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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좋고 싫은 건 확실하게 (25/28)

외전2 좋고 싫은 건 확실하게

프라임 공작령의 영지민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영주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금은 다른 영지에 비해 현저히 낮으면서도, 제국에서 요구하는 할당량에 관해 영지민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영주가 직접 부담하는 것만 해도 프라임 공작은 굉장히 좋은 영주였다.

더군다나 프라임 공작가는 영지민들을 크게 괴롭히지 않았다. 세금은 적게 걷어도 개짓거리를 벌이는 영주들은 얼마든지 있다. 초야권을 행세한다든가, 갑자기 사업을 벌리며 영지민들의 인력을 차출한다든가, 아니면 영지민들을 쫓아내고 거기에 별장을 짓는다든가.

프라임 공작가는 그런 일들을 벌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지민들 앞에 아예 나타나질 않았다. 귀족들은 대체로 거드름을 피우며 평민들 앞에 나타나 그들이 조아리는 것을 보며 지배욕을 채우기 마련이건만, 선대부터의 프라임 공작은 그냥 눈에 띄지조차 않았다.

그래서 프라임 공작령의 영지민들 사이에 유행하는 오래된 농담 중에는 ‘프라임 공작이라는 거, 사실은 먹는 거 아냐?’, ‘프라임 공작님이야말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 정도로 프라임 공작은 공작령에서는 거의 상상의 존재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농담들은 대부분 큰 호의에 기반했다. 프라임 공작은 영지를 아주 잘 다스리면서도 영지민들에게 큰 관심을 표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아주 드물게 있는 영지전 같은 것이 열리면, 미하엘 프라임은 언제나 혈혈단신으로 건들거리며 나타나 이기고 돌아왔다.

평소에는 있는 티도 잘 안 내다가, 가끔 그럴싸한 짓을 하고 성으로 돌아가는 영주님.

그게 프라임 공작령의 영지민들이 프라임 공작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루카스 황태자가 황제 위에 오른 후 조용하던 공작령은 굉장히 떠들썩해졌다. 루카스 황태자가 공작령에 보냈다는 빨간 머리의 기사, 키리에 레미시어 때문이다.

프라임 공작의 호위를 자처하는 그는 언제나 프라임 공작 옆에서 시끄럽게 잔소리를 했다.

그로 인해 영지민들은 처음으로 프라임 공작이 새벽마다 영지를 둘러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만 되면 언제나 창밖으로 그들의 말싸움 소리가 들려오곤 하는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라니까! 그 웅덩이가 안 보입니까? 어제 새로 신으신 부츠가 다 더러워졌잖습니까!”

“아, 어떡합니까. 보인 순간 이미 내 발이 웅덩이를 디뎠는걸.”

“그래서 먼저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미안. 경 얼굴 감상하느라 사실 못 들었습니다.”

“각하, 사실은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다치신 거 아닙니까?”

……이 비슷하게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공작 성 근처의 마을에서 매일 새벽마다 들렸다.

그러니 영지민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미하엘 공작이 매일 빠짐없이 영지를 둘러봤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영지민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제발 미하엘 프라임이 낮에 순시하기를 바라게 됐다.

* * *

[새 황제가 즉위한 이후, 황제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 중 하나인 프라임 공작은 수많은 혜택을 받았다. 세제 혜택부터 시작해 갖은 이권이 프라임 공작령의 것이 됐다.

그간 하도 조용해 폐쇄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프라임 공작은 순식간에 제국 권력의 핵심축 중 하나로 등극한 것이다.]

미하엘은 신문을 집어 던지며 짜증을 냈다.

“나 원래 핵심이었는데!”

“……꼭 그 말을 여기서 하셔야 합니까?”

“제가 불평하는 거 경 말고는 아무도 안 들어 줍니다.”

“그건 제 알 바 아니지만, 수련장은 사용한 사람이 치우게 돼 있습니다. 제가 각하가 버린 신문도 치워야 한단 소립니다.”

키리에 레미시어는 프라임 공작령에 온 뒤에도 아침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새벽에 미하엘을 따라 영지를 한 바퀴 돈 다음, 식사를 하기 전에 꼭 수련장에 들러 검을 휘둘렀다. 프라임 공작령의 기사들도 감탄하며 본받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미하엘은 지금 그 수련장에 와 있었다. 다름 아닌 키리에를 보기 위해서다.

키리에는 손에 묻은 송진을 닦으며 미하엘을 곁눈질했다. 정확히는 흘겨봤다. 그 마땅찮은 시선에 미하엘이 히죽 웃었다.

“저희 어머니는 저를 걱정하신 나머지 딸을 친구 하나 없는 사회 부적응자로 키우셨죠.”

“한마디로 친구가 없어 저에게 불평하러 오셨다는 거군요.”

“안 됩니까?”

“요즘 수도에서는 개인의 불평을 들어 주는 의사들이 따로 있어, 그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룬답니다.”

“경에게 돈 내고 불평하란 얘깁니까?”

“돈 안 받고 불평도 안 듣고 싶습니다.”

“너무 어려운 남자다, 경.”

미하엘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웃었다. 키리에가 이마를 찡그리고 검을 잡자, 그녀는 은근히 기대감을 품으며 키리에를 쳐다봤다.

하지만 사내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 미하엘만 흘끗거렸다. 이유는 명확했다. 미하엘이 벙긋 미소 지었다.

“부끄럼 탑니까?”

정확한 표현이었고, 키리에는 얼굴이 벌게졌다.

“……각하 앞에서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고 싶지 않습니다.”

“흠, 제 앞에선 모두가 어설픕니다.”

‘재수 없어…….’라는 표정이 여실히 키리에의 얼굴에 드러났다.

미하엘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 짜증을 띠고 있는 결벽적인 저 얼굴이 아주 가끔, 진지하게 바뀌는 것을 좋아했다.

가장 맛있는 과일을 따기 위해서 기다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당신이 짜증 내는 걸 구경한다고 하면, 키리에는 세상 제일가는 변태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겠지.

좋아, 서비스다. 미하엘은 결심하며 일어섰다.

