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사후세계(1권) (1/18)

극락의 BL 소설 1

Chapter 1. 사후세계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졸이며 읽었던 BL 소설이 있다. 어느 동양풍 판타지 세상이었는데, 그곳 사창가에서 일하는 수와 그런 수를 사들이는 공의 사랑 이야기였다. 단순한 소재임에도 내가 끌렸던 이유는 아마 소설 속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창가에서 수가 고생하는 일화들, 공과 사랑을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각종 음모와 오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고 있던 피폐함이 내 마음을 간질였다.

그것은 마치 내 인생의 분위기와도 같았고, 나 자신과도 같았다. 매사 주눅 들어 있고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 축 처진 머리카락, 불쾌한 표정, 그리고 더러워 보이는 눈 그늘. 소설의 문체 하나하나가 그 매스꺼운 풍경을 가리키고 있었고, 수는 반대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소설 속의 수를 싫어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 몸, 심지어는 그 신음까지. 어떻게 너는 그토록 순수하고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사랑받을 수 있는 거지? 도대체 나와 무엇이 다르기에. 역설적이게도 수에 대한 미움이 커질수록 그를 동경하는 마음도 커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게 돼 버렸다.

* * *

“누룩. 수오 님이 찾으신단다.”

“네.”

해가 이미 중천에 떴는데, 나는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 BL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어느덧 1년이었다. 나는 그동안 창남인 수의 시종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눈을 떠보니 BL 소설 속에서 언급도 되지 않았던 시종이 되어 있었다. 미움과 동경.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1년 후 품게 된 것은 그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땀에 절고 푸석하게 붙어 있는 머리카락, 어딘지 음침해 보이는 눈 그늘. 제대로 씻고 치장도 한다면 좀 더 괜찮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곳 사창가에서 여자는 좀처럼 꾸미기 어려웠다.

애초에 남색을 위해 구획된 마을이었다. 따라서 남자의 치장만 인정하고 있다. 여자의 역할은 단 두 가지뿐이다. 남자를 낳기 위한 씨받이가 되거나, 창남의 시종으로서 일생을 바치거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BL 소설의 수였던 수오라는 창부의 시종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싫었다. 그 사람을 싫어했으니까. 더러운 수작과 찝찝한 의혹들이 가득한 소설 속에서 제 혼자만 빛이 나던 수. 그러나, 그 얼굴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되었던가. 일순간에 그 애증은 완전한 사랑이 되어 버렸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모순적인 동물이다. 소설로만 읽었을 때는 주인공에 대한 자격지심과 패배감이 아득하였으나, 그를 눈앞에 둔 순간 그 화려함과 순수함을 소유하고 싶어졌다니.

“누야. 무슨 일 있느냐.”

문밖의 청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수오 님이었다. 내가 꾸물거리는 사이 직접 내 방 앞으로 오신 것이다.

“수오 님. 죄송합니다.”

나는 즉시 문을 당겨 열었다. 그러자 곱디고운 그의 자태가 보였다. 줄곧 방에 있던 내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주름이 졌다.

“누야… 오늘도 얼마 자지 못한 것이더냐…….”

그의 부드러운 손이 내 침침한 눈가에 닿았다. 그는 내가 안쓰럽기라도 한 듯 몇 번이고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뺨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내 처지를 깨닫고 그 손을 조심스럽게 쳐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아니지 않으냐. 넌 어떻게 된 애가 항상 그렇게…….”

그의 말투는 결코 책망이 아니었다. 안타까움에 한숨을 겨우 내쉬는 그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 지난 1년간 불순한 마음을 품어 왔었다. 그러나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훗날 공인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사랑을 받아 만개해야 할 꽃봉오리. 그것이 수오 님이었다.

“수오 님. 시키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는 내 질문에 또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기껏 이토록 걱정돼 와 주었더니 또 공적으로만 대하는구나…….’

1년간 그가 술을 마시며 몇 번이고 내게 진심을 전해 왔던 순간들이 있었다. 이제 그만 님이라 하지 말고 오라버니처럼 대해도 된다며…. 그렇게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곳이 소설 속 세상만 아니었다면, 나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를 수오 오라버니라고, 혹은 수오야, 라며 다정하게.

“…되었다. 다른 종에게 시키겠다.”

수오 님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내 앞에서 등을 돌렸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참 잔인했다. 그가 이렇게 내게서 등을 돌리면 내가 비참해진다는 걸 알면서.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걸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그는 공적으로만 대하는 내 태도가 얄미웠던 것이다.

“수오 님!”

나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따라가 주었다. 사실 거의 반사적이고 습관적인 움직임이었다. 나는 떠나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저 앞에서 살짝 미소 짓는 것 같았다.

“그래. 말해 보아라.”

“…저에게, 저에게 시켜 주세요.”

그는 의도적으로 뜸을 들이다 이내 내게로 몸을 틀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무척 청정하게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역시 너는 내가 없이는 안 되는 것이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일까. 그의 속내를 전부 다 파악하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닷새 후 수도에서 큰 어르신이 오신다고 한다. 내가 그분을 모시게 되었어.”

“네……?”

나는 황망하게 그를 바라봤다. 닷새 후 수도에서 큰 어르신…. 어딘가 낯익은 대사 한 줄에 소름 한 줄기가 쫙 퍼져나갔다. 소설에서 수는 이 말을 사창가의 포주에게 듣는다.

‘닷새 후 수도에서 큰 어르신이 오신다. 특별히 네가 모시게 해두었으니 잘 해보아라. 혹시 아느냐. 네가 마음에 들어 큰 상을 내리실지.’

큰 어르신이라는 것은 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대사가 이루어지고 정확히 5일 후, 두 사람은 처음 대면하게 되고 서로에게 급격히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는 육체뿐이었던 관계가 점점 애틋한 사랑이 된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5일 후면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게 된다. 아니, 빼앗기는 게 아니라…. 수오 님은 이제 나 없이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겠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행복해진다는 대목이 아니었다. 그가 ‘나 없이’ 결말을 맺게 된다는 부분이 내 심장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네게 내 치장을 맡기려고 한다. 오늘 밤부터 내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이 어떠하냐.”

그의 마지막 말이 종이 울리듯 반복해서 내 귓가에 들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이토록 급하게 소설이 전개되고 있다고?

수오 님의 나이는 아직 스물세 살이었다. 그가 남자 주인공을 만나는 것은 스물다섯 살. 적어도 내게 2년이란 시간이 있을 줄만 알았다. 그를 남몰래 연모하고, 그 옆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의 시간이 2년쯤은 남아있을 줄 알았다.

“싫은 것이냐.”

“수오 님…….”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1년간 그 누구에게도 몸치장을 맡기지 않은 수오 님이었다. 그런 분의 목욕 시중을 든다는 것은 분명 신뢰받는다는 의미겠지. 평소라면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몰래 방방 뛰고도 모자랄 경사였다. 하지만 그게 남자 주인공과의 정사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벌써 가슴이 쓰라렸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내 방에서 묵도록 해라.”

“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종과 한방에서 잠을 이룬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남색가인 그이기 때문에, 여자와 한방에서 잔다고 해서 오해를 받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해하는 내 반응을 이미 예상했었는지 수오 님은 뒤이어 말을 이었다.

“목욕 시중에 단장까지 시키려 하는 데 밤중에 돌아가게 할 순 없지. 네가 아니라 다른 시종이라도 그리하였을 것이다.”

“아.”

나는 이해 간 척 짧은 감탄을 뱉었다. 그의 방이 있는 화향관에서 내 방은 꽤 거리가 멀었다. 밤중에 돌아간다면 이곳이 사창가인 이상 취객이 부딪혀 올지도 모를 노릇이었고. 아무리 남색 마을이라 하더라도 여색을 밝히는 자가 없을 거라 보장할 순 없었다. 역시, 그는 너무나 깨끗한 사람. 나 같은 시종의 처지까지 이토록 배려해 주는 것은 그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섬세한 마음에 가슴이 홧홧해졌다.

“알겠습니다. 수오 님. 오늘 밤부터 물건을 챙겨서 화향관으로 가겠습니다.”

“그리하여라.”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그의 입가에 예쁜 곡선이 그려졌고, 이내 몸을 돌려 사용관 밖으로 향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애꿎은 손을 뻗었다. 그는 내 손 안에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마저도 닷새 후면 무너지고 만다.

저릿한 마음에 결국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소설 속 공이 어떤 모습이었더라. 한동안 그 잔혹한 성정과 미친 집착, 광기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소설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수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그 외에 다른 것에는 피도 눈물도 없었던 남자. 하지만 수에게도 자신을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기색이 있으면 여과 없이 미친 기질을 내뿜었다.

한번은 그랬지. 수가 다른 남자의 화대를 받던 날, 공은 이곳에 불을 질렀다. 시커멓게 타 버린 자신의 터전과 자신을 따르던 사용인들을 바라보던 수의 모습을 아마 소설 속에서 이렇게 표현했었던 것 같다.

‘수오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처참해진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욕심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는 걸 막을 수 있진 않았을까. 혹은 조금만 일찍 진심을 고백했더라면…. 하지만 이미 그곳엔 자신이 아껴 마지않았던 것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작가는 수가 바라보고 있었던 그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묘사해주지 않았다. 다만 독자가 추측하기로 화향관이겠지 할 뿐. 그리고 아껴 마지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물건이었을까. 욕심을 부렸다거나, 진심을 고백했다거나 한다는 것은 아마 공에 대한 이야기였겠지. 그런 소설 속 대목을 떠올려보면, 또다시 가슴이 아팠다.

수오 님은 앞으로 공인 그 남자를 그토록 좋아하게 되겠구나. 공에게 좋아한다는 마음을 일찍이 고백했더라면 공이 오해를 하고 불을 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그는 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 공이었다면. 혹은 최소한 내가 BL 소설 속 남자 역할로 태어났었더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단 한 번이라도 그를 품어 볼 수 있는 양반의 역할로 태어났더라면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텐데. 최상의 화대로 그를 품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쾌락을 위해 정성 들여 애무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BL 소설 속 여자로 태어나 버렸다. 그것도 여자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 남색 마을의 여자로.

나는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현실이 보였다. 낡은 벽지, 낡은 가구,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허름한 방. 이것은 반드시 벌이었다. 나는 지금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이다.

이전 생에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가장 큰 벌을.

* * *

이전 생에 대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BL 소설을 제외하곤 냄새뿐이었다. 피비린내가 나던 화장실. 오래 묵은 물이 구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웠다는 것. 변기에는 토사물이 있었지만, 굳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 나는 전생의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왜 자살을 선택했던 건지조차도 모른다.

다만 그때의 느낌이, 굉장히 절박했다는 것 정도만.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난다.

나는 숨을 뱉어 냈다. 과거의 생각은 좋지 않았다. 그게 BL 소설 속 세계관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곳은 소설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

“후우.”

화향관으로 가기 전에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봤다.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면 좋겠는데. 오늘부터 수오 님의 목욕 시중을 들게 되어서 외모가 전보다 훨씬 신경 쓰였다. 그는 분명 아름다운 육체를 하고, 부드러운 피부 결을 하고 있을 텐데, 그에 반해서 나는…….

추악한 열등감에 스스로가 싫어졌다. 거울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얼굴 구석구석을 살펴봤지만 똑같았다. 밤이라서 붓기가 조금 가라앉았다는 것 정도였을까.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몸은 어떨까. 나는 바지를 삐죽 비집고 튀어나온 아랫배를 꼬집어 본다. 수오 님은 뱃살 같은 것 없겠지.

“하아.”

정말 오늘부터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가. 벌써부터 의식이 아찔해져 왔다. 그 긴 밤을 내가 음욕(淫慾)한 생각 없이 버텨낼 수 있을까. 게다가 내 목욕 시중을 받은 그 몸을, 눈앞에 두고서. 나는 이미 상상만으로도 벌써 아래가 젖어 들고 있는데.

