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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행복한 지옥 (24/28)

외전1 행복한 지옥

남부의 땅은 황량했다. 근 20년 가까이 전쟁을 반복해 온 땅이니 그럴 만도 했다. 풀이 자랄 틈도 없이 그곳을 군대가 밟아 대고 다시 후퇴하길 반복했다.

그 잔혹함과 무용으로 이름 높은 수장 브라무스크는 노련하게 남부 소수 왕국 연합을 이끌어, 낸터킷 후작에게서 그들의 초원을 지켜 냈다.

그러나 그런 브라무스크가 와병 중임을 전하며 갑작스레 1년의 휴전을 청하자, 낸터킷 후작은 즉시 수락한 후 황제와 대립각을 세웠다. 황제로 즉위한 루카스가 후작의 누이, 낸터킷 황태후를 자신의 실종 사건 주범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가 즉위한 지 고작 1년 만이었다.

루카스는 온갖 증거 자료를 모아 황태후를 죄인으로 고발, 황가의 일원에서 제명하고 그 직위와 재산을 몰수할 것을 하명했다.

황태후가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급히 남부의 낸터킷 영지로 피신했다.

그러자 루카스는 친정을 선포하고 남부로 직접 군대를 끌고 내려왔다. 그런 상황에서 브라무스크가 휴전을 청한 것은 낸터킷 후작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아니,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루카스가 황후인 리네트까지 데리고 친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낸터킷 후작은 맨 처음에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어여삐 여긴다더니, 여인에게 홀려 전쟁터에까지 데리고 온다더냐? 애송이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보여 줘야겠군!”

그는 남부에서 이름난 명장이었다. 20년간 남부 전선을 도맡아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낸터킷 후작이 아니라면 진작에 브라무스크가 남부를 지배했을 거라고 호사가들은 얘기했다.

하지만 바로 그 황후가 혈혈단신으로 남부로 내려가 브라무스크와 협상했다는 사실만큼은 낸터킷 후작도 정녕 몰랐다.

공식 문서에서는 자신을 황후가 아니라 ‘록시온의 공작’이라고 칭하곤 하는 그녀의 진가는 브라무스크와의 협상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귀한 인질이자 협상가임을 앞세워 리시스트 제국이 남부 소수 왕국 연합을 존중할 뜻이 있음을 내비침과 동시에, 원활한 협상을 따냈다.

결국 낸터킷 후작은 앞뒤로 자신을 향해 겨눠진 화살을 목도하게 됐다.

“이제 다 끝났군요.”

황량한 땅 위, 거대한 바위 끄트머리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붉고 거친 피부를 가진 거대한 덩치의 중년 남자였고, 나머지 한 명은 도무지 그 남자와는 연이 없을 것만 같은 제국인 특유의 피부를 가진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남부 왕국 특유의 통이 넓은 흰 바지는 먼지로 인해 지저분했으나 부츠는 고급품이었다.

웃기는 건, 머리에 쓴 커다란 모자였다. 제국의 아가씨들이 들판으로 놀러 갈 때나 쓰곤 하는 챙이 넓은 모자는 전장에 들어맞지 않는 한가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더불어 남자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조그만 몸집 위에는 누군가 정성 들여 뜬 숄이 걸쳐져 있었다.

한 마디로 ‘아무거나 집어 입은 패션’이었다.

중년의 남자, 브라무스크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픽 웃었다.

“그래. 오늘 낸터킷은 그 목숨을 다할 것이다.”

“잊지 마요. 후작의 목숨은 제국의 것입니다.”

“아무렴. 후작의 목을 가장 앞장서 베겠다는 부하 놈들을 다독이느라 고생깨나 했지.”

오늘이야말로 길고 긴 전쟁을 끝내는 날이었다. 브라무스크 또한 무기를 들고 전장에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제 옆의 여자, ‘록시온의 공작’ 때문이었다.

