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거짓
어젯밤 남자와 정사가 끝났을 그 방에서, 나는 두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붉은 요 안쪽에 흐물거리며 늘어져 있던 정액 덩어리.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른 시종 아이가 오고 나서야 요를 들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잠깐 착각을 했었다. 이곳이 어쩌면 소설 속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수오 님이 나를 어쩌면…….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그러나 이불 속의 흔적들이 내가 쓸모없는 배역이라는 것을 재차 실감 나게 했다. 분명 전개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인데도. 수오 님이 마지막에 행복해질 것이 분명함에도 빨랫감이 된 이불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동안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었을까.
“…….”
쭈그려 앉아 이불의 얼룩을 지우려고 보니, 시야가 검게 불타올랐다. 눈물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뤄지지 못할 감정이 안타까웠다. 스스로가 처량하기 그지없어서 두 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이 증오심은 정당한 걸까. 상관없다. 나는 남자를 원망하고 있으니까.
부율. 내게서 수오 님을 뺏어갈 그 남자를.
“……읏.”
그 잘난 얼굴로 수오 님을 얼마나 울렸을까. 내게는 한 번도 보여 주시지 않은 수줍은 그 얼굴을, 어젯밤 부율에게는 보여 주셨던 걸까. 쾌락에 젖은 얼굴로 남자를 보고 안아달라고 애원하셨을까. 혹시, 마지막에는 서로를 향해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이미 사랑을 예감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안쪽이 꽉꽉 막혀서, 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어 차례 때린다. 그런데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읏… 끗…….”
머릿속이 몽롱해져 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눈가가 눈물로 축축해진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재빠른 몸짓으로 내 등허리를 받쳐 주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짙은 향기만이 콧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단숨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거라.”
“읏… 하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오싹한 소름과 함께 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남자의 소맷자락을 꽉 쥐며 몇 차례 더 숨쉬기를 반복했다.
“하아. 하아…….”
“조금만 더 천천히. 그래.”
남자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 손을 잡아.”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끝내 주저하고만 있자, 남자가 덥석 내 손을 자신의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안심한 듯 남자의 입 밖으로 작은 숨이 터져 나왔다.
“넌 정말…….”
남자의 스쳐 지나가는 얕은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남자의 얼굴이 어젯밤 꿈속에서 봤던 그 남자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슬퍼 보였다.
“…네 방까지 데려다주겠다. 어딘지 말하거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남자가 나를 안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손짓으로 재빨리 땅을 가리켰다. 그러나 남자는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젯밤이 걱정이었다면…….”
“그건……!”
정곡을 찔려 어찌할 바 없이 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의미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다시 무표정이 된다.
“…뭐, 그렇게 생각하게 둬도 나름 재미있겠군.”
“네……?”
“아무것도 아니다.”
남자의 입가가 슬며시 위로 올라간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다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숨결이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시종들 방은 이쯤이라던데.”
제멋대로 길을 정한 남자가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나는 눈으로 내 방을 확인하고는 남자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내려주마.”
의외로 고집 없이 남자는 나를 대청마루에 내려 주었다. 그대로 내 방에 달려갈까 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가 계속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누룩.”
남자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 몹시도 익숙해서 당황스러웠다. 마치 오랫동안 남자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있었던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오늘 밤은 네 주인이 있는 곳으로 오거라.”
“…네?”
나는 남자의 담담한 듯한 어조에도 한참을 곱씹어 생각했다. 그가 설마 수오 님의 거처를 말하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얼빠진 표정에도 남자는 단호하게 말할 뿐이었다.
“처음은 실수라고 생각해 어물쩍 넘어갔겠지. 하지만 두 번째는 어떠할까.”
“그게 무슨…….”
“너도 궁금하지 않으냐. 네 주인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켜선 안 될 의문스러운 마음을 남자에게 단숨에 지적당했다. 수치감 때문이었을까. 남자의 맘에 몸이 위축되고 만다. 나는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남자의 눈빛은 그날 밤처럼 따갑게 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내 모든 것을 거칠게 찢을 듯한, 위협적인 시선이었다.
“오늘 밤도 네 주인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가 말을 멈추고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홀린 듯 발끝을 남자에게로 돌렸다. 남자는 손을 뻗으면 내게 닿을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숨소리는 귓가에 낯간지럽게 울릴 정도로, 가까웠다. 숨을 빼앗길 것 같았다. 남자가 내뱉는 소리 없는 협박에.
“내가 너를 가지는 게 무엇 나쁘겠느냐.”
그건, 남자의 확신에 찬 한 마디였다.
“…뭐, 어차피 네 주인도 내 것이니 상관없겠다만.”
남자가 등을 돌려 다른 길로 향한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뒤늦게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결국, 남자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서 풀린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알고 있다. 수오 님은 결국 그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고 만다. 남자가 내게 찾아와 말을 건 이유를. 도망간 나를 굳이 붙잡으며, 방 안으로 들인 이유를. 그리고 나를 수오 님 앞에서 자신의 품에 안은 이유를.
그는 수오 님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오 님의 단순한 시종에 불과한 나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원작 소설 속에서 나는 묘사조차 없는 시종 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1년 전 내가 이곳에 오고 난 후부터 무언가가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이름이 생겼고, 남자가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말았다. 그런 남자가 다음에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이 저리기 시작한다. 공포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한참을 몸속에서 떠돌아다닌다.
남자는 수오 님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수오 님의 것인 나 역시도, 그의 통제권 안에 가둘 작정이다.
* * *
“마침 잘 왔네. 밤참을 요청하셨거든.”
어슬렁거리다 결국 들어오게 된 부엌방에서 시종 아이가 내게 요리 몇 가지를 건넨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들이고는 재빨리 상차림 준비를 했다. 이윽고 작은 상에 몇 가지 음식들이 올라가고 나는 곱게 단장된 색색의 찬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수오 님의 방에 갈지 말지 결정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 마음을 모르는 시종 아이는 내 등을 떠밀며 상다리를 잡으라고 재촉했다.
“뭐해? 네 일이잖아.”
“어… 아.”
어물쩍 말을 더듬는 내가 답답했는지, 급기야 그녀가 상다리를 들고 나를 바깥까지 내쫓는다.
“술상은 한참 전에 방 안에 날라 놨으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모셔.”
시종 아이가 귀찮은 기색을 하고 찬이 담긴 상을 내게 떠넘겼다. 나는 꽤 무게가 나가는 상을 버텨내기 위해 무릎 한쪽을 세워야만 했다.
“…하아.”
나는 부엌방과 그의 거처 사이에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상을 가져가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을 때부터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의 의도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 소설의 다음 대목도 알고 싶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남자와 수오 님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남자가 수오 님을 건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끝내 상을 들고 수오 님의 방 쪽을 향해 걸음을 틀었다. 그래. 남자를 봤던 처음부터 나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이 수오 님 위에 겹쳐지고, 내가 소설 속에서 읽었던 정사의 장면이 그대로 현실에서도 펼쳐지게 되는 것을.
나는 지독히도 그것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상상하다가, 마지막에는 절망해버린다. 남자가 내 몸을 수오 님 눈앞에서 능욕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체념이 아니었다. 나의 욕심이었다. 차라리 내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오 님의 몸이 부율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길 바라는 나의 일그러진 욕망이었다.
툭툭.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감정이 실린 주먹이 나무 기둥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나왔다. 안에서는 벌써 누군가의 천 자락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운 거동, 당황스러운 발소리가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었다.
“…누룩.”
문을 열고 수오 님이 나왔다. 그는 잔뜩 눈썹을 찌푸리며 상 옆에 앉아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남자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줄곧 방 안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수오 님 옆에 선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남자는 나를 찬찬히 훑더니, 웃으며 수오 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왔어?”
반사적으로 입술이 뒤틀렸다. 남자의 음탕한 손이 점점 더 수오 님의 허리 위로 올라간다. 상을 뒤엎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남자와 눈을 맞췄다.
“밤참을 가져왔습니다.”
남자는 더 도발할 생각이 없는지 뒤로 물러났다. 나는 남자가 비워둔 틈새를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오 님은 나를 말릴 생각이었는지 내 옷자락을 쥐었지만, 내 발걸음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뭐해. 서 있지만 말고 술잔을 채우거라.”
남자가 심술궂게 수오 님을 재촉한다. 수오 님은 하는 수 없이 문을 닫고 남자의 곁에 앉았지만,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위태로웠다. 하지만 이제 와 문밖으로 나갈 순 없었다. 내 눈동자에 비친 두 남자의 거리가, 아슬아슬했으니까.
“종은 이만 보내시지요.”
수오 님의 음성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인 듯 나를 흘겨보았다. 나를 보는 남자의 시선에 다시 수오 님의 눈썹이 무너져 내렸다.
“원하신다면 차라리 다른 여종을…….”
“가까이.”
수오 님의 말을 끊고 남자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비어 있던 거리가, 피부와 살덩이로 가득 메워진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깟 여종은 상관 말거라. 내가 너를 품었다 해도, 투기는 정도껏 해야지.”
남자의 눈은 수오 님에게 말을 하면서도 줄곧 내게 향해 있었다. 고의적인 남자의 대사에도 나는 쉽게 걸려 들어간다. 남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수오 님에게 닿아 있는 저 손을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떼어 내고 싶었다.
“당신…….”
한편, 남자의 말에 손을 떤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수오 님의 눈동자가 심히 요동치고 있었다.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구나. 어젯밤은 내 아래에서 그리도 좆을 탐하더니.”
남자의 그을린 웃음에 수오 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다. 하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어젯밤 두 사람에게 벌어졌을 일들에 끔찍한 것들이 충동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을 갈라놓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의 전부였다.
“그만…….”
“저를…! 저를 이곳에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수오 님이 먼저 말을 열었지만, 나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남자를 향해 외쳤다. 더는 참기 어려웠다.
“그래. 내가 너를 불렀지.”
“그건… 저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셨습니까.”
남자의 눈이 흥미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며 무르팍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용기는 나지 않았다. 분명 수오 님은, 나를 원망하게 될 거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누룩.”
“…저는 그저.”
입술이 바싹 말라 갔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다 알면서도, 수오 님의 반응이 신경 쓰여 입가가 굳어졌다.
“말하거라.”
“저는…….”
차라리 저를 안으세요.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지 않는 이 말이, 남자의 재촉에 서서히 기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수오 님의 몸을 지키고 싶은 것은, 단순히 내 이기심에 불과했다. 수오 님은 남자를 원하고 있을 거야. 남자에게 안기고, 사랑을 받고, 화향관에서 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것을 막는 행위는 커다란 배덕이었다. 그동안 나를 보살펴 준 그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저를… 대신…….”
