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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약혼식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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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약혼식

그 길로 타운 하우스에 돌아와 며칠을 꼬박 쉬었다. 리네트는 침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애플이 무색할 정도로 아팠기 때문이다.

루카스가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리네트가 아프다는 이야기만 듣고 돌아갔다.

그녀가 완전히 기운을 차렸을 때는 완연한 연말이었다.

리네트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줄을 당기자 타운 하우스의 하녀가 왔다.

“저게 무슨 소리니?”

“아, 귀족가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이랍니다. 수도 변두리의 고아원에서 나와 노래를 부르죠.”

“여기도 왔니?”

하녀가 눈알을 굴렸다. 눈앞의 아가씨가 저 노랫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로가나를 불러와. 내 실내복 좀 가져다주고.”

“……예에.”

하녀가 로가나를 불러올 동안 동안 리네트는 요 며칠 틈틈이 써 뒀던 기사를 마무리하고, 로가나가 왔을 때 그녀에게 내밀었다.

“베티에게 가져다줘. 그리고 가는 길에 저 노래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동전 몇 닢 쥐어 줄래?”

“노래를 듣고 싶으시면 제가 불러 드릴까요?”

“나한테 기부 받고 싶니?”

리네트가 픽 웃으며 답하자 로가나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때는 도둑 길드의 대목이거든요! 길드의 어린아이들을 고아원에서 나온 척 노래 부르게 하고, 돈을 걷죠!”

“그리고 들어간 집의 장식품도 훔치고?”

“아가씨는 영명하셔요!”

로가나는 발랄하게 리네트를 칭찬했다. 리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 짓다가 눈을 깜박였다.

“혹시 그러면, 그런 애들을 알아볼 수 있니?”

“누구요? 아, 도둑 길드에서 온 애들요? 그럼요. 왜요?”

“음, 시킬 게 좀 있어서. 그 애들 믿을 만하니?”

도둑 길드의 아이들을 믿을 만하냐고 묻는 상황이 좀 웃기기는 했다. 곧 쾌활한 답이 돌아왔다.

“그 애들은 가장 많은 돈을 주는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죠!”

“좋아. 그러면 베티에게서 돌아오는 길에 도둑 길드에서 나온 아이들을 데려와 줄래?”

“네!”

로가나는 어디 필요하냐고 묻지도 않고, 리네트가 준 쪽지를 들고 돌아서 나갔다. 손에는 리네트가 준 동전도 함께였다.

“애들에게는 내가 돈 줄 테니, 그 돈은 맛있는 거 사먹어!”

“네!”

이미 방문 밖으로 사라진 쪽에서 높은 대답이 들려왔다.

로가나도 애플도 좋아하지만, 이럴 땐 로가나가 편했다. 자신을 숭배하듯 따르는 로가나는 애플과 달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의 명령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애플이었어 봐. 도둑 길드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쌍심지를 켰겠지.

그 쌍심지를 켜는 하녀는 지금도 뼈가 붙지 않아 이 타운 하우스에서 가장 따뜻한 방에 있다. 잠깐 애플이라도 만나고 올까- 했으나, 곧 실내복을 가져온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나가는 길에 하인 아무나에게 말해서, 케이크와 구움 과자를 잔뜩 사 오라고 말하겠니? 적어도 성인 열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남는 돈은 가지렴.”

리네트는 하녀에게 금화 한 닢을 튕겨 주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얼굴로 하녀가 발걸음을 재촉해 나갔다.

* * *

리네트는 일부러 계곡에 다녀온 일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았다.

그사이 베티는 ‘리시스트의 아침’ 편집장이라는 신분으로 사교계의 화두로 떠오른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베티는 리네트에게 계곡 이야기를 써 달라고 성화였으나, 리네트는 판단을 보류했다.

황제가 그만큼이나 양보했다. 협상권에 수조권을 끼워 준다는 건, 황제의 마음이 루카스에게 완전히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이럴 때 판세를 굳히겠답시고 섣불리 노튼을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다.

그날 그렇게나 노튼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보인 차다. 황제로서는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라며 진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신년회까지는 수도에 묶여 있어야 했다. 이때를 정비 기간으로 쓰자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책상에는 리네트에게 날아온 초대장과 편지 같은 것이 수북하게도 쌓여 있었다.

‘티타임에나 들러 볼까.’

리네트는 그간 인맥을 넓히기 위해 연회에는 참석했으나,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참석하는 티파티에는 참석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한데 요즘은 날이 추우니 다들 연회보다는 작은 음악회나 티파티를 열었다.

리네트는 그 초대장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 한쪽에 따로 분류된 봉투 꾸러미를 발견했다.

“뭐야, 이게?”

봉투들은 한결같이 모두 분홍색이었다. 뒤집어 보니 발신인을 알 수 있었다. 봉투를 밀봉한 밀랍 위에는 은방울꽃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루카스 리시스트다.

‘그런데 월계수의 리시스트라면서, 왜 은방울꽃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봉투를 뜯으니 그 안에서 카드가 쏟아져 나왔다. 내용물은 모두 비슷했다.

[쾌유를 빌며.]

[사랑을 담아.]

[나의 연인에게.]

직접 쓴 짧은 멘트들이 새겨져 있었고, 보기 좋은 실자수로 은방울꽃이 사방에 수놓여 있었다. 귀여운 짓을 다 했네.

아마 ‘약혼을 앞둔 남자가 연인에게 보내는 카드’라는 본분에 충실했을 것이다. 어쨌든 루카스 리시스트는 리네트가 뭔가를 시키면 굉장히 성실하게 그 역할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자였다. 심지어 어떤 카드 안에는 직접 그린 듯한 연인 그림도 있었다.

“되게 못 그렸네.”

리네트는 피식피식 웃으며 카드를 접어 넣다가 문득 심란해졌다.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서다.

정드는 게 제일 무섭다더니, 제가 딱 그 짝이었다. 아니, 아니다. 차라리 정드는 건 귀여운 수준이다. 그 남자의 얼굴은 정이 들 만한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계속 봐서 익숙해지고 애정이 쌓이는 타입이 아니라, 볼 때마다 사람의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종류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젠장.”

리네트는 절뚝이며 일어나 그 카드들을 모조리 구석의 바구니에 몰아 버렸다.

그래도 아예 답장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네트는 책상 서랍을 열어 가장 초라한 갈색 편지지를 꺼냈다.

[조만간 들르세요.]

하인한테 하는 말도 이렇게까지 냉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네트는 초록색 봉투 안에 그 편지지를 접어 넣으려다가, 고개를 갸우뚱하곤 결국 끝에 추신을 적어 넣었다.

[당신의 연인, 리네트 카멜리아.]

그렇게 적어 놓고는 어쩐지 그 편지지를 다시 쳐다보는 것도 민망해져, 리네트는 난폭하게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본래대로라면 하인을 불러 밀랍을 부드럽게 녹이고 천천히 봉해야겠지만, 그러기도 싫었다.

결국 리네트는 절뚝거리며 일어나 벽난로에 다가가서 밀랍 스틱을 휘휘 불꽃 위에 저었다. 밀랍이 적당히 녹은 듯하자 도로 책상 앞으로 와 봉투 앞에 박아 넣었다.

거칠게 녹였으니 그 밀랍이 어여쁠 리 없다. 심지어 조금 그을었으나, 그 흉함이 오히려 리네트는 만족스러웠다. 어쩐지 예쁘고 사랑스러운 편지는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밀랍이 완전히 굳기 전에, 물고기 모양의 도장을 쿵 찍었다. 본래 가문의 문장인 동백꽃을 써야 마땅하나, 카멜리아 공작저를 나올 때 리네트는 가문의 표식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급한 대로 구입한 게 물고기 문양이었다. 루카스는 그 물고기를 볼 때마다 피식피식 웃곤 했다.

이윽고, 연서라고 보기엔 꽤 추레한 모습의 봉투가 완성했다. 리네트는 콧방귀를 뀌며 하인을 불렀다.

“황성에 가서 록시온의 주인께 전하고 오너라. 친전이란다.”

“앗, 예!”

친전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 레미시어 타운 하우스의 하인들이라면 으레 그 독특한 물고기 모양의 도장이 루카스 황자에게 가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인은 리네트가 주는 동전을 받아 챙기며 씩씩하게 나갔다. 보기 드물게 씀씀이가 후한 카멜리아가의 아가씨는 레미시어의 타운 하우스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가씨, 과자를 사 왔는데요…….”

타이밍 좋게 하녀가 돌아왔다.

“주신 금화가 너무 많아서, 생각보다 많이 사 버렸어요.”

“얼마나 샀기에?”

“그게…….”

하녀가 창문 바깥을 기웃거렸다. 리네트는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보았다.

타운 하우스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는데, 거기서 엄청난 양의 케이크 박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알 만했다. 금화 한 닢은 금액이 컸다. 케이크나 과자가 아무리 비싸도 금화 한 닢을 거스르면 남는 금액이 꽤 많았을 테고, 이 하녀는 그 많은 거스름돈을 자기가 가지는 게 부당하다 생각했으리라.

리네트는 픽 웃었다.

“정직한 사람은 상을 받아야지.”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돈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주었다. 하녀가 굽실거렸다.

“케이크와 과자들은 2층의 가장 큰 응접실에 예쁘게 차려 주겠니? 아이들이 먹을 거니까 함께 마실 음료는 너무 뜨겁게 만들진 말아 줘.”

“예!”

그렇게 하녀를 보낸 후, 리네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로가나가 제 방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아가씨! 분부하신 대로 노래하는 아이들을 데려왔어요!”

리네트는 숄을 챙겨 그레이트 홀로 내려갔다. 열댓 명쯤 되는 아이들이 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로가나는 리네트를 부축해 내려간 다음 그녀를 계단 위 적당한 위치에 세워 두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 선반에 손을 뻗던 아이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리네트는 그 애가 선반에 손을 뻗는 줄도 몰랐는데.

“자, 얘들아. 노래를 잘 부르니?”

아이들이 ‘네!’ 하고 합창했다. 리네트는 빙그레 웃었다.

“노래를 잘 부르면 과자를 줄 거야.”

그 말에 아이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대열을 정비했다. 노래를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리네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여기서 말고.”

“그럼요?”

“일단 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않겠니? 자, 나를 따라오렴.”

아이들은 삼삼오오 손을 잡고 리네트의 뒤를 걸었다. 단체로 맞춘 옷은 허름했고, 아이들에게 잘 맞지도 않았다.

로가나가 빠르게 다가와 절뚝거리는 리네트를 부축했다.

이내 2층 응접실에 도착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에게 리네트는 ‘차려진 케이크와 과자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단다.’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눈알을 굴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모두 과자를 배불리 먹고, 몸도 녹이고 있을 때였다. 한 아이가 호기심에 차 리네트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몸이 아프신가요?”

“응. 나는 몸이 아프단다. 그래서 너희 같은 아이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 주는 게 좋아.”

리네트는 생긋 웃었다.

“하지만 다른 집에서 불렀던 노래는 안 돼. 나도 이미 많이 들었거든.”

“그럼 어떤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가르쳐 주는 노래를 배워서 불러 줄 수 있겠니?”

아이들이 눈을 깜박였다. 리네트는 제 앞에 선 아이의 손에 빨간 잼이 보석처럼 박힌 쿠키 하나를 쥐여 주며 입을 열었다.

* * *

겨울은 리시스트에서 가장 지루한 계절이다. 저 북부면 몰라도 수도는 가을과 겨울, 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도, 세상을 온통 뒤덮을 듯한 눈도 없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화젯거리에 집중한다.

그리고 최근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아무래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웃고 다니는 황자와 그의 약혼녀였다.

마력석 사고 이후 애도차 취소됐던 신년회가 다시 열리는데, 그 배경에는 황자의 약혼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황자가 카멜리아 가문의 둘째 아가씨에게 오랜 세월 구혼해 온 것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황자는 리시스트 시내에 아주 자주 보였다. 예를 들면, 수도 중앙 광장 한편에 기사들이 우르르 도열해 서 있으면 모두들 ‘아, 황자님이 오늘은 카멜리아 양과 이곳에서 데이트 중이시구나.’ 하고 생각하는 식이다.

기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시내 곳곳에서 보였다. 보석점, 의상실, 은행…… 그리고 오늘은 ‘해바라기 정원’이었다.

최고급 음식점들보다는 약간 격이 떨어지지만, 직접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그 점주의 센스에 힘입은 ‘해바라기 정원’은 목가적인 식사로 이름 높았다.

그리고 리네트 또한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눈앞의 허브 셔벗이 큰 역할을 했다.

“얼음…… 얼음이다…….”

“그래. 얼음이지.”

마법이 아니라면 얼음 공급은 영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최근 시내에는 얼음 디저트 종류가 씨가 말랐다.

그러나 ‘해바라기 정원’은 달랐다. 점주는 목장 옆에 차가운 얼음 동굴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질과 흡사한 향의 허브가 얼음과 섞여 달고 상쾌한 맛을 냈다. 리네트는 셔벗을 음미한 후, 곧이어 제 앞에 놓인 구움 과자들에 흡족함을 나타냈다.

“아, 만족스러워.”

“만족스러우셨나요, 나의 아가씨?”

“물론이죠.”

“그럼 슬슬 이동하실까요?”

“뭐야? 어딜 또 가?”

좀 앉아 있고 싶은데. 리네트가 눈을 깜박였으나 루카스는 ‘음, 예약해 놓은 게 있어.’라며 그녀를 슬슬 이끌었다.

“아이, 참!”

“번거롭지만 오늘은 좀 참아 주세요.”

최근 있었던 사고의 여파는 이 커플에게도 미쳤다. 리네트 카멜리아 또한 다리를 절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리네트가 무사히 홀을 지나 바깥의 마차에 당도할 때까지 에스코트했다.

점주와 종업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마차를 탄 리네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탄식을 내뱉으며 모자를 벗었다.

“아, 배불러.”

“그 정도야?”

“엄청난 솜씨잖아. 다 먹어치울 수밖에 없지.”

“이런, 남겨도 돼. 얼마든지 또 먹으러 오면 되는데.”

리네트는 손가락을 흔들며 루카스에게 쯔쯔 혀를 차 보였다.

“오늘의 아이스크림은 내일 다시 오지 않아.”

“하하.”

경쾌하게 웃은 루카스가 바깥으로 신호하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경호 때문에 주변은 기사들로 한참 둘러싸인 채였다.

리네트는 데이트할 때마다 사방에 ‘나 황자하고 데이트해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루카스가 경호를 걱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

“음? 아, 보석상에 갈 거야.”

“나 필요한 거 없는데?”

리네트가 눈을 깜박였다.

“알렉사 양을 만나러 간다며.”

“응.”

“티타임에는 반드시 초대해 준 이에게 작은 선물을 해야 예의니까.”

“아하.”

알렉사는 티파티 개최를 하기로 결정했다며 리네트에게 초대장을 보낸 참이었고, 리네트 또한 기꺼이 응했다. 루카스는 거기에 보낼 선물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그야 레미시어 오팔을 가진 사람한테 아무리 대단한 걸 해 주어도 눈에 차지도 않겠지만.”

“하지만 알렉사는 아무리 작은 거라도 기뻐할 거야.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군.”

루카스가 장난스러운 표정이 됐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 나의 연인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정하지만, 유난히 나에게만 가혹하단 말이야.”

“차기 황태자가 되려면 가혹한 평가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법.”

리네트가 노래하듯 웅얼거렸다.

그때, 마차 바깥에서 흥얼거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저 노래네?”

“무슨 노래?”

“음, 왕자님이 어쩌고 하는…….”

“그런 노래가 있어?”

리네트는 턱을 긁으며 모른 체했다.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사가 영…….”

“가사가 어떻길래?”

“그게, 꼭 나와 노튼의 이야기 같단 말이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네트는 흥미롭게 경청하며 거들었다.

“왕비님이 없어지고 첫째 왕자님만 남았네, 신나게 말을 달렸네- 어쩌고 하는 그 노래?”

리네트가 흥얼거리자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너로군?”

“눈치가 뭐 이렇게 빨라?”

그녀는 투덜거리며 모자를 다시 뒤집어썼다. 보석상 앞에 도착해서다.

루카스는 먼저 내려 리네트를 부축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야 나와 노튼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까 이제 와 새삼 노래로 만들 일이 없거든.”

“고작 그런 걸로 안 거야?”

“물론 내가 긴가민가한 부분은 ‘마법사는 화가 나 저주를 내렸네.’ 부분이지만.”

리네트는 피식피식 웃으며 루카스의 손을 잡고 보석상 안으로 들어갔다.

“가사만 들으면 마치 둘째 왕자가 마법사를 무찌른 것 같지만, 막상 노래를 불러 보면 둘째 왕자가 나쁜 놈 같잖아?”

“그렇지.”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나?”

“남의 걸 훔쳐서 내 것처럼 하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줘.”

루카스가 감탄하듯 물었으나, 리네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 그대로다. 제가 살던 바깥 세계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가사만 바꾼 것이었다.

얼마 전, 아이들을 불러 케이크와 과자를 잔뜩 먹이면서 그 노래를 가르쳤다. 쉬운 멜로디에 쉬운 가사이니 아이들은 금방 외웠다.

배운 노래를 훌륭히 불러 달라고 부탁한 리네트는,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아이들에게 과자를 넉넉히 싸 주었다.

그 결과로 지금 수도 리시스트에는 루카스와 노튼을 빗댄 노래가 이리저리 퍼지고 있었다.

“애들을 이용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충동적인 생각이긴 했지.”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력석 사고 때문에 어른들이 바빠서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잖아.”

“그렇지. 요즘 보초를 서는 것 때문에 결국 일반 시민들마저 나섰으니까.”

“아이들끼리 놀 궁리를 해야 하는데, 좀 괜찮은 놀이를 했으면 싶었어. 새 노래를 가르쳐 주고 함께 부르는 정도는 아이들에게 제법 나쁘지 않은 놀이지.”

루카스가 감탄했다.

“그리고 헛소문도 퍼트리고?”

“신문으로 대놓고 노튼을 공격할 수는 없잖아.”

리네트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보석상 안까지 기사들이 따라오지는 않았고, 자연스레 두 사람은 보석상 내실에 단둘이 앉아 있게 됐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걸.”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최대로 활용해야지. 그래서, 효과는 좀 있었어?”

“놀라울 정도로?”

“어떤데?”

루카스는 최근 제게 접근해 온 이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고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그 속 내용은 극비였다.

자연스럽게 루카스가 마법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생겼다. 황제를 함께 만난 라베노바 백작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에게도 대답하지 않으니, 더더욱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 와중에 노래가 퍼졌다. 평민 아이들이 모여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마치 동화 같았으나, 누구든 루카스와 노튼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악한 마법사와의 약속을 어겨 마법사를 처단하기에 이른 둘째 왕자와, 참회하고 반성한 마법사를 첫째 왕자가 거두어 선한 마법사로 태어나게 한다는 가사였다.

그 노래가 진짜냐고 모두가 루카스에게 물었지만, 루카스는 하하 웃으며 ‘노래일 뿐입니다.’ 하고 말을 흐렸다.

리네트라고 루카스와 입장이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 쪽이 더했다. 사람들은 루카스의 입이 굳게 닫히자 리네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세간의 인식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더 수다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네트는 수다스러운 여자인 척하며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제가 모든 걸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마법사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어머, 이건 비밀이에요.”

라거나.

“프라임 공작께선 루카스 전하와 제법 마음이 맞으셨던 모양이에요. 공작은 호인으로 유명한 분이라 더 그러셨을 거예요. 기꺼이 루카스 전하와 함께하고 싶다 말씀하셨답니다.”

라든가.

“루카스 전하께서는 아주 용감하게 계곡을 오르셨어요. 절뚝거리는 저를 안고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으셨죠. 저는 어찌나 낯이 뜨겁던지……!”

라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리네트가 흘리는 말들에 주목했다. 그야 마법사의 이야기뿐이었다면 두루뭉술한 그 내용 때문에라도 금세 질렸을 것이나, 프라임 공작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그 프라임 공작이 첫째 황자의 편을 들기로 한 것인가?’

‘프라임 공작은 몸을 사리는 타입 아니었나? 그런 공작이 첫째 황자를…….’

‘그보다, 프라임 공작은 동부 귀족들의 구심점 아닌가? 우리 동부 연합은 루카스 황자 전하의 편을 들어야 하는 건가?’

제국에 단둘뿐인 공작가의 이름은 어마어마했다.

리네트는 프라임 공작의 이름이 단숨에 큰 화제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그를 끌어들이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상상했다.

사람들은 마법사의 노래를 듣고 루카스를 연상했고, 리네트에게 캐물은 후 프라임 공작이라는 이름을 얻어 돌아갔다.

“이건 어때?”

상념에 잠긴 리네트를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깨웠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어느새 물건을 내온 보석상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제 눈앞에는 환하게 핀 주홍색 장미가 있었다. 장미는 유리석으로 일일이 깎아 만든 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좋아요. 이걸로 할래요.”

“몇 송이?”

한 송이만 해도 어마어마한 가격일 텐데, 루카스의 질문은 더더욱 어마어마했다.

몇 송이냐니, 리네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맞받아쳤다.

“……한 다발이면 몇 송이죠?”

“아마 열 송이일걸. 그러면 스무 송이를 사야겠군.”

“열 송이라면서요?”

루카스가 리네트의 머리카락 끝에 입 맞추곤 답했다.

“한 다발은 그대의 것이라오.”

그 능청에 웃음이 터졌다.

* * *

수도 리시스트의 상업 거리 중에서도 ‘황실 납품’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보석상 중에서는 단 두 군데로, 하나는 낸터킷 황후의 단골이었고, 하나는 선대 황가의 납품처였다.

