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약혼 (6/12)

목차

5. 약혼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잠든 레인의 뺨을 조심히 간질였다. 얼굴 위로 따갑게 내리꽂히는 강렬한 햇빛에 미간을 구기며 반대로 돌아누웠지만 햇빛은 여전했다.

결국 레인은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어나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푹 잤는지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데에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끝으로 빗으며 레인은 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방 안을 살폈다.

묘하게 자신의 방보다 너른 공간감에 들여놓은 가구도, 인테리어도 달라서 대체 자신이 어디서 자고 있었던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레인은 어리둥절하기 그지없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힘겹게 깜박이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다 마녀에 관한 책을 훑어본 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에이든의 침실로 향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내고는 금세 지금의 상황을 납득했다.

‘아, 아직 에이든 님의 침실이구나.’

평소 같으면 사역마들을 시켜 자신의 방으로 옮기거나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의아했으나 이제 각인도 새기고 에이든의 마녀가 되었으니 그에 따른 그 나름의 대우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에이든과의 거리감이 조금 줄어든 듯한 기분에 레인은 조금 행복해졌다.

‘혹시 에이든 님이 계신 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잠든 동안 옆에서 지켜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널따란 침대 옆을 손바닥으로 훑었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손끝으로 만져지는 온기는 차갑기만 했다.

에이든의 거친 손길에 걸레짝처럼 찢겼을 드레스도, 침대 위에 분명히 남았을― 밤새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도 없이 방 안은 깨끗하고 고요했다.

자신의 방이 아닌 에이든의 방에서 깨어났다는 걸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또 괜한 기대를 해서…….’

레인은 가벼운 실망감이 담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녀가 되나 먹잇감으로 사나 정기를 취할 때 외에는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건 달라지지 않는 듯했다.

물론 레인은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는 편인 데다 정사가 보통 긴 게 아니라 얼굴을 자주 못 본다는 감각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에이든과 섹스 외에 다른 것을 같이 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게 퍽 섭섭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그렇지만 에이든이 자신을 영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불안해하는 저를 달래기 위해 마녀의 각인도 새겨 주었고 영원히 곁에 두고서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도 해 주었으니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슬슬 수마에 빠져 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상황 파악도 끝나자 그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불러야겠다 싶어 종이라도 울려 보려 주변을 살폈다.

별안간 레인의 시야에 침대 테이블에 놓인 꽃병이 들어왔다. 화병에 꽂힌 꽃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했더니 자신이 역에서 사 온 그 꽃다발의 꽃이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레인은 에이든이 이걸 침실에 장식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조심스레 손을 뻗어 화병 바깥으로 흐드러진 백합의 꽃잎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손끝을 타고 촉촉한 물기와 보드라운 꽃잎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을 보니 살아 있는 백합이 분명했다.

그에게 주기에는 이상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서 차라리 아무것도 사지 말걸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막상 에이든이 이를 소중하게 침실에 장식해 둔 모습을 보니 좀 전까지 남아 있던 섭섭한 마음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가슴이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만큼 행복한데 어쩐지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에 젖어 있던 레인을 방해한 것은 이 방을 향해 다가오는― 거침없는 발소리였다.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레인이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나체인 몸을 가림과 동시에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레인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 자리에는 에이든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착장을 한 그는 성큼성큼 레인이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오더니 곁에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평소와 달리 흐트러져 날카로운 콧날을 간질이는 앞머리에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나 최소한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다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그것 또한 색다르게 느껴졌다.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느낌에 레인은 가슴을 진정시키려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는 손을 놓았다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에 아차 싶어 다시 이불을 손에 쥐었다.

레인이 저 혼자 허둥지둥대는 사이, 시선으로 레인의 상태를 살피던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네.”

“아, 네. 방금 일어났어요.”

“식사는?”

“어, 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빛나는 에이든의 외모에 잠시 홀려 있던 레인이 얼이 빠진 말투로 되물으면 에이든은 별 대수롭지 않은 걸 다 되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네 침실로 가져다줄까, 아니면 여기서 먹을래?”

“여기서 먹어도 돼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레인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당연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먹겠거니 했는데 침실에서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토끼처럼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인의 반응에 에이든은 피식, 옅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럼 여기로 식사를 가져오지.”

“아, 그… 그러니까 에, 이든 님은 식사 안 하세요?”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그의 이름에 한없이 어색한 말투로 물으면, 순간 에이든이 따갑고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렇게 밤새 제 이름을 부르짖었으면서 아직도 제 이름과 낯을 가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침대 위에서 정기를 바치면서 말하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이름을 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싶어 레인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무마하기로 했다.

헤실헤실 실없는 레인의 미소에 에이든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내 식사는 왜?”

“아무리 봐도 점심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배 안 고프신가 해서요.”

레인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그에게 정기를 바쳐야 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 버렸으니 오늘은 몇 시에 정기를 취할 건지 예정을 미리 알아 두고 싶어서 물었으나 에이든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 쑤셔지면서 밥 먹고 싶어?”

“네?”

레인이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에이든이 레인이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고 있는 동안에도 착실히 품고 있던 딜도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너무나 익숙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물건이 에이든의 손길에 눅진하게 젖은 내벽을 긁으며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불을 붙잡고 있던 레인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점차 이불이 말려 올라갔다.

“흐읏…….”

젖은 내벽을 긁어 대는 딜도에 뜨거운 한숨과 함께 살갗이 비벼지는 질척한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지만 안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건지 에이든의 손장난은 금세 끝이 났다.

무척이나 짧은 손장난이었으나 그사이 레인이 앉아 있는 침대 시트가 동그랗게 젖어 더러워져 있었다. 풍겨 오는 정기의 향취도 순식간에 달아져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렸다.

일변한 에이든의 표정에 레인은 그가 잠시간 건넨 쾌락에 몽롱하게 풀린 눈을 하고서도 흘깃흘깃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이 제 탓인가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레인의 정취가 달아지면 달아질수록, 제 안에서 이는 욕망과 충동을 참기가 어려웠다. 정도껏 상태를 봐 가면서 해야 하는데 욕구가 일 때마다 무작정 덮쳐서 복상사로 죽게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에이든은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레인은 에이든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에이든도 레인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나 오해를 푸는 대신 옅은 한숨과 함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쑤셔지면서 밥 먹기 싫으면 그런 말 하지 마.”

“…….”

“뭐, 네가 원한다면 해 줄 수도 있고.”

“아, 아뇨! 전 괘, 괜찮아요.”

레인은 정말로 식사 시간 동안 아래가 쑤셔지며 밥을 먹게 될까 두려워 열심히 이불을 쥐고 있던 양손까지 내저으며 사양했다.

그 모습이 퍽 재미있어 에이든은 다시금 옅은 웃음을 흘린 뒤, 사역마들에게 식사를 내올 것을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어제 먹었던 것과 비슷하리만큼 화려한 요리들이 줄줄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그리고 사역마 하나가 제게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조아리더니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원피스를 건넸다.

보통 이런 건 그 여자분이 가져다주시던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키가 훤칠한― 남자의 형상을 한 사역마가 레인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혹시 사역마는 성별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 싶어 옷을 건네받으면서도 얼굴을 특히 유심히 관찰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 듯했다.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하고 청결한 여자의 이목구비와는 달리 남자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선이 굵어 인상이 뚜렷한 느낌이라 아무리 공통점을 찾아보려 해도 느낌이 너무 달라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마법 같은 걸로 얼굴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변장술 같은 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얼굴까지 바꿔 가며 자신의 앞에 나타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악마며 사역마의 존재를 전부 알고 있으니 정체를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남자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서 물러날 때까지 레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런 레인을 에이든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비딱하게 쳐다보았다.

뺨에 내리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레인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바라보자 그가 물었다.

“저런 남자가 취향이야? 아주 시선을 못 떼네.”

