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계곡의 마법사 (10/28)

9장 계곡의 마법사

그날 난 기차 사고는 참혹했다. 갑자기 멈춰 선 기차의 뒤 칸은 전복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대부분 귀족들이 데려온 사용인들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가 있던 칸은 특별히 사고를 대비해 무겁게 만들어 놓은 덕에 멀쩡했다고 해요…….”

“기가 막힌 노릇이군.”

자리에 앉아 있던 리네트가 손깍지를 낀 채 중얼거렸다. 보고를 한 로가나가 눈치를 보며 리네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애플은 어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로가나가 냉큼 대답했다.

애플이 목숨을 잃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가씨가 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애플은 다른 승무원에게 전달을 부탁하기 위해 맨 뒤 칸을 벗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칸을 벗어났다고 해서 다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애플은 기차 안에 서 있다가 휘어 버린 칸에서 굴러 머리를 다쳤다. 팔도 부러졌다. 기차 사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지만, 애플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고 현장 주변에는 마땅히 큰 마을도 없어서 인명 피해가 더 컸다.

애플도 제때 처치를 받았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먼저 달려온 말들은 황제와 그나마 멀쩡한 고위 귀족들을 태웠다. 의사와 마법사들 또한 황제에게 묶였다.

황자들은 그 현장에 남아 기사들을 지휘해 사고 잔해를 치우고 사람들을 구조했으나, 문제는 빠른 조치는 모두 귀족들을 위해 행해졌다는 것이었다.

애플은 하녀였고, 치료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뒤 칸에 있던 귀족들 중에도 쓰러지거나 넘어져 다친 이들이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애플보다, 발목을 삔 백작 부인이 먼저 치료받았다.

리네트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애플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리네트의 하녀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원인이 뭐야?”

리네트의 질문은 눈앞의 남자에게로 던져졌다. 루카스는 며칠 내내 사고 수습에 매달리다가 이제 막 리시스트로 돌아온 참이었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리네트는 그것을 일부러 모른 체했다.

“마력석.”

“또야?”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리자 루카스가 설명했다.

“기차의 동력원이던 마력석이 갑자기 빛을 잃었다는군.”

“마력석이 하나만 있었던 건 아닐 것 아냐?”

“기차에 실려 있던 마력석 전부가 동시에 힘을 잃었다.”

루카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어. 원인은 다 같아. 마력석이 힘을 잃었다. 너는 저택에서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요 며칠간 리시스트의 가로등은 모두 꺼져 있었어.”

리네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치안은?”

“수도 경비대가 3교대로 수도를 돌고 있어. 하지만 역부족이야. 곧 한계가 올 거다.”

황당한 일이었다.

제국의 거의 모든 마력석이 힘을 잃었다.

마력석은 제국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동력원이었다. 안전성의 문제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쓰이고 있는 용도는 가로등과 램프, 기차 정도지만, 그 세 가지만 없어져도 야기되는 문제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리네트는 애플이 누워 있는 방 쪽을 바라봤다.

저택에 돌아온 후, 다친 애플을 돌보느라 밖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었다니. 리네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력석 출하량이 줄어든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글쎄. 모르겠어.”

“……그래.”

리네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는 잠시 리네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안 궁금한가?”

“뭐가?”

“……카멜리아 공작 부부의 상황이라거나.”

그녀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라는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봤다. 루카스는 그 와중에도 옅게 웃음이 나오는 자신을 알아채곤 조금 당황했다. 이런 때 웃다니 그야말로 악당이 아닌가.

하지만 저런 게 그녀의 장점이다. 필요 없는 것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것. 루카스는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천천히 말했다.

“갈레안 카멜리아가 크게 다쳤다더군.”

“…….”

“공작 부부와 떨어져서 뒤쪽 칸에 가 있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비교적 피해가 큰 뒤 칸에 있었고, 다리 한쪽을 크게 다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해. 깨끗하게 나을 가능성은…… 없다더군.”

리네트는 대번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갈레안이 왜 공작 부부와 떨어져 있었는지 능히 짐작할 만했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소년의 귓가에 아비가 자신을 어떻게 낳았는지 속삭였다. 아마 자신의 말 때문에라도, 갈레안은 공작 부부의 얼굴을 쉽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루카스는 말을 이었다.

“이멜다 카멜리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고 해. 카멜리아 공작은 온 수도의 의사와 마법사를 모두 불러들이려는 모양이지만, 마법사들은 모두 마탑으로 갔고 의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폐하께서는?”

마력석 출하량이 줄어든 것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한데 루카스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왜 저러지.

“왜?”

“그게, 마력석 출하가 줄어든 것과 관련해서 아버지께서도 계곡에 사람을 보내려고 하셨던 모양이야. 이번 일이 아무리 봐도 마법적인 일인 만큼 더욱더.”

“그런데?”

루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과도 관련 있어.”

“뭐야. 난 내 걱정해서 온 줄 알았네.”

하도 얼굴이 굳어 있기에 농담했는데, 그게 더 안 좋았던 모양이다. 루카스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도 있긴 해. 잠은 자고 있는 거야?”

“자고 있어. ……로가나 덕에.”

로가나가 슬쩍 눈인사했다.

현재 리네트가 머물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알렉사에게 고용된 고용인들이기에 리네트는 가급적이면 타운 하우스의 하인들을 쓰지 않으려 했다. 어떤 루트로든 리네트의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애플의 간호를 로가나와 번갈아 가며 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체력 싸움이다. 루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그녀를 떼어 내야 하는 게 제 볼일이었으니까.

“……당분간 로가나가 도맡아야 할 것 같은데.”

“왜?”

“문제가 좀 생겼어.”

루카스는 리네트를 바라봤다. 리네트의 눈은 의문을 담고 있었으나 비교적 차분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도 차분할까.

황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계곡의 마법사’가 너를 불렀어.”

“……뭐라고?”

리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루카스 자신도 그랬는데 오죽할까. 루카스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계곡의 마법사가 너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노튼 때와 같아. 대상이 너와 프라임 공작이라는 게 다를 뿐.”

“……면담이라고?”

“그래.”

계곡의 마법사는 몇 년 전 노튼을 지명해 독대한 바 있다. 그때의 협정으로 계곡의 주술도 풀렸다.

하지만 지금, 그가 다시 한번 리시스트 제국에 면담을 요청했다.

다만 노튼이 아닌, 리네트 카멜리아와의 면담이다.

“대체 왜?”

리네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루카스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 설명을 먼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의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용건은 오면 설명한다는군.”

“……노튼 황자가 아니라?”

