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북부로
노튼 황자가 철도 수복을 위해 북부에서 협상 중이라는 소식에 더해, 루카스 황자와 리네트 카멜리아마저 그곳에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자비가 될 여인이 북부 사교계에 친근감을 더하기 위해 미리 지역을 방문하는 일 정도는 흔했지만, 사람들은 루카스 황자가 집안에서 구박받는 제 연인을 한시도 떼놓고 싶지 않아 한다고 수군거렸다.
챙, 챙-!
“그 연인의 신변은 걱정되지도 않았나 보죠?”
“뭐, 오히려 걱정돼서 그렇다고 해 두지!”
“그렇습니까?”
루카스와 쾌활하게 문답을 주고받는 것은 프라임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칼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프라임 공작은 두 사람과 헤어진 직후 영지를 빠르게 정리해 두고 수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황제를 알현한 뒤, 루카스 황자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사람들은 몰랐다. 하지만 모두들 루카스 황자 편을 들기로 한 프라임 공작이 북부를 회유하기 위해 나섰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북부를 회유하기도 전에 죽겠는걸요!”
챙, 채챙!
칼이 부딪쳤다. 프라임 공작의 말에 루카스가 답했다.
“죽으려고 나선 길은 아니니 부디 노력해 주시오!”
“그럼요! 구혼 여행길을 저승행으로 만들 생각은 저도 없답니다!”
“무슨 구, 혼!”
루카스가 손을 쭉 뻗었다. 그의 손에 달린 장검이 빠르게 상대의 배를 파고들었다. 상대는 얼굴을 가린 검은 복면을 온통 피로 축축이 적시며 쓰러졌다. 입에서 피를 토한 것이 분명했다.
루카스는 상대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몸을 돌려 다시 팔을 뻗었다. 쩡, 하고 금속이 부딪쳤다.
* * *
루카스는 계곡 복무를 2주 남겨 둔 키리에의 귀환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기에, 황실의 호위 기사들만 데리고 북부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거기에 뜻밖의 인원이 지원했다. 프라임 공작이었다.
공작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저도 결혼하고 싶어서요.’라고 말했다. 루카스는 영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리네트는 그 말을 즉시 알아들었다.
북부에서 합류하게 될 키리에 레미시어에게 그녀가 다분히 사심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부로 출발한 지 보름, ‘이렇듯 습격이 잦을 줄 알았다면 그냥 리시스트에서 빈둥댈 것을 그랬다.’고 프라임 공작이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검의 달인이라는 프라임 공작은 작은 키와 날렵한 몸놀림을 무기로, 장검을 휘두르며 괴한을 다섯 명째 쓰러트리는 중이었다.
“젠장, 황자님! 원한을 왜 이렇게 많이 산 겁니까?”
“나도 모르오!”
농담 같은 말들이 칼이 부딪치는 사이로 오갔으나, 상황은 심각했다. 벌써 열 구는 넘는 시체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황실에서도 실력 좋은 이들만 호위 기사로 뽑아 왔건만, 스무 명이 한꺼번에 덤벼 오는 데는 장사 없었다. 그나마도 프라임 공작과 루카스가 아니었다면 피해가 훨씬 컸을 것이다.
그리고 리네트는 이럴 때야말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가나와 리네트는 마차를 닫아건 채, 미리 받아 둔 단검을 손에 쥐고 양쪽 창문을 경계했다.
“로가나, 괜찮아?”
“이쪽은 괜찮아요.”
로가나는 창문 쪽을 경계하다 말고 리네트를 힐끗 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단검은 그렇게 쥐시는 게 아녜요. 반대로.”
“어? 그래?”
“예. 그렇게 쥐시면 다쳐요. 그러니까…….”
자신이 쥔 단검을 들어 보인 로가나가 무표정하게 창문 쪽으로 손을 내리꽂았다.
콱-!
“억!”
창문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팍, 피가 튀었고 리네트는 기겁했다.
손 하나가 창문 안으로 들어오려던 찰나, 로가나가 그 위에 단검을 내리꽂아 버린 것이다.
곧 근처에서 ‘이놈, 어딜!’ 하는 호위 기사의 소리와 함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로가나의 단검에 관통당해 버둥거리던 손이 이윽고 축 늘어졌다. 그제야 로가나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쥐셔야 해요.”
로가나는 괴한의 손에서 단검을 팍, 하고 빼냈다. 관통당한 손이 스르륵 늘어져 창문 바깥으로 빠졌다.
리네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이 떨려 제대로 단검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로가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단검을 직접 고쳐 쥐어 준 뒤에야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애플이 죽어라고 따라오겠다 주장했으나, 로가나만 데리고 온 것이 실로 다행이었다.
* * *
곧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도 희미해졌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마차 창문을 두들겼다.
또도독, 똑똑.
미리 정해 둔 암호였다. 그제야 리네트는 안도의 숨을 쉬며 마차 창문을 열었다. 루카스였다.
“괜찮아?”
“으응.”
“다 죽이고 와 보니 마차 옆에 웬 놈이 쓰러져 있어서 놀랐네.”
리네트는 그제야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복면을 쓴 괴한이 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니 풍경은 더 가관이었다. 시체가 스무 구는 넘게 누워 있었다.
저쪽에서 피 칠갑을 한 프라임 공작이 투덜거리며 얼굴을 닦아 내다가, 이쪽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웃음이 나오냐. 하여간 대단한 인간들이었다.
* * *
아무래도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이 습격하다 보니 이쪽의 피해도 상당했다. 루카스가 왼팔을 깊게 베였고, 호위 기사들은 두 명이 죽었다.
“아야야야.”
“조금만 참아.”
리네트는 마차에 들어앉은 루카스의 팔에 붕대를 고쳐 매 주는 중이었다. 그까짓 거 침만 바르면 낫는다고 루카스는 허세를 부렸으나, 리네트는 이런 종류의 상처가 덧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력석이 없으니 마법 의사에게도 보일 수 없어, 그녀는 수시로 루카스의 상처를 닦아 내고 약초를 갈았다.
“북부에 가서 해도 되는데.”
“뭐라는 거야. 그러다 죽어.”
네가 파상풍을 알아? 리네트는 말을 삼키며 붕대를 묶었다.
“공작님은?”
“내 대신 일행을 인솔 중이지.”
“아니, 안 다치셨냐고.”
“음.”
원래 마차를 이용하던 프라임 공작은, 팔을 다쳐 승마를 하기 어려운 루카스 대신 말을 탔다. 루카스의 말은 가벼운 공작을 태우고 날듯이 뛰었다.
루카스는 마차 창문으로 제 말을 내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쁜 놈. 아주 날아다니는군.”
“좋아하라고 놔둬. 여자분이니 가볍겠지.”
“그야 그렇지만서도. 그런데 로가나도 제법인데?”
“그러게.”
로가나는 마차를 부리다가 죽은 호위 기사 대신 마차를 끌고 있었다. 그야 그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다른 호위 기사의 도움을 받아 말고삐를 쥐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차를 끄는 것에도 큰 재능이 있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피난민 꼴이군.”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온 동네에 황자의 행렬이라고 광고할 생각은 없어 모두들 기사복 대신 간편한 여행복을 두른 참이었다.
그래도 기사들뿐일 때는 나름 절도가 있어 보였으나, 로가나가 마차를 끄는 지금은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황후 전하가 아주 마음이 급하신가 봐.”
리네트가 여상히 비아냥거렸다. 루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런 일을 벌이실 거면 돌아올 때 해 달라고 말씀이라도 드릴 걸 그랬나.”
두 사람을 습격한 주체는 뻔했다. 황후, 아니면 카멜리아 공작이었다.
“적어도 철도 사업 협상은 성공하고 돌아가는 길에 죽어야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겠어?”
“언제부터 국가를 그렇게 챙기셨다고?”
리네트가 비웃으며 몸을 마차의 쿠션에 기댔다.
“너는 괜찮아?”
“나는 아주 멀쩡해.”
“하긴, 네 하녀는 네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그 괴한들을 모두 죽여 버릴 기세더군.”
루카스가 웃으며 말했다. 리네트도 피식 웃었다.
며칠 전 습격에서 괴한들은 리네트를 거의 마차에서 끌어낼 뻔했으나, 로가나가 괴한들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으며 리네트를 구했다.
“면목이 없을 지경이야, 내가. 약혼녀의 안전을 그 하녀에게 지키게 하다니.”
“너도 지키잖아.”
실없는 소리에 리네트가 면박을 주었다.
루카스 또한 괴한들의 목을 여러 번 쳐 내는 것을 리네트는 분명 보았다. 하필 그중 하나의 목이 리네트의 발치로 데구루루 굴러온 통에 이틀간 밤잠을 못 이뤘지만.
“본래는 빠르게 가려고 했지만 이래서야 어쩔 수 없겠어. 이틀 정도는 다음 도시에서 푹 쉬자.”
“괜찮겠어?”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틀 빨리 간다고 해서 그사이에 노튼이 활약을 대단히 할 수 있…… 겠군.”
루카스가 말하다 말고 씩 웃었다.
“그러면 노튼이 제국에 엄청나게 이바지했구나- 하는 거지, 뭐.”
정말 성격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닐까? 이런 무른 남자와 왕관을 가지려 하다니, 나는 역시 잘못 선택한 거 아냐? 하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루카스의 말도 옳았다. 다친 것은 루카스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여섯 명의 기사 또한 자잘한 상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중 한 기사는 발목 인대가 늘어나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다. 이틀 정도라도 푹 쉬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스무 날 정도 남은 셈인가.”
“그렇지. 너도 이 기회에 푹 쉬어. 마침 가는 곳은 따뜻한 샘이 있는 도시니까.”
“오, 그래?”
리네트가 반갑게 눈을 떴다. 귀라르델 산맥의 끝에 걸쳐져 있는 도시 오페세레는 지열 덕분에 따뜻한 물이 이곳저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루카스는 그곳에서 기사들을 쉬게 하며 재정비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말들도 바꿔야 하고, 식량도 보충해야 해. 영주 성에 가서 묵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영주에게 일일이 인사를 받고 식사를 하다 보면 이틀을 쉬기는커녕 내내 시달리게 될 거야. 그러니 가장 좋은 여관을 찾아 묵도록 하지. 괜찮겠지?”
“날 뭘로 보고.”
그때였다.
“맛있는 것도 먹읍시다.”
창문이 슥 열리며 프라임 공작이 고개를 들이밀고는 말했다.
“배고파 죽겠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거칠게 부리면서 밥도 제대로 안 줄 줄 알았으면 역시 리시스트에 남아 있는 건데요.”
“공작님 그 소리 한 여든일곱 번만 더 하면 백 번 채우시겠어요.”
리네트의 비아냥에 프라임 공작이 히죽히죽 웃었다.
“백 번 하면 비싼 밥 사 주십시오, 황자님.”
“분부대로.”
창문이 닫혔다. 마차가 다각다각 길을 재촉했다.
* * *
막상 오페세레에 도착해 좋은 여관에 묵겠다는 계획은 불발됐다.
근교에 쌓인 시체들로 인해 결국 일행의 신분이 드러났고, 오페세레의 영주는 제발 영주 성에서 묵어 달라고 빌었다.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영주는 식사도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프라임 공작은 기꺼이 사양했다. 정말이지 프라임 공작이 없었다면 루카스와 리네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날 저녁까지 영주와 먹어야 했을 것이다.
프라임 공작은 거절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고, 오페세레에서 가장 기가 막힌 스튜를 한다는 여관까지 그새 알아내는 수완도 발휘했다.
“세상에, 이거 진짜 맛있네.”
스튜를 한입 뜬 리네트가 감탄했다. 고기를 과일주와 함께 오래 푹 끓인 요리였다.
리네트의 신분을 모르는 여관 주인이 크게 웃으며 ‘많이 드세요!’ 하고 서비스로 술까지 한 잔 내주었다.
“루크, 거기 소금 좀 주세요.”
“……굉장히 친근하게 부르시는군요, 미카.”
“불만입니까, 루크?”
“아니오, 미카.”
옆에 앉은 두 사람 덕분에 분위기가 퍽 화기애매하다는 것만 빼면 꽤 괜찮은 식사였다. 리네트는 결국 스푼으로 땡, 하고 접시를 두들겼다.
“뭐 하는 거예요, 두 사람.”
미카-미하엘 프라임 공작이 싱긋 웃으며 스푼을 돌렸다.
“여행 중의 친분 다지기죠. 풀네임을 부르면 모두 곤란해지기도 하고.”
“친분이 아니라 싸움 거는 것 같은데요?”
“오- 천만에요, 리넷.”
그녀가 ‘리넷’이라고 부른 순간, 리네트의 등에 소름이 와스스 돋았다. 미하엘 프라임 공작은 정말이지 애칭 하나로 남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우, 느끼해.”
“풀네임이 좋다면 그쪽으로 불러 드릴까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제발 그래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리네트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작 난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
루크라고 불린 루카스가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스튜 그룻은 부지런히 비우는 것이 그의 입맛에도 맞는 듯했다. 그는 스튜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막상 불러 줬으면 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는 애칭인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리네트를 바라봤다.
나? 리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언제 그랬어?”
“이런, 섭섭한데. 그때도 비슷했다고. 이런 식당에서.”
“-아.”
리네트가 당시를 기억해 내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 루카스는 맨 처음에 정체를 숨기느라 그녀에게 ‘루크’라는 이름을 댔었다.
“그랬네.”
“뭡니까? 저만 모르는 둘만의 러브스토리?”
“듣고 싶어요?”
“예. 저는 좀 궁금한데요.”
프라임 공작이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루크가 저 멀리 저택에서 눈물짓는 리넷을 보고 반한 겁니까? 소문대로?”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렇게 된 마당에 말 못 할 것도 없다. 리네트는 간략하게나마 두 사람이 어떤 상황에 만났는지 말하려고 했으나,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근처에 앉아 있는 호위 기사들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축배를 기울이며 하는 게 좋겠군요.”
“재미없는 남자.”
프라임 공작이 혀를 찼다.
“대체 왜 저런 남자와 결혼하려고 합니까? 차라리 저랑 하시죠.”
“어머나, 그럴까요?”
리네트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프라임 공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다.
“저는 부인 될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니, 남자 친구 정도는 열 명쯤 만나도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인데요? 엄청 끌려요.”
“놀라지 마십시오. 동시에 열 명을 만나도 존중하겠습니다.”
“멋져요! 공작님을 먼저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국의 공작가들을 아예 다 없애 버릴까.”
루카스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어쨌든 농담은 거기까지였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식탁 위에 작은 접시들을 올려놓고 머리를 맞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지도를 함부로 펼칠 수 없으니 접시로 대체한 것이었다.
식탁 위에 손바닥만 한 핑크색 접시, 그것보다 조금 작은 연두색 접시와 더 작은 나무 접시가 올려졌다.
리네트가 입을 열었다.
“북부가 폐쇄적인 분위기라는 건 다 아시죠?”
“음. 혈족들의 맹약만으로 일족과 영토를 유지해 온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그 동맹이 공고하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북부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눠지죠.”
리네트가 가장 큰 핑크색 접시를 손가락 끝으로 두들겼다.
“가장 큰 곳은 북부 혈맹의 맹주이자 중심지인 ‘카칭’이에요. 몇백 년이 넘도록 북부의 혈맹을 혈족혼으로 유지해 온 데다,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를 두 개나 가지고 있어 발언권도 크죠.”
“노튼 황자도 카칭에 가 있다죠.”
“예.”
