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결혼 계약
아무튼 논의 끝에 결혼식은 한 달 후로 정해졌다.
미하엘 프라임이 신부의 들러리가 될 것인지, 신랑의 들러리가 될 것인지에 대해 꽤 지난한 각축전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신부의 들러리가 되기로 했다.
“드레스 입은 저의 모습으로 모두를 기절하게 할 겁니다!”
의욕 넘치는 미하엘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기절들 하긴 하겠군.’ 황제의 말이 뒤를 이었고, ‘폐하의 말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미하엘이 농담 섞어 답했다.
미하엘의 입담에 지친 황제는 환자는 쉬어야 한다는 핑계와 더불어 국정을 돌봐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다.
“이왕이면 남부 전통 의상처럼 어깨도 쫙 드러내고 다리도 좀 보여 주는 거 어떻습니까? 싸움질로 다져진 제 탄탄한 각선미가 진짜 끝내주는데, 그동안 보여 줄 기회가 영 없었지 뭡니까.”
“……각하. 이제 좀 주무시죠.”
“그동안 환자 대우한다고 저랑 아무도 안 떠들어 줬다고요. 얼마나 심심했는데!”
리네트는 끝나지 않는 미하엘의 주접에 마구 머리를 헤집은 뒤 키리에를 불렀다. 곧 그가 들어와 미하엘의 이마를 눌러 눕혔다.
그러나 미하엘은 누우면서도 떠들어 댔다.
“경! 경도 제가 치마 입는 거 반대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일단 각하께서 지금 떠드시는 것부터 반대합니다.”
“뭐라고요? 결투를 신청한다!”
“환자와는 결투하지 않습니다.”
“다 나으면 결투합시다!”
“저는 금치산자와도 결투하지 않습니다.”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소!”
“모욕한 것 맞으니 제발 그냥 주무십시오!”
“두 사람, 잘 어울리는군?”
루카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한마디 보탰으나, 미하엘의 이마를 누르던 키리에는 ‘장갑 없이도 결투 신청은 할 수 있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라고 루카스에게 짜증을 냈다.
루카스는 빠르게 사과하며 뒤로 물러났다. 리네트와 마법사는 진작에 문 바깥으로 나와 있던 차였다.
* * *
계곡의 마법사와 리네트와 루카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조용히 회랑을 걸었다. 봄이 찾아오기 시작한 황성의 정원은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파릇파릇하게 물들어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계곡의 마법사였다.
“이제 저도 슬슬 놔주세요, 리네트.”
우아하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으니 하얗게 빛났다. 언뜻 볼 때는 백발 같기도 했다.
마법사가 지낸 세월은 지독히도 길었고, 리네트는 어쩌면 그녀가 지내 온 시간들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드럽지만 아직은 겨울을 머금고 있는 바람이 세 사람을 간지럽혔다.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제가 붙잡은 적도 없는걸요?”
“모른 척하지 마요.”
계곡의 마법사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아직 소원을 빌지 않았잖아요.”
리네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녀가 약속을 지키는 대가로 마법사에게 요구한 마지막 조건은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동화에서는 원래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의 소원을 들어주잖나.
본래 이 동화의 주인공은 나넬이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어진 이야기의 주인공은 리네트였고, 리네트는 자신이 소원을 빌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탑에도 들르겠다고 약속했고, 저는 할 일이 아주 많아요. 그 눈물 많은 뱁새가 빨리 오지 않으면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절 위협했는걸요. 그러니 리네트, 소원을 빌어요.”
리네트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흠, 좋아요. 제 소원을 빌죠.”
본래 리네트는 마법사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을 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 빌 작정이었다. 수많은 동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그녀 또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으리라.
하지만 리네트는 ‘오래오래 행복하게-’야말로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구 사항은 확실하게, 더불어 현실적으로.
리네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후, 옆에 선 루카스의 손을 당겨 잡았다. 루카스는 별말 없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야.’
‘왜?’
‘너 나 좋아하냐?’
‘……약 먹었냐?’
갑작스런 질문에 제 머릿속의 카멜리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리네트는 피식 웃으며 미하엘의 베프 어쩌구 하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그 말대로라면 리네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마 ‘백안’, 카멜리아이리라.
그리고 리네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제는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카멜리아를 쉬게 해 주세요.”
루카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눈앞의 마법사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머릿속의 백안은,
‘야,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에는 해설이 필요한 법. 리네트는 미소를 띤 채 부연했다.
“백안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능력이에요. 카멜리아 공작가의 사람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힘 때문에 너무 많은 딸들을 괴롭혔죠.”
“진심인가요?”
“네.”
황제가 리네트에게 너그러운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 외에도 ‘백안’을 황가에 편입시키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네트는 백안을 자신의 핏줄에 남겨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계곡의 마법사에게 소원을 빌기 전에 황제에게 록시온을 달라고 요구했다. 백안이라는 쓸모가 남아 있을 때 요구를 관철시켜야 했으니까.
루카스에게 받아도 되지만, 어쨌든 명분이라는 건 중요한 것이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제위의 시작부터 ‘여자에게 홀려 엄청난 권한을 쥐여 주는 사람’으로 인식시키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가 해 줄 일은 앞으로도 산더미같이 많았으니.
게다가 최근 리네트는 일부러 ‘백안’의 힘을 끌어다 쓰지 않았다. 증거를 모으고, 사람을 회유했다. 노튼을 몰락시킨 것은 백안이 아니라 리네트 자신이었다.
애초에 ‘남의 거짓말을 알아보는 능력’ 같은 건 없어지는 게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선대 카멜리아 공작은 거짓말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핑계로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오만하게 살았다.
그 능력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들을 부인으로 맞거나 취한 주제에, 필요 없을 때는 가차 없이 내버렸다.