“답답하구나. 하지만 입술이 오물거리는 게 마치 아랫구멍이 벌름거리는 것 같아서 동하기는 하구나.”
나는 흠칫 떨며 남자를 쳐다봤다. 아직도 남자의 눈동자는 짐승처럼 짙었다. 나는 겁을 먹고 수오 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확인한 눈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아…….”
나를 보는 수오 님의 눈이 공허했다. 아무 열정도, 어떤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서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혹여 그가 부율이 아닌 나 때문에 질투를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옷을 벗고 내 품 안으로 들어오거라. 누룩.”
“…저, 저, 저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수오 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원하지 않아. 부율에게 안기는 나 때문에 질투해 주지 않아. 깨닫고 나자,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한순간이라도 기대를 했던 스스로가 한심했고, 그저 두 사람 사이에 난 방해꾼이라는 제 처지를 알게 되어 끔찍했다. 이곳을 떠나야 해. 수오 님의 말처럼 나는 이 방에 발을 들여선 안 됐던 거다.
“아무래도 그, 그만 가볼…….”
“아, 혹시 내 말이 부탁처럼 들렸느냐.”
그러나 남자는 그런 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했군. 아까 것은 명령이었다.”
땀으로 뒷덜미가 젖어 들어갔다.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어느새 남자의 뜨거운 숨길과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만이 들어차 있었다.
“너는 정말… 기어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구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예고라도 하는 듯 바닥을 짚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남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가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안타깝게도 네 작은 입술뿐이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거라.”
남자의 커다란 손이 도망가려는 내 뒷머리를 잡았다. 그 두꺼운 손 마디 마디에 윤기 없이 거친 머리카락들이 빈틈없이 엉킨다. 남자는 그대로 나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 등 뒤로 수오 님의 텅 빈 눈길이 느껴졌다. 나는 반항하지 못했다. 아니, 반항하지 않았다.
“이 입에 내 것이 어디까지 들어갈까.”
“읏……!”
남자의 관고(寬袴) 밖으로 성기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 입술에 두둑 부풀어 오른 바지 섶을 비볐다. 거친 천의 감촉도 괴로웠지만, 더 힘든 것은 천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남자의 성기였다.
“하아…. 좆이 네 입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이만큼이나 커졌구나.”
“우읍……!”
“잠시만 기다려라. 매듭을 풀고 네 안에 맨 살덩이를 가득 넣어 줄 터이니.”
남자가 한 손으로 빠르게 관고를 헤집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술에 닿았던 천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곧이어 커다란 살덩이가 아랫입술을 찔렀다. 축축했다. 남성기의 끝에서 비릿한 향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욱!”
“숨 참고 입에 넣어.”
남자는 헛구역질하는 나를 더욱 단단히 옭아매고 아랫도리를 들이밀었다. 남자의 악력에 자꾸만 앞으로 쏠려 간다. 결국은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냄새가 기어이 입안 가득 들어오고 만다. 당장이라도 뱉어내고 싶은 욕구를 참고 남자의 힘에 입을 크게 벌렸다.
“하아, 그래. 잘하고 있어. 목구멍 끝까지. 옳지. 그렇게.”
남자는 나를 거의 공중에 들어 올리다시피 내 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간신히 발끝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남자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숨이 막히고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끈적한 타액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데도, 남자는 황홀하다는 듯 연신 웃었다. 그리고 줄곧 시선을 한곳에 두고 있었다. 내 등 뒤에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을 수오 님을, 부율이 계속 노려보고 있다.
“밤 중에 모르고 윗구멍에 박아도 보지인 줄 알고 좆질할 것 같은 입 구멍이구나.”
“우우웁…! 하우으읍!”
“하하. 더 안쪽까지 집어넣거라. 이 정도로 질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미친 자처럼 내 뒷머리를 쥐고 허리를 놀려 댔다. 푹, 푹 소리가 날 정도로 남자의 거근이 입안에 꽂혀 들어왔다. 죽을 것 같았다. 숨을 쉬려 콧구멍을 넓혀봐도 남자의 음모가 가로막아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간신히 그가 귀두 끝을 좌우로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코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는 시선 너머에 있는 수오 님을 향해 비소를 흘렸다.
“애지중지 아껴 놓기만 한 것을 애먼 놈한테 빼앗기게 생겼으니.”
“웁… 하우욱……!”
“그 건방진 태도도 얼마 가지 못하겠군.”
남자의 손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귀두를 목구멍에 깊숙이 박아 넣다가도, 쑥 뒤로 빼내어 혓바닥에 진득한 액체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 남자가 내 볼 안쪽에 귀두를 밀어 넣었을 때는, 어금니에 남자의 포피가 닿기도 했다.
“하아… 크윽. 자지를 빨기 위해 뚫린 구멍 같구나.”
“후으우붑…! 아읍…! 제발…! 하웁!”
“끝내고 싶으면 얼른 내 좆물을 빼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아…. 하지만 이래서야 아직 멀었겠는걸. 좀 더 힘내 보아라.”
“우우욱……!”
남자가 허벅지에 힘을 주고 내 목을 더욱더 끌어당겼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물이 죽죽 뽑혀 나왔다. 숨을 쉬지 못해 벌게진 두 볼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턱밑과 옷자락에는 내가 흘린 침으로 범벅이었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수오 님만 보던 남자가 어느새 울고 있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오해하지 말거라.”
남자의 음성은 아까보다 좀 더 차분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가 자신의 기다란 기둥을 전부 내 입 구멍에 처넣으며 웃음을 흘렸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이러는 것이니.”
“우브븝…! 욱…! 욱……!”
“크흑! 젠장. 드디어 조이는구나.”
남자가 희열에 차 허리를 움직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남자를 필사적으로 밀쳐 냈다. 하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내 두 손을 손쉽게 제압하더니 천장 위로 올려세웠다.
“누룩.”
남자가 천천히 내 입에 담긴 물건을 빼내었다. 눈빛이 무서웠다. 동시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잠시 뒤, 남자가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다가왔다.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내가 네 주인 입에 정액을 싸지르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얼굴이 굳는다. 남자는 그대로 내 귓불을 씹었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필사적으로 남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남자의 커다랗게 솟은 물건을 바라봤다. 거의 동물처럼, 나는 입을 벌렸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지.”
“우웁……!”
스스로 벌린 입 구멍에, 남자의 흥분이 멈출 줄을 모르고 거세지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감탄이 섞인 신음을 흘리며 그렇게 내 목젖에 퍽퍽 더러운 살덩이를 박아 넣었다. 나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남자의 성기를 조였다. 비릿한 정액을 혀로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남자의 성기를 안쪽까지 받아들이며 울부짖었다.
“하아, 하아. 으윽!”
그때, 남자가 입안에 정액을 내었다. 점성이 있는 하얗고 몽글몽글한 것이 입천장에 맺힌다. 반사적으로 토해내기 위해 콜록거렸지만, 남자는 내 턱을 붙잡고 다시 성기를 물게 했다. 남자의 요도에서 정액이 끊이질 않고 나왔다.
“으윽… 크읏……!”
“욱…! 하, 으욱!”
남자의 산발치는 정액 줄기에 결국 혓바닥이 정액에 휘감긴다. 구역질이 나왔다. 비릿하고, 짭짤한 맛이 입안 전체에 느껴졌다.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정액을 다 쏟아낸 것인지 천천히 귀두를 움직였다. 그러나 결코 입 밖으로 성기를 내빼지는 않았다. 아예 후희마저 즐길 셈인지 부어오른 내 볼 안쪽에 귀두를 문질러 댔다.
“목울대가 내려가질 않는군. 다 삼키기 전까지 놓아줄 생각은 없는데.”
“으붑… 으… 하아…….”
남자의 말에 허겁지겁 정액을 목구멍에 모아본다. 농도 짙은 점성이 목에서 넘어가지 않고 턱 막혀 삼켜내기가 괴로웠다. 겨우 몇 번의 시도 끝에 목울대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턱을 놓아주었다.
“입보지도 이리 정액을 꿀떡꿀떡 잘 삼키니, 어느 남자가 널 마다하겠느냐.”
“하아, 하아, 하아…….”
“그런데 말이다.”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지금은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는 내 머리를 잡고 눈을 맞추게 했다. 다시 내게 속삭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남색을 하는 네 주인은 어떠할까.”
“…읏.”
“뭘 보고 저리 물건을 세우고 있을까. 응?”
남자의 손에 힘이 풀린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남자가 내게서 손을 떼고, 내게 여유를 준 것은. 나는 그 순간에 고개를 돌려 수오 님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텅 빈 눈으로 우리 둘을 주시하고 있던 수오 님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내 시선은 수오 님의 입가에 다다르다가, 마지막에 그의 하복부로 떨어진다.
“…아.”
입이 벌려졌다. 수오 님의 중앙에 꼿꼿이 세워져 있는 기둥은, 한참 전부터 그래왔다는 듯이 단단해 보였다. 당황한 내 표정에 남자가 뒤에서 내 허리를 안는다. 이어서 낮은 목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전해졌다.
“…발기한 걸 보니, 내 좆이 어지간히도 먹음직스럽게 보였던 모양이야.”
부율이 내 귓가에서, 싸늘하게 미소했다.
“네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떻게 할까. 이대로…….”
“읏…….”
“내가 저놈을 탐해도 되겠느냐.”
얼마나 한참을 물고 있었던 것일까. 입술 안쪽에서 피 비린 맛이 느껴졌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입술 대신 남자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해야 할 말과 나가지 말아야 할 행동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그만. 제발…….”
남자의 비단옷을 붙잡은 손이 떨리고 있다. 그런 나를 알아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지켜만 보고 있던 수오 님이 먼저 움직였다.
“나가거라.”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수오 님이 재빠르게 내 팔목을 붙잡았다. 남자가 서둘러 내 반대편 팔을 잡았지만, 이미 내 몸은 수오 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지금 당장 이 방에서 꺼지거라.”
“으윽!”
남자에게 붙잡힌 팔 한쪽을 빼내기 위해, 수오 님이 거칠게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한 나는 그만 옆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부실한 바닥이 흔들리더니 이내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아…….”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돈다. 수오 님이 입을 벌리고 내가 넘어진 곳을 바라봤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그러나 서서 보고만 있을 뿐, 나를 일으켜 세우진 않았다. 부딪힌 뼈마디가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무릎 위로 쏟아지는 수오 님의 냉랭한 반응이 비참할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나가겠…….”
“잡아라.”
등불이 깔린 탁한 바닥에서 부율의 발그림자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자리를 올려다보니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게 내 품에 넘어졌어야지. 이렇게 다칠 일을 없었을 것 아니냐.”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뭐하느냐. 어서.”
“아…….”
멍하니 남자를 보기만 하다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남자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나를 단단히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신의 품에 놓았다.
