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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위기 (8/12)

7. 위기

레인이 에이든의 품에 안겨 지하실을 빠져나온 건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언제나 반쯤 졸도하여 제정신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육체적으로 많이 피로할 뿐, 정신은 놀라우리만큼 온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허리고 다리고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기에 결국 에이든의 품을 빌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하실에 드나들었던 지난날들 중 가장 멀쩡한 상태였지만, 아마 평생 그곳을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고, 에이든의 체취가 느껴지는 옷자락에 머리를 기대며 레인은 생각했다.

그렇게 레인을 품에 안고 방에 도착한 에이든은 침대 위에 조심스레 레인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온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해 놓고서는, 침대에 내려놓을 때에는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하는 것이 레인은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저를 조심히 다루어 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만무했다.

솔직히 지하실에서 젖꼭지를 빨리는 내내 무르핀을 원망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하실에 간 건 그저 사바트를 위한 교육의 일환이었던 듯 에이든의 태도나 말투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제법 부드러웠다.

“곧 무르핀이 점심을 내올 거야. 챙겨 먹어.”

그렇게 말하고는 에이든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레인의 몸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퉁퉁 불어 터진 젖꼭지며, 온몸에 남아 있는 잇자국하며 모두 숨김없이 드러난―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에이든의 진지한 눈빛이 자신을 훑는 순간 갑자기 수치심이 몰려오면서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에 뭐라도 걸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옷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저를 향한 에이든의 시선이 워낙 따가워 얼어붙은 것처럼 꼼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여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는 것이 레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내 에이든의 시선이 두 배는 부풀어 있는 레인의 유두에 멎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레인은 자신의 젖꼭지가 저릿해지는 감각에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해 놓고 조금 쉬었다고 다시 성욕이 차오르는 것이 제 스스로도 어지간히 음란하다고 느껴졌다.

그것도 고작 에이든의 눈길 한 번에 몸이 달아오른다는 것이.

불현듯 코끝을 스치는 점차 달큼해지는 정기의 향취에 에이든은 반듯한 미간을 살짝 구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레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마치 만져 달라는 듯이 바싹 서 있는 유두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교육이 지나치게 잘 된 건가, 왜 자꾸 정기가 달아지지? 그렇게 하고도 더 하고 싶어?”

“으흑! 잘… 모르겠어요.”

평소의 레인이라면 화들짝 놀라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며 학을 뗐어야 옳았으나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솔직하게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레인의 반응이 의아했던 에이든은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여 레인의 표정을 살폈다.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는지 제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레인의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더 만져 주기를 바라며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레인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초리가 가느스름해졌다.

더 해도 나쁠 건 없었지만 지하실에서 교육을 제법 힘들게 해 두기도 했고,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쉬지 않고 해 대다가는 이틀 동안 내리 앓아누워 정기를 맛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주일 내내 레인이 아카데미에서 오기만을 기다리며 보내는데 당장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에이든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레인은 도리어 그러한 에이든의 행동이 의아하여 시선을 피하기 위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호기심을 띠는 동글동글한 황금빛 눈동자가 짙은 잿빛 시선과 마주했다.

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또 무슨 말을 내뱉어서 제 욕망을 부추길지 몰라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에이든이 예상한 것처럼 레인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안 하시는 거예요?”

“오늘따라 자주 보채네. 꿈이 복상사로 바뀌었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길이 레인의 곱슬거리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분거렸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나른하면서도 낮게 으르렁거리는 짐승과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제야 레인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복상사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언제는 너 이상으로 널 가져도 좋다고 해 놓고서 복상사는 안 된다?”

에이든의 반문에 레인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직은 죽는 게 좀 무서워서……. 그렇지만 에이든 님이 원하신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하고 대답하고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변명이랍시고 주절주절 내뱉는 레인이 귀여워서, 농담 반 장난 반을 섞어 재미 삼아 던진 질문이었다. 그렇게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제 반려로 삼으려는 여자였다. 제아무리 벼룩의 간도 빼먹는다는 악마여도 좋아하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물음은 그저 농담이었고, 기껏해야 과격하기 그지없는 표현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양옆으로 휘휘 젓는 것, 그 정도의 반응이 돌아오리라고 에이든은 생각했다.

그러나 레인은 한술 더 떠서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들으면 기뻐하는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것처럼 부끄럽다는 듯 입꼬리를 어색하게 당겨 웃으며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이든의 소유욕을 적절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자극했다.

“하아.”

에이든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통이 밀려오는지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감싼 채였다.

심상치 않은 에이든의 반응에 레인이 자신의 대답이 뭔가 잘못됐나 싶어 덜컥 겁이 나 부랴부랴 되새김질해 봤지만 결코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은 아니었고, 혹시 자신의 대답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짓말로 오해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단언컨대 그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고, 또 에이든이 진심으로 그렇게 할 요량으로 물은 게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답한 것은 그저 에이든이 좋았고, 이전에 했던 말에 책임을 지고 싶었으며 그로 인해 에이든이 더욱 저를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나름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몇 번 정말로 죽겠다 싶었던 때도 있었기에.

에이든은 다시금 깊은 한숨과 함께 레인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뒤로 밀었다. 레인의 몸이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아직 그의 잇자국이 선명한 새하얀 몸 위로 한 마리의 짐승처럼 올라탔다. 레인의 얼굴 위로 에이든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에이든의 눈동자는 그 빛이 더욱 짙어서 거의 검정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에이든은 한 손으로는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풀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레인의 가는 허리를 쓸었다. 손끝이 레인에게 새긴 마녀의 각인을 훑고 지나갔다. 에이든의 손길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에 레인은 몸을 떨었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지하실에서 그렇게 해 놓고도 그의 아랫도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열이 잔뜩 몰려 아플 만큼 빳빳하게 서 있었다.

어느새 에이든이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모두 풀려 앞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근육으로 짜인 탄탄한 몸에 시선을 고정한 레인은 무의식중에 입 안에 고인 침을 꼴딱 삼켰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레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에이든은 이내 레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정말… 이러니까 내가 널 사바트에 못 데려가지. 응?”

“저, 사바트 못 가요?”

레인은 약간의 실망감과 안도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딱히 다른 악마들과 벌이게 될 (의도치 않게 초대받게 된) 난교 파티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고,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지는 쪽이었지만 마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 해서, 하기 싫은 것도 꾹 참고 지하실에서 그토록 열심히 교육을 받았건만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면 에이든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단호한 대답이었다.

“못 가.”

“왜요? 다른 악마들이랑 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갈 필요가 없어질 거야, 곧.”

“…….”

