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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호연 (7/18)

Chapter 7. 호연

수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가옥을 꼽으라면 단연 술원성의 본가가 으뜸이었지만, 산 중턱에 있는 선정의 본채도 사람들의 입에 곧잘 오르내리곤 했다. 숲과 강가로 둘러싸여 자연스레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가옥은 황제가 직접 그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선정의 가문이 황가와 깊은 연이 있었다는 것은 세간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한참 전 몰락한 그가 어떻게 황제의 환심을 샀는지는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기와집은 멀리서도 용마루가 잘 보이지 않았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호연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아무도 오지 않는 오래된 집터. 하지만 그런 곳에 꽤 오랜만에 인적이 나타났다.

남자는 어깨 위로 짙은 갈색의 화구통(畵具筒)을 매고 곧바로 안채에 올랐다. 선정은 남자의 등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동안 과묵했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명령이 떨어진다.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가 방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었다.

“격조했습니다. 선정 님.”

“1년 만에 여길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선정의 어조는 정중했고 느긋했지만,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미 그의 성정을 알고 있는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변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온 것입니까.”

“초상을 찾았습니다.”

“초상이라.”

선정의 올곧던 눈썹이 굽어진다. 남자는 황급히 매고 있던 나무통에서 그림 한 장을 꺼냈다. 자그마치 2척이나 되는 그림 한 폭이 전부 여자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작은 몸집, 검게 그을린 듯한 뺨의 자국, 얄팍하지만 숱이 많은 눈썹. 보고 있던 선정의 눈이 커다래진다. 남자는 선정에게 말했다.

“공주마마십니다.”

“…….”

선정은 말없이 그림을 응시했다.

창백했던 얼굴 대신, 영롱했던 입술 색이 희게 변해 있었다. 얼굴에는 생전 연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기미가 생겼고 제법 햇볕에도 타 있었다. 예전 그가 보았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 작고 고왔던, 그 누구보다 어여쁘던 꼬마 아이가 그늘이 되어 있었다. 그의 햇빛 아래 있던 그 여린 아이가.

“우적(雨赤) 마을입니다.”

남자는 지체 없이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에 노비의 초상을 그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열흘 전쯤, 여종의 초상을 그려 달라 부탁한 남자가 있었다더군요. 완성된 그림을 가져가더니 이곳저곳 들쑤시며 신상을 캐고 다녔답니다. 이상히 여겨 그림 하나를 더 그려서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는데, 그게 바로 이 그림입니다.”

선정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의 기분이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꽤 낮은 저편까지 떨어졌다. 그녀가 노비라고. 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시퍼렇게 세워진다.

“기억에 남는 대로 그려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대낮인데도 술 냄새를 풍기는 걸 보면 맑은 정신으로 생활하는 자는 아닌 듯했습니다.”

남자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병을 들고 길거리를 전전하던 늙은이였다. 밤이 되면 창관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남자의 옷에 늘 붉은 연지가 묻어 있는 걸 보면 굳이 쫓아가지 않아도 남자의 행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자였기 때문에 초면인 자신에게도 술술 털어놓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술을 사준 대가로 얻은 그림이 설마 지난 1년간 찾아다녔던 그녀를 닮은 얼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다시 선정을 찾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예정돼 있던 출가가 1년 전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많이 늦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혼인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선정, 그 역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문제는,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녀가 맞는가 그뿐이었다.

“이 자가 사는 곳은 파악했습니다. 찾아가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선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상의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며, 종이의 끝을 의미 없이 들추어보기도 했다. 아릿한 통증이 되찾아오는 것도 같았다. 1년간 가슴에만 묻어 놓았던 기억들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서서히 답습해 왔다.

“초상을 그려 달라 부탁한 자가 있다고 말했습니까.”

선정의 물음에 남자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을 캤다고.”

“그렇다 합니다.”

선정은 턱을 쓸며 다시 그림을 쳐다봤다. 공주의 생김새 그대로였다. 검은 머리카락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 공주와 같은 이목구비와 몸의 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 속 여자의 귓불에 있는 붉은 점이었다. 공주와는 확연히 다른 제 아이라는 증표. 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를 찾아내야겠습니다.”

남자는 선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선정의 머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전혀 관심이 없던 이야기. 그러나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호기심으로 그의 마음에 답답하게 자리했다. 그저 우연이었을까.

“우적 근방에 숨겨진 마을이 하나 있다던데.”

남자가 곧이어 짚이는 것이 있는 듯 선정의 말을 맞받아쳤다.

“남색하는 자들이 모여 산다는 곳 말씀입니까.”

항간에는 남색 마을이라고도, 창부촌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예전부터 기이한 소문이 나는 동네이기도 했다. 여인을 배척하고 고운 남자를 이용해 돈을 버는 곳. 그런 소문 때문인지 돈을 벌려는 남자 노비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 들어가는 마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기분 나쁜 곳임은 틀림없었다. 사방팔방 그녀를 수색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남자 역시도 그곳은 회피했을 만큼 정상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사라졌던 날.”

선정의 입술이 떨렸다.

“노비 한 명이 같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선정은 1년 전 그녀가 사라졌던 그때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방 안을 누비던 그녀의 향기가 허공에서만 맴돌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곁을 지키던 집 노비. 소년은 열두 살 무렵부터 행랑채에 지내면서 선정의 식구들을 보필해 왔던 사용인이었다. 그녀를 돌보게 시킨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경계심이 심한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사람이 그녀의 또래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그녀를 잃게 만든 가장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선정의 입가가 무너진다. 그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곱상한 면상이니 창부 노릇도 제법 어울렸을 겁니다.”

“그자가 그곳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찾아 죽이십시오.”

선정의 재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남자의 대답은 무덤덤했다. 어차피 그에게 처음부터 주어졌던 역할은 명확했다. 공주를 찾으면 그녀와 접했던 자들은 없앤다. 그것이 그가 황제로부터 받은 임무였다.

“공주를 찾으면, 바로 황궁으로 가셔야 할 겁니다.”

“황궁이라.”

선정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는 그제야 눈앞의 술잔에 주목했고, 술을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청자의 잔에 맑은 것이 가득 담긴다. 그의 적막한 마음에 비교하면 다디단 술이, 유독 기꺼웠다.

“폐하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

“그러니, 대가로 받으실 예물들만 생각하십시오. 선정 님.”

남자의 눈이 선정과 비스듬히 마주쳤다. 황제의 것들은 전부 다 닮은 눈빛을 하고 있던가. 선정이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술기운이 올라 흔들리는 시야로 남자의 행동이 보였다. 선정의 몸에 힘이 들어간다.

“아까부터 계속 그 아이를 공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공주님이시니까요.”

“가짜인 것이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선정의 두 눈에 날이 선다. 그는 남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 아이는 지난 7년간 제 아이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선정 님.”

남자의 물음에 선정은 더 답하지 않고 입술을 다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도, 아직 정해진 것은 없었다. 다만 방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갈 곳이 정해져 있는 표류. 선정의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뜨거웠던 공기가 단번에 식어 의미 없이 흘러갔다.

“그럼 다음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남자의 두 눈이 옆으로 가늘어졌다. 그는 선정의 의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자신은 황제의 수하에 있는 인물이었지만 지난 몇 해 동안 선정의 밑에서 일해 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갈등은, 그 사이에서 수도 없이 벌어져 왔었다.

남자의 고개가 떨어지고 이윽고 손이 화구통으로 향했다.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남자가 그렇게 가고 난 뒤, 선정은 술을 몇 잔 더 입에 댔다. 그리고 알싸한 기운이 턱 아래까지 올라올 때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답답한 방을 나가 마당으로 나갔다. 꺾인 나뭇가지에 진달래꽃이 위태롭게 나고 있었다. 봄이었다. 그 아이가 사라진 날이 겨울이었으니까, 벌써 그녀를 보지 못한 지 1년이 넘어가 버린 것이다.

“서방님.”

선정은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별채에 머무는 그의 아내가 어째서 이곳까지 걸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용건이 뭡니까.”

“찾았더랍니까?”

남자가 왔다 갔다는 것을 멀리서 보기라도 한 것일까. 선정은 찾아온 혜수를 향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일삭(一朔) 만에 보는 여자의 얼굴에도 여전히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씀해 주시지요. 드디어 폐하를 찾아뵐 수 있는 것입니까.”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혜수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선정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감이 표출되어 나왔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

“황궁에 가는 것.”

선정은 혜수의 말에 비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연민의 표현이기도 했다. 가문 사이에 약조한 혼례로 인해 그녀 역시 불가피하게 시집을 온 것뿐인데, 왜 이토록 권력 따위에 매달리고 있는 건지 몰랐다.

“배 속의 아이는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선정의 물음은 덤덤하고 단조로웠다. 하지만 혜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수가 없지요.”

선정이 미소를 짓는다. 혜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단 한 번도 말려 주지 않았을까. 그녀가 그의 지어미로 있는 동안, 다른 사내와 정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외로움과 싸웠던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제게 먼저 말을 건네주었더라면. 하지만 선정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보지 않았으며, 무심했고 언제나 차가웠다.

“당신이…….”

