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종장
‘리시스트의 아침’까지도 필요 없었다.
기뻐야 할 황태자 책봉식에는 피가 튀었으며, 결혼식은 미뤄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노튼 황자는 구금되었으며, 프라임 공작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 또한 순식간에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피로 물든 월계수 관과 두 황자, 그리고 계곡의 마법사와 리네트 카멜리아.
노튼 황자가 저지른 짓들을 번호까지 매겨 주워섬긴 리네트의 덕일까? 여태까지 현명하고 선한 황자로 불렸던 노튼의 평판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모함입니다!”
“그만하자, 노튼.”
황제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노튼이 방에 구금되어 임시 재판정이 그의 방에서 차려진 참이었다. 낸터킷 황후는 적극적으로 노튼에 대한 구명문을 보냈으나, 황제는 그것을 읽지도 않고 불에 태웠다.
그리고 지금.
황제와 루카스, 리네트에 마법사까지. 단 네 명이 이곳에 앉아 있었다.
“네가 이제 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다. 나도 이제 너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
“너는 언제나 아쉬울 때만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황제가 차가운 얼굴로 손발이 구속된 노튼을 쳐다봤다.
“관례에 의해 처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너에게 관례는 사치다. 따라서 루카스와, 계곡의 마법사가 대리인으로 내세운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그 처벌을 맡기겠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네 행동을 납득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가 언제는 내게 물어보고 행동했느냐?”
노튼이 독이 잔뜩 오른 표정이 되어 입을 닫았다. 황제가 루카스에게 턱짓했다.
“루카스. 어떻게 생각하느냐. 뭘 해야 목숨을 위협당한 네가 만족할 만한 벌이 되겠느냐.”
루카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이 심히 느려 답답할 정도였으나, 황제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루카스가 씩 웃었다.
“황위 계승권을 박탈해 주십시오.”
노튼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루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노튼 리시스트가, 이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황위 계승을 하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단지 그것뿐인가?”
“저에게는 상에 가깝지만, 저 애에게는 희망을 빼앗는 일이 되겠지요. 그리고…….”
루카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제 약혼자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황제의 시선이 리네트에게 쏠렸다. 리네트는 정중하게 무릎을 굽히고 말했다.
“폐하. 며칠 전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나이까.”
“고하라.”
리네트는 우아하게 일어서 노튼 쪽을 바라봤다.
사흘 내내 움직이지 못했기에 참담한 몰골이 된 노튼이 그녀를 마주 보고 이를 드러냈다. 짐승이나 다름없었으나, 노튼에겐 짐승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래. 리네트도 마주 보며 웃었다.
“황자님.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황자님을 참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
“그래서 앞으로도 자주 뵙고 싶답니다.”
“개수작하지 마라, 계집!”
한껏 비아냥대는 어조에 노튼의 얼굴이 뒤틀렸다. 리네트는 혀를 찼다.
“진심이에요. 저는 지금도 노튼 전하의 행보가 여기서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비극적일지 생각한답니다.”
“나를 조롱할 거면-”
“그리고 저는 황제 폐하께 사랑받는 며느리이고 싶기도 해요.”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황제 쪽을 쳐다봤다.
제 며느리감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그리고 얄미운지도 알고 있는 황제는 지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계속해서 말하라는 뜻이다.
“폐하께서 딱 둘밖에 없는 아들 중 하나를 잃어버리면, 지금은 괜찮다 생각하실지라도 나중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그렇죠?”
리네트는 황제가 공명정대하려 애쓰는 똑똑한 군주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명정대하려 애쓰는 군주라는 건, 공명정대하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그는 노튼이 루카스에게 저지른 짓들을 목도하고도 그 목숨만은 살려 달라 루카스와 거래해 왔다. 노튼이 제 발로 그 기회를 걷어차 모두 무산됐지만.
노튼의 죄목들은 정말로 그가 지금 당장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정말로 처형한다면 황제는 분명 뒤늦게 후회할 것이다. 그리도 지극히 사랑하는 자식이니.
뒤늦은 후회가 누굴 타깃으로 삼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 자리에서 노튼에게 책임을 묻는 자신에 대해 황제는 미움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재난은 미리 방지하는 게 최고였다.
제 곁의 마법사처럼, 구멍을 그대로 놔뒀다가 한참 후에 허겁지겁 막느라 고생하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저 여자가 알면 네 눈썹을 다 뽑아 버릴걸.’
백안이 심드렁하게 속삭였다.
‘묘하게 리얼한데? 그거 네 체험담이야?’
‘민둥 눈썹으로 두 달을 다녔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리네트는 노튼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진작부터 노튼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 두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더없이 자비로워 보이지만, 노튼의 입장에서는 가장 괴로울 일.
리네트는 노튼 앞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사흘을 씻지 못했는데도 잘생겼으니 엄청나긴 정말 엄청난 얼굴이었다. 이 얼굴로 그딴 짓이나 하다니 정말 아깝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노튼 전하. 공작이 되세요.”
“……뭐라고?”
리네트의 말에 노튼은 물론이거니와 황제도 눈을 부릅떴다.
그에 리네트는 턱 밑에 손을 받치고 생글생글 웃음을 보였다.
“본래 황가의 형제들은 단승 작위를 물려받죠. 전하도 물려받으시길 바라요. 공작님이 되셔서 오래오래 사세요. 좋은 것도 많이 드시고, 장수하셔야 해요. 그게 제 바람이랍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생각하던 노튼의 눈이 흐려졌다. 설마…….
“그리고 영원히 황제가 될 수 없는 비극을 남은 인생 내내 맛보세요.”
방 안의 공기가 걷잡을 수 없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리네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리시스트의 누가 당신을 존경하겠어요, 노튼 전하. 당신의 본성이 만천하에 까발려졌는데.”