그러나 루카스가 택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다른 두 곳의 황실 납품처는 지나치게 노숙했기 때문이다. 아마 선대 황가와 낸터킷 황후의 취향에 맞추기 위함이겠지.

리네트는 보석 장미 주문을 위해 주인과 대화하는 루카스를 뒤로하고 전시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전시실 안은 보석들로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여느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면 유리로 막아 놨을 법하지만, 이곳은 가장 귀한 고객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내실이었다. 모두 리네트가 손만 뻗으면 집어 올릴 수 있도록 돼 있었다.

리네트는 작은 옥석과 금장식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굉장히 작은 장식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그녀가 흔들 때마다 찰랑거렸다.

그에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점원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사랑스럽지요? 동부에서 나는 질 좋은 옥석을 장인이 세공해서 만든 물건이에요. 이파리의 모티브는…….”

리네트가 얇은 금 사슬이 연결된 팔찌를 들어 올리자 점원은 금세 다시 설명했다. 어찌나 쉼 없이 설명하는지, 목 안 마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곳들과는 디자인 성향이 다르네요?”

리네트의 질문에 직원은 화색을 띠며 답했다.

“저희는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디자인을 만들려고 노력한답니다! 저희가 자랑하는 장인들은 대부분 자연물에서…….”

말 괜히 시켰어. 리네트는 이 점원에게 ‘제발 조용히 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즐겁게 떠드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쩐지 미안한 노릇이다.

리네트가 망설이는 동안, 뒤에서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다 보셨소?”

“아, 전하.”

리네트가 방긋 웃으며 돌아섰다.

“저를 기다리셨어요?”

“기다린다는 말은 적절치 않지. 그대를 보고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오. 그대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게 돼.”

정말이지, 자신이 그 대상이 아니었다면 리네트는 ‘염병한다.’고 읊조렸을 것이다. 리네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항상 전하의 다정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돼요. 보잘것없는 제게 언제나 듣기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가끔 꿀에 몸을 담근 기분이 된답니다.”

“내 비루한 낱말들은 그대의 사랑스러움에 비할 수도 없다오. 아무튼, 거기.”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직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닿은 물건들은 모두 주시게.”

미친놈아,

라고 말할 뻔했다. 사랑스럽고 수줍은 여인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직원뿐만 아니라 방금 전까지 루카스를 응대했던 가게의 사장까지, 모두의 표정이 퍽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시선이 조금이라도 닿은 물건.

이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루카스는 평민 출신이라 돈 쓸 줄 모른다는 조롱을 뒤에서 들을 정도로, 황족으로서의 대부분을 누리지 않았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에게 ‘돈 쓸 줄 모른다.’는 말을 처음으로 한 자가 누군지 정말로 궁금했다. 이렇게나 돈을 막 쓰는 남자도 그녀가 알기론 별로 없었다.

리네트는 욕 대신 ‘황자의 약혼녀’ 가면을 다시 한번 고쳐 쓰는 상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거절의 말일랑 하지도 마시게. 그대의 입에서 작은 거절이라도 나오는 순간,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내가 거절당한 듯 쓰라릴 테니.”

말 진짜 잘해. 리네트는 애써 웃었다.

“황공합니다.”

* * *

기차 사고 직후, 가장 먼저 문제로 떠오른 것은 리시스트의 사고 대처였다. 이런 종류의 대형 재난에는 대부분 마법사들이 대응했으나, 마법사들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책이 전무했던 것이다.

루카스는 계곡으로 출발하기 전, 노튼 측보다 훨씬 빠르게 평민들이 가는 의료원에 거금을 쾌척했다. 그런 식의 민심을 끌어오는 것은 중요했다.

루카스는 계곡에서 돌아온 다음, 온갖 기부 행사에도 돈을 뿌렸다. 황제는 이제 루카스를 밀어주기로 작정한 듯, 루카스가 쓰는 돈의 반 이상은 황제가 비밀리에 댄 것이었다.

하지만 루카스가 돈을 쓰는 것이 꼭 이미지 개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약혼식 때문에 루카스의 북부행은 기약이 없었다. 정확히는 언제 출발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라긴 뭐 하지만- 두 사람은 약혼식 전까지는 적당히 셀러브리티 노릇을 해 보기로 약조한 상태였다.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화제나 뿌려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해서 루카스는 리네트를 위해 수많은 돈을 지불했다. 보석상에서, 음식점에서, 심지어 들판에까지.

리네트는 겨울의 숲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낭비하는 거 아냐?”

“뭐 어때.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낭비해도 끝없이 남아 있는 걸.”

황자가 카멜리아의 아가씨와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괜히 날개 돋친 듯 퍼지는 게 아니었다. 루카스는 정말 온 힘을 다해 돈을 뿌리고 있었다. 당장 지금의 모습만 해도 그렇다.

수도 리시스트의 옆에 붙어 있는 큰 숲은 제국인들에게 크게 사랑받았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아무래도 커다란 인공 호수였다. 호수는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해, 제국인들은 그 근처를 산책하거나 때로는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었다.

오늘의 루카스는 그 호수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계곡의 마법사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배우기로 한 거야?”

“좋은 것을 답습하고 재현하는 것 또한 모범적인 지배자의 자세 아니겠어?”

계곡의 마법사는 밤의 초원에 털가죽 걸친 소파를 놓았다. 루카스는 거기서 영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황성에서 수십 명의 하인들을 부려 커다랗고 아름다운 유리 테이블을 놓고, 푹신한 의자도 함께 가지고 왔다. 리네트의 발밑에는 아늑한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따뜻한 차가 앞에 놓였다.

낙엽이 뒹구는 풀밭 위에서 호수를 보며 차를 마시는 것은 상당한 운치가 있었으나…….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저 멀리서 이쪽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보고 있으면, 그 운치를 즐길 생각도 들지 않는다. 심지어 근처에는 기사들과 시종들이 잔뜩 도열한 채다.

이래서야 일부러 구경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기껏 병원에 잔뜩 기부해 놓고 뭐 하는 거야. 때를 모르고 사치하는 황자라고 소문날 거야.”

“구혼 상대에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건 남자들의 기쁨인걸.”

심란한 리네트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손가락 끝으로 쿠키를 부수던 루카스가 눈을 찡긋했다.

“뭣하면 그대가 잘 써 주시지요.”

어차피 신문도 네가 쓰잖아, 라는 뜻이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곁눈으로 뾰족하게 응시하며 차를 마셨다.

쿠키를 마저 부순 루카스가 그것을 집어 발밑으로 떨어트렸다. 밑에 있는 개 한 마리가 냉큼 쿠키를 받아먹었다. 독을 피하기 위해서다.

리네트는 손을 뻗어 흰 개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개는 으르렁거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리네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기가 차 웃음이 나왔다.

“얘는 으르렁거릴 거면 무릎에 앉질 말든가, 아니면 얌전히 안기든가.”

“이 종의 개들은 대체적으로 성격이 그렇지. 타고난 성격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황성에서 많이 키워. 독이 든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든.”

루카스가 낮게 웃으며 리네트의 품 안에 있는 개에게 손을 뻗었다.

개는 루카스에게도 예외 없이 으르렁거렸고, 손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를 드러냈다.

어이쿠, 무서워라. 루카스가 손을 빼내며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귀여워서 어김없이 자꾸 손을 뻗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황성에서 키우는 거 아냐?”

“그래. 처음에는 왜 이런 개를 키우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개와 리네트를 번갈아 응시했다.

“요즘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나를 개에 비교하는 거야?”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리자, 루카스가 하하 웃으며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잡아떼기냐- 하고 말하려는데, 루카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네가 훨씬 더 귀엽지.”

리네트는 이번에야말로 이마를 확 찡그렸다. 이런 종류의 상황을 한두 번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석상에서, 자선 파티에서, 기부 단체에서, 의료원에서, 음식점에서…… 루카스는 애정을 과시한답시고 그녀에게 꿀 바른 듯 달콤한 말을 늘어놨다.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그녀도 여상히 그 말을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 어려웠다.

과시적인 말들 속에 섞이는 눈빛은 이제 슬슬 도를 넘고 있었으므로.

루카스처럼 그렇게까지 잘생긴 얼굴의 경우, 보통은 그 잘생김에 가려 미묘한 표정은 읽기가 어렵다.

하나 리네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최근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졌노라고.

눈 밑의 살이 둥글게 솟으며 휜다. 풍성한 위아래 속눈썹이 겹쳐지고, 작은 눈주름들이 겹치고 겹쳐 여지없이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낸다.

리네트는 그럴 때마다 짜증 나게도 가슴이 뛰었다.

사실, 처음 그가 자신에게 접근하고 제 제안에 응한 것은 순전히 재미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 버금가는 절박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리네트가 그를 타박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야말로 그에게 철저히 흥미 위주로 관심을 던지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간 크게도 제 사람에게 해를 입힌 것이 기가 막혀 제가 가진 어설픈 위치로 눌러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생각이 달라진 것은 그의 얼굴을 보고서다. 망할 그 얼굴 때문에 리네트는 그와 어울려 볼 생각을 했다. 그의 대척점에 저주받을 에드가 발란이 있었기도 하고.

그리고 그 이후의 관계야, 철저히 이익과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리네트는 ‘사실은 그게 이 남자 얼굴을 조금 더 구경하기 위함이었던가?’ 하고 가끔 고민하게 됐다.

그 잘난 얼굴에게 매분 매초 사랑을 고백받고, 가끔은 손가락이 스치고, 입술을 거절하면서도 결국 가슴이 뛰고 마는 지금 상황들이 그리 불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란히 앉은 그의 어깨와 자신의 어깨가 수없이 맞부딪혔다. 사실 리네트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전혀 몰랐을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제 어깨가 닿을 때마다 그렇게 눈 밑의 살을 달덩이처럼 부풀리며 웃는데, 어떻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북부에는 언제 갈 거야?”

리네트는 애써 말을 돌렸다.

신년회 이후 루카스는 북부로 향할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았으나 그가 떠날 것이라는 것만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글쎄, 아마 신년회가 끝나고 일주일에서 열흘은 넘기지 말아야겠지.”

루카스가 턱을 괴고 고민했다. 리네트는 모피를 고쳐 두르는 척하면서 그에게 닿은 팔꿈치를 뗐다.

루카스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리네트와 시선을 맞췄다. 그가 제 심정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한가요, 아가씨?”

금발의 황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리네트는 시선을 호수 쪽으로 돌렸다. 저 얼굴은 반칙이었다.

“네가 거기서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돼서.”

“이런. 덜떨어진 약혼자에 대한 우려였나.”

“그럼 뭔 줄 알았는데?”

리네트가 시선을 돌린 보람도 없이, 루카스는 리네트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고 목은 길게 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참으로 품위 없지만, 연인을 쳐다보는 남자의 포즈로는 완벽했다.

“약혼한 지 얼마 안 돼서 멀리 떠나가는 연인에 대한 아쉬움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기대가 크네?”

“그야 나는 아쉬우니까요, 아가씨.”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리네트의 장갑 낀 손을 청했다. 그는 남들 앞에서 리네트의 손등에 이마를 대는 것을 즐겼다. 귀족 여인을 대하는 황족의 예로는 최상이었으니, 약혼자를 아끼는 황자의 모습으로는 딱 좋았다.

덧붙여 노튼과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노튼과는 달리 품위 없을 정도로 제 연인을 싸고돈다.’는 말마저 돌았으니.

리네트는 익숙하게 제 손등을 내주었고, 곧이어 제 손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감촉에 기겁했다.

입술이었다.

보통 때와 같은 입맞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한데 루카스는 리네트의 손을 받아 뒤집은 뒤, 여지없이 내보여진 손바닥에 입 맞췄다. 엄지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둔덕과 새끼손가락을 받치는 근육 사이의 골에,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잠깐이 아니었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손바닥에 느리고 깊게 입 맞춘 후, 그녀의 손을 제 뺨에 댔다. 그 동작은 굉장히 천천히, 그러나 끊김없이 이어졌으며 사뭇 끈적했다.

분명 장갑을 끼었는데, 그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리네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웃으며 리네트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프라임 공작 이야기를 이것저것 했더군.”

……그렇게 웃으면 반칙 아닌가? 리네트는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 됐지만 빠르게 대답했다.

“고객 유치 차원이지. 어땠어?”

“성공적이야.”

루카스가 그녀의 손을 뺨에서 내려놨다. 그렇지만 손을 놔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 손을 겹쳐 잡으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면 대체 어땠을지 모르겠어. 그런 종류의 매물을 다루고, 고객과 밀고 당기는 일이 아주 능숙하더군.”

로가나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랬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말에 따라 몇몇 간자들을 동원해 정보상을 시험적으로 굴렸다.

모아 온 정보의 급을 나누어, 원하는 이들에게 팔아 치운다.

그러한 일을 로가나는 아주 능숙하게 해냈다. 자신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고는 했으나, 적성에 꽤 맞는 모양이었다.

최근 리네트가 사교계에 뿌린 프라임 공작에 대한 소문을 궁금해하는 이들은 많았고, 로가나는 능숙히 고객들을 유치했다.

몇몇 귀족들은 은밀히 접선해 프라임 공작이 정말로 루카스와 손을 잡았는지, 대가는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중 라베노바 백작도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초장에 대어를 낚은 셈이다.

리네트는 이번에는 진짜 정보만을 아낌없이 뿌리라고 일러 주었다. 정보상의 신뢰는 중요하다. 소문이 퍼지면 또 다른 고객들이 몰려올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에게 있어서 유리한 정보였다. 다들 정보를 듣고 루카스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것이다. 황제가 루카스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지만, 편은 많을수록 좋았다.

리네트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제 손을 잡고 있는 루카스의 체온 때문이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는 새삼스런 리네트의 시선에 눈을 깜박였다.

“손.”

“응?”

“손 놔줘.”

“아.”

보통 때였다면 루카스는 곧바로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주 정중하게 ‘실례했다.’고 말하면서 웃었겠지. 그러나 오늘의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잡고 있으면 안 되나?”

“…….”

“어차피 약혼할 사이인데 추운 날씨에 꼭 잡고 있는 것도 괜찮아 보이잖아.”

루카스의 말은 틀리지는 않았다. 자유연애가 유행 중인 작금의 수도에서는, 팔짱을 끼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맞대고 있는 연인들이 흔하게 목격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루카스의 핑계는 어찌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싸늘한 날씨에 손을 덥혀 주고 싶어서 연인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황자. 퍽 그 사랑이 애절해 보일 순 있겠지.

하나.

리네트는 주변을 둘러봤다.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은 대여섯 발자국쯤 물러서 있었다. 작게 말하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전에도 이런 말 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응?”

“점점 지나치지 않아, 당신?”

“뭐가?”

루카스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유들유들한 얼굴을 보니 좀 짜증이 나서 리네트는 빠르게 말했다.

“사람들 때문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단지 리네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뿐이라면, 호수 앞에 놓은 테이블과 찻물로도 충분하다. 굳이 손까지 붙들고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리네트는 손을 흔들어 루카스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불편해, 하고 말하려 했다. 루카스가 제 손을 다시 붙잡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리네트가 모피 안으로 감추려던 손을 다시금 붙잡았다. 그리고 리네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찔하도록 푸른 눈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

“…….”

리네트는 입을 닫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질문에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리네트가 시선을 피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리네트와 시선을 맞추고 다시 물었다.

“정말?”

리네트는 그 순간 황자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의 모든 풍경을 한꺼번에 훑었다.

호수 위로 낙엽 몇 개가 떨어져 물 자국을 남기고, 사람들은 이쪽을 흘끗거리면서도 저 멀리서 산책한다. 개는 여전히 저편에서 짖고 있고, 차가운 바람은 제 뺨을 괴롭혔다.

어지러웠다.

리네트는 기실 제 앞에 놓인 길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는 리네트를 이 세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녀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 답은 눈앞의 남자뿐이다.

‘정해진 해피엔딩’을 위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루카스와 언약하고, 그와 얽힌 채 끝까지 함께하는 삶.

사랑 따위 없어도 리네트가 그 길을 걷기만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대륙에서 가장 권세를 떨치고 있는 제국의 황자님. 엄청나게 잘생겼고, 제게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호의적이며, 어쩌면…….

어쩌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리네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말까지 정해져 있는 그 길을 마냥 따라 걷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네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도 북부에 갈래.”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데려가 줘.”

* * *

낸터킷 황후는 요즘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가 부리는 점복은 기차 사고가 있기 며칠 전, 불길한 그림자가 비치니 기차에는 타지 말라고 조언했다.

황후는 반신반의하며 기차에 타지 않았고, 사고가 난 것을 전해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은 황후의 심기를 해치기만 했다. 기차 사고로 제국이 뒤집어진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계곡의 마법사’가 저 얄미운 리네트 카멜리아를 불러낸 것이다.

낸터킷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있는데, 왜 그 여자애를?’

루카스는 보란 듯 리네트 카멜리아와 함께 계곡으로 떠났다. 그동안 그녀의 아들은 기약 없이 북부로 떠났다. 말이 철도 사업 유치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지난한 일이었다.

낸터킷 황후는 노튼이 떠나기 전날, 그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오오, 노튼. 그대를 그 추운 북부로 보내려니 마음이 비할 데 없이 아려 옵니다. 하필 점점 추워지는 때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해내고 오겠습니다.”

노튼은 수척한 얼굴로 낸터킷 황후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낸터킷 황후는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울었다.

착한 내 아들!

루카스 놈이 계집애 꽁무니를 따라 계곡으로 간 동안, 홀로 일하고 있는 제 아들이 안타깝고 대견하기만 했다.

“차라리 라베노바 백작을 대신 보내면 어떻소? 가엾은 알렉사를 두고 어찌 그대만 홀로 저 먼 북부에서 고생한단 말인가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알렉사가 움찔했다. 어쩐지 계속 어두운 얼굴로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알렉사, 그대라도 애원해 보세요. 어찌 이리 아리따운 약혼녀를 두고 떠난단 말인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낸터킷은 알렉사의 등을 떠밀었다.

알렉사는 주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사실 알렉사는 눈앞에서 황후가 이렇게까지 울고 불고 하는 통에 어쩐지 겸연쩍던 참이었다. 아무리 슬프다 해도 황후처럼 이렇게까지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연스레 알렉사는 한발 물러선 반응을 보였다.

그게 성에 차지 않은 황후는 곱지 않은 눈으로 알렉사를 흘겨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노튼을 보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한층 속을 뒤집어 놨다.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고 돌아온 루카스와 카멜리아 계집애가 황제에게 전한 이야기에, 낸터킷 항후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미친 것들! 내 아들이 없다고 그새 모함을 해!”

황제는 루카스의 말을 듣고 내치기는커녕 증거가 있느냐는 둥 캐물었다고 했다. 황후는 미치고 팔짝 뛰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점복을 불렀으나, 점복에게서도 아연한 답이 돌아왔다. 점을 칠 마력석을 구하지 못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낸터킷 황후는 그야말로 손발이 다 잘린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알렉사를 불러 한바탕 제 속풀이를 하곤 했지만, 노튼과 작별하던 날 알렉사의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아 보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사교계 여인들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 여인들은 말을 옮기는 걸 좋아했다. 낸터킷 황후가 입만 놀려도 그녀가 루카스를 증오해 악을 쓴다는 이야기가 퍼질 것이다.

가슴에 불이 난 듯 답답하고 뜨거웠다.

게다가 심란한 일은 또 있었다.

남부의 왕국들 앞에서 누름돌 노릇을 톡톡히 하던 제 오라비가 서신을 보낸 것이다. 마력석을 구할 수 없냐는 내용이었다.

군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야간 경비인데, 마력석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인 듯했다. 심지어 낸터킷 후작은 밤에도 낮처럼 잘 본다는 남부 왕국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오죽 불안하면 수도까지 서신을 보내겠는가!”

낸터킷 황후는 사방으로 사람을 동원해 마력석을 닥닥 긁어모았다. 그러나 그녀가 당황할 만치 수확은 없었다.

제국 창고의 마력석들 중 그나마 힘이 남아 있는 것들은 따로 분류되어 황제의 창고로 들어갔다. 황제의 창고는 황후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모든 걸 깡그리 불태워 죽이고 싶었다.

그녀가 황후 궁에 처박혀 매일매일 침구를 쥐어뜯고 있는 동안, 저 루카스와 카멜리아 계집애는 온 수도를 쑤시고 다니며 연애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더욱더.

“그것들은 구호 활동도 하지 않는다더냐!?”

“그것이…….”

제 앞에서 시녀 하나가 겁에 질려 허리를 조아렸다.

“루카스 황자님께서는 이미 엄청난 양의 황금을 쾌척하고 계시다 합니다.”

“돈이면 다 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게…… 다 된다고 할 정도로 많은 양인지라…….”

시녀가 우물거리다가, 대번에 뾰족해지는 황후의 눈길을 보고 겁에 질려 말을 흐렸다.

황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그 돈이 다 어디서 났단 말이냐! 황자에게 지급되는 가용비는 일정하지 않느냐!”

“그것까진 저도…….”

기가 막혔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지금 구호니 뭐니 하며 뿌리고 다니는 돈은 황후의 사재에 육박했다.

노튼이 몇달 전 배럴 남작이라는 자금줄을 잃은 후로, 매번 가용비가 모자라 허덕이는 것을 보다 못해 제 사재를 털어 준 것만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겼다.

‘한데 대단한 지지 기반 하나 없는 그놈에게 대체 돈이 어디서 났단 말이야!?’

낸터킷 황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백작도 모른단 말이오?”

라베노바 백작을 불러 묻자, 라베노바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소문이 있긴 합니다만…….”

“무슨 소문이든 아는 대로 다 말해 보시오.”

“리네트 카멜리아 양이 프라임 공작의 이름을 입 밖에 냈다 합니다.”