능력이라는 건 괜찮은 인간에게 주어져야 제 쓸모를 다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동안 ‘백안’은 그 능력의 십분의 일도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제넘는 능력을 받은 탓이다.
‘나 죽어!? 죽는 거야!?’
‘그럴 리가.’
물론 ‘논외’는 있다.
계곡의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그럼 당신 또한 앞으로는 ‘백안’ 없이 살아가겠다는 건가요?”
“아, 그건 조금 다른데요. 제 말 좀 마저 들어 주세요.”
리네트는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 힘은 없어져야 마땅해요. 하지만-”
그리고 힐끔 루카스를 바라봤다. 온화한 눈이 무한한 신뢰를 담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신뢰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다 감수하겠다는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리네트가 뭘 저지를지 기대하는 종류에 가까웠다.
그의 기대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이건 좀 민망한데…….
“그래도 저는 남은 인생 꿀 빨고 싶으니까, 저까지만 하세요.”
‘이 미친…… 뻔뻔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아하하하하!”
욕설과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하나는 카멜리아의 것, 하나는 마법사의 것이었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옆에 앉은 남자가 웃음을 간신히 참는 소리가 들려, 그의 손을 꾹 잡아 주며 속삭였다.
“비웃어도 돼. 나라도 웃길 테니까.”
“아니, 이젠 괜찮아. 참고로…….”
루카스는 나머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마저 웃은 후 말을 이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노답이지만, 너도 노답이다. 리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연인을 올려다본 다음, 계곡의 마법사를 바라봤다.
계곡의 마법사는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당신까지만 해 먹고, 남들은 못 해 먹게 하겠다?”
“원래 뭐든 간에 독점적으로 해 먹어야 전설이 되는 법이니까요.”
“황제는 싫어할 텐데요.”
“알 게 뭐예요. 그러시든가 말든가. 황제 폐하도 그 잘난 인생에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게 하나쯤 있다는 건 아셔야죠.”
아차, 노튼도 있었지. 리네트는 덧붙였다.
“아, 노튼까지 두 개.”
“……뭐, 문제는 없지만. 카멜리아는 괜찮다던가요?”
“네.”
‘야, 내가 언제!’
카멜리아가 소리 질렀으나 리네트는 빙긋 웃었다.
‘그럼 나 없이 오래오래 멍청한 애들 구경하면서 더 살 거야?’
그 말에 카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리네트는 백안이 내놓을 답을 알고 있었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가엾이 여길 뿐이었다. 계곡의 마법사와 같이, 사백 년의 시간을 보냈을 카멜리아를.
‘멍청한 리시스트와 눈치 없는 프라임은 속 편하게도 잠들었는데, 너도 나까지만 해.’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곡의 마법사 또한 카멜리아가 동의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가 빙긋 웃었다.
“기발한 소원이군요.”
“혹시 안 들어주실 건가요?”
“천만에요.”
계곡의 마법사는 리네트에게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리네트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당신에게, 그리고 끝내 우아한 마지막을 당신으로 장식할 내 친구에게 찬사를 보내요. 그녀는 사백 년을 기다려 끝내 죽음까지 동반할 친구를 얻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눈웃음이 루카스를 향했다.
“루카스. 당신은 상관없나요?”
“그 능력이 제 것도 아닌데 상관할 수 있습니까? 다만 궁금한 건 있습니다.”
“뭔가요?”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졌다.
“카멜리아와 리시스트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겁니까?”
두 이름을 가진 자가 영원을 맹세하는 순간, 세계의 붕괴가 끝난다는 이야기가 루카스는 내내 궁금했다. 하지만 도무지 이 여자들이 비밀을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루카스에게는 여러 가지가 물음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상황과 대화로 미루어 대강의 이야기들은 짐작했지만, 어쨌든 그가 가장 확답받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계곡의 마법사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결혼해야 세계가 구해지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정확히는, 저희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 듣고 싶습니다.”
루카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햇살 아래 빛나는 금발이 황홀하게도 흐트러졌다.
리네트는 가감 없이 제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외면하기로 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무슨 말이라도 하면 더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알기론 두 사람의 시작은 계약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계곡의 마법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루카스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그랬나요? 전 처음부터 사랑이었는데요.”
두 사람의 처음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대답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루카스가 리네트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면서 ‘나랑 자자.’고 하는 그녀를 봤다면 당신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음, 역시 남의 연애 구경하는 것도 오래하면 징그럽군요.”
계곡의 마법사는 감탄 대신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리네트는 이마를 감싸 쥐었으나, 곧 루카스의 말대로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 소원 들어주시기 전까진 계속 구경하셔야 돼요. 그러니 빨리 해 주시죠.”
“그렇게까지 말하면 역시 들어줘야죠. 빨리 들어주고 저는 사라질게요. 연애들 하세요.”
“호강은 안 누리세요?”
오래오래 카멜리아 공작저에서 호강 누린다며? 리네트가 의문을 담아 묻자 마법사가 음…… 하고 신음했다.
“이건 비밀인데요.”
“……?”
“애플 양이 저한테 극진하게 대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녀가 끓여 주는 차는 너무 맛없어서 못 먹겠어요.”
웃음이 터졌다. 웃음 사이에 소원을 담아 마법사는 마지막 마법을 부렸다.
부디 리네트 카멜리아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더불어, 그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행복하지 않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만족스럽게 눈감기를.
* * *
기실 사람들은 남의 행복한 이야기보다는 불행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알렉사 레미시어는 최근 그 사실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부러워하며 주워섬기던 사람들은 이제는 자신의 불행을 두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레미시어 가문의 귀하다던 막내도 별거 아니었군.”
“그 미모가 하도 이름 높았지만 이제는 그 콧대도 꺾였으려나?”
