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가장 평범한 로맨스에 대하여
봄을 앞둬서 그런지 날씨가 좋았다. 애플이 흥얼거리며 산길을 걷자 지젤이 웃었다.
“좋아요?”
“그럼 좋죠. 얼마나 신나는데요.”
애플은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듯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지젤은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리넷이 그쪽을 너무 많이 부려 먹긴 하죠.”
“음, 그런가요?”
“휴가인데도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황후님의 부시녀장, 애플이 장장 세 달의 휴가를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의 이야기다.
* * *
리시스트 제국에 황녀님이 태어난 지 오 년이 지났다. 아이를 낳을 때 황제의 머리를 다 쥐어뜯어 놓으며 ‘널 죽일 거야!’라고 위협했다던 황후의 이야기도 슬슬 잊힐 때가 됐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회자됐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아직 둘째가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황녀를 낳은 황후가 툭하면 ‘둘째는 없어, 다시는 없어! 카멜리아 따위 알 게 뭐람!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고!’라며 입버릇처럼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정말로 황후는 둘째를 낳을 생각이 없는 걸까?’ 하고 모두가 궁금해했다. 자연스레 그 질문을 받게 된 사람은 사과같이 발간 뺨을 하고 있는 부시녀장이었다. 성격이 불같은 황후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플이라고 별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모셔 온 아가씨는 처녀 시절부터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애플이 리네트의 속내를 예측할 수도 없었다. 리네트는 정말로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아가씨였기에. 어제는 애를 안 낳겠다 해 놓고 오늘은 낳아야겠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리네트였다.
그러니 애플은 당연하게도 입을 닫았다. 부시녀장으로서 꽤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태도였으나, 문제는 애플이 평민 출신이라는 데에 있었다.
황후가 아끼는 시녀이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질문하는 모든 이들이 애플의 상급자였다. 자연스레 그녀는 황후 궁 바깥에서는 좋은 취급을 받기 어려웠다. ‘평민 주제에 황후를 등에 업고 가지가지 한다.’는 게 그녀를 흉보는 귀족들의 태도였다.
애플을 답답하게 하는 건 또 있었다. 바로 시녀장을 맡고 있는 베켓 자작 부인이었다. 베켓 자작 부인은 낸터킷 황후 때부터 황후를 모셔 온 시녀였는데, 평소 매우 공정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시녀장이 됐다.
애플은 리네트가 약속한 것과 달리 부시녀장이 됐다. 이유는 하나였다. 애플은 제국 공용어를 아주 잘 쓰고 읽었으나, 황실의 문서에는 취약했다. 황성 공식 문서에는 아직도 종종 고대 제국어가 쓰였기 때문이다.
고대 제국어는 본래 리시스트 제국이 지금처럼 덩치를 키우기 전, 다른 나라의 글자를 빌려 와 만들어진 언어였다. 어릴 적부터 배우고 쓴 황족이나 귀족들은 괜찮았으나, 애플 같은 평민들에게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베켓 자작 부인은 성격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애플이 서류를 잘못 작성하면 이마를 찡그렸다. 화를 내지 않는 부분이 가장 무서웠다.
그녀는 언제나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류를 가져갔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주기는커녕 그저 귀찮은 일은 자신이 치워 버린다는 태도에 애플도 머뭇머뭇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기 일쑤였다.
리네트는 애플에게 ‘고대 제국어를 잘하게 되면 시녀장 자리에 올려 줄게.’라고 했지만, 애플은 어쩐지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밤에 초를 켜고 공부를 하려고도 해 봤지만, 낮의 황성은 너무 고됐다.
리네트는 쉬엄쉬엄하라고 했지만 모두가 엄청난 업무량에 치이고 있었다. 애플은 자신 혼자 게으름을 피울 정도로 못된 처녀는 아니었다. 그러니 밤이 되면 책상 앞에 앉아 봐야 곧 코를 박고 졸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업무에 시달리고, 인간관계에 정신이 깎이는 나날이었다.
황녀님이 다섯 살이 되어 록시온에서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던 날, 애플은 리네트에게 처음으로 울며 졸랐다.
“아가씨, 저 휴가 좀 주세요! 제발요!”
황녀님이 거처를 옮기면 자연스레 록시온 시녀들의 일도 줄어든다. 우여곡절 끝에 애플은 세 달의 휴가를 얻어 냈다.
황후는 ‘넌 좋겠다. 휴가 줄 상사도 있고…….’ 어쩌고 푸념하긴 했지만, 애플이 그녀를 모시게 된 이후로 별다른 휴가를 가지 못했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게다가 애플이 피곤할 때면 한쪽 다리를 살짝 전다는 것도 리네트의 죄책감에 한몫했다.
다만 리네트는 긴 휴가를 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바로 계곡의 마법사에게 초대장을 전하는 것이었다.
계곡의 마법사는 첫째 황녀님이 태어났을 때도, 미하엘이 결혼했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황후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후견인에 대한 투덜거림이 담긴 편지를 애플에게 주며 계곡에 한번 다녀와 달라 전했다.
호위로는 지젤이 붙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플은 황후의 최측근이었다. 그녀에게 악의를 가진 자가 애플을 납치하거나 죽이기라도 할까 봐서였다.
“마법사씩이나 되는 분을 이렇게 막 부려 먹어도 돼요?”
애플은 의문을 제기했으나, 지젤은 신난다며 바로 승낙했다. 계곡의 마법사를 보러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 * *
물론 휴가를 받고 나서 곧장 계곡으로 떠난 건 아니었다. 지젤과 애플이 만난 건 약 이틀 전이었다.
애플은 황후 궁에서 나오자마자 한 달 동안 집에서 누워 있었다. 말 그대로 누워서 모든 걸 해결했다. 사흘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아 펜플이 식겁해 방문을 열어 봤을 정도였다.
“흔히 사람들이 휴가를 받으면 누워서 숨만 쉴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러는 경우는 흔치 않잖아요?”
“아하하, 그런데 애플은 정말 숨만 쉬었어요?”
“그럼요. 침대에서 밥 먹고, 자고, 누워 있는 거 너무 좋더라고요.”
애플이 어깨를 으쓱하며 목을 두어 번 돌려 보았다.
“심지어 이제 목도 돌아간다고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뭐?’ 하고 의문을 가질 일이었겠으나, 지젤은 그 말에 바로 감탄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목도 잘 안 돌아가는 고됨으로는 마법사 또한 황성 시녀들에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와, 누워 있기만 해도 그게 되나요?”
“그럼요. 지젤 님도 한 사흘만 누워 보세요. 목의 각도가 달라질걸요?”
애플이 숲길을 씩씩하게 걸으며 웃었다. 지젤도 목을 두어 번 돌려보다가, ‘아이고, 저는 안 되겠어요.’ 하며 죽는소리를 했다. 그때, 어디선가 새가 삐로록- 울었다.
“어머, 뻐꾸기가 우네요.”
“벌써 뻐꾸기가 나왔나요?”
“이맘때 짝짓기를 해야 따뜻할 때 알을 낳을 테니까요. 암컷 뻐꾸기로 한번 변신해 보세요. 수컷 뻐꾸기들이 파르륵 날아들걸요!”
계곡은 봄을 맞아 한창 연두색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애플이 까르륵 웃으며 하는 소리에 지젤도 빙그레 웃었다.
“안 돼요. 아쉽지만 공간을 접었더니 좀 힘들어서요.”
“그게 그렇게 힘든 마법인가요?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마차 타고 올 걸 그랬어요.”
지젤은 이틀 전 애플을 수도에서 만나자마자 공간을 접어 바로 계곡으로 왔다. 계곡의 마법사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계곡 바로 아래 도착한 두 사람은 걸어서 마법사의 동굴로 가고 있었다.
“마법사님에게 초대장을 전해 준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예요?”
“글쎄요? 그냥 수도로 천천히 돌아가면서 마을을 구경할까 봐요.”
애플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딘가 여행을 가고 싶진 않고요?”
“글쎄요, 아가씨 따라서 너무 이상한 데 많이 다녔더니 솔직히 여행은 별로 안 가고 싶어요.”
“남쪽 나라에 가서 미남들을 끼고 사는 게 장래 희망이라고 들었는데?”
지젤이 의문을 제기하자 애플이 배시시 웃었다.
“저 남쪽 왕국 다녀왔잖아요. 거긴 저랑 안 맞더라고요.”
애플은 당초 남쪽 어딘가의 해변 마을에서 미남들을 끼고 여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했으나, 리네트를 따라 브라무스크의 천막에서 석 달을 지내 본 후에는 그 꿈을 완전히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쪽 남자들은 너무 몸이 좋고 단단해서 제 취향이 아니에요.”
“여자분들은 그런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나요?”
“물론 그런데!”
애플은 허리를 짚고 손가락 하나를 흔들었다.
“저는 좀 야리야리한 미남이 좋거든요!”