의외의 이름에 낸터킷 황후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설마 프라임 공작이 그들에게 돈을 대고 있는 것인가?

“프라임 공작가는 선대부터 수도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지 않소?”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라베노바 백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프라임 공작이 퍽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였다고, 카멜리아 양이 최근 열린 자선 파티에서 말했다 합니다.”

“그 호의적인 제스처가 단순히 안부 인사를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작정하고 붙어먹은 것인지는 모르지 않소!”

황후치고는 퍽 조야한 언사였으나, 낸터킷 황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짜증이 나 있었다.

라베노바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저도 알아보고는 있으나…….”

“백작은 북부에서 고생하고 있는 노튼이 가엾지도 않소?”

황후의 추궁은 계속됐다. 라베노바 백작은 한참 동안이나 낸터킷 황후의 짜증을 견뎌야 했다. 오죽하면 시녀들이 안타까운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였다.

라베노바 백작은 몇 번이나 자신이 정확히 알아보겠다고 약조하고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낸터킷 황후가 패악을 부린다는 소문은 황성 안에 짜하게 퍼져 나갔다.

예민한 황후는 모든 것을 트집 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던 시녀는 잠시 빗을 바꾸기 위해 자리를 떴다가 뺨을 맞았으며, 또 다른 시녀 하나는 그녀의 손톱에 얼굴을 다쳐 상처가 남았다. 궁내부장은 얼굴에 상처가 난 시녀를 위해 위로금을 주어야 했다.

결국 알렉사가 다시 입성했다.

황후는 친한 부인들이 없었다. 정확히는 예민한 그녀의 벗이 될 수 있는 귀부인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녀의 말 상대라도 할 사람은 알렉사뿐이었다. 알렉사가 노튼에게, 그리고 낸터킷 황후에게 택해진 이유는 그녀가 조용히 상대의 말을 들어 주는 타입이어서였다.

알렉사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아침부터 낸터킷 황후의 내실을 찾아왔다.

“전하, 요즘 몸이 아프시다 해서 걱정이 되어 찾아왔답니다.”

“고맙군. 그런데 그건 무엇이오?”

알렉사는 꽃다발을 들고 빙그레 웃었다.

“겨울에는 보기 힘든 장미랍니다. 장미가 아름다워 전하께 드리고 싶어 제가 가져왔답니다.”

“어머나.”

낸터킷 황후에게 알렉사가 건넨 것은 생화가 아니라 유리석으로 만들어진 장미였다.

낸터킷 황후는 섬세한 유리석 장미들을 받아 보고 감탄했다. 겨울 오전의 햇살을 받은 장미들은 여리고 사랑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이런 물건도 있답니까?”

“한 보석상에서 만든 물건이랍니다. 유리로 만들어 아주 아름답고 섬세하지요. 시들지도 않아 장식해 놓고 감상하기 그만이랍니다.”

알렉사는 낸터킷 황후가 노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고, 황후의 상실감을 달래고 싶었다.

해서 최근 리네트에게 선물받은 장미를 보고, 낸터킷 황후를 위해 보석상에 따로 주문을 넣은 것이었다.

“이런 장인이 있다니, 세상엔 정말 대단한 재주를 가진 이들이 많군요. 마음에 듭니다.”

시녀들은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두들 최근 낸터킷 황후의 패악에 기가 질린 참이기에, 제발 알렉사가 그녀를 달래 주길 바랐다. 그리고 알렉사는 훌륭하게도 시녀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건 어느 보석상의 물건입니까?”

유리 장미 열 송이를 구경하던 황후가 대뜸 저렇게 물어 왔다.

“아예 열 다발쯤 주문해 이곳저곳에 장식하면 좋겠군요. 내친김에 황실 납품 간판도 내주도록 하고요. 내가 고정적으로 주문하던 보석상도 좋지만, 슬슬 단골 구매처를 바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알렉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름을 말하는 것은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러나…….

“내일 당장 그 보석상을 들어오라고 해서 카탈로그를 받아 보도록 하지요. 이런 것을 만드는 상인이라면 아주 아름다운 상품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군요. ……알렉사?”

낸터킷 황후의 눈썹이 들썩였다.

“왜 말을 하지 않지요?”

낸터킷 황후는 사치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것에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어떤 물건을 사도 한때의 여흥으로 넘겼다.

그래서 알렉사는 유리석 장미 또한 황후가 보고 기분전환을 하는 정도에 그칠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리석 장미를 구입한 보석상은 최근 루카스와 리네트가 드나들어 유명세를 떨친 곳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나중에라도 그 보석상을 불러들여 보석을 산다면…… 그 후에는 어떤 소문이 퍼질까?

루카스의 안목이 황후보다 앞섰다는 말이 돌 것이다.

알렉사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 패착이었다. 다른 선물을 골랐어도 됐을 것을.

차라리 거짓말을 할까?

하지만 알렉사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콘페라스라고 합니다.”

알렉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시녀들 중 몇몇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시녀들은 중류 귀족 신분이 대부분이었고, 루카스가 쓸어 갔다는 그 보석상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알렉사는 부디 황후의 귀에 소문이 늦게 들어가기를 바랐다. 적어도 황후가 내일쯤에는 바빠서 보석상을 보기로 했던 것을 깜박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운이 나빴다.

황후가 이미 들어 본 이름이었던 것이다.

“콘페라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콘페라스. 콘페라스. 황후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굴렸다.

알렉사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식은땀이 났다.

황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의 시녀에게 물었다.

“내가 그 이름을 들은 바 있느냐? 분명 들어 봤는데 기억이 안 나는구나.”

시녀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녀는 도움을 바라는 얼굴로 알렉사를 쳐다봤다. 알렉사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최근 이름을 알리고 있는 보석상이라, 아마 다른 부인들에게서 들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최근에 귀부인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디 보자, 내가 최근에 만난 건…….”

황후가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뚝, 동작을 멈췄다.

실내의 기온이 순식간에 북부 귀라르델 산맥의 꼭대기만큼 떨어지는 듯했다.

“……라베노바 백작에게서 이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백작께서 이런 물건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신기한 일입니다.”

알렉사가 애써 미소 지었으나, 이미 황후의 이마는 찌푸려져 있었다.

“알렉사.”

“예.”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이름은 내가 아는 사람이 드나든다는 가게인 것 같은데.”

“……그러신가요?”

알렉사는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굳은 표정이 됐다.

황후의 눈이 싸늘해졌다. 명백했다. 라베노바 백작은 루카스가 황금을 뿌리고 다닌다는 이야기에 첨언하여, 그가 드나드는 보석상과 음식점, 기부 단체의 이름까지 주워섬겼다.

그리고 콘페라스는 루카스가 물건을 싹 쓸었다는 보석상의 이름이었다.

기가 막혔다.

저 알렉사까지 나를 놀리는가!

황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석 장미를 알렉사에게 집어 던지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아름다워 보이던 유리석 장미가 어찌나 저주스러운지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알렉사 레미시어다.

알렉사는 아직 노튼과 결혼하지 않았고, 황후가 화를 내 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알렉사가 목에 걸고 있는 레미시어 오팔이 때마침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황후는 심호흡했다.

“알렉사.”

“……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지요?”

“예.”

알렉사는 아까보다 확연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는 주먹을 꾹 쥐었다. 길게 길러 아름답게 손질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내가 그대를 카멜리아의 사생아 계집에게 보낸 이유는, 모쪼록 모범이 되어 그녀를 이끌어 주기 위함이었지요.”

“예…….”

“그 계집애가 하는 것을 따라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알렉사가 뭐라 대답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푹 숙였다.

황후는 그마저도 화가 났다. 알렉사가 최근 리네트 카멜리아와 하하호호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은 황후 또한 알고 있었다. 남들은 알렉사 레미시어마저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넘어갔다고 소근댔다.

하지만 황후는 확신이 있었다. 알렉사는 자신을, 그리고 노튼을 위해 리네트 카멜리아와 친한 척하는 것뿐이라고. 리네트 카멜리아와 만나면 매번 자신을 만나러 와 카멜리아 계집애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담담히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흔들렸다. 방금 알렉사가 고개를 들었다 내린 동작 때문이다.

‘설마하니 방금 내 앞에서 그 계집애를 두둔하려고 한 것인가.’

황후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녀가 손에 집히는 것을 집어 던지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알렉사 레미시어가 아직 노튼과 결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렉사. 오늘 나는 그대에게 아주 실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군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세요.”

알렉사는 말없이 일어나 무릎을 굽힌 후 돌아섰다.

시녀들이 황급히 앞으로 가 문을 열어 주는데, 황후는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 장미는 갖다 버려라.”

황후의 말을 들은 알렉사의 어깨가 움찔했다. 시녀가 눈치를 보자, 황후가 말을 이었다.

“갖다 버릴 때 반드시 깨라. 자근자근, 조각 하나 남지 않게 가루로 만들어 버리렴.”

예에,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알렉사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했다. 어릴 적부터 그 몸가짐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알렉사 레미시어는 어깨 한 번 떨지 않고 우아하게 사라졌다.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알렉사가 나가자마자 황후는 곧장 제 옆에 놓여 있던 간식 접시를 문으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치우는 것은 당연히 시녀들의 몫이었다.

* * *

다음 날 황후를 찾은 것은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마력석이 없어 절절매던 점복이 소량이기는 하나 점칠 만한 마력석을 구해 황후에게 기별을 넣은 것이다.

심란하고 화만 나던 차에 황후는 아주 반갑게도 점복을 맞았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점쟁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머리가 희끗희끗 벗겨지고 있는 그는 헤헤 웃으며 황후에게 절을 올렸다.

황후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맞은편에 앉혔다.

“그래, 마력석을 구했다고.”

“예에. 제가 운이 좋아…….”

점쟁이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황제 폐하도 구하지 못해 안달인 마력석을 어디서 구했단 말이냐. 운이 아니라 재주가 좋은 것 아니냐?”

“아이고, 본래 점복이라는 것들은 베푼 대로 돌아오기 마련인지라.”

점쟁이의 사연은 신묘했다. 집을 나오는데 웬 거지 계집애가 제집 담에 기대 있더란다. 처음에는 도둑인가 싶어서 내쫓으려다가, 하는 짓이 며칠 굶은 것 같아 음식이나마 먹고 가라며 내주었다.

점은 마법과 비슷하지만 자연에 더 의지하는 것이라, 점쟁이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베풀면 그 운이 제게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거지 계집애는 몇 번이고 인사하더니, 다음 날 웬 꾸러미를 가져왔다.

거지가 가져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흰 꾸러미’라 점쟁이는 이마를 찡그리며 그것을 풀어 보았는데, 그 안에는 마력석 대여섯 개가 있었다.

“아니, 거지가 마력석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게 더 이상한데.”

“그게, 예전에 제 가족과 헤어질 때 팔면 큰돈이 될 거라고 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아무도 사 주지 않았다나요. 보아하니 그게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샀지요. 거지 아이도 희희낙락하며 돌아갔습니다.”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마력석을 내놓자, 황후는 그것을 집어 관찰했다. 틀림없는 마력석이었다.

“신기하군.”

“예에. 아무튼 점을 잠시나마 볼 수 있게 되어, 가장 먼저 전하를 찾았답니다.”

황후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점쟁이가 들어오기도 전에 시녀 대부분을 물린 차였다. 황후의 곁에는 시녀 두어 명뿐이었다. 그 둘조차도 황후는 멀리, 방 끝으로 물렸다. 제 말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눈치 빠른 시녀 하나가 커튼을 치고 문간으로 물러섰다.

“자,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제가 계속해서 점을 치지 못했으니 아마 이번 점은 꽤 잘 나올 것입니다.”

“점이란 게 한동안 안 본다고 잘 나오는 것인가.”

“점을 보는 것도 기력의 하나이니 말입니다.”

점복은 황후의 앞에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천을 깔고 동그란 나무통을 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 마력석 세 개를 넣은 후 뚜껑을 닫았다. 뚜껑 위에는 수많은 별들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여름의 별자리였다.

그 옆에 철로 된 넓은 접시를 놓고, 점쟁이는 숯탄을 올려 불을 붙였다. 곧 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후의 내실에 옅게 연기가 퍼졌으나 황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뒤이어 점복은 나무통 위에 월계수 가지를 올렸다. 그 가지 위에 손을 얹은 후, 중년의 남자는 황후에게 미소 지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내가 요즘 심란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노튼이 북부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잘 지내지 못한다면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더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 그 얄미운 첫째와…….”

거기까지 말하고 황후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쯤 해서 방 안에 남은 자들은 모두 황후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건만, 이럴 때마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멜리아의 사생아 계집애가 어찌나 활개를 치고 다니는지 두고 볼 수가 없다. 저번에 네가 불길한 그림자가 보인다고 하더니, 그 말이 아주 꼭 맞더구나.”

“그러셨습니까?”

“그래! 그 재수 없는 계집애 때문에 수국 나무를 다 밀었는데, 하늘에 수국 비를 뿌려서는!”

황후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 계집애가 알렉사까지 꾀어내었나 싶어 아주 머리가 복잡하다.”

“좋습니다. 먼저 황후 마마와 황자 전하의 별을 보도록 하지요.”

황후는 익숙하게 제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노튼의 물건은 미리 준비해 둔 손수건이었다.

점쟁이는 두 개의 물건을 숯 위에 올렸다. 화르륵, 머리카락은 금세 탔고 손수건은 불이 붙었다. 매캐한 연기가 오르자 점쟁이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마력석 품질이 좋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제가 쉬어서 좋은 기운이 쌓였든가.”

“그러냐.”

“이전보다 한층 명확하게 보이는군요.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점쟁이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의 운은 북쪽에 있긴 합니다. 다만 고난이 있군요. 전하의 별이 지금 힘을 발하지 못하는 시기입니다. 이런…….”

“왜, 왜 그러느냐.”

황후가 급히 물었다. 점쟁이는 이마를 찡그렸다.

“이상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분명…… 이 별이 그런 별이 아닌데…….”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보아.”

“레미시어 아가씨의 별이…….”

“알렉사 말이냐?”

“예에. 아가씨의 별은 본디 전하의 별을 뒷받침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배치가 이상합니다. 아가씨의 별이 전하의 별 위에 올라왔군요.”

“뭐라고?”

“이건 예상한 적 없는 일인데…… 전하. 일단 황후 전하의 별을 보겠습니다. 황후 전하의 별은 다행히도 별 이상이 없군요. 조금 빛이 흐려졌지만 그건 잠시 지나가는 구름 때문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는 별일 없다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노튼의 별을 알렉사가 가리고 있다니!

황후는 점쟁이의 점 판에 바짝 다가섰다. 그리 들여다봐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점쟁이는 월계수 가지를 한 번 흔들었다.

“노튼 전하의 별은…… 이상합니다. 원래 이 시기에 전하의 별은 가뜩이나 힘을 받지 못하는데, 힘을 전해 줘야 할 레미시어 양의 별이 오히려 전하의 힘을 빼앗고 있군요.”

“어째서냐!”

황후가 소리치자 점쟁이가 이마를 찡그렸다.

“잠시 보겠습니다. 그…… 레미시어 양의 근처에 이상한 별이 하나 있군요. 푸른…… 푸른빛을 가진 별입니다. 작은 별인데…… 아하, 별 무리를 거느리고 있어서 그렇군요.”

푸른 별? 황후는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어쩐지 그 정체가 짚일랑 말랑 했다.

“별 무리…… 문제는 이 별 무리입니다. 레미시어 양의 별이 그 별 무리에 이끌려 황자 전하의 별 주변을 이탈했군요.”

“이탈했다고?”

“예.”

점쟁이는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던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황후를 바라봤다.

“안 됩니다, 이건.”

“무슨 말이냐.”

“레미시어 양의 별이 이미 전하의 별을 떠났습니다.”

점쟁이는 황후가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후는 눈에 힘을 주더니 되물었다.

“사실이냐.”

“예.”

“내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묻는 것이다. 혹시 그 푸른 별이 카멜리아 계집애의 것이냐.”

점쟁이는 잠시 망설였다.

“그것을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만, 제가 가진 마력석은 한 번 더 점을 볼 정도만 남아 있는지라…….”

“그래?”

황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알렉사가 그 카멜리아 계집애에게 홀려 노튼을 배신한단 말이냐.”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 푸른 별은 제가 록시온에서 봤던 그림자와 비슷합니다. 아마 전하께서 생각하는 사람이 맞겠지요. 제가 본 것이 맞다면, 레미시어 양의 별은 이미 노튼 전하의 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떠났다고 보셔도 될 겁니다.”

황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최근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그 애를 카멜리아 계집애에게 붙인 건 그 계집애를 찍어 눌러 버리려는 것이었는데, 알렉사는 도리어 그 계집에게 홀려 버린 것 같더구나.”

점복은 가만히 손을 모았다. 이럴 때 황후에게 말을 섞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황후는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좋다. 노튼의 운을 보자. 다른 것보다 노튼을 보는 것이 가장 명확하겠지.”

“예에.”

점쟁이는 다시 마력석을 바꾸어 넣었다. 통 안에서 한 번 사용된 마력석은 평범한 돌로 변해 있었다.

그가 월계수를 재차 흔들고,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아,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것이냐?”

“아니, 아닙니다. 레미시어…….”

또다시 알렉사의 이름이 나왔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주먹을 쥐었다. 점쟁이는 물끄러미 허공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카멜리아.”

“그 계집애 말이냐?”

“아니오, 아닙니다.”

점쟁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푸른 별 무리 때문에 황자 전하의 별은 북부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 뒤에 더 큰 뭔가가 있지만, 그것보다 제 시야를 가린 게 있습니다.”

남자는 가지를 내려놓고 말했다.

“카멜리아 양이 아닌, 다른 카멜리아가 때가 되면 접근해 올 겁니다. 길은 거기에 있습니다.”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노튼을 북부에서 데리고 오는 게 낫단 말이냐?”

“아뇨, 아닙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점쟁이는 뭔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황후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리십시오. 카멜리아의 별이 접근할 때까지.”

“…….”

“그때까지는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지금은 움직여 봤자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습니다. 황후 전하의 별도 구름에 가린 형국입니다. 다만-”

“다만?”

“……레미시어 양의 별은 이제는 떼어 두시는 게 좋습니다.”

점쟁이를 불러들일 때는 좋은 결과를 보리라 생각했는데, 심란함만 가중됐다.

황후는 점쟁이를 물리고 황후 궁의 문을 닫았다.

그날부터 낸터킷 황후가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차 사고 때부터 계속해서 아프다는 황후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황후 궁은 아무 기별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황후 궁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울며 달려온 알렉사 레미시어가 황후 궁의 문을 하루 종일 두들겼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열리지 않았단 이야기만 ‘리시스트의 아침’ 한편을 장식했다.

* * *

신년회를 며칠 앞두지 않은 날이었다.

리네트는 아침부터 바빴으나, 그 모든 일정을 미루고 새벽부터 달려온 제 친우를 맞았다. 알렉사였다.

“리네트.”

“예.”

“물을 게 있어요.”

알렉사의 얼굴은 초췌했으나 그 기품은 여전했다. 여느 귀족 아가씨들이라면 채 눈을 뜨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리네트는 담담히 알렉사를 맞았다.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이다.

“말씀하세요.”

“리네트가 ‘리시스트의 아침’에 제 이야기를 썼나요?”

“아니요.”

리네트가 고개를 젓자 알렉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먼저 분명히 해 두고 싶었어요.”

“아뇨, 제가 더 미안해요. 베티에게 알렉사는 나의 친구라고 더 분명히 이야기해야 했는데.”

‘리시스트의 아침’에 쓰인 알렉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견고한 황후의 내리사랑도 끝이 났는가.

(전략)

그리하여 알렉사 레미시어 양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눈물로 물들이며 황후 궁의 문을 직접 두드렸다.

그러나 황후 궁은 그녀를 외면했다. 레미시어 양은 황후 궁을 두들기며 ‘전하! 알렉사가 잘못하였습니다!’라고 외쳤다는 황성 관계자의 증언이 있었으며…….

(후략)]

“리네트, 말해 두지만 그 기사는 사실과 달라요.”

“알아요. 알렉사가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제가 더 잘 알아요.”

리네트는 분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알렉사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맹세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 없었기에 리네트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알렉사?”

“아뇨, 리네트. 사실과 다르지만…… 리네트가 생각하는 쪽은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알렉사의 뒤이은 말에 리네트는 얼굴을 굳혔다.

“저는 황후 궁 앞에서 쓰러져 울었거든요.”

사실이라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렉사. 제발 나를 이해시켜 줘요.”

“리네트.”

아름다운 빨간 머리카락은 힘없이 땋여 어깨에 늘어트려져 있었다.

리네트는 언제나 선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울분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믿지 않았어요. 웃으며 지나쳤죠.”

“…….”

알렉사는 리네트를 쳐다보다가, 제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어쩌면 운명은 이렇게까지 잔인할까요…….”

* * *

리네트가 알렉사 레미시어의 티파티에 유리석 장미 다발을 들고 방문한 것은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알렉사는 그녀를 제 옆에 앉히며 더없이 반겼다.

그리고 티파티가 끝난 후, 리네트는 알렉사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알렉사.”

“네. 말씀하세요, 리네트.”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리네트를 보고 알렉사는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대관절 무슨 말씀이시기에 저의 용감한 친우 리네트가 이렇게 망설일까요?”

그리고 리네트가 한 말은 알렉사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리네트는 알렉사에게 자신이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알렉사. 내 말 잘 들어요.”

“네, 네에…….”

“마법사는 노튼이 당신의 운명이 아니라고 했어요.”

“리네트.”