“노튼 황자가 그녀를 사랑한 적 없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잖나?”
“사랑에 목숨 거는 건 여인들이나 할 법한 짓이지.”
재미있는 건, 알렉사가 익히 들었던 여인들의 험담보다 사내들의 험담이 배는 수위가 높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마치 자신이 노튼 황자라도 된 듯, 혹은 값을 매기는 장사치처럼 알렉사의 값을 앞다퉈 후려치기 시작했다.
예쁘지만 콧대가 높다느니, 착한 척하는 것도 결국은 황가에 시집가려고 두른 위선 아니냐느니.
웃기는 것은 그런 소리를 지껄여 대는 미혼의 청년 귀족들 중 레미시어 가문에 청혼서를 넣지 않은 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알렉사의 파혼 이후 쏟아지던 연서들은, 황궁에서의 사건 이후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 청혼서들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남들 앞에서 망신당해 가격 떨어진 상품을 내가 사 주겠으니 황공하게 여겨라.]
레미시어 후작은 그 청혼서들을 보고 노발대발하다가 종내에는 보지도 않고 찢어 버렸다.
알렉사가 귀애하는 하녀가 그 이야기를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레미시어 후작이 왜 매일 이마를 짚고 있는지 정녕 몰랐을 것이다.
“후작 각하의 집무실을 청소하다가 주웠어요……. 아가씨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며 하녀가 내민 종이는, 레미시어 후작이 분노를 담아 쓰다 말고 구겨 버린 답장이었다.
처음에는 ‘친애하는 xx 가문의 귀한 첫째 아들이자 xx의 자랑에게-’로 시작하던 답장은, 그 끝에 이르러서는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너와 네 가문을 요절내고야 말 것이다!’로 마무리되었다.
알렉사는 레미시어 후작이 미처 보내지 못한 그 답장을 보고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황궁에서 그녀가 겪은 일들은 실로 엄청났다. 단 한 번도 노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남들 앞에서 확인 사살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감싸고 나선 키리에, 그리고 그 때문에 다친 프라임 공작까지. 모든 일이 독이 발린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찔렀다.
그래도 자신은 괜찮았다.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친마저 이런 일들을 겪고 있다는 것, 심지어 마음이 다칠까 싶어 제게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알렉사는 오늘 처음으로 구겨진 편지를 쥐고 눈물을 흘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서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으나, 원래라면 제 이야기 상대가 되었을 키리에는 프라임 공작의 침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알렉사가 홀로 앉아 울음을 삼키던 그때였다.
똑똑, 하녀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겼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는데…….”
“누구시니?”
“그게…… 카멜리아 아가씨셔요.”
알렉사는 뒤늦게 들려온 이름에 놀라 황급히 뺨의 눈물을 닦았다.
하녀는 ‘오늘은 아프시다 전할까요?’ 하고 물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알렉사와 대비되어, 행복한 결혼을 앞둔 신부로 회자되고 있는 것을 길가의 개도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냐, 조금만 기다려 달라 전해 줄래? 그리고 내 단장을 도와줄 아이를 불러 주렴.’ 하고 말했다.
하녀가 내심 놀라는 것이 문밖으로 전해졌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거울을 봤다. 울고 있던 것을 알게 되면 리네트는 틀림없이 마음 아파할 것이므로.
* * *
“울었어요?”
그러나 알렉사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리네트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를 알아챘다. 발개진 눈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알렉사는 옅게 웃으려 했으나, 리네트가 풀이 죽어 고개를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리네트가 왜요…….”
알렉사는 침착하려 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마저도 리네트가 찾아오는 타이밍은 귀신같았다. 어쩜 이렇게 제게 누군가가 필요할 때 나타나는지.
한데 리네트는 알렉사의 눈치를 보며 눈길을 피하는 것이, 큰 죄라도 지은 듯한 얼굴이었다.
알렉사는 리네트의 죄책감을 알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알렉사가 남들 앞에서 불쌍한 아가씨로 전락한 것만 같아 미안한 것이리라.
괜찮다고, 나는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리네트의 손을 붙잡은 채 입을 다물었다. 길고 긴 침묵이 두 여인 사이에 흘렀다.
“저기, 알렉사.”
“…….”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죠…….”
그때, 리네트가 주저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껏해야 그녀가 할 이야기가 노튼 황자와 벌어진 일을 사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알렉사는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자신과 황후 사이를 벌려 놨다는 이야기부터, 본래는 북부에 다녀와서 뭐라도 할 작정이었으나 알렉사가 곧장 파혼장을 보내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알렉사는 리네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그녀의 손을 놨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머릿속으로 차분히 셈하고 나서 고개를 드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리네트가 눈에 보였다.
“그래서, 리네트는 뭘 사과하고 싶은 건가요?”
알렉사는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노튼 전하께 파혼장을 보낸 것은 저의 선택이니 리네트가 사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황후 전하와 절 갈라놓은 것은…… 그래요. 제가 많이 괴롭긴 했으니, 사과하는 게 맞겠네요.”
“……미안해요.”
맹세코 그녀가 이렇게 풀 죽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카멜리아 공작저에서 발란가의 그 무뢰한에게 얻어맞았을 때도 리네트는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으니까.
알렉사는 새삼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웃으려다가 말았다. 지금 웃어 버리면 용서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봐도 되나요?”
“……물어보세요.”
“리네트. 당신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나요?”
그 말에 리네트의 갈색 눈동자가 얼었다. 알렉사는 되도록이면 화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리네트를 바라봤다.
몇몇 사람들은 리네트를 괴팍하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 제 할 말을 기어이 다 하고야 마는 성정은 그러한 평가를 받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부분이야말로 알렉사가 리네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알렉사는 리네트에게서 흘러넘치는 충만한 자존감이 좋았다. 알렉사에게 리네트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리네트가 뭘 좋아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리네트는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게 두려워 알렉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혹시, 처음부터 노튼 황자 전하 때문에 제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나요?”
