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반려 (9/12)

8. 반려

일주일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부터 에이든의 행동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보호가 심해졌다고 해야 할지, 이전에는 정기를 취할 때가 아니면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떨어져 있는 게 더 이상할 만큼 어딜 가도 꼭 곁에 있었다. 사역마를 붙이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면서, 꼭 제 눈으로 잘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다며 꾸역꾸역 옆에 달라붙어서는 뭘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식사를 할 때면 고기를 잘라다가 직접 입에 넣어 주질 않나, 옷 갈아입는 것도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목욕 시중도 늘 하던 사역마가 아닌 에이든이 직접 나섰다.

늘 사역마에게 시키기만 했지 자신이 직접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이 처음이라 여러모로 서투른 점이 많았다. 목욕물 온도를 잘 못 맞춰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기도 했고, 몸을 씻겨 낼 때 힘을 너무 쓰는 탓에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레인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은 미숙하고, 때로는 귀찮기도 했지만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에이든의 다정한 배려를 받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기도 했고, 한껏 걱정을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인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침대 위에서의 에이든의 태도가 180도로 완전히 달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예전에는 그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희롱하고 능욕하기 바빴는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로는 딱 한 번, 한 번으로 그쳤다.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 내뱉었던 각종 음담패설이나 소유욕이 짙게 느껴지던 말들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는데, 처음 한두 번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것이 계속되니 오히려 미칠 것 같았다.

좋긴 좋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밍밍한 느낌이었다. 온갖 멋들어진 재료들은 전부 넣어 놓고서 정작 소금 간을 빼먹은 듯한, 그런 느낌.

지난 4년 동안 해 오던 것이 있었는데 한 번만 하고 끝내기에는 영 몸이 근질근질해서 에이든에게 정기가 부족하지 않느냐고, 에둘러 한 판 더 하자고 살살 꼬드겨도 에이든은 더 말이 나올 새라 칼같이 거절했다.

“너 그러다가 또 쓰러지면 이번에는 내가 미칠 거야.”

“저는 정말로 괜찮은데…….”

“잔말 말고 몸 다 나을 때까지 시키는 대로 해.”

에이든은 쓰읍, 하고 혀를 차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헐벗은 레인의 몸을 이불로 꽁꽁 싸맸다. 롤 케이크처럼 두터운 이불에 둘둘 말린 레인은 조금 섭섭했다. 이전처럼 지쳐서 쓰러질 만큼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은데 그마저도 못 하겠다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이.

“기절할 만큼만 안 하면 되잖아요. 적당한 섹스는 건강에도 도움이…….”

“안 된다니까.”

“…….”

“한 번만 더 그러면 내일 하루 종일 털끝 하나도 손 안 댈 거니까 알아서 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레인은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툴툴거렸다.

예전에는 더 하기 싫다고, 그만해 달라고 사정을 하고 고개를 저어 대도 기어코 해 댔으면서, 이제는 하고 싶다고 해도 안 해 주는 것이 속상했다.

물론 에이든의 마음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깨지도 않고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만 있었으니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평소보다 자제하고 조심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았는데, 일어난 것이 기적에 가깝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요한이 썼다던 마비 독이 하필이면 자신의 체질과는 상극이었고, 거기에 오래 쌓인 피로와 정신적인 충격이 겹쳐 회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였다고.

그래서 어떻게 깨어나기는 했으나 체력적으로는 거의 한계나 다름없으니 푹 쉬고 많이 먹고 무리하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재차 강조하며 의사는 처방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이런 충격적인 진단 결과와는 달리 레인의 몸은 가뿐하다 못해 쌩쌩하기 그지없었는데, 사역마에게 귀띔을 받기로는 아무래도 에이든이 자신이 잠든 동안에 걸었다던― 상당한 마력을 필요로 하는 회복마법 덕분인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회복마법이라도 근본적인 피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겉만 멀쩡하지 속은 의사의 소견 그대로나 다름이 없을 거라고도.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요 근래 조금 무리하게 정기를 바치기도 했고, 또 쓰러지기 전에는 거의 쉼 없이 에이든을 받아 내는 바람에 스스로도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납득은 됐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거친 정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에이든 님께서 이렇게 절 이렇게 만드셨잖아요. 책임져 주세요.”

“하아…….”

“그리고 에이든 님도 정기, 좀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한 번 정도 더 한다고 죽지 않아요, 저. 그러니까 딱 한 번 만요. 네?”

생전 없던 레인의 투정에 에이든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양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레인을 쳐다보았다.

레인은 새하얀 이불에 돌돌 말려 모양내기에 실패한 엉성한 생크림처럼 침대에 앉아서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를 별빛처럼 빛냈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을 향해 양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당겨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레인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했다.

“내일은 정기 섭취 없어.”

“……?!”

“물론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고.”

“자, 잘못했어요. 그것만은 제발…….”

“물론 키스도 없어. 오늘 굿나잇 키스가 마지막 키스가 되겠네.”

“키스도 안 하는 건 너무 해요.”

이불에 말려 있어 손을 쓸 수 없는 레인이 쭉 뻗은 다리로 침대를 팡팡 치며 항의를 했지만 에이든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이 활짝 웃어 보이고는 성질이 난 듯 주름진 레인의 이마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유유히 방을 빠져나왔다.

“잠옷 가지고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그렇게 방 안에 혼자 남은 레인은 억울해져서 다시 한번 다리로 침대를 팡팡 걷어차며 괜한 침구에 분풀이를 했다.

자신의 유혹이 좀 끈질겼기로서니 어떻게 정말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할 수가 있는지, 악마 아니랄까 봐,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방식의 정기 섭취 방법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애태웠다 먹으면 더 맛있나?”

