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원하던 그림을 완성하는 법 (18/28)

17장 원하던 그림을 완성하는 법

“어쨌든 원하는 그림은 나왔군요.”

미하엘은 마차를 타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컥, 하고 목 졸리는 소리를 냈다. 리네트가 미하엘의 크라바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리넷……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 과격한 거 아닙니까?”

“결투가 무슨 소리예요? 어디 한번 설명해 봐요.”

제대로 설명 안 하면 당신 아주 호되게 욕먹을 줄 알아요. 리네트는 곧 크라바트를 놓고 팔짱을 끼었다.

“아, 그거…… 진짠데요.”

“제대로 설명하라고요.”

미하엘은 멋쩍은 듯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 *

키리에 레미시어는 수도로 오던 날, 미하엘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미하엘에게 화를 냈다.

여자라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키리에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적어도 미하엘 프라임이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제국이 얼마나 뒤집어질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자신이 제외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납득했다. 이런 종류의 기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루카스와 리네트가 프라임 공작이 여자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계곡의 마법사’를 만났을 때가 아닐까, 하고 키리에는 순식간에 추측해 냈다.

키리에는 바로 그 자리에서 미하엘에게 자신이 화난 이유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각하의 성별이 어떻든 그 사실에 화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을 숨기시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제게 한 농담들은 비밀과 상관없이 그저 무례합니다.”

“어…….”

미하엘은 조금 난감해졌다. 화가 났을 때 거세게 몰아붙이고 짜증을 내는 사람은 그래도 화풀이가 끝나면 그럭저럭 풀어진다.

하지만 키리에처럼 차분하게 화를 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섭다는 사실을 미하엘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하는 말들은 정말로 옳은 것뿐이었다.

“각하께서는 제가 각하를 검사로서 존경한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 사실을 이용해 각하께서는 저를 두고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들을 던졌습니다.”

“……그때는 화 안 내지 않았소.”

“그 농담들은 제가 각하께 성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성립합니다.”

키리에의 지적은 정확했다. 키리에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먼저 여쭙습니다. 각하께서는 여성을 사랑하는 분은 아니시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각하께서 하신 말씀들은 저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고 하신 말씀들이시지요?”

“……그렇소.”

“성별을 바꾸어 생각해 보시지요. 만약 제가 여성이었다면, 그리고 각하께서 남성이었다면 제가 들은 말들은 레미시어 가문에서 각하를 파렴치한으로 고발하고도 남을 말들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미하엘은 눈알을 굴렸다.

“……꼭 그게 경에게만 한 말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했기에 문제가 안 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잘못했습니다.”

어쨌든 미하엘은 퀵 사과의 미덕을 갖춘 자였다. 그러나 사과가 빠르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받아들이리라는 법은 없다.

키리에는 미하엘을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모든 사과가 받아들여지리라는 것 또한 오만입니다. 그 사과를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제 말을 믿어 달라며 깨진 찻잔 조각을 내세웠던 남자다. 이 정도로 강직한 남자라면 미하엘도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한다고, 그녀는 이제야 뉘우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어떻게 해야 내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까?”

키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각하께 결투를 신청하기라도 하고 싶지만, 저는 이미 노튼 황자께 결투를 신청한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여자와 검을 나누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않는다, 까지만 했으면 아마 미하엘은 그 남자에게서 미련없이 마음이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키리에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각하께 그 말은 엄청난 실례가 될 것 같군요. 적어도 제가 그간 해 왔던 어떤 종류의 생각들이 무뢰배에 가깝다는 점을 일깨워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물론 이 말은 각하의 무례에 대한 용서는 아닙니다.”

정말이지,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남자였다. 미하엘은 그래서 키리에의 소매를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내가 경과 결투한다면?”

“무슨 소립니까?”

그렇게 묻던 키리에는 ‘아.’ 하는 표정이 됐다. 미하엘이 자신과 3개월 뒤에 결투하리라 짐작한 것이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각하께서는 제가 각하와 결투한 후 각하가 이기신다면 제가 용서해 드리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니오?”

미하엘은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 ‘결투라도 하고 싶다.’는 말은, 결투해서 이기든 지든 결과가 나오면 깨끗하게 감정을 털어 내겠다는 말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키리에는 그대로 돌아서서 자신이 하던 일을 묵묵히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루카스와 리네트가 도착해 곧장 수도로 향했다. 그래서 미하엘은 키리에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수도로 온 후 키리에는 루카스의 호위 기사 노릇을 하기 위해 황성으로 이동했다. 미하엘은 자신의 타운 하우스에 머물러야 했으니 더더욱 키리에를 볼 기회가 없었다.

* * *

“……제정신이에요? 가문의 비밀이라며, 왜 이리 허술해요?”

이야기를 듣던 리네트는 기가 막혀 미하엘을 꼬나봤다.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지나고 나니 미친 사람 같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습니다만?”

“리네트. 저 키리에 경 사랑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리네트는 눈을 갈매기처럼 휘며 웃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마저 말해요.”

“내 사랑을 개 짖는 소리 취급하다니.”

미하엘이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했지만 리네트는 코웃음쳤다. 이윽고 다시 바로 앉은 미하엘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키리에의 결투에 주목했다. 결투 상대인 노튼이 북부에 데리고 간 기사 중엔 마땅한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 수도로 와서 괜찮은 기사를 찾아 대리로 내세우겠지.

“제가 노튼 전하의 대리로 나서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죠.”

“그 님은 뽕 바구니를 받자마자 팽개치실 것 같은데요.”

“정확합니다.”

미하엘이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그 생각을 정말로 실천에 옮기려 했고, 그 전에 다시 한번 키리에를 찾아갔다.

키리에는 오랜만의 복귀 때문에 레미시어 가문으로 돌아가 있던 참이었다. 미하엘은 이른 아침 레미시어 후작저에 방문을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거의 통보였다.

그러나 레미시어 후작은 프라임 공작의 방문 요청을 기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튼파였던 레미시어 후작가는 지금 알렉사의 파혼 때문에 미적지근한 입장이 된 터였다.

알렉사 레미시어의 파혼 후 레미시어 후작은 단 한 번도 노튼파 귀족들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둘째 아들인 키리에가 루카스의 최측근이니 루카스파로 전향하지 않겠는가-라는 게 최근 레미시어 후작가를 둘러싼 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루카스파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어진 프라임 공작이 직접 방문한다는 것은 꽤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레미시어 후작은 곧장 하인을 보내 방문을 환영한다고 밝혔으며, 둘째 아들을 만난 후 자신과도 저녁 식사를 해 주면 감사하겠다는 초대장을 한 장 더 보냈다.