“말도 안 돼, 정말.”

더럽다. 추악해. 상상만으로도 반응해버리는 내 몸이 역겨웠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공과 사를 철저히 하는 시종처럼 그를 모신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결코 내 이런 속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꿈에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양심에 찔려 왔다.

어쩌면 그가 지금껏 나를 내치지 않고 이렇게 신뢰하고 있는 것은 전부 이 가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나는 그 몸을 욕정 하지도 않고 매번 딱딱하게 대하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그 근육을 만져 보려고 애쓰는 다른 시종들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거짓으로 응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그의 품 안에서 자지러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런 상상도 앞으로 닷새면 끝이었다. 나는 서랍 상자 속을 응시했다. 남창들만 쓰는 분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몰래 간직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나에겐 용기가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의 줄거리를 바꿀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분을 바르면 얼굴은 좀 더 나아질지 몰라도 그의 마음까지 돌릴 순 없다. 그게 지금 내가 사는 세계였다.

나는 조용히 서랍 상자를 닫았다. 그만두자. 준비는 이것으로 되었다.

발목을 비틀어 밖으로 나갔다. 가슴 한가득 그의 시중을 들기 위한 물건들로 가득했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나를 위한 것은 없었다. 이게 그에게 있어 나의 존재 무게겠지. 그리고 이곳 세계에서 나의 위치고. 새삼스럽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알고 수백 번도 결심해왔을 터인데. 그런데도 수오 님이 나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화향관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의 앞에선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연모하는 감정 뒤로 지독히 드리워져 있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는 곧 타인에 대한 방어 기제를 만들었다. 특히나 수오 님에 한해서만은 나는 그 어떤 때보다 강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하찮은 소망을 품었다.

“수오 님.”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두드리자 경쾌한 소리가 안팎으로 흘러나온다. 나는 이렇게 그의 방문을 매만지는 걸 좋아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내 방문과는 다르게 그의 것은 화려하고 단단했다. 그런 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가끔은 특권같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멋대로 상상하곤 했다. 그가 나를 웃는 얼굴로 반겨주기를, 그리고 그 고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들어오거라.”

밤기운을 머금어 수오 님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 낮과는 또 다른 온도 차이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입술을 짓누르며 동요를 숨기고자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찬 새벽 공기를 대비하기 위해 바닥을 데우기라도 한 것인지 방 안이 후끈했다. 수오 님은 등을 보인 채 자신의 머릿결을 정돈하고 있었다. 보랏빛을 머금은 은발이 그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앉아 노닌다. 나도 모르게 그 광경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누야.”

“…네.”

나는 문을 닫고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나의 모습을 살폈다. 나 역시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어딘가 불만인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나 역시 따라서 눈썹을 움직여 본다. 어미 새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갓 난 새끼처럼.

“밥은? 저녁은 제때 먹고 왔느냐.”

“…아…, 네.”

뜸을 들이고 말았다. 사실은 먹지 않았다. 배급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입에 무언가를 삼킬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가슴이 이따금 아파지고 있으니까.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시종 가슴이 답답했다.

“누야. 너는 정말.”

거울에 비친 그의 표정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그러다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큰 소리를 내고 싶은 걸 참는 듯했다.

“…거짓말이 서툴다. 이리로 와.”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나무 밑동처럼 부동하고 있던 발을 띄웠다. 그리고 발걸음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서랍 대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바로 내게 건넸다.

“먹어라. 지금 당장.”

“예?”

“내 눈앞에서 먹어라. 불안해서 안 되겠다.”

수오 님이 내게 준 것은 흰 쌀밥으로 만들어진 주먹밥이었다. 흰 쌀은 시종이 먹을 수 없는 진귀한 식료였다. 언제나 갈색 콩이 섞인 잡곡만 먹었었는데…. 나는 눈앞에 희고 고운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뭐하느냐. 먹지 않고.”

“아, 네!”

겉면에 있던 얇은 장지(長紙)를 벗기자 금방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냄새가 입안 가득 스며들었다. 수오 님은 이렇게 종종 자신이 식사하고 남은 음식들을 내게 주곤 했다. 그런데 그게 오늘따라 더 맛이 있었다. 먹는 동안 쭉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 때문일까.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 먹었습니다.”

나는 손안에 남은 종이를 동그랗게 말아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하지만 수오 님이 그 주머니를 툭툭 가리켰다. 혹시 더러워 보였던 걸까. 나는 허겁지겁 다시 종이를 꺼냈다.

“이리 다오.”

“네?”

“네 옷이 더러워지지 않느냐. 내가 버릴 테니 이리 다오.”

나는 쭈뼛쭈뼛 장지를 그에게 건넸다. 그가 그것을 자신의 소매 속에 숨긴다. 창부의 방은 이따금 손님의 방이기도 해서 쓰레기통을 거치해 두지 않는다. 밖에 나가 조금 걸어 나가야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이 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수오 님께 쓰레기를 건네다니. 아무리 그가 달라고 했어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누야. 나는 너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

무르팍이 아프도록 바지를 움켜쥐었다. 그의 말에 아까 먹었던 밥이 식도를 타고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그에게 불쾌감만 줄 뿐이야.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누야. 목욕물을 데워다오.”

다행히 수오 님은 그 이상 내게 아픈 말을 찔러 오진 않았다. 다만 또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등지면서 느릿하게 방 한쪽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손님과 창부를 위해 마련된 욕탕이었다. 이미 받아 놓은 물을 데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금방 욕탕에 얕은 수증기가 피워 올랐다. 그 뿌연 연기 속에서, 나는 그제야 눈물을 낼 수 있었다. 뿌옇게 내 얼굴이 묻혀 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금씩 흐느꼈다.

어느덧 물이 데워지자, 나는 소매로 눈가를 닦고 눈물에 젖은 소매를 위로 슥슥 걷어 올렸다. 그가 이걸 보면 내가 목욕물에 젖은 줄만 알겠지.

“수오 님. 받아 놓았습니다.”

내 부름에 그가 문을 열고, 욕탕으로 들어왔다.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살결이 다 비치는 침의(寢衣)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매듭을 지지 않아 끈이 좌우로 늘어져 있었고 그의 나신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평소 마른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 위로 또렷이 복근이 서 있었다. 그의 단단한 장골 밑으로 피부색과 전혀 다른 색깔의 무언가가 보였다. 조금 붉고 거무스름한 것이 흉기처럼 커다랗게 축 늘어져 있었다.

“누야. 벗겨다오.”

그는 내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등을 돌렸다.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고 그의 침의를 받았다. 혹시나 내 음흉한 시선을 들켜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아직 그에게 꾸중은 들려오지 않았다.

수오 님은 천천히 욕통 아래로 허리를 내리고 앉았다. 짧고 기분 좋은 듯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따뜻하구나.”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수오 님은 나무 욕통의 뒷부분에 목을 걸치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그가 피로를 풀고 있는 사이 목욕물에 꽃잎을 갈아 놓은 가루들을 넣었다. 욕탕이 금세 향긋한 꽃 냄새로 가득해졌다.

“달콤하다. 직접 만들었나 보구나.”

“네.”

나는 쑥스러워서 욕통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가 손등을 저을 때마다 수면이 찰랑거렸다. 그 파동이 내가 보고 있는 곳까지 퍼져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목욕하는 것은 수오 님인데, 내 몸이 달아올라 땀이 배어 나왔다.

“이리로 와. 내 몸을 닦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의 몸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못된 생각이 드는데 그의 몸을 직접 만진다면 어떻게 될까. 차마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물며 가져온 짐 중에 있던 목욕 수건을 들었다.

“그… 어디부터 닦아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목욕 시중은 처음이었지.”

“…네.”

“다른 창부들한테도?”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무슨 의도로 하신 질문일까.

내가 이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은 1년 전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누룩이라는 자는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것이 생명에 의해서인지 혹은 소설 속 전개에 의해서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쭉 이곳 사창관의 시종이었다. 적어도 나는 다른 창부의 목욕 시중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 이전엔 어떠했는지 모른다.

“되었다. 어깨부터 씻겨다오.”

내 대답을 기다리다 질리셨는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닭살이 돋아 거칠거칠한 내 피부와는 달리 옥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다음은 여기. 가슴을 닦으면 된다.”

그가 손수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수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과 그의 가슴팍이 맞닿아 있다. 물컹거리는 내 가슴과는 달리 그의 것은 대리석을 만지는 것처럼 단단했다. 수건으로 매만지다 이윽고 분홍빛이 도는 그의 젖꼭지가 만져졌다.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가라앉아 있었던 돌기가 내 손길에 의해 솟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곳을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너무 세게 닦으면…, 쓸려서 아파. 거긴 그만해도 된다.”

“죄, 죄,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내 외침이 욕탕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기세에 되레 놀란 수오 님이 이번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릴 여유도 없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죄송합니다. 그게, 아프게 해서…….”

“…좀 더 밑으로 내려가 보거라.”

“좀 더 밑으로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옷소매를 더 걷어 올린 뒤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갔다. 울퉁불퉁하게 돋아 오른 여러 개의 근육이 만져졌다. 나는 그 윗부분을 조심스레 수건으로 닦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좀 더 아래로 이끌었다. 손이 멈춰진 곳은 상체와 하체를 구분 짓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이었다.

“이, 이곳도 하는…….”

“그래.”

“저, 저는…….”

그럴 수 없어요.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실 어떤 것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잖아. 마음 한편의 추악한 악마가 내게 속삭였다. 그의 고간에 달린 물건을 만지고 싶잖아. 마음껏 괴롭히고, 희롱하고 싶은 거잖아. 너의 흔적을 그에게 남기고 싶잖아. 그의 신음을 듣고 싶잖아.

악마가 그렇게 나를 유혹하고 있는 사이,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손님들에게 보여줄 부분이야. 이곳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손님도 있어. 내가 설마 네게 못 할 짓을 시키겠느냐.”

“…….”

“누야. 너는 내 시종이다.”

“…네.”

“그러니까 나를 위해 해다오.”

그랬지. 나는 그의 시종일 뿐이야. 갑자기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순간은, 공을 만나기 위한 한 과정일 뿐이다. 나는 지금 공에게 사랑받기 위한 몸을 보필하기 위해 이곳에 온 입장이야. 나의 실책이다.

이것은 명백한 욕심이었다. 나는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그는 허리를 들어 욕통에 걸터앉았다. 수면을 해치고 나온 그의 물건에서는 물방울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나는 아까보다 침착한 목소리로 그에게 전했다. 그의 것은 아직 발기하기 전이었다. 말캉한 그것을 부드럽게 쥐면서 다시 한번 내 처지를 깨달았다. 그는 나에게 발정하지 않는다. 비참했다.

“포피를 내리고 안쪽을 닦으면 돼.”

“네.”

그가 말한 대로 물건의 포피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밀어 내렸다. 조금씩 매끄러운 귀두 끝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수오 님의 얼굴을 쳐다봤다.

“먼저 세워야지. 누야.”

“…세우다니. …저는 못 해요.”

이런 초라한 제가 수오 님을 느끼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뱉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럼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지만 말고 얼굴을 보여다오.”

“…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하늘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그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들켰을지도 몰라. 이미 아래 속곳이 엉망으로 젖어 있다는 걸. 무서웠다. 그의 벗은 몸 앞에서 발정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날에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섰구나.”

“네?”

그가 잠시 뒤 자신의 아래를 가리켰다. 당황스러웠다. 그를 바라보느라 만지지도 못했는데. 일단 서둘러 그의 포피를 내렸지만, 사실 마음은 아주 복잡한 채로였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응.”

