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마녀 (5/12)

4. 마녀

기나긴 정사에 지쳐 기절한 레인은 꿈조차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사로잡혀 있었다. 밖에 천둥 비바람이 몰아쳐도 깨지 않을 것만 같은 완벽한 잠에 빠져 있던 레인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레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방 안을 가득 적시고 있는 햇살은 아침에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와 달리 노을이 지듯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말이었다.

“왜 여기 있지……?”

레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마의 늪에 빠져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자신이 이 방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조금씩 상기해 내기 시작했다.

분명 오늘 아침 정원에서 에이든의 아침 식사가 마치고 나서 사역마가 자신을 이 방으로 옮겨 줬다.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씻은 것도 기억이 났다.

물론 씻느라 지치기도 했고,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해져서 머리를 말려야지, 말려야지 생각하면서도 제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침대에 엎어졌던 것 또한.

그리고…….

레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기억이 좀처럼 잘 떠오르지 않는 탓이었다.

에이든의 식사가 너무 격해져 기절했다 일어나면 늘 이런 식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쾌락 때문에 기억이 모조리 지워져 다시금 기억을 맞춰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늦게 돌아오는 기억은 기절하기 직전의 것이었는데 한참 동안 생각이 나지 않아 관자놀이를 맨질맨질 광이 나도록 문지른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레인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힘을 주어 문질렀다. 그러고는 기억을 차근차근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잠들었는데, 잠들고 일어나니 에이든이 있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민망스럽게도 또 울어 버렸고, 그걸 에이든이 달래 주었다.

“아!”

거기까지 기억해 내자 마치 모든 퍼즐의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기절하기 바로 직전의 기억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처음에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다정한 애무와 4년간 저택에 살았으면서도 처음 본― 용도를 알 수 없는 지하 창고. 그리고 거기에서 벌인 격렬한 정사와 제발 그만해 달라 비는 자신의 애원.

그 모든 것이 떠오르자마자 레인은 곧장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와 방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울에 비친 레인의 모습은 정체 모를 끈적끈적한 액체와 정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기억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정했다. 거기에 누군가가 갈아입힌 듯한 기다란 슬립 원피스까지. 부어오른 젖꼭지와 속옷을 입지 않은 아래가 조금 쓰라렸지만 겉으로 봐서는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레인은 입고 있는 기다란 슬립 원피스를 조심스레 들추어 허리께를 살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남아 있을 터였다.

있었다.

영원히 에이든의 것이라는 붉은색의 증표가 허리께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동그란 원 안에 그려진 육망성과 뱀이 그리핀의 몸통을 감싼 형태의 낙인이 기억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꿈이 아니었어.”

레인은 진심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더 이상 에이든에게 버려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기분이었다. 정기가 맛없어져도, 큰 잘못을 해도 에이든은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다.

물론 혼은 나겠지만.

그러나 혼이 나더라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에 충분했다. 순간 레인은 눈물이 핑 돌면서 울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이렇게 기쁜 날에 눈물을 보이는 게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금의 이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다시 외톨이가 되어 세상 속에 홀로 남지 않아도 되는 것.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되고, (대가를 바쳐야 하기는 하지만) 원하는 것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또 (에이든은 질색할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곁을 지켜 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내 곁을 지켜 주는 누군가가 평생토록 곁에 있으리라는 사실만으로도 레인은 무척 만족스러웠고, 또 에이든에게 감사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정기를 바치는 것뿐인데 평생 곁에 둬 주겠다니.

레인의 가슴 밑바닥이 새의 깃털로 슬금슬금 간질여지는 듯한 기분에 흐흐흐, 하고 낮고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아, 혹시 이거……. 지워지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이런 낙인 같은 걸 찍혀본 적도 없거니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빛은 인두 같은 것으로 지져서 새겼다기보다는 누군가 물감을 붓으로 크게 떠서 그린 것처럼 선명해서 도리어 미심쩍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뒤, 혀를 내어 검지에 침을 묻힌 뒤 표식의 붉은 부분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보았다.

다행히 피부가 붉게 달아오를 뿐 표식의 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확인을 마친 레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버려질까 봐 떨지 않아도 되었고, 에이든에게 버려져 비참해질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생토록 메워지지 않을 것 같던 가족의 빈자리도 어느 정도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에게서 확인도 받아 냈다. 몸의 표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분이었다.

가슴 깊이 차오르는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었던 레인은 혼자 눕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이불에 몸을 풀썩 던지고는 팔과 다리를 흔들어가며 새하얀 이불 위를 유영했다. 이토록 벅차오르는 기쁨을 맛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에이든과 함께 한 나날들이 모두 힘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날이 즐거웠다고도 말할 수 없었기에.

이토록 깊은 행복감은, 에이든과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후 저택에 살게 되면서 맞은 첫날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대 위 베개를 끌어안고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레인의 모습은, 곧장 에이든의 눈과 귀로 들어왔다.

레인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실제로도 감시를 붙여 놓은 사역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저택 자체가 에이든의 권역이었고, 따라서 이 저택에 있는 한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에이든이 마음을 먹는다면, 혹은 그가 원한다면 자리에 앉아 저택 내의 어디든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에이든은 자신의 식사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케어를 사역마에게 맡겨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눈과 귀는 줄곧 레인을 향해 있었다. 그는 사역마의 눈을 통해서도, 이 저택에 깔린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서도 레인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 말은 즉, 레인이 거울 앞에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표식을 닦아보는 것도, 혼자 침대 위에 뛰어들어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도 에이든은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레인은, 에이든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는 것도, 남들은 악마가 영원히 곁에 두고 귀여워해 주겠다 하면 끔찍하다며 진저리를 치던데 저렇게도 좋을까, 하고 제법 귀엽게 생각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에이든은 레인을 볼 수 있었지만, 레인은 에이든을 볼 수 없었기에.

기쁨에 취해 지쳐 버린 레인은 자리에 대자로 누워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한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나도 큰 침대를 양팔을 뻗어 훑었으나 그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한 점 없이 서늘했다.

적적하기 그지없는 빈자리를 손으로 훑으며 레인은 조금은 서운함이 맴도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도 곁에 없으셨나 보네.”

몸을 섞을 때에는 거침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며 한껏 살갗을 맞대어 오면서도 정기 섭취가 끝나고 나면 휙, 하니 사라져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감각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처음에 침대로 들였을 때에는 밤이 다 새도록 곁에 있다 가 주셨는데.

하지만 그 이후로 에이든은 단 한 번도 잠든 자신의 곁을 지켜 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애처럼 자신이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고 보채기도 그러해서 그저 속으로 삭였다.

그리고 저택에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자신을 잡아먹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게다가 정기를 대가로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사소한 것마저 신경 써 달라고 요구하기에는 낯간지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서도 얼굴을 봤으면 좋겠는데.’

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 지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별안간 허기가 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택에 온 뒤로 여태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래서야 곧 다가올 에이든과의 식사를 버틸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야…….”

몸을 반쯤 일으켜 주위를 살피며 거기까지 말했을 때쯤, 갑자기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의 명령으로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용건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에 레인은 방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표했고, 곧장 문이 열리면서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음식들이 차례차례 방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식사가 화려한 편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당황스러울 만큼 양이 너무 많았다. 테이블이 가득 차 접시를 다 놓지 못할 지경이었다.

레인이 사역마들을 향해 눈짓하며 말을 고르고 있으려면,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무르핀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이 사태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아침과 점심 식사를 모두 내라는 주인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네?!”

깜짝 놀란 레인이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쳐다보면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녁 식사는 두 시간 뒤에 내오겠습니다.”

“두 시간 뒤요?”

레인은 황당한 기분에 차례대로 차려지는 음식들을 눈으로 훑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세팅된 음식들은 척 보기에서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고, 두 시간 만에 소화가 될 만한 양도 아니었다.

아무리 체력 보충을 위해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두 시간 간격으로 식사를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다섯 시간 뒤로 미루면 안 되겠냐고 말이라도 꺼내 보려 입을 달싹이던 레인은 이내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협상의 여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이든의 명령에 움직이니까, 에이든에게 직접 말해야 하나?’