“불평 들어 줄 값을 하겠습니다.”

“왜 가정형입니까? 이미 들어 드렸는데요.”

“제가 치를 값은 불평 한두 마디짜리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미하엘은 근처에서 연습용 검을 빼 들었다.

이에 키리에의 표정이 굳었다.

“안 됩니다.”

“왜요?”

“저는 환자와는 검을 섞지 않습니다.”

“그래요?”

챙.

미하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검이 부딪쳤다.

키리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제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웃고 있는 남장 여인이 어느새 검을 제게 뻗어 낸 것이었다. 민첩한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찔렸을 것이다.

“각하!”

“미하엘이라고 불러 달라니까, 참.”

챙, 챙.

심드렁한 말과 함께 검이 두어 번 더 부딪쳤다. 이번에는 예상한 바라 다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절로 긴장하며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작고 가느다란 눈,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히죽이죽 웃는 키 작은 여인은 정말로 방심하기 딱 좋게 생긴 상대였으나, 그녀 앞에서 방심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안 합니다!”

“정말?”

미하엘이 부드럽게 찔러 들어왔다. 키리에는 침을 삼키는 것도 잊고 옆으로 피해 냈다. 종이 한 장 차이였으나 미하엘은 허공을 찌른 자신의 검 끝을 보더니 투덜댔다.

“역시 제가 쓰는 검과 연습용 검은 너무 무게가 다릅니다. 남의 칼 쓰니 자꾸 손이 더뎌지네.”

긴장감이 확 들었다. 저게 더디다면 평소엔 대체 얼마나 빠른 거지? 키리에는 그쯤 해서 쓸모없는 고집을 꺾기로 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제국 제일검이었다. 그런 여인을 상대로 환자니, 어쩌니 하며 검을 섞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웃기는 일이었다.

진지하게 검을 들고 대련 전의 예를 취하는 키리에를 보고, 미하엘도 간단하게 예를 취했다.

“당신 또 환자 어쩌고 하며 짜증 낼 거 뻔하니 오른손은 안 씁니다.”

“저도 안 쓰겠습니다.”

“후회할 텐데.”

“각하를 상대로 후회하는 것은 안 부끄럽습니다.”

키리에는 허세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와 같은 조건에서 겨루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공작령에 온 뒤에도 키리에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대결을 청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상처가 회복되려면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더 재활 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키리에는 오랜만에 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이내 미하엘이 부드럽게 검을 돌려 쥐었다.

“갑니다.”

“부디.”

미하엘이 오른손으로 검을 다루는 것은 여러 번 본 적 있으나, 왼손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후, 키리에는 순전히 학술적인 이유로 이 집안의 기록을 뒤져 봤다.

프라임 공작가의 검사들에 대한 기록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더럽게 짜증 나는 천재들의 연속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짜증 나는 데미안 리아 이후로는 온갖 요상한 기교가 프라임가의 검술에 추가됐다.

한데 키리에가 그간 봐 온 미하엘의 오른손 검술은 정직하고 빨랐다. 아마 왼손은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순간 미하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딴생각할 여유가 있나 보군요?”

휘릭, 소리가 들렸다. 연습용 검은 대체적으로 한 손검 중에서도 무거운 축에 속했다. 근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런 검에서 이런 소리가 나다니. 키리에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옆으로 피한 후 그 검을 쳐올렸다.

채챙, 소리가 울렸다.

“와하!”

미하엘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제가 왼손을 쓰면 다섯 합 이상 제 칼을 받아 낸 사람이 없는데, 다음 합이 궁금하군요!”

정말 재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에가 몸을 돌려 검을 빼낸 후, 반격을 시도했다.

챙, 하고 다시 칼이 부딪쳤다. 미하엘이 빠르게 키리에를 막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키리에는 눈을 부릅떴다.

“……!?”

“얏호!”

미하엘이 엄청난 힘으로 칼을 올려 쳤다. 챙, 하는 가벼운 소리가 아니라 와장창-! 하는 소리가 두 사람의 검에서 났다.

키리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속도도, 기교도, 힘까지도.

키리에의 가슴 바로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던 미하엘이 후, 하고 웃었다.

“입 맞추기 딱 좋은 각도네요.”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미안합니다. 솔직히 저도 경 앞에서 요조숙녀인 척하고 싶긴 한데 말입니다.”

미하엘이 검을 놨다. 키리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련 중에 검을 놔?

하지만 그의 착각이었다. 미하엘은 키리에의 사각지대인 아래로 빠르게 돌아간 다음, 반대편에서 떨어지는 검을 받아 내 뒤에서 키리에의 목에 검을 겨눴던 것이다. 검술이라기보다는 거의 묘기에 가까웠다.

키리에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항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복합니다.”

“하하. 무력으로 좋아하는 남자의 항복을 받아 내면서 수줍은 척하면 그것도 웃기지 않겠습니까.”

미하엘이 즐겁게 웃으며 연습용 검을 땅에 내던졌다.

“졌으니까 경이 수련장 치우는 겁니다!”

키리에는 검을 놓으며 생각했다. 더러운 재능충. 정말 싫다.

* * *

미하엘 프라임은 여자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굉장히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공작 성 바깥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또래보다 압도적으로 영민했으므로 자신이 나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납득했다. 그러나 영민한 아이들은 납득에서 그치지 않고 탈출로를 마련해 내기 마련이다.

미하엘은 방랑자를 꾀어내 자신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지민인 척하셨군요.”

“예.”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미하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구니를 끌렀다. 오전부터 멀리 나간다니까 성의 하인들이 바리바리 싸 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공작령 근처의 강가에 나와 있었다. 범람에 대비해 근방의 둑을 점검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런 것까지 공작이 직접 하는 영지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핑계 대고 놀러 나온 것이다.

“말을 타고 이곳까지 달리는 게 유일한 제 탈출구였죠. 이쪽은 하천 범람이 쉬워서 사람들이 살지 않거든요. 어머니도 여기까지 말을 타고 다녀오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셨죠.”

