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바람 잘 날 없이
“아무튼 이틀은 꼼짝없이 영빈관에 있어야 하겠네요.”
“어차피 당신이 가져온 텡스미스의 서약서도 카칭 영주와 만나 확약을 주고받아야 하니 잘됐죠.”
“호위 기사들한테야 잘된 일은 아닐 겁니다. 인원도 별로 없는데 다들 꼬박 이틀 동안 경계를 좀 해야겠군요.”
한숨 자고 일어난 미하엘은 가장 먼저 경호 체계부터 바꾸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노튼이 카칭에서 그 정도 일을 벌일 수 있을까? 큰 추문이 될 텐데.”
“글쎄요. 저는 노튼 황자님이 이 사태를 가만히 관망한다면 벌거벗고 카칭을 한 바퀴 돌겠습니다.”
미하엘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리네트도 동의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이라 말해 주자면 나는 노튼에게 반말했고, 키리에는 노튼 뺨을 때렸어. 나라도 안 참아. 키리에야 정식 결투를 신청했다지만 나는 황족 모독죄로 노튼이 끌고 가서 목을 베어도 안 이상한 상황이라고.”
“물론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만.”
루카스가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노튼의 병력은 이쪽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황제가 북부로 노튼을 보낼 때, 낸터킷 황후가 제 오라비의 사병들을 꽤 딸려 보냈기 때문이다.
“노튼 쪽은 기사 10명에 병사 30명 정도야. 이 정도로 인력이 앞서면 해볼 만은 하겠다 생각할지도 모르지.”
“난전이 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지젤이 말을 보탰다.
“난전이 되면 저도 힘을 쓰기 어려워요. 게다가 공간을 접어야 해서 힘을 아껴야 하기도 하고요. 저는 정원에 굴을 파는 정도만 할게요.”
“토끼같이 생겨서 굴을 파겠다니, 귀엽기 그지없어라.”
미하엘이 귀신같이 집적거렸다. 지젤은 영문도 모르고 헤헤 웃었다.
리네트가 이를 지켜보다가 미하엘에게 속삭였다.
“절조를 좀 지키시죠.”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걸 뭐 하러 지킵니까? 미남은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습격은 그날 밤 일어났다.
* * *
평소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지 않는 영빈관이다.
리네트는 밤새 횃불을 환하게 켜 놓자고 주장했으나,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차라리 허점을 만들어 놓는 게 좋아.”
“저도 전하의 생각에는 동감입니다.”
미하엘이 루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흥에 취해 즐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두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튼은 우리를 우습게 봐. 좀 더 우습게 보게 놔두는 것도 좋겠지.”
루카스가 환하게 웃으며 영빈관의 시종들을 불렀다. 오늘 저녁에는 만찬을 즐길 것이니, 음식을 오후까지 마련해 놓고 밤에는 모두 귀가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에 음식 만드는 냄새가 오후 내내 사방에 퍼졌다. 노튼이 머무는 영빈관의 시종들까지 이쪽으로 와 일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미하엘의 합류는 극비로 다뤄졌다. 새벽에 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키리에 경. 러브샷 압니까, 러브샷?”
“예? 모릅니다. 무엇입니까?”
“텡스미스의 젊은이들에게 배운 건데, 남자들의 우정을 다지는 음주법입니다!”
미하엘이 즐거이 키리에를 끌어당겨 팔과 팔을 얽는 광경을 보고 리네트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정말 사기꾼도 저런 사기꾼이 없었다. 지젤이 옆에 있을 때는 계속 끌어안고 있더니, 그가 마법진을 보러 간 후에는 키리에에게 집적댔다.
그녀의 성별을 포함해서, 이 사실을 나중에 키리에가 알면 얼마나 짜증을 낼까 생각하니 또 재미있긴 했지만…….
“우리도 해 볼까?”
루카스가 은근히 그녀에게 치댔으나 리네트는 루카스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환자는 음주 엄금.”
“상처를 술로 소독하면 좋대.”
“그건 뿌리라는 얘기지, 마시라는 얘기가 아니거든.”
