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각
에밀리에게 고민 상담인지 연애 상담인지 모를 무언가를 받고 난 후, 레인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나흘 동안 제대로 잠든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잠깐이라도 눈은 붙였다면 이번에는 아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제 모레면 에이든이 있는 저택으로 가게 될 텐데 에이든의 얼굴을 보게 될 것도 걱정이었고, 그 걱정을 나중으로 미루면 에밀리가 했던 말이 떠올라 레인을 괴롭게 했다.
‘정말로 내가 에이든을 좋아하는 건가?’
에이든이 좋기야 좋았다. 악마이기는 해도 자신의 은인이었다. 먼 친척 집을 전전하며 마구간이나 헛간에서 희멀건 죽이나 먹으며 겨우 연명하던 삶이 그로 인해 바뀌었으니까.
자신이 바라는 만큼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늘 자신의 곁에 있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은 소중했다.
게다가 저번 주말에는 자신에게 제법 다정하지 않았던가.
버려질까 봐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증표도 새겨 주었고, 마녀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했던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조언을 해 주기도 했으며 아카데미로 떠나는 마차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떠나기 전날 밤, 침대에서 했던 섹스는 정말 미칠 만큼 좋았다.
그리고 심장이 요란스레 뛰고야 말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레인은 부끄러운 기분을 참을 수 없어 이불을 펑펑 발로 찼다. 그러고는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좋아하는 건가? …좋아하는 거야?”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레인으로서는 에밀리가 해 준 말 말고는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는 게, 멈출 수 없을 만큼 자꾸 에이든을 의식하고 생각하게 되는 게 제 스스로도 무서울 정도인데 이게 사랑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요한에게 손등에 키스를 받았을 때에는 전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장이 떨리지도 않았고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하고.
그렇게 비교를 해 보면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부정하고 싶었다. 달리 반박할 만한 말도 없는데도 그러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과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새벽 동이 텄고 레인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퀭한 눈동자를 하고서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반사적으로 저택에 돌아가기 위한 짐을 쌌다.
그 와중에도 심장 소리는 요란해서 저택에 돌아가는 걸 기뻐하는 건지 저어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하루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쓰면서도 전혀 시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번 주부터 틈틈이 공부해 두었던 상업에 관한 입문서와 세금에 대한 서적은 책상 서랍 한구석에 치워 둔 지 오래였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움직이고 생활하면서도 눈은 푹 죽어 있는 탓에 에밀리가 시시때때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담아 옆자리를 흘깃거렸으나 끝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에밀리는 오지랖이 넓은 편이기는 했지만 말을 얹어도 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은 후, 설탕을 듬뿍 넣은―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사 주며 레인이 쓰러지지 않도록 열량과 카페인을 보충시켜 줄 따름이었다.
“난 논문이 급해서 먼저 갈게. 넌 그거 다 마시고 천천히 와.”
하고 레인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레인은 그런 에밀리의 배려가 고마웠다.
뜨겁고 좋은 향기가 나는 커피는 얼마간 레인을 진정시켜 주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후후 입으로 불어 식혀 가며 천천히 커피를 음미했다. 기분 좋은 온기에 레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고민이 아주 약간 덜어진 기분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에 실려 오는 싱그러운 꽃향기가 기분이 좋아서 레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근처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벤치에 그늘을 만들어 주어 눈이 부시지 않고 딱 좋았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조용히 소곤거리는 타인의 대화 소리가 은은한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어 긴장을 덜어 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갑작스레 긴장이 풀려서일까, 밤새도록 찾아오지 않았던 졸음이 뒤늦게 몰려왔다.
레인은 가물거리는 시선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것 같아 자신의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절없이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점심시간은 훌쩍 지나 버린 뒤였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진 것 같은 느낌에 이상하다 싶어 눈을 뜨니 식당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아무도 없이 레인 혼자만 덩그러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졸음이 역력한― 미처 다 뜨이지도 않는 눈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으로부터 이미 한 시간은 족히 지나 있었다.
깜짝 놀라서 어서 연구실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히 자던데, 조금 더 자다가 가지 그래요, 레인.”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레인이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요한이 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초여름,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나부끼며 일렁이는 햇살과 그림자의 파도가 요한의 미소 위에 아름답게 내려앉았다. 가지런히 무릎을 모아 앉은 허벅지 위에는 반쯤 읽은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한이 여기에 있지?
아직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레인이 요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요한은 그러한 레인의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맑은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것 같은 명랑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 침 흘렸어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아.”
잔뜩 흐트러진―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모습을 들켜 부끄러워진 레인은 다급하게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정말로 정신없이 잠들었는지 침 자국은 이미 굳어 있어 문질러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살살 긁어내리고 나서야 민망하기 짝이 없는 흔적들을 지울 수 있었다.
요한은 다시 한번 레인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제 다 지워져서 깨끗하다고,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레인은 다른 사람 앞에서 칠칠맞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괜히 입가에 뭔가 또 묻었을까 싶어 입 주위를 매만지고 있자 요한이 상냥한 어투로 레인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잠을 잘 못 자요?”
“아, 네……. 조금요.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요한의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걱정이 깃드는 것을 보고 레인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레인의 대답에 요한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그녀를 향한 배려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걱정이나 고민 같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레인.”
“아, 마음은 고맙지만 그냥… 불면증 비슷한 거라. 그래도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사실 에이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두고서 밤새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잔 것이었지만, 자신을 좋아한다 고백한 사람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일을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기도 했고, 이미 에이든의 것이 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요한에게 얼마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기에 대충 웃으며 얼버무리기로 했다.
이제는 정말로 연구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라 이만 작별 인사를 입에 담으려던 순간, 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이번 주말이요?”
“네. 주말에 번화가 쪽에서 바자회가 열린 대요. 다양한 공예품이 주로 나온다고 하는데, 아기자기하고 볼 것도 많다고 들었어요.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갔으면 해서…….”
요한은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는지 두 뺨을 조금 붉히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레인은 연애나 사랑에는 둔감했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데이트 신청이었다.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 주말에 번화가에 나가 바자회 같은 것을 구경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자 제안하는데, 이것이 데이트가 아닐 리가 없었다.
레인은 조금 고민이 되었다. 마침 이번 주말에는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에이든과 어떻게 얼굴을 마주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난 평일 동안 주말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요한의 데이트 신청은 레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기회였다.
그러니까 주말에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적절한 이유를 만들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레인은 고민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마음을 정하고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요한. 주말에는 본가로 돌아가야 해서 바자회에는 같이 못 갈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다음에 시간 되면 에밀리랑 셋이서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요. 미안해요. 그럼 전 연구실에 들어가 봐야 해서 먼저 가 볼게요.”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요한에게 다음 약속을 제안하며 위로한 레인은 못다 한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레인의 뒷모습을, 요한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대답이었다.
레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연구실에 앉아 논문을 쓰며 생각했다.
분명 좋은 기회에 좋은 제안이었다. 데이트 신청이 분명했지만 좋게 해석하면 친한 친구끼리 주말에 시내에 놀러 가는 건 무척이나 흔한 일이었다. 더욱이 자신은 요한에게 마음이 없었고, 좋은 사람 좋은 친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두 눈 질끈 감고 수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저도 모르게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에이든의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에이든에 대한 마음의 갈피도 못 잡았으면서도 결국 에이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되고야 마는 까닭을 레인은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너무 갑작스레 만난 바람에 이미 에밀리에게 에이든과 약혼했다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는 것도 잊어버렸어.’
요한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다음에 셋이서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했으니 그때 말을 해 둬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에밀리가 갑자기 파티션 너머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말없이 웃으며 시계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벌써 저녁때가 가까워져 있었다.
연구실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에밀리가 기다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오늘부터 화려한 주말인데, 넌 어디 안 가?”
“…집 가야지.”