프라임 공작의 말에 리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튼은 카칭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며 철도 사업권을 유치하는 중이었다. 사실상 땅에 길을 놓는 것이니 온갖 이권이 얽혀 있었다. 이 귀족이 괜찮다고 승낙하면, 다른 귀족이 ‘그 길은 우리 영토를 지나간다!’며 발끈하는 식이었다.
“카칭의 영주는 알레한드로 카칭이죠. 제가 그 부인에게 접근이라도 하면 좋을 테지만, 현재 몸이 좋지 않아 사교계에도 나오지 않는다니 저로서는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어요.”
“알레한드로 카칭은 그 흔한 첩도 하나 두지 않는다죠.”
프라임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카칭 영지는 세 사람의 첫 목표는 아니었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곳이긴 하지만, 노튼이 이미 알레한드로 카칭에게 적극적으로 집적대는 상황이었다.
루카스가 거기에 참전하면 여러모로 불리했다.
“그리고 황자 둘이 모두 카칭에만 붙어 있으면 나머지 두 지역이 발끈하겠죠.”
“음. 게다가 노튼이 나 때문에 도발되어 무리한 일을 벌일 가능성도 너무 높고.”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어쨌든 제국을 위한 일인데, 노튼이 무리하다가 이도 저도 망쳐 버리면 아무것도 안 돼. 각자 다른 지역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게 가장 좋지.”
남은 곳은 두 지역.
먼저 ‘텡스미스’ 지역은 북부의 오래된 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연합 지역이었다. 교통의 요지이긴 하지만 석탄이 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철도가 지나가기만 하는 지역이나, 텡스미스가 없으면 철도 사업 자체는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빅타’ 지역. 광산이 개발되며 새로 실권을 쥔 작은 영지 네 곳이 연합해 만든 곳이었다. 평민 출신의 준남작, 혹은 자작들이 영주로 군림하고 있어, 덕분이라긴 뭐 하지만 실리를 중요시 여기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노튼이 카칭으로 간 이유를 알겠어요. 나머지 두 곳 모두 루크에게 유리하군요.”
리네트는 텡스미스와 빅타를 대신하는 두 개의 접시를 손가락 끝으로 돌리며 말했다.
“텡스미스는 오래된 만큼 보수적이죠. 이런 사람들일수록 생득권에 예민해요. 루크가 평민으로 지냈다 하더라도, 결국은 첫째이니 심정적으로는 루크의 편을 들 가능성이 있죠.”
“빅타는…… 노튼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평민에서 준귀족 신분이 된 영주들의 지역이니까.”
프라임 공작이 턱을 괴고 있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 둘째 도련님, 이런 때에도 그런 거 따져 가며 일할 만큼 철없는 타입입니까?”
“음, 뭐랄까…….”
루카스가 팔짱을 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보수성이야말로 귀족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
“저랑 진짜 안 맞겠군요. 나이 먹어서 더 잘생겨졌다길래 실제로 얼굴 보고 괜찮으면 그쪽에 붙을까 했는데.”
프라임 공작이 따분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리네트가 빙그레 웃었다.
“뭐 어때요. 남자는 얼굴 보고 만나는 거죠.”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제 신방에 처박을 수 없는 신분의 상대라면 성격도 고려해야 한답니다.”
두 여자의 대화에 루카스가 질렸다는 표정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루크가 어딜 먼저 방문하냐는 거예요.”
루카스 일행의 목표는 카칭이 아닌 나머지 두 개의 영지였다.
오페세레를 지나 이틀 후면 두 개의 영지로 가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어디를 먼저 가느냐가 관건이었다.
“텡스미스는 보수적인 만큼 성의를 따질 겁니다. 루크가 가장 먼저 텡스미스에 왔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하겠죠. 보수적인 만큼 빅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요. 아마 루크가 빅타에 먼저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평민 출신의 준귀족들보다 낮춰 봤다고 화를 낼 겁니다.”
“하지만 그건 빅타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래.”
루카스의 지적에 리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빅타 쪽은 근 이십여 년 동안 북부에서 가장 큰 사업을 주도적으로 벌여 온 지역이지. 돈도 가장 많이 벌었을 거야. 자부심도 대단하겠지.”
“텡스미스에 먼저 들렀다간, 허례허식에 집중하는 그렇고 그런 귀족들과 다를 것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군요.”
프라임이 접시를 튕겼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수조권도 함부로 쓰지 못한다는 거예요. 폐하께서는 만일의 경우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하라고 수조권을 쥐여 주셨지만…….”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카드인 만큼 남발하면 저평가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
루카스가 목이 타는 듯 물을 마셨다.
“세금을 자체적으로 걷을 수 있다는 건 북부에는 큰 이익이지만, 제국 자체로 보면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급하다고 해서 철도 사업권과 수조권을 바꿨다며 루크를 비난할 세력들이 있겠죠.”
더욱이 노튼이 카칭에서 수조권 없이 사업권을 유치해 온다면 한층 더 크게 비교될 것이다.
수조권 없이 불리한 카드만으로 철도를 유치해 온 둘째 황자.
수조권까지 줘 가면서 뒤늦게 작은 영지들에서 철도를 유치해 온 첫째 황자.
황제는 이런 것까지 계산했을까? 리네트는 좀 짜증이 났다. 그 여우 같은 양반은 루카스에게 꼭 유리하기만 한 치트키를 쥐여 준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생색대로 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북부에서의 승부야말로 진짜라고 봐도 좋았다. ‘리시스트의 아침’ 같은 것으로 적당히 작은 업적을 부풀려 띄우는 잔재주는 부릴 수 없었다. 마력석이 없으니 지젤을 이용하지도 못했다.
진검승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 * *
얍얍. 영주관으로 돌아가는 동안 리네트는 팔을 휘둘러 봤다.
그에 프라임 공작이 웃었다.
“뭐 하는 겁니까?”
“미카가 너무 멋있어서요. 저도 검을 다루고 싶어졌어요.”
“관두십쇼. 사람 죽이는 기술 배워서 뭐 합니까.”
프라임 공작은 하품하며 답했다.
“미카는 배웠잖아요?”
“저야 뭐 배웠다고 하긴 어렵고, 그냥 원래 잘한 겁니다.”
“우와, 재수 없어…….”
리네트가 기함했다. 루카스도 맞장구쳤다.
“그래도 초반에 가르친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제 어머니가 가르치셨죠. 저희 핏줄은 본래 칼 잡으면 자기 몸처럼 다룹니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좀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루카스가 조금 망설이자 프라임 공작이 픽 웃었다.
“저희 집안 잘생기고 예쁜 걸로도 유명하죠?”
“……말해 두지만, 당신의 생김새를 품평하려던 것은 아니오.”
“압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이 섞였으면 결투를 신청했을 테니까요.”
프라임 공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간단합니다. 제국에 두 개밖에 없는 집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들 미남, 미녀들과 결혼했죠. 미남, 미녀들 핏줄이 계속 섞이니 자식들도 예쁜 얼굴이 많았고요. 전 아버지 닮았습니다.”
“아- 아무래도 선대와 달리…….”
“예. 어머니는 사람을 골라서 결혼하긴 어려운 처지셨으니까요.”
프라임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말투가 하도 여상해서 리네트가 다 묘한 기분이 됐을 정도다. 계곡에서 들었던, 그녀의 부모 이야기는 비극에 가까웠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아닐 수도 있겠구나…….’
“뭐, 아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그 말에 두 사람 다 프라임 공작 쪽을 쳐다봤다. 프라임 공작은 눈을 껌벅이다가 픽 웃었다.
“제가 퍽 오해하기 쉽게 말하긴 했죠. 지나가는 방랑자의 목을 친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신분을 모르셨습니다. 흔한 이야기죠. 여행자와 시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 뭐, 시골 처녀가 사실은 공작이었다는 부분이 안 흔하지만요.”
“아…….”
“물론 저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상당히 가혹한 평가를 내렸습니다만.”
“어떤 평가요?”
“여행자라는 핑계로 시골 처녀 희롱하고 날아 버리는 양아치였겠다 싶었죠.”
셋 사이에 나직한 웃음이 퍼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악-
셋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를 따르던 호위 기사들과 로가나도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오페세레의 저녁 거리는 인적이 많지 않았다. 추운 데다가 슬슬 다들 저녁을 먹고 잠이 드는 시간이라 더 그랬다. 서로의 시선이 오갔다.
여자의 비명은 골목 쪽에서 들렸다. 로가나가 재빠르게 그쪽을 넘겨다보고는 리네트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자 둘이에요. 웬 무장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일행은 몰래 그쪽으로 다가가 그림자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봤다. 중년의 부인 둘이 네 명의 무장 인원에게 둘러싸여 빌고 있었다.
“제발.”
“이 사실을 알면-”
“놔주시오!”
같은 이야기들이 들렸다. 보아하니 남자들이 부인들을 끌고 가려는 것 같았다.
리네트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프라임 공작이 먼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하지만…….”
“무장한 남자들의 수준은?”
루카스의 물음에 로가나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장검을 들고 있어요.”
“섣불리 나서지 마세요. 절대 안 됩니다.”
프라임 공작이 재차 강조했으나 루카스는 이마를 찡그릴 뿐이었다.
“루크. 여기는 초입이라곤 하지만 북부입니다. 수도의 논리가 안 통하는 곳이에요. 그냥 불량배도 아니고 장검을 들고 있는 무장 인원이라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누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고요. 여자들이 큰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장 수준도 변변찮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여관에 머물고 있다면 몰라도, 영주 성입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오페세레의 영주는 루카스에게 큰 친절과 호의를 보였으나, 그건 그저 루카스가 제국의 황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페세레에서 잡음을 일으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큰일을 앞두고 있는 만큼 북부에서 조금의 트러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식사를 하러 나온 참이라 무장도 간편했다. 호위 기사들 중 장검을 찬 이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루카스 또한 세검 하나만 차고 나온 참이다.
그렇지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군.”
“루크.”
프라임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고개를 내저어, 프라임 공작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카의 말이 옳소. 하지만 내가 왜 북부에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미카도 날 이해할 거요.”
“…….”
“대단한 대의가 있다고 말하진 않겠소. 실제로 그렇지도 않고.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다수의 남자가 여자를 위협하고 있는 현장을 말없이 떠날 순 없어.”
그렇게 말한 루카스는 빠르게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라임 공작이 말릴 새도 없었다. 호위 기사들이 즉시 그 뒤를 따랐다.
리네트 또한 루카스를 따르려 했지만 로가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는 위험해요.”
로가나의 말이 옳았다. 리네트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프라임 공작은 혀를 차며 리네트 옆에 섰다. 호위 기사들이 모두 루카스의 옆에 있으니 리네트를 지킬 사람도 필요했다. 세 사람은 골목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슨 일입니까?”
루카스가 다가서자마자 무장 인원들이 한꺼번에 이쪽을 경계했다. 그리고 곧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상대로군. 정규 훈련을 받은 움직임입니다. 골치 아프겠는데…….”
프라임 공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쪽하곤 상관없는 일이니 꺼져.”
“이런, 부녀자들을 위협하는 놈들은 왜 꼭 배운 듯이 똑같은 대사를 할까.”
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이를 갈았다.
“빚을 받으려는 것이다. 사정을 모르면 나서지 마.”
“살려 주세요!”
그때, 부인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은 혀를 차며 칼을 들이댔다.
“조용히 안 해?”
“아악!”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옷을 잘 차려입은 쪽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곧장 옆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뒷덜미를 차여 푹 고꾸라졌다.
그제야 루카스는 부인이 팔 뒤쪽에 큰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핏자국이 갈색 드레스에 배어 있어 어둠 속에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빚은 돈으로 받으면 되지, 목숨으로 받아서 쓰나.”
“그런 것까지 설명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우두머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잘나신 얼굴 보존하고 싶으면 못 본 척하고 꺼져.”
“아니, 난 사정 설명을 듣고 싶은데.”
“끈질긴 놈.”
남자들이 장검을 들자, 호위 기사들과 루카스 또한 검을 빼 들었다.
프라임 공작은 빠르게 리네트를 골목 뒤로 빼돌렸다.
“아가씨가 볼만한 광경이 못 될 겁니다.”
곧 칼질 소리가 요란해졌다.
리네트는 불안해하며 골목 바깥쪽에서 안쪽을 기웃거렸으나, 공작이 ‘어허.’ 하고 그녀를 붙들어 안쪽을 볼 순 없었다.
“불안한데…….”
“그쪽 약혼자를 뭘로 보는 겁니까? 괜찮을 겁니다.”
“……진짜요?”
“뭐, 저보단 못하지만요. 적어도 어중이떠중이들보단 낫죠.”
“아깐 어중이떠중이 아니고 정규 훈련을 받은 군사라면서요.”
프라임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규 훈련 받아 봐야 어지간한 놈들이 수도의 제국 기사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루크는 기사가 아니잖아요.”
“음.”
그 와중에도 골목 안에서는 계속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공작은 쭈그려 앉은 채로 리네트에게 웃어 보였다.
“전 남자 칭찬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저 사람은 얼굴만큼은 칼 씁니다.”
“엄청 잘 쓴다는 얘기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보다는 못 씁니다.”
그 말에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리네트는 킥킥 웃고 말았다. 확실히 이전에 있었던 습격에서도 루카스는 원활히 공격을 막아 내곤 했다. 프라임 공작이 워낙 재빠르게 날아다녀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
“뭐, 칼은 못 쓰지만 마음 씀씀이는 저보다 낫군요.”
“무슨 소리예요?”
“제가 말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대로 물러섰다면 조금 실망하긴 했을 겁니다.”
프라임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네트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 됐다.
“엄청 말리셨잖아요?”
“제가 공짜로 일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제 가문하고 영지 걸고 일하는데, 제 선택이 합리적인지는 좀 따져 봐야죠.”
리네트는 프라임 공작을 흘겨봤다.
“시험하신 거예요?”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전 매 순간 저한테 없는 남성성을 시험받으며 산다고요. 하지만 제가 몸을 사리는 것과 달리, 황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하시면 좀 문제가 있죠.”
프라임 공작의 말은 날카로웠고, 리네트는 그녀의 말을 납득했다.
프라임 공작-그러니까 미하엘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안전한 것을 추구해 오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녀로서는 아까와 같은 순간에 몸을 사리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언제 어디서 여자인 것이 밝혀질지 모르니까.
하지만 군주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무릇 군주란 사소한 이익에 앞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미하엘은 말한 것이다.
“그나저나 오래 걸리는군요.”
“제가 좀 보고 올까요?”
로가나가 슬쩍 단검 한 자루를 들고 골목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곧장 손에 든 단검을 잽싸게 던져 넣었다.
푹-!
“억!”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로가나가 돌아서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끝났어요, 아가씨!”
미하엘과 리네트는 잠시 말을 잃고 로가나를 바라봤다.
그에 로가나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어……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아가씨?”
그러나 미하엘이 더 빨랐다.
“리넷,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런 인재는 어디서 키워 왔습니까?”
“……어쩌다 보니 주웠는데요.”
주웠다는 말에 로가나가 활짝 웃었다.
“아가씨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셨지요!”
미하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크도 그렇고, 당신도 뭐 저렇게 탐나는 사람들만 끼고 다닙니까?”
“로가나는 안 돼요.”
“키리에 경은 된단 얘깁니까?”
“제 거 아니니까. 근데요.”
리네트가 주섬주섬 일어나 스커트를 털며 말을 이었다.
“진짜 그 꽉 막힌 벽 같은 남자가 왜 좋아요?”
미하엘은 쭈그려 앉아 있느라 저린 무릎을 두들기며 웃었다.
“얼굴 외엔 볼 거 없는 남자랑 약혼한 분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진 않습니다.”
