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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백 (3/12)

2. 고백

레인은 식탁에서 내려와 에이든의 품 안에 안기듯 두터운 허벅지에 자리를 잡고 마주 보고 앉았다. 자신의 몸무게 탓에 무겁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에이든의 허벅지는 생각보다 안정감 있게 레인을 받쳐 주었다.

레인은 상체를 먼저 하고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게 좋겠다 판단하여 일단 에이든의 가슴팍에 안겼지만 막상 두툼하게 갈라진― 그것도 제 안에 품고 있던 향유로 번들거리는 가슴을 핥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이 모든 것이 창피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여태 온갖 변태 같은 짓을 다 해 놓고서 고작 에이든의 가슴을 핥는 것에 이리도 부끄러워지는 까닭을, 레인은 알 수 없었다.

“향유가 굳으면 깨끗하게 하기 힘들어질 텐데,”

“…….”

“아니면 하루 종일 내 몸만 핥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뺨에 붙을 머리칼을 다정하게 떼어 주며 내뱉는― 저의가 분명히 보이는 말들에 레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하겠노라고, 당장 하겠다고 자신을 설득시키는 건지 에이든에게 대답하는 건지 모를 중얼거림 끝에 레인은 에이든의 벌어진 셔츠 자락을 양손에 쥔 뒤 서서히 가슴팍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자신이 품고 있던 향유에서는 장미 향이 났다. 정원 한가운데라 생화에서 나는 향인지 향유에서 나는 향인지 몰랐는데 이렇게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에이든에게서 나는 햇살을 가득히 머금은 바닷바람 같은 체취에 장미 향이 섞이니 기분이 묘했다. 그에게 봉사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이 에이든을 덮치는 듯한 자세도 어딘지 모르게 레인의 성욕을 자극했다.

레인의 붉은 혀가 느릿하게 에이든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혀끝에 부드러운 장미 향이 맴돌았다. 향유 탓인지 에이든의 피부가 무척이나 매끄러워서 혀가 피부 위를 미끄러지듯 기었다.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열심히 향유를 핥고 있는 레인의 정수리를 에이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가느다란 허리를 간질이는 굽이치는 푸른빛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넘긴 뒤 훤히 드러난 허리와 둔부를 손바닥으로 넓게 쓸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닿은 레인의 가는 허벅지가 잘게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레인의 허리를 쓸던 손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 지난번 진하게 남겨 두었던 손자국의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새하얀 엉덩이를 주물렀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응, 으…읏.”

“네가 얼른 깨끗하게 해 줘야, 식사도 하고, 오붓하게 얘기도 나누고 하지, 레인.”

노골적인 손길과는 달리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레인을 다정하고도 바지런히 채근했다. 한순간이라도 혀가 멈추지 않도록.

레인의 입술이 가슴팍에서부터 점차 아래로 내려갈 즈음, 불현듯 에이든의 손가락이 레인의 속살을 파고들어 왔다.

연이은 매질로 퉁퉁 부어오른 음부 사이를 무자비하게 가로지르는 손길에 레인은 순간 머리끝까지 저릿해지는 고통에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악! 아파요……. 조금만 살살……. 흐윽.”

“쉬이, 괜찮아. 어서 하던 거 해야지.”

레인이 아프다며 칭얼거리면 에이든은 짐짓 상냥한 말투를 꾸며내어 레인을 달래면서도 손으로는 구멍을 희롱하며 내부를 넓혔다.

레인은 입으로는 살살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아래로는 기쁜 듯이 에이든의 손가락을 잘도 받아들이며 조여 왔다. 얼마 쑤셔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에이든의 손가락은 이미 레인의 애액으로 흥건했다.

에이든은 마치 레인 보고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위나 아래나 내 손가락을 못 먹어서 난리네.”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레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기의 향이 깊고 진해졌다.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면서 아래가 뻐근해지는 정기였다.

엉덩이께에 닿는 바지춤이 더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는지 레인의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에이든은 몰래 사역마를 시켜 건네받은 자그마한 로터를 차례로 음부 안으로 집어넣었다. 향유 덕분인지 손가락으로 내부를 진득하게 풀어 둔 덕분인지 로터는 레인의 내부로 빨려 들어가듯 수월하게 들어갔다.

로터의 개수가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레인의 혀 놀림은 점차 둔해졌고, 가슴팍에 고개를 부비며 거친 숨결을 토해내는 횟수가 많아졌다.

로터가 다섯 개째 삼키자 레인은 혀를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채 에이든에게 안겨 반쯤 울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부터 우웅, 하고 낮게 울려 퍼지는 진동이 내부를 끈질기게 자극해 도저히 혀를 움직일 정신이 없었다.

“아, 흐으, 이거, 이거……. 흡, 빼 주세요.”

레인이 로터의 자극을 애써 견디며 눈물로 흠뻑 젖은 눈동자로 에이든을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에이든의 젖은 셔츠 자락을 손으로 꼭 말아 쥔 채였다.

레인의 손끝에서 구겨지는 셔츠 자락과, 자신의 허벅지에 편히 기대어 앉던 엉덩이가 흥분에 겨워 들썩이는 모습과, 로터의 낮은 진동에 섞여 들어가는 레인의 울음소리를, 에이든은 흡족하게 감상했다.