“아마 당신에게 말하면 당신 또한 알아챌 거라고 했어요. 운명이 아니기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만났기에 느껴지던 작은 삐걱거림들을요. 마법사는 조만간 그 삐걱거림이 균열이 될 것이고, 당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커질 거라고 했어요.”

“농담이…… 과하네요.”

리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아녜요. 마법사는 자신이 그녀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 봐야, 제가 결국은 우정 때문에라도 당신에게 달려가 이 이야기를 할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마법사는 당신에게 닥친 슬픔을 위로해 주라고 내게 말했어요.”

알렉사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물들었다.

“리네트, 저는 이런 이야기…….”

“납득하기 어렵겠죠, 알렉사. 나중에라도 위로가 필요하다면 나를 찾아오세요. 그때 마법사의 나머지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리네트와 알렉사는 작별했었다.

* * *

알렉사의 뽀얀 뺨은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황후 전하는 제가 전하를 모독했다고 하셨어요. 저는, 저는 그저 전하가 기쁘셨으면 했어요.”

“알렉사.”

“저는 황후 전하 또한 제 어머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아니셨나 봐요.”

리네트는 한숨을 쉬며 알렉사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근처에 서 있던 로가나가 재빠르게 나가 문을 닫았다.

이제 방에는 두 여인뿐이었다. 알렉사는 리네트의 품에 안기자마자 숨이 터져라 울기 시작했다.

“전, 전하는, 제가 노튼 전하의 옆에 설 자격이 없다고…….”

“…….”

“리네트의 말대로, 흑. 저는 그걸 믿지 못하고…….”

리네트는 알렉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알렉사는 한참이나 울었다.

겨우 눈물이 잦아들 때쯤 리네트가 알렉사에게 속삭였다.

“마법사는 그랬어요. 선한 당신은 그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다 말라 죽고 말 거라고.”

“…….”

“알렉사.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내가 한 가지 더 알려 줄까요?”

알렉사가 젖은 눈을 들어 리네트를 올려다봤다. 리네트는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 푹 한숨을 쉬었다.

“……황후 전하는 그 장미가 싫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저 그건 트집거리였던 거죠.”

“무슨 말인지…….”

“황후 전하는, 점을 믿어요.”

“……알아요. 그런데…….”

“알렉사. 당신은 지금도 황후 전하께 잘못했다고 빌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겠지요?”

리네트의 말에 알렉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리네트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황후 전하께 물어보세요. 신년회에는 나오실 테니. 점 때문에 당신을 내쳤느냐고요.”

“……설마…….”

“마법사는 그것까지 제게 예언했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고, 요행만 좇는 자들은 결국 그 빈약한 믿음 때문에 당신을 내칠 거라고.”

“……정말인가요?”

“알렉사.”

리네트가 알렉사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알렉사의 눈물로 제 가슴께가 젖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분명 알렉사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 거예요. 더 좋은 사람이.”

그 말에 알렉사는 또다시 목이 메어라 울기 시작했다.

리네트는 알렉사의 흐트러지기 시작한 붉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속이 쿡쿡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카스는 또 제게 동정심이 많다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알렉사를 좋아했다. 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를,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준 아가씨를 노튼과 함께 묻어 버릴 수는 없었다.

* * *

알렉사 레미시어가 황후에게 내쳐진 것 같다는 소문이 수도에 돌았다.

정작 그 소문을 만든 장본인은 태연한 얼굴로 편지를 분류하고 있었다. 신년회를 이틀 앞둔 시점, 수많은 초대장과 청구서가 배달 온 참이었다.

리네트는 로가나에게 사인한 청구서를 건넸고, 로가나는 그것들을 한쪽에 분류했다. 그리고 연서.

“아드빌 벨레이온…… 끈질기네.”

리네트는 그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책상 한쪽에 던졌다. 아드빌 벨레이온은 최근 그녀에게 꽤 끈질기게 연서를 보내는 이였다.

리네트에 관해 퍼진 소문 중 가장 주요한 소문은 루카스 리시스트가 그녀에게 보낸 구혼금으로 인해 리네트 카멜리아의 지참금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루카스 황자는 구혼금 전부를 핌 은행에 그녀의 이름으로 예치했다고 한다. 그 금액은 실로 엄청났고, 처음에는 평민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욕하던 귀족들도 점차 태도를 바꿨다.

리네트가 루카스의 구혼을 받아 주지 않고 있는 것도 한몫해, 그녀에게 연서가 제법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은 그녀에게 시간을 내 달라는 것부터, 파티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으니 교제 신청을 받아 달라는 본격적인 것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가문의 재산을 손에 넣기 힘든 둘째나 셋째들이었다.

아드빌 벨레이온은 그중에서도 꽤 끈질긴 부류였다. 그 많은 연서들 중 반 이상이 아드빌 벨레이온의 것이었으니, 리네트로서는 고개를 내저을 만했다.

그때,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를 뚫고 루카스가 타운 하우스를 방문했다.

어깨에서 비를 떨어내며 들어온 루카스는 문을 열어 준 로가나에게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의 당밀 사탕 상자를 건넸다.

그러나 로가나는 고양이처럼 어깨를 움츠리고는 그 사탕을 받지 않았다.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할 정도로 그대에게만 충성하는군.”

“로가나, 받아 둬.”

리네트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로가나는 그제야 당밀 사탕을 받아 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난폭한 손길에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자. 이건 그대 것.”

“뭐야?”

“캐러멜.”

“거기 둬.”

루카스가 가져온 캐러멜 상자는 안중에도 없이, 리네트는 청구서 하나를 살펴보며 사인했다. 얼마 전 주문한 종이 대금이었다.

“그런데 알렉사 양은 어떻게 됐나?”

“어느 정도는 내 생각대로, 어느 부분은 생각보다 더 심하게.”

루카스는 재킷을 벗어 난롯가에 대강 걸어 두고는 셔츠 차림으로 앉아 리네트를 바라봤다.

“궁금한데.”

“점쟁이가 황후에게 달려간 건 내 생각대로.”

“또?”

“황후는 내 생각보다 더 심하게 알렉사에게 대한 것 같아.”

리네트는 티파티 초대장을 열었다. 별 볼 일 없는 초대장이었다.

거절 편지를 쓰기 위해 깃펜을 들며 리네트는 점복에 관해 생각했다. 마력석이 없어 애먹는 것은 마법사들뿐만은 아니었다.

* * *

지젤은 실로 오랜만에 리네트를 방문했다.

그녀가 계곡의 마법사를 만났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진 참이었다. 마탑이라고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리 없었다.

마탑에서는 리네트를 만나려고 별짓을 다 했다. 그러나 황실에서는 리네트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리네트가 들어앉은 타운 하우스에는, 황자의 호위 기사 말고도 황성의 기사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뱁새 한 마리가 타운 하우스로 날아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지젤이 짹! 하고 울자, 리네트는 깜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지젤!”

“야, 들어가기 전에 말할게. 너는 나한테 빚 있지, 그치?”

지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리네트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나한테 빚졌으니 계곡에서 마법사 만난 얘기를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픽 웃은 그녀는 지젤이 앉은 창틀에 ‘흰 꾸러미’를 올렸다. 지젤이 까만 눈을 깜박거리다가 그 내용물을 알아차리곤 대경실색했다.

“야, 이게 뭐야! 너 어디서 났어!?”

“계곡에서.”

“대박 사건! 나 이거 줘!”

“안 돼, 인마.”

리네트가 꾸러미를 홱 낚아챘다. 뱁새는 창틀에서 버티던 것도 잊고 홀린 듯 창문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리네트는 손가락을 세워 들어 보였다.

“내 부탁 들어주면 좀 나눠 줄게.”

“뭔데!”

“마력석에 마법 좀 깃들여 줘.”

그 말에 지젤이 딱 멈췄다.

그랬다. 리네트가 내민 것은 마력석이었다. 계곡의 마법사에게서 필요하다고 사정해 얻어 온 물건. 제국에 몇 개 남지 않은, 힘을 잃지 않은 마력석.

“……사람 죽이는 마법은 안 되는데?”

“그런 거 아냐, 멍청아. 넌 날 뭘로 보는 거야?”

리네트가 뱁새를 손에 움켜쥐고 들여다봤다. 뱁새는 지지 않고 짹짹거렸다.

“동물 학대자!”

“네가 동물이냐?”

“지금은?”

잠깐의 소란 뒤, 결국 지젤은 마력석의 유혹에 굴복했다.

“무슨 마법을 부리면 되는데?”

“너 점성술 알아?”

“별 보는 거?”

제국에서 개인적으로 마력석을 쓰는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마법사와 점술사들.

마법사들이 막대한 양의 마력석을 소모하는 데 반해, 점술사들은 꽤 적은 양을 쓰긴 했다. 그러나 마력석이 없으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법사와 그 결을 같이했다.

그리고 리네트는 마력석에 환상이 깃들게 하길 지젤에게 부탁했다.

“구체적인 환상은 필요 없어. 그 점복이 내가 원하는 내용을 보길 바라.”

“야, 너 그런 게 더 어려운 마법인 거 알기는 해?”

지젤은 투덜거리면서도 마력석을 열심히 챙겼다.

“나도 대충 알거든? 괜히 어설프게 환상 마법 부리는 것보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걸 기반으로 환상을 보여 주는 쪽이…….”

“아, 알았어, 알았어. 이 비전문가야. 근데 맨입으론 안 돼.”

“마력석 줬잖아!”

“마력석 몇 개 갖고 너무 부려 먹는다!”

지젤이 짜증스럽게 지저귀었다. 리네트도 지지 않았다.

“지금 마력석 어디서 구할 수도 없는 거 아주 잘 알거든!?”

리네트의 말이 맞았다. 어쨌든 마력석이 필요한 쪽은 지젤이었다.

“계곡의 마법사 이야기도 해 줘.”

“싫은데?”

“야, 제발. 내가 망토도 주고 이거저거 해 줬잖아.”

그녀는 잠시 지젤을 째려보았다. 어쨌든 그녀는 지젤에게 제법 많은 빚을 졌다. 지젤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얘기해 줘야 돼?”

“어? 그럼 좋지. 왜? 시간 걸려?”

“나 마법사하고 약속했어. 남한테 말 안 하기로. 근데 6개월 후에 내가 그 사람 만날 일이 좀 있을 거 같거든.”

“뭐!? 또 만나!?”

지젤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게 그렇게 반가운 소식이니?”

“당연하지! 계곡의 마법사한테 궁금한 게 얼마나 많은데!”

결국 리네트는 ‘마법사가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젤이 궁금하다는 거 6개월 후에 물어봐 주기.’라는 조건으로 거래를 일단락 지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지젤이 마법을 부려 놓은 마력석을 점쟁이에게 우연을 가장해 가져다주고, 그가 황후에게 달려가도록 한다.

그리고 가엾은 알렉사는…….

* * *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알렉사의 눈물 젖은 뺨이 생각나서다.

어쨌든 리네트는 알렉사가 노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노튼과 황후에 대해 석연찮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알렉사가 노튼 황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

제 이기심으로 알렉사를 노튼과 떼어 놓은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사실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리네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황후가 알렉사를 좀 멀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두고 그녀가 천천히 멀어지게 하고 싶었는데…….

“알렉사가 생각보다 너무 상처받은 것 같아.”

리네트가 한숨을 내쉬자 루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대는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한 것 같아.”

“내가 내 방에 당신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정한 게 아닐까? 바라는 게 많으세요, 황자님.”

루카스가 하하, 웃으며 난롯가 주변을 서성이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연서.”

“이런, 나도 꽤 만만한가 보군.”

“무슨 소리야?”

티파티 거절 편지를 마저 쓰던 리네트가 루카스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편지들을 흔들었다.

“내가 구혼하고 있는 아가씨가 퍽 매력적인가 봐. 내가 버티고 있는데 이렇게 연서를 마구 보내고.”

“난 또. 열어 보지도 않았으니 놔둬. 나중에 다 태울 거야.”

“이런, 귀라르델의 바람보다 싸늘한 아가씨. 어디 보자…….”

루카스는 궁금해하며 연서 더미를 뒤져 한 편지를 꺼냈다.

그에 로가나가 리네트에게 물었다.

“쫓아낼까요?”

황자에게 하는 말임에도 심히 대단했다.

루카스는 ‘그 주인에 그 하녀로군.’ 하고 웃으며 편지를 뜯어 즐겁게 읽기 시작했다.

리네트는 고개를 내젓고는 로가나에게 ‘황자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네. 더 이상 못 보겠으니 머리 닦을 수건이라도 가져다줘.’ 하고 말했다. 로가나는 루카스에게 대하던 것과는 달리 아주 정중하게 리네트에게 고개를 숙인 후 나갔다.

“재밌어?”

“음, 다들 어디 같은 곳에서 배우나? 내용들이 전부 진부하군.”

“진부하면 그만 읽어.”

“하지만 좀 질투 나는걸. 이거 정말 안 읽은 거 맞지?”

루카스가 피식피식 웃으며 편지 몇 개를 넘겨 봤다.

“그런 게 궁금해?”

“당연하지. 어찌나 절절한지 나도 이 편지를 쓴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을 지경이야. 감동받아서 가슴이 저릿저릿하군.”

루카스가 제 가슴을 움켜쥐며 윽, 하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리네트는 기가 차서 코웃음 쳤다.

“그런데 아드빌 벨레이온? 이 이름은 왜 이렇게 많아? 누구야?”

“벨레이온가의 둘째. 준남작 가문의 둘째라니, 별 볼 일 없지.”

“별 볼 일 없는 거치고는 잘 알고 있는데.”

“하도 많이 보내니까 뭔가 싶어서 뜯어봤거든.”

“이것도 뜯어봤어?”

“왜?”

그제야 리네트가 눈을 들어 루카스를 바라봤다. 루카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편지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내용이 좀 격렬해서.”

“그래? 평범한 초대던데.”

“음, 너와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함이 좀 다른 거 같은데. 네마르의 살롱에 초대할 테니 한번 보고 싶다고 하잖아.”

리네트가 눈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그런 말 없더니, 점점 내용이 발전했나? 줘 봐.”

네마르의 살롱은 살롱 중에서도 저급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말이 살롱이지 대낮부터 술에 취하는 이들이 많았고, 자유연애를 목적으로 한 귀족 남녀들이 모였다.

“볼 필요 없어. 읽어 줄 테니. 요즘 네마르의 살롱에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순수한 이들이 많아 그대를 이곳에서 보면 참 좋겠다 생각했다고 하는군.”

“순수하다는 건 뭘 뜻하는 걸까? 멍청함?”

리네트의 독설에 루카스가 편지로 얼굴을 가리고 킬킬 웃었다.

“그런 이야기에 좋다고 거기 뛰어갈 줄 알았나.”

“궁금할 수는 있지. 그런데 끈질기게도 보냈군.”

루카스는 아예 리네트의 책상 끄트머리에 본격적으로 기대앉았다. 그녀에게 온 모든 연서를 뜯어볼 기세였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음, 재미있다기보단-”

위쪽은 아드빌 벨레이온의 연서가 대부분이었고, 루카스는 아래쪽을 뒤졌다. 그 외에 다른 이들은 누가 있나 싶어서였다.

“깡그리 이름을 적어 놨다가 죄다 키리에 밑으로 보내 버리고 싶군.”

“무슨 뜻이야?”

“아, 키리에는 훈련을 좀 강하게 하거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리네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잠시 루카스를 응시했다.

겨울비로 인해 어두워진 방 안에서 연한 회색으로 물든 루카스의 얼굴은 미소가 덮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이 자신을 바라보기 전에 리네트는 빠르게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루카스 쪽이 빨랐다.

리네트의 눈이 흔들렸다. 루카스와 리네트의 사이는 멀지 않았고, 어두웠지만 남자의 얼굴은 아주 잘 보였다.

“내 약혼녀 될 사람에게 간도 크게 연서를 보내는 놈들을 죄다 흙바닥에 굴려 버리고 싶다는 뜻이야.”

루카스가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리네트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야?”

리네트가 물었으나 루카스는 말없이 리네트 옆에 팔 한쪽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방금 전 짓고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말하다 보니 궁금해져서.”

루카스가 몸을 숙였다.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리네트는 눈을 약간 찡그렸다.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생각은. 빨리 약혼하고 북부로 가고 싶다, 같은 거지.”

“그래?”

남자의 수려한 얼굴은 리네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리네트는 그게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나,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마주했다. 푸른 눈은 한 번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것뿐이야?”

“……그거 말고 뭐가 있단 말이야?”

이럴 때마저도 루카스의 얼굴은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잘생겼다.

비 오는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옅게 빛나는 금발과 그 아래 자리한 선한 눈. 쭉 뻗은 코와 입술. 아직도 마르지 않은 빗방울이 그의 셔츠 깃에 묻어 있다가 루카스의 움직임에 따라 순식간에 옷 안으로 스몄다.

리네트는 그 모든 것이 유독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독히도 불편했지만, 꿈결 같기도 했다.

“글쎄,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리네트.”

남자는 언제나 리네트를 ‘그대’, 혹은 ‘너’라고 불렀기에 방금의 호칭은 놀랍도록 생경했다. 리네트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남자를 쳐다봤다.

“너를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연서를 보내는 이들이 있어. 너는 내가 발을 빼면 곤란하다고 했지만, 사실 지금은 네가 발을 빼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

리네트가 살짝 입을 벌렸다.

루카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리네트에게는 돈이 있었고, 이제는 공작의 보호 아래에서도 반쯤 벗어난 상태였다. 제국법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그 신변은 남편에게로 귀속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리네트가 어느 날 갑자기 연서를 보낸 이들 중 하나와 결혼하고 ‘나 발 뺀다.’고 선언해도, 그녀가 원하던 자유는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음, 이런 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약혼이라는 건 아무래도 이전보다 훨씬 확고히 묶이게 되는 거잖아? 나와 약혼하고 나면 이런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여지조차 없어지는 거고.”

루카스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리네트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루카스는 제게 슬슬 발을 빼도 괜찮지 않느냐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글쎄, 무슨 소리일까.”

루카스는 슬쩍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리네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런 리네트를 외면하며 또 다른 편지를 뜯었다. 가장 위쪽에 있는 아드빌 벨레이온의 편지였다.

때마침 로가나가 다시 돌아와 수건을 내밀었고, 그는 수건을 한 손으로 받아 머리를 닦으며 편지를 펼쳤다.

“네마르의 살롱 다음은 무슨 이야기를 써 놨나 보도록 할까. 향수까지 뿌린 듯한데.”

“루카스 리시스트. 지금 그 편지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방금 했던 말을 따져 묻기 위해, 그의 손에 든 편지부터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로가나가 더 빨랐다.

로가나는 리네트의 손을 가로막고, 루카스의 손에서 빠르게 편지를 가로챘다.

“뭐야?”

“손대지 마세요.”

“뭐?”

루카스와 리네트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모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에 로가나가 이마를 찡그리며, 편지를 근처에 있던 작은 접시에 탈탈 털었다. 이파리 몇 개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뭐야, 그게?”

“향수는 아니네요.”

로가나는 이파리를 멀찍이 두고 손을 흔들며 냄새를 맡았다.

“악질이에요.”

“그러니까 뭔데?”

“아가씨. 제가 이 사람 죽여 버리게 허락해 주세요.”

그러니까 뭐냐고.

두 사람이 질린 표정으로 로가나에게 몇 번이나 묻고 나서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 이파리가 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톡 쏘는 향을 좋다고 맡으면 점점 머리가 이상하게 되죠. 지능이 점차 떨어지거나, 환각을 보게 되는 종류의 독이에요.”

루카스와 리네트는 서로를 쳐다보고, 아드빌 벨레이온의 이름으로 된 편지를 모두 뜯어봤다.

한결같이 같은 이파리와, 때로는 꽃송이가 동봉돼 있었다. 말린 꽃이나 좋은 향이 나는 향낭을 연서에 동봉하는 일은 워낙 흔했기에 다들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리네트의 경우에는 연서에 흥미가 없었기에 더더욱 몰랐다.

“이런 걸 이렇게 대놓고…….”

기가 막혀 하는 리네트에게 루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마 남의 이름을 빌렸겠지. 연관되었어도 아마 모른다고 잡아뗄 거고.”

“하지만…….”

“그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어이가 없군.”

루카스는 빠르게 바깥에 있던 호위 기사를 불렀다.

“비가 그치기 전에 벨레이온 준남작가의 아드빌 벨레이온을 구금해. 알아볼 것이 있다.”

“예.”

기사 몇 명이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리네트는 창문 밖으로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은 것은 루카스였다. 리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루카스를 바라봤다.

“황후일까?”

“아마도. 편지 봉투에 독을 바르거나 하는 일은 황성에선 일상이니.”

그런 말을 하는 루카스는 너무나 씁쓸해 보였다.

“이제 슬슬 저쪽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거겠지.”

루카스가 머리를 기울였다. 금색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쏟아졌고, 그림자도 기울었다.

“폐하께서 너와 내 약혼을 황명으로 굳히겠다는 이야기는 이제 대부분의 귀족들이 다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노튼과 알렉사 레미시어도 갈라설 참이지. 황후는 네가 견딜 수 없이 싫을 거다.”

그림자 속에서 보이는 루카스의 얼굴이 조금 우울해 보였다.

“네게 동정심을 여러 곳에 뿌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대는 알렉사에게 다정함을 베푸는 대신 황후의 적개심도 키워 버렸군.”

“……어차피 상대가 나를 싫어하게 돼 있다면, 아예 그 이유를 만들어 주라는 말도 있잖아.”

리네트는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루카스는 입을 약간 벌렸다 닫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하던 말은 마저 해야겠지. 차라리 잘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

“약혼을 철회하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얘기하는 거야, 나는.”

리네트의 눈이 흔들렸다.

