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윤회
“이 옷은 어떠하냐.”
“잘 어울리십니다.”
거울 속에, 생전 만져 보기도 힘든 비단옷을 줄줄이 들고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있었다. 수오 님은 거울로 이리저리 재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새로운 옷을 건넨다.
“혼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그럴 리가 있겠냐고 둘러댔지만, 수오 님 말이 맞았다. 그가 고운 옷을 걸칠 때마다 내 표정은 한없이 굳어져 갔다.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치장도 옷치레도 전부 내가 도맡아 해야 함이 마땅했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를 아름답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와 내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또 이만큼 심술을 부리게 되는 걸까.
“기운이 없어 뵈는구나. 아침을 또 거른 것이냐.”
입맛이 없었다. 사실 어젯밤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정말로 잘 챙겨 먹…….”
“누룩. 사실만 답하거라.”
“…안 먹었어요.”
고개를 숙였는데도 수오 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고개를 까닥까닥 움직이며 그 시선을 피해 보고자 했다. 그러다 그가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나는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수오 님?”
수오 님이 입고 있던 비단옷을 벗어 원래 복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나가자꾸나.”
그 청청한 음색이 다시 마음속을 울렸다. 산책하길 기다리는 강아지도 아닌데, 그 한마디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갈 거야.”
내가 좋아하는 곳.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아, 설마 1년 전 내가 좋아하는 곳이 있었던 걸까.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좋았다. 그가 나를 신경 써주고 있다. 그 사실 하나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 어서.”
“아, 네!”
나는 허겁지겁 옷을 갠 뒤 수오 님 뒤를 따랐다. 바깥을 나가보니 비가 떨어질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비옷을 가져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랬다간 수오 님과 멀어질 것 같아 쏜살같이 그의 옆까지 달려 나갔다. 그는 발걸음을 늦췄다. 항상 이랬다. 시종인 나까지도 배려해 주었다. 나는 달아오르는 붉은 두 뺨을 식히려 두 손으로 볼을 가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너무 좋았다. 그의 모든 것이.
얼마 뒤, 걸음이 멈춰 선 곳은 어느 허름한 가게 앞이었다. 이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절로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수오 님?”
조심스레 그를 부르자, 그는 옅은 미소로 나를 환히 돌아봤다. 괜히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가 날 돌아보면 이따금 이렇게 돼 버리곤 했다.
“자, 이거.”
가게 주인과 몇 차례 말을 주고받은 수오 님이 잠시 뒤,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나는 멍하게 서 있다가 엉거주춤 그것을 받아들였다. 손안에 있는 것은 설탕을 녹여 만든 새하얀 과자였다.
“입맛이 없을 때 종종 먹곤 하지 않았느냐.”
내가 이 과자를 좋아하기라도 했던 걸까. 사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기 앉자꾸나.”
그가 나를 불러 조금 떨어진 곳의 의자를 가리켰다. 우리 둘은 그곳에 앉기로 했다. 온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앉는데, 서로의 손가락이 조금 맞닿고 만다.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색 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수, 수오 님 것은요?”
“너 주려고 산 건데 내 것이 왜 필요하겠어.”
안 되는데…. 더는 기대할 수 없는데. 나는 과자 막대를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뛰는 심장을 억누르지 않으면 그의 귓가까지 들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수오 님은 안 드세요?”
“난 괜찮다. 어서 먹거라.”
그가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 어여쁜 마음에 작은 상처라도 내고 싶지 않아, 가장 못생긴 구석을 뜯었다. 과자는 금방 혀에 녹아 사라졌다. 맛있었다. 과일 향이 입안에 퍼지면서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처음 먹어보는 것 같은데, 어딘지 익숙한 맛이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느냐?”
과자를 입안 가득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오 님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내 기분이 염려되어 일부러 이곳으로 데리고 와 주신 걸까. 과자가 혓바닥에 녹은 자리에 여전히 단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과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자가 금방 녹는구나…….”
수오 님이 낮게 목소리를 늘어뜨렸다. 나는 과자를 한번 보고 수오 님을 바라봤다. 괜히 기분이 죄송스러웠다.
“저, 저는 좋아해요! 눅눅한 것도…….”
진심이었다. 오히려 이게 더 맛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더 그랬다.
“그래. 항상 그런 말을 했었지.”
“네……?”
우물거리는 입을 멈추고 그에게 되물었다. 분명 그의 앞에서 과자를 먹는 건 처음이었을 텐데…….
“항상 너는 내게 괜찮다는 말만 하지 않았느냐.”
“아…….”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입안에 있는 과자를 녹였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면 그는 나를 어떻게 볼까. 겸손해서라던가 그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단지 그의 반응이 무섭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그때였다. 과자를 절반 정도 먹었을 무렵, 무릎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이마에 곧바로 굵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비가…….”
나지막이 말을 뱉고 나자, 빗방울은 점점 더 빈번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해요. 괜찮을 줄 알고 비옷을 안 가져왔어요.”
어떡하지. 나는 눈으로 재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어디 비를 피할 곳이 없을까. 하필 넓은 시장 바닥에는 단지 물건을 감쌀만한 천막밖에 없었다. 화향관으로 돌아가려면 여기에서부터 한 식경은 걸어가야 했다.
“제가 얼른 비옷을 사 올…!”
그때 수오 님이 빠르게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근처에 여숙(旅宿)이 있어. 주인과 아는 사이니 비옷을 빌려줄 것이다.”
“네……!”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한쪽 손이 끈적거렸다. 설마. 나는 황급히 그에게 잡힌 손을 쳐다봤다. 설탕 알갱이가 비에 젖어 팔목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저분해진 과자들이 주르륵, 발등 위로 떨어졌다.
“수, 수오 님. 죄송해요!”
내 몸에 묻은 설탕물들은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끈적한 내 손을 붙잡은 바람에 그의 손마저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괜찮아. 우선 비부터 피하자꾸나.”
그는 그대로 끈적한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마주 잡은 손의 따듯함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얼굴 사방에 튀겼지만 그걸 깨달을 재간이 없었다. 일각(一刻)이 조금 넘어, 우리는 어느 노쇠한 여숙에 도착했다.
“저 때문에…, 죄송해요…….”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서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오 님은 비가 뚝뚝 떨어지는 천막을 올려다보다가 내 쪽으로 등을 돌렸다. 비가 와서일까. 그의 눈빛마저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꿈만 같아.”
그가 나를 보며 말한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고운 두 뺨은 상기되어 있는 채였다. 이 역시 비가 와서일까.
“…꿈이요?”
내 물음에 수오 님이 옅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몸을 좀 녹이고 가야 할 듯싶구나.”
“아…….”
그제야 수오 님의 젖은 몸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옷 한 장 덕분인지 그의 탄탄한 가슴이 대번에 드러나 있었다. 혹시나 나 역시 젖었을까 싶어 가슴팍을 바라봤다. 그보다 어두운색의 옷이었기 때문에 살이 드러나 보이진 않았지만, 가슴 봉오리가 솟아나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등을 돌리고 말했다.
“제, 제가 들어가서 방을 잡아 올게요.”
그리고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후다닥 여숙 안으로 들어갔다. 여숙 안은 허름한 외관과 달리 의외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저기, 빈방이 있을까요?”
“여자 혼자 쓰게?”
주인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훑어본다. 저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나를 도망 나온 씨받이쯤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되려 큰 소리로 받아쳤다.
“주인님 몸을 녹일 장소가 필요해요. 저는 시종이고요.”
“몇 개?”
그제야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풀고 열쇠를 뒤적거렸다. 순간 방을 하나 달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나라니. 큰일 날 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그 혼자 들어가게 하고, 문밖을 지키고 싶었지만 나를 그리 내버려 둘 수오 님이 아니었다. 그 착한 성정이 때로는 이렇게 괴로웠다. 영락없이 한 방에 둘이 있느니 차라리 방을 두 개 빌려 따로 씻는 게 나을 듯싶기도 했다.
“방은 두…….”
“하나 주십시오.”
“수오 님?”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았다. 수오 님이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이고, 수오였구만. 안 그래도 저번에 우리 아들놈한테 잘해줘서 고마웠소.”
주인 남자의 태도가 일변했다. 넉살 좋은 웃음을 날리며 손수 열쇠를 수오 님 손에 쥐여주기까지 했다.
“다음번에도 화향관으로 가라고 할 테니 제대로 놀아주시오.”
“네.”
수오 님은 열쇠를 건네받고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나는 조용히 맞잡은 손을 바라봤다. 손과 손 사이에서 눅눅해진 과자 알갱이가 비벼졌다. 불쾌한 감정이 이 끈적한 감촉에서 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이상한 상상을 막아보고 싶었지만 계속 흘러나오는 건 아까 전 소나기와 같았다. 싫었다.
“들어가자.”
오래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깨어났다. 나는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하나였지만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도 수오 님과 그 남자, 두 사람이 있었다.
* * *
“먼저 씻어라. 누야.”
“네…….”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던 수건을 쥐고 그대로 욕탕으로 들어왔다. 원래 같으면 사양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질투보다 더 지독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모르는 남자를 증오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을 남자에 대해서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재빨리 물을 받았다. 찬물을 쐬면 조금 나아질까. 하지만 몸이 저릴 만큼 차가워져도 소용없었다.
“…못됐다, 정말.”
자조하는 미소를 짓고 나서야 그나마 끔찍한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내 잘못이었다. 애초에 비옷을 가지고 왔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다면.
나는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과자 부스러기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조금 굵은 결정들은 아직 피부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무심히 혀로 핥아 음미했다. 더는 아까와 같은 달콤한 맛이 나지 않았다. 싱거운, 혹은 빗물에 섞여 이상한 맛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게 현실이었다. 그 달콤했던 기억들은 사실 훅하고 날아갈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알갱이들을 모조리 씻어 냈다.
그리고 수건을 들고 몸을 닦았다. 그러다 다시금 못다 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오 님과 함께 있는 다른 사내. 그 두 사람의 은밀한 행위들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파묻혀도 그 기묘한 상상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좇아왔다. 싫어도, 끝까지 좇아온다.
“하아. 하아…….”
