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소개 (2/12)

1. 소개

주말이 지나고 레인이 아카데미로 돌아가자 음탕한 신음으로 가득했던 저택은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호흡하는 숨결마저 또렷이 들려오는 고요 속에서 에이든은 서재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미리 붙여 놓은 사역마의 눈을 통해 기차와 마차를 번갈아 타며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레인의 모습을 감상했다.

오랜만의 교육이 제법 버거웠는지 평소보다 파리해 보이는 얼굴로 차창에 고개를 기댄 채 멍하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물거리는 황금빛 시선이 아무래도 졸린 듯했으나 역이 있는 광장까지 가는 길이 꽤나 험했기에 쿵쿵 아래위로 흔들리는 마차에 머리를 찧을 때마다 반듯한 미간을 짜증스럽게 찌푸렸다.

레인은 마차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는 내내 기운이 없었다. 가끔 느릿한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굳게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얼굴이 새빨갛게 익곤 했는데 이것저것 쓸모없는 것들을 생각하기 좋아하는 레인이 아무래도 주말 동안 제 밑에서 울부짖으며 신음한 일을 다시금 떠올린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열차에서 저 혼자 흥분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레인의 모습에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군침이 돈 까닭이었다.

주말 동안 일주일을 금욕하며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기를 섭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곁을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써부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금방 그리워질 줄 알았더라면 제 분신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직접 정기를 취할 걸, 하는 아쉬움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아, 아니면 지하실에라도 데려갈 걸 그랬나.’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레인에게 그다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지하실에만 가면 이상하게도 양질의 정기가 샘솟듯이 흘러나왔다. 평소 먹던 것보다 끈적하면서도 중독성이 가미된 독특한 맛이 났는데, 평범한 악마들이었다면 한번 맛보는 순간 정신이 나갈 만큼 환상적이었다.

‘다음번에 돌아오면 핑곗거리를 하나 만들어서 지하실로 데려가 볼까.’

어차피 레인을 지하실로 데려갈 만한 구실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벌을 주기 위한 벌을 계속해서 내리다 보면, 결국에는 용서를 받기 위해 지하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다지 좋지 않다고는 해도 레인의 몸은 솔직하게 기뻐했다. 입으로는 싫다고 울면서도 쾌락을 좇아 허리를 흔드는 모습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그녀는 모를 터였다.

‘좋아. 지하실로 데려간 김에 좋으면서 싫다고 자꾸 거짓말을 하는 그 버릇을 고쳐 놔야겠군.’

그러면서 다음번에 돌아올 레인을 어떻게 괴롭혀 요리할까, 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때였다.

어느새 레인은 아카데미에 도착해 기숙사에 짐을 푼 뒤, 곧장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한 여자가 대뜸 레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활달함이 느껴지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와 콧잔등에 드문드문 보이는 주근깨가 제법 매력적인) 붉은 머리의 여자는 레인과 같이 마법을 전공하는 에밀리였다.

“레인! 얼굴이 왜 그래?”

에밀리는 레인을 꼭 끌어안으려는 듯 다가서다 말고 그렇게 말했다. 무언가 가슴 깊이 찔리는 것이 있는지 (당연히 있을 테지. 주말 동안 몇 번이나 했는데, 레인의 수줍음 많은 성격상 찔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어깨가 크게 움찔하면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흘렸다.

악마랑 부단히도 몸을 부대끼며 살았으면서 어지간히도 연기를 못한다 싶었다.

“어, 왜에?”

“아니, 뭔가 좀……. 피곤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얼굴이 수척해. 집에서 맛있는 거 안 해 줬어? 본가 갔다가 돌아오면 늘 얼굴이 활짝 펴서 돌아오더니 오늘은 다 죽어서 왔네.”

에밀리는 레인의 갸름한 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진심으로 걱정하여 말했다.

레인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모로 피하며 어색하게 웃기를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가 진수성찬은커녕 다리를 벌리고서 굵직한 살덩이를 받아 내느라 시간을 모두 허비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어, 그저 웃는 것이겠지.

오래 관찰을 해 온 탓인지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했다.

에이든은 예전부터 저 에밀리라는 여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레인의 얼굴에 친밀하게 손을 대는 것 또한 기분 나빴지만, 약간의 수확은 있었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기로 했다.

‘본가 갔다가 돌아오면 늘 얼굴이 활짝 펴서 돌아오더니.’

에이든은 그 말을 곱씹었다. 레인이 자신과의 관계를 꽤나 즐기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레인 또한 자신과의 관계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옷을 벗고 있을 때 말고는 좋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걸 들은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에이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고르고 고른 먹잇감이었고,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정성을 들여 쾌락으로 길들였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악마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그러했다.

레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걸작 중에 걸작이었다.

어느새 레인은 책상 앞에 앉아 글자들이 빼곡한 종이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인사를 마친 에밀리는 레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레인이 오기 전 하던 것을 마저 하려 드는 듯 펜을 들어 무언가를 끄적이는가 싶더니 잠깐의 침묵을 못 참고 파티션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과제는 했어?”

“응. 대충은. 그런데 잘한 건지 모르겠어. 이론만으로 하려니까 머리 아파. 한번 해 보면 좋을 텐데.”

“하긴 마력이 쥐뿔도 없는데 이런 거 배워서 어디다 쓰나 몰라.”

그렇게 말하며 마법식이 적힌 종이를 다 본 신문처럼 팔랑거렸다. 레인이 공감이 되는지 작게 웃었다.

“빨리 졸업해서 결혼이나 해야지.”

“결혼? 결혼해?”