노튼이 내도록 괴로워할 일을 리네트는 생각해 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만 절대로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래오래 황제 위 바로 옆에 두는 게 제법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엾은 데다가, 비참하고, 수치도 모르고, 욕심까지 많죠. 저였으면 자살했겠다. 그렇죠? 그런데 전하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리네트는 싱긋 웃었다.
“저는 평생 2인자로 살 수밖에 없는 당신의 인생을 천천히 저만의 오락거리로 삼아 맛볼 예정이랍니다.”
노튼이 다시 사나운 말을 퍼부었으나 그 자리의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황제는 리네트 카멜리아가 제게 마지막 손길을 내밀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리 자식새끼가 대단한 일을 벌여도, 시간이 지나면 부모는 자식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은 틀린 곳 하나 없었다.
리네트는 아직까지도 재판이라는 걸 열어 굳이 노튼이 잘못을 빌길 바라는, 나아가 목숨이라도 살려 주고 싶은 황제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다.
게다가 리네트 카멜리아의 말은 효과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노튼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은 너무 쉽다.
하지만 영원히 패배자로 남아 남은 인생을 영위하는 건 노튼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장 무서운 벌이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황제의 관을 쓴 루카스 옆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공작이라는 작위는 온갖 의무 때문에라도 꼬박꼬박 황성에 출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볼 때마다 수군거리는 귀족들 사이에서 공작으로 살아야 한다. 물려줄 수도 없는 작위인 데다 명예도 없었다.
황제는 그렇게 잔인한 벌이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느꼈다. 어쩌면 부모인 자신보다 리네트가 노튼을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는 리네트를 칭찬하는 대신, 또 다른 아들에게 눈을 돌렸다.
“……무섭지도 않으냐?”
‘너 저런 거랑 살 붙이고 같이 살 수 있겠어?’라는 뜻이었다.
이에 루카스는 희미하게 웃더니 제 부친에게 속삭였다.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아들 하나만 답이 없다 생각했는데, 이쪽도 다른 의미로 답이 없었다. 그는 이마를 짚고 싶은 기분이 됐다. 아들 둘 다 정상이 아니었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리네트 카멜리아의 말대로 노튼을 공작으로 봉하겠다. 영지는…… 그렇군. 계곡의 요새로 하자.”
“아버지!”
마법사가 흐응, 하고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지친 얼굴로 계곡의 마법사에게 웃어 보였다.
“거슬리면 언제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아무리 리네트가 풀어 주었다고 해도, 자신이 키운 맹수였다. 길들이지 못한 책임에 대해, 황제는 자식의 손발을 직접 묶어 버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계곡의 마법사가 환하게 노튼 쪽을 향해 웃었다.
“들었어요? 저는 이제 제발 당신이 헛짓거리를 하길 바라야겠군요.”
노튼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계곡의 마법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과시하듯이 귓불을 보여 주었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꼭, 그 예쁜 눈알을 뽑아 제 귀걸이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황제가 되고 싶어 또다시 수를 쓰든, 작위에 따르는 의무를 소홀히 하든. 어쨌든 마음에 안 드는 짓거리를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었다.
* * *
‘노튼 황자의 황위 계승권 박탈’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지만, 모두들 예상한 바였다.
‘그건 그렇고, 황태자로 자리매김한 루카스 리시스트의 결혼식은 언제 치러지는가?’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을 빠르게 잊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노튼의 일은 뒤로하고, 모든 이들은 루카스와 리네트의 결혼식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 했다.
황태자 책봉식과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온 귀족들 중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했다,
게다가 지금 수도는 재미난 일로 가득했다.
예를 들면, 마탑의 창시자를 보기 위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수도 리시스트로 몰려왔다.
뱁새 한 마리를 앞세운 마법사들은 카멜리아 공작저로 줄 세워 쳐들어갔다. 그 직후 공작저 근처에 사는 제국민들은 꽤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게 됐다.
백여 명의 마법사들이 공작저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갖 마법을 구사했지만,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마법사들은 불꽃을 피우고 물을 퍼부었지만, 카멜리아 공작저는 강력한 마법으로 끄떡없이 보호받았다. 당연히 ‘계곡의 마법사’의 작품이었다.
어떤 마법사는 굴까지 팠지만 공작저의 담을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 엄청난 방어력에 한 마법사가 메테오를 시전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지겹고 시끄러운 침입이 계속되자 ‘계곡의 마법사’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계곡의 마법사’가 까마득한 제자들 앞에 서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에 관해 ‘리시스트의 아침’은 꽤 생생한 보도를 전했다.
“이 사랑스러운 바보들아. 기다리고 있으면 들를 테니 썩 꺼지세요.”
뒤이어 ‘리시스트의 아침’은 계곡의 마법사와의 단독 대담을 며칠에 걸쳐 내보냈다.
계곡의 마법사와의 대담으로 알려진 사실은 다양했다. 그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초대 카멜리아 공작과 프라임 공작이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계곡의 마법사가 리네트 카멜리아야말로 카멜리아 공작가의 적손이라고 선언하자, 자연스레 리네트 카멜리아의 평가는 올라갔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리네트 카멜리아를 비호하기 위한 그녀의 수작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으나, 마법사 앞에서 감히 무례하게 그렇게 캐묻는 이는 없었다.
* * *
“아가씨의 이름이 요즘 리시스트의 귀족가 부모들에게는 제일 짜증 나는 이름이라는 거 아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리네트는 애플이 제게 건네는 가운을 받아 걸쳤다. 슬슬 봄이 온다지만 찬 바람이 아직도 거셌다.
애플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요즘 여자애들이 자기도 공작 할 거라고 그런대요.”
“제발 와서 해 달라고 빌고 싶네.”