“그래. 사실 이 요청은 사건 직후 황실에 날아왔어. 하지만 정신도 없었던 데다가 진위 여부 검증 때문에 전달하는 데 오래 걸렸다.”

리네트가 이마를 짚으며 루카스를 노려봤다.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 공유하자고 안 했던가?”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보를 노튼 쪽에서 독점했어. 정확히는 첫 연락을 받은 게 노튼 쪽이었지. 하지만 면담 대상자는 노튼이 아니라 너였고, 진위 여부 검증은 아버지께서 같이하셨다.”

“……그렇군.”

“일단은 오늘 당장 황성에 같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하지만…… 괜찮겠어?”

예전보다 확실히 여윈 리네트를 보고 루카스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실 리네트는 애플에 대한 걱정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와중에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로가나에 대한 미안함도 한몫해서, 리네트는 며칠간 굉장히 무리했다. 심지어…….

“발목은? 의사에게는 보였어?”

“응. 애플을 보러 온 의사에게 같이 보였어.”

그날 리네트는 발목을 삐었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터라 열차가 흔들릴 때 맥없이 꺾여 버린 것이다. 지금 리네트는 발목에 부목을 대고, 로가나의 부축이 없으면 걷기도 힘든 처지였다.

“앞으로 한 달은 이렇게 걸어야 한다던데.”

“이런.”

“하지만 황성에 가야 하는 거지?”

“……그래.”

루카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끔찍하다는 말투에 리네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 줘.”

“……지금 당장 가게?”

“그럼 날 저물고 갈래? 황성이 밤손님도 받아?”

뾰족한 말투까지 마모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루카스가 리네트의 손을 붙잡자, 리네트가 영차 하고 일어섰다.

“로가나는 애플 옆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당분간 네가 나를 좀 부축해 줘. 나 혼자서는 못 움직여.”

“당연한 말 하지 마.”

리네트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입고 있는 옷이 좀 황성까지 들어가기는 허름하지만, 폐하께서도 이해하시겠지.”

이 발목으로 드레스를 벗고 페티코트를 겹쳐 입고 하다 보면 날이 샐 것이다.

리네트는 로가나에게 부탁해 가운만 새로 걸치곤 여몄다. 하지만 그 솜씨가 퍽 허술해 결국 로가나가 다시 여며 줘야 했다.

루카스의 팔을 꽉 잡고 리네트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금세 이마에 땀이 송송 돋아났다. 마차까지 가려면 타운 하우스의 계단을 내려가, 홀을 거쳐 또 돌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리네트는 계산이 빨랐다. 그녀는 걸음을 멈춘 후 루카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아 줘.”

“……뭐라고?”

“나 안아서 마차 태워 달라고.”

보란 듯이 팔까지 벌린다.

루카스는 잠시 이게 무슨 일인지 분간이 안 돼 눈을 깜박였으나, 리네트가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비효율적이야. 이렇게 걸어서 마차 타려다가는 황성에 도착하기 전에 늙어 죽을 거야.”

루카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비효율적…… 단지 그래서인가?”

“그럼 뭐가 더 있어?”

리네트의 미간이 덩달아 구겨지려 해서, 루카스는 잽싸게 무릎을 굽혀 리네트의 겨드랑이와 무릎 뒤로 손을 넣었다. 동작은 자연스러웠고, 리네트는 루카스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을 탈출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어서 루카스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후 몇 번 고쳐 안으니, 리네트는 아예 편안하게 이마까지 루카스의 어깨에 기댔다.

루카스는 별말 하지 않고 빠르게 방을 나왔다. 타운 하우스의 하인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가운데 홀을 통과하자, 리네트가 중얼거렸다.

“애플이 누워 있는 게 이럴 땐 다행일까…….”

“무슨 소리야?”

“그 애는 이런 광경을 보면 또 호들갑을 떨어 댈 테니까.”

그 말투 안에는 온갖 감정이 들어 있었다. 루카스는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빠르게 걸었다.

마차 앞에 도열해 있던 호위 기사들도 두 사람을 보고 당황했지만 이내 즉각 문을 열었다.

루카스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리네트가 짧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두 사람은 기차 연결 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갑갑하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그날 분명히 리네트가 제 말에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감아 버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거면 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루카스는 리네트의 아픈 발목 아래 쿠션을 괴었다. 흔들리면 아플까 봐서였다.

다각다각. 마차가 굴렀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친 여인을 이렇게 황실에 부를 때는, 꽃이라도 한 아름 안기면서 반겨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 안타깝게 생각한다.”

“괜찮습니다.”

황제는 덤덤하게 리네트를 맞았다.

‘호인처럼 보이던 것은 아마 그가 여유 있는 상황에서 웃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군…….’

여유 넘치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황제는 경직돼 보였다. 신기하게도 신경질적이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홀에는 노튼과 라베노바 백작, 그리고 몇몇 대신 등이 함께였다. 아무래도 회의 중이었던 모양인지 홀 한편엔 넓은 테이블과 지도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계곡’에 가 주었으면 한다.”

“죄송하지만 폐하. 제가 치료 때문에 저택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던지라, 상황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설명해라.”

이 자리에서 설명을 할 만한 사람은 라베노바 백작 정도였다. 라베노바 백작은 리네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마력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태도는 노골적이었고 경멸스러웠다. ‘백안’이 그 순간 그녀에게 속삭였다.

‘쟤 죽이자.’

그리고 리네트는 거기 진심으로 대답하고 싶어졌다.

죽일까?

이 와중에 지금 사람 무시하는 거야? 리네트는 살짝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두들 당연한 표정으로 라베노바 백작과 리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만 제외하고.

루카스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백작의 말은 노골적인 비아냥을 담고 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이 나이 되도록 공작저에서 한 번 나와 보지도 않은 계집애의 지적 수준을 궁금해하는 동시에 그녀를 깔보는 것이었다.

리네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귀라르델 산맥과 계곡이 주요 산지이며, 리시스트 제국에서는 현재 영구적인 발광 마법과 영구적인 발열 마법을 걸어 주요 산업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리네트의 간단한 대답에 라베노바 백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되어 입을 벌렸으나, 리네트는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제국 수도에서는 주로 가로등에 쓰이는데, 그 설치 구역은 수도의 18개 구역 중 15개 구역에 달합니다. 두 해가 가기 전에 추가적으로 3개 구에도 설치할 예정이죠.”

“그렇…….”

“본래 몇 년 전까지는 황성을 비롯한 5개 구역에 한했는데, 노튼 황자님이 계곡의 마법사와 전격적인 협정을 맺은 이후 마력석 생산량이 대폭 늘었고, 마탑의 발광 마법 보급과 맞물려 3년 동안 10개 구역에 추가 설치가 가능했습니다.”