귀두와 포피 사이 가느다란 틈에 거품을 묻혀 발랐다. 그다음, 욕통에서 물을 길어 조금씩 흘려보냈다. 어느새 거품이 사라지면서 그곳이 깨끗이 닦였다. 나는 자신이 손에 쥔 것이 남자의 성기라는 사실도 잊은 채 일에 몰두했다.

“…이제 되었다. 먼저 가서 방을 정돈하도록 해.”

“네? 하지만 아직 더…….”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어서 나가 보아라.”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목욕 시중은 처음이었지만 적어도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의 몸에 아직 거품을 내지도 않았고 머리카락을 감겨 주지도 못했다. 혹시나 내가 실수라도 하고 만 걸까. 또 무슨 잘못을 해 버린 거지. 불안한 마음이 몸을 엄습해 왔다. 스스로가 또다시 혐오스러워진다. 바보같이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해서는.

“누야.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앙다물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뺨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아, 안 돼.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더 못생기게 보인단 말이야. 제발, 제발 멈춰줘. 하지만 내 바람은 거기서 끝이었다. 낮부터 참아 왔던 눈물들이 고장 난 것처럼 철철 흘러나왔다.

“이런.”

수오 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서둘러 욕통에서 나와 내 두 볼을 어루만졌다. 목욕물의 뜨거운 온도가 눈물과 함께 번져 나갔다.

“너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누야.”

“흑…. 죄…송해요. 수오 님. 정말 정말 죄송해요…….”

“왜 우는 것이야. 내가 너를 울린 것이냐.”

“흐윽…읍. 끅.”

“말해 다오. 누야.”

나는 말하는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수오 님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냐.”

그의 질문이 바뀌었다. 나는 흐느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나를 쭉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매만졌을 때도, 울고 있었을 때도, 그리고 시선과 시선이 만나는 지금도.

“…저는…….”

“너는 누굴 위해 우는 것이냐.”

“그건… 수오 님을 위해서…….”

아주 작은 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수증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수려한 미모가 꿈과 같이 느껴졌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 이 눈물도 나의 것이지.”

그가 턱에서 방울 지어 떨어지는 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 손길이 볼에 그어진 눈물 자국을 따라 올라왔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게 보였다.

“이제 나가거라. 더는 못 참겠으니.”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았다. 그가 다시 욕통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진다. 그러나 욕탕 문을 닫자마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움받아 버렸어. 내가 더러운 상상을 했기 때문에 그걸 눈치채신 거야. 그래서 나를 더 이상 참아주지 못하겠다고 하신 거야. 더러워, 더러워. 나는 더럽다.

어깨를 감싸서 손끝으로 닭살이 돋아난 피부 결을 뜯었다. 하지만 뜯어도 뜯어내도 그처럼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처럼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그저 얄궂은 각질만이 손톱 안을 파고들어 남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가 바라보고 있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수오 님 대신 내 얼굴이 비친다.

더러워. 역겨워. 네가 나한테 그런 존재라고!

네가 자초한 거야.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제발 이러지 마. 너 미쳐있어. 어딘가 정말 이상하다고!

“…윽!”

그때, 머리가 울렸다. 무언가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두 명의 얼굴. 하지만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전생에 대한 그림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그러다 연기처럼 사라지길 반복한다.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나는 누구와 함께 있었던 거지. 아니, 저건 애초에 나였을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을까.

“하아. 하아.”

가슴을 치고 숨을 토했다. 그제야 호흡이 내쉬어졌다. 필사적으로 공기를 머금는다. 조금씩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까의 기억은 뭐였을까. 이곳에 오고 처음이었다. 악몽과도 같은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 나는 거울로부터 멀어졌다. 손끝에 부드러운 뭔가가 잡혔다. 수오 님이 정돈해 두라고 말씀하셨던 침구였다.

거의 습관적으로 침구를 손에 쥔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펴고 그가 뉠 잠자리를 만들었다. 나의 존재는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때만 가치가 있다. 이렇게 지금처럼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를 위해, 그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면 돼.

어느덧 깔끔하게 정돈된 자리를 보며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과거의 나는 분명 죽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 이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된 거야. 그거면 되었다. 지금은 살고 싶어졌으니까. 바로 수오 님을 위해서.

그런데 수오 님이 욕탕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혹시 더운물 때문에 쓰러지신 건 아닐까 걱정이 돼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가끔 간헐적으로 그가 움직이거나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가쁜 듯 거칠어졌다가 다시 가라앉은 그 숨소리가 물바가지 소리와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오시려나 봐. 나는 재빨리 구석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다리게 했구나.”

새 침의를 걸친 그의 머리카락에는 아직 물기가 묻어 있는 채였다. 물방울들이 조금씩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뚝, 뚝. 나는 그의 탐스러운 육체를 보지 않기 위해 시답지 않은 그 물줄기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다.

“이불은 정돈해 두었어요. 편하게 주무세요.”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는 수건을 내려놓고 내가 깔아 놓은 이불을 밟았다. 사락하고 가볍게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왜 거기 있어. 이리로 오지 않고.”

“아, 저는 여기면 돼요. 가져온 모포도 있고…….”

“모포? 설마 저 천 쪼가리 말하는 것이냐?”

“…네.”

시종이 사용할 수 있는 침구는 정해져 있었다. 싸구려 목재를 얼키설키 엮어 만든 나무 베개. 추운 겨울날에도 보온이 전혀 되지 않는 이불 또는 죽은 짐승의 털로 만든 모포였다. 아마 수오 님 같은 분은 상상도 못 하겠지. 그는 화향관에 있는 곳 중 가장 좋은 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는 그였다. 다른 마을에서도 그를 만나기 위해 귀족들이 돈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비싼 가구들도 모두 그들이 하나둘 차곡차곡 가져다 바친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야. 설마 맨바닥에서 자려는 게냐.”

“…네.”

이미 당연히 그러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꾸만 되물어 오는 그의 앞에 주눅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함께 자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고 해도 그 이상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되었다. 맨바닥에서 자든 설사 방 밖의 마룻바닥에서 자든 상관없을 텐데 다정한 그 목소리에 이상하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내게 먼저 물어봐 주지 그랬느냐.”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수오 님.”

“긴말 안 해. 이리로 오거라.”

“하지만…….”

“네가 그리 자는 걸 보면서 어떻게 푹 쉴 수 있겠어. 바보 같은 소리 말고 당장 오거라.”

나는 가져온 모포를 품 안으로 더욱 당겼다. 그의 권유는 달콤했고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공간에 눕게 된다면 난 더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그의 곁에서 잘 자신이 없었다. 그의 고운 피부를 살갗 옆에 두고 제대로 숨 쉴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잘게요.”

재차 거절하는 날 보는 그의 표정이 점점 서늘해져 갔다. 위쪽이 콕콕 쑤시듯 뻐근했다.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보는 내 마음은 한층 더 굴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내가 남창이라 그러느냐.”

“네?”

“더러운 게지. 넌 나와 근본이 다를 터. 네가 나고 자란 곳에선, 남색을 더럽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었다. 애초에 난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어딘지 몰라. 이 소설 속에 온 지 단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걸. 남색이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내가 대답하길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잔인하구나. 너는 나를 볼 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다가도, 이렇게 가끔 나를 아주 외면해 버려. 답답해. 이상하게도 가슴이…….”

그가 가볍게 가슴을 움켜쥔다. 연하늘색 눈빛이 짙게 푸르스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옆면으로 떨어져 그의 표정을 가렸다. 그가 그럴수록 두려움이 내 몸을 점차 잠식해가고 있었다.

“수오 님!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저를 봐주세요. 다신 주제넘게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다시는요!”

다급한 내 외침에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안심하고 숨을 가늘게 내 쉬었다.

“그래. 다시는 그리 하지 말거라.”

“네! 꼭 그럴게요!”

그가 조금씩 입꼬리를 올렸다. 완전히 환해지진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들어찬 두려움을 없애기엔 충분했다. 나는 가져온 모포 따위 내버려 두고 즉시 그의 이부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매끄러운 비단이 발목을 스치고 그의 따듯한 체온이 내가 있는 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이윽고 두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 쪽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주었다.

“자자꾸나. 누야.”

“네.”

그가 방 안을 밝히고 있던 등을 껐다. 이윽고 경대에 있던 나직한 등불만이 남았다. 노랗고 붉은 열기가 아주 작게 우리 둘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의 옆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몸을 뉘었다. 그와 함께 덮고 있는 이불 가장 끝자락이 내 움직임과 더불어 흔들렸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이 밤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베개를 베고 있는 내 귓가에 뚜렷하게도, 소리가 고동쳤다. 뚝, 뚝. 그리고 이내 그 물방울은 거센 비처럼 빠르게 내 가슴팍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은 이제 어디를 노닐고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등 쪽이 뜨거웠다. 새벽바람은 분명 서늘할 것인데도 그에게 가장 가까이 향해 있는 등판에서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지어는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 발가락이 저렸다.

애써 조금씩 꼼지락해보지만, 이불이 사락사락하는 소리 때문에 또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내 꼴이 송장과도 같아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발정이 났다.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잠시 뒤 숨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그것도 무리였다. 자꾸 입에서 덥고 습한 입김만이 나왔다.

“…읏.”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음부가 쑤셨다. 엉덩이 쪽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기껏 새로 입은 속곳인데, 애액이 흘러나온다.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에서 온몸이 마비된 것같이, 바보 같았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세를 돌렸다.

처음에는 천장을 보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내 시야가 수오 님을 원하고 있었다. 욕망에 못 이긴 눈은 수초도 견디지 않고 그의 잠자는 얼굴을 좇았다.

…아름다워.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고운 피조물일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인간이라는 생물은 이기적이고 무정하고, 오싹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 사람만큼은 달라. 소설 속이라서 가능한 걸까. 나는 천천히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속곳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나는 앞부분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천 위임에도 불구하고 손끝에 물기가 닿는다. 기분 나쁜 감촉. 그러나 육체의 쾌락만큼은 제대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

속곳 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속곳을 내리고 아예 맨 음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주 조용한 방 안에서 조금씩 질척이는 소리가 나왔다. 오줌이 마려운 듯한 알싸한 느낌. 아랫배에서부터 전해지는 아찔한 감각.

나는 이윽고 이불 아래에서 오줌이 마려운 꼬마처럼 등을 말았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이대로 들켜버리면 어떡하지. 이곳에서 쫓겨날 거야. 그뿐인 줄 알아? 평생 그에게 경멸받을 거야. 날 죽여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무서운 생각도 결코 내 손가락을 멈추진 못했다. 나는 그의 콧날을 바라봤다. 우아하게 뻗은 저 직선이 내 계곡을 탐한다면 어떨까. 그가 나의 밑을 빨기 위해 저 코를 움푹한 곳에 파묻고, 게걸스럽게 나의 것을 흡입하는 거야. 쭙쭙, 음란한 소리로 한없이 더럽고 맛없는 나의 애액을 삼키며 고통스럽게 눈을 찡그린다면 어떨까.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부여잡고 만족할 때까지 흔들 것이다. 그가 그만이라고 말해도 절대 멈추지 않고 혀를 내밀라고 시켜야지. 혀를 최대한 내밀게 한 뒤 질 구멍 안으로 쑤셔 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가 개처럼 침을 턱까지 질질 흘린 상태로 눈을 치켜세워 나를 바라볼 것이다.

‘맛없다. 역겨워. 더는 그만 시키거라.’

그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을 것이다. 그의 앞에서 처절하게 미소 지으며 애원하겠지. 당신 같이 순결한 사람이 이렇게 더러운 걸 먹으니까 어때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걸 보며 조금은 슬퍼하겠지. 결국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주는 쾌감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을지도 몰라.