강 주변에는 사람도 살지 않아 이렇다 할 위험이랄 게 없었다. 프라임 공작가는 칼을 제 수족처럼 다루는 이들이 태어나는 가문이니, 미하엘의 어머니는 그녀가 칼 한 자루 차고 말을 달려 나가는 것에 대해 크게 제동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강가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 영지민 아이들이 종종 모험 온다는 것은 선대 공작도 미처 몰랐다.

말을 달려 나온 어느 날, 미하엘은 멀리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말을 보이지 않는 곳에 매어 두고 다가가자, 아이들 서너 명이 마른 풀을 쌓아 두고 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또래 애들과 놀아 봤습니다. 재미있더군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란.”

“…….”

미하엘은 바구니에서 와인과 고깃덩이, 빵 쪼가리 같은 것들을 꺼내며 떠들었다.

키리에는 그동안 깔고 앉을 천을 편 다음, 그 위에 낮은 나무 식탁을 깔았다. 미하엘이 식사 바구니를 챙기는 것을 보자마자 바위 위에 대충 앉아 먹을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챙긴 것들이었다.

예상대로 미하엘은 감탄했다.

“경은 어쩜 이렇게 세심합니까? 난 그냥 길바닥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어깨도 잘 못 쓰는 분이 길바닥에 앉아 어떻게 식사합니까?”

“어제 저한테 항복한 분이 하실 말은 아닌데요.”

키리에는 결국 신경질을 냈다.

“그럼 길바닥에 앉아서 드십시오!”

“싫은데요.”

미하엘이 혀를 날름 내밀고 앉았다.

키리에는 착실하게도 나무 식탁 위에 식기들을 펴고, 고깃덩이를 얇게 저며 올렸다.

미하엘은 와인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또래 남자애들이 어떻게 거들먹거리는지 배웠습니다. 재미있었죠.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건방지게 굴더군요.”

“그게 각하가 시종일관 건들거리는 태도를 가지신 것에 대한 변명입니까?”

미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경이 뭘 잘 모르나 본데, 하나 가르쳐 줘도 됩니까?”

“말씀하십시오.”

“저는 경한테만 건들거립니다.”

“제가 만만합니까?”

“아뇨.”

그녀가 코밑을 훔치며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죠.”

“하던 말씀이나 계속하십시오.”

키리에는 고기를 다 저민 후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미하엘은 얇게 도려내진 껍질을 들어 보고 조금 감탄한 후에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제 건방진 태도를 보고 당황하며 지적하셨으나, 성의 사용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하셨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을 키워 본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귀족 남자들과 어울려 본 적도 별로 없으셨기 때문에 성장기 남자애들이 어떤지 모르셨던 거죠.”

“저희 집안에서는 건방지게 굴면 아버지께 가장 먼저 혼났습니다. 모든 남자아이들이 건방지진 않습니다.”

키리에가 말하는 동안 소스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맛을 보던 미하엘은 그가 눈을 흘기자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맛있어 보이길래…… 아무튼 그건 레미시어 후작께서 워낙 교육에 엄격하시니 가능했던 일이죠. 보통은 사용인에게 가혹할수록 모범적인 귀족 자제 취급을 받지 않습니까?”

“남을 깔보는 게 귀족의 소양인 양 구는 무도한 이들이 있긴 하죠.”

고기를 집으려던 미하엘의 왼손을 키리에가 과일을 깎던 칼등으로 탁 때렸다. 미하엘이 입을 비죽거렸다.

“뭐, 제 태도가 바뀐 후에도 공작 성의 도련님이 사춘기를 맞았다는 이야기나 듣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러려니 했죠. 참 착한 사람들이야.”

영지민 아이들과 미하엘이 논 시간은 자그마치 1년을 넘었다. 미하엘은 맨 처음 대장 노릇을 하던 덩치 큰 소년을 이기고 자신이 대장이 되었다.

그야 당연했다. 당시의 미하엘 프라임은 공작 성의 기사들조차 이기기 버거워했다. 그런 미하엘을 평범한 소년들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데 매번 미하엘이 대장 노릇을 하게 되자 소년들은 불만스러워했다. 미하엘은 자신을 이기고 얼마든지 대장 노릇을 하라고 큰소리를 탕탕 쳤다. 그게 미움의 이유가 됐다.

“……각하를 이기고 대장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전쟁 영웅이 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미하엘의 이야기를 듣던 키리에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미하엘은 으하하, 하고 웃었다.

“뭐, 그땐 저도 어렸죠. 재미있는 건 다 같이 해야 하는데, 저는 친구들을 만난 게 처음이었고 제가 재미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거든요.”

결국 소년들은 어느 날부터 강가에 오지 않았다. 미하엘은 며칠이고 남자애들을 기다렸으나 소용없었다. 남자애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따돌린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목숨을 빼앗았죠!”

“그런 거짓말 재미없습니다.”

미하엘이 코를 찡그렸으나 키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빵을 자른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으십니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근처에서 들꽃 두어 송이를 뚝 꺾어 온 후, 그 위에 올렸다. 이내 아름답고 목가적인 식탁이 완성되자 미하엘의 눈이 커졌다.

“……이런 취미가 있었습니까?”

“알렉사가 가르쳐 준 겁니다.”

키리에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소꿉놀이도 그냥 하지 않았죠.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나중에 누군가와 소풍을 나가게 되면 꼭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쩐지 손도 못 대게 하더라니.”

“각하처럼 자꾸 식탁에 집적대는 사람이 있으면 영원히 식탁은 완성되지 않죠.”

키리에는 그녀의 앞에 작은 은제 나이프와 포크를 내밀었다.

“드시죠.”

“경. 진짜 진지하게…….”

“청혼이라면 거절합니다.”

몇백 번째의 청혼을 받고 있는 남자는 이제 받기도 전에 그녀의 청혼을 거절했다.

미하엘은 시무룩해져서 와인을 홀짝였다. 언제 썰어 놨는지 치즈 같은 것도 가지런히 한쪽에 예쁘게도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게 끝입니까?”

“어, 더 듣고 싶습니까?”