“너만 허락해 준다면.”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당겨 웃는가 싶더니 레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뺨 위에 내려앉은 뜨겁고 말랑한 감촉에 레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허락이라는 단어가 상상 이상으로 듣기 좋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레인은 에이든이 말하는 그 ‘곧’이 구체적으로 얼마 뒤를 말하는 것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레인이 입을 벙긋하는 순간 에이든의 입술이 덮쳐 온 까닭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더운 숨과 타액만을 나누었다.

좁은 입 안을 거침없이 침범해 오는 에이든의 붉은 살덩이는 레인의 혀를 여유롭게 유린하면서 스치기만 해도 신음이 줄줄 흐르는― 빳빳한 유두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레인의 허리가 튕겨져 오르면서 비명처럼 새어 나온 신음은 그대로 에이든의 입에 먹혀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혀를 얽고 나서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집요하게 제 입 안을 탐하던 에이든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레인은 그의 밑에서 숨을 헐떡였다. 에이든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욕망이 잔뜩 어린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레인은 등허리를 타고 짜릿한 쾌감이 치달았다. 숨이 막혀 죽을 만큼 위험하면서도 감미로운 쾌락이었다.

에이든은 기대와 두려움이 어린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물었다.

“지금부터 복상사 예습 겸 마음의 준비를 해 볼까?”

“복상사를 어떻게 예습을…….”

“거의 죽겠다 싶을 만큼 하면 되지.”

레인의 물음에 에이든이 웃으며 대답했다.

천연덕스러운 미소와 함께 돌아온 태연한 대답에 레인은 할 말을 잃은 채 에이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단단히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저를 덮쳐 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러나 레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고, 에이든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낮은 웃음과 함께 상체를 숙여 레인의 귓가에 대고 감미롭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아래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아 줄 테니까.”

“아…….”

“덕분에 오래간만에 포식하겠어.”

* * *

다시는 악마의 성욕을 자극하지 않겠노라는 큰 교훈과 함께 레인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에이든과 수없이 몸을 겹쳤던 자신의 침실이었고, 정액이며 땀으로 더러워져 있던 침대 시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초롬히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몸 또한 잠든 사이에 씻겨진 건지, 에이든이 몸에 남긴 잇자국이며 손자국을 제외하면 무척이나 깨끗했고 심지어 향유까지 발랐는지 피부가 촉촉하고 향기로웠다.

시간 감각이 전혀 돌아오지 않아 레인은 맨 먼저 시각을 확인했다.

새벽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어둠에 감싸여 은은한 조명 아래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정원 나무들의 윤곽이 보이는 걸로 봐서 두어 시간 뒤면 새벽 동이 터올 터였다.

아무리 힘들어서 잠들었다고 해도 분명 지하실에서 나온 것이 점심 무렵이었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악마의 정력이란 무시무시했다.

레인이 기절했다 다시금 밀려오는 쾌락에 눈을 뜨고, 저를 덮쳐 오는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에이든의 밑에서 신음하다 정신을 잃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에이든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커다란 것에 꼬챙이처럼 꿰뚫려서는 엉엉 울어도 봐주지 않고 정확히 느끼는 지점을 노려 콱콱 박아 올 때마다 정말 레인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그것이 수없이 반복되는 가운데서 복상사한다는 게 무엇인지, 희미하지만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와중에도 에이든은 마시면 마실수록 치미는 갈증에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저를 끊임없이 안고 물고 빨아 대며 정기를 취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진 몸을 팔로 받쳐 들어 자세를 잡고서 추삽질을 이어 갈 적에는 그동안의 섹스는 저를 많이 봐준 것이며, 자신이 아무리 음란하다고 해도 에이든의 정력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꼬르륵.

자신의 상념을 가르고 들어오는 식욕에 레인은 조금 민망하여 요란스레 울리는 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뭔가 식욕이 일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깨워 식사를 부탁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시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번 허기를 느끼자 갑자기 미친 듯이 입맛이 돌기 시작하면서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레인은 가리는 게 없는 편이었고, 주방에 가서 생햄과 먹다 남은 빵 조각, 잼 정도만 몰래 챙겨 나오자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정중하게 두들겼다.

이 시각에 또 에이든이 찾아온 건가 싶어 흠칫거리며 문 쪽을 바라보자,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르핀이었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일어날 때마다 타이밍 좋게 식사를 가지고 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레인은 에이든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르핀을 안으로 들였다.

새벽임을 감안해서인지, 무르핀이 들고 온 식사는 비교적 소화하기 쉬운 것들로 간단히 꾸려져 있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빵에 국물이 자작한 양배추 찜. 드레싱을 적게 뿌린 샐러드와 달걀과 채소가 곁들여진 부드러운 카나페.

하나같이 맛있어 보여 레인은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모두 음식이 올라오기도 전에 카나페 하나를 슬쩍 입에 넣었다.

공복이 길어서 그런지 입에 넣는 족족 황홀하리만큼 맛있었다. 안 그래도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의 솜씨가 좋다 싶었는데 오늘따라 그 사실이 더욱 절절히 느껴졌다.

레인이 입에서 살살 녹는 식사를 거침없이 입에 넣을 동안 무르핀은 나머지 음식들을 보기 좋게 테이블 위에 옮긴 뒤, 레인의 곁을 지켰다. 옆에서 식사 보조를 하며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물을 채워 놓는 것은 물론, 빈 접시도 깔끔하게 치워 음식을 먹는 데에 불편함이 없게 했다.

때때로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예의 그 건조한 목소리로 레인에게 물었고 레인은 아직 덜 찬 배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방금 가져온 그대로 다시 음식을 새로 가져와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렇게 먹어 놓고 똑같은 음식을 부탁하는 게 조금 민망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무르핀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빈 접시를 들고 나가 새로 음식을 들고 왔다.

두 번째 접시까지 싹싹 비우고 나서야 겨우 레인은 공복에서 벗어나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빈 도시를 치우는 무르핀에게 감사를 표했다.

“식사 가져와 줘서 고마워요. 마침 배고팠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네.”

“그런데 어떻게 딱 알고 식사를 가지고 왔어요? 이렇게 늦은 시각에 주방에서 준비하려면 많이 피곤할 텐데.”

레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까닥이던 무르핀에게, 레인은 그렇게 물었다. 좀 전까지 배가 너무 고파 잊고 있었던 궁금증 중 하나였다.

매번 저택에 올 때마다 적절한 타이밍에 식사가 들어오는 것이 놀랄 만큼 정확해서 어디서 보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새벽이 하늘 깜깜할 때에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방에 가려는 사실을 미리 안 것처럼 방으로 식사가 오지 않았던가.

