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습격
귀라르델 산맥 때문에 카칭과 빅타 사이에는 험로가 많았다. 빠르게 이동하려면 좁은 길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마차도 작아졌다.
말이 고작 두 마리 매인 마차를 대령한 데에 관해 루카스는 굉장한 기세로 사과했다. 그러나 정작 리네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괜찮겠어?”
“어쩔 수 없지. 매번 좋은 마차를 타는 게 더 이상한 일인걸.”
“하지만…….”
루카스가 힐끗 그녀의 발목을 쳐다봤다.
기차 사고 때 다친 발목은 좀처럼 낫지 않고 있었다. 평소에 걸어 다닐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갑자기 뛰거나 큰 동작을 하면 여지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루카스가 걱정하는 기색을 알아챈 리네트가 옅게 웃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업고 가든가?”
“나는 상관없는데. 그럴까?”
루카스가 정말로 제 말에 리네트를 안고 탈 기세여서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차 안은 좁았다. 여태까지 타고 온 마차와 달리, 다리를 뻗지도 못하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일주일을 견뎌야 하게 생겼다.
로가나가 푹신한 담요와 쿠션을 잔뜩 깔아 놓긴 했지만, 다리를 뻗고 가는 것과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가는 건 확연히 달랐다.
결과적으로, 리네트는 마차 여행을 하루 종일 하고 나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산맥이니만큼 당연히 마차가 흔들렸고, 리네트는 마차 안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어야 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잔뜩 몸을 긴장시키니 저녁쯤에는 초주검이 됐다.
“괜찮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중간에 머무르는 마을 또한 작은 곳이었다. 2층 건물의 여관에는 간신히 방이 세 개 있었다. 호위 기사 2명, 루카스와 호위 기사 1명, 리네트와 로가나가 각각 방을 하나씩 나눠 쓰기로 했다.
피곤에 절어서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와중에도 리네트는 불쌍한 호위 기사를 향해 야유했다.
“상관과 한방이라니, 정말 짜증 나겠다…….”
“그런 소리 할 여유 있으면 수프부터 제대로 떠.”
루카스가 어이없이 웃으며 리네트를 바라봤다. 리네트는 수저로 수프를 뜨는 족족 거의 다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을 거 같아…….”
“죽지 마. 북부에는 결혼 못 한 여자가 죽으면 처녀 귀신이 된대. 처녀 귀신 되지 말고 살아나.”
“바보들…….”
결혼 안 해서 더러운 꼴 안 보고 죽으면 그게 땡큐지, 뭐라는 거야. 그 말까지는 못하고 리네트는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런. 키리에가 밤이 되기 전에 올 텐데,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어?”
“아으…….”
키리에의 합류가 한참이나 늦어진 참이었다. 키리에는 본디 오페세레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알렉사의 파혼 때문에 늦을 것 같다고 전서구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드디어 그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리네트로서도 키리에를 만나고 싶었다. 알렉사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해 듣고 싶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감기는 눈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 옆에서 로가나가 허둥지둥했고, 루카스는 웃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 데려가서 눕혀야겠어.”
결국 루카스가 그녀를 들어 안았다. 보통 때였다면 버둥거렸을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얌전히 안긴 채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루카스는 거참, 하고 미소 지었다.
“이런 일이 매일 있다면 매번 네가 피곤해지길 바라고 싶은데.”
“뭐라는 거야…….”
리네트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여간, 마지막의 마지막 대답까지 받아칠 여자였다. 작게 웃은 루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방에 들어서자 로가나가 잽싸게 그녀의 등 뒤에 매인 짜내기 끈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옷 갈아입는 것까지 볼 수는 없었으므로 루카스는 잽싸게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잘 자.”
“너 내일 죽어…….”
리네트는 로가나가 끈을 푸는 것을 돕기 위해 간신히 허리만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루카스는 웃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날 밤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루카스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 * *
키리에는 밤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인지라 여관은 단 한곳뿐이었고, 그는 수월하게 여관에 도착한 뒤 바로 루카스를 만났다. 루카스는 여지없이 반가워했다.
“오랜만이군, 내 친구. 계곡은 어땠어?”
“말도 마십시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키리에는 투덜거리며 루카스가 건넨 발효주를 들이켰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려서 먼지를 먹은 탓인지 오늘따라 쭉쭉 잘도 들어갔다.
“세 분이 다녀가시기 전후에는 엄청나게 바빴지만, 그 후에 마법사도 조용해졌지 않습니까?”
“그렇지.”
“계곡에 주둔한 기사단들이 여태까지 그랬듯 다들 한층 한가해진 기분으로 늘어져 있는 꼴을 보니, 제 속이 다 뒤집어지더군요.”
키리에 레미시어는 제국 기사단에서도 유난히 부지런한 자로 유명했다. 검을 다루는 자로서 게을러지면 안 된다는 그의 자세는 기사단의 나이 먹은 자들에게는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젊은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 고지식함 때문에 루카스에게 돌아서기도 했지만.
루카스는 빙긋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입니까. 하나하나 대련했습니다. 남은 복무 기간 동안 하루에 세 명씩이요.”
“얼마나 이겼나?”
“얼마나라뇨.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키리에가 이마를 찌푸렸다.
“거기 있는 게으름뱅이들에게 제가 질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키리에는 마저 투덜거렸다.
“아무튼, 마땅한 상대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렇군.”
“프라임 공작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았을 겁니다.”
술잔을 흔들던 루카스의 귀가 트였다. 그렇잖아도 루카스는 미하엘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안달하던 차였다. 미하엘이 키리에를 점찍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이 고지식한 남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하엘이 여자라는 것도 몰랐다.
루카스는 미하엘이 키리에를 어떻게 공략할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그것은 한참 후로 미뤄진 참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지금 놀리고 싶긴 하단 말이야.’
키리에는 얼굴도 잘생겼고 레미시어 후작가의 차남이다. 검술 또한 제법 뛰어나다는 것이 맞물려 몇몇 귀족 가문에서는 그를 탐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고지식함 때문에 그에게 들어오던 청혼도 뜸해졌다. 레미시어 후작가 전체가 노튼을 지지하고 있는데도 홀로 루카스를 지지하는 꼿꼿함이, 남들 보기에는 이상하게 비춰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큰 변동이 없는 한 프라임 공작이 아니라면 키리에를 데려갈 만한 그럴듯한 집안은 없었다.
루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프라임 공작이 왜?”
“아시잖습니까? 프라임 공작님은 검의 달인입니다. 몇 번이라도 검을 나눠 볼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서요.”
키리에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뛰어나긴 한 것 같던데…….”