“이대로 네 방에 가자꾸나.”
“…네?”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내게,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변덕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네 주인이 너를 쫓아내니 어쩔 수 없…….”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의 말을 수오 님이 가로막았다. 남자의 미간이 좁혀진다. 등도 달빛도 없는 자리에서, 수오 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제가 보는 앞에서 하시지요.”
“뭐라?”
“내 시종이니, 건드실 거면 내 앞에서 하란 말이었습니다.”
수오 님은 긴장하고 있었다. 분노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부율의 말대로 수오 님은 남자를 원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곳에 남게 할 이유가 없다.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
제 주인을 배신하고 남자의 품에 안길지. 아니면, 주인을 향한 연정을 누르고 두 사람의 정사를 지켜볼지.
“썩 재미있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이따위 것이 당신에게 놀이라면, 기꺼이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놀이?”
수오 님의 도발에 남자가 눈매를 찌푸렸다. 제대로 걸린 걸까. 수오 님이 소리 없이 입가를 올렸다.
“남녀의 정사 따위 한순간일 뿐입니다. 싸고 나면 사라지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네 놈이 지금 무슨 말을…….”
“그러니 내게서 빼앗아 가실 순 없을 겁니다.”
남자는 아까처럼 웃어 보려 입꼬리를 당겼지만, 결국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바득 쥔 주먹이 위태로워 보였다.
“네 놈 역시 네 놈이 말했던 남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 좆을 세우고도 뻔뻔스레 고개를 쳐올리는 걸 보니.”
“…놀이는 놀이일 뿐이니까요.”
“하… 하하하.”
남자가 실성이라도 한 듯 어두운 얼굴로 연신 웃음을 흘렸다. 수오 님은 그런 부율을 아무런 표정 없이 보고 있을 뿐이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낯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나는 떨리는 눈으로 수오 님의 얼굴을 좇았다. 제발 내게 무엇이라도 말해 주기를. 혹은 이 모든 것을 말려주기를.
그러나 끝내 수오 님은 나와 눈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좋다. 그럼 사양 않고 이곳에서 안지.”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흠칫 몸을 피하며 남자와 멀어지려 했지만, 그가 놓치지 않고 내 뒤에서 허리를 붙잡았다. 이윽고 남자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두꺼운 손가락이 천 위로 올라온 젖꼭지를 감싼다. 그러다가 작정한 듯 부풀어 오른 유방을 한꺼번에 덥석 쥐었다.
“흣……!”
“아래는 전부 벗거라.”
홀린 듯 남자의 속삭임을 듣고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수오 님을 좇는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야. 지금 그의 이름을 불러도, 응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절망에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머릿속이 남자의 명령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체념일지도 모른다. 오랜 기다림이 질리고 질려서, 아무것도 아닌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졌었던 걸지도 모른다.
“…읏.”
나는 천천히 바지 매듭을 풀고, 그 아래 있던 속곳마저 아래로 끌어 내렸다. 무명천이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네 젖을 애무할 동안 물이 나오도록 자위하거라. 아, 그리고 또 하나.”
“하으읏……!”
남자가 있는 힘껏 두 젖가슴을 쥐어짜며 내 목덜미를 핥았다. 곧 축축이 젖은 혀가 내 귓불까지 올라온다. 남자는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충분히 적셔 놓아야 할 것이다. 뒤에서 곧장 찌를 것이니.”
“으흐읏……!”
어느새 다시 기다랗게 선 남자의 물건이 내 엉덩이에 와닿았다. 금방이라도 무방비한 속살을 가르고 안쪽까지 파고들어 올 것 같았다. 부르르 허리가 떨렸다. 남자는 그런 내 반응에 더 흥분한 듯 내 허벅지 사이로 귀두를 삽입했다.
“윽… 하아, 통통하게 오른 것이 보지 살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먹을 만 하구나.”
“하으으… 아앗……!”
남자의 손이 이번에는 저고리 틈새로 들어왔다. 그는 바득바득 묶인 끈을 급히 찢은 뒤 맨 가슴살을 쥐었다. 마치 젖가슴이 손잡이라도 되는 마냥, 남자가 무게 중심을 내게로 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하아, 하아. 다리를 더 모으거라. 네 앞부분에 내 좆이 닿을 수 있게, 그래. 그렇게.”
“흐윽……!”
남자가 뒤에서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나를 재촉했다. 서 있는 자세에서 남자에게 덮쳐지는 것이, 이토록 수치스러울지 몰랐다. 나는 수오 님을 가장 먼저 찾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았다. 뚜렷한 눈이 내 허벅지 언저리쯤에 와닿아 있었다. 수오 님의 것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채였다.
“기둥에서 물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구나. 네 보지 물 때문인지 내 물 때문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으흣… 저, 저는…….”
“내 친히 확인해 줄 터이니 한쪽 다리를 올려 보아라.”
남자가 손을 내리더니 내 허벅다리를 쓰다듬는다. 어처구니없게도 몸이 뜨거웠다. 남자 때문이 아니었다. 나와 남자가 연결된 피부 사이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는 수오 님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오 님의 터질 것 같이 솟아오른 물건이 나를 애끓게 했다.
“개도 오줌을 쌀 때 한쪽 다리를 올리거늘. 너는 개보다 질질 싸면서도 내 말을 듣질 않는구나.”
“아흑!”
남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 엉덩이를 때렸다. 남자의 매질이 끝난 것은 내가 간신히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난 뒤였다. 그와 동시에 수오 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내 허벅지에 놓였던 시선이 더 깊은 곳을 파고들어 왔다. 질척거리며 물소리를 내는 나의 젖은 속살 속이었다.
“하아…. 푹 젖었구나. 금방이라도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가겠어.”
“하아, 하으으읏……!”
남자의 가운뎃손가락이 손쉽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구멍은 익숙한 듯 그 손가락을 오물오물 빨아들였다. 내가 신음을 지르자, 남자가 웃으며 세 손가락을 동시에 찔러 넣었다.
“아흐으으응……!”
“세 개도 이리 맛있게 씹어대니 이제 자지를 넣어도 반항하지 않겠구나.”
남자의 손목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때마다 젖은 속살이 찍, 찍 물을 뱉어 냈다.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으으읏……!”
“하아. 더는 못 참겠군.”
한참을 박아대던 남자가 갑자기 쑥 하고 손가락을 밖으로 빼내었다. 어딘지 허전한 감각에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턱을 쥐고 입술을 들이댔다. 숨이 모자라 헐떡거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남자가 내 몸을 돌려세웠다. 손끝에는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남자의 심장은, 처음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아, 누룩.”
“하아, 하아.”
입술을 떼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남자의 눈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익숙했다. 기다려 왔던 일인 것처럼 저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가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시선 너머에는 더 이상 수오 님이 없었다. 불안한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네가 저놈 좆을 보고 흥분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남자의 말에 머릿속에 새하얘진다. 더럽고 어두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얼굴이 굳어갔다.
“마음이 바뀌었다.”
그 순간, 남자가 내 엉덩이를 쥐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나는 허공에 뜬 몸을 어찌할 바 모르고 바둥대기 바빴다. 남자는 웃었다.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는 동안은, 네가 내 얼굴만 보았으면 한다.”
“…어째서.”
거부의 말 대신 질문이 앞서 나갔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수오 님과 눈을 맞추고 싶다가도, 남자의 슬퍼 보이는 눈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당혹스러웠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수오 님을 보려 했지만, 남자가 보지 속에 성기를 끼워 넣으며 내 행동을 저지했다.
“하으으으읏……!”
여유 없이 질척거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며 필사로 버텼다. 남자는 그런 나를 가엽게 보는 것 같다가도 곧, 좁은 구멍에 제 물건을 끔찍이도 밀어 올렸다.
“하아, 큭. 어째서냐고 물었느냐.”
“아으으응…! 하아으응……!”
격렬한 움직임에도 남자는 단단한 고정된 채로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 시선을 피한 수오 님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나를 이렇게 보고 있었다. 그래. 어째서일까. 남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몸을 섞고 난 지금에서야.
“내 너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틈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눈길이 바깥으로 향한다. 그때 꿨던 악몽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온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남자의 눈이 슬퍼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수오 님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너를 저놈에게서 되찾을 것이다.”
잔인하게도, 남자가 집착한 것은 처음부터 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남자가 나를 수오 님보다 먼저 발견했을 때부터? 그렇지 않으면, 혹시 내가 수오 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소설 속 내용이 뒤틀리기라도 한 걸까.
무엇이 되었든, 나의 존재로 인해 남자가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부율이 나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수오 님의 행복이 사라지는 건 아닌지 눈앞이 깜깜했다.
“누룩. 벽에 등을 붙이거라.”
정신을 차려보니 튀어나온 등뼈가 차가운 벽에 맞붙어 있었다. 남자는 그 상태에서 나를 억지로 밀어 내 몸을 벽에 밀착시켰다. 남자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부드러웠던 손길이 내 머리를 확 잡아당겼다.
“내가 널 어떻게 범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라.”
남자의 거근이 마주 본 상태에서 엇박자로 움직였다. 아랫배가 묵직했다. 남자의 귀두가 흉기가 되어 내장을 흔드는 것 같았다.
“아흐으읏…! 멈, 멈춰 주세……!”
“하아… 좆에서 이리도 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데 멈춰질 리가 있겠느냐.”
남자가 내 허벅지를 들어 올리며, 가늘게 웃는다. 퍽퍽 벽에 부딪히는 등보다 남자의 것이 들락날락하는 구멍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살에 닿는 남자의 맥박이 마치 내게 하는 위협 같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네 보지가 이리 만든 것이다. 내 좆물을 쭉 짜내고 있어.”
“하으으으앙……!”
허벅지를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어느새 내 배를 타고 가슴으로 올라온다. 그는 내 반응을 주시하며 우뚝 서 있는 젖꼭지를 튕겨냈다. 내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말자,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세우고 젖을 물었다.
“아흐윽!”
나는 남자의 어깨에 쓰러져 헐떡였다. 그가 혀를 내밀었다. 뭉툭한 혓바닥이 꼭지를 살살 달래며 침으로 푹 적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으흐으읏…! 아앙……!”
“하아…. 손에 넣기만 해선 만족이 되지 않는다. 누룩. 너는 정말이지…….”
남자가 감탄하며 다시 젖을 물었다. 잠깐 사이 찬 공기에 노출되었던 꼭지가 다시 남자의 입안에서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무의식에 남자의 등을 콱 끌어안았다. 남자의 아랫배에 배꼽이 닿는다. 본능적으로 서로의 몸이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다는 듯,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널… 젠장. 범하는 것밖엔 생각이 나질 않아.”
“하아, 흐으윽……!”