무르핀은 에이든을 옆에서 모시는 사역마이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새벽이라는 감수성이 풍부한 시간을 이용해 친분을 쌓아 보자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무르핀은 차곡차곡 트레이에 빈 접시를 담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레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식사가 만족스러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좀 전까지만 해도 파리하던 안색에 생기가 돌아왔다. 미소와 함께 용기도 같이 돌아왔는지 자신에게 친근하게 건네 오는 질문에 도리어 그녀가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레인은 에이든의 것이었고,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정중하게, 에이든에게 하듯 대할 것을 명령받았기에 무르핀은 성실하게 대꾸했다.

“주인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시각쯤에 일어나실 테니 미리 식사를 준비해 두라고요.”

“아, 그렇구나…….”

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에이든에게 간파당한 것 같은 기분에 레인은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일어나서 배고파할 시각까지 맞히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소 민망하기는 해도 기분은 좋았다.

무르핀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인간과는 달리 수면이 필요 없기에 딱히 힘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

“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간을 잘 못 맞추세요?”

의외의 사실에 레인이 놀라서 그렇게 되물었다. 저택에서 식사를 자주 하긴 했지만 직접 주방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고역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사역마는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맛의 구별도 어렵죠.”

“…매번 맛있게 먹기만 하느라 전혀 몰랐어요. 조금 미안하네요.”

레인은 무르핀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무르핀은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는지 알 수 없었으나,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빈 접시를 치우는 데에 집중했다.

이내 테이블이 깨끗하게 치워지자 무르핀은 트레이를 양손에 들고서 이만 가 보겠노라 말하며 정중하게 묵례를 했다.

레인 또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문을 향해 걸어가는 무르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을 빠져나간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가만 듣고 있던 레인은 뒤늦게 몰려오는 졸음에 슬금슬금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무래도 공복인 동안에 잠시 잊고 있다가 배가 채워지니 잊고 있던 졸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에이든이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지만 일어날 시각을 세기도 전에 레인은 정신없이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뒤로는 저택에 있는 것 치고는 제법 평범하게 지냈다. 비록 아침 식사 전에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부러 깨우지 않은 걸로 봐서는 어제 마음껏 정기를 취해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느지막이 일어났는데도 에이든으로부터 아무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더욱 확실해졌다.

레인은 일어나자마자 에이든의 침실로 불려 가,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일어나자마자 간 거라 세수도 안 하고, 머리에 빗질 한번 못한 추레한 상태가 너무 창피해서, 게다가 눈앞에 앉아 있는 푸른빛이 도는 실크 블라우스 차림의 남자는 눈이 부시게 빛나서 레인은 제발 씻고 나서 식사를 하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지만 에이든은 단호했다.

“그거 다 먹기 전까지는 안 돼.”

“그렇지만… 저 지금 너무 모습이 볼품이 없는데요.”

그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레인은 너무 싫어서 반쯤 울상이 되어 그렇게 투덜거렸다. 눈 뜨자마자 사역마의 손길에 이끌려 온 거라 잠옷 차림 그대로에 눈곱도 에이든 몰래 떼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몰랐다.

그 때문인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도 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예쁘니까.”

“…거짓말하지 마세요.”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괜히 심술이 난 레인이 그렇게 투정을 부리면, 에이든은 마치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럼 확인시켜 줄까? 진심인지, 아닌지?”

테이블 맞은편에 있던 에이든이 어느새 자리를 옮겨 레인의 옆자리에 몸을 바싹 붙어 앉아 왔다. 코끝에 체취인지 향수인지 모를 매혹적인 향이 훅 끼쳐 왔다. 얼마나 향이 강렬한지 어마어마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 음식 냄새가 깨끗하게 지워질 정도였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빳빳이 굳혔다. 애꿎은 수프에 화풀이를 하던 숟가락질도 이내 멈추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뛰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내뱉는 숨결이 더워졌다. 내장이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에 레인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의 옆모습을 말없이 감상하며 스푼을 쥐고 있지 않은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쥐고는 자신의 바지춤에 가져다 댔다.

순간 손끝에 닿은 묵직한 존재감에 레인이 화들짝 놀라 스푼을 바닥에 떨궜다. 그러고는 황급하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에이든의 단단한 손길은 레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붙들어 오는 통에 레인의 새하얗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붉어졌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의 얼굴을 보며 잠시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것 봐. 진심인 거, 맞잖아.”

“그, 그래도, 이런 확인을 원한 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속옷 착용을 안 했지.”

그 말 한마디에 레인의 등줄기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자그마한 반항도 해 보기 전에 에이든의 손이 입고 있는 잠옷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레인의 사타구니 사이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질구 주변을 더듬는가 싶더니 이내 손가락 하나를 푹 집어넣어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삽입에 레인의 허리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파드득 튀어 올랐다.

“흐윽! 가, 갑자기 넣으시면… 흐으…….”

“어제 너무 많이 했나. 회복마법을 걸어 놨는데도 아직 부어 있네.”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든은 레인의 구멍 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빼냈다. 레인의 잠옷 아래로 파고든 손길이 마치 뱀처럼 스르르 허벅지를 타고 사라졌다.

레인은 오늘처럼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다행스런 날이 없었다. 아래가 부어 있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살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에이든은 레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히더니 이내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레인의 얼굴에 점차 핏기가 가시면서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고 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잘못, 했어요! 네? 잘못했으니까, 으흣! 하으, 제발, 흐응, 그만…….”

“속옷을 안 했으니까 내 걸로라도 막아줘야지. 응? 질질 싸지 않게.”

레인의 애원에도 에이든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입고 있는 잠옷을 허벅지 위로 말아 올리더니 레인의 부어 있는 입구에다 단단하게 서 있는 자신의 것을 문질렀다. 이내 입구가 천천히 젖어 드는 것을 확인한 에이든은 곧장 레인을 자리에 주저 앉혔다.

커다란 몽둥이와 같은 것이 순식간에 내부를 가르고 들어오는 통에 레인의 허벅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가는 허리가 다시금 파르르 떨리더니 내벽이 수축해 왔다.

에이든은 잔뜩 붉어진 레인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아주 맛있게 잘 삼키네.”

“아, 너무… 커요. 아파…….”

“부어서 그래. 조금 있으면 좋아질 거야.”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시간이 갈수록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빠듯하게 찬 아래에서 황홀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좀 더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는 회복마법을 건 모양이었다.

에이든은 레인의 허리를 슬슬 문지르며 물었다.

“어때? 지금은 괜찮지?”

“흐으, 네에……. 괜찮아요.”

“자, 그럼 이제 밥마저 먹자.”

“네? 이 상태로요?”

“밥 먹고 체력을 보충해 둬야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마음껏 하지.”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새 걸로 바뀌어 있는 스푼을 레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레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딜도를 삽입한 상태로 밥을 먹은 적은 많았지만 에이든의 것을 받은 채 식사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뭐 해? 어서 밥 먹어야지. 수프 다 식겠다.”

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레인은 복잡미묘한 기분에 등 뒤에 있는 에이든의 얼굴을 흘깃거렸지만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할 것을 권할 따름이었다.