하지만 레인은 이 넓은 저택에 에이든이 있을 만한 곳이 짐작이 되지도 않았고, 간다고 해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의문이었다.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정기를 쪽쪽 빨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만이 강렬했다.

사실 에이든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물약이나 자신에게 걸어 주는 체력 회복 마법 같은 것이 있어 몸 상태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피로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 조금 쉬고 싶기도 했고, 적절한 음식 섭취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시간 뒤에 또 밥 먹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이 밥 먹는 모습까지 눈에 담고 오라는 명령이 있었는지 가져온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 위에 차려졌음에도 무르핀을 포함한 사역마들은 끝까지 방 한구석에 서서 자신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접시 하나라도 비우지 않으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인은 식탁 앞에 앉았다.

음식량이 두 배라 그런지 자리에 놓여 있는 식기도 평소보다 가짓수가 많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올 만큼 많아서 레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식기를 양손에 들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무르핀을 흘끔거리던 레인은 이내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말씀하시죠.”

“…저녁 식사 말인데요, 두 시간 말고 네 시간 뒤로 미루면 안 돼요?”

악마의 사역마에게 이런 것이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정심이라도 자극해 보자 싶어 레인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 가장 아련하고 불쌍한 눈빛으로 사역마를 올려다보았다.

레인의 초롱초롱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무르핀의 표정은 한겨울에 내리치는 서릿발보다도 차가웠으며 지하실의 철문보다도 육중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괜히 물어봤나?’

레인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면서 속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불쌍한 척 연기는 하지 않는 건데 싶었지만 이미 보인 표정, 꺼낸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그…….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기름칠을 제때 하지 않아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양철 인간처럼 레인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접시에 코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창피함에 하늘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는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고개를 얼마나 푹 숙였는지 머리칼이 앞으로 쏠리면서 레인의 붉게 익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무르핀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불현듯 귓가에 에이든의 간결한 명령이 파고들었다.

‘원하는 대로 해 줘.’

에이든의 명령에 무르핀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아주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뗐다. 아무래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레인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찮은 먹잇감에게 이렇게 응석을 모두 받아 주다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주인이 레인이라는 먹잇감을 더할 나위 없이 아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성실하게 주인의 명령에 복종했다.

“…네 시간 뒤에 저녁을 내오면 괜찮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말없이 포크에 샐러드를 찍어 입 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던 레인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는 무르핀을 올려다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상처받은 햄스터처럼 시무룩하더니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금세 눈이 샛별처럼 반짝이는 것이 참 희한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황금빛 눈동자를 환희로 빛내며 레인은 활짝 미소 지었다.

“다섯 시간으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이거 다 소화시키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내 식사가 너무 늦어져. 네 시간으로 해.’

“…그렇게 되면 주인님의 저녁 식사가 너무 늦어져서 안 됩니다. 네 시간 뒤에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따라 그대로 무르핀이 대답하면 레인은 조금 실망스런 기색을 보이다가도 뒤에 이어지는 이유에 나름대로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감사의 인사와 함께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신이 난 듯 들썩이는 걸로 봐서 저녁 식사가 미뤄진 것 자체로도 다분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어 낸 레인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차라 밥이 술술 넘어갔다.

식사는 모두 맛있었고, 양이 많았지만 메인 메뉴는 대부분 레인의 배 속으로 들어가 깨끗한 빈 접시만 남았다.

더 이상은 못 먹겠다 싶을 즈음 레인은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며 식사를 마쳤음을 알렸다.

“잘 먹었습니다. 무척 맛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무르핀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방구석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사역마들을 불러 식사를 치우게 했다.

빵빵하게 부른 배를 안고서 행복감에 젖어 있던 레인의 곁에 무르핀이 다가와 물었다.

“하고 싶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하고 싶은 거요?”

“저녁 식사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원하시는 걸 마음껏 하게 하라는 주인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음…….”

그녀의 말에 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깐 동안 생긴 여유시간 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평소라면 날도 좋고 잘 가꾸어진 정원을 산책한다든가 시내로 잠시 나가 쇼핑을 한다거나 했을 테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 어떤 것도 당기지가 않았다.

시내로 나가기에는 몸이 피곤했고, 정원으로 나가 산책하기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 것 같아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인은 불현듯 하고 싶은 것이 떠올라 곧장 무르핀에게 물었다.

“혹시 책 같은 것도 구해다 달라고 하면 해 주나요?”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마녀에 관한 책을 좀 보고 싶어요.”

“그것만으로는 자료가 너무 방대해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음, 정확히 악마와 마녀의 관계에 관한 책이요. 마녀가 어떤 건지 기본적인 정의가 설명되어 있는 책도 한 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곧 책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무르핀은 예의 바르게, 그러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제스처와 함께 자리를 떴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레인은 불룩해진 배를 팡팡 두들기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밥도 거하게 먹었겠다, 시간도 제법 남아 있었고, 밖에 나가기도 귀찮던 찰나에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는 건 꽤나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았다.

바깥에 나갈 일도 없고, 침대에 누워서 해도 되는 정적인 활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마녀가 되기는 했지만 레인은 마녀라는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점차 관심을 잃고 사라져 가는 마당에 악마도 아니고 그 밑에 있는 마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아카데미 도서관에도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고, 레인이 찾아본 악마에 관한 서술도 대부분이 마법의 오용이나 폐해에 대한 서술 사이에 짤막하게 끼워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형국이니 마녀에 대한 서술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현재 악마나 천사와 같은 이세계의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좀 더 오래전에는 세계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인간 또한 있다고 했으나 다 옛날이야기였다.

지금은 마력이 있는 사람 자체가 적은 데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과학이 각광을 받으며 발전하고 있는 시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악마랑 계약을 하고, 몸에 각인까지 있는 것을 들켰다가는 단순한 스캔들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레인은 고문도 싫었고 사형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노하우나 참조를 할 만한 것이 있으면 미리 봐 두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에이든에게 보답을 하고 싶기도 했다. 조금 난폭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고, 불안을 걷어 주기 위해 마녀로 삼아 준 것이 고마웠다. 악마의 마녀가 된 이상,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또 잘해 내고 싶었다.

레인은 새롭게 투지를 불태우며 무르핀이 어서 책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무르핀은 마녀에 관한 서책 십수 권과 함께 나타나 레인의 방문을 두들겼다. 레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무르핀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 한가득 들려 있는 책이 무겁지도 않은지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레인에게 물었다.

“어디다 놓을까요?”

“아, 저기 아무 데나 놔주세요.”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가서 도와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무르핀의 표정은 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서성이던 찰나였다.

에이든의 사역마는 레인의 지시대로 대충 보이는 빈 공간 아무 데에다가 책을 내려놓았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무르핀의 곁으로 다가온 레인은 그녀가 가져온 책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었다. 대충 눈으로 제목만 훑었을 뿐인데도 제법 잘 간추려서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여기에 있는 것만 눈으로 훑어 두어도 마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한결 수월할 듯했다.

“저, 고맙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하고 말하려던 찰나 무르핀이 입고 있는 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는가 싶더니 레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저택에서 항상 하던 그 딜도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랴, 제단에서 질펀한 정사를 벌이며 마녀의 각인을 새기랴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챙겨 준 딜도에 레인이 조금 아연실색하여 커다란 물체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왠지 오늘따라 일정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레인의 심정 따윈 제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무르핀이 입을 열어 에이든의 전언을 전했다.

“주인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어떤……?”

“제대로 착용하시는지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레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레인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기를 바라며 되물었다.

“…네? 확인이요?”

“속옷을 제대로 착용하시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두 눈으로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무르핀은 기계적으로, 그러나 레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대답했다.

자신의 두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똑똑히 확인한 레인은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소리 나게 삼켰다.

침대 위를 구르면서 책을 읽을 생각은 했어도 무르핀에게 자신의 치부를 모두 보이며 딜도를 삼키는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과는 달리 레인의 아래는 새로운 자극과 환락을 기가 막히게 탐지하여 아직 넣지도 않았음에도 기대감으로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솔직하게 기뻐하는― 음란하게 변하고야만 자신의 몸이, 레인은 벌써부터 원망스러웠다.