“맥락 없는 청혼보다는 궁금합니다.”

“나한테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누가 너무한지 공작 성의 사용인들에게 물어보시죠. 백이면 백, 제 편을 들 겁니다.”

사실이었다. 미하엘을 기르다시피 한 늙은 유모는 키리에를 보고 처음에는 신랑감을 데려왔냐며 반색했으나, 곧 그를 동정하게 됐다.

“아이구, 어쩌다 우리 나리한테 휘말렸을꼬…….”

그게 유모의 입버릇이었다.

공작 성의 사용인들도 처음에는 낯선 빨간 머리 기사를 대하기 힘들어했으나, 공작 각하께서 물고기 똥처럼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고 점점 키리에를 동정하게 됐다.

덕분에 키리에의 방에는 사용인들이 힘들 때 먹으라며 쥐여 준 사탕 쪼가리나 조그만 천 인형 같은 것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미하엘은 코를 찡그리며 투덜댔다.

“다들 내가 월급 깎아 버릴 겁니다.”

“유모 월급이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모릅니다!”

“당당하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하엘은 키득거리며 빵 쪼가리를 집어 우물거렸다.

“그렇게 사내아이들이랑은 헤어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곧 추수 감사절이 다가왔죠.”

아무리 무심한 영주라도 추수 감사절에는 영지민들에게 얼굴을 내밀기 마련이다. 미하엘은 제 어머니를 따라 소공작의 모습으로 공작령을 돌아봤다. 일주일 동안 영지 곳곳을 돌아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소공작은 두 번째 들른 마을에서 소년들을 만났다. 제 어머니 뒤에서 말을 몰던 미하엘은, 엎드려 있다가 호기심에 고개를 든 소년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하엘이 오기 전에 대장 노릇을 도맡아 하던 덩치 큰 소년이었다. 소년은 맨 처음 이마를 찡그렸다가 곧 ‘어어어!?’ 하고 저도 모르게 미하엘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니까, 소공작에게 마을 소년이 손가락질을 한 것이다.

“문제가 커졌겠군요.”

“아뇨.”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자비로운 소공작이니까 그냥 지나갔습니다.”

“주변인들이 가만 안 뒀을 텐데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정작 제가 신경도 안 쓰고 가 버렸거든요.”

미하엘은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소년을 보고 빙그레 웃은 뒤, 술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말을 몰았다. 정작 소공작이 그렇게 말을 몰고 사라져 버리니 문제를 만들 수도 없었다.

“소년에겐 좋은 소공작으로 기억에 남았겠군요.”

“그래 보입니까?”

키리에는 미하엘의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장난기 넘치는 눈은 경박하기 그지없었지만, 가끔 그 눈이 고요를 찾을 때면 어쩐지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키리에는 시선을 마주친 채 말했다.

“소년은 그저, 잘 모르는 타인에게 함부로 굴면 안 된다는 정도의 교훈을 얻었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럴싸한 견해입니다만, 좀 다릅니다. 걔는 저랑 멱살 잡고 싸운 적이 있거든요.”

키리에가 이마를 찡그렸다. 미하엘은 단추가 두어 개 풀린 셔츠 앞섶을 붙잡고 흔들어 보였다. 다분히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몸짓에 키리에는 ‘설마-’ 하고 신음했다. 미하엘이 빙긋 웃었다.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다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시골뜨기가 제 자리를 빼앗으니 얼마나 열 받았겠습니까. 다른 애들이 제 명을 따르기 위해 개구리를 잡으러 간 동안, 걔가 제 멱살을 잡아당긴 적이 있습니다.”

“…….”

“셔츠가 찢어졌죠. 저도 그때는 좀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굳게 입을 닫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말하게 되면 자신이 계집애에게 졌다는 사실도 털어놔야 하기 때문이라는 치기 어린 이유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영주가 될 이가 사실 여자라는 것은 어떨까. 미하엘은 소년의 잘못을 탕감해 준 것이 아니라 거래를 했다.

벌 안 할게. 그러니 너도 입 닫아.

그런 눈을 하고 미하엘은 말을 몰아 빠르게 사라졌었다.

“……각하, 정말 소문 안 난 게 용하군요.”

“뭐, 유모 같은 최측근을 빼면 그 녀석이 유일합니다.”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저민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키리에는 제가 모시는 상사마다 묘한 곳에서 허술하다는 사실에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할 사람 없으면 그 마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예?”

“확실한 게 좋거든요, 저는.”

미하엘이 방만하게 드러누웠다. 상반신은 비스듬하게 세운 채 와인 잔을 기울이며.

“저희 어머니는 제 아버지를 보내고 수천 번은 후회하셨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한 번도 하신 적은 없지만, 그냥 압니다. 저는 그러지 않길 바라고 계셨죠.”

“아니,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

“생각해 보니 그놈이 제법 괜찮은 상대였다, 이겁니다. 굳이 제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요.”

그날 이후로 미하엘이 노심초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입이 가벼운 자는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함부로 입을 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공작이 계집애라는 소문은 일절 퍼지지 않았다.

아마 본래 입이 무거운 것도 있겠지만, 제 가족들이 다칠까 봐 평생을 침묵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테다.

그때 미하엘은 마음속으로 소년을 점찍어 뒀다. 물론 당사자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라 어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키리에가 퉁명스레 말했다.

“근데 왜 자꾸 저한테 청혼하십니까? 상대도 있으면서.”

“원래 좋은 놈들은 다른 여자들도 알아보기 마련이라 일찍 장가를 갔거든요.”

빈 잔을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미하엘이 키리에를 흘끗 올려다봤다. 그리고 표정 변화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얼굴에 입을 비죽였다.

“뭐야. 질투할 줄 알았더니 아니네요.”

“제가 뭣하러 질투를 합니까.”

그에 미하엘은 다리를 마구 허공에 굴렀다.

“와, 정말 끔찍하게 안 넘어오네!”

키리에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곤 과일을 하나 찍어 건넸다. 먹고 입이나 닥치라는 신호였으나 미하엘은 한술 더 떠 입을 벌렸다.