리네트가 한숨을 쉬며 제 책상 앞에 놓인 서류들을 쳐다봤다. 그녀가 카멜리아 공작 위를 물려받은 것이 공고해지자, 카멜리아 공작 영지의 휘하 영주들은 앞다퉈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세금을 내려 달라는 내용부터, 한번 보자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이걸 다 손대야 한단 말이지? 리네트는 가운을 여미며 혀를 찼다.
“이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걸 알면 걔들도 자기가 한 말은 취소할걸?”
“어머, 아가씨가 이상하신 거예요.”
애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쫑알댔다.
“아론 님만 해도 대리인에게 전부 맡기셨는데요.”
아론은 선대 카멜리아 공작이었다. 지금쯤 나넬리아의 왕국으로 가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리네트는 픽 웃었다.
“공작가의 영지들도 잘 모르는데 공부는 좀 해야지.”
“참 나. 대충 막 살고 싶다더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계시네요.”
투명한 찻물로 찻잔을 덥힌 애플이 뒤로 물러섰다.
“너는 의사 만나고 왔어?”
“아, 오늘은 좀 바빠서…….”
애플이 어물거리자 리네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 내가 의사한테 얼마를 냈는지 알아?”
“알아요, 알아요. 쳇, 우리 엄마보다 더 깐깐하셔.”
기차 사고 이후 애플은 자리를 빠르게 털고 일어났으나, 리네트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애플이 아직도 잘 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의사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애플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게 한 차였다. 그러나 애플은 자주 진료를 빼먹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바빴단 말이에요.”
“네가 내 방 정리하고, 차 끓이고, 드레스 손질하는 거 외에 뭐가 그렇게 바…… 쁘구나.”
손가락을 꼽아 보던 리네트는 말을 흐렸다. 리네트의 방 정리만 해도 엄청나게 손이 가는 일이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공작의 방은 엄청나게 컸고, 리네트는 옷을 허물 벗듯 줄줄 흘려 놓곤 했으니까.
애플이 눈을 흘겼다.
“알긴 아세요?”
“그으래…….”
“아무튼 빨리 황성에 들어가셔야 제가 좀 편해지든 할 텐데.”
“황성? 왜?”
“왜라뇨?”
따뜻해진 찻잔에 분홍색 찻물을 따르던 애플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결혼 안 하세요?”
“아, 그 얘기였군.”
“아, 그 얘기였군-이라니, 남의 말 하듯 하지 마시라고요.”
아가씨가 빨리 결혼하셔야 시녀들이 쫘라락 붙고! 제가 윗사람이 되든 해야 의사를 만나든 말든 하죠! 애플이 계속 재잘대며 찻잔 옆에 설탕통을 올려놨다.
리네트는 동그란 설탕 덩어리를 집어 찻잔에 담그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직 할 일이 좀 많이 남아서. 남의 재산 강탈이라든가.”
“예? 무슨 소리세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결혼도 장사라는데, 얻을 건 다 얻어내야지.”
“아, 뭔데요! 말해 주세요!”
전 아가씨가 이렇게 말 제대로 안 해 주고 입 다무는 게 제일 무섭다고요! 애플이 비명 지르듯 말했으나, 리네트는 씩 웃고는 입을 닫았다. 어차피 곧 애플도 알게 될 것이었다.
* * *
미하엘 프라임은 딱 열흘을 앓고 깨어났다. 중간중간 잠시 정신이 들었으나 곧 다시 죽은 듯이 잠에 들기를 반복했기에 모두가 맘을 졸이던 참이었다.
록시온의 가장 큰 방에 누워 있던 미하엘은 자신을 찾아온 리네트를 보고 반색했다.
“오, 황태자비 마마께서 쓰셔야 할 침대를 제가 선점해 쓰고 있으니 황공무지로소이다.”
“장난해요?”
리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일부러 미하엘의 오른쪽 팔뚝 상박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깃털같이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미하엘은 자지러졌다.
“으아악!”
“엄마야, 괜찮아요? 미안해요!”
바로 옆으로 쓰러지는 미하엘 때문에 기겁한 리네트가 빠르게 사과했다. 하지만 곧 킥킥 웃는 그녀의 웃음에 장난이라는 걸 알고 정색했다.
“아, 정말! 이런 걸로 장난칠래요?”
“장난 아닙니다. 정말 아프다고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장난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만 좀 해요.”
“예.”
미하엘은 방금까지의 장난이 거짓말인 듯 시치미 뚝 떼고 다시 침대에 기대앉았다. 리네트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목숨 보전했습니다.”
“제가 한 게 뭐 있어요?”
“멋진 후견인을 두고 계신 것도 따지고 보면 대단한 공로죠.”
정말이지, 이만큼 다쳐 놓고도 농담이 나오나? 리네트는 미하엘의 상처를 가늠했다.
의사는 그녀의 상박을 빈틈없이 붕대로 꽉꽉 싸매 놓았다. 노튼이 온 힘을 다해 칼을 내리친 데다가 아낌없이 어깨로 칼을 받아 낸 것까지 한몫해, 근육이 모조리 갈라졌다고 했다. 계곡의 마법사가 그녀의 피를 빠르게 멈추지 않았다면 목숨까지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열흘이 훌쩍 넘은 지금도 로가나가 미하엘을 거의 돌보다시피 하고 있었고, 키리에는 침실 밖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좋겠습니다?”
리네트가 비아냥거렸다.
키리에는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미하엘의 침실 앞에 있었다. 보다 못한 루카스가 몇몇 기사를 보내 교대시키려 했으나 키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미하엘이 깨어난 직후에나 겨우 안심하고 눈을 붙였다고 했다.
“좋긴요. 죽겠습니다.”