나는 그다음에, 그에게 내 위로 올라오라고 할 것이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옷을 벗고 내 위로 겹쳐 온다. 볼품없는 내 젖꼭지가 그의 연분홍색 젖꼭지에 비벼진다. 그는 간드러진 신음을 내지만 나는 돼지처럼 헉헉댈 뿐이다. 이윽고 그의 거근이 나의 안으로 들어오고…….

“으…응. 핫…….”

‘좀 더 조여라. 아무 감각도 없어. 헐거워.’

그가 원하는 대로 조여보지만, 그의 무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그에게 천을 씌우고 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편이 그가 더 기분 좋아질 방법일 테니까. 그리고 그가 드디어 신음을 쏟으며 내 안 깊숙한 곳까지 박는다. 탁탁 규칙적으로 살과 살이 부닥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나는 울다시피 그에게 매달리며 사랑한다고 고하겠지.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 응.”

나는 혀를 내밀어 그의 젖꼭지를 빤다. 연한 색이었던 유륜이 점점 빨갛게 번진다. 그가 자국을 남기지 말라며 불평하지만 나는 입술을 뺄 생각이 없다. 지겹도록 그의 피부를 흡혈하며 나의 자국을 남기는 데 집중하겠지. 귀찮고 하찮은 모기처럼 그의 희고 고운 피부에 나라는 사람을 남길 것이다. 이윽고 그의 불알이 터질 만큼 부풀어 오른다. 절정이 다가오자 그가 자꾸만 엉덩이를 빼려고 한다.

‘아이는 만들고 싶지 않다. 비키거라. 이러지 마.’

하지만 도망가려는 그의 허리를 두 다리로 옭아맬 것이다. 직접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의 분신을 나의 안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가 울며 호소한다. 이제 한계라며,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그럼 나는 소름 끼치게 웃어 보일 것이다. 제발 정액을 넣어 주세요. 수오 님. 내 안에 듬뿍 싸줘요.

“아…, 으응.”

나는 두 다리 사이를 붙이며 내 손가락 힘에 박차를 가했다. 눈앞에 그의 감긴 눈꺼풀을 보며 애원하는 그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한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감은 눈에서는 마치 자위를 하는 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오묘함이 있었다. 거의 절정에 다다른 흥분은 나를 제정신이 아니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참에 그의 앞까지 몸을 움직였다. 그의 숨결이 콧속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볼을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댄 후 그 숨을 피부로 느꼈다.

“아… 아…….”

빨리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코와 입 밖으로 정신없이 빠져나갔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 느낌을 포기할 순 없었다. 손바닥까지 애액이 흘러나왔다. 한없이 더럽고 끈적했지만, 눈을 뜨면 깨끗한 그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질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내장을 직접 휘젓는 듯한 느낌과 함께 짜릿한 아픔이 들었다.

이전 생의 나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이 몸은, 처음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에게 숨겨야만 하는 이 더러운 상상 속에서, 죄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그의 모든 것을 탐하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만족감.

처음은 누구였어? 말해줘.

그만해. 그만하라고! 끔찍해, 너 정말 끔찍하다고!

“윽!”

질 안에서 꿈틀대던 내 손가락이 순간 멈췄다. 이상한 장면이 눈앞을 다시 한번 스쳤다.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땀에 절인 듯 눅진했다. 또 다. 두 사람이 있었어. 경멸스럽게 누군가를 바라보는 한 사람과, 그런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무서운 사람. 나는 그 사이에서 관찰자처럼 서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이건 어떤 기억이지? 아니, 기억이 아니라 또 다른 소설 속 전개일까. 그렇다면 누구의 이야기일까. 나는 허겁지겁 속곳을 올렸다. 장마철 널려진 빨랫감처럼 불쾌해진 천 쪼가리가 피부에 감긴다. 더러운 기분에 일순 자살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BL 소설 속에서 벌을 받는 처지였으니까.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이야기만 아니면 돼. 이 세계 속에서 내가 정해둔 딱 그만큼 만의 공간. 나는 그 안에서 그 누구에게 피해도 주지 않은 채, 오늘 한 자위처럼 살아갈 것이다.

수오 님은 이제 닷새 후 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사명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다. 하지만 그 뒤 혼자 남게 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읽은 BL 소설은 조연, 그것도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던 시종의 삶을 조명해주지 않았다.

점점 시야가 아득해졌다. 아까 무언가를 본 충격 때문인지 해선 안 되는 상상을 해 버린 탓인지 신체가 나른해져 갔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또다시 수오 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이것이 닷새 뒤 일어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BL 소설 속에 갇혀 버린 나는, 저 완벽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슬픔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온다. 그러다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 * *

“으응…….”

햇빛이 눈꺼풀을 아프게 쪼아댔다. 내 방에 이렇게 해가 잘 들어왔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해를 피해 보려 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숨이 막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누야. 잘 잤느냐.”

“…어, 수오…님?”

수면 부족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그를 두고 멍청하게 보고만 있진 않았겠지. 처음 몇 초간은 그대로 누워서 그의 턱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거의 이불을 구기는 수준으로 헐레벌떡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오 님의 미소는 따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참 불편했다. 이럴 때만이라도 제대로 꾸중해 주시지. 그의 상냥함에 또다시 기대어 버린 스스로가 싫었다.

“괜찮다. 어서 세수라도 하고 와.”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고 재빨리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 속에 침 자국을 얼룩덜룩 붙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 정말 싫다. 쌓여 있는 먼짓덩어리들을 한 번에 치워 없애듯 얼굴을 물에 담갔다. 그러자 서서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역시 찝찝한 느낌에 이번엔 속곳을 확인했다. 불쾌한 냄새와 함께 습기가 코안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달거리 직전의 속곳처럼 얼룩덜룩한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새로운 속곳을 꺼내 입었다. 빨리 나가서 수오 님이 치장하는 걸 도와 드려야 한다. 결국 씻는 둥 마는 둥 덥수룩한 채로 탕을 나갔다.

“수오 님.”

그는 화장대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햇빛을 받아 연보랏빛 은발이 더욱이 빛나고 있다.

“누야. 이것만 끝내고 아침은 같이 먹자꾸나.”

“…네.”

시종으로서 그와 함께 식사해선 안 되는 것이었지만 결국 응하고 말았다. 더는 내 고집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기 때문일까. 나는 그냥 그의 뒤에서 머리 빗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부드러워요. 수오 님.”

그에게 빗을 넘겨받고 그의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지자 비단결 같은 촉감이 손안을 휘감았다. 뭉실뭉실한 구름을 만지는 것 같아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내 말에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네 머리도 나처럼 관리한다면 참 예쁠 텐데.”

그의 말에 나는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검고 푸석한 머리카락. 이곳에선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색이었다. 역시 소설 속에 단 한 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은 인물답게, 검은색의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조금 눈이 크고 입술이 동그란 여자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수오 님, 잠 잘 못 주무셨어요?”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눈가 밑에 푸르스름한 자국이 보였다. 워낙 피부가 얇고 투명하다 보니, 눈 그늘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어제는 없었는데…….

“아…. 신경 쓰지 말아라.”

그의 표정이 잠시 경직된다. 당황하거나 무언가 숨기시는 일이 있을 때 자주 저런 표정을 하셨다. 새벽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잠꼬대를 너무 심하게 했다던가…….

“깊게 염려하지 말아라. 넌 표정이 다 눈에 보여. 누야.”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음, 오늘은 시내에 나가볼까.”

“시내요?”

그가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 이곳에 오고 나서 심부름으로 한두 번 나가본 적은 있었지만, 자세히 구경한 적은 없었다. 수오 님은 나와는 다르게 자유롭게 시내에도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는 나와 다르다.

“잘 다녀오세…….”

“너도 함께 말이다.”

“네?”

“모처럼이니까 같이 가줄 게지?”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재차 울려 퍼졌다. 혹시 기뻐하는 표정을 들킨 건 아닐까. 억지로 볼 주변을 굳혀 보지만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수오 님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가볍게 웃는다. 무심코 받은 그 미소가 가슴에 치명적이리만큼 사랑스러워 보였다.

* * *

무언가가 빠르게 오고 지나갔다. 나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쳐다보다가도 금방 주변을 살펴 누군가를 찾았다. 혹시나 우매한 눈이 그를 놓치게 될까 봐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그의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길 잃어버리겠구나. 손잡아도 괜찮대도.”

“아, 아니요.”

쑥스러워서 괜히 팔꿈치를 쓸어내렸다. 수오 님은 화향관 밖에서조차 굉장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나는 수백 개의 눈총이 그에게 쏠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곳 남자들은 모두 그에게 매료되어 갔다. 그건 역시 BL 소설 속이기 때문일까.

“무슨 생각을 그리 해.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 네.”

그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가 들어가자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듣지도 못한 채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더라. 조금 걸었다고 더웠는지 이마에 얄팍한 땀이 흘렀다.

“여기는……?”

“마을에 몇 없는 여성 상가란다.”

“…여성 상가요? …와.”

예쁘다. 그의 앞인 것도 잊고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이곳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여자 옷이었다. 화려한 곡거와 심의, 그뿐만 아니라 귀걸이와 반지까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는데…….

“저번에 주문해 놓은 건?”

“아, 저쪽에 있어.”

내가 온갖 반짝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수오 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쪽 눈썹 끝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딱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호남이었지만, 수오 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뜨겁게 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싫어. 짜증 나.

“여기 있는 아가씨가 네 시종?”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마치 진열된 상품을 훑어보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역시 싫다.

“그만둬.”

옷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수오 님이 단번에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금세 손을 떼고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얼굴 풀어.”

남자는 승냥이처럼 미끄러운 걸음으로 수오 님에게 다가갔다. 수오 님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열된 옷 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든다.

“누야.”

수오 님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누야? 이름이 누야야?”

남자는 달려온 나를 보며 묻는다. 괜히 못 들은 척 시선을 남자의 정반대 편에 두었다. 대답해 주기 싫어.

“아니. 누룩.”

…대답해 주지 말지. 아쉬운 마음과 미운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한번 쓱 봤다가 수오 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 행동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다른 한쪽 손으로 뻗으려던 팔뚝을 움켜쥐었다.

안 돼.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뭐야. 애칭이야? 발음하기 힘들면 이년아, 저년아 하면 될 것을.”

“…신경 꺼.”

수오 님이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손을 내친다.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한편 이상하다고 느꼈다. 저 남자는 손님일까, 아니면 친구일까. 수오 님은 손님이 아닌 이상 다른 남자에게 친근하게 대하지 않았다. 친구가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음, 이 아가씨가 아까부터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쭉 보고 있어.”

남자의 눈이 뱀처럼 내 모습을 훑는다. 불쾌한 갈색 눈동자. 눈동자 색깔이 형편없는 밤 갈색인 걸 보면 그도 조연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좋은지 히죽거리는 남자의 입술이 짜증이 났다. 너도 나처럼 별것 아닌 주제에. 그런데도 수오 님의 몸을 만지고 있어. 싫다.

“신경 쓰지 말거라. 일이 있어서 알게 된 사이일 뿐이야.”

“정확히 말하면 몸을 나눈 사이랄까?”

입보다 눈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노려봤다. 싫다. 차라리 남자의 말이 장난 섞인 거짓 조롱이길 바랐다. 하지만 수오 님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수오 님의 표정이 저 남자의 말에 반응했다. 내가 본 게 헛것이길 바랐지만, 진실은 이미 그의 얼굴에 있었다.

“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수오 님의 말에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사실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앞으로 나흘 후면….

꿈 같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누야. 받아라.”

침울해하는 내 모습을 눈치라도 채신 걸까. 수오 님이 딱 보기에도 부들부들한 옷 하나를 내게 건넸다. 만져 보니 고급 비단옷이었다. 그가 일할 때 필요한 옷인 걸까. 나의 것이 아님에도 좀처럼 손을 뗄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느냐.”