하늘을 원망하며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에이든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곳, 에이든의 저택에 있는 이상 자신은 에이든의 원활한 식사를 위해 협조적이어야 했고, 그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것이 에이든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사용인이 아니라 에이든의 사역마라, 이전에 한번 사흘간 에이든과 정사를 벌이는 걸 보인 적도 있으니 공연히 창피할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치심이 완전히 가시는 건 아니라 레인은 붉어진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미처 감추지 못한 채 무르핀에게 테이블 의자에 앉을 것을 먼저 권했다.

“그, 그럼 일단 저 의자에 앉아 계세요. 저는 이쪽 의자에 앉을게요.”

무르핀과 레인은 사이좋게 테이블 의자를 하나씩 끌어다 앉았다. 시야를 가리는 테이블은 잠시 옆으로 치워 두었다.

의자에 앉은 레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딜도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다 맞은편에 정갈히 앉은 무르핀에게 다시금 물었다.

“꼭… 처음부터 다 봐야 하나요? 나중에 다 넣고 부르면 안 되나요.”

“주인님께서는 과정을 확인하시길 ‘특히’ 원하셨습니다.”

“아, 네……. 알겠어요. 할게요.”

특히, 에 유난히 힘을 준 그녀의 대답에 레인은 얼굴에 체념의 빛을 띠었다. 제 앞에 주어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것이었다.

레인은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대어 몸을 파묻은 뒤, 다리를 한 짝씩 들어 팔걸이에 걸쳤다. 미끄러운 사선을 그리는 팔걸이의 각도 탓에 다리가 자꾸 내려가는 것을 자세를 여러 번 고친 뒤에야 겨우 고정할 수 있었다.

레인이 입고 있던 가벼운 슬립은 양쪽으로 활짝 벌어진 다리 위로 말려 올라가, 덕분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무르핀에게 비부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저 늘 하던 것의 일환일 뿐인데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레인의 심장이 요란스레 뛰어 대기 시작했다.

레인은 우선 딜도를 입에 물고서 아래에 손을 뻗었다. 질구를 슬슬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상태를 확인했다.

약간 젖어 있기는 했으나 다짜고짜 이 커다란 것을 밀어 넣어도 될 만큼 충분한 젖어 있지는 않았다.

제단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면 가볍게 회음부와 음핵을 딜도 끝으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들어갔겠지만, 그동안 레인은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부탁한 책이 도착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잘 풀려 있던 속살이 다시 다물어지기에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이 레인은 옅은 한숨과 함께 슬립 위로 솟아 있는 가슴을 부드럽게 마사지 하듯 움켜쥐었다. 입에는 여전히 딜도가 물려 있는 채였다.

“흐으…….”

아주 옅은 신음이 레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가슴이나 젖꼭지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에이든의 손길을 덜 타서 감도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딱한 제단에 유두가 잔뜩 쓸리는 바람에 손끝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신음이 흐를 만큼 감도가 높아져 있었다.

그 주변부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레인은 금세 흥분하여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길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가슴을 쥐어뜯을 기세로 거칠게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다 이내 만져 주기를 원하듯 빳빳하게 서 있는 유두를 자신의 손으로 꼬집었다.

“흐응!”

허리가 비틀리면서 딜도를 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러 목덜미를 타고서 그대로 가슴께로 떨어졌다.

입고 있던 슬립이 타액으로 젖어 들면서 젖가슴의 모양이나 부풀어 있는 유두의 상태가 선연하게 비쳐 보였다.

무르핀은 자연스럽게 레인의 비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레인의 입구가 흥분한 듯 뻐끔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치부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의식한 탓이었다.

“으읏, 하으!”

레인은 몸이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유두를 손끝으로 긁어내리듯 문질렀다. 그러자 레인의 허리가 튕기듯이 솟아오르면서 앉아 있던 의자가 들썩이면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어색한 듯 굳어 있던 손놀림도 차츰 능숙하고 대범해져서 아래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젖꼭지를 만진 것만으로도 가볍게 가버렸다. 투명한 애액이 왈칵 쏟아져 의자 위를 적셨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절정의 여운을 즐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레인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입에 물고 있던 딜도를 잠시 한쪽 손에 쥐고서 비어 있는 다른 한쪽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아, 으응……. 젖었어.”

처음보다는 많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 딜도를 받아들일 만큼은 아니었다. 앞으로 두어 번은 더 가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을 듯했다.

레인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무르핀의 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에이든의 명령 때문에 앉아 있어서 그런 건지 그녀에게는 그다지 표정의 변화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석고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음란하게 흐트러진 레인의 모습을 차분히 눈에 담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무르핀의 차갑기 그지없는 새까만 시선이 레인을 자극했다. 어쩐지 에이든의 눈동자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앞에서 자위를 시킨 적이 없고, 또 (침대 위에 있을 때) 감정이 모두 씻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저 차가운 시선만큼은 자신의 음란한 몸을 힐난할 때의 그것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레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질구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나를 넣고 움직이다 신경을 갉작이는 듯한 미약한 자극에 하나둘씩 개수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손가락 세 개를 삼키고서야 겨우 만족한 듯 구멍이 오물거렸다. 내벽이 레인의 손가락을 달라붙듯이 조여 왔다.

“하아……. 으, 으읏!”

그러고는 위아래로 거칠게 쑤시면, 순간 눈이 뒤집힐 만큼 선명한 쾌락의 파도가 자신을 덮쳐들었다.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며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으나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좀 더……. 깊이, 흐읏! 아, 안 닿아.”

언제나 에이든이 기분 좋게 쑤셔 주던 곳이 자신의 손으로는 닿지가 않아 아쉬운 듯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며 내부를 들쑤시면서 닿았으면 하는 곳으로 손가락을 뻗어 보지만 그 근처에 비벼질 뿐, 원하는 곳에는 결코 닿지 않았다.

애가 타기 시작한 레인은 손에 쥐고 있던 딜도를 입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펠라티오를 하듯 정성스럽게 딜도 기둥을 혀로 핥아 올렸다.

오늘 아침 에이든의 것을 삼켰던 기억을 상기하며 레인의 입술이 커다란 딜도를 삼킬 때마다 아래가 움찔대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레인은 내리뜨고 있던 시선을 들어 무르핀과 시선을 마주했다. 에이든의 것과 비슷한 그 새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며 레인은 스스로 딜도를 움직여 타액으로 적셨다.

부끄러움도, 수치도, 어색함도 모두 잊은 레인은 자신의 타액으로 듬뿍 적셔진 딜도를 입에서 빼내어 아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몸이 달아 있던 레인의 입에서 앓는 듯 끙끙거리는 신음이 흘렀다.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에이든과 닮은 무르핀의 존재도 레인을 자극시키는 좋은 흥분제가 되었다.

꼭 에이든 앞에서 하는 것 같아서.

“으응……. 하윽! 으, 에이, 든…….”

레인은 사역마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낮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애액으로 젖어 있는― 기대감으로 벌름대는 입구에 귀두 끝을 맞춰 밀어 넣었다.

딜도의 머리를 조금 삼켰을 뿐인데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압박감이 엄청나 레인은 손을 멈추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레인이 앉아 있는 의자는 애액으로 엉망진창이었고, 쾌감으로 흐려진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딜도의 3분의 1을 삼키고 있는 입구는 그 크기가 버거운 듯 연신 뻐끔거렸다.

“흐으……. 흑, 아, 으응!”

다시 손을 움직여 딜도를 밀어 넣으려 했으나 힘이 빠진 건지 손이 자꾸만 헛돌았다.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던 레인에게, 잠자코 앉아 있던 무르핀이 다가왔다.

레인이 불그스레 달아오른 눈가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뱉는 숨결마저도 새빨갛게 붉은 것만 같은 레인과는 달리, 레인을 바라보는 무르핀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다가온 무르핀은 그런 레인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지난주에 자신에게 했던 것과 같은 물음이었다.

레인은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 앞에서도 아니고 그의 사역마 앞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모습을 질질 끌며 보여 주는 것도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았고, 또 그녀에게 부탁한 책도 저녁 식사가 돌아오기 전까지 전부 훑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무르핀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 바닥에 앉았다. 한쪽 손으로는 레인의 허벅지가 오므려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했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딜도의 끄트머리를 잡고서 천천히 레인의 내부로 밀어 넣었다.