“하아, 미칠 것 같아.”
남자의 눈이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이 나의 젖가슴을 노려보다, 이내 아랫배로 향한다. 무서웠다. 그가 도대체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작은 뱃속까지 내 씨물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재미있구나.”
“으흐흐으읏…! 더는… 더는 제발……!”
“하아, 큭. 보지가 이리도 질척질척해서는… 물 때문에 내 자지까지 엉망이 되어 있지 않으냐.”
남자가 귀두 직전까지 빼내었다가 다시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 탓으로 요란스레 물소리가 났다. 그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게 수오 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눈이 질끈 감겼다.
“하아, 이제 알겠느냐. 누룩.”
“…흣.”
남자가 내 볼에 떨어지는 눈물을 핥으며 다시 퍽퍽 자지를 박아 넣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닌 수오 님이 있는 방향으로. 이윽고 남자의 눈동자에 수오 님이 비친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수오 님은 숨을 멈추고 남자를 응시했다.
“네 주인은 오늘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구나.”
수오 님의 표정이 어떠한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더욱 흥분했다는 사실만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눈. 꾹 다문 입매.
그래. 수오 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아, 뒤돌아서 벽을 짚거라.”
남자가 겨우 내 다리를 놓아준다. 그러나 그 틈에서도 남자는 내 허리를 꽉 붙잡고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몸이 벌벌 떨며 간신히 뒤로 돈다. 나는 가는 손목으로 벽을 짚고 남자를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
“하아. 뒷구멍까지 축축해져 있지 않으냐.”
아슬아슬한 경계선 부근에 남자의 반들반들한 귀두가 와닿는다. 혹시 잘못된 구멍에 들어가 버리는 건 아닐까 엉덩이가 벌벌 떨렸다. 남자가 다시 웃는다. 그는 걱정하는 내가 우습다는 듯이, 귀두를 보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견뎌라. 금방… 하아, 금방 내어줄 테니까.”
“하으으응……!”
남자의 온몸이 내 뒤에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그는 내게 숨 쉴 시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곧 내 안에서 그의 성기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이.
“저놈이 지금 어떤 표정인 줄 안다면… 하아.”
“으흐으읏…! 아흑!”
“…너는 분명 울겠지.”
남자가 손을 뻗어 정돈되지 않은 내 음모를 헤쳤다. 그러다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듯 남자가 뜨겁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아흐으으응!”
쾌락으로 인해 전율이 올랐다. 남자의 검지가 음핵을 짓누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애액을 손가락에 묻혀 소음순을 흔들기까지 했다.
“아흑! 아…! 제발… 그만!”
“하아, 하아. 이리도 칠칠치 못하게 사방에 보지 물을 뿌려 대니.”
“아흐으으윽……!”
“네 주인이 바닥에 흘린 네 보지 냄새를 맡는다고 생각해 보아라. 이 많은 물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음탕한 말은 제법 사실적으로 들렸다. 이렇게 오래도록 정사를 하고 있다면, 내일도 이 방에서 남자와 내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끔찍한 악몽이 있을까.
“…설마 그걸 기대하고 이리도 질질 흘리는 것이냐. 응?”
“아아…! 으흐으응……!”
아냐. 아니라고. 나는… 수오 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더러운 냄새를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남자와의 질펀한 정사 흔적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으흑… 아흐윽…….”
습한 얼굴에 눈물이 다시 덕지덕지 덮인다. 남자에게 범해진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내 안에 가장 어두운 구석에 숨겨두고 있던, 가장 날 것의 생각들이 남자의 한마디 말에 의해 발끝으로 툭툭 떨어져 흘렀다.
나는 수오 님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봐주지 않아. 나를 감싸주지 않는 그를,
그래. 사랑하는 만큼 상처 입히고 싶었다.
“하아. 큭. 자지를 무는 힘이… 젠장. 못 당하겠군.”
부율의 숨이 젖은 목덜미에 갑갑하게 들러붙는다. 나는 몸부림 한번 치지 못하고 다리를 벌려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너도 경련하는 걸 보니 곧 절정이겠구나.”
남자의 말대로였다. 나는 남자의 몸으로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더 깊이.
차라리 좀 더,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줘. 차라리 내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다시는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도록.
“윽!”
남자가 기둥을 살짝 빼내더니 귀두 끝을 구멍 입구에 조준했다. 남자의 요도에서 미적지근한 정액이 발사되어 나왔다. 남자는 일부러인 듯 싸지른 그의 흔적을 튀어나온 음순에 펴 발랐다.
“…하아. 누룩. 입을 맞추거라.”
남자의 눈이 나를 시퍼렇게 쳐다보았다. 도망을 가야 한다. 이 남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나는 힘 빠진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남자는 예상외로 쉽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역시 넌… 그때와 똑같구나.”
남자의 목소리는 물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깊은 곳에 빠져 있어, 수면 위로는 그 의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그리 멍하니 마주 보고 있는 지금에도, 아무 파동도 오고 가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도,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의 표정이 불쑥 현실감을 되찾았다.
“밤중에 송구하옵니다. 부율 님을 급히 만나 뵙고자 하는 손님이 계십니다.”
“…….”
남자의 얼굴이 굳는다. 손님이 누구인지 알기라도 하는 걸까. 그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웠다. 그리고는 내 몸에 걸쳐주며 긴장한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내일 너를 다시 찾아가겠다.”
“……아.”
건네받은 옷은 새벽 공기처럼 차갑지도, 그렇다고 남자의 온도처럼 뜨겁지도 않았다. 나는 남자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그의 말의 의미를 묻지도 않았다.
“지금 가겠다.”
남자가 문밖에 있을 종을 향해 낮게 외쳤다. 순식간에 방 안이 예전 풍경을 되찾는다. 남자가 내게서 등을 돌린 그때가 돼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가 문을 열고 완전히 사라졌다. 문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로, 남자가 종을 따라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익숙한 그림자가 내게 다가오는 걸 눈치챘다.
새까만 그림자가, 드디어 내 키만큼 드리워진다. 나를 완전히 덮는 그 그림자는 내가 익숙히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누야.”
지난 1년간 나를 불렀던,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목소리. 눈을 감아도 끈질기게도 사라지지 않던 그의 향기가.
“그동안 내가 오만했어.”
드디어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순간, 그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쥐었다. 커다란 손에 가느다란 목이 장난감처럼 쏙 하고 들어간다. 수오 님은 서서히 내 목을 조여 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벌려 숨을 쉬어보려 하지만, 닫힌 목구멍으로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벌린 입술 틈새로 겨우 침만 흘리며, 수오 님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 그토록 바라던 내 얼굴이 비친다. 고통에 일그러진, 끔찍한 몰골을 한 내가.
“으… 하, 으끅……!”
수오 님이 추해져 가는 내 얼굴을 보며 곱게 미소 지었다. 어느 때보다 깨끗해 보이는 그의 입매는 멀어져 가는 내 의식 속에서 착각을 불러내기 충분했다. 그가 날 보며, 웃어주고 있어. 나를 용서해 주는 걸까. 그에게서 부율을 빼앗은 나를 기꺼이 받아주는 걸까.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음성이 이전과는 다름을 깨닫는다.
“내 아직 죄를 씻기는 일렀던 거야.”
시야가 흔들린다. 수오 님의 목소리가 내 곁에서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잠시 손에 힘을 풀고, 내 아랫입술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내 그동안의 죄를 씻기에는, 앞으로 지을 죄가 너무나도 크구나.”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이 연.”
화향관 별채에 작게 마련된 손님 방에서 부율이 작게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평범해 보이는 흑색의 심의. 하지만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가문의 문양이 남자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부율 님.”
부율은 이 연을 응시하다가, 이내 중앙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이 연이 조금 망설이다가 부율의 앞에 앉았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연의 단호한 말에도 부율은 그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부율의 태연한 태도에 이 연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시간이 없다. 이리도 세상과 동떨어진 마을에 제자를 계속 둘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창부라도 생기신 겁니까.”
“너는 나를 알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겁니다.”
부율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연은 답답할 뿐이었다.
“공주가 벌써 스무 살이 됐습니다. 황가와의 약속은 절대적이란 것, 아시지 않습니까.”
“…웃기는군.”
부율의 입매가 내려갔다. 순식간에 방 안에는 냉기가 흘렀다. 이 연은 아차 싶었지만, 더는 그의 앞에서 미룰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거역하신다면 어떤 이유를 만들어 내서라도 부율 님을 끌어낼 사람입니…….”
“그래서 공주를 죽였나 보군.”
“네?”
부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 연이 그 뒤를 쫓았지만, 부율의 뒷모습이 사나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한들, 부율은 아직 이 연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결국 연은 다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 소문을 믿으시는 겁니까. 부율 님.”
“너야말로 그 소문을 아직도 거짓이라 믿는 것이냐.”
부율이 날 선 눈초리로 연을 노려봤다. 연은 그에게 10년이 넘도록 함께 지내온 친우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연은 부율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연은 가문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을 자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황제가 모자란 공주를 미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친자식을 죽이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부모도 제 자식을 해치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좀스러운 놈이 그럴 리가 없지.”
“율!”
부율의 도를 넘는 말에 결국 참지 못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율은 숨조차 들이마시지 않고 조용히 그런 연을 보기만 했다. 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부율에게 외쳤다.
“정녕 공주가 죽었다면 혼사가 이리 진행되었겠습니까!”
“…….”
부율은 고개를 돌려, 창가 너머 밤을 응시했다. 방 안에 작게 난 창에, 제법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내가 결혼하게 될 공주가 진정 황가의 핏줄인지 어찌 확인할 수 있겠느냐.”
“도대체 무슨 말씀을……!”
도중에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연은 기막힌 감정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천자(天子)였다. 비록 지난 10년 동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공주라고 하더라도. 그런 국가의 애지중지(愛之重之)를 함부로 죽은 사람 취급하다니, 아무리 하늘이 두렵지 않은 부율이라 하더라도 이쯤에서 고집은 그만 부려야 한다. 이렇듯 연의 생각은 지난 몇 년간 제법 확고했다.
“하아…. 도대체 이리도 거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 공주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황제에게 청을 넣어 첩을 들이셔도…….”
그 순간, 부율이 웃음을 터트렸다. 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끊은 제자를 쳐다보았다.
“어지간히도 네 눈엔 내가 난봉꾼으로 보이는 모양이야.”
“…하아. 그럼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음에 둔 다른 규수라도 계신 겁니까?”
부율이 입가에 남은 미소를 뒤로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은 그런 부율의 반응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샅샅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다 곧 무엇인가 생각이 난 것인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헉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아니시겠지요.”
“무엇이 말이냐.”
부율은 지금부터 연이 할 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아직도 그 허무맹랑한 것을 믿으시는 겁니까.”