“뭐, 미래의 시아버지 만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죠.”

“……자기보다 높은 작위 가진 며느리를 볼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실 텐데요, 그분은.”

리시스트 제국에서 공작 위는 황제의 형제가 단승 작위로 물려받는 것 아니면, 프라임과 카멜리아 딱 둘만이 가진 작위였다. 그러니 레미시어 후작은 사실상 리시스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작위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공작 며느리라니. 상상이나 했을까. 리네트는 체념한 눈으로 미하엘을 바라봤다.

“그래서요?”

레미시어 후작이 그렇게 기대 만발한 모습으로 프라임 공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키리에가 미하엘의 방문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후작은 폭죽이라도 터트릴 수 있다면 터트렸을 것이다.

온 후작가의 환영 속에 키리에의 방에 입성한 미하엘은 키리에에게 말했다.

“내가 노튼 전하의 대리로 나서서 그대와 결투하면 되겠습니까?”

키리에는 그때야말로 미하엘 프라임을 진심으로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미친 거 아니야?

그 시선에 미하엘 프라임은…….

“나에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리네트 양. 짜릿하더군요.”

“……저리 꺼져요…….”

미하엘이 턱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어쨌든 키리에는 진저리를 치며 미하엘에게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다시는 각하 얼굴도 보지 않을 겁니다. 대관절 제가 각하의 놀이거리를 위해 노튼 전하께 결투를 신청한 줄 아십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맞았다. 미하엘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의 화를 풀 수 있을지 물었다.

“그래서요?”

“뭐, 해답을 준 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 * *

미하엘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키리에는 찌푸린 표정으로 미하엘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두십시오.”

“……그대를?”

“예. 솔직히 말해 많이 곤란합니다.”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레미시어 후작가로 돌아왔을 때, 후작은 키리에에게 루카스와 자리를 한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키리에는 놀랐으나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레미시어 후작가의 곤란한 지금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미하엘 프라임이 이렇게 쳐들어오기까지 하니 많이 곤란했다. 어쨌든 공작가다. 제 주변에 하도 자꾸들 출몰해 제국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 제국에서 공작 위는 꽤 레어템이었다.

“저보다 한참은 높으신 분이 제게 화 풀어 주려면 뭘 어찌해야 하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떨 것 같습니까?”

“내 작위가 문제요?”

“문제가 안 될 것 같습니까?”

미하엘은 아연해졌다. 그렇다. 키리에는 강직한 사람이니만큼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미하엘에게 크게 모진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리네트 같은 타입이야 화가 나면 상대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라거나 하고 끝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키리에 같은 타입은 그럴 수 없다. 미하엘은 공작이고, 키리에는 겨우 기사 작위 하나 가진 자다. 그는 자신이 화났다고 해서 그런 갭을 건너뛸 수 있는 성격도, 지위도 아닌 것이다.

“그냥 두십시오. 사실 지금 제게 이러시는 것도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대관절 저 같은 사람이 화난 게 공작 각하께 대체 무슨 대수라고 이러십니까? 혹시 제가 각하와 루카스 전하의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결정적으로, 키리에는 미하엘이 왜 제게 집적대며 그런 발언들을 일삼았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미하엘의 발언들이 그저 장난식의 희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그런 게 아닙니다. 경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이…….”

“다행은 뭐가 다행입니까?”

미하엘이 버럭 짜증을 내자 키리에가 이마를 찡그리고 미하엘을 쳐다봤다.

“내가 경의 화를 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게 이상합니까?”

“그…….”

“나는 하나도 안 이상합니다. 애초에 경 목숨은 내 거라고!”

미하엘이 버럭 소리 지르자 키리에가 눈을 부릅떴다.

“제 목숨이 왜 각하 겁니까?”

“찻잔!”

빽- 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미하엘은 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으로 둘둘 만 것을 꺼내 보였다. 그 과정에서 재킷이 풀어 헤쳐지고 셔츠가 벌어졌으나, 미하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키리에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는 지금 미하엘이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키리에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미하엘이 한 손으로 키리에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제 손에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아직도 경이 준 찻잔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일 아직 안 끝났잖아!”

“일이 끝난 후에 조금이라도 더 나쁜 선택을 하셨다 느끼신다면, 그때 이 찻잔 조각들을 제 목구멍에 털어 넣으셔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제야 미하엘의 말뜻이 뭔지 알아챈 키리에가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아니, 이런 건 왜 들고 다니십니까? 그리고 그거랑 제 화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있습니다! 내가 경을 좋아하니까!”

뎅-

두 사람 다 머리에 커다란 종이 울린 듯한 기분이 됐다. 키리에는 어이가 없어서였고, 미하엘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당황해서였다. 곧 그녀는 자아 성찰을 시작했다.

“좋아…… 좋아하나? 좋아하는 건가?”

“대관절…… 각하. 그렇게나 방종하게 굴어 놓으시고 뭐라시는 겁니까? 농담하십니까?”

“농담 아닙니다!”

미하엘은 버럭 소리친 뒤 뒤돌아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방종…… 솔직히 방종하긴 했지. 근데 그거야 우선 막 던져야 뭐라도 걸려 나올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고. 음…….”

“…….”

키리에가 한심한 표정을 짓든 말든 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방종…… 방종이 문제였나?”

이내 결심을 마친 미하엘이 비장한 눈으로 키리에를 돌아보았다.

“키리에 경!”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경에게만 집적대겠습니다!”

그 순간 키리에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결심이 섰다.

세상 여자 모두 죽고 미하엘 프라임만 남는다 해도 자신은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강요한다면 망설임 없이 사원의 성기사로 들어가 순결을 서원하겠노라고.

그러나 미하엘이 그런 그의 머릿속을 알 리 만무했다. 미하엘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키리에의 팔을 붙잡고 맹세하듯 말했다.

“경. 경에게 무례한 말을 한 것은 미안합니다. 방종하게 군 것도 잘못을 빌 것이외다. 화를 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놓고 말씀하십시오.”

키리에가 어깨를 털어 내자 미하엘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물러섰다. 마치 그 모양이 얌전한 시골 처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며 맹세하고 물러서는 건달과 같았으나, 어쨌든 당사자는 진지했다.