키리에가 어떤 말에 낚일지 알아채고 의도한 말이었다. 예상대로 키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라임 공작님과 겨뤄 보셨습니까?”
“아니.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그러진 못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구경하게 됐지.”
“우연한 기회요?”
“황자라는 지위에는 날파리가 워낙 많이 들러붙으니 말이야.”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키리에는 대번에 납득했다.
“적의 목을 추수하는 모습을 보셨겠군요.”
“추수라……. 사람에게 쓰기엔 엄청나게 끔찍한 소리지만, 어떤 뜻인지는 알겠는걸. 그래, 네 말대로 추수였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프라임 공작과 붙어 보고 싶은 건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단 경도 프라임 공작 각하와 한 번 검을 나누시고는 감탄했다고 하시더군요.”
수도 기사단장인 이단 경 또한 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수도에 잘 오지도 않는데?”
“작위를 십 대 때 물려받으셨잖습니까? 그때 붙어 보셨다더군요.”
“잠깐, 프라임 공작이 십 대면…….”
“예. 이단 경은 삼십 대 초반이었죠.”
십 대 여자아이와 삼십 대 초반의 기사가 붙어 여자애가 이겼다는 얘기다. 루카스는 휘파람을 불 뻔했다.
‘저렇게 동경하고 있으니 의외로 미하엘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키리에는 계속 떠들어 댔다.
“사실 계곡에서 몇 번이나 얄밉게 구셔서 장갑을 던질 뻔했습니다만, 그런 결투로는 얻는 게 별로 없죠. 다음에 뵙게 되면 가르침을 청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가 좋아하겠군.”
키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프라임 공작 각하도 결투를 좋아하신답니까?”
“음…….”
루카스가 눈알을 굴리다가 한참 후에 답했다.
“뭐, 어쨌든 자네와 붙는 건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습니까?”
키리에가 벙글벙글 웃자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미하엘이 키리에를 어찌어찌하는 건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가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도와준다 해도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도 않고.
‘키리에, 파이팅.’
루카스는 속으로만 기원했다.
“그런데, 자네 동생은 어찌 된 일인가?”
돌려 묻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빠르게 의견을 나누는 쪽이 나았기 때문이다. 키리에의 얼굴이 갑작스레 흐려졌다.
“그 이야기는…… 내일 아가씨가 오면 하죠.”
“왜? 먼저 이야기하면 안 되나?”
“아가씨도 관련돼 있어서요.”
루카스는 키리에의 어두운 표정에 약간 찝찝해졌다. 리네트가 알렉사와 황후 사이를 살짝 이간질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알렉사가 눈치챈 걸까.
하지만 알렉사가 눈치챘다고 해도 루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군. 그녀는 지금 피곤해서 먼저 자러 갔어. 아까만 해도 어찌나 졸던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
“뭐, 그 아가씨는 접시 물은커녕 망망대해에 빠트려도 입만 동동 떠서 살아날 것 같은데요.”
“내 약혼녀한테 그게 무슨 악담이야.”
루카스가 흥흥 웃으며 말했다. 키리에도 픽 웃었다.
“악!”
비명이 들린 건 그때였다. 방이 있는 위층이었고, 여자 비명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가 벌떡 일어났다.
* * *
로가나가 리네트의 드레스를 친절하게도 벗겨 주자, 리네트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리네트가 깬 것은 잠이 든 지 한 시간도 안 돼서였다. 깨고 나면 완전히 아침일 줄 알았으나, 그녀는 자신이 금세 깨 버렸다는 걸 깨닫고 의아해졌다.
피곤하면 오히려 오래 못 잔다더니, 그런 건가?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밑층에서는 아직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남자들은 아직 잠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네트는 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자신이 자는 동안 로가나가 옆에 물을 갖다 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눌렀다. 가벼운 손.
“아가씨, 가만히 계세요.”
“……응?”
카각!
리네트가 되물은 순간, 찢어지는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리네트는 숨을 삼켰다. 칼 소리였다.
로가나가 외쳤다.
“아가씨, 도움-”
도움을 청하세요-라는 소리였을 것이다.
까가가가가, 다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리네트는 그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습격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 옆에 있는 로가나가 누군가를 발로 찼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퍽. 쿠당탕-
리네트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
괴한은 한 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로가나 또한 도움, 이라고 말하는 순간 입을 틀어막혔던 것이다.
습격한 자는 총 세 명.
단검을 휘두르는 로가나에게 두 명의 괴한이 붙었다. 리네트는 순간 공포에 질렸으나 곧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괴한들의 목적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
북부행 이전에 예상했듯, 리네트의 암살을 기도할 만한 자는 워낙 많았다.
리네트는 팔꿈치로 괴한의 명치를 쳤다. 괴한의 손에 잠깐 힘이 풀리자 리네트는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발목이었다.
“-악!”
채 낫지 않은 발목이 급한 발걸음에 꼬여 비틀리고 말았다. 리네트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또다시 입을 틀어막혔다.
괴한은 이런 종류의 일에 익숙한 듯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한편, 양손을 빠르게 나머지 한 손으로 붙잡았다. 리네트는 자신이 그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무력화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로가나는 여전히 두 사람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빈손이 없는 괴한은 고민할 틈도 없이 그녀를 창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때, 루카스가 들이닥쳤다.
* * *
여관이 작았기에 루카스와 키리에는 금세 리네트가 있는 방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괴한 세 명이 보였다. 하나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헐떡이는 로가나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괴한은…….
루카스는 그 광경을 보고 머리가 하얘졌다. 리네트가 마지막 괴한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창문에 걸쳐져 있었다. 한 마디로 사람 돌아 버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노호성을 지를 틈도 없었다. 루카스는 뛰어가서 리네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괴한 쪽이 빨랐다. 괴한은 리네트의 목을 부러트리려던 참이었고, 실패하자마자 단검을 뽑아 그녀의 목을 찌르려 했다.
루카스는 거세게 그녀를 끌어당기며 괴한을 쳐 냈다. 하지만 문제는 루카스가 오페세레에서 다친 팔이 아직 제대로 낫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루카스는 리네트를 끌어안는 데는 성공했으나, 괴한을 밀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때문에 루카스는 영락없이 어깨를 내주는 모양새가 돼 버렸다. 그의 어깨에 단검이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큭!”
루카스는 리네트를 방 안쪽으로 돌리며 다친 어깨로 괴한을 밀어냈다. 괴한이 헉, 하고 신음하다가 균형을 잃고 창문 바깥으로 떨어졌다.
그사이 호위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느리기 그지없었으나 타박하기엔 경황이 없었다. 루카스는 소리 질렀다.
“바깥!”