부율은 조용히 바깥의 그림자를 좇았다. 화향관 주변으로 나는 진한 탁주의 냄새.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취객의 술주정.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제 안에 쏙 들어와 다른 놈을 쳐다보던 그 아이였다.
그 애틋한 부율의 시선을 눈치챈 연은 삐져나가려는 말을 참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부율이 이곳에 남고자 한 이유가, 그것이었던 걸까.
“…율.”
“말하거라. 너답지 않게 뜸 들이지 말고.”
부율이 문에서 떨어져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제법 피곤한 것인지 의자에 넓게 기대어 연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연은 부율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그는 소년이었다. 자신이 그를 돌보았던 십수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태껏 순진하게 그 꿈을 현실로 믿고 있다니.
“…그 여인은 부율 님을 매번 떠나지 않습니까.”
연은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질책을 삼가고 유연한 말로 부율을 시험했다. 부율이 믿고 있는 것이 그 이야기라면, 그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옳았다. 그녀는 언제나 율을 떠난다는 것을. 그런 선택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 그랬었지.”
부율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연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달랐다. 평소라면 자신의 말을 반발하고 나설 부율이 어째서인지 조용했다. 아니, 조금은 들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안타깝게도 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이번은 달라.”
부율의 입매가 기분 좋게 올라간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연은 알고 있었다. 저 견고한 눈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부율은 미쳐 있었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잔재들. 말도 안 되는 그 전생의 이야기들에.
* * *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여름날 장마에, 빗줄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목덜미에서 떼어 내려고 했던 그. 미처 여미지 못한 가슴팍 사이로 살짝씩 보이던 붉은 입술 자국들. 나는 단번에 그가 수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몸짓 하나하나가 그때의 그 문장을 대변해 주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소설 속 묘사보다 더 아름다워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내게 다가와 앞으로 내가 가지게 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누룩. 나는 어색하게나마 그의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름다움을 부끄럽게도 질투했었다. 어째서 나와 다르게 그는 깨끗할 수 있는 걸까. 내가 더러운 곳을 헤집고 있을 동안, 그는 영원히 그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가 증오스러웠다.
어째서 너는…….
아직도 그대로일까.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품고 있기에도 하찮던 그 증오심이 사랑으로 변한 것은.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아왔던 자격지심이 어느새 그와 함께 하는 생활 동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빼앗고 싶었다.
‘누야.’
그가 나를 부를 때 내는 낮은 울림이.
‘나를 보아라.’
눈이 마주칠 때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감각이.
‘너는 내게 묻지 않는구나.’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은 그가 나를…….
“누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그가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광경에 가슴이 서리해진다. 그의 왼쪽 뺨에 흘린 눈물 자국이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오… 님.”
어제와 똑같이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목이 턱턱 막혀왔다. 평상시 소리가 아닌 쇳소리가 나왔다. 흠칫 놀라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놓인 것은 없는데, 무언가 강하게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 일은 기억이 나느냐.”
“어제…라 하시면…….”
어젯밤.
나는 간신히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수오 님과 눈을 직선으로 맞는다. 그는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다시 물었다.
“얌전히 방에 있으라 하였는데, 굳이 내 방에 찾아오지 않았더냐.”
“제가… 요?”
아무리 어제 일을 기억하려고 해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오 님은 당황한 나를 보며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나는 다시 멍하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봤다.
“오늘은 푹 쉬어라.”
“죄,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유연한 표정과는 달리 말투가 단호했다.
“어떤 일도 없었다. 허나…….”
수오 님이 뒷말을 흐리며 내 목 언저리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손등이 빗장뼈 근처에 닿는다.
“당분간 너는 쉬는 게 좋겠구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잠을 자고 일어난 게 분명함에도 온몸에 피로가 가득했다. 나는 허리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상체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자 수오 님이 나를 따라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린다. 그가 내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머리카락을 내리는 것으로 상기된 볼을 숨기고자 했다.
“누야. 오늘부터는 이곳에 묵도록 하거라.”
“…아.”
이곳이라 하면. 나는 햇살이 들어오는 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언제부터 이리 강한 빛이 들어왔을까. 조금 의문을 가지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탁상과 의자.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작은 화병. 작지만 제대로 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 장롱.
이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덕화원이란다.”
“덕화원…….”
수오 님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것의 정체를 깨닫는다. 덕화원. 마을 축제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언급했던 장소였다. 이곳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녀 합방이 이루어지는 곳. 씨받이가 될 여자와 또 다른 남창을 만들기 위해 씨를 바쳐야 했던 창부가 아이를 만드는 곳. 나는 그제야 기겁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축제는 이미 끝났어. 무엇보다 이곳을 아는 외지인은 없을 테지.”
“그렇지만 저는…….”
수오 님의 말에 금방이라도 반박할 것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었다. 나는 무엇에 반대하려고 했었을까. 뒤따를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수오 님은 그 이상 말하지 않는 내게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야.”
“네. 수오 님…….”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이전보다 확고해, 무엇이 변한 것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에 의문이 들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백준이 찾아온 다음 날에도 나는 분명…….
이렇듯 모든 것이 흐릿했었다.
“내가 널 곧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 기억하고 있느냐.”
“행복…….”
수오 님의 말을 반복해 입에 담아보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비어 있는 내 눈동자를 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가엾게도.”
“…수오 님?”
“남자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느냐.”
수오 님의 입에서 나온 한 음절에 그제야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부율. 그 남자에 대한 것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또다시 남자와 밤을 보냈고, 수오 님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오 님의 표정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조용했고, 밖을 바라보아도 달빛조차 인식할 수 없는 밤이었다.
수오 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저 표정은, 어젯밤에는 내가 볼 수 없었던 동요였다.
“…너는.”
수오 님의 입술이 떨렸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하는구나.”
수오 님이 내게 손을 뻗는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어젯밤 남자가 내게 한 짓 때문일까. 그 짧은 움직임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아픈 목을 감싸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당분간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남자도 널 찾긴 힘들 것이다.”
“하, 하지만 화향관에서 절 찾을 거예요. 수오 님을 모실 수도 없…….”
“너는 날 돌볼 필요가 없단다. 누야.”
“네……?”
수오 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단호해진다. 또다. 나는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모든 것을 들쑤신다. 내가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그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수오 님의 작은 소맷자락을 붙잡아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 해보았지만, 그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이 용기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수오 님의 옆에 있는 내가 어딘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이하리만큼 불쾌한 감정이었다.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 여기 있거라. 문은 닫아 놓겠다.”
“수, 수오 님……?”
그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튼튼해 보이는 괴상한 문이 단숨에 입을 닫는다. 잠시 그 틈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상을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아픈 다리를 끌고 문으로 기어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그가, 나를 버린 걸까? 내가 쓸모없어서. 나라는 존재가 그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지만…….
“으윽!”
그 순간, 몸이 반으로 갈라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엎어지면서 신음했다.
“하으윽……!”
이마에 맺힌 땀이 무르팍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덜덜 떨면서 고통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어젯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율이 그렇게 방을 떠난 뒤 어떻게 나는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그 흐릿한 광경 속에 연기처럼 기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느낌.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본다. 나는 그 기억 속에서 더는 관찰자가 아니었다.
죄를 지었습니다.
“아윽……!”
남자는, 희미하게나마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넋이 나가게 되다가도,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나는 이 자를 벗어날 수 없어. 어떤 것에도 도망칠 수 없었다. 정해진 이야기가 가혹해서, 잊고 싶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지만…….
허나, 이 죄는 곧 잊혀질 것입니다.
나는 남자를 따라 웃었다. 기쁨의 미소가 아니었다. 드디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 * *
부율은 찬기만 남은 방 안을 살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누룩은 보이지 않았다. 시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방에서도, 수오가 있는 이 화향관에서도.
이런 일은 예상치 못했다. 부율의 발아래 진 등잔 밑 그림자가 길어진다. 서로를 노린 시선들이 겹겹이 덮쳐 왔다.
“누룩은 어디 있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곳을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부율이 낮게 웃었다.
“네놈과 놀아줄 여유는 없어. 헛짓하지 말고 누룩을 데려와.”
“부율 님께 겁간당한 아이가 과연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겠습니까.”
“겁간?”
부율의 꼿꼿했던 입매가 아래로 내려갔다. 수오는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는 듯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부율은 알고 있었다. 수오의 손바닥이 날 선 손톱자국으로 이미 엉망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부율이 내키지 않은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멈춘 자리는, 수오가 숨을 길게 내쉬며 누룩을 지켜보았던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지긋이 수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묘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어져야 할 인연, 혹은 악연이.
“왜지?”
부율의 성난 어투가 수오의 귀에 철저히 박힌다. 외면할 수 없는 물음이 덩그러니 방 한구석에 던져졌다.
“어째서 보고만 있었던 것이냐.”
“…….”
살점을 파고든 손톱이 점점 더 깊숙이 뼈에 닿는다. 수오는 애써 입매를 올리며 부율이 선 자리를 바라봤다.
“그리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던 것 치고는.”
“…….”
“고개를 든 네 놈 좆이 제법 우습긴 했지만 말이다.”
수오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마른 숨이 새어 나온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부율은 약해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오에게 직진했다. 그의 손목을 붙잡고 벽으로 몰아붙이며, 온몸으로 그를 짓눌렀다. 벌어졌던 입술은 다시 닫혔다. 동요를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 이상하단 말이지. 네놈을 이리 가까이 보면…….”
“윽!”
부율에게 잡힌 수오의 손이 새하얘진다. 간격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부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오의 얼굴을 유심히 뜯었다.
“무슨 짓입니까!”
“그래. 분명…….”
수오의 눈썹 위로 부율의 날카로운 시선이 떨어진다.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한 수오의 얼굴은 잠시 부서지고, 또다시 차가워지길 반복했다.
“낯이 익어.”
마지막 부율의 말 한마디에 수오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부율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동안 일부러 힘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질 만큼, 수오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공기가 뒤바뀐다. 차가웠던 것이, 다시 뜨겁게.
“…….”
불필요할 만큼 크게 수오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거친 숨이 입 밖으로 나온다. 부율은 그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수오를 관찰했다. 그러나 동요는 짧고, 순식간이었다. 이윽고 남은 숨을 모조리 뱉어내고는, 수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꿈이라도 꾸셨나 봅니다.”
부율은 수오에게 한 발짝 떨어져 생각에 잠겼다. 꿈이라고. 그러나 수오는 누룩과는 달랐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순간에도, 수상쩍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곱상하게 생긴 외모. 그러나 어딘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
그래, 분명히.
“호연(虎沿) 출신이느냐.”