갑작스레 날아든 에이든의 비아냥에 레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요…….”

자신의 부정에도 에이든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해서 또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까 봐 레인은 황급히 덧붙였다.

“평소에 보던 분이랑 다른 분이 옷을 챙겨 주셔서……. 왜, 보통 때 같으면 그 여자분이 이런 거 해 주시잖아요. 어제 식사도 그 분이 가져다주셨고, 책도…….”

레인이 적극적으로 해명하자 에이든의 눈빛에 어려 있던 은근한 분노가 점차 누그러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확실히 요즘 들어 자주 무르핀에게 레인의 시중을 들게 했으니 눈에 익을 법도 했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보이질 않으니 충분히 의아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마녀의 각인까지 받아 놓고 딴 놈에게 눈을 파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기묘한 감정이 에이든의 명치께를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생전에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레인에게 욕정을 품었다는 이유로 거의 고문에 가까운 채찍질을 받은 탓에 움직일 수 없어 다른 사역마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에이든은 물끄러미 레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황금빛 눈동자가 천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 레인이 눈앞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왜 이토록 불편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말없이 진지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에이든에 레인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봐서는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이유를 납득한 것 같았는데,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이 없으니 공연히 불안해져서 입을 열었다.

“…저, 에이든 님.”

“왜?”

“저 뭔가 잘못했나요?”

“그런 거 없으니까 옷 갈아입고 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네!”

한껏 제 눈치를 보며 물어보는 레인에게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감정을 숨기고서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어진 에이든의 표정과 말투에 레인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서 건네받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원피스는 새하얀 베이비 돌 드레스에 장식과 레이스를 최대한 간략히 한 듯한 디자인이었다. 기장은 딱 무릎까지 왔는데 벙벙하게 A 라인으로 퍼지는 것이 미감과 편안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제 뒤에 있는 지퍼를 올리는 것만이 남았으나 이상하게 오늘따라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뒤로 꺾다시피 해야 했는데 밥을 안 먹어서 그런 건지 어깨가 굳어서 그런 건지 지퍼에 손에 닿지 않았다.

낑낑대며 헤매던 레인은 결국 뒤로 돌아서서 에이든에게로 다가갔다.

레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말없이 감상하던 에이든은 갑자기 제 앞으로 다가온 레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옷 입다 말고 뭐 하는 짓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지퍼에 손이 안 닿아서…….”

조금 망설이는 듯한 기색으로 입을 연 레인은 이내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앞으로 모두 넘기고서 자신의 등 뒤를 에이든에게 보였다.

지퍼를 올리지 않아 V 자로 드러난― 새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에이든의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에 에이든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자고 무방비하게 등을 훤히 내놓고는 제 코앞에다 들이미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잡아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올려 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내가 만만한가 보지? 별걸 다 시키네.”

에이든은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재차 인내를 다짐한 뒤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로 대꾸하면서도 순순히 레인의 지퍼를 잠가 주었다.

에이든의 손길에 훤히 드러나 있던 레인의 등이 빠르게 천 아래로 사라져 갔다.

지퍼가 완전히 잠긴 것을 확인한 레인은 에이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식전 인사를 올린 뒤, 수프를 한 숟갈씩 떠서 입에 넣으며 레인은 에이든이 앉아 있는 자리를 계속해서 흘깃거렸다.

‘오늘은 안 가시나?’

옷을 입을 때야 직접 고른 옷이니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고 싶어 앉아 있었다 쳐도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은 상당히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용건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추었을 텐데, 진득하게 침대 옆에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유 또한 도통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자신을 흘깃거리는 시선에 에이든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밥 먹는데 집중해. 내 얼굴에 집중하지 말고.”

“그… 안 가세요?”

레인이 입 안에 남아 있는 수프 건더기를 씹어 삼킨 뒤 조심스레 물었다.

에이든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대꾸했다.

“어딜?”

“여기 말고 다른 데요.”

“여기는 내 침실인데 내가 나가야 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에는 식사 아니고서는 잘 안 보이시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계속 자리에 앉아 계셔서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 해서요.”

“그냥 있는 거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어.”

불퉁하게 대꾸한 에이든은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레인을 건너다보았다. 자신에게 한 소리 듣고서도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않는 레인을 향해 에이든이 턱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그제야 겨우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알맞게 구워서 나온 스테이크를 한입에 먹기 좋게 썰면서 레인은 줄곧 에이든이 대체 왜 저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밥 먹는 모습을 본다고 한들 정기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섹슈얼한 제스처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그냥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들 중의 하나일 뿐인데, 그것을 굳이 눈에 담아 두려는 이유를 영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보다 더 레인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에이든과 침대가 아닌 곳에서 아무런 용건 없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어색하다는 점이었다.

레인은 제게 볼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사라지는 에이든의 행동이 자신을 먹이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으나 막상 같은 공간에서 일상생활을 하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온갖 것들이 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즐겁게 콧노래라도 부르며 세상 행복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을 테지만 에이든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니 콧노래도 자제하게 되고,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라도 흥얼거릴까 봐 입술을 꾹 다문 채 얌전하게 고기를 입에 집어넣게 되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영겁의 침묵 속에서 레인은 조심히 스테이크를 썰고, 샐러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씹을 때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꼭꼭 조심해서 씹었다.

무슨 감시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체하겠다 싶어 참다못한 레인이 에이든에게 테이블에 같이 앉지 않겠냐고 권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는 자신에게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맞는 것보다는 마주 앉아서 대화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왜?’ 같은 무뚝뚝한 반응이 돌아오리라 예상했으나 에이든은 마치 그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럴까, 하고 대답하더니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예상외의 행동에 놀란 레인이 에이든을 쳐다보면, 에이든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레인 앞으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밀어 주었다.

레인이 좋아하는 새우 요리였다.

“많이 먹어. 먹어야 정기를 바치지.”

“아, 감사합니다.”

제 앞으로 밀어진 새우 요리를 빤히 바라보던 레인은 이내 에이든에게 가벼운 묵례로 감사를 표한 뒤 오동통한 새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언제나 그렇듯 맛은 완벽했다.

하지만 제 맞은편에 앉아 뚫어질 만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이든 때문에 맛을 전혀 음미할 수가 없었다.

레인은 약간의 고민 끝에 그와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 어떤 것도 좋으니 뭔가 대화를 나누면 이 숨이 턱턱 막히는 어색한 공기가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에이든 님.”

“왜.”

“그 있잖아요.”

“말해.”

운은 뗐지만 막상 대화를 하려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레인은 중언부언했다.

생각해 보면 에이든과 자신 사이에는 그다지 공통된 화제랄 것이 없었다. 정기를 바치고 취하는 관계는 그야말로 탄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외에는 무지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정기 외에 에이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에이든이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않는 레인을 재촉하려던 찰나, 그에게 궁금했던 것이 떠오른 레인이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꽃… 마음에 드셨어요?”

“무슨 꽃?”

“저기, 침대 옆에 있는 꽃이요.”

레인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테이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이든은 자연스럽게 레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제 오후쯤 갑자기 생각이 나 사역마에게 시켜 가져오게 한― 레인이 역 앞에서 샀다던 꽃이었다. 꽃이 다치지 않게 조심히 손질해서 잘 보이는 곳에 두라고 명령해 뒀는데 어디서 화병을 하나 구해다 침실에 장식해 둔 모양이었다.

별안간 무슨 꽃을 말하는 건가 싶었던 에이든은 그제야 그녀의 질문이 이해가 간 듯 ‘아, 저거?’ 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별반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심드렁한 반응에 초조해진 레인이 조심스레 에이든의 표정을 살피며 재차 물었다.

“꽃, 마음에 안 드셨어요?”

“글쎄. 솔직히 말하면 꽃 같은 것에 관심은 없지만 네가 준 거니까.”

“…….”