그녀의 몸이 떨렸다. 눈물을 참으면서 나는 추한 잡음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남자가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의 잘못은 선정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똑똑히 봐주길 원했다.

“씨 없는 사내만 아니었어도.”

선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혜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독하게 내뱉었지만, 그녀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다. 선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혜수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 상기된 뺨. 떨리는 입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마저 어느 것 하나 그 아이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녀의 진심은 결국 가문을 이을 권세를 원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때, 혜수가 발걸음을 옮겨 선정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거리 앞에서 선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젠 인정하시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 아이를 딸로 들인 순간, 공주로 만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입니다.”

혜수는 지금 이 순간, 선정의 눈빛이 흔들렸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의심이 사실이 되는 순간 비참한 처지는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가슴에 드디어 포기라는 것이 서기 시작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등을 돌려 선정에게서 멀어졌다. 더는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진심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역겨웠고, 끔찍했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었다.

고작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입양한 그녀를 한없이 애지중지 여겼던 것도, 이미 그가 미쳐있다는 여러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 * *

수가 다른 남자의 화대를 받아낸 날, 소설 속의 공인 부율은 패 놓은 장작들이 있는 창고에 들어가, 불을 질렀다. 작은 불씨는 곧바로 시종들이 있는 별채에 붙었고, 붉은 화염이 만들어지자 화향관까지 날아가 번졌다. 모두가 잠을 자는 새벽. 그 불길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사람도,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불 속에서 타들어 간 사람들도 있었다.

부율은 아직 불길이 수의 방앞까지 번지지 않았을 때, 그를 거칠게 방 밖으로 끌어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검붉은 시체들과 인간의 살이 익어가는 아찔한 냄새. 수오는 눈을 뜨고도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던 어느 한 곳. 소중한 것을 끝내 구하지 못한 마지막 미련.

그건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소설 속에서 묘사되지 않는, 그 문장의 끝맺음이 언제나 신경 쓰였다.

수오 님! 수오 님을……!

하지만 실제로 불길은, 내가 읽었던 그 소설의 내용과 다르게 화향관에 가장 빨리 닿았다.

안돼. 아직 안에 있을 거예요. 제발!

부율이 잡아챈 것은 수오 님이 아니라, 나였으며.

수… 오…….

미련 속에서 마지막으로 시선이 간 곳은 불에 타 무너져 가는 수오 님의 방이었다.

‘누룩.’

선명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울고 있는 내게 누군가 속삭인다.

‘그게 이제 아기씨의 이름입니다.’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소설 속의 이름. 누룩. 하지만 수오 님은 내가 그와 만난 처음부터, 나를 누룩이라고 불러 주었다.

‘이제… 저만 보셔야 합니다. 아기씨.’

같은 목소리. 떨림. 그 손에 잡힌 긴장한 땀. 도대체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누구일까.

‘아기씨는 제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차게 내려앉는다. 안 돼. 그만둬. 제발, 살려줘. 하지만 부율이 저지른 죄목처럼, 남자는 내게 소름 끼치도록 미소 지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소설 속 내용이 일그러져 가고 있다고만 믿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부율의 마음이 수오 님에게 향해 있지 않고, 내게 향한 것은 어딘가 틀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라고.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쉬이…. 아기씨.’

‘곧 잊혀질 것입니다.’

소설의 내용 그 이전의 삶에서,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부율이 그에게 죄를 범하기 전에 그에게 원죄가 있었더라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수오 님의 마음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누구였을까.

“…….”

나는 눈을 떴다. 내 손을 세게 잡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내 옆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꾸벅 졸고 있었다. 혹여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아니 그를 떠나기라도 할까 봐 아기처럼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불안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읏…….”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가슴 쪽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참지 못하고 마른기침이 나왔다. 입안이 건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손바닥에 뱉어진 것은 잿빛의 덩어리였다.

“누룩.”

남자가 일어나 내 어깨를 감싼다. 그는 놀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단단히 껴안았다.

“연기를 마셔서 그러는 거니 안심하거라.”

“…수오 님은.”

하지만 정작 내가 궁금한 것은 내 몸 상태가 아니었다. 수오 님은 그 불길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을까.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눈물에 부율의 얼굴조차 뿌옇게 보였다.

“당신… 어째서…….”

나는 있는 힘껏 남자를 밀쳐냈다. 부율도 원래부터 나를 억지로 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쉽게 내 뒤로 물러가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소설 속 내용 그대로 행동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 그 불로 인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 하곤 했으나,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머릿속에 드는 끔찍한 상상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수오 님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 그가 불타는 방 안에서 내 이름을 울부짖는 그 소리가 좀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남자가 증오스러웠다.

“내가… 내가 죽었어야…….”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무거운 눈덩이가 뜨거워진다. 소설 속 내용대로라면 수오 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불에 타 죽었어야 한다. 당연히 나도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어야 했는데.

“어… 어째서 당신은 수오 님을 그냥 두고 온 거야.”

분에 찬 목소리가 일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조용하게 남자에게 전해졌다. 부율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시 나를 보내줘.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

“누룩. 나흘이 지났구나.”

“…뭐… 라고요?”

“불이 난 지 나흘이 지났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의 통증이 진해진다. 나는 그대로 고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으, 아아윽… 하으으, 아아……!”

몸이 반으로 나눠진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떻게 말을 해야 남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증오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이 그대로 뚫려 버리는 듯한 통증에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에 담긴 평범한 것들이 사라지고 온통 허공에 있는 것처럼 텅텅 비어 버린다.

“아니야. 아니라고. 제발……!”

내게 속삭여 주었던 그 말을, 이제는 들을 수 없다고? 그와 함께하자고 약속한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이토록 빨리 순식간에. 내가 그를 볼 수 없게 돼버렸다고.

“거짓말이라고 말해. 제발!”

나는 부율을 향해 끔찍이도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나를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의 몸에 묻어 있는 흔적.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 수오 님의 몸. 나는 붉어진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말해…….”

“무엇을 말이냐.”

나는 무너진 그의 몸에 올라타 짐승처럼 그에게 이를 드러냈다.

“왜 그랬는지 말해!”

“…….”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이 남자의 뺨에 수시로 떨어진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그런 짓을 한 주제에. 나는 남자의 반응에 더욱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너를 연모한다.”

“뭐……?”

“평생을 미워하고 증오하거라. 하지만 난 너를 끝까지 내 옆에 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그런데, 생각 속에 있는 말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남자는 내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원망을 보며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째서 당신이 괴로워하는 거야.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찔한 마음속에서 죽을 것 같은 사람은 바로 나인데.

“당신을… 증오해.”

“…….”

간신히 내뱉은 독기 섞인 말에 남자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부드러운 말로 나를 설득했다.

“그리하여라.”

“뭐……?”

“너도 날 연모한다는 거짓은 바라지 않으마. 대신, 내 옆을 떠나지 마.”

부율이 손을 뻗어 내 턱을 어루만진다. 그러다 뺨에 흐르는 내 눈물을 손으로 쓸어서 달래 주었다. 또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남자만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불거져 올라왔다.

“네가 내 옆에 있는 한… 난 네게 전부를 줄 것이다.”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남자의 손을 치우고 자리를 일어섰다.

나는 전부를 원하지 않는다. 남자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어떤 역할도 없었던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썩은 나무 밑동처럼 더러운 욕망이 흔들린 것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모른다. 알 리가 없었다. 소설 속의 정해진 길만 가고 있는 이 남자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를… 그냥 보내줘요.”

내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해 있는 걸 눈치챈 남자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혹여 내가 밖으로 나갈까 황급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윽고 남자의 두 손이 그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내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제발… 보내줘요.”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었던 존재. 수오 님을 연민했고, 질투했으며 남몰래 사랑하기도 했다. 그를 소유하고 욕망했을 만큼 나는 그가 필요했다. 그가 없는 세상 따위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세계가 있다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더는 이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감정인지 상관없어. 난 절대 당신을…….”

“나를… 살려다오.”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입술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살결이 닿은 등 뒤가 뜨거웠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너무… 외롭구나.”

“…….”

“이리도 괴로운 것이었구나…….”

왈칵, 눈물이 흘러나온다. 나는 손등을 입에 가져다 대고 울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이 죄를 갚아나갈 것이니… 제발.”

그의 숨이 잠시 멈춰진다. 나를 가둬두고 있던 그의 손도 서서히 풀렸다. 나는 등을 돌려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 불그스레해진 눈가를, 잠을 못 자 눈 밑에 내려온 그늘까지 찬찬히 들여다봤다. 시선은 다시 내려가 어느새 그의 입술에 닿는다. 겁에 질려 새파래진 입술이 말하고 있었다. 부율이 무서워하는 것은 나였다. 그는 내가 그 자신을 떠날까 봐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 연모하는 마음을 부정하지는 말아다오…….”

그 입술이 애원을 말할 때, 나는 깨닫고 만다.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 밖을 뛰쳐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율.”

나는 어째서인지 남자를 줄곧 연민했다. 알 수 없는 커다란 죄악감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의 앞에서 나는 작아져만 갔다.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다. 내가 이 남자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

“당신을 알고 있어…….”

이 남자에게 진 죄를 깨닫고 만다.