루카스는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눈만은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남자의 이런 표정은 정말로 처음 보는 것이라 리네트는 당황하는 동시에 화가 났다.

“왜 그런 말을 해?”

“리네트.”

“이미 폐하께서 황명으로 너와 나를 묶겠다 하셨잖아. 게다가 알고 있잖아. 나 공작 하고 싶다고.”

리네트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설마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리네트는 쏘아붙였다.

여태까지 둘의 대화 패턴은 대부분 비슷했다. 리네트가 비아냥거리면 루카스는 하하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스는 어쩐지 달랐다.

그는 리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대체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는 거야? 아-”

리네트가 입술을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폐하께서 수조권까지 주신 마당에 내 도움은 필요 없어졌어? 이제 혼자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네트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루카스는 ‘이제 네 몫은 없으니 빠져.’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리네트.”

남자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오늘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게 벌써 세 번째다. 루카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적어도 신년회 전에는 역시 해야겠다 싶었어.”

“……무슨 말.”

루카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는 보기 드물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 걸까?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이 바다를 담은 눈동자 안에서 솟아났다가 사라졌다.

“기차에서 네게 하려던 말이 있었어. 사실 지금도 이 말을 하는 게 너무 빠르지는 않을까, 아니면 하면 안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 하면 되잖아.”

리네트는 간신히 투정하듯 말했다. 루카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우습게도 저 연서들을 보니 역시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틀 후면 그대와 나는 약혼으로 묶여. 그대로 결혼하게 되겠지. 원래 귀족들 간의 결혼이라는 게 그렇다고들 하지. 가문의 재산을 담 밖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핏줄을 잇기 위해. 그 외에도 많은 이익과 목적이 따로 존재하지. 그런 면에서는 우리의 약혼은 사실 그 누구보다 귀족적이야.”

리네트는 잠자코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루카스는 괴로운 듯 표정을 찌푸리다가, 입매를 올려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역시 귀족이 될 수는 없나 봐. 그대를 만난 게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그대가 나를 만난 건 그대에게 다행일까? 같은 생각을 하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카스도 그녀에게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아까 봤잖아. 저런 편지 같은 건 이제 더 자주, 일상적으로 올 거야. 내가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야. 식사를 할 때마다 은침을 찔러 넣고, 가장 가까이 있는 자조차 믿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

“난 모두가 알고 있듯이 평민 출신이야.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온 게 아니라 갑자기 그런 곳에 던져졌지. 그건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야.”

“각오했어.”

리네트는 짧게 말했다.

“내가 그런 것조차 각오하지 않은 줄 알아?”

“알아. 그대는 용감하니까, 리네트.”

루카스가 줄곧 잡고 있던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리네트는 갑작스레 어깨를 덮친 한기를 느꼈다. 실내는 그리 춥지 않음에도 그 손 하나가 제 어깨에서 떨어진 것이 어쩐지 서럽고 싫었다.

“하지만 그대가 각오하지 못한 것도 있어. 채 각오할 생각조차 못 했던 것. 목숨의 위협도 아니고, 황후의 미움도 아냐.”

“……뭔데?”

“…….”

루카스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리네트는 마음 한구석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야.”

“똑바로 말해.”

리네트는 일부러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가 날 목 졸라 죽이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리네트.”

루카스는 이제 상반신을 온통 리네트에게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창문 밖에서 들어오던 흐린 빛까지도 가려, 리네트의 시야는 온통 루카스로 가득 찼다. 리네트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루카스를 보았다.

“그대와 내가 약혼으로 묶이는 순간, 나는 욕심을 부릴 것만 같거든. 저런 편지들을 보내는 놈들을 모아 놓고, 그대와 손잡고 거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그 앞에서 네 손에 입 맞추고도 싶지. 귀밑머리를 쓸어 넘겨 보이며.”

루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할게.”

“…….”

“내가 너를 욕심 내게 될 것 같아서 그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리네트의 눈이 흔들렸다.

“리네트. 나는 그대가 편하지는 않아. 손바닥에 깊이 박힌 가시처럼 툭하면 아프고, 콕콕 쏘지. 계속 걸려. 뭘 하든 그대 생각을 하게 돼. 잊을 만하면 여지없이 자꾸 돌아보게 되고, 신경이 쓰여. 그런데, 빼내기에는 너무 늦은 거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루카스의 말은 리네트의 생각보다 훨씬 직접적이었다.

루카스는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좋은 사람, 아니면 싫은 사람, 불편하지만 멀리하면 그만인 사람이 전부였어, 나에게는.”

“…….”

“그런데 그대를 보면 불편하면서도 자꾸 가까이 가고 싶어. 가시가 툭툭 돋아서 찔리고, 톡톡 쏘는 독에 따가워하면서도 계속…… 욕심이 나는 거야.”

“루카스.”

리네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싶었다.

“원래 좋아한다는 게 그렇지 않나 싶어.”

루카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표정과 몸짓은 얌전했으나 그 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독점욕이었다.

생전 접한 적 없는 감정에 리네트가 당황했으나, 루카스는 틈을 주지 않고 마저 말했다.

“리네트. 나는 내가 당신을 놔주지 않기 전에, 발을 뺄 기회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루카스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리네트는 몸을 빼고 싶었지만 그러기 어려웠다. 제 뒤에 벽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여기서 발을 빼면 눈앞의 남자는 상처받을 것이다.

“나는 그대가 내 연인이라고 말하고 싶어.”

“……말해도 상관없잖아?”

“아니, 상관있어. 여태까지와는 달라.”

루카스는 책상을 짚은 팔에 무게 중심을 실었다.

“지금도 나는 네가 나의 연인이라고 말하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목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루카스가 한쪽 팔을 뻗어 리네트의 뺨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과 종이 한 장 정도의 간격만을 남기고 멈췄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닿아 있지 않지만, 얼굴이 화끈해지는 건.

“어디에도 이런 연인은 없지.”

손이든 뺨이든 닿는 것은 거절한다. 남들 앞에서는 붙어 있다가도,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여지없이 몸을 뺀다.

예전에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점점 달라지는 스스로를 느꼈다.

닿고 싶다.

얄밉게 웃는 얼굴을 쓰다듬고, 못되게 구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싶었다. 심술궂은 미소를 짓는 볼에 입 맞추고 싶었다.

자꾸, 욕심이 생겼다.

* * *

루카스 리시스트가 제 연심을 자각한 것은 생각보다 꽤 오래된 일이다.

남자가 황성에 들어오자마자 익힌 건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대개 황족이라는 이들은 매사에 바빠서 모든 사람들을 오래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첫인상으로 사람을 결정했다. 혹은 잠깐 보고도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거나.

루카스는 다행히도 그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야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방문 목적을 캐묻는 일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리네트 카멜리아가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봤다.

하지만 지금 와서 루카스는 그때 그녀의 제안을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을 조금은 후회했다.

자신이 좋아하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에게 조금 더 성의 있게 접근했을 테니까.

예를 들면 그녀에게 가져다주던 꽃송이는 조금이라도 더 큰 것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녀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바깥으로 나오게 하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그녀에게 갔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시시때때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채고 루카스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챌 때쯤 그는 이미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뭘 해도 그녀는 흥미 없어 했다. 목적을 위해서 그녀에게 협조한다고 생각했으며, 본인도 철저하게 목적에 맞게 행동했다.

웃으며 손등에 입 맞춰도 되냐고 물으면 짤 없이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조금의 접근도 허하지 않겠다는 그 냉랭한 태도에서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서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에드가 발란의 일이 일어난 날, 루카스는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키리에와 기사 복장을 하고 공작저를 방문했다.

그리고 가볍게 생각하고 들어선 곳에서 그녀에게 손을 올리고 있는 남자를 보고 그는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건 그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앞에 있는 게 리네트라서다. 화가 났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더 화가 난 건 그다음이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이번 일로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루카스는 아직도 그때 리네트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멜다 카멜리아에게 뺨을 하도 맞아 모자를 쓰는 것이 습관이 됐어. 이젠 안 때리냐고 얼굴을 들이밀 정도지. 조금 맞는 거, 멍드는 건 괜찮아. 어쨌든 조금만 버티면 끝날 일이었다고.”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처음 만났던 날, 리네트의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 처지 알 만하지 않느냐고 말하며 그에게 접근했었다.

거기에 흥미를 느꼈다.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자신이 참으로 저주스러웠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그런 상황에 익숙하게 만든 이들과 자신이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그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독이 든 말을 날카롭게 쏘아붙이면서, 자신이 다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은 결국 다시금 돌아와 그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는데, 그 칼끝이 향한 곳이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가 제발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주제넘게 자신이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이제는 자신을 아끼길 바랐다. 나아가 그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길 바랐다.

기차에서 입 맞추려 했던 것은 충동적이었으나 그의 간절한 진심이었다.

‘제발 내가 그대에게 끼어들 틈을 줘.’

그러나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엄청난 동정심과 달리, 루카스에게 주어지는 틈은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리네트는 오로지 약하고 가녀린 자에게만 제자리를 내주었다. 적어도 리네트에게 있어 루카스는 여유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 루카스는 때때로 조급함을 느꼈으며, 가끔은 격정적인 사람이 됐다. 어느 순간부턴가 리네트의 앞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여유 있었던 적이 없었다.

마법사는 리네트에게, 프라임 공작에게 그랬듯 루카스에게도 따로 시간을 안배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처럼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저 루카스에게 간결히 물을 뿐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나요?”

루카스가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마법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초대 카멜리아 공작에게 저는 거짓말을 구별하는 능력을 주었죠. 왜일 것 같아요?”

“왜입니까?”

“카멜리아, 그 거짓말 잘하는 소녀는 리시스트가 자신의 앞에서 언제나 진실하기를 바랐거든요.”

그들 사이에 얽힌 일은 루카스는 지금도 잘 모른다. 옛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루카스의 의문 담긴 표정에 마법사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당신 또한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하겠죠. 그거면 됐어요.”

“무슨 뜻입니까.”

“제가 이번 ‘내기’에서 질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에요.”

루카스는 수도로 돌아오며 자신과 같은 마차에 탄 리네트를 보며 내내 마법사의 말을 곱씹었다. 마법사가 한 내기가 뭔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질문을 되새김질할 뿐이었다.

수도로 돌아와 만난 제 아비는 리네트에게 물었다.

“내 아들을 연모하나?”

리네트의 답은 걸작이었다.

“제게 구원과 같은 분입니다.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다.

때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인에게 화를 내는 남자들이 있다. 루카스는 그런 부류들을 생각의 여지 없이 쓰레기라 명명해 왔다.

그러나 루카스는 자신도 어쩌면 그런 쓰레기가 아닐까, 하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리네트 카멜리아는 루카스가 그렇게 대답해 달라고 한다면 황제에게 망설임없이 루카스를 사랑한다고 다시 대답해 줄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 점이 가장 아이러니했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본인에게는 절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약간의 희망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흔들리는 기차에서 눈을 감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제 얼굴을 넋놓고 쳐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돌리는 그녀. 호숫가에서 어깨가 닿는 것에 움찔거리던 그녀. 제가 붙잡은 손을 일부러 거칠게 빼던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 손등에 입 맞추면 당황해 버리는 리네트 카멜리아를 보며, 루카스는 느긋이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루카스 리시스트는 그럴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든 감정들은 이제 푹 젖어 뚝뚝 떨어질 정도가 됐다. 억누르기도 어렵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 * *

리네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는 이제 그녀가 어떤 감정인지 작은 표정 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예민하고 짜증이 많았다. 그것은 언뜻 보면 단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예민한 만큼 남의 감정 변화에도 예민하고, 그만큼의 신경을 할애했다. 사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그녀는 굉장히 세심한 사람이었다.

짜증을 많이 부리는 이유 또한 명백했다. 화를 쌓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스가 멍청한 짓을 해도, 짜증 한 번 낸 후 뒤끝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크게 화낸 것은 로가나가 남작의 도박장에서 당한 일을 알았을 때, 노튼이 마법사의 말을 듣지 않아 마법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도다. 누군가의 가벼운 잘못에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여인이었다.

루카스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면 저 사랑스럽고 영리한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소용돌이칠까 궁금했다. 눈을 깜박거리면 눈꺼풀에 입 맞추고 싶었고, 황당해하면 안아 들어 올리며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었다.

“지금 약혼하고, 결혼하고 나서 이혼해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모른 척할때는……. 루카스가 낮게 웃었다. 리네트는 눈에 힘을 주고 화가 난 척하고 있지만, 저건 당황한 기색이다. 그리고 그 표정마저 루카스는 제 마음속에 귀중하게 꾹꾹 눌러담으며 말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하지 마.”

“…….”

“물론 나는 너와 약혼하고, 결혼하고, 네가 원한다면 이혼마저도 해 줄 거야. 그게 우리의 약속이니까. 하지만 그게 단순히 너와 나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상인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수행하듯 맺은 계약이지만, 이제는 좀 다른 이유가 생겼거든.”

리네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리네트. 아마 우리가 약혼하고 나면 모든 게 숨 가쁘게 돌아갈 거야. 아마 여유 있게 이런 말을 하기도 어려울 테지. 북부로 가는 길은 험할 것이고, 제 안위 챙기기도 바쁠 거야. 그러니 그 전에 분명히 해 두고 싶어.”

루카스는 그녀를 만난 후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너와 그런 약속을 한 이유는 황제 위를 갖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지금은 이유가 전혀 달라.”

“……황제 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하는 기분이 드는데, 리네트 카멜리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 피하지 마. 그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는 잔잔하게 웃으며 기대었던 책상에서 몸을 뗐다.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오늘 그녀를 방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연서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줄은 몰랐고, 제가 연서들을 보며 질투할 줄은 몰랐지만.

본디 그녀와 제 사이에 평온한 시간이 존재하긴 했던가?

리네트를 내려다보던 루카스의 시선이 차츰 내려갔다. 그는 리네트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지 마.”

모르긴 뭘 몰라. 그녀는 정말로 치사했다. 매번 저렇게 모른 척한다.

그렇지만 루카스는 리네트 카멜리아가 제 할 말을 막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민하고 짜증스러운 그녀는 다정했으며 상냥했다.

“거절할 거면 지금 해.”

루카스는 이럴 때면 제 외모에 퍽 감사했다. 꽤 봐줄 만한 얼굴과 벌어진 어깨 같은 건, 자신이 뜻하지 않은 비에 온몸이 젖었다 해도 퍽 괜찮은 광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책상 위의 상자를 잡아당겼다. 리네트가 쳐다보지도 않고 방치한 ‘캐러멜’ 상자였다.

커다란 손에 의해 조그만 상자가 입을 벌렸다. 상자 안에는 캐러멜색의 보석이 달린 반지가 있었다.

“좋아해.”

“…….”

“나와 약혼해 줘.”

리네트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루카스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로 그녀가 거절해도 괜찮았다. 리네트에게 이 순간이 그와의 약혼을 거절할 마지막 타이밍인 것처럼, 루카스는 이것이 제게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 안에서 이런 식으로 몸집을 불려 나가는 감정을 잘라 낼 기회.

성문의 문지기로 서 있던 시절, 루카스에게는 미래를 상상할 시간이 많았다.

어렴풋이 사랑스럽고 다정한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함께 놀러 가는 것. 손을 잡아 입을 맞추고, 어설프지만 행복한 연인이 되는 과정. 그리고 끝내는 반지를 끼워 주고, 그녀와 행복하게 결혼에 골인하는 삶을 그려 본 적은 숱했다.

하지만 황성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그런 종류의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정말로 제 살길 찾기도 바빴고, 노튼과 신경전 벌이기만도 벅찼다.

그런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건 그녀를 만난 후다. 물론 루카스가 예전에 했던 연인에 대한 상상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떤가.

화를 내는 것도 사랑스럽고, 짜증이 많지만 그 안에는 전부 다정함을 수반했다. 데이트 신청은 물론이고 함께 놀러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하지만 루카스는 그녀와 어설픈 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할 거면 확실한 것이 좋았다.

그녀와 약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후에도, 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다 끝내 그녀마저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끝낼 거면 지금 끝내야 했다.

“내가 거절하면, 너는.”

“음…….”

루카스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장기간의 구혼 끝에 거절당한 황자가 되겠지.”

“그럼 나는?”

“글쎄, 냉정한 말이지만 그다음은 내 알 바 아니지.”

리네트가 입을 조금 벌리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실연의 상처를 보듬기도 바쁜 와중에, 나를 찬 원망스러운 여인을 살필 틈이 있겠어? 그냥 잘 사나 보다 하겠지.”

“…….”

“그리고 너는 내가 아니어도 네 삶을 잘 꾸릴 만한 사람이고.”

“나도 황자님을 찬 되바라진 여자가 되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제야 리네트의 말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상은 남자보다 여자한테 더더욱 매정하다고.”

“하지만 너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루카스가 씩 웃었다. 리네트는 이제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팔짱을 꼈다.

“네가 하는 말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네 말을 바로 받아들이기엔…….”

“아, 미리 말해 두지만-”

금발의 황자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나와 약혼하겠다고 대답한다 해서, 그걸 내 감정에 대한 대답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야.”

“…….”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멍청이들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아니까.”

리네트가 하려던 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할 말 없는 표정이 되어 우물거렸고, 루카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나와 약혼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네게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약혼하고,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네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어.”

그럼에도 루카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는 있겠지.”

대단한 계약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자신은 그녀의 약혼자가 될 수 있다. 남편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싶은 것을 줄 수도 있겠지.

꽤 괜찮은 조건 아닌가.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이야?

그에 리네트가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루카스를 내려다봤다.

“진담이야……?”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겠어? 이 반지 비싼 거야. 이런 걸 주면서 농담하진 않아.”

루카스가 진지한 눈을 하며 말했다. 그녀는 더없이 황당하다는 심정을 갈무리하다가, 이내 체념한 듯 답했다.

“루카스 리시스트. 내 사정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이제 와 발을 빼고 싶지는 않아.”

“…….”

“뭣보다.”

리네트는 책상을 튕겼다. 책상 위에는 아까의 연서들이 쌓여 있었다.

“독초가 담긴 연서 몇 장 받았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졌다고 말하다니, 정말 농담으로밖에 안 들리거든?”

“뭐, 개중에 꽤 괜찮은 사람도 섞여 있을지 누가 알아?”

“하지만 당신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리네트의 갈색 눈이 루카스 쪽을 응시했다. 아까와는 다른 생기 있는 눈.

루카스는 그녀가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중에서 제일 괜찮은 사람은 너 아냐?”

순간 루카스의 얼굴이 화사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아, 방금 그 말 너무 좋은데.”

“…….”

“한 번만 더 말해 줘.”

“……싫어!”

리네트가 질색하며 뒤로 몸을 물렸다.

그에 루카스가 고개를 흔들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 안에는 아직도 반지가 있었다.

그녀는 ‘으.’ 하고 질린 소리를 냈다.

“너무 싫어한다…….”

“받지 말까?”

“부디 받아 주세요,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씨.”

리네트는 체념한 표정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말 안 해도 루카스는 그게 직접 끼워 달라는 뜻이라는 걸 이해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반지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그녀는 알까. 따뜻한 캐러멜색 보석은 그 눈동자를 꼭 닮아 있다는 것을.

* * *

타이밍 좋게도 루카스의 프로포즈 후, 황성에서 시녀가 찾아왔다.

궁내부장의 직속 시녀라는 여인은 리네트에게 약혼식의 순서와 예법 등을 완벽히 숙지시키기 위해 왔다고 고했다.

리네트는 루카스가 반지를 끼워 준 손으로 그를 빠르게 쫓아 보냈다. 덕분이라긴 뭐 하지만, 그래서 루카스는 프로포즈 이후 리네트를 이틀 동안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신년회 당일.

약혼식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황성에 온 리네트는 배정된 방 안에서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늘어져 있다가, 루카스를 맞았다.

본디 단장하지 않은 여인을 남자가 찾는 것은 금기에 가깝다. 리네트의 방 앞에 찾아온 루카스를 보고 시녀는 대경실색한 얼굴이 되었으나, 정작 리네트가 괜찮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루카스는 화장기 하나 없는 리네트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한숨도 못 잔 얼굴인걸.”

“새벽에 겨우 눈 붙였어. 죽을 거 같아.”

“잠이 안 와서?”

“못 잔 거지.”

리네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약혼식의 순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녀와 재현해 보느라 거의 밤을 새웠다.

약혼식은 간단하지만 머리 아픈 일들로 이뤄져 있었다. 맨 처음 황제의 약혼 선언이 있은 후, 카멜리아 공작이 나와 그에 화답하는 것이다. 시작부터 거의 폭탄이었다.

“괜찮으려나.”

“그야 황명으로 이뤄지는 약혼이니 그 작자가 섣부른 짓이야 하지 않겠지.”

얼마 전, 황제는 카멜리아 공작이 반대할 것을 알면서도 약혼을 명했다. 내심 모두가 긴장했으나 카멜리아 공작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승낙을 답했다.

“그러니까 더 찜찜하다고. 나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양반인데.”

“흠. 그래서 그런가.”

“뭐가?”

루카스가 중얼거리자 리네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루카스는 픽 웃었다.

“공작가에서 내게 뭘 보냈거든.”

“뭔데?”

“예식복.”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멀쩡한 물건을 보낸 건 아니구나?”

“정답.”

통상적으로 귀족들의 약혼식을 치를 때는 양쪽 가문에서 상대가 입을 예복을 보내는 것이 관례다.

리네트만 해도 황성에서 옅은 하늘색의 드레스를 보냈다. 가슴 부분에 아름다운 보석들을 별처럼 수놓은 그 드레스는 루카스를 낳은 선대 황후가 처녀 시절 걸쳤던 보석들을 활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작가에서는…….

“내가 레벤튼에서 입던 것과 비슷한 옷을 보냈더군.”