“나한테 꽃을 선물할 생각을 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기도 하고, 계약하고 나서 처음 받아 본 선물이니 기념할 겸 해서 보관하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쿡쿡,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는 오래 살고 볼 일이지, 하고 농담 삼아 중얼거리며 레인의 앞에 놓인 빈 접시를 치우고는 다른 접시를 밀어 주었다.

레인은 말없이 그가 제 앞으로 밀어 준 접시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한번 먹어 보고 싶다고 했던― 남해에서 잡히는 생선으로 만든 찜 요리였다.

처음에 그가 글쎄, 하고 대꾸했을 때에는 상처를 안 받은 건 아니었다. 에이든은 그저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혼자서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곤두박질치던 레인의 기분이 하늘을 치솟듯 날아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이든을 생각하며 산 선물이 아주 소용없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꽃이 자신으로 인해 기념할 만한 특별한 것이 되었다는 건 레인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많이 걱정했는데,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렇게 대답한 레인은 에이든을 앞에 두고 테이블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에이든과 눈을 맞추며 자연스레 소리 내어 웃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쨍하니 맑은 하늘에 부서지는 햇빛처럼 찬란했고, 웃음소리는 평화로운 마을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경쾌했다.

에이든으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그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에이든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금이 갔다. 어째서인지 어깨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도 당황스러우리만큼 레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심장 주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기를 취하고 있지도 않은데도.

어쩐지 자신과 레인 사이의 세계가 이전과는 아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에이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꼭 집어낼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어쩐지 제게 보내오는 저 미소가 사역마의 눈을 통해서 봤던― 레인이 요한에게 보냈던 그것과 흡사해 보인다는 점과 저 미소를 좀 더 자주 눈에 담았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이런 에이든의 감정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레인은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식탁 아래로 경쾌하게 발을 굴리며 천진하게 물었다.

“그럼 저 앞으로 이상한 선물 자주 드려도 돼요?”

“…또 뭘 주려고.”

레인의 웃는 모습에 홀려 있던 탓에 에이든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필요 없다거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혼을 내는 듯한 말투는 아니어서 레인은 방싯 웃으며 에이든이 제 앞에다 가져다준 생선 요리를 입에 넣고는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다요. 사실, 드리고 싶은 선물이 많았거든요. 가끔 에밀리랑 시내에 나가 놀거나 아카데미 내에서 열리는 바자회 같은 거 둘러보다 보면 에이든 님 생각나는 게 몇 개 있었는데 결국 안 사고 그냥 돌아왔어요.”

“왜? 돈이 부족해? 용돈 더 줘?”

“아뇨, 돈은 지금도 충분해요!”

갑자기 용돈을 인상해 주겠다는 에이든의 말에 깜짝 놀란 레인은 식기를 손에서 내려놓고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저번에는 학과가 사라지지 않게 기부금을 내주겠다더니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용돈을 올려 주겠다고 하니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빚을 몸으로 갚아야 하는 건 둘째 치고, 경제적인 지원은 지금 받고 있는 걸로도 충분했다. 안 그래도 턱 없이 많은 용돈을 쓸 길이 없어 차곡차곡 모아 두고 있는 판에 더 받을 수는 없었다.

예상보다 강건한 레인의 사양이 탐탁지 않은지 에이든은 불만스레 굵은 눈썹을 까닥였다. 변명이든 해명이든 이유를 대 보라는 제스처였다.

레인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밥 먹다 말고 이렇게 갑자기 속마음을 꺼내려니 쑥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차분히 말을 이었다.

“돈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냥… 뭘 드리면 좋아할지 모르겠어서요.”

“…….”

“그래서 악마에 대해 여러모로 공부를 했는데 하나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영혼이나 정기 얘기밖에는 없어서……. 그런데 그건 이미 드리고 있잖아요. 사실 그것 말고는 드릴 게 없기도 해요.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게 몸 말고는 없어서……. 어차피 선물을 사도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라 에이든 님 돈으로 사는 건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자신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애꿎은 식기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레인을 말없이 응시하던 에이든이 이내 옅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됐으니까, 내 생각나는 거면 아무거나 사 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너무 자주 생각나서 돈 떨어지면 나한테 말하고.”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레인은 그저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일순 에이든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짙은 잿빛 눈동자가 마치 폭풍 전야의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처럼 이상하리만큼 푹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표정과 눈빛은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 순식간에 평소대로 돌아왔다. 레인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다시금 에이든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렇지도 않듯 무심하게 접시를 치우는 모습에 요즘 눈이 안 좋아졌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 뒤로 이어진 식사 분위기는 제법 나쁘지 않아 처음에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하던 에이든의 존재도 나름 익숙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대화는 서재에서 가볍게 하는 안부 확인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어떠한지, (요한이 그녀가 소개받은 첫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요한 말고 집적대는 다른 남자는 또 없는지, 학과는 여전히 위태위태한지 그런 것을 물었다.

레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을 이어 나가다가 주변 남자에 대해서 물을 때에는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몸서리까지 쳐 가며 부인했다.

“그런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사실 에밀리가 소개해 준 요한도 거의 반 억지로 만난 거였어요.”

“흐음, 그래? 반 억지로 만난 사람인데도 인상적일 만큼 좋은 사람이었나 보네. 느닷없이 생각날 만큼.”

에이든이 이기죽거리며 요한을 자꾸만 들먹이자 레인은 그런 그의 반응이 무척이나 갑갑하고 억울했는지 반쯤 울상이 되어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정말 아닌데요…….”

“왜 너 좋아한다는 사람이 처음이라 기분이 싱숭생숭 했다며?”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그래도?”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이어진 에이든의 재촉에 레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자신의 속마음을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제 개인적인 얼굴 취향은 에이든 님이라서……. 요한도 잘생겼긴 하지만 에이든 님이 훨씬 좋아요.”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내뱉은 레인의 진심 어린 대답에 에이든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 재수 없기 짝이 없는 요한보다 자신을 더 좋아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좋아하기에는 악마로서의 체면이 있었기에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저 외모가 자신이 좀 더 취향이라는 말 한마디에 어째서 이토록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뭐, 보는 눈은 나쁘지 않네.”

한결 풀어진 분위기에 힘입어 레인은 긴장을 풀고 조잘조잘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처음 뵀을 때부터 좋았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처음 봐서 그런가, 진짜로 소환에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너무 잘생긴 외모에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사람들이 왜 악마에게 홀리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잘 알았으면 됐어. 이제 내 마녀가 되었으니까 딴 놈이랑 눈이라도 마주쳐 봐. 특히 요한이랑 눈이 맞는 순간, 네가 누구 것인지 몸으로 알게 해 줄 테니까.”

“아, 안 그럴게요. 약속드릴게요, 정말로.”

이렇게 물꼬를 트게 된― 편안하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이든이 묻고 레인이 답하는 대화에서 벗어나 레인도 평소 에이든에 대해 궁금했던 사실을 제법 적극적으로 물어봤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지, 싫어하는 것이 따로 있는지 같은― 아주 선물을 주려고 단단히 벼른 듯한 질문들이었다.

계약을 맺은 인간이 먼저 악마의 취미나 취향에 대해서 관심은 가진 적은 에이든이 아는 한 거의 없었다. 자신이 계약한 인간에게 헤벌쭉 홀려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악마들은 몇 있긴 했지만.

이전에 마녀를 들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예상치 못한 관심이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지 않아 스스로도 신기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접시는 모두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사역마를 불러내어 식기들을 모두 치우게 했다.

예의 그 남자가 텅 빈 왜건과 함께 나타나 식기와 빈 접시들을 싣고서 유유히 사라졌다.

만복감으로 차오른 배를 팡팡 기분 좋게 두드리고 있는 레인에게, 에이든이 불현듯 물었다.

“오늘 내 식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 어떤 식사요?”

“오늘 나한테 정기 안 바칠 거야?”