이 조그맣고 평범한 데다가 이상한 옷을 입은 여자가 시녀 하나만 대동하고 나타나, ‘남부 가지고 그만 싸웁시다. 당신들이 만족할 만큼 자리를 내어 드릴게요.’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브라무스크는 코웃음 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브라무스크의 신뢰를 얻었고, 그에 보답했다. 그 결과가 지금 브라무스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머나, 머지않아 후작이 잡히겠네요.”

놀라운 일이었다. 낸터킷 후작이 오랫동안 남부에서 브라무스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또한 훌륭한 전략가이자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후작을 이 정도로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전장을 관찰하는 모습이란……. 브라무스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후작이 말에서 떨어졌네요!”

여인은 기다란 통 같은 것으로 전장을 보고 있었다. 먼 곳도 가깝게 볼 수 있는 제국인들의 발명품이었다.

브라무스크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재미있나?”

“당신은 재미없나요?”

그녀는 놀랍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다가 웃었다.

“하긴, 오랜 숙적이 저 같은 사람의 협잡으로 무너지는 모습이 그리 달갑진 않으실 수도 있겠네요.”

록시온의 공작은 그의 속내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다.

브라무스크는 쓰게 웃었다. 아무리 적장이라지만 오랜 숙적인 낸터킷 후작과 되도록이면 제대로 된 결판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20여 년이 흐르자 초조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자신의 욕심이 제 가족들을, 친구들을 절단 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눈앞의 여인과 손을 잡았다. 아니,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요. 시대라는 건 그런 거죠.”

“……그런가.”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요. 그렇기에 제국 또한 당신들과 손을 잡은 거죠. 남부를 다 차지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껏 싸워 온 시간의 두 배는 되는 세월이 걸리겠죠.”

“하지만 그대는 모든 걸 가졌지 않나.”

브라무스크는 여인을 향해 지적했다. 불과 몇 년 전, 공작가의 사생아에 불과했던 눈앞의 여인은 공작 위부터 황후의 지위, 그리고 황제가 가장 아끼는 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잃은 건 하나도 없었다. 제국 신민들이 간혹 그녀를 향해 ‘욕심이 많다.’고 평하는 것은 브라무스크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예외죠.”

“어떤 면에서?”

“저는 주인공이니까요.”

자신이 만물의 중심임을 당당히 선언한 그녀는 곧 다시 몸을 돌려 전장을 바라봤다.

브라무스크는 허, 하고 웃었다. 그녀의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겠지만, 브라무스크에게 그 말은 오로지 그녀의 자신감으로만 들렸다. 중년의 수장은 결국 짙은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젊은이의 패기가 기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 입는 센스는 없는 것 같군.”

“아니, 저기요.”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여인이 브라무스크 쪽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리고 웃었다.

“제가 이곳에 드레스와 보석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면 당신이 날 상대나 해 줬겠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상하게 옷을 입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

“이봐요. 패션은 상대적인 거라고요.”

“알았으니 앞이나 보게.”

웃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때, 저 멀리로 전장의 아득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낸터킷 후작이 붙잡혔다는 신호였다.

* * *

“리네트!”

“오셨습니까, 폐하.”

바지를 입었으면서, 리네트는 치마를 입은 듯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실로 여유 있는 태도였다.

아무리 남부 왕국 연합과 손을 잡았다지만, 그녀는 브라무스크 휘하의 남부민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기가 죽을 환경이지만 그녀는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상대를 맞이했다.

오히려 다급해 보이는 것은 상대방이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황제는 말 위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듯 내려왔다. 머리에 쓴 관이 튕겨 나갈 정도였다. 모래땅을 밟아 달려 나가는 부츠 굽에서는 흙의 파편들이 튀었다.

이내 남자는 팔을 벌려 여인을 안았다. 그 바람에 여인이 쓰고 있던 모자가 땅에 떨어졌고, 여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뭡니까. 누가 보면 제가 죽었다 살아 돌아온 줄 알겠습니다.”

“저에겐 마찬가집니다.”

“제 생존 신고는 정기적으로 한 것으로 아는데요.”

“얼굴은 못 봤지 않습니까.”

