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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의혹(1) (4/18)

Chapter 4. 의혹(1)

수오는 약이 자신의 고통을 멈추어 줄 것이라 믿었다. 1년 동안 거액을 들여 구한 약은 과연 효과가 있었고, 자신의 욕망도 채워주는 것처럼 보였다. 소중한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그를 한없이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를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점 약의 효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끔찍한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매시, 매분 장면들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름다웠던 몸이 거칠어지고, 텁텁해지기 시작한다. 마르기 시작한다. 시드는 꽃처럼, 지는 노을처럼 수오는 떨어져 가고 있었다. 깊은 절망으로.

“내성이 없는 약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없수.”

툭 내뱉는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눈이 찌푸려진다. 수오는 남자의 손에 들린 약 종이를 확 낚아채며 다시 물었다.

“제가 부탁한 약이 맞습니까.”

“처음 것하고 같아. 저번에 준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수오는 약을 품 안에 넣으며 숨을 내쉬었다. 반면 그런 수오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어딘지 게슴츠레해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입술을 열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환각을 보게 될 거야. 절대 잊을 수 없는 환각을.”

수오의 입가가 굳어간다. 그는 아직 이 약을 사용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남자는 어두운 표정의 수오를 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사실은 환각이 아니라는 말도 있더군.”

남자는 그대로 수오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난 1년 동안 몇 번, 이렇게 그의 연락을 받고 이곳에 오긴 했지만 오래 있으면 재수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는 다시 수도로 향하기 위한 채비를 끝마치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수오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손끝으로 약을 확인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누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마, 그 길에서 부율을 보게 될지는 몰랐다.

“길 좀 묻지.”

부율은 누룩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묻고 있었다. 행인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덕화원을 비껴간다. 수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옆은 뭐지?”

“덕화원입지요.”

행인의 얄궂은 입술에서 기어이 그곳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수오의 주먹이 가늘게 떨린다. 그는 이를 꽉 물고 망설였다. 어떤 구실로 부율을 멈출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생긴 기와집이군.”

“축제가 끝났으니 잠겨있을 겝니다.”

부율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외지인은 이곳 축제를 알지 못한다. 행인의 가벼운 언동이 무언의 규칙을 깨려 하고 있다. 수오는 흙바닥에 단단히 묶여 있던 뒤꿈치를 들었다. 그러나 더 빨랐던 것은 부율이었다.

“바쁘니 이만 가보지.”

부율은 예상외로 덕화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행인은 부율을 지나, 덕화원의 사선으로 걸어 나간다. 부율은 아까 전 행인이 가리킨 곳으로 향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수오는 안심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사방을 튀었던 그의 눈이 의미 없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수오의 시각에서 부율이 사라진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 부율이 목적지를 바꾸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부율이 갑자기 든 호기심으로 덕화원의 대문을 열었을 때. 하필이면 녹슨 쇠가 허무하게 부서져 내렸다. 여러 번 타인이 드나든 흔적 때문에 대문의 잠긴 열쇠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오의 시선이 다시 부율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수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쿵. 쿵.

대문을 지나, 넓은 화원이 보인다. 부율은 그때까지만 해도 쉽게 열린 대문이 수상하다고만 생각할 뿐 이곳의 정체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멀리서 문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과격하게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소음이.

쾅. 쾅.

소리가 나는 곳은, 가장 안쪽에 있는 별채였다. 화원을 지나, 기와집 하나를 더 넘어가야 보이는 작은 별채. 허름하게 보이는 공간은 누군가가 상당히 드나든 모양인지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나 있었다. 그 흔적이 비에 완전히 단단해진 것을 보면 꽤 오래전 발자취인 것 같았다. 부율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그곳의 문을 바라봤다.

“…잠금쇠가 밖에 나 있군.”

이상했다. 축사나 창고에서나 볼 수 있는 문을 일반 별채에서 보다니. 부율은 홀린 듯 문고리에 손을 댔다.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여는 구조인 만큼 부율이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오는 뒤늦게 부율이 덕화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뛰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을지 몰라.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고작 그녀를 숨길 수 있었던 곳이, 아무도 쓰지 않는 빈집이었으니까.

“이런.”

부율은 문을 열었다. 밖에서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던 소음이 문을 열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흐. 흐윽.”

애달픈 목소리가 부율을 흔들어 놓는다. 그는 놓치지 않고 누룩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수오는 정확히 이때부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누룩의 보랏빛 입술에서 그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수오의 어깨는 굳은 듯이 단단해져 가기만 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수오는 괴롭게 신음했다. 얼마 안 가, 그의 손끝이 가까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것하고 같아. 저번에 준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수오의 마음이 흔들렸다.

* * *

부율이 나를 데려간 곳은 화향관이 아니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무의 낡은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축축하고 후덥지근한 방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가장 먼저 이불 위에 나를 눕히고, 그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이 불쾌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가져다줄 테니 말만 하거라.”

“…….”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음식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 했던 말…….”

그의 입술이 고민스럽게 움직인다. 그가 내게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걸까. 그의 입술이 다시 다물어진다.

“…저.”

나는 반 박자 느리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부율의 눈이 커진다.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냐.”