짧은 소리였지만 호위 기사들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우당탕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여관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어두운 숲으로 도망치는 괴한의 뒤를 호위 기사 둘이 쫓아갔다. 나머지 하나는 여관 문을 경계했다.
그사이를 노리고 습격하는 후발대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로가나 쪽은 키리에가 도맡았다. 키리에는 빠르게 장검을 뽑아 로가나를 짓누르는 자를 향해 쇄도했다.
괴한이 잽싸게 뒤로 물러섰으나 로가나가 빨랐다. 그녀는 자신을 방금 전까지 누르고 있던 괴한의 발목을 잡아채 그가 넘어지게 만들었다.
쿠당탕, 소리가 났고 키리에는 망설임 없이 넘어진 괴한의 목을 밟았다. 커어억, 괴한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로가나는 괴한의 손바닥을 편 후, 망설임 없이 그 위에 단검을 박아 바닥에 고정했다. 우드득 소리가 났다. 손등이 부서졌을 것이다.
“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괴한이 비명을 질렀다.
키리에는 그사이 바닥을 뒹굴고 있던 자의 발목을 끊었다.
“어억!”
키리에는 발목에서 피가 철철 나는 자의 멱살을 붙잡고 복면을 벗긴 뒤, 검의 손잡이를 입안에 우악스레 들이밀었다. 함부로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괴한은 그가 복면을 벗기기도 전에 혀를 깨물어 버렸던 것이다. 입안이 피투성이인 것을 보자마자 키리에는 그를 내던지고 뒤로 돌아섰다.
로가나가 다른 괴한의 손바닥을 붙들고 있는 사이, 루카스가 그의 입안에 제 팔뚝을 들이밀고 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던 루카스의 팔을 괴한은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그가 통증에 팔을 빼면 그사이 혀를 깨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팔꿈치를 더 들이밀었다.
“끄으으윽.”
“팔을 빼면 죽으려 들겠군. 어떻게 하지?”
루카스의 침착한 말투와 달리 그의 팔은 처참했다. 어깨에는 단검이 박힌 채였고, 팔뚝은 괴한의 입속에 있다. 피가 철철 나 셔츠가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루카스가 괴한에게 달려드느라 밀려난 리네트는 식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채였다.
“너, 너…… 괜찮아?”
“나는 괜찮아. 너는?”
“전하.”
키리에가 한숨 쉬듯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더니, 제 검집을 루카스의 팔과 놈의 입 사이 틈에 밀어 넣었다. 말이 밀어 넣는 것이지, 거의 이를 부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자비한 손속이었다.
그제야 루카스가 팔을 뺐다.
“미치겠군요. 기사들이나 할 짓을 황자 전하께서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음. 프라임 공작이 가르쳐 줬어.”
“가르쳐 준다고 다 합니까? 전하가 언제부터 그렇게 모범생이었다고!”
루카스는 이마를 찌푸린 채로 제 팔을 들어 봤다. 그러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입을 틀어막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네트와 눈이 마주쳤다. 황자는 씩 웃었다.
“정말 괜찮아.”
“피가…….”
“음.”
루카스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네가 괜찮으면 괜찮아.”
그제야 리네트가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놀란 듯 보였고, 루카스는 나머지 한쪽 팔을 뻗었다.
“너는 괜찮아?”
리네트는 기가 막혔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남자는 이런 순간마저도 다정했다.
“당신은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리네트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키리에는 그 소리를 들으며 제 손안의 괴한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괴한은 검집을 문 채 아직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키리에는 제가 모시는 황자 전하, 정확히는 만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중상을 입은 황자를 바라봤다.
화가 치밀었고, 키리에는 결국 손을 뻗어 괴한의 뺨을 후려갈기고 말았다. 빠드득 소리가 났다. 아마 괴한은 이가 다 나갔을 것이다.
* * *
“죽여 버릴 거야.”
“안 됩니다.”
“놔! 다 죽일 거야! 쟤들은 나 죽이려고 왔는데 왜 나는 안 돼!”
“심문 끝난 다음에 죽이십시오.”
리네트가 키리에를 올려다보자 키리에는 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심문이 끝나면 당신이 저자를 얇게 저미든, 스테이크를 만들든, 아니면 불에 태우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
“난 상관할 거야. 안 돼.”
말을 보탠 건 루카스였다. 리네트는 정말로 화가 치미는 얼굴로 루카스를 돌아봤다.
루카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 고운 손에 핏방울을 묻히고 싶지는 않다네.”
“지금 네 팔이 피범벅이거든!?”
이런 순간까지 농담이 나와? 리네트는 씨근덕거렸다.
한바탕 그 난리를 친 후 겨우 상황을 수습했을 때는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 숲으로 뛰어간 호위 기사들은 한참 뒤에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동안 키리에는 루카스의 상처를 처리했다. 그는 가장 먼저 루카스의 옆에 붙어서 눈물을 쏟을 것처럼 팔을 내려다보는 리네트를 옆으로 밀어냈다.
“비키십시오.”
리네트는 잠자코 물러났다. 어쨌든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오페세레에서 약간 다친 정도까지는 치료할 수 있었지만, 어깨에 단검이 박혀 있는 수준의 상처는 건드릴 엄두도 못 냈다.
리네트는 이를 악물고 뒤돌아선 후, 로가나를 돌봤다. 다행히도 로가나는 군데군데 타박상만 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두 괴한을 상대한 것치고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 키리에. 나 무서운데.”
“이걸 그냥 놔두면 두 배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겁니다.”
“살살 해 주- 헉!”
루카스가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키리에가 빠르게 단검을 뽑은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호위 기사가 빠르게 지혈제를 바르고 붕대로 싸매는 동안, 루카스의 안색은 완전히 새하얗게 변했다.
그사이 키리에는 괴한의 사지를 결박한 후, 여관 1층에서 벌벌 떨고 있던 주인에게 소금을 빌렸다.
그리고 괴한의 입안에 천 쪼가리와 함께 소금을 처넣었다. 로가나가 질린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이가 다 나가 있던 괴한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피거품을 뱉었다.
화난 키리에가 얼마나 무자비해지는지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키리에가 있는 일행을 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이 박힌 부분이 근육이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빗나갔으면 대출혈이었을 겁니다.”
“그래그래, 다행이네.”
“전하.”
키리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는 괴한을 죽이겠다고 씩씩대던 리네트가 한심해 보일 정도로 태연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출혈 때문인지 핏기가 없었다. 땀도 흘리고 있었다.
“심문은?”
“어렵습니다. 여긴 자백제도 없고요.”
“그렇군. 당연하겠지만 말도 없겠고.”
“예.”