“하지만 용서해 줄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경에게 잘못을 빌 것입니다. 나의 지위는 의식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대가 모시는 황자 전하가 카멜리아 양에게 애정을 바쳤듯, 나 또한 그대의 애정을 구걸할 것이니- 나는 이 순간부터 키리에 레미시어의 포로요.”

“누구 맘대로 포롭니까? 그리고 포로도 지위에 따라 취급이 다릅니다.”

어쨌든 그의 성격도 참 대단했다. 미하엘의 말에 굳이 포로 취급법을 지적하고 있었으니.

하나 미하엘은 분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를 그대의 가장 천한 노예로 다뤄 주십시오! 사랑이라는 야수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나는 그대라는 주인의 온정을 갈구하오!”

키리에 레미시어는 정말로 선대 프라임 공작이 보고 싶어졌다. 눈앞에 있다면 애한테 로맨스 소설 좀 작작 읽히라고 충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똑똑.

“오라버니?”

두 사람 모두 순간 멈추었다. 문 저편에 있는 것은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키리에는 빠르게 눈으로 프라임 공작에게 말했다.

‘제 동생 앞에서 쓸데없는 말 하시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미하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얌전히 선 알렉사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었고, 키리에는 그녀가 야위지는 않았는지, 뺨이 해쓱하지는 않은지 체크했다. 그러나 레미시어가의 아가씨는 언제나 그랬듯 화사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으며, 고민하거나 아파하는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손님이 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알렉사 레미시어입니다.”

“오오-”

‘시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키리에가 정말로 작위고 뭐고 자신을 다시는 안 볼 것이라고 미하엘의 본능이 경고했다. 미하엘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하엘 프라임입니다.”

“어머나.”

알렉사가 입을 가리며 놀랐다.

“제국의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보는 분이시군요.”

고풍스러운 인사였다. 어느 정도로 고풍스러우냐면, 웬만한 귀족들은 고리타분하다며 이제 아무도 하지 않는 인사법이었다.

그러나 알렉사는 망설임 없이 그 인사를 입에 담았고, 미하엘은 빙그레 웃었다.

“그 말 제 입으로는 참 자주 하는데, 남에게 들은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 반갑군요.”

“예에. 한데 제가 조금 이따 오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 괜찮다. 곧 가실 분이니.”

키리에의 매정한 말에 미하엘이 뒤돌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정하십니다!”

그러나 키리에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정말로 ‘루카스가 아니었다면 너 같은 건 진작에 내쫓았어.’라는 얼굴로 미하엘에게 고했다.

“……각하. 제발 부탁이니, 제 존중을 받고 싶으시다면 이 이상 제게 말 걸지 마십시오.”

“도무지 경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라곤 없는 것입니까?”

키리에도 미하엘이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키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간 적도 없습니다.”

그 말 자체로 축객령이 됐다. 미하엘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궜다.

“알겠습니다. 가겠소.”

“……그 전에.”

키리에는 한숨을 쉬며 미하엘에게 다가갔다. 미하엘이 흠칫함에도 불구하고, 키리에는 그녀의 셔츠 깃을 틀어쥐고 레이스로 된 크라바트를 단정하게 맸다. 공작은 연두색 눈동자를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굴렸으나, 기사는 한 번의 헛손질도 없이 그녀의 재킷까지 단정하게 닫았다.

“가십시오.”

동부의 수장을 보내는 말이라기엔 너무나 매정하고도 짧았다. 무례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하엘은 별말 없이 키리에의 방문을 나섰다. 당황한 것은 알렉사뿐이었다.

“세상에, 오라버니. 어찌 공작 각하께…….”

“됐다, 알렉사.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쓰지 않겠어요!”

잠시 각하를 배웅하고 오겠어요. 알렉사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미하엘을 쫓아 나갔다.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착해 빠진 자신의 동생은 미하엘이 제게 어떻게 굴었는지를 안다 해도 배웅할 것이다.

어쨌든 미하엘이 물러갔으니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 방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좋아한다니.”

기가 막혔다. 대여섯 살 어린애도 그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치가 떨렸다. 미하엘 프라임이라는 사람을 존경해서 실실 웃으며 따라다녔던 제 꼴을 돌이켜보며 키리에는 짜증을 냈다.

게다가 그런 비밀을 가져 놓고 셔츠까지 온통 풀어 헤친 채 키리에의 방을 나가려 했다. 그 부주의함에 기가 막힐 정도였다.

결국 그는 눈을 감고 뒤로 등을 깊게 묻었다.

‘……알렉사에게 혹시라도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야겠군.’

자신의 동생은 너무 착해서 친구들도 가려 사귀지 않았다. 리네트 카멜리아 이후에 제 동생의 새 친구가 미하엘 프라임이 된다면, 그래서 그 입버릇이 옮는다면.

……차라리 리네트 카멜리아가 낫지, 하고 생각했다가 키리에는 제풀에 놀라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튼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냈더니 제 사고 방식도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 * *

키리에 레미시어가 축객령을 내렸다고 해서 미하엘이 그대로 레미시어 저택을 나가진 않았다.

후작은 미하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참이었고, 그 댁 둘째 아드님에게 반한 미하엘은 어쨌든 레미시어 후작에게 점수를 따 두고 싶었다.

“공작 각하.”

……그리고 시누이에게도. 미하엘은 어느새 제 옆으로 따라온 알렉사 레미시어에게 몸을 숙여 보였다. 알렉사 또한 무릎을 숙여 답한 다음 곧장 말을 이었다.

“송구해요. 저희 오라버니께서 많이 무뚝뚝하시지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레미시어 양.”

미하엘은 애처롭게 웃었다.

“초면에 우스운 꼴을 보였군요.”

알렉사는 눈알을 잠시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랑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스워지지 않습니까.”

미하엘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알렉사는 민망한 듯 웃곤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오라버니의 방문 앞에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야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데 못 들은 게 더 이상했다. 미하엘은 이마를 짚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이고, 두야.

“하지만 각하. 맹세코 저는 각하가 제 오라버니께 품으신 마음에 대해 어떤 편견도 갖고 있지 않답니다.”

“감사합니다…….”

남색을 하는 공작. 수도에서는 프라임을 두고들 그렇게 말했다.

미하엘은 미칠 노릇이 됐다. 어쩌다 이렇게 비밀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됐는지 모를 일이다. 프라임 영지에서는 나도 제법 멋지고 유능한 데다가 입도 무거운 사람인데!