“아하……?”
지젤이 턱을 어루만졌다. 애플은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취향을 어필했다.
“저는 예쁘게 생긴 사람이 좋아요. 황제 폐하 같은 얼굴이 좋겠네요. 그림 같은 미남 있잖아요? 물론 황제 폐하가 좋다는 건 아니고요.”
“뭐, 그랬으면 저는 되게 재미있는 치정 싸움을 구경했을 수도 있겠네요.”
“황제 폐하께서 어디 다른 사람한테 눈이나 돌리겠어요?”
루카스 리시스트는 록시온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록시온의 시녀들이 업무 과중에 치인 것에는 루카스도 한몫했다. 황제가 매일같이 록시온에 머무르니 챙길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어쨌든 업무 과중과 별개로, 그런 루카스를 바로 옆에서 본 시녀들의 눈은 하늘같이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얼굴만 봐도 웃음 미어지게 하는 남자가 황후에겐 죽고 못 산다.
그야 리네트 카멜리아가 황제에게 쥐여 준 게 좀 많아야지, 하고 이성을 찾는 시녀들도 있기야 했지만, 언뜻 그림만 보고 있으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인에게 권력자 절세미남이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무해한 남자가 좋은 것 같아요. 제 발닦개가 될 것 같은 남자요.”
“그렇지만 돈도 있어야 하고, 얼굴도 황제 폐하만큼 미남이어야 하고요?”
“돈은 없어도 돼요. 제가 부자잖아요.”
“……리네트가 사람 여럿 망쳤군요.”
지젤이 혀를 내두르자 애플이 까르르 웃었다.
* * *
‘계곡의 마법사’는 두 사람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한다는 듯 동굴 입구부터 예쁜 별들을 천장에 매달아 애플의 감탄사를 자아냈다.
마법사의 동굴에 도착한 애플은 차를 끓이겠다고 나섰다. 애플의 차 맛을 아는 계곡의 마법사는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순 없다며 만류했으나, 애플은 막무가내였다.
“가끔은 사람 손으로 마시는 차도 그리우실 거예요!”
계곡의 마법사는 끙, 하고는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지젤은 어때요?”
대화를 나누다 애플의 이상형 이야기까지 들은 계곡의 마법사가 웃으며 물었다. 지젤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에 애플은 대번에 거절했다.
“마법사는 사절입니다!”
“이런. 마법사인 걸 빼면 지젤도 꽤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헌신적인 타입이고요?”
“아가씨 친구라서 두 배로 거절합니다!”
“어머나.”
계곡의 마법사는 아쉬운 표정이 됐다. 반면 지젤은 픽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제가 헌신적인 건 마법사님에게뿐이라고요.”
“글쎄요. 헌신적이라기보다는 좀 귀찮게 구는 것 같긴 하지만…….”
“너무하시네요, 정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당신이 더 너무한 것 같지 않나요?”
계곡의 마법사가 질린 표정으로 말하자 지젤은 ‘어차피 만나 주지도 않으시잖아요.’라며 투덜거렸다.
마탑에 방문한 계곡의 마법사는 탑의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거리를 하나씩 풀어 주고 사라졌다. 마법 연구부터 인생 상담까지 모두.
그녀의 전천후 해결 덕분에 마탑에선 엄청난 연구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그녀에게 재방문 요청이 쇄도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계곡의 마법사는 ‘도움은 딱 한 번’이라는 말과 함께 두문불출했다.
그러니 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애를 태우며 계곡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지젤이 다시 한번 마탑의 사절이 됐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계곡에 가 문을 두들겼으나 계곡의 마법사는 ‘적절한 이유 없이는 방문을 받지 않겠다.’며 지젤의 방문을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다 때마침 리네트의 초대장이 그런 지젤에게 절호의 핑계가 돼 주었던 것이다.
“결론은 세기의 미남이되, 애플을 해칠 수 없는 무해한 남자로군요.”
“그것입니다!”
“음, 그 조건을 만족하는 남자를 제가 알고 있긴 한데.”
“정말요!?”
애플이 새카만 눈을 부릅떴다. 그에 계곡의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당신의 발닦개가 될 것 같은 사람은 아니라 안 되겠군요.”
“에이, 사랑은 아무도 모르는 거랬어요. 발닦개는 처음부터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고요.”
발랄한 처녀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들기자 계곡의 마법사가 웃었다.
반면 지젤은 그런 애플을 보며 감탄했다. 이 제국에서 리네트를 빼고, 계곡의 마법사에게 이렇듯 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애플이 유일할 것이다.
그야 계곡의 마법사가 카멜리아 공작저에 머무르던 시절, 애플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돌보았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그녀에게 이렇게 편안한 태도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과연 맹수 조련사의 마인드…….”
“맹수 조련사요?”
“생각해 보면 리네트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를 앉혀 두고 드레스라도 입혀 낼 수 있었던 건 애플 양뿐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맹수는 심하잖아요. 우리 아가씨가 맹수라뇨! 우리 아가씨, 사실 가끔 여리기도 하거든요?”
“걔를 여리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플 양이 대단한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건 계곡의 마법사였다.
“됐고. 두 사람, 오늘 저녁 먹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세요.”
아무리 냉랭한 그녀라 해도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시점에 두 사람을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애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아침 일찍인가요?”
“내일 점심에 손님이 하나 오거든요.”
지젤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저 말고 여길 오는 사람이 또 있어요? 대체 누구-!”
누구냐고 묻는 지젤의 입을 계곡의 마법사는 아주 효과적으로 막았다. 지젤을 작은 쥐로 변신시킨 것이다.
펑, 하고 지젤이 사라진 자리에서 회색 털을 가진 쥐가 놀란 눈을 떼구르르 굴렀다.
찍찍, 찍찍!
이윽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쥐를 마법사는 손안에 가두어 들어 올린 후, 애플을 향해 웃어 보였다.
“저쪽 방에서 쉬어요. 몸을 씻고 싶으면 동굴 뒤의 온천을 쓰면 돼요. 알겠죠?”
“……예에…….”
이래서 마법사는 거절한 거라고, 애플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시끄러우면 상대방을 쥐로 만드는 종족이랑 대체 어떻게 연애를 하겠어?
* * *
그래도 온천은 반가웠다.
애플은 뜨거운 물로 몸을 씻는 걸 좋아했지만, 황성에서는 좀처럼 느긋이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일이 워낙 바쁘기도 했거니와, 시녀장인 베켓 자작 부인부터가 제 특권을 챙기지 않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애플이라고 혼자서 목욕장을 사용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집에를 가자니 황성에서 나갈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애플은 새벽같이 일어나 온천으로 향했다. 하지만 새벽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동물들을 보고는 마음이 좀 바뀌었다.
‘원숭이랑 같이 온천 쓰고 싶진 않아…….’
계곡의 마법사는 인간 외의 생물에게는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고, 계곡에는 정말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온천에도 동물들이 가득한 건 당연지사였다. 봄이라지만 아직 산속은 추웠기 때문이다.
결국 애플은 발만 담그기로 했다. 치마를 걷고 양말을 벗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발가락이 절로 움츠려졌으나 물 안에 발을 담그자 표정이 풀렸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흐, 좋다.”
리네트가 들었다면 너는 어째 노인같이 말한다며 웃었을 말투였다.
내친김에 애플은 품 안에 가져온 쿠키도 두어 개 꺼내기로 했다. 본래 계곡으로 가며 배고플 때 먹으려고 가져온 쿠키였으나, 딱히 먹을 일이 없어 남겨 둔 것이었다. 자그마한 손수건 안에 싸인 쿠키를 베어 무니 기분이 좋아져 절로 노래가 나왔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리네트가 황녀님에게 가끔 불러 주던 노래였다. 물론 황녀님은 노는 게 제일 좋다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왜 말과는 달리 항상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긴 했지만.
애플은 콧노래를 부르며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지끈거리던 발목도 뜨거운 물에 담그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온천에 몸을 담근 원숭이들과 물을 마시러 온 토끼들이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거리는 것도 귀여웠다.
‘노는 거 완전 좋다. 영원히 출근 안 하고 싶다.’
내친김에 발로 찰방찰방 물을 튀겼다. 뜨거운 김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 토끼들이 움찔거리다 팔딱팔딱 뛰어 풀숲 안으로 몸을 감췄다. 귀여웠는데.
그렇게 애플이 두 번째 쿠키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또 다른 동물이 나타났나 싶어 뒤를 돌아본 애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웬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애플의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시스트의 산에서 주로 나타나는 거대하고 흉폭한 빨간 곰은 아니었다. 몸집은 빨간 곰보다 반쯤 작았고, 털은 까만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플의 키보다는 컸으며, 발톱은 위협적이었다.