* * *

이곳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오기 전, 나는 불행한 삶을 살았었고 그 사실에 대해 체념하고 있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좌절하고 단념하기도 했지만 나를 상처 주는 것들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했다. 온갖 끔찍한 것들이 내 몸을 얼키설키 감싸고 나를 무너뜨려 가고 있던 절망 속에서, 나는 결국 모두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편을 택했고 그건 아주 잠깐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려 했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제발 이대로 잃을 수는 없다며. 그 마지막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이미 두 눈을 뜬 채로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먼 기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보았다. 부율이 드디어 이 소설 속에 등장했을 때, 그가 수오 님이 아닌 나에게 감정을 품게 되었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의 간절한 목소리에서 전생의 연인을 볼 수 있었다.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남자를 꿈속에서 보았으며, 답답한 가슴으로 깨어나야만 했다. 죄책감.

내가 그를 상처 주었다는 전생에 남은 원죄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었다. 소설 속에서.

“오늘 못 만날 거 같아. 과제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럼 레스토랑은 취소하고 너 과제 하는 모습만 볼게.

남자의 불안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냐…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그냥…….”

―지금 차 끌고 갈게.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를 거부한 지 한 달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무언가 눈치라도 챈 것일까.

“아냐! 괜찮다니까!”

나는 당황해서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 탓으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전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그 새끼랑 헤어지라고 말했지.”

핸드폰을 내려놓자 침대 위의 남자가 질렸다는 듯이 말을 뱉는다. 그의 입꼬리가 반대로 누운 초승달처럼 축 내려간다.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니면 정말 그놈 말대로 결혼할 생각이야?”

“…나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눕는다. 단순한 장난 같은 일들이 사건으로 변하기 몇 달 전, 나는 태연하게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었다. 조금은 위험한 놀이일 뿐이야. 언젠가 지워버리면 될 거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저지른 실수가 두 남자를 최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 * *

부율을 기억해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게 신을 신겨주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와 함께 호연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이곳은 수도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숲이 드리워져 있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세워져 있는 기와집. 부율의 별가였다.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지 모른다. 조용하고, 낯선 공간. 이 모든 걸, 그가 준비해 놓았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그가 계획한 일이고, 어디까지를 내다보고 있는 걸까.

그가 불을 지른 그 날이, 하필이면 지방 향리의 여식들이 손님으로 온 날이었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어제 두고 간 옷은 입지 않았구나.”

“…….”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냐.”

남자의 눈썹이 밑으로 가라앉는다. 혹여 제가 사준 것이 별로였을까 염려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화향관에서부터 입고 온 잿빛으로 얼룩진 저고리를 내려다봤다.

“…….”

“같이 가게에 가서 옷을 구경하는 것은 어떠하냐.”

“…….”

“네가 마음에 꼭 드는 새 옷을 사주마.”

남자는 은빛 실로 수를 새겨 놓은 꽃신을 내게 신겨 주며, 잠시 내 발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나는 아침 햇빛에 반사된 남자의 남청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충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아…….”

남자의 입술이 벌어진다. 그제야 내가 한 행동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감추었다.

“…….”

그의 뺨이 조금 붉어진다. 그는 내 손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손을… 잡아도 되겠느냐.”

그는 수줍어하며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계속 무릎을 꿇은 채 내 신발만 보며 말을 건넸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나는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남자가 나를 붙잡았던 그 날, 나는 남자에 관한 꿈을 기억해 냈었다. 하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정말 이 남자가…… 내가 전생에 함께 했던 남자가 맞는 걸까. 어째서 소설 속의 부율이 내 전생과 이어져 있는 걸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남자를 피해 발을 내디뎠다.

“새 옷은 필요 없어요.”

“누룩.”

남자가 서둘러 내 손목을 잡는다.

“부탁이다. 너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부율의 눈이 서글퍼 보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꽤 자주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내가 텅 빈 눈으로 그를 응시하면, 그는 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금방이라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고.

“함께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상관없다.”

“하지만 여긴 수도…….”

“마치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내 말이 맞느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그를 걱정할 리가 없다. 아무리 그가 전생의 내 연인이었다고 해도, 그건 과거일 뿐이다. 그때의 감정도 흐릿했고,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그의 옆에 있는 지금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율이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풀이 죽은 사람처럼 입가를 내린다. 그는 잠시 뒤 숲길로 시선을 옮겼다.

“네게 어울리는 옷이 있을 것이다.”

“…….”

“지금부터 손을 잡을 것이니, 싫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남자가 내 손을 덥석 쥐고 나를 끌어당겼다. 그는 일부러 보폭을 줄이고 천천히 나를 이끌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 남자가 내 옆모습을 응시하며 내 발걸음에 맞춰 걷는 것이 어쩌면 예전에도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전생이었을까. 아니면 화향관에 있었을 때부터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욱씬 가슴이 저릿해졌다. 감정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남자가 내 손을 꽉 쥔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해 죽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도망갈 수 없다.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밤이 되고, 새벽이 밝아오기 전까지 몇 번이나 탈출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남자는 나를 찾아냈고, 급기야 묶어 놓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체념한 걸까. 나는 스스로 되물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더는 어떤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어 있는 마음은 거의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다 왔구나.”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부율이 말한 가게에 도착했다. 나는 온갖 고운 비단이 전시된 가게 안팎을 흘깃했다. 그는 내 시선에 신이 났는지 내 허리를 감싸왔다.

“몇 시간 동안 구경해도 좋다.”

나보다 더 눈을 반짝이는 부율의 기세에 나는 결국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잠시 뒤 그가 처마 끝과 연결된 종을 울렸다. 그 소리에 사용인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 둘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 소문이 퍼진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미리 준비해두기 위함이니 노여움은 풀어 주십시오.”

부율이 말없이 내 등을 밀어 시종들을 보게끔 했다. 두 명의 시종이 허리를 들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가늠하던 눈동자들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눈치 빠른 시종들은 그의 의도를 바로 파악했다.

“아씨. 이쪽입니다.”

내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부율은 나를 그리 만들 속셈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의 옆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나리께서 직접 재단해 주실 겁니다.”

시종의 말을 들은 부율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간다. 그는 내 허리를 더욱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 겁내지 마시게. 자네.”

그때 뒤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바깥에서부터 짐작하고 있던 바였지만 남자의 옷차림을 보고 나자 확실해졌다. 그는 평민이거나 하층 서민이 아니었다. 귀족이자 양반인 남자였다. 남자는 유난히 푸른 도포를 날리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이리 귀여운 아가씨를 내 잡아먹기라도 하겠는가.”

“오래간만입니다. 대감.”

“자네도 오랜만이군. 술원성에게는 내 간밤에 신세를 졌어. 꽤 좋은 기방을 소개받았거든.”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몸에서 약한 술 냄새가 났다. 부율은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결국 남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아버지를 만나셨습니까.”

“그래. 마침 자네 이야기를 했지.”

“…….”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힘이 느슨해졌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

“거기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작 데려온 건 여자아이구먼 그래.”

“…함부로 잘도 지껄이십니다.”

“하하하. 말하는 투는 꼭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군.”

남자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그와 나를 살폈다. 나는 부율을 올려다봤다. 그가 꾸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나는 다만 최대한 거리를 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정말 옷을 지으러 온 건 아닐 테고.”

“…….”

“말해 보시게. 무엇을 짓고 싶은지.”

부율의 입술이 아주 잠깐 들썩이다 다시 멈칫한다. 그걸 순식간에 포착한 남자의 얼굴에 다시 기묘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 얼마 전 폐척(閉斥) 지방 관리의 여식이 유람을 갔다가 실종된 모양이야.”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그저 상상을 펼쳤을 뿐이네. 혹시 이 아이를 그 여식이라고 속이고 싶은 건가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리의 힘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다.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주 기분 나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내 몸을 서서히 잠식해 나간다. 품었던 의심이 현실이 된다. 절망은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사과하지.”

“…하온데 가능하신 겁니까.”

남자의 눈꼬리가 휘어진다. 부율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짧은 숨을 내뱉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아이의 신분을 되찾을 때까지입니다. 그때까지만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남자의 가슴이 땅을 향한다. 그가 몸을 숙이며 부율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부율의 얼굴은 줄곧 진지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아이에게 꼭 맞을 법한 옷을 찾아주지.”

남자의 웃음이 멈췄다.

“대신 폐하께 내 이야기를 잘 좀 전해 주게나. 곧 새신랑이 돼서 황궁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부율은 몸까지 딱딱히 굳은 채 남자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잠시 내 쪽을 힐긋 내려다본다. 나는 부율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부율은 그런 나를 좀 더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궁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 하였는가. 자네.”

“제 여인은 여기 있는 이 아입니다. 폐하의 청은 거절할 생각입니다.”

“허…. 자네 아비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단단히 미쳐있군.”

남자의 이마에 있는 주름이 깊어진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율을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부율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남자의 시선을 받아냈다. 남자는 곱게 선 부율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자네의 그 고집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남자가 말을 마치자 그의 뒤에서 문이 열렸다. 힐끗 본 방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걸려 있었고, 커다랗고 화려한 장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남자는 입을 광대까지 올리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소문은 잘 듣고 왔네. 어디 한 번 내 솜씨 좀 발휘해 보지.”