갑자기 튀어나온 결혼 소리에 레인이 깜짝 놀라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에밀리는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뭐, 그럼 결혼해야지. 집에서는 어서 결혼하라고 난리야. 여기 입학하기 전에 결혼부터 하고 들어가라는 거 억지로 졸업 뒤로 미뤘어.”

“하지만 넌 이제 겨우 스물둘이잖아?”

“원래 귀족 가문끼리는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해. 잽싸게 사돈 관계 맺어서 가문끼리 협력 관계를 구축해 놔야 일하기도 편하고, 저쪽이나 이쪽이나 각자 사업 파악하기도 수월하니까.”

“아, 그렇구나.”

레인을 고개를 주억거렸다. 묘하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대체 왜 그런 걸로 시무룩해하는지, 에이든은 지켜보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혼 따위가 뭐가 대수라고. 자신과 계약을 맺고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자신과 몸을 섞었으면서 이제 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다면 인간계에 있는 어지간한 남자랑 결혼하는 것보다는 제 곁에 붙어서 사는 편이 훨씬 편하고 좋을 터였다.

그리고 주말 동안 단단히 교육도 시켜 놨으니 결혼이니 미래니 하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겠지.

에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에밀리와의 대화는 에이든의 뒷골이 당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너도 집에서 결혼하라고 막 안 그러셔? 후견인이 삼촌이랬나? 너 엄청 아낀다며?”

“응. 뭐……. 그렇지만 너무 애지중지하시니까, 좀 더 곁에 있길 바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럼 더 좋은 남자랑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시겠지. 다 큰 조카 평생 옆구리에 끼고 살아서 뭐 할 거야.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계속 공부해서 교수까지 하길 원하셔?”

“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에밀리는 손가락을 경쾌하게 튕기면서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이 아주 귓가에 걸린 것이 에이든은 아주 못마땅했다.

“야, 그럼 잘됐네.”

“뭐가?”

“난 너 공부를 하도 열심히 하기에 집안에서 교수하라고 압박이 있나 했잖아. 그래서 여기저기서 다리 좀 놔 달라는 거, 입도 뻥끗 못 하고 있었는데,”

“응?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폭주 기관차처럼 저 혼자 떠드는 에밀리의 말허리를 끊고서, 레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에밀리는 어딘지 모르게― 그동안 숨겨 왔던 계략을 펼쳐 보이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남자 소개받을래? 요한이라고 우리랑 같은 아카데미 학생인데, 나 보고 계속 말 좀 해 달라고 난리야.”

에이든은 순간적으로 에밀리라는 여자의 혀를 뽑아 버릴까, 생각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참기로 했다. 괜히 레인 주변의 인물을 건드렸다가 자신이 그녀 모르게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만큼 낭패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레인이 어떤 대답을 돌려 주냐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레인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짙은 잿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레인은 (대체 무슨 생각할 거리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한참을 깊은 생각에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아유, 너도 참…….”

에밀리는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레인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새하얀 피부에, 흔치 않은 새벽녘 하늘빛을 닮은 푸른 머리칼, 아름답게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마치 천사가 내려와 세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들로 물감을 만들어 그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걸 좀처럼 이용해 먹지 않은 레인이 안타까운 탓이었다.

사실 이미 그녀가 자신의 달콤한 정기를 이용해 제법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나온 반응이었다.

레인은 그런 에밀리의 반응이 어리둥절하여 왜 그러냐고 몇 차례 묻다가,

“됐어. 나중에 점심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시내 나가서 먹을 거야.”

하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자리를 정리해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이든은 교육의 효과가 있었다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괘씸하기는 하지만 에밀리라는 여자도 너그러이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레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레인이 에밀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 이미 에이든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귀족 자제가 많았고, 허울뿐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이름만 대면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큼 명성이 높은 상인의 가문이나 기사의 가문인 경우가 많았다.

어릴 적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가까운 친척이자 같은 귀족의 신분을 가진 삼촌(을 가장한 악마)이 후견인으로 자신을 돌보아 주셨다는 거짓 설정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레인은 겉으로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부와 명예, 권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서 기껏 소개받아 봤자 자신의 거짓된 삶이 쉽게 들통나리라 생각했기에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결혼을 하고 가문끼리의 사업에 손을 쓰게 될 에밀리가 부럽기도 했다. 결혼 자체가 부럽다기 보다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그 미래가 명확한 것이 레인의 마음을 조금 어지럽혔다.

지금이야 에이든이 자신의 정기를 좋아해 주고 있으니 그다지 상관은 없었지만,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고 난 이후가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미래 이야기를 꺼냈다가 주말 동안 호되게 혼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대체 뭐 해 먹고 산담.’

에이든이 자신을 버릴 때쯤이면 결혼 적령기는 이미 지나서 가정을 꾸리기는 힘들 것 같으니 적어도 돈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겠다 싶어 저축을 해 둔 것이 있긴 했다. 거짓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후견인인데 어디서 굶고 다니지 말라고 에이든은 매번 자신의 앞으로 돈을 보내 주었는데, 과제 하는 데에 필요한 서적을 구매하거나 가끔 기분 삼아 좋은 곳에 식사를 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딱히 쓸 일이 없어 대부분의 금액을 저축해 두고 있었다.