루카스는 근 삼 개월 만에 보는 자신의 아내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에게 안긴 여인이 그만 좀 하라고 등을 마구 때릴 때까지.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손에는 큰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루카스는 제 성에 찰 때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폐하, 할 일이 많습니다.”

“경, 오랜만이군!”

결국 보다 못한 기사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만류했다. 키리에 레미시어. 오늘의 전투에서 낸터킷을 생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기사였다.

루카스는 그를 보고 반색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는 동부 영지로 떠나서, 그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기색에 키리에 레미시어가 이마를 찡그렸다.

“저 피곤합니다.”

“알았네. 거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잔소리는.”

루카스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리네트를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고,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낸터킷 후작이 묶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제는 자연스럽게 막사 중앙의 황좌에 앉았다. 리네트 역시 자리에 앉았으나 황후석이 아닌 가신들이 앉는 긴 의자였다. 전장에서만큼은 황후가 아니라 공작으로 있겠다는 그녀의 의사를 모두가 존중한 결과였다.

“낸터킷 후작. 오늘의 결과를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하오.”

황좌에 앉자마자 루카스는 낸터킷 후작에게 말을 건넸다.

낸터킷 후작은 얼굴을 구기며 루카스를 바라보다가, 리네트를 응시했다.

“계집의 속삭임에 어머니에게 칼을 드는 패륜아에게 맞선 것이 무에 안타깝단 말이오?”

“점쟁이의 속삭임에 자기 아들을 숲에 버린 여자를 감싸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안 듣고 싶으실 텐데요.”

리네트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후작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저 협잡꾼 계집이! 지금 누구를 모함하는 것인가!”

“글쎄, 낸터킷 후작.”

루카스가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비토의 목숨을 거둔 이가 당신의 지시였다고 이미 증언한 참에, 더 이상 서로 힘 빼는 짓은 그만하는 게 좋지 않겠나. 빠르게 인정하면 선처하겠다고 이미 몇 번이나 서신을 보낸 것을.”

“인정할 것이 없는데 뭘 인정한단 말이오?”

“그렇군.”

“황제,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낸터킷 후작이 사납게 중얼거렸다.

“이십여 년 동안 지켜 왔던 남부 전선을, 내 누이 하나 잡겠다고 야만인들에게 내주는 것도 모자라 나까지 모함하는군.”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루카스가 빙그레 웃었다. 낸터킷 후작은 화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1억 명의 제국 신민들이 이렇듯 쉽게 남부 전선을 물리는 것을 허용할 것 같나!”

그 말에 리네트는 활짝 웃으며 루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예.”

“제가 잠시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낸터킷 후작, 남부 전선을 물리는 걸 누가 허용할 것 같냐고요? 당신 빼고 다요, 멍청아.”

루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쏟아진 폭언에 낸터킷 후작은 일순간 멍청한 표정이 됐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다리를 꼬고 앉아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한 인간을 본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낸터킷 후작은 정말로 능력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그 능력을 다른 곳에 쓰면 좋았을 거라고, 리네트 카멜리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를 만약 동부 개척지에서, 혹은 해안선을 어지럽히는 해적들에게 썼다면 제국의 세는 더욱 굳건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낸터킷 후작의 지위는 너무나 높았으며, 황후의 오라비이기도 했다. 노골적으로 노튼을 차기 황태자로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더 힘을 실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대 황제는 그를 그저 남부에 밀어 넣어 버렸다.

“20년입니다. 충분히 길었죠. 당신이 브라무스크와 싸우며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든 땅은 자그마치 작은 왕국령과 같은 크기입니다.”

“…….”

“덕분에 제국의 남부는 계속해서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남부 전선 근방은 아무도 살지 않으려 하는 땅이 되었어요. 그런데 누가 당신의 선전을 좋아하겠어요?”

“말조심해라.”

리네트는 싱긋 웃었다.

“나보고 말조심하라는 사람들이야말로 말조심 안 해서 꼭 목이 날아가더라고. 인피리어 공작님은 잘 계시려나? 아직 눈알 안 빠지고.”