방금 식사를 마쳤는데 별안간 튀어나온 식사 소리에 레인이 의아하여 되물으면 에이든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제야 그 식사가 자신의 밥이 아니라 에이든에게 바칠 정기에 대한 얘기를 라는 것을 깨달은 레인은 뒤늦게 에이든이 점심이 지나도록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아함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하건대 에이든은 침대 위에서 벌어질 일을 사전에 물어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을 맺자마자 처녀인지 아닌지 물어보기는 했지만, 침대 위에서 어떻게 할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레인은 에이든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런 쪽에 지식이 전무했고, 또 에이든은 만나고 나서는 오롯이 에이든의 취향에 맞춰 길들여졌기에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가 하고자 하는 것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식사를 ‘어떻게’ 할지 물어봐도 레인에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혹시 에이든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어서 넌지시 암시를 던지는 건가 싶어 레인이 물었다.

“물론 당연히 정기를 바치긴 할 건데…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내가 원하는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거.”

“네?”

“어제랑 오늘 힘들었을 테니까, 오늘 저녁 정도는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물론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어.”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레인은 그것이 그의 배려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러니까 어제랑 오늘 몸을 혹사시켰으니 남은 식사는 레인이 편한 대로 해 주겠다, 요컨대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그런 배려가 조금 낯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제 체력이 떨어지자마자 이상한 물약을 입에 가득 털어 넣어 가며 안았을 것이다.

어젯밤에만 해도 그러했다. 에이든 님이라는 말로 꼭 300번을 채울 때까지 새벽 동이 다 터오도록 혹사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배려라는 것을 해 주겠다고 하니 레인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좋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들이밀어진 선택지가 당혹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변화도 자신이 에이든의 마녀가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레인이 그런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답답했던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지? 어젯밤의 기억이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인데, 오늘 한 번 더 할까? 이번에는 주인님으로 300번을…….”

“아, 아니요! 아뇨, 그냥 생각 중이었어요.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에이든의 말에 화들짝 놀란 레인은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에 이르기까지의 악몽 같았던 시간이 되풀이될까 무서워 에이든의 말허리를 끊어 가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짓을 연달아 이틀이나 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용기였다.

레인의 대답에 약간의 말미를 주겠다는 듯 에이든은 반듯한 눈썹 한쪽을 치켜든 채 레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레인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뭐든지 간에 좌우지간 부탁을 해야 어젯밤과 같은 혹사를 피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뭘 해 달라고 부탁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백지장 같은 머릿속을 뒤져 봤자 나오는 건 백지뿐이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에이든이 원하는 대로 정기를 취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맘을 담아 의자에 등을 파묻은 채 앉아 있는 에이든을 흘깃거리면,

“이제 생각이 났어?”

하고 단호하게 묻는 통에 다급하게 고개를 젓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진 테이블 위에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적당한 대답을 찾은 레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요…….”

생각보다 오랜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있던 에이든이 팔짱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레인을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레인이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첫날밤에 했던 대로 해 보고 싶은데, 해 주실 수 있어요?”

“첫날밤?”

“왜 그, 계약하고 나서 쾌감을 알려 주신다고 대가 없이 했던 날 있잖아요.”

“아, 그때? 그때처럼 해 줬으면 좋겠어?”

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자신의 부탁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싶어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과 진심을 담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자, 에이든의 커다란 눈매가 점차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알겠다는 대답이 떨어졌다.

입가에 번져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조금 불길했지만 레인은 자신의 기우이기를 바라며 못 본 척 웃어넘기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든은 레인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어깨를 붙잡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조용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밤이 깊으면 네 방으로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마치 밀회를 즐기는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레인은 어깨를 흠칫 떨며 입고 있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잔뜩 겁먹은 채 자리에 굳어 버린 레인의 모습이 에이든은 조금 유쾌하여 소리 없이 웃었다.

이내 그는 볼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그대로 침실 밖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발소리가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깊은 한숨과 함께 전신에 가득 들어찬 긴장이 빠져나갔다.

레인은 제 귓가를 타고 들어온 목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목소리 사이사이로 흘러들던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힐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장 무난하지 않을까 싶어 고른 것이었는데, 어쩐지 이마저도 그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은 이제 세 시간 뒤면 돌아올 밤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주말 아침이 밝자 저택 앞으로 미리 부탁한 마차가 당도했다. 길고도 짧은 주말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한 역으로 가기 위한 마차였다.

늘 챙겨 먹던 아침도 거르고서 짐과 함께 재빠르게 저택을 나선 레인은 문밖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어 도둑고양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택 안은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고, 저택 밖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정원에 피어난 꽃과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 뿐이었다.

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쥐며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다. 평소처럼 아무도 없어서.’

예전 같았으면 조금 섭섭했을 일이 오늘만큼 다행인 적이 없었다.

어젯밤 일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에이든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와 한두 번 몸을 섞은 것도 아니었고, 남에게 말 못할 만큼 갖은 변태적인 행위들을 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으나 어젯밤의 섹스는 여태껏 해 왔던 변태적인 행위들과 비교해 봐도 월등히 부끄러웠고, 또 좋았다.

예고한 대로 저녁노을이 지고 방 안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자신의 방에 찾아온 에이든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는 자신에게 눈길을 던지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침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들고 온 와인을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이든은 앞으로 마녀로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이전처럼 제게 정기나 열심히 바치면 되며, 혹여 허리에 있는 각인이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드러나는 순간 마법이 발동되어 어떤 방법으로든 목숨이 위험한 일은 만들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마치 자신의 고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들에 약간 감동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는 레인에게, 에이든은 특히 될 수 있는 한 남자들과는 가깝게 지내지 않는 편이 (어느 쪽인지 모를) 신상에 좋을 거라는 충고를 재차 강조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놈이랑 시시덕거리는 꼴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

“네가 누구 것인지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알게 될 테니까.”

귓가에 울려 퍼지는 낮고 음산한 위협에 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이든의 협박이 무서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조금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오늘 낮에 분명히 자신에게서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 약속을 받아 냈고, 그래서 요한과의 오해도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남자 문제로 신신당부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허리에는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든의 마녀임을 나타내는 각인도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신은 오롯이 에이든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자신이 그의 것임을 확인하고, 다른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을 단단히 단속하는 그의 태도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잠시 생각에 잠긴 레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물었다.

“저, 있잖아요, 에이든 님.”

당연하다는 듯이 곧장 긍정의 대답이 돌아와야 할 레인이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어 초조한 기색을 숨기고 와인을 홀짝이던 에이든은 그녀의 부름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 제가 불안하세요?”

“…무슨 말이야, 그게?”

한참 동안이나 고민스레 입술을 달싹이다 내뱉은 질문의 의도를 도통 파악할 수 없어 에이든은 짙은 눈썹을 의뭉스레 까닥이며 되물었다.

그러면 레인은 순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어깨를 조금 움츠리면서도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요, 제가 낮에 분명 약속을 드린 것 같은데, 계속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하셔서 혹시 불안하신가 해서요.”

“뭐가 불안해?”

“…제가 다른 남자한테 가 버릴까 봐요.”

“…….”

에이든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조금 놀란 표정으로 레인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간 말없이 레인의 황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일 만큼 아주 느린 속도로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시선이 점차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을 한쪽 귀 뒤로 넘긴 탓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와 입고 있는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쇄골, 그리고 풍만한 가슴과 옷에 감춰진 허리와 골반을 훑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설 만큼 지독한 감정과 욕망이 뒤얽혀 있는 진득한 시선에 레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시 에이든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에는 숨이 턱 막힐 만큼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

“…….”

“널 가지고 있는데도 더 가지고 싶은 기분이 불안이라면.”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든은 손을 뻗어 레인의 뺨을 가만 어루만졌다. 짙은 소유욕과 욕망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스란히 그에게로 삼켜지는 기분에 레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을 가졌으면서 그 이상으로 자신을 가지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이, 에이든이 자신에게 보이는 그 소유욕이 지나치게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온몸의 세포의 감각이 단숨에 일깨워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레인은 자신이 에이든에게 버려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을 그가 알아줬듯이, 자신도 에이든의 불안을 달래 주고 싶었다.