의문이 들었다. 이전 생의 나는 어째서 BL 소설을 봤던 걸까. 괴로웠다. 과거가.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미래를 항상 가슴 속에 묻고 있어야 하는 지금의 나에게, 이만한 고문은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린 걸까.
…도대체 이전 생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거지?
“누야. 괜찮으냐?”
문밖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느릿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대충 감싸고 욕탕을 정리했다. 내 흔적을 지워야 한다. 그가 불쾌해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나갈게요. 죄송합니다.”
모두 정리한 뒤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힘없는 걸쇠처럼 턱 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나는 그 앞을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윽!”
갑자기 두 사람이 보였다. 눈앞에 선명하게. 아니, 실제로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꿈을 꾸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했다. 이건 내 머릿속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기억이었다.
또 다. 어째서. 왜 항상 내가 알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가 보이는 거지?
어디가? 지금 그 사람한테 가려는 거지?
상관하지 마. 애초에 네가 끼어든 거잖아. 제발 좀 정신 차려.
웃기지 마.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가. 내가 가게 할 거 같아?
너 이게 드라마 같지? 네가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지? 그래서 그래? 그래서 이렇게 뻔뻔한 거냐고.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거기에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마음이 뭉근해져 온다. 누가 어떤 말을 하는 건지, 또 누가 어떤 말을 듣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싫어.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어. 나는 당신을 아직 놓아주고 싶지 않아.
상관없어. 오늘은 나와 함께 하게 될 테니까.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안아줘. 너한테 안기는 거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까. 날 네 마음대로 다뤄. 마음껏, 분이 풀릴 때까지.
처절했다. 감정이 넘쳐흘렀다. 그런데도 주워 담을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안기고 싶어. 주인공이 될 수 없어도 좋아. 당신이 마지막으로 품을 여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좋아.
“아…….”
이윽고 환상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또 한 가지.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수오 님이 있었다.
“누룩!”
“수오…님.”
수오 님의 두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뜨거워. 눈물이 이토록 뜨거운지 처음 알았다. 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그런 수오 님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네, 네가 어떻게 잘못되는 줄만 나는…….”
아름다워. 그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 그의 손에는 끈적한 부스러기들이 묻어져 있었다.
“안아 주세요…….”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미소 지었다. 내뱉은 말을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선처를 바랐다. 어쩌면, 내가 노리는 것은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비겁했다. 하지만 환상 속의 그 사람처럼 애원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발밑에 누워 울부짖고 싶어. 안아달라고 떼를 쓰고 싶어. 부디, 마지막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그의 여자로 품어 달라고 울고 싶어.
“수오 님이랑 하고 싶어요.”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 외에는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안 될까요…….”
그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보고 자신감을 잃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때를 노려 그에게 간청했다. 스스로에게도 실망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의 마음이 가장 연약해져 있을 때를 노렸어. 꿈을 꾸었다고 하자. 꿈에서 어떤 사람을 봤다고 말이야.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꿈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고 말이야. 나는 그를 붙잡은 손을 떼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꿈을…….”
하지만 내가 말을 전부 다 잇기 전에 그는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렸어. 쫓겨날 거야. 나는 체념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어지러움이었다.
“죄송해요. 지금 당장 나갈게요.”
“…기다려.”
수오 님은 느릿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심장이 날뛰었다. 손끝이 맥박의 움직임을 못 따라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수오 님?”
그저 그의 옆얼굴만 보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말도 없이, 욕탕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 문고리는 내가 쓰러지기 전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맥없이 아가리를 벌렸던 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손에 닿아 생생하게 보였다. 문고리는 기뻐하고 있었다. 미칠 듯한 이 희망에.
“씻고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여러 번 눈을 깜빡거리고 저린 발가락들을 꿈틀거려 보아도 현실이었다. 수오 님은 가만히 있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죽을 것만 같아. 죄어 오는 심장의 통증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고통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다니 미친 건 아닐까. 아까 어지러웠던 머리가 맑은 물이 끼얹은 것처럼 멀쩡해졌다. 곧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몸을 닦는 소리.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느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마룻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럴 때마다 꾸욱 하는 낡은 나무판자의 소리가 났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발은 쥐가 난 것처럼 아렸다. 하지만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바닥에 발자국을 내고 나서야 수오 님의 물소리가 멈추었다. 이윽고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보랏빛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더욱더 투명해 보였다. 그는 방 한쪽에 걸려 있던 침의를 잡고 어깨 뒤로 걸쳤다. 서로의 호흡이 거짓말처럼 가빠진다. 숨을 쉴 수 없다. 목이 메어 말소리도 나가지 않는다. 변명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기대를 해도 되는 걸까.
“수, 수오 님…. 저 아까 그 말은…….”
“많이 기다렸느냐.”
그런 말은 반칙이었다. 슬퍼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몸을 씻는 시간 따위, 그동안 내가 그를 사랑했던 시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수오 님의 저 말이 다른 말로 들리는 것일까. 마치 그동안의 모든 시간을 헤아려 주는 듯한, 위로해주는 듯한 다정한 물음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한숨 느리게 쉬다가 겨우 말 한마디를 다시 내뱉는다. 젖은 눈물에 가려 수오 님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
“수오 님의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어요…….”
진득한 욕심이 가득 베인 과즙을 그대로 삼키는 것 같이 목이 막혔다. 나는 그의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마지막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소설의 결말을 아는 나에게 그처럼 바보 같은 소망도 없었다. 어차피 그를 잃는 것이라면, 그에게 안기는 마지막 여자로 기억되고 싶었다. 이 정도라면 이곳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그 정도라면.
“…등은 끄는 편이 낫겠지.”
담백한 그의 대답과 함께 등불이 탁하고 나가 버렸다. 가림막을 비집고 간간이 비쳐 나오는 노을빛을 제외하면 깜깜한 암흑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몸 선이 선명히 보였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누야.”
그의 눈빛이 노을빛과 함께 주황색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이곳이 다른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 그와 내가 둘로 남겨진 새로운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옷을 벗겨다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그런데,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추해 보이지는 않을까. 혹여 너무 애 같아 보이진 않을까 속으로 수천 번 걱정을 곱씹으며 몸을 움직였다.
“누룩.”
수오 님이 내 손을 잡았다. 누구의 맥박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맞닿은 피부가 뜨거웠다. 너무 가쁘지도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그는 다른 손으로 내 턱 끝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너는 내 마지막 여자가 될 것이다.”
그 울림이 배 속까지 깊이, 정면으로 맞닿아 앉았다. 포근했다. 안심됐다. 예견된 결말이란 없다고 착각할 만큼. 나는 입고 있는 겉치레들을 하나둘 벗어갔다. 바깥에 걸치고 있던 더러운 옷부터 안에서 젖어 있는 속곳까지. 그 앞에 알몸으로 섰다. 하지만 그가 보지 않았으면 바랐다. 어둡다는 것이 이토록 다행스러운 줄은 몰랐다. 그의 완벽한 몸과 달리 내 몸은 무척이나 엉터리처럼 보였으니까.
“…수오 님.”
말하고 싶어. 사랑한다고. 사실은 처음 당신을 실제로 만나게 된 순간부터 무척 가슴 떨려 왔었다고 말이야. 하지만 소리는 거기에서 멈췄다. 아니, 멈추어야 했다.
“너는 역시 내게 묻지 않는구나.”
수오 님이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며 침상 위에 쓰러졌다. 방 안에서는, 그의 울림과 내 작은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너를 안는 것인지.”
수오 님이 나를 안는 이유. 당연해.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니까. 결국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닐 걸 서로 알고 있으니까. 소설과 다른 전개는 딱 여기까지 일 거니까. 하지만 그대로 말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불자락 끝을 매만지며 그가 내게 더욱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렸다.
“…수오 님.”
“한 번은 네가 물어봐 주길 바랐어.”
수오 님은 침상에 무릎을 걸치고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가 내 위에 있다. 그의 눈동자는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게 뻗어 있는 콧날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현실임을 말해 주고 있다.
“…수오 님.”
입을 맞추고 싶어요.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수오 님이 바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부드럽고 말캉한 그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녹을 듯 내 입가에 떨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혀를 내밀었다.
마치 이것이 우리의 처음이 아닌 것 마냥.
수오 님의 입술 속으로 들어가 버린 내 혀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의 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혀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집어삼켰다가 다시 굴리고, 마음껏 헤집었다. 그것이 기분이 좋아 좀 더 그에게 몸을 맡기고 기대어 버리고 만다. 수오 님은 그런 내 마음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두 허벅다리를 비비자 부끄럽게도 흐르는 애액의 촉감이 느껴졌다. 거품이 생길 만큼이나 달게도 풍성해져 있었다. 그도 눈치챈 것인지 내 두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여기에서… 열이 나는 모양이구나.”
“흐으읏… 못 참겠어요.”
그의 검지가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질 내벽보다 차가운 온도의 손가락이 곧바로 안쪽까지 다다른다. 그는 능숙하게 내가 느끼는 곳을 찾아 다시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두 개뿐인데도 이미 가득 찬 것 같았다. 하지만 좁은 구멍이 욕심을 부린다. 그의 손가락을 더 먹고 싶다고 안달을 하고 있었다. 이거 봐, 집어삼키고 있어. 수오 님이 낮게 읊조렸다.
“이제 그만 넣어 주세요…. 아……!”
“안 돼.”
평소보다 더 단호한 대답에 전율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 한계였다. 그와 처음으로 접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흥분해 있었다. 나는 그를 가지고 싶다. 언제나 상상만 해오던 그 실물을 내 안에 집어넣고 싶었다. 마구 휘저어서 그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누야.”
“하지만…….”
정말로 참을 수 없어요. 무슨 자신감이 나온 건지 나는 벌떡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물건이 커다랗게 선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더 가까이 댔다. 얼른. 얼른 넣어 줘요. 하지만 귀두 끝만 살짝 스칠 뿐 삽입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안달이 나.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이대론 안 될 것 같다. 나는 성급한 마음으로 그의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읏. 누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물이 나왔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몸이 멈춰지지 않았다. 경멸하겠지. 분명 그럴 거야. 그래도 만지고 싶어.
“하… 흣… 너무…….”
“수오 님…….”