“…아, 수오 님께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나는 내 품에 들어온 비단옷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쭈뼛 뒤로 물러섰다. 내 것이 아닌 걸 탐한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나를 붙잡는다. 조금 다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것이 아니다. 네 것이다.”

“네?”

놀라서 실례인 줄도 모르고 수오 님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어여쁘게 휘었다.

“마음에 드느냐.”

“아.”

그제야 깨달았다. 수오 님이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황홀함과 죄책감이 뒤섞여 원인 모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손안에 부드러운 천 감이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가 나에게 준 선물. 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들여다봤다.

“이 마을에서 비단으로 된 여자 옷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복 받은 년.”

내 옆에서 남자가 비단옷을 감상하며 진드기처럼 조잘댔다. 역시 싫은 남자였다. 그런데 옷을 한참 들여다보니,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수오 님?”

나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옷감이 비단인 것도 그렇고, 색도 그렇고 어쩐지 그가 평상시 자주 입던 옷이랑 닮아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옷의 크기와 무늬 차이 정도였다. 수오 님은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이제부턴 함께 할 테니까.”

그의 음성이 차분하게, 부드럽다. 나는 가만히 수오 님의 대답을 곱씹었다.

“뭐든지 함께 하자꾸나.”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의미일까. 이제부터 함께라니, 일시적으로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낱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그의 한 마디에도 기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욕심이 났다. 역시 나는 그를 그 누구에게도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아아, 어쩐지 열 받네. 이거 구하느라 고생한 게 누군데 말이야. 안 그래, 수오?”

남자가 우리 사이를 가르고 수오 님의 허리를 감아 들어왔다. 순간 인상이 팍 구겨진 나를 본 남자는 코웃음을 친다. 마치 주제를 알라는 듯이.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오늘 밤, 날이야?”

“하아…….”

수오 님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그를 꽉 끌어 맨다. 싫어. 싫어. 싫다고. 머릿속이 질투로 엉망진창이 돼 버릴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이 흔들렸다. 남자는 그걸 알고서도 수오 님과의 사이를 뽐내려 하고 있었다.

“나흘 후 수도에서 중요한 손님이 와. 한동안 손님 받을 생각은 없어.”

“거기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가.”

“말조심해. 백준.”

수오 님이 슬쩍 내 얼굴을 흘리며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마치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괜찮았다. 창부인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쯤은.

나는 밤에 그가 손님을 받는 날이 오면 화향관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그가 남자의 밑에 깔려 내는 신음을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나에게 언제까지고 남자였다. BL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내겐 적어도 사랑하는 남자였으니까.

“하아…, 이러면 오늘까지 준비한 보람이 없어지는 데 말이야. 어떡하지, 그냥 주지 말까?”

남자가 내 손에 들린 비단옷을 빼앗았다. 급하게 비단 끝자락을 붙잡아 봤지만 되찾을 수 없었다. 남자의 투박하고 거친 손에 청초한 옷이 덜렁덜렁 매달린다.

“읏…….”

수오 님이 나에게 준, 이제 나의 것이 된 소중한 옷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빼앗아 갔다.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어떻게 할래? 응?”

남자가 얄궂은 목소리로 수오 님에게 물었다. 수오 님은 화를 참으려는 듯 얼굴을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내가 남자 주인공으로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남자였다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멋지게 해결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저녁에 화향관으로 와.”

“그렇게 나와야지.”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수오 님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만 남자의 손에 있던 비단옷을 뺏어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되받는다. 그러나 마음은 용암이 솟구치는 것처럼 들끓어 올랐다.

“가자꾸나. 누야.”

“…네.”

나는 가게 바깥으로 나가면서까지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안에 수백 개의 바늘을 꽂는 상상을 한다. 울며불며 애원하는 그를 무릎 꿇리고 머리를 짓뭉개고 싶었다. 남자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백준.

“누야.”

내가 이런저런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을 무렵, 수오 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미 가게를 나서고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어디까지 왔더라. 설마 벌써 도착하고 만 것일까.

“누룩.”

내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수오 님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가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 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받은 비단옷을 품에 꼭 안고 그 무늬만을 바라봤다.

“나를 보아라. 누야.”

“네…….”

나는 조금씩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모시던 그의 얼굴이었다. 약간의 석양과 함께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아름다웠다.

“아름답구나.”

그가 미소 지었다. 나는 다시 한번 비단옷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그가 준 옷도 확실히 아름다웠다.

“…너는 바보로구나.”

수오 님이 옅게 미소를 흘렸다. 그에게 저런 웃음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고개를 다시 들어 그의 정취를 샅샅이 기억에 담는다. 좋았다. 지금 이 순간이.

“누야. 들어라.”

그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나와 일직선으로 시선을 맞췄다. 나는 당황해서 손목을 휘휘 저었지만, 수오 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두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못할 게 없었단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붉은 석양빛에 그을려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그에게 매료되어 갔다. 그를 사랑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를 위해서 나는 못 할 게 없어.”

그러다가 일순 정신이 돌아왔다. 몽롱했던 기분이 그의 마지막 말에 의해 겨우 진정이 됐다. 무엇을 위해서?

“네? 수오 님?”

황급히 그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몸을 일으키고 난 뒤였다. 나는 그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그가 다시금 상냥하게 내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돌아가자. 누야.”

“아…….”

그렇지.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슬슬 해가 저물면서 공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단념하고 수오 님과 발걸음을 맞췄다.

수오 님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던 걸까.

나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오늘과 같은 사사로운 사건은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공과 수의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의아해졌다.

소설은 공의 등장으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이전 수의 인생과 이곳 마을의 사정 같은 건 자세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다만 독자가 추측하게끔 쓰여 있었을 뿐.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수오 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게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심지어 이 마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혹은 수도가 어떤 곳인지도 나는 전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 소설에 오게 된 것은 고작 1년 전 일이었다. 그동안 이 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바깥일에 대해선 무지했다.

만약에, 만에 하나 내가 모르는 사건이 앞으로 일어난다면? 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이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나는 비단옷이 구겨질 만큼 움켜쥐었다.

만약 그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오늘 밤 수오 님을 조연도 아닌 그 남자에게 빼앗길 심산이라면, 차라리 나의 것으로 품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오 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사랑하는 그의 뒤에서 나는 이제 무엇이 되었든, 아무래도 좋았다.

* * *

곧 남자가 이곳으로 올 시간이었다. 나는 흘끔 수오 님의 방 쪽을 바라봤다. 그는 일찍이 목욕을 끝마치고 몸을 닦는 중이었다. 나는 심부름 할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곤 화향관 대문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남자를 기다렸다. 제시간에 오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였다. 낮게 숨을 뱉었다. 의기양양했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 마음이 약해지고 있다. 남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수오 님의 마음이 문제였다.

만약 그가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는 거라면? 여자인 나는, 취향이 전혀 아닌 거라면?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없었다. 수오 님의 마음을 받는 것에도, 그리고 미움을 받지 않는 것에도. 나흘이 남았다. 애초에 주어졌던 시간 자체가 많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젠 그마저도 나흘이었다.

오늘 한숨 더 자고 나면 앞으로 사흘. 나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거지. 수오 님에게 버려지면 이곳에서 더는 낙을 두고 지낼 수도 없어. 그는 곧 공의 것이 되어 그가 사는 수도로 가게 되겠지. 나는 그것을 행복해해야 할까. 그의 행복을 바라며 나의 처지를 지독히도 안고 살아가야 할까. 아니, 나는 싫었다. 자조하며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사실은 끔찍이도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뜬다.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 등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아래에 누군가가 문지방을 넘는다. 남자였다.

“읏…….”

남자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낮의 차림보다 훨씬 가벼운 옷매무새였다. 뭐야, 곧바로 벗을 수 있게 입고 온 거야? 나의 수오 님을 범하고 싶어서 서늘한 새벽 공기에도 저렇게 얇게 입고는. 금방이라도 풀어헤칠 것만 같잖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선 안 된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선 안 돼. 뭐라도, 뭐라도 해서 저 남자를 막아야 했다. 나는 마음속에서만 품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백준…, 님!”

별로 뛰지 않았는데도 숨이 차올랐다. 양심의 숨이 곧 끊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남자의 얼굴이 내가 달리는 방향 쪽으로 꺾였다.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고개를 쳐올리고 나를 내리깔았다. 일순 기분이 나빠졌지만, 연기를 시작했다.

“수오 님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응. 그런데? 마중이라도 나온 거야?”

“네.”

또다시 위쪽이 찌르듯이 뻐근했다. 소설 속에 떨어진 이후 이토록 커다란 거짓말은 처음이었다. 내가 소설을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 전에 치르셔야 할 외상값이 있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주인님이요.”

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가게에 드나들면서도 항상 술값을 외상으로 하거나 다른 사람한테 올려 두었다. 가게 주인님은 언제나 그 일을 벼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외워 장부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게 시키신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가게 주인님께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그가 흠씬 혼쭐이 나서 이곳에서 쫓겨나면 내가 수오 님을…….

“아, 그거. 끝나고 할게. 그리고 안내는 필요 없어. 이미 방도 알고 있고.”

“…네?”

“그런 의미에서 이만 실례.”

“자, 잠깐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나는 눈 뜬 시체처럼 남자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오 님의 방으로 향했다.

“잠깐, 하아……!”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꼴사나운지 알고 있었다. 능글맞은 모습으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태풍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팔을 휘젓는다. 그러나 그의 소매 끝에도 미치지 못한 손목은 결국 처참하게 꺾여 무너졌다.

“수오!”

남자는 먼저 도착해 방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그리고 한껏 웃음을 머금고 수오 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빼앗긴다. 빼앗긴다. 빼앗기고 만다. 그 순간, 바지 밑단에 발이 걸려 땅바닥에 풀썩 넘어져 버렸다. 미처 손을 완전히 뻗지 못해 이마부터 땅에 부딪혔다.

“으윽!”

넘어지기 전에 문틈 사이로 수오 님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큰 소리로 바닥에 엎어졌기 때문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분명 그의 눈에도 지금 내 꼴이 보였겠지. 금방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손으로 애꿎은 흙을 긁었다. 까진 이마가 너무 아팠다. 그런데 그것보다 지금은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서글펐다.

“누룩!”

이마를 부딪쳐서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방금 목소리. 화난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는 수오 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조금 앞으로 들자, 눈앞에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있는 수오 님이 보였다. 신발도 신지 않고 방 밖으로 달려 나오셨는지 바지 밑단과 발이 흙으로 엉망이었다. 의식을 잃었던 걸까. 이제는 헛것까지 보인다.

“심부름을 갔다던 녀석이.”

“수오 님……?”

“거짓말이었더냐. 갑자기 저놈 쪽으로 달려가질 않나 넘어지질 않나. 도대체 얼마나 나를 걱정 시켜야 하겠더냐.”

“아, 그, 그게.”

얼굴이 벌게졌다. 거짓말이 들킨 것은 그렇다 쳐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나는 차라리 이것이 환청이고 헛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이 아찔했다. 이미 부딪힌 머리 탓으로 사방이 빙빙 도는데 그에게 할 변명까지 생각하면 온몸이 저렸다.

“뭐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저 녀석 왜 내 뒤를 쫓아와선. 성가시게.”

수오 님의 뒤에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인다. 수오 님은 그를 한번 날카롭게 노려본 후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살폈다. 그의 예쁜 이마에 화가 난 사람처럼 핏줄이 서 있었다. 내가 저렇게 만든 걸까. 미묘한 감정의 싹이 돋아 나왔다. 무엇일까. 이 기쁜 것 같은 희한한 마음은.

“누룩. 널 어찌하면 좋을까.”