주제넘은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에이든과 나눠 마신 와인의 힘을 빌려 레인은 대담하게 에이든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고는 긴장 돼서 그런 건지 주체가 안 되는 심장 박동 탓인지 모를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든 님이라면… 더 가지셔도 좋아요.”

“…….”

“저 이상으로 저를 가져 주세요.”

애교나 유혹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레인으로서는 에이든에게 진심을 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어제처럼 그의 아래에 깔린 채 허리를 흔들며 새벽 내내 펑펑 울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걸로 에이든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인의 말에 에이든의 굵은 눈썹이 움찔 하는가 싶더니 도저히 못 당해 내겠다는 듯한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침묵 속에 그의 웃음소리가 모두 흩어질 즈음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방 안을 밝히던 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마치 그에게 삼켜지듯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에이든은 갑자기 어두워진 사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쳐다보는 레인의 입술을 가만히 지분거리며 말했다.

“…가끔 보면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모르겠어, 레인은.”

“……?”

“갖은 욕망이란 욕망은 다 자극해 놓고, 식사는 첫날밤처럼 다정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니.”

“아…….”

“정말이지 돌겠어.”

그렇게 뇌까린 에이든은 레인의 어이없는 부탁들이 기가 차다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한없이 다정히 레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맞물린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금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을 때 에이든의 양손은 레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호흡이, 타액이, 혀가 얽혀 들어갔다.

에이든이 혀끝으로 입 안의 여린 살을 건드릴 때마다 레인은 옅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뺨을 붙잡고 있는 에이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평소에 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지만 에이든이 해 주는 키스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서 레인은 눈을 감은 채 뺨에 닿은 에이든의 체온과 호흡을 느끼며 그의 움직임을 따라 혀를 얽었다.

“하아… 좋아요, 에이든 님…….”

“…후우.”

레인의 솔직한 감상에 귓가에 괴로운 듯 낮게 신음하는 듯한 에이든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레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속옷을 조급한 손길로 벗겨 냈다.

보통 때 같으면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가 되었을 옷은 무사히 벗겨져 레인의 어깨를 타고 흘러 골반에 걸쳐졌다. 입고 있던 속옷까지 모두 벗겨져 상반신이 오롯이 드러난 레인은 맨살갗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온기를 찾듯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목에 팔을 감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지난번, 에이든에게 자신의 불안을 고백하고 자신을 달래기 위해 키스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부끄러워서 할 수 없었을 행동들이,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 그의 불안을 달래 주고 싶다는 의지에서 나온 용기 때문인지 오늘만큼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나왔다. 그저 에이든이 저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에게 소유당하고 싶은 욕망만이 레인을 가득 채웠다.

레인의 적극적인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에이든은 레인을 곧장 침대 위에 쓰러트린 뒤, 맞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고서 이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만져 주기를 바라듯 빳빳하게 서 있는 유두를 손끝으로 굴리며 물었다.

“고작 키스만으로 젖꼭지를 세운 거야?”

“흐읏, …하으, 네에…….”

“누가 이렇게 교육을 잘 시켰나 모르겠네. 키스만으로 느낄 만큼. 응?”

“아, 흑, 전부 에이든 님이… 에이든 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에이든은 상을 주듯 레인의 유두를 입에 담았다. 혀끝을 세워 살살 약을 올리듯 젖꼭지를 건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거칠게 뭉개듯이 애무하기 시작했다.

순간 척추가 쭈뼛 설 만큼 전신을 맴도는 생소한 감각에 레인은 허리를 비틀며 신음했다.

“흐응! 아, 하읏, 이상…해요……. 흣!”

“이럴 땐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부드러운 애무에 익숙하지 않은 레인이 이상하다며 울먹이자 에이든은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어투로 지난날의 교육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레인은 밀려오는 쾌감에 도리질을 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으응, 읏! 조, 좋아요… 좋아요…….”

“옳지, 잘하네.”

에이든은 주인의 명령을 잘 따른 강아지를 칭찬하듯 레인의 잘록한 허리를 손바닥으로 넓게 쓸어내리며 이번에는 다른 한쪽 유두를 감쳐물었다. 이번에는 혀가 아닌 이를 살짝 세워 아프지 않게 유두를 긁었다.

젖꼭지가 에이든의 이에 닿을 때마다 밀려오는 쾌감에 괴로운 듯 레인은 신음과 함께 등 뒤에 닿는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죽죽 그으며 허리를 파르르 떨어 댔다. 아직 아래는 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속옷이 완전히 젖어 있어 딜도가 삽입되지 않은 텅 빈 구멍이 뻐끔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속옷을 끄르고 제 것을 조르는 구멍에다 단숨에 성기를 박아 넣고 싶었으나 일단 다정히 안겠노라 약속했기에 에이든은 뻑적지근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애써 무시한 채 레인의 드레스 자락을 들추고는 속옷 위로 손가락을 굴리며 음핵을 자극했다.

처음에는 미약한 자극에도 교성을 내지르며 기뻐하던 레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극이 부족했는지 에이든을 유혹하듯 애타게 골반을 돌리며 눈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흐응, 흐, 아… 이거, 말고…….”

“이거 말고, 뭐?”

“하으, 에이든 님 거 박아 주세요, 제발. 힉, 아흐… 부족해요, 부족…하읏!”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솔직할까. 자꾸 이러면 상냥하게 해 줄 수가 없는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이든은 골반에 걸쳐진 드레스 자락이며 젖은 속옷들을 모두 끌어 내려 바닥에 내팽개친 뒤 침대 테이블 위에 있던 마개를 딴 와인 병을 들고 와 레인의 몸에 부었다.

“아… 차가워…….”

새하얀 나신에 붉은빛의 액체가 쏟아지고, 새하얀 침대 시트 또한 붉게 물들어 바닥에 있는 카펫마저 적셨다. 갑작스레 피부에 닿은 차가운 액체의 감촉에 레인은 저를 불태우는 것 같던 성욕이 잠시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와인에 푹 적셔진 자신의 살결에 닿은 에이든의 혀에 다시금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열락이 파도처럼 들이쳤다.

와인을 음미하듯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는 에이든의 혀 놀림은 분명히 자극적이었지만 절정에 다다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쾌감은 분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쌓여만 가 레인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아, 흑, 제발 가게 해 주세요……. 흐읏, 하윽, 흐… 더 이상은 안 돼, 하아…….”

“…맛있네, 레인의 몸으로 마시니까.”

레인의 부탁을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에이든은 그저 와인으로 적셔진 레인의 몸을 철저히 혀로만 탐할 따름이었다.

쇄골에서부터 가슴팍, 배꼽, 골반, 허벅지, 마지막으로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전신에 남아 있는 와인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수없이 혀로 애무당하고 나서야 레인은 겨우 에이든의 것을 받을 수 있었다.

원치 않은 애무만 잔뜩 받다가 제가 바라던 굵직한 성기가 내벽을 거칠게 가르고 들어와서는 자궁이 울릴 만큼 쑤셔 댈 적엔 환희와 쾌락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와 자신이 얼마나 마음속 깊이 에이든의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평소에 에이든에게 정기를 바칠 때에 쾌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에이든은 자신을 벗겨 먹지 못해 안달이었고, 따라서 자신이 먼저 나서서 에이든에게 해 달라 애원한 적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삽입되는 순간 단순히 쾌감뿐만 아니라 머리칼이 쭈뼛 설 만큼 강렬한 희열에 반쯤은 울면서 반쯤은 좋아서 절정에 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치도 모른 채 에이든에게 박아 달라 조른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와인이 온몸에 적셔져 괴로울 만큼 감미롭게 애무당했던 순간이 그간 해 왔던 섹스보다도 기분이 좋아서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줄곧 복잡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날의 에이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마구 뛰고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지난밤의 기억들을 떨쳐 내려 애썼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여태껏 정기를 바쳤을 때랑 똑같은 거라고 생각하자.’