라베노바 백작이 입을 닫았다.

“발열 마법의 원리나, 리시스트 기차역에서 뻗어 나간 14개 노선의 기차에서 마력석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도 말씀드려야 할까요?”

“……됐다. 백작, 그대도 무례했네.”

황제가 빠르게 리네트를 저지했다. 그녀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리네트는 자못 공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였다. 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네트를 비롯한 방 안의 이들이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튼이었다.

노튼은 제게 몰린 시선을 깨닫고 손을 저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께서 퍽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라워서. 아, 그러니까 이것도 아가씨를 놀리려던 건 아니고.”

그래. 놀리려던 거 아니고 정말 신기해서 웃었겠지. 너 같은 놈은 그런 눈치도 없어서. 리네트는 생긋 웃었다.

“황공합니다. 미욱한 자가 범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 황자께는 퍽 재미있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쯤 하지. 라베노바 백작, 다시 시작하게.”

“예. 죄송합니다. 마저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부디 부탁드립니다.”

리네트의 승낙에 라베노바 백작은 아까보다는 사뭇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기차 사고 이튿날, 저희 쪽으로 계곡의 마법사가 보낸 마법 전령이 왔습니다. 다만 사고 수습 때문에 노튼 황자님께서도 바쁘셨기에 그 전령을 확인하고 진위 여부를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진위 여부를 알아보기는. 그냥 너희들끼리 독식하려 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정보를 공개한 이유는 뻔하다.

“그러다 계곡의 마법사가 동일한 내용의 전령을 같은 날 프라임 공작에게도 발송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말하라.”

느린 말투에 황제가 조급하게 끼어들었다. 라베노바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카멜리아 가문의 리네트 카멜리아와 면담을 원한다.”

“왜 저를…….”

“모릅니다.”

여태까지의 태도와 달리 라베노바 백작은 이번에는 정말 진실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카멜리아 공작이라면 납득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리네트 카멜리아 양을 콕 집어 지명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용건은 무엇인가요?”

“그것도 모릅니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리네트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노튼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차가운 자색 눈으로 리네트를 뚫어져라 봤다.

신기해서, 혹은 처음 보는 형의 구혼자라서? 그런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시선은 절대 아니었다.

‘네깟 게 대체 뭔데?’

시선이 나타내는 바는 분명했고 리네트는 불쾌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참는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몇 년 전 ‘계곡의 마법사’와 독대하신 노튼 황자 전하께서 계시지 않은지요? 마법사와 좋은 관계를 맺어 우정으로 다져진 협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네가 몇 년 전에 계곡의 마법사랑 독대해서 협정 맺었다고 동네방네 떠벌리더니, 지금 이게 뭐야. 너 뭐 잘못했지?’

리네트는 비아냥을 가득 담아 꾹꾹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노튼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모릅니다. 프라임 공작 또한 소환됐지만, 정확히는 프라임 공작에게 떨어진 마법사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리네트 카멜리아와 함께 계곡으로 오라.’는.”

리네트는 기가 막혀 터트리듯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자면, 저는 프라임 공작 각하를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안다. 프라임 공작 또한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더군.”

황제가 말을 덧붙였다. 황제는 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리네트를 내려다봤다.

“프라임 공작은 몇십 년째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지. 그대를 만났을 리도 없거니와, 본인이야말로 더 당황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면…… 이유도 모르시겠군요.”

“그래. 노튼, 너도 정녕 모르느냐?”

급작스레 질문을 받은 노튼이 당황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 송구스럽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프라임 공작의 영지에서도 별다른 기별은 없었고?”

황제가 운을 띄자 노튼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공작이 제게 따로 준 기별은 없었습니다.”

“그런 뜻은 아닌데. 알았다.”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말뜻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았다.

프라임 공작의 영지에서 대체 노튼에게 따로 갈 기별이 뭐가 있겠는가. 응당 그가 프라임 공작의 영지에 풀어 두었을 간자의 기별을 기대한 것이다.

‘걔 돈 없어서 간자 못 쓰는 거 아시면서.’

리네트는 속으로만 혀를 내밀었다.

노튼의 자금줄 중 가장 큰 줄기를 맡았던 배럴 남작의 도박장을 휘저어 놓은 지 벌써 3개월이다.

그야 황자이니 표면적으로는 호의호식하고 황실에서 돈을 대어 쓰겠지만, 간자를 황실의 돈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리시스트 제국의 크기가 얼만데. 간자를 보내는 것도 엄청난 돈이 든다.

그리고 노튼은 최근 쓰고 있는 간자들에 대한 자금 지원을 대폭 줄였다. ‘백안’이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프라임 공작은 최근 정계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영지는 중요도 또한 떨어졌기에, 아마 노튼은 가장 먼저 프라임 영지에서 간자를 뺐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묻는 것이겠지. 아무튼 못된 양반이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 그대에게 계곡으로 가길 부탁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리네트가 고개를 숙이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이렇게나 선뜻 대답할 줄 몰랐다는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계곡의 마법사의 무서움을 알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꽤나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내실에서만 살았던 리네트 카멜리아가 계곡에 가라는 말에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괜찮겠나?”

“예. 다만 제 상황이 여의치 아니하여…….”

리네트는 슬쩍 발목께의 치마를 들어 보였다. 부목을 댄 발이 그대로 다 보였다.

“저런. 어쩌다 그랬느냐?”

“며칠 전의 기차 사고에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황제가 씁쓸하게 혀를 차다 입을 닫았다.

“해서 하인이나 기사를 데려가도 될까요?”

“호위는 당연히 황실에서 붙여 줄 예정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아버지.”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든 것은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빠르게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네가?”

“안 됩니다.”

황제는 눈썹을 들어 올렸고, 노튼은 반대하고 나섰다.

루카스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노튼을 바라보자, 노튼이 이어 말했다.

“형님은 리시스트 제국의 첫째 황자입니다. 형님이 계곡에서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곤란합니다.”

‘정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잘한다.’

맹세코 그 자리의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리네트는 삐딱한 표정이 되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노튼을 바라봤다. 루카스의 몸을 걱정해서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단지 루카스가 리네트를 따라갔다가 큰 공을 세울까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루카스도 만만한 이는 아니었다.

“이런, 노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너도 단신으로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떠났잖니. 그것도 나조차 없을 때.”

너도 갔는데 내가 못 갈 것 같냐. 엿이나 드셈. 뭐 대강 그런 뜻이었다.

루카스가 빙그레 웃는데, 라베노바 백작이 침착하게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저도 함께 봉공했습니다.”