“먹여 주십시오.”

“바닥에 던져 개미 밥으로 줄까요?”

“젠장. 경이 밥 먹여 주는 걸 바라느니 내가 경의 애완견이 되는 쪽이 빠르겠습니다.”

미하엘이 벌떡 일어나 앉아 과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키리에는 빈 미하엘의 잔에 와인을 채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데이트는 해 드리잖습니까.”

“……데이트인 줄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는 게 바보 아닙니까?”

“드디어 내 마음을 받아 주기로……!”

감격한 미하엘이 앉은 채로 몸을 기울였으나 키리에는 찬물을 끼얹었다.

“제 입장에서야 경호지만, 각하께서 데이트라 생각하고 신나 계시는 걸 굳이 지적해서 입 아프게 떠들어야 하는 상황보다는 그냥 놔두는 게 낫죠.”

“젠장. 경, 나 지금 당장 결혼해서 애 낳는다 쳐도 노산이라고요.”

“왜 출산 여부를 각하께서 마음대로 결정합니까? 제가 아이를 안 갖고 싶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잠깐, 나랑 결혼할 마음은 있습니까?”

“딱히 없지만 노산이라는 말에는 한마디 얹고 싶어서 한 말입니다.”

미하엘이 투덜거리는 말에 키리에는 꾸준히도 초를 쳤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고, 미하엘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키리에는 이쯤 해서 어느 정도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느꼈다.

미하엘 프라임은 이제 삼십 대 초반이다. 그녀가 어깨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한 말을 키리에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언장도 없고, 작위를 물려줄 자식도 없다. 프라임 공작가의 방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미하엘만큼 동부 영지의 구심점이 될 인물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결혼은 중요했다.

하지만 미하엘은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남자를 만나기는커녕 키리에만 물고기 똥처럼 따라다녔다.

키리에는 그게 부담스러웠다. 그는 언제나 느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키리에가 노튼의 호위에서 루카스의 호위로 보직을 변경하는 데는 1년이 넘는 숙고의 시간들이 따랐다. 그것도 노튼을 바로 곁에서 매일같이 보며 겨우 결정한 것이었다.

그가 약삭빠르게 미하엘의 청혼을 받아서 소공작의 부친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키리에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미하엘 프라임을 싫어하는가? 거기에 키리에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아니오.

그랬다면 애초에 동부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리에는 가만히 제 옆에 앉은 미하엘을 바라봤다.

“각하.”

“예.”

“승낙도, 거절도 없는 지금 같은 상황은 각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하엘의 얼굴이 굳었으나 키리에는 말을 이었다.

“정말 노산을 걱정하시는 건 맞습니까?”

“경.”

“장난처럼 결혼이니, 노산이니 하시지만 저는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기, 경. 혹시 거절이라면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해 줬으면 좋겠는데.”

밀짚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애써 웃음 지었다. 언제나 장난처럼 웃는 여인은 가볍게 그에게 청혼했고, 습관처럼 거절당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이 상황이 오래가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가 공작 성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의 모습을 모든 이들이 키득거리며 봤다. 미하엘이 여자인 것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르는 자는 미하엘의 농담이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키리에가 딱딱하게 굴거나 때론 난처해하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수도에서 온 잘생긴 기사가 난감해하는 건 모두의 즐거움거리였다. 키리에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나 그런 제게 계속 거절당하는 미하엘이 점점 우스워지는 건 문제였다. 미하엘은 최측근들 외에는 성의 사용인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던 영주였다. 그런 영주의 이미지가 자신으로 인해 계속 망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키리에는 제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해 두죠. 저는 각하께서 제게 농담처럼 건네는 이야기들이 싫습니다. 제 거절이 각하의 농담을 맞받아치는 도구로 쓰이는 것도, 사람들이 웃으며 저와 각하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하엘은 그가 지금 돌리고 돌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청혼은 그만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이 우스워지는 게 싫은 건지. 그래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경. 답지 않게 돌려 말하고 있는데, 지금 그만하고 다른 사람 찾으라는 얘길 하는 겁니까?”

“그래 보입니까?”

“……확실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키리에는 잠시 입을 닫고 눈앞의 여인을 쳐다봤다. 자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각하. 저는 느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각하처럼 아직 차려지지도 않은 식탁에 미리 지분대는 사람을 싫어하죠. 제 식탁은 단 한 번도 빠르게 완성되는 법이 없습니다.”

“…….”

“하지만 저는 슬슬 이 식탁을 빨리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식사를 차리는 것이 너무 늦어 식사할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문제겠죠.”

미하엘 프라임은 경박하고 쾌활해 보이나 실상은 굉장히 냉정했다. 루카스와 리네트에게 그녀가 합류한 것도, 사실은 스스로의 안위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안위를 그렇게나 따지던 인물이, 제게는 다 내줄 듯이 굴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바깥에 밝히지 않았다. 전부 키리에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다정함을 방관하는 것 또한 키리에는 기사로서의 의무 방기라고 생각했다.

“각하. 저와 한 번만 더 겨뤄 주시겠습니까?”

“……경?”

“각하께서 이기시면 다시는 각하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긴다면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

미하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즐거운 소풍은 끝났다. 공작 성에 소문이 쫙 퍼졌다. 공작님의 계속된 집적거림에 화가 난 키리에 레미시어가 드디어 결투를 신청했다는 말에 프라임 공작가의 기사들은 대부분 킬킬거렸다.

“아이고야, 공작님. 내 그럴 줄 알았소!”

“공작님 과한 농담이야 동부 놈들이나 좋아하지! 뻣뻣한 수도 놈들이 좋아하겠소?”

“닥쳐라, 이놈들아. 네놈들이 사랑을 알아?”

미하엘은 제게 한마디씩 하는 기사들의 머리통을 치며 쾌활하게 응대했다.

그들 대부분은 미하엘과 키리에의 결투에 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얼마나 강한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각하가 이길 거 아니오? 뻔한 대결을 대체 왜 하는 거래?”