아름다웠다. 그 밖에 다른 수식어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발정은 아름다웠다. 손가락을 타고 그의 음수(淫水)가 흘러나오고 있다. 전부 다 핥아서 맛이 어떠한 지 그에게 속삭여 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허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나를 붙잡아 단단히 옭아맸다.
“윽… 하아. 지금부터 네 밑을 핥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은 그만 내려놔.”
그가 손을 쳐내더니 그대로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바로 아래에서 느껴졌다. 부드럽지만 가파르기도 했다. 발끝이 들리며, 떨렸다. 나는 침상 위로 흐르는 그의 머리카락들을 잡았다. 끝도 없는 정복욕이 욕망을 간질인다. 안 되는데, 원하게 된다. 그를 깔고, 내 소유로 만들고 싶다. 더러운 내 밑을, 그가 혀를 내밀어 정성껏 핥는다.
“하으응…! 아아!”
그의 젖은 혀가 소음순을 간질였다. 혓바닥으로 몇 번이나 핥다가, 이윽고 혀를 세워 질 안에 넣었다. 요란한 물소리가 났다. 혀는 뒤로 빠지다가 다시 안쪽으로 전진하길 반복한다. 나는 천장을 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손안에 잡히는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느끼며, 마음껏 물을 뿜었다. 그의 목울대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나를 희롱한다.
“하아, 하아…. 더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하거라.”
“흐읏… 저는…….”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게걸스럽게 내 앞부분을 집어 삼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이미 그의 고운 입가에 음탕한 물을 잔뜩 엎질러 버렸는데.
“앞이 부족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
“수, 수오 님… 하으읏!”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윽고 그가 혀를 세워 뱀처럼 음핵을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아흐흑!”
그는 추잡한 자세로 내 밑에 엎드려 나의 살갗을 핥는 것으로 모자라, 성감을 짓누르며 애무했다. 육체가 주는 쾌감보다는 정신에서 오는 추한 배덕함이 흘러넘쳤다.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를 질 안에 넣는다. 혀와 손가락이 동시에 내 쾌락을 위해 움직였다.
“수오 님… 아흐으읏… 아앙!”
“하아…. 물이 많구나. 물이 많아서… 끝없이 들어가.”
그의 손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착, 착 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웃으며 손바닥에 묻어나온 애액을 핥아 마셨다. 부끄러웠다.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몸을 씻을 때 밑도 제대로 씻기는 했던 걸까. 온갖 걱정들이 날아다녔지만, 사실은 기뻤다. 그처럼 깨끗한 사람이 나의 몸을 사랑스레 여겨 주는 것만 같아서. 그게 행복했다.
“수오 님…. 하아, 저도, 저도 수오 님 것을…….”
나는 어두운 곳으로 손을 더듬어 그의 물건을 찾았다. 곧이어 뭉툭하게 솟아오른 남근이 손에 잡혔다. 나는 서둘러 그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윽…! 누야.”
혀끝을 단단하게 하여 그의 첨단을 자극하자 그가 움찔하며 신음을 질렀다. 나는 눈을 치켜세우고 그 끝에 나오는 달콤한 물을 빨아 먹었다. 그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감았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의 귀두를 입안에 넣었다.
“크윽.”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나는 목구멍 안까지 그의 것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토기가 올라왔다. 이 이상은 헛구역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역시 무리였던 걸까.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며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때였다.
“하아. 잠깐. 가지 마.”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억지로 나를 끌어당겼다.
“좀 더 안으로… 하아, 옳지…….”
고왔던 손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기 짝이 없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그에게 이끌려갔지만, 구역질이 나와 윗배가 불편했다. 목청 끝까지 그의 귀두가 닿았다.
“우욱… 욱…….”
“그래…. 혀는 내밀고, 숨은 조금 참아라. 하아. 바로 거기다.”
수오 님의 느끼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감각에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와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숨소리가 가빠지는 것을 보면 그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그래서 꾹 참고, 그의 성기를 입 구멍 안까지 받아들였다. 곧이어 수오 님이 내 뒤통수를 잡고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살덩이에 이를 세우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코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웁… 훅… 우욱.”
“울고 있는 것이… 읏, 보기가 좋구나. 역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그의 음모에 떨어져 내렸다. 침도 질질 흘러나와 그의 허벅지를 푹 적시었다. 그의 몸이 나로 덧칠해져 간다. 살결에서 나는 향이 점차 옅어지고 내 냄새로 물들어 갔다. 추잡스럽고, 더러워져 갔다. 열이 난다. 너무 좋아서, 괴로움도 열락이 된다. 서로의 몸이 얼룩덜룩해져 간다.
그가 기뻐하고 있다. 공이 아닌 나로 인해서.
“하아…….”
그가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내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깝게 당겨, 내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혀가 엉망이 되어있는 내 입안을 돌아다닌다. 이윽고 입을 뗐을 때는 그가 수컷의 눈을 하고 날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엎드리거라. 누야.”
나는 망설였다. 엎드리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해. 그러면 이 모든 일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그와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어서.”
“수오 님…. 하지만 저는 수오 님의 얼굴을…….”
그러나 그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너무나도 손쉽게 내 몸을 뒤집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성기가 내 엉덩이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곧바로, 벌어진 틈새 사이로 그가 음경을 밀어 넣었다.
“아흐으윽!”
“너에게는 아직 이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구나.”
살점이 찢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겁고, 아팠다. 하지만 그는 내 팔뚝을 붙잡고 연신 허리를 움직였다. 이상했다. 이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남자를 안에 들여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하으… 아하앙……!”
“하아, 하아. 누야. 누룩.”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딘지 초조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두꺼운 남근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대한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견딜 뿐이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의 물을 모조리 삼키고 싶었다. 내 안에, 바로 이곳 내 자궁에.
“누야. 너는 누구의 것이냐.”
“흐으읏…. 저는, 하으으응!”
수오 님의 것이에요. 수오 님의 것인데. 하지만 차마 입에 내진 못하였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으니까.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안 될 인연이니까. 그러나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의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다.
“으흐으윽!”
“말해다오. 어서.”
“하아, 하으, 저는, 저는…….”
입술이 잘못 움직이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그랬다가는 여기에서 끝이 날 테니까. 굳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오늘, 우리는 끝이 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른 대답을 생각했다. 가장 안전하고, 우리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보통의 관계를.
“저는 수오 님의 시종… 하으, 시종이에요.”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래.”
나는 당황해서 엉덩이를 조금씩 뒤로 내뺐다. 내 대답이 부족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서서히 그의 성기가 멀어져 갔다. 그는 음경이 내 안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내 엉덩이를 붙잡았다.
“그만둬.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지 않으냐.”
“수, 수오 님……?”
그의 목소리가 탁하고 어두웠다. 표정을 확인하려 해도 그림자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그의 끝부분이 다시 소음순을 가르고 질 속으로 들어왔다.
“으흑…! 아흐윽!”
“아프지 않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비소했다. 울음을 터트리는 날 보며 혀로 입술을 쓰는 것도 같았다. 이건 쾌락일까. 그렇지 않으면 해로운 고통에 불과할까. 단단한 기둥이 내벽을 스칠 때마다 따가웠다. 마치 마른 상처를 사정없이 헤집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은 이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전생의 나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이 몸은 단 한 번도 남자의 것을 받아들인 적이 없는 불모지였다.
“누야. 하아, 내 이름을 불러다오. 누야.”
“수… 하읏, 수오 님… 하윽!”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내 어깨를 물었다. 콰득, 하고 이가 살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몸에 있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맹수에게 물린 듯 숨이 끊어질락 말락 가냘픈 숨만 내쉴 수 있었다.
“네 안에 정액을 뿌려선 안 되겠지. 하아.”
갑자기 성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쉬움도 잠시, 그가 내 엉덩이를 잡고 계곡 사이를 넓게 벌렸다. 곧, 항문 근처에서 그의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으윽!”
주르륵, 그의 흔적이 소음순에까지 떨어져 내렸다. 그 따듯하고 이상한 감촉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이걸로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 관계가 끝이 났다.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허무했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차마 생각하기도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에 줄곧 마음속에 묻어 두어야 했던 정교(情交)가 어째서인지 울연했다. 그는 우리가 했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수오 님은, 지금 이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계신 걸까.
얼마 안 가 그가 침상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분명한 걸음으로 다시 욕탕으로 들어갔다. 흐르는 정액은 아직도 내 아래에 바싹 붙어 있는 채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일까. 그가, 나를 남자 손님들처럼 대접해줄 리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가랑이를 벌리고 손을 대봤다. 엉덩이 사이에서 시작된 정액 줄기가 어느새 허벅다리를 타고 질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자조했다. 나의 결말은 오늘로 끝이다. 이 홀로 간직하고 있던 짝사랑도, 질긴 집착도, 욕정도 오늘로 끝이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수오 님을 잊을 수 있을까. 그 깨끗한 얼굴, 나를 올곧게 봐주었던 그 눈빛을 내가 외면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흔적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았다. 결말을 실감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일렀다. 아직,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돌려 다시 1년 전, 그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결말을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다른 결말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남자와 남자가 이어져야 하는 이 세계에서, 나는 하찮은 여자 시종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 * *
다음 날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나 말고도 다른 시종 아이가 들어와 함께 수오 님의 단장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쓸어 넘기며 햇빛에 비친 그의 머리카락 색에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누룩. 집중 안 하니?”
“…죄송합니다.”
맞은편에서 수오 님의 입술에 색 기름을 바르던 시종의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녀는 나를 한껏 째려보다가 이내 수오 님의 뺨에 붉은 꽃씨를 갈아 녹인 것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의 창백했던 두 뺨이 다소 생기를 되찾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혹여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야.”
그때 수오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주 작게 네, 라고 말하였지만, 결코 그와 시선을 맞추는 법은 없었다.
“누룩.”
그러자 그가 한 번 더 단호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빗을 내려놓고 그의 앞에 있는 거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에 가시가 박힌 듯 고통스러웠다. 이러려고, 그를 피했던 것이 아닌데.
“송안. 너는 그만 나가 보아라.”
“…예.”
그녀가 방을 나가자 수오 님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젯밤부터 이상하게 행동하는구나.”