하지만 자신을 몸으로, 그 얼굴로 기쁘게 했다고 해서 레인의 바람대로 로터를 빼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요한인지 하는 인간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은 것에 대한 분노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괘씸한 마음은 남아 있어서 마지막까지 기분이 풀릴 때까지 레인에게 심술을 부릴 요량이었다.

‘뭐, 괴로워서 우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그래서 에이든은 레인의 안에 삽입한 로터를 빼내는 대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럽게 질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부를 휘젓기 시작하자 레인의 허리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곧추섰다. 그러고는 에이든의 손가락이 레인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에 에이든은 나머지 한 손으로 레인의 허리를 받쳐 들었다. 레인은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톱이라도 세워 상처를 낼까 봐 손끝으로 가만히 누르고만 있는 것이 썩 귀여웠다.

“흐읏! 찢어져요……. 흐응! 찢, 어져…….”

“향유 하나 제대로 못 담는 곳인데, 이 정도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흐윽, 잘못, 했어요……. 제가, 아흑, 흐으, 잘, 잘할게요.”

“그럼 하던 거 마저 하자, 레인.”

“뭐… 뭐요?”

“깨끗하게 해 준다고 했잖아.”

에이든이 울상을 짓고 있는 레인을 향해 야살스레 웃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미소여서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핏기가 가셨다.

레인의 내부에는 로터 다섯 개가 진동하고 있었다. 진동이 낮게 설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개수가 개수이다 보니 서로 진동이 맞물리면서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레인의 성감대를 은은하게 자극해 왔다.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안을 휘젓는 순간, 로터들이 움직이면서 내벽에 진동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레인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에이든의 몸을 핥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슴팍과 그 아래로 이어진 배는 대부분 다 핥아 향유의 반들반들한 자국은 거의 없었고, 남아 있는 건 에이든의 아랫도리뿐이었다.

그러니까 무식하게 커서 항상 제 몸을 드나들었음에도 이게 진짜로 사람 몸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인지 의심이 되는 물건을 혀로 핥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레인의 눈빛에서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에이든은 레인의 등을 토닥이며 그 세 치 혀로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레인. 하던 대로만 잘하면 아침 식사는 박지 않고 끝내 줄게. 물론 안에 있는 로터들도 곧장 빼 줄 거고.”

“…….”

“조금만 참고 하자. 나랑 계약 했을 때 말 잘 듣기로 했잖아, 레인. 응?”

언제나 강압적으로 굴면서 자신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정기만을 취하던 그가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나올 때마다 레인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말투가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꼭 쥐여 주며 달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라 (레인은 어엿한 성인 여자였다) 아이를 어르는 말투를 들을 만한 나이는 아닌데 싶다가도, 그 에이든이 평소와는 달리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게 부탁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으로는 고개를 저어야 한다고, 못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몸은 레인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레인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오늘 간신히 평소와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온 에이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민 끝에 로터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의자 아래로 내려갔다.

새까만 정장용 바지에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가 검게 젖어 있었다. 레인은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천을 혀끝으로 천천히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손으로는 바지 버클을 풀었다.

입고 있는 속옷을 끄르자 자신의 손목만 한 크기의 성기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굵은 기둥에는 핏줄이 돋아나 있어 손을 뻗어 감싸면 얕은 맥박이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양손으로 성기를 조심스레 그러쥔 레인은 이미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입 안으로 삼켰다. 머리 위로 감탄에 가까운 나지막한 신음이 흘렀다. 에이든의 것이었다.

“…하아. 잘하네, 레인.”

그는 퍽 자상한 목소리로 레인을 칭찬하며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레인의 푸른 빛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스며드는 옅은 신음이 레인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에 레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입에는 꾸역꾸역 집어삼켰음에도 아직 반이나 남아 있는― 그의 성기를 문 채였다.

다행히도 기분이 많이 풀린 건지, 좀 전에 정원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사납게 날뛰던 눈빛이 나른한 흥분 속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도 약간의 애정이 느껴져 레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기가 아직 질린 건 아니었나 봐.’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이 확 풀리면서 에이든의 성기를 애무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입에 닿지 않는 뿌리 근처에서부터 혀를 내어 기둥을 타고 쭉 훑어 내린 뒤 첨단을 입에 물고 빨았다. 기둥을 붙잡고 있는 손은 입 안의 움직임에 맞춰 위아래로 부지런히 쓸어내려 성감을 자극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한 레인의 혀 놀림에 에이든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자신과 수없이 몸을 섞어 오면서 다양한 변태적 플레이는 곧잘 수긍하며 따라오면서도 펠라티오만큼은 교육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레인의 입 안이 워낙에 좁은 탓도 있었고, 자신의 사이즈가 너무 큰 탓도 있어 여러 차례 시도를 해 봤지만 영 교육의 효과가 적었다. 본인도 딱히 즐거워하는 기색도 없고 시키나 마나 정기의 질은 거의 그대로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만둔 이후로는 가끔 벌을 주듯이 시키는 것 외에는 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혀도 쓰고 손도 쓰고 하는 레인의 모습을 보니 오랜만이라 그런가 평소보다도 흥분이 빠르게 차올랐다.

“후우, 그래, 옳지.”

“우읍, 흐응…….”

에이든의 칭찬에 레인은 곧장 목구멍을 열어 에이든의 성기를 더욱 깊숙이 받아들였다. 귀두 끝을 조여 오는 목구멍이 자극적이었다.

이르게 찾아온 사정감에 에이든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레인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쥐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컥, 커흑, 하는 레인의 거친 신음이 들려왔다.