그의 인내심 없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여태 몰랐던 걸까. 그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요.”

부율의 눈이 바짝 마른 내 입술로 향한다. 짙은 눈썹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에 있던 찻주전자를 들었다.

“차라도 괜찮으냐.”

“…네.”

찻잔 바닥으로 경쾌한 물소리가 떨어진다. 은은한 찻잎의 기분 좋은 향이 코끝으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다가와 주길 기다렸다. 그는 다시금 내 앞에 앉았다.

“잠시 일어설 수 있겠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목에 힘을 실었다. 부율이 불안한 눈길로 떨리는 내 팔을 붙잡아 주었지만, 그때마다 영락없이 힘이 빠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도로 눕혔다. 그리고 찻잔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이윽고 부율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당황해서 입을 다무는 것도 잊고,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만끽하고야 만다. 그는 입술의 좁은 틈새로 물을 흘려주었다. 나는 아기 새가 된 것처럼 부율의 한쪽 팔에 의지하여 그가 주는 물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틈새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자신이 넣은 흔적들을 확인했다. 어루만졌다. 혀끼리 맞닿은 감촉이 뜨거웠다. 그의 혀가 부드러워서였을까.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나긴 입맞춤 후, 내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들은 부율이 드디어 입술을 뗐다. 눈이 마주친다. 그의 입꼬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올라가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누룩.”

그의 뺨이 홍조로 얼룩진다. 나는 멍하니 그 두 뺨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실들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부율, 이 남자가 내 옆에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네가 그리웠다.”

그는 이불에 덮여 있는 내 손을 찾았다. 마치 애지중지하듯이 조심스레 내 손을 어루만진다. 그러다가 내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를 보았느냐.”

부율의 눈시울이 두 뺨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10년 전부터 보았던 것처럼, 너도 나를 꿈에서 보았느냐.”

그가 내게 이 말을 물었을 때, 나는 긴장을 하며 고개를 저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가 꿈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놀라야 했던 걸까. 부정하며, 소설 속 이야기에 다시 집착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기이하게도,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예전부터 줄곧 내 이야기였던 듯, 내 것이었던 듯 마음이 편해졌다. 그의 한 마디에. 그가 나와 어쩌면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

“꿈속에서 너는 나를 매번 떠났었다. 그저 말없이 나를 버려두고 갔었지.”

손가락 마디 마디에서 슬픔에 떨고 있는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그는 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한없이 숭고했다.

“매일 반복되는 꿈 때문에 미칠 것 같다가도, 가슴이 아파서 포기할 수 없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어.”

나는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까지 덮여 있던 비단 요가 스르륵 내려간다. 맨피부에 닿는 매끄러움이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 그는 잠시 놀라다가, 나를 껴안았다. 그 단단하게 보였던 가슴팍이 무언으로 흔들렸다. 쌕, 쌕. 그의 가슴이 위아래로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보았다. 스승조차 나를 가엽게 보았지.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느꼈다. 불규칙한 그의 숨소리에 덩달아 가슴이 뛴다. 나는 그것이 새로운 감정이라고는 깨닫지 못한 채로,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저, 가만히.

“허나 너를 보고 모든 것을 믿게 되었지.”

눈을 감으면, 언제나 어두운 세상이 펼쳐졌다. 나를 괴롭게 하는 꿈들이 보였다. 그것은 환각인 것 같다가도, 현실 같았다. 하지만 부율이 말하는 것은 달랐다.

“내 너를 만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 어두운 세상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눈을 떴다. 커다란 방 안의 광경이 시선 속으로 한꺼번에 들어온다. 현실이 보였다. 거짓 같던 모든 것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그가 건넨 진실이 내 앞에 있었다.

나의 전생이 그의 전생과 이어져 있다는 거짓 같은 진실이.

이곳은 정말 소설 속인 걸까.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의심이 점차 내 안에 크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당장은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부율의 손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살점을 휘어 감아 왔다.

“네가 내 시야 안에 있어 준다면 얼마든지.”

소설 속의 공은 잔악무도했고, 사랑 앞에서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그는 전혀 달랐다. 실낱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마음이, 부서질까 애처로웠다. 잠시 뒤 그가 물러서며 나를 품에서 놓았다. 그의 손이 베개로 향했다. 그는 딱딱한 벽에 솜 베개를 세운 뒤 나를 뒤로 눕혔다. 덕분에 앉은키가 높은 그와 시선이 비슷해졌다.

“화향관으로 돌아갈 것이냐.”

“…….”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오 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왔어도, 괜찮았던 것일까. 정말로.

“…밤길은 위험하니 같이 돌아가자꾸나.”

씻길 리 없는 마음인데, 그의 목소리가 녹녹했기 때문일까. 조금씩 여물어진다. 나는 수오 님을 떠올렸다. 그의 청청한 푸른 눈을 생각했다. 아프다 못해 흐를 것 같은 한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서웠다.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이.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를 떠나는 것이었다. 통제된 공간 안에서 그는 나의 유일한 세계여야 했다.