그의 눈이 나를 샅샅이 살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제 여숙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좀처럼 그를 평소같이 대할 수가 없었다. 죄를 지었다는 느낌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와 공인 남자의 사이를 갈라놓았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책 속에서는 분명, 수오 님이 여자와 잤다는 설정이 없었었다. 심지어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조연, 바로 나 같은 시종과 잠자리라니.
“아무것도 아닙니…….”
“어제 내가 너를 차갑게 대한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오 님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제 잠시 서운함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말을 했던 시점에서부터 나는 그와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게 말하자면, 상관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어제는… 내가 잘못하였다. 그러니 마음을 풀거라.”
“수오 님……?”
나는 멍하니 그가 내뱉은 말을 되감았다. 수오 님이 나같이 하찮은 것에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다. 어제와는 다른 의미의 정적이 머릿속에서 난잡하게 돌아다녔다.
“내가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어. 조금… 치사한 마음을 품고 말았구나.”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어떻게든 내 얼굴을 마주 보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처음 보는 그의 초조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의 미간을 보자 그의 입매가 누그러졌다.
“누야. 이제 단 며칠뿐이다. 그 며칠만 지나면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행복… 이라니, 무슨 말씀을…….”
“부디 기다려다오.”
수오 님이 잡은 내 손을 그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뛰고 있었다. 손끝에서 울리는 내 맥박의 박자와 분명 똑같이. 그의 심장이 나로 인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 수오 님…….”
“다음번에는 내가 말하마. 네가 말하도록 만들지 않아. 다시는.”
그의 입술이 내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가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이건 꿈일까. 정말 현실이 맞는 걸까.
“그러니 며칠만 더 기다려다오. 누야.”
그가 눈을 감고 내 손에 남은 온기에 기대었다. 그의 차가운 귀가 내 손 안에서 서서히 제 온도를 되찾아 간다. 거울 앞에 두 남녀가 서 있었다. 수오 님과 나였다.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도, 그가 내게 한 달콤한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꾹 다문다. 그에게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그 며칠이라는 것이, 과연 계속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다음은 앞으로 없는데.
나의 행복은 그일지 몰라도. 수오 님. 당신의 행복은…, 공인 그 남자에게 있는데.
* * *
수오 님의 치장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소설 속에서의 묘사와 똑같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를 보자니 새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이 바로 그가 공을 만나는 날…….
“얘, 누룩. 주인님께 가서 미약을 가져오너라.”
나는 연배가 있는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 오늘은 미약을 쓰시는구나. 소설 속에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었는지 기억은 없었지만, 수오 님은 공인 그 남자를 만난 첫날부터 쾌락에 빠져들었었다. 그렇다면 그건 미약 때문이었던 걸까.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단념했다. 어차피 그는 공을 사랑하게 된다. 그 첫정이 미약 때문이든, 아니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화향관을 나서 주인님이 계신 본관에 다다르자 처음 보는 남자들이 보였다. 손님인 건지 아니면 주인님을 보러 온 타향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처음 보는 이방인에 이질감을 느꼈다. 지난 1년간 내가 봐왔던 것이라고는 이곳 마을 사람들, 혹은 근처 마을에서 온 자들이었으니까.
“이곳이라고.”
“그렇습니다.”
“여자처럼 비실비실한 것들만 있군.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별할 수가 없겠는데.”
“하하. 오늘 특별히 준비한 아이는 그렇지만도 않을 것입니다.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부율 님.”
그 자리에서, 나는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부율. 그 남자였다. 나도 모르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소설 속 묘사보다 풍부한 색채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그 앞에 굽실거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짐승 같은 눈초리가 나를 좇아왔다.
아, 방금. 눈이 마주쳤다.
“저 아이는?”
“네?”
남자의 긴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갑자기 무거워진 공기가 내 어깨를 바닥까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술에 찌든 사람들의 소리도, 화향관에서 나는 음색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 남자의 꺼림칙한 시선만이 내 안에 남았다.
“아아… 여긴 시종이 모두 여자입니다. 손님들이 시종마저 탐을 내면 하극상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공의 앞에 있던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엇이 그리 웃긴 지 이해할 수 없다. 부율, 저 남자도 나와 같이 무표정으로 줄곧 나를 살폈다. 한 발짝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놀랍군.”
“비단 이 가게뿐만이 아닙니다. 옆 가게도 시종들이 몽땅 여…….”
옆에 있는 남자를 제쳐 두고 그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그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그가 내 코앞에 있다. 나는 그의 발끝을 쳐다봤다. 짙은 감청색의 머리카락. 호박빛 눈동자. 은빛 자수가 둘린 품이 넉넉한 심의(深衣). 발목을 덮는 청색 가죽신.
남자를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아까 스치듯 본 그 볼품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건 완벽히 소설 속의 묘사와 일치했다. 처음 그가 수를 맞이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고개를 들어라.”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조금씩 뒤로 빠르게 걸어갔다. 지금 공인 이 남자를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의 두 사람 모습이 밤새 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 같았기 때문에.
“저, 저는 시종일 뿐으로 송구하오나…….”
“고개를 들라 하지 않았는가.”
그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앞길로 뛰어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헉, 헉…….”
어느 정도 그와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뒤를 돌아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만큼 뛰어온 건지 등불 빛이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나는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남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위, 무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샛노란 조명이 밝혀졌다. 조연은 이제 그만, 무대에서 내려갈 시간이었다.
* * *
“왜 이렇게 늦게 와!”
“죄… 죄송합니다.”
시종장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절로 허리가 굽어진다. 나는 최대한 수오 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야 했다. 이윽고 몇 차례 더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바깥 마루에 스러지듯 앉아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공이 이 세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수오 님의 연인이 될 남자가 내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왜 나를 붙잡으려고 한 걸까. 소설 속 관찰자처럼 있던 자신의 처지를 들킨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다. 설마, 말도 안 된다. 남자가 나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시간은 어느덧 술시(戌時)였다.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전개대로라면, 남자는 가게 주인님과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 있어야 한다. 어차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아침이 오길 기다릴 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발목을 비틀어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딜 그리 바삐 도망가나 했더니, 이곳이었나 보군.”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그만 발목이 삐끗해 흙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수오 님 방 안에 있던 시종장이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나는 땅을 짚어 간신히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숨소리 하나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송구합…….”
“부율 님.”
시종장이 급하게 내 말을 끊고 남자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슬며시 뒤를 돌아보며 나를 째렸다. 나도 허겁지겁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아이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부율 님을 모실 수오 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남자의 칼 같은 물음에 시종장이 다시 허리를 내리며 대답을 고했다.
“오늘 밤 뒷정리를 도울 여종이옵니다. 혹여 여부가 있으시다면 다른 시종을 불러들이겠습니다.”
남자는 화향관을 드나드는 한량 중에서도 거물의 손님이었다. 그렇기에 술상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빈 잔을 채워 넣을 여종이 필요했고, 화향관 중에서도 특별히 솜씨가 좋은 그녀가 모시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들은 남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이내 그의 입에서부터 확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물러가라. 오늘 밤은 이 아이로 하겠다.”
“송구하오나, 이 아이라고 하시면…….”
“저 아이다.”
남자의 손이 다시 나를 가리켰다. 나는 움찔하고 시종장을 쳐다봤다. 그녀는 낭패 짙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저 아이는… 아직 들어온 지 1년도 채 안 된…….”
“술잔만 채우면 되는 것을, 뭐 그리 까다롭게 굴지?”
“죄, 죄송합니다.”
시종장이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흙먼지가 묻은 천 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마 나보고 오늘 밤 한 방에 들라는 이야기일까. 이렇게 되면 제 발에 제가 걸린 꼴이었다. 하지만 시종장의 눈치에 못 이긴 나는 체념하고 다시 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오 님이 계신 방문을 몇 차례 두들기다가 남자에게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남자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신을 벗고 방 안으로 들었다. 나는 열린 문 사이에서 잠시 주춤하다 시종장을 바라봤다. 그녀가 뭐 하는 짓이냐고, 어서 들어가라며 무언으로 내게 뻐끔거린다. 하는 수없이 축 처진 어깨로 문지방을 넘었다.
“오늘 밤, 부율 님을 모시게 된 수오라 하…….”
수오 님이 남자의 등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하곤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후다닥 방 안 구석으로 들어가 머리를 바닥 아래로 떨어뜨렸다.
“네가 왜…….”
수오 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그런 수오 님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소리가 나도록 털썩 자리에 앉았다.
“내가 들어오라 했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다른 여종이 모시는 것으로 알아 놀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으냐.”
“예. 죄송합니다.”
수오 님이 남자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공기가 답답했다. 술 냄새로도 지워지지 않는 축축한 미약의 향이 괴로웠다. 역시 수오 님은 벌써 미약을… 드신 걸까.
“한 잔 따라 보아라.”
“예.”
술병을 잡은 수오 님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어서, 이 방을 나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수오 님에게 받은 술을 한 모금에 전부 들이키더니 시선을 옮겼다. 그 섬뜩한 눈빛의 끝에 내가 걸려 있었다.
“너.”
남자의 부름에 어깨가 흠칫거렸다. 수오 님 역시 술병을 내려놓으며 남자의 시선 끝에 있는 나를 본다. 그의 눈이 나를 불안하게 좇고 있다.
“넌 나를 이미 알고 있지.”
남자를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던 눈이 본능적으로 위로 움직였다. 그제야 마주친 두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남자의 입가가 슥 올라간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 눈, 나를 알고 있는 눈이다.”
나는 남자를 조용히 응시했다. 호박빛의 강인한 눈매가 흡사 호랑이와도 비슷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뒷덜미가 떨릴 만큼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뒤꽁무니를 빼고 줄행랑을 치고 싶었다. 남자의 시선만으로도 벌거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남자는 도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손바닥에 땀이 차 두 손을 엉키게 잡아도 자꾸만 미끄러졌다. 나는 숨도 내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부율 님. 저 아이는…….”
얄팍한 침묵을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닌 수오 님이었다. 하지만 수오 님의 개입에도 남자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강하게, 나를 죄어들어 왔다.
“말해 보아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부율 님. 왜 그러십니까. 저 아이는 시종일 뿐입니다. 부율 님 상대는 제가…….”