에이든의 밑에서 펑펑 울며 좋다고 울부짖던 모습도, 그의 위를 타고 올라 제 스스로 허리를 흔들던 모습도, 그런 자신을 각종 음란한 말들로 희롱하며 앞으로는 와인이 마시고 싶으면 자신의 몸에 부어서 마셔야겠다고 속삭이던 에이든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도 모두 털어 낸 레인은 이제는 하도 보아 익숙해진 마부를 향해 가벼운 묵례를 건넨 뒤 짐을 마차 안에 실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한 마부가 레인에게 짐을 싣는 것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지만 레인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여행용 가죽 가방이었다. 이 정도쯤은 혼자서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괜히 마부를 내려왔다 올라갔다 귀찮게 했다가 마차가 출발하는 시간이 늦어질까 봐 걱정인 것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에이든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여행용 가방과 함께 힘차게 마차에 올라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갑자기 강한 힘이 문을 붙드는가 싶더니 익숙한 손이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레인이 그토록 마주치기 싫었던 에이든이었다.

“헉!”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에 레인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에이든은 물기로 가득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이렇게 나올 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레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뭘 그렇게 급하게 가. 간만에 배웅해 주려고 했는데.”

방금 막 씻고 나온 것인지 뒤로 넘긴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덕분에 입고 있는 새하얀 셔츠의 어깻죽지와 목덜미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단추를 세 개쯤 풀어 젖힌 셔츠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목덜미에는 자랑이라도 하듯 어젯밤 레인이 그에게 남긴 붉은 잇자국이 선명했다.

그의 품에 안겨 쾌락에 겨워 울면서 남긴 잇자국이었다.

정사의 흔적이 선명한 에이든의 몸을 보자마자 어젯밤 일을 떨쳐 내기로 한 레인의 노력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숨처럼 내뱉던 깊은 쾌락에 잠긴 신음, 두 팔로 꼭 끌어안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더운 열기, 서로의 상체를 밀착시킨 가운데 자지러지게 신음하는 저에게 흥분한 만큼 흔적을 남겨 보라 속삭이던 위험하고도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레인의 얼굴이 단숨에 화르륵 타올랐다.

얼굴로 몰린 열기가 제 스스로도 느껴져 레인은 고개를 팍 숙여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고서는 그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안 그러셔도 되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다 할까. 어젯밤만 해도 내게 아주 맛있는 와인을 직접 몸으로,”

에이든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정쩡히 앉아 있는 레인의 부드럽고 새하얀 손등을 어루만지며 어젯밤 일을 입에 담는 순간, 레인은 다급하게 다른 한 손으로 에이든의 입을 텁, 소리 나게 막았다.

에이든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크고 시원한 눈매를 들어 레인을 올려다보자 오월의 장미가 옮겨 물든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레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입을 막은 건 순전히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던 건지 레인은 화들짝 놀라서는 뒤늦게 에이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제 스스로도 무척 당황스러운 듯 줄곧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듣는 귀가 있는데 그런 얘기를 갑자기 꺼내시면 좀 곤란해요.”

“뭐 어때? 아, 하긴 인간은 사회적 체면도 중요했지. 원하면 영원히 못 들은 걸로 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아, 아뇨. 말씀만으로도 충분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히 못 들은 걸로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 레인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옅은 웃음을 흘리며 레인의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가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러하듯 친절하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뜨거운 숨결과 입술의 말랑한 감촉이 약지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순간, 레인의 심장도 같이 내려앉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어젯밤 저녁 식사로 그가 자신에게 느끼고 있던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안 하던 배웅도 하고, 약지에 입을 맞추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분히 내리뜬 시선 위로 내려앉은 기다란 속눈썹은 에이든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을 방해했다.

에이든은 레인의 약지에 입술을 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이내 커다란 눈매를 흐드러지게 접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자신이 좋아하리라는 확신에 찬―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레인은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인의 마음은 속절없이 요동쳤다.

그가 원하던 반응이 나온 것인지, 에이든은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건 서비스.”

“…….”

“그럼 조심히 다녀와. 다음 주말, 기대하고 있을 테니.”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에게 손짓하여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차창 너머로 에이든의 얼굴이 스치듯이 지나쳤다. 이제껏 봐 온 표정 중에 가장 즐거워 보였다. 차창에 얼굴을 딱 붙이고 있는 레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일 만큼.

레인은 자세를 고쳐 앉고서 자신의 손가락에 남아 있는 온기와 촉감을 되짚듯 손등을 말없이 쓸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심장 소리만이 요란했다.

* * *

에밀리는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레인을 흘깃거렸다. 서로 졸업을 앞두고 논문 때문에 이러니저러니 바빴고,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는 거의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레인의 상태가 이상해서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지난 주말, 본가에서 돌아온 이후 1분 간격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으며 과제를 하다가도 갑자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참 뒤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거세게 고개를 젓기를 반복했다.

그 짓을 사흘 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아, 에밀리는 참다 참다 결국엔 논문을 쓰던 펜을 내던지고 파티션 너머에 앉은 레인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있어?”

에밀리의 물음에 레인은 고개를 돌려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아무 일도 아니야.”

누가 봐도 고민이 깊어 보이는 얼굴로 레인은 그렇게 말했다. 자세히 보면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반질반질하던 피부가 푸석했고, 눈가는 퀭하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입술은 또 얼마나 물어 댔는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오지랖이 넓은 에밀리를 복장 터지게 만들기 딱 좋은 상태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에밀리는 책상 위를 나뒹굴던 연고 하나를 레인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 애를 혼이라도 내듯 엄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레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일단 이거 먼저 바르고, 나랑 얘기 좀 하자.”

“아니, 나 정말 괜찮다니까.”

“너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여. 네 입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얼굴은 전혀 아니야.”

“…….”

“뭐 해? 어서 연고 안 바르고.”

연고를 멀뚱히 손에 들고만 있는 레인에게 에밀리가 단호하게 눈짓하자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레인은 연고의 뚜껑을 열고 약지에 조금 덜어서 입술에 얇게 펴 발랐다.

레인이 연고를 바르는 모습을 도끼눈을 치뜨고서 감시하던 에밀리는 연고의 뚜껑이 닫혀 제 손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

“안 그래도 연구가 잘 진행이 안 돼서 미치겠는 사람 앞에서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나흘씩이나 한숨만 푹푹 쉬어?”

“…내가 그랬어?”

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던 것인지 에밀리의 말에 레인은 놀란 듯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에밀리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기로 하며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랬어.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 좀 해 봐. 나 속 편히 논문 좀 쓰게.”

에밀리의 단호한 재촉에 레인은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그동안 레인이 에밀리에게 조언을 구해 보자고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책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고민 상대가 에이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에이든이 자신이 소환해 낸 악마라는 것도 말할 수 없었고, 계약을 넘어서서 마녀가 되었다는 것도 말할 수 없었고, 일단 여기서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삼촌으로 되어 있지만 그렇고 그런 짓을 매일 밤마다 해 왔으며 지난 주말에도 했다는 것 또한 말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 복잡미묘한 관계를 어떻게든 잘 숨겨서 얘기를 해야 했는데, 레인은 거짓말에 재주가 없을뿐더러 말을 지어내는 데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반면에 에밀리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체가 모두 탄로 날까 봐 무서워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밀리 말고는 달리 얘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기도 했고, 지난 주말 이후 혼란스럽기 그지없어진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기에 큰맘 먹고 얘기를 하기로 했다.