“아, 그렇군. 라베노바 백작을 깜박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 공을 남들이 잊어버릴까 봐 대뜸 나서는 꼴하곤. 너희 사이도 알 만하다.’

리네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루카스가 덧붙였다.

“아버지. 물론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 알고 있으며, 노튼이 저를 걱정하는 이유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사랑하는 여인을 단신으로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루카스.”

“아버지. 노튼이 떠날 때는 아무도 없었다지만, 지금의 리시스트에는 제가 없어도 노튼이 있지 않습니까.”

맹세코 그곳이 황제의 안전이 아니라면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을 것이다. 은근슬쩍 노튼을 제 대체재로 밀어내는 화법이 훌륭했다.

루카스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기에 리네트는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루카스가 희미하게 웃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

야, 이거 남들 앞에서 들으니까 제법 상처 되는데.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후회하는 삶. 그 말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황제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좋다.”

“감사합니다.”

“다만, 정말로 위험한 짓은 하지 말거라, 루카스.”

황제의 시선이 리네트에게도 머물렀다.

“그대도 마찬가지다. 리네트 카멜리아.”

“예.”

“비록 검의 달인인 프라임 공작과 함께한다고는 하나, 상대는 몇백 년을 살아온 마법사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를 상처 입힌. 결코 방심할 수 없으며, 나는 제국이 또다시 황자를 잃어버리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그 예를 받아 주었다.

노튼이 이를 악물었다가 외쳤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안 된다. 루카스의 말을 듣지 못했나.”

황제는 이제 사뭇 엄한 표정이었다. 루카스에게 짓던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노튼이 주먹을 꾹 쥐는 것이 보였다.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 본 것은 저뿐입니다.”

“그래. 그러니 리네트 카멜리아와 루카스에게 잘 알려 주도록 해라.”

저 정도로 빈틈이 없으니 리시스트 제국의 남부를 침상에서 봉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솜씨에 리네트는 혀를 내둘렀다.

곧 대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갔다. 노튼은 마지막까지도 씩씩거리며 서 있다가, 황제의 축객령에 마지못해 나가야만 했다.

* * *

제국의 안위가 걸린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다. 고위 마법사들 중에는 간혹 공간을 접을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력석이 힘을 잃어 모두 소용없다는 점이다. 마탑에 마법 전령을 보내기도 힘에 부쳤고, 더욱이 공간을 접는 정도의 고위 마법을 펼치려면 필연적으로 마력석이 필요했다.

계곡까지는 힘껏 말을 달리면 꼬박 5일이 걸렸다. 그녀가 계곡행을 수락하자마자 황제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사두마차와 기사들을 내주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녀가 입을 옷, 식량도 차곡차곡 준비돼 있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준비했겠지.’

제국에서 감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사람은 없다. 황제는 리네트가 거절하리라 감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리네트는 결국 레미시어의 타운 하우스에 갈 짬도 내지 못한 채 편지 두 통만 남겼다. 알렉사에게 타운 하우스를 비우는 데 대한 양해를 구하고, 로가나에게 애플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안 되는 거야?”

출발 전 황제의 주치의가 점검해 준 발목을 흔들어 보이며 리네트가 말했다. 의사가 동행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기차 사고 때문에 수도의 의사들은 모두 동원된 상태였다.

“……제국 내의 마력석이 모두 멈춘 사태니 어쩔 수 없어.”

“하긴. 수도 경비대도 한계라고 했지.”

“그래.”

가로등이 없으니 범죄가 늘어날 것을 염려한 황제는 제 기사들까지 모두 차출해 수도 전 구역을 3교대로 순찰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가나 휴일이라고는 없는 상황에 모두 지쳐 버릴 것이다.

지치면 느슨해진다. 그리고 범죄는 느슨해진 틈에 일어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차가 모두 멈췄다. 꼭 필요한 의약품을 제때 전달받지 못하는 사람, 유통 기한이 짧은 식재료가 기차 안에서 썩어 버린 사람 등…… 엄청난 도산과 사망,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아직도 반란의 여지가 도사리는 남부에서 이 사실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단지 마력석이 없을 뿐이지만, 엄청난 혼란이 예상됐다. 게다가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서 이 일이 해결된다는 법도 없다.

리네트는 루카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르면서도 골똘히 생각했다.

마차는 발을 다친 리네트 때문에 의자가 모두 빠져 있었다. 대신 푹신한 카페트와 태피스트리, 쿠션 따위로 채워져 있었다.

리네트가 그 안에 자리 잡자 루카스가 들어와 앉았다.

“너는 왜?”

“황자님이라서.”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보통은 황자님이 직접 말을 달리거나 하진 않을 테지.

“불편하면 나갈까?”

“불편할 사람이 따로 있지. 네가 노튼 황자도 아니고. 그냥 있어.”

“고맙군.”

두 사람을 복잡한 표정으로 배웅하러 나선 것은 노튼 황자였다. 대기하는 동안 리네트는 계곡의 마법사에 관해 그와 꽤 오랜 시간 말을 나눴다.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딱히 눈물겨운 인사를 나눌 만한 형제가 아니기에 인사말도 짧았다.

기사들이 마차 근처에 도열하고 선두의 기사가 신호하자, 곧 마차가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상당히 급한 여정이라 마차는 안에 앉은 귀빈들의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달렸다. 마차가 거세게 흔들려 쿠션이 아니었다면 마차 안에서 통통 튀어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며 리네트는 몸을 웅크렸다. 거의 밤을 새워 출발을 준비했기에 노곤했다.

“잘 수 있겠어?”

“응, 아니…….”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리며 무릎을 굽혔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발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삔 발은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거슬렸다.

루카스가 혀를 차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지금은?”

“……이럴 필요까진 없어.”

“하지만 아까보단 낫지?”

정말이었기에 리네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루카스는 그녀의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린 채 그대로 뒤로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카스도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그는 타운 하우스에 올 때부터 피곤해 보였다.

리네트도 더 이상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어 눈을 감았다.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다.

* * *

두 사람은 계곡과 반나절 거리에 있는 요새에서 프라임 공작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프라임 공작은 마법사의 전령을 받은 즉시 요새로 출발했다고 하니, 아마 먼저 와 있을 것이다.

도시마다 말을 갈아 가며 밤낮없이 달려, 둘은 사흘 만에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네트는 산 아래쪽에 위치한 회색 요새를 내려다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기 키리에 경이 있는 거지?”

“음, 그렇겠지.”

“그 딱딱한 얼굴도 아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반가운걸.”

“글쎄, 키리에도 그렇게 생각할까…….”