제 외조카의 이름에 낸터킷 후작은 이를 갈았다. 자신의 누이가 낳은 그는 현재 계곡에서 거의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신이 황제 폐하의 실종 사건에 협조한 정황 증거가 너무 명백해요. 어쩌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고마울 정도였다고요.”

루카스가 황제 위에 오르기 전부터 리네트는 긴 시간 동안 낸터킷 가문의 축출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노튼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지만, 낸터킷 황후는 여전히 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조금의 불안 요소도, 혹은 찝찝함도 남겨 두기 싫었다.

낸터킷 일가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남부의 왕국 연합에게 남부 땅을 줘 버리는 것은 그리 저어되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남부 왕국 연합은 그 땅에서 살아온 소수 왕국들의 공동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몇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남부 땅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있었다. 식량을 약탈하기 위함도, 혹은 땅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살아왔던 땅을 스스로 일구기 위함이었다.

반면 제국 입장에서 남부 땅은 이제 계륵 같은 곳이었다. 오랜 세월 리시스트 제국은 자존심 때문에 남부의 전선을 물리지 않고 있었으나, 황폐해진 땅을 취한다 해서 큰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리네트는 그렇다면야 그 땅을 브라무스크에게 줘 버리고, 대신 낸터킷이라는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쯤 할까, 공작.”

“그러시지요, 폐하.”

그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낸터킷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스로 죽겠나, 아니면 남의 손을 빌리겠나.”

“나에게도 기사로서의 자존심은 있다.”

“아, 그렇군.”

스스로 죽겠다는 말이렷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장 나선 것은 키리에였다.

키리에는 검격을 가늠한 후,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신속한 찌르기에 낸터킷 후작은 억울함도 토해 내지 못하고 죽었다.

“대저 그가 원하는 죽음을 주는 것이야말로 상이거늘.”

루카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낸터킷 후작이 원하는 대로 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 남매가 부와 권력에 기대어 저질러 온 악독한 일들은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고 제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 * *

브라무스크를 위시한 남부 소수 왕국들의 수장과 국경에 대한 합의를 거치고, 장수들의 상벌을 논의하고 났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모두가 막사에서 물러간 뒤에야 루카스는 자신의 침대에 쓰러졌다.

“이리 와.”

그가 말을 건넨 상대는 한 명이었다. 막사의 입구 쪽에 있던 리네트가 뒤돌아 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 나 차 한 잔만 마시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잔에 차를 따르자, 루카스는 침대에 웅크린 채로 성화를 부렸다.

“빨리 와. 보고 싶었단 말이야.”

“어머나,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으면서.”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간 게 대체 누구더라?”

투덜거리던 루카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제게 안겨 오는 여인을 끌어당겼다. 여인이 까르륵 웃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침대 딱딱하지?”

“뭐 어때. 브라무스크의 천막은 땅에 담요 하나만 깔고 자는 수준이었는데. 아, 푹신하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황제의 막사였다. 사람이 기십 명은 들어찰 정도로 넓었으며 침대는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리네트는 간만에 누리는 부드러운 감촉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으나, 루카스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루카스는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물었다.

“브라무스크의 천막에서 잤어?”

“뭐? 아아.”

리네트가 픽 웃으며 답했다.

“귀한 인질이잖아.”

“……브라무스크의 명성을 믿긴 하지만, 참. 나는 네가 그래서 좋아.”

루카스가 작게 투덜거렸다. 리네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좋아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하네?”

내용은 사랑 고백인데,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루카스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허리에 머리를 비볐다.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 천막에서 잤다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잖아…….”

“부부 생활에는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폐하.”

“긴장감이 너무 팽팽해서 뒷덜미가 당깁니다, 내 아가씨.”

리네트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웃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 예쁜 걸 놔두고 남부로 가는 내 마음도 별로 달갑진 않았지.’

‘그런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서 하라고.’

‘시끄러워.’

‘넌 예쁜 말을 하면 죽냐?’

‘죽어.’

카멜리아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투덜거렸으나 리네트는 그녀를 빠르게 쫓아 보냈다.