괴한들은 작정하고 리네트를 죽이러 온 듯, 몸에서 어떤 신분의 증표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자들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굳이 ‘백안’에게 묻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리네트 일행의 여정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녀를 납치하는 것이 아닌 죽이려는 자들.
노튼, 낸터킷, 카멜리아.
“리네트, 너는 나와 계약할 때 적당히 방해되는 자들을 치워 달라고 했지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어지는걸.”
침대에 앉아 있던 루카스가 쓴웃음을 짓자 리네트는 그에게 잠자코 진통제를 건넸다.
루카스의 오른팔은 이제 너덜너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페세레로 가는 길에 다친 건 오늘 입은 상처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였다. 어깨 근육이 찢어졌고, 팔꿈치는 괴한에게 물어뜯겼다. 하필 입고 있던 것은 셔츠 한 장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동감입니다. 북부에 오면서 위험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설 줄이야. 좀 더 일찍 합류하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키리에가 한숨 쉬듯 말했다.
“음, 그전에는 프라임 공작이 있었으니까. 네가 없어도 괜찮았어.”
“예. 하지만 아예 빅타에서 합류해 같이 출발하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어쨌든 전하께서 오른팔을 다치신 건 문제가 큽니다.”
“인력이 너무 부족하지?”
“예.”
본격적으로 경호가 가능한 것은 이제 호위 기사 세 명과 키리에뿐이었다.
키리에가 합류하기 전에는 루카스까지 네 명이 리네트와 로가나를 경호했으나, 네 명이 두 명을 경호하는 것과 네 명이 세 명을 경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루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프라임 공작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나?”
“없습니다. 텡스미스에서 이미 출발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즉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건 상당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프라임 공작은 텡스미스에서 2주 정도 머물 작정이었으나, 루카스처럼 생각보다 빨리 협상을 타진했다면 이미 떠나고 없을 수도 있었다.
“안 되겠군. 중간에 있는 영지에서 호위 인력을 빌려야겠어.”
“문제는 호위 인력을 빌릴 만한 규모의 영지가 카칭까지 가는 길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잠깐만.”
루카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레벤튼이 얼마나 걸리지?”
“……레벤튼이요?”
키리에가 노골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레벤튼. 루카스가 평민으로 자란 영지였다.
“레벤튼은 마차로 꼬박 사흘 정도입니다. 쉬지 않고 간다면요. 하지만 레벤튼에 들렀다 가면 카칭까지는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북부 지역을 벗어나게 되는 셈인데요.”
“카칭까지 이 인원으로 일주일을 가는 게 훨씬 무리야. 그리고…… 아니다.”
루카스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역시 관두지.”
“예. 차라리 중간에 호위 인원을 강제 차출하는 편이 낫습니다. 어쨌든 제국의 황자 전하께서 이런 몰골인데, 차출을 꺼리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겠죠.”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좋아. 그러면 바로 출발하자.”
“바로요?”
“어쨌든 습격 직후니 또 다른 놈들이 당분간 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안 됩니다. 상대적으로 피를 덜 흘렸다고 해도 전하는 지금 중환자에 가깝습니다.”
“음.”
루카스가 눈을 약간 찡그리며 키리에에게 조르듯 턱을 들이댔으나, 키리에는 단호했다.
“당장 다음 마을까지만 함께할 경호 인원부터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죽이겠습니다.”
“그래.”
키리에가 턱짓한 것은 이가 온통 부서진 괴한이었다. 한쪽 구석에 결박돼 있던 그는 제 운명을 직감한 듯 고개를 떨궜다.
키리에는 그 남자의 목덜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리네트가 루카스를 툭툭 건드렸다.
“응?”
“누워.”
“음, 괜찮아. 아직은.”
“당신 지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거든?”
“하하, 걱정해?”
“루카스. 농담하지 마.”
리네트는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호위 기사들에게 청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자리를 비워 주세요.”
“하지만…….”
“방문을 닫고 나가는 정도로만.”
호위 기사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나 루카스가 그들을 내보냈다.
“별일 없을 거다. 잠깐 자리를 비워 줘. 내 연인이 놀란 것 같으니.”
그 말에 그제야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리네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어…… 나는 걱정하는 연인을 안아 줄 만반의 자세를 다하려고 했는데.”
왼쪽 팔을 벌리고 있던 루카스가 익살스럽게 눈을 껌벅거렸다.
“이럴 때까지 장난치지 마!”
리네트의 일갈에 루카스가 시무룩하게 팔을 내렸다.
“이럴 때에는 보통 안겨서 눈물짓는 거 아니야?”
“내가 지금 널 죽이고 네 관 위에서 눈물짓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해?”
“실로 무시무시하고 그럴듯한 협박이로군요. 잘못했습니다.”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네트는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팔짱을 끼고 서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무섭게 봐?”
“너야말로 먼저 대답해 봐. 대체 왜 그랬어?”
리네트를 감싸고 대신 단검을 맞은 걸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왜냐니. 당연히 너를…….”
“날 구하고,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는데?”
“어…….”
루카스가 눈알을 굴리다 대답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해.”
“끝까지 농담하는 네 신경 줄이 엄청나게 굵다는 건 알겠어, 루카스. 하지만 내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야.”
리네트는 발을 탁탁 바닥에 구르려다가 찌릿하고 오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다.
루카스가 그 모습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섰으나, 그녀는 나머지 한쪽 발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눌렀다. 자연스레 루카스는 다시 주저앉았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해.”
“음…….”
“루카스 리시스트. 우선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리네트가 루카스의 허벅지를 발로 누른 채 말했다. 실로 방만한 자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화가 난 상태였고, 그것보다 훨씬 고압적인 자세가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일행에서 목숨에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최우선순위는 너야.”
“리네트. 그 말은 어폐가 좀 있는…….”
“네가 나를 살리고 먼저 죽는 쪽이 훨씬 어폐가 넘쳐, 루카스 리시스트.”
리네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인생은 내가 죽으면 끝나. 하지만 네가 죽어도 끝나지.”
“…….”
“반면 네 인생은 내가 죽어도 끝나지 않아. 이 차이를 모르겠어?”
루카스는 이마를 좁혔다. 리네트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북부로 떠난 황자 일행에서, 만약 리네트 카멜리아가 죽어 버린다면 안타까운 비극으로 치부될 것이다. 연인을 잃은 황자에게 안타까운 시선이 몰리고, 카멜리아 공작가가 황가에 손해 배상을 물면 끝. 황자는 황태자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전진 또 전진.
하지만 북부로 떠난 황자 일행의 여정에서 루카스 리시스트가 죽어 버린다면?
비극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일행에 포함된 모든 자들이 황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죽을 것이다. 리네트 카멜리아 정도는 살아날 수도 있지만, 그건 카멜리아 공작가가 그녀의 구명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살아난다 해도 혼자가 된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네트는 빠르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땡, 게임 끝.