“리네트. 난 네가 참 한결같아서 좋아.”
리네트가 ‘욕이지, 그거?’라고 되물으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챙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멈칫했다. 기다리던 소리이자 가장 원하지 않던 소리였다.
그리고 곧 그들이 있던 만찬실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자들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것이다. 동시에 만찬실의 큰 문으로도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싸구려 갑옷을 입은 자들이 들이닥쳤다. 몇몇은 창문 옆에서 촛불을 끄기 시작했다.
만찬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호위 기사들이 빠르게 칼을 빼 들었다. 앞서 준비한 덕이었다. 리네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병사는 아닌 것 같지?”
“고용한 자들인가.”
루카스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말살이 목적이니 상대들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단지 눈신호가 다였다.
“야호!”
미하엘은 키리에랑 얼싸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신이 쥔 유리잔을 그쪽으로 집어 던졌다. 리네트는 미리 얘기해 둔 대로 테이블 안으로 빠르게 기어들어 갔다.
챙챙-!
이윽고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러브샷에 실패한 내 분노의 칼을 받아라!”
미하엘이 즐겁게 소리 질렀으나, 그를 뺀 다른 이들은 별 여유가 없는 듯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리네트는 테이블보 아래에서 어둠을 응시했다. 이럴 때야말로 그녀가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매번 즐겁게 주둥이를 놀리면서도, 결국 이런 때가 오면 보호받고 말지.’
[어쩔 수 없잖아. 네 재주가 그 정도인걸.]
카멜리아가 놀리듯 갑작스레 그녀의 의식에 끼어들었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넌 이럴 때 귀신같이 나타나는구나.’
[안 심심하고 좋지, 뭐.]
‘지금 내가 심심한 것처럼 보여?’
[땅이나 파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테이블 아래에서 쭈그려 앉아 다른 의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퍽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특히 바깥에서 정신없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간간이 울릴 때에는.
리네트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텅! 하고 누군가가 테이블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려다 입을 막았다. 이런 곳에서 비명을 내는 건 리네트의 위치를 노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곧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올라섰고, 와장창- 하고 요란하게 접시들이 깨졌다. 그뿐인가. 또 누군가가 테이블에 밀쳐졌다. 테이블이 덜덜 흔들렸다.
리네트는 눈물이 나는 것을 애써 참았다.
[네가 너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런 생각 안 해.’
[안 할 거 같아, 넌.]
이게 정말 누구 놀리나. 리네트는 짜증이 났으나, 화를 낼 겨를도 없어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테이블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우르릉, 와장창!
리네트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훅, 바깥의 공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테이블보에 막혀 있던 방 안의 공기가 리네트에게 쇄도했다. 그 안에는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일어났다. 어둠 속에 눈이 익기 시작한 것은 리네트뿐만은 아닐 터. 게다가 아까부터 달이 구름을 넘나들며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달이 드러나면 습격한 자들 또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실루엣을 빠르게 알아볼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혹여라도 테이블이 뒤집힐 경우, 문간 쪽으로 가겠다고 사전에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체 하나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쿵, 하고 그녀가 넘어졌다. 눈물이 찔끔 났으나 계속 퍼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리네트는 옆으로 다리를 뻗어 조심스럽게 뒤로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달빛에 슬슬 싸우는 자들의 실루엣이 익숙해졌다. 그녀는 잠시 도망치는 것도 잊고 그 가운데서 익숙한 금발을 눈으로 찾아 헤맸다. 팔을 다친 루카스가 제대로 싸우고 있을까, 걱정된 것이다.
다행히도 황자는 근처에서 다치지 않은 쪽 팔로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습격에 제대로 대비한 보람이 있는지, 이쪽을 습격한 자들은 그 수가 몇 남지 않았다.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근처를 더듬었다.
[그 남자를 사랑하니?]
‘……내 목숨이 달려 있는데 사랑 챙길 겨를이 어디 있어? 이 와중에 괴롭히지 좀 마!’
[네 목숨이 달려 있는 와중에 주저앉아서 그 남자 찾는 꼴을 보여 놓고선 뭐라는 거야.]