침착하고 차분한 손길에 딜도는 착실히 레인의 속살을 파고들어 갔다. 내벽을 문지르듯 압박하며 들어오는 감각에 레인은 허리를 튕기며 허벅지를 떨어 댔다.

“흐응, 읏, 아, 안 돼……. 하윽!”

레인의 간절한 애원에도 무르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고, 레인의 질구는 게걸스럽게 딜도를 삼켜 들어가 마침내 기둥을 끝까지 삽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딜도를 모두 받아 냈을 무렵 레인의 회음부는 실금이라도 한 듯 애액으로 질펀하게 젖어 음란한 빛을 띠었고, 맥없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헉헉 연신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레인이 속옷을 착용한 것을 확인한 무르핀은 오물오물 딜도를 밀어내는 입구에 다시금 기둥이 보이지 않도록 끝까지 삽입했다.

그 순간 레인의 허리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옷 착용 확인했습니다.”

“으, 네……. 도와주셔서, 으읏, 감사합니다.”

쾌감에 젖은 와중에도 자신을 도와준 무르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레인은 그녀가 유령처럼 사라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전신을 맴도는 환락의 여운이 가신 뒤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리 사이로 애액이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선명해 레인은 양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닦을 것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때마침 테이블 위에 손수건이 하나 놓여 있어 그걸로 다리 사이를 훔쳤다.

레인이 앉아 있던 의자는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어 아무래도 가구를 교체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레인은 아무 생각 없이 맞은편에 놓인― 무르핀이 앉아 있던 의자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무르핀이 앉아 있던 의자는 자신의 것에 비해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하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에이든이랑 할 때는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기 탓인가 서서히 눈빛이 가라앉으면서 차가운 정염으로 불타오르는 게 눈에 보여 크게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녀는 사역마라 그런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목석 앞에서 하는 기분에 도리어 창피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수치심이 자신의 성감을 더욱 자극하기는 했지만.

레인은 다시금 붉어지려는 얼굴을 손부채질을 하며 가라앉히고서 자신이 앉았던 의자는 문 근처로 옮겨 두었고, 하나 남은 의자는 어색하지 않게 테이블 앞에 재배치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자를 옮기는데, 무르핀이 앉아 있던 의자에 못 보던 상처가 눈에 띄었다. 튼튼한 원목으로 짜인 프레임에 무언가로 긁은 듯한 자국이 일직선으로 나란히 나 있었다. 꽤나 깊게 파였는지 나무의 새하얀 속살이 모두 보일 정도였다.

‘뭐지? 어디 긁히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방이 좁은 것도 아니고, 가구를 자주 옮기는 것도 아니어서 레인은 조금 의아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제 안에 깊게 박힌 딜도가 빠져나오지 않도록 조심히 걸으며 무르핀이 가져온 책을 손에 들고 하나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후의 만찬처럼 느껴지는 저녁 식사를 앞두고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은 결과, 레인은 무르핀에게 부탁하여 가져온 책을 모두 훑어볼 수 있었다.

중간에 게살수프를 떠먹다 책에 한 방울 흘리고야 만 약간의 불상사가 있었으나 다행히 잉크가 번지지는 않았고 종이가 살짝 더러워진 정도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만큼 자그마한 실수였다.

이윽고 마지막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레인은 도리어 마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녀가 하는 일은 악마를 모시는 일이었는데, 악마의 곁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이어서 직접 정기를 바치거나 아니면 같이 악마를 모실 다른 인간을 꾄다거나 악마를 도와 인간을 타락시키는 계략을 꾸며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신 마녀는 악마로부터 약간의 힘을 빌려 받아 다른 사람들은 쓸 수 없는― 고대 마법을 구사하거나 악마가 거느리는 사역마의 일부를 다룰 수 있는 사용 권한을 양도 받기도 한다는데, 어느 쪽이든 간에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예시는 아니었다.

그나마 유익했던 건, 왜 이런 책이 끼워져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마녀와 악마 사이에 종종 있다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사례집이었다.

페이지마다 누렇게 변색되어 모서리가 둥글둥글 깎인 것이 어지간히도 손을 많이 탔다 싶었던 그 책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절륜하고 아름다운 악마가 인간을 꾀어 사랑하는 척 영혼을 잡아먹는 얘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 책에서는 반대로 아름다운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된 악마가 종족을 초월하여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얘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들뜨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발을 동동 구르며 읽은 그 책에서 뜻밖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악마의 진짜 이름을 입에 담게 되면 그때부터 인간과 악마의 영혼이 하나로 묶여 영원을 함께 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진짜 이름? 그렇다면 에이든에게도 진짜 이름이 따로 있는 건가?’

레인에게 에이든은 그저 에이든이었는데, 그 이름은 가짜에 불과하고 어딘가에 진짜 이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기분이 묘해졌다.

언감생심 에이든과 결혼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이든이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 새삼 실감이 되었던 탓이었다.

레인은 자신과 만나기 이전의 에이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그가 바라던 정기를 바치고, 자신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평화로운 삶, 돈에 쪼들리지 않는 삶,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는 존재. 그런 것들을.

그렇다고 다짜고짜 에이든에게 가서,

“옛날얘기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라고 물어도 어쩐지 돌아오는 대답은,

“왜 그런 게 알고 싶을까? 응?”

하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감싼 뒤 위험스러울 만큼 치명적인 미소와 함께 입술을 지분거리는 모습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신은 또 그의 밑에 깔려 앙앙 울면서 잘못했다며 비는 결말이 될 터였다.

‘안 봐도 빤하지.’

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책장을 덮었다.

* * *

해가 완전히 저물고 완벽한 어둠이 깔린 저택 복도를, 촛불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레인의 걸음은 으레 그러하듯 에이든의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탁에 덩달아 에이든의 저녁 식사도 늦어진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소화 불량을 막고 체력은 온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제단에 갈 때 입었던― 척 보기에도 상스러워 보이는 의상과 달리 현재 레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새하얀 실크로 만들어진 기다란 드레스는 레인의 몸의 굴곡을 아름답게 돋보이게 만들었고, 몸에 하고 있는 장신구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손에 한 가느다란 팔찌와 걸을 때마다 슬며시 드러나는 발찌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 드레스 역시 아주 평범하지는 않았는데, 어깨가 모두 드러난 오프숄더 네크라인에 양 옆구리 부분이 크게 파여 있어 움직일 때마다 허리께에 새겨진 마녀의 각인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거기에 드레스의 양옆이 깊고 길게 트여 있어 걷기 위해 다리를 뻗으면 속옷을 입지 않은 골반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아무리 봐도 에이든의 취향이 분명한 의상이었다.

몇 시간이고 박혀 있던 탓에 눅진하게 풀어진 내벽을 타고 딜도가 주르륵 미끄러질 때마다 걸음을 멈추었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다시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기를 반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다 텅 빈 복도에는 아주 옅은 신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결처럼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레인의 발걸음이 에이든의 침실 앞에 닿았다.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아마 이 저택에 있는 어떤 곳보다도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방이기도 했다.

레인은 새까만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육중한 문 앞에 서서 노크를 두 번 했다.

역시나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문 너머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

저번 주랑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목소리인데 레인은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자신의 허리께에 새겨진 마녀의 표식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에이든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레인의 몸은 에이든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황금빛 문고리에 손을 뻗어 잡아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에이든은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히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레인이 방에 들어서자 와인을 마시려던 손을 잠시 멈춘 뒤 레인이 서 있는 문가에 가만 시선을 던졌다.

방 안은 불빛 한 점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와 달리 몇 개의 초가 방을 밝히고 있었다. 거기다 침대 맞은편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이 밝아서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에이든의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는 레인을 적나라한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별안간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레인은 뺨을 붉히며 조심스레 팔로 제 몸을 가렸다.

짧지만 강렬한 에이든의 시선이 잠시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침대 머리맡에 놓인 탁자 위에 내려 두었다.

좋은 원목을 사용하여 만든 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화병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은은한 달빛을 맞고 있었다.

순식간에 레인이 서 있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든은 새하얀 실크 드레스 아래로 내려오는 푸른빛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낮게 읊조렸다.