그렇게 중얼거린 레인은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와 제 살갗에다가 코를 박고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좀 전에 욕조 한가득 풀었던 향유와 정원에서 따온 꽃잎 향이 날 뿐, 구미가 당기는 듯한 향은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혹시 몰라 혀를 내어 날름 핥아 봤지만 이렇다 할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살다 살다 에이든에게 제발 해 달라고 매달리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겪게 될 줄이야.

가슴 속에 이는 분을 삭이기 위해 거친 콧김을 내뱉으면서도 레인은 얌전히 침구를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에이든이 제게 입힐 잠옷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딱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 잠옷을 갈아입은 레인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에이든의 옆자리에 조용히 누웠다.

에이든은 사람이나 물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불빛만을 남겨 두고 모든 빛을 꺼 두었다. 서서히 시간의 흐름에 깎여 나가고는 있다지만 가끔 지하실에서의 일이 떠오를 때면 어둠이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든의 과보호는 어느 정도 레인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곁에 에이든이 있고, 언제든 자신을 구하러 와 줄 거라고 생각하면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기에. 게다가 실제로 자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았던가.

레인은 제 곁을 지키며 말없이 책장을 넘기는 에이든의 옆모습을 한참 동안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듯한 콧날에 옅은 불빛으로 인한 음영이 졌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은 석고상의 그것처럼 반듯했고, 책의 활자를 쫓는 시선에 드리운 짙고 풍성한 속눈썹은 여자인 자신이 봐도 탐이 날 정도였다.

자신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마계의 문자로 쓰인 책을 가만히 넘기는 에이든의 옆모습은 이지적인 학자와 같았으나 학자라고 하기에는 비현실적인 외모라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명화 느낌에 더 가까웠다.

‘하긴, 우리 교수님만 보더라도 외모가 너무 다르긴 하지.’

레인은 졸음이 몰려오는지 점차 묵직해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았지만 건강 문제니 뭐니 하며 차일피일 미뤄 뒀던 물음을, 오늘만큼은 꼭 입에 담아 보리라 다짐했기에.

에이든의 곁에 몸을 찰싹 붙인 레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잠기운과 약간의 용기를 빌려서.

“…에이든 님.”

“왜.”

“요한은 어떻게 됐어요?”

“…알고 싶어?”

“네.”

“행방불명됐어. 가족들도 찾다가 포기한 모양이고.”

에이든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지만 레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행방불명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요한이 살아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일은 영영 없겠구나, 하고.

한참 동안 옅은 숨소리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고요가 이어지고, 이내 레인이 그 정적을 가르고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에이든 님이 죽였어요?”

“…그래.”

이전과는 달리 약간의 침묵 끝에 망설임을 담아 대답하는 에이든을 향해, 레인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좀 더 기쁘게 웃고 싶었지만, 수마가 밀려드는 탓에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짓는 것이 최대였다.

“다행이에요. 다시 만날 일은 없어서.”

“…….”

“그런데 혹시 유령이 돼서 제 앞에 나타나면 어쩌죠?”

“그럴 일은 없어. 그 정도 영혼이면 곧장 지옥에 떨어질 테니.”

“지옥에서 다시 돌아오면요?”

“그때 가서 또 죽이면 되지.”

“이미 죽었는데, 다시 죽을 수 있어요?”

“죽는다기보다는 소멸에 가깝지만.”

“그렇구나.”

에이든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은 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이든은 어느새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조심스레 레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두툼하고 따스한 손길이 제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불안도 조용히 가시는 기분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스르륵, 제 머리칼 사이사이로 스미는 온기가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사이, 에이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섭지는 않아?”

“왜 무서워요?”

“보통 인간들은 제 동족을 죽이는 존재를 두려워하던데.”

“으음…….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요한은 괜찮아요. 죽었다고 해서 딱히 동정심이 들거나 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

에이든은 그렇게 싱거운 대답만을 남기고는 자리에 누워 레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은 뒤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레인은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체취와 온기를 따라 몸을 바싹 붙여 그 너른 등에 팔을 둘렀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의문 하나가 해소되었을 뿐인데, 놀라운 만큼 깊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오늘 밤은 지하실에서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양이라는 목적으로 아카데미에서의 학업을 잠시 쉬고 줄곧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레인은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햇볕이 따사로운 낮 시간에 맞춰 가벼운 산책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씩 가볍게 정기를 바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레인에게는 너무나 심심한 자극이었다.

책을 보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그렇다고 말동무를 할 만한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택에 있는 동안 가끔 시내로 외출을 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줬던 에이든은 요양을 하는 동안만큼은 절대로 저택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덕분에 레인의 요양 생활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씩 에밀리가 보내오는 편지에 답장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으나 그마저도 졸업 논문 탓에 자주 오지는 않아 레인의 무료함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에이든은 어젯밤 제게 선언한 대로 정말로 털끝 하나도 손을 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 주던 짧은 입맞춤도 가벼운 눈짓 정도로 바뀌었고, 매번 손수 입에 떠다 주던 음식들도 제 손이 아닌 다른 사역마들의 손을 빌려 했다.

너무나도 철두철미해서 레인은 되레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무슨 고양이를 약 올리는 집사도 아니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팔랑거리는 그 손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에이든의 의기양양한 미소마저도 (잘생기긴 했지만) 짜증스럽게 느껴져서 레인은 표정을 확 구겼다. 그러고는 배신감과 서운함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정말로 하루 종일 이러실 거예요?”

“뭐가?”

자신이 뭘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에이든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진작 그만뒀으면 좋았잖아.”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하자고 졸라 대던 행동에 대한 당연한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고소해하는 것 같았다.