카멜리아가 따분한 듯 말했다.
[너도 거짓말 되게 못하는구나. 하지만, 살아서 말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주 나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멍청아. 시체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봐야 시체 애호가밖에 안 돼.]
“……익.”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네트는 뒤늦게 기겁해서 제 입을 닫았으나,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지? 옆으로 잽싸게 굴러야 하나?
정말 위기에 몰리면 머리 굴리다가 망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리네트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제 앞까지 다가온 습격자가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까강-!
그리고 리네트는 다음 순간 제 목이 붙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누군가가 제 앞에서 마주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녀는 옆으로 굴러 그쪽을 바라봤다.
그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환하게 드러났다. 익숙한 금발의 황자는 어느새 제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한쪽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텐데 한 치의 밀림도 없는 실력이었다.
몇 번 더 칼이 부딪쳤고, 습격자가 쓰러졌다. 리네트는 그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루카스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상대가 시체가 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바다를 담은 새파란 눈동자를 리네트는 잠시 홀린 듯 바라봤다. 시체 애호가라는 말이 희한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윽고 루카스가 주변을 둘러본 후 검을 바닥에 던졌다. 까강. 키리에가 마지막 한 놈과 싸우고 있을 뿐 상황은 거의 진압된 차였다.
검이 사라지자 빈 한쪽 팔을 남자는 망설임 없이 리네트에게로 내밀었다. 리네트는 얼이 빠진 채로 그 손을 붙잡았고, 그대로 안겼다.
“……루카스.”
“응?”
“……고마워.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리네트는 적어도 카멜리아의 말이 어느 정도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웬일로 말을 듣네.]
시체 애호가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이 죽어 버리는 것.
죽으면 어떤 말도 못 한다.
사랑의 고백도 죽어 버린 다음에는 소용이 없다. 리네트는 자신에게 손 내미는 루카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마음은 이미 깊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의 목을 꽉 매게 한 생각이 있다.
이 아름다운 황자님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리네트는 그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에 사랑을 맹세하는 것으로 이 세계가 완성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철이다.
저 카멜리아를 보라.
[눈치챘어?]
그래. 리네트는 속으로 속삭였다.
거짓말을 잘하는 소녀 카멜리아는 왜 남의 거짓말을 구분하고 싶어 했을까? 세계를 구할 모험에 리시스트를 따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누군가의 사랑의 밀어를 의심했던 건 아닐까. 마음이 깊어 병이 되어서도 끝내 사랑의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리네트는 이번에야말로 수도에 돌아가면 마법사를 만나 제 궁금증을 묻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카스는 기쁜 듯 리네트를 꽉 끌어안았다. 리네트는 눈을 감고 루카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 *
미하엘은 능숙한 시체 처리반처럼 굴었다. 습격자들의 시신을 뒤지고, 조사가 끝난 시신은 영빈관 한쪽에 쌓았다.
“짠- 제가 뭘 주웠게요?”
덕분에 만찬장의 분위기는 한껏 바닥으로 가라앉았으나, 미하엘만은 끈질기게도 하이 톤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생에 예능인이었을 거야.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하엘이 내민 것을 쳐다봤다.
“되게 익숙한 문장이네요?”
“이건…….”
키리에가 이마를 구겼다. 미하엘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카멜리아의 문장이었다.
리네트는 당황했다. 암살자들이 의뢰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게 발견됐다고? 이렇게 허술하게?
‘이게 뭐야?’
[그런 식으로 물으면 대답 못 하는 거 알잖아.]
‘……카멜리아 공작이 여기까지 움직인 거야? 이 북부까지?’
[아니.]
백안은 리네트의 의문을 부정했다.
이 문장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건데, 그럼? 그 말에 대답한 건 루카스였다. 그는 리네트의 표정을 보더니 씩 웃었다.
“내가 건넸어. 기억 안 나?”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리고 루카스 쪽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는 정말 소중한 물건인데 말이야. 리시스트 기차역에서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해 봐.”