에밀리의 물음이 묘하게 요한이 제게 했던 데이트 신청과 겹쳐 보였지만 레인은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
레인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밀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파티션 너머로 어질러진 종이와 펜, 책들을 치우는 소리가 서먹하게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레인 또한 에밀리를 따라 말없이 책상 위를 치웠다.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서 마지막 마무리로 마른걸레로 책상에 묻은 잉크를 닦아 내고 있는데 에밀리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 한마디에 잉크를 닦아 내던 레인의 손이 멎었다.
에밀리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활달한 성격이 반영된 듯 통통 튀듯 시원스런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격려가 담겨 있었다.
“내가 말했지. 그 남자도 널 좋아하고, 너도 그 남자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사랑하는 사람끼리 있으면 뭘 하든 다 용서가 되는 법이야. 사랑의 힘 모르니?”
“…….”
“집에 돌아가면 그 약혼자 만나는 거지?”
레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밀리는 힘없이 축 늘어진 레인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짝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겠어? 게다가 잘생겼다며? 네게 잘해 준다며? 그럼 다 된 거지. 그리고 내가 했던 말 잊지 마. 결혼식 하면 꼭 나 불러야 한다.”
“알았어.”
에밀리의 실없는 소리에 레인은 조금 기운이 나 웃으며 대답했다.
현실적으로 악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못할 것이고, 따라서 결혼식도 치를 일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에밀리의 밑도 끝도 없는 긍정론을 듣고 있자니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4년이나 봐 온 사람이었다. 허리께에는 여전히 마녀의 각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아마) 영원을 함께할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든 말든 간에 그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무슨 상관이랴.
어쩌면 자신이 에이든을 좋아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약속할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을 함께 한다는 건, 이유를 불문하고 멋진 일임에는 틀림없었기에.
“…잠시만, 이거 그냥 결혼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기분에 레인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거대한 환호성과 수군거림 같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재빠르게 창가로 다가가 상황을 살피던 에밀리는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것인지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눈을 떼질 못했다.
“어머나, 세상에! 미쳤다, 레인! 빨리 와 봐.”
창밖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팔을 뒤로 휘적거리며 이리로 오라고 재촉하는 에밀리의 모습에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흥분했나 싶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뭔데? 뭔데 그래?”
그렇게 말하며 레인은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지난 3년간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주말을 앞둔 평일 저녁이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아카데미를 빠져나가 놀러 갈 시각이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공부고 나발이고 부리나케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들 하던 것을 멈추고 아카데미를 찾아온 낯선 손님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생이고, 교수고 너 나 할 것 없이 시선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손님의 얼굴을 보고서 숙덕거리며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물론 아카데미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기에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러한 환호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데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저거 봐, 진짜 잘생기지 않았냐? 저렇게 차려입고 온 거 보면 약혼자 보러 찾아온 것 같은데, 진짜 부럽다.”
에밀리가 곁으로 다가온 레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며 동의를 구했지만 레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로 꼬박 닷새였다. 닷새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밥도 먹지 못했으니 유령이나 허깨비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버젓이 아카데미 한복판에 서 있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서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훑던 남자의 눈이 정확히 레인이 서 있는 창가 쪽에서 멎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레인은 순간 겁이 나서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얽혔을까.
시종일관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로 아카데미 정문 근처에 서 있던 그는, 창가에 서 있는 레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딴사람이라도 된 듯 시원스런 눈동자를 흐드러지게 접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꼭 숨바꼭질에서 이긴 어린아이처럼 장난기가 그득 넘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레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와, 이쪽으로 손 흔들어 준다!”
잘생긴 남자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줄 착각한 에밀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서 옆에 서 있던 레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물론 레인을 대신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밀리의 힘찬 손길에 바닷물 속 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레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에이든 님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으신 거지?’
그가 건네 오는 인사를 받을 수도 없고 받지 않을 수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레인은 그저 멍하니 서 있다.
내일쯤에나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니 반가움보다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게다가 에이든은 자신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보러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신이 나서는 요란스럽게 떠드는 자신과는 달리 레인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뒤늦게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에밀리가 고개를 돌려 레인의 표정을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이 꼭 만나기에는 좀 껄끄러운 사연을 지닌 지인을 우연히 맞닥뜨린 것 같은 당혹스러움이 느껴져 에밀리는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기 저 사람, 아는 사람이야?”
“어… 응.”
“정말? 누구야? 누군데 여기까지 널 데리러 온 거야?”
“내…….”
의외의 사실에 흥분한 듯 순식간에 쏟아붓는 에밀리의 질문에 레인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에이든과 자신의 관계를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에이든과 자신의 사이는 무척이나 복잡했다.
아카데미에 제출한 서류상으로는 자신의 후견인으로 되어 있었고, 호적상으로는 자신의 삼촌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자신의 삼촌이라 하기에는 나이가 지나치게 젊었고, 화려한 외모 탓에 갖은 이목을 끌고 있었다.
곧이곧대로 얘기했다가는 아카데미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 것이 빤했기에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냥 부모님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먼 친척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내 약혼자야.”
* * *
레인은 연구실을 뒤로하고 아카데미 한복판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쏟아지는 비처럼 맞고 있는 에이든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에이든에게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생각했다.
‘왜 에밀리에게 내 약혼자라고 거짓말을 했을까.’
물론 자신의 허리에는 에이든의 마녀임을 나타내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고, 에이든이 말하길 악마의 마녀가 된다는 것은 인간 세계로 치자면 약혼과 비슷한 거라고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한 탓에 엉뚱한 대답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레인 자신의 의지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에이든에게로 달려가면서도 왜 이렇게 조급증이 드는지,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모두 에이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또 기분이 나빴다.
그가 잘생긴 건 사실이었고, 그건 레인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왠지 모르게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에이든을 아무도 볼 수 없는― 나만이 볼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곳에다 꼭꼭 숨겨 두고 싶었다.
왜 자꾸 이런 음습한 감정이 자신의 마음을 들쑤시는 건지, 이 감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레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른 사람의 시선에 에이든이 닿는 게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난다는 점이었다.
그는 나의 악마였고, 내가 계약한 악마였다.
나의 에이든인데.
그런 울분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무렵 레인의 발걸음은 에이든이 시야에 들어올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맨날 연구실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 건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건지 조금 뛰었다고 숨이 가빠 왔다.
레인은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빠른 걸음으로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눈길로 말없이 바닥에 시선을 내리깔다 주위를 훑어보기를 반복하던 에이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다시금 시선이 얽혔다. 에이든은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레인만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오직 둘만 남겨진 것처럼.
정장을 갖춰 입은 에이든은 그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화려했다. 기다란 머리칼은 뒤로 남김없이 넘겨 시원한 이마와 콧날이 그대로 드러났으며 이마 아래로는 짙고 굵은 눈썹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와 그 속에 자리 잡은 짙은 잿빛 눈동자는 레인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면서.
레인은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의문 섞인 시선이었다. 도대체 저 잘생긴 남자와 자신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하는― 의문스러운 시선.
레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에이든과 단둘뿐인 세계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의 의문스런 시선에 대답하듯 약간의 고양감과 함께.
그것은 일종의 확인 사살이었다.
이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아무도 이 사람과 자신의 사이를 방해할 수 없다는― 배타적인 선을 긋는 것이었다.
레인의 발걸음이 정확히 에이든의 앞에 멎는 순간, 그는 칭찬이 섞인 미소와 함께 힘겹게 달려오느라 잔뜩 흐트러진 레인의 하늘빛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에이든의 손길에 굽이치는 강물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넘실거리는 하늘빛 머리칼이 귀 뒤로 넘어갔다. 귓바퀴와 귀 뒤의 연한 살결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늘 해 주던― 별것 아닌 행동 중 하나일 뿐이었으나 오늘따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이든이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렇게 달려와.”