에이든을 원하고 바라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레인은 좀 전까지 느껴졌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면서 서글픔이 몰려왔다. 고작 정기를 바치고 싶어 졸라 댔다는 이유로 에이든에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고. 그럼에도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저만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레인이 부탁했다.

“그래도… 키스는 해 주세요.”

“…….”

“키스만요. 안 돼요?”

“…이리 와.”

살짝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며 애원하자, 에이든은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듯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레인을 응시하더니 이내 제게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면 레인은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 해맑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사의 흔적이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팔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에이든의 목에다 두른 채였다.

에이든은 짙은 잿빛 눈동자로 레인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새벽 하늘빛을 닮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약간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길을 너무 잘 들였나. 이러다가 나중에 사바트에 가고 싶다고 조르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음, 아무리 그래도 사바트는 좀…….”

“왜? 누누이 말했지만 마계에 가면 다들 네 정기 먹겠다고 짐승처럼 달려들 텐데. 이 아랫배에,”

에이든은 잠시 말을 끊고 레인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통통 두들겼다.

그 경쾌한 손놀림과는 달리 뒤이어 이어지는 말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귀가 간질간질해질 만큼 야한 음담패설이었다.

“정액을 가득 못 채워 안달일걸.”

그렇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요사스러웠다.

순간 레인은 제 아랫배에 가득 부어질 정액을 상상했고, 여러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질펀한 정사를 벌여 댈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악마들은 억지로 제 다리를 벌리고서 빳빳하게 선 성기를 제 구멍에다 박아 댈 테고, 자신의 자궁에다 끊임없이 정액을 쏟아 낼 것이다. 구멍이 정액을 다 삼키기 못하고 꿀렁꿀렁 넘쳐흐를 때마다 에이든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엉덩이를 내리칠 것이고, 그때마다 내벽이 수축하는 바람에 정액을 다 먹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더 달라며 졸라 대냐며 타박하겠지. 그러면 자신은 울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할 테지만, 입을 여는 순간 다른 악마의 음경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변명은 그대로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질 것이었다.

그런 난잡한 정사의 장면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아래가 젖어 들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에이든의 코끝을 간질이는 레인의 정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해져서 순간 숨을 참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제아무리 요즘 욕심껏 레인을 안지 않았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이만큼 정기가 달큼해질 수 있는지, 에이든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자신에게 잘 길들여졌다는 얘기겠지만, 이래서야 다른 악마들도 군침을 흘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순간의 반항이라도 사바트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어떡하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불안에 에이든의 눈빛이 점차 수심에 잠겨 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 레인은 잠시지만 행복했던 상상에 마침표를 찍고서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에이든의 걱정과는 달리 그를 안심시켜 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다른 악마들과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왜?”

“전 에이든 님의 마녀이기도 하고… 그리고…….”

에이든의 반문에 말꼬리를 주욱 늘어뜨리며 한참을 입술을 달싹거리던 레인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에이든의 가슴팍에다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전 에이든 님이 해 주시는 게 가장 좋아요.”

“…….”

“제가 건강해지면, 꼭 해 주세요.”

에이든은 대답 대신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레인의 턱을 들어 올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꼭 듣고 싶었던 말을, 참으로 사랑스럽게 말해서 상이라도 주듯 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레인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어 입 안의 여린 살덩어리를 유린했다.

“흐… 읏.”

점차 더운 숨이 섞여 들고, 혀가 서로 얽히면서 다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러 레인의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에이든의 혀가 레인의 입술과 혀를 물고 빨 때마다 옅은 신음이 흐르면서 몸을 바르작거렸다. 얕고 가벼운 흥분이 전신에 일었다.

그러면 에이든은 레인의 등허리를 퍽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토닥이면서도 거칠게 레인의 입 안을 구석구석 범했다.

마침내 에이든이 진하게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떼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레인의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훔칠 무렵엔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는 쾌감에 흐물흐물 녹아 풀어져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레인의 눈빛에는 좀 더 해 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기서 더 했다가는 제 인내에도 한계가 올 것이 분명했다.

에이든은 레인의 기대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더는 안 돼.”

“…….”

“그래도 오늘만 잘 참으면 좋은 거 줄 테니까.”

“좋은 거요? 좋은 게 뭔데요?”

이번에는 실망감 대신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레인이 물었지만 에이든은 생글생글 의미심장한 미소만 띨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차 물어봐도 그저 좋은 것, 이라는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좋은 게 뭐지?’

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에이든은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 같이 있을 수 없다며 사역마를 곁에 붙여 줄 테니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서 침실을 나섰다.

에이든이 제 곁에 붙여 준 사역마는 역시나 그렇듯 늘 보던 무르핀이었다. 최근에서야 사역마의 이름을 알게 된 레인은 제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무르핀에게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에이든 님께서 뭐 선물 같은 거 준비하시는 거 있나요?”

“…….”

“좋은 거를 주신다고 하는데, 뭘 주시려는 건지 영 감이 안 와서요.”

레인의 물음에 언제나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서 한 치의 미동 없이 반응하던 무르핀은 양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에이든이 사역마들에게 레인의 선물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지만 짐작이 가는 바가 영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인 몰래 주문한 반지가 도착한 지도 꽤 되었고, 그걸 언제 전해 주면 좋을지 고민하던 에이든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지난번처럼 채찍질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괜한 걸 물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그저 예의상 사용인들이 으레 하는 말에 불과했으나 레인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순간 무르핀은 레인의 사고를 읽을 수 없어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제게 물어볼 게 뭐가 더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리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거듭하던 레인이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악마의 마음을 동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르핀은 아주 드물게 황당한 기색이 역력하여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레인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에이든의 여자 취향을 물어보는 건,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번 질문만큼은 도저히 그 의중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제게 꽂히는 무르핀의 시선에 레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악 달아올랐다. 당황한 레인은 황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게요……. 에이든 님이 오늘 저한테 털끝 하나 손대지 않을 거라고 해서요. 요즘 들어 정기 섭취도 덜하셔서… 그래서 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유혹이란 걸 해 볼까 해서……. 이상한가요?”