그런데 부율이 등장하면서 나의 세계는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전부 다 거짓이라고 말한다. 수오 님이 나의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고 했다. 침몰하는 시야 사이로 흐릿하게 부율의 표정이 보인다.

그는 내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옆에서 함께 기다려 주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건 어딘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내가 수오 님을 바라보았던 눈동자. 이 남자의 눈동자에도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 * *

그날 밤, 부율은 수오 님을 찾아가지 않았고 시종들은 한산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이부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감아도 더 이상 검은 세상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긴 호흡을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나는 내일 수오 님을 찾아가 해야 할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전해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부율이 수오 님을 사랑하는 미래. 나와 수오 님이 이어지지 않는 결말.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

“…아.”

그러다 문득 쓰라린 발목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수오 님을 모시려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했다. 나는 느릿하게나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재를 찾으러 곳간에 갈 심산이었다.

“읏.”

창호를 열자 바람이 셌다. 나는 찌푸린 눈으로 발을 내디뎠다.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 바람 탓에 시야가 막막해진다. 나는 익숙한 길을 더듬으며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내 팔을 팍 끌어당겼다.

“따라오너라.”

거센 바람 소리 사이로 수오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린 줄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수…….”

내 부름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수오 님은 내 팔목을 붙잡고 축간으로 데려갔다. 손님들의 마필이 있는 곳이었다. 누구도 새벽에 찾아가지 않을 곳. 수오 님은 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고 나서야 굳었던 입술을 풀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미소 짓지 않았다.

“날 찾아오지 않았더구나.”

수오 님의 시선이 내 입술 아래에서부터 발목까지 떨어진다. 나는 움츠러들며 몸을 숨겼지만, 그는 내 허리를 강하게 붙들었다. 심장이 다시 분란하게 뛰기 시작한다.

“내가 무서웠던 것이냐.”

어둠 속에서 그의 푸른 눈동자가 풀어진다.

“대답하거라. 내가 너를 무섭게 한 것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덕화원을 나가 부율을 만났던 일. 그리고 부율과 내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일. 나는 그것들을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마치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그 앞에서 제대로 어깨가 펴지지 않았다.

“네가 오지 않아 퍽 나쁜 것들을 상상하고 말았단다.”

수오 님은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줄곧 밑바닥을 응시하며 그의 발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가늠했다. 그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 순간,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까지 널 밑으로 끌어 내릴 수 있을까.”

“으윽……!”

무거운 힘이 어깨의 가장자리를 힘껏 짓누른다. 종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밑으로, 밑으로 줄어들어 갔다. 이윽고 내가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고 말자, 그가 웃었다. 손에 집힌 지푸라기가 파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역시 내 앞으로 점점 더 추락해 왔다. 밑으로, 밑으로.

결국, 눈이 마주친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입매가 나를 향해 날 서 있었다.

“광기는…, 내가 널 가지게 되면서 사라졌다고 믿었었다.”

“수… 오 님?”

그는 내 부름에 대답 대신 내 젖가슴을 아프도록 쥐었다. 일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고통에 어깨를 비틀어 보지만, 그는 내가 그럴수록 오히려 여린 살점을 노려 손톱을 박아 넣었다.

“널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데려와… 드디어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었지.”

“하… 으응……!”

순식간에 그의 커다란 손에 의해서 매듭이 벌어졌다. 그는 그 풀어진 저고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맨 젖살을 찾았다. 붉게 부풀어 오른 젖꼭지가 그의 지문에 의해 뭉개져 간다. 수오 님은 아랫입술을 핥으며 나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수치감이 열병처럼 목 위까지 차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았다.

“앞으로 일삭(一朔)이면 뒷문으로 사내놈들 양물을 받는 짓거리도 끝난다고 생각했었다. 널 드디어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으으응…! 아……!”

그의 긴 손가락이 치마 속으로 들어오더니, 단숨에 음문을 뚫고 들어왔다.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울어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물소리가 나올 때까지 그 손가락들은 쉴 새 없이 내 안을 돌아다니며 붉은 살점 안을 끝까지 파고들어 왔다. 푹, 푹 음탕한 소리가 허허한 축간 안에 울려 퍼진다. 짐승과도 같은 그의 움직임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정조를 지킨 좆을 네 보지에 꽂아줄 수 있다고, 그리 순진하게 믿고 있었지. 멍청하게도.”

그는 빠르게 묶여 있던 바지 매듭을 풀어내고 잔뜩 성이 나 있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귀두 끝에 버젓이 줄줄 흐르는 물들이 보였다. 정액을 내기 전에 흐르는 그 물들이, 기둥을 타고 그의 음모까지 뚝뚝 떨어져 내려갔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내 다리를 벌리고 그대로 첨단을 보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풀어지지 않은 살점의 근육들이 힘겹게 그의 자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픔과 쾌락 속에서 주먹을 쥐고 넋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으으으윽!”

“크윽!”

텅 비어 있던 구멍 안이 그의 살점으로 꽉꽉 채워져 갔다. 그런데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막혀 있는 안을 넓힐 것처럼 더욱더 기둥을 쑤셔 넣었다. 턱 하고 숨이 막힌다. 속살을 파고드는 두꺼운 남근에 아랫입이 견디지 못하고 한계까지 벌려지고 만다.