물론 리네트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말이었고, 알렉사는 미하엘의 머릿속을 몰랐으므로 그저 생긋 웃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릴게요.”

“예?”

“저희 오라버니는 작은 새 같은 사람이라 그렇게 정면으로 돌파하시면 도망간답니다.”

알렉사가 슬쩍 속삭이자 미하엘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제가 남자라는 건 안 걸리십니까?”

“음, 뭐-”

알렉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오라버니가 여자를 만나는 걸 저는 본 적이 없어서요……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답니다.”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닐까. 이것도 리네트 카멜리아의 영향일까. 미하엘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알렉사 레미시어는 우아하고 정숙한 데다가 기품이 넘쳐 뭇 아가씨들의 귀감이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종류의 귀감이 아닌가.

“이런.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거절당하셨다지만…… 그래도 각하. 희망을 잃지 마세요. 저희 오라버니는 낯을 가려서, 정말 싫은 사람은 자신의 방에 들이지도 않으신답니다. 그리고-”

알렉사가 손가락을 세워 입술 가운데에 가져다 댔다.

“아까 재킷을 챙겨 입히신 것도요. 저희 오라버니는 남을 그렇게 살뜰히 챙기는 분이 아니세요.”

아마 제 비밀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이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대신 미하엘은 감사를 담아 그녀의 손을 청해 그 손등에 제 이마를 댔다.

“아, 저는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겠지만 부친인 레미시어 후작과 뵙기로 해서요.”

“알고 있어요. 물론 오라버니를 만나고 계실 줄은 몰랐지만…….”

알렉사는 키리에에게 뭔가 묻기 위해 왔다가 두 사람의 싸움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그에 미하엘이 부드럽게 물었다.

“혹 리네트 카멜리아 양의 일입니까?”

“어머나…… 리네트를 잘 알고 계신가요?”

“예, 물론.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시면 제가 답할 수 있는 선에서 답해 드리죠.”

그러나 알렉사는 미하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리네트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아무래도 지고하신 각하를 전령으로 쓰는 것은 저어되는군요.”

“그러십니까? 그럼 대신 저를 후작 각하의 응접실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알렉사는 웃으며 미하엘을 후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응접실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나가는 길에서 모든 사용인들이 알렉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미시어 오팔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각하를 왜 만나고 싶어 하시는지는 알고 계시지요?”

“예. 뭐, 밥 먹고 편먹는 거야 익숙합니다.”

미하엘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알렉사는 다행이라는 듯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알렉사의 질문은 후작가의 아가씨가 공작에게 던지는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직관적이었다. 이전에 그녀가 보여 준 고풍스러운 인사와 우아한 태도와는 상반된 것이기도 했다.

대저 귀족가의 아가씨들이라면 부친이 누굴 만나든, 그리고 손님이 부친을 만나러 온 이유에 관해서도 입을 닫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인들은 남자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사는 미하엘과 레미시어 후작 간 만남의 목적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게다가…….

미하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레미시어 오팔을 목에 건 아가씨는 손님이 있는 줄 몰랐다기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 오라비의 방에 들어선 뒤, 자신을 후작의 응접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뻔한 구도였다. 레미시어 후작이 시킨 일이겠지.

마침 후작저를 방문한 미혼의 공작. 그리고 파혼해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가문의 막내딸.

그 속셈이 하도 뻔해 미하엘은 헛웃음을 들이켤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대신 알렉사에게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말입니다만, 키리에 경은 후작께 어떤 아들입니까?”

“오라버니요? 음…… 개인적인 호기심이신가요?”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알렉사가 눈을 빙그르르 굴리다가 입술을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웃었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바깥에서 자란 분이라 사실 큰 오라버니나 저만큼 아버지와 친밀하시진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오라버니를 깊이 신뢰하신답니다. 어린 나이에 기사 작위를 따냈을 때는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죠.”

미하엘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왜 레미시어 양께서는 지금 제 옆에 계십니까?”

“……예?”

“대저 미혼의 여인이 혼기 찬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집이라고 해도요. 아가씨를 따르는 시녀 하나 없는 상황에, 저는 사뭇 후작의 저의가 의심된답니다.”

너희 아빠, 나한테 너 시집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충분히 노골적인 말이었고, 알렉사의 뺨이 조금 발개졌다.

미하엘은 이어 말했다.

“후작께서 저를 만나려 하시는 이유야 길거리의 아이들조차도 알고 있을 겁니다. 아가씨의 파혼에는 후작께서 더 이상 노튼 황자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배경이 깔려 있겠죠.”

“그런 것은 아…….”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싶겠지만, 글쎄요. 아가씨의 파혼 이유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누구나 후작 각하와 노튼 전하의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건 키리에 경이라는 경우의 수가 하나 더 있어 가능합니다.”

“…….”

“키리에 경은 누가 보나 루카스 전하의 심복입니다. 오른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후작께서 키리에 경과 함께 전하의 편에 서신다면 전하는 크게 환영하실 것입니다만, 후작께서는 아마 키리에 경이 충분한 보증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한마디로, 레미시어 후작은 루카스가 키리에에게 보내는 신뢰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미하엘에게 알렉사를 편입시키는 형태로 루카스파 합류를 꾀한다-는 생각을 했겠지.

알렉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이런. 울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미하엘은 머리를 긁고 싶은 것을 참으며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키리에에게 혼날 것 같아서였다. 달래야 하나,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렉사는 당황하긴 했으나 울지 않았다. 다만 속눈썹을 조심스럽게 내리깔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런 것이 각하의 비위를 거슬렸나요?”

“음, 그렇다기보단-”

미하엘이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마음에 드는 쪽은 좀 더 나이가 많고, 성별이 다른 쪽이라서요.”

그 말에 알렉사가 저도 모르게 아핫, 하고 웃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명랑한 웃음이었다.

곧 알렉사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들어 미하엘을 바라봤다.

“맞아요. 아버지께서는 제게 일부러 키리에 오라버니의 말 상대라도 하라고 하셨어요. 하필 오늘. 공작 각하께서 오라버니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에게요.”

어라. 미하엘은 눈썹을 꿈틀했다.

어쩐지 지금의 알렉사는 아까 키리에의 방문을 두들겼던 여인과는 사뭇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시감이 아주 짙었다.

“각하께서 생각하신 목적과, 아버지의 속마음은 내심 다르지 않을 것이에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제게 제국에서 가장 좋은 신랑감을 골라 주고 싶어 하세요. 각하는 정치적 파트너가 아니라, 훌륭한 신랑감으로 택해진 것이랍니다.”