쿠키를 든 채로 눈을 부릅뜬 애플의 바로 앞에서, 곰은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애플의 시선이 쿠키 쪽으로 향했다. 비싼 꿀과 땅콩을 듬뿍 넣어 구운 쿠키였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런가?’
곰을 위협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애플은 조심스레 쿠키를 든 팔을 옆으로 뻗었다. 곰의 시선이 쿠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단 냄새를 쫓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온천으로 왔다가 쿠키 냄새를 맡았거나.
어느 쪽이건 애플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서 도망가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애플은 눈치를 보다가 쿠키를 툭, 하고 곰의 뒤쪽으로 던졌다. 곰이 킁킁 냄새를 맡으며 쿠키 쪽으로 몸을 돌린 후 그것을 먹었다.
우드득, 우드득.
곰의 입속에서 쿠키 씹히는 소리가 났다. 쿠키 먹는 소리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조심스럽게 몸을 낮췄다. 온천에서 나가야 하는데, 곰이 가로막고 있어서 아무래도 건너편으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치맛자락이 잔뜩 젖어 들어갔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두어 발짝 움직였을 때, 쿠키를 다 먹은 곰이 다시 일어섰다.
이에 애플이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순간이었다.
“뭐 하는 거냐, 빨리 도망 안 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애플은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봤다. 웬 인영이 숲 안쪽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그런 걸 가릴 새는 없었다.
곰 또한 큰 소리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크앙-! 하고 울었다. 남자에게서 발산되는 적의를 감지한 것이었다.
애플은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온천 건너편으로 뛰었다. 그 소리에 곰이 다시 애플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남자는 혀를 찼다.
“멍청한!”
야생 짐승은 도망치는 것을 쫓는 본능이 있었다. 자신이 주의를 끄는 동안 살금살금 도망치면 될 것을, 저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하지만 질타할 틈도 없이 남자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곧 곰이 크게 소리 질렀다. 애플은 도망가다 말고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남자가 곰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은 매서웠다. 검을 등에 박은 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헐레벌떡 뛰어 도망쳤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곰을 쫓으려다가 금세 포기했다. 상처 입은 짐승을 무기 없이 쫓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은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미 멍청한 짓을 몇 번이나 해 온 전적이 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남자가 배운 건, 사람이 대충 중간에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내 남자는 혀를 차며 도망치던 여인 쪽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보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위에 있었던, 그래서 누구에게나 당연스레 하대하는 말투. 비할 데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오만한 표정. 나이를 좀 더 먹어 미모도 무르익었으나, 도저히 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싸늘한 자색 눈.
애플은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제야 어젯밤 계곡의 마법사가 안다고 했던 남자가 누군지 그녀는 알아챘다.
루카스만큼 미남이지만, 도저히 애플의 발닦개는 되지 않을 남자.
노튼.
계곡의 영주, 인피리어 공작이 거기 있었다.
* * *
“마법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요?”
“하지만 극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젤, 당신이 말하는 방법은 마법 윤리를 어기는 마법들뿐이잖아요.”
동굴은 새벽녘부터 토론의 장이었다.
지젤은 아침 일찍 일어난 계곡의 마법사를 붙들고 마법의 쇠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국의 마탑은 폐쇄적인 성향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당연했다. 마법사들은 괴팍했고, 사람들은 마법을 대신할 것들을 잘도 찾아냈다.
“마법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계곡의 마법사가 마탑을 설립할 때 일찍이 정해 둔 룰이었다.
권력자들은 남을 해칠 수 있는 수단에 가장 큰돈을 지불했으나 마법은 그 대상에서 제외됐고,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법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자 기술이어야 해요.”
“거기에는 저도 십분 동의하지만…….”
토론에 집중한 두 사람은 동굴에 나타난 애플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두 분 되게 즐거워 보이시는데 죄송하지만, 저 수건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그제야 지젤이 화들짝 놀라 입구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망토를 몸에 두른 애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있었다.
“애플 양? 괜찮아요?”
“아뇨. 안 괜찮아요, 에취!”
지젤은 그녀의 기침을 듣자마자 손가락을 부딪쳤다. 파앗- 하고 순식간에 애플의 몸을 적시고 있던 수분이 날아갔다.
“고맙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젤이 벌떡 일어나는데 계곡의 마법사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노튼.”
노튼? 지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애플의 어깨 뒤를 넘겨다보았다.
그 뒤에는, 왜 그가 있는 걸 몰랐는지 의아할 만큼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흉악한 기세를 뿜어내며.
하지만 계곡의 마법사는 그 얼굴을 보고도 생긋 웃었다.
“보아하니 이번 달의 숙제도 훌륭히 해낸 모양이군요.”
“다음 달의 숙제까지…… 요.”
노튼은 코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숙제? 무슨 소리야?
계곡의 마법사가 빙긋 웃었다.
“인피리어 공작님은 매달 제가 내준 숙제를 하고 계시거든요.”
“무슨 숙제-”
“네게는 물을 권한이 없다, 남자.”
노튼이 험악한 표정으로 지젤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계곡의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착한 일을 하는 거죠.”
큽, 지젤은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점심에 온다던 손님이 바로 인피리어 공작이었답니다. 본래 세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저는 노튼이 이번 달에는 착한 일을 하지 않기에 드디어 그 눈을 제게 바칠 마음이 들었나 했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착한 일을 한 모양이군요?”
“……이자들 앞에서 말해야 하오?”
노튼이 이마를 찡그렸다. 계곡의 마법사는 환하게 웃었다.
“싫으면 그 눈알 주세요.”
“……마구간 여물통에 빠진 하녀에게 새 옷을 사 주라 했소.”
“아, 그렇군요. 좋은 성주님이네요. 애플 양에게 망토를 준 일은 다음 달 치로 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소.”
“안 돼요. 오늘은 이번 달이잖아요.”
계곡의 마법사가 얄밉게 말했다.
노튼은 눈을 부라렸으나, 심심하면 눈알을 빼 달라고 말하는 계곡의 마법사에게 더 이상 따지는 것은 무리인지라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애플은 약간 겁먹은 얼굴로 지젤 뒤에서 노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튼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다가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애플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 포악한 황자가 제게 무슨 나쁜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노튼은 뒤늦게야 애플이 누군지 알게 된 참이었다. 그는 곰에게 놀라 온천에 주저앉은 애플에게 제 망토를 둘러 주었으나, 그녀가 누구의 시녀인지 알게 된 지금은 제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튼은 의외로 별말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 한쪽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았다.
“점심에 찾아오라 했지만, 오늘 저녁에 일정이 있소. 그래서 일찍 왔고.”
“그래요. 이렇게 됐으니 넷이서 함께 아침을 먹을까요? 식탁 앞에 앉은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요.”
계곡의 마법사가 생긋 웃었다. 애플은 몹시 싫다는 표정으로 계곡의 마법사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이내 애플의 표정이 구겨졌다. 힝, 저 황자님…… 아니, 공작님이랑 밥 먹어야 돼?
* * *
계곡의 마법사가 리네트 카멜리아의 후견인이 되기로 선언한 이후, 계곡의 요새에 있던 제국의 병력은 완전히 철수했다. 황제는 요새를 노튼에게 내렸다.
하지만 요새로 쓰던 성은 폐쇄적이었고, 노튼은 갈수록 말을 잃어 갔다. 성안에 앉아 화를 내거나, 기물을 부수는 게 그의 유일한 일정이었다.
지금은 이마저도 신물이 나 대부분의 경우 노튼은 그저 누워 있었다. 낸터킷 황후가 목숨을 잃었을 때마저도.
눈물이 조금 났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가야 할 곳을 잃은 배와 같았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이에 계곡의 마법사는 영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에게 숙제를 내 주었죠. 한 달에 한 번 착한 일을 하고 내게 와서 보고하라고.”
어린 학생을 일컫듯이 말하는 그녀를 노튼이 노려보았으나, 그게 다였다. 노튼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앞에 있는 과일을 포크로 잘게 분해하기 시작했다.
애플은 이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황성에서 완벽한 예법을 선보이던 황자님이 하는 행동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저는 사실 노튼을 그리 싫어하지 않거든요. 어머, 노튼.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진짜예요.”
“앗…….”
“왜요?”
지젤이 조그맣게 신음하자 계곡의 마법사가 물었다.
“저런 미남이 취향이셔서 혹시 저를 귀찮아하시는 거라면…….”
“지젤, 저는 사백 살도 넘게 먹은 사람이에요. 지젤이든 노튼이든 저에게는 어제 태어난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덧붙여서 지젤이 혹시 제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지젤의 빠른 부정에 계곡의 마법사는 웃으며 반겼다.
그동안에도 노튼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과일을 분해하고 있었다. 애플은 그것을 못 본 체하고 싶었다. 정말로.
“저기요, 황자님…….”
애플이 조그맣게 말을 걸자, 노튼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너무나 날카로워서 애플은 조금 쫄았지만, 용기를 내서 다시 말했다.