“인마, 수도 놈들은 자존심 빼면 시체 아니냐.”

기사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키리에를 흘긋거렸다. 키리에는 미하엘에게 결투를 신청한 뒤에도, 언제나처럼 단정히 서서 미하엘을 경호하고 있었다.

온갖 농담이 오갔지만 그는 마치 들리지 않는 듯 행동했다.

소문으로는 프라임 공작령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에게 가서 칼을 갈았다는데…… 그에 몇몇 기사들은 혀를 차기도 했다.

“정말 각하가 싫은가?”

“솔직히 질 게 뻔할 텐데.”

“집중 안 하냐?”

미하엘이 모여서 떠드는 기사들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어이쿠, 하고 오금을 맞은 기사들이 주저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미하엘 프라임의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었다. 기사들은 곧 수군대길 관두고 집중했다.

미하엘도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며 훈련을 지시했다. 물론 머릿속에는 며칠 전 키리에와 강둑에서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진심입니까?”

“예.”

“하지만 내가 이길 텐데.”

“사자와 인간이 싸우면 대부분은 사자가 이기겠죠.”

하지만 이기는 인간도 가끔 나오기 마련이라고, 키리에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미하엘은 ‘아니, 내가 사자야!?’ 하고 농담하려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입을 닫았다.

어쨌든 더 이상 농담은 그만해 달라고 하는 이 앞에서 또 그러면 미움받을 거라는 것 정도는 상식이었다.

“좋습니다. 다만 사자도 패널티가 있어야겠지.”

“필요 없습니다.”

“아니, 가끔은 사자도 온정이라는 게 있어요.”

미하엘은 씩 웃으며 ‘연습용 검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연습용 검을 든 자신은 상당히 둔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둔해진 거라고 하면 이놈들이 기가 막혀 하겠지만.’

미하엘은 왼손에 든 연습용 검으로, 온 힘을 다해 공격해 오는 기사의 칼을 대충 받아쳐 내며 생각했다.

전력을 다한 것이 무색하게, 기사는 울상이 됐다.

“다음.”

그녀는 그쯤 해서 흘끗 키리에 쪽을 바라봤다. 공작령의 기사단이 되었으니 은근슬쩍 끼어서 훈련받아도 괜찮으련만, 그는 고집스럽게도 미하엘의 뒤에서 경호를 서고 있었다. 훈련 시간에 누군가가 무기를 들고 덤벼들지 모른단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경호 대상이 미하엘이라는 게, 그가 비웃음당하는 주된 이유였다.

제국에서 칼 제일 잘 쓰는 사람.

두 합이 뭔가. 한 합도 그녀에게 제대로 당해 내지 못하는 애송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지킨다는 말에 공작가의 기사들은 뻑 하면 웃어 댔다.

그렇지만, 미하엘은 그래서 키리에가 좋았다. 계곡에서 만난 그가 그저 그런 잘생긴 기사 놈이었다면 그녀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하나 그는 고지식하도록 제 의무를 다했고, 자신이 믿는 것에는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거는 사람이었다.

그가 루카스를 위해 찻잔 조각까지 씹어 먹을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미하엘은 진심으로 키리에가 탐이 났다. 이런 사람이 자신에게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순간이 보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방법이 나쁘긴 했나.’

미하엘은 그를 만난 이후로 종종 ‘내 성격이 그렇게 별로인가?’ 하고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다. 자신이 좀 더 성실하고 선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키리에 레미시어가 나를 좀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그가 그렇게 아껴 마지않는 알렉사 레미시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아름답고 아름다워 볼 때마다 질리지도 않는 그 미모를 제외하고도, 그 예쁜 얼굴에 담긴 성격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선하고 착하고 예쁜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아무리 말을 골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만 한다. 어쨌든 미하엘의 가신이 된 그녀를 미하엘 또한 자주 보게 되었는데, 정말로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연스레 미하엘은 ‘내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키리에 레미시어가 내게 조금은 이성적인 호감을 가졌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알렉사 같은 여인과는 삶의 출발 지점부터가 다르기에 부러워하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 생각의 결론은 어김없이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뭐 어쩌겠어?’로 났다.

그녀 또한 어떤 맥락에서는 리네트 카멜리아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 부유하듯 떠도는 인생.

그런 삶을 30년 살다 보면, 어떤 것에도 쉽사리 진지해지기 어렵다. 농담처럼 진심을 보내고, 튕겨 나가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납득할 수 있는 성격이라야 그런 인생을 버텨 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진지한 적 없는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게 나쁘긴 하지.’

미하엘은 무성의하게 다음 기사를 발로 차 버리며 생각했다.

“다음.”

미하엘은 슬슬 땀 때문에 미끄러워진 왼손을 바지에 비비며, 검을 오른손으로 잡았다가 키리에 눈치를 보고 다시 왼손으로 잡았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또 킬킬거렸다.

“완전 꽉 잡혀 사시네.”

“조용히들 해라. 나한테 엉덩이 걷어차이고 싶지 않으면.”

미하엘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이기고 싶은 걸까, 지고 싶은 걸까.’

누가 봐도 미하엘이 이기는 싸움이다. 그는 미하엘이 이긴다면 다시는 미하엘을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미하엘은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다.

“식사를 차리는 것이 너무 늦어 식사할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문제겠죠.”

키리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는 느리고 미약하게나마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게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라고 미하엘은 장담했다. 키리에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미하엘의 상황이 문제였다.

키리에는 지금 미하엘의 가장 큰 과업이 ‘결혼’과 ‘가문 잇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키리에에게 목을 매 그 결혼이 영 이뤄지기 요원한 상황이라는 것도.

그런 상황들을 함께 고민한 끝에, 그녀는 키리에가 한 말을 ‘당신에게 빚을 졌으니 당신이 이기면 결혼해 주겠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내가 지면 다른 남자 찾아라…… 인가.’

미하엘은 연습용 검을 휘휘 돌렸다. 저 성실한 남자는 아마 온 힘을 다해 자신과 결투할 것이다. 키리에 레미시어가 이길 경우, 그가 요구할 건 뻔했다.