“저…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레인의 질문에 에이든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마치 여기에 오면 안 되는데 왜 왔냐는 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레인도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당황하여 덧붙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번도 오신 적 없으시잖아요. 늘 저택에서 기다리셨고. 오늘은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놀라서요.”
“그냥……. 너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 구경해 보고 싶어서. 요즘 아카데미는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 그럼 제 연구실 구경시켜 드릴까요? 다행이다. 방금 막 에밀리랑 같이 정리하던 참이라 깨끗하거든요.”
해맑게 웃으며 조잘거리는 레인에게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오로지 레인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 전에,”
“……?”
“…배가 좀 많이 고파서 그런데 네 기숙사 방부터 먼저 갈까?”
“네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비명에 가까운 대답과 함께 레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순식간에 화악 붉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남사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여 레인이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서 그를 올려다보자 에이든은 그런 레인의 표정에 유쾌한 듯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고는 앞장서라고 말하듯 레인의 마른 등을 토닥였다.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찰나의 순간 마주친 에이든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진심을 레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레인은 에이든을 데리고서 자신이 살고 있는 기숙사 방으로 안내했다.
레인이 열쇠로 문을 열고 기숙사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이든은 곧장 문을 잠그고 레인을 한쪽 벽으로 몰아세웠다. 문의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마치 섹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단단한 에이든의 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을 뿐인데 레인은 어느새 한쪽 벽에 몰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독 안에 든 생쥐 꼴이 되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끄럼을 많이 탈까? 응?”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저와 눈을 마주칠 생각을 않는 레인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장난기와 숨길 수 없는 진득한 욕정이 묻어 나왔다.
이내 턱을 감싼 에이든의 손길이 레인의 고개를 들게 했다. 레인은 저항하지도 않고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에이든과 눈을 마주했다.
저택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을 기숙사에서 하려고 하니 갑자기 부끄러웠는지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엔 수치심인지 정념인지 모를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 눈빛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에이든은 혀를 내어 레인의 입술을 가볍게 핥아 올리고는 이내 잡아먹을 듯이 레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거칠게 맞물렸다. 에이든이 레인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애무하자 긴장으로 꾹 닫혀 있던 레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에이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잇새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아주 조금, 벌어졌던 틈이 점차 넓어지면서 어느새 레인의 입 안은 여린 점막을 헤집는 에이든의 혀로 가득 차올랐다.
방 안 가득히 풍겨 오는 정기의 향취에 에이든은 그것을 음미하려 레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싹 붙여 거의 품에 가두다시피 안았다. 레인은 자꾸만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아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입고 있는 셔츠 사이를 파고들어 온 에이든의 커다란 손바닥이 저번 주보다 훨씬 얄팍해진 가는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레인의 막힌 입술 사이로 옅은 비음이 흘렀다.
“흐응…….”
거침없이 여린 점막을 혀끝으로 유린하는 에이든의 혀를 받으면서 내뱉는― 짧은 한숨 같은 레인의 신음에 에이든은 속이 끓는 기분이었다.
아주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이든이 잠시 입술을 떼어 내면, 레인과 에이든 사이에 얇은 은사가 이어지다 이내 끊겼다. 에이든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레인의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린 뒤, 이내 허리를 숙여 레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새하얀 살갗에 이를 세워 박아 넣었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으윽, 하는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아릿한 통증에 몸을 바르작거리면서도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선명하게 올라온 붉은 자국을 에이든이 넓게 혀를 내어 핥으며 말했다.
“저번에 안았을 때보다 살이 빠진 것 같은데.”
“…아, 밥이, 흐으, 잘 안 넘어가서…….”
“식사 끝나면 밥부터 먹여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든은 레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답게 레인은 셔츠도 목 끝까지 단추를 꼭 잠갔고, 넥타이 또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단히 맸으며 속바지에 치마까지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허물어트린다는 사실이, 에이든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레인이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차례차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옷 아래로 감추어져 있던 레인의 나체가 오롯이 드러났다.
단단하게 솟은 유두와 호흡을 할 때마다 가늘게 떨며 오르내리는 갈비뼈, 허리께에 새긴 각인과 기대감으로 흠뻑 젖어 있는 음부까지, 에이든 앞에서 숨김없이 드러났다.
레인은 기숙사 방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여 팔을 들어 민망스레 솟아 있는 젖꼭지라도 가려보려 했으나 에이든이 그것을 저지했다.
“갑자기 왜 가려?”
“그냥… 갑자기 창피해져서요.”
“그럼 창피하지 않게 혼을 쏙 빼 줘야겠네.”
“네? 아, 안 그러셔도 되는, 흐윽!”
갑작스레 에이든이 빳빳하게 솟은 유두를 이를 세워 깨무는 통에 레인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며 신음을 흘렸다. 격렬한 통증과 함께 쾌감이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그러고는 마치 이런 자극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랫배가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더욱 풍부하고 깊어진 정기의 향취에 에이든은 만족스레 웃으며 유두를 핥고, 다른 한쪽 가슴을 거칠게 주물렀다.
에이든의 혀끝이 단단해진 유두를 건드릴 때마다, 에이든의 손끝이 유두를 꼬집을 때마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줄줄 새어 나오면서 아래로는 묽은 애액이 주르륵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아주 좋아 죽네, 레인.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물을 질질 싸 대고.”
에이든은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애액을 손바닥으로 쓱 훑는가 싶더니 이내 기대감으로 벌름거리는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박아 넣었다.
갑작스런 침입에 놀란 레인의 가는 몸이 순간 흠칫 떨었으나 이내 밀려오는 쾌감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아랫입은 더 큰 걸 달라고 조르듯 에이든의 손가락을 삼켜 대고 있었다. 레인이 좋아하는 지점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문지르면 내벽이 손가락을 잡아먹을 듯이 씹어 댔다.
방 안은 금세 살결과 살결이 마찰하는 찔꺽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올랐고, 흘러넘치는 묽은 애액은 에이든의 손등을 타고 근육이 단단히 붙은 팔뚝에까지 흘렀다.
“이 소리 들려, 레인? 네 구멍이 날 기다렸다는 듯이 삼키는 소리가?”
“하으… 네네, 으응, 들려요…….”
레인은 눈앞이 흐리게 보일 만큼 강렬한 쾌락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든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했다.
허벅지가 쾌감에 못 이겨 잘게 떨고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에이든은 레인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두터운 허벅지를 밀어 넣어 바깥쪽으로 벌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레인의 다리가 들어 올려지면서 음부가 훤히 보일 만큼 활짝 벌어졌다.
어느새 에이든의 손가락을 세 개나 삼킨 레인의 입구는 풀어질 대로 풀어져 손가락 하나는 더 넣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에이든은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단 레인의 정기와 아랫배에서부터 뭉근하게 차오르는 열기에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했다.
“날 많이 기다렸나 봐. 어지간히도 조르네, 내 거 달라고.”
“흐읍, 흐으… 주세요…….”
“뭐라고?”
“흐응, 에이든 님 거, 주세요.”
축축한 호흡 사이로 들려왔던 웅얼거리듯 불분명한 목소리가, 자신의 물음에 다시금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고는 내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물로 일렁이는 눈동자로 저와 시선을 맞췄다. 이미 흥분으로 잔뜩 달아오른 두 뺨은 붉었다.
귓가를 타고 들어온 전혀 예상치 못한 레인의 부탁에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면서도 빠드득, 소리 내어 갈리는 잇소리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익숙지 않은 기숙사 방에서 벌이는 정사에 어색해했으면서 애무 몇 번에 갑자기 돌변해서는 음란하게 제 것을 조르는 레인이라니.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과 함께 에이든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더욱 거친 손놀림으로 구멍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물이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레인의 몸이 쾌감에 바르르 떨더니 이내 들이치는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에이든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흐윽, 우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모를 소리에 질꺽거리는 마찰음이 섞여 들어 방 안은 온통 음란한 소리로 가득했다.