“과일이 드시기 힘드신 거면 제가 잘라 드릴까요……?”
그가 과일을 먹기 위해 저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녀는 노튼이 식탁에서 저러는 것이 보기 싫었다.
애플은 리네트가 식사를 깨작거릴 때면 그 접시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곤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좋은 음식이 귀한 집에서 자란 평민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팔십 먹은 노인으로 보이나?”
황자는 그녀의 예상대로 예민하게 굴었다. 애플은 코를 찡그렸다.
“그럼 혹시 드시기 싫은 거면…….”
“지금 나를 투정하는 어린애로 보는 건가?”
아니, 그럼 뭔데! 애플은 정말로 짜증이 났다.
“됐어요, 그럼.”
요상한 분위기에 지젤이 눈알을 굴리다가 말을 돌렸다.
“애플 양, 우리는 오늘 여길 벗어날 텐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나요? 제가 바래다 드릴 테니 아무 곳이나 말해 보세요.”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고…….”
지젤의 필사적인 분위기 전환에 그녀도 호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플은 착한 처녀였으니까.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단 수도로 바로 돌아갈까 해요. 원래는 천천히 갈까 했는데,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또 예전처럼 일에 치여 공부도 못할 것 같아서요.”
“공부요?”
“고대어 공부죠, 뭐. 좋은 선생님을 수도에서 구해 봐야겠어요. 그래야 시녀장한테도 덜 눈치가 보일 것 같고…….”
그 말에 코웃음 친 건 노튼이었다. 그는 여전히 과일을 포크로 잘게 짓이기며 무시하는 말투로 애플을 비웃었다.
“고대어 선생을 구한다니, 웃기는 말이군.”
“……뭐가 웃기신데요?”
“고대 제국어를 따로 가르치는 선생은 없다. 그건 자연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체득하는 것이고, 기본에 가까운 일이니.”
고대 제국어는 공용어와 거의 비슷했지만 가지고 있는 뜻이 조금씩 다르거나 동음이의어가 많아, 귀족들은 대부분 책을 읽어 가며 그것을 체득했다. 그로 인해 고대어만 따로 가르치는 선생을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어렴풋이 고대어를 배워야겠다 생각한 애플로서는 몰랐던 사실이었고, 곧 그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그렇구나…….”
의외로 쉽게 납득하는 애플을 보고 노튼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내지 않나?”
그 말에 애플은 이마를 찡그리고 정말 이상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노튼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신가요? 화내라고 일부러 그러셨어요?”
“……그건 아니고.”
노튼이 입을 닫았다. 그는 황후의 시녀를 일부러 보란 듯이 무시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해 하지 않자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애플이 어떤 여인의 밑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플은 항상 자신보다 몇 수는 먼저 생각하는 리네트와 몇 년을 보냈다. 자연스레 그녀는 무언가에 대해 잘 몰라도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르는 건 배우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노튼의 속내를 모르는 애플은 여전히 이상한 표정을 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전직 황자님이 하시는 말이니 맞겠죠. 혹시 저한테 틀린 말 하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니다.”
“그럼 됐어요. 마법사님 앞이니 거짓말하셨을 리도 없고.”
그 말에 지젤이 피식 웃었다. 노튼이 그쪽을 가볍게 노려보았지만 이내 빠르게 시선을 거뒀다. 계곡의 마법사가 어쩐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노튼과 애플을 번갈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좀 있는데.”
“전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애플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계곡의 마법사가 웃었다.
“좋은 선생을 제가 하나 알고 있거든요. 황성에서 통용되는 고대어를 아주 잘하고, 시간도 많죠. 게다가 제 말을 아주 잘 들어요.”
“그 선생, 저도 아는 사람 같습니다.”
지젤이 손을 들며 한마디 거들었다.
애플은 사색이 되었고, 노튼은 으르렁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마법사.”
“아휴, 왜 그러죠? 당신 잘난 척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노튼.”
계곡의 마법사가 턱을 괴고 웃었다.
“게다가 애플은 차를 ‘아주’ 잘 끓여요. 최근에 차를 끓여 주는 하녀가 그만두지 않았나요?”
어차피 계곡의 마법사의 말은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차를 제대로 마실 수 없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성격이 더 나빠진 노튼에게는 약간의 희소식이기도 했다.
노튼이 애플을 바라봤다. 겁먹은 시녀가 거기 있었다.
물론 노튼은 자신이 사기당할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패착이었다.
* * *
계곡의 요새에는 생각보다 사용인이 많았다. 그야 당연했다. 계곡 주변은 마력석을 캐는 광부들 외에는 평민들이 따로 돈을 벌어먹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곡의 요새가 인피리어 공작의 성이 된다는 기별이 왔을 때, 요새의 사용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새의 기사들이 모두 철수하면 어떻게 돈을 벌지?’ 하고 모두 고민했으니까.
그들이 노튼의 사용인으로 고용 승계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구간을 지키는 하인부터 세탁부, 성을 수리하는 인부들에 더해 정원사나 요리사까지 추가 고용되었다. 노튼이 아주 굶어 죽을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튼은 제국의 황자님이었다. 아무리 사용인들이 많아도 그에게는 척박하고 춥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요새를 좋게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줄 몰랐다.
애플은 눈을 찡그렸다. 제게 주어진 방의 처참함 때문이다.
노튼의 방 근처에 자리한 하녀의 방은 싸늘했고 먼지가 자욱했다. 바닥에 카펫 대신 깔린 면직물은 낡은 데다가 닳아빠졌고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나무 침대는 금방이라도 썩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가장 작은 마을의 싸구려 여관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사용인의 복지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분이군요…….”
애플을 안내한 하녀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걸 생각해 주는 귀족 나리들도 있다던가요?”
“저희 아가씨는 그러셨으니까요…….”
하녀는 애플과 입씨름할 시간에 빨리 제 일을 끝마치고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당연하게도 애플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간략하게 애플이 앞으로 할 일과, 그녀가 자주 오가게 될 곳을 알려 주었다.
아무리 요새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귀족의 성과 구조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므로 애플은 금세 성의 지리를 익혔다.
계곡의 마법사는 한 달 동안 노튼에게 고대어를 배우라고 말했다. 그녀의 속셈이 뭔지 애플은 잘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애플이 노튼에게 아무리 까불어도 그녀의 목숨은 안전했다. 계곡의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동화가 끝났다고 해도, 사람의 인생이 끝나지는 않는 법이죠. 그리고 인간이라면 좀 배울 줄도 알아야 하고요.”
그녀가 애플에게 선물로 귀여운 사과 모양 브로치를 달아 주며 한 말이었다. 애플은 아무리 생각해도 계곡의 마법사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뒤쪽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배워야지!
‘좋아! 베켓 자작 부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다!’
그렇게 귀엽다면 귀엽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목표를 세운 채 애플은 인피리어 공작 성에 들어왔다.
지젤은 영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계곡의 마법사가 ‘정 걱정되면 당신도 한 달 동안 그 요새에 있든가요. 그동안 내 동굴에 드나드는 것 정도는 용인하도록 하죠.’라고 말하는 바람에 대찬성하는 입장이 돼 버렸다.
하루에 세 시간. 애플이 차를 가져가는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노튼은 애플을 가르치게 됐다.
이게 무슨 우스운 조합이란 말인가. 리네트가 듣는다면 웃을까, 울까? 애플은 궁금해하며 차를 준비했다.
* * *
“……계곡의 마법사가 내게 사기를 쳤군.”
노튼은 애플이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마를 찌푸렸다.
“시고, 떫고, 달아. 어떻게 차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맛이 날 수가 있지?”
“감사합니다.”
“자랑이 아니다. 빌어먹을.”
노튼의 아름다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애플은 감사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조금 시무룩해져 있었다. 면전에서 차가 맛이 없다고 지적받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애초에 차 맛 같은 건 잘 모르시는 분이고, 루카스 전하는 아가씨만 옆에 있으면 다 좋다는 분이었고…… 프라임 각하는 나보다는 로가나 아가씨가 끓인 차를 드셨고…….’
속으로 자신이 차를 내간 상전들을 꼽아 보던 애플은 자신이 지적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납득했다.
하지만 눈앞의 공작님은 차라면 도가 튼 황성 시녀들의 시중을 받던 분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내일은 좀 노력해 볼게요.”
“노력한다고 그게 될…… 됐다.”
공작은 이마를 찡그리고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애플의 왼쪽 가슴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과 모양 브로치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일개 시녀가 달았다기엔 너무 비싼 보석 브로치. 계곡의 마법사가 그것을 달아 주는 것을 노튼도 본 참이다.
계곡의 마법사가 ‘한 달에 한 번 착한 일 하기’ 따위의 숙제를 제게 내 주었을 때 그가 반발하지 못했듯, 이번에도 같았다.