“알렉사.”
“노튼 전하와 제 사이를 벌릴 생각뿐이었나요, 리네트?”
모든 관계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하기 마련이다. 자신과 노튼의 관계처럼. 혹은 제 둘째 오빠와 프라임 공작의 관계처럼.
시작은 비슷한 관계임에도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서로 가진 진실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과 노튼은 자신만이 일방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파국을 맞았다.
키리에와 프라임 공작은, 글쎄……. 프라임 공작 쪽이 일방적이지만, 키리에는 어쨌든 다정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키리에에 대해 꽉 막혀 있다고 평가하지만, 알렉사는 제 둘째 오빠가 황무지에서도 새싹을 발견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런 사람이 제게 던져지는 진심을 외면할 수 있을 리 없다. 아직 그 둘의 끝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쁜 엔딩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리네트 카멜리아는 자신에게 진심인가, 아닌가.
알렉사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대답을 재촉했다.
“리네트. 내가 당신에게 한순간이라도 친구였나요?”
리네트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알렉사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하든 미소로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사.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대체 왜 노튼과 떨어트려 놓으려고 애썼겠어요.”
“오라버니 때문일 수도 있죠.”
“알렉사, 진심이에요?”
리네트는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은 꽤 우스꽝스러웠다.
“난 당신 오빠보다 당신을 백만 배는 더 좋아한다고요!”
아.
알렉사는 결국 얼굴을 가리고 무너지듯 웃고 말았다.
“아, 알렉사? 알렉사, 우는 거예요? 예? 미안해요. 당신 오빠를 당신이 좋아한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정말 좋아해서, 아니, 그러니까…….”
리네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으나 알렉사는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리 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우는 것이라 착각한 리네트가 당황하는 모습을 한참은 더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 말이다.
리네트는 한참이나 알렉사에게 빌었다.
루카스가 그 광경을 봤다면 맹세코 ‘내 주인은 사실 리네트 카멜리아가 아니라 그 위의 알렉사 레미시어인 것이냐.’고 되물었을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당신을 바로 용서할 순 없어요.”
“그……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리네트는 드물게 알렉사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자신이 잘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상대에게 굽히는 것이 빠른 용서의 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리네트를 보고 알렉사는 픽 웃으며 고민하는 척했다.
“글쎄요. 노튼 전하가 말한 것처럼 가시 박힌 통에서 굴리거나…….”
“설마 정말로 그럴 건 아니죠?”
“뭐, 노튼 전하도 실제로 가시 박힌 통에 들어가시진 않았으니까요.”
알렉사가 살포시 웃자 리네트는 알렉사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노튼인데도 그녀는 저렇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알렉사.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뭐 하지만…… 괜찮아요?”
“뭐가요?”
“노튼 전하 말이에요.”
리네트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제가 가장 마음에 걸려 했던 건, 알렉사가 노튼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거였거든요…….”
“알기는 했다니 다행이네요?”
착한 사람이 비아냥거리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이제는 대강 그녀의 화가 풀렸다는 것도 알면서, 리네트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알렉사는 윤기 흐르는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었다.
“어떻게 괜찮아지겠어요?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웃고 있는데요…….”
“웃기라도 해야지요. 제가 우는 순간, 누군가가 절 더 싼 값에 데려가기 위해 눈을 번득일 텐데.”
알렉사의 말은 간결했고, 리네트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차린 순간 리네트는 이마를 짚었다.
“빌어먹을 놈들…….”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 비싼 종이에 욕설만 잔뜩 쓰셨더라고요.”
재미있죠? 처음에는 정중하게 시작했지만 결국은 모두 욕설로 끝났고, 그마저도 부치지 못하셨어요- 하는 말에 리네트는 참담한 기분이 됐다.
노튼이 벌을 받고 모두가 하하 호호 끝난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노튼이 몰락한다면 그 주변인들도 따라서 몰락하는 건 당연했다.
아름답고 선한 알렉사는 리네트의 복잡한 속도 모르는 듯이 수더분하게 웃으며, 제게 청혼한 자들이 어떤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를 늘어놨다.
“다 죽여 버릴까요?”
“관두세요. 그럼 리네트가 마녀로 불리지 않을까요?”
리네트가 한숨을 쉬자 알렉사는 싱긋 웃었다.
“외려 여성분들은 조용하시더라고요. 재미있죠?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알렉사에게 청혼서를 넣은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낮춰 보고자 안달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수도의 귀부인들은 알렉사에 대해 입을 닫았다.
가볍게 알렉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여인도 없지 않았으나, 대체로는 동정론이 우세했다.
“제게 꽤 많은 티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답니다. 전하와 파혼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요.”
노튼과 파혼했을 때는 대부분 흥미 위주로, 그녀가 노튼을 왜 찼는지 듣기 위해 초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의도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 알렉사는 진저리를 쳤더랬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날아드는 초대장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이 많았다. 어머니가 없는 알렉사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겠다는 마음들이 분명했다.
“고마운 일이에요.”
“그러게요…….”
“인피리어 공작 각하께서는 동정조차 받지 못하고 계시는 걸 보면 제가 퍽 나은 처지인 것 같아요. 그렇지요?”
쫓겨나듯이 계곡으로 향한 노튼에게 황제는 ‘인피리어’라는 성을 붙여 주었다. 누가 봐도 2인자를 위한 성이었고, 그것은 황제 나름의 복수였다.
“리네트,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알렉사의 갑작스러운 말에 리네트가 눈을 반짝 떴다.
“물론이죠!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저를 당신의 결혼식 들러리로 세워 주세요.”