생리적인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에이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지만 단단한 허벅지는 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릿짓만 거칠어질 따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든이 레인의 입 안에 사정했다.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정액을, 레인은 말없이 삼켰다. 목구멍을 찌르는 성기 탓에 헛구역질을 하느라 눈가는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 자국이 선명했고, 입 주변은 타액과 미처 넘기지 못한 정액이 흘러 흥건했다.

고통스런 와중에도 흥분했는지 아래에 삽입해 두었던 로터 두어 개가 애액으로 푹 젖은 채 푹신한 정원 잔디밭 위에서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레인의 입에서 성기를 빼내어 바지춤을 추스른 에이든은 눈물로 젖은 레인의 눈가를 가벼이 어루만졌다.

“잘했어, 레인. 상으로 로터를 빼 줄게.”

“고맙, 콜록, 고맙습니다.”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 레인을, 에이든은 양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켰다. 마치 좌판의 사과 상자처럼 번쩍 들어 올려진 레인은 그대로 에이든의 무릎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침을 삼킬 때마다 비릿한 정액의 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슬쩍 올려다본 에이든의 표정에 깊은 만족감이 어린 것을 확인했으니까, 자신만 조심해서 잘 참아 넘기면 되었다.

헛구역질은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곧 가라앉았다.

그사이 에이든은 레인의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로터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사위가 조용해지면서 얌전히 제 품 안에서 숨 쉬는 레인의 거친 호흡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뜨겁게 밀려드는 호흡이 일정한 간격으로 에이든의 가슴팍을 적실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충족감이 차올랐다.

무방비한 상태로,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온전히 자신에게 몸을 의지해 오는 레인이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감각이 새삼스레 그의 소유욕을 오롯이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러운 레인.

에이든은 발갛게 부어오른 둔덕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듯이 집어넣어 안에 삽입한 로터를 빼냈다. 로터가 하나씩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레인의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흐르며 허벅지를 가늘게 떨어 댔다.

평소라면 해 주지 않을 테지만, 에이든은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레인을 달래듯 아랫배 쪽에 짧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로터가 내부에서 빠져나갈 때보다 에이든의 입술이 닿을 때, 레인의 몸은 화들짝 놀란 것처럼 튀어 올랐다.

그 반응이 유독 재미있어 계속하다 입술이 아니라 혀를 내어 핥아 올리면 하응, 하는 비음 섞인 신음이 에이든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어쩐지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의 신음이었는데, 간지러운 건지 좋아하는 건지 모를― 가슴 밑바닥을 깃털로 살금살금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에이든이 레인을 쳐다보자 레인은 자신이 내뱉은 신음을 의식하고는 부끄러웠는지 양손에 얼굴을 푹 묻은 채 표정을 숨겼다.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제스처였다.

레인에게 삽입했던 로터는 이미 모두 빼내어 식탁 위에 얹어 두었고, 몸의 떨림도 멎었다. 그럼에도 정원에는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레인은 꼼짝도 않고 한참을 에이든의 품에 안겨 있다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인 건 레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인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어떤 거?”

모르는 척 되묻는 에이든의 목소리를 가만 듣고 있던 레인이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했다.

“그… 신음이요.”

“어떤 신음?”

“있잖아요, 그 배에 하셨을 때…….”

“뭐? 이거?”

하면서 물어보면서 확인하는 척 에이든이 다시금 레인의 아랫배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 같은 신음도 함께였다.

뭍에 나온 물고기보다도 생생한 반응에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즐거운 듯 내뱉은 유쾌한 웃음소리에 레인은 창피함에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서 가만히 에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양미간을 찌푸리고서 비릿한 미소만 짓는 것을 봐와서 그런가, 아니면 그저 더 이상의 형용이 필요 없을 만큼 제 취향의 외모라 그런가.

양 입꼬리를 보기 좋게 끌어당겨 균형 잡힌 호선을 그리는 입매와, 짙은 쌍꺼풀이 진 눈매가 휘어지면서 주름진 미간이 화악 펴지는 것이 황홀할 만큼 해맑아 보여서, 레인은 홀린 듯이 에이든의 뺨에 손을 얹었다.

악마여도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맑게 웃을 수 있으시구나.

그 사실을 그와 계약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본 그의 행복한 미소에 대한 감탄이, 에이든을 바라보는 레인의 시선에 어려 있었다.

“왜? 키스라도 하고 싶어?”

어느샌가 에이든의 입가에는 주인을 향해 달려오는 강아지처럼 해맑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 대신 언제나 저에게 보이던 미소― 그러니까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끌어당겨 짓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금 정염이 이는 듯 어둡게 침잠해 들어가는 에이든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레인은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하고 싶은데 애써 부인할 때나 쓰는 말인데.”

마치 주문을 외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게 느껴져 레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에이든의 얼굴에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아침 햇살처럼 눈부신 황금빛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허공을 방황했다.

레인은 뒤늦게 에이든의 뺨에 얹은 손을 황급히 떼 보려 했으나 에이든이 손을 붙잡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오히려 만지고 싶으면 마음껏 만져도 좋다는 듯 제 뺨에 붙은 레인의 자그마한 손 위에 커다란 손을 덮어 감쌌다. 그러고는 점차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인이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이미 에이든의 품에 안겨 있는 데다가 한쪽 팔이 등을 받치고 있어 물러서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치 막다른 골목길에 몰린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가 된 듯한 기분에 레인은 울상을 지었다.