“입 다물라.”
방 안이 다시 적막해졌다. 남자가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흔들리고 있는 등불을 쳐다봤다. 남자는 이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검은 그림자가 뇌리에 깊이 박힌다.
…설마 내가 그의 등장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남자의 발언은 위험한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어물쩍거리며 남자의 재촉을 회피했다. 그러자 그가 다른 말들을 내게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물음들. 소설 속 전개와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들을.
“이름은 무엇이냐.”
나는 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다 소맷자락에 이끼처럼 흙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안도한다. 내가 이곳에서 시종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누룩이옵니다.”
“나이는.”
“스물입니다.”
“그래. 남자 경험은?”
술술 혀를 움직이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그러다, 혀가 씹혀 아픔을 꾹 억눌러야만 했다.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 나를 얌전히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어서 말하라.”
“…….”
나는 입술을 물어 대답을 참았다.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의 처음은, 앞에 있는 수오 님이었기에 함부로 입 밖에 내는 짓 따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애써 두 손을 모았다.
“없습니다.”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남자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내 대답은 정답이었을까, 혹은 실수였을까. 불안한 감정이 샘솟았다.
“좋다. 누룩. 옷을 벗어 보아라.”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몰려왔다. 내가 지금 들은 소리가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때, 수오 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구기며 수오 님을 흘겼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벗겠습니다. 오늘 밤 부율 님을 상대하는 것은 저 아이가 아니라 저이지 않습니까.”
수오 님이 급해진 손으로 걸쳐진 덧옷들을 전부 벗어냈다. 사락하는 비단의 청청한 소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와 함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혹시 어젯밤 그의 몸에 흔적을 남긴 것은 아닐까. 눈동자들이 어지러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편, 그런 내 시선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아까부터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저 남자였다. 남자의 두 눈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가늘어졌다.
“…그런 거였군.”
남자의 눈이 수오 님의 위부터 아래를 샅샅이 훑는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감흥이라기보단 물건을 측정하는 상인의 안목 같은 것이었다. 뒤늦게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어딘가 저 남자는 소설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잘못된 방향으로.
“그래. 다음은 뭐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수오 님은 다음 말을 내뱉기도 전에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몹시 불안해 보였다. 마치 소중한 걸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애처롭게 보였다. 나는 그런 수오 님을 멍하게 바라만 봤다. 그는 이제 남자의 것이 된다.
당장이라도 이 방 밖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남자가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남자의 눈빛이 다시 빛났다.
“어디 입맞춤이라도 해보아라.”
남자의 말에 수오 님이 고개를 내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아야 했다. 그 이후에 들린 소리는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추잡한 소리였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1초가 평생과도 같이 느껴졌다. 더는 두 사람이 소리가 나지 않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남자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쳐야만 했다. 저 남자는, 설마 입을 맞추는 중에도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나를 짓눌리듯 응시했다.
“…아.”
눈물이 나왔다. 1년 동안 고이 버텨 왔던 인내심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사랑해야 할 운명인 것을. 나 따위는 끼어들 자리도 없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고 뿌예진 시야 속에서 수오 님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 날 보고 있다. 그러나 눈물 때문에 도통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오너라.”
남자의 숨이 가빠졌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색정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음성이었다. 수오 님은 그에게 더 가깝게 밀착했다. 하지만 이내 남자에 의해 밀쳐졌다.
“아니. 누룩. 너 말이다.”
나는 힘이 빠져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채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저 남자가 무엇을 바라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예상했던, 짜여진 극본 속에서 나는 두 사람에게 있어 조연에 불과하니까. 나는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벗거라.”
…뭐?
“제발. 부율 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다 할 수 있……!”
“닥쳐.”
나는 놀라서 남자를 쳐다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 때부터 격정에 불타오르는 사이였다. 남자가 내 놀란 토끼 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마치 제 손아귀에 놓인 새끼 강아지를 대하는 것처럼 미소했다.
“아까처럼 울어 보아라.”
“…네?”
“더 울어 봐.”
“그것이 무슨…….”
내가 당황해할수록 남자는 즐거워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자 하는 것일까. 수치를 느낄 틈도 없이 남자가 가슴을 덮쳐왔다. 남자의 거친 손이 얄팍한 천 조각을 헤집는다. 이윽고 젖가슴이 찬 공기에 맞닿았다. 남자의 시선이 뾰족 솟은 젖꼭지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그, 그만……!”
“제법 먹음직해 보이는군.”
남자가 한 손 가득 내 젖을 움켜쥐며 음탕한 미소를 흘린다. 나는 남자의 커다란 손에 흔들거리는 젖가슴을 보며 생각했다. 남자의 손이 닿아 있는 곳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구나.”
“으응……!”
그 순간, 남자가 내 젖살을 강하게 쥐면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남자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얹었다.
“여기. 더러운 쥐새끼가 있는 모양이야.”
“으흑!”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가라앉은 그때, 극심한 통증이 목 언저리를 짓눌렀다. 동시에 선명하게 붉은 핏물이 유두까지 흘러내렸다. 남자가 내 목덜미를 물었다.
“괜찮으냐, 누야!”
왼쪽 귓가에서 수오 님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오 님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멍한 눈길로 남자를 바라봤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밤을 보낼 목적이 아니셨다면 다른 곳으로……!”
“누가 그럴 목적이 아니라고 했지?”
“…예?”
수오 님의 두 눈빛이 흔들린다.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잔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공기가 위태롭게 가라앉았다.
“방해하지 말아라. 입맞춤한 화대는 네 녀석 앞으로 넉넉히 달아 줄 테니.”
“무슨 말씀을 하는……!”
수오 님이 필사적으로 남자의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애초에 몸의 쓰임이 다른 두 사람이 비등한 힘을 가질 리가 없었다. 남자의 반동에 수오 님이 중심을 잃고 뒤로 무너졌다. 다시, 남자의 손이 내 몸을 기어들어 왔다. 남자는 기어코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미소했다,
“누룩.”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말투에 붙잡힌 골반이 움찔 뛰어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도 널 알고 있어.”
“무, 무슨…….”
처음 듣는 대사에 그의 손이 점점 더 내 허벅다리 안쪽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뜨겁고 낯선 체온이 속곳 안으로 느껴졌다. 굵은 손가락이 어느새 산만한 음모를 헤집어 지나다녔다. 남자가 탄성 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살짝씩 보이는 내 젖꼭지를 줄곧 쳐다봤다.
“하아. 여기, 미약을 사용한다고 했었지.”
남자가 옆에 있는 수오 님을 흘깃 보며 확신 어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갑갑한 죄악감이 척추를 노리는 것 같았다.
“멀뚱히 보지만 말고 가져와. 이 아일 아프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부탁입니다. 그만두십시오.”
질끈 문 입술에서 살점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아래에 깔려 다리를 벌리고 있는 나를, 수오 님이 거칠게 쳐다본다. 두 남자의 시선이 팽배하게 맞서고 있었다.
“내 말 한마디면 널 이곳에서 내쫓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당신.”
남자가 수오 님의 낮은 목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룩. 네가 선택해.”
“…그, 그만 하…….”
“네 주인이 널 아끼다 화대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지.”
허공에서 말이 멈추었다. 남자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적중했다는 듯 입매를 올렸다.
“아니면, 네가 주인 대신 나를 받아들일지.”
다음 순간, 남자가 급하게 입술부터 부딪쳐 왔다. 아랫입술이 남자에 의해 진득하게 부풀어 오른다. 끈적한 타액이 생각보다 달콤해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눈앞에서, 전혀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하고 있다. 싫은 감정이 울컥 솟구치다가도, 수오 님을 이 남자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아… 대답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조금 기대를 했던 걸지도 몰라. 그가 이 상황을 말려주기를. 하지만 수오 님은 주먹을 질끈 쥐고, 한없이 약해져 있는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수오 님에게 건넬 예정이었던 미약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런 이기적인 것뿐이었다.
“…안아 주세요. 저를… 수오 님 대신으로…….”
“잠깐! 누야. 제발 그……!”
수오 님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남자가 단숨에 내 다리를 벌리고 내 속곳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미약을 자신의 손가락에 쏟았다.
“곧 내게 안기고 싶어서 안달하게 될 거다.”
“무슨… 아흣!”
미약이 줄줄 흘러내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단숨에 내 안을 찔러 들어왔다. 순식간에 안쪽까지 남자의 가운뎃손가락이 닿았다. 남자는 속살 속에서 손가락을 펴며 부피감을 늘려갔다.
“힘 빼. 강제로 넓혀지기 싫으면.”
“하, 으읏……!”
남자가 작정했다는 듯 다른 한 손으로 내 아랫배를 눌렀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이 차올랐다. 나는 남자의 어깨에 매달리며 울음을 쏟아냈다.
“뺄게요. 뺄 테니까 제발……!”
“혀 내밀어.”
남자의 명령에 나는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두툼한 입술을 한껏 벌려 가늘게 떨고 있는 내 혀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뜨거웠다.
“하으… 아으읍!”
“하아. 하아. 다리 더 벌려. 그래. 그렇게.”
남자의 말대로 다리를 벌리자, 발가락 근처에서 수오 님이 입은 얇은 비단 자락이 느껴졌다.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고 있다. 남자의 아래에 깔려 개구리처럼 형편없이 다리를 벌리며, 손가락이 처넣어지고 있는 이 모습을.
“으흑… 아흣……!”
“여기 안쪽에 작은 돌기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여길 만져주니 물이 질질 나오는데.”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수오 님 쪽에서 아주 작은 미동이 느껴졌다. 나는 아주 정신없는 틈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수오 님 쪽을 쳐다봤다.
“…….”
수오 님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공포에 질려, 그 눈동자를 바라봤다.
“…….”
“…….”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눈을 감고, 그 눈동자를 피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처음 보는 그의 겁에 질린 표정.
그건 아끼는 것을 잃을까 봐, 처참히 무너져 가는 눈빛이었다.
“여기에 집중하거라.”
그때였다. 남자가 다시 내 젖가슴을 사납게 쥐기 시작한 것은.
“아흐윽!”
“지금 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네 주인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명심해.”