“…….”
그 말에 리네트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들러리야말로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파혼한 알렉사가 그 자리에 나타난다면, 그것도 리네트의 들러리라면…… 분명 곱게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곱게만 안 보면 다인가. 지금의 추세에 더해, 알렉사는 더욱 추문에 휩싸일 것이다.
자신이 파혼하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황태자비를 위한 들러리가 되는 여자. 즉, 알렉사 스스로 자신의 평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알렉사는 리네트의 불안한 눈빛에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녜요. 저는 그저 제 친구의 결혼식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싶은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알렉사…….”
그 말에 알렉사가 빙그레 웃으며 리네트의 손을 당겨 잡았다.
“저는 오늘 리네트가 돌아가고 나면, 아버지께 작위를 달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예?”
“다 리네트 덕분이에요.”
알렉사는 코를 찡긋했다.
첫째 오라버니가 이어받을 레미시어 후작 위를 탐내는 것은 아니었다. 알렉사는 레미시어 후작령의 영지 중 하나와, 아버지의 가신으로서의 작위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제 부친에게 날아든 건방진 편지들을 보고 그녀가 생각한 것이다.
“많이 생각해 봤어요. 제게 연서를 보낸 사람들 중 저를 마음속 깊이 사랑해 줄 남자가 있을지.”
“…….”
“하지만 리네트야말로 알잖아요.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리네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예전의 알렉사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녀는 선량하고 예쁜 데다가 상냥했지만…… 노튼을 생각하며 뺨을 붉히고, 꿈꾸는 듯한 눈동자가 되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말투로 제게 말하고 있었다.
알렉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저를 너무 많이 바꿔 놨어요.”
“…….”
“사랑이라는 게 도무지 예전처럼 황홀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로요.”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노튼이라는 소년 하나만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를 꿈꾸며 선량함을 가다듬었고, 아름답게 가꾸고, 사랑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건 다 부질없었다.
아무리 멋진 여자가 된들, 상대가 비틀려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노튼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청혼서를 보내는 모든 남자가 그녀는 못 미더웠고 기껍지 않았다.
제 부친의 편지를 두고 알렉사는 고민했다.
가장 좋은 신붓감으로 불리는 자신이지만, 그런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과연 있는가?
나아가, 자신이라는 사람이 온 인생을 다 바쳐 함께할 남자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제게 앞다퉈 구애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잘생겼는지만 어필해 댔다.
우스운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하면 뭘 하는가. 정작 개중 아무도 알렉사를 귀히 여기지 않는데.
한때 알렉사는 노튼과 낸터킷 황후가 제게 함부로 구는 것을 감내했으며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리네트 옆의 루카스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날 알렉사가 본 광경은, 리네트가 어떤 말을 해도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남자였다. 리네트가 똑바로 서서 안심하고 제 할 말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발판이었다.
그런 남자가 도무지 또 존재하리라고, 그리고 자신이 기적처럼 그런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덧붙여 그 발판을 꼭 제 남편이 될 사람에게만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귀애하는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결혼해서 행복을 찾는 것보다, 아버지께 가신의 작위를 받아 제 길을 닦아 나가는 쪽이 더 쉬울 것 같지 않나 싶기도 해요.”
추측이 아닌 사실이었다.
하지만 리네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기도 했다. 삽시간에 수많은 일을 겪고 변해 버린 자신의 친구 앞에서 리네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제나 사랑을 믿던 알렉사는 비혼 주의자가 돼 버린 것이다.
큰일을 겪은 이들이 염세적으로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지만…… 리네트는 다시 눈치를 보았다.
“……제가 알렉사에게 너무 큰 죄를 지은 건 아닐까요?”
“무슨 소리예요.”
알렉사가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아니라면 저는 지금쯤 인피리어 공작 부인이 되어, 계곡에서 남편의 눈알이 언제쯤 뽑힐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말이었다. 인피리어 공작 부인이라니! 그 당황스러운 직함에 리네트는 결국 웃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곧 알렉사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데 제가 리네트 다음으로 작위를 받게 되면, 또 제게 나쁜 물을 들였다고 당신이 욕을 먹겠죠? 그건 싫은데…….”
“아, 좋은 방법이 있긴 해요.”
“뭔데요?”
리네트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알렉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을 듣다가 환하게 웃었다.
“리네트는 정말 못됐군요! 남을 방패막이로 쓰려 하다니!”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당신 방패막이가 못 돼서 안달일 거예요, 그 사람은.”
리네트가 투덜댔다.
이에 한동안 웃은 알렉사는 빠르게 일어났다. 미하엘 프라임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예전에는 환자에게 방해가 될까 방문을 꺼렸으나, 핑계는 확실해졌다.
* * *
어쨌든 긁어낼 거 다 긁어냈고 원하는 거 다 받아 냈으니 할 일은 하나만 남았다. 리네트는 새벽부터 황성까지 온 재단사 팔스에게 투덜거렸다.
“한번 만든 드레스, 그냥 대충 입으면 안 돼요? 꼭 이렇게 아침부터 수선을 떨면서 다시 꽉꽉 조여야 돼요?”
“네.”
“왜요?”
“각하, 그동안 마음고생하셔서 살이 빠진 게 눈에 보이거든요.”
몇십 년 동안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로 일한 가락이란. 리네트는 흡족하게 웃었다.
책봉식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카멜리아 아가씨’라고 부르던 팔스는 오늘 그녀를 만나자마자 ‘각하’라고 불렀다.
아직도 그녀를 카멜리아 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각하라고 불러야 하는지 헛갈려 눈을 굴리는 멍청이들과는 궤가 달랐다.