덕분에 제법 많은 액수가 쌓였지만 평생을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돈을 불릴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삭한 것도 아니라 그저 금고에 가만히 모셔만 둔 것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영학이나 상업 쪽을 전공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를 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에는 에이든이 쓰는 마법이 너무 궁금해서, 악마랑 계약까지 해서 배우고 싶은 게 고작 그런 것인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부득불 우겨서 지금의 전공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3년 내내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느낀 건 자신은 마법에 더럽게도 재능이 없다는 슬픈 사실과, 각종 교과서며 연구서에 적힌 각종 악마들의 사악한 만행을 어쩔 수 없이 에이든과 겹쳐 보게 되는― 별로 좋지 않은 효과만 낳았다.

레인이 품고 있는 에이든에 대한 불신이란 그런 것에 기인했다. 어느 책을 봐도 악마와 계약을 맺은 인간은 하나같이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거나, 악마의 세 치 혀에 마음을 뺏겼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거나, 사랑을 맹세해 놓고서는 뒤통수를 때리거나 하는 식의 일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레인은 에이든도 언젠가 쓸모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을 버리겠거니,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에이든이 자신을 버리게 되는 그날을 상상하면 서글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정기를 맛있게 취하고 있으니 미래를 준비할 여력은 있었다. 레인은 그것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다.

에밀리는 그날 이후 소개니 뭐니 하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완고한 태도에 포기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들은 마지막 학년이 되었고, 1년 후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논문을 써서 통과가 되어야 했는데 결혼이니 소개니 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육지의 물고기처럼 퀭한 눈동자로 과제와 논문을 번갈아 가며 처리하고 있던 에밀리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더니 파티션 너머로 불쑥 얼굴을 내밀어 부탁했다.

“레인. 미안한데 혹시 도서관 가서 책 좀 빌려다 줄 수 있어? 나 지금 과제 다 못해서 어디 갈 시간이 없어서. 미안. 과제 다 끝내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어, 알았어. 무슨 책인데?”

“마법의 과학적 이해.”

“그거 한 권이면 돼?”

“응. 부탁 좀 할게.”

에밀리의 부탁을 받은 레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침 조금 짬이나 경영학이나 경제학 책을 빌려다 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겸사겸사 가면 딱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서는 레인의 뒷모습을, 에밀리는 빼꼼히 쳐다보았다. 저 애 걸음으로 봐서는 10분이면 도착할 테니, 미리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추어 만나게 될 터였다.

옆에 비어 있는 레인의 자리를 보며 에밀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나한테 엎드려 절할 날이 올 거야. 에휴, 정말이지 남자 한번 소개시키기 참 힘들다.”

『마법의 과학적 이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꽉 채워진 서가의 가장 위 칸에 꽂혀 있었다. 발판 없이 올려다보려면 목이 아파 올 만큼 높았다.

웬만큼 키가 크지 않고서야 발판을 써도 닿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 볼까 싶어서 근처를 두리번거리는데, 웬 남자가 쓱 곁에 다가오더니 기다란 팔을 뻗어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레인이 찾고 있던 『마법의 과학적 이해』였다.

“아, 그 책…….”

제가 빌려 가야 하는데요.

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고 (어찌 됐든 그 책을 빌리는 건 그 사람의 자유였으니까), 그렇다고 에밀리에게 부탁받은 책을 안 빌려 갈 수도 없고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다른 사람 손에 들린 『마법의 과학적 이해』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남자가 불쑥 책을 레인에게 내밀었다.

“이 책 찾고 있던 거 맞죠?”

“아, 네. 그런데요.”

“…안 받으세요?”

레인이 책을 받아 들지 않고 빤히 쳐다만 보니 이번에는 오히려 남자 쪽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제야 뒤늦게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수고를 해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레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서 책을 받아 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저는 빌려 가시려고 그런 건 줄 알았어요.”

“저는 전공이 마법은 아니라서요.”

“그러시구나.”

레인은 그렇게 대꾸하며 조용히 책을 품에 안고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긴, 마법 전공이 아니고서야 굳이 제목에 마법이 적힌 책을 빌려 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새삼 자신의 전공이 폐과 위기에 처해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달은 레인이 저도 모르게 슬픈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침울해지는 듯한 분위기에 남자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혹시 다른 책 찾으시는 거 있어요? 도와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따로 볼일 보세요.”

“저, 시간 많아요. 오늘 수업 하루 쨌거든요. 같이 찾아 드릴게요.”

레인은 그제야 자신을 도와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부신 오전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구불거리는 금발에 사파이어처럼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 자그마한 얼굴에 박힌 입술은 개구진 미소가 가득했다. 그 장난기가 가득 어린 웃음과 친절을 가득 담아 호선을 그리는― 곱게 접힌 눈매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에이든이랑은 정반대네.’

레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든의 머리색은 짙은 검은색을 띠었고 눈동자는 차가운 짙은 회색빛이었는데 화가 나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검어지곤 했다. 눈앞에 남자처럼 해사하게 웃는 일도 없었다. 대부분은 무표정이었고, 그가 웃는 이유의 대부분은 자신의 음란한 몸을 비웃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거나.

에이든이 남자처럼 해맑게 미소 짓는다면……. 좀 이상할 것 같았다. 해맑은 미소와 에이든은 공상을 즐겨하는 자신으로서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에이든은 언제나 자신을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훑어 내리기 바빴기에.

남자의 해맑은 미소가 무척이나 오랜만이라 레인의 마음이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졌다.

덕분에 마법이 전공이 아니면서 어째서 마법 전공서가 있는 서가에 그가 있는 것인지, 또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레인이 찾고 있던 책이 『마법의 과학적 이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겨를조차 없었다.

거기에 타인의 다사로운 친절은 그러한 사소한 의문을 덮기에 매우 충분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서 레인은 그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럼 혹시 경영학이나 경제학 쪽 책 같이 찾아봐 주실 수 있나요?”