이제껏 정기를 바치기 싫어서 도망간 먹이와 마녀가 다 합쳐 세 자릿수는 훨씬 넘어가며, 개중에는 어느 누구도 악마의 정기 섭취를 걱정하며 정기를 더 바치기 위해 악마를 유혹하겠다는 담대한 생각을 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노라 말하고 싶었지만 무르핀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레인은 자신이 봐 온 인간들 중에서 가장 이상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 주인도 만만치 않았다.

정기 섭취를 제 스스로 자중하는 악마라니. 다른 악마들이 들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코웃음을 치거나 비웃음을 당할 일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언제나 레인의 앞에서만 한없이 물러졌고, 한없이 이상하게 행동했다.

무르핀은 말없이 눈앞에 있는 레인을 바라보았다. 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한 질문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옅은 한숨을 삼킨 무르핀은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요…….”

부쩍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무르핀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허튼소리를 함부로 하실 분이 아닙니다. 얌전히 기다리시면 아마도 그에 상응하시는 것을 드릴 겁니다.”

“하지만 뭘 주실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레인 님께서는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하는 거라…….

솔직히 말하면 레인은 달리 필요한 것이 없었다. 에이든과 계약을 하기 이전에는 많은 것이 부족한 삶을 살기는 했지만, 지금은 용돈도 차고 넘쳤고 옷도 여러 벌에, 원하던 아카데미도 다니고 있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삶은 풍족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저를 갖겠다며 지하실에다가 가둔 요한도 이미 에이든의 손에 죽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원하는 게 있다면…….

“…에이든 님이요.”

“…….”

“에이든 님을 저만의 것으로 만들기는 좀 힘들겠죠? 아, 지난번에 가르쳐 준 에이든 님의 이상형은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요즘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라…….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점입가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레인의 말에 무르핀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지만 아무리 봐도 저를 놀리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자신의 주인이 제 손안에 다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하지만 일전에 자신이 말해 주었던 제 주인의 이상형이 뭔지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이 레인 본인임을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고서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레인은 인간의 감정에 둔한 편인 자신보다도 에이든의 감정에 무심한 것 같았다. 아무리 표정을 살펴봐도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에이든을 함락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레인의 눈동자가 그러한 무르핀의 판단에 확실히 쐐기를 박아 주었다.

이런 무르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인은 에이든을 손에 넣을 방법을 같이 궁리해 주면 안 되겠냐며 먼저 제안을 해 왔다.

“점심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고, 에이든이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비웠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도움을 못 받을 것 같아서요.”

“…….”

“그래도 무르핀이 저보다는 오래 에이든 님을 봐 왔을 테니까, 어떻게 머리를 맞대면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곤란한 듯 시선을 도르륵 굴린 무르핀은 레인의 설득에 못 이겨 끝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자신의 조언을 얻는다고 해서 딱히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자신의 주인을 손에 넣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짤 필요도 달리 없어 보였으나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레인은 무르핀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조금 긴장한 듯 어색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활짝 피더니 가볍게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럼 우리 같이 앉아서 잠시 얘기 좀 나눠 봐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가 무르핀의 어깨를 눌러 반강제로 앉힌 뒤, 어떻게 하면 에이든이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할 수 있을지, 누구보다도 즐거운 얼굴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무르핀의 눈과 귀를 통해 레인의 즐거운 재잘거림을 듣고 있던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자신의 사역마를 데리고서 끙끙대지 않아도, 오늘 하루만 넘기면 어련히 원하는 것을 품에 안겨 줄 텐데.

영 참을성 없는 건지, 마냥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직접 저를 쟁취해 보겠노라 덤비는 레인의 진취적인 행동이, 이상하게도 에이든은 제법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웃었다.

“뭘 봐?”

그의 느닷없는 웃음에 몇몇 사역마들이 에이든을 조심스레 흘깃거렸으나 에이든의 건조한 시선이 주변을 한 번 쓱 훑자, 다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서 원래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던 그는 저택의 정원 손질과 내일 레인에게 건네줄 ‘좋은 것’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즘 들어 사바트 초대장이 날아오는 횟수가 부쩍 빈번하게 늘어 더 이상 레인을 반려로 맞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편지를 인내심을 갖고 처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또 비싼 거금을 들여 맞춘 반지를 언제까지나 제 품 안에서 썩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계절에 맞추어 정원에 심는 꽃과 나무의 종류를 바꾸고, 느긋한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새로 맞추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오긴 했지만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서 본격적으로 정원을 바꾸는 건 처음이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을 거듭해 봤지만, 아주 화려하게 하는 건 도리어 레인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최대한 정원을 정갈하게 꾸미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꽃은 장미로 모두 통일하되 색은 적절하게 섞고, 테이블은 레인이 세 명쯤 나란히 누워도 남을 만큼 더 크고 넓고 튼튼한 것으로 마련했다. 테이블보는 심플한 화이트 레이스가 섞인 것으로, 테이블의 장식은 부케를 연상시키는 은은한 파스텔빛이 감도는 꽃을 메인으로 쓰기로 했다.

에이든은 저를 유혹해 보겠노라며 이것저것 다양한 방법을 무르핀에게 제안하는 레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열심히 정원에다가 삽질을 하며 장미를 옮겨 심는 사역마들의 뒷모습을 꼼꼼하게 감시했다.