그때 그가 간지러울 정도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엎드려서 창피한 자세로 있었구나. 처지가 의식되자 순간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숨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어떤 표정이었는지 훔쳐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

나는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마를 한 손으로 가리고 앞을 바라보는데, 수오 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연 하늘색 눈이 어둠 속에 가려져서 그런지 혼탁해 보였다.

“누야.”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를 피했구나.”

나는 그의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일에 대한 꾸중이나 책망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그의 시간을 방해한 것이 기분 나빴던 걸까. 그의 말투는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더 낮고 날카롭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담담하게 들렸다.

“…….”

“아… 죄송합니다…….”

그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생각해 보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초조해져서 손톱 안에 흙이 진창 들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바닥을 긁었다.

“되었다.”

그가 내 한쪽 팔을 붙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꽤 거친 힘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난 뒤에도 그에게 잡혔던 팔 안쪽이 얼얼할 만큼이나.

“다친 곳은 가서 소독하거라. 끝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와.”

“네? 하지만 백준 님이…….”

싫어요. 목을 수차례 내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는다. 앞으로 수오 님의 방 안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까무룩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다른 시종들이 어떻게 창부를 모시는지는 알고 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와중에도 혹시나 모를 위험 상황을 대비하여 같은 방 안에 있기도 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여태껏 잘 피해왔을 터인데. 머리가 새하얘졌다.

“너도 이제 제대로 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자, 잠깐. 수오 님!”

끔찍한 기분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알고 있어. 수오 님이 알고 있었다. 시종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의 전부를 돌보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나 내 외침에도 수오 님은 냉정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백준이 수오 님의 뒤를 따라간다. 절망스러웠다. 설상가상 남자는 나를 흘겨보곤 오만하게 입가를 올렸다.

“…싫어요.”

미처 말하지 못했던 거절의 말.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겨우 읊조릴 수 있었다.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데도 그렇게, 굳이 입 밖으로 꺼낸다. 까진 이마가 아픈 줄도 모르고 다친 마음을 여러 번 두들겼다.

“싫어요…….”

눈물방울이 뚝뚝 뺨에 떨어졌다. 축축하고 느릿하게.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이대로 방으로 가 이불을 덮어쓰고 떼를 쓰며 울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오늘도 습관처럼 다리가 움직였다. 나는 결국 그의 시종이다. 그가 명령하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소독약이 있는 별관으로 가, 그가 바란 대로 상처를 치료했다. 시종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백준이라는 남자와 살을 부딪치고 있을 장소.

나는 화향관에 도착해서도 눈앞의 문고리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꽤 튼튼한 문 틈새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문을 한 차례 두드렸다.

“…….”

이상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하고 귀를 쫑긋 세워 문 가까이 대보지만 역시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문고리를 잡아당길까도 싶었지만 차마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관두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지금은 돈이 없다고. 오늘은 손님으로 온 게 아니었다니까?”

잔뜩 짜증이 나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죽 내밀었다. 백준과, 금전관리를 하는 자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안주인님이 시킨 일일까. 나는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봤다. 그렇다면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수오 님 혼자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

다시 문고리를 봤다. 추악하지만, 기회였다.

나는 살며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였다. 깜깜하다.

“하…….”

수오 님의 숨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잠시 뒤 익숙해진 시야가 어둠 속에서 견뎌내며 넓어져 갔다.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왔으면 풀어. 뭐 하는 짓이야.”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나는 움찔거리며 그를 살폈다. 아까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눈에 기다란 천이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백준으로 착각한 걸까. 어쩐지 그의 말투가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가벼웠다. 고민이 됐다. 나인 것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방을 나가는 것이…….

하지만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금지된 마음이 뻗어 나갔다.

“됐다. 시작할 거면 빨리…….”

수오 님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습관적으로 그의 시종일 때 자세가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를 살폈다. 그의 손이 등 뒤로 묶여 구속되어 있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

나는 대답 하는 대신 숨을 죽였다. 머릿속에서 온갖 말들이 오고 갔다. 기회다. 저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방비한 상태의 수오 님을 만질 기회야. 비록 백준이 해 놓은 짓이긴 하지만 그는 당분간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 내가 수오 님을… 만질 수 있지 않을까?

염치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무릎이 바닥에 깔린 이불에 스치는 소리에, 그가 몸을 뒤로 내뺀다. 가엽게도. 하지만 그 모습에 더욱 설레었다.

“…….”

“어서.”

그는 나를 재촉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는, 백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고 말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좀 더 과감하게 그의 어깨부터 만져 보았다. 예상외로 가냘프기보단, 두텁고 빳빳한 근육이 손안에 잡혔다.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속살 아래 균형을 알게 된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목욕 시중을 하며 눈길을 피하며 만졌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음탕한 감촉이다.

“하아……, 더 아래로.”

나는 그의 어깨에서 가슴으로 손을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 위에 여린 젖꼭지 살이 만져졌다. 검지로 그 부드러운 정점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가 한숨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소설에 써진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듣는 그의 신음이다. 달라. 무척 달랐다. 글로 읽었을 때 상상했던, 그 가냘프던 음성과는 달리 훨씬 거칠고 색스러웠다.

“읏……. 핥아도 돼.”

먹이를 허락받은 개 마냥 허겁지겁 그의 가슴에 입을 가져다 댔다. 내겐 요령이 없었기 때문에 물기 어린 추잡한 소리만 나왔다. 그런데도 입안에서 제대로 발기하고 있는 젖꼭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신이 나서 좀 더 아프게 그것을 물고 당겼다. 그의 입안에서 짜릿한 허덕임이 터져 나왔다.

“읏, 하아. 바지를……, 바지를 벗겨다오.”

그의 요청에 두 손을 뻗어 재빨리 그의 바지를 벗겼다. 그가 엉덩이를 들어주어 손쉽게 벗길 수 있었다. 그는 속곳도 입지 않은 채였다. 이미 이 모든 정사 행위를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질투의 감정 따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성기가 아랫배에 닿을 정도로 빳빳이 서 있다. 매우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로 그 불그스름한 기둥 겉으로는 핏줄이 충혈돼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것을 입으로 물었다. 언제나 상상만 해왔던 행위였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흐윽!”

아까보다 더 커진 교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 고운 얼굴에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표정이 새겨졌다. 턱을 한계까지 벌리고 나서야 간신히 그의 것을 머금을 수 있었다. 너무 커서, 이대로 턱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래가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됐다.

나는 그의 뿌리를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름다운 그의 외모와는 상반되는 까슬한 음모가 내 코끝에 닿았다. 더는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대신 그의 귀두 끝에 맺혀 있는 시큼한 물을 혓바닥으로 핥아 먹었다. 매끄러운 민둥 부분이 혀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나는 그 감촉이 퍽 마음에 들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핥아댔다.

“…그래. 상상한 대로야.”

열중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그저 선율같이 고운 신음과 그의 움직이는 곡선들, 그 매끄러운 표면에 온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다. 내가 백준이 아니란 걸 들킬까 하는 조바심도 까맣게 잊은 채, 그의 성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의 첨단 끝에서는 자꾸만 끈적한 물들이 흘러나왔다. 그것들은 내 유연한 혀에 달라붙어 나를 유혹했다.

“아니, 하아…. 그 이상으로…….”

그의 두꺼운 기둥이 경련이라도 난 듯 불끈 부풀어 오른다. 딱딱하다. 올곧은 생김새인데도 짐승처럼 혈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것이 신기했다. 발정 난 손길은 주체하지 못하고 그 혈관을 어루만졌다. 동시에 그의 신음이 더 커졌다. 나는 기뻐서 혀로 그 혈관부터 귀두까지 핥아 올렸다.

“윽……!”

그가 내 입으로 이만큼 느껴주고 있다. 넣고 싶다. 그의 것을 처음인 이 몸으로 한껏 받아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간절한 마음이 잠식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다. 혹시, 정말로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은,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를 가져도…. 마지막으로, 그를 ‘공’에게 빼앗기기 전에.

“이제… 미치겠으니 벗어. 당장.”

수오 님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더 다급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대로 옷을 벗을 수 없었다. 벗었다간, 들킨다. 그리고 내게는 그것이 없었다. 백준에게는 달렸고 내게는 달려 있지 않은 것. 수오 님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남자의 물건이 내게는 없었다.

“…….”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애꿎은 그의 성기를 손안에 넣고 감쌌다. 그는 신음을 뱉었지만, 무언가 언짢은 게 분명했다. 잠시 뒤, 그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렇구나.”

“…….”

“하지만 내가 넣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가 넣는다고. 나는 내쉰 숨마저도 들키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수오 님은 이곳에서 공(攻) 창부가 아니었다. 그는 전천후가 가능하지 않은 수(受) 창부였다.

“네가 직접 넣거라. 나는 손이 묶여 있으니까. 어서.”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수오 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한 게 도저히 맨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사람처럼 취기가 달아올랐다. 온몸에, 그리고 그를 머금었던 입안 가득 달큰한 맛이 났다.

하지만 손은 무의식으로 옷고름으로 향한다. 그러다 그의 성기가 반쯤 사그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엉거주춤 다시 그의 곁에 다가섰다. 그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뜨거운 숨을 내쉰다.

“다시 세우거라.”

“어…….”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멍청한 실수였다. 들켰을까.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려고 했다. 더 정신이 나갔다간 그대로 ‘네.’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끝이 났다. 무어라고 변명해야 좋지. 하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능한 년. 쓸모없는 더러운 년. 자학적인 욕지기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서.”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미소하는 것 같았다. 들키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백준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는 너무도 달랐다. 혹시 성교할 때의 신음이 높기라도 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오만 생각들이 머리 위를 둥둥 떠돌았다. 그 사이에 수오 님은 엉덩이를 들어 나를 재촉했다.

“미치겠구나.”

나는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누르고 수오 님의 앞에 다가섰다. 다행히 그의 두 손은 아직 단단히 묶여 있었다.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그의 위에 앉아 성기를 품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눈도, 손도 모두 자유롭지 않은 그에게 적어도 대번에 들킬 리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굉장히 안일한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젖은 음부가 안달하며 그를 원하고 있다. 그 날 새벽 홀로 했던 애무가 아니라 진짜 그의 것을 넣고 싶었다. 백준인 척 가장하며 그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거짓된 행위라도 상관없다. 수오 님만 모른다면.

이건 강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를 갖고 싶다.

수오 님…….

이름을 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그의 무릎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가 조금 긴장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반쯤 고개를 숙였던 그의 성기가 다시 맨살의 감촉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손으로 소음순을 벌리고 그의 성기 위에 앉았다.

“하, 큭…….”

그가 괴로운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나는 신음이 나올까 재빨리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팠다. 그의 성기가 내 팔뚝만 한 게 문제였을까. 그래도 많이 젖어 있어 어떻게든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공포 속에서 그만 다리를 달달 떨었다. 이제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좁아. 이렇게 좁을 줄은… 하아.”

“읍.”

지금 소리를 질러선 안 돼. 불룩 튀어나온 가슴을 가려야 할 두 손은 어찌할 바 없이 입가로 갔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도 수오 님은 자꾸만 허리를 움직였다. 커다란 기둥뿌리는 계속해서 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결국, 미처 가리지 못한 입 밖으로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읍.”

안 돼. 제발 참아. 제발 견디란 말이야. 그를 가지기 위해서 이런 고통쯤은 넘기란 말이야. 멍청한 년. 더러운 년. 스스로를 향해 화살을 돌려 봐도 목에서부터는 비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살려달라는 말이라도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 무릎을 세웠다. 조금 일어서면 괜찮아질지도…….

“그래. 내가 움직이기 편하게 해주는구나.”