“화낸다.”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키리에도 머리 아플 것이다. 황위 쟁탈전 전에, 빠르게 군역을 끝내기 위해 이단 경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요새에 배치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제 나쁜 운 때문에 절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프라임 공작은 어떤 사람이야?”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어.”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

“응. 내가 없을 시절에 작위를 물려받아 수도에 딱 한 번 온 적이 있다더군. 그 이후에는 계속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해.”

제국에 딱 두 개뿐인 공작 가문이었다. 카멜리아 공작가가 백안으로 그 위명을 떨친다면, 프라임 공작가는 무가로 이름 높았다. 둘 다 건국 공신 가문이었고, 전통이 깊었다.

다만 계속해서 수도의 공작저에 머무는 카멜리아 공작 일가와 달리, 프라임 공작가는 이전 대부터 영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인가?”

“삼대 째 수도에 들락거리지 않고 있다고?”

“내가 알기론 그래.”

“왜? 혹시 영지가 너무 멋지고 좋아서?”

“그렇진 않을걸.”

루카스가 턱을 긁으며 프라임 공작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프라임 영지는 동부 광산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교통의 요지이긴 하지만, 특별한 특산물 같은 건 없어. 단지 근처의 야트막한 산지에서 품종 좋은 군마들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다는 것 정도?”

“흠.”

“대대로 무가로 유명해. 이름 높은 기사들을 많이 배출했지.”

“내가 아는 기사도 있어?”

“가장 마지막이 데미안 리아.”

“아.”

리네트가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 리아 또한 프라임 공작가의 셋째였다. 그는 황제의 근위 기사단장으로 10년 이상 복무하며, 프라임의 성이 아닌 새 성을 황가에서 받았다.

“그 외에도 많아. 기사로 복무한 것은 데미안 리아가 마지막이었지만.”

“삼대째 괜찮은 기사가 안 나온 건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그 무예를 이어받은 이들이 모두 후계자였을 뿐이야. 지금의 프라임 공작도 엄청난 검사지만, 작위를 이어받느라 기사 복무는 포기했다더군.”

“아하.”

기사로 복무하는 이들은 보통 가문의 둘째나 셋째다. 생득권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첫째라면 가문을 이어받아야 한다.

“아무튼 뚜렷한 활약을 하지 않은 지는 어느덧…… 오십 년은 된 것 같군.”

엄청나군. 리네트는 생각했다. 개국 공신 아니었으면 진작에 단순 세습으로 작위가 낮아져 지금쯤 자작이나 되어 있을 일이다.

“이래서 고인 물이란.”

“음?”

“한곳에 고여 있으면 발전이 없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그거 말고 특별한 거 없어?”

“딱히? 아…….”

루카스가 눈을 껌벅이다가 웃었다.

“있긴 있는데 말해 주기 싫은걸.”

“뭔데?”

“말해 주면 네가 너무 기대할 것 같아서 싫어.”

다리를 뻗고 있던 리네트가 부목을 댄 발목으로 지그시 루카스의 허벅지를 눌렀다. 루카스가 ‘아야야.’ 하고 엄살을 부리며 손을 흔들었다.

“미인으로 유명해.”

“미인?”

리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카스는 그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사흘간 마차에서 지내며 그녀가 보인 반응 중에 가장 다이내믹했다.

“그래. 남자든 여자든 대대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기로 유명하다더군.”

“우와. 마차 더 빨리 안 달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루카스가 너스레를 떠는 동안에도 마차는 빠르게 굴러갔다. 곧 요새에 당도하자 병사들이 뛰어나왔다. 그 선두에 있는 것은, 하루 전 띄운 전령새를 받고 대기하던 키리에였다.

마차가 열리자마자 보인 익숙한 얼굴에 리네트가 환하게 웃었다.

“안녕, 키리에 경!”

그러나 막상 빨간 머리카락의 훈남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루카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음, 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루카스가 마차에서 내려 키리에와 한 번 가볍게 포옹한 후, 리네트를 부축해 내렸다.

아무리 마땅한 시중인 없이 온 길이라지만, 남녀가 유별하다. 높으신 분들의 의외의 스킨십에 병사들이 수군거렸고, 키리에는 리네트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보자마자 또 그런 표정이야? 나도 좀 반가워해 주면 안 돼?”

“반가워할 만한 모습을 하고 오셔야 반가워하죠.”

“내가 왜?”

“제가 그걸 꼭 말로 해야 합니까?”

“아, 급하게 온 걸 어떻게 해. 마차 안에서 하루 종일 예쁘게 차려입고 있을 순 없잖아?”

리네트가 짜증을 부리자, 키리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다가 곧 허- 하고 황당해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겁니까?”

“여자는 항상 조신하고 아름다워야 된다고 말하는 꼰대로 본다, 왜!”

그녀가 받아치니 키리에가 한층 더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저는 당신 발을 말하는 겁니다! 귀족 아가씨가 뭘 하느라 발이 그 꼴이 돼서-”

“……계속할 거야?”

그의 말을 가로막은 건 루카스였다. 그제야 키리에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루카스와 리네트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황송한 노릇이지만 카멜리아 아가씨만 보면 짜증이 나는 병에 걸렸습니다.”

“요새에서 비아냥거리는 솜씨만 늘었네?”

리네트가 루카스에게 기대며 이죽였다. 키리에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자신들을 마중 온 기사들이 키리에의 모습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황당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퍽 엄격한 대장처럼 굴었을 텐데, 리네트를 보자마자 키리에가 보인 모습에 당황한 거겠지. 알만했다. 루카스는 두 사람을 다독였다.

“됐고 들어가지.”

“예. 프라임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프라임 공작은 요새의 가장 큰 홀에서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선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들었던 프라임 공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다. 이상하다. 작위 받은 지 십 년은 됐다고 들었는데.

“저기 저 사람, 당신 없을 때 작위 받았다며.”

“아.”

리네트가 속삭이자 루카스가 눈을 깜박이다 웃었다.

“그가 소년 시절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작위를 일찍 받았지.”

“그렇구나.”

두 사람은 수군대면서도 홀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프라임 공작은 잰걸음으로 다가와 루카스 앞에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하엘 프라임입니다. 루카스 리시스트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 뵙는군. 일어나시오.”

“예.”

프라임 공작이 일어났다. 리네트는 반사적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리네트 카멜리아입니다.”

“카멜리아 공작가의 일원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더 좋은 곳에서 뵈었다면 복된 일이었을 것이나, 사정이 이러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공작은 리네트의 손을 청했다. 리네트가 손등을 반사적으로 내밀자, 공작이 가볍게 손을 잡고 제 가슴께에 한 번 가까이 댔다 돌려놓았다. 루카스처럼 정중한 자세는 아니었으나, 같은 공작가의 일원에게 표하는 예의로는 손색이 없었다.