아하. 미하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리네트 카멜리아’다.

알렉사는 정중하나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태도는 어쩐지 리네트와 많이 닮아 있었다. 둘이 친하다더니…….

‘물들었구만.’

미하엘은 저도 모르게 실실 웃고 싶어졌다.

키리에 레미시어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싫어하는 이유는 꽤 많겠지만, 그 이유 중 비교적 큰 비율을 차지하는 인사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분명 선하고 순종적인 여인이라고 들었건만, 직접 만난 알렉사는 오히려 약간은 리네트를 연상케 했다.

미하엘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웃으면 후작을 비웃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오라버니의 방문 앞에서 뜻하지 않게 들은 이야기 덕분에 아버지의 음모도 무산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알렉사는 빙그레 웃었다.

“저희 아버지의 목적은 다른 자식을 통해서라도 이뤄질 것 같네요.”

“이런, 부디.”

미하엘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후작의 응접실 앞까지 나란히 걸었다. 그러나 기분만은 두 사람 다 상쾌했다.

후작의 응접실에 다다른 알렉사는 미하엘을 자리로 안내한 뒤, 그에게 귀띔했다.

“아까는 각하를 전령으로 쓰는 게 저어된다고 하였지만, 역시 오라버니보다는 이쪽이 낫겠네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리네트에게 제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제가 낫다고요?”

알렉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 핑계로 각하께서 다시 한번 레미시어 후작저에 놀러 오신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리네트는 호위가 필요할 테고, 저희 오라버니는 뜻밖의 말 상대를 얻겠지요.”

미하엘은 감격에 젖었다. 이 아가씨는 천사가 아닐까.

“이럴 수가. 레미시어 양은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입니까?”

미하엘의 과도한 찬사에 알렉사는 환히 웃으며 드레스를 들어 보였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알렉사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문 뒤로 사라졌다.

미하엘은 느긋하게 하녀가 내온 차를 음미했다. 차는 아주 향긋하고 맛있었다.

* * *

카멜리아 공작저는 단 나흘 사이에 뒤집어졌다. 황제의 호출 때문이었다.

황제의 집행관은 리네트 카멜리아가 수도로 복귀한 바로 이튿날, 카멜리아 공작저에 행차했다.

리네트의 복귀를 모른 채 북부 쪽으로 날을 세우고 있던 공작은 집행관이 건넨 서신을 보고 희게 질렸다. 이멜다는 공작이 꾹 쥔 서신을 뒤에서 넘겨보다가 졸도할 뻔했다.

황제는 친절하게도 서신으로 ‘미하엘 프라임의 고발에 의해 카멜리아 공작을 황족 살해 기도 혐의로 비공개 소환한다.’고 적었다. 친필이었다.

“내가 이 나라에 바친 충성이 얼마이며, 내 가문이 제국을 위해 봉사한 세월이 사백 년이거늘!”

카멜리아 공작은 분노했다. 황제를 만나 자신의 충성의 무게를 따져 볼 셈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황제를 잠시나마 배알하고 온 카멜리아 공작의 기세는 무섭도록 수그러들었다. 황제는 카멜리아 공작의 분노를 앞에 두고도 심히 여상하게 말했다.

“그대의 딸이 물려받은 능력으로 제국을 위해 봉사할진대, 이를 방해함은 그대의 충성조차 흐리게 만들었음이다.”

한마디로 ‘네 딸이 백안 가지고 있으니 넌 이제 쓸모없다. 황자 살해 기도 같은 짓을 안 했으면 중간이나 갔겠지만 사정 안 봐 줄 것이다.’는 소리였다.

카멜리아 공작은 차라리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멜다는 정말로 한 번 졸도했다. 수도에 남아 있던 애플 때문이었다.

리네트가 북부에 가 있는 동안 애플은 공작저의 하녀들을 불러 모아 그간 카멜리아 공작 부부가 리네트를 학대했다는 증거를 모았다. 그리고 그 증거는 즉각 황제에게 보내졌다.

황제는 카멜리아 공작에게 증거들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대의 충성을 셈하고 싶으나, 카멜리아 공작가의 이능을 가진 그녀를 학대했다는 것은 제국이 카멜리아 가문에 보내는 우정을 무시하고 그 능력을 제 입맛대로 이용하려던 것이 아닌가?”

이멜다 카멜리아는 그 논리로 말미암아 공작과 같이 고발당했다.

‘카멜리아 공작가와 프라임 공작가가 제국에서 갖는 권한은 크다. 두 가문은 제국에서 누리고 있는 특권만큼이나 철저히 제국에 대한 충성과 우정을 다해야 한다. 특히 카멜리아의 경우, 그 이능의 소유자는 제국을 통솔하는 주춧돌 중 하나이기에 가문 스스로도 중히 대하여야 한다. 그러니 백안의 소유자를 제 입맛대로 바꾸려 하고, 더불어 학대함은 그 권위에 취한 나머지 제국을 제 손안에 쥐고 휘두르려 함이며, 나아가 제국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는 다름 아닌 프라임 공작이 펼쳤다.

이 말을 한 주체가 프라임이기에 설득력은 충분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리네트는 카멜리아 공작이 제 친모를 빌미로 협박했다는 사실 또한 밝혔다.

카멜리아 공작은 부인했으나, ‘카멜리아 영지 내 대장장이의 하녀’라는 말을 실마리로 리네트는 그녀의 궤적을 찾아냈다.

실제로 카멜리아 영지의 한 마을에서 공작을 만났다는 대장장이의 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비록 그 신변을 염려하여 재판장에 나타나진 않았으나, 황제의 집행관은 그녀의 주변에서 카멜리아 공작이 다녀간 흔적을 찾아냈다. 하녀의 주위를 맴돌던 간자가 발각된 것이다. 여차하면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게 분명했다.

비록 사생아라고는 하나 그 친모를 겁박하고 협박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 만행 또한 밝혀지자, 황제는 무표정하게 카멜리아 공작에게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 근신하라. 열흘 내에 모든 혐의를 부인할 만한 증거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카멜리아 공작의 작위는 일정 기간 회수될 것이다.”

“회, 회수라면…….”

“이후 적당한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 카멜리아에는 공작이 없을 것이다.”