루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리네트가 하는 말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토를 달고 싶었다. 정확히는 화를 내고 싶었다.
“알아, 리네트.”
“알았으면-”
“하지만, 네가 죽어 버린 후의 나는 대단히 행복할 거라고 믿나?”
리네트는 입을 닫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카스의 표정은 온화했으나, 그 눈 안에는 격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네트의 말에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 인생은 계속되겠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루카스는 제 허벅지에 올라온 리네트의 발을 슬쩍 들어 내려놨다. 자연스레 리네트가 휘청이다가 기울어지자, 그는 리네트의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앗.”
그녀는 루카스의 품에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쓰러지듯 안겼다. 다친 그에게 세게 부딪힐까 봐 그 와중에도 옆으로 몸을 기울여 피하려는 게 그녀다웠다.
루카스는 왼팔로 그녀를 단단히 안아 당겼고, 리네트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훅 끼쳤다.
“뭐 하는 거야.”
“리네트. 솔직하게 말하지.”
“…….”
“아까 네 방문을 열었을 때, 정말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제게 안긴 그녀가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루카스는 화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네 말 맞아. 내가 죽으면 다 끝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너를 모르쇠 하란 말이야?”
“…….”
리네트가 긴장해 쌕쌕거렸다. 그렇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들지는 않았다. 아마 루카스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네가 그대로 목이 꺾여 버리는 것을 방관할까? 그리고 죽은 약혼녀를 추억하는 비운의 황자가 되어서 카칭에 간 다음, 로가나를 빌미로 철도 사업권을 교섭하고? 그다음엔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고. 모르는 여자를 황비로 맞이한 후 남은 생애 동안 죽은 옛사랑을 아련하게 추억하면 될까?”
“루카스.”
“응? 리네트. 말해 봐.”
그쯤에서 루카스는 리네트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그를 당황한 채 응시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문득 제 안에 의외의 취향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채고 놀라워했다. 지금 그는 제게 안겨 있는 이 자그마하고 못된 여자애를 그대로 집어삼키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난폭한 동시에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이대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싶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체취를 맡고 싶었다. 작고, 못되고, 짠한 여자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녀를 붙들고 체온이 남아 있음을 오래도록 확인하길 원했다.
루카스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녀 스스로의 목숨보다 남자의 목숨을 우선하라는 연인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따뜻하게 감싸고도 싶었다. 이런 게 양가감정인가.
“너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아. 리네트, 네가 죽으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가 하던 말이 얼마나 무서운 내용인가 싶어 공포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것도 제 목숨을 주저 없이 내던질 만한.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그는 희열을 느꼈다.
제 사랑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그러나 그에게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사실에 몸이 벌벌 떨려 왔다.
“…….”
리네트는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미안한 표정인 것으로 미뤄 보아 그녀는 자신이 슬퍼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루카스의 속을 덥히는 것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루카스는 불같이 일어나는 충동을 참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풀고 속삭였다.
“리네트 카멜리아.”
“……왜.”
“입 맞춰도 돼?”
리네트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 또한 자신을 꽉 붙들고 있던 그의 팔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알아챈 참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벌떡 일어난다면 루카스는 그녀를 붙잡지 않을 것이다.
“싫으면 지금 일어나.”
“…….”
“제발.”
남자는 빌듯이 말했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파도가 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리네트는 여러 차례 그와 입 맞췄다. 그러고는 깔깔 웃으며 다음에는 뭘 할지를 의논했다. 둘 사이의 입맞춤은 어쩌면 여태까지 신뢰의 확인에 불과했다.
루카스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러므로 그는 그녀에게 헌신할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
하지만 지금 그녀가 벗어나지 않으면 이제부터의 입맞춤은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이 얼굴 앞에서 더 이상의 계산은 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고, 지겨웠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앞서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 또한 그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리네트는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보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지만 제 앞에 있던 얼굴이 잠시 숨을 삼키다가,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까슬한 입술이 맞닿았다. 피를 흘려서 그랬을까. 평소와는 다르게 거친 입술이 그녀의 윗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뒤이어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여린 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루카스는 거의 리네트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여유만만하던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갈급하게 입 맞춰 오는 남자의 기세에 리네트가 뒤로 밀렸다.
루카스는 생각 같아서는 그녀를 두 손으로 안고 싶었으나, 한쪽 팔은 붕대를 칭칭 감은 채였다.
그렇다고 판단을 뒤로 미루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 빠르게 눕혔다.
방금 전까지 루카스가 앉아 있던 침대에 누워 버린 리네트는 순간적으로 바뀌어 버린 각도에 기겁했다. 입을 맞출 때 항상 시선의 높이가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낮았던 남자를 밑에서 올려다보는 기분은 묘하고 이상했다.
피가 아직도 조금 묻어 있는 흰 얼굴,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 어두운 불빛에 더해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리네트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건, 설마…….
그러나 루카스 쪽이 좀 더 빨랐다. 남자는 그대로 머리를 내려 리네트의 귓가에 입 맞췄다. 가볍게 붙인 입술을 뗀 직후에는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작게 들리는 숨소리에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간지러워서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루카스가 킥킥 웃고는 그녀의 턱에 입술을 붙였다.
“리네트.”
“어…….”
그가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진 채였다.
루카스는 몇 번이나 다시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녀가 슬쩍 그를 밀어내야 하나 고민할 때, 루카스가 말했다.
“네 심장 소리가 듣고 싶어.”
“……심장?”
“안 돼?”
그러니까, 심장이라고 함은…… 리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루카스가 속삭였다.
“이상한 짓 안 할게.”
“무, 슨 이상한 짓!”
“일단 하고 싶어도 못하거든.”
루카스는 그대로 얼굴을 떼고 그녀를 보며 장난스럽게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리네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그래. 나도 아무 생각 안 했어.”
루카스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듣고 싶어.”
“…….”
리네트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루카스가 픽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너 목까지 새빨개졌어. 이런 건 처음 보는걸.”
“…….”
“아까운데.”
루카스는 방문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을 것이다.
아니,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는 가장 귀한 여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풀이하듯-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상황에서 헛짓으로 소중한 순간들을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는 좋아하는 꽃을 조심스레 피우듯이 한 겹, 한 겹 벗겨 내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아주 천천히. 가장 안전해질 때까지.
지금은 그런 순간은 아니었다. 루카스는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귀를 댔다. 동작은 느렸고, 리네트는 루카스의 얼굴이 닿는 순간 파르륵 떨었다. 하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이 됐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심장이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 오른팔 하나를 걸레로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이런 소리라면 꽤 만족스러웠다. 루카스는 왼팔을 리네트의 허리 아래로 넣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한참이나 그녀의 심장 소리를 감상했다.