나는 사용인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대청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율의 시선이 등 뒤로 꽂혔다. 하지만 이내 문이 닫히고 부율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디어, 막혀 있던 가슴이 트이기 시작한다.

“긴장하지 말고 이쪽으로 서 보아라.”

“…….”

남자의 눈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를 훑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흠…….”

남자는 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더니, 내 소매를 가볍게 들추었다. 나는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남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 있는 자세는 나쁘지 않구나. 오히려 굳은 곳이 없어 놀라울 정도야.”

“…….”

“네 나이만큼 종노릇을 해 왔다고는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기녀같이 치장한 흔적도 없고…….”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다시 내 앞에 섰다. 이번엔 그가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다.

“얼굴도 곱상하구나. 분을 좀 바르면 제법 기생이라 해도 믿겠어.”

나는 미간을 찌푸린다.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남자의 눈을 피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부율의 말대로 노비 신분은 아닌 것 같군.”

노비 신분. 애초에 내게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한 걸까.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어떻게 하면 홀로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유일한 시간이었다. 내가 부율의 감시를 벗어나 그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그래서였을까. 남자의 어렴풋한 시선에도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부율을 벗어날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알려 주세요.”

어엿한 봄이 된 하늘이 창가에 투명하게 비친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도,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꽃송이도 내가 살았던 마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수오 님이 없는 것이 분명한, 아주 깨끗한 세상. 나는 수오 님이 있는 지옥으로 함께 가고 싶었다. 그와 함께 다시 밑으로 추락하고 싶었다.

“이곳을 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 그러다, 다시 입을 닫는다. 모험을 했다. 해서는 안 될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 남자가 부율이 황궁에 들어가 입신양명하길 바라는 자라면,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너를 도와야 하는지 말해 보아라. 왜지?”

“…….”

꽉 물린 입술 근처가 새하얘진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남자는 내 대답이 늦어지자 지루해졌다는 듯이 눈을 딴 곳으로 돌렸다. 무언가를 말해야 했고, 어떤 짓이든 해야 했다.

“제가 곁에 있으면 그는 황궁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리께서도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할 겁니다.”

소설에서도 부율이 황제의 명을 받고 궁으로 가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이런 식은 아니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 남자가 결말에서는 어떤 선택을 했던가.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그가 사랑하는 남자인 수오 님을 선택했었다. 그 흐름대로 가게 된다면 부율은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길이었다.

“너는 아직 부율을 모르는 게구나.”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내 주위를 돌았다. 그의 눈이 멈춘 곳은 불안에 잠겨 떨고 있는 내 손가락이었다. 잠시 뒤 그가 의자에 앉았다.

“폐하가 부율을 부마로 삼으려는 건 그가 차기 황제로 추대받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

남자의 말에 눈이 커다래졌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내 반응에 남자의 두 눈이 휘어진다. 그제야 남자가 하게 될 말을 알아채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부군이 됨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멀어질 것이다. 허나…….”

예상했던 일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그의 눈이 밝게 빛났다.

“피는 보겠지만, 그가 반역을 택한다면 충분히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남자는 어쩌면 부율이 궁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넘쳤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져 남자에게 대꾸할 수 없었다. 부율이 차기 왕의 자리에 거론되고 있다는 것도, 황제가 그를 부군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한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소설 속에서도 등장한 적 없던 뒷이야기들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내게 생각을 정리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너를 귀족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뒤에서 조력하는 방법밖에는 없겠구나.”

귀족의 삶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수오 님의 사랑을 받는 것. 그를 내 마음껏 사랑해 줄 수 있는 시간. 그러나 모든 게 깨진 지금, 남자의 말에 쉽사리 반대할 수 없었다.

“여 보아라.”

남자의 부름에 반대편 문이 열렸다. 줄곧 바깥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계집종의 복숭아뼈가 붉어져 있었다.

“진홍색 비단을 준비하거라.”

남자의 한마디와 함께 시종들의 분주한 발걸음 질이 시작된다. 이윽고 남자의 의도대로 귀족으로 보이기 위한 단장이 시작됐다.

* * *

거울을 들여다봤다. 들쑥날쑥한 길이의 푸석해 보이던 머리카락은 한쪽으로 올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바닷물을 머금은 듯 푸른색을 띠고 있는 진주가 그 위에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새하얀 분칠이 칠해진 얼굴이 보였다. 두 뺨은 꽃이 피어난 듯 은은한 분홍빛이었고, 입술은 그에 맞춰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소매 끝을 쓰다듬었다. 비단의 결이 선명한 소리를 내며 손끝에 부드럽게 감긴다.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지만 투명한 저고리는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덮어 주었고, 가슴을 받쳐 주기 위한 허리끈이 붉은색 치마와 함께 이어져 있었다.

“어울리는구나. 귀족 태생이라 해도 믿겠어.”

남자가 한결 낫다는 눈으로 내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보이는 찬사에도,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은 단지 표면에 지나지 않았다.

“부율이 왜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음흉한 눈빛을 띠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에 잡힌 문고리를 응시했다. 저 문이 열리면, 곧 부율도 달라진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반사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부율을 불러올 테니 앉아 있거라.”

“…….”

문이 열리고,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귓가에 커다란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전보다 길어진 치맛자락에 눈동자를 움직였다. 걷기만 해도 사박사박한 비단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풍성한 치맛단이 거슬렸다.

도망갈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수도에서 내가 부율의 눈을 피해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을까. 그를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그 시간 동안 화향관까지 갈 수 있을까.

그때 시종들이 드나들던 반대편 뒷문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부율의 눈에 띄지 않고 남자의 사저를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아무도 없는 마루 복도에서 부율과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방으로 들어올 참인지 한참 터벅거리던 소리가 같은 시점에서 멈추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치맛자락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기다란 복도를 지나, 맨발로 흙길을 달렸다. 이윽고 남자의 가옥을 빠져나가는 문이 보였다.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걸쇠로 잠겨져 있었지만, 안쪽에서는 열 수 있었다. 나는 무거워 보이는 나무 기둥을 손에 쥐고 있는 힘껏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커다란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난 틈으로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밀어 넣었다.

이윽고 생소한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왔던 곳과는 정반대의 풍경에 잠시 멈춰 서고 만다.

“아…….”

부율이 나를 이끌었던 조용했던 길목과는 달리, 번화한 곳이었다. 왼편으로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있을 법한 시장이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양반들의 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서민들의 걸음걸이는 내가 줄곧 보았던 사람들의 행세와는 달리 굉장히 빨랐다.

나는 인파들을 뚫고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 헤맸다. 반 시진이 지나도 마땅한 곳이 없어 거의 포기하려는 찰나 그제야 인적이 드문 길목에서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노을이 어슴푸레 져가는 애매한 시간. 나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어느 낡은 가게를 찾았다.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무 벽에 갇혀 있는 여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술상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남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게 안은 소란스러웠고 잡다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내들처럼 그녀들의 고운 손길에 발길을 멈추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혼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을 때쯤, 한 남자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순 부율인 줄 하고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제 막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참이었는지 가득 찬 술병을 들고 나를 내려다봤다.

“규수께서 이런 곳엔 어쩐 일로?”

어깨에 닿은 불쾌한 손보다 남자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역시 그렇게 보이는 걸까.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다시 흘낏 쳐다보다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 자는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계산을 끝내기도 전에 다급한 마음이 먼저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남색… 마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

남자의 눈썹이 올라간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남창들끼리 접붙이는 취미를 가진 여자들이 있다곤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그게 아니라 저…….”

“상당히 자유분방한 아가씨네?”

남자의 입가가 씨익 올라간다. 그 섬뜩한 미소에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남자는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이윽고 내 가슴에 머문다.

“남창들이 모여 사는 곳 말이지…….”

남자는 술병을 입술에 대더니 술을 절반 이상 비워 냈다. 취기가 만족스럽게 돌기 시작했는지 남자의 눈이 풀려 갔다. 그는 벽에 손을 짚고 나를 안쪽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생각 난 것이 있다는 듯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혹시 불 난 곳을 말하는 거야?”

“불이 났다면…….”

“어떤 창관 하나가 홀라당 타버렸던 사건. 그곳에 있던 남창 새끼들은 전부 다 뒤졌지.”

남자는 겨우 웃음을 참고 있다는 듯이 씰룩거리며 다시 술병을 들었다. 소란스러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마치 물에 잠기어 바깥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는 것처럼.

“전부 다 죽… 었습니까?”

“그래. 불이 옆 마을까지 번지는 바람에 꽤 많은 놈이 죽었다지 아마.”

남자는 남은 술마저 전부 들이킨 뒤, 내 손목을 잡았다. 아직도 나는 그 조용한 물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확인일까. 부율이 말했던, 끔찍한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남자의 입을 통해 재차 확인했다. 금세라도 쓰러져 무너질 것 같이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 가게에도 남창이 한두 명은 있을 거야. 그러지 말고 위로 같이 올라가는 게 어때?”

“…….”

남자는 새빨간 눈을 하고 충격으로 새파래진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이 축축해질 때까지 혀로 핥고, 또 핥았다. 무의식적으로 불뚝 튀어나온 성욕을 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여전히 무의식의 세계에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어서 올라가자.”

