언제나 수긍하며 살아왔다. 답답하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자유를 갈망한 적은 없었다. 반항을 꿈꾸기는 했지만 완전한 탈출을 시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왜… 저를.”

그런데 이제는 묻고 싶었다. 그가 나를 이토록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이유. 밖에서 나를 감시하면서 나쁜 소문은 거짓일 뿐이라고 달래는 이유.

“입양하신 건가요.”

그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침착해진 입으로 삐딱함 없이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나를 아빠라고 불렀던 거, 기억하십니까.”

“…….”

열두 살에 처음 그의 집에 입양됐을 때, 무엇보다 가족의 품이 그리웠던 나는 그를 줄곧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한 1년 정도는, 그의 품에 매달려 떼를 쓰고 졸랐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갈구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도 내가 그의 가옥에 감금된 신세라는 것을 깨달은 1년 뒤 영영 사라졌다. 그래서 좋은 기억만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때의 추억이 서려 있었다.

“그때부터 자주 눈에 밟혔습니다.”

그 무뚝뚝한 표정에 작게 아쉬운 미소가 떠올랐다.

“부성애가 이리 무서운 건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는 결국 자조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건 결코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편한 공기가 시간을 더디게 만들어 갔다. 그는 혼인은 없다고 말했다. 마치 제 여식을 보호하려는 투기심 많은 아비처럼 나를 짙은 눈으로 보며.

“그럼 푹 쉬십시오.”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가 방을 나간다.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인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잠이 들기 전 커다란 어둠과 마주했을 때, 가끔 몸서리칠 만큼 아찔해지는 공포에 눈을 뜰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창호지에 스며드는 달빛에 안심하고 나서야 다시 눈이 감겼다. 불면을 겪는 동안 생긴 습관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 빛이 아니었다. 나는 새까만 사람의 그림자에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익숙한 인영이었다.

“수…….”

“누룩.”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며 그렇게 불렀다.

“그게 이제 아기씨의 이름입니다.”

다음 순간, 그가 내 입을 막았다. 사뭇 차가운 어조였다. 이런 밤중에 문을 두들기지 않고 나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불안해하는 내게 미소를 보였다.

“썩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습니까. 당신도 나처럼 썩어 있는 주제에…….”

그 비열한 미소에 꼼짝도 못 하고 온몸이 굳어 버린다. 나는 저릿해지는 줄도 모르고 손톱 밑을 아프도록 눌러 댔다. 그런데도 속절없이, 달빛에 비친 그의 요염한 얼굴에 넋이 빠지고 만다.

“나를 취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읏…….”

“당신이.”

내가 망가뜨린 그는 여전히 깨끗해 보였다. 얼굴을 보면, 그저 순수해 보이기만 했다. 구름 같은 얼굴을 하고 장대비를 내려 나를 적시는 하염없이 높은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수오는 그런 자가 아니다. 우리는 끔찍한 괴물에 불과하다. 그날도 그의 눈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도망가는 겁니다. 저와 함께…….”

그는 곧장 내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혀가 그대로 쭉 펴지더니 목구멍으로 작고 딱딱한 것이 쑥 넘어가 버린다. 그는 내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입안에 거적때기 같은 천을 쑤셔 넣었다.

“욱. 우우웁!”

“쉬이. 아기씨.”

지금 이 상황에 대처할 힘조차 없는 나는 그대로 그의 힘으로 뭉그러지며 신음했다. 그는 더 나아가 내 두 눈에 검은 천을 대고 뒤통수에 세게 묶었다. 거세게 몸부림치며 저항해 보지만 강한 힘이 두 손을 막고 있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수오가 이렇게 힘이 셌던가. 경악할 만큼 강한 남자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울음이 아니라 이건 웃음소리였다.

“아기씨는 제 것입니다.”

“웁! 우우으읍!”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 달려올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가 넣은 천 때문에 숨이 가빴다. 그래서 도무지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목소리가 어둠에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무언가 이상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그런가 했지만, 그렇다기에는 의식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릴 아기씨를 제가 어찌 견디겠습니까.”

“웃…. 으…….”

“더럽혀지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게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가느다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어느 순간, 그의 목소리조차 작게 들렸다.

“아기씨.”

그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처연하리만큼 아릿하게 내게 고백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메말라 있었다. 어떤 희망도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절망뿐이라는 걸, 그는 알까.

“허나, 이 죄는 곧 잊혀질 것입니다.”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완전히 잠겨 버린다. 담겨 있던 모든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버린다. 그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주마등이 스친다.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그건 과거의 잔상이었다. 전생의 일부였고 지금껏 그를 만나 느꼈던 감정들의 원인이었다.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내가. 아니,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나는 원래부터 그리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톱니바퀴 일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반복해서 사랑했다. 내 안에 혐오로 싹을 피운 그를 이번 생에도 미치도록.

* * *

꿈은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꾸다가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끔찍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차츰 꿈을 꾸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오후 늦게 잠에서 깨어나면, 그동안 비어 있던 기억이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이게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살던 곳이. 그곳을 직접 확인하면 꿈이 진짜인지 알 수 있을까. 되살아난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확인받을 수 있을까.

나는 부율이 외출한 때를 노려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숲길은 이곳과 먼 자리에 있는 게 분명했다. 기억 속에 없는 길을 더듬으며 내가 알고 있는 표식을 찾기 위해 눈을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이 제법 가벼워졌다. 분명 알고 있는 길이었다. 그 날, 그와 시장에서 비를 피해 바위 밑으로 들어갔던 때. 불쑥 튀어나오는 그리움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꿈에서 보던 커다란 기와집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막상 오니 덜컥 겁부터 났다. 금세라도 그가 나타날 것 같았다. 수오 님이 그 고운 미소로 저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르다. 분명 나의 시종이었던 그와 화향관에 있던 그는 다른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둘 다를 바랐다.

그를 여전히 원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커진다. 추억이 담긴 곳에 발을 들이기가. 기억이 없던 때에 느꼈던 공허보다도 더 쓸쓸하고 지독했다.

우두커니 한결같은 모습을 한 가옥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게 조용했다. 문을 두드리면 숲 전체가 울릴 것 같이, 웅장해 보이기도 했다.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했다. 나는 간신히 손을 문거리에 올렸다. 대문은 아주 간단하게 열렸다. 마치 나를 여태껏 기다려 왔다는 듯이.

“…….”

확 트인 곳에 갈림길이 두 개로 나 있었다. 한쪽은 안방과 사랑방이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한쪽은 내가 살았던 별채와 노비들의 거처였다. 나는 익숙한 듯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귀가 웅웅 울릴 정도로 매미들의 구애 소리가 크게 났다. 그 한 가운데, 한적한 정자 아래에 남자가 보였다.

어떤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곳은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그 역시 그랬다. 조금 야윈 모습으로. 그를 아버지라 부르기에는 어리지 않는 나이. 하지만 나는 이끌리듯 작게 그를 불렀다.

“…아버지.”

넓은 등이 천천히 반응한다. 이윽고 그가 나를 보았다. 그리움에 사무쳐 꿈인 줄 알았던 걸까. 그의 두 눈이 커지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님.”

그 한마디에 아픈 기억들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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