아, 그제야 리네트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건 그녀가 이멜다의 옷을 입고 루카스를 만나러 갔을 때, 배짱이 있다면 공작가에 찾아와 보라며 그에게 던져 버린 문장이었다.
“어차피 올 습격이라면 나는 알뜰하게 써먹기로 결심했거든.”
리네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러니까…… 루카스 리시스트는 이 습격을, 카멜리아 공작의 짓으로 꾸미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푸른 눈이 이쪽을 향해 묘한 웃음을 흘렸다.
“물론 경제적인 내 연인을 본받은 자세라네.”
“하지만 내 거라고 그쪽에서 우기면…….”
“잊었어? 너는 오래전부터 카멜리아 공작가의 문장이든, 인이든 하나도 안 쓰고 있다고.”
루카스가 부스럭부스럭,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성의 없이 생긴 물고기 문장이 찍혀 있는 편지.
리네트가 아무 데서나 구입한 막도장이었다.
이를 보며 미하엘이 키들거렸다.
“참고로 증인은 접니다. 제국에 둘밖에 없는 공작 위는 이럴 때 써먹는 거죠.”
귀족은 그에 준하는 귀족의 고발과 증거가 있어야만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그 제국법이 카멜리아 공작의 발목을 잡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 *
이른바 ‘거슬리는 사람들 다 치우기’ 계획의 첫 제안은 미하엘이 했다.
“각하께서요?”
“안 됩니까?”
“아니…… 뭐랄까. 이런 종류의 계획을 세우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여서요.”
리네트의 말에 미하엘이 투덜거렸다.
“무슨 소립니까. 제 인생이 얼마나 피와 음모로 점철되었는지 아십니까? 이래 봬도 제 왼손에는 흑염룡이 잠들어-”
“더 들어야 돼요?”
그에 미하엘이 씩 웃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성별 때문에 중앙의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 이런 종류의 음험한 계획을 세우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다.
“어쨌든 제가 루카스 전하였다면 이번 습격이 끝나자마자 옆 영빈관으로 가서 노튼 전하부터 쳤을 겁니다.”
미하엘의 말에 루카스가 쓴웃음을 짓자, 그녀가 단호한 얼굴을 했다.
“제왕의 정원은 빈틈없이 가지치기돼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루카스 전하는 정원을 방치하는 사람에 가깝죠. 물론 정원을 가꾸실 계획 정도는 있으니 카멜리아 공작가의 문장을 계속 갖고 계셨겠지만요.”
“음. 그냥 나한테 중요한 물건이라 그랬지만…….”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수단이 있다면 가리지 않고 써야 합니다. 갖고 묵혀 놨다가 죽을 때 관에 함께 넣어 달라고 하실 심산은 아니셨을 거 아닙니까?”
미하엘은 북부에서 최소한 노튼이라도 죽이고 가야 한다 주장했으나,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노튼이 없으면 묻힐 일들이 있어. 황후 전하께서는 소중한 자신의 아들을 잃는 순간 영원히 입을 닫을 것이네.”
“그 납치 사건 말입니까?”
“그래.”
잠시 생각하던 미하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가나의 납치가 사전 연습이라는 데에는 미하엘도 동의하던 차였다. ‘어째서 로가나가 선택되었을까?’에 대한 의문에 가장 깔끔한 대답을 내놓은 것도 미하엘이었다.
로가나는 나이 대가 루카스와 대강 비슷하고, 북부 영지 최고위 귀족의 자제다. 게다가 카칭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지역이며, 폐쇄적인 지역 성향상 소문도 그리 퍼지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로가나를 수도까지 흘려보낸 것과 반대로, 북부까지 루카스를 흘려보냈을 것이다. 죽이지 않은 이유야 알 수 없으나, 시체가 발견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진실은 낸터킷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루카스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튼이 사라진다면 낸터킷은 영원히 입을 닫을 것이다. 루카스는 결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노튼은 황제의 아들이다. 황제가 루카스를 끔찍이 아낀다고는 하지만, 노튼이 한 짓을 그냥 보아 넘기는 것만 봐도 그의 자식 사랑은 루카스에만 치우쳐 있지는 않음이 명확했다. 적어도 그의 눈치 정도는 봐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습격을 없었던 듯이 흘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 당장 수도로 간다면, 황제는 루카스의 어깨와 팔을 보고 대경실색할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에 거슬리는 세 이름-낸터킷, 노튼, 카멜리아- 중 선택된 것은 카멜리아였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보아하니 카멜리아 공작 부인의 것 같은데. 소중한 물건이라면서요. 압수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문의 문장은 신분을 나타내는 만큼 그 주인이 누구인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리네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문장을 만지작거리다 미하엘의 말에 움찔했다.