노튼은 혀를 차며 애플에게 책을 던졌다. 뭔지도 모르고 덥석 책을 받은 애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가요?”
“리시스트 제국사 평전.”
“어…….”
“그걸 읽어 보다가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고쳐 주겠다.”
“어…… 네…….”
애플은 눈을 깜박이다가 책을 열었다. 딱 봐도 비싼 양피로 싸여 있는 두꺼운 책. 아마 엄청나게 비싼 책일 것이다.
이런 걸 막 던지다니. 매일 서가를 정리하며 도둑맞은 책이 있을까 봐 마음 졸이는 하녀들의 마음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그 거친 손속에, 애플은 혀를 차며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여로가 뭔가요?”
“뭐?”
창가에 앉아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노튼이 애플 쪽을 바라봤다. 애플은 노튼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사란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길게 그려진 한 줄의 여로와 같지만, 기실 그 여로는…….”
“여행길.”
“아하!”
애플은 눈을 깜박이더니 책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정확히 노튼이 두어 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지양이 뭔가요?”
“……그걸 몰라?”
“아니,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왜 물어?”
노튼이 짜증을 냈다. 애플은 울고 싶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아는 단어랑 뜻이 반대인 것 같아서요…….”
“읽어 봐.”
“……그러니 우리는 과거의 일을 거울삼아 어리석은 과오를 반복하는 것을 지양해야 할 것이며…….”
“그게 뭐?”
공작님의 태도는 실로 신경질적이었다. 한 달 내내 맛없는 차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애플은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그…… 지양은 따라간다는 뜻 아닌가요?”
“그건 지향.”
“아하!”
애플은 옆에 있던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지양’과 ‘지향’이 어떻게 다른지 적어 놓는 것이었다.
노튼은 이마를 짚고 싶은 기분이 됐다.
‘저런 게 황후의 부시녀장이라고?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똑똑한 척 굴더니, 저런 멍청한 시녀를 끼고도는 이유가 뭐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나가라고 내쫓을 수도 없다.
노튼은 짜증스럽게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두들기며, 열심히 적는 여자애를 비스듬히 쳐다봤다. 계곡의 마법사는 제게 인간이라면 배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저런 멍청한 계집애에게 내가 배울 게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곰에게서 그녀를 구한 건 순전히 실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곰에게 잡아먹히도록 그냥 놔둘걸. 노튼은 애플이 들었다면 대경실색할 생각을 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하지만 애플은 그가 그런 생각을 이어 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곧이어 ‘그런데 알데아토는 누구인가요? 그리고 그 질녀라는 건 무슨 뜻인가요?’라고 질문을 연이어 해 댄 것이다.
‘리시스트 제국사 평전’ 서문의 열여덟 페이지 중 두 페이지를 설명하는 데 노튼은 결국 세 시간을 전부 써 버렸다.
* * *
나흘에 걸쳐 겨우 ‘리시스트 제국사 평전’ 서문을 다 떼었을 때, 노튼은 자신이 교과서 선택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눈앞의 시녀에게 그 책은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여섯 살 때 다 읽었다. 넌 대체 몇 살이지?”
“저요? 스물여섯 살요. 각하께서 이 책을 다 읽으셨을 때보다 스무 살이나 많네요!”
창피해해도 모자랄 노릇인데,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애플을 노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짜증 난 표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쏘아붙였다.
“자랑이 아니다.”
“하지만 창피한 것도 아닌걸요.”
“이게 왜 안 창피한가?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다.”
“아, 그거야 그렇죠.”
애플은 제국사 평전의 표지를 톡톡 두들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황자님만큼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해도 되는 사람이었으면 부끄러워해야죠. 하지만 전 시녀인걸요?”
“황성의 시녀들도 모두 이 정도는…….”
“아, 저는 평민이었거든요.”
한때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죽이려 했던 황자님이 무섭지도 않은지, 애플은 노튼의 말을 자르고 까르르 웃었다.
노튼은 그녀를 무례하다고 혼내도 될지, 아니면 이마저도 계곡의 마법사는 용납하지 않을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플은 말을 이었다.
“전 여섯 살 때 어머니를 도와서 집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별해야 했어요. 실수로 독초라도 캐면 그날은 식구들이 다 배앓이를 했죠. 각하께서는 그런 환경은 아니셨을 거 아녜요?”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예전에는 황자님이셨고, 지금은 공작 각하시죠. 아무튼 고대 제국어 같은 걸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고요, 제가.”
너야 속 편하게 공부했으니까 그렇지, 라는 말은 훌륭하게도 노튼의 성질 머리를 건드렸다. 그 말에 악의가 정말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노튼은 더 짜증이 났다. 결국 그는 또다시 비뚠 말을 내뱉었다.
“가난한 것도 자랑은 아니다.”
그 말에 애플은 입을 닫았다. 그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닫으니 노튼은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이 시녀가 부끄러움을 알려나.
하지만 애플은 잠시 책 표지를 쓰다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요, 각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고하라.”
“각하는 왜 본인이 여기 계신지 아직도 잘 모르시죠?”
“……뭐라고?”
시녀는 뺨을 사과같이 붉히고 그를 쳐다봤다. 화가 나서였다.
노튼은 감히 내 앞에서 화를 내는 시녀가 있다니, 하고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대방이 제게 기어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게 익숙했으므로.
하지만 동시에 그 또한 화가 났다. 시녀 주제에 제 상태를 지적하는 그녀의 태도가 건방져서였다.
그때, 애플이 말을 이었다.
“전 제가 그런 사람이니까 각하께서 더 친절히 설명해 주셨으면 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자랑이 아니라고요.”
“내가 여기서 너에게 더 친절하라고?”
“설마 그게 각하의 가장 친절한 태도인가요?”
어느새 노튼의 손은 소파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그러나 애플은 지지 않고 덧붙였다.
“각하, 친구 없으시죠?”
“-나가.”
노튼의 말에 애플은 곧장 책을 챙겨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적어 내린 종이를 챙겨 책 안에 끼워 넣는 태도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애플이 그렇게 종이와 흑연을 챙기고, 새카매진 손가락에 책등이 더럽히지 않도록 팔에 책을 끼우고 나갈 때까지, 노튼은 애플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애플은 단 한 번도 노튼을 돌아보지 않았다.
* * *
노튼은 그녀가 이튿날부터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리네트 카멜리아의 하녀를 몇 년씩이나 했던 여자애를 얕봐서는 안 됐다.
그는 다음 날 오후, 어김없이 트롤리를 밀고 들어오는 시녀를 보고 기가 막혔다.
“무슨 일이지?”
“모르셔서 물으세요?”
애플은 뜨거운 물이 담긴 다기를 톡톡 두들겼다.
“차 드세요.”
“……필요 없다.”
“차 우리는 법을 좀 바꿔 봤으니까 드셔 보세요.”
노튼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플은 찻잎을 골라 담고, 찻물을 따랐다.
노튼의 앞에 찻잔이 놓였을 때, 그는 시녀의 눈을 올려다봤다. 자신과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 거라면 다 허튼짓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녀에게선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눈 안에는 방법을 바꿔 우린 찻물에 그가 보일 반응에 대한 기대감뿐이었다.
노튼은 남의 적의에 예민했고, 정말로 이 시녀가 제게 적의라곤 요만큼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예?”
애플이 눈을 깜박이자 그가 투덜댔다.
“대체 어떻게 요만큼도 발전이 없을 수 있느냔 말이야.”
“……맛없나요?”
“시지는 않군.”
“뭐야, 그럼 발전했네요?”
시녀는 빙그레 웃고는 사탕 통을 집어 노튼의 앞에 내려놨으나 노튼은 이마를 찡그리며 사탕 통을 밀어냈다.
그에 애플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사탕 통을 도로 챙겨 넣은 후, 트롤리 밑에서 책을 꺼냈다. ‘리시스트 제국사 평전’이었다.
“……진짜로 계속할 셈인가?”
“어, 하기 싫으세요?”
“나는 지금 네 의향을 묻고 있는 건데.”
노튼의 말에 애플이 감탄했다.
“우와,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나 봐요!”
“뭐?”
무슨 소리야? 노튼이 의아해하자 애플이 생긋 웃었다.
“저는 각하께서 남의 의향 같은 걸 물어볼 만큼 좋은 분이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계집.”
“아닌데…… 아까워요.”
화를 냈을 때는 빨간색이었는데, 오늘 애플의 뺨은 분홍색이었다. 애플은 얄미울 정도로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답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마법사님이 각하의 눈알을 뽑아 귀에 다실 테니까.”
노튼은 이를 악물었다. 애플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애플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주근깨가 조금 있는 분홍색 뺨을 가진 여자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아가씨는 각하께서 즐거워할 만한 일은 하나도 안 하려고 하셨죠. 제가 여기서 관두면 누가 제일 즐겁겠어요? 각하지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게다가 잠시 생각해 봤는데, 제가 수도에 간다 한들 각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을 구할 순 없을 거 아니에요? 심지어 돈도 내야 하고요. 각하에게 배우면 공짠데.”