남자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나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내 몸이 남자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

깨달은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불길 속에서 부율이 원래 구해 내야 했던 것은, 수오 님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갖기 위해 불을 저질렀고, 나를 구해 냈다. 몸이 그때 불에 뎄던 상처처럼 검게 짙어진다. 화상은 딱딱하게 굳어 가고, 내 마음 언저리에 그리움으로 자리 잡았다. 발악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나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읏.”

그러니까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살아 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고통스러웠고, 어서 이 슬픔을 끝내고 싶었다.

“술부터 한잔해.”

2층으로 올라가 남자가 내게 작은 술잔을 건넨다. 동그랗던 시야는 어느새 좁은 삼각형처럼 답답하게 내 의식을 가리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 술잔을 받아, 술로 입술을 적셨다. 그런데도 몸은 파삭하게 말라 가고 있었다.

“젖통이 크네. 빨아주고 싶게.”

남자의 팔뚝이 예민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남자가 따라 주는 술을 다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텅 비어 있던 속이 금세 뜨거워지더니 몸에 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속이 쓰렸다. 나는 그 쓰린 속으로 가슴의 통증을 못 이긴 척 받아들였다. 눈물은 그때부터 툭툭 떨어져 내렸다.

나는 수오 님을 지키지 못했어. 그를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죽음으로 몰고 갔다. 차라리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야기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부율이 내가 아닌 수오 님을 구해 냈을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설마 양반집 아가씨를 임신시키겠어.”

남자는 이죽대며 더 적극적으로 내 몸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른 색깔의 술을 잔 위로 졸졸 따라 주었다.

“마셔.”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강압적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우울은 내 몸을 순식간에 덮쳐 왔다.

“……좆을 빨지 않고는 못 견딜 거야.”

남자의 음성마저 희미하게 들린다. 시야는 뿌예지고 덜덜 떨리던 다리조차 완전히 힘을 잃어 갔다.

“둘만 있을 수 있는 방으로 가자.”

나는 남자와 발을 맞추어 그가 가리킨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오 님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그 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 * *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하아, 하아.”

정신을 차리니 남자가 내 아래에 누워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의 움직임 말고는 별달리 저항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는 깨진 술병의 날카로운 부분을 남자의 목에 들이대고, 낮게 웃었다. 남자는 술기운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 더러운 숨을 내게 뿜어대고 있다.

“어서 말해.”

“모, 몰라…. 나, 나는…….”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왈칵, 그 추잡한 손길은 벌써 새하얀 가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정말… 그 마을은 불에 타 사라졌…….”

“거짓말이야.”

남자의 눈덩이에 굵은 내 눈물방울이 턱턱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수오 님…….”

나는 깊은 몽상에 빠져 있었다. 남자를 인식하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할 수도 없었다. 남자의 목에 그어진 붉은 상처가, 그저 무덤덤했다.

“미, 미친년…….”

남자의 벌어진 입술에서 그제야 공포 이외의 것이 튀어나온다. 그는 완전히 입맛을 잃은 듯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더듬거렸다. 남자의 볼품없는 혓바닥이 자꾸만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다.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술병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던 걸까. 이 자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나를 겁간하려고 몸을 더듬는 순간부터?

“제발 사실을 말해줘…….”

나는 홀린 듯 남자에게 애원했다. 이 자는 답을 알고 있지 않아. 절대, 아무것도 알지 못해. 소설 속 주변 인물에 불과한 남자는 이 상황을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눈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내 시선이 문을 향했을 때, 남자가 필사적으로 내 어깨를 뒤로 밀쳐냈다.

“크, 씨발년아!”

남자의 커다란 발악이 그대로 내 몸을 짓이긴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남자의 몸에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알몸인 내 몸을 충혈된 눈으로 담았다. 그의 성기는 공포 때문에 아직 발기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일그러진 자존심 때문에 불을 지피고 싶을 뿐이었다.

“하… 윽.”

남자의 손이 내 젖가슴을 덮쳐 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미 남자에게 빼앗긴 술병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내 몸이 더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남자의 손길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이 순간 자체가 끔찍했다.

“이 씨발. 이 미친년을 그냥……!”

그가 아직 완전히 서지 않은 물건을 내 음부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좀처럼 들어가지 않자, 열이 받았는지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죽고 싶었다.

나는 눈을 뜬 채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를…… 끝내는 방법이 있을까.

“윽, 크하아악!”

그런데 그때였다. 남자의 목에서 내가 그었던 상처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 가슴 위로 떨어지는 남자의 선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유독 지독해 보이는 한 시선이 내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일어나.”

그는 죽은 남자의 시체를 방 한구석에 쓰러뜨리더니 나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그 섬뜩한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남자가 건넨 옷을 걸쳐 입고 나서야,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부율이었다.

“내가 네게…….”

나를 강하게 붙들고 있는 그의 손이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떨렸다. 눈은 진작부터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었다.

“너무 상냥하게 굴었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거칠었고, 연약했다.

“네게 강제로라도 알려 주었어야 하는 건데.”

그는 내 손목을 부서뜨릴 기세로 나를 거세게 벽에 밀어붙였다. 나는 공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무서운 눈빛에서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나를 죽일까. 그러면 좋을 텐데. 그가 나를 죽였으면 좋겠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남자가 내 목에 손을 두른다. 그러나, 힘을 주지 않은 채 나를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어째서.

그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는 죽어서도 나의 것이다. 누룩.”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함에도 구슬프게 들려왔다. 나는 그의 뺨에 떨어지는 눈물을 응시했다. 가슴에 생긴 상처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 벌어진 틈으로 남자의 비명이 둥지를 튼다. 그렇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죽지 못한다는 것. 내가… 수오 님을 영영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앞으로 똑똑히 알려주마.”

그의 손에 차츰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남자의 팔을 보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그 나약한 힘줄을.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그 현실에서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상처 주고 싶어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울부짖을 뿐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그놈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남자의 잔인한 말에 결국 정신이 흐릿해지고 만다. 술에 취한 몸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부율에게 기대고 만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할 수 없다.

나를… 살릴 수 없다. 이 절박한 어둠으로부터 결코.

* * *

한 시진 전.

부율은 황폐해진 정신으로 텅 빈 방을 한참이나 뒤졌다. 누룩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으나 그가 받은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누룩이 그의 품을 떠났다는 것. 그를 거부했다는 것. 그의 옆에 있기 싫어한다는 것. 꿈속의 그녀처럼 누룩 역시 그를 떠나리라는 것. 그 끔찍한 사실이 그의 마음을 해하는 것 같았다.

지 대감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자가, 정말 그가 알던 부율이 맞던가. 아주 사소한 것에도 미친 성정을 뿜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한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율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짐승처럼 방을 헤집다가 이내 거칠게 문을 젖히고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 몰골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허…….”

지 대감은 품에 쥐고 있던 신분 패(牌)를 꺼냈다. 지방 향리의 여식임을 인증하는 귀족들의 신분증이었다. 부율은 신분도 알지 못하는 저 여자를 데려다가, 결국 귀족으로 만들 셈이었다. 그렇게 양반이 된 그녀를 자신 옆에 앉히고 철저히 그녀를 가두고 싶은 속셈이었다.

“헌데…….”

지 대감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선정 그자가 찾던 물건과도 닮았단 말이지.”

과거 황가의 외척으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쥐었던 가문이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귀족이 되어 버린 선정. 왠지 그자가 찾던 여자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지 대감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선정이 그를 찾아왔던 것은 8년 전이었고, 이후에는 산속에 은거하는 그를 찾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분명… 고아를 찾고 있었는데.”

선정이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들어서지 않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딸이라도 들이고 싶었던 건지 그는 굳이 고아인 여자아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상세했고 구체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여아의 생김새. 그리고 나이마저도.

12살 정도의 이미 다 자란 아이가 왜 필요한지는 몰랐지만, 선정은 필사적인 얼굴로 자신을 찾아왔었다. 결국,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지 대감은 그 독특한 마지막 설명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인중은 가늘지만 길지 않아야 하며 눈썹은 두껍지 않고 일자로 늘어져 있는…. 유난히 현 황가의 핏줄들과 닮아 있는 그런 여아를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 고아를 찾아 선정은 진정 딸로서 키우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야 드는 의문에 지 대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촉이 잔뜩 곤두섰다. 하지만 그는 과거부터 눈감아 온 수많은 일처럼 이번 일도 모른 체할 셈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부율이 그에게 확실한 먹잇감을 물어다 주지 않는 이상, 그는 방관할 셈이었다.

* * *

부율은 나를 집안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구석에 널브러진 끈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내가 도망가는 것을 염려한 그가 잠자기 전 내 발목을 묶어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고, 무력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그러다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목조에 내 두 손을 끌어 올려 고정했다. 압박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끈이 단단하게 내 손목을 휘감았다.

그런 다음, 그는 줄을 잡아당겨 나를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앞에서 벌을 서는 사람처럼 겨드랑이가 올라간다. 부율이 그제야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딴 새끼한테 강간을 당해도 좋을 만큼 내 품이 싫었던 것이냐.”