“뭐?”

“레벤튼의 경비대는 짙은 초록색 옷을 입거든. 소재만 다르지, 거의 같은 물건이야.”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네트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카멜리아 공작 부인이 루카스에게 보낸 물건은 비싸고 고급스러운 소재로 되어 있었으나, 명백히 그 모티브가 눈에 보였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평민이던 시절, 문지기로 일하며 입었던 레벤튼의 경비대 옷이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공작가를 뒤집어 놔도 모자랄 일이었지만, 루카스는 그저 턱을 긁으며 웃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할 법한 물건이라며 보내셨더군.”

“……드디어 미친 걸까, 이멜다가?”

리네트가 어이없어하는 와중에 루카스만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친어머니가 아니라도 이름을 부를 정도야?”

“알 게 뭐야. 그 사람은 내 이름 대신 욕을 하는데.”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하곤 되물었다.

“그래서 그 옷은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잘 모셔 놨지.”

“이럴 땐 키리에 레미시어가 그리워지는군.”

뜻밖의 말에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 너같이 찔러도 푹푹 들어가기만 하고 화를 안 내는 사람 옆에는, 바람만 불어도 파르르 떠는 키리에 경 같은 인간이 있어 줘야 하는 거라고.”

바람만 불어도 파르르 떤다니. 키리에가 들었으면 정말로 파르르 떨며 화를 냈을 발언이나, 불행하게도 이 자리에는 루카스뿐이었다. 루카스는 하하 웃으며 자신이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옷이 의미하는 건 명백했다. 평민으로 십 년 넘게 살아오던 황자를 비웃는 것이다.

제 딸의 약혼자에게 보낼 선물로는 걸맞지 않지만, 그 딸이 리네트이고 약혼자가 루카스이니 이멜다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것이리라.

의도가 명백한 만큼 그 옷을 입을 경우 일어날 결과도 눈에 보였다. 황제는 대노할 것이다.

“그 결과를 알면서도 당신에게 그런 옷을 보냈다는 게 가장 화나는걸.”

“음? 왜?”

“왜긴 왜야.”

리네트가 팔짱을 끼고 얼굴을 구겼다.

“그 여자도 그쪽 성격 무던한 거 아니까 그딴 짓을 한 거 아냐.”

“그래?”

“그 옷 입고 약혼하려고?”

“그건 아니지. 그걸 입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한데.”

“거봐. 네가 그럴 거 아니까 그 여자도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하는 거라고.”

리네트가 짜증을 냈다. 루카스는 빙그레 웃으며 리네트의 입술 앞에 캐러멜을 내밀었다.

“뭐야?”

“오늘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할 텐데 이런 거라도 먹으라고.”

그녀가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그의 손가락에서 캐러멜을 가져가 주변 눈치를 보며 입에 넣었다. 황성의 시녀가 몸단장을 위해 오늘 하루는 굶으라고 단단히 타일렀기 때문이다.

루카스 또한 여자의 몸단장이 어떤 순서로 이뤄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소매 속에 캐러멜 몇 개를 숨겨 온 것이었다.

“번거로워 죽겠네.”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참아.”

캐러멜을 우물거리는 그녀를 루카스는 턱 밑에 손깍지를 끼고 쳐다봤다. 리네트가 찝찝한 표정이 됐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 표정이 왜?”

“히죽히죽 웃고 있잖아.”

“이런.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하고 약혼하는 날인데 울 순 없잖아.”

좋아하는 여자, 라는 말에 리네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돼?”

“그럼 어떻게 말해?”

오가는 대화에 루카스는 한층 더 뻔뻔하게 대꾸했다. 리네트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잠이 확 깬다.”

“왜?”

“생판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을, 생전 본 적 없는 미모의 얼굴이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좋은 뜻이지?”

싱글벙글 웃는 미남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굴리다가 문득 물었다.

“아드빌 벨레이온은 어떻게 됐어?”

“아, 잡았는데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지.”

“예상대로네.”

“그래. 네가 직접 대면한다면 좋겠지만…….”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네트가 그를 대면한다면 아드빌 벨레이온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바로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네트는 너무나 바빴고, 시녀에게 붙들려 루카스와 채 연락할 시간도 내지 못했다.

“연서를 증거로 들이밀었지만, 자신은 너의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고 잡아떼고 있어.”

“그건 좀 이상하네. 수도 사람이라면 내 이름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데.”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가 픽 웃었다.

퍽 자의식 과잉적인 발언이었으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의 약혼 때문에 수도는 꽤 떠들썩했다. 마력석 사고로 침울한 분위기였던 제국인들에게 색다른 흥미거리가 던져진 것이다.

귀족이라면 더욱더 그녀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자신은 유학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다던데. 아무튼-”

그때 시녀들이 줄이어 들어왔다. 그녀의 몸단장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루카스는 그쪽을 곁눈질하고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건 오늘 연회가 끝나고 마저 대화하도록 하지.”

“그러세요, 황자님.”

리네트는 시녀들 앞에서 완벽하게 황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인사했다. 루카스 또한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녀를 대하는 모습으로 인사하고 돌아 나갔다.

* * *

약혼식의 절차는 비교적 간소하다. 황제와 공작의 성혼 선언 후에 두 사람이 앞에 나서면 예물을 교환한다. 리네트에게는 낸터킷 황후가, 루카스에게는 이멜다 카멜리아가 반지를 건네주게 돼 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절차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루카스는 그녀에게 따로 제가 고른 반지를 먼저 건넨 것이다.

리네트는 시녀들이 제 머리를 다듬는 동안, 자신의 눈동자와 꼭 닮은 색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 반지는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것이라 식에서 끼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반지를 화장대 앞에 올려 두었다. 잠시 심부름을 가느라 자리를 비운 로가나가 들어오면 건네줄 셈이었다.

“푹 주무셨나요? 피부 결이 정말 고우세요.”

‘거짓말이군.’

“머리카락도 어찌나 탐스러운지, 손질이 필요 없을 정도네요.”

‘저것도 거짓말이야.’

오늘따라 ‘백안’은 참 착실하게도 발휘되고 있었다.

시녀들은 끊임없이 제게 칭찬을 건넸다. 하지만 리네트가 가진 능력 또한 끊임없이 그 말들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꼬박꼬박 일러바쳤다. 시녀들에게 내 칭찬 안 해도 되니 제발 좀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약혼식부터 그런 소리를 해 대면 황실 시녀들에게 건방진 아가씨로 오르내릴 것이다.

리네트는 공작저의 하녀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리네트에겐 언제나 호의적이었지만, 까다롭게 구는 이멜다의 이야기는 항상 안 좋게 했다. ‘리시스트의 아침’이 퍼졌을 때, 이멜다의 성격이 안 좋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증언하며 소문을 부풀린 것도 그녀들이었다.

리네트가 황성 시녀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좋을 것은 없었다.

백안은 그런 리네트를 놀리듯이 꾸준히 말을 걸었다.

“황자님이 왜 반하셨는지 알겠어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 잘한다.’

“황자님께서 약혼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오전에 굳이 아가씨를 보러 오셨다면서요? 정말 부러워요.”

‘이건 진짜네.’

시녀들만 없었어도 진작에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관자놀이가 다 지끈지끈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리네트는 마법사에게 묻고 싶었다. 의지가 생겼으면 없앨 수도 있지 않느냐고.

‘안 돼. 나도 놀고 싶다고.’

그리고 의지가 있다는 백안은 주제넘게 리네트에게 말까지 걸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까지 읽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공작도 이런 것에 시달렸을까?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가 거는 말을 못 들었어. 능력이 유독 약한 축이었거든.’

백안은 즐겁게 제게 설명했다. 원한 적도 없었지만 이런 정보는 그래도 좀 나았다. 리네트는 머릿속으로 되물었다.

‘백안의 능력이 약하고 강한 게 있다고?’

‘당연하지. 같은 칼을 휘둘러도 제 손처럼 쓰는 사람과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럼 나는?’

‘넌 좀 특별하긴 한데-’

그때였다.

“아가씨, 카멜리아 공작께서 오셨어요.”

* * *

약혼하는 딸을 그 부친이 약혼식 전에 따로 보는 것은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리네트는 화장을 마친 채로 공작과 독대하게 됐다.

‘오늘 방문객이 많구만. 귀찮은데.’

그렇지만 그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리네트는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제가 단장 중인 임시 투왈렛 룸으로 카멜리아 공작을 들였다.

공작은 여전히 재수 없을 정도로 오만한 얼굴이었다. 그는 투왈렛 룸에 들어오자마자 이마를 찌푸렸다.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사뭇 의기양양한 기세로구나.”

그녀가 입은 옷의 사이즈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고 날을 세운 것이었다.

리네트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어머, 잘 맞아요. 보시겠어요? 공작가에서 제가 적선받듯 입었던 낡은 드레스보다는 백만 배쯤 아름답지요.”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시비 걸러 오셨어요?”

시녀들이 자리를 피해 준 덕분에 의도하지 않은 부녀 단독 상봉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럴 때 로가나라도 있었어야 하는데.

“그럼 내가 새삼 네게 덕담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았느냐?”

“부지런하세요.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도 내시고. 전 공작저 쪽으로는 침도 뱉기 싫던데.”

리네트는 굳이 수위를 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에 공작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네가 황자 하나 잡았다고 아주 갖은 오만을 다 떠는구나.”

“황자만 잡았겠어요? 각하께서 누구 명령으로 이 자리에 계신지 생각해 보세요.”

황제 말 들으러 온 주제에 혓바닥이 기네? 리네트의 의도는 분명했다.

공작은 코웃음 쳤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네 명을 알아서 재촉하는구나.”

“황성 한가운데서…….”

‘황성 한가운데서 어디 딸한테 칼질이라도 해 보시든가요.’ 하고 답할 참이었다. 하나 리네트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공작은 그런 그녀를 보고 말을 이었다.

“리시스트의 신민 된 바로 황명을 듣는 것에 거리낌은 없으나, 그게 하필 너처럼 모자란…….”

하지만 그렇다고 리네트가 비아냥댈 찬스를 놓치는 타입은 아니었다. 리네트는 곧장 생각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모자란 게 누군지 모르겠군요.”

“뭐?”

“폐하 말씀 들으러 왔으면 얌전히 듣고 가시지, 왜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를 하고 계세요? 제 화를 돋우려고?”

공작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리네트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약혼식 전에 얄미운 딸년 얼굴 보고 사과라도 하러 오신 거 아니면 그만하시고 돌아가세요. 피차 좋은 감정도 없는데 더 안 좋은 일 만드시지 말고요.”

“…….”

“설마하니 오늘 와서 ‘역시 이 약혼 안 되겠소.’ 같은 소리 하실 거면, 황제 폐하의 명이라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시고 용기를 쥐어 짜내 보시고요.”

“리네트 카멜리아.”

공작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네트는 눈썹 한쪽만 들어 올렸다.

“네 어미가 궁금하지 않나?”

오, 이건 또 의외인데. 리네트는 정말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간신히 입을 다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작에게 꽤 즐거운 기분을 선사한 모양이었다. 공작은 비실비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네 어미를 찾았지. 내 영지에 숨어 있더군. 쥐새끼처럼.”

리네트는 침묵했다.

이래서 한동안 입 다물고 영지에 처박혀 있었던 거군.

빌어먹을 백안은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백안이 아니라도 공작은 리네트의 능력을 알고 있는 만큼 섣불리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더군. 딸이 황자와 약혼한다고 온 나라를 들쑤시고 있는데, 그 어미는 대장장이의 하녀가 되어 하루 종일 불 앞에서 쭈그리고 있는 모습이.”

머리가 아파 왔다. 어쩌라는 거야?

“지금이라도 이 약혼을 네가 스스로 물린다면 네 어미는…….”

이런 소리를 할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정말로 할 줄은 몰라서 리네트는 카멜리아 공작의 얄팍함에 비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리네트는 하하, 하고 웃었다.

“이봐요, 공작님.”

리네트가 공작의 말을 잘랐다. 평생 남들의 위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살아온 남자는 제 말이 잘린 것 하나로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네트는 공작이 뭐라 말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못 보던 사이에 협잡꾼이 다 되셨군요.”

“뚫린 입이라고-”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저 사랑하세요?”

그녀는 공작과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빠르게 그를 내보내고 싶었고, 공작은 예상대로 그녀의 질문에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었다.

“너 같은 계집애를-”

“그렇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리네트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공작님이 물려준 능력 덕분에 저는 각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요. 덕분에 저는 각하께 일말의 애정도 할애할 필요가 없었죠.”

어느 날 갑자기 툭 떨어진 세계다. 그녀를 귀히 여기며 아끼고 사랑을 주어도 내 부모가 아니니 어색할 판에, 노골적으로 경멸하는데 호감이 갈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런데 제가 얼굴 한 번 못 본 어머니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울고불고할 줄 아셨어요?”

리네트의 냉기 어린 말에 공작은 입을 닫았다.

영지를 둘러보겠다고 돌아다니더니, 리네트의 어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약점 하나 잡겠다고 영지를 비운 걸까. 아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우연찮게 잡은 약점 하나 가지고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협박을 하러 오다니. 리네트는 새삼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나약한지 깨달았다.

초대 카멜리아 공작-마법사가 말했던 소녀는, 제가 원했던 능력이 대를 물리며 이런 협잡꾼을 낳을 줄 알고 있었을까?

“각하. 각하께서도 ‘백안’을 ‘아직까지는’ 가지고 계시니 아시겠죠. 제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답니다.”

“은혜도 모르고-”

“은혜요?”

리네트는 그야말로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가엾은 하녀를 겁탈한 게 저에 대한 은혜인가요?”

“말조심해라.”

“‘아버지’야말로 말조심하세요.”

리네트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한 번이라도 저를 가엾이 여겨 동정을 베푸셨다면, 은혜 비슷한 걸 제가 갚아야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나올 만한 인생을 제게 베푸셨던가요?”

공작은 그야말로 할 말이 없어진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시녀가 투왈렛 룸의 문을 두들겼다.

“죄송합니다. 이제 슬슬 아가씨께서 옷을 입으셔야 해서…….”

리네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가 보세요, 아버지.”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공작은 이마를 찌푸렸으나, 별 대답하지 않은 채 뭔가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공작이 나가고 시녀들이 들어오자, 리네트는 그 물건을 빠르게 챙겨 열어 보았다. 리네트의 것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들어 있었다.

리네트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방금 말을 섞었던 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협박하려고 들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정말로 이 머리카락의 주인에 대해 모른다. 조금의 애정도 없었다. 어머니? 그런 건 애초에 리네트에게 없는 것이었고, 지금의 ‘리네트’에게도 그렇다.

하지만 이 순간, 제가 원하지 않던 상대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공작가에 보낸 후의 인생마저 겁박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누군가의 인생은 그녀에게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리네트는 자신이 동정심이 많다던 루카스의 말을 생각했다. 이런 게 동정심이라고? 아니었다. 그녀는 제 목구멍 너머에서 들끓는 열기를 도저히 동정심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로가나와 알렉사, 검은 머리카락의 주인…… 리네트도 어쩌면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멜다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어쨌든 공작가에서는 의식주가 해결된다는 이유만으로 안주하려고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리네트는 에드가 발란과의 결혼과 아이를 강요받고, 그에게 순종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마다 기지로, 가끔은 제가 운 좋게 물려받은 능력으로, 혹은 루카스에게 의지해 순간을 모면했으나, 결국 본질은 같았다.

리네트 또한 그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리네트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숨을 끝까지 들이쉬고, 참으세요.”

시녀가 뷔스티에를 조였다. 리네트는 숨을 반만 들이쉬었다. 끝까지 들이쉬었다가는 현기증이 올라 쓰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녀는 리네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알아챈 듯,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쪽의 레이스업 끈을 짜냈다.

리네트는 그 압박감을 견디며 제게 찾아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돌아간 공작에 대해 생각했다.

공작은 모두가 당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아랫사람’으로만 생각했던 자와 자신의 입장이 역전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입장이 역전되어 굴욕을 맛본 자는 이제 어떻게 할까?

답은 뻔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공작이라도 낸터킷 황후와 손을 잡을 것이다.

‘잘하면 한 번에 치울 수 있겠네.’

리네트는 용기를 내어 그렇게 생각했다. 재수 없으면 몸집이 더 커져 상대하기 곤란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어렵겠지. 리네트는 제게 왔던 독초와 연서를 생각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할 만큼 저쪽도 급해진 마당이다.

게다가 자신이 모욕감까지 안긴 카멜리아 공작이 노튼 쪽과 손을 잡는다면, 상황은 더욱더 제게 위협적으로 돌아가겠지.

“그럼 뭐 어때.”

“예?”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가운을 입히던 시녀가 되물었다. 리네트는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잠시 뭘 생각하다가 좀…….”

그때, 로가나가 들어왔다. 물잔을 든 채였다.

“아가씨, 부탁하신 거예요.”

“그래, 고마워.”

지끈거리던 머리 때문에 부탁한 약이었다. 잔에서는 약초를 달인 물 특유의 쓴 향이 났다.

로가나는 은으로 된 티스푼을 리네트 앞에서 저어 보인 다음, 자신이 한 모금 마셨다.

“으윽…….”

그리고 갑작스레 심장을 쥐고 비틀거렸다.

리네트가 눈을 크게 뜨자, 로가나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엄청 써요.”

주변에서 같이 놀라던 시녀들마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애플에게 배웠니? 실없기는.”

“아가씨 표정이 너무 심각하셨는걸요. 웃으셨으니 됐어요!”

명랑하게 웃으며 로가나가 건넨 잔을 받아 리네트는 쭉 마셨다.

‘내가 동정심이 너무 많다고?’

알 게 뭐야. 그녀가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 리네트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약을 대충 저어 마셔야 했을 것이다.

이런 순간 그래도 로가나의 농담 한마디는 리네트에게 제법 괜찮은 위로가 됐다.

* * *

철도 때문에 각 영지의 대귀족들은 신년회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으나, 수도에 머무르던 이들은 달랐다.

최근 분위기가 침울해 티파티 위주의 소규모 연회만 열렸던 터라, 수도의 귀족들은 거의 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약혼을 맞는 아가씨에게 귀족들의 관심이 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리시스트의 아침’은 3일 전 대대적으로 그녀의 약혼을 보도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가족에게 덕담을 건네러 간 이들은 조금 당황했다. 딸을 시집보낸다고 하기엔 너무나 굳어 있는 공작의 턱과,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공작 부인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후계자라 널리 알려진 갈레안 카멜리아는 내내 푸르죽죽한 얼굴이었다.

자연스레 귀족들은 약혼 당사자를 찾았다. 그리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리네트 카멜리아만은 약혼식에 임하는 행복한 여인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생기 있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인들에게 잔을 권하는가 하면, 축복 어린 말에 미소 지으며 응답했다.

약혼식을 위해 황성의 시녀들이 부린 화장술도 한몫해 그녀는 그 자리의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그때, 얼굴에 수심이 어린 알렉사 레미시어가 등장했다.

레미시어가의 막내딸이 황후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소문은 이미 사교계 전체에 만연했다. 그러나 모두 황후의 엄청난 변덕과 예민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가엾이 여길 뿐이었다.

이윽고 알렉사와 리네트가 마주 서자, 모두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그쪽을 향해 곁눈질했다.

엄청난 관심이 쏠린 건 당연했다. 황자들의 후계 구도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고, 그들의 아내가 될 여인들이었다.

“두 사람 친하다던데…….”

누군가 숨죽여 속삭였으나, 다른 누군가는 코웃음 쳤다.

“여인들의 우정은 종이보다 가볍다는 말 못 들었소?”

그러나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알렉사는 옅게 웃으며 리네트의 손을 먼저 청해 잡았다.

손을 잡다니! 그 친숙한 모양새에 몰래 곁눈질하던 이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리네트, 오늘 정말 예뻐요. 축하해요.”

“고마워요, 알렉사. 오늘 제가 가장 예뻐야 하는데-”

리네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오니까 제가 너무 초라해지잖아요. 저리 가요.”

“무슨 소리예요. 오늘 요정 같아요, 리네트.”

“당신은 여신이고요?”

알렉사에게서 옅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항상 그녀가 우아하게 미소만 띠는 것을 보아 왔던 사교계의 귀족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정말 친한가?

둘 사이에 오간 대화 또한 예의보다는 친근함이 더 진했다.

“좋은 일은 많은 이들의 입을 타야 한다지요. 카멜리아 양,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레미시어 후작마저 둘의 모습에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레미시어 후작에게 리네트가 어여뻐 보일 리 없었다. 후작에게 리네트는 딸의 퍽 골치 아픈 친구였다.

알렉사는 단 한 번도 아비의 속을 썩인 적 없는 착한 딸이었으나, 황후의 명으로 그녀와 친구가 된 이후로는 유난히 트러블이 잦았다. 카멜리아 공작저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와 타운 하우스를 내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레미시어 후작도 당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앞에서 손을 잡고 소리 내 웃는 딸을 보니, 후작 또한 마음이 살살 녹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모라는 존재는 제 자식이 행복해하는 게 가장 기꺼운 법이다. 노튼 황자 앞에서도 저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쯤 해서 레미시어 후작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최근 퍽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하고 있던 참이었다. 알렉사는 어린 시절 노튼 황자와 약혼했고, 제 딸이 노튼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황후와 황자는 어떤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후작은 항상 속이 안 좋았다.

게다가 제 딸이 황후에게 문전박대당한 것을 생각하면!

후작은 이쪽을 보며 수군대는 귀족들을 보며 화가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귀히 기른 딸인 알렉사가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오늘 황후와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을 하면서, 굳어진 얼굴을 애써 풀어야만 했다.