카멜리아 공작은 기가 막혔다. 이제 거의 사라졌다 생각한 ‘백안’이 얄궂게도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 황제의 말이 온전한 진심임을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넋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이멜다가 울부짖었으나 그는 오히려 제 부인을 밀어냈다.

루카스 황자 암살 기도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다름 아닌 이멜다의 문장이었다. 누가 봐도 함정이었지만, 공작은 그 순간 문장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제 부인을 탓했다.

결국 이멜다는 저택의 중앙에서 사용인들이 다 보는 와중에 혼절했다.

그렇게 카멜리아 공작가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잠긴 지 이틀 후, 프라임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머물고 있던 리네트 카멜리아는 뜻밖의 손님을 만났다.

‘소공작’.

갈레안 카멜리아였다.

* * *

“아가씨! 아가씨!”

애플이 놀라 잰걸음으로 들어오자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애플은 리네트가 붙여 주고 떠난 의사와 더불어 푹 쉰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회복돼 이제는 제법 잘 걸어 다녔지만, 아직 뛰는 것은 무리였다.

사실 리네트의 시중을 드는 일도 마찬가지였으나 애플은 하녀 일을 하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리네트는 막무가내로 일어나는 애플을 차마 막을 수 없어 대신 그녀에게 아주 간단한 일 정도만 맡기고 있었다.

한데 저렇게 뛰다니.

“애플. 다쳐.”

“앗, 하지만 정말 놀랄 일이 있는걸요.”

“네가 지금 자빠진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놀랄 거야. 조심 좀 해.”

“하지만…….”

“너 도로 가서 누울래?”

“아뇨.”

애플이 으힛, 웃었다. 잘 먹고 쉬어서 그런지 뺨은 건강한 붉은색이었다. 그야말로 사과 같았다.

“뭐가 그렇게 놀라워?”

“그게요. 지금 누가 찾아오셨어요.”

“뭐, 노튼 황자라도 돼?”

“아뇨. 차라리 그쪽이 나을지도 모르죠.”

그쯤 해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리고 애플을 바라봤다. 애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갈레안 도련님이 찾아오셨어요. 그것도 혼자.”

정말 놀랄 일이긴 했다. 리네트도 놀라 입을 벌렸으니.

애플은 괜한 승리감에 히죽 웃었다.

* * *

안전상의 이유로 리네트가 머물게 된 미하엘의 타운 하우스는 카멜리아 공작저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했고, 또한 견고했다.

미하엘은 자신 휘하의 기사들에게 아무나 저택에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기사들 또한 자신들이 지켜 줄 필요도 없는 기운 센 천하장사 공작님만 따라다니다가, 미래의 황태자비를 지킨다 생각하니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갈레안에게 몹시 무례하게 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갈레안 카멜리아는 공작가의 도련님이었으나, 기사들도 제 주인에게 주워들은 것이 있어 카멜리아 공작가와 리네트가 대립하고 있다는 정도는 잘 알았다.

갈레안은 카멜리아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하다 말고 남에게 말을 잘리는 경험을 했다.

“……리네트 누님은 아직 기별이 없으신…….”

“거참. 말을 전하러 간 하녀는 걸음이 느리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갈레안은 응접실 입구의 기사를 노려봤다. 기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한참이나 제 누이를 기다린 차였다. 하녀가 아무리 걸음이 느려도 저택을 두 바퀴는 돌았을 시간이었다.

보통 때라면 갈레안은 진작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 리네트를 반드시 만나야 했다. 제 집안의 상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카멜리아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 처박혀 어디론가 미친 듯이 서신만 쓰고 있었고, 이멜다는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녀가 이따금 입 밖으로 내는 ‘그 계집애’가 리네트라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리네트 카멜리아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됐다. 이멜다가 알면 기함을 할 일이었지만, 그는 제 어머니에게 리네트를 만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갈레안은 프라임의 타운 하우스까지 사병 한 명만을 대동한 채 홀로 왔다. 기차 사고의 여파는 갈레안에게도 미쳐 그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런 소공작에게 편의를 봐줄 만도 하건만, 프라임 휘하의 기사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카멜리아 공작가의 사병은 입구에서 저지당해 그 혼자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심지어 안에서도 철저한 몸수색을 당해, 그는 잔뜩 흐트러진 제 셔츠를 여러 차례 정돈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갈레안은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제 누이가 거기 있었다. 기차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약간 얼굴이 여위어 있었으나 반짝이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잔뜩 쳐든 콧대도.

갈레안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우다다-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덕분에 인사는 리네트가 먼저였다.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웬일이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다른 가문의 타운 하우스에 있는 것 자체가 부모님께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라더니, 실시간으로 폐를 끼치는 꼴을 구경하러 왔니?”

갈레안은 잠시 멍해졌다가, 그 말이 곧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임을 기억해 내고 얼굴이 발개졌다. 불과 몇 달 전에 했던 말이 이렇게 미치도록 부끄러워질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어머나.”

리네트가 까르르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옳은 바를 행할 뿐입니다.”

그 말이 차라리 키리에에게서 나왔다면 리네트는 ‘그렇구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옳은 바’라는 말이 갈레안의 입에서 나오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지겨운 중립주의자 같으니라고.

리네트는 팔짱을 끼고 갈레안을 내려다봤다.

“피차 서로 얼굴 맞대는 게 좋은 사이는 아니니 간단하게 하자. 뭐가 문제니?”

“……문제라고 고한 적도 없는데…….”

“고한 적 없지만, 내가 이미 그 집에 문젯거리를 던져 주었거든.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날 찾아올 리도 없을 테고.”

갈레안의 눈이 흔들거렸다. 제 어머니가 쓰러진 것을 그녀는 알까. 알 것이다. 손을 모으고 고소하다며 깔깔 웃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갈레안은 말해야 했다.

“……공존하게 해 주십시오.”

갈레안은 바른 자세로 서서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그에 리네트가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기 전에 저도 아버지를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저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했습니다. 그로 인해 누이의 고통을 방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이 열 살짜리가 아니라면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을 것이다.

리네트는 피식 웃었다. ‘네가?’ 잔뜩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갈레안을 쳐다보자, 소년은 약간 발끈하려다가도 이내 진정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답했다.

“그날 기차에서 누이께서 말씀하신 사실을 곱씹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께서 누이의 생모를 언급하신 바 없지만, 주변에서 모두 좋은 가문의 여인이라고 하여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생아인 누이를 어머니께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자랐습니다. 세상의 일들은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제가 가정 교사에게서 배운 것이었으니까요.”