“공…….”
공짜. 평민의 계산속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애플은 노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리네트의 뒤에서 몇 번 마주해 봐서 그가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애플은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화가 좀 났다.
하지만 노튼의 방을 빠져나오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녀가 지금 여기서 그만둔다면 수도에 가서 괜찮은 선생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시녀장이 꼭 되고 싶었으므로.
그런데 노튼만큼의 선생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노튼이 말했듯 고대어라는 것은 이제 거의 사장된 언어인 데다가 알게 모르게 공용어 안에 녹아 있어서 따로 배우기도 버거웠고, 돈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선생들은 대부분 귀족이다. 하급 귀족이라 할지라도 애플보다 한참은 높은 사람들. 돈을 내고 배우는데도 꼼짝 못 해야 하는 계급이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까마득하게 높은 황자님, 심지어 공짜 선생에게 배우는 게 한참 나으리라.
그리고 심지어 이 황자님은 제게 손도 까딱 못 하는 걸.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심술 때문에 속이 배배 꼬인 공작님이 퉁명스러운 소리를 하는 것 정도는 봐주자고 생각한 애플은 이를 노튼에게 솔직하게도 털어놨다.
노튼은 신음했다.
“너 이 계집…….”
“남자는 아니지요.”
냉큼 대답하는 애플을 보고 노튼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으나,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한 달. 한 달이다. 게다가 첫 주는 거의 지나갔다. 삼 주. 삼 주만 참자. 노튼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로 한숨을 쉰 후, 제 소파 한쪽에 있던 책을 던졌다.
“어머.”
애플은 멋모르고 책을 받은 다음에 눈을 깜박였다.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
“……고대어가 제일 자유분방하게 쓰인 데다 내용은 쉬운 책이다. 이런 거라면 너도 배우기 쉽겠지.”
“세상에.”
애플은 그 책과 노튼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의구심 섞인 눈초리에 노튼이 다시 그녀를 노려봤다.
“뭐?”
“제가 올 줄 알고 계셨어요? 책을 골라 놓기까지 하셨네.”
“……앞으로 수업과 관계없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
노튼은 애플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애플은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사탕 통을 꺼냈다.
“사탕 하나 드세요.”
“필요 없다.”
노튼은 사탕 통에 싫은 것이라도 묻어 있는 듯 질색하며 턱을 괴었다.
“읽기나 해.”
“네, 그럴게요. 음…… 오늘 아침에 일어나 문득 자서전을 집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데미안 리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라 나조차도 내가 무슨 순서로 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다. 첫 걸음마를 뗄 때 오른발부터 먼저 뗐나? 아니면 왼발부터? 물론 이런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나…….”
애플의 낭랑한 목소리가 노튼의 방을 채웠다.
노튼은 그 내용을 가만히 들으며 자색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 * *
저녁 식사는 언제나와 같이 맛이 없었다. 노튼의 마음에 드는 식사를 이 근방 지역의 요리사가 만들어 냈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식사를 대강 물린 후 노튼은 긴 소파에 방만한 자세로 앉아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을 넘겨 보았다.
다른 뜻은 없었다. 순전히 제 기억과 애플이 읽어 내는 내용들의 비교를 위해서였다. 낮 시간 내내 애플이 읽던 자서전을 들으며 노튼은 ‘저게 그런 내용이었던가?’ 하는 생각들을 했다.
프라임 공작가의 방랑자 데미안 리아는 상당히 제멋대로 자서전을 써 내려갔는데, 노튼의 기억이 맞다면 그 책은 순서도 뒤죽박죽이었고 내용은 난잡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듣는 자서전은 뭐랄까, 몰래 읽는 모험 소설 같았다.
‘이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노튼은 데미안 리아가 프라임 공작가에서 뛰쳐나오면서 훔쳐 온 술 두 병으로 말을 사는 대목을 보고 있었다. 데미안 리아는 술 두 병을 가지고 물물교환을 거듭한 끝에 늠름한 준마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부분을 보고 어린 노튼은 ‘귀족으로 태어나 협잡꾼이 따로 없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삐져나왔다.
‘나도 참. 재미있는 일이 없으니 별걸 다 그렇게 생각하는군.’
노튼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책을 넘겼다. 화려한 파티도, 진수성찬도, 좋은 술도 없는 계곡이다. 사용인들은 노튼의 눈에 띄지 않게 일하며 그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 교류하는 귀족도 없었다.
현 황제가 등극한 뒤로는 안부 인사 삼아 오던 편지도 끊겼다. 그리고 낸터킷 황후가 죽은 후로는…….
그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그 이름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그는 손을 뻗어 설렁줄을 당겼다.
땡그르르르…….
종이 몇 번 울렸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설렁줄을 당기던 노튼은 이마를 찡그리고 시계를 봤다.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보통 공작쯤 되는 사람의 성이라면 밤늦은 시간에도 사용인들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하지만 이곳은 계곡이었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출퇴근했고, 성에 거주하는 극히 적은 사용인들은 노튼의 눈이 닿지 않는 외성에서 지냈다. 그러니 늦은 밤이 되면 노튼은 항상 혼자였다.
그가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였다. 끽,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노튼은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숄을 걸친 애플이 하품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와 봤어요. 무슨 일이세요?”
“네가 왜…….”
“그야 제가 각하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쓰고 있으니 그렇지요. 그거 당기면 제 방에서는 잠도 못 잔답니다, 각하.”
애플이 어깨를 으쓱하며 노튼을 바라봤다. 노튼은 잠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술잔이나 가져와.”
“음…… 알겠어요.”
그리고 잠시 후, 밖에 나갔다 돌아온 애플이 내미는 잔을 보고 노튼은 기가 막혔다. 그녀가 술잔이 아닌 찻잔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술잔을 가지고 오라 하지 않았나?”
“이 시간에 바랄 걸 바라셔야죠. 전 성의 부엌도 방금 처음 들어갔다 와 봤어요.”
차를 끓인다고는 하지만, 집기들은 대부분 부엌의 하녀들이 준비해 준다. 애플이라고 이 밤중에 깜깜한 성의 대부엌에 다녀온 것이 쉬웠을 리 없었다.
그녀는 노튼의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들어 찻잔에 따랐다. 미약하게 향긋한 냄새와 섞여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적당히 드세요.”
“……이 시간에 남자 방에 와서 무섭지도 않은가?”
술잔을 내미는 애플을 보고 노튼이 흥미롭게, 동시에 위협하는 듯이 물었다.
그에 애플은 하, 하고 웃었다.
웃어? 노튼의 눈썹이 꿈틀하자 그녀는 정말로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절 위협하고 싶으셨으면 술잔 같은 걸로 까탈 부리질 마셨어야죠.”
“……무슨 소리지?”
“진짜 여자에 눈 돌아간 남자들은 술잔 같은 건 눈에 뵈지도 않는다고요.”
허, 헛웃음이 나왔다.
“귀족 아가씨들 앞에서 술잔 같은 걸로 핑계를 대며 젠체하는 남자들은 어디에나 있어.”
“제가 귀족 아가씨는 아니잖아요.”
할 말이 없었다.
애플은 ‘네가 나를 취하려 들었으면 진작 그랬을 것이며, 이제 와서 위협해 봐야 네가 그럴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하녀의 감 같은 거였다. 젊고 고운 하녀 애들을 취하려는 ‘높으신 놈팡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노튼이 최소한 그런 인물은 아니었기에, 애플은 그저 이 나리께서 헛소리 그만하고 저를 얼른 보내 주었으면- 정도의 생각만 할 뿐이었다.
“더 필요한 거 없으시면 저는 돌아갈게요. 아-”
애플이 몸을 돌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각하는 밤에 안 추우세요?”
그리고 이튿날 아침, 공작성의 집사는 성의 찬 바람을 막을 태피스트리와 침구를 몇십 개씩 주문 넣어야 했다.
* * *
리시스트 제국에서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들은 대부분 공작이 된다. 단승 작위에 불과하지만 황족으로서의 권력은 유지되기에 다들 결혼 정도는 했다. 더군다나 황가에서도 체면치레를 위해 그 자식들에게 작위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노튼에게는 영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황제가 노튼과는 거의 원수에 가까운 루카스다. 게다가 ‘계곡의 마법사’가 노튼을 죽을 때까지 감시한다는 사실이 제국 전역에 퍼져 얻을 것 하나 없는 그와 결혼하려는 여인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귀족에 한해서다. 평민은 이야기가 달랐다. 노튼에게는 엄청난 재산이 있었다. 제국의 황자쯤 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가 계곡에 왔던 초반에는 그의 침실을 차지해 보려는 여인들이 종종 나타났다. 물론 노튼에 의해서 개망신을 당한 후 쫓겨 갔지만.