“내 사랑.”
“…….”
“나 지금 깨달았어. 나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이제 와서? 그런 말 엄청나게…….”
루카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너무 기분 좋아.”
“…….”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대뜸?”
리네트는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된 듯 의심스럽게 물었다.
루카스는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왼손을 뻗어 침대 위에 흩어진 그녀의 머리카락과 볼을 쓰다듬었다.
“리네트. 나는 네 목숨과 내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을 거야.”
“…….”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리고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 목숨 같은 건 네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어.”
“……거 되게 열렬한 고백이네…….”
“방금 깨달았거든.”
루카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이야기도 미리미리 해 두지 않으면 영영 못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리네트가 투덜대자 루카스는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아까보다는 사뭇 옅은 입맞춤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은?”
“다음에는 여기서 안 끝날 거야.”
그 말에 제 빛깔을 되찾아 가던 리네트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루카스는 놀리듯이 다친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이런 팔로는 네가 힘드니까.”
힘들다고? 대체 뭐가? 리네트는 정말로 물어보고 싶어졌으나, 나올 답이 실로 무시무시한 것일 듯해서 입을 닫았다. 루카스는 정말로 물어봐 달라는 표정이었지만.
이를 애써 무시한 그녀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황자는 뒤로 슬쩍 물러선 다음,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리네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레벤튼은 왜?”
“엑.”
루카스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이 됐다. 리네트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왜?”
“아니, 이런 상황이면 보통 그다음에는 사랑의 말 같은 게 나와야 하지 않아?”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다른 질문이라니. 정말 경제적이다, 내 사랑.”
“……해 줘?”
“어?”
리네트가 머뭇거리다 한 말에 루카스는 눈을 크게 떴다. 리네트는 정말로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거야?”
“……어, 아니…….”
“뭐야.”
그녀가 투덜거리자 루카스는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뭐랄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김이 샌달까…….”
“그럼 말고.”
“와, 매정해.”
황자가 감탄했다.
“왜? 김샌다며?”
매정한 제 약혼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오만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못됐어. 못돼 처먹었어. 그런데 예뻐.
루카스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거 그러니까 되게 이상한 취향인 거 아닐까? 엄청 구제 불능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울리는 경보를 무시하며 웃었다.
“그래도 그런 네가 좋아.”
“……그만.”
“하하.”
루카스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옆에 다가앉았다.
“레벤튼은, 음. 거길 가면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랬어.”
“그럼 가는 게 낫잖아?”
“아니.”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레벤튼에는 확실히 내 친구들이 많아. 하지만 그건 경비대의 루카스일 때고, 황자 루카스로 거길 방문하면 좀 달라져. 나는 내 친구들로 하여금 나를 경호하고, 유사시에는 내 대신 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거야.”
“아…….”
리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내게 너를 대신해 죽지 말라고 했던 것과 같아. 알지?”
“……또 그 얘기.”
리네트는 루카스를 싫은 듯 밀었다.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맨 처음에 너를 약혼자로 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뭔데?”
“아, 튼튼해 보여서 쉽게 안 죽겠다.”
“……네 상처에 소금 뿌려도 돼?”
리네트가 실로 무시무시한 협박을 해 왔다. 루카스는 짐짓 무서운 척 몸을 떨어트렸다가 다시 그녀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이었다.
“레벤튼에서 내가 황자임을 가장 먼저 알아챈 귀족이 가장 먼저 뭘 했는지 알아?”
“뭔데?”
“나를 키워 주신 분을 데려다 매질했어.”
리네트는 이마를 찌푸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루카스는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낸 사람치고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황자 납치범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나를 키워 주신 분은…… 그대로 돌아가셨지.”
“루카스…….”
그가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문지르며 응석 부리듯 말했다.
“네가 안 죽어서 다행이야.”
“…….”
“정말로.”
키리에가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힘없는 가지가 서로에게 기대듯 몸을 붙이고 있었다.
* * *
다음 날 황자 일행은 새벽부터 일어나 길을 재촉했다.
애초에 여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적은 인원으로 다녔으나 루카스가 크게 다친 이상 상황이 달라졌다-고 키리에는 말했다.
“느리더라도 다음 마을에서 인원을 강제 차출해서 호위를 보충하시죠. 그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루카스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키리에는 드물게 강경했다. 여태까지는 고지식하게 굴면서도 루카스에게 져 준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이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전하가 죽으면 저희 다 죽습니다. 제 생명을 보전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리고 키리에는 흘깃 리네트를 바라봤다.
“……뭐,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의 생명도 마찬가지고요.”
“어째 경 말투에 가시가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먼저 아냐?”
“전하는 수하를 부리는 데 매정하지 못한 분이셔서요. 제 목숨이 아깝다고 호소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티격태격하는 둘과 달리, 정작 루카스 본인은 하하 웃으며 ‘두 사람 다 아까워.’ 하고 마차에 올라 버렸다.
리네트는 뾰로통해졌다. ‘쟤 목숨이 더 아까워, 내 목숨이 더 아까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굉장히 유치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불성설이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 열 배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키리에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치졸한 감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유치해! 저열해!’
뭣보다 질투의 대상이 저 키리에 레미시어라는 게 가장 별로였다.
속으로 투덜거린 리네트가 루카스의 건너편에 앉았다. 로가나가 그녀의 옆에 앉는데, 묵직하게 마차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키리에 또한 마차에 올라선 것이다.
“경도 타?”
“전하가 지금 저 모양인데 마차 안에 호위 인력이 하나도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리네트는 키리에를 내쫓고 싶은 기분을 감추며 창밖을 바라봤다. 좁은 마차 안이라 금세 북적북적해졌다.
그러나 금방 기분은 풀렸다. 루카스와 그녀의 무릎이 맞닿았고, 그것을 알아챈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자 루카스가 한쪽 눈을 찡긋했기 때문이다.
짜증 나는 기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바로 사르르 녹아 버렸다. 리네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망했구나.’
사랑에 빠지자마자 ‘망했다.’는 생각부터 하게 하다니, 아무튼 범상치 않은 남자였다.
저런 얼굴을 사랑해 버렸으니 앞으로 내 인생도 알 만하군. 이제 저것보다 못생긴 얼굴을 가진 남자는 못 만날 거야…….
* * *
마차가 무거워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다음 마을까지는 반나절이었고, 키리에는 조금 초조해졌다.
그러나 호위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해결됐다. 지젤이 찾아온 것이다.