갈레안은 리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야 피아를 구분할 수 있을 적부터 이멜다의 증오를 보고 자랐으니까.

“한때는 그 이유가 누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기차가 뒤집혔습니다. 마치 벌을 받은 것처럼. ……꼴사납게도 이런 모양이 되었고요.”

거기까지 말하고 갈레안은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 될까 말까 한 소년이었다.

기차에서 갈레안은 제 아버지가 하녀를 건드려 리네트를 낳았다는 사실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데려온 공작가의 사용인이라도 붙들고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물어볼 심산으로 뒤 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차 전복 사고였다. 그는 한참 후에 정신을 되찾았고, 한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원히 다리를 절 수도 있다는 건 그가 감당하기엔 힘든 일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 흐윽.”

침착하려고 했던 그는 결국 입을 닫았다. 눈물이 나려고 해서였다.

리네트는 눈앞의 소년이 한참 동안 울음을 삼키며 눈을 비비는 것을 팔짱을 끼고 심드렁히 바라봤다.

‘……좀 심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쟤 사정이고.’

리네트는 그렇게까지 정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평생 장애를 달고 살게 된 어린 소년을 동정할 만한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언니의 학대를 방관한 소년이라면 함부로 제 동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웃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갈레안을 비웃는 것은 너무 편한 일이다. 이전의 리네트라면 망설임 없이 그 앞에서 까르륵 웃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일까. 틀림없이 즐거울 테지만, 따르는 뒷맛은 씁쓸할 것이다.

그래서 리네트는 말을 돌렸다.

“아버지 탓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니 정말 다행이네. 이제라도 가서 참회의 기도를 함께해 드리는 건 어때?”

“……부끄럽게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몇 번 훌쩍거리던 갈레안이 콧물을 삼키며 리네트의 말에 대답했다.

“누이께서 가문을 왜 증오하시는지 압니다. 아버지께서 지은 죄의 결과가 누이께 전가되는 것도 모자라, 누이께서는…….”

“살해당할 뻔했지.”

리네트는 벽에 기대 말했다. 갈레안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는 시무룩해졌다. 리네트가 말을 이었다.

“공존이라고? 글쎄. 네 부모님은 나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이 어떤 짓을 나에게 저질렀지?”

“……어렴풋이나마 압니다. 물론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이 더 싫으실 수도 있지만…….”

“갈레안.”

리네트는 아까부터 미묘하게 올라오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소년의 말을 잘랐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네 의견은 없니?”

“……예?”

“네가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해. 아까부터 너는 그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리네트는 갈레안이 정말 싫었다. 너도 나도 잘못했으니 우리 모두 잘못했고, 앞으로는 다들 그러지 말자-라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레안은 그러면 안 된다. 타인이 아니라, 가문의 일원이므로. 중립적 입장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나 내세울 수 있는 이야기다. 네가 유엔이야, 뭐야. 그녀는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아, 갈레안이 내 입장을 이해해 줬네? 어머나, 고마워라. 내 마음을 알아줬어, 감동적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하하 호호 웃으며 살자고? 그런 뜻이야?”

“……아닙니다.”

갈레안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리네트는 빠르게 그의 답을 맞받아쳤다.

“공존? 글쎄. 네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영원히 목숨을 위협받을 거야. 너도 알잖니. 내가 백안의 계승자라는 걸. 그건 내가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을 일이고, 아버지는 나를 죽여서라도 백안의 계승자를 바꾸고 싶어 했지. 내가 이제 와서 아버지의 재판을 중재해 달라 간청한들, 내 목숨이 보장받을 순 없어. 재판이 끝난 공작 각하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 것 같아?”

“……설마, 백안의 계승을 제게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누이를……?”

“그래. 그걸 이제 알았니?”

리네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갈레안은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제 아버지가 누이를 단순히 사생아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줄 알았다. 이멜다의 증오는 그저 사생아에 대한 목적 없는 분노로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목적성 다분한 암살 시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너무 늦었어, 갈레안.”

갈레안은 한참 동안이나 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얼굴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리네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갈레안을 응시했다.

귀족가의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가정 교사가 붙어 온갖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억지로 머리 안에 이것저것 쑤셔 넣다 보면, 제법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밉살스러운 소리를 충분히 해내는 어린애가 된다.

갈레안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자신에게 자식의 도리 어쩌고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은 그야말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리네트는 지금 스스로에게 약간 놀라고 있었다. 갈레안이 이전보다 사뭇 안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리네트가 착해서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선 위치의 문제였다.

갈레안은 항상 안전한 곳에서 이멜다의 화풀이 상대가 된 리네트를 내려다보며 훈계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리네트는 안전한 미하엘의 타운 하우스에서, 곧 모든 것을 빼앗길 소년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은 어린 소년이 새삼 아주 조금 애잔해졌다.

이멜다의 치마폭에 감싸여 교과서적 옳음만을 읊던 소년은, 자신이 싸여 있던 치마폭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게다가 카멜리아 공작은 리네트에게 유독 박했지만, 다른 자식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갑지는 않았다. 그저 자식이라 후계자로 낙점했을 뿐, 갈레안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이러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잖아.’

리네트는 지금 상황에 기가 막혔다. 누가 봐도 어린애를 울린 자신이 악역이었다. 그녀는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그 사람들은 네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날 죽이려고 들 거야. 네가 원하는 공존 같은 건 없어. 특히나 네 아버지는 백안을 다시 자신이 휘두르고 싶어 하니 더더욱.”

“하지만 폐하께서 작위를 회수하시면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힘도 없게 될…….”

“그동안 쌓인 재산은 회수 안 해. 물론 새 공작이 나온다면 그 사람에게 전부 귀속되겠지만.”

그러나 카멜리아 공작도 바보가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지금 집무실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아니? 카멜리아 가문의 재산을 네 이름으로 귀속시키는 중이야.”

명백한 장난질이었다. 아직까진 황제도 제대로 가문의 재산에 손댈 수 없는 탓이다. 공작이라는 건 그런 지위다.

갈레안은 그제야 카멜리아 공작이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던 이유를 짐작해 냈다.

“그 재산으로 과연 네 아버지는 무엇을 할까? 이제라도 죄를 뉘우치며 속죄하는 삶을 살까? 아니. 이제는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들걸.”