레인은 에이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에이든의 셔츠를 붙잡고서 연신 교성을 내지르느라 바빴다. 에이든이 레인이 좋아하는 지점을 손끝으로 긁어내리듯 문지르며 지나갈 때마다 튕겨져 오르는 허리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더운 숨이 에이든의 가슴팍을 뜨겁게 간질였다.
에이든은 레인의 말을 제대로 못 들은 척 차분히 타일렀다.
“뭘 달라고 하는 건지 똑바로 얘기해야지. 응?”
“에이든 님, 걸로, 박아, 박아 주세요. 네? 아흑! 흐으… 에이든 님 걸로 가고 싶어…….”
자신의 셔츠 자락을 붙잡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짓도, 넘쳐흐르는 열락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도리질을 치는 레인의 모습도, 자신의 것을 조르는 그 목소리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침대 위에만 누우면 싫다고만 하는 그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노라 생각했건만, 막상 제 것을 조르는 레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흥분되었다.
“정말 미치게 하네.”
그 한마디를 짓씹듯이 내뱉은 에이든은 레인의 아래를 쑤시던 손가락을 빼낸 후, 바지 버클을 풀고서 한참 전부터 뻑적지근하던 성기를 꺼냈다. 검붉은 기둥에는 울퉁불퉁한 핏줄이 돋아 있었고, 귀두 끝은 이미 쿠퍼액으로 번들거렸다.
레인의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으로 성기를 슥슥 쓸어내린 에이든은 이내 레인의 입구에 귀두 끝을 맞춘 뒤, 레인이 바라던 대로 뿌리 끝까지 단숨에 삽입했다. 그러고는 레인의 양 허벅지를 두 팔에 걸쳐 몸을 공중으로 띄우고는 퍽퍽 소리가 날 만큼 박아 대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허릿짓을 할 때마다 레인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튀어 올랐다가 깊숙이 박히기를 반복했다. 자궁이 쿵쿵 울려대는 듯한 기분에 레인은 있는 힘껏 에이든의 목에 팔을 감아 안았다. 그러고는 벅차오르는 흥분을 견디려는 듯 에이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도리질을 쳤다.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과 함께 교성이 흘렀다.
에이든은 한계까지 벌어진 레인의 입구를 손끝으로 슬슬 더듬다 이내 둔부를 양손에 쥐고 주물렀다. 레인의 새하얀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밥은 안 먹어도 내 건 잘 먹네, 레인.”
“흡, 흐윽, …아, 에이든 님……. 에이든 니임.”
그저 말없이 울면서 에이든을 꼭 끌어안은 채 신음을 흘리던 레인이 차오르는 열락을 견디며 연신 에이든의 이름을 불러 댔다.
쾌감에 녹아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혀를 애써 움직이며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꼭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에이든은 거칠게 레인의 내벽을 꿰뚫던 것을, 뭉근하게 허리를 돌려 가며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제야 한숨 여유가 생긴 레인은 잠시 헐떡이던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어요, 에이든 님.”
“…뭔데?”
“…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세요.”
레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에이든은 좀 전의 흥분이 씻은 듯이 사라진 눈동자로 제 품에 안겨 있는 레인을 쳐다보았다.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뭉근히 계속하던 허릿짓 또한 함께 멈추었다.
여태껏 레인이 자신에게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담아 두었고, 제게만은 돌려 말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기에 아카데미에 오지 말라는 레인의 단호한 말이 에이든으로서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마녀의 각인까지 받아 놓고는 마음이 바뀐 건가?’
머리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전에는 제 불안을 덜어 주려 저 이상으로 저를 가져 달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레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애초에 레인은 거짓말에 소질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아카데미에 있을 요한 앞에서 자신과 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거나 그런 이유로 거부하는 것일까 봐,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잠시, 뒤이어 이어지는 말에 에이든의 불안은 순식간에 불식되었다.
레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가슴 깊은 데서부터 올라오는― 진심 어린 감정을 담아, 치를 떨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에이든 님 보는 거 싫어요.”
“…….”
“너무… 싫어요.”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레인은 진저리를 쳤다.
에이든은 곧장 레인의 표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레인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도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어색하고 또 무안하다고 느껴졌는지 하늘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온통 붉었다.
레인이 자신을 향해 보인 소유욕과 집착에 좀 전까지만 해도 한겨울에 내리치는 서릿발처럼 굳어 있던 에이든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지면서 깊은 만족감과 장난기가 반반씩 섞인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러고는 새빨간 물감에 집어넣었다 뺀 것처럼 붉디붉은 레인의 귀를 혀로 핥아 올리며 속삭였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응?”
“…….”
“그깟 인간들 시선에 닿는 게 그렇게 싫었어?”
“…싫어요.”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에이든의 목을 더 꽉 끌어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인의 작은 목소리와 몸짓에서 이런 마음을 자신에게 털어놓아도 괜찮은지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목나무에 앉은 매미처럼 철썩 달라붙어서는 얼굴을 숨기며 귓가를 붉히는 레인은 제법 귀여웠고, 자신의 것을 조르는 레인의 모습도 만족스러웠기에 에이든은 너그러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부탁을 받았으니 들어줘야겠지.”
“…감사합니다.”
“공짜로 들어주는 거 아니야. 대가는 톡톡히 받을 테니까.”
“열심히 할게요.”
레인은 좀 전까지만 해도 창피해하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에이든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톡톡히 대가를 받아 가겠다는 에이든의 말은 정말로 농담이 아니었다.
늦은 오후에 시작되었던 섹스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벽에다 몸을 기대어 하던 것을 침대에서 했다가, 그다음에는 침대 옆 테이블, 그리고 책상 위를 지나 지금은 창가에 기대어 박히고 있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이어진 정사 탓에 좁은 기숙사 방 안은 난장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건들은 이리저리 바닥에 굴러다녔고, 책상 위에 있던 종이나 펜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가구에는 자신의 애액과 미처 담지 못한 에이든의 정액이 점점이 흘러 있었다.
이토록 거칠게 섹스를 해 대는데 양 옆방에서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더욱 신기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몰래 방음 마법을 걸어둔 에이든 덕분이었지만 마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레인이 그걸 알아챌 리가 없었다.
여기는 저택이 아니라 안을 넓히는 딜도가 없다는 명목으로 레인은 대신 에이든의 것을 종일 박고 있어야 했다.
에이든의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빠듯하게 가르고 들어와 가장 깊은 곳을 퍽퍽 쳐올릴 때마다 레인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으며, 차가운 유리창에 닿아 눌린 젖꼭지가 허릿짓의 반동으로 문질러지며 빳빳해졌다.
웅얼거림에 가까운 신음과 함께 레인의 내벽이 에이든의 것을 조여 와, 음탕하게 누가 볼지도 모르는 창가에다 젖꼭지를 부비며 흥분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레인은 울상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다 풀린 혀를 움직여 부정해 보지만 그동안 에이든에게 길들여진 탓인지 도리어 감도만 높아졌다.
지칠 줄을 모르고 밀어닥치는 쾌락에 레인의 입에서는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만이 흘렀다.
어느새 창밖에는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달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덕분에 어두운 유리창에 두 사람의 인영이 마치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이것 봐, 레인.”
에이든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레인의 몸 위에 겹친 뒤 힘없이 고개를 떨군 레인의 턱을 부여잡고서 앞을 보게 했다.
“무척 아름다워.”
귓가에 속삭이는 에이든의 목소리를 넘겨 들으며 그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고개를 들자 열락에 잠겨 멍하니 풀려 있던 레인의 눈동자에 한순간 일렁임이 지나갔다.
마치 거울처럼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 탓이었다.
쾌락에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눈빛과 한껏 상기된 양 뺨, 미처 다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흐르는 타액.