“알았어. 얘기할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논문 쓰느라 바빠서 요새 사람 만날 시간도 없어.”

“하지만 저번에 요한은……?”

레인의 지적에 정곡이 찔린 에밀리는 모터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던 입을 느리게 달싹이다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겸연쩍은 듯 초록빛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호언장담에 조금의 신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때는……. 요한이 1년 내내 소개 좀 해 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서 그런 거고. 게다가 올해 지나면 아카데미에 다시 올 일도 없을 테니까 졸업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겠다 싶어서……. 하여튼 간에 하늘에 대고 맹세할게. 말 안 하겠다고.”

요한의 소개에 그런 뒷사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레인은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이번만큼은 에밀리를 믿어 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한숨을 쉬었는지, 에밀리 앞에서 토로하기 시작했다.

“…너 그 남자 좋아하네.”

오래도록 이어진 레인의 고민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에밀리는 마지막 남은 쿠키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입을 댈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해서, 길어지는 이야기에 차까지 우려 마시며 목을 축이던 레인은 순간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을 뻔했다.

그 무슨 황당한 말이냐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서 에밀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며 입을 축였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길어져 논문을 쓰고 있던 종이와 펜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고, 몰래 종이에 싸서 숨겨 두었던 비상 간식들은 빈 껍질이 되어 책상 위를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굴에 따갑게 박혀 오는 레인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찻잔을 내려놓은 에밀리는 간식의 잔해들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도 너 좋아하고.”

앞서 한 말을 정정해 주길 바라고서 쳐다본 것인데,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말이 되돌아와 레인은 도리어 벙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니?

이게 좋아하는 건가?

하지만 에이든도 나를 좋아한다고?

에밀리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과 약혼 비스름한 걸 했는데(이 대목에서 에밀리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낀 듯한 표정으로 레인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기껏 요한과 연결해 줬더니 딴 놈이랑 약혼을 해 버린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인은 너무 갑작스레 하게 된 약혼이라 자신도 몰랐다고 열심히 해명해야만 했다), 그 전에 지낼 때는 거리를 딱딱 지켜 가며 저 필요할 때만 나타나곤 하던 사람이 약혼하고, 그의 불안 비슷한 것을 알아주고 나서부터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같이 식사를 하지 않나, 선물로 준 꽃을 화병에 꽂아 침실에 장식해 두질 않나, 아카데미로 떠나려고 미리 부른 마차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저를 붙잡고서 인사를 해 주질 않나.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들 때문에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그 와중에 이상하게도 그 사람 생각을 할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이번 주말에 보자고 약속을 했는데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보고 싶다가도 주말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기도 하고.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에밀리에게는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지만 가장 미치겠는 건, 이곳에 오기 바로 전날 했던 그 정사가 시시때때로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몸을 쾌락으로 철저히 능욕하는 정사도 무척 좋았고 불만도 없었지만, 온몸이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애무가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에이든을 원하고 탐했던 그날 밤의 섹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잊히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레인은 얼굴을 붉히며 에이든을 생각했다. 어차피 다가올 주말, 시간을 멈출 수 없다면 한 번만 더 그날처럼 해 달라고 조를까 싶다가도, 막상 그날이 닥쳐서 뭐가 어찌 됐든 에이든 앞에서 다리를 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또 눈앞이 아찔했다.

늘 하던 것이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가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쓰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레인은 지난 나흘간 이런 이상하고도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덕분에 수면 부족과 그로 인해 쌓인 피로로 눈가의 검은 그림자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토로했더니 나온 대답이 ‘좋아하네’라고 하니 레인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돼? 나 지금 너한테 연애 상담하는 거 아니고 고민 상담하는 건데…….”

“네가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그렇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묻는 레인에게, 에밀리는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레 대꾸하고는 말을 이었다.

“평소에 쌀쌀맞던 사람이 갑자기 너한테 잘해 준다며? 그럼 너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반응이 좀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 너무 갑자기 달라져서…….”

“그럼 뭐, 네가 갑자기 좋아졌나 보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좋아져. 게다가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계속 봐 왔다니까.”

숙맥 같은 레인의 대답에 속이 답답해진 에밀리는 주먹을 말아 쥐어 얹힌 듯이 꽉 막힌 가슴을 팍팍 내리치며 말했다.

“계속 봐 왔어도 어느 날 갑자기 딱, 하고 의식되기 시작하면 이미 사랑이 시작된 거지. 사랑이 별거니.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는 거 하는 게 사랑이지.”

“…….”

“게다가 그 남자, 꽃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네가 선물해 준 건 잘 다듬어서 침실에 장식했다며?”

“응. 그랬지.”

에밀리의 물음에 레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에이든에게 제법 감동을 받았었다. 자신이 선물해 준 꽃을 소중하게 여기며, 뭐든 좋으니까 생각이 나거든 사 오라고 말해 준 것이. 게다가 그날 밤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 준 것도 꽤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레인의 모습에 에밀리는 그 남자 생각하고 있네, 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소개해 준 요한이랑 대화할 때는 수줍어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밥만 잘 먹더니 그 남자를 생각할 때의 표정은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피어난 꽃송이처럼 싱그러워서 레인이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에밀리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거둔 후, 차분히 설득을 이어 나갔다.

“잘 생각해 봐. 누군가가 너한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선물로 줬어. 좋아할 것 같니? 게다가 꽃에 관심도 없다는 사람이 네가 준 꽃은 소중하게 화병에다가 꽂아서 다른 데도 아니고, 침실에다가 장식을 해 뒀는데? 보통 사람들은 관심 없는 사람에게 그 정도 노력을 들이지 않아.”

“…….”

“그리고 그 남자, 잘생겼다며? 네 취향이라며? 네 취향인 남자가 너에게만 다정하다는 건데, 그러면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지. 나 같아도 내 이상형이 내게만 다정하면 홀라당 넘어가겠다.”

“하지만… 안 보고 싶기도 하단 말이야…….”

에밀리의 설득에 거의 넘어가기 직전,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듯 레인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반박했다. 에밀리가 하는 말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녀가 말하는 족족 다 맞는 말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간극에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에밀리는 그런 레인의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그건 너무 좋아서, 떨려서 그래. 가끔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을 보는 게 무서워지기도 해.”

“…….”

“너 그 남자 정말 좋아하나 보다. 결혼하게 되면 나 좀 불러 줘. 요한 앞에서도 꿈적도 않던 애가 어떤 남자한테 홀라당 넘어갔는지 그 얼굴 좀 보고 싶으니까. 알았지?”

에밀리가 쐐기를 박듯 레인의 두 손을 꼭 붙잡고서 앞으로 일어날 리도 없는 결혼 얘기까지 꺼냈음에도 레인은 부정하기는커녕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인뿐만 아니라 서재에 앉아 레인 곁에 붙여둔 사역마의 눈과 귀를 통해 에밀리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걸 가만 듣고 있던 에이든에게도, 에밀리의 똑 부러진 단호한 진단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레인이 나흘간 내내 병든 닭처럼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기에 걱정이 되어 지켜보고 있던 찰나, 평소에는 고깝기만 하던 에밀리가 먼저 나서서 고민 상담을 유도할 때만 해도 에이든은 이런 결론이 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둘 사이의 일을 숨기기 위해 애써 돌려가며 말하고자 애쓰는 레인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고, 또 고민이랍시고 내뱉은 말들에서 그날 밤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 훤히 보여 늘 저 좋을 대로 하던 것을 가끔 레인이 좋아하는 방법으로도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할 때까지만 해도 에이든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사역마 하나를 시켜 불면증과 신경 안정에 좋다는 차를 주문해 놓는데, 그 순간 들려온― ‘좋아하네’라는 에밀리의 진단이 떨어지자마자 에이든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레인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고,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각인이 새겨진 순간, 레인의 마음은 거의 확인한 거나 다름이 없었고, 악마 같은 매혹적인 존재에게 홀리는 인간이 한둘도 아니었기에.