그 순간, 수오 님이 마치 기다린 것처럼 엉덩이를 위로 쳐올렸다. 내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몇 번이고 하반신을 부딪쳐왔다. 이런 그는 알지 못했다. 짐승이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다.

“부드럽고, 하아. 그래, 비단 속을 거니는 기분이구나.”

마른 입술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비명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쓴 탓이었다. 그러나 수오 님은 만족한 사내처럼 혀로 아랫입술을 적셨다. 그 표정에 아픔도 가시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를 가지고 있다. 그가 내 안에 들어와, 나는 사내가 아닌 여자로서 그를 담고 있다. 꿈은 아니겠지. 희열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전부 만개하지 않은 붉은 속살은 경련하는데, 왜 자꾸만 먹고 싶은 걸까. 귓가에 지저귀는 그의 신음이 화사하다.

“더는 못 참겠구나. 뒤로…, 어서 뒤로 돌아.”

수오 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우왕좌왕하며 그의 몸 위에서 떨어졌지만, 어느 순간 현기증이 한꺼번에 몰아붙였다. 억지로 열린 살결이 저릿하고 얼얼하다. 몸은 마음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수오 님을…….

“제발, 어서.”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간절했다. 나는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커다란 성기에 조준된 구멍으로 그가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도 내 엉덩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조금만 더 뒤로 오거라.”

“…….”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의 거친 체모가 있는 곳까지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는 잔뜩 물기를 띤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구멍 사이로 자지를 넣거라.”

구멍, 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 아픈 것을 스스로 할 용기는 없었다. 그는 불룩 튀어나온 남성을 내 엉덩이에 비비며 다시 호소했다.

“…이러려고 날 묶은 것 아니었느냐. 눈을 가리면서까지, 날 애타게 만들려고.”

목구멍에서 둔탁한 공기가 턱하고, 내 숨을 가로막는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 조여오고 있다.

나는 그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를 기만하고, 나의 것으로 삼으려고 이 소설의 전체 내용을 거스르면서까지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수오 님은 나를 백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고작 아프다는 이유로 그를 거부할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성기를 쥐고 구멍 안쪽으로 삽입시켰다. 이윽고 첨단에서 흐르는 꿀물이 속살에 스며들며 작은 거품을 만들어냈다.

“조금 빨라질 거야.”

수오 님은 뒤에서부터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허벅다리로 힘을 주며. 나는 오싹해져서 엉덩이를 앞으로 뺐다. 이대로라면 들킨다. 그가 내 허리의 감촉을, 그 두께를 느끼게 된다면 반드시 들킬 것이었다.

“하아… 쉬이, 괜찮아. 도망가지 말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백준이 아니야. 내가 수오 님을 기만하고 강간하려던 사실이 들키고 말 거야. 감히 여자인 내가 그를 범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내가 사랑하는 그에게 들키고 만다.

나는 결국 그를 밀치고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얼마 안 가 구멍 속에 꽉 자리 잡고 있던 그의 분신이 조금 힘들게 빠져나갔다. 텅 빈 아랫도리에서는 질척한 애액이 주르륵 흐른다. 아픔을 토해낸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걸었다.

역시 나의 오만이자 실수였다.

나는 바지를 추켜올리고 힘껏 문을 향해 달렸다. 마지막으로, 새벽빛보다 더 검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바보같이, 나는 거기에서 의식을 잃었다.

* * *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모든 게 다 변했다고.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뭐?

그런데 왜 내 옆에 계속 있는 거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가 지금 내 집에 멋대로 들어 왔……!

좀 더 솔직해져 봐. 사실 너도 이걸, 욕망하고 있었잖아.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 사실은 날 무척, 욕망하고 있는 거였다면 좋겠어. 다른 남자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여자로서 봐주었으면 좋겠다. 어째서 나는 그를 BL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이곳이 평범한 로맨스 판타지였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평범한 창작 소설이었다면 우리의 인연도 조금은 달랐을까.

“누야.”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무념의 세계에서 다시 현세로 돌아왔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러운 습기가, 피부를 끌어안아 무척이나 불쾌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은 햇빛을 반사해 나를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수오야?”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부드러움과 반듯함을 동시에 지닌 턱선, 그리고 작은 얼굴에 시원하게 균형 잡힌 눈, 코, 입. 수염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턱, 다홍색 꽃잎을 머금고 있는 듯한 입술, 푸른 눈빛에 인간의 것이라고 상정할 수 없는 보랏빛 머리카락.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언뜻 신선이 내려온 것 같은 분위기에 금방 압도당하고 만다. 수오. 그래, 그는 나의 수오였다.

“…네가 나를 그렇게 불러 주는 건 오랜만이구나.”

“…….”

“몸은 좀 어떠하냐.”

나는 눈꺼풀을 여러 차례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방금 무어라 했지? 설마 수오 님을, 존칭이 아닌 수오라고.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닫고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다시 쓰러지듯 베개를 벨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게, 아랫도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따가움이었다.

“윽……!”

“움직이지 말거라.”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내 하반신을 흘끔 했다. 다행히 몸은 이불로 덮여 있어 더 추한 꼴을 수오 님에게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 몸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이 뻐근함의 정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게 깜빡이고 있는데,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어제 내 방문 앞에 쓰러져 있더구나. 빈혈이라도 든 건지. 우선 처방받아 온 약은 여기 두었다.”

“…어제.”

어제. 그 한 단어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무언가, 분명 잘못됐어. 나는 어제…….

“백준…….”

“기억이 난 모양이구나.”

나는 작게 끄덕였다. 어제 백준이 이곳에 다녀갔었지.

“자아, 어서 약을 들어라. 이거면 나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손바닥을 벌렸다. 손바닥에는 그가 준 정으로 된 약재가 있었다. 나는 그걸 물 없이 입안에 우물거리며 다시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수오 님은, 백준과 해 버린 거야.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깊은 정사를 벌인 것이다. 그 증거로 아까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 안 그득히 밤꽃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낮 기운의 습기와 더불어 그 진득한 향은 더욱더 내 코를 찔렀다.

“…환기를 좀 시켜야겠구나.”

“아, 제가!”

“아직 움직이면…….”

“으흣!”

나는 다시 이불 위로 고꾸라졌다. 그는 안타까워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 고운 얼굴에 그어진 걱정이 창가로 비치는 하늘보다 더 청청하다.

“저… 수오 님. 호, 혹시 어젯밤 제가.”

나는 목소리를 떨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난동을 피운 것은 아니었을까. 어제 생각해 보면 백준과 수오 님의 사이를 질투해서 엄청난 계획을 꾸민 것 같다. 그걸 실행하지는 않았겠지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몽롱하고, 무언가 흐릿한 감각이었지만 어딘가 자꾸만 불안했다. 나는 혹시 어젯밤 무언가를 범하고 만 것은 아니었던 걸까.

“누야.”

수오 님이 내 얼굴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나는 시선을 내려야 하는 것도 잊고 어느새 빤히 그의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아픈 것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정취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눈이 많이 부었어. 어젯밤 너무 많이 울어서.”

“네?”

“하지만 너에겐 그게 더 어울리더구나.”

무슨 말일까.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짚이는 데는 없었다. 혹시 백준을 쫓아가다가 넘어지고 난 뒤의 일을 말씀하시는 걸까. 분명 그때 억울하고, 비참해서 홀로 눈물을 흘렸었다. 그를 백준에게 보내기 싫어서. 그의 정사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죄송해요.”

나지막이 속삭이듯 그에게 사과했다. 그로선 남자와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가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그를 귀찮게 만들어 버렸다. 어쩜 이렇게 하찮은 시종인가. 스스로가 못나, 그 못난 모든 구석이 비수가 되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것 같다.

“오늘은 모두에게 쉰다고 일러두었다. 곧 큰 접대가 있을 터이니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아…….”

얼빠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큰 접대. 곧 수도에서 알아주는 가문의 공이 이곳으로 온다. 거물을 맡기 위해서 잠깐의 휴식이 허용되는 듯했지만 내겐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수오 님…….”

“그래.”

“수오 님은, 그 남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다소 긴장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꿀꺽하고 침이 삼켜진다. 그의 대답이 지금 이 순간만큼 기다려졌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큰 어르신 말하는 것이냐.”

“네…….”

당당하게 물어 놓고 나약하게 대답이 기어들어 갔다. 왜 이렇게 양심이 쿡쿡 찔리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그 질문 안에 담고 있는 흑심 때문이겠지. 마음속이 흑칠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분명 조정에서 크게 활약하는 가문의 남아라고 했지.”

“…수오 님은 그분의 용모를 아시나요?”

“용모?”

수오 님의 한쪽 눈썹이 평소와 다른 각도로 올라갔다. 아차. 그제야 실수했음을 깨닫는다. 너무 주제넘어 보였을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와 나 사이에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역시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이 물어서.

“죄, 죄송…….”

“그자가 많이 궁금한가 보구나.”

“그게 아니라 저…….”

“돈이 많은 귀족 자제라서 탐이라도 나는 것이냐. 하긴, 그 같은 인물이 이곳에 오는 게 흔치는 않지.”

“수, 수오 님. 저는……!”

“하지만 아서 거라. 너는 내 시종일 뿐이야. 그 남자는, 너와 달라.”

그런 것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가슴을 부여잡고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러나 열이라도 난 듯 답답하고 알싸했다.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그는, 내가 설령 시종에 불과하더라도 언제나 날 그 이상의 것으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딘지 성난 것처럼 나를 뜨겁게 대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롭게 선 목소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수오 님…….”

“누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계속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로 애꿎은 손을 뜯었다. 너무도 두려웠다.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됐을까.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았다.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이라면 나는 또다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두 눈동자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명령은 거부할 수 없다. 나는 시간을 끌어 고개를 들었다. 교묘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코끝을 쳐다본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를 경멸하고 있을 저 눈동자가.

“나를 봐야지. 제대로.”

“…….”

힐끗 본 그의 눈동자는 타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 이끌려 두 번 다시는 시선을 접지 못했다. 그가 따가웠다. 이미 그를 향한 내 마음부터 가시처럼 따끔할 것인데 새삼스레 다시금 아파졌다.

“알겠느냐. 너는 나의 시종이다.”

나는 눈짓으로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니, 이 소설 속에 태어난 이후부터 쭉 명심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분은 내가 모실 분이지 네가 모시는 게 아니야. 착각하지 말 거라.”

“…….”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울고 싶었다. 그분은, 수오 님이 모실 분이다. 그의 것이다. 그의 사랑. 곧 나를 떠나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오 님.

알고 있어. 정말로 충분히. 지독히 알고 있다고.

“그러니 너는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절대, 따로 행동하지 말 거라.”

“……네.”

비로소 그가 만족한 듯 미간에 지었던 주름을 폈다. 이제 원래대로의 그였다. 그는 일어서서 채비를 챙겼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좇았다. 오늘은 또 어딜 가시려는 걸까. 쉬어도 된다고 했었는데. 혹시 백준을 찾아가는 건.

“약효가 들고 있을 터인데.”

그가 날 보면 말한다. 그의 말대로였다. 조금 전부터 아래의 감각이 나아지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걸까. 새삼 그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 때였다. 약간의 얼얼한 통증은 있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었으니까.

“오늘 시내에 축제가 있는 모양이더구나.”

“축제요?”

나는 이불을 개다 말고 수오 님을 바라봤다. 이 마을은 축제가 드문 곳이었다. 황폐할 정도로 마을에는 창관과 조그마한 시장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건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남자를 사려고, 자신의 성 욕구를 음지에서 풀려고 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놀라웠다.

“마을에서 씨를 품을 여자를 데려온 듯하구나. 그래서 오늘 창부들과 주선을 시켜 줄 모양이야.”

“아. 그렇구나…….”