“…….”
그때, 루카스가 골목 안쪽에서 소리쳤다.
“내 사랑, 그럴 때는 아니라고 좀 해 줄래?”
두 사람 다 말이 없어졌다.
* * *
남자들 중 두 명은 숨이 끊어지고, 한 명은 로가나가 던진 단검에 목을 맞아 빈사 상태였다.
루카스의 뒤를 치려 해 어쩔 수 없었다고 로가나가 털어놓자, 모두 로가나를 칭찬했다.
결국 우두머리 하나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루카스가 툭툭 치며 ‘부인들에게 무슨 빚이 있다는 거야?’ 하고 추궁하니, 눈을 희번덕거리다가 혀를 깨물었다.
순식간이어서 말릴 틈도 없었다. 남자는 피거품을 내뿜으며 꿈틀거렸고, 로가나가 재빨리 리네트의 눈을 가렸다.
“이런.”
“이걸로 분명해졌군요. 죄 없는 놈들은 저렇게 자살 안 하죠.”
미하엘이 으쓱하며 한쪽에서 기사들이 보호하고 있던 여인들에게 다가가 우아하게 손을 청했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에…….”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한 여인은 그녀의 하녀인 듯했다.
미하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중년의 하녀가 머뭇거렸다. 근처에 있던 루카스가 한숨을 내쉬고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괜찮습니다. ……누구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부인은 루카스를 보고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루카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신분을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오페세레의 영주 성에 머물고 있다는 것으로 대답이 될까요?”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서둘러 영주 성의 신분패를 내보였다. 혹시 도시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사용하라고 오페세레의 영주가 내준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감사의 말만 전할 뿐,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피를 흘리고 계신데 상처를 봐 드려도 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선을 긋는 것만 봐도 분명했다.
혹시 남자라서 그런 걸까, 하고 리네트가 나섰다.
“제가 봐 드릴게요.”
하지만 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구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보통 자신들을 구해 준 것만 해도 경계를 풀기 충분한데. 리네트는 그녀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로가나에게 눈짓했다.
“부인께서 일어서기 힘드신 것 같으니 부축해 드려.”
“아닙니다. 하녀가…….”
손을 내저으며 제 하녀의 부축을 받으려던 부인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로가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로가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부인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면 부축해 드릴게요.”
“예, 예…… 예?”
누가 봐도 부인은 얼이 빠져 있었다. 로가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부인은 로가나의 말에 눈만 깜박거리다가 되물었고, 로가나는 다시 물었다.
“……싫으신가요?”
“아, 아뇨! 아뇨!”
주변 모두가 조금 당황해 부인을 쳐다봤다. 가만히 보니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하녀 또한 부인과 같은 시선이어서, 그 자리의 모두가 얼떨떨한 기분이 됐다.
부인이 이윽고 로가나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을 때, 리네트가 물었다.
“저기, 혹시 제 하녀와 아는 사이신가요?”
“예? 아, 아뇨.”
그제야 부인은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제가 아는 사람하고 너무 닮아서…… 혹시 몇 살인지 물어도 될까요?”
“저는 스무 살이에요.”
로가나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사실 그녀는 제 진짜 나이를 몰랐으나, 어림짐작으로 대충 스무 살이라고 답하고 다닌다는 것을 리네트는 알고 있었다.
그제야 부인은 표정을 바꿨다. 뭔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신가요.”
리네트가 미소 짓고 물었다.
“상처는…….”
“정말 괜찮습니다.”
부인은 겨우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창백하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제 하녀에게 기대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남편 없이 여행을 나섰는데, 어쩌다 보니 서로 좋지 않은 관계의 가문 사람들 눈에 띄어…….”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입은 드레스는 수수하지만 고급품이었고, 목에 걸고 있는 장식품도 유서 깊은 물건 같았다. 피부도 고왔다.
어떤 귀족 가문이든 간에 사이 나쁜 가문들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서로 죽고 죽이려 드는 것은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아무리 구해 주었다 해도, 이렇게나 경계하는 마당에 캐묻기도 뭐 했다. 루카스 또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그는 그녀를 공격한 무장 인원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청했다.
“머무시는 숙소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험하실 것 같은데, 혹시 영주 성에 머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루크.”
미하엘이 작게 타일렀다. 그러나 미하엘이 부정을 표할 필요도 없이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보셨듯 널리 알려지는 쪽이 훨씬 불편합니다.”
“그렇군요.”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정이 있어요.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신이라기는 뭣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부인은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려 했다. 리네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괜찮아요.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사실 부인이 뭔가 죄를 지은 사람이면 어쩌나 했지만, 저 남자가 혀를 깨문 걸 보면…….”
리네트는 바닥을 쳐다봤다. 혀를 깨문 남자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으. 리네트가 빠르게 눈을 돌렸다.
“……뭔가 뒤가 구린 건 저쪽인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중년의 부인이 말을 흐리자 루카스가 말을 더했다.
“영주 성이 어렵다면 숙소까지 바래다 드려도 될까요?”
“…….”
“정말로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그 정도라면…….”
부인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호위 기사들 중 두 사람에게는 시체 치우기를 명하고, 나머지 호위 기사 하나와 함께 부인과 동행하기로 했다.
“미카는 리넷을 챙겨 주시오.”
“어라, 목숨보다 중요한 약혼녀를 제게 맡기는 겁니까?”
미하엘의 장난스러운 말에 루카스가 픽 웃었다.
“목숨보다 중요하니 그대에게 맡기는 것이지.”
미하엘 한 명이 호위 기사 세 명의 몫은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리네트는 부인에게 슬쩍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잠시만요.”
중년의 부인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혹시나 해서……. 저쪽 아가씨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어…… 리네트는 로가나를 돌아봤다. 부인이 청하는 것은 로가나의 이름이었다. 로가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답했다.
“저는 로가나예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부인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출혈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우아했다.
영주 성으로 돌아가며 리네트가 로가나에게 ‘아는 분이니?’ 하고 물었으나, 로가나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 *
영주 성으로 돌아온 리네트와 미하엘은 루카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부인에 대해 물었다. 숙소에서라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숙소에는 베버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묵고 있더군. 하지만 본명은 아니겠지.”
“누가 봐도 그렇지. 흐음…….”
리네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본인이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데 어쩌겠어. 그나저나 로가나랑 닮은 사람이 누구길래 그러는지 궁금하네.”
“그것도 물어봤지만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얼버무리더군. 여행은 친정에 가는 길이래. 친정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마를 맞댄 두 사람 사이에 손을 넣고 휘저은 것은 미하엘이었다.
“아, 그만하고 쉽시다, 우리.”
“미하엘은 안 궁금해요?”
“그런 거 일일이 궁금해하면 영주 노릇 못 합니다. 영지에서 하루에 일어나는 습격 사건이 몇 갠지 아세요?”
프라임 영지만 해도 크고 작은 소영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말도 이해가 갔다.
루카스는 하하 웃고는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무튼 날도 늦었으니 이만 쉬지. 그리고 미하엘은 어떻게 할 건가?”
“예? 제가 왜요?”
“영주 성에는 큰 목욕탕이 있다는군. 샘에서 물을 끌어와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하던데.”
미하엘이 장난스럽게 이마를 찡그렸다.
“황자님, 지금 저하고 목욕하고 싶으세요?”
“그것보다는 내 약혼녀와 같이 들어가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지.”
“뭘 걱정합니까? 여자끼린데.”
방 안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는 없었지만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페세레의 하녀들이, ‘황자의 약혼녀와 프라임 공작이 같이 욕탕을 쓰더라.’라고 말하면 어쩔 셈인가?”
“그럼 제가 황자님하고 같이 욕탕을 쓰겠습니까?”
세 사람이 피식피식 웃었다. 프라임 공작은 거절하듯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키리에 경도 아니고.”
“……정말 아까도 물었지만, 대체 왜 키리에 경이냐고요.”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혹시 키리에 좋아하나?”
그걸 이제 알았어? 리네트가 대답하려는데 미하엘이 먼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두 가지로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여긴 영주 성이고 저희 신분은 다 노출돼 있으니 그 웃기지도 않는 애칭으로 부를 필요 없습니다.”
“그 웃기지도 않는 애칭을 가장 먼저 시작한 분이 공작님이거든요.”
리네트의 말에 미하엘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리넷은 괜찮습니다.”
“뭐야. 나만 안 돼?”
루카스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미하엘은 꿈쩍없이 답했다.
“둘째. 예.”
“……정말 키리에를 좋아하나?”
“정확히는 관심 있습니다.”
“호오.”
루카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말 뭐 하지만, 내 친우이긴 하지만 조금…….”
“대가 세죠.”
미하엘이 눈을 찡긋했다.
“원래 미인은 콧대가 높다잖습니까.”
“어디가 미인인데?”
“저보다 잘생겼으면 미인입니다.”
뻔뻔하도록 팔짱을 끼고 답하는 미하엘의 말에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키리에는 아마 그 말 싫어할 텐데.”
“좋아하도록 만들 겁니다.”
“아까부터 물어봤지만, 대체 뭐가 좋아요?”
“음, 얼굴밖에 볼 거 없는 저 황자님 어쩌고 하는 건 아까 대답했고요.”
얼굴밖에 볼 거 없는 황자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나 없는 데서 좀 해 달라니까.”
“둘째 아들이라 가문 이을 걱정 없고, 칼 잘 쓰고, 쓸데없이 뻣뻣해서 맘에 듭니다.”
“앞에 두 개는 그렇다 치고, 뒤에 하나는요?”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미하엘이 으스댔다.
“여자 몇 번 만나 봤다고 여유 넘치는 놈들보다, 경험 없고 뻣뻣한 놈 살살 녹여서 오래 쓰는 게 최고라고.”
“……어디다 써요?”
“여기저기에?”
폭소가 터졌다. 이제 막 계곡에서 북부로 달려오고 있을 경험 없고 뻣뻣한 놈을 리네트가 손꼽아 기다리게 된 건 물론이다.
* * *
대체로 리시스트의 귀족 사회는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 수도에서 지방으로 멀어질수록 더 그랬다.
수도의 살롱에는 이제 여성들도 많이 나와 친교를 쌓는다지만, 북부는 그렇지 않았다. 북부 사교계에서 살롱에 여성이 있다는 것은 딱 두 가지 경우였다.
누군가가 데려온 애인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유력 인사의 딸이거나.
그리고 노튼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후자였다.
알레한드로 카칭의 딸, 아리아나.
알레한드로의 부인이 두문불출하는 지금, 아리아나는 북부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인이었다. 알레한드로 카칭을 공략할 유일한 창구이기도 했다.
노튼은 멋들어진 몸짓으로 아리아나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여인은 수줍어하면서도 그의 인사에 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작 사흘인데요.”
“아리따우신 모습을 뵙지 못하니 사흘이 제겐 삼 년처럼 느껴지더군요.”
아리아나가 어머나, 하고 입을 가렸다.
“약혼자도 있으신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다 민망해요.”
“글쎄요. 저를 탓할지언정 아가씨를 탓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노튼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안 그런가, 라베노바.”
중년의 백작이 허리를 숙였다.
살롱에는 긴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여러 곳 있었다. 물론 청춘 남녀가 단둘이 이야기했다간 흠을 잡히기 십상이기에, 노튼과 아리아나는 각자 라베노바 백작과 시녀를 대동한 채였다.
그러나 이제는 라베노바 백작이 자리를 떠날 타이밍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 반나절도 안 된 것은 좋은 핑계가 되었다.
“저는 잠시 카칭 대영주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게.”
노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어머-’ 하고 부채를 폈다. 시녀는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봤다.
“아가씨…… 샤프롱인 베버 부인도 안 계신데.”
건장한 남자와 아가씨, 그리고 시녀인 자신만 남았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리라.
하지만 노튼은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나를 대체 뭘로 보고!
그러나 눈치 빠른 아리아나가 시녀에게 손사래 쳤다.
“아서라. 어디 감히 리시스트의 황자님께 무례를 범할 셈이니?”
그러곤 노튼을 향해 눈웃음쳤다.
“그렇지요, 황자님?”
노튼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웃었다.
“아리아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왔다는 것은 제게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정잡배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노튼이 그녀의 이름을 친근한 듯 부르자, 여인은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하지만 북부 사교계에서도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여인이다. 쉽게 넘어오지는 않았다.
“어머나……. 저의 어머니께서도 제 이름을 그렇듯 친근하게 부르지는 않으신답니다. 제 시녀가 이렇듯 걱정하는 것도 알 만하네요.”
“이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제게 무례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노튼의 유들유들한 웃음에 아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 미소 지었다.
“글쎄요. 약혼까지 하신 분께 제가 그래야 할까요?”
약혼까지 하신 분. 여인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약혼녀가 있는 남자는 필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런 곳까지 나와 노튼과 독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리시스트의 둘째 황자는 자색 눈동자를 지그시 여인에게 고정하고 다시 상반신을 숙여 여인의 손을 청했다. 여인은 오만한 포즈로 손을 내주었다.
노튼은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부디 갈망합니다.”
* * *
“고생했군.”
살롱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튼은 라베노바 백작과 마주 앉아 짧은 치하의 말을 건넸다. 신년회를 치르자마자 북부로 말을 타고 온 제 심복에게 건네는 말로는 너무나 간결했다.
그러나 라베노바 백작은 자신의 상전이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루카스는?”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라베노바 백작은 말을 이었다.
“저보다 이틀 정도 늦게 출발했습니다.”
“프라임이 거기 붙었다지.”
“예.”
“빌어먹을. 시골 영지에 계속 처박혀 있을 일이지, 왜 갑자기 수도의 일에 간섭하려 드는 거야?”
“……죄송합니다. 알아보려 했으나, 출발이 시급해…….”
아름다운 둘째 황자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애초에 그 멍청이에게 붙는 놈들이 어디 앞뒤 가리는 놈들이던가.”
애초에 루카스가 프라임 공작과 함께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러 간다고 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서로 손을 잡을 줄이야…….
노튼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계곡의 마법사에게 다시 한번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는 계곡의 마법사가 왜 리네트 카멜리아를 불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카멜리아의 이름을 가진 자로 하여금 왕자와 언약하라는 웃기지도 않는 부탁을 했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몇 년 전, 노튼을 만난 계곡의 마법사는 그에게 똑같은 부탁을 했다. ‘카멜리아의 여인이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왕자라도 상관없지 않은가?’
실로 기발한 생각이라고 당시의 노튼은 생각했다.
계곡의 마법사가 제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노튼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카멜리아 공작의 딸을 결혼시키려는 데에는 분명 악한 꿍꿍이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 무언가를 감추고,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것 아닌가.
게다가 노튼은 어쨌든 알렉사 레미시어와 약혼한 차였다. 그는 알렉사 레미시어와 파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해서.’라는 이유는 당연히 아니었다.
알렉사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였다. 레미시어 가문은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 또한 순종적이어서 제 성격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련하도록 착한 것이 가끔은 거슬렸다. 착한 사람일수록 약점도 많다. 노튼은 차라리 야심만만한 여자들이 낫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은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니.
그래, 마치 아리아나처럼.
노튼은 피식 웃었다.
사실 아리아나는 알레한드로 카칭의 수양딸이다. 이십여 년 전 어린 딸을 안타깝게 잃은 뒤 카칭 부인이 슬픔에 잠겨 두문불출하자, 카칭 영주가 제 동생의 딸인 아리아나를 입양한 것이었다.
북부 사교계의 꽃인 그녀는 데릴사위를 들여 북부의 주인이 될 예정이었고, 알레한드로 카칭의 뒤를 잇길 원하는 남자는 많았다.