“잘 어울리네, 그 드레스.”

눈을 내리깐 채 나지막이 속삭이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위험하리만큼 치명적인 달콤함에 젖어 있었다.

레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불빛을 보고도 그곳을 향해 뛰어들어 가는 불나방처럼 두려움과 쾌락이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손에 쥐고 있던 촛대를 놓지 않도록 살며시 손끝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선물로 줄까? 졸업식 때 입으면 딱 좋겠는데.”

“네?”

저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던지는 짓궂은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인은 놀라서는 저도 모르게 퍼뜩 모로 비켜 있던 시선을 들어 에이든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에이든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진득하게 맞물렸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농밀한 압박감이 시선을 타고 전해져 왔다.

레인의 목덜미며 어깨와 팔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눈치챈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은 뒤, 허리를 낮추어 레인이 손에 들고 있던 촛대의 촛불을 후, 입김을 불어 꺼트렸다.

방 안을 밝히고 있던 빛 하나가 사라지자 레인의 얼굴에도, 에이든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레인이 손에 들고 있던 촛대에서 희뿌연 연기가 희미하게 공중에 아지랑이를 그리다 이내 사라졌다.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에이든은 레인의 촛대를 낚아채더니,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레인의 손목을 붙잡고서 침대로 향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에이든 위로 레인이 몸을 겹쳐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은 길었지만 양옆이 길게 트여 있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몸을 밀착시킬 수 있었다.

다만 안에 품고 있던 딜도가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에 허리를 잠시 비트는― 애교에 가까운 행위가 있었지만 그 또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 품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두터운 팔로 꽉 감싸 안은 에이든은 레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물었다.

“왜 그런 반응이지? 내가 준 드레스가 별론가?”

“아뇨, 주신 건 감사하지만, 졸업식에서 입기에는 조금…….”

“졸업식이 싫으면 연회라도 열까? 네가 좋아하는 요한도 그곳에 불러서.”

“으……. 갑자기 요한 얘기는 왜 꺼내시는, 흐읏!”

갑작스럽게 에이든의 입에서 튀어나온 요한이라는 단어에 놀라기도 잠시, 레인의 가는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깊게 파인 드레스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정확히 마녀의 표식이 새겨진 그 지점이었다.

붉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지워지지 않는 그 표식을 에이든이 거칠한 엄지로 꾹꾹 누르듯이 매만지는가 싶더니 이내 드레스가 찢어질 듯이 잡아당겨 내려 혀를 내어 핥아 올렸다.

이상야릇한 기분에 레인은 말하려던 것도 잊고 신음과 함께 숨을 들이켰다.

레인의 갈비뼈가 에이든의 혀 놀림을 따라 가쁘게 오르내렸다. 레인은 뒤늦게 에이든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 보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집요하게 마녀의 표식을 혀로 핥으며 애무했다.

“으응, 거기는 이제 그만…….”

아래가 움찔거리는 적나라한 느낌에 레인이 허리를 파르르 떨며 애원을 해도 에이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만을 이어 나갔다.

“요한이 좋은 사람이었다면서? 좋은 사람은 초대를 해야지. 안 그래?”

“흐으, 아…….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왜 아주 좋을 것 같은데? 좋은 사람이니까 요한도 이런 네 모습을 보면 아주 좋아할 거야. 아, 물론 그 새끼가 보는 앞에서 널 범할 거긴 하지만. 레인, 네가 선택한 건 나니까. 나도 널 선택했고.”

“아, 그것만은 제발……. 그것만은 안 돼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이 내뱉는 에이든의 짙은 소유욕 어린 목소리에, 레인은 정말로 그가 화려한 연회를 열어 그곳에 요한을 초대해 자신을 범할까 봐 겁을 먹고서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요한이 보는 앞에서 한없이 흐트러진 채 음란한 모습으로 에이든과 몸을 섞는 모습을 보이는 상상을 하니 아랫도리가 저릿해져 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런 모순된 레인의 감정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레인이 품고 있던 거대한 딜도가 주르륵 내벽을 타고 내려와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다리 사이로 툭 떨어졌다.

몇 시간을 레인의 내벽을 드나들었던 딜도는 애액으로 흠뻑 젖어 외롭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제야 레인의 허리께를 애무하던 에이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레인은 에이든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느다란 양손은 에이든이 입고 있는 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여전히 위보다는 아래가 솔직하네, 응? 언제쯤 위도 아래랑 같은 대답을 하게 될까, 레인.”

숨을 헐떡이는 레인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여서 속삭이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모멸감이 느껴질 만큼 잔인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어떻게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느낀 것도 사실이고, 구멍을 빠져나온 딜도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탓에 이도 저도 못하고서 다만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면 에이든은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서 한결 진지한 표정으로 레인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갑작스레 입술에 머문 온기에 놀라 레인이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에이든을 쳐다보면, 에이든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댔다.

“입술 깨무는 버릇도 고쳐 놔야 하려나.”

그러고는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레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섹스를 하는 듯 진득하게 혀를 얽어 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입술을 애무해 올 따름이었다. 어린 짐승을 어르듯 혀끝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핥아 오는 것이나 입술과 입술을 다정하게 마주하고서 움직여 오는 것하며, (다른 의미로) 발끝이 곱아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인이 입술을 깨무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온몸이 저릿해지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서 레인이 마침내 입을 서서히 벌리면, 잘했다고 칭찬하듯 가볍게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여린 점막을 혀끝으로 슬슬 자극해 주었다.

맞부딪힌 입술 사이로 점성이 거의 없는 맑은 타액 한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마침내 입술을 떼면 몽롱하게 풀린 황금빛 눈동자가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좀처럼 맥을 못 추는 모습에 에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레인의 입가를 타고 흐른 타액을 손끝으로 훔쳐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축 늘어져 있던 레인의 눈이 번쩍 뜨이며 이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사소한 변화가 재미있어서 에이든은 자연스레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는 입술 깨물 때마다 이렇게 해야겠다. 효과가 좋네.”

무어라 말도 못 하고서 발그레 얼굴만 붉힌 채 입만 벙긋벙긋 대는 레인을 향해 시원스레 웃어 보인 에이든은 그녀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린 뒤, 좀 더 앉기 편하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에이든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누웠고, 레인은 그에게 안겨 있는 건지, 그를 덮치는 건지 모를 자세로 몸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몸이 살짝 앞으로 쏠리면서 등 뒤로 늘어트린 레인의 머리칼이 에이든의 몸 위로 쏟아졌다.

그가 입고 있는 셔츠는 단추가 두어 개 풀어져 있어 그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을, 레인의 푸른 머리칼이 닿으며 간질였다.

레인이 앉아 있는 곳이 마침 그의 사타구니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아래에 뭉근하게 닿는 에이든의 것이 이미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를 고쳐 앉아도 아래가 은근히 신경 쓰이고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레인이 부단히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을 가만 지켜보던 에이든은 레인의 한쪽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레인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때는 이미 에이든의 너른 품에 안겨 있게 되었다.

“아.”

레인은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애써 자세를 고쳐가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에이든의 것이 완벽하게 닿아 버린 탓이었다.

레인의 머리 위로 에이든의 옅은 웃음이 쏟아져 내리는가 싶더니 도망치지 못하도록 레인의 허리와 등을 감싸 안으며 그가 말했다.

“본격적으로 식사하기 전에, 가볍게 애피타이저부터 먹어 볼까?”

“애, 애피타이저요?”

낯선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레인은 조금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바쁘게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굴렸다.

레인이 기억하는 한, 에이든은 지난 4년 동안 정기를 취하면서 단 한 번도 애피타이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침실이든 식탁이든 자신이 오면 능욕하고 벗겨 먹기에 바빴지, 이런 고급스런 용어를 구사하지는 않았다.

‘뭔가 달리 바라시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러나 에이든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아서 레인은 불안해졌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마계 같은 데에서 애피타이저라고 부르는― 먹잇감에게 주로 하는 새로운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하게 되면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에이든이 자신의 건강을 해쳐 가면서까지 위험한 플레이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 레인은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긴장감에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면, 에이든은 제법 상냥한 손길로 빳빳하게 굳은 레인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마녀가 되면 예전이랑 뭐가 달라지는지, 궁금하지 않아?”