“전공이 마법 아니셨어요?”

“아, 그렇긴 한데 마법 말고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조금 관심이 생겨서요.”

차마 악마에게서 버려진 이후로 어떻게 먹고 살면 좋을지 몰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레인은 대충 둘러댔다. 남자는 레인의 말에 납득을 한 듯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남자는 성실하게 레인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었다. 전공이 무엇인지 다른 분야의 책에도 빠삭해서 레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초 입문서를 많이 추천해 주었다. 그중에서 실전에서 잘 활용할 수 있을 법한 상업의 기본을 서술한 서적과 세금에 관한 가벼운 입문서를 빌리기로 했다.

볼일을 마친 레인은 도서관을 나서자마자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시간을 많이 빼앗은 거 아닌가 걱정이네요.”

“아니에요. 제가 먼저 제안했는걸요. 그리고 저도 오늘 재미있었어요.”

그저 같이 도서관을 휘휘 돌아다닌 것뿐인데 뭐가 재미있었을까 싶으면서도 자신과 보낸 시간이 좋았다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아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연구실로 돌아가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레인이 입고 있는 소매 옷자락을 붙들었다. 레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거리가 훅 가까워져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다급한 듯 찌푸려진 미간과 저를 보는 애절한 눈빛에 레인은 조금 당황하여 그 자리에 굳었다.

‘뭐, 뭐지?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레인의 옷자락을 고민스레 매만지던 남자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요한이에요. 요한 벨리우스.”

“…….”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레인.”

그러고는 어느새 붙잡고 있던 자신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레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이며, 어떻게 자신이 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갑자기 손등에 입술을 왜 맞춘 건지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멀어져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레인은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에밀리를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밀리는 레인의 생각보다 훨씬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추궁을 할 것도 말 것도 없이 그저 요한 벨리우스라는 남자를 알고 있느냐는 물음 하나 던졌을 뿐인데, 잔뜩 흥분해서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여 가며 대답했다.

“어때? 잘생기지 않았어? 그동안 너 소개시켜 달라고 줄을 선 남자들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였거든. 또 내가 뒷조사에 일가견이 있잖니. 요한만큼 깨끗한 남자가 또 없어. 가정도 화목하고, 형제자매끼리 권력 다툼 없고. 여자 문제로 골머리 썩을 일도 없고, 게다가…….”

“……?”

“잘생겼어!”

기관총처럼 발사되는― 귓가가 먹먹해져 오는 목소리가 줄기차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을 끊기에 뭔가 싶어 쳐다보자 돌아온 대답이 그것이었다.

에밀리는 누가 보면 마치 자신이 요한을 소개받은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반면에 레인의 반응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인이 된 이후 맨날 보고 사는 얼굴이 에이든이었다. 물론 요한도 잘생기긴 했지만, 자신의 취향으로만 따지면 에이든이 좀 더 마음에 들었다.

날카롭게 쭉 뻗은 콧날과 언제나 심기가 불편한 듯 은은하게 찌푸려져 있는 양미간, 시원한 일자 눈썹. 언제나 침착하게 짙은 잿빛으로 가라앉은 눈동자. 얇은 입술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가며 내뱉는―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 하나같이 놀랄 만큼 자신의 취향인 외모였다.

그렇지만 요한의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웃을 때 햇살을 받아 맑게 반짝이는 동그랗고 푸른 눈동자가 예뻤다. 그렇게 해사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잘생기긴 했더라.”

그러나 레인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싱겁다고 느낀 에밀리는 조금 울컥하여 따져 물었다.

“너는 그런 외모가 흔한 줄 아니? 요한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렇게 반응이 심심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약혼자가 걔 외모의 반이라도 닮았어 봐! 난 발가락도 핥을 수 있어.”

“갑자기 발가락은 왜 핥아?”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으면 에밀리는 정색을 하고서 손을 내저었다.

“말이 그렇단 얘기지. 말이. 그만큼 잘생겼다, 이 말이지.”

“그래도 이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부담스럽고,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내가 지금 남자랑 사귈 때도 아니고…….”

“어휴, 누가 걔랑 꼭 사귀랬니? 그냥 사람이 어떤가, 한번 만나나 보라는 거지. 사귀면 좋고, 안 사귀어도 좋은 친구 하나 만들었다,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여태 아카데미 다니면서 네가 나 말고 다른 애랑 노는 모습을 못 봤어.”

갑자기 훅 들어온 사실 적시에 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레인은 공부와 과제로 바빠 친구라고는 에밀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이 많은 자리가 불편해 모두 불참했더니 어느샌가 사교 관계가 무척이나 좁아져 있었다.

에밀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요한, 착하고 좋은 애야. 뒷조사를 했는데 그 정도로 깔끔한 건 요한뿐이었어. 정말 나쁘지 않은 애니까, 그냥 친구로라도 지내. 그리고 억지로 소개한 건 미안해. 그렇지만 좋은 애라서 소개한 거지, 나쁜 애였으면 이렇게 무작정 소개하지도 않아.”

“…….”

“그러니까 잘 생각해 줘.”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하듯 말하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 *

순식간에 성큼 다가온 주말, 레인은 커다란 가죽 가방과 함께 기차에 앉아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에밀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요한은 자신이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에밀리가 극찬하는 외모를 제외하고서라도 사람을 대하는 매너가 기본적으로 좋았다. 도서관에서의 만남 이후로 에밀리는 억지로 자신과 요한을 엮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이전보다는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었고, 또 도서관에서도 한 번 마주쳐서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책을 빼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쩌다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성의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등 성실하게 반응을 보였다.