한참을 괴롭혀져 퉁퉁 부어오른 유두가 차가운 유리창에 닿을 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신음하며 허리를 흔드는 자신의 모습은 충격적일 만큼 음탕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에이든은 모두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흐으, 읏, 아, 보지 마세요, 안 돼……. 하윽!”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네가 누구한테 박히는지 제대로 보여 줘야지. 그래야 아무도 나한테 얼씬도 하지 않겠어?”
“아흐, 흐읍…….”
에이든에게 턱을 부여 잡혀 차마 고개를 숙일 수도 없어, 레인은 반쯤 울면서 줄곧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눈을 마주하며 절정에 달했다.
순간 내벽이 수축하면서 에이든의 성기를 힘껏 조여 와 에이든 또한 참지 못하고 레인의 자궁에다 정액을 토해 냈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꿀렁꿀렁 밀려드는 감각에 레인의 가는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쏟아 낸 탓에 레인의 아랫입은 정액을 미처 삼키지 못했고 애액과 뒤섞인 희뿌연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마침내 에이든이 성기를 빼내자, 레인의 몸은 벗어 놓은 옷가지처럼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머리가 부딪힐 것 같아 에이든이 황급하게 팔을 뻗어 쓰러지는 레인의 몸을 받아 들었다. 열에 젖은 몸은 다행히도 무사히 에이든의 품에 안겼다.
기절하듯 잠든 레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이든은 이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색색, 고른 숨소리가 일정하게 자신의 가슴팍에 닿을 때마다 에이든은 말없이 레인의 허리께에 새겨진 각인을 지분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짧게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가는 온기와 촉감이 간지러웠는지 레인이 무의식중에 몸을 뒤척였다.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요한이 레인에게 데이트 신청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건네는 것을 보고서 급하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고, 에이든은 생각했다.
요한을 견제할 요량으로 평소보다 신경 써서 차려입고 오긴 했으나 레인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자신에게 소유욕을 느끼는 레인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감각이었다.
하찮은 인간들의 이목 따위에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낚시터에 앉아 낚싯바늘을 던졌는데 물고기가 적으면 심심한 것처럼 어느 정도의 반응은 즐기는 편이었다.
레인을 만나기 이전에는 여러 인간들을 꾀어다가 돌려가며 정기를 취하곤 했으니 어느 정도 시선을 끌어오는 편이 먹이 사냥에 수월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들의 반응보다도, 에이든은 레인에게서 돌아온 반응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잠들어 있는 이 순간마저도 뼈째로 발라 먹어 버리고 싶을 만큼, 어제와 엊그제, 이틀 동안 느꼈던 초조함과 불안이 모두 가실 만큼 레인이 제게 보여 준 뚜렷한 감정에 가슴 깊이 충족감이 차올랐다.
레인을 한 팔로 안아 든 에이든은 도둑이 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질러진― 어둠이 내려앉은 기숙사 방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방 한편에 늘 저택에 올 때마다 들고 오는 여행용 가죽 가방이 새초롬히 놓여 있었다. 피로가 짙은 눈동자로 한숨을 푹푹 쉬었으면서도 이미 짐은 모두 다 싸 놨는지 가방의 배가 불룩했다.
에이든이 손가락을 한 차례 튕기자 방이 어질러지기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두 번째 튕겼을 때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레인이 입었던 제복이 차곡차곡 개켜져 가죽 가방 안으로 들어갔고, 마지막 세 번째로 손가락을 튕겼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 저택에 있는 에이든의 방에 도착해 있었다. 짐이 든 가방도 함께였다.
저택에 도착한 에이든은 곧장 사역마를 불러내 따뜻한 물에 레인의 몸을 씻긴 뒤 그대로 자신의 침대에 재울 것을 명령했다.
사역마는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에이든에게서 잠든 레인을 조심스레 받아 들고서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뒤이어 부르지도 않은 무르핀이 정갈한 편지와 함께 느닷없이 에이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든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면, 그녀는 에이든에게 다가가 초대장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자리를 비우실 동안 이런 것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에이든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르핀에게서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새까만 종이에 붉은 봉인이 찍힌 초대장에는 푸른 글씨로 ‘사바트’라고 적혀 있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윤락과 환락에 젖은 악마들의 연회였다. 계약한 마녀들을 모두 모아 놓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탐하는― 난잡한 난교의 장이기도 했다.
정기를 가득 취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정기의 질이 낮기도 하고, 레인과 계약을 한 이후로는 레인 이외의 정기는 도통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어 최근에는 전혀 걸음하지 않았다.
연락이 오는 족족 죄다 불살라 버리는 바람에 그쪽에서도 더 이상 자신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또 다시 초대장을 보내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에이든의 의문에 대답하듯 무르핀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새로 마녀의 각인을 새긴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 그래, 그랬지.”
그제야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에이든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마녀를 들여오게 되면 사바트에 데려가 다른 악마들에게 소개를 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소개, 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조 관념이 인간의 것에 머물러 있는 마녀를 타락시키는 교육에 더 가까웠다.
마녀는 손바닥만 한 천 조각 같은 속옷을 입고서(그런 의미에서 마녀의 각인을 새길 때 입는 천박한 의상과 취향이 상통했다. 에이든은 이 옷 취향이 늘 불만스러웠다) 모든 악마들 앞에서 음부가 훤히 보이도록 다리를 벌리고 앉아 너 나 구분할 것 없이 정액을 받아야 했다.
마녀에게 거부권은 없었고, 미리 미약을 먹여 몸을 달아오르게 한 뒤 사바트에 참가하게 되어 있었기에 싫다고 한들 반항할 수 없었다. 도리어 반항하면 할수록 악마들의 호승심만 자극해 그 반항심을 꺾겠노라며 더 험한 꼴만 보았다.
물론 정액으로 범벅이 된 레인을 보는 건 좋았다. 하지만 그건 온몸에 흩뿌려진 정액이 자신의 것이었을 때의 얘기였지, 다른 놈들의 정액을 받는 레인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레인의 정기는 그 향취가 특별해서 다들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다른 악마 놈들에게 깔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눈에 성수가 들어가는 게 나았다.
에이든은 갑자기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통에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눌렀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뇌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흐트러진 머리칼을 머리 뒤로 쓸어 넘긴 뒤 깊은 한숨과 함께 말없이 초대장을 불태웠다.
새빨간 불길에 검은 초대장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다음에도 똑같은 초대장이 오거든 문답무용 불태우도록.”
무르핀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명령에 충실히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초대장을 불사른다고 한들, 그에게 마녀가 생긴 이상 언젠가 한 번은 꼭 사바트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을 제외하고는.
“내일 아침 레인이 깨어나거든 지하실로 데려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내가 신호를 할 때까지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내보내선 안 돼.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지시하지.”
“…….”
“그리고… 새벽 동이 트자마자 보석상을 이곳으로 부르도록.”
“네. 알겠습니다.”
악마의 반려가 되면 사바트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레인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에이든의 침실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리게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폐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느낌에 집중하여 몇 차례 호흡한 뒤에야 서서히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나 에이든 님 좋아했구나.”
에밀리에게 상담했을 때에는 긴가민가했던 것이 에이든과 얼굴을 맞대고 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명확해져서 레인은 조금 쑥스러워졌다.
며칠 내내 잠도 못 자고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에이든이 아카데미에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순간, 그에 대한 감정이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해지더니 이내 에이든의 입을 통해 ‘질투’라는 단어가 들려오는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에이든을 좋아하고, 또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에이든이 자신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했었지, 자신은 질투나 소유욕과는 전혀 무관한―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에이든이 자신에게 집착하고 소유하려 드는 만큼 자신도 에이든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레인은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인정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밤새 고민했던 그 시간에 진작 마음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저 남자를 유혹해서 제게서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이나 강구하는 건데.