하지만 자신이 레인을 좋아한다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물론 에이든도 레인을 예전에 계약을 맺었던 다른 먹이들이나 마녀들과는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먹이야 철저히 대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즈니스적 관계였으니 그동안의 것들은 자신에게 고품질의 정기를 제공한 데에 대한 보상이라고 치더라도, (전혀 부탁받지도 않았음에도) 그 먹잇감을 직접 제 손으로 자신의 마녀로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영혼이 탐나서 다른 악마들에게 뺏길까 싶어 마녀로 만든 적은 있어도 제게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데려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레인을 사랑한다고?’

에이든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자꾸만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본래 악마이기도 했고,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이 저를 사랑하도록 유혹한 적은 많았어도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

레인을 향해 구구절절하게 이어지는 에밀리의 설명은 레인의 것임과 동시에 에이든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혼란스러운 기분만 가중되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애정하는 먹잇감이라 잘해 주는 것인지, 자신이 진심으로 레인을 사랑해서 특별해 잘해 주는 건지 스스로도 모호해졌다.

결국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겠다 판단한 에이든은 제 밑의 사역마 중 하나를 불러냈다.

무르핀을 대신해 레인의 시중을 들게 했던 그 사역마였다.

남자는 에이든 앞에 소환되자마자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용건을 물었다.

“차 주문 말고 달리 시키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네.”

“네가 보기엔 내가 레인을 어떻게 대하는 것 같지?”

에이든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질문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가장 정답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잘 대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에 넘칠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의 대답에 에이든은 깊은 한숨과 함께 밀려오는 두통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에이든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레인이 여태껏 자신과 계약을 해 온 여러 인간들과 비교해 봤을 때 어떠한지, 유독 레인에게만 특별히 대하는 것 같은지 그런 것이 궁금했다.

반듯했던 에이든의 양미간이 험악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알아챈 남자는 자신이 그가 바라던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눈치껏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알아서 자신의 심기를 살피는 남자의 모습에 에이든은 심호흡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을 인내하며 다시금 물었다.

“그건 이미 나도 알아. 이전의 계약자들이나 마녀랑 비교해 봤을 때 어떠냐고 묻고 있어, 지금.”

그제야 남자는 에이든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아주 진지하고도 꼼꼼하게 레인과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인간들에 대한 기억을 살폈다.

확실히 레인이라는 인간에 대한 에이든의 태도는 어딘지 별난 구석이 있었다.

사역마를 붙여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귀찮은 짓을 하는 것도, 하잘것없는 인간의 사정을 살피며 평일에는 내내 굶다가 주말에만 몰아치듯 정기를 취하는 것도, 그 평일 사이에 다른 인간의 정기를 먹어 치우기 위해 인간 세상을 살피지 않는 것도 모두 레인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애초에 에이든이 인간계에 있는 저택에 독수공방하며 틀어박혀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본래 악마는 수없이 많은 인간을 거느리며 그 등골을 빼먹는 족속이었다. 욕망과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을 농락하며 정기를 빼먹거나 영혼을 갈취하여 힘을 늘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 외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었고, 에이든 또한 더 무관심했으면 했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흥미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녀도 그러했다. 여태 그가 거느렸던 마녀들이 그리 적지 않았지만 정기, 영혼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쏟은 적은 없었다.

그에 반해 레인이라는 인간은 아주 달랐다.

얼마 전 무르핀이 레인에게 성욕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꼼짝도 못한 채 사흘을 내리 앓을 만큼 매질을 하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물론 주인의 먹잇감에 눈독을 들인 죄는 컸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먹잇감이 가진 정기를 취하도록 너그럽게 봐줬으면 봐줬지.

“아주 특별하게 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다른 계약자들과 달리 레인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으십니다.”

“내가?”

남자의 대답에 에이든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사죄의 마음을 담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약간 짜증이 치밀기는 했지만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화를 꾹 눌러 참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그래, 어디 한번 계속해 봐.”

“오래 주인님을 모셔 왔지만, 인간의 정기나 영혼 이외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레인이라는 인간을 제외하고는요.”

“그건 그냥 레인의 정기가 특별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러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인간과 계약을 하고 난 이후로는 다른 정기는 취하지 않는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전의 주인님이셨더라면 인간을 지하실에 가두어 두고서 죽을 때까지 그 정기만을 취한 뒤,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을까 추측됩니다만.”

“후우. 좋아. 됐어, 들어가 봐.”

남자의 대답이 여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옅은 짜증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더니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물러갈 것을 명령했다.

남자는 무덤덤하게 에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혼란스런 기분을 정리하려고 기껏 불렀건만 도리어 심경만 더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사역마들을 하나씩 전부 불러 취조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사역마 중에서 레인을 모르는 사역마는 없었으니.

하지만 이어진 취조에도 대체로 사역마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인간의 감정에 둔감한 편인 그들의 눈으로 봐도 에이든이 레인에게 보이는 행동들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점차 에밀리의 가설에 신빙성이 실리는 와중, 에이든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역마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단정하게 검은 하녀복을 차려입은 무르핀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에이든 앞에 나타나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에이든은 사역마를 잇달아 불러내어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기에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다른 사역마들이 불려 가는 것을 보고 이미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알고 있을 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지?”

에이든의 직설적인 질문에 무르핀은 덤덤하게 그에 응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잠깐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주인님께 레인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후우. 나 몰래 어디서 짜고 왔나? 왜 이렇게 하나같이 대답이 똑같지?”

결국 인내에 한계가 온 에이든이 짜증을 감추지 않은 한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칼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무르핀은 에이든을 흘깃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아는 한 주인님께서는 한낱 먹잇감의 눈물 따위에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과 정성, 금은보화를 들여 가며 교육한 적 또한 일찍이 없으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주인님께서 먼저 자처하여 인간의 몸에 마녀의 각인을 새긴 적도 없으셨습니다.”

“…….”

“하물며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인간이 선물한 쓸모없는 꽃을 가져오라 명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인간의 기분을 따지는 일조차 없으셨지요.”

“…….”

“그다지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악마와 먹잇감 사이의 관계라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악마와 마녀의 관계라고 하기에도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뱉는 족족 명치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무르핀의 문장에 에이든은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무르핀이 입에 담은 말들은 모두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었기에 결국 불만스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에이든은 양미간을 험악하게 구기고서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일정하게, 그러나 그 짧은 동작에는 가벼운 신경질이 묻어 나왔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에이든의 손가락이 이내 멎었다. 서재 가득히 울려 퍼지던 탁탁, 하는 신경질적인 소리도 함께 멎었다.

에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레인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 같지?”

“저는 감정에 대해 그다지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건 나도 알아. 알면서 묻는 거니까 대답해.”

“…인간의 감정으로 치자면 호감, 혹은 그 이상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무르핀의 대답을 들은 에이든의 낯빛에 옅은 체념의 빛이 새 그림자처럼 지나갔다.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사역마들을 모조리 불러내어 심문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확인 사살을 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에이든은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몰려오는 두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 같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물러가도 좋다는 듯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손짓으로 손을 내저었다.

에이든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모습을 감추려던 찰나, 에이든이 무르핀을 멈춰 세웠다. 공중에서 연기처럼 흩어지던 무르핀의 모습이 다시 온전히 나타났다.

무슨 일로 부르셨냐고 묻는 듯한 무르핀의 시선에 에이든이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레인 앞에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도록.”

“그날이라고 하시면,”

“그래, 지하실. 네 등에 있는 상처도 철저히 숨기도록.”

“알겠습니다.”

가벼운 묵례와 함께 에이든의 앞에서 사라지면서 무르핀은 속으로 자신이 한 말이 옳았노라 생각했다.

자신의 기분이 그토록 언짢으면서도 끝내는 그 하잘것없는 인간의 감정 하나에 연연해하며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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