오늘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마녀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모르는 척 훅 치고 들어오는 물음에 레인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다지 나쁜 짓을 한 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뜨끔한 것이며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를 만큼 창피해지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말을 망설이던 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 어……. 네. 그렇긴 한데,”

“한데?”

“저… 어떻게 아셨어요?”

“뭐를?”

모르는 척 되묻는 목소리는 순진했지만 그 이면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그득 섞여 있어 레인은 조금 초조해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뭘 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 입으로 꼭 들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그래서 레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제가 마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거요.”

“갑자기 내 서재로 들어와서는 마녀에 관한 책을 마구 빼 가기에 알았지.”

“아, 그렇구나.”

에이든의 대답에 레인은 빠르게 납득했다.

하긴 마녀에 관한 그 많은 책을 시내에 가서 사 왔을 리는 없었고, 저택 내에 책이 있는 곳이라면 빤했다. 서재 아니면 창고일 테지만, 창고를 뒤지는 것보다는 책등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서재를 쭉 훑는 것이 훨씬 빨랐다.

“그래서 수확은 좀 있었어?”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한 레인의 등허리를 두어 번 토닥인 에이든은 이내 허리를 타고 내려가 트여 있는 드레스 자락 아래에 있는 동그란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질문과 동시에 진해진 스킨십에 레인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고분고분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책이 너무 오래된 거라서 그런가, 어쩐지 잘 안 와닿았어요.”

“그렇지만 마녀랑 악마의 연애 얘기에는 즐거워 죽던데?”

“그, 그건 어떻게 아셨, 흐윽?”

레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질문을 가로막듯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길이 부어오른 레인의 음핵에 닿았다. 마치 만져 주길 기다린 것처럼 통통하게 부어오른 클리토리스에 에이든의 거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레인은 신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몸을 바르작거렸다.

“흐응! 아으, 제발 그만, 으응…….”

“악마와 마녀 사이에 사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줄 알아?”

“하으, 그만, 제발 그만, 아……. 안 돼, 흑!”

자신이 건네는 열락에 정신이 팔려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면서도 제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는 레인이 괘씸하여, 에이든은 더욱 거칠게 음핵을 비벼 대며 레인을 괴롭혔다.

그러자 텅 빈 구멍이 삽입을 재촉하듯 움직거리는가 싶더니 가볍게 절정에 간 건지 이내 왈칵 물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레인의 음부 바로 밑에 있던 에이든의 바지 앞섬이 애액으로 푹 젖어 들었다.

셔츠 자락을 손에 꽉 쥔 채 절정의 여운에 잠겨 바들바들 떠는 레인을, 에이든은 봐주지 않았다.

금방 가버린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어 내벽을 헤집기 시작했다.

순간 축 늘어져 있던 레인의 허리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쾌감에 곧추서는가 싶더니 언제 갔었냐는 듯 다시금 앙앙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레인에게 한 번 더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내 말에 똑바로 대답을 해야지. 아니면 지하실에 가서 다시 교육받고 싶어?”

“잘못, 했어요, 아흑!”

“자, 그럼 다시 똑바로 대답하자. 악마와 마녀의 사랑 얘기가 왜 그렇게 많은 줄 알아, 레인?”

“으읏, 모, 몰라요……. 흐읍, 모르, 겠어요.”

말을 안 들으면 지하실로 데려가겠다는 협박이 잘 먹혀 들어간 건지 처음에는 하염없이 신음을 흘리면서도 대답을 않던 레인이 이제는 제법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나 지하실에 가게 될까 지레 겁을 먹고서는 고개까지 젓는 레인의 얼굴은 반쯤 눈물로 젖어 있어 에이든의 가학심을 자극했다.

에이든은 자신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한 레인에게 보상으로 벌름대는 구멍에 손가락 하나 더 넣어 주었다. 그러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허리가 파드득 튀어 오르더니 이내 기쁜 듯이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아래로 손가락을 꽉꽉 물어 왔다.

손가락이 내부를 드나들 때마다 물이 찰박이는 듯한 음란한 마찰음이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마녀는 악마의 사랑을 받는 존재거든. 가끔 악마들 중에서 인간에 대해 애정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 영혼을 제 곁에 묶어 두고 싶어지지. 그때 그 인간을 마녀로 두는 거야. 다른 악마들이 낚아채지 못하도록,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거지.”

“으으, 하으…….”

“굳이 인간 세계의 것으로 비유하자면, ‘약혼’ 같은 건가. 그래서 유독 악마랑 마녀 사이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아. 그 애정이 단순한 애정을 넘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흐으? 야, 약혼이요? 대체 그게… 으읏, 하응! 그만, 갑자기 한꺼번에 넣으면, 히익!”

쾌락에 젖어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두 귀를 타고 똑똑히 들려오는 약혼이라는 단어에 놀라서 물어 오는 레인의 입을 막듯 에이든은 레인의 속살을 가르고 세 개째 손가락을 삽입하여 쑤시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이 들어갔을 때보다 묵직한 무게감에 레인의 아래는 그의 손가락을 기쁜 듯이 빨아들였다.

마찰음이 한층 더 격렬해지면서 레인의 허릿짓 또한 거칠어졌고, 눈빛 또한 점차 환락에 잠겨 들어가 몽롱해졌다. 에이든이 레인이 좋아하는 지점을 손끝으로 툭툭 찌르듯이 문지르면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서 허리며 허벅지며 바들바들 떨어 댔다.

온몸에 넘쳐흐르는 쾌감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레인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타액을, 에이든은 혀를 내어 핥아 올렸다.

고작 턱과 입술을 핥아 올린 것뿐인데도 그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지는 건지 에이든이 받치고 있는 레인의 가는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렇게 좋아? 하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여기에 딜도를 넣을 때도 좋아 죽긴 하던데.”

“아흑! 흐으…….”

그런 말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듯 레인은 울면서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 와중에도 레인의 허리는 에이든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귓가를 타고 들어오는 음담패설에 괴로운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몸은 음란하게 쾌감을 좇는 레인의 모습은 딱 에이든의 취향이었다.

게다가 손가락 세 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좀 더 큰 걸 달라며 조르는 음탕한 아래 또한.

자신의 사역마들을 모두 불러 모아도 여유로울 만큼 너른 침실이, 오로지 레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깊고 치명적인 정기의 향취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에이든이 물었다.

다 알면서도 묻는 기만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나한테 박히는 게 그렇게 좋았어?”

레인은 잠시 고민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레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헝클어진 새벽 하늘빛을 담은 머리칼이 레인의 고갯짓을 따라 앞으로 쓰러졌다.

솔직한 대답에 상이라도 주듯 에이든은 레인이 보고 싶어 했던 그 미소를 가식적으로 꾸며 보이며 레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리해 주었다.

귓바퀴에 닿는 낯익은 온기에 레인이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숨이 막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는, 그것이 진심 한 점 들어 있지 않은 거짓된 미소라 할지라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요한의 미소가 햇살처럼 맑고 투명한 느낌이라면, 에이든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달빛처럼 고혹적이고 신비로웠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레인이 홀린 듯이 에이든의 얼굴을 감상하는 사이, 불현듯 아래를 거칠게 쑤셔 대던 그의 손길이 멎었다.

어쩐지 아래가 허전해진 기분에 레인이 의아하여 에이든과 시선을 맞추면 좀 전까지만 해도 짓궂지만 욕망으로 일렁거리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레인은 기시감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 제게 보였던 것과 비슷한― 그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던 그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다른 남자를 생각한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잠깐, 요한의 미소를 떠올린 것뿐인데 어떻게 그것을 눈치챈 건지 알 수 없어 레인은 쾌감이 아닌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맞추고 있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도리어 그러한 행동이 다른 남자를 생각했다는 방증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면 에이든은 집요하게 레인과 시선을 맞춰 오면서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굴까. 나랑 같은 침대에 있으면서 누굴 생각한 거야?”