루카스는 리네트 쪽에 윙크하며 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에드가인지 뭔지 하는 놈이 공작가에 그렇게도 뻔질나게 드나든 이유는 그 숙모 덕분이었지. 그놈의 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하나 더 챙겨 뒀어.”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고, 리네트는 대번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살아는 있습니까?”
“살아 있지. 레미시어 가문의 감옥에서.”
미하엘과 루카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네트가 문득 든 생각에 끼어들었다.
“이멜다는 재판을 받게 되면 그의 증언을 요구할 거야. 카멜리아 공작가쯤 되는 가문의 재판이면 아무리 레미시어 가문이라고 해도 그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될 텐데.”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그런 놈들의 욕망은 직관적이고 즉물적이거든. 어쨌든 그곳에서 꺼내 준다는 말만 들어도 그놈은 대뜸 미끼를 물 거야. 다만 알렉사에게 양해를 좀 구해야 하는데, 해 줄 수 있겠어?”
리네트의 속이 뜨끔했다. 그녀는 알렉사와 아직 채 매듭짓지 못한 문제를 남겨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는 동안, 계속 가만히 있던 키리에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제 동생을 위증의 협조자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경. 레미시어 가문의 귀한 아가씨가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미하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드들을 적절히 써먹기 위함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키리에도 찬성이었다.
황제의 마음이 루카스로 기울어진 지금, 이대로 간다면 루카스는 별 이상 없이 황태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적들이 남아 있다면 불안함은 존속될 터. 싸움이 길어지는 건 사양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키리에는 최근 파혼한 자신의 동생이 이런 종류의 일에 또다시 조금이나마 연관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리네트는 잠시 알렉사를 생각했다. 그 착한 아가씨는 마냥 물러 보이지만, 의외로 당찬 부분도 있었다. 스스로 나서서 파혼한 것이 그렇다. 아무리 첫 단을 리네트가 깔았다고 해도, 그 계단을 오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이런 것은 그녀를 만나서 나눌 이야기다.
“뭐, 그런데 노튼 전하도 지레 겁을 먹긴 한 모양입니다.”
“음?”
모두의 의문에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야기부터 하려고 했는데, 세 분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노튼 전하는 오후에…… 정확히는 저희가 습격받기 전에 길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미하엘이 ‘참 나. 아주 자기가 배후라고 광고를 하는군.’ 하고 혀를 찼다. 루카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빨리? 노튼이 곧 떠날 줄은 알았지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영빈관의 시종들은 노튼이 해가 저물 무렵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그저 외출인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노튼을 모시던 사용인들과 짐들이 모두 빈 것을 보고 나서야 대경실색하며 뒤늦게 카칭 영주에게 그의 부재를 알린 것이었다.
하필 이쪽의 시종들은 습격에 대비해 모두 물렸던지라 자연스레 말 전달은 늦어졌다.
“수도로 가서 뭘 할 셈일까?”
뻔했다. 선수를 칠 생각이겠지. 아니면 먼저 가서 길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쪽에 마법사가 있다는 걸 좀 알아 뒀으면 좋았을 텐데…….”
“뭐, 무리도 아니죠. 빨빨거리며 뛰던 그 개가 마법사인 줄 대체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그때였다. 마침 지젤을 경호하던 기사 하나가 올라와 그의 마법이 완성됐다고 알렸다. 지젤은 마법을 쓰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고, 휴식이 끝나면 오후 나절이 될 것이라고도 전했다.
네 사람은 카칭 영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날 채비를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