레인은 어쩐지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자신이 일어났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타이밍 좋게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에이든으로부터의 전달사항을 알리러 왔음을 알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무르핀임을 알 수 있었다.
레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레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면서 예상대로 무르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전과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에 자로 잰 듯 반듯하고 깍듯하게 행동했다.
한 손에 간단한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서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인을 향해 다가온 무르핀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테이블 위에다 가져온 식사를 깔끔하게 세팅했다.
오늘 아침은 버터 향이 물씬 풍겨 오는 감자수프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빵 세 조각이었다. 평소와 달리 단출한 식사였지만 딱히 입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테이블 앞에 앉아 스푼으로 수프를 떠먹으며 에이든의 전달 사항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면 지하실로 가시게 될 겁니다. 에이든 님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지, 지하실이요?”
귓가를 타고 똑똑히 들려온 ‘지하실’이라는 단어에 레인은 놀라서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스푼이 나뒹굴었다.
무르핀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있는 식기를 주워 들고는 새 수저를 다시 가져오겠노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레인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그녀의 부름에 무르핀은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 돌아서서 레인을 쳐다보았다.
레인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 저… 제가 뭘 잘못했나요? 갑자기 지하실이라니…….”
말하면 말할수록 레인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겨우 에이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다 싶었더니 일어나자마자 지하실행이라니, 레인으로서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제아무리 에이든을 좋아하고, 그의 거친 정사에 길들여져 있다고 해도 지하실에 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거기에 들어가면 자신의 몸이 한계까지 쥐어짜이는 데다가 희미한 불빛, 벽에 잔뜩 걸린 각종 도구들, 어디에 쓰는 건지 이제는 전부 (몸으로) 알아 버린 난잡한 기구들까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손이 달달 떨릴 만큼 두려웠다.
그런 곳엘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가게 되었으니 레인으로서는 겁을 먹고 울먹일 법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이든에게 잘못한 게 없는 듯한데, 왜 가야 하는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레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르핀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못해서 지하실로 가는 게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저,”
“그저……?”
“개발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곧 사바트가 다가오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교육을 겸한다고도요.”
“어, 음……. 그런데 사바트가 뭐예요?”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레인이 솔직하게 의문을 표하자 무르핀은 딱딱한 어투로, 그러나 제법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악마들의 난교 파티 같은 것이었는데 자신들의 마녀를 모두 모아 두고서 말 그대로 ‘난교’를 벌이는 장이라고 했다. 악마의 마녀가 되었다면 적어도 한 번은 이 파티에 참가하여 인간으로서 타락했음을, 악마에 보다 가까워졌음을 증명해야 한다고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파티에 참가해야 한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실에 레인이 얼이 빠져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전혀 못 들었는데요…….”
“주인님께서는 레인 님을 특별히 아끼시니 다른 악마들의 손을 타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다른 악마들의 손에 넘겨주지 못할 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어필해 둘 필요가 있기에 그에 대한 교육을 행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물론 무르핀이 레인을 달래기 위해 내뱉는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었고, 에이든이 사전에 지시한 사항을 그대로 읊는 것에 불과했지만 레인이 그것을 알아챌 리가 없었다.
자신이 지하실에 가야 하는 사정에 대해 납득을 한 듯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조금 침울했다.
잘못을 하여 혼나는 목적으로 지하실에 가는 건 아니라고 해도 지하실에 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녀의 각인을 새긴 이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니 우울하긴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르핀은 언제 다시 가져왔는지 모를 새 스푼을 레인에게 내밀었다.
레인은 그녀에게서 스푼을 받아 들고는 새로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따뜻한 음식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감정이 약간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수프를 두어 번쯤 넘겼을까, 레인이 문득 고개를 들어 곁을 지키고 있는 무르핀에게 물었다.
“교육 열심히 받으면 빨리 끝내 주실까요?”
“글쎄요.”
“그래도 에이든 님을 곁에서 오래 봐 오셨으니까, 조금만 말해 주세요. 불안해서 그래요.”
레인의 애원에 무르핀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레인의 교육은 에이든이 얼마나 빨리 반지의 보석을 고르고 주문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지만 그것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되었기에 무르핀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레인에게 거짓말 섞인 위로를 건넸다.
“…레인 님의 정기는 이미 특별하기 때문에 그리 교육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수프가 좀 더 잘 넘어갈 것 같아요.”
무르핀의 말에 좀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었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물드는가 싶더니 기운차게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남이 하는 말을 의심도 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믿는 레인이 조금 신기하여 무르핀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에이든이 그녀를 아끼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악마가 하는 말이라면 그 저의를 의심해 볼 법도 한데 그런 것 하나 없이 순진하게 모든 말을 순순히 믿는 레인이 되레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무르핀이 가져온 수프와 빵이 모두 바닥을 드러냈는데도 배가 덜 찬 느낌이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허기가 졌던 모양이었다. 레인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계면쩍은 미소와 함께 무르핀에게 부탁했다.
“혹시 이 수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럼 잠시 주방에 다녀오겠습니다.”
무르핀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빈 그릇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새 수프와 빵 세 조각을 들고서 그녀가 도착했다.
레인은 그사이에 긴장이 풀렸는지 자신의 앞에 놓인 수프를 떠먹으며 에이든에게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에이든 님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세요?”
“……?”
“그… 그냥, 그냥 궁금해서요! 취향 같은 게 있으실까, 해서…….”
저에게 쏟아지는 건조한 눈빛 아래로 은은히 흘러나오는 경악에 물든 눈초리에 레인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변명을 덧붙였다.
사실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라기보다는 에이든이 저를 좀 더 좋아해 줬으면 해서, 유혹을 할 때 써먹으려고 물어본 거지만 대놓고 왜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미심쩍게 쳐다보는 눈빛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무르핀이 경악의 눈초리로 레인을 훑은 건, 이 여자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악마가 자신에게 쏟는 애정을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법도 한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인 것이 그녀로서는 조금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답지 않게 레인을 특별히 대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밑에 있던 사역마들을 닦달해 놓고서는 요한이 레인에게 접근하기가 무섭게 아카데미로 달려간 제 주인이나, 그만한 애정과 관심을 받아 놓고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주인의 이상형을 묻는 레인이나 도긴개긴이었다.
달리 말하면 상성이 좋다고도, 끼리끼리 잘 만났다고 할 수도 있었다.
무르핀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감상을 무표정하게 눌러 삼키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는 순진하면서도 음란한 인간 여자를 매우 아낍니다.”
“…….”
“그리고 머리칼은 푸른빛이 도는 것을, 눈동자는 황금빛이 도는 것을 선호하십니다.”
무르핀의 대답에 레인은 수프를 뜨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가슴팍까지 닿는 기다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눈동자 색이야 황금빛을 띠니 다행이지만, 머리칼은 조금 애매했다. 확실히 푸른빛을 띠었지만 두 눈이 시원하리만큼 선명한 파란색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물이 많이 빠진 것 같은 코발트블루색이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슬아슬하게 에이든의 이상형과 닮았다는 사실에 레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순진하고 음란한 건… 솔직히 말해서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에이든이 얼마만큼 음란한 여자를 좋아하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악마이니만큼 평범한 인간 수준은 아니겠지.’
조금 더 분발하자고, 레인은 다시 수프를 먹으며 다짐했다. 아카데미에서 느낀 거지만 에이든을 혹시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라도 하면 원통해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만 푹 빠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혹에 좀 더 힘쓸 필요가 있었다. 첫 유혹 상대가 악마라니, 갑자기 목표가 너무 높아진 기분이었지만 에이든이 좋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해 보는 수밖에.
“고마워요. 많이 도움이 됐어요.”