내일 완전히 바뀐 정원의 모습을 보면 레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에이든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오고 에이든과 같은 침대에 누워 새까만 천장을 바라보던 레인은 어쩌면 에이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짜로 바꿔치기 당했거나 후각이나 미각 중 어느 곳이 마비된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유혹을 해 댔는데도, 그 방법 중 어느 것도 씨알 하나 먹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반나절 내내 무르핀과 상의하여 짠 몇 가지 계획은 철옹성 같은 에이든의 철벽 앞에서 모조리 무너져 오늘 밤도 역시나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제 곁을 지키는 그의 곁에 얌전히 누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정말로 털끝 하나 손대지 않을 수가 있지?’

레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아서 부루퉁하게 삐죽 나온 입술을 숨길 생각도 않고서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시시때때로, 제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하던 것을 이제는 전혀 하지 못하게 되니 죽을 맛이나 다름이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나았을 텐데,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 놓고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니.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었다.

레인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모처럼 무르핀의 도움을 얻어 에이든 취향일 법한 드레스도 어렵게 구해 와 침대 위에서 기다렸다. 에이든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번뇌에 잠긴 얼굴로 침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것까지 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처음에는 화난 짐승처럼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에이든의 모습에 저를 덮치러 오는 줄 알고 유혹이 통했구나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레인.”

“…….”

“곧 자야 하니까 목욕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와.”

에이든은 조금 신경질이 묻어 나오는 몸짓으로 레인을 이불에다 둘둘 말아서는 욕실에 밀어 놓고는 잔뜩 흐트러진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레인이 목욕을 하다 말고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스럽게 침대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던 시선을 들어 레인을 바라보았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자신이 뭐 때문에 목욕을 하다 말고 뛰쳐나왔는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 오는 에이든의 질문에 레인은 심통이 나서,

“몰라요!”

하고 씩씩대며 쏘아붙인 뒤 도로 욕실로 들어갔다.

거품도 씻지 않고 느닷없이 욕조 밖으로 뛰쳐나간 탓에 제법 놀랐는지 무르핀이 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레인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레인은 속삭이듯이 사과의 말을 건넨 뒤 한껏 우울한 표정으로 도로 욕조에 들어가 몸을 조그맣게 옹송그렸다.

얌전히 무르핀의 손길에 몸을 맡긴 레인은 혼잣말인지 불평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글러 먹은 것 같아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냥… 다요…….”

몇 시간 전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레인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는 우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무르핀은 그녀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기분이 상했고, 따라서 기분을 달랠 만한 말을 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눈치챘지만 위로가 될 만한 말들은 대부분 에이든이 입에 담기를 원치 않는 것들뿐이었다.

에이든이 정원을 새로 정비했다는 사실과, 그 가격을 알면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향유를 와인 병만 한 크기로 주문을 넣었다는 사실과, 사역마들이 하루 종일 에이든에게 들들 볶여 팔자에도 없는 육체노동을 했다는 사실 따위는 절대로 레인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사역마들에게 내일 있을 모든 계획에 대한 것은 함구하도록 명령을 받았기에 이를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르핀은 약간 어색한 손놀림으로 레인의 우울한 마음을 대변하듯 잔뜩 굽어진 등에 따뜻한 물을 몇 차례 부으며 손놀림만큼이나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음……. 괜찮을 겁니다.”

“…낮에 짠 작전이 다 실패했는데요.”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일을 기약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르겠어요……. 도통 기운이 안 나네요.”

그렇게 침울하고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레인은 지금,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서 에이든의 곁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물론 에이든도 그런 레인의 서운함이 가득 찬 시선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일 있을 이벤트를 위해서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계획대로 레인을 자신의 반려로 맞게 되면 원하는 대로 뼈째로 발라 씹어 먹을 예정이었다.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 원망스런 눈초리에 에이든은 옅은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깊이 허리를 숙여 레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머리칼을 차분히 쓰다듬어 주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나웠던 눈초리가, 자신의 온기가 닿자 눈에 띄게 유순해지는 것에 눈에 보였다. 어쩐지 성격이 예민한 고양이를 다루는 듯한 기분에 에이든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만 참아.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식사할 테니까.”

“…….”

“그러니까 후회하기 싫으면 앞으로는 괜한 도발은 하지 마. 너도 괴롭고 나도 괴로운 짓을 애초에 왜 하는 건지…….”

“에이든 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던 말을 경청하던 레인이 물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던 목소리는 기분이 많이 풀렸는지 거의 평소와 같은 텐션으로 돌아와 있었다.

에이든이 옅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레인은 말을 이었다.

“저 오늘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 어땠어요?”

“…….”

“좀, 안 어울렸어요?”

뭘 물어보려나 했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에이든은 잠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 묻혀 있음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붉게 상기된 레인의 두 뺨을 응시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에이든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레인은 이런 질문이 새삼스레 쑥스러웠는지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고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요……. 오늘 낮에 붙여 주신 무르핀이랑 같이 여러 가지로 얘기를 나눠 봤거든요.”

“…그래.”

“무르핀이 약간 힌트를 줬는데 뭔가 마음이 동할 법한 옷을 차려입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알아서 벗기실 거라고, 그래서 해 본 건데 이상했어요? 반응이… 제가 생각한 거랑 많이 달라서요.”

“…사실대로 말해 줘?”

레인은 에이든의 진심이 궁금했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에이든은 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만큼 레인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듯 속삭였다.

“어제 해 달라고 조른 것에 대한 벌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평온하게 누워 있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러고는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레인의 배에 손바닥을 얹더니 그대로 아래로 쓸어내렸다. 얇은 천 사이로 온기가 스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 손끝이 닿은 곳은 평범한 속옷을 입고 있는 레인의 음부였다.