한데 아리아나는 카칭 가문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노튼이 북부를 방문한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중앙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수양딸이라는 자신의 입지가 불안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튼은 그런 아리아나 카칭의 욕망을 읽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황비를 꿈꾸든, 북부의 주인을 꿈꾸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노튼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를 이용해 카칭 영지에 철도를 놓을 수 있느냐뿐이었다.
‘어차피 어머니도 알렉사가 영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고.’
수도에서 낸터킷 황후는 라베노바 백작을 통해 알렉사가 영 이상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미 황후는 알렉사를 떼어 놓을 마음이 만만이었다.
그렇다면야- 아리아나에게 그 이야기를 슬쩍 흘리는 것도 좋겠지.
“할 말이 뭔가?”
생각을 끝낸 노튼은 제 주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앞의 찻잔에 집중하던 라베노바 백작을 재촉했다. 그는 막 카칭까지의 여정을 끝낸 참이라 피곤할 텐데도 노튼에게 굳이 할 말이 있다며 자리를 만든 참이었다.
그게 프라임 공작의 루카스파 합류인 줄 알았지만, 그는 말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었다.
“그게, 배럴 남작이…….”
“배럴?”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노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게 자금을 댔던 자의 이름이었다.
배럴 남작이 도박장 관리에 실패해 재산을 몰수당한 이후, 황제는 노튼에게 경고했다. 군주가 되고 싶다면 검은돈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도덕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끝내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노튼이 오랫동안 편안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싶다면 뒤탈이 될 만한 돈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노튼은 황제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고, 배럴 남작이 제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손을 끊었다.
그런데 왜 그의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신년회에 어찌어찌 참석하긴 한 모양입니다만,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무슨 이야기?”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 루카스 황자가 손댄 정황이 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그래.”
노튼이 이마를 찡그렸다.
도박장에 황제의 관리들이 들이닥치기 약 사흘 전, 키리에 레미시어가 술에 취한 채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나 주정만 하다가 사라진 그를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홀에서 카드를 돌리던 한 귀족 나부랭이가 유일하게 그를 알아보고 배럴 남작에게 귀띔했다.
“배럴 남작의 재산이 몰수당한 이유는 정확히는 도박장에서의 인신매매 때문입니다. 한 귀족이 창부를 끼고 나타나, 도박장의 마법 약과 여자를 빼돌려서 증거로 삼았죠. 뒤늦게 그 귀족이 누군지 알아봤지만 당연히 가명이었습니다.”
“그건 이미 보고받아서 알고 있지 않나. 요점만 얘기해.”
짜증스럽게 노튼이 답하자 백작은 빠르게 말했다.
“그 귀족과 동행한 창부가 루카스 황자 옆에 서 있었다더군요.”
“그런 여자가?”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이름으로요.”
“……!”
노튼은 화닥닥 몸을 세웠다. 그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게 무슨…….”
“도박장에서 그녀가 유난히 설쳐 대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더군요. 배럴 남작은 리네트 카멜리아가 도박장에 위장해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고 저를 붙잡고 성토했습니다.”
리네트 카멜리아.
노튼은 그녀를 몇 번 보지 못했으나, 분명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계곡의 마법사 일로 단둘이 독대를 했을 때도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그녀의 모습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별것 아니네…….’ 생각했었는데.
“도박장에 위장해서 들어왔다고……?”
라베노바 백작 역시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카칭까지 달려오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셈했습니다만, 애초에 배럴 남작의 도박장을 별다른 증거 없이도 덮칠 정도의 신뢰성 있는 제보를 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리네트 카멜리아의 단독 행동은 아닐 겁니다. ”
“……분명 동행한 남자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적어도 키리에 레미시어 정도는 돼야 하나…….”
“그는 그날 도박장에 변장도 하지 않고 등장했죠. 갑작스레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질 이유가 뭐겠습니까?”
“루카스.”
노튼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설마하니 황자가 직접 도박장에 방문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에, 그저 그가 배럴 남작에게 간자를 심었을 거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마저도 추측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확실한 증언이 나왔다.
노튼은 어이가 없었다. 루카스가 몇 년 전부터 황위에 깔짝대며 제게 덤비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신을 훼방 놓은 것을 확인하고 나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솟구쳤다.
“천한 놈이!”
생득권으로 따지면 루카스 리시스트가 훨씬 황좌에 가까웠다.
하지만 노튼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십 년 넘게 평민으로 살아왔던 자다. 그가 하는 짓을 노튼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노튼은 그를 처음 본 날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지방 영지의 경비대 옷을 입고 얼떨떨하게 머리를 긁으며 서 있는 놈. 얼굴은 시커멓게 타 있었고 목은 벌갰다. 하루 종일 햇빛 아래에 서 있었던 평민들의 증거였다. 그 새까만 손이 자신에게 닿는 것도 싫었다.
몇 년 황성에서 지내며 피부도 다시 흰 빛을 띠고 이제는 황족인 양 거들먹거리고 있지만, 자라난 환경을 생각하면 그는 쫓겨나 마땅했다.
그런 놈이 감히 나를 방해해?
최근 자금줄이 끊겨서 간자들과 소식을 나누기조차 버거웠던 기억이 솟구쳐 올랐다.
황후는 부자이기는 하나, 국경에서 고전 중인 자신의 오라비에게 돈을 대느라 노튼에게 큰 도움은 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노튼이 북부까지 직접 와야 했던 것도 북부에 로비를 해 댈 만한 자금이 부족해서였다.
“여태까지의 계획을 모두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라베노바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태까지 루카스에 맞서 노튼 측의 전략을 짜 오던 자였다. 그러나 그로서도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변수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여태까지 저희는 루카스 황자가 카멜리아 공작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청혼했다고 생각했잖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건가?”
“예. 적어도 평범한 귀족 여성이라면 이런 일에 직접 개입할 생각조차 못 할 겁니다. 배럴 남작의 말로는 그 여자가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했죠.”
백작은 냉철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네트 카멜리아의 상황은 아주 나쁩니다. 사생아인 데다가 카멜리아 공작 부인이 그녀를 싫어하죠. 추측하자면, 그녀가 루카스 황자에게 먼저 손을 뻗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하지만 루카스가 그녀에게 얻을 게 뭐가 있나?”
“카멜리아 공작은 아직도 루카스 황자의 편을 들기는커녕 애매한 위치에 머물고 있죠.”
카멜리아 공작가의 세력을 제외한다면 황자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노튼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여태까지는 갈레안 카멜리아가 백안을 계승했을 거라는 추측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 전하.”
라베노바 백작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백안을 계승했다면, 모든 추측이 들어맞습니다.”
노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카멜리아 공작 부인이 친척 중 가장 쓰레기를 리네트의 남편으로 안배한 이유. 카멜리아 공작이 아직도 루카스의 편을 들지 않는 이유.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취했을 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의외로 저희는 조금 다른 개척로를 찾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하.”
노튼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작이 입을 열었다.
“백안의 계승 방법 중 가장 험한 것이 있습니다. 카멜리아 공작은 이대로 황가에 백안이 넘어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암살…… 인가.”
“예. 그리고 그녀는 지금 북부로 오고 있죠.”
“하지만 카멜리아 공작이 살수를 이곳까지 보낼 수 있을까?”
“전하. 개척로를 찾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중년의 백작이 옅게 웃었다. 노튼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군. 그녀의 목을 거두는 것은 우리의 몫이군.”
“예. 송구하나 이곳으로 오던 중 저는 그런 가능성들을 생각했고, 도중에 머무르던 마을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면 공작저에 제 편지가 도착하겠죠.”
어떤 편지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노튼이 피식 웃었다.
“루카스는 북부에 약혼녀를 묻게 되겠군.”
“그 김에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녀의 무덤가에서 평생을 지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기분이 좋아진 노튼은 제 손에서 보석 반지 하나를 빼 라베노바 백작에게 상으로 주었다. 백작이 빙그레 웃으며 반지를 소매에 감췄다.
“이번 일의 착수금으로 쓰겠습니다.”
“이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민망해지지 않나.”
노튼이 제 소매에 달린 보석 단추 두어 개를 뜯어내자 라베노바 백작이 으쓱하며 그것을 받았다.
“약혼녀까지 데리고 카칭에 와 봤자 얻을 것은 없을 텐데, 그렇게 쉽게 와 줄까?”
“제 생각이지만 아마 카칭으로 오진 않을 겁니다.”
과연 노튼의 오른팔이었다. 책략가로 이름난 자이니만큼, 그는 카칭에 앉아서 리네트와 프라임 공작 등의 대화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루카스 일행이 했던 전망을 그대로 읊었고, 노튼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텡스미스와 빅타라……. 두 지역 모두 카칭보다 작지만 그자가 할 만한 생각이로군.”
“예. 카칭은 이미 노튼 전하께서 계시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할 겁니다. 아마 보수적인 텡스미스 지역으로 먼저 향하지 않을까 싶지만…….”
“싶지만?”
“프라임 공작이 굳이 합류한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프라임은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가다. 게다가 여태까지 엉덩이 무겁게 굴던 프라임 공작이 굳이 움직였다는 인상이 통할 만한 곳은…….
“빅타?”
“정확히는 아마 일행을 나누지 않을까요?”
“그렇군. 굳이 셋이 움직일 필요가 없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빅타 쪽은 준귀족들이 많으니만큼 프라임 공작이 움직일 겁니다. 프라임 공작은 영지 경영에도 뛰어나니 그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겠죠. 보수적인 텡스미스에는 장자라는 점을 내세워 루카스 황자가 나설 겁니다.”
노튼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먼저 태어났다고 다가 아닌데 말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예측은 정확하게 반대로 들어맞았다.
* * *
오페세레 영주의 성은 산이라기엔 애매하고 동산보다는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따뜻한 물이 솟는 곳에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오페세레의 영주는 황자에게 자신의 영지를 구경시켜 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영주의 성 뒤쪽, 영주 가족들이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뜨거운 샘에서 휴식을 취하게끔 했다.
루카스는 기사들에게 함께 들어가자고 권했지만, 다들 영 불편한 표정으로 호위나 하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외로운 건가, 서러운 건가.”
루카스가 물속에서 뺨을 긁었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왜?”
하지만 뒤에서 명랑한 대답이 들려오자 루카스는 식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제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녀가 눈을 반짝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재미없다는 표정이 됐다.
“뭐야. 안 벗었잖아.”
“뭘 기대한 거야?”
“그거야 홀딱 벗은 미남이죠.”
루카스는 이마를 짚었다. 미하엘까지 뒤이어 나타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간편한 차림새였다.
미하엘은 가운을 갖춰 입고 물에 들어가 있던 루카스를 보고는 아주 애석한 표정으로 말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샘에서 벌거벗은 미남과 조우하는 건 모든 여성의 꿈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런 여성 들어 본 적 없다만.”
미하엘의 너스레에 루카스가 기막혀했다.
리네트는 한술 더 떴다.
“어머나, 그런 이야기를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러나 모든 여성이 가슴속 깊이 숨겨 둔 욕망인 거지.”
“그만해…….”
루카스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피식피식 웃으며 샘으로 다가왔다.
샘은 아주 잘 정비돼 있었다. 샘에 발만 담그고 싶은 사람을 위해 앉을 곳이 마련돼 있었고, 두 여자 다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갔다.
“웬일이야? 여기까지.”
“뭐, 사실 미하엘과 따로 이야기할 만한 틈이 별로 없어서 찾아갔는데-”
미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늦은 밤에 아가씨가 남자도 아니고 남장 여자를 찾아오다니. 낭만이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벌거벗은 미남을 찾아 여행을 떠나왔죠.”
루카스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너스레를 떨고는 있지만 아마 둘 다 이래저래 영주의 귀가 있을 만한 성보다는 차라리 호위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샘이 나을 것 같아 찾아온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애매한 표정으로 가운을 여몄다.
“미리 이야기를 좀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리 이야기하면 벌거벗은 미남을 구경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거 안타깝군.”
루카스가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황성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교육받은 게 ‘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언제나 갖출 것.’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가운을 걸친 채 있었다는 이야기다. 리네트는 루카스의 바로 옆에 놓인 검을 보고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뭐가 외로워?”
“음, 혼자 들어와 있으니 영 심심해서.”
그리고 남자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심심하다고 느낀 게 사치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은.”
“이런, 황자님. 제국의 미혼 여성들 중 가장 고귀한 이가 둘이나 왔다고요. 감사해하진 못할망정.”
미하엘이 투덜거렸다.
멀리 있는 호위 기사들 때문에 여전히 남장을 한 채였으나, 샘에 담근 발을 보니 확실히 그 크기가 작았다. 루카스는 새삼 그녀가 여자라는 걸 실감했다.
그때, 리네트가 발을 더 깊이 담그기 위해 드레스와 긴 드로워즈를 걷자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눈알을 다른 쪽으로 굴렸다.
“그래서, 고민을 좀 해 봤는데.”
“……응?”
때문에 그는 리네트의 말에 좀 늦게 반응했다.
“미하엘이 텡스미스로, 우리가 빅타로 가는 게 좋겠어.”
“처음 했던 말과는 반대가 아닌가?”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 사람은 함께 북부로 출발하면서 어느 정도는 갈라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결론을 냈다.
보수적인 텡스미스에는 루카스가, 실리를 중요시하는 빅타에는 미하엘이.
그러나 리네트는 전혀 반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루카스가 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어디로 올지 궁금해하겠지. 저녁에 했던 이야기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텐데, 허를 찔러 보는 게 어떨까 싶어.”
“통할까?”
“뻔한 것보단 낫지. 그리고, 난 사실 빅타야말로 오히려 당신이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어.”
리네트의 계산은 간단했다.
프라임 공작가는 제국 건국 때부터 명맥을 이어 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미하엘이 간다 해도 텡스미스의 영주는 크게 반길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꽤 매혹적인 인맥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빅타는…….
“빅타는 북부에서도 소외됐다는 인상이 강하지. 미하엘이 가는 것보다 당신이 가는 쪽이 효과는 더 좋아. 미하엘이 가서 영지 경영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돕는 것도 괜찮겠지만, 당신이 중앙 진출을 돕겠다고 약속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흠.”
“빅타의 준귀족들은 북부에 불만이 많아. 당신이 중앙에 길을 만들어 줄 거라는 인상이 있다면, 충분히 당신에게 사업권을 내줄 거야.”
리네트의 말이 맞았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엘,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 혼자 가니 좀 외로울 것 같아서 전하의 약혼녀와 함께해 볼까 생각했지만.”
미하엘이 발을 담근 채 어깨를 으쓱했다.
“외로워하는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하하.”
루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도 내 생각을 해 주니 다행이라고 할지.”
“뭐, 미래의 황태자 전하에게 미리 아부해 둔다고 하죠. 그럼.”
말을 마친 미하엘이 잽싸게 발을 빼 수건으로 닦은 후 슬리퍼를 신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벌써 가는 건가?”
“용건 끝났는데 연인 사이에서 물장구칠 정도로 나쁜 사람 아닙니다, 저. 그럼 전 자러 갑니다! 안녕!”
쾌활하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둘만 남았다.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리네트를 쳐다봤다.
리네트는 멍하니 프라임이 사라진 쪽을 보고 있다가, 문득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자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여서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리네트만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남아서 물장구쳐도 되는데.”
리네트는 머쓱하게 자신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나는 지금 미하엘에게 고마운걸.”
루카스는 빙그레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네트의 옆에 앉았다. 푹 젖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그녀가 젖을까 봐 떨어져 앉은 채였다.