레인은 감사 인사와 함께 무르핀을 향해 웃어 보인 뒤, 더할 나위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수프를 떠먹었다. 그 옆모습이 너무나도 결연해 보여,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얼굴로 수프를 넘기는 건지 무르핀으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에 심각한 결함이나 잘못이 있었던 게 아닌지, 레인의 곁에 말없이 서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에이든은 응접실에 앉아 천연 색색의 보석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을 말없이 훑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새벽 동이 트자마자 이곳으로 오느라 눈곱도 덜 뗀 추레한 모습의 보석상 벨라가 앉아 있었다.
벨라는 보통 이렇게 급한 출장에 응하는 편은 아니었다. 귀찮기도 했고 자신들이 먼저 부르겠다며 경쟁을 벌이는 귀족들의 작태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경우 워낙 단골에 자신을 자주 불러 주는 편이기도 했고, 또 보석을 구매하는 데 있어서 값을 따지지 않기로 유명했기에 무례하기까지 한 출장 요청에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돈은 벌어 먹고살아야 했기에.
벨라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흘깃거렸다. 분명 높은 귀족임에 틀림없는― 고귀함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쭉 뻗은 콧날, 입매가 살짝 내려와 있는 얇은 입술, 커다란 쌍꺼풀진 눈매는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짙고 굵은 눈썹하며 이마를 지나 콧잔등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앞머리는 그의 외모를 좀 더 우수에 찬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화려한 외모와 달리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무서워서 벨라는 오금이 다 저려 왔다.
가져온 보석이 마음이 안 드는 건가, 싶었지만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보석만큼은 신중하게 살피고 있었고,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면 다른 건 없냐고 진작 물어 왔을 터였다.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알면 좀 나을 텐데.
벨라는 직접 물어볼까 하다 이내 관두고서 에이든이 적당한 보석을 고를 때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에이든은 피처럼 붉은 가넷으로 할지, 아니면 아주 맑은 빛을 띠는 사파이어로 할지, 아니면 순백의 다이아몬드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이야 어떤 보석을 하든 하등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레인이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신중해졌다. 기왕이면 레인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해 주고 싶었다.
세 가지 보석 중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순간 보석을 쥔 에이든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양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벨라가 화들짝 놀라서는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공포에 질린 듯 숨을 훅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얼굴에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낀 에이든은 벨라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손짓했지만 구겨진 표정은 쉽사리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하실에 남겨 두고 온 분신의 눈과 귀를 통해 타고 들어오는 레인의 모습이 에이든의 인내심을 시험한 탓이었다.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민하고 있던 보석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는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에 벨라가 걱정을 표했다.
“괜찮으십니까? 사용인을 불러올까요?”
“괜찮아요. 잠시 현기증이 와서……. 죄송하지만 조금 쉬도록 하죠.”
정중하게 대답한 에이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둠으로 새까맣게 뒤덮이자 지하실에 있는 레인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레인은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양쪽 팔걸이에 다리를 하나씩 얹어 음부가 고스란히 보이도록 벌리고 있었다. 팔걸이에 얹어진 허벅지는 밧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다리를 오므릴 수 없었다.
게다가 양팔은 의자 뒤에 묶여 있어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전신이 옴짝달싹 못하게 의자에 묶인 레인은 사역마들에게 젖꼭지가 괴롭혀지고 있었다.
“흐읏… 하으, 그만, 아, 이상해…….”
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신음했다. 이미 오랫동안 괴롭혀진 젖꼭지는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렸고, 단단하게 솟아 있었다.
사역마들이 이로 가볍게 깨물 때마다 레인의 가는 허리가 튕기듯이 튀어 올랐으나 그마저도 몸이 의자에 구속되어 있는 탓에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의자가 달그락 움직이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릴 따름이었다.
레인의 구멍에서는 이미 물이 줄줄 흘러 앉아 있는 나무 의자가 새까맣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구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마치 넣어 달라 재촉하듯이 입구를 오물거렸다.
계속해서 자극은 밀려오는데 가지 못해 괴로워 레인이 제발 박아 달라 애원하면 발딱 솟은 유두 위로 가벼운 매질이 떨어졌다.
“하윽! 으윽!”
안 그래도 오랜 애무 탓에 예민해져 있는 유두에 매질이 떨어지자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분신인 에이든이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것으로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레인의 유두를 손끝으로 쿡쿡 찌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로 먼저 가기 전까지는 박아 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 레인?”
“아흐, 못 해요… 못, 해요……. 제발 박아 주시면, 악!”
다시금 레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애원에 매질이 떨어졌다. 이전의 매질보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매질 두 번에 퉁퉁 부어오른 유두는 곧장 사역마들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따끈하고 축축한 혀가 핥아 올리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레인은 자음과 모음이 이어지지 않는―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흘렸다.
레인이 박아 달라 애원하면 가슴 위로 매질이 떨어졌고, 떨어지는 매질에 흥분하여 애액을 왈칵 쏟아 내면서도 끝내 가지 못해 괴로워한 레인이 다시 박아 달라 애원하기를 반복하는― 연쇄적인 반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러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에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면서 뻑적지근해지는 것이 당장에라도 지하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에이든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흑, 에이든 님, 아, 제발 가게, 흡, 가게 해 주세요…….”
옴짝달싹 못한 채 양쪽 젖가슴을 사역마들에게 빨리면서 울부짖는 레인의 모습을 애써 뒤로 하며 에이든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미 사전에 자신의 용무가 끝나기 전까지는 레인을 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사역마들과 분신에게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향취가 더욱 깊어진 정기를 직접 제 손으로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실에 가는 방법은 빨리 보석상과의 일을 마치고 이 여자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는 것뿐이었다.
에이든은 다시 눈을 떠, 뻐근한 자신의 아랫도리와 귓가에 잔잔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레인의 신음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서 보석을 고르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발을 들인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레인은 금방 끝날 거라고 했던 무르핀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두 시간 내내 애무만 받고 한 번도 절정에 달하지 못한 탓에 사역마들이 젖꼭지가 아닌 맨살갗에 대고 혀로 훑어 올려도 찌르르 척추를 타고 쾌감이 차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레인을 가게 할 정도는 아니라 차고 넘치는 쾌락은 해소되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여 몸을 더욱 민감하고 예민하게 만들 뿐이었다.
내벽이 경련하고 수축하며 커다란 것이 밀고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래에는 그 어떠한 자극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음핵을 문질러 주어도 금세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역마들은 물론, 눈앞에 앉아 있는 에이든 또한 자신의 아래에는 손가락 하나 가져다 대지 않았다.
정말 유두를 애무하는 것만으로 가게 할 요량인 듯했다.
“흐응, 하… 으, 흐읏, 으응…….”
사역마들은 돌아가면서 레인의 탐스럽게 솟아오른 유두를 맛보고 있었다.
그렇게 빨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너무나도 황홀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유두를 빨고 핥아 대서 정말로 뭐가 나오기라도 하는 건 아닌 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두 시간 내내 쉼 없이 희롱당한 젖꼭지는 이미 퉁퉁 부어올라 혀가 닿는 순간부터 신음이 줄줄 흘렀다. 심지어는 혀가 닿지 않아도 그저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릿할 정도였다.
이제 더 이상 박아 달라 애원할 정신도, 레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애처롭게 신음을 흘리며 열락의 흠뻑 젖은 몸을 느리게 바르작거릴 따름이었다.
“아, 더는… 흐, 안 돼……. 하윽! 흐읏!”
그 순간 레인의 유두를 빨던 사역마들이 갑자기 이를 세워 깨물기 시작했고, 갑작스레 찾아온 강렬한 고통이 도리어 자극이 되어 결국 레인은 두 시간 내내 차곡차곡 쌓여 있던 쾌감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절정에 달했다.