미하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리네트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왜요?”
“왜냐뇨. 눈 뜬 순간부터 자는 순간까지 잔소리를 내내 들어야 하는 제 심정을 모르시겠습니까? 무슨 칼 쓰는 사람이 그렇게 무식하게 구냐며…….”
그대로 죽었으면 동부는 어떻게 할 뻔했냐느니, 기껏 검의 정수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는 주제에 왜 몸으로 받았냐느니, 그놈의 잔소리 때문에 죽겠다고 미하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입은 찢어져 있어서 리네트는 피식피식 웃었다.
“좋아 보이시는데요?”
“……티 납니까?”
“완전.”
“밖에는 비밀로 해 주세요.”
미하엘이 속삭였다. 리네트는 흘깃 바깥쪽을 쳐다봤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을 테지만, 어쩐지 바깥의 키리에가 이 대화를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팔은 어때요?”
“뭐, 아시는 대로입니다.”
의사는 미하엘의 오른팔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운이 좋으면 간단한 운동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검을 드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미하엘은 거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싸매 놓은 제 어깨를 내려다보고, 손가락 끝을 몇 번 움직여 보인 다음 씩 웃었다.
“오른팔은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제법 괜찮은 거래였습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제 어깨 하나로 목숨 둘이면 멋진 거래 아닙니까?”
노튼의 칼은 키리에의 심장 쪽을 노렸다. 게다가 자칫해 칼이 비껴 나갔다면 알렉사까지도 다칠 수 있는 각도였다.
“하지만 당신, 검사 생명은…….”
“음, 그거 말인데요. 하도 다들 걱정해 주셔서 참 민망하긴 합니다만, 그것도 괜찮습니다.”
미하엘이 겸연쩍게 웃어 보이자 리네트는 명치께가 약간 저렸다.
따지고 보면 그녀 또한 자신과 루카스의 싸움에 휘말려 어깨를 희생한 셈이었다. 안 미안할 리 없었다.
하지만 미하엘의 입에서는 조금 다른 말이 나왔다.
“저기, 카멜리아 양.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
“……예?”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미하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최 종잡을 수 없어서였다.
미하엘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여자 친구가 없어서 이런 건 잘 몰라도 이해 좀 해 주십쇼. 리네트 양, 우리 친구 맞지요?”
“……뭐, 일단은요?”
“이런. 베프는 아닌가 본데…….”
“베 뭐요……? 당신 그런 말 누구한테 배웠어요……?”
미하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하녀한테? 아, 카칭 양 말고 뺨이 사과 같은 아가씨 쪽 말입니다.”
애플, 요놈의 계집애. 이상한 것만 가르치고 있어……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리고 되물었다.
“일단은 친한 친구라고 치고. 그런 걸 왜 묻는 거예요?”
“그야 친한 친구끼리는 비밀이 없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 죠?”
“비밀이 생기면 털어놔야 되는 거 맞죠?”
“……무조건은 아니지만요……?”
정말로 심각하게 묻는 미하엘의 얼굴에 리네트 또한 절로 긴장해 침을 꼴깍 삼켰다. 미하엘은 턱을 한참 동안이나 어루만지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일단 제 입장에서는 리네트 양이 가장 친한 여자 친구거든요. 그야 제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거긴 합니다만, 다 차치하고…….”
“서론이 뭐가 이렇게 길어요? 아무튼 저한테 비밀 얘기 하겠단 거죠?”
리네트가 손을 내저으며 묻자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요.”
“그게…….”
미하엘이 힐끗 문밖을 곁눈질했다.
리네트는 본능적으로 이게 키리에 레미시어에게 들리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드디어 키리에 레미시어를 포기했어요?”
리네트가 픽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미하엘은 잠깐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평소에는 하나로 질끈 묶은 밀짚 머리가 헝클어져 푸슬푸슬 흔들리는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답지 않게 미하엘 프라임은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대체 왜 이래? 리네트가 눈을 부라렸다.
“똑바로 말 안 하면 저 갈 거예요. 물론 미하엘의 베프인지 뭔지도 안 할 거고요.”
“저 청혼받은 것 같습니다.”
“……네?!”
리네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미하엘의 얼굴은 시뻘게져 있었다.
리네트는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미하엘의 침실에는 그녀의 성별 때문에 핵심 관계자 빼고는 출입을 금한 터. 애플조차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고,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리네트는 개탄을 금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진짜 재밌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만 들어야 하다니!”
“……놀라는 포인트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티저 던져 놓고 딴소리하지 말고 말해 봐요. 뭐예요?”
미하엘은 눈알을 굴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 * *
미하엘이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녀는 눈알을 몇 번 굴려, 희부옇게 밝아오는 푸른 새벽의 빛 사이에서 이곳이 록시온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맙소사,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그녀는 깔깔한 혀를 입안에 굴리며 로가나를 찾았다.
열이 펄펄 끓고 상처 때문에 앓는 와중에도 그녀는 몇 번 눈을 떴고, 제 옆에 로가나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하엘은 입을 열어 로가나를 불렀다.
“카칭 양.”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이는 화들짝, 큰 소리를 들은 듯 깨어 다가왔다.
“물 좀…….”
미소 지으며 부탁하던 미하엘은 기겁했다. 제 옆에 있던 것은 익숙한 빨간 머리 남자였기 때문이다.
“경?”
“카칭 양은 잠시 눈을 붙이러 갔습니다.”
미하엘의 짧은 물음에 이마를 찡그린 남자가 답했다.
“아니, 근데 왜 당신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뚝뚝한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그 직후 그는 물을 적신 수건을 들고 미하엘의 마른 입술을 꾹꾹 눌렀다.
“물…….”
“깨어나서 물을 찾으면 바로 주지 말고 먼저 입술부터 축이라고 했습니다.”