재미있는 건, 그가 거리를 벌려 앉는 것을 달가워할 거라 생각했던 리네트가 오히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떨어져 앉아?”
루카스는 물이 튀지 않도록 그랬다고 설명하려다 그냥 빙그레 웃었다. 구구절절 설명해 가며 그녀의 의심을 씻어 주는 것보다는 적당히 모른 척하는 쪽이 효과가 좋았다. 리네트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비단 정치적인 생각뿐 아니라, 그녀는 언제나 침묵 사이에 생각을 끼워 넣었다. 그러다 보면 루카스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더 생각이 앞서가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면…….
“뭘 봐.”
뭘 생각하기에 떨어져 앉은 것만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거지? 루카스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리네트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루카스가 떨어져 앉은 의도에 관해 굉장히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벗은 미남 구경하러 왔다고 말한 주제에.
리네트 카멜리아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겁쟁이가 됐다. 대부분의 경우 루카스의 앞에서다.
루카스는 이제 대강 리네트의 성향을 파악한 참이었다. 도박장에서도, 황성에서도…… 리네트는 항상 과감하고 용감했지만, 꼭 자신과 둘이 남으면 겁을 먹었다.
그건 그녀가 아마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루카스는 생각했다.
제가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나가는 미남자에게 ‘나랑 잘래?’ 같은 소리를 해 댔으나, 막상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여지없이 한발 물러선다. 귀엽기 그지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근 그녀가 부쩍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면 빠르게 시선을 피한다. 하지만 루카스가 쳐다보지 않을 때는 또다시 그를 뚫어져라 관찰한다.
마치 뭔가를 분해하듯이 뜯어보고, 가늠한다.
루카스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아마 리네트 스스로는 잘 모르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알려 주면 되지 않을까.
황자는 그래서 젖은 머리카락을 괜히 쓸어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제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느끼하게 왜 그래?”
이것 보라지. 먼저 지레 놀라 묻잖아. 루카스는 빙글빙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세상에는 얼굴을 보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루카스는 그녀가 제 얼굴만 좋아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알 게 뭐람. 어떤 부분이든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거 아니겠어?
루카스는 언제나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다가오는 자들을 내치지 않았다. 실제로 그를 따르는 젊은 귀족 중에는 그의 겉모습에 매료된 자들도 많았다. 이전에도 루카스는 그런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리네트에게 빠진 후에는, 자신에게 그녀를 매료시킬 만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만으로 제 외모에 감사를 보내곤 했다.
사랑이라는 건 어쨌든 호감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으니.
“왜 그러겠어요?”
“뭐야, 존댓말 하지 마. 갑자기.”
루카스는 한 뼘 더 다가앉았다. 이쯤 되면 물이 튀는 것은 별문제가 안 된다. 분위기라는 것은 잡혔을 때 누려야 한다.
그녀는 민망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리네트가 조금이라도 몸을 뺐다면 루카스도 굳이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을 테지만.
“이왕 프라임 공작이 자리를 만들어 줬으니, 성의를 봐서라도 오붓하게 연인과의 시간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벌거벗은 미남은 아니라도, 젖은 미남 정도면 괜찮지 않아?”
“우와, 자기 입으로 미남이래…….”
“아니야?”
리네트가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정말 노골적으로 집적댄다…….”
“얘기했잖아.”
루카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대놓고 입 맞출 만한 각도를 재 보는 것이었다.
“그게 싫으면 내 청혼 받지 말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싫어?”
이럴 때는 웃지 않는 쪽이 나았다. 루카스는 그녀에게 장난삼아 입 맞춘다는 인상은 주기 싫었다. 해서 진지하게 그녀의 갈색 눈을 들여다봤다. 리네트가 그런 눈에 약하다는 것도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네트가 내쉰 숨이 루카스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싫다고는 안 했-”
그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루카스의 입술이 리네트의 뺨에 닿았다.
쪽.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루카스가 움직이는 통에 그의 금색 머리카락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리네트의 가운 앞섶에 투두둑 떨어졌다. 물 얼룩이 묘한 선을 그렸다. 리네트의 얼굴은 이제 불이 난 것처럼 새빨개졌다.
루카스는 다시 한번 볼에 입 맞췄다. 이제 그의 허벅지가 리네트의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루카스의 젖은 가운은 리네트의 드레스를 빠르게 적셨다.
물론 리네트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아름다운 황자가 그녀가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입맞춤을 퍼붓고 있었으므로.
루카스는 리네트의 뺨에, 턱에, 귓가에, 감은 눈두덩에, 코끝에.
그리고 입술에 입 맞췄다.
신년회의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루카스는 한쪽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리네트의 가느다란 목이 뒤로 기울었다. 루카스의 팔 안에 가득 들어온 여인의 옷이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젖어 갔다.
그녀는 움찔하다가 루카스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위험했다.
정말로 위험해지기 전에 루카스는 깔끔하게 입술을 뗐다. 물론 그 전에 그녀의 뺨에 한 번 더 입 맞추는 건 잊지 않았다.
쪽, 소리에 리네트가 화들짝 놀라서 이쪽을 지그시 째려봤다.
“너…….”
“싫다고는 안 했지만, 좋다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려는 거지?”
루카스가 그녀를 안은 채로 웃었다. 리네트는 그 얼굴을 아주 잠깐 넋 놓고 쳐다보다가 금세 정신 차렸다.
“그걸 알면서!”
“그러면 좋아지게 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 아니야?”
“아니거든!”
루카스가 손을 놨다. 리네트는 괜히 단단히 매여 있는 가운을 더 꼭 여미며 루카스에게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틈을 주면 안 되겠어.”
“음, 항상 생각하는 건데 너는 너무 틈이 없어서 탈 아닐까?”
“어디가?”
“그야-”
루카스는 리네트 쪽으로 다시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기껏 쉬어야 할 밤에 여기까지 와서 빅타니 어디니, 갈라져서 가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고.”
“…….”
“저녁 먹고 일이 많았잖아. 곯아떨어져도 모자랄 판에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냐?”
그 말에 리네트의 표정이 반쯤 한심하다는 듯 바뀌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너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고 발을 샘에서 빼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천으로 발을 닦으려는데, 루카스가 손을 뻗어 천을 빼앗았다.
뭐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천으로 그녀의 발을 감쌌다.
“내가 할-”
“벌거벗은 미남 관광 대신, 미남의 추행을 받으시지요.”
“뭐라고?”
루카스는 대답 없이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그녀의 발을 눌렀다.
“아야!”
“살살 할까요, 내 사랑?”
“하지 마.”
“저 때문에 일하고 계신 분께 제가 이런 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실 루카스는 그녀의 발목이 제대로 아물지 않은 것이 내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북쪽으로 출발하며 그녀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부목을 풀었으나, 아직도 가끔 절룩거렸다.
지금도 아프긴 했는지, 루카스가 어떤 지점을 누르자 리네트는 악, 하고 낮게 비명을 질렀다.
“알아.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고, 가능성들을 따지고.”
“…….”
“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루카스는 나직하게 말하며 리네트의 다리를 제 무릎 위로 올렸다.
리네트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긴 했지만 한층 순순해졌다. 시선은 자신의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프라임 공작이 기껏 쉬라고 널 데려다 줬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자리를 비워 준 거잖아.”
“……당신들 짰어?”
“아닌데.”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리네트의 발목을 쥐어 눌렀다.
“프라임 공작이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냥 차라도 마시면서 마저 이야기 좀 하자고 찾아가니까, 낭만이 없다면서 내 목덜미를 붙잡고…….”
리네트는 이런저런 계획을 미하엘과 따로 더 이야기할 참이었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런 그녀의 말은 다 듣지도 않고, 그녀를 붙들고 루카스가 쉬고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나도 일벌레란 소리를 듣지만 당신은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벌거벗은 미남을 보러 가자는 소리라도 하러 온 줄 알았더니만!”
같은 소리를 해 가면서.
그리고 루카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프라임 공작…… 정말 첫인상하고는 너무 다르군.”
“여러 가지 의미로 한결같은 사람이야…….”
“하지만 너도 그 벌거벗은 미남이 궁금하긴 했던 거잖아?”
루카스의 짓궂은 말에 리네트가 눈을 흘겼다.
“벗지도 않았으면서.”
“음, 벗을까?”
황자가 가운을 들썩였다. 반사적으로 리네트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마!”
“왜, 벗은 미남 보고 싶다며.”
“비자발적으로 벗은 미남이 보고 싶은 거지, 이런 노출증 같은 대사를 기대한 거 아니야!”
“뭐야, 강제로 하는 게 취향이야?”
“아니라고! 왜 그렇게 되는데!”
오페세레의 숲에 작은 비명이 메아리쳤다.
호위 기사들은 생각했다. 수도에 돌아가면 ‘리시스트의 아침’에 첫째 황자와 약혼녀의 이상한 취향을 제보해야겠다고.
* * *
미하엘은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리네트의 방을 방문했다가,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그녀를 마주했다.
“왜 그렇게 봅니까?”
“당신 때문이에요…….”
아침부터 원한의 말을 주워섬기는 여인에게 어젯밤 대강 어떤 일이 있었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미하엘은 자신과 동행한 연인이 평범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등 좀 떠밀어 준 것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거 알아보려고 아침 식사 들고 찾아왔어요?”
“뭐, 남의 침대에 누워 있는 벌거벗은 미남 구경도 나쁘진 않으니까.”
성적인 뉘앙스가 다분한 말에 리네트가 베개를 집어 들고 자신의 얼굴을 푹 묻었다.
“이 책 분명히 동화였는데…… 왜 갈수록 장르가 달라져…….”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개의치 않았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됐고, 아침 들어요.”
꿀과 견과류를 올린 빵을 내밀며 웃는 미하엘을 멍하니 쳐다보던 리네트가 부스스 일어났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침 어쩌구 하는 말도 미하엘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예요? 오늘은 푹 쉬는 거 아니었어요?”
“당신이 너무 늦게 일어난 겁니다.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미하엘이 찬물을 건네자, 리네트는 습관적으로 찬물에 은침을 넣어 휘휘 젓고 확인했다.
“와 너무하네.”
미하엘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물을 쭉 마셨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너무하긴 뭘 너무해요. 습격을 그렇게 받아 놓고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게 더 멍청하지.”
“그건 맞아요. 하지만 이 빵은 내가 먹어 봤으니 마음 놓고 들어요.”
“그러고 보니…….”
리네트가 눈을 껌벅였다.
“로가나가 없네?”
“맞아요. 나도 그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미하엘이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당신 시녀가 못 들어오게 방해할 줄 알았는데, 당신 방까지 오는데 아무도 가로막지 않던데요?”
“그래요? 얘가 어딜 갔지?”
리네트가 미하엘이 먹던 빵을 빼앗아 입에 넣으며 사방을 둘러봤다.
식사를 트롤리에 받쳐 미하엘을 따라온 성의 시녀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희한하네…… 아.”
그때였다.
문을 열고 로가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식사 중인 두 사람을 보더니 황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죄송해요! 어제 늦게 잠드셔서 아직 주무실 줄 알았는데!”
“아냐, 괜찮아. 미하엘이 식사도 챙겨 줬어. 그런데 어디 다녀온 거야?”
리네트는 그렇게 말하며 미하엘이 새로 집어 먹은 빵을 또다시 그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빼앗아 우물거렸다.
그에 미하엘이 리네트를 흘겨봤다.
“제가 무슨 갱도 종달새입니까?”
동부 광산 지역 광부들은 갱도에서 유해 가스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종달새를 꼭 한 마리씩 데리고 들어갔다.
즉, ‘내가 네 기미 상궁이냐.’와 비슷한 말이었다.
리네트는 미하엘의 말을 무시하고 로가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게, 잠시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해서…….”
“너를? 누가?”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 그…… 어제 아가씨께서 구해 주셨던 부인 있잖아요.”
“아가씨가 구하다니, 정확히는 기사들이 구한 거 아닙니까?”
미하엘이 딴죽을 걸었지만 로가나는 당차게 대답했다.
“아가씨도 한몫하셨죠!”
“예, 예.”
미하엘 또한 이 갈색 머리의 시녀가 리네트에게 유난한 충성심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하엘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사과 잼이 얹힌 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고, 곧 리네트에게 파이를 빼앗기고는 코를 찡그렸다.
“아무튼 그 부인께서 사람을 보냈더라고요. 여쭤볼 게 있으시다고.”
“사람을? 우리에게?”
“정확히는 제게요.”
리네트가 사과 잼 파이를 우물거리다가 미하엘을 쳐다봤다.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없이 로가나를 재촉했다.
로가나는 뺨을 긁으며 마저 답했다.
“고향이 어디냐, 나이는 스무 살이 맞느냐 같은 걸 물어보셨어요.”
“왜?”
“아는 분이 어릴 적 잃어버린 딸이 있대요. 근데 그분이랑 제가 너무 닮아서 혹시나 하고 여쭤보셨다고.”
“어머, 그래?”
리네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로가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사실은 네가 그 딸 아냐?”
“아닐걸요. 딸을 잃어버린 분은 귀족이시래요.”
부인은 자신의 하녀를 통해 정말이지 로가나에게 온갖 것을 샅샅이 물어본 모양이었다. 고향은 어디냐, 나이는 몇 살이냐부터 해서, 부모님 성함을 아느냐 등등.
그러나 로가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어릴 적 기억이 있을 때부터 이미 거리의 소매치기였어요. 귀족들이 아이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대부분 납치죠. 몸값을 받기 위해서요. 하지만 몸값을 받아야 하는 아이를 누가 도둑 길드에서 소매치기로 쓰겠어요?”
“그건 그렇지.”
리네트가 답하자 로가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저는 수도의 도둑 길드에 있었어요. 북부에서 몸값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를 수도까지 데리고 올 이유가 없죠. 도둑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카멜리아 양, 당신 뭐 하는 사람이길래 도둑 길드 출신을 하녀로 쓰고 있는 겁니까…….”
옆에서 미하엘이 우유를 마시며 신음했다. 옆에 있던 오페세레의 시녀도 조금 식겁한 눈치였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
“그래서, 부인께는 아니라고 말씀드렸니?”
“네. 하녀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로가나는 익숙하게 리네트와 미하엘 앞에 차려진 음식에서 고기를 들어 얇게 저미기 시작했다. 빵 위에 고기를 올리고 채소를 갈아 절인 것을 뿌린 후, 은침을 찔러 넣는 행동은 매우 민첩했다.
미하엘은 그 빵을 들어 올려 한입 먹고 말했다.
“리네트 양, 근데 어제는 왜 늦게 잤습니까?”
“네?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다가-”
“음,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네. 재미없어라.”
“그러니까 자꾸 장르 바꾸지 말라고요.”
리네트는 손을 뻗어 미하엘이 입에 넣던 빵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졸지에 입안 가득 빵을 물게 된 미하엘이 읍읍거리며 항의하려 했으나, 음식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한참을 우물거려 겨우 빵을 목으로 넘긴 미하엘이 코를 찡그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자 전하도 어릴 적에 몸값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아는 게 뭡니까?”
“전 잘 몰라요, 그때 일은.”
사실이었다. 그건 리네트가 빙의하기도 전의 일이다. 게다가 그때의 이야기는 루카스가 돌아온 이후로는 거의 없던 일처럼 취급돼서 귀족들 사이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루카스는 납치가 아니었잖아요?”
미하엘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루카스 황자 전하만 말에 태우고 숲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이 황제의 사냥터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황자 전하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전하에게 선물로 내리기 위해 만들었던 사냥터죠. 당연히 맹수 같은 건 진작에 씨를 말려 둔 곳이었습니다.”