리네트는 가만히 제 앞에서 인사하는 공작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프라임 공작은 아주 평범했다.

조금 길게 길러 뒤로 묶은 머리카락은 밀짚색이었다. 루카스처럼 금실을 녹인 듯한 반짝임은 없었으나, 금발이라고 말할 만은 했다. 눈은 흐릿한 초록색…… 아니, 연두색이라고 해야 할까.

수염은 깨끗하게 밀어 젊어 보이긴 했지만, 인상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키도 루카스보다 한 뼘 정도는 작았다. 목소리도 가늘어서 남성미라고는 요만치도 없었다.

대대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이가 태어난다고 했으나 눈앞의 프라임 공작은 그 당사자가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라고 생각하다가, 리네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이런 시선이 싫어서 수도에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데, 무슨 무례한 생각이람.’

남의 용모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미추를 막론하고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공작가라는 지위 때문에라도 그런 종류의 화제에 시달렸겠지.

리네트는 자신이 루카스의 구혼 상대로 지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상기하고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안타까워하는 것조차 무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 프라임 공작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한가하게 사교 파티에 나온 것도 아니고.

“상황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예. 저희도 다 아는 것은 빼고요.”

“물론입니다.”

리네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라임 공작은 빠르게 홀 한쪽의 테이블에 세 사람을 인도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계곡은 몇 년 전으로 후퇴한 상황입니다. 어느 지점 이상으로 들어가면 모든 걸 하늘로 날려 버릴 만한 강한 태풍이 붑니다.”

“정찰 나갔던 두 명의 기사가 각각 팔과 다리가 부러져, 저희는 진입을 포기했습니다.”

프라임 공작의 말에 키리에가 어두운 표정으로 덧붙이자, 루카스가 물었다.

“이번 마력석 사건 이후에 진입한 건가?”

“아닙니다. 제가 보낸 편지를 보셨겠지만, 저는 요새의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직후 정찰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계곡이 심상찮다고 판단했고 수도에 보낼 장계를 보내려는 찰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마법사의 전령을 나와 아가씨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었죠.”

프라임 공작이 설명했다.

기차 사고가 일어나 수도 근교에서는 난리가 났으나, 개통역에서 기차의 도착을 기다리던 프라임 공작 이하 동부 귀족들은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기차 도착이 두어 시간쯤 늦어지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새 한 마리가 프라임 공작에게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습격에 예민한 프라임 공작은 반사적으로 칼을 빼어 새를 베었으나, 마법으로 만든 새는 베이지도 않고 프라임 공작의 칼끝에 살포시 앉았다.

새가 물고 있는 것은 작은 편지.

프라임 공작은 그 편지를 남들 앞에서 읽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의 귀족들을 뒤로하고 따로 열어 본 편지에는 수도에서 일어난 기차 사고의 간략한 내용과 더불어 마법사의 전언이 쓰여 있었다.

리네트와 함께 계곡으로 오라는.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순간 누군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조금만 생각했다면, 얼마 전 리시스트를 뒤흔든 염문의 주인공이라는 걸 떠올렸을 텐데.”

“그, 그런가요.”

제가 만든 소문이라고는 하지만 리시스트를 뒤흔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남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리네트는 조금 창피해졌다.

프라임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그때 부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카멜리아 공작 부인의 이름이 리네트였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없군요.”

“예에…….”

“아무튼 그대가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것을 알고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생판 만나 본 적도 없는 아가씨를 데리고 계곡으로 가야 하다니.”

키리에가 나섰다.

“만나 봤다면 한층 더 당황스러우셨을 겁니다.”

리네트는 키리에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러나 갑옷을 차려입은 키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리네트만 심통이 나 키리에를 노려봤다.

프라임 공작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여기 있는 키리에 경에게 전령새를 띄웠는데, 키리에 경도 계곡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위험해졌다는 전언을 주더군요. 얼마나 머리가 아픈지.”

“…….”

“한데 계곡을 관찰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발견한 것이 있죠.”

“공작 각하께서 함께한 정찰대는 무사했습니다.”

키리에가 말을 더했다.

정찰대는 조심스럽게 태풍이 불지 않는 지역을 가늠하며 계곡에 접근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공작이 함께한 정찰대에게는 태풍이 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깊이 들어가면 해당되지 않는 일이지만. 아마 리네트 양과 함께 가면 깊은 곳까지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제가 가야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해서 빠를수록 좋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당장 내일 아침에 괜찮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프라임 공작은 리네트를 바라봤다. 리네트는 여전히 발에 커다란 부목을 댄 채였기 때문이다. 딱 봐도 오래 걷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루카스가 나섰다.

“내가 함께할 예정이오, 공작.”

“……전하께서요?”

“그래. 사랑하는 여인을 그런 곳에 혼자 보낼 수는 없지.”

리네트는 엄청난 반대를 예상했다. 루카스도 각오한 바였다. 마차를 타고 오는 사흘 내내, 대뜸 나타난 황자에 대해 프라임 공작이 얼마나 거품을 물까 하고 대화를 나눈 바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프라임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어설픈 시녀보다는 황자님 같은 분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반대 안 하나?”

루카스가 당황한 듯 물었다. 프라임 공작은 옅은 비웃음을 띠고 루카스에게 말했다.

“이미 수도에서 오실 때 폐하의 윤허를 받으셨을 것이 뻔한데 제가 반대해서 뭐 하겠습니까.”

“……그런가.”

“그리고…….”

“그리고?”

프라임 공작의 눈이 리네트를 향했다.

그 눈초리는 리네트를 가늠하는 듯 보여서, 그녀는 약간 짜증이 났다. 왜 저렇게 게슴츠레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거야?

공작이 말을 이었다.

“드레스 입고 산길을 오르느라 불평하고 힘들어하는 시녀들보다는, 여차하면 황자님께서 안아 올리기라도 하시는 쪽이 낫겠죠. 기사가 안아 올리려 해도 외간 남자의 손길이 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늘어놓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니.”

“…….”

리네트는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지금 프라임 공작의 발언은 너무나 무례했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야.’

뭐지? 프라임 공작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불편하던 마음이 계속해서 콕콕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백안’의 능력은 지금 공작의 발언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뭐지? 루카스가 가는 것이 기분 나쁜가?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리네트는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지켜보면 본심이야 금세 나올 일이다. 프라임 공작처럼 높은 이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뭔가 영 마음에 걸렸다.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외치는 듯한…… 리네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럴 때면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백안’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당장 자신이 성년이 되는 것도 아닌데.