정말로 젖꼭지를 애무당한 것만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한참 동안 시달린 내벽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내부를 조이며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에이든이 커다란 성기로 때려 주었던 자궁 입구 부근이 간질거리는가 싶더니 몸에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실금한 것처럼 묽은 애액이 나무 의자를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목적을 달성한 사역마들은 그제야 레인에게서 입술을 뗐다. 그러고는 절정의 여운에 젖은 듯 가볍게 경련하는― 땀에 흠뻑 젖은 새하얀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연한 살갗에 스미는 고통에 나무 의자에 축 늘어져 눈을 반쯤 까뒤집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레인의 몸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가는 허벅지에 사역마들이 남긴 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이것으로 용건은 모두 끝났는지 지하실에 있던 모든 사역마들이 단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지하실에는 오롯이 레인과 에이든,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말없이 가만 소파에 앉아 레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다가온 에이든의 발걸음은 정확히 레인이 앉아 있는 의자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레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듯이 진지하면서도 심각한 눈빛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젖은 푸른 머리칼과 고정해 둔 밧줄 틈으로 보이는― 몸을 바르작거리느라 생긴 까지고 쓸린 상처가 눈에 띄었다. 한참을 괴롭혀진 양 유두는 완전히 새빨갛게 익어 원래의 것에 두 배쯤은 부어올라 있었으며 가슴에 내리친 매질에 새하얀 가슴팍은 울긋불긋했다.
등받이에 기대어 몽롱한 눈동자로 힘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인의 모습은 에이든의 참을성을 철저히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보석상과의 용건을 빨리 끝내고 분신과 교대한 보람이 있었다.
이만한 정기, 이토록 음란한 모습을 다른 놈들과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레인은 자신의 먹잇감이었고, 자신의 마녀이며 영원의 시간 동안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가능했다.
땀으로 잔뜩 흐트러져 있는 레인의 얼굴 위로 에이든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몸을 가까이 붙여 온 에이든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레인.”
그의 부름과 함께 코끝에 익숙한 에이든의 체취가 맡아지자 레인은 고개를 조금 움직여 에이든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에이든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 듯이 끌어당겨 웃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상을 주지.”
그 순간, 그토록 바랐던 자극이 레인을 덮쳐 왔다.
숨이 턱 목 끝까지 막히는 감각과 함께 커다란 에이든의 것이 레인의 내부를 순식간에 꿰뚫고 들어왔다. 두 시간 내내 풀어져 있던 질구는 에이든의 것을 버거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삼켜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젖꼭지를 애무당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쾌락에 레인은 에이든의 성기를 삼킨 것만으로도 절정에 달해 내벽을 조이며 물을 흘렸다.
에이든이 허리를 움직이자 레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격렬하게 허리를 튕기며 반응했다.
“하읏, 으응! 시, 싫어… 히익, 하으, 갈 것, 같아.”
“방금 넣은 것만으로 가 놓고는 또 가는 건가?”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레인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절정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잠시 에이든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인 탓이었다.
하지만 에이든 쪽도 급한 건 마찬가지였다. 레인이 두 시간 내내 교육을 받을 동안 에이든 또한 음탕한 레인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아야 했다.
평소라면 레인의 상태를 봐 가며 조절하며 안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레인 안에 제 성기를 박고서 정기를 잔뜩 취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기에.
그 와중에도 여유로운 척 레인을 놀리는 듯한 말을 내뱉는 것은 그가 가진 최소한의 인내였다.
“싫은 게 아니라, 후, 좋다고 해야지.”
“…아, 하흐, 으… 흐읏!”
“이것 봐. 아랫입도 내 걸 꽉꽉 무는 게 좋다고 하잖아, 응? 레인?”
그렇게 속삭이며 에이든은 레인의 자궁까지 침범할 기세로 내벽 깊숙이 쳐올렸다.
단단한 귀두 끝이 퍽퍽 레인의 몸뚱이를 쳐올릴 때마다 레인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발발 떨리는가 싶더니 다시금 내벽이 경련과 함께 수축했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 또한 참지 못하고 레인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귀두를 박아 넣고 곧장 사정했다.
세 차례에 걸쳐서 토해 내는 정액이 배 안에서 꿀렁거리듯 밀고 들어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계를 넘어선 쾌락에 에이든이 파정이 끝남과 동시에 성기를 빼내었으나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하다가는 정말로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할 것 같아 에이든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밧줄에 묶여 있던 레인의 팔다리를 자유로이 풀어 주고는 밧줄 자국이 깊게 새겨진 허벅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쪽,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지하실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흐으…….”
레인의 맥없는 신음이 에이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붉게 상처가 난 부위를 진득하게 혀로 핥아 올리자 잠시 멎었던 떨림이 다시금 찾아왔다.
“쉬이, 착하지.”
“…에, 이든 님.”
레인이 남아 있는 힘을 쥐어 짜내 완전히 풀려 버린 혀를 움직여 에이든을 불렀다. 어느새 레인의 가는 손목에 입을 맞추고 있던 에이든이 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시선을 들어 레인을 바라보았다.
곧장 눈물에 젖어 든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가만히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한참 뒤에야 레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추워요……. 안아 주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레인의 칭얼거림에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레인의 가는 몸을 제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러면 레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두 팔을 들어 에이든의 단단한 목에 감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팔에 힘을 주고 싶었지만 온몸 구석구석에 스민 쾌락 탓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양팔을 더 가깝게 붙이는 것이 레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에이든과 몸을 겹치고서 한참을 안겨 있었을까.
열락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몸이 에이든의 온기 속에서 점차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던 호흡도 고르게 변했고, 파들파들 경련하듯 떨리던 몸도 더 이상 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 몸도 마음도 진정된 것이 레인 스스로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에이든도 느껴질 때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서 동시에 입을 열었다.
“레인.”
“에이든 님.”
그리고 동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서로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깨질 것 같지 않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에이든이었다.
“…왜 불렀어? 좀 전에는 안아 달라 그러더니 이번에는 박아 달라 그러려고?”
에이든은 그저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레인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미약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가슴팍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레인의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새빨갛게 젖어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아.”
옅은 한숨을 내뱉은 에이든은 레인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쳐 안아 들었다. 몸이 불쑥 공중에 떠오르자 떨어질까 봐 불안했는지 레인이 몸을 굳히며 제 품에 더욱 안겨들었다.
에이든은 안심해도 좋다는 듯 다른 한쪽 팔로 레인의 등을 힘주어 단단히 받쳤다. 그제야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던 레인의 몸이 안심한 듯 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하실에 들어찬 기구들 중 가장 푹신한 형틀에 레인을 내려놓는가 싶더니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양 손목을 묶어 위로 고정했다. 그러고는 허벅지 사이를 우악스럽게 벌리고는 아직 젖어 있는 아래에 단단히 선 자신의 성기를 비비는가 싶더니 단숨에 밀어 넣었다.
순간 비명에 가까운 신음과 함께 레인의 허리가 튕겨져 올라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봐주지 않고 레인의 자궁구를 무지막지하게 쳐올렸다.
갑작스레 밀어닥치는 쾌감에 레인이 몸을 비틀며 조금만 천천히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에이든은 도망치려는 레인의 골반을 양손으로 붙잡아 내리며 음모가 비벼질 만큼 뿌리 끝까지 삽입하여 허릿짓을 이어 갈 따름이었다.
“으응! 그렇게 거칠게, 하시면, 하윽!”
“왜? 박아 달라고 했잖아.”
“미칠, 것, 같아요…….”
“아주 예쁜 짓만 골라서 하지.”
그가 성기를 크게 쳐올릴 때마다 툭툭 끊기는 레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 어린 대답에 에이든은 웃으며 대답했다.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에이든도 미칠 것 같기는 매한가지나 다름없었다.
에이든은 콧잔등을 간질이는 자신의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고는 제 아래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신음하는 레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흐르던 신음이 에이든의 입에 먹혀 들어가면서 전축의 볼륨을 한 단계 낮춘 것처럼 지하실 가득히 울리던 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그 작아진 소리는 레인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