남자가 성난 얼굴로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곤 조급하게 입을 벌려 내 젖꼭지를 물었다. 온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저릿했다. 남자의 이가 거칠게 내 정점을 물어뜯었다. 나는 붉게 부어오른 봉오리를 보고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래로 손 뻗어서 자지를 쥐어 보아라.”
“흐읏…….”
싫었다. 하지만 내게 이 이상 거부를 기대할 희망이 있을까.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잔뜩 솟아오른 기둥을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남자의 핏줄이 박동했다. 남자는 내가 잡기만 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자 괴로운 얼굴로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읏…. 위아래로 세게 움직여.”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조심스레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봤지만, 남자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제멋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네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파정할지.”
“으흑. 제, 제발…….”
손가락 틈 사이로 남자의 끈적한 흔적이 흘렀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귀를 닫아 버리고 싶었다. 남자는 숨을 길게 내쉬며 내 손바닥에 귀두를 문질렀다. 남자의 요도 구멍 밖으로 눅눅한 물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러다 뚝뚝, 내 허벅지 안쪽까지 떨어져 내렸다.
“하아, 뒤 돌아. 누룩.”
남자의 성기는 그렇게 몇 번을 더 내 손 안에서 움직이다, 이내 멀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떤 말을 뱉고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했다.
“네 주인이 볼 수 있도록 어서.”
“흡… 아, 흣.”
남자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쥔다. 그리곤 순식간에 내 몸을 뒤로 돌이켜 세웠다. 어느새 눈앞에 수오 님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렇게 하면 덜렁이는 네 가슴도 내 손아귀에 가득 들어오지 않겠느냐.”
남자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부푼 성기가 내 엉덩이 근처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흐느꼈다. 눈을 뜨면 반드시 수오 님이 앞에 계실 테니까. 그 처음 보는 무서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게 될 것이니까.
“하아…. 보지 살 근처가 뜨거워. 충분히 울려줄 테니 안심하거라.”
“…아, 아흑!”
남자의 굵은 끝부분이 충혈된 살점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두꺼운 것일까. 나는 끝없는 아픔에 힘을 풀기 위해 허리를 낮췄다. 그러자 남자가 내 젖을 다시 바락 쥐어 든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대로 남자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으흐윽!”
“쉬이. 그렇게 엎드려서 받는 것도 견디는 방법의 하나다.”
남자는 내 엉덩이만을 높이 들어 올린 채 다시 입구에서 성기를 문질렀다. 곧 남자의 귀두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구원을 바랐다.
“아… 으으……!”
“…….”
다시 수오 님의 비단옷이 손가락에 걸린다. 닿아선 안 될 선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허겁지겁 그 끝을 손에 넣는다. 동시에, 남자의 성기가 전부 질 안으로 들어왔다.
“아흐으윽!”
“큭. 내가 먹었던 어떤 보지보다도… 하, 젠장.”
남자가 간헐적으로 숨을 쉬며 내 젖꼭지를 꼬집었다. 괴로운 감정 속에서도 알 수 없는 쾌락이 발가락을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발을 들어 올리며 남자의 기둥을 한껏 조였다.
“가히 최고로구나. 하아.”
“아읏… 아아아……!”
남자의 움직임이 가빠지고 있다. 긴 막대기가 내 안을 사정없이 치대는데도, 나는 아래에 깔려 견뎌내는 것만으로 일관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근처에서 가는 숨이 어지러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수오 님의 호흡이었다.
…누야.
잠깐 스치듯 들린 나를 부르는 목소리. 그것이 수오 님의 목소리라고 눈치챈 것은 잔인하게도, 남자가 내 엉덩이를 있는 힘껏 붙잡았을 때였다.
“네 살점이 내 좆에 끈덕지게 달라붙는구나. 하아…….”
“으흐으응……!”
남자의 엇박자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수오 님도 잊고 바닥을 긁으며 온몸을 떨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미약 때문일까. 더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크흣. 젖가슴도…. 이제껏 봐 온 여인 중에 이렇게 큰 젖은 본 적이 없어…. 이곳이 남색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넌 이미 천한 것이 되고도 남았겠지.”
“하… 아앙……!”
천한 것. 남자의 말에 줄곧 손에 있던 수오 님의 옷자락이 움직였다.
“흐윽. 하으응! 아……!”
남자의 커다란 물건이 내 안을 쑤시듯이 휘돌아다닌다. 남자는 참지 않고 터트리듯 숨을 토해냈고, 그때마다 성기는 고깃덩어리처럼 부피를 더해갔다. 안쪽 주름이 남자의 움직임에 견디지 못하고 전부 다 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조여봐도, 남자의 육중한 것에 의해 자꾸만 입구가 벌어져갔다.
“하아, 이렇게 아프게 박아대는데도 잘 참는군. 옳지. 조금만 더 견디거라.”
“하으으! 제발…! 으흐윽!”
남자는 일부러인 것처럼 내 허리에 자신의 무게를 싣고 한가득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그런 남자를 피하고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앞으로 기어나가게 됐다. 어느새 손에 잡히는 것은 수오 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그의 손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수오 님의 손가락이, 한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수오 님이 그런 내 손목을 한꺼번에 붙잡는다. 남자는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흑…! 수……!”
수오 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처참한 얼굴을 하고는, 다른 남자의 좆을 받아내면서도,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수오 님의 얼굴을 찾는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남자는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거칠게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서 너는…….”
그때, 수오 님의 입술이 움직였다. 방 안을 떠들썩 휘젓는 정사의 소리에 파묻히는 아주 작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순 없었다. 그는 울 것 같은 죄 어린 눈으로, 내게 분노하고 있었다.
“하아, 다시 뒤로 돌아. 누룩.”
남자는 흥분을 겨우 참아내며,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것이 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뒤 돌아.”
남자는 자신의 성기를 내 안에서 한시라도 빼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말라버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내 손목을 꽉 붙들고 있던 수오 님의 손도 스르륵 힘을 잃어갔다.
“고개를 들어.”
“읏…….”
연약한 힘으로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목덜미를 감싸 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예상 밖의 깨끗한 눈동자에 시야가 흔들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남자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금부터 네 안에 내 흔적을 남길 거다. 누룩.”
“그만….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남자의 한계까지 두툼해진 기둥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찔한 감각에 위험하다는 것도 잊고, 남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긴 소설 속일지 몰라도, 내 몸은 진짜였다. 만에 하나,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될 것이다.
“…하아. 화대를 냈으니 그에 응당한 대접은 받아야지 않겠느냐.”
남자의 정직한 대답에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나는 어디까지나 수오 님의 대신이었다. 오늘은 분명 남자와 몸을 섞는 마지막 날일 터. 그는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을 탐하며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임신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어. 소설은, 분명 정해져 있으니까. 그래, 정해진 운명이니까.
“입 벌려.”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입술을 벌렸다. 이윽고 촉촉한 그의 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일순 숨이 막혔다. 하지만 어떤 불평도 내지 못했다. 우리 둘은 그렇게 한참 눈을 감고 사랑하는 연인처럼 입을 맞추었다. 아래쪽은 질척거리는 물소리로 방을 잔뜩 적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응, 하… 응. …윽!”
그때, 갑작스러운 고통에 눈이 떠졌다. 누군가, 내 손목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쥐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지만 남자의 무자비한 허리 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읍… 읏……!”
남자가 거칠게 움직일수록, 내 손목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음탕하게 질 속을 휘젓는 남근의 퍽퍽 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방 안의 공기가 텁텁해져 갔다. 누군가 끔찍하리만큼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으읍… 흣, 그만. 아읍!”
하지만 남자는 그 시선을 알지 못했다. 나의 반항이 여전히 자신에게 향하는 고집이라고 믿는 남자는, 내 허벅다리를 짓누르며 자신의 성기를 처넣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아, 하아. 크흣!”
“우우웁……!”
남자의 기둥에 붙은 혈관들이 그의 박동수에 맞춰 벌떡 뛰었다. 어느새 애액으로 인해 축축해진 남자의 불알은 내 엉덩이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 상태에서 좌우로 성기를 움직이며 내 입술을 끝까지 탐했다.
“하으응…! 아, 흐으윽!”
고통에 예민해진 피부들이 쾌락에 들뜨기 시작했다. 남자의 거근 때문이 아니었다. 내 손목을, 죽을힘을 다해 억누르고 짓이기고 있는 수오 님의 커다란 손 때문이었다. 나의 몸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흐윽! 누룩. 네 보지 안에 싸주마. 크윽!”
“흐으으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뜨거운 정액이 안쪽 속살을 범해 들어온다. 나는 가벼운 절정에 달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남자는 내 몸 위에 쓰러져 나를 한가득 끌어안았다. 마치 정사가 끝난 뒤 사랑을 속삭이는 지아비처럼.
한편 어느새 손목은 자유로워져 있었다. 나는 눈을 떠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 손자국이 팔목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누룩.”
수오 님이 나를 부른다. 그 목소리에서는 예전과 같은 상냥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운 여름날의 습기처럼 그의 소리는 답답하게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품은 감정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도,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누룩이라는 아이.”
부율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에 서한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제껏 이곳 화향관을 관리해 오면서 손님의 입에서 창부 외의 이름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한은 붉은 함에서 각설탕을 하나 꺼내어 곧장 입안에 넣고 굴렸다.
…분명,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인데.
“출신이 어디지?”
서한은 잠시 부율을 살폈다. 이름을 말하면서 그의 입꼬리가 무의식중에 올라간 걸 떠올리면, 가게 아이 중 하나일 터인데.
“죄송하지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짚이는 데가 없습니다. 혹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
서한은 부율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정계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오라는 놈의 시종 말이다.”
“시종? 시종이라 하시면… 아……!”
이제야 알겠다는 듯 서한의 턱이 벌어졌다. 그 꾀죄죄한 여자애를 말씀하시는 건가. 설마 남색인 그가 여자의 이름을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한은 자세를 고쳐 잡고 부율 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1년 전 수오가 가게에 들어오면서 함께 데려온 여자애입니다. 출신지도 신분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상하죠.”