‘야. 부부 생활 해야 되니까 가서 좀 자. 피곤하지도 않냐?’

그렇지 않아도 남부에서 내내 ‘열일’하느라 힘들었다고 구시렁거린 카멜리아가 곧 사라졌다.

리네트는 제 머릿속에 살고 있는 이 친구와 그럭저럭 공존하는 데에 제법 익숙해진 차였다.

“다친 데는 없어?”

“딱히? 아, 벌레에 물리는 건 좀 괴롭더라.”

리네트는 어깨에 걸친 숄을 벗어 제 왼팔의 벌레 물린 자국을 보여 주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의 남부에는 벌레가 많았고, 리네트도 밤마다 벌레에 뜯겨야만 했다.

루카스는 벌건 자국을 보더니 거기 가볍게 입 맞췄다.

“뭐, 그래도 안색을 보니 잘 지낸 것 같네.”

“좀 타기는 했어. 애플이 필사적으로 쫓아다니면서 모자를 안 씌웠으면 새까매졌을걸.”

지난해 이맘때쯤 리네트는 남부로 가겠다고 말을 꺼냈다. 막 제위에 오른 루카스는 대경실색하며 대체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가느냐면서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리네트는 제위 초기에 낸터킷 가문을 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들을 컨트롤하기 힘들 거라며 루카스를 설득했다. 꼭 네가 가야만 하느냐는 말에 리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몇 달에 걸친 전략과 협상문이 완성된 후, 황후는 아끼는 시녀 하나만 데리고 남부로 훌쩍 떠났다. 그리고 스스로 브라무스크의 인질이자 조언가로 그곳에 남았다.

루카스는 억울한 듯 웅얼거렸다.

“내 아내가 너무 바쁘다…….”

“세금으로 먹고사는데 바빠야지, 그럼.”

“나보다 더 바빠…….”

“사람들은 똑같이 놀고먹어도 여자를 더 욕하기 마련이거든.”

리네트가 킥킥 웃으며 말하자 루카스가 그녀에게 입 맞춰 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맞닿았고, 리네트 또한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에 심취했다.

그녀의 어깨 숄을 벗겨 내며 루카스는 ‘옷은 또 어디서 이렇게 이상한 것만 골라 입었어.’ 하고 투덜댔다.

‘왜 다들 내가 이상한 옷 입었대!? 나는 그래도 나름 열심히 골라 입었는데!’라고 리네트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 것 가지고 티격태격하기엔 둘은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다.

* * *

황태후가 틀어박힌 성까지 함락하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낸터킷 후작의 참수를 접한 영지의 기사들이 의욕 없이 항복한 덕이다.

성의 세탁부처럼 차려입고 도망치려던 황태후는 기사에게 끌려 나와 루카스 앞에 내팽개쳐졌다.

낸터킷 성을 점령한 루카스는 성의 가장 화려한 홀의 주인 자리에 앉아 낸터킷 황태후를 내려다봤다. 황태후는 이를 갈며 그를 올려다봤다.

“루카스, 그래도 한때나마 내가 아들처럼 여겼습니다. 나를 이리 대하다니 유감이로군요.”

“아들을 숲에 버리는 취미가 있으신가 봅니다. 저도 유감입니다.”

“본래도 천둥벌거숭이 같았으나 제위에 오르니 이제는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는가 보군요.”

“글쎄요. 그리 천하다 폄하하시던 아랫것들의 옷을 입고 도망치려던 전하의 모습은 아주 잘 보입니다만.”

그에 루카스의 뒤에 앉아 있던 리네트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이제 나보다 더 잘 비꼬는 거 같은데.”

“자랑 아닙니다.”

옆에 서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는 날이 갈수록 제 적들을 비아냥대는 솜씨가 하늘을 찔렀다. 그 아내라는 인물이 그렇다 보니 당연했다.

그때, 황태후가 그녀를 꼬나보았다.

“제 계집에게 저런 것을 입혀 놓는 자 앞에서 내가 하녀의 옷을 입은들 무에 부끄러워할 일이란 말입니까?”