정말로 괜찮아서 그런 건데.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도 안 했는데.

말을 해도 좀처럼 믿어 주지 않는 에이든의 반응에 레인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에이든은 울상을 짓는 레인의 표정에 무척이나 즐거웠다. 물론 그도 레인이 정말로 키스를 하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레인은 계약을 한 이후로 먹이로서 자신의 위치를 잊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은 아주 초반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도, 이런 것이 싫다거나 저런 것이 너무 힘들다거나 하는 투정이나 불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니 레인이 자신의 뺨에 손을 얹은 것은 키스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에 가까울 터였다.

그럼에도 이렇듯 행동하는 것은 그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레인의 반응이, 울상을 짓는 레인의 표정이.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잠시 가지고 놀듯 에이든은 혀를 내어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얇은 입술을 가로지르는 붉은 혀가 심장이 잠시 멎을 듯이 색스러웠다.

시원스레 쭉 뻗은 코끝이 레인의 뺨에 닿았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레인의 일자로 꾹 닫힌 입술에 닿았다. 입을 벌리고 있으면 불시에 혀가 밀고 들어올까 봐 고집스레 다문 입술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다고 해서 혀를 못 섞는 건 아닌데.

처음에 몸을 열었을 때는 제외하고는 키스나 애무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하는 것들을 거의 안 해 주어서 그런가. 이런 면에 있어서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레인이, 에이든은 조금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복욕을 자극하기도 했다.

아직 자신이 더 손을 댈 만한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은 데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사실 키스나 가벼운 애무는 정기를 취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 뿐, 크게 메리트가 없었다. 다른 악마들도 정기를 취하면 삽입에나 관심이 있었지 부드러운 애무 같은 것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든이 레인과 계약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런 악마로서 낯간지러운 짓을 해 준 것은 오로지 그녀가 섹스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보기 안 좋았기 때문이었고,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갔다가 불쾌한 감정이 편견이 되어 하기 싫다면서 내내 징징댔다가는 그거 교육하는 데에만도 시간을 한참 잡아먹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몸을 섞은 지 꽤 되었고, 지난 평일 동안 괘씸하게도 요한이라는 멍청한 인간과 놀아나기는 했지만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기에 키스 정도쯤은 해 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돌아오는 반응이 제법 쏠쏠하기도 했고.

에이든의 입술은 어느새 레인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들숨과 날숨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까지 다가가 있었다. 입술을 조금만 더 움직이면 스치듯이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레인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레인.”

“…….”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을 해야지.”

에이든의 재촉에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망설이듯 오물거리는가 싶더니 지나가는 개미한테 말을 걸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키스가 하고 싶었어?”

“아…니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

“지난번에도 미래니 뭐니 하더니 정말로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건가? 응?”

그렇게 속삭인 에이든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사역마를 시켜 식사를 하느라 한참 동안 방치되어 있던 식탁 위의 꽃다발을 가져오게 했다.

자신의 코앞에까지 닿아 있던 기척이 뒤로 물러서더니 느닷없이 생생해진 꽃향기에 조심스레 눈을 뜨면 에이든은 레인의 손을 덮고 있던 손으로 꽃다발을 쥔 채 느긋하게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에이든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피면서 몸을 섞느라 잊고 있었던 바로 그 꽃다발이었다.

요한을 생각하다, 에이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꽃이었다. 하지만 이미 에이든의 웃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있을 것도 다 있는 악마에게 꽃을 선물하려 했던 조금 전의 자신의 생각이 공연히 창피하기도 해서 레인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 모습을 얼이 빠져서는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꽃다발 속에 코를 파묻고 있던 에이든이 가만히 시선을 들어 물었다.

“이 꽃, 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그냥… 샀어요.”

레인은 대답을 망설이다 대충 그렇게 얼버무렸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샀다고 말하기가 창피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면 에이든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로 되물었다.

“다른 남자한테서 받은 게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의심하는 에이든에 레인의 눈이 놀란 듯 토끼인 양 동그래지는가 싶더니 당황하여 손사래까지 치며 대답했다.

“정말로 제가 직접 샀어요. 역 앞에서 팔길래 돈 주고 사 왔는데…….”

그러나 에이든은 레인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은 채 제 할 말만을 이어 나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음담패설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걸리적거리는 꽃다발은 식탁 위에 멀찌감치 치워 둔 지 오래였다.

“그 남자는 알고 있어? 향유 하나도 제대로 담지 못할 만큼 쑤셔져 박혔다는 걸.”

“…그런 거, 흑, 정말 없어요.”

“집에서는 늘 커다란 딜도를 박은 채 생활하는 것도 알고 있으려나, 응?”

“제발 믿어 주세요. 진짜……. 흐으, 아닌데…….”

“조금 섭섭하네. 이제 좀 머리가 컸다고 솔직하게 대답도 안 해 주고, 다른 남자에게 홀랑 빠져서는 받은 꽃다발도 눈치 없이, 이렇게 자랑하듯 가져오고.”

“아니,”

“나 질투 나게.”

“…….”

“…응?”

레인의 젖어 있는 음부를 희롱하듯 손가락으로 쑤시며 끊임없이 귓가에 대고 제 할 말만을 쏟아붓던 에이든의 입이, 고작 레인의 침묵 한 번에 순식간에 멎었다.