에밀리가 말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성품이 올곧고 좋았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잘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에밀리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요한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별거 아닌 사소한 만남이었지만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더니 사실인 듯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레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던 것이었다.

‘에밀리 말대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겠어서 레인은 도리어 심란해졌다.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뱉은 레인은 근심에 젖은 황금빛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였다.

기차가 마지막 역에 도착하고 열차에서 내려 마차로 갈아타려던 레인은, 역 앞 광장에서 좌판을 늘어놓고 파는 꽃 한 다발을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책이나 옷, 음식 말고 무언가를 구매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요한을 생각하다 보니 에이든이 생각났고, 에이든을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꽃을 사고 싶어졌다. 에이든에게서 언제나 받기만 했지 (정기 말고) 다른 것을 준 기억이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악마가 꽃을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이런 말이 조금 웃기다는 건 알지만) 그간의 정이 있으니 좋아하는 척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레인은 아름답게 포장된 꽃다발 하나를 품에 안고서 마차를 타고 에이든이 있을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앞에 마차가 당도했다. 레인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는 가볍게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한 뒤 저택 밖으로 사라졌다.

에이든의 저택은 언제나 그렇듯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이 사는 기척 하나 없는데도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는 정원이나 저택의 외관을 보면 좀 기이하긴 했으나 레인은 이런 저택의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저택에 맴도는 고요한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어딘가 어수선하다고 해야 할지, 냉담한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환대를 받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 같은 감각이 있었는데, 오늘은 마지못해 억지로 문을 열어 준 느낌이었다.

레인은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서 자연스레 현관 입구로 향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품에 안은 꽃다발과 풀어 헤친 레인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굳게 닫힌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젖히려는데, 이상하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건대 저택의 문이 잠겨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뭐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뒤로 하고 다시 한번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데, 느닷없이 문 앞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자세히 보니 에이든이 부리는 사역마였다. 지난번 자신의 목욕을 도와줬던― 그 무표정한 여자.

여자는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숨을 고르고 있는 레인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에이든에게서 전달받은 사항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오늘은 색다른 식사를 하시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것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레인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커다란 병과 용도를 모를 마개와 함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를 펼쳐 드니 우아한 필체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레인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향유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아래에 품고서 정원 테이블에서 기다릴 것.]

* * *

에이든은 그렇게 고대하던― 레인이 자신이 있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심기가 불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 굶다가 이제 겨우 취하는 정기였는데, 그러면 좀 더 식욕이 피어올라야 정상이었으나 식욕은커녕 머리에 열만 올랐다.

사역마의 눈을 빌려 줄곧 레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던 에이든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들끓는 감정을 추스르려 푹신한 서재 의자에 몸을 깊이 뉘어 심호흡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역마를 통해 보는 레인의 모습이 언제나 그렇듯 여지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향유가 든 병과 아래를 막을 마개를 받을 때의 긴장한 듯 조금 굳은 표정도, 자신에게 먹히기 위해 정원 테이블로 향하는 순순한 발길도, 파도처럼 넘실대는 푸른 하늘빛의 머리칼과 제법 거친 바람결에 품에 한 아름 안고 있는 꽃다발의 향기가 날아갈까 싶어 확인하는 얼굴도 모두 군침이 돌았다. 식욕인지 성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끓어오르기에 아주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인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단전에서부터 부글부글 끓는 듯한 분노가 차올랐다.

자꾸만 그 재수 없는 요한 벨리우스라는 인간 앞에서 지었던 표정이 그 위로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표정들.

마치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눈빛하며, 별것도 아닌 말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당겨 소리 내어 웃는 것하며,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그가 얼마 동안이나 식당 주위를 맴돌았는지,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 위해 몇십 분을 하염없이 기다렸는지 따위는 전혀 모르고서 그가 베푸는 호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하나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으…….”

그의 거칠어져 가는 상념을 일깨우듯 귓가를 타고 레인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정원 한편에 마련한 테이블에 도착한 레인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테이블 한쪽 옆에 조용히 치워 두고 그 위에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스커트 아래로 들어간 손이 음부를 헤집으며 병의 입구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반사적이라고 해야 하나, 교육이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몸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그저 명령 하나 내렸을 뿐인데 레인의 아래는 벌써부터 젖어서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찔꺽거리는 음탕한 소리가 들려왔고, 음핵을 문지를 때면 허리를 들썩였다.

다른 한쪽 손은 테이블 위에 짓뭉개진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천 위로 유두가 자리 잡은 부분을 문질러 보지만 아무래도 천이 여러 겹이라 자극이 감질나는지 해야 하는 일도 잊고 가슴을 반죽처럼 거칠게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흐읏, 으……. 아, 좀 더…….”

쾌감에 취해 있는 레인이 어쩐지 괘씸하게 느껴져 에이든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역마에게 저 천박한 구멍에다 향유를 집어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고 있던 병의 마개를 뽑으며 레인에게 다가가더니 예고도 없이 입고 있는 스커트 자락을 휙 걷은 뒤 기다란 병의 주둥이를 빠끔거리는 구멍에다 박아 넣었다.

갑작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깜짝 놀란 듯 레인이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하윽! 아……. 갑자기 그러면, 으읏!”