“아니- 왜 나만 갖고 그래, 다들!?”

갑자기 저격당한 리네트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키리에가 킥, 하고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카스가 그녀의 옷을 따로 챙겨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리네트는 그저 편하다는 이유로 아직도 그 통 넓은 바지를 입고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차저차하여 황태후는 독배를 받았다. 그나마 직접 갈 길을 택하라는 루카스의 배려였다.

그녀는 오만 저주를 토해 낸 뒤, 독이 든 잔을 삼키고 쓰러졌다. 가쁜 숨이 잦아드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끝났군.”

이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걸 낸터킷은 알고 있었을까. 루카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옆의 기사에게 명했다,

“사흘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시 수도로 복귀할 것이다. 성에서 징발한 술을 풀고 가축들을 잡아 병사들에게 내주어라.”

“예.”

“다들 고생했다. 그리고…… 리네트!”

리네트?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돌아본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멀쩡하던 리네트는 갑작스레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다.

* * *

황제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받아 내지 않았다면 리네트는 땅에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루카스의 품 안에 안긴 여인의 뺨은 창백했고, 숨은 가늘었다. 황제는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의사를 소리쳐 불렀다.

그녀는 낸터킷 성에서 가장 조용한 방에 눕혀졌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진찰했고, 결론 내렸다.

“저는 이쪽은 전문이 아니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회임을 하신 것 같습니다.”

임신성 빈혈이라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얼굴엔 당황과 기쁨이 엇갈려 교차했다. 섣불리 기뻐하기에는 루카스의 표정이 너무나 안 좋았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의사에게 몇 번이나 확실하냐고 거듭해 물었고, 의사는 점점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황제가 자신에게 ‘맞는가? 확실한가? 정말인가?’라고 몇 번이고 묻는다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결국 정신을 차려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리네트 카멜리아가 신경질을 냈다.

“그만 좀 하십시오.”

“……하나.”

“폐하,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저도 짚이는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 말을 삼키며 리네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눈치를 보던 자들은 하나둘씩 슬금슬금 물러갔다. 의사는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리네트가 그쪽도 물러가라 손을 내젓자 내심 기쁜 얼굴로 부리나케 줄행랑쳤다.

그렇게 둘만 남았다. 루카스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봤다. 리네트는 지친 표정으로 루카스의 손을 잡았다.

“브라무스크의 천막에 머무르면서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참 허무하게도 생리가 없더라고.”

전쟁 중인 막사에서 여성들이 지내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남부로 갔으나, 그 많은 준비가 무색하게도 대자연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제 옆의 남자가 할 말을 익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얘기하지 않았어?”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냉랭하기까지 한 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할 말은 많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표정이 됐다. 그럴 만도 했다.

월경이 끊긴 지 두 달이 넘었을 때,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이 사내라면, 그 사실을 안 순간 인질이고 남부고 낸터킷이고 간에 다 팽개치고 그녀를 데리러 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리네트.”

“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돌아오라고 했을 테니까. 아니야?”

“당연한 소리를…….”

“그럼 내가 왜 말 안 했는지도 알겠네.”

“리네트!”

루카스는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가 곧장 사과했다.

“미안.”

“아냐. 그럴 거 같았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검은 머리를 헤집었다. 시녀가 아침마다 공들여 빗겨 주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버릇 때문에 매일 저녁 산발이 되어 있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루카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줬다.

“어쨌든 다 끝났으니까 됐어. 이제 수도로 돌아갈 일만 남았잖아? 기쁜 일이니 그런 표정 하지 마.”

“……리네트.”

“뭐야. 내 이름밖에 말 못 하는 사람 같네.”