“아… 하으응…! 제발, 더는……!”

“큭…. 이리도 물을 척척 내니 내 어찌 널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수오 님의 손바닥이 내 엉덩이로 향한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엉덩이가 붉은 생채기로 가득했다. 수오 님은 그때마다 구멍 안에 맑은 물을 뿌리며 신음을 냈다. 현실이 흐릿해져 간다. 무엇이 진짜였고 무엇이 가짜였던 걸까.

“하아…. 엉덩이를 더 들어 보아라.”

거의 절정에 다다를 것 같을 즈음, 그의 손이 내 허리 아래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한 번에 천장 위로 들어 올렸다. 불쑥 들린 엉덩이 사이에 그의 자지가 빽빽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지가 박힐 때마다 젖통이 사방으로 흔들리는구나.”

그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미소한다. 고고한 얼굴, 매혹적인 표정. 그러나 더 격하게 남근을 내리꽂았다.

“아, 하으으으…! 가, 갈 것 같…! 이상해질 것 같아요……!”

“하아, 아직 기다려.”

땀에 절인 머리칼이 불쾌하게 짝이 없었다. 지푸라기들에 둘러싸인 몸은 더 형편없다. 나는 언제나 이 더러운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래에 깔려 엉망진창으로 범해지고 있노라면 달콤한 착각에 빠질 것 같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쾌락에 진창 뒹굴어도, 그와 이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스로 움직여 보아라.”

그가 허리 짓을 멈췄다. 나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인내심이 사라진 그가 먼저 자리에 누웠다. 그는 나를 이끌고 그의 배 위에 올라타길 재촉했다.

“자지를 구멍에 끼워 맞추거라.”

“…아.”

그의 입에서 부끄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한쪽 허벅다리를 들어 올리며 그의 끝을 갈라진 틈새로 조준했다. 뾰족한 송곳처럼 그의 시선이 내 몸을 잘게 해치는 것만 같았다.

“축축하구나. 조금만 움직여도 좆이 빨려 들어갈 만큼.”

그는 입가를 올리며 망설이는 나를 조롱했다. 아랫도리가 아릿했다. 하지만 끝을 맛보고 싶어서 애가 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천장 위로 바싹 발기한 그의 것을 내 안에 넣었다. 그리고 위아래로 허리를 움직였다.

“하으으으응……!”

“큭……!”

절정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곤두박질쳤던 박동 수가 점점 느려진다. 나는 가는 숨을 뱉으며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는 중이었다.

“계속 움직이거라.”

그의 바람대로 몇 차례 엉덩이를 움직여 보지만, 민감해진 속살이 그의 물건을 거부했다. 조금만 스쳐도 억지로 벌어졌던 상처가 쓰라렸다. 하지만 수오 님은 내 두 팔목을 붙들고 다시 분명한 목소리로 내게 명령했다.

“내가 분출할 때까지 스스로 움직여.”

그 차가운 몇 마디에 다시 어깨가 움츠러든다. 절정에 가려졌던 성교의 아픔이 서서히 몸을 괴롭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했다. 여기에서 멈출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벗어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허리를 곧추세울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를 사정시키기 위해 구멍 안을 조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넣었다 뺐다 하는 기술이 제법이구나. 창부 짓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라도 한 것이냐.”

“흐읏… 아니에요. 아, 흐윽.”

수오 님이 손을 뻗어 흔들리는 내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아까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손길. 하지만 그건 언제든지 그의 의지로 바뀔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놈한테 배우기라도 한 것이냐.”

평탄한 질문의 어조. 나는 내 안에서 맥박치는 그의 기둥으로 그 역시 절정에 다다라 오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내가 그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을까.

“…전…. 전, 모르겠어요.”

대답과 함께 가슴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반대로 그는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퍽퍽 내 구멍 안으로 그의 것을 박아 올렸다.

“하, 큭.”

“하으으읏……!”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워 내 허리를 꽉 안았다. 어느새 서로를 마주 본 자세가 된 우리는, 잠깐 동안 침묵 속에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시 그의 성기가 부풀어 오른다. 아까 전보다 커진 성기가 구멍을 빈틈없이 메웠다.

“나는 너를 연모하고 있다.”

숨이 멈췄다.

“…나의 유일한 주인이었던 너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난잡하게 범해주었지.”

부푼 성기는 폭발 직전을 알리는 듯 내 안에서 충혈돼갔다. 그때, 그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손을 뻗어 나를 떼어놓는다. 구멍 밖을 빠져나간 성기는 상상대로 붉어져 있었다. 끈적한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고, 성교의 냄새가 났다. 그는 그것을 멋대로 내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약효는 여전한 것 같구나.”

“우우웁……!”

커다란 성기가 한꺼번에 입술 안으로 모조리 들어왔다. 나는 억지로 그것을 받아내면서도 숨을 내쉬기 위해 콧구멍을 벌려야 했다. 수오 님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인지, 혹은 지겹기라도 한 것인지 손으로 내 코끝을 쥐었다. 숨이 턱 막혀온다. 죽을 것만 같았다.

“허나, 하나 더 먹는다 하여 나쁠 것은 없으니.”