짹, 째재잭. 익숙한 새소리에 리네트는 몸을 곧추세웠다. 한 시간 정도 달린 후였다.
“뭐지?”
“로가나, 창을 좀 열어 봐.”
“네.”
로가나가 빠르게 창을 열자, 파르륵- 익숙한 뱁새가 날아 들어왔다.
그에 키리에가 기겁했다.
“웬 새가…….”
하지만 리네트는 제 품에 날아든 뱁새를 활짝 웃으며 반겼다.
“지젤!”
“안녕!”
뱁새가 부리를 열었다. 키리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됐다. 루카스도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미소 지었다.
“그 마법사 친구?”
“안녕하세요, 전하!”
뱁새는 째재재잭, 지저귀고는 날개를 펼쳐 루카스 쪽을 향해 인사했다. 마법사라는 말에 키리에는 그제야 이해한 표정이었다.
“처음 뵙네요!”
“저도 처음 뵙는군요. 지즈 엘란.”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요. 리네트의 친구인걸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뱁새가 즐거운 듯 리네트의 손바닥 위에서 날개를 펼친 채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새라기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불운하게도 하필 이런 애랑 엮여서 온갖 수모를 감내하시고-”
“손바닥 접어 버린다.”
지젤의 말을 리네트가 가로막았다. 지젤은 피로록, 운 다음 포르르 날아 루카스의 팔 위로 앉았다. 정확히는 그가 오른팔에 감은 붕대 위에 앉았다.
“보세요, 쟤가 저런 애예요! 지금이라도 약혼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런. 당신 정말 리네트와 친하군요?”
“아니거든!”
“아니에요!”
동시에 터져 나온 말에 루카스는 정말로 즐거운 표정이 됐다. 키리에는 이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로가나만 아직도 신기하다는 듯 지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이 먼 곳까지 웬일이야, 지젤?”
“아, 맞아!”
한참을 리네트의 횡포에 관해 논하던 뱁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베티가 말 좀 전해 달래.”
“베티가?”
“기삿거리 없대! 내놓으래!”
“……걔는 돈을 그렇게 벌어 놓고 사람 채용 안 하고 뭐 해?”
베티는 리네트 대신 ‘리시스트의 아침’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이야기를 쓰기에 베티만으로는 접근성에 한계가 있었고, 리네트가 북부로 떠난 뒤에 낸 두 부의 ‘리시스트의 아침’은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특종감을 내놓으라는 거다.
“사람이야 많지. 하지만 정보원이 없는걸!”
“아무리 그래도 나 없는 동안 대충 사교계 얘기로 때울 짬도 없단 말이야?”
“그야 다들 자기 자랑만 하니까 가십이 없잖아!”
리네트는 픽 웃어 버렸다.
그렇다. 남 잘났다는 이야기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지면에 오른 누군가를 씹고 뜯고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리시스트의 아침’의 주 소비자다.
“달랑 그 얘기 하러 왔어?”
“아니. 그런데…….”
뱁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망설이는 그 동작에 리네트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여기에선 편하게 얘기해도 돼.”
“마법사 얘긴데?”
“응.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계곡의 마법사를 같이 만난 사람이야.”
“하지만…….”
뱁새가 로가나 쪽을 쳐다봤다. 로가나는 재빠르게 나가려고 했으나, 리네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뱁새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짹짹 울었다.
“자, 일단 나를 기쁘게 팔 벌려 환영해 봐!”
“뭔 새소리야.”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새소리가 맞긴 맞는데, 왜 욕처럼 들리지?”
“카멜리아 양의 특기 아닙니까? 멀쩡한 말도 욕처럼 하는 거.”
키리에가 맞받아쳤다. 리네트는 그쪽을 한 번 째려봤다. 남자 둘이 조용해지자 뱁새가 말을 이었다.
“마탑에서 나를 너에게 보냈다!”
“설마…….”
“맞아!”
뱁새가 명랑하게 파르륵, 루카스에게서 날아올라 리네트의 무릎에 앉았다.
“마탑 노인네들이 너한테 계곡의 마법사 얘기 듣기 전에는 오지 말래!”
“뭐?”
리네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펑, 하고 작은 소리가 들리며 연기가 퍼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엄청난 무게가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앉았고, 그와 함께 그녀의 목을 끌어당기는 손이 나타났다.
리네트는 꺅,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작은 마차 안, 뱁새는 온데간데없고 웬 청년 하나가 제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안녕!”
“……지즈?”
“그래!”
장난기 넘치는 분홍색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마법 실험을 하다가 영영 변해 버린 분홍색 눈동자. 리네트가 이 눈을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리네트는 제 무릎 위에 앉은 청년의 얼굴에서 아는 부분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베티와 함께 몰래 바깥에서 뛰어놀던 소년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그 소년을 꼭 닮은 윤기 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귀여운 청년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리넷!”
* * *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지젤은 루카스에 의해 리네트의 품에서 억지로 끌어 내려졌다.
곧 그는 루카스와 키리에 사이에 끼어 앉아,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했다.
“네가 계곡의 마법사 이야기를 너무 안 해 줬잖아. 그래서 마탑 노인네들이 너를 물 샐 틈도 없이 따라다니다가, 알게 된 이야기는 모조리 수집해 오라고 했어!”
“……이렇게 대놓고?”
“황자님 몰래 따라다니다가 걸려서 오해받으면 마법사라도 사형이라고!”
지젤이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마탑에서는 아직도 마력석의 대부분이 힘을 잃은 이유에 대해 연구 중이었다. 기실 마탑은 마력석 사고 이전에도 마력석들이 차차 약해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바빴다고 했다. 마법이라는 건 마력석이 없으면 곤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곡의 마법사와 조우한 후에도 입을 열지 않는 리네트를 마탑이 주목했다.
“그리고 사실 너를 돕느라 투명 외투 빼돌린 걸 걸렸거든…….”
“그래서?”
“에헴, 어르신의 말을 전할게.”
지젤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전음 마법이었다. 곧 허공에서 작은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리네트 카멜리아 양. 마탑에 신세를 졌으면 갚으시게. 마법사와 만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은 언제든 상관없지만, 그 껌딱지를 떼 내고 싶다면 속히 빠르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네.]
지극히 간단한 전언이었다. 리네트가 의심스럽게 지젤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당분간 네가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응. 아, 될 수 있으면 늦게 얘기해 주면 안 돼?”
“왜?”
“나 마탑에서 나온 거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 리넷, 나 맛있는 거 사 주라!”
지젤은 천연덕스럽게 손을 모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리네트는 이마를 짚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그러면 너, 내가 죽으면 곤란하겠네?”
“어? 죽어?”
지젤이 놀란 눈을 하자 리네트가 픽 웃었다.