“아니, 저…….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불순한 생각이 아니라 그냥 그, 미소가 요한이랑,”

에이든의 오해를 풀어 주고자 레인은 황급하게 말까지 더듬어 가며 해명을 했지만, 에이든은 레인의 말을 미처 다 듣지도 않고 냉정하게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고는 오금이 다 저릴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것이었다.

“또 요한. 정말이지 조만간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해서 눈앞에서 범해야, 그 새끼 생각을 그만하려나.”

“…….”

“아니면 밤새도록 내 정액을 배 속에 부어서 네가 누구 것인지 알려 줘야, 그때 딴 놈 생각을 그만두려나.”

“…….”

“응? 레인? 네 주인이 묻는데 대답을 해야지.”

대답을 종용하며 레인의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다정했으나 내뱉는 목소리는 깊은 질투와 소유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려던 마음은 이미 싹 가신 지 오래였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레인은 지금 당장 에이든이 내민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선택의 요지는 비교적 간단했다.

두 개의 선택지 모두 레인에게 요한을 철저히 버리고 에이든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요한을 신경 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에이든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간에 요한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레인은 그다지 요한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고, 요한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 평가한 것도 그냥 성격이 특별히 모난 구석 없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을 두고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든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를 이토록 증오하는 이유를, 자신으로서는 아무 감정 없는 상대를 떠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각인을 통해 에이든이 자신을 영원히 버릴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레인은 에이든과의 관계를 될 수 있는 한 원만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그의 화도 풀고, 오해도 풀고 싶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적나라한 음담패설을 입에 담으며 자신을 희롱한다고 해도 애정이 담긴 것과 담기지 않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레인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입술을 주시하며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는 에이든과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을 향해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여기서 흐지부지 물러났다가는 정말로 큰일을 치를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에이든의 셔츠 자락을 힘껏 손에 쥐고는 입을 열었다.

“요한…에게는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방금 잠시 떠올린 것도 별생각이 없이 무의식중에 떠오른 것뿐이고요.”

그의 짙은 한쪽 눈썹이 심드렁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에 레인은 바짝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인 뒤 긴장해서 굳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원하시는 대로 해 주세요. 요한이 보는 앞에서 절 범하셔도 좋고, 배 속에 정액을 잔뜩 부어 주시며 제가 누구의 것인지 알려 주셔도 좋아요. 제 주인이시니까, 그러길 원하신다면 저는 괜찮아요.”

“…말은, 참 잘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저한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레인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침을 꼴딱꼴딱 삼키고서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손바닥으로는 레인의 뺨을, 손끝으로는 눈가를 어루만지던 에이든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

“네?”

“아니면 주인님도 좋고.”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커다란 두 눈을 멍청하게 깜박이다가 뒤이어 덧붙여지는 말에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눈치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 걸로 봐서는 어떻게 한고비는 넘긴 것 같았으나 좀 전까지 불같이 화내던 사람이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보이는 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고, 요한의 앞에서 범해지거나 정액이 가득 부어지며 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처분이었기에 약간의 망설임 끝에 허락받은 새로운 호칭을 입에 담았다.

“음… 에이든 님?”

“…….”

“주인님?”

“…왜 자꾸 끝을 올려?”

원하던 대로 불러도 가만히 누워 꼼짝도 않던 에이든이 퉁명스레 불만을 내뱉었다. 그러면 레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입에 잘 안 붙어서요. 갑자기 부르려니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그럼 입에 붙을 때까지 부르면 되겠네.”

에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순식간에 레인과 자리를 바꾸었다. 에이든의 품에 안기듯 앉아 있던 레인은 어느샌가 그의 아래에 깔려 등 뒤에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고, 얼굴 위로 에이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치 연약한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즐거운 기대감과 잔학한 가학심이 반반 섞인 눈동자가 레인의 전신을 훑었다. 에이든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뼈까지 발라 먹히는 기분에 저절로 레인의 몸이 떨렸다.

에이든은 각인이 새겨져 있는 레인의 허리께를 손으로 지분거리며 입고 있는 드레스를 거칠게 손으로 찢어 벗겼다.

에이든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드레스가 넝마 조각이 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나체가 된 것이 부끄러워서 가슴을 팔로 가리려고 했으나 에이든의 매서운 시선에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마녀가 되면 예전이랑 뭐가 달라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네.”

“달라지는 건 없어. 그 책에 적힌 건 모두 옛날이야기고, 넌 그저 나만 생각하며, 나만 바라보며, 영원히 내게 정기를 바치며 살면 돼.”

“…….”

“오늘 밤은 호칭을 바꾸는 연습부터 해 볼까.”

그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는 동시에 에이든이 레인을 덮쳤다.

“에이든 님, 에이든 님, 아흑, 에이, 든 니임, 흑, 아흐윽! 안 돼,”

“자, 똑바로 불러야지. 이런 식이면 아침 식사 때까지 300번 못 채워.”

침대 시트를 부여잡으며 연신 에이든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는 레인을 향해, 에이든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냉정하게 재촉했다.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빠듯하게 가르고 들어와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치받을 때마다 레인은 몇 번째 부르는 건지 모를 에이든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고통스런 쾌감에 가느다란 몸을 연신 떨어 댔다.

에이든의 이름을 부르는 레인의 목소리는 이내 찾아온 절정의 여운에 젖어, 흩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계속되는 쾌감에 괴로운 듯 레인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침대 헤드 쪽으로 도망치듯 기어갔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서 고통스런 쾌락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지만 에이든이 그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는 도망가려는 레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끌어내리고서 다시금 격렬한 허릿짓을 이어 나갔다. 퍽퍽 속살을 거칠게 쳐올리는 움직임에 울먹임에 가까운 교성이 레인의 입술 사이로 힘없이 새어 나왔다.

“흐으……. 에이든 님, 에이, 든 님. 아, 흑, 에, 에이든 니임. 제발…….”

“말했잖아. 300번 다 채우기 전에는 안 멈출 거라고.”

“잘못 했어요. 더 이상은 못 하겠, 히익!”

바깥으로 잠시 빠져나갔던 그의 성기가 순식간에 내부를 꿰뚫고 들어오는 순간, 레인은 애원하다 말고 허리를 휘며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절정에 다시금 달했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도 파정하여 자궁에 정액이 쏟아졌다. 이 또한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이었다.

에이든이 잠시 쉴 겸 해서 레인에게 박고 있던 성기를 빼내면 잔뜩 벌어져 있는 레인의 입구가 경련하듯 바들바들거리는가 싶더니 미처 담기지 못한― 정액과 애액이 섞인 진득한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구멍 사이로 빠끔히 보이는 새하얀 정액과 붉은 속살과의 선명한 대비가 에이든의 성욕을 자극했다.

절정의 여운에 푹 잠겨서는 허리만을 겨우 들어 올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레인의 질구에, 에이든은 다시금 빳빳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며 귀두 끝을 갖다 대었다.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아래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면, 그는 레인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자비하게 자신의 것을 박아 넣고서 허리를 놀렸다.

순식간에 에이든의 커다란 성기에 꿰뚫린 레인은 허벅지를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가벼운 절정에 달해 실금이라도 한 것 같은 묽은 액체를 아래로 뱉어 냈다. 후드득,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흐으……. 흐윽, 더 이상은… 못해요……. 에이든 님, 읏!”

“앞으로 165번만 더 부르면 되니까, 조금만 힘내자.”

“더는… 못해요.”

“동틀 때까지 계속하면 나야 좋지. 걱정하지 마. 기절하지 않게 마력으로 체력 관리는 해 주고 있으니까.”

“흐윽, 싫어, 안 돼! 아흑, 흡, 으응……!”

대화를 하는 동안 잠시 주춤했던 그의 허릿짓이 다시금 격렬해지기 시작하면서 레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어도, 애원을 해도 도저히 봐줄 것 같지 않은 그의 단호함에 레인은 이 기나긴 정사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힘없이 풀린 혀로 그의 이름을 연신 외치며 제 안으로 쏟아지는 정액을 받아 낼 따름이었다.

결국 레인은 ‘에이든 님’으로 300번이라는 횟수를 꼭 채우고 나서야 에이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번째인지조차 셀 수 없는 절정 속에서 허리를 들 힘조차 없이 에이든이 저를 받치는 손길에 의지하고 있던 레인은, 그가 잔뜩 부어오른 구멍에서 성기를 빼내자마자 그대로 허리가 무너져 내렸다.