“헐.”
그야 열흘 넘게 정신을 잃었다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켜면 탈이 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목마른데! 미하엘은 잠시 눈알을 굴리다 수건을 쭉 빨았다. 수건에 괴여 있던 물기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아, 살겠다. 바짝 말라 있던 목구멍에 물 몇 방울이 들어가니 그것도 물이라고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미하엘은 신나게 수건을 쭙쭙 빨았다.
“……뭐 합니까?”
“……수분 보충?”
수건을 들고 있던 키리에가 어처구니없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하엘은 수건 끝을 툭 뱉고 볼멘소리를 했다.
“어깨 박살 나도 살았는데, 그깟 물 좀 들어간다고 죽는답니까? 물 좀 줘요.”
“……앓느니 죽지…….”
키리에의 말투는 정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냉랭했으나 손길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물 한 잔을 따른 후,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허리를 받쳐 앉히고 그녀의 입 앞에 갖다 대는 모습이 그랬다.
미하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물잔을 받기 위해서였으나 키리에는 그녀의 손을 쳐 냈다.
“그냥 드십시오. 마음 변하기 전에.”
그녀는 입을 비쭉였지만 두 번 거부하진 않았다. 꼴록꼴록꼴록,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했다.
앗, 이왕 불쌍해 보이는 김에 아기 새처럼 귀엽게 받아먹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미하엘은 물컵을 다 비운 다음에야 떠올렸다.
그러나 키리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더 드리면 됩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탁, 물컵을 탁자 위에 놓은 키리에가 다시 그녀의 옆에 다가와 허리를 받치다가 흠칫했다. 미하엘의 어깨까지 얌전하게 올라와 있던 이불이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깨를 다친 미하엘의 상반신은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붕대로 꽁꽁 싸매 놓기는 했으나, 옷을 갖춰 입은 것에 비하기는 좀 어려웠다.
미하엘은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는 남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나가 보십시오. 눕는 건 저도 합니다.”
“아닙니다.”
“성질 머리에 안 맞는 짓 하면 일찍 죽습니다.”
“다친 기사들 수발 정도는 저도 여러 번 했습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미하엘은 몸의 힘을 빼고 키리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키리에는 마치 새끼 강아지를 보듬듯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눕히고, 목에 받친 베개도 다시 정리했다. 어깨까지 이불을 다시 덮은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하엘은 이상한 표정이 됐다.
“안 나갑니까?”
“로가나 양에게 아침까지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말인즉슨, 아침까진 곁에 있겠다는 얘기다. 미하엘은 왼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 황성에 자신을 해치려 들 사람은 없다. 그리고 만에 하나 누군가 습격하더라도 괜찮다-는 이야기였지만, 키리에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게 가벼운 일입니까?”
미하엘은 벙긋 웃으며 대답하려고 했지만 키리에가 더 빨랐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키리에 경…….”
“웃지 마십시오. 속 터지니까.”
아니, 왜 환자한테 시비야!? 미하엘은 억울한 표정이 되었으나 키리에는 씨근대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태도였다.
세상에.
“목숨 구해 줬더니 웃지도 말래…….”
작게 구시렁거린 게 문제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키리에가 맞받아친 것이다.
“누가 구해 달랬습니까?”
“……와. 경, 방금 그 말 좀 너무한데요.”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목숨 구해 줘 놓고도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미하엘이 민망해진 나머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키리에는 짜증으로 답했다.
“기껏 검의 정수라는 소리까지 듣는 사람이, 검을 쳐 내진 못할망정…….”
그제야 그녀는 흐흥, 하고 웃었다. 툴툴거리긴 해도 결국 걱정했다는 뜻이었다. 그러지 말지. 왜 그랬어, 나 때문에-라는 뜻이라는 걸 미하엘은 바로 알아차렸다.
“걱정했다는 말은 좀 똑바로 하십시오, 경. 나 정도 되는 사람 아니면 오해합니다.”
“각하 정도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글쎄요. 키리에 레미시어에 한해서는 어깨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장난스럽게 으스대던 미하엘이 멈칫했다. 씨근대던 키리에의 눈가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괜히 생색냈다가는 저 남자 오늘 죄책감에 잠 못 자겠군. 답지 않게 기특한 생각을 하며 미하엘은 다시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됐습니다. 농담입니다. 경 아니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는 온전한 진심이었다. 아마 노튼이 칼을 내리친 이가 누구였든 미하엘은 끼어들어 막아 냈을 것이다. 물론 키리에라서 더 반사적으로 나선 것도 맞지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검이라도 뽑아 막아 냈겠으나 아무리 미하엘이라도 그 거리에서 그럴 재주는 없었다. 결국 미하엘은 몸으로 노튼을 막아섰다. 그 멍청한 황자가 쓸데없이 힘은 셌는지, 오른쪽 어깨가 못 쓰게 되긴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그녀는…….
“……책임지겠습니다.”
“아니, 뭘 또. 책임이야 노튼 전하가 지는 것이지, 경이 저지른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 뜻이 아닙니다.”
너스레를 떨던 미하엘이 멈칫했다. 키리에는 새빨개진 눈으로, 그러나 그녀를 분명히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의사는 각하가 다신 검을 들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뭐-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예? 아니…….”
이게 뭔 일이여. 미하엘이 황망하게 눈을 데굴거리는 동안 키리에는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 나름대로는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미하엘이 누워 있는 침실 앞을 지키면서, 로가나가 눈을 붙여야 할 새벽이 되면 침대 옆에 앉아서 창백한 얼굴을 한 미하엘을 내려다보면서.
“각하께 그간 제가 저지른 무례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제게 무례하셨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푸신 은혜까지 모르쇠 하는 무뢰한은 아닙니다.”