깜짝 놀란 레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서 그저 숨을 훅 들이마신 채로 이불 끝을 살며시 말아 쥐었다. 하루 종일 키스 말고는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새까만 어둠 속에 젖어 시각이 차단된 탓에 촉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속옷 위로 음부를 더듬는 에이든의 손길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에이든은 마치 모든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레인의 클리토리스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레인의 어깨가 순간 들썩이면서 베갯잇에 머리칼이 쓸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입술 새로 옅은 신음이 흐른 것은 물론이었다.

“흐읏……!”

“여기가 퉁퉁 부어서 더 이상은 못 한다고 울 때까지 놔주지 않았을 거고,”

“…….”

“다시는 함부로 날 도발하지 않겠다면서 허리를 흔들며 반성하게 만들었겠지.”

문장에 마침표가 찍혔을 즈음, 아래를 지분거리던 에이든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거두어졌다. 어느샌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던 레인은 정신이 몽롱하여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천 위로 닿은 것뿐인데도 왜 이렇게 흥분이 되는 것인지, 에이든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아래가 젖어 속옷은 이미 축축해져 있었다.

달뜬 레인의 표정과 호흡과는 달리 에이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레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자기 전에 해 주는― 혀를 섞지 않는 가벼운 키스였다.

에이든의 진심을 알 수 있어서 좋았고, 또 자신의 노력이 영 쓸모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뻤지만 에이든이 끝내 저를 덮치지 않는 것이 레인은 조금은 섭섭했다. 그렇지만 내일부터 다시 정기를 섭취한다고 했고, 또 해 달라고 졸랐다가 오늘처럼 식사를 안 하겠다고 할까 봐 순순히 에이든의 키스를 받았다.

그러나 그 대신 한 가지 당부는 해 두고 싶었다.

“…에이든 님.”

“왜.”

“내일부터는 식사 제대로 해 주시는 거예요.”

“…….”

“오늘 조금 섭섭했거든요. 정말 손 하나 안 대실 줄은 몰라서…….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꼭 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그러니까 어서 자.”

“네에.”

그렇게 에이든에게서 확답을 받고 나서야 레인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내일 있을 식사가 기대되는 밤이었다.

레인은 밤새 행복한 기대를 안고서 에이든의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서 일어났으나 이상하게도 옆에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이후로 일어났는데 에이든이 곁에 없는 건 처음이라 레인은 조금 당황하여 텅 빈 이부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온기가 아주 옅게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자신이 깨어나기 제법 오래전에 이미 일어난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텅 빈 자신의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대체 어디 간 걸까, 생각에 잠겨 있으려면 누군가가 침실에 노크를 해 왔다.

예의 무르핀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인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용건을 말했다.

“에이든 님께서 오늘 아침 식사는 거르신다고 하십니다.”

“네? 왜요?”

“사바트 관련으로 준비하실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건만, 이 꼭두새벽부터 식사를 거를 줄은 미처 몰랐기에 레인은 조금 풀이 죽었다. 어젯밤 내일부터는 꼭 식사하기로 약속까지 해 놓고 아침이 되자마자 약속을 어긴 것이 못내 섭섭했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에이든을 손에 넣어 보겠노라 당찬 포부를 안고 있었으나 서운한 상황이 계속되니 마음이 꺾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저보다 몇 배는 더 방탕하게 살았을 악마를, 이제 스물넷을 넘긴 자신이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무르핀은 어제와 비슷한 정도로 울적해 보이는 레인의 표정에 점심 전까지는 일을 마친다고 했으니 적어도 점심에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나름대로의 격려를 보냈다.

그런 무르핀의 뜻을 눈치챈 레인은 위로해 줘서 고맙다고, 미소 지으며 말했지만 평소처럼 천진한 웃음이 아닌 입꼬리만 스윽 끌어당겨 웃는 아련한 미소에 자신의 말이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일과는 레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평소대로 흘러갔다.

아침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에이든이 미리 부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의사를 저택으로 불러와 진찰을 받았는데, 며칠 전부터 증상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체력 수준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진찰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늙은 의사는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종이에다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한한 악필로 이상한 약초 이름 같은 것을 써 내려 가며 말했다.

“체력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앞으로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몸을 잘 돌보세요. 피로가 쌓인 것 같다 하시면 꼭 쉬어야 하고요. 무리하는 것도 안 됩니다. 푹 주무시고, 약도 잘 챙겨 드시고, 물을 많이 마시세요.”

“아,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빠르게 회복된 것 같아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여기 처방전을 적어드렸으니 부쩍 피로하다 싶으시면 이 약을 지어 드세요. 효과가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의사는 레인 앞으로 종이를 내민 뒤 인사와 함께 저택을 떠났다.

레인은 마차를 배웅하겠다고 했으나 무르핀이 말리기도 했고, 의사 또한 그렇게 나오시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그저 마음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정중한 거절에 창밖 너머로 점차 멀어져가는 마차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 나니 시각은 점심이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곁에 에이든이 없을 때만 해도 우울하기 그지없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잘 가니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아무래도 곧 에이든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옷장에 걸린 옷들 중 어떤 옷이 에이든의 취향에 가까울지 심도 있게 고민하던 와중, 잠시 자리를 비웠던 무르핀이 에이든의 전언을 가지고 돌아왔다.

“오늘 식사는 정원에서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머, 정말요?”

레인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동안은 늘 침대가 있는 곳에서만 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오래간만에 정원에서 식사를 한다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제 서운해했던 자신을 위해 뭔가 단단히 준비한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싶어 궁금하기도 했다.

아침까지 걸렀는데 평범하게 끝내진 않으시겠지?

“그러면 대체 뭘 입고 가면 좋지?”