어딘가 이질적으로 변한 듯한 분위기에 에이든은 하던 것을 멈추고, 레인이 민감하게 느끼는 목덜미 주변과 쇄골을 차례로 오가던 그의 얼굴이 레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레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처음에는 의아함만이 가득했던 시선에 점차 깊은 당혹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레인이 울고 있었다.

에이든은 레인이 울 때면 소리 없이 눈물만을 흘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산 없이 서 있는 사람처럼 뺨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이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명치께에 고여 스며들었다.

“너…….”

에이든은 뭔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듯 눈가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는데, 커다란 두 눈망울은 왜 자신을 부르다 마느냐고 묻듯 순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에이든은 레인이 역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그 꽃다발을 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택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레인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당연히 가져온 꽃다발이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란 변덕스러운 존재였으니 아주 가끔 기분 전환 삼아 평소에 하던 것과 다른 짓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꽃을 산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라는 것이 쉬이 짐작이 갔다.

그럼에도 레인을 매도한 건 단순히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억울해하는 레인, 울상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자신에게 매달리며 해명하는 레인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유쾌했기에.

그래,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

고작 이런 장난에 왜 우는 건지, 에이든은 당황스럽다 못해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입에 차마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늘 내뱉던 수준의 음담패설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이 그녀의 무엇을 자극해서 침대 위에서 너무 힘들어서, 혹은 쾌락에 겨운 울음이 아닌 평범한 인간처럼 슬퍼서 우는 건지, 에이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에이든의 표정에서 심각성을 읽은 것인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레인은 뒤늦게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뺨에 다 축축해지도록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의아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레인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레인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손으로 닦으며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나 왜 이러지, 정말? 저, 이거 별거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화가 난 듯 단단하게 굳은 에이든의 턱을 어떻게 해서든 풀어 보려 약간의 애교도 섞어 가며 말해 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심각한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굳어 갈 따름이었다.

“죄송해요. 정말로 울고 싶어서 운 게 아니에요.”

“…….”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방에 들어가서 쉬어. 식사는 그리로 올려 보낼 테니.”

에이든은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레인을 의자에 앉힌 뒤 자리를 떴다. 곧장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사역마가 유령처럼 나타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발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로브를 레인의 어깨에 둘러 끈으로 여며 주었다.

그 와중에도 레인의 시선은 뒤돌아 멀어져 가는 에이든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울어서 내게 실망했을까.

하지만 레인 스스로도 어째서 울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억울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순수하게 꽃이 사고 싶어져서 샀고, 에밀리가 소개해 준 요한을 제외하면 주변에 남자라고는 없었고, 또 아카데미에서도 그리 인기가 많은 타입도 아니었다. 남자한테 꽃을 받을 만한 환경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매도였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말꼬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억양으로 봐서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러니까 그걸 남자에게서 받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놀린 셈이었다.

‘정말이지 울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울지 않고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사역마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대로 에이든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기분을 풀어 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죄다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방까지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자가 정중하게 물어 왔다. 레인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못 걸을 것 같아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양해를 구한 사역마는 의자에 앉아 있던 레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레인은 순순히 사역마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죄송해요. 걸어가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이니까요.”

그렇게 대꾸한 여자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레인을 번쩍 안아 들고서 정원을 벗어나 저택에 마련된 레인의 방으로 향했다.

레인을 푹신한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 둔 뒤, 아침은 조금 있으면 이쪽으로 올 것이며, 식사가 올 동안 방 안쪽에 마련된 자그마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미리 받아 두었으니 원하시면 몸을 담그고 계셔도 좋다는 말을 전한 여자는 인사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저번에는 목욕까지 도와주더니 오늘은 아무래도 에이든이 거기까지 명령을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레인은 로브를 벗은 뒤 천천히 벽을 짚으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 * *

검은 바탕에 붉은 실과 금실로 새겨진 휘장이 드리운 가장 높은 권좌에 에이든이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서 고개를 기댄 채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지만 이곳만큼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벽에 걸어둔 등불과 방의 귀퉁이에 피워 놓은 커다란 횃불이 공간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권속에 있는 모든 사역마들을 이 자리에 불러냈다. 얼마간의 지능이 있고,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는 자들만을 불러 모았다.

모두 합해서 스물 안팎 정도 되는 사역마들은 에이든의 부름에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아래로 하여 두 줄로 섰다. 가운데는 에이든이 앉아 있는 권좌와 이어지는 피처럼 붉은 카펫이 가르고 있었다.

자리에 모두 모인 사역마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다만 머리를 조아린 채 주위를 곁눈질하며 분위기를 살피느라 바빴다.

자신의 주인이 이곳으로 불러 모은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최근에 먹이로 삼은 인간 여자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그 인간 여자와 무슨 일이 있어서 자신들을 모두 불러 모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장 드높은 권좌에 앉아 위압적이기 그지없는 새빨간 시선으로 자신들을 훑어보는 에이든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인다는 것 외에는.

침 넘기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지는 고요한 적막 속에서 에이든이 팔걸이에 걸쳐 둔 손끝을 까닥였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울려 퍼지는 일정한 간격의 소리는 사역마들을 긴장에 떨게 만들었다. 자신의 주인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증거가 하나둘씩 나타날 때마다 명줄이 처참히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에이든이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물음이 아니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내 사랑스러운 먹잇감이 왜 그랬을까.”

“…….”

“왜 그렇게 갑자기 눈물을 쏟았을까.”

“…….”

“응? 왜 그랬을까?”