남색 마을과 세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수도인 호연(虎沿)이 있었다. 황궁이 있는 곳, 그리고 부율 그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호연 출신이라면, 본 적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유한 것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그곳에서 창부를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율의 말을 들은 수오의 표정은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기묘하게 비틀린 입매가, 마치 그의 정체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남창에 불과한 몸입니다. 감히 그곳에 가본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설령 본 적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어느 가문의 남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을.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수오와 누룩의 관계.
“누룩이 떠났다면 네 놈에게 남은 볼일은 없다.”
부율은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이 이상 놈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누룩을 찾아야 한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되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놈을 혼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만 가보지.”
문짝이 열리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파묻힌다. 와중에 선명히 들린 것은 수오의 작은 숨소리였다. 부율은 귀를 세우고,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놈은 누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 역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율은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었다.
부율의 발밑에 밟히는 나뭇잎들이 어지러이 소리를 낸다. 그는 희미하게 번지는 창부관의 불빛을 보고 꿈을 생각했다.
이 연의 말대로 꿈속의 그녀는 자신을 떠난다. 매번, 매 순간, 그래. 악몽처럼.
그런데 꿈속의 그녀는 자신을 떠나, 어디로 갔을까.
여태 생각한 적 없었던 의문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 한 번도 꿈속에서 나와 주지 않던 후속의 이야기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녀는, 자신의 손을 떠나 다른 놈의 품속으로 간 것일까.
혹은 영영, 그 꿈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을까.
* * *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동자를 굴려도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다시 누워 천장을 응시해 보지만, 시간은 가지 않았다. 덕화원이 이런 곳이었던 걸까. 나는 아직도 낯선 자들의 정사 흔적이 남아 있는 이불을 한편에 치우며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쯤 돌아와 주시는 걸까. 단단히 잠긴 문이 나를 보며 비웃는 것 같았다. 이 기다림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처지는 여전히 똑같았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없이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잠긴다. 거침없이 저며오는 졸음 속에서 필사적으로 빛을 따라가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인영이, 다시 좇아오기 시작한다. 싫다. 더는 꿈을 꾸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읏.”
좁아진 시야 속에서 간신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깻죽지부터 흘러내린 땀은 등허리까지 말썽이었다. 천천히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발목을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두 발목이 흉측했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상처 하나 없는 통증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가야 해…….”
어떻게든 지친 몸을 끌고 문 앞까지 가보지만, 단단하게 잠긴 것이 갑자기 풀릴 리가 없었다. 멍하니 잠금쇠를 노려본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의 기척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그 열린 틈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주 허망하게도, 공중에 허우적대던 손가락들이 단숨에 잡혀 버렸다. 수오 님이었다.
“많이 기다리게 했구나.”
1년 전, 내게 보여줬던 그 미소로 다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곳 세상에 대해서도. 하지만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수오 님.”
나는 그를 사랑한다.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텐데. 미안하구나.”
수오 님이 등 뒤에서 꺼내 보인 것은 나무로 된 상자였다. 그는 내 앞에 앉아, 작은 미소로 상자를 열었다. 어두운 결속에서 송송 흩어져 있는 붉은 열매가 보였다.
“이건…….”
한눈에 봐도, 이곳 마을에서 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수오 님은 상자 속에서 가장 붉은 것을 꺼내 내게 건넸다. 손가락이 맞닿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쥐었다. 수오 님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더욱 내게로 가까워질 뿐이었다.
“네가 좋아했던 것들은 잊지 않고 있어.”
“제가 좋아했던 것… 이요?”
수오 님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그는 내 입술 가까이에 작은 열매를 가져다 대며, 입술을 벌렸다. 마치 내 입이 열리길 바라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서일까. 전혀 식욕은 돋지 않는데. 그의 붉은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것만 같아서. 색이 같아서. 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벌리거라.”
그의 목소리가 떨린 걸까.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에 닿는 입술이 떨린 걸까. 서늘한 바닥이 축축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입을 벌리고, 그가 주는 붉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혀 천장에 부서진 열매껍질에서 달콤한 과육이 흘러나온다. 수오 님의 눈이 반달처럼 예쁘게 휘어진다. 그는 두 번째 열매를 손에 들었다.
“누야.”
과일은 달았고, 잎사귀의 풋풋한 향이 났다. 처음 먹어보는 것 같은데, 알고 있는 맛인 것처럼 익숙했다. 나는 열매들을 다시 입안에 넣으며, 입술에 남은 나머지 과즙마저 핥았다. 수오 님은 그런 날 보며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내 볼을 감싸고 한숨처럼 작게 속삭였다.
“…네게 나는 무엇일지 언제나 궁금했단다.”
입가에 묻은 붉은 흔적이, 그의 손톱에 물든다. 마주한 시선은 여느 때보다 뚜렷했다. 하지만 수오 님은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묻지 못했지.”
“…어째서.”
일순 입 밖으로 나가버린 내 물음에 수오 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대답했다.
“네가 지금 내게 묻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이윽고 쏟아진 정적이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처럼 답답했다. 내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 물었어야 했던 것.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껏 내가 그에게 궁금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너와 다르게 나는 언제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오 님…….”
“사실은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내 턱을 잡고 당겼다. 순식간에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졌다. 더는 고개를 돌릴 틈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스쳐도 닿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는 망설임 없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너를…….”
그런데 다음 순간, 아지랑이같이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말을 끝맺으려 했지만, 머릿속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귓가가 흐릿해지고, 갑작스러운 경직이 일었다. 나는 당황해 그의 가슴을 밀쳐 냈다. 수오 님의 당황하는 표정이 시선 아래에서 보인다. 그 얼굴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어째서일까. 모든 것이 이미 벌어졌던 일인 것처럼 익숙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윽……!”
감히 당신에게 품은 이 마음을 아시고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아냐. 틀려. 아니라고. 어둠 속의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나를 붙잡고, 어둠 밖으로 끌어 내린다. 그리고 조롱했다. 이 자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어. 도망가야 해. 하지만…….
“읏, 아……!”
너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장면이 변했다. 같은 남자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분위기도, 말투도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절규하듯이 소리친다. 죽을 것처럼, 일그러져 있어서는.
너도 내게 미쳐있다는 거, 알고 있는 주제에.
아냐. 틀려.
“누룩.”
“하아, 하아…….”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는, 수오 님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온몸에 젖은 땀이 수오 님의 손바닥까지 적신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품에 당기고 다시 안정을 취했다. 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을 보았느냐.”
“저는…….”
수오 님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굴 보고 있었던 걸까. 기억 속의 남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고개를 들어라.”
턱 끝에 닿아 있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내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움직였다. 이윽고 다시 붉은 것이 입술에 와 닿는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얌전히 그가 주는 것들을 삼켰다. 아까와는 다른 조금 쌉쌀한 맛의 과즙이 목구멍으로 들어간다. 수오 님의 말이 맞았다. 들썩거리던 가슴이 안정을 되찾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기가 들던 몸에 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으응…….”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내가 보는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밖의 것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른했고, 졸린 것도 같았다. 나는 반쯤 감긴 눈을 하고도 그를 좇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수오 님이 내 앞으로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곧 입술에 열매가 아닌 다른 것이 닿았다.
“아… 응…….”
작은 두 손등이 커다란 그의 손바닥 아래에 갇힌다. 그는 빈틈없이 내 몸을 덮쳐왔다. 힘을 잃은 몸이 점점 뒤로 넘어간다. 수오 님은 나머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받쳤다.
“하, 으응…… 아.”
그는 벌려진 내 입술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마치 입안에 남은 과즙을 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빨간 것들이 전부 그에게 흡수될 것 같았다. 그의 혀가 정신없이 나를 탐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등에 바닥이 닿을 때까지.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이 순식간에 내 몸에 닿는다. 그는 마치 기다려 왔던 순간인 것처럼, 곧바로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벌써 서 있구나.”
“아흐……!”
얇은 천 위에 불쑥 솟아있는 젖꼭지를 조롱이라도 하는 듯이, 수오 님은 작게 웃었다. 점점 더 정신은 몽롱해져만 갔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다만, 몸의 감각이 너무나도 달았다.
“매일 보면서 생각했지. 커다란 가슴에는 어울리지 않는 짧은 저고리라고.”
“아… 하아앙……!”
수오 님은 몇 번이고 손에 넘치는 젖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러다 지문 끝에 꼭지가 닿기라도 하면 집요하게 잡아당겼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애무에도 치마 아래는 제멋대로 반응했다. 뜨거웠고, 축축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벌리며 호소했다.
“하아…. 수오 님…….”
“꼭지가 천을 뚫고 나올 것 같구나. 이리 헤져서는…….”
수오 님은 끊어질 것 같은 실올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젖가슴을 문지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세우고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끊어냈다. 곧이어 천이 찢기는 소리가 나더니 꼭지가 답답한 옷을 뚫고 공기 중에 튀어왔다. 그는 정확히 그 부분을 혓바닥으로 핥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안에 머금기 시작했다.
“하, 으으읏…! 아!”
“하아…. 마치 씹어달라는 듯이 단단해져 있지 않으냐. 이리도 음란한 것을 내 여태 참고만 있었구나.”
그는 침으로 번지르르해져 있는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팔뚝으로 눈을 가리며, 턱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외면했다.
“아래는 얼마나 젖어 있을까.”
그가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솜털이 솟아오르는 감각에 저절로 몸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벌려져 있는 두 다리만큼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는 속곳 안으로 손마디를 넣고 풀숲을 헤집었다. 나는 흐느껴 울며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 그의 중지에 부풀어 오른 정점이 닿았다. 그 짜릿한 감각에 허리가 크게 휘어졌다. 수오 님은 그런 나를 한 번 흘기더니 곧장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으으윽!”
“푹 젖어 있어. 자지, 아니 주먹을 넣어도 쑥 들어갈 것 같구나.”
곧장 손가락 세 개가 보지 안으로 쑤셔 넣어진다. 숨이 꽉 막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수오 님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밖으로 흘러나오던 애액은 두꺼운 손마디에 걸려 더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때, 움직이던 손가락이 가장 기분 좋은 부분까지 걸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
“기껏 딱딱하게 만들어 놓은 젖꼭지가 풀어져 있구나. 다시 단단해질 때까지 스스로 만지거라.”
그는 손수 내 손을 가슴으로 가져다 대며 낮은 음조로 명령했다. 손끝에서 매만져지는 반질반질한 꼭지가 낯설었다. 수오 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애써 빨아 놓은 젖통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어서.”
“흐으…….”
그의 신경을 건들기라도 한 걸까. 그가 손가락을 세우며 보지 안쪽까지 서슴없이 찔러왔다. 세 개의 손가락이 푹푹 소리를 내며 내장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일부러인 것처럼 방광이 있는 곳을 정확히 쳐댔다.