“제… 흑, 바…알.”

콜록거리며 그의 허벅다리를 퍽퍽 쳐보아도 그는 물러서 주지 않았다. 침과 애액이 뒤섞여 목젖에 달라붙는다. 어째서.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을까.

“약을 먹기 위해 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으부부부읍……!”

그의 정액이 드디어 내 안에서 발해진다. 그는 일부러인 듯 내 혓바닥에 요도를 조준하고 내가 그의 맛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수오 님은 그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입을 억지로 벌렸다.

“입안에 물이 가득해졌구나.”

그의 손가락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혓바닥에서 정액과는 다른 쓴맛이 감돌았다. 그가 내게 무엇을 준 걸까.

“이제 삼켜도 좋다.”

이윽고 손가락이 입안에서 쑥 빠져나간다. 그러나 곧바로 그가 내 목을 쥐어왔다.

“무엇 하느냐. 어서 삼키지 않고.”

내 목을 쥐는 손의 힘이 서서히 세지기 시작한다. 시야가 검게 변한다. 다시 그 검은 세상이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수오야.”

모든 기억이 그 검은 세상 안에 있었다.

“쉬이…. 아기씨.”

쓴맛이 기도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동시에 내 목을 쥐고 있던 그의 힘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얹으며 내게 속삭였다.

“곧 잊혀질 것입니다.”

눈꺼풀이 감겼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쯤,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체념했다. 이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왜 지금껏 모르고 있었을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그가 만들어 놓은 지옥이라는 것을.

* * *

그를 처음 만난 건 비가 축축 내리던 장마철의 여름이었다. 덥고 찝찝한 온도 속에서도 낡은 건물은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속으로 투덜대던 내가 떠오른다. 교수는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던 손수건을 탁상에 올려놓으며 막 열변을 토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열정에 잠깐 감탄하지만, 창가를 난타하는 빗소리에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오늘도 제시간에 도착하기는 글렀어.

“…일반적으로 사후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은, 현생에서 덕을 쌓아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윤회 사상을 보면 대개 틀린 답을 내놓습니다.”

나는 노트에 필기하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전공생이 아닌 남자가 유독 눈에 띈다. 뒷자리에서 엎드려 잠을 자거나 녹음기를 틀어 놓고 딴짓을 하는 동기들과는 다르게, 남자는 침착하게 필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 하나 놓칠세라 집중하고 있었다. 왜일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텅 빈 노트를 바라본다.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이름이었다.

“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수행이 부족한 결과로 봅니다. 즉,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나쁜 일의 결과라고 보는 거죠. 삶은 끊임 없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는 불상사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남자를 보았다. 그는 필기하기를 멈추고 왼편에 있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일순 시선이 스친다. 나를 본 건가. 내가 그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킨 걸까.

“그런 생각으로 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열반 혹은 극락의…….”

하지만 그때 남자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당황하며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흔한 듯, 특이한 이름이었다. 나는 펜을 들고 빈 종이에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글자. 호일까, 오일까. 바보같이 왜 나는 그때 그의 이름에 집중한 거였을까. 편집증적인 자신의 행동에 놀라면서 펜을 내려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오늘 강의 마칩니다.”

교수는 땀에 전 손수건을 대충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서둘러 칠판의 글씨를 지우기 시작했다. 손을 들었던 남자도 태연히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가장 열심히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으면서, 시간에 쫓기고 있었던 걸까. 교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 시간이 끝났음을 알린 그가 대단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등 뒤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데. 약속 장소, 어디…….

“저기요.”

남자였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이 푸르렀다. 렌즈를 낀 걸까. 아니면, 혼혈? 그의 정체에 대해서 혼자서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전공생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내 대답에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어렵네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복도에 점점 사람들이 줄어든다. 나는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 다음에요.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가방 밑바닥에 아무렇게나 떨구어져 있는 핸드폰을 손으로 찾으며 남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끊겼던 핸드폰이 다시 진동을 내며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발신자를 확인하곤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고작 그뿐이었던 첫 만남.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 * *

꽤 시끄러운 공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바깥에서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안에서도 물이 끓는 소리로 온통 정신이 사나웠다. 우리 둘은 정신을 차려보니 그날도 함께 있었고,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망가진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지긋지긋했다. 무서웠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두려웠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집착에 익숙해진 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일상 속에 그가 있었다. 그의 존재가 너무 커서, 더는 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뚜렷이 볼 수 없었다.

“네가 자초한 거야.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그는 울부짖었다. 그도 괴로웠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야 한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내 발걸음이 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어김없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품 안으로 나를 끌어안는다. 익숙한 향기. 똑같은 감촉. 그 중독될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남자는 또다시 달콤한 말을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안아줘. 너한테 안기는 거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까. 날 네 마음대로 다뤄. 마음껏, 분이 풀릴 때까지.”

싫어. 싫다고. 죄책감과 함께 혐오스러운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건 남자를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향한 감정이었다.

“제발…….”

가냘프게 그의 어깨에 매달려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런 나를 더욱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빌어도 소용없다는 듯이, 조용히 나의 애원을 종용했다. 그 부드러움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든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모든 행동. 나의 말. 나의 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왔다. 그의 머릿속에. 그의 모든 것에.