결국 레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에이든의 것을 받은 채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슬금슬금 부피를 키워 오는 에이든의 것이 신경 쓰여 레인은 수프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나이프를 쥔 손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렇게 정신없는 식사 시간이 끝나자마자 에이든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빈 접시가 치워지고 테이블 위가 깨끗해지자마자 에이든은 레인을 그 위에 엎어 두고는 거침없이 박아 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치받아 오르는 쾌감과 내벽을 빠듯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거친 허리 놀림에 레인은 그저 끙끙 앓는 소리만을 흘렸다.

“흐읏, 응! 윽, 하으… 히익!”

“밥 먹는 내내 위도 아래도 오물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어. 왜 그렇게 보채? 어련히 박아 줄 텐데. 응? 레인?”

“아, 흑, 잘못, 했어요… 읏!”

“잘못하긴. 칭찬해 주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은 거칠게 레인의 자궁구를 쳐올렸다. 머리가 쿵쿵 울리는 것 같은 기분에 레인이 울면서 몸을 바르작거렸지만 에이든은 레인의 골반을 힘껏 잡아 퍽퍽 소리가 울릴 만큼 허리를 움직일 따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레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즈음, 레인은 이내 절정에 달했다. 내벽이 한껏 조여 드는가 싶더니 다리 사이로 맑은 애액이 터져 나오면서 에이든의 침실 카펫을 적셨다. 이내 에이든도 파정했다.

자신의 내벽으로 밀려오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느끼며 레인은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성기를 빼낸 에이든은 엎드려 있던 레인의 몸을 뒤집어 잔뜩 흐트러져 있는 레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정리해 준 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정말로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양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예쁘네.”

“…….”

“무척.”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이든의 밑에서 울었던 레인의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그의 한마디가 너무나 기쁘면서도, 그런 에이든이 저에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빠졌으면 좋겠다는 깊은 소유욕으로 가슴이 들끓었다.

이런 적이 정말 없었는데 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이를 갈고 덤비고 싶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런 레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든은 옷을 추스르고는 레인의 허벅지를 타고 흐른 애액을 손으로 훑었다. 손바닥에 흥건히 묻은 애액과 정액이 뒤섞인 액체를 가만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입가에 가져가 혀로 핥아 올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레인은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레인의 모습에 에이든은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

“아…….”

더 하셔도 괜찮다고 레인이 말하려는데 에이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예쁘게 하고 싶다며? 얼른 씻고 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아, 네……. 감사합니다.”

레인은 에이든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에 담겨 있던 정액이 주르륵 흐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이든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속옷도 제대로 입고 와. 사역마를 통해서 건네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에이든 님.”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어색하게 웃으면서 침실을 나서는 레인의 모습을, 에이든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의 말이 맞았노라고.

결국 주말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새벽까지 레인은 계속해서 에이든에게 정기를 바쳤다. 자의가 반, 타의가 반이었는데, 처음에는 좋아서 하다가 나중에는 힘들어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 에이든은 ‘왜? 나랑 복상사해도 좋다며?’ 하고 자신이 한 말을 들먹이며 섹스를 계속하게 했다.

물론 중간중간 에이든이 자신의 체력을 살펴 가며, 적당히 조절을 해가며 했기에 체력이 다해서 기절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로는 몇 번 까무러치듯 쓰러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피로가 빠르게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푹 잤는데도 꿉꿉하리만큼 기묘한 피로감이 어깨에 잔뜩 뭉쳐 있었고, 위아래로 덜컹거려 제대로 잘 수도 없는― 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내내 졸았으며 아카데미로 향하는 기차로 갈아타면서도 창문에 머리를 콩콩 찧어 가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잤다.

그렇게 아카데미에 도착했음에도 개운한 느낌은 하나도 없이 짙은 피로감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에이든이 자신의 상태를 봐 가며 했다고 해도 요 근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해 댄 탓에 몸이 더 이상 버텨 내질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레인은 뒤늦게 생각했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에이든의 이상형은 순진하면서도 음란한 여자라고 했는데, 순진은 둘째 치더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에이든의 눈에 들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음란해지기 전에 악마의 정력을 버틸 만한 체력을 먼저 기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의 얼굴에 내려앉은 짙은 피곤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한이었다.

연구실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 눈 밑에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고서 호들갑스럽게 제게 다가와 약혼자에 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던 에밀리는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연구실 뒷정리를 깨끗하게 마친 뒤,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아카데미 내 식당에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우연히도 요한이었다.

갑작스런 요한의 등장에 레인은 깜짝 놀라 묽은 수프를 뜨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학생들로 바글바글한 이곳에서.

“어… 요한?”

얼이 빠진 것처럼 놀란 레인과는 달리 요한은 천연덕스런 얼굴로 환하게 부서지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리서 레인이 보여서요. 마침 자리도 비어 있고. 혹시 따로 같이 앉을 사람이 있는 건 아니죠?”

“아, 괜찮아요. 오늘 에밀리가 아파서 저 혼자예요.”

레인은 놀란 감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하고는 식판을 제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했다. 그러면 요한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그렇게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금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신과 단 몇 차례 만났을 뿐이었지만, 낯선 타인과의 대화가 늘 어색한 자신과는 달리 언제나 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딱 입 안에 넣은 음식물을 씹고 목구멍으로 넘길 즈음에 저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대답을 구하곤 해서 식사 중의 대화는 편안하게 흘렀다.

하지만 레인의 표정은 그만큼 편안하지는 않았는데, 사실 지난번 요한의 데이트를 거절한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뿐더러 또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타이밍을 재느라 표정도 목소리도 계속해서 부자연스러워졌다.

어딘지 모르게 서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한 레인의 표정과 피로감이 짙어 보이는 안색에 요한은 하던 말을 멈추고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네? 아, 아뇨. 저 안 아픈데……. 왜요?”

“그게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그래서 어디 아픈가, 해서.”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나 했더니 단순히 저를 걱정한 거라는 사실에 레인은 입가에 민망한 미소를 띠며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안색이 안 좋은 건 주말 내내 침대에서 힘을 빼느라 기력이 없는 탓이었지만 요한에게 곧이곧대로 모두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피곤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둘러대기로 했다.

“아, 괜찮아요. 그렇게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오늘은 병문안 겸 에밀리한테 잠시 다녀왔다가 일찍 자려고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정말 괜찮아요?”

아무래도 요한은 레인이 불면증을 겪고 있는데 그런 사적인 일을 터놓을 만큼 친밀한 사이라 아니라 일부러 숨기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물어 왔다.