혼잣말이 질문에 대한 대답 종용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희번득한 시선이 고개 숙인 사역마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그 어느 누구도 선뜻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에이든의 저 포악한 성질머리를 받아 낼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저절로 흐를 만큼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에이든과 사역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대답을 강요하는 자와 대답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신경전이었다.

“왜 다들 말이 없지?”

“…….”

“귀가 없나? 아니면 혀라도 잘렸어?”

에이든의 다그침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사역마들은 하나같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가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인간의 마음에 훤한 존재는 다름 아닌 에이든 본인이었다. 인간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어떠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슨 특성을 지녔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에이든,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권속에 속해 있는 사역마들은 애초에 인간 따위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인인 에이든의 명령에 따르며 충성을 다하는 것에 그 존재 의의가 있었지, 하찮은 인간 여자 하나의 마음을 살피고자 사역마가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짜증스러운 듯 에이든은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겁박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정말 귀라도 잘라 줄까? 혀라도 잘려 봐야 내 질문에 대답을 하겠나?”

에이든의 살벌한 호령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오금이 다 저리는 기분이었지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 봤자 대답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때 때마침 레인의 방 안내를 마친 사역마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역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옅은 안도의 한숨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그녀는 권좌에 앉아 있는 에이든을 향해 한차례 머리를 조아린 뒤 그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음을 보고했다.

에이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자에게로 향했다.

“무르핀, 레인의 상태는?”

“달리 보고할 만한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그래…….”

잠시 생각에 잠긴 에이든은 무르핀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무엇이 말씀입니까.”

“내 먹잇감이 왜 운 것 같아? 한 번도 안 그러던 게 왜 그러냐고.”

“…….”

“레인의 시중을 자주 들게 했으니, 넌 뭔가 짚이는 게 있겠지.”

무르핀은 레인의 시중을 들었을 뿐, 레인의 고민 상담을 하거나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다 한들 그녀 또한 레인이 무슨 생각으로 울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무르핀과 다른 사역마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르핀은 에이든이 무언가를 묻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바란다면 몰라도 일단 대답을 하고 본다는 점에 있었다.

“글쎄요. 우는 모습을 워낙 자주 봐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태연한 얼굴로 내뱉은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역마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저런 말을 직접 하면 어떡해?’

‘목이라도 날아가는 거 아니야?’

조용한 눈짓으로 속삭이는 수군거림이 침묵 속에서 파문을 일었다.

에이든은 무르핀의 대답에 짙은 한쪽 눈썹을 까닥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운 건 좀 달라. 정기 바치다가 힘들어서 운 거랑은 다르다고.”

“그렇군요.”

“도대체 왜 운 건지 모르겠어. 걔가 고작 그런 걸로 울 만한 애가 아닌데.”

“그렇습니까.”

“그래서 묻고 있잖아. 짚이는 데가 없는지.”

넋두리처럼 이어지던 말의 화살이 다시금 무르핀에게로 돌아왔다.

무르핀은 잠시 레인에 대해 생각했다.

레인은 여태껏 봐 온 에이든의 먹잇감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부류에 속했다. 거의 영겁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간들과 계약을 맺는 모습을 봐 왔지만 에이든이 이토록 온 신경과 정성을 기울여 교육하고,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많은 금은보화와 시간을 아까우리만큼 펑펑 쏟아부은 것은 레인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인간이 울든 말든 관심조차 없던 그가 상황과 경우에 따른 인간의 눈물을 세세하게 분류하고서 왜 우는지에 대해 이토록 깊이 고찰하는 모습을, 그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레인에 대한 에이든의 태도 또한 특이했지만 레인이라는 인간 자체도 무르핀이 여태 봐 온 인간 중에 가장 특이했다.

보통 인간들은 악마와 계약을 하면 대가를 통해 얻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지, 어떻게 하면 대가를 성실하게 치를지 고민하는 족속들은 아니었다. 악마가 받아 가는 대가가 많으면 인간들은 어떻게 ‘인간적으로’ 이럴 수 있냐면서 화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악마에게 빈 소원 자체가 인간적인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소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레인은 큰 욕심도 없었고, 큰 행복을 바라지도 않았다. 악마를 소환하는 데 성공해 놓고서는 시내 외곽에 위치한 저택에서 제때 입에 풀칠하면서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을 고작 소원이랍시고 내뱉은 것이었다. 그러한 소박한 소원은 에이든의 지나친 관심을 받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한결같았다.

이토록 악마가 애정하는 먹이가 없음에도 레인은 그다지 그것을 자각하고 있지 않았고, 그 이상 헛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먹이로서 계속되는 훈육과 교육도 고분고분 잘 따랐고, 아주 가끔 찾아오는 우울을 견디지 못할 때면 목욕을 하면서 슬쩍 조심스레 물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혹시 저에게 실망하진 않으셨겠죠?’ 하고.

그러한 물음은 듣기란 무르핀으로서는 머리털 나고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갖은 인간들의 시중을 들었지만 에이든을 욕하는 것은 들었어도 실망하지 않았을지 묻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이 기묘한 관계를 정의할 만한 능력이, 무르핀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다지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악마와 먹잇감의 관계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무르핀은 에이든보다 감각이 날카로웠다.

“주인님께서는 어째서 한낱 먹잇감에게 그토록 신경을 기울이십니까.”

“…지금 뭐라고 했지?”