* * *

루카스가 입장하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비켰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황자는 날 듯이 제 연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여인 또한 환하게 웃으며 황자를 맞았다.

누가 봐도 언약을 앞두고 행복한 연인의 모습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슬쩍 발걸음을 옆으로 옮겨 주었다.

하지만 그 대화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리네트는 잔을 들고 황자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전하. 나 이제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어.”

봄꽃이 핀 듯 아리따운 미소였다. 황자 또한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무슨 소리야?”

“부녀의 정을 돈독하게 다지는 시간을 가졌거든.”

“장인어른 되실 분이 따님을 너무나 사랑하시나 보군?”

리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사랑해서 죽여 버릴 만큼.”

“어떻길래?”

“백안을 얻기 위해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려는 모양인데.”

황성에 들어와 사교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세월이 없었다면 루카스는 그 순간 표정을 굳히고 말았을 것이다.

“……확실해?”

“내 어머니 얘기를 했어.”

리네트는 눈인사하며 슬쩍 멀어지는 알렉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렉사가 완전히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약혼을 취소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죽여 버리겠다고.”

“공작 부인을?”

“어머, 전하.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누가 보면 어리석다 웃을지도 몰라요.”

리네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루카스의 어깨를 미는 척하고 꼬집었다.

‘멍청아, 헛소리할래?’

루카스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제가 그대를 이렇듯 사랑하니 눈이 멀어 가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이 비루한 구혼자에게 그대의 지혜를 나눠 주지 않겠습니까?”

“기꺼이.”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연인끼리의 장난으로 보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리네트의 설명이 끝나자 루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억지로 취해 낳았다는 하녀…… 하지만 돌아가신 것 아니었어?”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괜찮아?”

두 사람은 슬쩍 연회장을 거닐었다. 아직 황제 내외가 들지 않아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고, 스쳐 지나가는 귀족들의 인사를 대강 받아넘기며 속삭이기 적당했다.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어머니가 새삼 한 번 더 돌아가신다고 해서 그렇게 대단히 마음 아프게 다가오진 않는다고 답했지.”

“공작의 일격이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거군.”

미소는 루카스의 입가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의 미소와는 다른,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결국 공작에게 남은 건 마지막 방법뿐이고.”

“그래.”

대대로 카멜리아 공작가는 백안의 적통 계승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딸에게 능력이 계승되면 데릴사위를 들이거나, 아이를 낳게 해 아들에게 입적시켰다. 그러나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 자식도 있게 마련이다.

그럴 경우 ‘백안’은 어떻게 되는가.

리네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백안’은 마지막 방법을 알려 주었다. 계승자가 죽으면, 백안은 다른 어린 핏줄에게 옮겨 간다고.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백안이 의지를 가지게 된 이유기도 했다.

계곡의 마법사가 한 소녀에게 안겨 준 능력은 시간이 지나며 추악한 이들에게 이용당했다. 좋은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는 않으니, 그냥 주변인에게 옮겨 가는 거야.’

백안은 그렇게 말했다.

‘물론 갈레안이라는 애는 나도 싫어. 그렇지만 남은 애가 그 애밖에 없다면 어쩌겠어? 내가 지금의 카멜리아 공작에게 계승된 게 무슨 이유라고 생각해?’

카멜리아 공작 또한 그 마지막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갈레안이 백안을 계승한다는 확신이 없어, 여태껏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리네트를 회유하거나 겁박한 것뿐이다.

하지만 모든 게 먹히지 않는다면 그는 이제 리네트를 죽일 것이다. 그것 또한 새로운 계승자를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머니 때문에 겁을 먹은 척하는 건 안 됐던 거야?”

“그럼 오늘 약혼 취소인데?”

“음, 안 되겠군. 기각.”

루카스는 유쾌하게 말하면서도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시선의 끝은 한쪽에 선 카멜리아 공작 내외를 향해 있었다. 도저히 그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기 어려웠으리라.

“인사 한번 할까?”

“진심이야?”

“약혼식 전에 인사하는 게 뭐 어때서.”

황자는 그대로 공작 부부를 향해 휘적휘적 갔다. 약혼식을 앞둔 남자가 상대 여인의 부모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모두가 의심 없이 한 발짝 그를 위해 비켜섰다.

“복된 날입니다. 이렇게 저를 위해 그녀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딱히 황자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루카스의 인사에 응한 것은 이멜다였다. 이멜다는 퍽 흥미롭다는 듯 루카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제가 드린 옷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뻔뻔하기도 하지. 리네트는 혀를 찼다.

금발의 황자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공작 부인에게 정중히 답했다.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제게 맞지 않았습니다.”

“어머나, 그랬군요. 제 불찰이네요. 꼭 그 옷을 입으신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요.”

이멜다가 부채를 흔들며 웃었다. 그 시선이 리네트와 마주쳤으나, 여전히 그녀는 오만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미친 계집애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네 약혼식 날 뭘 어쩌겠어?’ 하는 생각이 묻어났다.

하지만 말이야.

리네트는 픽 웃으며 루카스의 뒤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날을 펴, 가볍게 목 주변에서 흔들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에 이뤄졌고, 남들이 본다면 ‘조금 더운가?’ 할 수도 있는 짧은 제스처였다.

그러나 이멜다에게는 사뭇 다르게 다가올 만한 동작이었다. 누구라도 자신과 사이가 나쁜 사람이 목 주변에 손날을 대고 그어 버리는 듯한 행동을 한다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멜다가 얼굴을 싹 굳히자, 리네트는 모른 척하고 루카스의 소매를 슬그머니 잡았다.

“전하, 하지만 언제나 멋지세요.”

“그렇습니까.”

“오늘 입으신 옷은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빛깔의 옷 같아요.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네요.”

“이런, 리네트. 그대도 그렇습니다. 그때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그 자리의 누구도 두 사람이 리시스트 기차역의 창고에서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비에 쫄딱 젖어 귓불에서는 피가 나고 얼굴에는 멍이 든 채, 맞지도 않는 이멜다의 드레스를 입었던 리네트를 생각하며 루카스는 미소 지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몇 배는 사랑스러웠다.

물론 그녀가 좀 더 나은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화장을 해서, 멍이 지워져서 같은 이유는 당연히 아니었다.

* * *

약혼식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치러졌다. 황제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앞으로 불려 나갔다.

카멜리아 공작은 똥 씹은 표정으로 혼약을 선언했다. 그 얼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카멜리아의 핏줄이 리시스트 황가에 허락된 적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감탄하는 사람도 있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낸터킷 황후가 리네트에게 끼워 준 반지는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예물 중 가장 가볍고 작은 것이었다.

월계수 나뭇잎 모양으로 조각된 은반지.

약혼반지라고 하기에는 초라했으나, 황후는 미소 지으며 그 반지를 그녀에게 끼웠다.

“듣자 하니 그대가 이런 디자인을 좋아한다지요. 신경 써 골라 봤답니다.”

그 말에 리네트는 반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렀던 보석상의 디자인이 이런 모티브의 보석을 많이 내놨던 것 같기도 하다. 낸터킷 황후로서는 그녀에게 초라한 물건을 줄, 실로 괜찮은 핑계였던 것이다.

리네트는 환하게 웃었다.

“예. 마음에 쏙 들어요. 고맙습니다.”

그 속이 어떻든 간에 두 사람 모두 남들 앞에서는 웃어야 했다. 이멜다에게는 제스처라도 취했지만, 황후에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네트는 낸터킷 황후가 끼워 주는 반지를 받아 뒤로 물러섰다. 루카스 또한 이멜다에 의해 같은 반지가 끼워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리시스트 황가에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보물 중 하나라고 황후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영광된 일입니다. 제가 황자 전하께 이런 귀한 물건을 끼워 드릴 날이 올 줄은.”

“기쁨을 금치 못하겠군요.”

이멜다의 말에 루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약혼 절차가 끝나자, 곧 황제의 생일 축하를 위한 다른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고대한 약혼식치고는 간단했으나, 리네트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새벽부터 캐러멜 하나밖에 먹지 못해 배도 고팠고, 구두도 갑갑했다.

그녀는 툭 내뱉었다.

“배고파.”

그 말에 루카스는 빠르게 시녀를 불렀다.

그러나 리네트는 루카스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본래 이런 자리에서 여인이 뭔가 입에 넣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리를 피해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빈 배를 채우는 것은 가능했지만, 리네트는 주인공이었고 자리를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내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루카스는 생각했다. 그는 고민 끝에 무화과 위에 작은 치즈가 올라간 음식을 곁눈질하며 입을 떼었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너무 가녀려서 요정인 줄 알았다오.”

“어머나…….”

리네트가 말끝을 흐렸다. 뜬금없는 칭찬에 당황한 듯 보였으며 속내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야, 뭐 해? 갑자기.’

그러나 루카스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이 자리에도 나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 것 같군. 모두 그대를 쳐다보는 것을 보면 말이야.”

‘황자가 사랑에 미쳤구나.’

‘헛소리를 하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의 리네트가 예쁘긴 했다. 한데 아무리 그래도 요정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높으신 분이 그렇게 말하니 동조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 근처에 서 있던 루카스파의 젊은 귀족들이 가장 먼저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어찌나 아름다우신지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숲속을 뛰어노는 페어리가 나타난 줄만 알았습니다.”

점점 칭찬의 말은 커지고 과해졌다.

“저는 카멜리아 양의 뒤에서 누군가 빛을 비추는 줄 알았답니다!”

“가벼운 발놀림은 또 어떻고요! 허공에 떠 계신 줄로만 생각했어요!”

무시무시하게 세를 불리는 칭찬 때문에 리네트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편 없는 황자라더니, 아부하는 사람은 수십 명이었다.

그때, 루카스가 무화과를 내밀었다.

“다들 이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군. 요정은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지. 인간의 음식을 먹으면 인간이 되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을 먹고 인간이 되어 내 곁에 있어 주겠소?”

‘루카스 리시스트…… 죽는다, 진짜.’

리네트가 그를 꼬나봤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수줍음, 혹은 투정으로 보이는지 주변에서는 가볍게 환호까지 했다.

루카스는 한술 더 떠 그녀의 입술 앞에 무화과를 내밀었다.

리네트는 결심했다. 다시는 배고프단 소리를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꾹 감고 무화과를 받아먹었다. 유감스럽게도 눈물 나게 맛있었다.

“어떻습니까.”

“……원래 사람이었습니다.”

고마해라. 많이 먹었다.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루카스의 표현대로 복된 날이었다.

* * *

낸터킷 황후는 상석에 앉아 있다가, 와르륵 웃음이 터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꼴 보기도 싫은 루카스 리시스트와 리네트 카멜리아가 그쪽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눈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귀족 하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쨌든 그녀 또한 이런 자리에 오랜만에 나온 참이었고, 그녀를 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이 인사를 하겠다고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강녕하셨습니까.”

곱디고운 여인이 드레스 자락을 들고 사뿐히 인사를 건넸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그 미모만은 죽지 않았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오팔이 무섭도록 번쩍거렸다.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황후는 냉랭하게 답했다.

“그대의 걱정 덕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도 건강하셨소.”

레미시어 후작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낸터킷 황후는 그에게 노튼을 부탁하며 더없이 따스하게 인사했기 때문이다.

제 딸이 비위를 거슬렸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까지 이렇게 대하는 것은 퍽 모욕적이었다. 알렉사가 황후 궁 앞에서 울며 돌아섰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측근 시녀로부터 이미 전해 들은 바이나, 직접 황후를 만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레미시어 후작은 화를 다스리려 노력했다. 어쨌든 아직 약혼은 깨지지 않았다. 이것 또한 그녀의 변덕일 뿐이니, 곧 좋아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미시어 후작은 비탄을 느꼈다.

자신이야 황후를 만나는 날은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다. 그러나 제 딸은 어떠한가.

자신과 달리 그녀는 노튼과 결혼한다면 어쩔 수 없이 황후를 계속 봐야 할 것이다.

제 딸은 사랑하는 노튼과 결혼한 후에, 늘 황후의 변덕에 마음을 졸이며 살게 되는 것일까?

레미시어 후작은 생각 같아서는 제 딸과 노튼의 약혼을 파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도 제 딸이 이렇게 기죽어 있는 것은 황후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알렉사가 노튼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이다. 제 딸에게 파혼을 명해 봐야 그녀는 제 말을 듣지 않을 터. 언제나 순종적이었던 딸이기에 더더욱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후작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럴 때 차라리 노튼 황자라도 있었다면 그를 만나, 그에게 제 딸을 지켜 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것을.

하지만…… 거기서 후작은 또다시 멈칫했다. 노튼 황자는 어떠한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황후가 그렇게 변덕스럽게 굴고 제 딸에게 모멸감을 준다 하더라도, 노튼 황자가 제 딸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결국 제 딸과 신 앞에서 언약할 이는 노튼이었으니.

후작은 여자의 행복이야말로 남자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남편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튼처럼 이해타산이 확실한 타입은 알렉사를 불행하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잡스러운 소문이 나는 것을 싫어해 섣부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도 않았으며, 매사에 빈틈없이 굴었다.

후작은 정말이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만큼은, 노튼 황자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알렉사를 사랑하느냐고.

그렇지만 노튼 황자는 지금 북부에 있었다. 견고한 북부의 귀족들 사이에서 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서.

근 한 달이 넘었지만 모두들 그 일이 그렇게 빨리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노튼 황자는 그곳에서 반년은 넘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또.”

후작의 상념 사이로 황후의 인사가 파고들었다. 제 아들의 약혼녀를 대하는 것이라기엔 너무나 성의 없는 태도였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셈이었다.

후작은 당장이라도 황후에게 따지고 싶었으나, 집중된 시선에 꾹 참았다.

알렉사는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계곡에 가 있는 둘째가 여기 있었다면 대신 화를 내 주었을까. 후작은 고지식한 성격의 둘째 아들이 왜 루카스 황자의 편을 들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만은 십분 이해했다.

몇몇 여인들이 알렉사를 곁눈질하며 소곤거렸다. 생각보다 황후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작은 루카스 황자 쪽을 쳐다봤다. 젊은 귀족들이 상당수 몰려 있는 그곳에선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알렉사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말을 걸었다.

“아버지.”

“그래.”

“저는 아버지를 존경해요.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인생에 비하면 제 경험은 일천하기만 하죠. 그러니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후작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알렉사의 어조는 무겁고 단단했다. 그녀 또한 황후의 태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사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상대가 저를 싫어해도 제가 잘하면 되겠지, 생각했어요. 증오는 꾸준한 사랑과 애정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고 배웠거든요.”

여인의 덕목은 현숙함과 꾸준한 사랑이다. 끊임없이 그 남편을 공경해야 하며, 모든 이에게 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알렉사는 그 말에 가장 들어맞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로 묻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큰 애정으로 대해도 상대가 제게 어떤 호의도 할애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게 마음을 낭비하지 않는 게 저를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요?”

알렉사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레미시어 후작은 이내 알렉사의 시선이 자신과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네트 카멜리아.

“나중에…….”

알렉사의 초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후작은 제 둘째 아들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 * *

연회는 슬슬 무르익어 갔다. 사람들은 이제 슬슬 친한 무리끼리 나뉘어 자신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귀족들은 계속해서 루카스의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했으나, 눈치 빠른 누군가가 연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자고 제안했다. 결국 본의 아니게 둘만 남게 되었다.

황자님은 능숙하게도 리네트를 작은 정원으로 인도했다.

상당히 외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사랑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한겨울이지만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덕에 꽃이 핀 나무들이 꽤 많았다. 정원 가운데의 우물도 얼지 않아 찰랑찰랑, 가끔 물소리가 났다.

한마디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위해 루카스가 제 재킷을 벗어 걸쳐 주었다.

“좀 무겁네.”

“음, 이래 봬도 황자님이라.”

재킷 앞에는 수많은 휘장이 걸려 있었다. 다 루카스에게 주어진 칭호와 영지를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리네트는 새삼스럽게 그 훈장과 문장들을 살펴봤다.

“꽤 많이 받았네?”

“응.”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친정이 가지고 있던 영지들 중 일부라더군. 결혼하실 때 가지고 온 지참금이었지. 아버지께서 나를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쥐여 주신 것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노튼에게 미움받았겠군.”

리네트가 픽 웃었다. 루카스도 어깨를 으쓱하며 정원 한쪽의 긴 의자를 슥슥 쓸었다. 두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고개를 들자 별이 보였다.

“맨 처음 황성에 들어왔을 때는 그 애가 나를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몰랐지. 나는 정말로 황위만큼은 관심이 없었거든.”

“하지만 폐하께서 너무 많은 영토를 주셨고?”

“그래.”

황제는 루카스를 만난 기쁨에, 그리고 긴 세월 동안 평민으로 살아온 그에 대한 안타까움에, 죽은 황후가 지참금으로 가져왔던 광대한 평야를 그에게 내주었다. 노른자위나 다름없는 부유한 땅이었고, 노튼으로서는 그게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루카스의 재킷에 달려 있는 문장들은 모두 그의 영토와 작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많은 영토에서 그는 영주였고, 엄청난 부자였다.

루카스가 문장을 살펴보는 리네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만약 황제가 되지 못해도 영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

“무슨 소리야?”

리네트는 뾰족하게 되물었다.

“황제가 못 되면 너랑 결혼할 이유도 없잖아.”

루카스가 가슴을 꽉 쥐는 시늉을 했다.

“윽. 나의 연인은 약혼식 날 이렇게 차가운 말로 나를 상처 입히는구나.”

“작작 해. 너랑 내가 애초에 만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너지?”

“뭘?”

“로가나한테 이상한 거 가르친 사람.”

오늘 오전, 약을 먹은 로가나가 가슴을 쥐며 쓰러지는 시늉을 해 식겁한 차였다. 그게 이 남자의 동작을 흉내 낸 거라고 리네트는 확신했다.

그녀의 설명에 루카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깜찍하게도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네가 가르쳐 준 거 아냐?”

“아닌데. 흠.”

루카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나를 따라 했는지는 알겠는걸.”

“왜?”

“그야 로가나는 네 충성스러운 강아지니까. 나를 보면 네가 웃는 걸 보고 따라 한 게 아닐까?”

“자신만만하네? 뭘 믿고 그렇게 생각해?”

리네트는 픽 웃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루카스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뭘 믿고라니. 지금 이렇게 웃고 있잖아.”

앗, 방심했다. 리네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루카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냈다.

“안 되겠다. 기준을 정해야겠어.”

“무슨 기준?”

“당신, 저번부터 그렇게 은근슬쩍 자꾸 닿아 오는 게 신경 쓰인단 말이야.”

리네트가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렸다.

“여태까지야 너와 내가 합의하에 계약을 맺은 관계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당연히 이런 얘기는 안 했는데, 이제는 해야겠어. 함부로 만지지 마.”

“이런.”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야기했잖아. 나는 이제부터 그대에게 열렬하게 치근덕댈 거라고.”

“치근덕…….”

남자의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내가 계속해서 구애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황자님. 구애한다고 해서 제게 손대는 것까지 허락한 건 아닌데요?”

리네트가 눈을 찡그리며 웃자 루카스가 능청을 떨었다.

“아니, 약혼한 사이에 입술에 손가락 대는 것도 허락 안 해 주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그 핑계로 내게 지저분하게 치대려는 건 아니고?”

“지저분하다니!”

루카스가 이번에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대여, 계약을 맺은 것치고는 그대도 퍽 성의 없는 연인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나, 제가 어디가요?”

“그야 연인이라고 하면 으레 있을 법한 입맞춤도-”

“입맞춤-?”

리네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루카스가 화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손등에 입 맞추는 것도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고.”

“그야 제 마음이지요.”

리네트는 괜스레 루카스의 재킷을 단단하게 여미며 톡 쏘아붙였다.

“사랑한다고 해서 스킨십을 강요하는 남자라니, 그게 퍽 저열한 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황자 전하?”

“그래서 이렇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루카스가 그녀의 앞에 서서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리네트는 작게 웃었다. 어쨌든 눈 튀어나올 만큼 잘생긴 남자가 제게 이렇게 열렬하게 구애하고 있는 상황이 딱히 싫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꽤 신사적이었다.

“그러니 제게 손등을 허락해 주시겠어요?”

“뭐, 그쯤이야 얼마든지 허락해 드리지요.”

리네트가 손을 내밀었고, 루카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제 차가운 손등에 닿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리네트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무엇입니까?”

“이왕 이렇게 된 만큼 선을 정해야 될 것 같은데.”

“선?”

“그야, 어쨌든 이제는 정말 약혼을 했다고 못 박힌 사이잖아.”

리네트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들겨 루카스에게 앉으라 청했다. 루카스는 재빠르게 리네트의 옆에 앉아 어깨를 그녀에게 붙였다. 따뜻한 온기가 싫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걸 정하자는 얘기예요.”

하지만 리네트는 거기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루카스의 뺨을 슬쩍 밀고 사이를 벌린 다음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남들 앞에서 그대의 연인 노릇을 사양하진 않을 테니까, 손등에 입을 맞춘다면 얼마나 진하게 맞출 것인가? 횟수는 얼마나 되는가?”

“이럴 수가…….”

루카스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의 연인은 너무나 잔인하군요.”

“이깟 게?”

리네트가 키득거렸다.

“어떤 귀족들은 결혼한 뒤, 부부 관계 횟수와 자세까지도 정해 놓는다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무슨 소립니까, 나의 연인이여.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저는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요.”

“음, 평민 출신 황자님은 순진하기도 하시지.”

리네트는 별생각 없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진하다니! 반대거든! 매일 할 거야!”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싫어! 할 거야! 매일 할 거야! 다양하게!”

“다양하게 뭘…… 아니, 이런 걸 왜 묻고 있는 거야, 나는!”

“원하신다면 대답해 드리죠!”

“대답하지 마!”