사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이유로 피폐해져 있었지만, 결코 불면증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을 괴롭히던 걱정거리도 사라졌겠다, 그냥 단순한 체력적인 문제라서 당장이라도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곧장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렇듯 요한에게 진짜 사정을 말할 수 없었기에 레인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다시금 요한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제가 잘 아는 가게가 있는데 불면에 좋은 향초를 팔아요. 저녁 먹고 잠시 갔다 올래요? 에밀리 병문안 선물도 살 겸 해서 다녀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요한의 뜻밖의 제안에 레인은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요한이 추천하는 가게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조금 귀찮기도 했다. 에밀리의 병문안을 가겠다 얘기했지만 교수님의 얘기를 들어 보면 생사가 오락가락할 만큼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간단하게 안부만 묻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렸고, 또 자신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자신을 좋아하는 요한에게 계속 숨기는 것도 영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둘만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레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저녁 얼른 먹고 빨리 갔다 와요. 레인에게 꼭 도움이 될 거예요.”

레인에게서 돌아온 긍정의 대답에 요한은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환희와 기대감으로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순간, 레인은 그의 미소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오히려 미안해졌다.

곧 자신이 입에 담게 될 거절의 말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고 깊은 상심이 드리울 것이 선명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추천해 준 가게는 시내에서도 조금 외곽에 위치한 골목길에 조그맣게 숨어 있었다. 숨어 있다기 보다는 가게 자체가 작아서 눈에 잘 안 띈다는 편이 좀 더 적절한 것 같았다.

손님이 안을 구경할 수 있도록 유리로 된 벽면에 붙어 서서 가게 내부를 흘깃거리면 굉장히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 수공예품인 것인지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인형부터 시작해서 뜨개질로 만든 목도리, 스웨터, 요한이 말했던 향초와 반지 따위의 귀금속 등 없는 게 없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요한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레인은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가게 구석구석 피워 놓은 촛불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부드럽고 심신이 안정되는 듯한 포근한 향에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크게 향초의 효능을 기대하고 온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에이든에게도 하나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향은 느낄 수 있을 테니.

가게에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한참이 지나도록 주인이 맞으러 나오지 않는 것이 의아해서 레인이 요한을 쳐다보았다. 요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가게 안쪽으로 가서 주인을 불러오겠노라 말했다.

“그런데 주인도 아닌데 그렇게 막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요. 여기 가게 주인이랑 친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불러올게요.”

그렇게 말하더니 근처에 있던 빈 의자를 끌어다가 레인을 앉히고는 가게 안쪽에 있는― 창고인지 개인적인 공간인지 커튼으로 가리어 둔 공간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게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레인은 의자에 앉아 에이든에게 줄 것도 미리 봐 두고, 에이든에게서 받은 용돈이 충분한지 지갑의 잔액도 확인하고, 가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시내의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요한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 졸음은 물밀듯이 밀려와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인 찾는다고 나서기 전에 미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약혼자가 있다고 먼저 말을 해 둘걸.

레인이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 즈음, 요한이 가게 주인을 찾으러 나섰던 커튼 너머로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금 가까워져 오는가 싶더니 이내 요한이 돌아왔다.

드디어 왔구나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시야가 휘청 흔들리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

레인은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두 눈동자와 입밖에는 없었다.

“요한… 뭔가 몸이 이상해요.”

당혹감과 불안으로 젖어 있는 레인에게, 요한이 조용히 다가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쓰러진 레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마치 인형처럼, 너무나도 가벼이.

레인은 그제야 요한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을 데리러 오겠다던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레인의 두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요한을 쳐다보았으나 자신을 응시하는 요한의 새파란 눈동자는 걱정보다는 고요한 기쁨이 깃들어 있었으며 표정 또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방금 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따윈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제야 레인은 이 모든 것이 요한의 계략임을 깨달았다.

이곳에 저를 데려온 것도,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모두 요한이 한 짓이라는 걸.

점차 레인의 눈빛에 스미는 분노를 읽어 낸 것인지, 요한은 레인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마치 레인이 뭘 알고 싶어 하는지, 뭘 묻고 싶어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맞아요. 다 내가 꾸민 일이에요, 레인.”

그렇게 대답하는 요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제 몸에 닿는 요한의 손길도, 팔도, 가슴팍도, 얼굴 위에 닿는 숨결도 불결하기 그지없었으나 마비가 된 탓에 그 어느 것 하나 거부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감에 절망한 듯한 레인의 눈빛에 요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레인의 몸을 제 품 안에 가까이 당겨 안으며 말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거예요. 난 이 독에 내성이 있지만 레인은 아닐 테니.”

그렇게 속삭이며 요한은 그대로 레인을 품에 안은 채 발걸음을 옮겨 커튼 뒤쪽으로 향했다. 기타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나 주인이 잠시 쉬는 공간쯤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커튼 뒤쪽에는 지하실로 연결되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요한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 두터운 철문으로 된― 오직 바깥에서만 잠글 수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런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닌지 그의 행동에는 막힘이 없었다.

레인은 시시각각으로 덮쳐 오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 봤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 충동적으로 외출한 거라 요한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니와, 주변 인간관계가 좁아서 자신의 부재를 눈치채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에밀리라면 자신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사람을 불러 줄 테지만 그러려면 최소한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연구실에서 만나는 시각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알 수 없었고, 그 즈음이면 요한의 손에 죽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손발이 묶여 있는 정도라면 간단하지만 마법을 쓸 수도 있을 터였다. 주말 내내 에이든의 정액을 잔뜩 받았으니 평소보다도 몸에 도는 마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데, 마법이라고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레인의 몸을, 요한은 약간의 안타까움을 담아 다정하게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떠는 이유가 요한 그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태연해서 레인은 도리어 두려웠다.

제정신이 아닌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여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가구라고는 침대와 테이블과 의자 하나씩뿐인 삭막한 인테리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푹신하고 고급스런 장식의 소파에 자신을 앉히는 요한을 향해, 레인이 물었다.

그러면 예의 그 천사가 내려온 것만 같은 요한의 아름다운 얼굴이 우수에 젖어 드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입고 있는 제복 아래로 드러난 레인의 희고 가는 종아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레인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꼭, 가지고 싶었어요.”

“대체 사람을 어떻게 가져요?”

요한이 자신의 종아리를 쓸어내리는 순간 레인은 오금이 다 저릴 만큼 역겹고 구토가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 참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 그는 일인용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레인 앞에 양쪽 무릎을 모두 꿇고서 레인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댔다. 입고 있는 제복 위로 요한의 황금빛 머리칼이 넘실거렸다. 그 작은 머리통을 당장에라도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만 지내게 할 거예요. 나만 보게 할 거고, 내 앞에서만 울게 할 거고, 내 손만 타게 할 거예요. 그러면 레인을 온전히 가질 수 있죠. 나, 혼자서.”