‘다시는 제게 청혼하지 마십시오, 같은 이야기겠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콧김을 뿜었다. 자신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들고 덤비는 남자라니, 아이러니했다.

어쩌다가 이런 인생이 된 걸까. 쓴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뭐 지루한 것보단 낫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다음 기사를 맞았다.

물론 그녀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는 데 실패했으며, 애꿎은 기사들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 * *

의외로 두 사람이 결투하는 날 구경꾼은 별로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미하엘 프라임을 대체 누가 이기겠는가. 게다가 날까지 흐렸다.

결투에서 키리에가 내건 조건이 꽤 흥미롭긴 하지만 다들 ‘우리 공작님이 드디어 공식적인 남색가로 등극하는 순간인가.’라고 생각했으며, 몇몇 향상심 강한 기사들만이 눈을 빛내며 훈련장으로 왔다. 결투의 결과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검격이 궁금해서였다.

결투라고는 하지만 목숨을 내거는 것이 아니기에 복장은 간편했다. 미하엘은 송진을 손에 묻혔다.

그에 기사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검이 미끄러지는 것보다 손에서 송진 냄새 나는 게 더 싫다던 미하엘이 송진을 묻히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덕이다.

공기에서 흐릿하게 물 냄새가 났다. 미하엘은 연습용 검을 쥐고 웃었다.

“곧 비가 오겠군요.”

“다른 날로 하긴 어렵습니다.”

“그래, 경. 빨리 끝내지요.”

‘빨리’라는 말에 키리에가 눈썹을 꿈틀했다. 미하엘은 자신의 말이 그의 심사를 건드렸다는 걸 알아챘으나 사과하지 않았다.

가운데 선 기사는 숙취에 전 얼굴로 하품을 했다.

“에, 누구든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 승리입니다. 물론 목숨을 위협하거나 하는 행위는 안 됩니다. 거…… 뭐 더 필요합니까?”

“됐소.”

키리에의 말에 기사가 머리를 긁으며 뒤로 물러났다. 피차 다 알고 있는 룰, 설명하는 게 더 시간 낭비였다.

미하엘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로 키리에 쪽을 향해 손짓했다.

“오시죠.”

“예.”

대답은 평온했으나 기세는 험악했다. 미하엘이 눈을 깜박인 다음 순간 키리에가 쇄도했다.

쨍, 소리를 내며 검이 맞부딪쳤다. 미하엘은 검 너머로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단단한 눈.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미하엘은 하하,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지, 그를 굴복시키고 싶진 않았다.

역시,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해서 금세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미하엘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변한 그녀의 기세에 키리에가 흠칫했다.

미하엘 프라임이 어떤 사람인지 키리에 레미시어는 아직도 몰랐다.

‘모르면 알게 해 줘야지.’

미하엘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 *

수십 번이나 검이 부딪쳤다. 구경꾼은 점점 늘었다. 미하엘 프라임과 다섯 번 이상 칼을 부딪친 사람이 이 성안에는 없었다. 몰려든 기사들이 내두르기 시작했다.

사실 미하엘 프라임이 최대한 속전속결로 대부분의 결투를 끝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녀의 검을 오래 받아칠 자가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녀의 체력이었다.

아무리 단련하고 근육을 만들어도,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크고 어깨는 두 배인 남자와 오랜 시간 검을 부딪치면 미하엘 쪽이 압도적으로 지쳤다.

땀을 비 오듯 쏟아 낸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앞머리가 잔뜩 젖어 있는 키리에의 모습을 보고 미하엘은 그 와중에도 제가 이 남자에게 단단히 반했구나 싶었다. 잘생겼거든!

툭, 하고 빗방울이 하나둘씩 쏟아졌다. 새벽부터 꾸물대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질린 표정으로 심판을 보던 기사가 손을 들었다.

“거, 두 분 나중에…….”

그러나 이어 부딪치는 챙, 소리에 기사는 입을 닫았다. 지금 두 사람한테 그만하라고 해 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기사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공작 성의 하녀들이 비가 올 것 같자 서둘러 쳐 놓은 천막 아래였다.

곧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센 비는 아니었지만 옷깃이 젖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때-

챙강!

어이없을 만큼 높은 소리가 났다. 퍽, 하고 검이 날아가 흙 위에 떨어졌다. 미하엘은 두 손을 들었다.

“항복.”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 갑작스레 시끄러워졌다.

“뭐라고!?”

“각하!”

미하엘의 패배 선언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기사들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가장 당황한 건 키리에였다. 키리에는 날아간 검과, 제 손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미하엘을 노려봤다.

“각-”

“그, 뭐시냐. 항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경.”

미하엘은 가만히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대치했다.

기사들이 웅성거렸으나 그것은 당황과 충격이었지, 비웃음이나 경악은 아니었다. 미하엘의 패배는 누가 봐도 정황상 체력 고갈 때문이었고 모두가 납득할 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리에만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키리에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쳐다봤다. 져 준 것 아니냐는 의심과 원망이었다.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패배에 변명을 하는 것은 검사의 도가 아니라지만, 비가 오니 오른쪽 어깨가 너무 아프군. 게다가 이렇게 오래 싸운 건 처음이야. 지금도 숨이 차서 말하기가, 헉. 힘들군요.”

“……각하.”

“축하합니다, 키리에 경. 당신이 날 이겼습니다.”

미하엘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다시 하나로 묶으며 웃었다.

“무슨 소원을 들어주길 바라나요?”

* * *

아무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패배한 미하엘 프라임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는 자가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공작 성의 주인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도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키리에는 검을 내던지고 빗속에 선 그녀가 지독히 외로워 보였다.

극히 일부의 사람 말고는 아무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가 여자란 것을 아는 이들조차 그녀의 속내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제나 농담처럼 지나가듯 말하고, 상대가 심각해지면 ‘장난이었다.’고 손을 흔들며 지나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외로움은 이럴 때 드러난다.

미하엘은 그에게 져 주었다.