키리에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누운 미하엘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키리에는 그를 제지하고 말했다.
“앞으로 제가 각하의 오른손이 되겠습니다.”
키리에는 이틀 전, 루카스를 만나 자신이 미하엘 프라임의 휘하에 영구 종속되는 것에 관해 허락을 구했다.
루카스는 놀란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깨어나 허락한다면 본인도 허락하겠다는 답이었다.
“루카스 전하께서도 이해하셨습니다.”
“아니…….”
“기사는 본디 두 명의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저 때문에 검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의적이었든 타의적이었든, 각하께서 더 이상 검을 쥐실 수 없다는 것의 의미는 큽니다.”
“저기, 경. 뭘 오해하고 있는데…….”
미하엘은 애써 설명하려고 했으나, 키리에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셨을 거라는 거 압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할 뿐이니,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하엘은 연두색 눈동자를 되록되록 굴렸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 상황이 자신이 그에게 더 이상 외면받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누운 채로 한참 동안 눈동자만 깜박이며 키리에를 올려다봤다. 결벽적인 성격의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그 턱이 호두 같았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옆에 있겠다는 겁니까?”
“예.”
“앞으로도 계속?”
“예.”
“제가 죽을 때까지?”
“……죽지 말라고 옆에 있는 겁니다.”
키리에가 한층 엄격해진 얼굴로 답했다. 미하엘은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슬쩍 다시 물었다.
“오른손이 되겠다는 말은 그 뭐시냐.”
“……경호를 맡겠다는 얘깁니다.”
“밥은 안 먹여 줍니까?”
“취소할까요?”
“안 할 거 압니다. 아, 그럼 나 이제 안 무시하겠네? 너무 좋다.”
이쯤 되니 안 웃을 수가 없었다. 히죽거리는 미하엘을 보며 키리에는 이마를 구겼다.
“……소원 푸셔서 좋습니까?”
“아니, 안 좋을 리가 없잖습니까. 와- 빚졌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채권 회수할 줄은 몰랐는데. 어깨 한 번쯤 박살 날 만하네.”
키리에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팡, 하고 그가 미하엘의 머리 옆 베개를 내리친 것이다.
미하엘은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각하 스스로에 대해 쉽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 경…….”
“기껏 그렇게, 그렇게 부질없이…….”
키리에 레미시어가 미하엘에게 가지고 있던 존경심은 꽤 견고했다.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니며 키리에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는 모습이 그를 인간적으로 참 많이 실망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키리에가 검사로서의 그녀에게 가진 경애의 감정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그리고 뭣보다…….
그녀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자신이 키리에에게 마음을 주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저는 힘이 있는 사람이, 제 안위 때문에 남의 불의를 외면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게 그렇게…….
미하엘은 아무래도 키리에에게 ‘제 안위를 재지 않고 남의 불의를 막은 사람’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심지어 평생 쌓아 올린 검을 버리면서까지 키리에를 지켜 낸 사람이 된 것이다.
미하엘은 웃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다음 순간 제 볼에 떨어진 축축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경?”
키리에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무십시오.”
“그, 경.”
“로가나 양이 오면 깨워 약을 드리라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경! 지금 내 말 안 듣고 나가면 후회할 텐데!”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키리에는 빠르게 몸을 돌려 침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언제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더니, 참 쉽게도 비운다. 미하엘은 허탈한 듯 키리에가 나간 문을 쳐다보다가 어이없이 웃었다.
에라, 모르겠다. 난 경고했어. 그렇게 미하엘은 키리에의 말을 곱씹으며 킥킥 웃다가 잠들었다.
* * *
리네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청혼이에요?”
“아, 청혼이죠! 평생 옆에 있겠다잖아요!”
이게 나이 서른인 인간이 할 말인가? 리네트는 그야말로 생떼를 피우는 미하엘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미하엘은 침대 위에서 마구 다리를 흔들며 우겼다.
“죽을 때까지 옆에 있겠다는 게 청혼 아니면 뭡니까?”
“그 말, 밖에 있는 키리에 경 불러다가 들려주고 확인 사살하고 싶은데…….”
“하지 마십시오.”
리네트의 말에 미하엘은 다급하게 답했다.
청혼 아닌 거 알고 있으면서도 착각하고 싶은가 보다. 놔두자…… 하고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근데 그게 비밀 이야기예요? 키리에 경도 알고 루카스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굳이 ‘친한 여자 친구’를 찾아가면서 공유할 만한 얘기는 아닌 거 같은데……?”
‘친한 여자 친구’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자 미하엘은 얼굴을 구겼다.
“정말 이런 게 내 베프라니…….”
“저 아직 인정 안 했고요. 인정 안 한 입장에서 말하긴 굉장히 유감스럽지만, 본래 베프라는 건 그렇게 아름다운 사이가 아니랍니다.”
“그런 거 같습니다. 아무튼 비밀 얘기는 따로 있는데요.”
“말씀해 보시죠. 청혼 얘기 들어 보니 어차피 별것 아닐 게 뻔하니까 대충 빨리 끝냅시다. 곧 황제 폐하도 오실 거고-”
“저 사실 검사 생명 안 끝났습니다.”
“루카스도…… 뭐라고요?”
눈을 부릅뜬 리네트를 향해 미하엘은 피식피식 웃었다.
“대충 빨리 끝내자면서요.”
“장난쳐요!? 키리에 경 부르기 전에 빨리 말 안 해요!?”
미하엘이 환자가 아니었다면 리네트는 그녀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물론 그에 준하는 소요가 한바탕 있었고, 미하엘은 한참이나 켁켁댄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프라임가의 검술이 무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프라임가의 검술은 양손을 다 씁니다.”
“…….”