리네트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루카스에게 ‘치워 달라.’고 말한 것의 무게를 그녀는 지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의 삶은 생각보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않다. 카멜리아 공작의 협박에도 리네트는 그간 그에게 제대로 대응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일어난 지금, 카멜리아 공작은 리네트 카멜리아를 진심으로 죽이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끊어 놔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리네트는 조금 갈등하고 있었다.

과연 이 소년은 부모의 죗값까지 받아야 할 만큼 잘못했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건 예전부터 그녀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미하엘이 그녀의 앞에서 이멜다의 문장을 꺼냈을 때 윤곽을 드러냈다.

리네트는 카멜리아 공작 부부 두 사람만은 어쨌든 완전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하엘이 가져온 수단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작가의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다. ‘황족 살해 기도’라는 죄명은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물론 뒤탈이 없게 하려면 그쪽이 가장 좋다. 하지만 과연 지금 카멜리아 공작가의 모두를 끊어 놓는다고 해서 자신이 완전한 평화를 되찾을까?

리네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루카스가 비록 어릴 적 납치당했지만 다시 돌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누이.”

“말해.”

‘그렇다면 어떤 것이 완전한 끝맺음일까.’

리네트는 갈레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갈레안은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통해 백안을 이어 나가려 하신다는 건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어떨까요.”

리네트는 순진하게까지 들리는 그 말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갈레안은 그 동작만으로 그녀가 뭐라 생각하는지 금세 알아챈 듯 덧붙였다.

“아버지의 말을 안 듣겠다, 그런 애매모호한 뜻이 아닙니다.”

“그래. 질풍노도의 사춘기 남자애 같은 말 말고, 좀 나은 말을 해 봐.”

“……제가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리네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갈레안의 말은 단순히 결혼을 하겠다, 하지 않겠다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책에서 인위적인 처치로 생식 능력을 잃어버린 남자들에 대한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백안을 계승하게 하여 가문의 대를 이으려 하십니다. 하지만…….”

갈레안은 눈가를 비볐다. 우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립하게 될 겁니다.”

정말 머리 회전이 빠른 꼬맹이였다. 갈레안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갈레안이 그렇게 된다면 카멜리아 공작은 갈레안으로 하여금 백안을 잇게 하려는 것은 관둘 것이다. 당연히 공작가의 재산도, 작위도 소년에게 돌아가지 않게 된다.

이멜다가 과연 그 꼴을 두고 볼까?

자연스레 이멜다와 카멜리아 공작은 대립하게 될 것이라고 소년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어린애의 머릿속에서 나온 방법이었다. 한계가 분명했다. 갈레안은 리네트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어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거세하면, 이멜다가 공작과 대립하려 들 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공작은 갈레안과 리네트를 둘 다 죽이고, 새로운 자식을 낳으려 하겠지. 그게 가장 ‘그다운’ 선택이었다.

게다가.

리네트는 머리를 차갑게 하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닌지 먼저 스스로 점검해야 했다.

왜냐하면 갈레안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이건 미친 짓이었으며, 아마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갈레안. 나는 네가 정말 싫어.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주제에 어쭙잖은 배움으로 양비론이나 내세우며 매번 내게 자식의 도리를 들먹였지. 부모의 도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어머니를 놔두고 말이야.”

……입바른 소리 좀 했다고 해서 이 어린애까지 죽이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리네트는 도무지 알렉사처럼 선해질 수는 없었다.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디 가서 똥통에나 빠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의 목이 참수당해 성벽에 걸리길 바라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때, 백안 ’카멜리아’가 끼어들었다.

‘대귀족이니까 그 정도로 잔혹하게 다루진 않을걸.’

시끄러워. 리네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런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하는 걸 고소한 마음으로 듣고 싶지도 않아.”

“누님…….”

갈레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리네트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크게 한숨을 쉬며 갈레안에게 말했다.

“난 그렇게까지 악당은 아니라고. 악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소년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고 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소년의 입에서 고맙다거나 그 비슷한 말이 나올까 봐, 소년의 말을 빠르게 가로막았다.

“물론 네 말처럼 하하호호 같이 살자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명심해. 네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 것도, 어머니가 날 학대한 것도 진짜야. 나는 그들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의 죗값을 받게 할 거야. 종국에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되겠지.”

“……예.”

갈레안이 언제나 주워섬기던 인간의 도리라는 건 그런 거라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 부모가 잘못했다고 해서 어린애까지 같이 죄를 묻지는 않는 것.

이게 잘하는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밝아진 갈레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네트는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악당이 되지 않으려다가 다 망하는 거 아닐까.

그렇지만 리네트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원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녀의 수명이 약 80년 정도라고 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대략 60년쯤 유지해야 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완전 빡센 일이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뒤통수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복수에 불타서 제 목숨을 가지러 오는, 마지막 남은 카멜리아 공작가의 후손 같은 게 등장할지도 모른다. 혹은 죽은 줄만 알았는데 귀신 같은 몰골로 살아 돌아온 갈레안이라든가.

뭐, 그런 막장 드라마는 남들은 재미있겠지만 자신의 인생이 되면 하나도 재미없다. 리네트는 이 막장 드라마를 이제 끝내고 싶었다.

‘눈에 걸리는 거 다 죽여 버린 다음 오래오래 행복한 공주는……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는 없잖아.’

‘네가 최초로 다 죽여 버리고 행복해진 공주가 되는 건 어때?’

카멜리아가 쫑알거렸다. 리네트는 정말로 카멜리아가 제 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말이나 못 하면.

‘안 돼. 그럼 나중에 남편도 다 죽여 버려야 돼.’

‘……루카스는 왜?’

‘세상에 한 번도 안 싸우고 죽을 때까지 행복한 부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행복해지기 위해 발에 걸리는 걸 다 죽여 버린 후에는, 행복해지기 위해 남의 죽음을 여상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리네트는 도무지 그게 행복한 인생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야 스트레스는 좀 덜 받겠지만.

“재판은 어디까지나 폐하의 몫이지만, 그 결과의 경중을 조절하는 건 내가 하게 될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말해 두지. 공짜는 없어.”

갈레안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리네트는 그 얼굴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너도 내게 협조해야 할 거야. 보호자 없이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바닥 쪽을 괜히 흘겨보며 툴툴거렸다.

“이거 완전 나만 손해 보는 장사 아냐.”

결국 소년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소년에게 듣는 감사의 말이 너무나 생경하고 어딘가 근질거려서, 리네트는 속으로 ‘그냥 꺼지라고 하고 다 죽으라고 놔둘걸.’ 하고 생각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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