안에 들어 있는 향유가 줄어들지 않는 모습에 사역마는 의아한 듯 이리저리 병을 움직이다 이내 방법을 깨닫고는 병의 각도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그제야 병에 들어 있던 향유가 꿀렁꿀렁 소리를 내며 레인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병의 주둥이가 박힌 아랫입이 기쁘다는 듯 오물거리며 레인의 입술 사이로 색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레인은 아랫배에서부터 가득 차오르는 향유의 감각이 이상했는지 그만하라며 도리질을 쳤지만 사역마는 레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에이든의 명령에 따라 병 안의 내용물이 모두 빌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 이상해요……. 뭔가… 아, 흑!”

사역마가 갑작스레 병을 쑥 빼내어 마개를 삽입하자마자 다시금 레인의 허리가 비명과 같은 신음과 함께 휘었다. 손잡이가 달린 마개는 레인의 질구를 빈틈없이 막아 안에 든 향유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잘 막아 주고 있었다.

생소한 감각에 온몸을 떨어 대는 레인의 모습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에이든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분명 맛있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맛있게 요리해서 먹어 치워야겠다는 생각 대신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지독한 가학심이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쾌락으로 그 머릿속을 새하얗게 지워버리고 싶다가도, 레인이 싫어할 만한 짓만 골라 해서 펑펑 울리고 싶기도 했다.

에이든은 사역마를 시켜 저 파르르 떨고 있는 구멍에 박힌 마개가 잘 기능하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마개의 성능을 확인시켜 주었다.

“윽, 안 돼! 아, 안이 이상해요…….”

향유로 가득한 아랫배가 출렁이는 듯한 감각에 레인이 우는소리를 냈다. 실제로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참으로 먹음직스럽게도.

에이든은 곧장 자신의 사역마를 불러들였다. 레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남기고서.

사역마는 충실하게 에이든의 전언을 전한 뒤 이내 에이든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향유에 섞은 약간의 미약이 효과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며 에이든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레인을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해야 하는 데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미묘한 분노에 모든 것이 지워졌다.

요한.

요한 벨리우스.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죽여 버릴까.

차라리 그동안 이런 문제로 속을 썩여 왔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에이든은 악마였고, 여태껏 자신과 계약을 한 인간 중에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먹잇감이 적지 않았다. 솔직히 악마에게 정조 관념이 있을 리가 없었고, 레인만큼 매력적인 정기는 아니었기에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여럿이서 정기를 취하더라도 크게 기분이 상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넘칠 만큼 밀려들어 오는 쾌락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마저도 대부분은 계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는 잠깐의 교육이었지, 교육이 끝난 후에도 저 아닌 다른 놈을 찾는 일은 전혀 없었다.

저 하나만 먹이로 삼아 주면 안 되냐고 무릎 꿇고 비는 인간은 있었지만.

게다가 레인은 먹잇감으로서 훌륭하게 자신의 교육에 따랐다. 도리어 반항이 너무 적어서 길들이기 편하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아카데미에 가서도 레인은 별달리 남자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하루 종일 연구실과 도서관, 기숙사를 오가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스킨십에 미세한 거부감을 보이는 레인의 모습에 에이든은 무척이나 흡족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방심의 대가는 제법 컸다.

에밀리, 요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이 문제였다.

에밀리 그 인간 여자는 레인에게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며 말을 꺼낸 순간 바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요한인지 뭔지는 그 여자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찾아 죽였어야 했어.

갑자기 솟구치기 시작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미래 운운하던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미래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다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혹시 그 빈자리를 요한이 차지하는 건 아닌가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에이든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레인이 있는 정원 테이블로 향했다.

향유에 섞어 놓은 최음제가 듣기 시작했는지 마개 주변이 움찔거리면서 조금씩 향유가 새어 나와 레인의 쭉 뻗은 새하얀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끔 흥분에 못 이겨 몸을 바르작거렸으나 혼자 자위를 하지 않은 점은 칭찬할 만했다. 자신의 명령 없이는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교육을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서, 이렇게 내 먹이로서 충실하면서,

어째서 그 새끼를 쳐내지 않아.

왜 웃어.

왜 그놈의 호의를 순순히 받고, 왜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하냐고.

“레인.”

소유욕과 집착으로 가득 차오른― 그 앞에 수많은 문장들이 생략된 나지막한 부름에 테이블 위에 엎드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보았다.

에이든의 짙은 잿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레인은 자신의 아랫배에 품고 있는 향유가 출렁이는 기묘한 감각과 어째서인지 자꾸만 몸이 달아오르며 옅은 신음을 흘리게 되는 쾌감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고 음산한 것이, 시간이 갈수록 짙고 깊어져 가는 눈동자가 아무리 봐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저택에 방금 도착했고, 그가 명령을 내린 대로 충실히 행했으며 그가 저토록 화를 낼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악마인 만큼 다정한 편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그가 기분이 좋거나 나쁜 데에는 항상 이유가 따랐다. 그 이유가 때때로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어도 이유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에이든이 어째서 저토록 기분이 안 좋은 것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후우.”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한 한숨 소리가 고요한 저택 정원에 울려 퍼지는 순간, 레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저벅저벅 구두를 신은 발걸음이 자신에게로 가까워질 때마다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체내로 스며들어 가는 미약 탓에 레인의 호흡은 거칠어져만 갔다. 달뜬 몸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공포심과는 달리 에이든이 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잔뜩 기대를 머금고는 흥분으로 떨어 댔다.

어서 박아 주길 바라듯이 뻐끔대는 구멍 탓에 품고 있던 향유가 다리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늦게 힘을 주어 봐도 한번 새어 나오기 시작한 향유는 끊임없이 구멍의 작은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래에서부터 다리를 타고 발끝까지 선을 그리듯이 이어져 내리는 향유의 감각이 레인을 자극했다. 발끝에 대롱대롱 달려 있던 향유는 이내 소리 없이 잔디밭에 떨어졌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의 모습을 말없이 훑으며 의자를 뒤로 당겨 식탁 앞에 앉았다.