“아으흐흑! 그만…! 수, 수오 님…! 하윽!”
“벌써 찔끔찔끔 나오고 있구나. 기특하게도, 줄곧 참았던 모양이야.”
수오 님의 시선이 방 안에 놓인 요강으로 향했다. 실은, 온종일 볼일을 보지 못했다. 수오 님이 돌아올 걸 생각하면 도저히 소변을 눌 수가 없었다. 수오 님의 눈이 가늘어진다. 다시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얕은 기대감이 묻어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뭉툭해진 젖꼭지를 직접 손으로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읏…….”
“더 세게 꼬집거라. 그 정도로는 내가 핥아댔던 것처럼 딱딱해지지 않을 게다.”
“하읏…….”
그의 말대로 좀 더 강하게 비틀자, 꼭지가 더 단단해져 가는 것 같았다. 수오 님은 젖을 주무르는 내 양손을 주시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팔뚝에 선명한 선 핏줄 자국이 음탕했다. 나는 발이 벽면에 부딪히고 있는지도 모르고 넓게 두 다리를 벌렸다. 수오 님에게 범해지고 있다. 부율 때와는 다른 설레는 감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젖이 빨개질 때까지 섰구나. 어서 빨아 삼켜달라는 듯이 내 쪽을 향해 있지 않으냐.”
“하아, 하으응…. 더… 더요…….”
“역시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구나.”
수오 님이 웃으며 젖은 보지 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애써 닦지 않았다. 오히려 혀를 내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애액을 핥았다. 그의 혀끝에 끈적한 애액이 실처럼 쭉 늘어진다. 반달의 눈을 한 그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 뺨에 퍼진 붉은 기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야.”
그가 나를 부른다. 나는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수오 님은 저를 바라보지 않는 시종이 원망스럽기라도 한 듯 거칠게 내 팔을 끌어 올렸다.
“아……!”
“언제까지 내 눈을 피하고만 있을 것이냐.”
강제로 일으켜 세워진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에게 잡힌 팔뚝은 핏기를 잃고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수오 님은 단호한 눈길로 나를 재촉했다.
“내 아무래도 너를 가르쳐야 하겠구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서웠다. 불순한 생각이 그를 처음 본 그 순간 때처럼 욱하고 올라온다. 허벅지를 타고 내리는 불결한 애액처럼.
전혀, 그칠 줄을 몰랐다.
“앞에 서거라.”
수오 님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청자로 된 둥근 요강 앞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춘 내게 스스로 요강을 열게 시켰다. 그다음, 치마저고리를 단숨에 벗겨 내었다.
“방 안에 퍼진 짙은 냄새가 여기에서 나는 냄새였구나.”
오뚝 솟은 그의 코가 수풀에 닿는다. 그와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그의 두 손이 내 엉덩이를 쥐고 있어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가까워지고 만다. 얼마 뒤, 그가 엉덩이 둔덕을 헤집고 손가락 하나를 질 안에 넣었다.
“아으응……!”
“더 벌려.”
그의 말을 따라 다리 사이를 넓히자, 이번엔 수월하게 두 번째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아까운 보짓물을 맨바닥에 떨어뜨려서야 되겠느냐.”
수오 님의 미간이 좁아진다. 흠칫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자, 그의 팔꿈치를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요강을 확인하고 엉거주춤 허리를 낮추었다. 드디어 마룻바닥이 아닌, 매끄러운 청자 안에 작은 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뚝. 뚝.
수오 님의 입선이 소리와 함께 슥 올라갔다.
“옳지.”
내벽을 어루만지고만 있던 손가락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액이 그 커다란 반동과 함께 죽죽 뽑혀 나왔다. 더는 자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눈이 풀리고, 다리가 무너졌다. 수오 님은 주저앉는 나를 받쳐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세 개까지 늘려갔다.
“…어깨를 잡거라.”
“하으으으으……!”
나는 재빨리 그의 어깨에 매달려, 엉덩이를 들썩였다. 금방이라도 오줌이 나올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대로 멈추지 않으면 소변 줄기가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가고 싶었다.
“흐으윽…! 아흐으읏……!”
“여기가 더 커진 것 같구나.”
말을 끝낸 수오 님이 혀를 내밀고 털이 나 있는 앞부분을 핥았다. 지그시 누르기도 하고, 혓바닥으로 넓게 훑기도 하며, 가녀린 정점을 괴롭혔다. 나는 끝내 앞으로 자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숲을 헤집고 더 깊은 길목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껍질이 벗겨진 그곳을 혀끝으로 살살 긁었다.
“아흐으으으읏!”
“…전부 다 쏟아내거라. 참지 말고.”
구멍 안에 들어간 손가락이 고꾸라지며 방광 부근에 닿는다. 요도를 필사적으로 좁혀 보지만, 뾰족한 그의 혀끝이 정점을 노릴 때마다 이완되고 만다. 더는 한계였다. 발목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며, 털썩하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나는 요강에 걸터앉은 채로 그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읏…. 하아, 하으…….”
정신없이 배출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망연한 얼굴로 수오 님을 올려다봤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저 내 허벅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가까웠다. 다리가 아니라… 마치 그사이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깨끗해졌구나.”
그는 조금 흐릿해진 시선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펼쳐진 그의 손바닥은 애액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번엔 네가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 줄 차례다.”
“…아.”
그는 미소하곤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그 손을 잡기 위해 저린 손목을 움직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그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눈썹이 또 한 번 와륵 무너지고 만다. 그가 억지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윽!”
“지금껏 쌓여 있는 좆물 전부 다 네 안에 배출할 것이다.”
그의 커다란 몸에 비해 턱없이 작은 몸이 종이쪽처럼 그에게 끌려간다. 그는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뒤에서 성기를 끄집어냈다. 그의 첨단은 이미 미끌미끌해져 있었다. 정액보다 맑은 무색무취의 물이 그의 요도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으으읏…….”
벽에 눌린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수오 님의 숨은 그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강렬했다.
“…그가 이리도 너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윽!”
양 겨드랑이 사이로 그의 손이 불쑥 들어온다. 그는 발딱 서 있는 내 젖가슴을 단숨에 손에 쥐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엉덩이를 뒤로 빼거라.”
“흐읍……!”
길게 위로 솟아있는 그의 물건이 엉덩이 굴곡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이대로 살집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더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를 원했다.
“하으으으응!”
“하, 큭!”
엉덩이를 뒤로 움직이자마자, 커다란 귀두가 소음순을 가르고 단숨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뿌리까지 집어넣을 생각인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가 흥분한 숨을 뱉으며 내 젖을 바락 쥐었다.
“물 보지가 따로 없구나.”
수오 님이 옅은 미소를 내 귓가에 흘린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동시에 여느 때보다 사실적이었다. 마치 이곳이 현실인 마냥, 나를 홀리고 있다.
“그자한테 범해지면서도 이런 간드러진 신음을 내지 않았더냐.”
“흐으읏… 아앙……!”
그의 거친 허리 짓에 한쪽 뺨이 벽면에 부딪힌다. 아픔을 호소해 보지만, 그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손톱이 젖살에 푹푹 박혀 들어온다. 그 날카로운 감각에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흐으… 윽!”
구멍이 굵은 기둥으로 꽉 채워진다. 그러다 조금 멀어지기라도 하면 아쉽기라도 하듯 엉덩이가 뒤로 움직여졌다. 그는 웃었다.
천박한 보지가 물을 쭉쭉 내며 성기를 물고 있는 것을 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제법, 남자 다룰 줄은 아는구나.”
“아아으… 아앙……!”
“다음은 누구로 할 작정이었느냐. 부율 그 남자를 놓치면 다른 놈도 노릴 생각이었느냐.”
“흐읍…! 아뇨. 저는 정말로……!”
수오 님이 다시 한번 강하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오뚝한 젖꼭지도 이윽고 벽에 찌그러져 형편없는 모양으로 무너졌다.
“보지로 좆을 조이는 방법은 어찌 알았느냐.”
그가 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끌어당겼다. 배려 따위 없는 거친 행동이었다. 붉었던 뺨이 이번에는 새파래진다. 그는 두려움에 바싹 선 내 목선을 따라 숨을 뱉었다.
“제 주인보다도 더 능숙하게 남자를 홀리고 다니니, 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흐으윽!”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물건이 내 안에 박힌다. 나를 미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부율 그 남자 때문일까. 내가 그 대신 그 남자의 몸을 받아냈기 때문에.
눈가가 붉어지고, 눈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진득하게 박혀,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흑…, 아, 흐으윽…….”
“뚝 그치거라.”
수오 님이 날 선 목소리로 나를 책망한다. 그런데도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급기야 그가 손을 높게 들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붉은 생채기가 엉덩이에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내 여태 너를 불쌍히 여겨 참았건만…….”
“하아윽!”
피부에 튄 그의 뜨거워진 목소리가 소름처럼 내 온몸을 질식시킨다. 그가 이번에는 반대편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네가 나를 배신하였구나.”
“아흐으윽!”
아물었던 가슴의 생채기에 다시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주는 달콤한 것들을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 꿈같은 것들이 지워질 만큼 가혹했다.
“하아. 누룩.”
그가 가파른 숨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곧 커다란 손으로 내 정수리를 누르기 시작했다.
“앉아라.”
그는 물건을 빼고 나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진득한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의 성기가 있었다.
“입을 벌리거라.”
그가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명령은 단조롭고, 스산했다. 나는 그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반항하지 못한다. 결국, 작게 입을 벌리고 만다. 그러자, 그 좁은 잇새로 우람한 성기가 아랫입술을 짓누르며 들어왔다.
“우우웁……!”
“전부 다 삼키거라.”
육중한 살집이 한꺼번에 입안에 들어왔다. 성교의 냄새가 섞인 비릿한 향이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꾸역꾸역 내 입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우욱! 웁!”
“하, 읏…. 네게만 주는 것이니 전부 다 마셔야 할 것이다.”
눈물이 볼을 타고, 그의 음모까지 흐른다.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 뒤통수를 벽으로 끝까지 몰고 가며, 마지막에는 목구멍에 귀두를 박았다. 몇 번을 그렇게 움직이다가, 이내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입천장에 몽글몽글한 정액이 맺혔다.
“혀로 끝부분을 핥거라. 더는 새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우으붑…. 하우웁……!”
안간힘을 다해 혀로 첨단을 굴려보지만,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커다란 기둥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뭉툭한 귀두에, 작게 갈라진 좁은 틈새. 그 사이에서 나오는 정액의 흔적들이 계속해서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입안이 온통 수오 님의 향기로 가득했다. 그의 정액. 그의 체취. 그의 냄새.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형편없는 몸들만이 기억 속에 남았다.