나는 어색하게 미소했다. 이 BL 소설 속에서는 두 가지의 여성만이 출현했다. 하나는 나 같이 창부들을 곁에서 보필하는 여자 시종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대로 창부를 만들기 위해 그 씨를 품는 씨받이였다. 그리고 오늘 축제가 바로 그 씨받이 여성들을 맞이하는 마을의 축제인 것 같았다. 엄선한 창관의 창부들과 씨받이로 데려온 여성을 접 시키는 축제.

“같이 가서 보자꾸나.”

“저, 저랑요?”

“응.”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수오 님의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종류의 축제인지는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 간 지 오래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갔다.

“네.”

혹여 표정을 들킬까 봐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귀까지 벌게진 느낌이 들었다. 이내 수오 님의 옷자락 소리가 사락사락 기분 좋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다. 이제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 * *

그를 따라나선 축제 장소는 제법 북적한 느낌이 들었다. 마을 사람의 절반 정도는 이곳에 모인 것 같다. 이렇게 큰 축제가 있다는 걸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을까. 아직 소설 속에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널 잃어버릴 것 같구나.”

수오 님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고운 손등을 보고도 두 눈을 말똥말똥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저 손을 잡을 엄두는 내지 못한 채. 그러자 보다 못한 수오 님이 먼저 내 손을 잡아채 갔다. 그의 따듯한 체온이 대번에 내 작은 손을 감쌌다.

“…아.”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쾅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심장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었다. 설마 이 심장 소리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건 아니겠지.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힐끗 옆을 쳐다봤다. 그는 다행히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구나.”

나는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순식간에 인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눈앞의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보기에도 서른 명은 돼 보이는 여자들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여자들이었다.

“수도에서 왔다고 하더구나.”

수오 님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곧 여자들을 사이에 두고 창부들이 등장했다. 모두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서른 명의 새로운 창부들이 잉태될 것입니다.”

가장 앞쪽에 있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굵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소란스러웠던 군중들이 곧장 입을 다문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귀가 먹먹했다. 봐서는 안 될 것들을 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곳 세계관이란, 한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짓도 감행해야 할까. BL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이 왜 하나같이 남색을 하는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정말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창부로 자라나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색은, 이 소설 안에서 쭉 만들어져 왔던 것은 아닐까.

“그럼 삽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의 말에 소복을 입은 여자들이 일제히 다리를 벌렸다. 그들 모두 속곳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여자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체념하고,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는 일들을 관망했다.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 사실 그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 수오 님…….”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하고 쥐었다.

“왜 그러느냐.”

“저기…….”

그를 불러 놓고 다시 목소리를 떨었다. 보고 싶지 않아. 이상해. 저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야. 하지만 그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다만 마음만 급할 뿐이었다.

“괜찮아. 누야.”

그가 내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맑은 미소를 짓는다. 이런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순간 그와 나 둘만 다른 세상에 떨어진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커다란 목청에 그 착각도 깨어졌다.

“거기 세 번째 창부. 주의하시오. 씨받이와의 관계 중에 신음을 내선 안 되오.”

나는 세 번째 창부를 눈으로 찾았다. 관계는 한없이 조심스럽고 천천히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남자는 어딘지 힘들어 보였다. 그에게는 처음일 여자와의 관계. 어쩐지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쯧, 안 되겠군.”

두루마기의 남자가 세 번째 창부의 상복을 붙잡고 끌어내린다. 그리고 여자 역시 또 다른 누군가가 데리고 나갔다. 창부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발작한 모양이구나.”

“발작… 이요?”

수오 님은 마치 남자를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설명했다.

“평생을 남색이라 믿다가 처음 여자를 접하니 충격받은 게지. 여자에게 흥분한 남자는 저렇게 실패한 종자 취급을 받아. 이곳 창부로서의 가치도 곧 떨어질 거다.”

그때, 끌려갔던 여자가 다시 군중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얼굴이 희멀겋게 변해서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리를 벌렸다. 이윽고 새로운 창부가 등장했다. 의식은 곧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는 사라진 창부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잉태된 아이들은 다시 마을을 지탱하는 창부가 될 거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도 욕정 하는 것도 사내뿐이겠지.”

“…….”

“무엇을 생각하느냐. 누야.”

“…저는.”

나는 막연히 입술을 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하지만 신기하게도 입술을 연 순간 말은 그 앞을 한참 달려 나갔다.

“…불쌍해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분명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다 말로 하고 나니 가슴이 시원했다. 애초에 이곳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도. 너희들도 어쩌면 나와 함께 벌을 받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이 정해진 운명 밖으로,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원하던 사람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완벽한 결실을 보기 위해서.

“…그렇구나.”

그의 입가가 굳어졌다.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서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나를 꽉 붙잡고 있다. 손바닥이 허옇게 변하고, 피가 몰린 살점은 퉁퉁 불어 있었다.

“허나,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이지.”

나는 맞잡은 손을 그저 바라봤다. 뺄 생각도 뿌리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리만 벌리면 자유보다 더 큰 걸 얻을 수 있을 텐데 무엇하러 벗어나겠느냐.”

“…자유보다 더 큰 것?”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받기만 하면 돼. 입을 옷도, 잘 곳도 신경 쓰지 않고. 그러니 자유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게 수오 님의 진심이었다.

그는 창부로서 이 마을에서 갇혀 있다가, 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 물정에 밝은 공은 수오 님에게 귀인 그 자체였고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운명이다.

그러나 그 엄중한 말에 풀이 죽는다. 무엇을 실망하는 것일까. 이미 그만한 각오를 하고 있었을 텐데. 시간이 좀 더 빨리 앞당겨진 것일 뿐 그 무엇 하나 바뀐 것은 없었다. 내가 할 일이란,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될 뿐.

“…수오 님은 행복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말이 앞서 나갔다. 재빨리 입을 가려봐도 이미 튀어 나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본다. 나는 얼음처럼 굳어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행복이라.”

그는 의식 행렬을 바라보며 내가 던진 말을 읊조렸다. 감문(感文)하는 듯이.

“지난날 동안 죗값은 모두 치렀으니 곧 그리되겠지. 이제 드디어 모든 걸 가지게 될 테니.”

나는 수오 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죗값. 혹시 그에게 내가 모르는 빚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내가 알기로 가장 자유로운 창부 중 하나였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

“…무엇이 가장 가지고 싶으십니까?”

그가 지금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공이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굳이 수오 님에게 물었다. 그는 또 나를 본다. 푸른 눈빛에 잠식해 버릴 것만 같은, 긴 정적이 흘렀다. 심장 소리가 귓가를 건든다. 쿵. 쿵.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의식 거행을 마칩니다. 오늘부터 매 정(正)시에 합방이 있을 거니 참관자들은 덕화원으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의식이 끝났다. 수오 님은 내게 향했던 눈을 거두고 앞을 보았다. 나 역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여인과 창부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정사를 나눈 사람들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들이었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지겠구나.”

“아, 네…….”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수오 님이 가지고 싶은 것. 그게 무엇이든 내가 구해다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한껏 쥐어다 드렸을 텐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론 비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공과 만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그가 바라는 것이 그 남자가 아닐 수도 있을 텐데.

“너와 함께 오를 데가 있다.”

“오를 데요?”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빨랐다. 하지만 내 박자에 맞추어 준다는 걸 알고는 옅게 미소가 퍼졌다.

“동산에 오를 것이다. 그곳에서 가장 잘 보인다고 하기에.”

“예?”

무엇이 잘 보인다는 걸까.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그가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어. 그리고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었다.

“밤별 놀이를 한다 더구나. 너와 함께 보고 싶었어.”

밤별 놀이. 그건 불꽃놀이의 이곳 말이었다. 나는 함박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누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뛰어가듯 그의 옆을 걸었다. 동산 위를 오를 때까지 힘든 줄도 모르고, 나는 그의 옆을 음미했다. 줄곧 기다려 왔던, 그와의 오롯한 시간을 허무하게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처음으로,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 * *

왜 불꽃놀이가 이곳에서는 밤별 놀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별로만 수놓아진 고요한 밤하늘에, 붓으로 그리는 것 같은 또 다른 별들. 화려한 도시의 분위기와는 다른 고즈넉한 느낌이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동산 위에서 나는 지금 수오 님의 옆에 있다. 이대로 별이 몇 개인지 세면서 계속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갔다. 아름다웠다.

“…수오 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 전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수오 님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

사랑해요. 하마터면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저 지긋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책임한 용기라도 난 걸까. 어두운 탓에 그가 그림자처럼 보였다. 푸른 눈빛만이 밤별처럼 형형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수오 님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까지 빨개진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누야.”

그가 나를 불렀다. 심장이 뛰었다. 숨을 멈춰서 달래보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의 손끝을 바라봤다.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내 마음을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큰 어르신을 모시기로 한 건 보상이 컸기 때문이다.”

예상 밖의 말에 눈이 동그라진다. 특별히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까지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이 다시 저릿해졌다.

“나는 곧 이곳을 떠날 거란다.”

“…네?”

박동 수가 고장 난 것처럼 뛰었다. 떠난다니. 이곳을. 왜?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그 아이들처럼 되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소설 내에서도, 그는 화향관의 창부로서 시작한 등장인물이었지 다른 설명은 없었다. 그래서 멋대로 수오 님도 다른 창부들과 같이 이곳에서 태어난 줄만 알았다.

“그, 그렇지만.”

이것이 소설의 전개 내용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소설 속에서 수오 님은 공을 만나 이곳에서 오로지 공만을 맞는 창부가 된다. 그러다가 공이 수오 님을 사들여 수도로 함께 데려가는 조금은 진부한 줄거리였다. 수오 님 혼자 스스로 이곳을 벗어나는 선택지는 소설 속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그는 공의 남자였고, 공이 하는 선택의 보상이었다.

“너는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

벗어난다니. 그런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살을 한 벌을 받는 중이라고, 그래서 BL 소설 속에 들어와 버린 거라고, 이미 자기 합리화는 끝난 상태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자유라는 걸 상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만 금단의 열매처럼 수오 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나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글쎄.”

수오 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어디든 좋겠구나.”

바람 소리에 휘날려 수오 님의 말이 퍼져 들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오 님은 정말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렇구나. 결국, 그는, 공이 오든 오지 않든 이곳을 떠날 작정이다. 우리는 이어질 연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거였다.

“…네.”

무슨 말에 대답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나직이 읊조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늘에 잠깐 뜨는 불꽃들처럼, 그 역시 나의 이야기에서 잠시 뜨고 마는 별이었다. 그런 별이라면, 그런 밝음이라면 차라리 지금부터 보이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나면 그는 밝게 빛나고 있다. 푸른 눈동자가 내 눈앞에 있다.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이틀이겠구나. 누야.”

나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욕심내지 마. 더는 희망을 품지 마. 주제넘게, 소설의 내용을 바꾸려 하지 마. 오늘 밤만 지나면 이틀이다. 수오 님의 말을 되감아 본다. 어찌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내 마음은. 나는 방랑자처럼 애타는 마음을 붙잡고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모래 속에 묻을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우물을 구할지는 나의 유일하게 남은 자유의지였다.

“수오 님.”

그의 손끝이 머리카락 끝에 머물러 있다. 그도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어딜 가시든 잘되시길 바랄게요.”

아니. 가지 마세요. 내 곁에서 떠나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그 한마디가 도무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정말 바보구나.”

수오 님은 입술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내뱉지 못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바보였다. 겁이 났다. 별들은 내게 속삭였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마. 너의 마음을 비치지 마. 수오 님의 행복한 결말을 망가뜨리지 마.

밤은 다시 아침이 된다. 이 한 밤의 꿈이 끝나면 소설의 끝이 다가오듯 다시 수오 님을 위한 무대의 막이 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는 참고 있을 작정이었다.

그래, 정말로 그럴 계획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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