마치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나른하게 젖은 요한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자신을 이곳에 가두어 놓고 햇빛 한 점 못 보게 할 요량인 듯했다.

대화를 이어 나가면 나갈수록 속이 안 좋았다. 어떻게 대화가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제정신인 것처럼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레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에이든이 무척이나 간절하고 또 절실히 보고 싶었다.

레인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요한이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울먹이는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에 가만 시선을 맞추고는 이내 손을 뻗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숨이 넘어가라 울어 젖히기 시작하는 레인을 달콤한 말로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 마요, 레인. 밖에 나갈 수 없지만, 내 말만 잘 들으면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요. 그러니 울지 마요. 네?”

“…나한테 왜 이래요. 집에 가게 해 줘요……. 돌아가고 싶어.”

“저번 주에 레인이 아카데미에 찾아온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어요.”

“…….”

“나한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에, 말투에……. 둘이서 친밀해 보이더라고요. 약혼자나… 아니면 적어도 레인이 사랑하는 사람쯤 되겠죠?”

이전에 에이든이 아카데미를 찾아온 날의 일을 상기하는 요한의 눈빛은 깊은 심해를 헤엄치듯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지독히도 차갑게 굳어 있어서 레인은 입을 꾹 막고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이 상황이 무서워서 그런 건지, 요한이 제 상상 이상으로 불가해한 인간이라 두려운 건지, 에이든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벌벌 떨면서 눈물만 떨구었다.

울상이 된 레인의 표정을 가만 올려다보던 요한의 굳어 있던 얼굴에 이내 해사한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우는 얼굴도, 울음을 참는 모습도 예쁘네요, 레인은. 그러니까 그 남자에게도 사랑받는 거겠죠?”

“…….”

“그렇지만 이제 레인은 나만의 것이에요. 제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난 귀족 집안이라도 여기까지는 알아낼 수 없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기가, 레인의 집이에요.”

“…싫어.”

“잔뜩 사랑해 줄게요, 레인.”

“싫어! 이 미친,”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허리께를 지분거리던 요한의 손길이 입고 있는 옷을 벗기려는 듯 셔츠 자락을 걷어 올릴 무렵 레인이 참지 못하고 육두문자를 외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땅울림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지반이 흔들리는 것처럼 지하실에 놓여 있는 가구들이 일제히 덜컹덜컹 소리를 내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지하실을 밝히고 있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지하실은 순식간에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잠기게 되었다.

“뭐지?”

요한조차도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짜증스런 목소리로 짓씹듯이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어둠 속을 손끝으로 짚으며 가지고 있던 성냥으로 횃불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 순간 소리도 빛도 모조리 삼킬 듯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흘렀다.

“으아아악!”

쇠가 양쪽으로 갈려 찢어지는 듯한 이 비명은 낯설기는 하지만 분명 요한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레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코만 훌쩍이고 있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네, 레인은.”

“……?”

“각인도 새겼는데, 내 것으로서의 자각이 너무 없어. 다시 지하실에 가서 교육을 해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 말과 동시에 깜깜했던 지하실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면서 사위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그리고 눈앞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에이든 님?!”

레인이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이든은 평소와 달리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레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진짜 에이든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레인은 뒤늦게 찾아온 안도감에 눈물을 글썽였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을 의자에서 일으켜 품 안에 안아 들었다. 익숙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자 그제야 몸의 떨림이 멎었다.

좀 전까지 마비되어 있던 몸도, 어째서인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레인은 에이든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코끝에 맡아지는 익숙한 체취와 온몸을 감싸는 온기에 긴장과 공포에서 해방된 레인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그녀의 건강에는 딱히 이상은 없으며 단순히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에이든은 기절한 레인을 제 품으로 있는 힘껏 당겨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한에게로 차분히 다가갔다.

요한은 레인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옷을 벗기려 했던 손목이 잘려 나간 탓에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지하실 구석에 잘려 나간 오른손이 나뒹굴었고, 바닥은 피바다나 다름이 없었다.

요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텅 빈 오른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에이든을 노려보는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 레인을 가진 자를 향한 질투와 증오로 짚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서글서글한 웃음기가 섞인 눈빛으로 레인을 바라보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이질적인 눈빛이었다.

그러나 악마인 에이든에게 그 광기 어린 눈빛이 통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붉은 카펫처럼 깔린 피로 물든 길을 거침없이 내디디며 그의 앞에 다가섰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안 들어서 진작 죽여야겠다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정말 안타까워. 안 그랬으면 목숨은 붙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여길 알고 들어온 거지? 넌, 뭔데 자꾸만 나의 레인을!”

“손 말고, 그 혀부터 잘랐어야 했나.”

뒷골이 서늘해질 만큼 싸늘한 한마디가 비수처럼 요한의 귓가에 꽂히는 순간, 그의 얼굴에 주먹이 꽂히면서 몸이 두터운 철문이 있는 방향으로 종잇장처럼 힘없이 날아갔다.

온몸을 덮쳐 오는 고통에 요한은 쿨럭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이든은 지하실을 비추는 횃불에 길게 늘어트려진 자신의 그림자에서 사역마를 불러내어 명령했다.

“저 새끼, 지하실로 데려가. 처리는 내가 직접 한다.”

에이든의 명령에 사역마는 요한의 몸을 한 손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요한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발버둥을 치자 귀찮았는지 가볍게 목 뒤편을 손날로 내리쳐 기절시킨 뒤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에이든은 제 품에 힘없이 안겨 있는 레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고여 있었다. 엄지로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 낸 뒤, 에이든은 마법을 사용해 이 재수 없는 지하실과 가게를 모조리 불태웠다.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도록, 그 어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 * *

에이든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레인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제 욕심을 맘껏 채우느라 하루 종일 괴롭혀 댔어도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일어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은 침대 위에 누워 마치 죽은 듯이 고요하게 잠든 레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침구 속에 몸을 푹 파묻고 있는 레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흐르는 강물처럼 구불구불 흐트러진 머리칼은 햇빛을 받으면 밝게 부서져 푸른 하늘빛으로 빛났고, 그늘에 가리어진 곳은 초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늘한 남색으로 가라앉았다. 편안히 감고 있는 두 눈 아래로 부채꼴처럼 넓게 퍼진 속눈썹은 길고 풍성했다. 마치 인형처럼,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것처럼 너무나 편안히 잠들어 있어 에이든은 되레 불안해졌다.

정말로 이대로 영영 눈을 감을까 봐, 다시는 순진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을까 봐.

그렇게 되면 에이든은 레인을 되살릴 셈이었다. 레인과는 계약도 맺었고, 자신의 마녀이기도 했다. 죽으면 영혼이 제 수중에 떨어질 테니 약간의 출혈을 감수한다면 분명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했던 레인과 아주 같지는 않을 터였다. 이미 죽은 육체를 되살리는 것은 악마라고 해도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었다.