“하하. 리네트는 그런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은 지켜볼 일이죠. 아-”

프라임 공작은 루카스에게 성의 없이 대꾸하다가 리네트를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물론 카멜리아의 아가씨는 그 지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야기한 것은 시녀들의 경우입니다.”

“예에…….”

리네트는 애매하게 웃었다. 뭐라 대꾸할지 몰라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 노튼 전하께 들은 이야기들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호.”

프라임 공작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노튼 전하야말로 계곡의 마법사를 독대한 유일한 분이죠. 그래, 계곡의 마법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자리에 라베노바 백작이 있었다면 독대가 아니라 자기가 같이 있었다고 주장해서, 분위기 개판으로 만들고 재밌었을 텐데.’

물론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리네트는 간결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마법사는 계곡으로 걸어 들어가면 보이는 폭포들 중 세 번째 폭포의 뒤쪽 동굴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폭포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한나절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마법사는 아주 젊은 여자일 때도, 할머니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공통분모는 여자라는 것뿐입니다. 노튼 황자는 계곡에서 만난 모든 여자는 계곡의 마법사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그러던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노튼은 똥 씹은 표정을 해 놓고서도 두 사람에게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야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대로 마력석이 멈춘다면 제국이 맞을 혼란은 어마어마했다.

아무튼 노튼 또한 심각한 일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 높이 살 만은 했다…… 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그게 제 착각이라는 건 곧 알게 됐다.

* * *

계곡으로 출발한 것은 총 일곱 명이었다.

루카스와 리네트, 프라임 공작과 키리에, 그리고 호위기사 세 명.

프라임 공작은 ‘인원이 너무 많다.’고 난색을 표했으나, 키리에는 ‘두 사람만 오라는 말은 없었잖습니까?’ 하고 대꾸했다.

“안전을 염려하는 거라면 내가 있지 않나?”

프라임 공작이 자신이 찬 장검을 흔들어 보이자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각하께서 검의 달인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마법의 달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사에게는 아무리 대비해도 과하지 않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법사에게는 아무리 대비해도 과하지 않다라…… 그렇군.”

프라임 공작이 싱긋 웃었다.

“내 작은 조부께서 하신 말씀이니 뭐라 대꾸할 수도 없군.”

작은 조부. 데미안 리아를 말한다는 것을 리네트는 대번에 깨달았다.

그 역시 검의 달인으로 이름 높았으나, 마법사에게는 칼이 무용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데미안 리아 또한 계곡의 마법사를 만났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말이 아니었어도 자네는 따라왔겠는데?”

프라임 공작의 말에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황자 전하랑 공작 각하를 보내 놓고 제가 요새에 드러누워 잠이나 잘까요?”

“그것도 맞아.”

프라임 공작은 몸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말을 돌려보낸 지는 조금 됐다. 마법사가 살고 있는 이 계곡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길이랄 것이 없었다.

그나마 마력석을 채취하던 계곡의 중반부까지는 말을 타고 올랐으나, 그 이후부터는 별 도리가 없었다.

“계곡이 열린 후로 마법사는 자신이 있는 곳 부근에만 결계를 쳐 놓고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력석을 채취하는 이들에게서 마법사를 봤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키리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새에 와 있는 한 달 동안 수집한 이야기가 꽤 되는 모양이었다.

“사실상 지금의 제국에서 계곡의 마법사를 만난 것은 노튼 전하뿐인 거네.”

리네트의 말에 키리에가 받아쳤다.

“예. 그러니 노튼 전하의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곤란하군…….”

폭포 뒤에 살고 있는 마법사인지라 필연적으로 길이 험했다. 바위 사이사이를 짚고 가야 하니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남자들이 리네트를 업었다. 물론 그냥 업지는 않고, 환자용 운반 의자를 이용했다. 프라임 공작은 키가 작아 의자를 메면 리네트의 다리가 끌렸기에 제외됐다.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업다가 지금은 루카스의 차례였다. 기사들은 대경실색했으나 루카스는 ‘내 연인을 대체 내가 아닌 누가 업는단 말인가?’ 같은 소리를 하며 자처했다.

“괜찮아?”

“응. 좀 미안할 정도로.”

루카스의 물음에 리네트가 겸연쩍어하며 답하는데, 프라임 공작이 입을 열었다.

“노튼 황자님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시겠어요?”

“네. 그러니까…… 노튼 황자님은 몇 년 전에 마법 전령을 받고 계곡으로 가셨다고 해요. 한데 마법사를 만나는 건 그리 쉽지는 않았다네요. 길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중간중간 여인들이 튀어나와 일행을 현혹했다고 해요.”

“예를 들면 어떤?”

리네트는 턱을 긁었다.

“소녀가 살려 달라고 뛰쳐나와서 구해 주었더니 식량을 훔쳐 간다든가, 노파가 나타나서 방금 죽을 뻔했는데 이 숲에서 처녀를 만나면 절대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같은 이야기죠.”

“옛이야기 같군요.”

“네. 그다음에는 당연히 처녀가 등장했는데, 그 할머니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이고 도망가는 중이라며 도와 달라고 했대요. 할머니를 잡아 주면 계곡의 마법사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나.”

프라임 공작이 킥킥 웃었다.

“마법사도 유치한 짓을 했군요.”

“우리는 전해 듣는 입장이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마법사의 앞마당에서 그런 상황을 계속 맞닥뜨리면 정신이 없겠죠.”

“그래서 노튼 황자님은 어떻게 했다던가요?”

“다 무시했다더군.”

프라임 공작의 말에 답한 것은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노튼의 성격다워. 모두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니 폭포가 열렸고, 마법사가 웃으며 ‘과연 제국의 황자다운 배포다.’라고 했다던가.”

“저희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시해야 할까요?”

“노튼은 그러길 권했지만, 글쎄. 나는 마법사가 이런 상황에 그러리라고 생각되진 않는걸.”

옛 동화 같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리네트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마법사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걸까? 노튼을 만나겠다고 먼저 청한 건 스스로일 텐데, 대체 왜?

어렴풋이 짚이는 건 있었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로가나가 몰래 속삭여 준 것이었다. 로가나는 자신이 드나들던 살롱에서 노튼 황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 노튼 황자를 수행한 귀족 하나가 와서 떠들어 댔어요. 마법사와 독대를 하고 돌아온 노튼 황자의 표정이 안 좋았다고. 그리고 수도에 돌아오며 리시스트의 주변 속국들을 점검해야 한다고 흘리듯이 말했다던데요.”