“아하?”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말을 달려 숲으로 들어간 때에 일어난 맹수의 습격이라- 너무 타이밍이 좋았죠. 모두들 납치를 의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로 십 년 동안 황자의 몸값을 받으려 한 자들은 없었습니다.”
미하엘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카멜리아 공작가쯤 되는 대귀족 가문인데 그때 안 뒤집혔습니까?”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카멜리아 공작가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아시면서.”
“음. 저희 가문은 뒤집혔습니다.”
공작은 팔짱을 끼었다.
“황자의 납치로 득을 보는 가문이 제국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희 영지도 그때 엄청나게 시끄러웠죠. 수도에서 온 병사들이 잔뜩 뒤집어 놨거든요.”
“어라…….”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로가나가 눈을 깜박였다.
“부인도 그런 비슷한 소리를 하셨어요.”
“그래?”
“네. 어릴 적 딸을 잃은 이유가 동물의 습격 때문이었다고요.”
“호오.”
미하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하지만!”
리네트가 손뼉을 짝 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이 없죠!”
“그건 그래요. 나만 해도 오늘 점심 먹고 떠나야 하고.”
“내일 떠나는 거 아니었어요?”
미하엘이 눈을 찡긋했다.
“텡스미스로 가는 여정을 따져 보니, 중간에 산을 넘는 데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해요. 오늘 출발하는 게 낫겠더군요.”
“엑.”
“알아요. 제가 그립겠죠? 막 보고 싶겠죠?”
미하엘은 너스레를 떨었다. 리네트는 한숨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대관절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동안 권위 있는 공작님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식사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미하엘의 끝없는 농담에 리네트는 쉴 새 없이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 * *
빅타까지는 그리 긴 여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빅타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리네트는 노튼이 카칭에서 한 달 넘게 고전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됐다.
빅타에 도착한 첫날, 루카스는 빅타의 영주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다 같이 모여 철도 사업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마력석 사고는 전 지역에서의 큰 이슈다. 북부에서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이라고 마력석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대형 사고를 이유로 황자가 사업권 유치를 위해 방문했는데도, 빅타의 영주들은 콧대를 세웠다.
이틀 후, 빅타의 영주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했다.
한데 딱 거기까지였다.
호출만 무시하지 않을 뿐, 사업권 이야기만 하면 모두 딴소리를 했다.
“철도가 놓이면 그 중간에 있는 영지민들의 집은 어떻게 합니까?”
“중간 기착지로 선정된다 해도 저희는 손해입니다.”
“애초에 자치권을 주셔 놓고 이런 식으로 또 일방적인 협조를 구하면…….”
자신들 할 말만 늘어놓는 영주들에게 루카스는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회담은 두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노튼이 온갖 연회에 참석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회담에 불러 앉혀 봐야 모두들 자기 이권 핑계를 대며 제국과 연관되지 않고 싶어 했다.
결국 루카스는 타깃을 바꿨다.
빅타 지역을 대표하는 대영주이자, 북부의 탄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는 베케이아 남작을 연회에서 따로 만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베케이아 남작은 루카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북부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고 다 듣지 않습니다. 제 말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빅타의 영주 연합은 자수성가한 준귀족들이 대부분입니다. 작위 덕분에 사업을 할 수 있으니 제국에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 최소한의 의리는 회담 참가인 것이고?”
“그렇지요.”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남자인 그는 루카스 옆에 서 있는 리네트를 보고 싱긋 웃은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빅타의 영주들도 황자 전하께서 약혼녀까지 데리고 온 성의는 대단히 좋게 보고 있답니다. 그러니 그 무거운 엉덩이들을 들어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평소에는 제가 불러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답니다.”
루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영지들마다 제각각 요구 조건이 다르니 어찌하겠소? 원하는 중간 기착지의 위치가 다 달라서 그것을 모두 연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그 가운데에서 최고의 협의점을 찾는 것이 황자 전하의 일 아니겠습니까?”
베케이아 남작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시건방진 조언에도 불구하고, 무엄하다는 호통은커녕 넋두리나 하시는 전하가 놀랍긴 합니다만.”
베케이아 남작은 그런 루카스가 퍽 기꺼운 듯했다.
“수도에서 황자 전하께서 오셨다 해서 자존심이나 세우는 유형이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시는 남작님도 보통 분은 아닌데요.”
리네트가 쏘아붙이자 베케이아 남작이 애매하게 웃었다.
“카칭에서의 소문은 여기에도 이미 돌았으니까요.”
카칭. 노튼을 말하는 것이었다.
루카스와 리네트가 시선을 교환했다.
“노튼 황자는 어떻다던가요?”
“아, 두 분은 여정 때문에 카칭의 소문을 듣지 못하셨겠군요.”
베케이아 남작이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의 미소와는 다른 자조적인 표정이었다.
“아리아나 카칭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글쎄요. 알레한드로 카칭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양딸입니다.”
뒤베케이아 남작이 아리아나 카칭에 대해 설명하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아리아나 카칭이 노튼 황자와 무슨 상관이죠?”
“노튼 황자님은 이미 약혼녀가 있으시지요?”
베케이아 남작의 말투는 사뭇 냉소적이었다.
리네트는 ‘약혼녀’라는 단어에서 불길함을 느꼈지만 애써 명랑하게 답했다.
“예. 제 친구이기도 하죠. 알렉사 레미시어. 아름답고 현명해 그녀와 친구인 것이 제 큰 자랑이랍니다.”
리네트의 말에 남작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수도의 분들은 제 생각과는 퍽 다른가 봅니다. 황자 두 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
“뭐, 여자들의 우정은 더 심오하다는 것이지.”
루카스가 말을 잘랐다. 남작은 그제야 자신이 옆길로 샐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도로 본 화제로 돌아갔다.
“어쨌든 그 레미시어 양과 약혼한 지 오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으신 듯하더군요.”
“무슨 뜻이죠?”
“노튼 황자가 노골적으로 아리아나 카칭에게 접근하고 있거든요.”
“…….”
남작의 말뜻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남작은 노튼 황자가 알렉사의 자리를 빌미로 아리아나를 유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카칭에서는 한층 더 수도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북부 영지들은 혼맥으로 굳건히 이어진 곳입니다. 아리아나 카칭은 원래대로라면 데릴사위를 들여 카칭의 주인이 될 예정인데, 그런 것을 알면서도 노튼 황자가 그녀에게 다분히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작의 이야기를 들으며 리네트는 기가 막혔다.
노튼! 알렉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문제는 노튼 황자가 알레한드로 카칭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리아나를 취하고, 이후에는 어찌할 것인가입니다.”
“그녀 또한 알렉사 레미시어처럼…….”
“버려지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아무도 못 하고 있죠. 아리아나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지만.”
남작은 고개를 기울이며 야유했다.
* * *
“노튼, 그 미친놈이!”
방에 도착한 리네트는 북부에 온 이후로 가장 열렬히 화를 표출했다.
알렉사가 그간 노튼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노튼은 그런 알렉사의 노력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그녀의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내주네, 마네 하며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혼맥으로 밀어붙일 일이 있고 아닐 일이 있지!”
“동감이야.”
루카스가 씁쓸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동시에 노튼이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드는군.”
“당신 동생, 그 정도로 최악이야!?”
“유감스럽게도.”
황자는 리네트에게 배정된 방의 응접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길게 이어진 연회로 인해 지친 탓이었다. 목에 두르고 있던 크라바트는 다 풀어헤쳤고, 재킷도 바닥에 집어 던져 놨다.
로가나가 주섬주섬 옷들을 주워 루카스 옆에 쌓아 놓으니 옷 무덤이 동그랗게 하나 생겼다.
“카칭의 후계자를 꾀어낸 다음, 사업권을 따내는 거야. 그다음은 제 알 바 아니라는 거겠지. 레미시어 양을 내치고 아리아나라는 여자를 황자비 후보로 놔두든, 아니면 그대로 그 여인을 내치든.”
“북부의 보복이 무섭지 않은 건가?”
“보복이라고 해 봐야 이미 놔 버린 철도를 어떻게 하겠어? 한번 철도를 놓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영주들 마음대로 안 돼. 운송 수단이라는 건 그런 거야.”
루카스는 철도가 한번 놓인 후에는 영주들이 뭘 어찌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노튼이라고 이걸 모를 리 없다.
일단은 사업권을 따내고 보자는 심산일 것이다.
“중간 과정이 어떻든 북부에서는 욕먹어도 나머지 지역에서는 욕을 먹지 않을 거야. 어쨌든 북부의 석탄 공급이 돼서 철도가 정상화된다면, 그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이들이 대부분이지.”
“알렉사와 북부의 불쌍한 아가씨가 황자에게 버림받든 말든?”
리네트가 화를 내며 루카스가 누운 소파 옆에서 쾅, 발을 굴렀다.
그에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오, 내 사랑.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을 테니 염려 마.”
“지금 농담이 나와?”
“농담이라도 하게 해 주라. 나 사흘 동안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루카스는 소파에 누운 그대로 리네트를 끌어당겨 그녀의 드레스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가 칭얼거리게 놔두지 않았다.
“버리니, 마니 하는 소리를 그렇게 여상하게 농담이랍시고 말할 거야?”
“그럼?”
어쩐지 목소리가 심상찮아 루카스는 드레스 자락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화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가볍게 말하는 걸 보니 너도 꼭 노튼 놈 같아서.”
“……이런.”
그제야 루카스는 상반신을 세워 일어났다.
리네트는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단지 알렉사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루카스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 * *
리네트와 루카스의 만남은 모두 거래 덕분이었다. 리네트는 그에게 제 능력을 제공했고, 루카스는 그 대가로 제게 안식처와 작위를 건네기로 했다. 상호 고용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알렉사는 아니었다. 리네트와 같이 황자와 약혼한 여인이지만, 그녀와 노튼의 관계는 리네트와 루카스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알렉사는 어린 시절 노튼과 약혼했다. 낸터킷 황후는 어린 귀족 아가씨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알렉사를 노튼과 짝지어 주었다.
알렉사는 잘생기고 멋진 노튼을 보고 반했으나, 노튼은 알렉사를 괜찮은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튼에게 알렉사의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었지만, 아리아나와의 일만 봐도 그가 알렉사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실제로 리네트와 이야기할 때면 반짝반짝 빛나는 알렉사의 얼굴은 노튼의 이야기를 할 때만 유독 어두워졌다.
리네트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노튼과 찢어 놓으려 수작을 부린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 관해 알렉사에게 언젠가는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당장 신경 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알렉사는 지금 리네트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루카스는 그것에 관해 농담을 하고 있었다. 리네트는 루카스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화가 나는 건 꼭 알렉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네트는 ‘버린다.’는 말을 쓰는 루카스를 보고 머리가 차가워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루카스가 리네트를 버릴 수 있는 처지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리네트에게 열과 성을 다해 구혼하고 있었다. 상호 고용 관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리네트가 그를 버리면 버렸지, 그가 리네트를 버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리네트는 속이 안 좋아졌다. 화가 났다.
왜일까.
‘왜긴 왜겠어.’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루카스가 눈에 들어왔다. 예쁜 바다색 눈은 차갑게 굳은 리네트의 기분만을 살폈다.
최근 들어 저 얼굴이 지독히도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리고 여지없이 지금도 그랬다.
루카스의 영준한 얼굴을 들여다 본 순간, 리네트는 유행이 백만 년은 지난 막장 드라마 대사를 읊을 뻔했다.
“나 너 좋아하냐?”
그리고 그다음 대사는 어땠더라. 기억도 안 났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결국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알고 있다.
리네트 역시, 그 주인공들처럼 어느새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루카스가 버리네, 마네 하는 소리를 지껄인 것에 화를 낸 것도 그래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약점이다. 그가 자신의 사랑을 알면 자신을 쥐고 흔들까 봐 두려웠다.
물론 자신이 감정을 자각한 것, 그리고 그게 약점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리네트는 고백을 입에 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튕기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사실 얼마나 간단한가.
루카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다음엔 결혼한 후 영원히 이혼하지 않는다. 그러면 세계도 구할 수 있고, 마법사에게 소원을 이뤄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루카스는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꿀 빠는 인생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리네트는 사랑을 자각했음에도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부유하듯 현실감이 없던 때에서 이 세계로 끌려 내려진 지 얼마 안 됐다. 그래서 더 절실했다.
부유하듯 대충 떠다니며 막사는 인생이라는 건 언뜻 들으면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십 년 가까이 살아 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지.
찌라시를 만들고, 마법을 부리는 새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남의 거짓말을 구별해 내고. 자신이 했던 일들은 남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자신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래서 그녀는 편안히 남이 만들어 준 인생을 걸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는 들으면 그녀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리네트는 적어도 제 인생이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길 바랐다.
루카스를 도와서 그를 황태자로 만들고, 황제로 만들고, 그 옆에 앉아 누리는 것들이 끝내 그녀가 쟁취한 결과물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북부까지 따라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그 후였으면 했다.
리네트는 답답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
“넵.”
남자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에 리네트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욕먹을 소리 한 건 귀신같이 알아서 존댓말부터 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것 보라지. 얼굴은 저렇게 예뻐 가지고, 마치 키우는 개처럼 구는 모양새가 용서를 안 할 수가 없다.
“너 내가 착해서 용서해 주는 줄 알아.”
황자의 장점은 어쨌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리네트가 화가 난 걸 알아차린 그는 리네트의 드레스 자락에 이마를 댔다.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루카스가 과장된 자세로 엎드렸다. 남들이 보면 두 눈을 비비며 의심할 만한 광경이었다.
“주제넘었습니다!”
“너 뭐 해?”
“용서해 주시면 말씀드릴게요!”
리네트는 당황하며 얼른 일어나라고 몇 번이나 을러멘 뒤에야 루카스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카스가 방금 펼친 스킬이, 그가 레벤튼의 문지기로 일할 때 진상 떠는 귀족들에게 부리곤 했던 기술이라는 걸 듣고 나서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 * *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겨우 두 사람은 진정하고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대관절, 내가 진상이냐?”
“아니, 그건 아닌데 거기서 더 화나면 진상 비슷한 게 될 거 같아서……?”
“진짜 진상이 뭔지 보여 줘?”
“잘못했습니다……?”
리네트를 잘 아는 로가나는 그녀에게는 차가운 차를, 루카스에게는 뜨거운 차를 내왔다. 루카스는 별생각 없이 차를 마시다가 혀를 델 뻔했다. 로가나가 보란 듯이 혀를 내밀었다.
“만약에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두 사람은 나란히 창문가에 앉은 차였다. 북부의 겨울은 추웠고, 베케이아 남작의 성벽은 아주 두꺼웠다. 덕분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리 넓진 않았지만 바깥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리네트의 질문에 루카스가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내가 너를 단호히 거절한 후에도 계속 집적댈 건지 물어보는 거야.”
황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보는 거야…….”
“아니야?”
리네트가 묻자, 황자는 나직하게 웃고 제 옆에 앉은 그녀를 들여다봤다.
“내가 집적댈 거라곤 했지만, 그건 네가 받아 줄 때의 이야기지.”
“…….”
“네가 나를 거절한다면 더 이상은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렇구나.”
리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카스를 바라봤다.
“내 안에서 네 평가가 그렇게 높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형편없진 않거든……?”
“그건 정말 다행이로군.”
루카스가 웃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네가 날 거절한 후에, 파혼하자 한다고 해도 막지 않을게. 원래 사랑이라는 건 거절한 쪽이 한층 더 속상해지는 법이지.”
로가나가 둘러 준 숄에 목을 묻은 리네트는 그의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됐다. 거절한 후. 그런 건 사실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는 아무래도 그녀에게 거절한 후의 관계까지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황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상황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네게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그래…….”