무르핀의 예상치 못한 건방진 물음에 에이든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신은 어째서 레인이 우는지에 대해 물었지, 그딴 것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이든의 차가운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르핀은 계속해서 덤덤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레인은 분명 주인님께 자신은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눈에 띄는 특이 사항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인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없지 않습니까.”

“…….”

“그런데 어째서 고작 인간의 눈물 하나에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십니까.”

따박따박 받아치며 내뱉는 무르핀의 말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었지만,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이어서 에이든은 도리어 짜증이 치밀었다.

사실 무르핀이 하는 말이 옳았다. 레인 스스로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예기치 못한 눈물이었다. 제 스스로도 당황해서는 괜찮다고, 연신 변명인지 해명인지를 해 댄 것 또한 사실이었다. 레인은 곧잘 생각하고 있는 것이 금방 얼굴에 보이는 타입이었고, 그러니 자신에게 괜찮다며 입에 담은 말도 진심에서 나온 말일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소리 없이 쏟아지던 눈물 어린 레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묘하게 기분이 찝찝한 것이 그 이유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먹잇감이었고, 자신만의 먹잇감이어야 했다, 레인은.

적어도 그녀의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레인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에게도 악마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안 되었다. 레인이 흘린 작은 눈물 한 방울마저도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에이든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무르핀은 입 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채 누구보다도 정중하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좀 전에 그녀에게 던졌던― 레인이 왜 우는 것이며 그에 대해 짚이는 데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이었다.

“저로서는 짐작되는 곳은 없지만, 레인 님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대화?”

“네.”

“하지만 대화라면 평소에도 하는 거잖아. 대체 그런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지?”

“몸의 대화 말고 레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심정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

“주인님에 대한 감정이나,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심정에 관한 대화를 나누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인간들은 종종 그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곤 하더군요. 레인 님에게도 통할지 저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만, 해 볼 가치는 있다 여겨집니다.”

“대화라…….”

무르핀의 충고에 에이든은 권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썩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보였다.

레인의 주인이면서도 고작 먹잇감의 심정 하나 파악하지 못해 그녀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짜증스러웠지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짚이는 구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레인은 자신의 앞에서는 대부분 솔직하게 대답했고, 대체로 숨김없이 말하는 편이었으니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터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혹시나 그 꽃다발이 요한과 관계된 것이라 울음을 터뜨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좋아. 레인의 식사는?”

“이제 곧 방으로 이동할 겁니다.”

“조금 뒤로 늦춰. 내가 신호를 하면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무르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에이든은 자신이 불러 모은 사역마들을 모두 물렸다. 사역마들 사이에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이 정도로 끝나기를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무르핀이 아니었다면 천년만년이고 숨 막히는 대치가 계속되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에이든은 가장 오래 곁에서 모신 사역마답게 배짱이 아주 대단하다는 감탄과 함께 사역마들은 무사히 에이든의 그림자 속으로 되돌아갔고, 에이든은 권좌에서 일어나 레인의 방으로 향했다.

레인의 방에 도착한 에이든은 형식상으로 하던 두 번의 노크도 잊고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도대체 왜 울었는지, 그 눈물이 요한과 관련이 있는 건지 확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탓이었다.

노크도 없이 힘껏 문을 열어젖히고서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에이든의 시야에 들어온 건, 넓디넓은 침대 위에 누워 잠든 레인의 모습이었다.

옷을 입을 기력도 없었는지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앞을 여미지도 않아 앞섶이 모두 드러나 있었고, 하늘빛 머리카락도 젖은 채로 침구에 닿아 있었다.

근처에 수건을 쓴 흔적이 없었을뿐더러 몸의 물기는 다 말랐으나 머리칼에서는 여전히 뚝뚝 물이 떨어지는 걸로 봐서는 애초에 머리를 말릴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확실해 보였다.

레인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걸음을 옮긴 에이든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대화라는 걸 해 보려고 식사도 뒤로 미뤄 가며 왔더니 정작 자신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 당사자는 맘 편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리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베개도 있고, 두터운 이불도 있고, 자리도 넓다 못해 저만 한 사람 셋은 너끈히 눕고도 남을 만큼 넓은 침대에 베개도 베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고 모서리에 딱 붙어서는 처량하게 잠든 모습이 무척이나 심기에 거슬렸다.

에이든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무르핀을 시켜 수건을 들고 와 레인의 머리칼을 말리도록 했다. 그사이 에이든은 물기로 축축하게 젖은 침구를 갈았고, 입고 있던 얇은 실크 가운을 벗긴 뒤 도톰한 샤워 가운을 새로 입혔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레인은 한 치의 미동도, 뒤척임도 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심지어 좋은 꿈을 꾸는 건지 무어라 말을 하듯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레인의 머리칼이 대충 마르자 에이든은 사역마를 물리고 레인과 단둘이 방에 남았다.

금세 고요로 젖어 든 방에는 일정하게 들려오는 레인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가운 사이로 선명하게 보였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마른 것에 비해 풍만한 가슴과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는 에이든의 참을성을 철저하게 시험하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먹잇감을 놔두고 그냥 ‘대화’라니.

도저히 악마로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심정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몸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에이든에게는 훨씬 쉽고 편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이를 아득 깨물며 인내했다. 제 품에서 울던 레인의 모습이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떠오르는 탓이었다.