“치수가 달라지면 당연히 옷의 태도 달라지죠. 이거 봐요. 허리 쪽이 좀 줄었네요. 제가 오늘 안 왔으면 헐렁한 옷을 입고 식을 치르실 뻔했어요.”
“이런, 튼튼한 게 내 매력인데.”
최근 리네트가 했던 대화들 중에 가장 가볍고 한가로로웠다.
리네트는 제 옆구리에 팔스가 핀을 찌르는 것을 견디며 중얼거렸다.
“소원으로 산업 혁명이나 빌 걸 그랬나…….”
“예?”
“아녜요.”
리네트는 마력석 없이 석탄으로 다니던 기차들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렸다. 증기 기관 정도는 있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굴려야 하지? 그녀가 요즘 하는 생각들은 전부 그런 식이었다.
옷은 공장에서 좀 만들면 안 되나? 기계가 없잖아. 그보다 면직물이 자동화가 안 돼서 힘들겠구나. 사람들이 다 직접 씨실하고 날실을 넣어 틀로 짜고 있으니 언제쯤 가봉 없이 옷을 입을 수 있으려나.
상수도도 마찬가지야! 수도에 보급률이 너무 낮잖아! 이 동네 고칠 거 너무 많아! 이거 언제 다 해!?
그녀의 팔을 받치고 있던 애플이 투덜거렸다.
“아가씨, 제발 딴생각은 적당히 하세요. 저 힘들어요.”
“세상에, 상전한테 하는 말본새 좀 봐. 너 해고한다?”
“해고하세요. 저 없이 행복하실지 어디 보자고요.”
팔스가 감탄한 눈으로 똥배짱을 부리는 하녀를 바라봤다. 성격 괴이하다고 소문난 카멜리아 공작에게 이렇게 대놓고 투덜대는 하녀도 드물리라.
리네트는 픽 웃었다. 말과는 달리 애플은 최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리네트가 애플 남매에게 ‘리시스트의 아침’ 지분을 넘겼기 때문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데다 가장 공신력 높은 신문으로 통하지만, 어쨌든 ‘리시스트의 아침’의 시작은 3류 가십지를 표방한 물건이었다. 그런 걸 계속 쥐고 있으면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이다.
하지만 제 옆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한 애플에게 주기에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저 이제 그럼 부자예요!?”
리네트가 애플에게 ‘리시스트의 아침’을 주겠다고 말한 순간 애플이 올린 비명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후부터 애플은 리네트가 무슨 말만 하면 ‘저 신문으로 번 돈 들고 확 남쪽 나라 가서 살 거예욧! 양쪽에 미남들 끼고!’라고 귀엽게 협박해 댔다.
저 협박 내용에는 분명 미하엘이 지대한 공헌을 했으리라고 리네트는 추측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젠장, 이게 뭡니까.”
마침 미하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결혼식 들러리를 위한 화려한 예복을 로가나의 도움으로 차려입은 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 멋진 자태를 과시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팔스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금세 입을 다문 미하엘의 예복은 바지 정장이었다.
미하엘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아직도 밝히지 않았다. 앞으로도 당분간 밝히지 않을 것이다. 키리에 때문에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황궁에서의 사건 이후, 레미시어 가문의 둘째 아들이 황태자의 심복 자리를 차 내고 프라임 공작 휘하로 들어간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꽤 놀라운 것으로 취급됐다.
본래 키리에는 노튼을 모시다가 루카스의 아래로 간 이력 때문에 ‘레미시어 가문의 비겁자’라고 불려왔으나, 그것 또한 이제 와서는 ‘키리에야말로 정의를 지키는 기사의 귀감’이었다고 재조명되고 있는 차였다.
그런 상황에 미하엘이 여자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키리에를 볼 시선은 대번에 바뀌어 버릴 것이다. 둘째 아들이기에 물려받을 작위도 재산도 없는 키리에가 ‘여공작’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 아니라 공작가의 재산과 작위를 바라는 것이라 비치기 쉬웠다.
물론 미하엘 본인은 ‘재산과 작위가 아니라 그냥 나를 통째로 다 줄 수도 있는데!’ 하고 발을 동동거렸지만.
“다 입었습니까?”
“아쉽게도 아직이요.”
리네트가 턱 끝으로 옆에 놓인 트롤리들을 가리켰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번쩍거리는 보석들이 그 위에 줄줄이 놓여 있었다.
“저거 다 두르고 휘감고 얹어야 해요.”
미하엘은 개중 목걸이를 하나 들어 보더니 그 무게에 기겁하며 내려놨다.
“저딴 걸 목에 두르고 하루 종일 있어야 한단 말이지?”
“참고로 드레스 입고는 제대로 눕지도 못해요.”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하엘도 픽 웃었다.
미하엘은 며칠 전 드디어 키리에에게 자신이 양손잡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가 당연히도 불같이 화를 낼 줄 알고 변명을 준비하던 미하엘은, 의외로 수더분하게 받아들이는 키리에를 보고 식겁해 버렸더랬다.
‘경, 혹시 귀신 들렸습니까!?’라는 말에 키리에는 그제야 짜증을 냈다던가.
“양손잡이라고 해서 각하께서 제게 어깨를 내준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어쨌든 밥은 안 먹여 드려도 되겠군요.”
“대박적.”
“뭡니까?”
“키리에 경, 역시 결혼해 주-”
“꺼지세요.”
그 뒤에 키리에는 미하엘을 붙잡고 ‘당분간 각하께서 왼손을 쓰실 수 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사람이 가장 약해졌을 때 배신자가 드러나는 법입니다.’하고 당부해 또다시 청혼을 받았다. 그가 진저리를 친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키리에를 옆에 두는 대신 미하엘은 알렉사에게 자신의 영지 중 한 곳을 쪼개 주었다. 반은 알렉사의 부탁, 반은 레미시어 후작에 대한 미안함의 발로였다.