그녀가 애써 웃어 보였으나 루카스는 여전히 웃기 힘들었다. 그녀가 익히 가지고 있는 공포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진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 * *

황태자비로 즉위한 리네트가 가장 먼저 들은 말, 그리고 가장 많이 시달린 말은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야 손이 귀한 황실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리네트 카멜리아가 가지고 있는 ‘백안’에 대한 기대감까지 합쳐져 대부분의 이들이 리네트를 만나면 축복을 구실 삼아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갈레안 카멜리아가 제국령 밖으로 나간 이후에는 더했다. 말이야 공부를 하고 오겠다는 것이었으나, 너무 빨리 철이 든 소년이 제게 백기를 흔들고 있는 것임을 리네트는 모르지 않았다.

눈치 빠른 소년이 제국령 밖으로 유학 간 다음부터 모두가 리네트의 아이를 기대했다. 하나는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며, 하나는 카멜리아 가문을 물려받을 터였다. 당연히 사람들의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리네트는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냐면…….

“애가 그렇게 좋으면 너희들이 많이 낳아서 나 하나 주든가!”

……어느 티 파티가 끝나고 나서 록시온의 꼭대기에서 지른 소리가 리네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물론 아이를 낳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과학이 없는 곳에서 애 낳다 죽으면 어떻게 해!’

그래서 리네트는 제 친구인 지젤에게 정말 별걸 다 요구했다. 마법으로 피임이 되는지 물었을 때 지젤은 흥미로워했으나, 안 아프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마법을 만들어 달라는 말에는 이마를 찡그렸다.

“안 돼, 그건.”

“왜!”

“윤리의 영역에 어긋나.”

‘마법사 주제에 무슨 윤리 어쩌구를 주워섬겨?’라며 리네트는 투덜댔지만 의외로 지젤이 설명해 준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은 진작에 의료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발달했으나, 마법사들은 그것이 악의를 가진 인간에 의해 잘못 이용될 경우를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군주가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병사들을 마법으로 대거 만들어 낸다면 어떻게 되겠어?”

그 한 마디에 리네트는 모든 것을 납득했다. 동시에 절규했다.

“망할 인간들, 다 죽어!”

지젤은 안타까운 눈으로 ‘계곡의 마법사님에게 배웠으니, 네가 애를 낳을 때 옆에 있다가 과다 출혈 정도는 멈춰 줄게…….’라고 답했다.

그냥 처음부터 피가 안 나면 안 되나? 하고 리네트는 투덜거렸지만 될 리 없다.

* * *

어쨌든 출산에 관해 리네트가 가지고 있는 공포를 루카스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매번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도 ‘잘 살아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판 다 깔아 놓고 애 낳다 죽으면 엄청 억울할 것 같은데…….’라는 이야기를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막상 루카스가 ‘그럼 다른 귀족들처럼 밖에서 입양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하고 속삭이면, 그녀는 물끄러미 루카스를 올려다보다가 ‘이 얼굴은 물려줘야지.’라며 그의 코를 꾹 누르면서 웃곤 했다.

그러니 출산이라는 것을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던 그녀가 자그마치 석 달이나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게 루카스는 속상하고 서운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리네트 또한 온갖 경우의 수를 다 따져 본 다음 내린 결정이겠지만, 그녀가 홀로 무서워하며 보냈을 석 달의 시간이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아 루카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볼에 갖다 댔다.

“미안해.”

“뭐가?”

“그냥, 다.”

“됐어. 어쨌든 당분간 애는 언제 생기냐는 소리는 안 들어도 돼서 좋긴 하네.”

리네트는 코를 훔치며 웃었다.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제 아이의 건강을 비는 선물이 도착하기 시작할걸.”

“그게 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휘두를 검과 말 같은 게 오기 시작할 거야.”

평민들 사이에서 자라났다고는 하지만 루카스는 황실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남자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도하며, 남자아이가 쓸 만한 선물만 할 것이다.

즉각 그 말을 알아들은 리네트가 질리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싫다…….”

“내가 막 황실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 배 속에 있을 시절 선물로 들어왔다던 검들이 잔뜩 쌓여 있는 창고를 네가 봤어야 하는데.”

루카스가 즐겁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질린다는 표정이었기에 리네트 또한 나직하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 맞춘 후 침대를 두들겼다. 올라오라는 말이었다.