정신은 몽롱했고, 시간 감각도 사라진 지 오래여서 근육에 힘이 모두 빠진 맥없는 개구리와 같은 자세로 침대 위에 엎어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이든의 성기가 빠져나갔음에도 레인의 구멍은 오랜 정사 탓인지 금세 다물리지는 않았다. 빠끔히 뚫린 구멍 사이로 에이든의 정액이 가득히 차오른 것이 보였다. 새벽 동이 다 트고 점심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해 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에이든이 흩뿌린 희멀건 액체가 흘렀다. 아래를 타고 흐르는 감각에 레인의 입구가 반사적으로, 그러나 느리게 오물거렸다.

에이든은 사타구니 사이를 흐르는 정액을 검지로 훔친 뒤 자연스럽게 레인의 입구에 다시 집어넣었다. 으으, 하는 레인의 희미한 신음과 함께 허리가 조금 움찔거렸지만 다만 그뿐이었다.

“한 방울도 빠짐없이 삼켜야지.”

“으으음……. 싫…어…….”

에이든이 가볍게 타일렀지만 레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정신의 퓨즈가 나간 듯한― 밤새도록 수없이 제게 빌었던 애원뿐이었다. 그마저도 제정신으로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제 아래에 무언가가 삽입되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무의식중에 나온 대답에 더 가까웠다.

아래 구멍이 꼭 다물려야 정액이 흐르지 않을 텐데, 레인의 상태로 봐서는 제 말을 이해하기도 어려워 보였고, 또 마법과 물약을 통해 억지로 끌어낸 체력이 그야말로 한계에 거의 간당간당했다.

하는 수 없이 에이든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딜도를 가볍게 세척한 뒤 뻐끔이 벌어진 레인의 아래에 대고 단숨에 쑤셔 넣었다.

“흐윽!”

순간 뇌리에 번개가 치듯이 꽂히는 쾌락에 레인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죽은 듯이 벌어진 채로 멈춰 있던 질구가 확 조여 드는 것이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레인의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남은 체력이 모두 소진된 듯했다.

다행히도 레인의 구멍은 딜도를 삼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잠든 동안에도 꽉 물고 있었다. 혹시 몰라 가볍게 옆으로 흔들어 보았지만 빠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에이든은 그대로 엎어진 채 잠든 레인의 몸을 뒤집어 똑바로 뉘어 주었다. 얼마나 울어 댔는지 기다란 하늘빛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붉게 짓무른 눈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역시 침대 위에서 우는 게 가장 예쁘네.”

버려질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것보다.

푸르고 붉은 대비는 에이든의 마음을 다시금 동하게 했지만 이 이상 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기에 아쉬운 마음을 잔뜩 담아 손끝으로 눈가를 지분거릴 따름이었다.

에이든은 뺨에 달라붙은 레인의 푸른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해 주고, 부스스해진 머리를 차분히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새하얀 나신에 새겨진 마녀의 표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영원히 자신의 소유임을 알리는 표식이 레인에게 새겨진 것이 무척이나 흡족하여, 에이든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걸로 멍청한 딴 놈에게 빼앗길 일은 없겠지.”

에이든이 레인에게 각인을 새긴 것은 자신에게 실망하여 먹이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자신이 버려질까 하는 레인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마녀의 각인은 자신을 악마에게 오롯이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이었기에.

악마에게 바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거나, 진심으로 자신의 소유권이 악마의 손에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아무리 제사를 지낸다고 한들 각인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녀가 된다는 것은 약혼을 하는 일에 가까웠다. 마녀도 악마에게 마음이 있어야 했고, 악마 또한 마녀를 어느 정도 마음에 두어야 성사되었다. 하찮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마력과 피를 소모해 가며 제 것으로 만드는 멍청한 악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동안 에이든이 레인에게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진즉에 했을 법도 했지만, 애초에 레인이 제게 고분고분하기도 했고,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레인이 제게 실망했냐고 물으며 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며 결심이 섰다.

저 먹이를,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어 두자고.

겸사겸사 요한에 대한, 자신에 대한 레인의 진심도 확인할 겸.

그리고 결과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레인은 영원히 제 것이 되었고, 레인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에이든은 레인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얇은 커튼을 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물기가 어린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짓무른 눈가에 마력을 불어넣은 뒤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 * *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쇠사슬에 양팔이 묶인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육체에 가시가 달린 채찍이 박혔다. 짜아악, 하는 섬찟한 타격음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수차례 매서운 채찍질이 가해졌으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소리라도 내는 순간, 그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몸이 허공에 매달려 있어 등짝에 내리꽂히는 채찍에서 오는 고통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이어지는 매질에 살갗이 터져 피가 몸의 굴곡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 발끝에 고였다가 이내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깨끗하던 등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살갗은 찢기다 못해 살이 패어 피가 밴 속살이 드러났다.

소파에 앉아 사역마들이 그녀의 등에 쉼 없이 채찍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든은 손을 들어 그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뒤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소파 옆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 와인 잔이 놓이는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역마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방 안의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는 소리였다.

“그래……. 벌을 받는 자세가 나쁘지 않으니 용서는 해 주지.”

“…….”

“먹이와 개인적인 대화를 시도해 보라는 조언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각인을 새길 기회도 생겼고.”

“…감사합니다.”

고통 어린 비명을 삼키느라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무르핀이 대답했다.

그 짧은 대화 사이에도 공중에 떠 있는 무르핀의 발아래로 피가 웅덩이처럼 고였다.

에이든은 뭔가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다시금 사역마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좀 전까지 하던 것을 계속 이어 하라는 뜻이었다.

피를 흘리는 무르핀의 등에 재차 채찍질이 가해졌다.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채찍질에 못 견뎌 철그럭, 양팔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비명 한 점 없는 기이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방 안의 분위기를 살얼음판을 걷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흡!”

억지로 비명을 눌러 참던 무르핀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순간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의 한쪽 눈썹이 의아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무르핀은 뒤늦게 자신이 신음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에서부터 엄습해 오는 공포에 몸을 굳혔다.

에이든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아 두었던 와인 잔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허공에 매달린 무르핀에게 다가가 피를 철철 흘리며 속살이 헤집어진 그녀의 등에다 와인을 뿌렸다.

불에다가 달구어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무르핀을 덮쳐 왔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이 흐를 뻔했으나 입술을 깨물어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등에 뿌려진 와인이 피와 함께 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톡톡, 바닥을 두드리는―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사역마들은 일제히 시선을 바닥에 처박고서 조용히 숨 쉬었다. 무르핀에게 향한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튈까 봐.

“벌을 받는데 누가 이렇게 즐겁게 소리를 내지?”

“…죄송합니다.”

“그래……. 이해해. 그렇게 달콤하고 치명적인 정기를 가졌는데 제아무리 악마보다 둔감하다고 해도 그 맛을 모를 리가 없지. 안 그래?”

“…….”

“게다가 눈앞에 대고 다리를 벌리며 음란하게 자위를 해 대는데,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지. 이해해.”

“…….”

“다 이해가 가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아량 넓고 이해심 깊은 주인을 연기하던 에이든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일변한 것은 그때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한겨울에 내리꽂히는 서릿발보다도 차가운 눈빛에 무르핀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역마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에이든은 무르핀의 몸을 뒤집어 턱을 부여잡고서 물었다.

“응?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무르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에이든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레인을 범하지 않은 건, 그래, 칭찬해 주지. 머리가 돌아 버릴 만큼 매혹적인 정기가 눈앞에 있는데, 어지간한 인내력으로는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명령, 허락 없이 내 먹잇감을 두고 발정하면 그때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

“알아들었어?”

“네. 감사합니다.”

돌아온 대답에 사납게 번뜩이던 새빨간 눈동자가 무르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은 에이든은 무르핀에게 채찍질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사역마는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가시 박힌 채찍이 와인으로 젖은 무르핀의 등에 연신 내리꽂혔다.

소리 없는 비명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악마의 먹잇감은 사랑스럽다』 2권에서 계속

그 악마의 먹잇감은 사랑스럽다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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