화향관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대부분 자신이 일일이 다른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굶주림과 고역에서 허덕이던 여아들을 구세주랍시고 데려와 지금처럼 창부를 모시는 일을 시켰다. 하지만 누룩은 달랐다. 제 발로 가게에 들어왔고, 심지어는 제 주인인 수오와 줄곧 제 짝처럼 붙어 있으니.
“…이곳에 있을 아이가 아니다.”
“네?”
부율의 스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서한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런 서한의 반응에도 부율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다만 더 낮아진 목소리로 어젯밤 마음먹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일삭(一朔) 동안 이곳에 묵을 터이니 방을 마련해 놔.”
“예, 물론이죠. 헌데… 일정에는 지장이 없으신 겁니까?”
서한이 부율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나지막이 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부율은 이곳에 며칠밖에 묵지 않을 예정이었다. 황제의 청이 있어 조만간 황궁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인 그가, 무슨 연유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내 것을 돌려받아야겠거든.”
“부율 님 것이라 하시면…….”
의미심장한 부율의 말에 서한은 그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부율이 심의 속에서 금화를 꺼내어 탁상에 내려놓았다.
“누룩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 돈은 원하는 만큼 넉넉히 줄 테니.”
서한은 자신의 탁상 위에 놓인 금화를 멍하게 바라보다 이내 깨달았다.
…부율 이 남자는 이곳에 남색을 하기 위해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훨씬 더 지독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 * *
믿을 수 없는 관계의 변화에도, 화향관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나는 뜰 먼지가 잔뜩 묻은 볼품없는 내 짚신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 바뀐 걸까.
…어쩌면 이 소설 속은 처음부터 엉망이 아니었을까. 내가 수오 님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그 순간부터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부율…….”
나는 나지막이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남자의 입술. 그 거대했던 성기. 그 남자가 나를 부를 때 내던 저음의 목소리. 어떤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작품 속의 공이 미친 자인 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수오 님의 앞에서 여자를 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나같이 형편없는…….
“누룩.”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수오 님의 등장에도 선뜻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나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꾸물거리며 뒤를 돌았다.
“수오 님…….”
잠깐 올려다본 그의 눈이 날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젯밤 일은… 너에게 신세를 졌구나.”
그가 점점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어째서인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가 그만 멈춰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그럴수록 수오 님은 거친 발걸음으로 더욱 빠르게 내 앞에 설 뿐이었다. 그러다 찰나의 순간, 수오 님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일순 밀려오는 아찔한 고통 속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흑!”
“…….”
수오 님은 내 표정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러다 내 손목에 반점처럼 남은 피멍 자국을 보고는 힘을 풀어주었다.
“방으로 들어와.”
수오 님의 단정적인 말투에도 감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그의 방에 들어가, 그의 단장을 도와 오늘은 그가 공에게 안길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야 하는 처지인 것을.
하지만 나는 도저히…….
“누룩. 따라 들어오거라.”
수오 님은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나는 화향관의 기둥에 시선을 두며, 멍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
그가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읏…….”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창부인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사람.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줄 구세주. 부율이라는 남자는, 수오 님에게 있어 탈출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젯밤 그런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고 말았다.
곧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된다. 열정을 나누게 되고, 어떤 주인공들보다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방해꾼일 뿐이야. 선명해진 시야 속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수오 님의 옆모습이 보였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죄해야 한다. 아니,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의 인연을 지켜주어야 한다.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수오 님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뛰었다. 이윽고 익숙한 문이 보이자, 나는 주저 없이 문고리를 당겼다. 수오 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쪽을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수, 오…님.”
나는 문을 닫고 허전한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수오 님이 그런 내 모습을 소리 없이 눈으로 좇았다.
“어젯밤 일은…….”
나는 소맷자락으로 상처 입은 손목을 숨기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분노가 내 몸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이 새하얘진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
“많이 아팠느냐.”
수오 님의 눈이 내 몸을 천천히 훑는다.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아니요. 괘, 괜찮습니다.”
나는 손목을 뒤로 숨기며 그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 대답에 무언가 불만을 느낀 것인지, 수오 님의 눈썹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조금 들썩이며 움직인 것도 같았다.
“그렇게 커다란 물건을 좁은 구멍으로 받아 내면서도, 아프지 않았다고.”
“…네?”
예상치 못한 물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멀리서 보여야 할 그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수…, 오 님……?”
그가 옅게 입가를 올렸다. 하지만 전혀 미소다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를 어젯밤보다 더 아프게 만들어도 되겠구나.”
“그게 무슨…….”
눈을 크게 떠도 그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내 두 다리에 붙은 몹쓸 천들을 들어 올린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점점 더 내 속살에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을.
“그전에 임신이라도 되면 큰일 날 터이니, 다리를 벌려 보아라.”
“아, 그…….”
나는 버벅거리며 등을 벽에 붙였다. 더는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그제야 그의 손이 내 속곳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로의 시선이 불안하게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사납게 내 두 다리를 벌렸다.
“수, 수오 님……!”
“약을 처방받아 왔다. 몸에 해로운 약이라지만 피임 효과는 확실하다더구나. 어젯밤 그놈 씨도 씻겨 내려가겠지.”
“자, 잠시…! 읏……!”
수오 님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속곳이 벗겨져 갔다. 나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수오 님의 아래에서 형편없이 다리를 벌렸다. 수오 님의 눈이 날카롭게 내 아래를 살폈다. 그러다 이내 그가 품 안에서 정제된 약을 꺼내었다.
“어젠 도망치지 않더구나. 누야.”
그가 벌려진 구멍 안으로 약을 넣으며 미소 지었다.
“나와의 처음은 그리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더니.”
수오 님과의 처음…? 하지만 우리의 처음은 분명…….
“하윽!”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혼란스럽기만 한데, 기다란 손가락이 질 속을 무자비하게 휘저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약이 내벽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작정한 사람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반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나를 옭아매었다.
“도중에 울며 그만둬 달라고, 내 이름을 불러 줄 줄 알았다.”
“으흑…! 수오 님……!”
“설마 안아달라 하며 그놈을 위해 구멍을 조일 줄은 몰랐지.”
가장 안쪽까지 약이 넣어진다. 수오 님은 미소 지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그놈 애는 배지 않아도 되겠구나. 누야.”
“흐으읏……!”
“아아. 그리고…….”
수오 님이 질 밖으로 손을 내뺀다. 마른 곳을 무리하게 저은 그의 손가락은 애액 하나 없이 건조한 상태였다. 그는 내 허벅다리를 어젯밤 그 남자처럼 강하게 쥐며, 나를 위에서 내려다봤다.
“이걸로 네 안에 정액을 싸질러도 당분간 괜찮겠지.”
“수, 수, 수……”
수오 님. 그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맞는 걸까.
“참아라. 네가 어제 나 대신 그 남자를 품었으니….”
“아……!”
두툼하게 일어난 남자의 성기가 음모에 닿았다. 옷 위였지만, 굵은 형태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그의 것이 발딱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수오 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붉었다.
“나는 너를 품을 수밖에.”
“아윽!”
그가 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포를 헤집는다. 얇은 천 안에는 속곳도 입지 않는 그의 성기가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갈라진 계곡 안으로 발기한 성체를 집어넣었다.
“하아…….”
그의 몸이 일순 떨린다. 추위에 있던 자지가 점점 뜨거워진다. 그는 그 촉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내 지금껏 여자는 너밖에 품어본 적이 없지만.”
“아아응……!”
강직한 남근이 보지 안을 사정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가장 안쪽 살점에서 성기를 좌우로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큿. 과연 그 남자 말대로구나. 물 없는 보지도 이렇게 맛있을 줄은. 하.”
“흐윽! 아파… 아파요, 수오 님!”
그의 감탄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을 것인데도, 무서워서 자꾸만 엉덩이가 뒤로 움직였다. 수오 님은 그 작은 움직임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 엉덩이를 붙잡았다.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주제에 어딜 도망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느냐.”
“흑, 제발…. 어젯밤 일은 잘못했어요. 흑, 아흑……!”
단 하루의 일이었음에도, 그의 남자를 품었던 죄. 그러면서도 수오 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 복잡한 감정이 뒤죽박죽 설켜 또다시 커다란 혐오감을 만들어 냈다. 나는 내가 싫었다. 수오 님에게 억지로 범해지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그가 아닌 내 몸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틀렸다. 너는 어떤 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아으으으……!”
그의 것이 얼마나 긴 것인지, 귀두가 아직도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자궁에 닿아 내장이 전부 파열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들 정도로 거칠었다.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 내 가슴에 닿았다. 그의 눈썹이 분하다는 듯 올라갔다. 이윽고 그가 내 옷 저고리를 매몰차게 뜯어 벗겼다.
“잘못은 그놈이 하지 않았느냐. 너를 내 앞에서 멋대로 유린했지.”
공기에 드러난 젖가슴이 그의 손에 의해 흔들거린다. 그는 어젯밤 남자가 문 흔적이 있는 젖을 내려다보며 섬찟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왜… 그놈이랑 할 때 추잡한 물소리가 들렸을까. 설마 겁탈을 당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누야.”
그때, 수오 님이 내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얼마나 세게 잡은 것인지 살점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수오 님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 두 젖가슴을 다시 한번 짓눌리며 잡아당겼다.
“여기에 방울이라도 달아야 할 것 같구나.”
“흐으아악……!”
“그래야 네 주인은 나밖에 없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알 것 아니냐.”
그는 젖살에 긴 손톱을 박아 넣으며 있는 힘껏 내 가슴을 주물렀다. 그의 두 손아귀에서 젖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펑퍼짐하게 퍼지길 반복한다. 나는 두 눈으로 일그러져 가는 가슴을 확인하며 흐느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수오 님……!”
“무엇을 말이냐.”
멈춰 있던 허리 짓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다시 내 젖꼭지를 죽죽 잡아당겼다.
“흐윽! 아으응…! 다시는, 흑, 다시는 부율 님에게 안기지 않……!”
하지만 내 사죄의 말은 얼마 가지 못하고 수오 님의 손에 의해 멈추고 말았다.
“입 다물 거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내 입과 코를 전부 가렸다. 그의 손에서 나는 음란한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수오 님은 내가 기절 직전이 돼서야 손바닥을 치워 주었다.
“하아. 누룩. 다리 더 넓게 벌려.”