“그냥 눈만 좀 떠 봐, 레인.”

에이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초조해질 때면 잠든 레인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한 치의 미동조차 없는 작고 가녀린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서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체력적으로 완전히 회복이 된 상태라 제아무리 마력을 불어넣는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

레인이 끝없는 잠의 늪에 빠진 사이, 요한은 지하실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혀 두라고 사역마들에게 일렀더니, 정말로 딱 그만큼만 괴롭혔다. 처음에는 제발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죽여 달라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물론 에이든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사지를 잘라 제 권속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죽음이라 생각했다. 만약 인간을 장난감처럼 부서뜨렸다가 고치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면 요한은 이미 수십 차례 죽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기에 정신을 완전히 부서트려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만든 뒤에 죽였다.

그 사이사이, 요한은 자신의 죄를 고했다. 에이든은 단 한 번도 잘못을 실토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라도 해 줄 것처럼.

“레인이 좋았어……. 좋아서 그랬어. 1년을 넘게 지켜봤어. 그런데 어째서 날 좋아해 주지 않아? 난 이렇게나 레인을 좋아하는데, 레인은 내게 관심이 전혀 없었어. 그래서, 날 좀 봐 줬으면 좋겠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서 노력했는데…….”

“…그래서 납치도 하고, 감금도 하고, 독도 썼다?”

“날 제대로 본다면, 분명 날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후우. 역시 혀부터 잘랐어야 했어.”

에이든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요한은 많은 것을 고백했다. 어떻게 레인을 납치할 준비를 했는지 따위의 일이었다. 고문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죄를 실토했다. 레인 이전에도 많은 여자들이 그 가게의 지하실을 거쳐 갔다고 했다. 천사 같은 낯짝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여자들은 그의 저의를 의심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퍽 많은 여자들을 꾀었다.

인간 말고 저와 같은 동족으로 태어나는 편이 적성에 맞았겠다 싶은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에이든은 요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레인을 건드렸기에.

에이든의 레인을, 요한의 레인으로 만들고자 했기에.

계속되는 고문 끝에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찾아왔다. 요한의 시체는 소각되었고, 증거는 어디에도 남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의 부모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요한의 행방을 찾는다는 소문이 제 귀에도 들려왔지만 이내 그 소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가게에서 화재가 난 일이 지역 신문 기사에 크게 실렸기 때문이었다. 그 내부에 있던 정체 모를 지하실에 관한 의문은 덤이었다.

평범해 보이던 잡화점에 숨겨진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은 좋은 가십거리였고,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평소 행실이 좋고, 영주민들에게 다정하며 친절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어떤 귀족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줄 만큼.

결국 그들의 부모는 요한의 실종도, 지하실의 정체도 모두 숨기는 쪽을 선택했다. 그 모든 것이 까발려졌다가는 귀족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테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주말 급하게 보석상을 불러와 부탁했던 반지가 도착했다.

어마어마한 선금을 얹어 주고 최대한 빨리,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완벽한 반지를 만들어 내라고 독촉한 보람이 있었다. 반지는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제 수중에 떨어졌다. 바라던 바였고, 다음 주말이 오기 전 미리 받아보고 싶었기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일 처리였지만 정작 이 반지의 주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보석상 벨라는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서 만든 반지를 받아 들었음에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어 보이는 에이든의 표정을 조용히 흘깃거렸다.

혹시 마음에 차지 않는 건가 싶어 한참 동안 그의 눈치를 보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냐고 묻자 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반지는 마음에 듭니다. 기일에 맞춘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례비는 두둑하게 드리지요. 다음에 또 부르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지독히도 슬퍼 보였기에 아무래도 반지를 줄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대강 짐작하고는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자리를 떴다.

벨라가 자리를 뜨고, 마차를 타고 저택 밖을 나서는 걸 확인한 에이든은 자신의 사역마를 불렀다.

무르핀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레인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으십니다.”

“몸 상태는?”

“호흡, 맥박 모두 정상입니다.”

“그래.”

용건이 모두 끝나자마자 에이든은 말없이 손짓을 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무르핀은 제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에이든의 등 뒤에다 대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모습을 감추었다.

에이든은 응접실에 혼자 남아 말없이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레인과 잘 어울리는― 투명하고 맑은 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 한 쌍이 새초롬히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인이 눈을 뜬 건, 정신을 잃은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레인은 마치 방금 전까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낯익은 방의 풍경을 살폈다.

정신을 잃었다 싶었더니 아무래도 곧장 저택으로 데려온 건지 익숙한 저택의 침실이었다. 요한에게 붙잡혔던 그 끔찍했던 지하실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의아한 점이 있다면 누워 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에이든의 방이라는 점이었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곁에 에이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평소와 달리 다정한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는 했지만 제 잠자리를 지켜 줄 만큼 다정하지는 않았기에 기쁘다기보다는 조금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에이든은 척 보기에도 불편한 차림으로 자고 있었다. 밤새 섹스를 해 대도 저만 힘들다고 울었지 피곤한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던 남자였는데, 눈가에 내려앉은 그늘이 짙어서 레인은 조금 걱정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이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눈가를 엄지로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피부 결이 거칠거칠한 것이 아무리 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더 편한 차림으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입고 있던 셔츠 단추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 순간 자신의 손목이 허공에서 덥석 잡혔다.

누가 제 손목을 붙잡나 했더니 바로 에이든이었다.

“에이든 님……? 깨어 계셨어요?”

에이든은 레인의 물음에 일언반구도 않고,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괴로운 듯 양미간을 험악하게 구기며 실눈을 뜨며 쳐다보았다.

그 험상궂은 눈빛에 레인은 저 때문에 괜히 그의 잠을 방해했나 싶어서 죄송하다고, 잠을 깨울 생각은 아니었다며 허공에 붙잡혀 있던 손을 빼 보려 했으나 손을 놔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붙잡아 왔다.

그대로 손목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에 레인이 신음과 함께 얼굴을 찌푸리자 에이든은 술에 취한 건지 잠에 취한 건지 알 수 없는 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야 일어난 거야?”

“네. 방금 막 일어났어요.”

“깨어난 척하는 거 아니고?”

“어떻게 깨어난 척을 해요. 보통 자는 척을,”

레인의 대답은 미처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이든이 레인을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두툼한 가슴팍에 얼굴이 짓눌린 채 허리며 등이며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꽉 끌어안아 오는 에이든 탓에 레인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캑캑, 조여 오는 숨통에 빈틈이라도 만들어 보려 겨우 몸을 뒤척이자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더욱 단단히 레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커다란 몸을 한껏 웅크려 레인의 어깻죽지와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파묻은 채 심호흡을 했다.

어쩐지 에이든이 저한테 매달려 오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는 줄 알았어.”