차라리 침대 위에서 힘들어서 우는 거였더라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든 먹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터였다.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옷을 벗겨 먹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중에 옷을 벗겨 먹든 입혀 먹든 간에 지금은 때가 아니었고, 인내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깊이 잠든 레인의 곁에 같이 누워, 에이든은 레인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풀풀 피어오르는 맛있는 향취의 정기를 눈앞에 두고 인내하기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레인이 춥지 않게 팔뚝을 쓸어 주는 척하며 피부 결을 매만지거나, 가볍게 입을 맞추어 정기를 살짝 취하거나 하며 가까스로 레인이 깨어날 때까지 시간을 죽이며 버틸 수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꼼짝도 않고 잠든 레인의 몸이 한번 크게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스르륵 소리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일으켰다기보다는 그저 일어나야 한다는 집념이 반사적으로 몸을 깨운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레인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반쯤 눈이 감겨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온몸으로 꾸벅꾸벅 졸다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을 에이든이 가까스로 팔을 내어 받쳐 들었다.

에이든은 레인의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히고서 조심스레 어깨를 흔들어 레인을 깨웠다.

“레인. 일어나.”

“으음……. 잠시만요, 조금만…….”

아직도 잠에 취한 건지 돌아오는 대답이 느릿했다. 금방이라도 감길 것처럼 축 내리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평소 맑은 벌꿀색을 띄던 것과는 달리 탁하고 우중충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 우느라 눈이 부은 탓도 있어 보였다.

에이든은 레인의 퉁퉁 부은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부기가 단숨에 가셨다. 손끝에 담은 마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렸을까, 잠에 취해 흐려졌던 레인의 눈동자가 점차 본래의 색을 되찾는가 싶더니 이내 평소 에이든이 알던 레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대체 얼마나 잔 거지?”

곁에 에이든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레인은 바로 옆에, 그러니까 손을 뻗으면 곧장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에이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서는 허억, 하고 누가 봐도 놀란 사람처럼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더니 이제야 자신이 옆에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잔뜩 겁에 질려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레인의 얼굴을, 에이든은 탐탁지 않다는 듯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쳐다보았다.

‘잡아먹고 싶은 걸 꾹 참고 기껏 기다렸더니 이런 반응이라니.’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에이든이 레인을 찾은 목적은 대화를 하기 위함이었고, 좀 전의 아침 식사 자리가 어색하게 끝난 탓도 있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눌러 참고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많이 피곤했나 보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푹 자던데.”

“아……. 네, 조금 피곤했나 봐요. 죄송해요. 자려던 건 아니었는데,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더니 저도 모르게 그만.”

“뭐, 됐어. 사과받으려고 한 건 아니니까.”

그러고는 둘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적막이 흘렀다.

둘 다 할 말이 없지 않았다. 에이든은 어째서 레인이 꽃다발 하나에 운 건지, 그 심정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싶었고, 레인 또한 에이든이 끝내 듣지 않고 자리를 떠버리느라 듣지 못한― 자신이 운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사람 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꺼내야 했는데,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쑥스러움인지 어색함인지 모를 감정이 입을 떡하니 막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아무런 용건 없이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기를 바치고 정기를 취하는 데에 익숙했지 섹스를 끼지 않고 말을 주고받기란 너무나 새삼스러웠다.

깨질 것 같지 않은 정적은 먼저 부순 건 레인이었다.

“저… 있잖아요.”

“그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말해.”

어렵사리 말문을 연 레인은, 에이든에게서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요, 정원에서 울었던 거요. 그거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괜찮다고 말씀드린 것도 진짜로 괜찮아서 그런 거고, 억지로 괜찮다고 한 것도 아니었어요. 믿어 주세요. 저 정말로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닌데 왜 울어?”

곧바로 되돌아온 에이든의 날카로운 물음에 레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욕을 하면서, 방 안에 있으며 줄곧 생각을 해 봤지만 그것만큼은 자신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남에게 설명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하지만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에이든의 침묵에 레인은 불안한 듯 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이내 고해 성사를 하듯,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 꽃다발, 오늘 저택으로 오는 길에 역에서 산 거였어요. 요한이라고, 에밀리가 최근에 소개해 준 친구가 있는데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한번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만났는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다정했고,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처음이라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

“분명 좋은 사람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를 않더라고요. 신기하죠?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어서, 참 이상하다 생각하다가, 그냥……. 요한이 웃는 얼굴이 햇살 같거든요. 그런데 그동안 그…….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덜컥 사 버렸어요.”

“…….”

“아마 악마에게 꽃 줄 생각을 한 건 저밖에 없겠죠? 좀 창피하네요. 그렇지만 뭘 드리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냥 충동적으로 산 건데. 다른 사람한테서 받은 거 아니고 제가 산 건데,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서 울었나 봐요.”

이런 걸 말로 하기는 처음이라 어색함 탓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예상외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레인은 에이든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조금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레인은 이내 미소를 거두고는 고해하는 내내 내리 깔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에이든과 시선을 맞추었다. 말없이 레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에이든의 짙은 잿빛 눈동자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미약하게 흔들렸다.

“혹시 이런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그저 그 질문을 하나 던진 것뿐인데, 물음표가 찍히자마자 레인의 목소리가 잠겨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지난 4년간 미처 말할 수 없었던, 그럼에도 레인의 일상에 늘 드리웠던 불안을 표현한 가장 적확한 질문이었기에.

버려질까 두려움에 떠는 레인의 울먹이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이든은 아주 충동적으로, 너무나도 인간스럽게도 대답 대신 레인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레인 또한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이게도 팔을 그의 목에 감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려 4년 만에 계약상에 없는 섹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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