“널 놓아줄 순 없어.”

남자는 그 희고 고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간지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그 작은 힘이 언제 무겁게 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미쳐있었다. 정말로 미쳐있었다.

“널 소유하는 게 마치 옳은 일처럼 느껴지거든.”

그날도 나는 그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는…….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 * *

졸업식 준비로 동기들이 하나둘 바빠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모두가 미래의 일로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을 때, 나 혼자 우울하던 그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을 때의 감정은 더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올곧게 믿고 있던, 평생 쌓아 놓았던 구축물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게 내가 그에게 한 짓이었다. 내가 그를 배반한 그 무언가의 결과물이었다.

“알고 있었어.”

그의 담담한 고백에 손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괜찮아.”

그는 웃었다. 억지로 입가를 올리지도 않았고, 차분한 입매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네가 내 시야에 있는 한은, 괜찮아.”

그는 펼쳐진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손마디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순식간에 내 손을 붙들어 잡았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기만 한 힘은 아니었다.

“단지 흥미였으니까. 호기심이었으니까. 그렇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죽고 싶어.”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보다도 가장 먼저 나온 말에, 나 역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사라지고 싶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의 집착으로부터도, 내 몸을 억압하고 있는 그의 상냥함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다. 이기적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없어지고 싶었다. 이 세계로부터.

“죽고 싶어. 미안해.”

그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플 정도로 힘이 실린 그의 손아귀 속에 몸이 흔들린다.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눈가에 떨어지는 눈물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날 서 있었다. 끔찍한 감정이었다.

“더는 말하지 마.”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처음 듣는 무서운 어투에 가슴이 아파져 왔다.

“제발.”

그다음,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예전처럼 내 옆에 있어.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너는 그냥 다 잊고, 다시 내게 돌아오기만 하면 돼.”

처절한 목소리가 그의 커다란 몸을 울린다. 눈물로 그의 등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내 발목을 쥐고 있었다. 나는 선 채로, 그를 내려다봤다.

“이대로 나를 버리지 마…….”

몇 년간 커다랗게 보였던 그의 몸집이, 어린아이처럼 작아지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몇 달 새 야위어진 그의 턱선 아래로 눈물이 툭툭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다. 뜨거웠다. 발목에 덴 듯 그의 눈물이 너무도 뜨거웠다. 그럴수록 죄책감은 더 짙어져만 갔다.

* * *

우울이 작게 내 안에서 움트고 있었을 때를 기억한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 작게만 보여서, 하찮게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언제든지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아직 괜찮아. 아직 나는 괜찮아.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만큼 자라난 걸까. 지겹게만 생각했던 그에게 되돌아가는 스스로가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대로니까. 그 아름답고 고운 얼굴에 생채기 하나 없이 어려움 하나 없이 나를 미소로 바라보니까. 그래서였던 걸까. 출구가 없는 기다란 통 속을 혼자 떠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남의 탓을 하는 것에도 지쳤을 무렵, 나는 어느새 괴물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믿었던 것을 자처하고 있었다. 나는 깨달아야 했다. 처음부터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이토록 추악하게 만들었다는 진실을.

그랬었으면 그에게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있었을까. 그의 집착과 더러운 욕망 속에서 도망가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을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는 곳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벌써 몇 번을 토해냈는지 모른다. 자살을 결심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머릿속에 맴돌아, 그것을 게워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해해야 했다. 이윽고 피가 모이고, 작은 욕조 안에 물이 첨벙거릴 때쯤 나는 지독한 냄새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이나, 모든 일이 벌어진 이후였다. 그 마지막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소매를 잡는 데 성공했다. 부드러운 손길. 따듯한 온도.

그리고 남자의 울부짖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때, 그 순간, 그 시간의 의식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에 와 있었다. 내가 읽었던 소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던 BL 소설 속으로.

나는 언제부터 이 세계에 있었던 걸까.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을 현생으로 두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은 시점이 조금 늦어졌던 걸지도 몰라. 도대체 무엇이 내 기억을 막아 왔던 걸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었을까. 내 기억은 되살아났다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꺼져가는 소실 속에서 나는 한 가지만을 간직했다.

죄책감이었다.

그러니 떠날 수 없다. 나는 이 지옥에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 이번 세계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 * *

원인 모를 열병에서 헤어나오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내내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눈을 뜨고 나서야 내 몸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깨달았다. 평소보다 더 쉽게 헛구역질을 했으며 무엇을 먹어도 똑같은 맛처럼 느껴졌다. 열을 배출하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따듯해진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런데도 두려움은 계속됐다. 환각을 보는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 같지만, 눈꺼풀을 열면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일쑤였다.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움직여야 했다. 해가 지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오 님을 모시는 일. 그를 단장시키고 몸을 깨끗이 하는 일. 남자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그를 돌보아야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시간. 그 지긋지긋함에도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은 그 아름다운 얼굴뿐이었다. 나는 거울을 본다.