“아무래도 내가 지금까지 내 투정을 끊임없이 받아 준 약혼녀에게 지나치게 응석을 부리는 바람에 네 걱정을 산 것 같군.”
황자는 창가에 턱을 괴고 리네트를 쳐다봤다.
찬 바람이 조금씩 들이쳤지만 리네트는 머리에 오른 열을 식히고 싶었기에 굳이 창문을 닫지 않았다.
덕분에 루카스의 금색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흩날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루카스의 그림자도 흔들렸다.
“물론 네가 내 사랑을 받아 준다면 참 좋겠지만, 많은 걸 바라진 않을게.”
“…….”
“받아 준 후에도 네가 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남자는 한쪽 눈으로 그녀에게 윙크했다.
“사랑이라는 건 언젠가 식기 마련이잖아. 너는 나한테 10년 안에 황제를 만들어 줄 테니, 그 후 이혼하자고 했지. 그 말대로라면 내게 10년은 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그 시간은 사랑의 유효 기간치고는 너무 길지.”
“긴가?”
“음. 적어도 내가 봐 온 사람들 중에서는 십 년을 좋아 죽는 사람들은 없더라고.”
리네트는 조금 심란해졌다. 지금은 도무지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타이밍이 아니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이제 슬슬 어느 정도는 제 입장을 정리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리네트가 막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뭐, 그런 의미에서 이혼은 나쁘지 않은 선택 같기도 해.”
“……어?”
리네트가 눈을 껌벅이자 루카스가 씩 웃었다.
“아예 끝이 있는 관계인 쪽이 훨씬 서로에게 충실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 렇겠지.”
리네트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슬며시 기분이 나빠졌다. 화가 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섭섭했다.
그때, 백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머릿속으로 세상 비극의 주인공 다 하고 있네.’
야, 넌 나타나도 이럴 때 나타나냐. 리네트가 짜증스럽게 생각하자 목소리가 을러멨다.
‘내가 왜 생겨났는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거짓말 진짜 잘했거든.’
뭐라는 거야? 리네트는 백안에게 다시 물으려 했으나 루카스는 리네트가 백안과 대화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뭐, 하지만 나는 가끔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기도 해.”
“…….”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동화 있잖아.”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어쨌든 지금은 너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놀고 싶어.”
“……놀고…….”
“그래. 애인은 아니니까, 내 사랑.”
루카스가 리네트의 손등을 청한 뒤 그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친애의 감정 외에는 어떤 것도 실리지 않은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자. 어릴 적 친구에게도 그리 많이 해 보지 않은 말을 남자는 수더분하게 내뱉은 뒤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시 과장된 자세로 숙여 인사했다.
“다시 한번, 화나게 해서 미안했어.”
로가나가 루카스의 재킷을 챙겨 건넸다. 남자는 문이 닫히기 전에 웃어 보였다.
“잘 자.”
* * *
결과적으로 빅타에서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빅타의 영주들은 실리를 중시하는 만큼, 카칭에서처럼 오랜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일주일 동안의 입씨름 끝에 절반의 성공을 안겨 준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간 뒤, 저녁 만찬에서 베케이아 남작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야, 축하드립니다.”
“이게 축하받을 일이오?”
루카스가 허탈하다는 듯이 물었다. 베케이아 남작은 ‘물론이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실 영주들이 이 정도로 양보할 줄은 몰랐거든요.”
‘양보라니, 양보 다 죽었네.’
리네트가 속으로 생각하며 포크를 놀렸다. 옆에서 채소를 놔주던 시녀가 빠르게 비는 접시에 놀라며 고기 한 점을 더 올려 주었다.
빅타는 석탄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다. 빅타의 영주들은 어쨌든 철도가 놓임으로써 석탄의 판로가 뚫린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역시 북부 지역의 암묵적인 룰을 깰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어쨌든 결국은 카칭으로 가셔야 하겠군요.”
베케이아 남작이 술을 권하며 말했다.
귀라르델 산맥의 차가운 동굴에서 오랫동안 묵혀 만든 술이라더니, 과연 맛이 좋았다. 리네트는 과일주를 홀짝이며 영주들의 요구 사항에 대해 생각했다.
빅타의 영주들은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인 카칭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서, 베케이아 남작은 빅타 지역의 영주들을 대표해 서신을 작성했다. 알레한드로 카칭에게 ‘루카스 황자가 주도하는 철도 사업권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수조권 카드는 조금도 쓰지 않고 낸 성과로는 대단했지만…… 리네트는 고민했다.
노튼이 버티고 있는 이상, 결국 루카스는 노튼보다 나은 무언가를 알레한드로 카칭에게 내놔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조권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북부의 동맹이 견고하다는 것을 본의 아니게 확인한 차다. 알레한드로 카칭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가 과연 수조권을 혼자만 받고 입을 씻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리네트는 초조한 심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금세 빈 술잔을 보고 시녀가 술을 따라 주었다. 목이 타는 기분이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아마 두 분은 노튼 황자님의 방법은 쓰지 못하시겠죠.”
“아리아나 카칭이요?”
리네트가 차갑게 웃자 베케이아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오후에 전해 듣기는 했는데…….”
“무슨 소식 말입니까?”
루카스의 물음에 남작은 입을 열었다.
“알렉사 레미시어가 노튼 황자와의 파혼을 정식으로 요청했다더군요.”
리네트는 술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예?”
“알렉사 레미시어가…….”
남작은 친절하게도 리네트에게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 말을 못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알렉사가요?”
“예? 아, 예.”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네트는 눈을 부릅떴다.
“진짜예요?”
“설마하니 제가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사실 새삼스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작의 말은 진짜였다. 리네트의 능력이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알렉사가 노튼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그녀도, 루카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베케이아 남작은 둘의 모습에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희 쪽에서는 낸터킷 황후가 노튼 황자의 지원을 위해, 일부러 알렉사 레미시어에게 파혼을 먼저 청하길 강권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강권은 아닐 거예요.”
“그럴까요?”
“노튼 황자는 자신의 평가에 흠집이 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죠. 황후는 그런 노튼 황자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희도 알아봐야겠군요.”
“알게 되시면 부디 저희에게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요.”
리네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술을 마저 들이켰다. 시녀가 다시 술을 따르려 했으나,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내일 카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마셨어.”
“……그래.”
많이 마시긴 했다. 만찬은 곧 끝이 났고, 리네트는 일어서며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로가나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베케이아 남작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루카스 또한 리네트에게로 다가서다가 베케이아 남작을 쳐다봤다. 베케이아 남작은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카멜리아 양이 카칭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알레한드로 카칭의 아내는…….”
“몸이 약해 사교계에 거의 나오지 않지요.”
“예. 그렇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럼요?”
“그 부인은 이십여 년 전에 딸을 납치당해 잃었습니다.”
리네트는 기울어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알레한드로 카칭의 부인인 글로리아 카칭은 자신의 딸을 찾아 이십여 년째 북부를 떠돌고 있습니다.”
리네트와 로가나의 눈이 마주쳤다.
* * *
북부의 귀족들은 혈연에 대한 집착이 수도의 그것보다 훨씬 심했다. 오랜 세월을 혼맥으로 유지해 온 지역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유달리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집착했다. 그건 그녀가 세 번을 유산하고 나서야 간신히 얻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사실 북부의 남자들은 혈연에 대한 아집 때문에 첩을 당연하다는 듯이 두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알레한드로 카칭만은 첩을 두지 않았다. 글로리아를 끔찍이도 사랑했기에.
어릴 적 다쳐 한쪽 다리를 저는 알레한드로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 주던 하녀 글로리아를 사랑해, 끝내는 부인으로 삼은 이야기는 카칭에서 너무나 유명했다.
본디 신분 차이가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수많은 경우가 있겠지만, 글로리아는 남편의 지위에 비해 부족한 자신을 끊임없이 탓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세 번이나 유산을 한 그녀가 위축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기적같이 자식을 낳게 되었다. 딸을 본 알레한드로 카칭은 갓난애를 물고 빨다 못해 일을 볼 때도 업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이에 글로리아가 겨우 한시름 놨을 때, 비극은 일어났다. 글로리아가 아이와 잠시 친정에 다녀오기 위해 나서던 중 짐승이 습격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간신히 정리하고 주위를 둘러봤으나 아이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시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알레한드로는 글로리아를 달랬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고. 하나 글로리아는 자신의 딸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는 미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차분하게 카칭 지역을 수색했다. 귀라르델의 눈 쌓인 산맥을 올랐고, 깊은 숲 속을 뒤졌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알레한드로 카칭조차 자신의 부인이 가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글로리아는 일 년에 단 한 번, 가을걷이를 할 때만 카칭으로 돌아와 영주 부인 노릇을 합니다.”
베케이아 남작이 한숨 쉬듯 말했다.
“그 외에는 계속 영지를 떠돌아다니는 거군요?”
“예. 아이를 찾기 위해서요.”
“왜 우리는 그런 걸 몰랐지?”
루카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북부에 오기 전에 분명 귀족들을 조사했는데…….”
“그야 북부만의 공공연한 비밀이니까요.”
남작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알레한드로가 결혼할 때만 해도 모두들 글로리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유산했을 때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아이의 시체라도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북부 귀족들이라면 특히요.”
“그렇군요…….”
리네트가 가볍게 눈알을 굴려 로가나를 곁눈질했다. 로가나는 표정 없이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 부인이 가을 외에는 계속 밖으로 나다닌다는 것 자체가 좋게 보일 리 없으니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겁니다.”
“아하…….”
“알레한드로의 체면을 생각하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는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의 영주니까.”
결속력이 단단한 만큼 자신들끼리는 감싸고 돈다는 건가. 리네트는 슬슬 이제 북부 귀족들의 성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외부 인사에게는 한없이 냉랭하지만, 한번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들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출신이 어떻든, 어떤 짓을 하고 다니든 대체로 감싸 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노튼 또한 아리아나에게 그런 개수작을 걸고 있는 거겠지.
그쯤 해서 리네트는 알렉사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노튼에게 자신의 불안함을 전해 달라고 넌지시 리네트에게 말을 건넬 정도였다. 황후에게 문전박대당하고, 노튼에게서는 기별도 없고. 너무나 불안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안해하는 것과, 그녀가 직접 파혼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리네트는 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노튼을 사랑하잖아, 알렉사.
‘하지만 진짜인 걸 알고 있잖아.’
백안이 속삭였다.
리네트는 훠이, 훠이- 괜히 눈앞에서 새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남작이 의아한 표정을 짓기에 ‘……벌레가 좀.’ 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요새 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네 생일이 다가와서 그래.’
뭐라고? 리네트는 백안의 목소리에게 다시 묻고 싶었지만, 백안은 정말로 제멋대로였다. ‘그날 되면 내가 생일 축하 노래 불러 줄게!’ 하고는 쏙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무튼 생일보다는 당장 다른 것에 집중하긴 해야 했다.
“그러면, 빅타에서의 마지막 밤을 편안히 보내시길.”
베케이아 남작이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을 전송했다.
루카스와 리네트는 남작과 마주 인사하고 식당을 나오자마자 로가나를 데리고 빠른 속도로 방으로 돌아왔다.
* * *
“로가나가 글로리아의 딸일까?”
“그건 몰라. 하지만…… 그 가능성을 놓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일이군.”
로가나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모인 시선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리네트가 로가나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로가나. 네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좀 더 해 볼래?”
“……저기, 아가씨…….”
로가나가 조그맣게 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아가씨가 원하는 대답을 할까요?”
“무슨 소리야?”
리네트가 로가나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답한 것은 루카스였다.
“글로리아의 딸로 착각하도록 꾸며 보겠다는 건가?”
“뭐?”
“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로가나가 머뭇거리다가 리네트를 보고 미소 지었다.
“도둑 길드의 아이들이 명절에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셨죠?”
“응.”
“그 애들이 명절이 아닐 때 무엇을 하는지 아시나요?”
“설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돈을 훔치고, 사기를 치죠. 심부름할 아이가 필요한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그 집안의 밑천을 빼돌리기도 해요.”
“…….”
리네트의 얼굴이 굳었으나 로가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 저를 도둑 길드에 팔아치운 사람은 제 몸값이 필요해 납치했대요. 북쪽에서 온 그는 제가 상당히 부잣집 아이인 줄 알고 납치했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집 아이여서 몸값을 요구하기도 전에 죽을 뻔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도둑 길드에서는 저를 샀죠. 갓난아이도 쓸모가 있거든요. 젖을 먹지 못해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는 갓난애를 안은 여인에게 어느 누가 적선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겠어요?’-라는 말 정도는 즉석에서 바로 지어낼 수도 있죠.”
“그리고 그 사연을 듣고 누군가는 눈물을 죽죽 흘리겠군.”
“예.”
차분하게 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로가나는 숨 한 번 멈추지 않았다. 도둑 길드에서는 대체 어떤 걸 가르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가씨, 필요하시다면 제가 할 수 있어요.”
로가나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은혜를 갚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어요. 나중에 아닌 것이 밝혀져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아가씨께서 사업권을 따내신 후 아니겠어요?”
“그런 방식으로는 안 돼, 로가나.”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리고 로가나의 손을 잡았다.
“무르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대충 마무리 지어진 일은 끝이 좋지 않아.”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어.”
루카스가 턱을 괴고 의자에 앉은 채 리네트에게 물음을 던졌다.
“리네트. 로가나는 글로리아의 아이인가?”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라고 대답하려던 리네트는 입을 닫았다. 쾌활한 목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맞아!’
“…….”
아. 그제야 리네트는 루카스가 하려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전율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나 보군. 그리고…….”
루카스가 로가나를 쳐다봤다.
“너는 정말로 글로리아 카칭의 딸인 모양인데?”
“예? 제가요!?”
로가나가 식겁해서 리네트를 쳐다봤다. 리네트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되어 로가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가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찾으신 것은 카멜리아 공작이었지. 내 얼굴은 황제 폐하와 너무나 닮아 있었지만, 폐하께서는 카멜리아 공작의 확답을 원하셨어. 그리고 카멜리아 공작은 나를 보자마자 폐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래…….”
리네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글로리아 카칭과 알레한드로 카칭 또한 카멜리아 공작을 찾을 거야. 그러나 ‘백안’은 너에게 있어, 리네트.”
“…….”
“네가 ‘백안’의 소유자라는 것을 외부에 공개해야 할지도 몰라. 만약 너와 공작의 사이가 좋았다면 협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너와 공작이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리네트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아, 맙소사. 생각하지도 못했다.
카멜리아 공작저에 처박혀 있을 때, 그녀는 백안의 후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찾아보곤 했다. 이 능력을 대체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싶어서.
대체적으로 성인이 되기 전의 능력들은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십 대 시절 제게 찾아온 능력을 어설프게 쓰다가 친구들에게 절교당하거나, 아니면 홀로 집에 처박혀 지냈다. 차차 능력을 잃어가는 선대에게 질투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백안’이 제게 있다는 사실이 공표되는 순간,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공작이야 자신을 죽이려고 필사적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니 상관없겠지만…….
루카스가 걱정하는 건.
“공개하고 나면, 폐하께서는 욕심을 내실 거야.”
리네트는 입을 닫았다. 단지 결혼만 하는 거라면 문제될 것 없다.
하지만 리네트가 백안의 소유자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는 즉시, 황제는 그녀를 루카스와 결혼시키고…….
“……국가에 영광된 출산으로 이바지하길 강요당하겠지.”
“그래. 재미있는 마차 여행도, 즐거운 북부 구경도 끝이야.”