레인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이든은 괜한 도발은 그만두라고 그랬지만, 오랜만에 정원에서 하는데 분위기를 적절히 달굴 만한 의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젯밤 에이든을 유혹하기 위해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꺼낼까 싶다가도, 이미 간파당한 유혹을 다시 써먹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레인의 진지한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무르핀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든 님께서 의상을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입고 나가시면 될 겁니다.”

“아, 의상 고를 걱정은 덜어서 다행이네요.”

“그럼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거울 앞에 레인을 세운 무르핀은 차분히 준비를 도왔다.

입고 있던 드레스를 정중한 손길로 벗긴 뒤 에이든이 정해 줬다던 드레스를 입혔다.

화려한 보석이 머메이드라인의 드레스 주름을 따라 빼곡하게 박혀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빛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났다. 드레스에 사용된 옷감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서 살갗에 닿는 감촉도 좋았고 광택도 고급스러웠고 우아했다. 아무래도 어깨가 훤히 드러난 디자인이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무르핀은 곧이어 레인을 화장대 앞에 앉히고서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녘 하늘빛을 띄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한데 묶어 올렸고, 중간중간 머리를 땋아서 모양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장식이란 장식은 모두 올렸는데 새하얀 진주가 메인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수정으로 된 머리핀도 섞여 있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이렇게 큰 꽃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풍성한 새하얀 장미꽃을 귀 뒤에 슬며시 꽂아 핀으로 고정했다.

그렇게 치장을 마치고 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는데, 옷이 날개다 싶을 만큼 예쁘다 싶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 옷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에이든 취향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랬다.

에이든이 보통 식사 때 자신에게 입히는 옷은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은근하게 몸의 실루엣이 비치거나 노출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다못해 드레스 자락이 골반에서부터 길게 트여 있거나, 허리나 등이 파여 있거나, 속옷을 입지 않은 몸의 실루엣이 다 보일 만큼 얇아 입으나 마나 하거나. 셋 중 하나는 꼭 들어가야 했다.

물론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무척이나 예뻤고, 돈도 품도 많이 들었다는 것 또한 짐작이 갔으나 아무리 봐도 에이든이 좋아할 법한 옷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새 취향이 바뀐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대며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살피고 있자, 거울 한구석에 평온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무르핀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전에 본 적 없는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영 처음 보는 표정에 레인이 조금 의아하여 고개를 돌려 무르핀을 쳐다보았다. 레인의 시선이 닿자마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표정을 갈무리하여 섰다.

‘뭐지? 분명 이상한 미소를 지었는데.’

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 좀 전에 그 표정, 뭐였어요?”

“무슨 표정 말씀이십니까?”

“그, 방금 있잖아요. 뭔가 간계를 꾸미는 것 같은 이상한 미소를 지었잖아요. 이렇게.”

그렇게 대답하며 레인은 공들여 해 준 화장이 무색하리만큼 얼굴 근육을 자유분방하게 움직여 무르핀이 지었던 표정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었던 표정과 똑같기는커녕 무뚝뚝한 무르핀의 시원스런 웃음만 자아냈다.

물론 그건 얼마간의 성취감이 느껴지는 일이긴 했지만 레인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무르핀은 때 아닌 자신의 흉내에 건조했던 표정을 무너뜨리고서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 젖히더니 한참 후에 웃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겨우 레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뇨.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닌데……. 분명 봤는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레인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져 정리해 주며 무르핀이 말했다.

“어서 정원으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 맞다. 곧 식사 시간이죠. 그럼 가 볼게요.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능숙하게 레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끄는데 성공한 무르핀은 즐거움이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정원으로 향하는 레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른 것도 아닌 에이든을 갖고 싶다던 레인이 정원에 준비된 것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더할 나위 없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정원으로 향한 레인은 너무나도 달라진 풍경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혹시 꿈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음에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레인은 특별히 정원을 아끼는 것도 아니었고, 관리도 에이든이 도맡아 하고 있어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못 보던 새로운 꽃이 들어왔다거나 정원에 심어 놓은 나무의 수종이 조금 바뀌었다거나 하는 정도의 변화는 쉬이 눈치챌 만큼의 관심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숱하게 이 정원을 거닐었지만 정원의 구조 자체가 바뀐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방이 훤히 트여 있어 어디에서든 정원의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던 이전과는 달리 장미 덩굴로 휘감긴 아치형의 입구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안으로 이끌리듯이 들어가면 온갖 장미들이 제 허리께에 맞추어 가지런히 양옆으로 자리 잡고 있어 레인에게 길을 터 주었다.

계절에 맞춰 들여오던 꽃들은 전부 어디로 간 것인지 정원의 꽃은 모두 장미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가장 흔한 붉은 장미에서부터 시작해서 새하얀 것까지 온 세상에 있는 장미란 장미는 모두 모아온 듯 걸을 때마다 장미 향이 강렬하게 코끝을 찔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너무나 낯설어진 정원의 모습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느 순간 장미들로 가득했던 시야가 확 트이는가 싶더니 화사한 파스텔빛 꽃들이 만발한― 자신이 누워도 넉넉하다 못해 남아도는 거대한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커다란 테이블을 본 순간 레인은 가슴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불현듯 예전에 아랫배 가득히 향유를 담고서 에이든과 정사를 벌였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정원에서 속옷까지 모두 벗고서 식탁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었지.