“윽…. 하아.”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줄곧 무릎 꿇고 앉아 있던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손목에서, 내 손등까지 간지럽힌다. 그리고 손마디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내 팔을 일으켜 세웠다. 곧 두 시선이 같은 위치에서 마주한다. 그 푸른 눈빛 속에 더는 아까와 같은 헐벗은 몸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쪽 뺨에 붉게 그을린 상처가 있는 스스로가 보일 뿐이었다.
“…누룩.”
그가 나를 부른다. 목소리는 예전과 같은 온도를 되찾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붙잡은 그의 힘이 세져 간다. 이토록 그가 나를 얽매여 온 적이 있었을까.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하지만 수오 님은 내가 답을 찾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자에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다정한 목소리. 애가 탈 만큼 고운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그 그림자는 누구를 향해 있는 걸까.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물어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버림받을까 봐. 이 세상 속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 알려지게 될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나를 보아라. 누야.”
“…….”
그의 목소리가 간절해진다. 언제 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걸까. 반사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시선이, 수오 님에 의해 위로 향한다. 그의 눈이 흔들린다. 하지만 파동이 있던 자리에 내 얼굴이 비치자, 다시 잔잔해졌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는 없어.”
“…수오 님.”
그가 말하는 소중한 것. 다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그러니 부디…….”
그의 목소리에 눈물이 고인다. 나는 우리의 손이 맞닿은 공간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올렸다. 그의 눈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 속의 나는, 이상하리만큼 태연해 있었다.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 그러나 나는 결국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수오 님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어째서였을까. 줄곧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조금씩 가슴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수오 님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이곳은… 수오 님의 세상. 그가 주인공인 소설 속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허무맹랑한 전개는 나를 옥죄어 올 뿐이었다.
내가 그의 세상을 망가뜨려 놓고 있다는 게 너무도 확실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죄악감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수오 님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있었다.
* * *
“알아보았습니다.”
서한의 작은 목소리에도 부율의 귀가 쫑긋 선다. 알기 쉬운 상대의 반응에 서한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당한 관심. 이미 주어가 누구인지 눈치채기라도 한 듯, 부율의 어깨는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말하거라.”
“…누룩이라는 시종 아이는.”
부율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그리움이 사무쳤다. 사흘이 지난 오늘도 그녀가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부율은 꽉 쥔 주먹을 차마 풀지 못하고 서한을 응시했다.
“적(籍)이 없습니다.”
“적?”
서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부율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에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평민들과 노예들은 모두 관고(官庫)에 이름과 소속을 기록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노예라 할지라도 도망친 놈들을 수색하기 위해 주인들이 이름만큼은 반드시 올려놓지요.”
부율의 눈썹이 가라앉는다. 서한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룩은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수오의 시종일 리가 없었다. 놈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그녀를 제 장난감인 것처럼 가늠하고 있던 그 어두운 그늘이 증거였다.
“수오가 데려온 아이기에 당연히 그 적에 올려져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없었군.”
서한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부율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그녀의 과거가 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쯤은 자신도 예상하던 바였다. 창백한 피부에 갑자기 탄 듯한 햇빛 자국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예전부터 일하고 있던 몸이 아니다. 분명 안에서 생활했을 터. 그러다 1년 전부터 시종 일을 하면서 빛에 그을렸을 것이다.
“혹시 몰라 귀족들 족보에서도 누룩이라는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귀족도 평민도, 노예도 아니라…….”
부율은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파헤칠수록 미궁 속이었다. 이름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누룩이라는 이름이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어야 할 터.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그녀가 이 나라에서 유령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흔치 않은 이름이니 더 조사를 해보면 단서는 나오겠지요.”
“…아니.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부율의 한쪽 입매가 올라간다. 그는 마른 입술을 애써 혀로 닦아내며 정면을 바라봤다. 애초부터 방법이 틀렸던 것이다. 이름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초상을 그릴 수 있는 자가 누구지?”
“한 명밖에 없습니다. 15년 전에 수도에서 선생을 하던 자인데…….”
“좋다. 그자에게 누룩의 얼굴을 부탁하거라. 화향관에 지내도록 하면서 들키지 않게 작업하게 시켜. 보수는 평소 그림값의 열 배로 쳐주겠다.”
“…하, 하오나 고작 시종의 초상을 의뢰하기는 조금…….”
부율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 시선을 눈치챈 서한이 하룻강아지처럼 어깨를 움츠린다.
“내 너에게 이 일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소, 소인 어찌 어르신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
“입을 놀릴 수 있는 그 혀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잠했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서한은 결국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말을 주워 담는 수밖에 없었다. 부율의 말이 진심인 것은 그 누가 들어도 확실했기 때문에.
“당장 내일 부르겠습니다.”
“…….”
내일이라는 서한의 말에 부율이 잠시 멈칫했다. 아직 누룩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서한은 누룩이 아직도 자신의 시종을 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부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씹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지. 거처하는 곳만 알려다오.”
“예. 적어드리겠습니다.”
서한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부율을 바라봤다. 긴 속눈썹 아래로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아직 몇 밤밖에 지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꽤 지쳐 보였다.
“…이 일은 함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율의 매서운 시선에 서한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율이 누룩에 대해서 더 언급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의 한 마디에 있었다. 더 이상의 소란은 없어야 했다. 최대한 조용히 누룩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자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으로 또 나를 찾는 자가 이곳으로 오거든, 이미 수도로 출발하였다고 둘러대거라.”
황제의 눈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야 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부율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습기에 젖어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점차 커지며, 조금씩 부율의 어깨도 차게 젖어 들어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 연의 말대로 황제의 청이 이른 시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황가의 감시도 심해질 것이다. 묘책이 필요했다.
누룩을 안전하게 데려갈 수 있는 최상의 방법.
그때, 부율의 머릿속에서 서한의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적(籍)이 없습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부율의 입가가 올라간다. 묘책은 있었다. 있는 적을 지우거나 바꾸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없는 적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율은 잿빛 하늘에 눈을 돌렸다. 빗방울이 굵지 않은 것을 보니 곧 그칠 모양이었다.
그는 방으로 향하던 발을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 *
“으… 하, 아.”
꿈이었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보이는 어두운색의 그림. 깨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인 이곳에서 나는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수오 님이 이곳에 나를 내버려 둔 지 사흘째였다. 그는 이른 새벽에만 나를 찾았고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더는 나를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친 내 몸을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감긴 눈꺼풀에서 잠깐씩 섬광이 보인다. 얼마나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경직된 몸에서 땀이 비처럼 흐른다. 쾅, 쾅. 벽을 치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들렸다. 바깥소리일까. 혹은 이곳에서 나는 가짜 소리인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싶어.
공간에는 아무도 없는데, 희미한 울림만이 내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지친 듯한 음성. 분명 익숙한 울림인데, 알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한 번 더 울렸다.
죽고 싶어. 미안해.
아까 전보다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로 결국 여자가 울음을 참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여자를 찾아보려고 해도, 그림자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러다가, 검은 공간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으… 하, 윽!”
깜깜했던 앞이 갑자기 하얗게 솟아올랐다. 뜨거운 빛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아도 꿈속의 나는 눈을 가릴 수 없었다. 가릴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하게 목소리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다. 눈이 점점 빛에 익숙해져 갈 때쯤 멀리서 털썩, 하는 파동이 들렸다.
제발…….
짙은 회색 공간 속에서, 나는 목소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내 옆에 있어…….
남자가 흐느끼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를 끌어안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대의 아래에서, 남자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나를 버리지 마.
쿵.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가슴팍까지 차가운 소름이 퍼졌다. 간절한 남자의 목소리가 왜 이토록 아프게 느껴지는 걸까.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인영은 환영처럼 흩어져 갔다. 노력할수록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지 마.
남자가 단호하게 내뱉는 말은 상대를 동요시킬 수 없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남자가 가까워진다. 희미했지만, 불안해 보이는 그의 어깨가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보이는 공간 안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적어도 그놈한테는 가지 마.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희미한 눈동자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여자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내 손을 확 끌어당겼다. 남자의 어깨로 뻗은 한 손이 무너져 간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남자는 웃었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그리웠어.
구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남자의 몸이 점점 현실감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림은 단단한 몸이 되어, 만지면 체온마저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해졌다.
너는 나를 이미 알고 있지.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자는 나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붙잡고 있던 여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와 나. 둘만이 남은 공간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나도 널 알고 있어.
심장이 날뛰었다. 드디어 남자의 정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나를 품에서 떼어 놓으며 눈을 마주치려 했다. 눈을 감아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이곳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꿈속일 뿐이었다. 눈을 감을 수 없어. 남자의 얼굴이 시야 속에 선명히 보였다.
…드디어 만났구나.
남자였다. 남자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긴 머리카락. 희고 고운 피부. 정돈된 속눈썹.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술에 칠해져 있는 다홍빛 연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림새가 남자의 눈에 무엇보다도 생생히 비쳐 있었다. 나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호흡이 가팔라진다. 의식이 꿈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아, 하아.”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요를 걷어차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얀 벽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다시 꿈속의 남자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자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남자와 닮아 있었다. 아니, 남자 그 자체였다. 가슴이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고리를 쳐다봤다. 문은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문을 벅벅 차보지만 무의미한 동작일 뿐이었다. 숨이 점점 더 차오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안 돼. 제발. 여기서… 나가야 해.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뜻을 알 수 없는 꿈에서 깨어나, 이번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계속해서 가슴에 울렁거리며 나타난다.
“으, 흐윽.”
슬픔이 기도를 뚫고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윽……!”
꿈속에서 봤던 그 밝은 빛처럼 붉은 노을빛이 눈을 뒤덮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넘어갔지만, 누군가 강하게 내 손목을 붙잡아 준다. 또 익숙한 향이었다.
“이런.”
남자의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찡그렸던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노을에 비친 남자의 머리 색이 적색으로 예쁘게 물들여졌다. 나는 드디어 갈망하던 것을 찾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흐. 흐윽.”
남자는 잡은 내 손목을 그대로 끌어 올려,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두르며, 이미 젖어 있는 그의 어깨에 눈물을 쏟아냈다.
“…설마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문을 치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 내 손등이 닿아 있었고, 그의 어깨에 내 숨이 스미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것도 소설과 닮아 있는 것이 없었다. 왜일까. 이 남자는, 내가 알고 있는 남자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이 똑같았다. 향기도, 얼굴도, 목소리도.
“악몽이라도 꾼 것이냐.”
남자가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미소를 흘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냐. 네가 나를… 그리워했을 리는 없을 텐데.”
농처럼 던진 그의 말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꾼 그 꿈에서 나오는 그 남자는 악몽이 아니었으니까.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건 죄책감이었고, 또 그리움이었다.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한 남자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