평소라면 제 몸에 먼저 손이 나갔을 텐데, 털끝 하나 손대지 않은 채 자리에 앉는 에이든의 행동은 명백히 평소와는 달랐다.

레인은 에이든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저를 바라보는 깊게 가라앉은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은 미소 한 점 없이 딱딱했다. 저를 볼 때마다 일던 사나운 정욕은 없었고, 자신을 뼈째로 발라 먹어 버릴 심산인 듯 차갑고 냉정했다.

레인은 이 상황이 무섭기도 하고, 그의 기분을 풀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그 방법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다만 걷어 올린 스커트 자락을 말없이 쥐었다.

때마침 에이든이 손등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어 번 치며 명령했다. 여전히 눈빛은 싸늘했다.

“옷 벗고, 테이블 위에 다리 벌리고 앉아.”

간결하고 냉정한 명령이 떨어졌다.

레인은 말없이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섰다. 테이블의 높이가 살짝 높은 탓에 까치발을 오래 하고 있었더니 다리가 이상하게 저린 듯했지만 에이든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에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레인은 곧장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씩 벗어 내렸다. 처음에는 위에 걸치고 있던 가벼운 카디건을, 그다음에는 짧은 재킷과 조끼를, 마지막으로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고 난 후, 레인은 에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레인이 제 앞에서 옷을 벗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이든이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렸다.

계속 벗지 않고 뭐 하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확인을 받고 나서야 레인은 속옷마저 모두 벗어 완전한 나체가 되었다. 몸을 가려 줄 것 하나 없이 알몸으로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조금 싸늘한 기운이 맴도는 봄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레인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올라탔다. 피부로 싸늘한 추위가 스몄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이든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식사 시간이었고, 에이든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현재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타 에이든 앞에 앉은 레인은 양옆으로 다리를 벌렸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음부를 막고 있는 검은 마개가 정면으로 보였다. 레인의 희고 가는 다리에는 향유가 흐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에이든은 그 자국을 가만히 손바닥을 쓸었다.

“분명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왜 이렇게 질질 싸질렀지? 응?”

“아, 죄송합니……. 아흑! 흐윽!”

레인의 사죄는 에이든이 음부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순간 비명으로 바뀌었다. 두터운 에이든의 손바닥이 레인의 음부에 닿을 때마다 레인의 가느다란 몸이 고통으로 잘게 떨렸다.

비명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매질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에이든의 손찌검이 멈추었을 무렵, 레인의 음부는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퉁퉁 부어올랐다.

그 와중에도 구멍이 움찔대는 것을 보고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말아 올리며 웃었다.

“이렇게 때려 줘도 아주 좋아서 죽네. 맞으면서도 느끼다니.”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닌데…….”

그러한 반응이 에이든이 음부에 부어 넣은 미약 때문인지 전혀 모르는 레인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너무 아파서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건만, 자신의 아래는 눈치코치 없이 좋다고 구멍을 벌름대는 것이 느껴져 수치심에 변명을 내뱉던 목소리는 갈수록 흐려져 갔다.

그런 레인의 반응에 쐐기를 박듯 에이든이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검은색 실크 블라우스의 옷소매 사이로 굴곡진 팔뚝과 레인의 것에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두터운 손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소매 끝에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내 옷에 물을 잔뜩 튀겨 놓고는.”

애액인지 향유인지 모를 희끄무레한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필이면 에이든이 입고 있던 옷이 새까만 탓에 그 대비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레인은 부끄러운 마음에 새빨간 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웬만한 것에는 꿈쩍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녘 하늘빛을 닮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는 이미 붉은 노을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이든은 자리에서 슬쩍 엉덩이를 떼고서 한 손으로는 레인의 양 허벅지 사이에 남아 있는 자그마한 공간을 짚으며 그 사이로 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레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맞는 게 그렇게 좋았어?”

“아, 아니,”

“그렇게 좋았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난 또 네가 쑤셔 줄 때만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그런 게 아니라,”

“진작 말했으면 이렇게 향유 하나도 제대로 못 담을 만큼 쑤시지는 않았을 텐데. 응?”

레인이 하려는 변명들을 모두 잘라 먹은 채 제 할 말만을 이어가던 에이든이 레인의 구멍을 막고 있는 마개의 손잡이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배 속에 담긴 향유가 거칠게 출렁이는 감각에 레인은 옅은 신음을 흘리며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버티고 있던 레인의 양팔이 흥분 탓인지 가늘게 떨었다.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음담패설에 레인은 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조금 서러워졌다.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하며, 자신을 못마땅하다는 듯 분노가 잔잔하게 어린 채 자신의 육체를 훑어 내리는 시선하며, 그 모든 것이 지금의 행위를 더할 나위 없이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벌써 내 정기가 질린 건가?’

레인의 뇌리에 그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레인은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눈앞에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도, 코끝에 스미는― 바다를 품에 가득 실어 안고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시원한 체향도, 자신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근육질의 몸도, 이 저택에서 보내던 시간들도 모두 없었던 일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토록 갑작스레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져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눈물을 꾹 눌러 참고서 신음을 흘리는 레인의 모습을, 에이든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음심을 자극하는 레인의 신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기에.

에이든은 눈앞에 없는 가상의 에밀리와 요한을 앞에 두고서, 그들은 모를― 자신만이 아는 레인을 끊임없이 보여 주어 제 것임을 상기시키듯이 굴었다.