루카스는 리네트를 품에 안은 다음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리네트.”

“응?”

“내가 제의하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루카스가 속삭였다.

“나도 네가 예전에 했던 말을 좀 생각해 봤거든.”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어쨌든 너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하나씩은 낳아야 한다고 말했잖아.”

“음…… 그렇지.”

리네트가 영 못마땅한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루카스의 즉위 전, 두 사람은 태어날 아이에 관해 약속했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황가의 아이로, 여자아이를 낳으면 카멜리아의 아이로.

루카스는 그때 ‘어쨌든 그때까진 나랑 같은 침실 쓰겠다는 거지?’ 하며 웃고 넘겼지만, 그 후부터 계속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찝찝함이 있었다.

황위를 꼭 남자애가 이어야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 입을 뗐다.

“첫째가 딸이든 아들이든, 그냥 황가의 아이로 하면 안 될까? 그러니까, 황위 계승권을 주자는 얘기야.”

리네트는 잠시 몸을 굳혔다가 느리게 그를 돌아봤다. 루카스는 옅게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이번에 남부로 떠나는 널 보면서 생각한 게 있거든.”

“…….”

“그냥 네가 황제 하면 안 되나?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은데.”

그 멍청한 말에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루카스는 ‘아, 물론 이건 내 사심도 들어 있긴 해.’ 하며 덧붙였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일에 치여 잠도 못 자는 것을 리네트 역시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겨우 웃음이 잦아들 무렵, 루카스가 다시 속삭였다.

“남자애여야만 왕관을 쓸 수 있다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거든.”

그러니까, 루카스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왕의 자질이라는 것은 성별을 가려 태어나는 게 아니다.

제국을 20년간 흔들어 왔던 전쟁을 단숨에 끝내 버리는 그녀를 보면서, 루카스는 그녀를 꼭 닮은 딸이 첫째로 태어났을 때 왕관을 주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아까울지를 셈했다.

멍청한 아들과 똑똑한 딸이 태어난다면, 똑똑한 딸에게 왕관을 주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리네트는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황후의 일을 너끈히 해냈다.

‘키리에 레미시어가 망설임 없이 동부로 떠날 수 있었던 건, 황제 옆에 리네트 카멜리아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수도에 유행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그녀가 품은 출산의 공포도 한몫했다. 리네트는 어쨌든 루카스에게만은 다정했고, 제가 가진 의무에 충실했다.

‘너무 충실해서 문제지.’

세상일은 모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녀도 아이의 성별은 어찌할 수 없다. 만약 계속해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남자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그 의무를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공작가에서 가장 끔찍해했던 종마 취급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그녀의 공포를 옆에서 다 목도해 놓고, 태어날 아이의 성별에 목매는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리네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진 알고 하는 말이야?”

“물론.”

루카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나는 앞으로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잘 거고, 거기에 더해서 머리가 굳은 노친네들이 매일매일 내 앞에서 ‘여황제라뇨!’라며 화내는 꼴을 봐야 할 거란 뜻이지.”

리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난 공작 위는 여자애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뭣보다 록시온이…….”

남자는 제 아내의 배에 손을 올리면서 눈을 찡긋했다.

“이 애가 딸이라면 난 너 닮은 딸을 최소한 둘이나 만날 수 있는 거지.”

“……어째 다분히 놀리는 뉘앙스인데, 그 말.”

리네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키리에는 황성에 절대 오지 않겠지.”

“그리고?”

“나는 행복한 지옥에…….”

“지옥?”

“천국을 잘못 말했군.”

“루카스?”

웃음이 넘쳐흘렀다. 리네트가 루카스의 허벅지를 꼬집었으나 그는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어쨌든 그녀도 이기고 자기도 이기는 일이었다. 손해 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손해 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내놓은 답으로는 꽤 괜찮지 않은가.

생각을 이어 가던 루카스는 제 목을 감아 오는 손길에 곧 그 생각도 집어치워 버렸다.

이딴 잡생각보다는 눈앞의 아내에게 입 맞추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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