“……?”

“잠든 지 사흘이 넘어갔을 때에는 일분일초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고.”

고작 잠시 기절한 것 가지고 엄살이 심하다 싶었는데, 뒤에 이어진 나지막한 말에 레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넘었다고요?”

“그래. 오늘로 꼭 일주일째였어.”

에이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레인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주일간 잠들어 있었다는 감각이, 자신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몸이 상쾌하고 가뿐한 느낌에 푹 잤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주일 내내 누워 있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솔직히 에이든이 구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니, 긴장이 풀리자마자 의식을 잃은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것이 일주일 동안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냐고 물으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조금 긴가민가했다.

레인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의사는 뭐래요?”

“피로가 좀 많이 쌓인 데다 그 독이 너와 상성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 탓에 회복이 무척이나 더뎌지고 있다고. 다행히 생사를 오갈 만큼 아주 위험한 독은 아니라 죽지는 않을 테지만, 정신적인 충격도 있어서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그러더군.”

“…죄송해요. 저는 그렇게 오래 잠들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혹시 많이 걱정하셨어요?”

레인의 물음에 에이든은 레인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와 정통으로 마주친 순간, 레인은 자신이 정말로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가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은 잿빛 눈동자가 깊은 안도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뒤늦게 그의 피로감이 저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 에이든답지 않게 제 곁을 지키고 있던 까닭도, 일어나자마자 절절하게 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은 까닭도 어째서인지 모두 알 것 같았다.

에이든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이든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니. 솔직히 걱정보다는 두려웠어.”

“…….”

“이대로 계속 눈을 뜨지 않을까 봐.”

그 차분하고 덤덤한 고백이 끝나자 에이든은 레인을 자신의 품 안에서 순순히 놓아준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작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동작마저도 짙은 피로감이 배어 나왔다. 레인도 덩달아 에이든을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오늘 자신이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도리어 에이든이 쓰러졌겠다 싶은 몰골이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일주일간 자신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건, 그동안 식사도 무엇도 아무것도 못 했다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다. 일주일 내내 굶었으니 피곤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정기를 달라고 얘기하지 않는 건지, 혹시 제게 미안해서 그런 거면 자신은 생각보다 멀쩡해서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에이든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곧 애들한테 식사 가져오라고 할 테니 먹고 있어.”

“에이든 님은요?”

“난,”

에이든이 뱉으려던 문장은 미처 이어지지 못하고 입 안에 소리 없이 고였다. 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든의 곁에 다가서는가 싶더니 매가 사냥감을 사냥하듯 손을 휙 낚아채어 제 뺨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에이든의 커다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부비며, 놀란 기색으로 저를 쳐다보는 에이든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좀 전과 달리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기에 얼굴에 철판 깔고 하려던 것을 계속하기로 했다.

“저는 제 식사보다 에이든 님의 식사가 더 중요한데……. 하면 안 될까요?”

“…안 돼.”

“왜요?”

“방금 일어났는데 무리하면 안 좋을 수 있으니까 나중에 해.”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음성은 단호했지만 레인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 상태는 자신이 더 잘 알았고, 저보다는 에이든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것이 훨씬 마음에 걸렸기에 자신은 없지만 도발을 해 보기로 했다.

레인은 고개를 돌려 제 뺨에 가져다 댄 에이든의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에이든의 몸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 사이를 일자로 죽 가로질러 언제나 제 아래를 쑤셨던 손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에이든은 이전보다 더욱 크게 움찔거렸다.

“너…….”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명백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레인은 직감적으로 잡아먹히기 직전임을 알아챘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레인은 에이든에게 봉사하듯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이는 세우지 않고, 혀만을 움직여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핥아 올렸다. 에이든의 손끝이 레인의 여린 점막에 닿을 때마다, 레인의 혀끝이 에이든의 여린 살점을 건드릴 때마다 에이든의 미간은 점차 험악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해.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그냥 넘어가 줄 테니까.”

에이든이 그르렁거리듯이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으나 레인은 오히려 대담하게 에이든과 눈을 마주하며 손가락을 더욱 깊숙이 목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황금빛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단 채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아슬아슬해져 있던 에이든의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그대로 침대 위로 레인을 쓰러트렸다.

에이든은 그 위를 짐승처럼 올라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가락을 물고 있던 레인의 입 안을 혀로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

레인은 거부하기는커녕 에이든의 목에 팔을 감아 제 품에 당겼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요사스러운 비음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후으… 흣, 하으…….”

“…좋아?”

점차 거칠어져 가는 호흡에 레인이 잠시 쉴 수 있도록 입술을 떼고서 나지막이 물으면, 레인은 대답 대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좀 전까지 자신을 대담하게 도발할 때는 언제고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조금만, 더 해 주세요.”

그러면 에이든은 당연하다는 듯이 레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타액에 젖어 반들반들해진 입술을 이로 가볍게 물고 빨더니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거침없이 가르고 들어갔다. 고른 치열을 가볍게 훑은 뒤 입 안으로 더욱 깊숙이 넣어 혀를 얽었다.

혀가 맞부딪힐 때마다 익숙한 비음이 흐르면서 레인의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점점 차오르는 흥분감에 몸을 바르작거리자 에이든은 상체로 레인의 몸을 가볍게 눌러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덕분에 레인은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에이든에게 정기를 바치기 위해 일부러 도발을 했지만, 그와 익숙한 입맞춤을 하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요한에게 붙잡혀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도,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셔츠를 들추던 끔찍한 감촉도 모두 잊혀 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타액을 섞던 에이든은 이내 입술을 떼고는 레인의 목덜미를 세게, 이를 세워 물었다. 갑작스레 덮친 고통에 레인의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으나 에이든의 몸에 가로막혀 자그마한 손짓 발짓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흐윽……! 아파…….”

레인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면 에이든은 혓바닥을 넓게 내어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갈수록 달아져 가는― 오래간만에 맡는 정기에 숨을 깊게 훅 들이마시며 말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레인은 에이든이 갑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물은 것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임을 눈치채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에이든 님이 구해 주셨잖아요.”

“좀 더 일찍 구했더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깨어나지 않았을까, 자주 생각했어. 정신적 충격도 덜 받았을 테고.”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그리고 이렇게 깨어났잖아요. 몸도 멀쩡하고, 정기도 멀쩡하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아니면 걱정시키기 싫어 부러 즐거운 척을 하는 건지 해맑게 웃으며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서 조잘거리는 레인의 옆모습을, 에이든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뺨에다 내리꽂히는 시선에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이던 레인은 그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려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굳게 잠겨 있던 황금빛 시선이 오롯이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워진 에이든은 다시금 레인을 꼭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혀끝에 닿는 레인의 옅은 정기가 눈물겨울 만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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