그녀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마법사 때문이었다. 노튼은 자신이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는 짓을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법사가 요구하는 대로 착한 일 운운하는 짓을 따라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튼은 요 며칠간, 애플을 제게 붙인 마법사의 심산이 어쩌면 다 늙어서 젊은 처녀, 총각 붙여 놓는 노인들의 짝짓기 놀이 비슷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부시녀장님의 방에…… 벽난로를요?”
“그래.”
“하지만 그분은 다음 주면 떠날 분인데…….”
“그래서?”
노튼은 고개를 기울이며 비스듬하게 집사를 바라봤다. 집사는 두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안에 차질 없이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예.”
“정원사에게 봄꽃이 피었으면 좀 솎아다 꽂아 두라고 하게.”
“예? 예.”
집사가 되물었다가 다시 답했다. 그러나 역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에…….”
“내 방에.”
“아, 예.”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튼은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봤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한가운데에서, 새카만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땋아 올린 애플이 정원사와 이야기하다가 정원사가 내민 흙 뿌리를 받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이 났다. 춥다기에 굳이 집사를 불러다 방에 태피스트리 같은 걸 달아 줘도 뚱하니 감사하다고 딱 한마디 하더니, 저딴 흙 뿌리 따위를 받곤 환히 웃는다.
그러니까, 노튼이 마법사를 의심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게 그녀의 심심풀이 짝짓기 놀이라면, 어쩌면 그게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 * *
노튼은 불확실한 것을 질질 끄는 취미가 없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돈 좋아하나?”
“예? 당연하죠.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애플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어 책의 한 부분을 소리 내 읽었다.
“-아무튼 돈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황제 폐하께 내 전 재산을 맡긴 다음 내가 실수할 때마다 벨린 금화 한 개씩 까자고 말했는데, 폐하께서는 내 뒤통수를 우아하게 후려갈겼다……. 여기엔 한 분 계시네요. 선선대 황제 폐하께서는 데미안 리아 경의 돈이 싫으셨나 봐요.”
“……진짜로 그런 게 궁금해서는 아니다.”
어쩐지 입이 말라 눈앞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 노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신맛도 단맛도 이제는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플의 발전을 칭찬할 만했는데, 여전히 떫은맛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요?”
“혹시 내 잠자리를 덥히고 싶은 생각이 있나?”
그 말에 애플은 들고 있던 책을 내리고 선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시선을 읽을 수가 없어서 노튼은 괜히 이마를 찡그려 보였다.
이윽고 애플이 피식 웃었다.
“제가 언젠가 이 말을 듣고 너무 감동적이어서, 저도 꼭 상사에게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황후 전하가 아니라 각하께 쓰게 됐네요.”
“말해.”
“각하, 미치셨어요?”
“무례한!”
그러면서도 노튼은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본인도 낯이 뜨거웠던 것이다. 그는 이어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마법사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너와 나를 붙여 놓은 것 같더군. 해서 너도 그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 궁금해서다.”
“전하는 그럴 마음이 있으세요?”
애플이 뚱하게 물었다. 노튼은 조금 망설였지만, 아니라고 말을 아끼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시녀의 휴가는 다음 주면 끝나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신경이 쓰인다.”
“제가요?”
“그래.”
노튼은 흠, 하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바보가 아니다. 마법사의 얄팍한 수작쯤은 알고 있어. 내게 한 달에 한 번 착한 일 따위를 시키는 것처럼, 네가 나를 어떻게든 바꿔 놓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
여전히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는 애플의 새카만 눈동자와 그의 시선이 부딪쳤다. 노튼은 그 까만 눈동자를 통해 지난 삼 주를 돌이켜봤다.
애플은 되바라지고, 버릇없고, 가끔 무례한 말로 뺨을 맞은 듯한 기분을 선사했지만, 이상하게도 노튼은 점점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어쩐지 처음처럼 그녀의 심산을 뒤집어 놓으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졌달까.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이튿날이면 제 앞에 꼿꼿이 서서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을 낭랑하게 읽는 그녀를 보며 노튼의 복잡한 마음은 점점 가닥을 잡아 갔다.
노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적어도 계곡의 마법사는 내게 정붙일 곳 하나는 마련…….”
“각하. 말씀하시는 와중에 죄송한데요.”
그때 애플이 그의 말을 잘랐다. 노튼이 그녀를 바라보자 애플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았어요. 어쨌든 제가 신경 쓰이신다는 거죠?”
“그래.”
“제 방에 들여놓은 태피스트리니 뭐니 하는 것과, 가끔 하녀들을 통해 보내 주시는 간식 같은 것들도 그래서고요?”
“그건 그냥…….”
노튼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렇군요.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
남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에, 자신은 대체 어디까지 떨어진 건가. 한때는 제국을 다스리려고 했던 남자가, 이런 곳에서 초라한 시녀에게 제 옆에 있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저딴 소리나 하고 있었다. 비참한 처지에 자조마저 들었다.
그러나 노튼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애플은 그를 한층 더 아래로 떨어트렸던 것이다.
“정신 차리세요, 각하.”
“……뭐라고?”
노튼이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애플은 책을 접어 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
“각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진 알겠는데, 그거 아니에요.”
“내가 어떤…….”
“뻔하죠. 혹시 이런 대사 들어 보셨어요? 너 같은 계집애는 처음이야. 내 뺨을 때리다니.”
애플이 연극조로 대사를 읊었다. 노튼은 보다 혼란스러워진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나?”
“아뇨. 그냥 이런 상황을 주로 다루는 통속 소설에 나오는 대사죠.”
“……무슨 뜻인지 이해를 잘 못 하겠다.”
까만 머리를 귀엽게 땋아 내린 시녀가 눈알을 굴리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각하는 지금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튼이 일갈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애플은 ‘어휴,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맹수 다음에는 멍청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노튼에게 다 들리게.
맹수가 누구를 말하는지 노튼은 알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멍청이가 스스로를 일컫는 것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하지만 애플은 그가 화를 내게 놔두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각하. 정신 차리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
“각하께서 제게 그런 마음이 든 건 그저 외로워서 그런 거예요.”
“외…….”
그 생경한 말에 노튼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애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가로챘다.
“예. 외로워서요.”
애플도 노튼의 변화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애플의 차를 한 모금은 마셨고, 수업 시간 전에 미리 책을 읽어 본 후 애플이 모를 법한 부분을 짚어 주기도 했다. 이전의 노튼이었다면 눈을 의심할 법한 변화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노튼의 생각처럼 그가 자신을 좋아하거나 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그깟 걸로 감동받을 만큼 상냥한 인물이 아니었다.
‘알렉사 님처럼 곱디고운 귀족 아가씨였다면 감동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애플은 힘주어 말했다.
“각하. 세상 어디에도 좋아하는 여자를 세 시간 내내 세워 놓는 남자는 없어요.”
그 말에 노튼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플은 자리에 선 채 제 다리를 흔들어 보였다.
“이제 아셨어요? 각하는 한 번도 수업 시간 동안 저를 앉히신 적이 없어요. 왜일까요?”
왜지?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애플이 답을 내놓기를 기다렸다. 애플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시녀고, 평민이니까요. 각하께는 제가 각하 앞에 서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인 거예요. 앉으라는 호의조차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 전 다리가 불편한 사람인데도요.”
그 뒷말에는 노튼도 조금 놀라 항의했다.
“다리가 불편한지 몰랐다.”
“알았는데 그러면 진짜 나쁜 놈이죠. 게다가 제 다리는 따지고 보면 각하 때문에 다친 걸요.”
애플은 뒷짐 지고 웃었다. 노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멍청한 둘째 황자님. 애플은 이 자리에 없는 리네트를 향해 홀로 속삭였다.
아가씨의 말이 맞았어요. 저 사람이 황제가 됐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놀랍도록 잔인한 왕이 다스리는 곳이 됐을까요?
노튼은 그저 오랜 외로움에 지쳐서, 제게 바락바락 대드는 작은 여자아이에게 마음 한편을 내주었을 뿐이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다니, 이 공작도 지독하게 불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눈물 흘린 사람을 애플은 몇 명이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내의 사과를 가로막았다.
“미, 미안-”
“각하, 사과 안 하셔도 돼요. 각하를 탓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겁먹은 얼굴을 했다. 애플은 아주 예전의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고,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가 이런 얼굴을 하게 되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 것이다.
마법사가 그에게 한 달에 한 번 착한 일을 하게 한 것, 그리고 그녀를 옆에 붙인 것도 아마 이런 것을 바라서였을 것이다. 그는 아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애플은 자신이 지금부터 할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될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나 끝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외람된 말이지만, 각하께서 먼저 사과하실 사람은 저 말고도 많을 것 같네요.”
“……주제넘다.”
그제야 노튼이 이마를 조금 찡그려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나 죽이지도 못하는데! 애플은 쾌활하게 웃었다.