“저 양손잡이입니다. 정확히는 왼손을 더 잘 씁니다.”
“…….”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리네트는 한참 후에 겨우 입을 뗐다.
“그럼 지금 키리에 경은…….”
“……전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말 다 안 듣고 가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데미안 리아 때부터의 이야기다.
데미안 리아가 데미안 프라임이던 시절, 국가적 영웅의 품위 손상을 우려해 차마 말할 수 없는 헛짓거리 때문에 그는 오른손을 한동안 쓸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가 다쳤다고 하여 적들이 쉬지는 않는 법이고, 데미안 리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후 데미안 리아는 ‘검사는 양손을 다 쓸 수 있어야 한다.’며 프라임가의 검술을 양손잡이용으로 고쳤다. 그리고 그 검술은 미하엘 프라임에게까지 성공적으로 대물림됐다.
“말이 돼요?”
“저희 작은 증조부께서는 말이 안 되는 짓거리들로 국가적 영웅의 자리까지 꿰차고 성도 받은 분입니다.”
“미친 집안 같으니라고…….”
프라임가의 검술이 양손잡이라는 게 소문나지 않은 이유는 본 실력을 감추기 위함도 있으나, 공작 2대가 모두 수도에서 활동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과 검을 맞대 본 자들은 대부분 동부 귀족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위명은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들을 공략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데미안 리아의 일화들 중 상대적으로 저 일화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 또한 비슷했다.
리네트는 화장한 것도 잊고 마른세수를 할 뻔했다. 미하엘이 입을 비죽거렸다.
“제가 그랬잖습니까. 제 왼손에는 흑염룡이 잠들어 있다고. 뻥 아니었다고요.”
“아니, 그건 미친 중2병이나 할 법한 대사인 줄 알았죠!”
“중2가 뭡니까?”
“있어요, 당신 조상님 같은 거!”
아무튼 그래서 미하엘 프라임은 키리에 레미시어의 위기 때 오른쪽 어깨를 썼다. 왼쪽 어깨보다는 오른쪽 어깨가 여러모로 좀 덜 손해라는 생각이 앞섰던 모양이다. 그 순간에 그런 계산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게 미하엘의 대단한 점이긴 했지만…….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키리에가 서 있을 문 쪽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셀프로 팔자를 꼰다더니, 그 좋은 예가 제 바로 옆에 있었다.
미하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도 역시 말하는 게 낫겠죠?”
“예, 뭐…… 나중에 알면 펄펄 뛸 테니…….”
“말 안 했다가 나중에 들키면 화내겠죠?”
“당신을 죽일걸요?”
“아, 그건 걱정 없긴 합니다. 왼손에 검을 든 저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적의 기사라고요!”
와, 저런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데 저걸 대체 누가 진심이라고 생각하겠냐고요. 리네트는 기가 막혀서 웃어 버렸다. 미하엘도 배시시 웃었다.
“언제 말하죠?”
“솔직히 말하면 최대한 빨리.”
“그러니까 빨리 언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젠장! 베프면 좀 쓸모 있는 조언 좀 하십쇼!”
“저는 당신이 베프 어쩌고 하기 전까지 제가 당신 베프인 줄도 몰랐거든요?”
두 사람이 한참 동안 티격태격하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순간 키리에인가 싶어 굳은 두 사람에게, 시종이 익숙한 자들의 방문을 고했다.
루카스와 황제, 그리고 계곡의 마법사였다.
* * *
“정말…… 여자로군.”
아무리 황제 앞이라고는 하지만 환자가 일어나 절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신 미하엘은 앉은 채로 어깨를 폈고, 황제는 가늘게 뜬 눈으로 미하엘을 쳐다봤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붕대를 감았다고는 하나 가슴이라도 가릴 법한데, 정작 미하엘 본인이 벙글벙글 웃으며 가슴을 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은 민망해하기도 뭐 했다.
“그렇습니다. 폐하를 기만한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아하하하, 예.”
미하엘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뻔뻔하면 할 말도 없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동부 영지들이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게 세금을 낸다 싶더라니.”
프라임 공작가는 최근 몇십 년간 이상할 정도로 동부 영지들을 착실하게 컨트롤해 왔다. 세금도 잘 내고, 말도 잘 듣고, 별 이득도 없는데 기차까지도 잘 놓는다 싶었다. 영주들이 착해서, 혹은 프라임 공작이 황가에 절대 충성해서라고 하기에는 좀 찝찝했다.
그런데 이런 약점이 있어서 그랬군. 만약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쿠션 없이 프라임 공작가의 수장이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그간 말 잘 들어온 것으로 참작해 달라 할 셈이었나. 30년 동안 찝찝해하던 것의 실체를 목격한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자네는 내 아들 편을 든 게 아니라, 며느리 편을 든 것이군.”
미하엘 프라임이 루카스 리시스트의 편으로 나선 것이 희한하다 싶었다. 그동안 프라임 공작가는 착실하게 말은 잘 들으면서도 정치에는 발을 담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미하엘 프라임은 나름대로 제 살길을 강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공작 위를 받았으니, 미하엘 프라임 또한 여자임이 드러나도 공작 위를 유지하는 데 별문제가 없을 터.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그러나 막상 미하엘 프라임은 싱글싱글 웃으며 헛소리를 해 댔다.
“그녀는 제 베프니까요!”
“베…… 뭐라고? 아니다. 설명할 필요 없어.”
베프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 헛소리에 대꾸하기 시작하면 또 한도 끝도 없이 대화가 늘어질 거라는 사실을 황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리네트를 돌아봤다.
“이걸 염두에 두고 공작 위를 받은 것인가?”
“제 비루함을 훌륭하게 해석해 주시니 영광스러울 따름이지요.”