끔찍한 몰골이 그 앞에 비추어진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심이 불처럼 가슴을 태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 고운 손을 떠올렸다. 그의 손이 나의 얼굴을 더듬는 상상을 했다. 묘한 쾌감이 가슴에 핀 불쾌함을 잠재우는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시선은 이미 거울을 비껴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 처음 보는 꽃이 놓여 있었다. 시든 꽃도 있었다. 마치 여러 번 누군가 다른 시각에 놓고 간 것처럼 제각기 생기가 다른 꽃 더미였다.

“…….”

꽃은 향기가 독했다. 한번 그 줄기를 만진 것만으로도 꽃내음이 저고리를 파고들어 맨살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꽃을 내려놓고 화향관으로 향하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안개로 흐릿해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계속됐다. 이윽고 화향관에 다다라서도 나는 보지 못했다. 수오 님의 방앞을 서성이고 있는 남자를,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누룩.”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본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조금 자세히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소설 속의 부율이었다.

“깨어났구나.”

남자는 당장이라도 나를 품을 기세로 내가 있는 자리까지 빠르게 걸어왔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쳐보지만, 남자가 내 손을 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독한 꽃내음이 남자에게서 나고 있었다.

“내 너를 매일 같이 찾아갔지만…….”

그의 말도, 어떤 떨림도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나마 남자의 온도를 견디다, 결국 그를 밀치어 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늘 불쾌했던 감각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소설 속에서 드디어 공이 등장하고 말았다는 것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곧장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처마 밑에 걸린 등불이 바람에 작게 흔들리며 길어진 그림자가 도로 짧아진다. 그 작은 틈을 타 남자를 벗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위해 대청마루에 올랐다. 문을 여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남자는 그렇게 내게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줄곧 어느 한 점에 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문을 닫았다.

“…….”

수오 님은 이제 막 몸을 씻고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닦아 내고 있는 참이었다. 근육의 선을 따라 떨어지는 물을 보며, 넓적다리 부근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입을 뗐다.

“제가 며칠을 누워있었던 것인지…. 죄송합니다.”

“…….”

수오 님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재빨리 이부자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곧게 핀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불쑥 튀어나오는 상상을 억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은 채, 다만 두 사람이 이미 만났다는 사실밖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슴은 쓰라린 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면, 생각보다 그 아픔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체념을 경험한 것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 그대로 꼿꼿이 설 수 있을 뿐이었다.

“…누야.”

밤에 젖어 있는 목소리가 방의 저편에서 들려왔다. 순식간에 귀가 뜨거워진다. 나는 애꿎은 포단의 주름만 바라본 채 저편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보았느냐.”

수오 님의 물음은 어렵지 않았다. 헤져 있는 정신 속에서도 나는 비교적 올곧게 대답할 수 있었다.

“부율 님 말씀이시라면 아까 전부터 바깥에…….”

그때,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 수오 님을 쳐다봤다. 그의 발밑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병이 있었다. 미약을 담았던 통이었던지 불쾌할 정도로 짙은 향이 퍼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깨진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우,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주울 동안은 절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구나.”

“예……?”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남자를 이름으로 지칭했음을 깨닫고 만다.

“아…. 죄송합니다. 그게…….”

남자의 이름을 내가 들었던 적이 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큰 어르신, 혹은 큰 손님이라고만 불리었던 남자가, 언제 소설 속에 이름으로 등장했던가. 시종도 남자의 이름을 불렀을까.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조각을 그대로 손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날 선 표면이 살점을 긁고 손목까지 흘러내려 갔다. 나는 멍하니 손톱에 떨어지는 피들을 보고만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그게…….”

수오 님은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와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붉게 젖은 내 손을 잡았다.

“저는… 그분을 오늘 처음 봤…….”

거기까지 말을 하고, 입술이 멈췄다.

“처음…….”

그래. 분명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자는 왜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걸까.

“…….”

수오 님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손까지 피가 물들어 가고 있는데,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보느라 떨어지는 붉은색을 신경 쓰지 못했다. 뚝, 뚝 마른 바닥이 습해져 간다. 하얗던 바지 천이 검붉은 핏기로 얼룩져 가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핏물을 대충 옷에 문지른 뒤 다시 손바닥에 조각들을 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그어진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불순한 생각 때문인지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다 치웠습니다.”

깨진 조각들을 무명천으로 감싸 품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수오 님의 눈이 아주 잠시 흔들린다. 그러다가, 자리에 일어서서 갈아입을 옷을 손에 들었다.

“…그리도 잊기 싫었던 것이더냐.”

“예?”

수오 님의 말에 잠시 당황하다, 입고 있는 바지에 묻은 핏물을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옷차림으로 그의 시중을 들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갈아입고 오겠…….”

“이곳에 있기 싫은가 보구나.”

정곡을 찔린 것처럼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아직 이 안에 남아 있었다. 수오 님이 알지 못하는 것. 내가 지난 1년 동안 가장 무서워했던 것.

“지켜볼 수 있겠느냐. 오늘 밤.”

“…아.”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상처를 입어도, 그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상처와 그의 상처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가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그의 입에서 잔혹한 말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할 수…….”

작은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신음과 같은 소리는 점점 비명에 가까워진다. 그러다가 간신히, 진심이 나왔다.