“각하께서 이기시면 다시는 각하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키리에는 미하엘의 검이 날아가던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미하엘이 이길 수 없는 조건을 걸었다는 것을.

당초 그 말을 할 때의 키리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뒤돌아보면 이렇게 오만한 말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너를 사랑하진 않지만, 정 그렇다면 받아는 줄게.’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 상대를 굴복시켜 사랑받길 바라겠는가. 때론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긴 하나, 미하엘 프라임이 그런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자신은 또 실수한 것이다.

키리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을 보고 ‘당신, 그렇게 자벌레처럼 뻣뻣하게 살다간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걸요.’ 황후가 저를 놀리듯이 하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키리에는 몰려오는 생각들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미하엘이 손을 내젓자 곧 주의를 환기했다.

“아, 물론 소원 외로 그대에게 다시는 집적대지 않겠습니다. 경이 내게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는 건 이해했으니까.”

“…….”

“그러니 다른 걸 말해 보십시오. 음…….”

그녀가 턱을 괴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혹시 황제 폐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저를 뭘로 보고 그러시는 겁니까.”

“글쎄. 성희롱범 상사를 둔 불쌍한 기사?”

키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감정을 정리하려던 목적만은 이 결투로 달성된 게 분명했다. 그가 기대한 바는 아니었지만, 미하엘이 항복하던 순간 그는 제 식탁에 이제 손님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차릴 식탁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대한 요리와 제대로 준비된 은식기들, 그리고 아름다운 꽃장식까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런 식탁이 아니라도 상관없는 사람도 있다. 다 저며지지 않은 고기, 껍질을 채 깎지 않은 과일이라도 그것을 차린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좋은.

분명 지금의 제 식탁은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런 식탁이라도 상관없어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좋습니다, 각하. 말씀드리죠.”

“얼마든지.”

미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먼발치에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보이자 키리에는 잠시 고민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자신이 지금부터 할 행동이 합당한 것일까?

그러다 눈앞의 다 포기한 듯한 연두색 눈동자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 사랑이 합당한지 아닌지 따지지도 않고 일단 던지고 보는 인간 앞에서 제가 머리 터지게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키리에는 검을 떨궜다. 진한 송진 냄새가 땀 냄새와 섞여 손에서 피어올랐다. 향긋하다고 절대 말할 수 없는 냄새였기에 손을 자신의 바지에 문질렀다. 끈적거리는 송진이 바지에 흉한 자국을 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이런 것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 좀 서툴러도 이해해 주십시오.”

“음? 무슨…….”

미하엘이 눈을 껌벅거리는 동안 키리에는 제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등을 주십시오.”

“그게 소원입니까? 소원치곤 좀 해괴한데.”

미하엘은 쭈뼛거리면서도 제 왼손을 내밀었다. 키리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하엘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곧장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여인에게 남자들이 바치는 최상의 예였다.

“뭐야?”

“왜 저래?”

귓가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따라왔지만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다. 미하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돼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키리에는 입을 열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 한참이나 귓가에 울렸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후, 미하엘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문을 뗐다.

“……지금 나 놀리는 겁니까?”

“전 이런 걸로 농담 안 합니다.”

“농…… 농담한다고 복수하는 거지?”

“아닙니다.”

“……차라리 뺨을 때리십시오.”

그 말에 키리에는 결국 나직하게 웃고 말았다.

“청혼해 놓고 상대의 뺨을 때릴 순 없습니다.”

“미쳤나 봐!”

비명 소리가 공작 성의 하늘을 울렸다. 동시에 미하엘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키리에는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미하엘은 달아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준 채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어렸을 적 각하의 멱살을 잡고 셔츠를 뜯어냈다는 놈 생각을요. 짜증이 나더군요.”

“……미친.”

“각하께 결투를 신청한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각하와 결혼할 경우의 제 삶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 봤는데, 각하의 옆에서 잔소리를 안 할 자신이 없더군요. 각하가 이기면 평생 수련한다 생각하고 입 닫고 있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싸워서 이길 수도 없는데 잔소리는 해서 뭐 합니까. 근데 제가 이겼으니 할 수 있겠군요. 제 소원은, 결혼하고 나서도 각하께 화는 내게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까?”

키리에는 천천히 일어나 그녀를 잡아당겼다. 미하엘은 기력 없이 끌려왔다. 그렇다기보다는 버틸 생각조차 안 들었다는 게 맞았다.

키리에는 나직하게 한숨 쉬었다.

“그럼 제가 제 목숨 구해 준 사람 두고 떠날 만큼 파렴치한일 줄 아셨습니까?”

“그…….”

미하엘이 옆으로 눈알을 굴렸다. 키리에는 조금 짜증이 났다.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겁니까? 애초에 그런 선택지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

“……물론 제가 좀 오해할 만하게 말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아까 각하께서 져 준 순간 알겠더군요.”

그 말에 미하엘이 입을 비죽였다.

“져 준 거 아니고…….”

“예. 제가 이겼죠. 그러니까-”

키리에는 미하엘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헉, 뭐야?”

“야, 우리 각하 남색가인 척하다가 설마…….”

“진짜 남색가한테 걸린 거야!?”

키리에는 귀를 닫으려고 애쓰며 미하엘을 내려다봤다. 그의 가슴 아래에서 키리에를 올려다보는 미하엘은 아직도 황망한 얼굴이었다.

나중에 자식들에게 ‘청혼했을 때 네 어머니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이었단다.’ 같은 이야기는 못 하겠군, 하고 생각하며 키리에는 속삭였다.

“딴생각하실 여유가 있습니까?”

“……뭐, 왜, 뭐가요?”

미하엘이 당황해 팔을 휘저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입 맞추기 좋은 각도라고, 각하가 먼저 말씀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미하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키리에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미하엘 당신이.”

미하엘 프라임 공작의 첫 입맞춤이 공작 성의 가신들 앞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미하엘 프라임 공작은 오해가 다분히 쌓여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과 사용인들 쪽을 한 번 쳐다본 후, 왼손으로 빨간 머리 기사의 멱살을 잡고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이후로 만 이틀 밤낮 동안, 아무도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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