약간의 실랑이 뒤에 웃음소리가 지나갔다.

리네트는 정확히 루카스를 다섯 번 밀어냈고, 루카스는 리네트의 코앞까지 얼굴을 두 번 들이댔다. 남들 보기에 정말 손색없는 연인이었다.

리네트는 여섯 번째의 시도에서 루카스를 완전히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실랑이하느라 거칠어진 숨소리와 웃음소리 같은 것들을 진정시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음, 넌 남들 앞에서 어디까지 하고 싶은데?”

“입맞춤?”

“기각.”

“너무해. 그럼 이마는?”

“그것도 싫어. 얼굴은 다 안 돼.”

“이럴 수가. 나의 연인은 너무나 매정하군.”

“네가 너무 개방적인 거라고 생각 안 해?”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남들 앞에서 입을 맞추고 있으면 야유를 듣기 십상일 것이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면박 주며 주워섬겼다.

“음, 손등에 입 맞추는 건 괜찮고.”

“그건 너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도 가능한 거잖아?”

“음. 내 뒤에서 따라오는 정도도 허락해 줄게.”

“그건 키리에도 가능한 거고!”

양자의 입장 차가 확연하니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카스는 뺨에는 입 맞출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고, 리네트는 얼굴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맞섰다.

결국 어깨에 손 올리는 것 정도에 합의를 봤으나, 횟수에서 또 입장 차가 벌어졌다.

“한 달에 한 번.”

“말이 돼? 북부는 춥다고!”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거든?”

“아무리 옷을 입어도 거긴 추워!”

“그럼 불을 때면 되지!”

북부에 가면, 그곳의 폐쇄적인 귀족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라도 연회와 티파티 등에 자주 참석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어깨에 손을 얹게 해 달리고 루카스는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보할 수 없지! 리네트는 손을 뻗어 루카스의 코를 비틀었다.

“이 황자님이- 대체 일을 하러 가는 거야, 사심 채우러 가는 거야?”

“둘 다!”

“당당하게 말하지 말라고!”

“앗. 방금 내 코 허락 없이 만졌으니 나도 한 번쯤 그대를 허락 없이 만지게 해 줘!”

“이게 무슨 함무라비 법전인 줄 알아!?”

“함…… 뭐?”

“그런 게 있어!”

만담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치댔고, 받아 주는 자도 상대에게 마음이 없지 않으니 즐거웠다.

리네트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다. 그에 루카스가 잽싸게 그녀의 손을 쥐려고 할 때였다.

“……그러니까, 두 분은 철저하게 계약에 의해 연인을 가장하고 계신다는 이야기인가요?”

숨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고, 두 사람 모두 그 말이 들리자마자 동시에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화랑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른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아이라고 하기에는 어설프게 큰 키.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리네트는 그게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양비론자 어린이.

오늘 두 사람의 약혼식 내내 푸르죽죽한 얼굴이 되어 있던 남자아이는 눈에 힘을 주고 두 사람을 꼬나보고 있었다.

“갈레안.”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누님에게 어쨌든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남자아이는 변명하듯 덧붙였으나, 눈초리는 리네트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리네트는 빠르게 말했다.

“갈레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너무 무례한 것 같은데.”

“글쎄요.”

갈레안 카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게 진짜라면, 두 분이야말로 저 연회장에 있는 모든 분들을 기만한 것이 됩니다. 더 무례하신 게 누구인지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그게 기차 사고 이후에 처음 보는 누이에게 할 말이니?”

그녀는 갈레안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빠르게 쏘아붙이자 갈레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누이. 이제 됐습니까?”

“응. 이제 됐으니까 꺼져.”

리네트의 차가운 말에 갈레안이 이를 악물었다.

“제게 답해 주십시오. 두 분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철저히 이해관계에 의해 약혼하신 겁니까?”

“얘 웃기네.”

리네트는 팔짱을 끼었다. 그러나 갈레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도 아버지를 기만해 가면서요?”

기만, 기만이라…….

리네트는 ‘할 말은 많지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지금 이 순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깟 게 기만이라면, 카멜리아 공작이 제게 한 짓은 무엇인가. 리네트는 그를 협잡꾼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보다 수만 배는 험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설명하기엔 리네트는 너무 피곤했다. 정확히는 갈레안에게 그런 것들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때 나선 이는 루카스였다. 갈레안의 등장에 주춤 일어섰다가, 날 선 남매의 이야기를 팔짱 끼고 관전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이다.

“이런, 갈레안 카멜리아. 소공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갈레안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십 대 초반의 소년은 공작과 꼭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재수 없군.’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주변머리는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싱긋 웃었다.

“그대가 한 말은 그리 틀리진 않는다네. 하지만 내가 몇 가지 덧붙여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혹시 그대는 천치인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갈레안 카멜리아는 자신이 들은 것이 제 십 년 남짓한 인생 최대치의 폭언이라는 것을 알고 입을 딱 벌렸다. 리네트도 당황해 눈을 크게 뜨고 루카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폭탄을 던진 장본인인 루카스는 태연했다.

뒤늦게 갈레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 말조심, 하십시…….”

“아니, 재미있잖아. 그대의 가문은 이 제국에 단둘뿐이라는 공작가다. 안 그런가?”

굳이 맞다, 아니다를 가를 필요도 없었다. 갈레안은 입을 다물고 루카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대의 부친은 카멜리아 공작 부인을 사랑해서 결혼했다던가?”

“……두, 두 분의 결합은 복된 것이었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갈레안이 뒤늦게 대꾸했고, 루카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갈레안을 가리켜 보였다.

“연애결혼은 아니라는 뜻이지.”

갈레안이 아연한 표정이 되자 리네트는 픽 웃었다.

그래. 연애결혼을 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귀족들의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갈레안은 아직도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황자가 리네트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믿고, 스스로가 기만당했다 생각해서 격분하다니.

“하지만, 그렇다면…….”

“사실 저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중 반 이상은 우리 말을 믿지도 않을걸.”

“…….”

리네트는 턱을 괸 채 루카스가 하는 말을 구경했다. 그녀가 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녀에게 청혼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야. 실제로 그렇고.”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사람의 선의와 사랑을 믿는 착한 소년이라는 건 알겠어. 본의 아니게 그대의 선의를 배반한 느낌이라 미안하군. 하지만, 거기까지야.”

“…….”

“그대가 그렇게 치를 떨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쯤 해 줄까?”

“…….”

“재미있는 건 정말로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돼 버렸다는 것이지.”

그 말에 리네트의 얼굴이 굳었다. 갈레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갈레안의 눈이 이만해졌다가, 리네트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루카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용서가 되려나.”

“……아뇨.”

의외로 갈레안은 곧바로 답했다.

루카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갈레안이 말을 건 것은 리네트였다.

“저는 누님에게 화가 납니다.”

“뭐라고?”

“누님이 저를 싫어하시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누이께서 왜 이 청혼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납득하고 싶습니다.”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갈레안은 주먹을 꾹 쥔 채로 음절에 하나하나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도 아마 아실 겁니다. 제 누이는 ‘백안’을 계승했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리네트가 백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카멜리아 공작가의 비밀이었다.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것은, 갈레안으로서는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갈레안은 이를 악물고 짜내듯이 리네트에게 따졌다.

“사람이라면 응당 부모를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누이께서는 가문에서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길바닥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은 백안 덕분입니다. 가문의 능력 덕분에 누이는 목숨을 부지하고, 공작가의 재산으로 컸습니다. 아닙니까?”

“야, 너 되게 짜증 나는 말 한다.”

리네트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갈레안은 말을 이었다.

“누이가 아버지께서 정해 준 약혼자를 거부하고 황자 전하께 간 것보다 더 나쁩니다. 누이는 가문을 배신하고 황실에 붙었군요.”

“워, 갈레안 카멜리아. 그 말은 좀 위험한데. 마치 카멜리아 가문이…….”

반역이라도 하려는 것 같잖아. 루카스는 일부러 중간에 말을 끊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갈레안이 그의 말에 움찔한 것이다.

“갈레안 카멜리아.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럼 자네는 자네의 누이가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길바닥으로 쫓겨났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그 말에 갈레안이 침묵했다. 루카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당한 부당한 대접을 모르진 않겠지. 나조차 목격했을 정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문에 제 몸 바쳐 데릴사위를 들여 핏줄을 이어 나가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고?”

“……전하께서 황위를 원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문이든, 귀족이라면 그 가문을 보전하고 재산을 담 밖으로 넘기지 않는 것을 가장 중하게 생각합니다. 백안 또한 가문의 재산이고, 이렇듯 일종의 계약을 통해 황실에 그 능력을 넘기려는 것은 부당합니다.”

황자는 더 대꾸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작은 정원을 울렸다.

“그런데 사랑하면 괜찮고?”

“……적어도 사랑에 눈이 먼 것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겠죠.”

갈레안이 대꾸했다.

아하. 리네트는 이제 이 소년이 왜 이렇듯 화를 내고 있는지 알아챘다.

그는 기차 사고 직전에 리네트에게서 그녀가 사실은 하녀 소생이라는 것을 들었다. 이후 소년은 리네트의 출신에 대해 알아봤을 것이고, 제 아비가 하녀를 겁탈해 그녀를 낳았다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길러진 소년이다. 이멜다는 갈레안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뒤늦게 접하기를 바랐고, 원리 원칙 주의자로 유명한 선생들만 데려다 교육시켰다. 갈레안을 당당하고 올바른 소리만 하는 이로 키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레안은 리네트가 루카스를 사랑해 약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으로나마 위안 삼았겠지. 그녀가 비록 부정한 출신이지만 그 인생은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정작 리네트가 전략적으로 가문을 나갔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네 만족을 위해 내가 황자님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확인받으려고 했지만, 배신감만 느꼈고?”

“그렇다는 것 같은데.”

정작 두 사람은 여유만만하게 갈레안의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소년은 분한 듯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피식 웃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혀 보였다.

“하지만 갈레안. 내가 약속하지.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지금까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대의 누이를 향해 구혼할 것이라네. 들었지 않은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어쩔 건데?”

리네트가 턱을 괴고 묻자 갈레안이 흠칫했다.

“그럼 어쩔 거냐고. 배신감 느껴서 나를 찌를래?”

“……그런 협잡꾼 같은 짓을…….”

리네트는 ‘네 아비가 오늘 오전에 훨씬 협잡꾼 같은 소리를 내게 와서 했단다.’ 하고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두 사람 왜 사랑 안 해요!?’ 하고 빼액 떼를 쓰는 어린애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역시 뒷맛이 나빴다. 어쨌든 제가 하녀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갈레안이 공작과도 데면데면했다고 전해 들은 차다.

“뭐, 이쯤 되니 명백하군.”

“뭐?”

“그대가 나를 사랑하면 되잖아?”

루카스는 퍽 얄밉게도 웃고 있었다.

리네트는 좀 짜증이 났다. 마법사도 그렇고, 이제는 갈레안까지 제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세기의 미남이라고 한들, 모두가 ‘연애해! 연애해!’ 하고 박수를 치고 있으면 리네트처럼 청개구리 같은 타입은 어쩐지 그 말을 듣기 싫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적을 더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레안이 되바라지거나 못돼 처먹은 타입이었다면 여기서 당장 뛰쳐나가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남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려 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공작이나 낸터킷 황후에게라도 얘기했겠지.

그러나 자신을 저렇게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갈레안은 꽤 나쁘지 않은 애였다. 아직까지는.

‘어쩌면 카멜리아 공작가에도 약간의 희망은 남아 있는 거 아닐까?’

물론 두고 봐야 한다. 리네트는 그딴 희망에 제 인생을 걸 생각도, 기다려 줄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갈레안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던 짜증 나는 인상은 조금 수정해 주기로 했다.

“됐고.”

“쳇.”

“갈레안. 뭐 하나 알려 줄까?”

리네트는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며 갈레안에게 여상히 물었다. 공작가의 어린 소년이 눈을 찌푸리며 리네트를 바라봤다.

“네 누이는 분명 그렇게 로맨틱한 이유로 이 황자님과 약혼하진 않았단다.”

“…….”

“하지만 뒤늦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지.”

툴툴대고 있던 루카스는 순간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깜짝 놀라 앞을 돌아봤다. 그리고 제 크라바트를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갈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루카스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황자님, 저는 이유 없는 짓은 하지 않아요.”

항상 뾰족하게 그를 쳐다보던 눈이 환하게 웃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처음은 가벼웠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언제나 제 손등을 침범하던 남자의 입술은 리네트의 입술이 닿자 얼떨떨한 듯 멈춰 있었다.

그녀는 쪽- 소리가 나도록 루카스에게 입 맞추고는 커진 눈동자를 보며 픽 웃었다. 막상 하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그녀는 두 번째 용기를 내 다시 한번 입 맞췄다.

쪽.

두 번째 소리는 조금 더 작았고, 그녀는 입술을 떼지 않고 눈을 휘며 웃었다. 어두운 정원에서 얼굴을 맞대고 보는 푸른 눈이 문득 흐려졌다고 생각할 때였다.

순식간에 팔이 뻗어 나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깨부터 등까지 두툼하고 큰 손이 강하게 그녀를 잡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정말?”

리네트는 작게 답했다.

“코 허락 없이 만졌으니 답례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남자의 작은 한숨이 리네트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제발…….”

리네트가 키득키득 웃자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매번 이런 답례가 돌아오면, 허락 없이 아무 때나 만져도 되는데…….”

“위험한 소리를 하시네요.”

“그렇지만.”

“-애 앞에서.”

그제야 루카스가 옆을 돌아봤다. 그 앞에는 눈을 끔벅이는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시선을 맞춘 루카스는 조금 더 음험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가 납득하겠어?”

“그야-”

“더 긴 납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잠깐만.”

“제발.”

남자의 호소는 짧았으나 간절했다.

리네트는 제 이마를 간지럽히는 금발에 눈을 찡그렸으나, 감지는 못했다.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짙은 푸른 눈이 담고 있는 강렬한 감정에 압도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험했다. 갈레안을 놀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쩐지 여기서 홀려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리네트는 자신을 다독이려고 노력했다.

안 돼. 안 된다고. 아까까지 생각했잖아. 남들이 등 떠미는 길은 가기 싫다고.

하지만 남자의 팔 안에 얌전히 가둬져서 싫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자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싫어?”

그딴 얼굴을 하고 싫으냐고 물으면 반칙이었다.

리네트는 남자가 ‘첫 키스’라고 우기던,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그런 얼굴로 이런 소리를 했다면 두말없이 사타구니를 발로 차고 쫓아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리네트의 눈앞에 있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슬프게 흐려질 것만 같은 깊은 눈, 그리고 누그러뜨린 깔끔한 눈썹.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 붉게 물든 입술과 잔잔한 홍조,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동화 같은 왕자님 얼굴.

그러니까, 마법사는 정말이지 리네트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길을 안배한 셈이었다.

리네트는 잠깐 생각했다. 혹시 마법사는 리시스트 가문에 대대로 미모를 내려 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 얼굴은 말도 안 되는데…….

차마 싫다고도 거부할 수 없는 얼굴이라 리네트는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눈을…….”

“다시 뜰까?”

“아니.”

리네트의 대꾸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딸려 왔다.

이윽고 리네트의 입술에 다시 부드러운 것이 맞닿았다. 그녀가 그에게 선사했듯 가벼운 입맞춤은 아니었다.

황자는 입술을 벌리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먼저 물었다. 부드러운 살덩이들이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파고들었고, 리네트는 그대로 파도 사이에 휩쓸리는 기분이 됐다.

루카스의 팔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끝은 그마저도 어찌하지 못해 그녀의 팔을 놓았다가 다시 붙잡았다.

리네트는 킥킥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카스의 입술, 혀 같은 것들이 그녀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뜸 그에게 동침을 제안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건방지고 대담한 짓이었는지 리네트는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아마 상대와 입 맞추고 있지 않았다면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간신히 입술을 뗐을 때, 리네트는 가장 먼저 옆부터 살펴봤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체 그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갔네.”

“……리네트.”

시종일관 그의 얼굴에 머무르고 있던 여유 같은 건 하나도 남지 않은 얼굴로 루카스가 리네트를 지그시 바라봤다.

리네트는 눈알을 굴리다가 제 어깨를 붙든 루카스의 손을 떼어 냈다. 그녀를 꽉 붙들었던 힘이 무색하게도, 루카스는 별 저항 없이 물러섰다.

그러나 리네트는 장난스럽게 루카스의 손을 놔주지 않고 들여다보다가 그 손끝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났다.

“지금…….”

“음, 네가 항상 하길래 어떤 느낌인가 궁금했어.”

루카스는 힘없이 웃었다.

“갈레안은 갔어. 더 그러면 내가 착각한다고.”

“음, 그렇구나.”

리네트는 심드렁히 말하면서도 루카스의 손을 놓지 않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 다시 제 입술을 묻었다. 시선은 루카스를 향한 채였다.

“나 살면서 좀 궁금했던 게 또 있는데.”

“놓고 말해. 손가락에 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죽을 거 같다고.”

남자는 참 솔직하게도 말했다. 손을 빼려는 황자를 보며 리네트는 씩 웃었다.

“자기 좋아하는 남자를 갖고 노는 여자의 마음이 되게 궁금했거든?”

“……너.”

그대, 혹은 당신. 남자는 늘 여유롭게 장난치듯 리네트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지금 리네트를 부르는 루카스의 어조는 갈급하기 그지없었다.

리네트는 제 입술로 루카스의 손가락 마디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재미구나?”

“……나도 궁금했던 게 있는데.”

리네트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나머지 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리네트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뭔데?”

“여자들한테 좌지우지당하는 남자들이 참 한심하면서도 왜 저러나 싶었거든.”

“그렇구나. 지금은?”

루카스는 한숨을 쉬다가, 리네트의 어깨를 붙잡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보기 좋은 이마와 짙은 눈썹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라졌다.

“……제발 나를 더 갖고 놀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군.”

아하하, 리네트가 웃었다.

그에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그러나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나를 사랑해?”

“갈레안이 없는걸, 지금은.”

“젠장.”

그가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신음했다.

재킷 덕분에 감촉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그 숨소리가 어쩐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카멜리아 소공작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지, 원망을 보내야 하는 건지 구별이 안 가는군.”

“싫은 남자랑 입을 맞추지는 않지.”

그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홱 들자, 눈이 마주친 리네트가 또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루카스는 다시 원망스럽게 웅얼거리며 리네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입을 맞추는 정도는 나쁘지 않은 데다가 얼굴은 봐줄 만하지만, 딱히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경제적으로 하는 여자를 나는 본 적이 없어…….”

“하필 그 여자가 네 약혼녀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네트는 감탄했다. 정말이지, 사람 속을 무섭도록 잘 맞추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딱히 사랑하는 건 아니다.’보다는 조금 더 달가운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얘기해 주고 싶진 않은걸.’

리네트가 심술궂게 흥흥 웃었다.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채였다.

루카스는 한참 후에야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동정을 구걸하기로 마음먹은 듯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은 얼굴로.

“리네트.”

“두 번은 없어.”

“역시 다시 한번 갈레안 카멜리아 소공작을 데려와야…….”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루카스의 손을 놨다.

“재주 있으면 다시 데려와 보든가.”

“아니, 뭐 꼭 오늘 다시 해야 하는 건 아닌 데다…… 소공작을 데려오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너와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 다음으로 보류하도록 할까.”

정말이지 말 하나는 청산유수였다. 루카스의 말에 리네트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게 우리의 첫 키스인 건가.”

“……정말이지, 처음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건데?”

“그야 역시 그 도박장에서의 기억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았단 말이지.”

루카스가 씩 웃다가 아, 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봤어?”

“뭘?”

“배럴 남작이 오늘 연회에 왔던데.”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뭐라고? 그 사람, 재산 몰수당한 거 아니었어?”

황제는 배럴 남작의 도박장을 트집 잡아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작위는 박탈하지 않았으니 이곳에 오려면 올 수는 있었으나, 근신의 의미에서라도 보통은 그 같은 일을 당하면 몇 년간은 사교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연회에 올 돈이 없는 것도 한몫하고.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 리시스트의 큰손 중 하나로 불렸던 재력이 어디로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따로 숨겨 놓은 재산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나보다는 네가 문제라는 거야.”

“……나를 알아볼까?”

“아마도.”

루카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 잠입했을 때, 루카스는 마법으로 얼굴을 바꾸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야 그때는 그를 재판장에 세울 목적이었던지라 그 이후에는 더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배럴 남작은 동부의 촌놈과 검은 머리 여자가 로가나를 훔쳐 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자의 약혼식에서 그 검은 머리의 여자를 봤다면? 그것도 그 여자가 황자의 약혼녀라며 떡하니 서 있다면?

자신이 음모에 빠졌다고 발광할지도 몰랐다. 노튼에게 보고하는 정도는 양반이다. 자금줄이 끊겨 고민하던 노튼은 그것을 끊어 놓은 주체가 누군지 알게 될 것이고…….

“……본격 개전이로군.”

“역시 그렇겠지.”

“무대는 북부일 테고.”

물론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리네트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주어진 시간은 이제 약 5개월.

북부 귀족이 아무리 공고하다 해도 리네트는 그 이상 시간을 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여유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북부로 갈 준비를 해야겠군. 내일부터 바쁘겠어.”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그때도 물었지만, 왜 북부에 가려고 하지? 나만 가도 되는 곳인데. 북부는 춥고 험해. 가면 외롭고 힘들 거야. 너를 아는 사람들도 그곳엔 없고.”

리네트는 루카스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북부로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북부에서 알려 줄게.”

“……쉽지 않은 아가씨로군.”

“이제 알았어?”

말은 필요 없었다. 루카스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누르고, 그녀를 에스코트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왕관까지의 길은 요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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