“할 수 있어요.”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사랑하는 수오 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떤 죄도 저지를 수 있었고, 어떤 악질도 견뎌낼 수 있었다.

“…….”

수오 님의 눈이 어두워진다. 그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벽을 쳐다보았다. 나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시선이 어긋난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아니다.”

잔잔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 그 차가웠던 목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원래 그의 목소리였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위해 따듯한 손을 건네주었던.

“오늘 밤 너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하, 하지만…….”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 손부터 치료…….”

그때, 두 사람의 뒤로 문이 가파르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뒤바뀐다. 무거웠던 실내가 금세 다른 향기로 아득해진다. 그건 아까 맡았던 남자의 진한 꽃내음이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군.”

부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장 나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내 피 묻은 옷에 시선이 꽂혔다. 그의 눈가가 시퍼렇게 변했다. 다음 순간, 그가 내게 달려와 손을 낚아챘다. 손바닥에 벌어진 상처가 부율의 눈동자에 비친다. 내 몸에 있는 피를 가까이 본 그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그는 유별히 내 손목까지 그어진 상처를 살피며 핏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서 치료해야 한다. 당장 나가서 의원을……!”

아주 얕은 상처였다. 그가 확인한 내 상처는 깊게 긁혔던 것뿐이지 어딘가 덧날 상처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당황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 역시 원인 모를 불쾌감을 느껴야만 했다.

“노, 놓아 주세요.”

나는 그를 향해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하고 나를 간신히 쳐다봤다.

“작은 상처일 뿐입니다.”

부율의 눈이 다시 한번 내 얕은 상처로 향한다. 그의 눈이 점점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수오 님은 그 틈을 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다른 것을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

부율은 말없이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목선으로 가느다란 땀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 잠시…….”

그의 입 밖으로 무언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입술을 주저했다. 결국, 그는 뒤늦게 말을 돌렸다.

“이리 오너라.”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수오 님이 내게 한 말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나는 이곳에 남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수오 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해야 했다.

“…아뇨.”

부율의 걸음이 멈췄다. 나는 그 틈을 타 그에게 벗어나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 자리는 여기에요.”

나는 이부자리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었다. 시종이 창부를 지켜보는 자리. 정사의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뒤처리까지 지켜보는 공간. 혹은 손을 뻗어 추악해진 자리를 정리할 수도 있는 거리.

처음부터 내가 있었어야 했던 곳. 나는 그곳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께서 좋은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이곳에서 보필하겠습니다.”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다. 정해진 운명대로 시간이 흘러갈 수 있도록. 나는 그 변두리에 있으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수오 님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설령 나를 죽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르신이라…….”

부율의 입술이 작게 떨린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고 스르륵 내려간다. 그의 얼굴이 굳어가고 만다.

“그리 선택한 것이냐.”

그가 묻는 저의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부율은 불안한 내 눈빛을 보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네 주인을 내 아래에 깔고 범하면 그 마음을 접을 테냐.”

그의 목소리에는 금이 가 있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성대의 상처가 바깥으로 드러날 정도로 헤져 있었다.

“똑같은 구멍이니 내 얼마든지 네 주인을 망가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안쪽은 엉망이 되어있다. 순서가 뒤죽박죽인 기억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어차피 천한 창놈인 것을.”

“윽!”

옷을 전부 다 벗은 부율이 가장 먼저 수오 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아슬아슬했다. 당장이라도 수오 님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그의 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분노였고 증오였다. 수오 님은 그런 부율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정확히 소설 속의 묘사와 일치하고 있었다. 처음 두 사람이 정을 나눴던 밤. 그날의 풍경과 똑같은 것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 지고 있었다.

“똑같은 구멍이라. 세우실 수나 있으시겠습니까.”

수오 님은 그런 남자를 비웃었다. 동시에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 뚜렷한 눈빛에 가슴이 뭉근해진다. 아팠다. 나는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하.”

그때 갑자기 부율이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소리와는 다르게, 부율의 손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너를 강간할 수도.”

순식간에 수오 님을 포단 위로 넘어뜨린 부율이 그의 손목까지 제압했다. 수오 님은 어찌 된 일인지 담담하게 그런 부율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찬 듯 답답해진다.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수오 님이 부율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장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축 늘어진 좆으로 어찌 강간하신다는 겁니까.”

똑같은 대사였다. 수오 님이 웃으면서 부율에게 건네는 대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소설 속 대사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그를 위해서 거의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나는 품 안에 있던 날카로운 조각들을 떠올렸다. 그것으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하…. 그래. 그렇지.”

부율의 반쯤 미쳐있는 목소리에도 정신이 번뜩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무의식중에 조각들을 손에 쥐었고 다음 일을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다. 수오 님을 잃을 것이다. 남자에게 결국 빼앗기고 말 것이다.

“네 시종의 보지 속에 혀라도 집어넣고 자위해야겠구나. 어디…….”

나는 날 선 조각을 높게 들어올렸다. 부율의 대사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살결이 찢어지며 엉망이 된다. 작은 파편들은 그의 등뒤로 흘러내렸다.

곧 이어, 아픈 얼굴을 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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