황태자의, 나아가 황제의 칼이 될 수도 있었을 아들이 프라임 공작의 호위를 자처했을 때, 후작은 그 이유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낙담했다고 전해 들었다.
물론 그걸 미하엘 혼자 일종의 지참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리네트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망상이야 자유였다. 그 입 밖에만 안 낸다면.
아무튼 김칫국을 드럼째 마시는 건 황제뿐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알렉사가 작위를 선택했다는 이야기에 레미시어 후작은 키리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낙담했다. 그녀가 걸어갈 험난한 길을 아는 탓이었다.
후작은 ‘카멜리아 공작 각하야 알아서 가시밭길 다 쳐 내고 걸어갈 분이지만, 여린 네가 대체 어떻게 그 질시를 견뎌 낼지…….’라며 걱정했고, 어쩌다 보니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리네트는 ‘아니, 저도 여리거든요!’ 하고 콧김을 뿜었다. 물론 후작은 코웃음 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결국 알렉사는 제 아버지의 가신이 아니라, 미하엘의 휘하에서 남작 위를 받았다. 모쪼록 그편이 나을 거라는 게 리네트의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알렉사를 욕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후에 미하엘이 제 성별을 밝힐 경우, 그녀는 알렉사의 가장 든든한 우산이 될 것이다.
리네트가 작위를 줄 수도 있었으나, 그건 알렉사도 리네트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친구였고, 상하 관계가 조금이라도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리네트!”
그리고 곧이어 알렉사가 들어왔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그녀를 보고 리네트는 흐린 눈을 했다.
“도대체 신부가 누군지 모르겠네……. 이쪽 아니에요? 암만 생각해도 이쪽이 천배는 예쁜데.”
“아하하, 무슨 소리예요? 리네트가 만배는 예뻐요!”
“와- 진짜 알렉사니까 믿어 주는 거지, 남이 했으면 그냥 아첨이구나 했을 거야…….”
‘네가 더 예쁨’, ‘아니, 네가 더.’, ‘아니, 네가 더 더.’ 같은 덕담이 몇 번 더 오갔다. 그날의 또 다른 주인공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 반복됐을 것이다.
키리에가 헛기침을 하더니 문을 몇 번 두들겼다.
“전하 오셨습니다.”
“이런, 벌써?”
“마치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크흠, 헛기침을 하며 루카스가 들어섰다. 리네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조금 더 늦게 왔으면 하긴 했지.”
“정말이지, 조금도 빈말은 하지 않는 내 연인이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카스는 부드럽게 팔을 벌려 그녀의 허리를 안고 뺨에 입 맞췄다. 리네트는 픽 웃으며 마주 입 맞추고 떨어지려 했으나, 루카스가 몇 번 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서야 떨어질 수 있었다.
“오늘 잘생겼네?”
“음, 내 연인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얼굴일 것이 분명한지라. 힘 좀 썼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리네트가 원했던 마지막 선물이자, 결혼식 이전에 꼭 거쳐야 할 절차였다.
“네가 말한 것은 다 쓰긴 했는데, 리네트 카멜리아.”
“응.”
루카스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훑어보는 리네트에게 사내가 섭섭한 듯 웃었다.
“내가 그리 못 미더운가?”
“정확히는 관계의 영속성을 믿지 않는 거지.”
“그래서 너를 사랑하는 거지만.”
옆에서 미하엘이 고개를 쏙 내밀어 서류를 훑어보곤 감탄했다.
“와- 지독하네요, 정말. 이런 게 내 친구라니. 정말 적으로는 안 돌리고 싶다.”
옆에 서 있던 알렉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전 이 정도는 꽤 괜찮은 것으로 보이는 걸요……?”
파혼 미경험자와 경험자의 차이일까, 하고 생각하며 리네트는 빙긋 웃고는 서류를 펼쳤다.
서류는 다름 아닌 ‘혼인 계약서’였다.
리네트도 루카스도, 상대가 자신을 더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구는 확실하게, 더불어 현실적으로.’라는 그녀의 신조에는 결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루카스에게 결혼식 전에 혼인 계약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내용은 자세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깨지더라도 작위는 지속될 것이며, 리네트 카멜리아가 가지는 권한에 대한 확인이 길게도 쓰여 있었다. 더불어 리네트 또한 사랑이 깨진 후에도 루카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흔했다. 몇몇 대귀족들이 결혼 전 작성하곤 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작성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황가에서 혼인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문관들이 조금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미하엘과 알렉사가 굳이 결혼식 전에 이곳을 찾은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서류의 공증을 위해서다.
서류의 마지막까지 꼼꼼히 확인한 리네트가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러면 도장을 찍을까?”
“부디 그리하세요. 그런데 그 물고기 도장은 계속 쓰는 거야?”
그럼 카멜리아 공작가의 인장도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못생긴 물고기 도장이 황가의 혼인 계약서에 찍힌다면 정말 볼만할 것 같기는 했다.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계약서 위에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그러나 리네트는 의외로 한참이나 계약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나?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열려고 했다. 리네트가 계약서를 들어 올리며 말하기 전까지는.
“음, 역시 물고기 도장은 못 쓰겠어. 너무 못생기긴 했지?”
“아, 그래? 그럼 이 기회에 새로 파는 건 어때? 어차피 황가의 일원이 되면 직인은 하나 따로 있어야 하거든.”
루카스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신의 직인은 이미 찍힌 참이니, 서류는 리네트가 들고 있다가 결혼 후에라도 도장을 찍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혼인 계약서를 들고 있던 리네트는 잠시 루카스와 서류를 번갈아 응시하더니 의외의 말을 입 밖에 냈다.
“루카스. 나 사랑해?”