리네트가 웃으며 치마를 들어 올렸다. 그 천연덕스러운 몸짓에 황제는 루카스를 쳐다봤다.
내 아들 괜찮을까…….
하지만 정작 천 년 묵은 능구렁이에게 휘감긴 미남 아들이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황제는 괜한 걱정을 했다 생각했다.
“어쨌든 괜찮아 보이는군. 언제쯤 일어날 수 있겠나?”
“일어나는 건 지금도 가능합니다만, 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래도 열흘은 넘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열흘도 대단히 빠른 것 같은데. 리네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으나 미하엘은 벙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황제가 루카스를 쳐다봤다.
“한 달 후가 어떠냐?”
“결혼식 말입니까?”
“그래. 영주들도 빨리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거 말입니다만, 아버지.”
“또 뭐냐?”
황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은 환하게 웃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 선물 하나 주십시오.”
“갑자기 선물 말이냐? 황가의 창고에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그들에게 줄 결혼 선물이야 산더미처럼 창고에 쌓여 있었다. 그뿐인가. 각 영주들에게서 들어온 특산물이나 보석 따위도 엄청났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차치한 채, 그가 이런 자리에서 갑작스레 선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심산이 있는 것이다.
“빨리 말해라.”
“제 것은 아닙니다.”
“네가 갖고 싶은 물건이야 당연히 아니겠지.”
황제가 혀를 찼다.
“네 아내 될 사람한테 뭔가 주고 싶으니 굳이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어쨌든 황제는 제 첫째 아들이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것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뭔가 가지고 싶어 하는 법이 없는 아들이 일부러 선물을 요구한다면, 그것 또한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돌아갈 것이다.
루카스가 웃었다.
“록시온을 카멜리아에게 양도케 해 주십시오.”
“뭐라고?”
그건 원래 대대로 황후의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려던 황제는 눈썹을 꿈틀했다. ‘리네트’가 아니라 ‘카멜리아’라고 말한 뜻을 뒤늦게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리네트가 한 발짝 나섰다.
“송구하오나 폐하, 한마디만 하게 해 주시겠어요?”
“열 마디든 백 마디든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궁금증 또한 짙게 담겨 있었다. 리네트는 방긋 웃었다.
“록시온을 카멜리아 공작가의 영토로 편입시켜 주세요.”
“……거긴 황성의 한가운데다.”
“정확히는 카멜리아의 ‘딸’에게만 존속되는 영지로 편입시켜 주세요.”
“무슨…….”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물으려던 황제는 입을 닫았다. 카멜리아의 아들이 아닌 딸.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영지라는 것은 그 소유주의 권한이 가장 막강하게 발휘되는 곳이다. 황제를 대리해 세금을 거둘 수 있으며, 사병을 운용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록시온을 카멜리아 공작가의 영지로 편입시킬 시 카멜리아 공작가는 황성 안에서 사병을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황권을 침해할 수도 있는 강력한 권한이며 용납할 수 없는 권리였으나, 황제는 리네트 카멜리아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가 강조한 것은 ‘딸’이었다.
황제는 카멜리아 가문의 운 없는 딸들이 그간 겪어 온 잔혹함을 떠올리고 이마를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카멜리아 가문에서 그간 ‘백안’을 타고난 여인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아 능력을 물려준 후 남자 형제의 아이로 입적시키거나, 아니면 일찍 죽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자신 이후로도 카멜리아에서 태어날 딸들이 혹시라도 겪을 비극을 좌시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아들에게 작위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먼저 태어난 딸이라도 자신보다 까마득히 어린 남자 형제가 태어난다면 가문의 재산이나 작위와는 연이 없어진다.
그러니 리네트는 자신 이후로도 생득권에서 외면될지도 모르는 카멜리아의 딸들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주려는 것이다. 공작 위를 여자도 이어받을 수 있게 한 것 외에도, 또 다른 안전장치를 위해서.
일종의 ‘황성 내의 알 박기’를 통한 전략이었다. 적어도 카멜리아 가문이 황성 안에서 사병을 굴릴 수 있다는 엄청난 권한을 계속해 지키고 싶다면, 카멜리아 가문의 후손들은 딸을 낳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른 가문들이 아들을 낳으려고 별짓 다 하듯이.
“……리네트 카멜리아.”
“사병은 다섯 명 이하로 제한하셔도 상관없어요.”
리네트가 빙긋 웃었다.
축소된 권한이라 할지라도 누구든 그 엄청난 특권을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결혼 선물치고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자신이 이 선물을 주지 않는다 해도 루카스가 이 선물을 그녀에게 쥐여 줄 거라는 데 황제 위를 걸 수도 있었다. 굳이 황제의 손으로 주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제 남편이 팔불출이라고 소문나면 곤란해요.’
리네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주 알뜰하게도 시아비 써먹는 며느리였다. 그리고 안 들어줄 수도 없는 주문이었다.
어쨌든 계곡의 마법사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는 여인이다. 록시온이 아니라 록시온 할애비를 달라고 해도 아마 줘야 할 것이다.
심지어 그 건국 시조께서는 리네트 카멜리아 옆에 서서 황제를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 안에 담긴 의미는 단 하나였다.
‘내가 만든 나라 안에서, 그 정도 부동산 쪼가리 하나 내 피후견인한테 못 쪼개 줘요?’
“……알았다.”
황제는 울며 겨자 먹기라는 말을 절감하며 대답했다.
리네트가 환하게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폐하.”
그에 미하엘이 중얼거렸다.
“와, 진짜 노튼 전하 없다고 실하게도 긁어 간다.”
리네트와 루카스를 제외한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황제는 처음으로 미하엘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다.
옆에서 눈 부라리며 태클 걸 사람 없다고 참으로 열심히도 황가의 재산을 빼 가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 공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