레인은 자신의 먹이였고,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먹잇감이었고, 제 손안에서만 몸을 떨며 신음했다. 이것이 진짜 레인의 모습이었다.

너희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아무렇지 않게 호의를 받는 레인이 진짜가 아니라,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우는 레인이 진짜 레인이라고.

그렇게 말하듯이 에이든은 신경질적으로 레인을 괴롭혔다.

불시에 아래 구멍을 막고 있던 마개 손잡이를 당겨 빼내자 담고 있던 향유가 다리 사이로 줄줄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란 레인이 황급하게 다리를 오므려 보려 했지만 에이든의 몸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래를 조여 보려 애썼지만 향유는 레인의 노력이 무심하게도 벌어진 구멍을 타고 줄줄 흘러나왔다. 덕분에 소매는커녕 에이든이 입고 있던 검은 바지가 온통 향유로 범벅이 되어 젖었다.

레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분명 향유를 담고 있으라고 그랬는데. 어떡하지?’

걱정도 잠시, 질 내부를 꽉 채우고 있던 액체가 모두 빠져나가고 텅 비어 허전하다는 듯 오물거리는 구멍에 에이든의 두터운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흐응!”

“안이 텅 비었네.”

“흐윽……. 으응, 읏, 흐으…….”

“향유는 한 방울도 없으면서 뭘 잘했다고 조여 대?”

“잘못, 흑,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레인이 반쯤 울면서 빌자 에이든은 선심 썼다는 듯 내부를 헤집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고는 애액과 향유가 진득하게 묻어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혀를 내어 핥아 올렸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강한 수치심이 밀려든 레인은 다시금 에이든에게 빌었다.

“제가,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제발 핥지 마세요, 제발…….”

“그렇게 핥고 싶어?”

레인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마음이 풀린 에이든은 짐짓 고민하는 척하다 이내 원하는 대로 레인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물렸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핥아 내리는 레인의 혀 놀림은 대단히 정성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듯 혓바닥을 넓게 펼쳐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기도 하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손가락 사이를 잇는 여린 살을 핥아 올리기도 했다.

능숙하게 혀를 움직이며 바닥에 내리깐 눈동자를 가지런히 덮고 있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가볍게 떠는 레인의 요염한 모습에 에이든의 마음 한구석이 흡족해졌다.

“좋아, 레인?”

레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내부를 드나들다 나온 것을 에이든이 핥는 걸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하는 게 낫다는 의미의 끄덕임에 더 가까웠지만 에이든은 말없이 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강아지에게 그러하듯 제법 애정을 담아서.

저택에 도착한 내내 미묘하게 날이 서 있던 목소리와 자신을 훑어 내리는 착 가라앉아 있던 시선과 거칠게 자신을 매질하던 손길과는 달리 지금은 화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고, 손길도 훨씬 부드러웠다.

에이든이 기뻐하는 기색이 얼핏 보이자 레인의 마음이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금 더 노력한다면 에이든이 자신을 버릴 시기를 잠시라도 뒤로 늦출 수도 있겠다, 그런 희망이 언뜻 보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좌우지간 에이든의 마음에 들도록, 아직 먹잇감으로써 쓸모가 있다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에이든이 기뻐할 일을 해야 했고, 에이든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해야 했다.

레인은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에이든의 손길에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여 기대었다. 물론 그만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혀로는 계속 손가락을 빨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는 강아지나 작은 동물들이 주인에게 그러하듯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꼭 자신을 예뻐해 달라고 부탁하듯이.

제 스스로 교태를 부려 오는 레인의 모습에 에이든은 자신의 소유욕이 채워지는 듯한 감각에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 이럴 것이지.

너도 나 없이는 못 살잖아. 나한테 그렇게 길들여져 놓고는 이제 와서 그딴 인간 남자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레인을 바라보며 시선으로 속삭이는― 소유욕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말들과 달리 에이든의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기에 그가 얼마만큼 자신에게 소유욕을 느끼고 있는지 레인은 전혀 몰랐다. 자그마한 교태에 채워질 만큼 에이든의 소유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버림받을까 봐, 자신의 정기가 맛이 없다는 이유로 쉬이 저를 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꼭 그게 오늘일 것만 같아서 그래서 레인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흡족하도록, 그래서 자신을 지금 당장 버리지는 않도록.

에이든은 깨끗해지다 못해 타액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레인의 입에서 빼냈다. 그러고는 레인의 다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들어가 있던 몸을 뒤로 하여 원래 자리에 앉았다.

레인이 타액으로 흐트러진 입가를 혀로 핥아 정리하며 다음에 이어질 명령을 기다리듯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에이든은 그런 걸 쉽게 알려 줄 수 없다는 듯 그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정원에서 하는 멋진 식사인데, 입고 있는 옷이 말이 아니네. 그치?”

실제로 레인이 아랫배에 가득 담고 있던 향유가 분수처럼 쏟아진 탓에 에이든이 입고 있는 옷자락이며 바지 앞섶도 모두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하필이면 까만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젖은 자국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실크 블라우스는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서 에이든의 다부진 몸의 굴곡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고, 에이든의 바지춤은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흥분했다는 것이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에이든은 더워서 그런 건지 답답해서 그런 건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흐트러진 블라우스 사이로 향유에 젖어 반들거리는 가슴팍이 드러났다.

“오붓하게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내 꼴이 이래서 누가 깨끗하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이든은 식탁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레인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와 위아래로 까딱이는 눈짓에 그제야 레인은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제가, 깨끗하게 해 드릴게요.”

레인의 입술 사이로 그 말이 흘러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이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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