부율이 내 등 뒤로 섰다. 벌써 딱딱히 굳은 그의 성기가 내 엉덩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는 내 속곳을 벗긴 뒤 허벅지 사이로 끈을 집어넣었다. 거친 실뭉치들이 벗겨진 정점을 사정없이 긁었다. 나는 발끝을 들어 어떻게든 끈에 닿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는 그런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이리 보니 정말 기녀가 따로 없어.”

“으흣…….”

“네 더러운 곳을 끈으로 묶어 종일 방 안에 가둘 것이다.”

남자는 계곡 틈새까지 끈이 들어갈 수 있게 양쪽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느껴본 적 없는 기분 나쁜 전율이 하복부를 덮쳐 왔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대로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곧 천장 위에 닿아 있는 내 두 손목을 포박하고 있는 굵은 끈에 음부를 조이고 있는 끈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팔이나 다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붉은 속살에 박혀 있는 끈이 위아래로 움직여 미칠 것 같았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감각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쏟았다. 부율은 그런 나를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볼 뿐이었다.

“아, 아흑! 흐윽……!”

“이렇게 보니 가슴이 덜렁거리면서 움직이는 게 꽤 불편해 보이는군.”

부율의 눈동자가 흔들거리는 젖꼭지에 가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여분의 끈을 집어 들었다.

“꼭지만 보이도록 젖통을 꽉 묶어주마.”

부율이 입맛을 다시며 아래로 처진 내 젖가슴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쥐고 짜더니, 가슴 위쪽과 아래쪽으로 끈을 두르고 가운데를 연결해 매듭을 지었다. 동그랗던 젖이 끈의 압박으로 와그락 무너지더니, 젖꼭지만 앞으로 튀어나왔다. 부율은 그런 내 가슴 모양을 여러 번 만지작거리며 성기를 세웠다. 귀두가 그의 음모에 맞닿을 정도로 바싹,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대로 꼭지를 빨리면 어떻게 울지 기대되는구나.”

느릿하게 뱉은 말과는 달리 그는 거칠게 내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그다음 고개를 숙여 붉게 충혈된 꼭지를 정신없이 흡입했다.

“하아앙…! 흐읏, 싫어, 그만둬요……!”

“이곳만 딱딱하게 서 있지 않으냐. 남자한테 빨리기 쉽도록 발기한 주제에 네가 나를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내 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줄을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도, 혀끝을 세워 젖꼭지를 튕겨냈다. 그러다 내가 가냘픈 신음을 지르기라도 하면 다시 입을 벌려 유륜까지 빨아 삼켰다. 아픔에 익숙해져 가는 몸은 남자가 주는 폭정에 환희를 질렀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머릿속에서조차 남자의 커다란 성기를 애원하고 있다.

나는 안간힘으로 떠오르는 남자의 몸을 밀어냈다. 이대로 남자를 안고 싶고 그의 입에 혀를 넣고 싶다는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어째서 이리도 더러운 생각에 잠기고 마는 걸까. 스스로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하…… 애액이 진창 쏟아져 나오는구나. 끈이 물에 흠뻑 젖었어.”

부율이 음부에 박혀 있는 끈을 잡아당기며 조롱했다. 그러다 손가락 하나를 곧장 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찌그덕하는 물소리가 들리자 부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푹 젖은 손가락을 보지 밖으로 빼내더니 그대로 입안에 넣고 빨았다.

“시고 짜구나. 제대로 익었어.”

“읏…….”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재빠르게 내 턱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다시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넣어 달라고 애원해 보아라.”

“…….”

“박히고 싶어 안달 난 몸뚱이로 언제까지 참을 셈이냐.”

남자의 바람대로 나는 참지 못했다. 그를 엉망진창으로 괴롭혀주고 싶었다. 나는 그를 상처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었다. 그가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차라리 그가 이대로 날 죽여주길 바랐다.

“읏… 당신이, 싫어…….”

부율의 눈이 커졌다.

“난 당신을 원하지 않아……!”

부율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한동안 내 눈동자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이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네 눈에는 내가 병신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하윽!”

그는 줄을 잡아당겨 내 음부를 괴롭히는 끈을 강하게 조였다. 소음순이 거칠게 쓸려 따갑다가도, 발기한 앞부분을 여러 번 스치자 비명이 나왔다. 엉덩이 뒤까지 파고드는 줄 때문에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다리를 비비 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기된 내 뺨 한쪽을 매만지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말해.”

“하… 으으읏… 아항……!”

“너도 날 원한다고 말해!”

부율이 성난 힘으로 내 뺨을 문지른다. 나는 끝까지 그가 원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나는 부율을 원하지 않았다. 그를 저 밑까지 끌어 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하…….”

갑자기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끈으로 묶인 내 몸을 감상하듯이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눈으로만 흘겨보다가,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나는 힘이 풀려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똑바로 누워.”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나를 보며 위협하는 시선이 위에서부터 떨어진다. 나는 어두운 남자의 인영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둠에 가려지지 않는 검붉은 성기가 너무도 선명히 내 앞에 있다. 귀두 끝에는 탁한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고 금방이라도 소음순을 갈라 보지를 비집고 정액을 분출할 것만 같았다. 끔찍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 반응을 즐기려고 마음먹은 듯이 입꼬리를 당겼다.

“이리도 말을 안 들으니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하겠지.”

“오, 오지 마…….”

“임신이라도 시켜야 조금은 얌전해지겠구나.”

“시, 싫… 아악!”

그를 피해 뒷걸음치다가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을 때쯤, 부율이 내 두 다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내 두 발목을 끈으로 묶더니 아까와 같이 천장에 달린 매듭에 연결했다. 순식간에 두 다리가 천장을 향해 위로 올라간 꼴이 되었다. 등은 바닥에 찰싹 붙고 낑낑대며 일어서려고 해도, 남자의 앞에 꾹 다문 보지를 보인 채 애벌레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음문 사이로 힘겹게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다리를 벌리지 못하니 보지 속이 예전만큼 편하지 않을 것이다.”

“흐윽! 아아으흐읏……!”

“아랫배가 더부룩해서 좆을 밀어내고 싶겠지.”

부율이 손가락으로 보지 속을 요란하게 긁었다. 두 발목에 고정된 끈 때문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떨고 있는 내 몸을 보고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이런 자세라면 내 정액이 네 자궁까지 닿기 쉽겠어.”

그는 물로 흥건히 젖은 귀두를 소음순에 비볐다. 찰박거리는 살점끼리 마찰하자 금방이라도 미끄덩하고 그의 물건이 안쪽까지 들어와 버릴 것 같았다. 묘한 기대감과 불쾌감이 내 몸 위를 짓눌렀다. 이렇게 함락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뜨겁다. 누구라도 좋으니 성기로 거칠게 쑤셔 넣어주길 바랄 만큼.

“넌 내 아이를 낳아야 할 것이다. 하아… 그때까지는.”

“하으으으아… 앗!”

“매일같이 네 젖은 보지 속에 정액을 넣어주마.”

통통하게 불어 있는 살점을 비집고 부율의 성기가 힘겹게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물건을 끝까지 넣으려고 했다. 발목에 감긴 끈 때문에 허공에 들린 허리가 고통으로 비틀린다. 하지만 그는 방해된다는 듯 움직이는 내 허리를 붙들고 아랫배를 더욱 밀착시켜 왔다.

“아흐으응……!”

“크윽……!”

그의 고환이 내 엉덩이에 닿을 때까지 안으로 깊숙이 성기가 들어왔다. 벌어지지 않는 다리 대신 구멍은 스스로 넓어지기 위해 물을 쏟아냈다. 부율의 눈이 붉은 속살에 간다. 그는 질 속에 남근이 제대로 박혀 있는지 살피기 위해 손가락으로 소음순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이윽고 빈틈없이 구멍이 메워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허리를 움직였다.

“이리 박아 넣는 게 수월한 것을 왜 여태 몰랐을까.”

“하으응… 아, 흐으읏……!”

“묶어 두고 범해야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 것이냐.”

그는 허공에 뜬 내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고 통통한 살을 찰싹 때렸다. 마치 혼나는 것 같아서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발개졌다.

“아흑!”

“이렇게 자지러지는데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내 엉덩이를 연달아 때리며 동굴 속에서 자지를 움직였다. 그러다 어딘가 걸리는 곳을 찾아내 그곳을 집요하게 찔러 왔다.

“싫, 아, 흑…! 싫어…! 아흐윽!”

“앉기 힘들어질 정도로 엉덩이를 때려 주어야 말을 들을 것이냐. 그리되길 원하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분히 엉덩이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는 만족스럽게 부어오른 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쓸며 울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초점을 잃어가며 흐릿해졌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위험해 보였다.

“너는 나의 것이다. 누룩.”

뜨거운 손이 천천히 내 아랫배로 올라왔다. 그는 자지가 박히면서 진동하는 내 아랫배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훑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내 아랫배를 힘껏 손으로 눌렀다.

“아……!”

“이곳에 내 아이가 들어설 것이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너는 내 아내가 될 것이고.”