“알아요. 하지만 저희 아가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 걸 내가 어찌-”
반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려던 남자가 얼굴을 구겼다.
알렉사 레미시어. 황후의 가장 친한 친구인 레미시어 남작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레미시어 가문의 사랑받는 고명딸은 한때 그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프라임 공작가의 가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노튼이었다.
노튼은 그제야 애플의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꽤 큰 착각에 빠져 있었음도 알아차렸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 알렉사의 일을 아주 가까이서 보았기에.
생각을 이어 가던 노튼은 문득 눈앞의 시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무감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서서.
그제야 남자는 화들짝 놀라 말했다.
“앉, 앉으라.”
“괜찮아요. 뭘 새삼스럽게 앉으라고 하세요.”
“앉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노튼은 신음하듯 물었다.
“혹시…… 내가 싫은 건가?”
“네.”
알고는 있었지만 애플의 빠른 대답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너는 한 달 동안…….”
“각하,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관두면 각하께서 가장 즐거워하실 거라고. 그리고 각하보다 더 좋은 공짜 선생은 없다고요.”
네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노튼을 잔인하게도 헤집어 놨다.
호감이 있어서 그에게 말을 붙이고, 웃고,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장 좋은 선생을 돈 한 푼 쓰지 않고 고용할 수 있었고, 게다가 계곡의 마법사 덕분에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를 끓여 낸 건 그저 선생에게 주는 과외비 같은 것이었다. 술잔을 찾는 그에게 잔을 가져다준 것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어서였으며, 사탕을 권한 것은 그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그 정도 교류도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튼은 다른 사람과 그 정도의 교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언제나 받기만 했기에 남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겼다.
자연스레 인간적 호의는 자취를 감추고 노튼의 지위에 고개를 숙이는 이들만 남았지만, 계곡에 고립된 이후로는 그런 것들마저 뚝 끊겼다. 그렇기에 노튼은 그녀의 작은 호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반면 애플은 그와의 사이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안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이렇게나 아름답게 생겨서, 조금만 다정했다면 남의 호의를 무더기로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노튼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당황했고, 새빨개졌고, 끝내는 황망해하고 있었다.
이를 보며 애플은 리네트 카멜리아가 루카스와 사랑에 빠지고 만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확확 바뀌는 것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도한 몰입은 금물이다. ‘아름답고 차가운 공작을 매료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평민 소녀’ 같은 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오는 일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애플은 누군가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신의 장래 희망 또한 상기했다.
미남을 끼고 잘 먹고 잘사는 것.
‘잘 먹고 잘산다.’는 그녀의 계획에 감정 노동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저놈 고쳐 쓰기 전에 내가 늙어 죽고 말걸?’
물론 노튼이 애플에게 호감을 품게 되고, 제 곁에 있으란 말을 꺼내려고 시도한 것 자체는 꽤 괄목할 만한 일이라고 애플은 생각했다.
하지만 방식이 틀렸다. ‘내 곁에 있어.’가 아니라 ‘내 잠자리를 덥히고 싶은 생각이 있나?’라니. 초야권 행세하는 악덕 영주나 할 법한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있는 이 공작님과는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애플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노튼의 얼굴은 다시 차분해졌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발아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만 나가 봐라.”
“네. 그런데 각하, 수업이 네 번 남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애플의 말에 자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 눈동자는 다시 예전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계곡의 마법사와 한 약속을 어기진 않겠다.”
“예.”
애플은 고개를 끄덕이고 트롤리를 정리해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힌 직후, 방 안에서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고 사랑을 찾으려고 하니 저렇게 되지. 오늘 저녁 메뉴는 뭐가 나올까? 애플은 흥얼거리며 제 방으로 향했다.
* * *
노튼은 무표정한 얼굴로 네 번의 수업을 모두 끝냈다. 다만 애플을 세워 놓지는 않았다. 애플이 다음 수업 시간에 그의 방에 갔을 때, 방 안에는 작은 나무 의자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애플은 고맙다는 말 없이 그곳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그동안 그녀는 황실 공식 문서에서 쓰이는 단어들에 관해서는 거의 다 익힌 참이었고, 얼마 남지 않은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도 문제없이 끝낼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끝내며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 이 안에서 상당히 가혹하게 표현되긴 했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다정하고 상냥했다는 것이다. 특히 황제 폐하가 그렇다. 나의 머리는 폐하의 위대한 딱밤을 몇백 번은 맛보았지만, 그 주먹에 사랑이 담겨 있었기에 그나마 나는 사람 노릇이나마 할 수 있었다고 말하겠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나, 만약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해 두고 싶다. 첫째,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다.”
긴 문장을 막힘없이 읽은 애플이 픽 웃었다.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을 읽은 제국민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국가적 영웅은 그들을 모두 정신 이상자로 몰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노튼을 쳐다봤다. 노튼은 창문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이었지만 애플이 오늘의 수업을 하며 한 번도 막히지 않았기에 노튼은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들이쉰 다음 나머지 문장을 읽었다.
“둘째,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홀로 자라지 못한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정했는지를 반드시 기억하라. 당신이 걷는 길을 세심히 닦아 놓은 자가 있었음을, 당신이 먹는 음식을 위해 애쓴 자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모두가 당신을 욕한다 해도 거기에 관심이 있음을 되새기라. 데미안 리아 씀. 추신- 황제 폐하. 역시 제게 새로 내리신 성이 마음에 안 듭니다. 공식 문서에서는 제 말을 삭제하라 하셨으니 여기에라도 남겨 둡니다.”
그 발칙함으로 세상에 회자되는 마지막 문장을 읽은 애플이 이내 책을 덮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고 노튼을 바라봤다. 세 시간 내내 창밖만 응시하던 남자가 이윽고 이쪽을 돌아봤을 때, 애플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딱히 없지만, 마지막이니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애플이 천천히 일어난 다음, 어깨에 두른 숄을 걷어 내고 부드럽게 무릎을 굽혔다. 황성에서 오래 일한 덕에 그 모양은 나무랄 데 없이 우아했다.
노튼은 눈썹을 약간 찌푸린 채로 그녀가 제게 인사하는 것을 지켜봤다. 인사를 끝낸 여인이 입을 열었다.
“건강하세요, 각하. 아가씨께 안부 전해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애플이 어깨를 으쓱하고 책을 그에게 건네었다. 공부가 끝났으니 돌려주려는 것이다.
잠시 그 책을 쳐다보던 남자는 애플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가져라.”
“어머나, 하지만 책은…….”
“난 두 권 있다.”
“아니, 각하. 그게 아니고요.”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여행자라고요. 이거 무거워요. 짐 돼요.”
“…….”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노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 애플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아니, 빼앗으려 했다.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애플이 책을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노튼을 내려다보며 눈웃음쳤다.
“하지만 책은 비싸니까 받아 둘게요.”
“……누굴 놀리는 건지.”
“길 가다가 굶어 죽을 것 같으면 팔아 치우려고요. 농담이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애플이 냉큼 덧붙였다. 노튼은 손을 내리고는 코웃음 친 후 고개를 돌렸다.
“나가 봐라.”
“네, 그리고 각하.”
“짧게 해.”
“감사해요.”
뒤이은 말에 노튼이 다시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애플은 책을 쥔 채 두 손을 모으고 웃고 있었다.
“전 바보가 아니라서 각하 옆에 있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이 먹어서 할머니가 되면 자랑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아름답고 차가운 계곡의 공작님에게 한때나마 고백 비슷한 걸 받았다고.”
“누가 네게 고백 따윌 했다고……!”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고백 비슷한 거라고.”
아직도 머리가 자라지 않은 귀족 나리의 뒤치다꺼리 같은 건 질색이다. 하지만 애플은 자신의 뒤에 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후임자를 위해서 약간의 길 정도는 닦아 두기로 마음먹었다. 데미안 리아가 말한 것처럼.
“늘그막의 자랑거리를 주셔서 감사해요, 각하. 그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세요.”
“시녀 주제에 건방지게 충고하려고 들지 마라.”
“축복이에요. 충고가 아니라.”
애플은 책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야 할머니가 된 제게 사람들이 말할 것 아녜요? ‘시녀 출신 주제에 뭐라는 거야? 그 각하께는 사랑하는 공작 부인이 있는데.’ 하고요.”
“…….”
그 말을 끝으로 시녀는 트롤리를 정리해서 서둘러 나갔다. 트롤리 위에는 데미안 리아의 자서전이 장식처럼 얹혀 있었다.
탁. 방문이 닫힌 뒤에도 남자는 넋을 놓고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창으로 쏟아지던 햇빛이 사라지고, 성 바깥으로 누군가가 떠들썩하게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마저 사라질 때까지.
남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초를 켠 후 책상 안에서 종이를 꺼내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동부의 레미시어 남작에게 길고 긴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