그날 일을 떠올리자 어쩐지 그때 배 속을 가득 채웠던 향유가 출렁거리는 듯한 감각이 들어, 레인은 새하얀 드레스에 감싸인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아랫배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 위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주둥이가 기다란 유리병 하나와 자그마한 쪽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레인이 자연스럽게 그 쪽지를 펼쳐 들자 거기에는 문장도 아닌 단어 하나만이 덜렁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얼굴이 붉어질 만큼 음란한 명령도 아니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 레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필체로 봐서는 에이든이 직접 남긴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도저히 그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멀뚱히 서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는데, 마치 레인이 쪽지를 펼쳐 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긴 뭐겠어. 나한테 정기를 바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널 위한 선물이지.”

레인이 뒤돌아서서 그 얼굴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에이든은 순식간에 귓가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레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훅 들어온 스킨십에 레인은 그대로 숨을 들이킨 채 몸을 굳혔다. 좀 더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싶었지만 기대감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어색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레인이 빳빳해진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바싹 붙어 있는 에이든의 옆모습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시야에 에이든의 모습이 들어오자마자 레인은 좀 전까지 긴장했던 것도 모두 잊고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여태껏 봐 온 에이든 중에 가장 잘생긴 에이든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멀끔하게 차려입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정장을 모두 갖춰 입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셔츠에 조끼에 재킷까지. 두툼한 근육에 입고 있는 옷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모습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다소 칙칙한 색상을 고집하던 의상도 오늘만큼은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얘서 황태자의 연회나 어느 명망 높은 귀족가의 영식과 같은 고귀한 느낌을 자아냈다.

레인은 제 옆에 허리를 두르고 있는 사람이 에이든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확인하듯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에이든 님 맞으세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헤, 벌린 모습에서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에이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한껏 꾸미고 온 보람이 있었는지 제 뺨을 뚫을 것처럼 와 닿는 레인의 시선에 제법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그래.”

“정말 에이든 님이세요?”

“그렇다니까.”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멋지게 하고 오셨어요?”

레인은 몸을 돌려 에이든과 얼굴을 마주하고 서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에이든의 모습을 다시금 살폈다.

혹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에이든의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팍, 단단한 팔뚝 따위를 찬찬히 쓸어보았으나 손에 생생하게 잡히는 걸로 봐서는 꿈은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도 제 취향의 얼굴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정식으로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더욱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아카데미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

그때만 생각하면 속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토록 매혹적으로 생긴 사람이 아카데미 한복판에 서 있는데 눈길이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못내 속상한 기분을 털어 낼 수 없는 건, 에이든이 자신의 눈에만 멋져 보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에이든이 숨이 막힐 만큼 잘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타는 건 싫었다.

그래서 에이든을 제 것으로 만들어 보자는 당찬 포부를 품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렇게 한껏 차려입은 에이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그 꿈을 이루기란 요원해 보였다.

“이렇게 너무 멋지시면 좀 곤란한데…….”

레인이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아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는데, 에이든이 별안간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제 몸을 더듬던 레인의 손을 가로채 쥐고는 제 품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레인의 허리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다른 한쪽 손으로 등을 단단하게 받쳐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작스레 훅 들어온 스킨십에 레인이 조금 당황하여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으나 거대한 테이블이 가로막고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에이든은 레인의 손을 꼭 쥔 채 커다란 상체를 숙여 입고 있는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레인의 쇄골을 코끝으로 훑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곤란해?”

“음, 그러니까…….”

“너한테 주려고 일부러 꾸미고 왔는데, 마음에 안 들어?”

“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갈아입고 오고.”

“그게 무슨……?”

에이든이 내뱉는 영문 모를 말들에 의아해하던 찰나, 레인은 별안간 이 모든 일, 그러니까 놀랄 만큼 바뀐 정원의 풍경과, 어딘지 모르게 에이든의 취향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자신이 입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정체 모를 단어의 의미와, 저와 맞춘 것만 같은 새하얀 에이든의 의상과, ‘자신’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꾸미고 왔다던 그의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눈치챘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과 동시에 에이든이 꼭 쥐고서 놔주지 않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졌다.

투명하게 빛나는 다이아 반지.

그걸 보는 순간, 레인은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에이든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고 말하듯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기뻐서, 그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입을 달싹였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이내 에이든의 미소가 눈물로 흐려졌다.

에이든은 울음으로 들썩거리는 레인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뚝뚝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훑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하루만 참으면 좋은 거 주겠다고. 그런데 그새를 못 참아서…….”

“그치만… 흐읍, 전혀 몰랐는걸요……. 에이든 님을 제게 주실 줄 제가 어떻게 알아요.”

에이든의 잔소리에 레인은 조금 억울해져서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했다.

좋을 걸 주겠다고 했을 때는 끝내 주는 밤이나 보내겠거니 했지 에이든 본인을 주리라고 상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더 따지고 싶었지만 아직도 가슴이 너무 벅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을 닦았다.

레인의 울음이 잦아질 때쯤, 에이든이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래?”

“…….”

“가질 거야, 안 가질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돌려보내고.”

“…가질래요. 가질 거예요.”

코를 훌쩍이던 레인은 에이든의 물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선물을 빼앗길까 봐 제 품에 꽁꽁 감싸 안는 욕심 많은 어린아이 같아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내 레인이 에이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종이에 적혀 있던 글자,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 입에 담는 순간 반려가 되는― 그의 진짜 이름을.

“세에레.”

레인이 에이든의 진짜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그의 이름이 담긴 종이는 재가 되어 사라졌고 레인의 허리께에 새겨져 있던 마녀의 각인이 지워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영혼이 어떠한 계약과 각인의 조건 없이 하나로 묶였다.

영원을 함께 하게 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둘의 입술이 조심스레 맞물렸다.

어떠한 대가도 없는, 서로만의 마음만이 가득한― 자유로운 첫 번째 입맞춤이었다.

『그 악마의 먹잇감은 사랑스럽다』 완결

그 악마의 먹잇감은 사랑스럽다 2권(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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