손은 내 젖가슴으로 올라왔다. 그는 아직도 끈에 묶여 짓눌려 있는 젖을 빤히 쳐다봤다. 남근은 흥분한 채 불끈거리며 내 안에서 크기를 더해갔다. 오싹했다. 그는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손을 뻗어 봤지만, 그는 오히려 즐기며 미소를 흘렸다. 확실했다. 이미 이성이 듣지 않을 만큼이나, 부율은 미쳐 있었다.

“내 아이는 네 젖을 빨며 자라나겠지.”

그가 서 있는 유두를 집으며 왼쪽으로 비틀었다. 피가 몰려 충혈된 젖통이 남자의 손길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 응… 아, 으응…….”

“그러니 네 몸은 내 소유다. 함부로 딴 새끼랑 뒹구는 건 허락 못 해.”

그는 질척대는 보지를 만끽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고정된 채 움직이지 못하는 두 다리도 기꺼워하였으며, 가지런히 모여 천장 위로 향해 있는 두 발목도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흥분하고 있는 것은 신음을 흘려대는 내 입술이었다. 연약한 살점을 매끄러운 귀두 표면으로 짓이길 때마다 입 밖으로 침이 흘렀다. 몸이 영락없이 그에게 반응했다.

“흑, 아… 우욱… 흐윽…, 아, 읏!”

그는 내가 울부짖고, 비명 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의 의도대로 멋대로 흐르는 눈물이 얄미웠다. 그런데도 자꾸만 몸이 뜨거워졌다. 견딜 수 없이 남자의 것이 필요했다. 좀 더 빠르게 그곳을 찔러주길 바랐다. 좀 더 세게. 거칠게. 더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 흐윽! 아윽! 아, 응……!”

내가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 그가 내 입술에 손가락을 넣으며 빨라고 명령을 한다. 나는 쾌락에 취해 남자의 손가락을 쭉쭉 빨기도 핥기도 하며 그를 재촉했다. 그저 수동적으로 남자가 내 구멍 안에 거칠게 박아 주기를 기다리며 엉덩이를 흔들 뿐이었다.

그는 내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빠르게 박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성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아쉬운 신음이 바람처럼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끝이 난 걸까. 방심한 그때, 남자가 잔뜩 발기한 기둥을 다시 구멍 속으로 박아 넣었다.

“아아아앙…! 하아으, 아, 읏!”

“큭!”

전율이 그와 나를 이은 하복부를 덮었다. 나는 질식할 것 같이 숨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저 남자가 움직이는 박자에 맞춰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그는 내가 절정에 다다른 것을 알고 음부에 손을 넣었다. 더듬거리는 그의 손가락 끝에 질척한 애액이 맺혀 있었다.

“하하하…. 내 것으로 끝까지 갔구나. 그리 증오하던 남자의 자지 맛이 제법 꼴렸나 보군.”

“흑…. 아… 흑.”

“철저히 씨물받이처럼 다루어 주마. 정액을 먹고 씨가 자궁까지 달하기 전까지 내 너를 이리 귀여워해 주겠다.”

그의 눈가가 야살스럽게 휘어진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커다란 몸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나를 덮치는 그의 단단한 근육들이 다시 바싹 긴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 허벅지를 꽉 붙잡으며 재차 성기를 집어넣었다.

“네가 기절하더라도 밤새도록 정액을 넣을 것이니 기대하거라. 하아, 큭…….”

얼마 안 가, 그의 요도가 움찔하며 구멍 밖으로 정액을 배출했다. 그럼에도 그의 것은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탄성을 유지했다. 얼마나 딱딱한지 내벽에 그의 기둥이 스칠 때마다 저릿하고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나를 안았다. 보지 속에 맑아진 정액을 뿜어내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그럴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내 젖꼭지를 희롱했다. 그가 마지막 사정을 끝내는 그때, 온몸은 이미 그의 정액으로 퉁퉁 불어 있었다.

“윽…. 흑…, 아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꺼운 성기로 인해 헐고 무너진 구멍 때문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 몸은, 부율을 원하고 있었다. 익숙한 쾌락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엉망이 돼버린 몸이 포효했다. 더는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 * *

밥숟가락이 그릇을 뒤적이는 소리가 요란스레 방 안을 채웠다. 어색한 침묵 탓에 분위기가 더욱 묘하게 흘러갔다. 부율은 깨작대는 내 행태에 미간을 좁혔다. 그에게서 밥맛이 없냐는 질문이 몇 번이나 들려오지만 나는 철저히 무시하며 몇 안 되는 밥알을 억지로 입에 삼켰다. 썩은 내가 나는 찌꺼기들을 머금는 듯 입술이 구부러졌다. 그만큼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식사가 유쾌하지 않았다.

“새로 떠다 주겠다. 이미 많이 식지 않았느냐.”

“…….”

밥그릇에 말라붙은 쌀알들을 보고 그제야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달았다.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니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저를 봐준 것이 그리도 좋았을까. 바보 같은 남자의 표정에도 실없는 비웃음조차 나가지 않는다. 싫다.

“누룩.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

답답해진 나머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그런데도 반응 없는 내 눈동자에 그만 그가 허탈하게 숨을 뱉는다. 언제까지 이런 꼴로 그의 옆에 있어야 하는 걸까. 밤이 되면 언제나 똑같이 그의 것을 받아내야 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속곳에 남은 그의 흔적을 닦아내느라 애써야 했다.

밖에 조금이라도 나가려거든 그가 붙잡는 바람에 바깥 공기조차 마실 수 없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감금 속에서 그는 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의 말만 들어야 하고, 그와 정사를 나누어야 하는 생활. 그 속에서 나는 죽은 자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입을 벌리거라.”

남자가 기어이 내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들더니 밥알을 크게 퍼,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저 눈을 흘길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외면해 버렸다. 그가 낮게 실소했다.

“아직 나를 거부할 힘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보지가 덜 다물어진 것 같구나.”

나는 남자의 음탕한 말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무언의 반항이었고 그를 상처 주기 위함이었다.

“나를 자극해서 좋을 것 없다. 당장 이 밥상 위에 널 엎어뜨리고 네 젖통이 뭉개질 만큼 뒤에서 쑤셔 줄 수도 있으니까.”

“…….”

소름 끼치는 남자의 말에 입술 끝이 동요하고 만다. 그런 미세한 내 반응에도 남자는 재깍 알아차리고 손을 뻗어 왔다.

“먹어라. 지금 당장.”

그가 굳게 다문 내 턱을 끌어당겨 다시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렸다. 청개구리가 된 아이처럼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의 뜻대로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네 정녕.”

그 순간 그가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보지 속을 엉망으로 해 놓아야 말을 들을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이미 위협적으로 낮아져 있었다. 그 위세에 기가 눌린 어깨춤이 작게 내려앉는다. 하지만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되려 인상을 가득 써본다.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웃더니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아!”

“엎드리거라.”

기어이 그가 내 어깨를 누르자 속절없이 몸이 아래로 무너졌다. 그의 말대로 젖무덤이 밥상에서 일그러지더니 펑퍼짐하게 눌렸다. 나는 뻘게진 얼굴로 부율을 노려봤다. 그는 재차 내게 경고했다.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잠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먹거라.”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를 덮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기로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가 바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거 놔요!”

그가 빈틈을 보인 그때, 나는 그를 힘껏 밀쳐냈고 그의 등이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부율은 한참을 놀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실망감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미 내가 그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아직도 그는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질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날 보내줘요.”

“…….”

끓어오르는 심정에도 조용히 그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좀 더 발악했어야 했다. 그가 보는 앞에 노랗게 뜬 얼굴을 들이대고 그를 반대했어야 했다. 그랬었다면.

“…치마 올리거라.”

부율이 이토록 난폭한 눈으로 날 바라보지 않았을 텐데.

“읏……!”

부율의 손길이 다급하게 내 등허리로 올라왔다. 그는 상 위로 내 어깨를 짓누른 채 반대편 손으로 내 치마를 들쳐 올렸다.

“바로 꽂아주마.”

그가 바지 매듭을 풀고 커진 성기를 음부에 문질렀다. 남근은 벌써 뜨거워져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걸까. 날 바라보던 순간부터 줄곧 발기해 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첨단이 울긋불긋했다. 나는 뒤에서 덮쳐 오는 그를 포기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애초부터 반항할 기력은 없었다. 체념한 채 그의 물건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크윽!”

“하아으읏……!”

어젯밤 내 안에 분출됐던 그의 정액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그 굵은 심지가 질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느다란 내 목을 이로 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내 체취를 맡는 게 느껴졌다. 그 커다란 성기가 더욱 괴물처럼 변해갔다.

“하아, 하아. 제기랄.”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내 아랫배를 끌어안았다. 정신없이 내 속살을 탐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수컷이 암캐를 짓밟아 생식기 안에 발기한 것을 삽입하는 듯이 부율의 것이 크게 부풀며 내 보지 안을 탐했다.

더러웠다. 하지만 점차 젖어 들어간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스스로가 비참해서 참을 수 없었다.

“젠장. 큭.”

오랜 시간 내 뒤에서 몇 번이고 허리를 움직인 남자가 마지막 순간 성기를 내뺀다. 그리고 내 입을 억지로 벌린 뒤 급하게 귀두를 욱여넣었다.