루카스는 일부러 빙빙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황제는 지금도 리네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모르쇠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가 ‘백안’의 소유자라는 것이 밖으로 공표된다면, 황제가 모른 척해 주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순산을 기원할 것이다.
“아, 머리 아파…….”
리네트의 혼잣말에 로가나가 허둥지둥했다.
“아가씨, 많이 아프세요? 약차를 좀 타 달라고 말할까요?”
“아냐, 그냥 하는 소리야.”
정말 저 애가 글로리아와 알레한드로의 아이가 맞다고?
머릿속으로 되물은 질문에 백안의 목소리는 경쾌하게 다시 한번 대답했다.
‘맞아. 로가나는 알레한드로 카칭과 글로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야.’
‘대체 어떻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거짓말인지, 아닌지만 구별한다고.’
얘는 왜 이런 데서 결정적으로 도움이 안 돼……. 흘리듯이 한 생각에 백안의 목소리는 짜증을 냈다.
‘야!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해!’
그러더니 휙 사라져 버렸다.
리네트는 아이고야,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애매하고 제멋대로인 능력이라는 건 아마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일 테지. 성인이 되기 전에는 제 마음대로 펼쳐 낼 수 없는 능력. 습격처럼 다가와 제멋대로 거짓을 판별하고, 알려 주는 것도 제멋대로다.
카멜리아 공작이 왜 성격 파탄인지 대강은 알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지, 그는 능력이 약해서 목소리를 못 들었다던가.
아무튼 이런 생각보다는, 로가나를 어떻게든 해야 할 때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으음, 어떻게 하지…….”
“왜 고민해?”
그때, 루카스가 물었다. 리네트는 긴 의자에 눕듯이 옆으로 엎드리며 신음했다.
“네 말이 맞아. 로가나는 글로리아와 알레한드로의 딸이야.”
“그렇군. 그런데?”
“로가나에게 원래 자리를 돌려줘야지…….”
“음. 너는 지금 뭘 좀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리네트.”
“뭐? 내가 왜?”
“들어 봐.”
루카스는 능숙하게 리네트의 팔을 잡아 그녀를 자신 쪽으로 돌려 눕혔다. 결과적으로 리네트는 루카스의 허벅지를 베고 긴 의자에 드러누운 상태가 됐다.
뒤통수에 닿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리네트가 화닥닥 일어나려 했으나, 남자는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지그시 눌렀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냥 누워서 내 말 들어 봐.”
리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버둥 쳤으나 곧 포기했다. 루카스는 쓴웃음을 짓고 로가나에게 물었다.
“로가나.”
“에, 예?”
“혹시 북부의 왕이 되고 싶나?”
“……북…… 뭐요?”
로가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말을 가늠하다가 재차 물었다.
“북부에서 왕이 될 수 있나요? 제국에 속했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확히는…… 리네트처럼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호호 웃고 싶나?”
“……제가요?”
“그래. 아까 들었잖나. 알레한드로 영주는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지고 있다. 그 수양딸인 아리아나 카칭은 북부의 공주님이나 다름없다지. 그런데 리네트가 증언해 주면, 너는 그 아리아나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거다.”
로가나는 눈알을 한참이나 굴리다 말했다.
“어떤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카칭 영주의 딸이라는 걸 증명하고 아가씨를 돕고 싶냐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야 당연히…….”
“아니, 아니.”
리네트가 로가나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다시 그녀의 이마를 누른 채 반대쪽 손을 내저었다.
“리네트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요?”
이마를 눌렀던 손은 그녀가 몸에 힘을 빼자 부드럽게 살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게 근데 은근슬쩍. 리네트는 곁눈질로 루카스의 손을 흘겼다.
그러나 루카스는 모른 체 말을 이었다.
“네 정체를 밝히면 나는 좋고, 그녀는 약간 곤란해져. 그녀는 지금 곤란을 무릅쓰고서라도 네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지. 하지만 로가나. 그게 네가 ‘바라는 삶’인가?”
“어…….”
“리네트는 아리아나 카칭이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가족이 모두 네 것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거든. 로가나, 내가 봤을 때 너는 별로 그런 것이 갖고 싶은 것 같진 않아.”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리네트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로가나가 말을 이었다.
“음.”
“…….”
“아가씨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저도 제대로 설명을 들어 본 건 아니지만, 대강은 옆에서 모시면서 알고 있어요. 아가씨의 말은 절대로 옳은 거죠, 언제나?”
언제나는 아닌데…… 리네트가 말할 틈도 없이 로가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가씨가 옳다면 옳은 거고, 틀리다면 틀린 거예요. 방금 제가 그 글…….”
“글로리아.”
“예. 글로리아라는 분의 딸이라면 그런 거겠죠. 근데요, 아가씨.”
로가나는 약간 입을 비쭉거리며 리네트에게 말했다.
“제가 그분의 딸이면 황자님은 좋고, 아가씨는 곤란하다니까 싫어요.”
“그, 로가나. 그런 게 아냐.”
리네트가 버둥거렸지만 이번에 그녀를 누른 건 로가나였다. 로가나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씨. 하나만 말씀드려도 돼요?”
“뭔데?”
“저는 사실 이 황자님 별로예요. 아가씨가 아까워요.”
속삭이듯- 이라고 말했지만 동작만 그랬지, 다 들렸다. 루카스 들으라고 한 소리다.
“허어?”
루카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씨는 더 멋있는 사람 만나야 돼요.”
로가나의 단호한 말에 리네트는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곧 빠르게 답했다.
“얼굴로 따지면 이것보다 더 멋있는 사람 만나기 힘들지 않을까…….”
“호오, 그건 고맙군.”
루카스는 사양도 하지 않고 좋아했다.
리네트는 그가 좋아할 말을 자신이 해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약간 짜증이 났다. 이게 츤데레라는 건가.
그러든가 말든가 로가나가 말했다.
“아녜요. 아가씨가 훨씬 예뻐요.”
“음…….”
“얼굴만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가 제일 멋있고, 아가씨가 제일 똑똑해요. 음, 잠시만요. 아까 한 말 취소할게요.”
로가나는 쉴 새 없이 말을 퍼붓다가 손을 앞으로 내세우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보다 멋있는 남자 없는 거 같아요.”
“…….”
“아가씨 혼자 사세요.”
“……응……. 되게 고맙네…….”
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몸은 어쩔 수 없어서, 리네트는 베고 누운 그의 무릎에서 제 머리까지 흔들리는 것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웃기냐?”
“음. 그녀가 네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재미있는데.”
남자는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해 가며 답했다. 리네트가 입을 비죽였지만 로가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저는 아가씨가 제일 좋아요. 그래서 아가씨가 곤란해하시는 건 싫어요. 하지만 아가씨는 제가 진심으로 그 카칭 영주님이라는 분의 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리고 저도 그걸 원할 거라 생각하시는 거고요.”
“……아냐?”
“음, 아가씨. 일단…… 아니에요.”
로가나가 말하자 리네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라고?”
“네. 모르는 사람 딸 돼서 뭐 해요, 제가?”
“네 친아버지라니까?”
“음…….”
로가나가 우물쭈물했다.
그때, 루카스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로가나에게 그렇게 강요하지 마.”
“아니, 그렇잖아?”
리네트가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루카스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리네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베고 있던 남자의 바지를 붙들고 소리치듯 말했다.
“하녀보다는 귀족 아가씨가 백배 낫지! 그리고 자기를 낳아 준 부모님이라고!”
“그렇지만…….”
로가나는 이제 난처해 보였다. 루카스는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를 도닥였다.
“진정해.”
“그…….”
루카스가 그녀의 말을 드물게도 가로막았다.
“리네트. 먼저 내 말 듣고 생각해 봐. 카멜리아 공작이 얼마 전에 네 어머니 이야기를 했을 때, 너는 어떻게 대답했지?”
리네트는 잠시 침묵했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랬다. 카멜리아 공작은 리네트에게 친어머니가 살아 있음을 알리며, 그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리네트는 대답했다.
“제가 얼굴 한 번 못 본 어머니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울고불고할 줄 아셨어요?”
“나는 로가나라고 해서 너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은데.”
“…….”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리네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부모는 자식을 그리워하고 자식 또한 부모를 그리워하게 마련이지만, 모두가 그렇진 않아. 리네트 너처럼. 애틋한 감정이 꼭 쌍방은 아니야.”
“예, 맞아요.”
로가나가 볼을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솔직히 부모님이 누군지 궁금해해 본 적은 있지만, 어…… 뭐랄까. 제가 꼭 그분들의 딸이 돼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리네트의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아! 하지만 아가씨에게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럴 거예요.”
“그들이 가진 부나 권력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여태까지…….”
리네트는 말을 잇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여태까지 힘들게 살아왔으니.’ 그녀가 하려던 말은 지나치게 무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가나는 리네트의 말을 짐작한 듯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저는 별로 좋은 인생을 살진 않았어요. 근데 그걸 알려 준 건 아가씨예요.”
“어……?”
“저는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게 막 힘들거나 고달픈 인생이라는 걸 잘 몰랐거든요. 그런가 보다, 이래야 하나 보다, 원래 이렇게 막막한 건가 보다 했거든요.”
로가나는 쪼그려 앉은 무릎이 아픈 듯 두어 번 두들기다가, 리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일어섰다. 그리고 리네트의 손을 당겨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가씨와 함께하고 행복해지면서, 그때가 불행했단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별로 아가씨의 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로가나.”
리네트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로가나는 리네트가 감동에 빠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아가씨의 곁을 떠나면 애플만 아가씨를 모실 것 아니에요?”
“어?”
“싫어요! 애플만 예뻐하시고 저는 금방 잊어버리실 거죠!”
“……어어?”
“애플이 아가씨를 오래 모신 건 인정하지만, 저도 아가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엄청 많이!”
리네트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녀 스스로는 카칭 영주 부부에게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럼…….”
“아, 물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자원할 거예요. 북부의 왕이요? 그 아리…… 뭐라는 아가씨하고.”
“아리아나.”
루카스가 말을 고쳐 주었다. 로가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싸우래도 이기고 올 거예요. 제가 훨씬 더 잘 싸워요.”
“그야 그렇겠지…….”
“조용히 해, 루카스. 아무튼 로가나.”
리네트가 한숨 쉬었다.
“네 마음은 정말 고마워. 잘 알았어.”
“저도 아가씨를 좋아해요!”
“그, 그래…….”
로가나가 활짝 웃었다. 리네트도 피식 웃었다. 어쨌든 로가나는 그다지 카칭 영주의 딸로 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곤란해지지 않는 방법을 써 보면 어떨까요?”
로가나는 손을 펴며 제안했다. 리네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그, 오페세레에서 만난 부인 있잖아요. 베버 부인이라고 했던.”
“아…….”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구해 주었던 부인. 모든 게 그녀로부터 시작됐다. 로가나가 말하는 것도 그녀였다.
“그럼 리네트를 통해 확인하는 게 아니라…….”
루카스의 말에 로가나가 대답했다.
“네. 베버 부인을 찾아보고, 그쪽에서 제가 그 두 분의 딸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는 거예요.”
“하지만 베버 부인이 카칭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는데?”
“아니.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는 좀처럼 없어. 그리고 말을 트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군.”
루카스가 끼어들었다. 리네트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부인에게 너는 이미 스무 살이라고 말해 버렸잖아?”
“그야 저는 버려져서 나이를 잘 모르는데, 황자님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일에 휘말릴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되죠.”
얘는 천재가 아닐까? 리네트는 생각했다.
루카스가 턱을 긁으며 고민했다.
“문제는 그 부인을 다시 만나는 거로군.”
“네.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해 봤는데, 부인께서 사실 그때 제게 말씀하신 게 있거든요. 댁에 일이 있어 카칭으로 돌아가신다고요.”
리네트와 루카스의 눈이 마주쳤다.
“으음, 하기는. 그럼 베버 부인이 카칭과 연관이 없더라도, 알레한드로 카칭에게 이런 아이가 있으니 만나 보시겠느냐…… 하며 접근하는 방법도 있겠네.”
“하지만 조심스러워야 할 거야.”
루카스가 첨언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네 자식과 비슷한 아이가 있는데 만나 보겠느냐는 이야기는 역린 같은 이야기일 테니까.”
“될 수 있으면 베버 부인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겠네.”
“그래.”
솔직히 막막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다. 로가나가 헤헤, 웃었다.
“아가씨께 제가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로가나.”
리네트는 눈앞의 로가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바짝 마른 몸과 함께 그녀가 약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네가 맹목적으로 나한테 이렇게 대해 주는 게 이해가 가진 않지만…… 정말로 사람 인연이라는 게 신기한 일이네.”
“앗, 아가씨…….”
로가나가 뺨을 붉혔다. 민망한 것 같았다.
루카스가 둘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뭐, 옆에서 보면 굉장히 동화 같은 일이긴 하지.”
“……동화라니…….”
그놈의 동화. 리네트는 동화라는 단어에 사용 금지를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계곡의 마법사를 봤을 때부터 동화라는 얘기만 나오면 막 짜증이 났다.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루카스는 말을 이었다.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교훈 같은 거 있잖아.”
리네트는 로가나를 풀어 주었다. 민망한 듯 그녀가 몸을 꿈틀거려서였다.
그러나 로가나는 리네트의 팔에서 풀려난 뒤 바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봤다.
“맞아요. 아가씨가 그때 저를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제가 누구의 딸인지도 모른 채 거기 갇혀 있었을 거예요.”
“…….”
“제가 이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로가나는 고양이처럼 뺨을 리네트의 드레스에 문질렀다. 리네트는 조금 머쓱해졌다.
“보답을 바라고 그랬던 건 아닌데…….”
“그러니 착한 일이라는 거지.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어디가 착한 일이겠어?”
루카스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했던 말을 사과하고 싶을 정도야.”
“무슨 말?”
“쓸데없이 동정심이 너무 많다는 말.”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가 곧 기억해 냈다. 루카스는 공작저에서 에드가 발란이 알렉사를 추행하려 했을 때, 그리고 리네트가 그것을 막아섰을 때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직도 그대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지만, 적어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
“…….”
“그리고 이건 로가나가 카칭 영주의 자식이어서가 아냐. 보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은 일은 반드시 하는 게 맞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리네트에게 손을 청했다. 오랜만의 동작이라 리네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제 손을 내밀었다.
루카스는 그녀의 손등을 물끄러미 보더니 거기에 자신의 이마를 정중하게 갖다 댔다. 느리고 확실하게, 아주 예의 바르게.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루카스가 말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했어. 노튼이 너 같았다면 어땠을까.”
“엑.”
“웃지 말아줘. 너나 노튼이나 사실 내게 싸늘하게 대하는 건 비슷하거든.”
루카스는 씩 웃었다. 리네트가 어이없어하며 일갈했다.
“누굴 누구한테 비교하는 거야?”
“물론-”
황자는 그렇게 말하고 바짝 다가앉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대의 싸늘한 말 뒤에는 봄바람 같은 다정함이 있다는 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지.”
“……또 시작이야?”
“또 시작이라니.”
루카스가 노래하듯 대꾸했다.
“나는 그대에게 청혼한 이후로 언제나 끊이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네.”
그리고 잽싸게, 리네트의 이마에 입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리네트는 잠시 멍해졌다가 소리 질렀다.
“루카스 리시스트!”
“아가씨, 죽일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죽이지는…….”
“아. 안 죽일 거야?”
다시 한번 쪽,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관자놀이였다.
“죽여!”
“네, 아가씨!”
결과적으로 루카스 리시스트는 빠르게 리네트의 방에서 쫓겨났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