“흐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미 젖은 붉게 부을 대로 부어 있었고, 음부도 마찬가지였다. 아픔에 호소해도 수오 님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사죄할 뿐이었다. 이제 어떤 죄를 씻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에게 매달려 빌었다.
“보지 안이 좁아도 너무 좁구나. 금방이라도 내보낼 것 같지 않으냐.”
“하으으앙…! 아아흑……!”
수오 님이 신경질적으로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런 그는 무서웠다. 하지만 수오 님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고 있노라면, 단 착각에 빠져 버릴 것 같았다.
마치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래서 나를 품고 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에.
“하아. 하아. 점점 보지가 질척해지고 있구나. 음란하기 짝이 없어.”
“아아으응…! 하아, 수오, 수오 님……!”
듣기에도 민망한 추삽질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가 나의 교성에 허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 내 허리가 바닥에 쓸리고 있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자지를 내리찧었다.
“크흑!”
“하아아아앙!”
온몸이 너덜너덜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몸이 그에게 귀속된 것처럼 파들파들 흔들거렸다. 수오 님은 내 허벅다리를 꽉 쥔 채로 과격하게 성기를 밀어붙였다. 점점, 아픔보다는 알 수 없는 쾌락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에게 소유되고 있다는 알싸한 기쁨이 무의식을 지배해 가기 시작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네 안에 씨물을 쏟아줄 것이다. 누룩. 하아.”
“으흐으윽. 아흐아앙……!”
나도 모르게 보지를 조이며 그의 물건을 받아들였다. 그의 정액을 가지고 싶었다. 수오 님이 두려웠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원하고 있었다. 수오 님은 내 엉덩이가 바들바들 떨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창부인 나보다 더 창녀 같구나.”
“으흑! 아니에요. 저는 그저… 수오 님이, 아흐으으윽!”
“어깻죽지에 다리를 올리거라.”
수오 님은 한계에 다다른 얼굴로 내 젖을 튕기며 명령했다. 나는 그 말에 거부할 생각도 없이 허겁지겁 그의 어깨에 다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며 더 깊은 곳까지 첨단을 밀어 넣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장 깊은 곳에 내주마.”
“아……!”
짧은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수오 님이 허리를 부딪쳐 올 때마다 마룻바닥까지 내려온 등이 괴로웠지만, 멈춰 달라고 소리칠 수는 없었다. 그가 나를 차갑게 대하는 지금에도, 나는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의 기둥에 붙어 있는 그 울퉁불퉁한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의 귀두는 몇 번 움찔거리다가 이내 뜨거운 정액을 쏟아냈다.
“크흐윽!”
“하아아, 아흐으응……!”
그렇게 그와 동시에 절정에 다다랐다. 나는 정점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그대로 등허리를 말았다. 하지만 수오 님은 내가 그의 품 안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내 허리를 한 손으로 가득 붙잡는다.
“가지 말거라. 누야.”
어째서 정사가 끝난 순간에도, 그는 나를 붙잡아 주는 걸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아직 배출하지 못한 성욕에 허덕이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더는…….”
“그게 아니야.”
그의 입술이 내가 할 말에 앞서 나를 집어삼켰다.
“으응…….”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의 황홀한 입맞춤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그의 맥박을 느꼈다. 격렬했던 정사 때문인 걸까. 그의 심장이 지금, 미친 듯이 뛰고 있다.
“하아… 누야.”
어느새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수오 님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그의 향기가 내 몸을 적시고 있다.
“다시는 그 남자에게 안기지 말아라.”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일까. 그의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 질투하는 걸까. 수오 님은 대답 없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문밖에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부터는 방에 들어오지 말거라. 절대로.”
“…그러겠습니다. 수오 님.”
대답하면서도 입술에 힘이 없었다. 바닥에 남은 찬기가 씁쓸했다. 방에 들어오지 말라는 수오 님의 말이 마치 나를 거부하는 그의 본심 같아서. 결국, 공을 선택해 버릴 수오 님의 미래 같아서. 나는 쓸린 등을 매만지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율,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도 지금부터 부지런히 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금만 더 참아다오. 아주 조금만 더, 내게 시간을 줘.”
그에게 등을 보인 그 순간, 수오 님이 내 팔목을 붙잡는다. 그건, 전과 달리 거칠기보다 애처롭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난 너를…….”
“수오 님. 오늘은 그분에게 안기시는 건가요…….”
“…뭐?”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서로를 감아주던 두 사람의 손이 풀려나고 말았다.
“저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 사이에서 방해꾼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얼한 통증이 하복부를 강타했지만,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수오 님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내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지친 몸이 마음에까지 들어와 발악하는 것 같았다.
더는 가슴 아프게 짝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배역으로, 단지 성욕을 처리하는 도구로써 이용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왜,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걸까. 나는 무거운 몸으로 수오 님 방에서 나가 마른 바닥을 지그시 밟았다.
형편없는 짚신.
쓸모없는 몸뚱이.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환희도 없는 이 소설 속 삶에서.
이제는 서서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 * *
“누룩.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오늘부터 들어오지 말라 하였습니다.”
수오의 말에 부율의 눈썹이 순식간에 와락 무너졌다. 수오는 남자의 작은 변화를 포착하고는 미약이 담긴 함을 열었다.
“남색은 경험이 없으신가 봅니다.”
“…뭐?”
“저와 했던 입맞춤이 형편이 없기에 물어보는 것뿐입니다.”
부율은 수오의 말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형편이 없다라. 그거야 당연했다. 남자에게 입술을 들이민 것은 수오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모두 누룩과 수오, 두 사람의 관계를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비련의 연인들인지, 아니면 아직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 것인지.
“한번 자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모릅니다. 시험해 보시죠.”
“하하.”
부율은 수오의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과연 자신이 평소 남색을 하는 사내였다면, 반하게 됐었을지도 모른다. 앙칼지면 앙칼질수록, 더 무너뜨리고 싶은 법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굳이 남색을 즐기는 종자가 아니었다.
“네 말대로 시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부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수오의 앞에 서서, 그의 고간을 내려다봤다. 옷 위로도 불뚝한 모양새가 자리 잡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계집애같이 생긴 남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수컷. 그래서 부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오가.
“그래. 어떻게 나를 즐겁게 해줄 계획이었지?”
“…사내들은 다 똑같지요.”
“똑같다?”
“누군가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수오의 입매가 순간적으로 삐뚤어진다. 부율은 그런 수오에게서 일순 기시감을 느꼈다.
“저는 그런 사내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부율 님.”
“…너는 정말.”
부율이 수오의 턱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그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부율이 입술을 열었다.
“거짓말이 능숙한 놈이로구나.”
두 사람의 콧등이 날카롭게 스친다. 수오는 미동조차 없었다. 부율은 그런 수오가 못마땅했다. 피할 줄 알았는데, 제법 끝까지 버티는 놈이었다. 하지만 부율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수오 역시 똑같은 눈으로 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맞추실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오늘 밤을 의미 없이 보내실 생각입니까.”
결국, 먼저 입술을 치운 것은 부율이었다.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과 몸을 섞을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부율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수오를 훑었다. 좋은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 동하지는 않았다. 그가 필요한 몸은 단 한 가지였다.
누룩.
“누룩이라는 아이의 방으로 가겠다.”
“안 됩니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부율이 입가를 무너뜨렸다.
“네가 감히 내게 그리 말해도 될 처지라고 생각하느냐.”
“남색이 아니라, 사실은 여색이라는 걸 들키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부율의 단호했던 표정은 결국 수오의 마지막 말에 부서지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공주와의 결혼을 피하고자 거짓 소문을 지어내고 있다는 것.”
“그 입 다물라.”
수오는 부율의 거친 언동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 중 과연 진정 약점을 쥐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잃을 것이 없는 자신일까. 그렇지 않으면, 잃을 것이 전부인 저 남자일까. 수오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
“밤은 이곳에서 머무시지요. 밖은 아직 춥습니다. 부율 님.”
부율은 저 앞에 있는 문고리를 한참 쳐다보다가, 곧 침상으로 다가갔다. 수오는 이미 포단 근처에 앉아 있었다.
“…어지간히도 미친놈이로구나.”
수오는 부율의 말에 시선을 내리깐다. 그의 눈은 부율이 들어 올린 포단에 가 있었다. 언제나 저 속에서 수오는 낯선 사내들의 신음을 받으며, 출구를 바랐다. 그 꺼림칙한 기억의 정중앙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율은 자신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수오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이, 서서히 그를 잠식해 가고 있다.
“아침이 밝으면 다시 누룩을 찾아갈 것이다.”
부율의 말에 어둠 속에서 수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얼굴의 고운 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흉측한 상처처럼 밤이 그를 집어삼켰다. 부율은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수오는 조용히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누룩을 탐했던 저 입술, 헐떡이던 허리, 누룩의 가슴을 쥐었던 손.
“…….”
그날 밤, 수오의 마음에 또 한 번 잔혹한 것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년 전 그가 저질렀던 죄와 똑같은 무게의 것들이.
* * *
지금쯤 두 사람은 서로를 정신없이 탐하며, 밤을 함께 하고 있을까. 어지러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다. 졸음에 젖은 몸뚱이가 점점 아래로 치닫는데도 불구하고, 끔찍한 상상이 눈을 뜨게 만들었다. 나는 얕은 수면 속에서 다시 악몽을 보기 시작했다. 천장 위에 나뭇가지의 그림자들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위로, 어딘지 익숙한 인영이 떠올랐다.
너는 나를 이미 알고 있지.
남자였다. 그는 그토록 자신 있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보거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나는 남자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그가 그토록 욕망하던 남자를 손에 얻으리라는 것. 남자의 손에서 많은 사람이 상처 입고 다치리라는 것. 그런데도 남자는 행복하리라는 것.
누룩. 나도 널 알고 있어.
남자의 눈빛은, 어딘지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전생에서 공에 대한 수많은 묘사와 대사들을 내리읽어왔지만,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남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걸까.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제발.
남자의 얼굴이 비스듬하게 멀어진다. 옆에서 본 표정이 슬퍼 보였다. 울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젯밤 남자가 내게 그런 말도 했던가.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은,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질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