“우웁!”

“크흑…! 더 크게 벌려!”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자 그 틈을 타 남자의 성기가 목구멍 끝까지 들어왔다. 그는 내 귓불을 붙잡고 목울대가 있는 곳까지 밀어붙였다. 이윽고 기도에 정액이 뿌려졌다. 그 끈적한 액체가 점막처럼 숨구멍을 막아 버린다. 가슴이 콱 막히며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자를 밀쳐내고 콜록대며 정액을 입 밖으로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알겠느냐.”

남자는 차림새를 정리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기침 때문에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도 나처럼 붉어져 있었다. 마치 나보다도 더 괴롭다는 듯이. 그런 모순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내가 주는 대로 꼬박꼬박 먹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다신…….”

목이 타는지 그가 마른 혀로 입술을 핥는다. 그러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은 채 줄곧 그렇게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날 쳐내지 말아라.”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알아달라며, 자신을 보아 달라고 하는 눈빛도 보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다시 벽을 바라본다.

“…….”

그리고 밤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 * *

“아…! 으흑……!”

“하아, 크윽! 윽!”

벌써 며칠째인지도 모르는 밤에, 나는 여전히 부율의 아래에 깔려 신음을 뱉고 있다. 지겹다고, 더는 느끼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 빌어 보지만 그 누구도 응답해 주지 않는다.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반복해서 발기한 성체를 구멍 속에 넣고 흔들었다.

“아, 윽. 아흑…, 욱…….”

“누룩. 하, 윽. 누룩.”

그는 오랜 정사로 새하얗게 질려 있는 내 얼굴에 몇 번이고 입술을 찍었다. 이제 서로의 채취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었다. 나는 밤이 되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될 때쯤, 나의 연인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차마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에는 가슴이 아렸다.

“크윽!”

남자의 손톱이 내 엉덩이 살에 박힌다. 그는 내 안에 정액을 쌀 때, 유난히 난폭했다.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표식을 새기고 싶어 안달 난 수컷처럼. 그리고 언제나 옆에 누워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혀가 서서히 입안으로 들어오고, 내 혀를 부드럽게 감싼다. 습관처럼 시작되는 후희에 나는 남자의 어깨를 슬며시 밀쳐낸다. 그러나 부율은 밀려나지 않고 되려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읏… 하읏…….”

“가만…히 있어. 쉬이.”

그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이 나를 감쌌다. 거듭된 성교로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고, 가쁜 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등을 토닥였다.

“누룩…….”

나를 부르는 숨결이 뺨에 닿았다.

“사랑하고 있다…….”

그의 숨이 점점 규칙적으로 낮아져 간다. 나는 달빛에 가리어 빛을 잃어가는 노란 등불에 시선을 맞췄다. 차츰… 부율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도 나를 가두느라 피곤했던 걸까.

비교적 지난 밤들보다 자유로워진 두 발목과 양 손목을 끄덕 움직여 봤다. 나는 남자의 팔을 내 몸에서 치워 내고 몸을 일으켰다. 계속되는 성교로 어긋나 있는 허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은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슬며시 문고리를 잡고 부율 쪽으로 눈을 돌려 보았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깊게 잠이 들어 버린 것일까. 나는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아…….”

그 순간, 아득히 먼 곳까지 벌거벗은 숲길이 눈앞에 크게 펼쳐졌다. 나는 정신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그러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올까 봐 얼른 문을 닫았다. 부율이 혹여 깨어난 것은 아닐까 몸이 반사적으로 휘청거렸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문을 열었다.

“…….”

껌껌한 밤길에서는 짐승의 우는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발을 내디디고 흙을 밟았다. 부율이 내가 신을 만한 신발을 모조리 불태운 바람에, 맨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숲으로 뛰어갔다. 그가 뒤에서 따라올까 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도 무시하고.

“하아, 하아.”

얼마나 뛰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동안 부율의 단단한 몸에 깔렸던 몸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땅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에 긁힌 발바닥에서 피가 났다. 하지만 드디어 벗어났다. 그 남자에게서 자유가 됐다. 나는 오랜만에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찰랑―.

그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

나는 홀린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산길에서 볼 법한 폭포가 나왔다. 그 아래 개울은 꽤 깊어 보였다. 나는 피로 얼룩진 발을 물에 씻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죽을 수 있을까.

수면에 흘러가는 핏물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 발을 완전히 물에 담갔다. 이대로 몸에 힘을 빼면, 폭포에 잠길 것 같았다. 그래서 숨을 쉬지 못하고, 결국에는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오 님…….”

그때. 그 아름다웠던 순간이 가슴에 사무칠 만큼 떠오른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리고 그가 내게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해주었을 때.

말하거라.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영원히, 그가 나를 버리기 전까지 나는 그를 갈구하며 그의 몸을 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몸짓도, 그가 내게 보인 사랑도 모두…….

“흑…, 으흑……!”

그리워. 이대로라면 온몸이 흘러내릴 것 같이 그가 보고 싶었다. 물에 떠내려가도 좋을 만큼,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나는 죽을 수 있었다.

우리… 같이 떠나요.

그에게 처음으로 내 마음을 고백했던 날. 어째서 그토록 느지막이 결심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내게 보여준 소중한 응답이 왜 지금은 들을 수 없게 돼버린 걸까.

그는 정말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토록 선명한데. 이렇게나 가깝게 느껴지는데. 아직도 그의 일부가 내 몸 안에 남아, 여전히 나를 들뜨게 할 것만 같은데. 잔인했다. 이렇게 잔인한 이야기였다면 그의 시종으로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내 두 눈에 품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

나는 몸에서 조금씩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리운 수오 님. 나를 다른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의 얼굴이 흐린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손을 뻗어 그 환영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내 안개에 가려 다시 사라져 버린다. 가슴에 가시가 꽂힌 듯 상처가 쓰라렸다. 그래. 더는…….

“…누룩!”

완전히 물에 가라앉기 전에, 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였다. 왜 자신이 망설이는지도 모른 채 잠시 동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룩!”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그가 간신히 내 팔을 붙잡는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눈가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손을 뻗어 남자의 눈가를 훔치자 그의 눈시울이 왈칵 차오른다.

“어째서……!”

“…….”

남자는 내게 이유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답도 그에게 줄 수 없었다. 그는 알지 못해. 내 괴로움을. 내가 수오 님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로 인해 사라진 연인의 존재가 얼마나… 아픈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게 어찌나 증오스럽던지, 나는 다시 남자를 향해 독기를 내비쳤다. 부율은 그 시선에도 저를 봐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보 같은 남자였다.

“어째서…. 죽을 수도 있었다. 죽을 수도 있었어……!”

“…….”

“아, 아니면 설마…….”

그가 끔찍한 상상을 품었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도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수오 님을 따라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똑바로 봐주었으면 했다. 나는 실의에 빠진 남자의 얼굴에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게 놔둬요…….”

“뭐라…….”

“그만 날 놔줘. 이대로 죽…….”

하지만 거기에서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떨리던 다리가 기어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으니까.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필사적으로. 그저, 그것이 최선인 것 같이.

“제발…….”

그의 등이 위아래로 크게 떨렸다. 빗줄기라도 떨어지듯 바닥에 솟은 풀들 곁으로 큰 눈물 줄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흐느꼈다. 꿈에서처럼.

“내가 어찌하면 되겠느냐. 제발…….”

나는 남자의 어깨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아픔을 끝낼 수는 없어. 하지만 남자는 마치 어떤 것이라도 내게 가져다 바치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는 수오 님이 아니야. 그러니까 할 수 없다. 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었다. 그는.

“내가… 내가 죽으면 그 마음을 접어줄 것이냐.”

“…….”

“네가 사랑하는 그놈을 죽인 내가 죽으면 더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냐.”

지금 뭐라고…….

“이 고통을 끝내고 싶구나. 나는…….”

“부…….”

“나 역시도 네가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더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제발…….”

그때, 부율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에는 내가 알고 있던 남자의 폭정이 없었다. 그는 순수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다는 듯이.

“죽지 말고 살아다오.”

거짓말처럼 마음이 갈가리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 남자를… 나는.

“그리고 네 손으로 나를 죽여다오.”

숱하게 되물었던 그동안의 의문들이 기억난다. 어째서 부율을 떠날 수 없었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그를 증오하면서도 왜 그의 몸을 받아들이고야 마는지. 그저 처음에는 그가 내 전생과 연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가 내 연인이었기에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 지금 이 순간 가장 크게 동요하고 있는 걸까.

“부율…….”

나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선이 정면에서 맞닿았다. 남자와 나는 서로를 지긋이 바라만 보았다.

“…당신.”

그제야 깨닫고 만다.

“아…….”

나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번 생에도 남아 있음을…….

“…….”

나는 약해진 그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았다. 이 남자를 죽일 수 없다. 이 남자가 보는 앞에서 죽을 수도 없었다. 허해진 가슴 속 빈구석에서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점철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남자를 떠나지 못한다.

“누룩. 연모한다. 너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

나는 이 남자의 사랑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사랑일까. 나는 자문했다. 알지 못한다.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갇혀 있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이 눈을 뜨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답답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가슴에 엉겨 붙는다.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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