“응.”
“안 돼!”
그가 벌떡 일어나 리네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루카스가 ‘에헤이.’ 하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다 도로 앉혔다.
리네트는 너무 웃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어.”
“뭐?”
지젤이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이마를 찡그렸다.
“설마 공작 각하?”
“아마도, 정답.”
리네트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썸즈 업.
지젤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와, 사람도 아냐!”
“그 사람이 사람 노릇 할 거였으면 진작 나한테 좋은 거 먹이고 좋은 옷 입혔겠지. 아무튼, 그럼 넌 나를 지켜야겠네?”
리네트의 말에 지젤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 런가?”
“나 죽은 다음에 마탑 돌아가서 ‘걔 죽어서 이야기 못 들었어요!’라고 하면 어떨까?”
“……나도 죽겠지?”
지젤이 마지못해 답했다. 그 말을 받은 건 루카스였다.
“그렇군. 우리는 카칭까지 마법사의 호위를 받을 수 있게 된 건가?”
“그래. 뜻밖의 이득인데, 이거.”
리네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지젤이 ‘너 되게 나쁜 사람처럼 웃는다…….’ 하고 속삭였으나, 그녀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해결되겠어.”
* * *
마법사는 마력석을 쓰지 않아도 되는 마법사와, 써야 하는 마법사로 나눠진다. 당연히 전자가 압도적으로 비싸고 희귀하다.
그리고 지젤은 전자였다.
“와, 리넷! 나 사람한테 이런 거 처음 써 봐!”
“……그래. 그럴 만하네.”
리네트가 불타 버린 시체를 질린 표정으로 곁눈질하며 말했다.
지젤은 쾌활하게 웃으며 리네트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가렸다.
“나쁜 놈들이니까 막 불태워도 되는 거지?”
“아마?”
카칭을 목전에 둔 참이었다. 습격은 점점 더 형태를 갖추었으나 지젤은 엄청나게 활약했다.
방금은 산길에서 스무 명 정도의 적이 습격해 왔다. 적들은 훈련된 인원이었고, 외길에다 한쪽은 절벽이기까지 했다. 지젤이 없었다면 모두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젤은 ‘와!’ 하는 감탄사 하나만으로 그 스무 명을 단번에 처단했다. 불기둥이 바닥에서 솟아올랐고, 스무 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재가 됐다.
“마법사들…… 되게 무서운 거군. 모든 마법사가 그대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가?”
검을 뽑아 든 키리에 옆에서 루카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지젤은 정말로 호위 기사들이 활약할 틈 따위는 요만큼도 주지 않았다. 지젤이 활짝 웃었다.
“아뇨! 저 같은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제가 가장 무서워요!”
그런 지젤을 보고 키리에가 루카스에게 속삭였다.
“친구끼리는 닮는다더니, 잘난 척도 닮는가 봅니다.”
“키리에 경, 다 들리거든?”
리네트가 짜증을 냈다. 지젤은 환하게 웃으며 한 수 더 떴다.
“저는 진짜로 잘났어요!”
물론 일행들 모두 지젤의 덕을 보고 있었기에 아무도 지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호위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불탄 시체들을 발로 차 절벽 밑으로 떨어트렸다. 어차피 옷가지까지 전부 타 버려서 수색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젤은 호위 기사들이 시체를 다 처리한 후에야 리네트의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대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재잘거렸다.
“우리 다 끝나면 캠핑 가자!”
“캠핑?”
“응! 이 마법 원래 고기 구우려고 만든 거거든? 가끔 마탑 근처 숲에 실험하러 간다 하고 동료들이랑 천막 치고 고기 구워 먹었는데, 그거 되게 재미있어!”
“고기…….”
그래, 고기 굽는 마법을 조금 세게 부리면 사람도 구울 수 있고 그렇겠지……. 리네트는 질린 표정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네트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청년은 방글방글 웃으며 계속 얘기했다.
“노인네들 마탑에서 오래 벗어나면 되게 뭐라고 그러는데, 마탑 근처 숲에 있는 건 뭐라고 안 하거든? 근데-”
“자, 일 끝났으면 잡담은 좀 떨어져서.”
그때,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지젤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지젤이 한사코 말을 놓으라 해서 그는 낮춤말을 쓰고 있었다.
어어, 지젤이 뒤로 휘청했다. 그 바람에 지젤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던 리네트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지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소 지었다.
“질투하세요?”
“음, 내 약혼녀가 외간 남자와 다정하게 끌어안는 모습을 보면 당연히 질투가 나지 않겠나?”
호위 때문에 리네트는 습격을 당할 때면 지젤과 밀착해 있었다. 지젤이 마법을 쓸 때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마력장이 방패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다만 지젤 또한 마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 정도로 다가서지 않으면 리네트는 오히려 지젤에게 방해가 됐다.
지젤이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쟤는 저한테 길가에 널린 돌멩이보다 더 매력 없어요!”
“죽을래?”
로가나에게 부축받던 리네트가 주먹을 쥐고 소리 질렀다. 루카스는 하하 웃고 말했다.
“내가 평민으로 살 때, 나와 가끔 당번이 겹치던 병사가 있었거든. 그 남자는 매일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를 욕했어. 드세고 억지가 심해서 너무 싫다고. 그런데 그 여자랑 결혼하더군.”
“어라…….”
“나는 방심 안 한다네.”
루카스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리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오르실까요, 아가씨?”
“일단 쟤 죽이고 가면 안 돼?”
“음, 마법사 살해는 중죄야. 안 돼.”
그에 지젤이 투덜거리며 그들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쟤랑 결혼이라니, 차라리 절벽에서 백번 구르라면 구르겠어요!”
“이런, 나랑은 좀 다르군. 나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절벽에서 백번 굴러야 한다면 구를 텐데.”
“우와-”
루카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젤이 감탄하며 리네트를 바라봤다.
“뭐?”
민망해져 얼굴이 빨개진 리네트가 눈을 치켜떴다.
“이 황자님, 머리가 좀 이상한가 봐!”
“마법사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무례한가? 싶지만, 그 말만은 동감입니다.”
뒤따라 오른 키리에가 거들었다.
아무튼 사방이 그녀의 적이었다.
로가나가 마차 문을 닫으며 쏘아붙였다.
“아가씨, 분부만 하세요.”
“뭘?”
“제가 밤에 다 죽이고 아가씨를 업어서 귀라르델을 넘어갈게요.”
그 말에 리네트가 루카스를 노려봤다.
“내가 이럴 것 같았어. 며칠 같이 다녔더니, 당신 농담이 착한 애한테 옮았잖아.”
음, 착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농담도 아닌 것 같고. 세 남자가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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