“이제 와서 새삼?”
“빨리 말해.”
‘우우-’ 난데없는 애정 과시에 미하엘이 야유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루카스의 웃음은 그 직후 빠르게 사라졌다. 루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네트가 자신의 손에 든 혼인 계약서를 북, 찢어 버린 것이다.
놀란 좌중을 뒤로하고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루카스 리시스트. 난 도장은 입술 도장이 최고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는 리네트가 자신의 입술을 두 번째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잠시 멍하니 있던 루카스는 그 사랑스러운 몸짓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는 당황을 머금고 있던 얼굴이, 더없이 환하고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반대로 쓴웃음을 지었다.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미하엘이었다.
“와, 정말 싫다. 지금은 좀 적으로 돌리고 싶은데요!”
“각하, 지금은 저희가 나가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아요!”
“아, 그렇습니까? 어이쿠!”
미하엘이 호들갑을 떨다가 알렉사에게 끌려 나갔다. 팔스와 애플을 비롯해 로가나까지도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빠르게 비웠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루카스가 리네트의 손을 쥐고 그 손등에 이마를 댔다. 가장 귀한 여인을 맞이하는 예의였다. 그 직후 남자는 그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짠하고, 예쁘고, 못된 여인이 까르륵 웃으며 품에 기꺼이 안겨 왔다.
루카스는 나직하게 그 귓가에 속삭였다.
“리네트.”
“응.”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자.”
“그래.”
한껏 웃음으로 끌어 올린 입술들이 맞닿았다.
단 한 번도 설레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의 입맞춤은 한층 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들은 오래오래 행복할 것이라고 두 사람 모두 확신했다.
동화책의 마지막 장이 덮인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 * *
[……하여, 최초로 황태자비이자 공작 위를 가진 여인이 리시스트 제국에 탄생했다.
더불어 황제 폐하께서는 대대로 황후들의 것이던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카멜리아 공작가의 소영지로 내렸다. 황성 안에 일개 가문의 영지가 생긴다는 것에 수많은 가문들이 항의와 우려를 표명했지만, 황제는 완강했다.
대저 백안의 황가 편입이 확실해진 가운데,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금발의 여인은 흐린 눈으로 신문을 내려놨다.
제국 수도를 온통 뒤흔들어 놨다는 소식은 변경의 작은 왕국까지도 전해졌다. 신문은 불과 며칠 전의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왕국의 왕비였고 가장 빠르게 신문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얼마 전 왕위에 오른 왕은 부디 이 혼란스러운 소식을 두 번째 아이를 밴 그녀가 모르길 바랐으나, 눈이 있고 귀가 달린 자라면 리시스트 제국의 소식을 모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리시스트 제국을 뒤흔든 가장 커다란 축인 카멜리아의 이름을 나눠 가진 여인이었다.
유독 심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리시스트 제국을 떠나온 뒤, 두 번 다시 자신의 가문 이야기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내내 자신을 딸 취급도 해 주지 않은 부친과, 나아가 그녀를 해하려 했던 계모를 생각한다면 무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왕이야말로 그녀가 계모를 피해 맨발로 숲을 헤매고 있던 것을 구해 낸 장본인이었으니, 그 보호 또한 별다르게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해졌다는 것을 왕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나넬.’이라고 불러 주는 왕만 있다면, 그녀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염려스럽기는 했다. 다름 아니라 제 동생이 보내온 편지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언니.’로 시작되는 편지는 신문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그녀-나넬리아는 이 편지를 이미 몇 번이나 거듭해 읽어 내린 후였다. 하지만 또다시 편지를 곱게 펴서 읽기 시작했다.
문장은 간결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제 동생이라는 것은 의심할 길 없었다.
[사랑하는 언니.
언니를 이렇게 불러 본 지 너무나 오래돼서 까마득해요.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은 동생을 용서하세요. 더불어 오랜만에 전하는 소식이 이런 모양인 것도 용서하시길 바라요.]
나넬리아는 그 말에 헛웃음 지었다. 동생은 자신을 계모에게서 구해 내 주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갚기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자신이야말로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배포 넓은 동생은 오히려 자신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더불어 동생은 ‘대저 구질구질한 집안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여자가 남은 가족을 구하려다 도로 말려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흔한 일이니, 저는 슬기롭게 행동하신 언니에 대해 언제나 감탄하고 또 감사하게 여긴답니다.’라는 말로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 주었다.
하나 역시 가장 걸작인 부분은 편지의 마지막 줄이었다. 길고 긴 안부 인사 끝에는 진정한 동생의 용건이 있었다.
[사랑하는 언니,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시리라 믿어요. 부끄럽지만 제가 이렇게 두서없는 편지를 보낸 이유이기도 해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할 언니의 이름.
하지만 ‘나넬리아’라는, 귀족이라면 쓰지 않을 너무나 성의 없는 이름의 복수를 하시길 바라요.
그 이름을 지은 자가 누군지 짐작은 하지만, 묻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아시겠지요.
부디 저의 부탁이 언니의 복중 아기씨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빌며.
언니를 사랑하는 리네트 카멜리아 올림.]
그녀는 편지를 곱게 접었다.
몇 번이나 읽어 외울 정도였지만, 여전히 그 문장들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희열감을 느끼게 했다. 제 잘난 동생은 자신에게 ‘마지막 칼자루’를 쥐여 주었던 것이다.
그때, 시녀 하나가 기척을 냈다. 나넬은 눈을 들어 고하라 눈짓했다. 시녀는 정중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론과 이멜다 부부가 성문에 도착했다 합니다. 왕비 전하의 부모로서 받아야 할 의전을 요구하고 있는데, 어찌할까요?”
나넬은 밝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제국의 죄인일 뿐, 내 부모가 아니라고 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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