노튼이 그때 마법사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그만 알았다. 마법사는 노튼에게 자신과 주고받은 이야기는 황제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하며, 어긴다면 리시스트 제국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 했다.

황제는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명석했다. 자신이 손대지 말아야 할 비밀에는 굳이 손대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튼은 리네트와 루카스를 대면하고서도 ‘그때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도 그 이야기는 굳이 청해 듣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마법사가 이야기해 주겠지.

“노튼 황자님은 그런 성격입니까?”

리네트의 상념을 깨트린 건 프라임 공작의 질문이었다. 루카스가 답했다.

“글쎄. ‘그런 성격’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

“음, 제가 작위를 승계받으러 수도에 갔을 때 뵌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서 말입니다. 그때는 황제가 되실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슨 뜻인가.”

리네트는 고개를 돌려 힐끗 공작의 얼굴을 바라봤다. 루카스의 옆에 선 프라임 공작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뭐, 저희끼리니까 말이지만요. 폐하께서 최근 본격적으로 후계 자리를 놓고 고심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

“저는 사실 폐하께서 여태까지 황위 문제를 질질 끌어 온 것도 이해는 안 갑니다만, 그야 루카스 황자 전하에 대한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죠.”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무례했다. 도저히 오늘 처음 본 황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리네트는 조금 입을 벌렸다.

그러나 루카스는 픽 웃으며 ‘그런가.’ 하고 답했다.

리네트는 반사적으로 키리에를 바라봤다. 키리에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인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프라임 공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과 황자의 대화다. 키리에가 끼어드는 건 어불성설이다.

프라임 공작은 키리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수도의 정계에 관심 없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작위가 작위니만큼 완전히 신경을 닫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 가문 아니오? 고충을 이해하오.”

“노튼 황자님이 냉랭한 성격이라는 것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를 만나러 올 때도 그러셨다는 건 의외로군요.”

결국 리네트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지 궁금합니다, 공작 각하.”

프라임 공작이 그제야 리네트를 바라봤다. 흐릿하다고 생각했던 연두색 눈동자는 가늘게 길어져 리네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저는 젊습니다, 카멜리아 양.”

“…….”

“필시 다음 대의 황제가 될 분과 평생 어깨를 나란히 해야겠지요. 그 밑에 설 사람으로서 궁금한 것이 당연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프라임 공작이 흘끗 키리에를 바라봤다. 잔뜩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보고 프라임 공작은 킥 웃었다.

“노튼 황자의 약혼녀를 동생으로 둔 이를, 이토록 충성하게 만든 첫째 황자가 어떤 사람인지.”

루카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황제 폐하를 오 년 동안 갈등하게 만든 이유는 과연 오랫동안 잃어버린 혈육에 대한 단순한 애잔함 때문인지.”

“…….”

“앞으로 둘 중에 한 분을 적어도 이십 년 정도는 모셔야 한다 생각하면, 이 기회에 진솔하게 알아 두고 싶은 게 제 본심일 뿐입니다.”

프라임 공작은 그쯤 해서 한 걸음 물러서 루카스와 리네트를 바라봤다.

“계곡을 타기 위해 간편한 여행자 복장을 하고, 다친 연인을 짊어진 모습은- 그 얼굴이 아니라면 퍽 평범한 평민 같기도 합니다.”

“평민으로 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루카스가 피식피식 웃으며 답했다. 프라임 공작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거죠.”

“…….”

“그게 아니었다면 참으로 소탈한 분이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아직도 평민이었던 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 그러고 계신지, 아니면 단순히 소탈한 분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전하가 평민으로 사셨기 때문이죠.”

“각하. 말씀이 선을 넘으셨습니다.”

결국 키리에가 말을 보탰다.

그러나 프라임 공작은 팔짱을 낄 뿐이었다. 그 동작은 자못 경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네트는 그제야 자신이 느끼는 위화감을 알아챘다.

프라임 공작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이 악의적으로 들리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배려하지 않았다.

그건 그게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말처럼 자신이 어깨를 나란히 할 지도자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반면 루카스의 반응은 단순했다. 루카스는 미소를 띤 채 공작의 말을 듣다가 답했다.

“그렇군. 계곡에서 그대에게 잘 보이라는 뜻이군?”

“그게 그렇게 들립니까?”

“그럼 그게 다른 뜻이 있나?”

프라임 공작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루카스는 제가 진 리네트의 의자를 다시 추스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주어진 과제가 많군. 리네트를 보호해야 하고, 여기서도 살아 나가야 하고, 그대에게도 잘 보여야 하고. 황자로 사는 건 정말 힘들어.”

그 투덜거림은 너무나 평온했다. 정작 당사자가 저렇게 반응하니 키리에도 뻘쭘해져 버렸다.

프라임 공작은 표정 변화 없이 걸음을 옮기며 맞받아쳤다.

“그렇죠. 살아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뭐, 황자 전하께는 비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공작으로 사는 것도 만만찮네요.”

“……제가 제일 만만찮거든요?”

결국 리네트도 대꾸했다. 프라임 공작이 뒤돌아보며 웃었다.

“그렇습니까?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는데요.”

“누가 그래요!?”

“‘리시스트의 아침’이라고, 수도분들은 이미 아시겠습니다만-”

리네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떠벌렸구나. 가만히 있겠습니다.

* * *

리네트는 중간중간 걸어 보려 했으나, 어김없는 통증 때문에 실패했다. 그녀는 두어 번 다른 남자들의 등 위를 오간 뒤에야 자신이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를 업고 가던 키리에가 혀를 찼다.

“때론 남의 도움도 좀 받고 사는 게 어떻습니까?”

“싫으니까 그렇지. 이게 뭐야. 다들 열심히 걷고 있는데 나만 등에 실려서.”

“대체 전하는 왜 이런 여자를…….”

키리에는 다른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리네트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지금 거기서 여자가 왜 나와? 내가 폐 좀 끼치는 게 싫다는데!”

“……정말이지, 당신은 대체 절 뭘로 보는 겁니까? 제가 당신 여자라고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한 말이 그렇잖아!”

키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요새에 도착했을 때도 그렇고, 당신이 절 어떻게 보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뜻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야?”

“사람이라는 건 원래 폐를 끼치고 은혜를 입고, 그러다 되갚아 줄 기회가 있으면 돌려주며 사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매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됐다고 거절부터 하지 않습니까? 아랫사람 시켜도 될 일을 직접 하고 있고요.”

“…….”

키리에는 나직하게 말했다.

“여자가 어쩌고 한 건 제 실수입니다. 그냥 사람이 왜 이렇게 삐딱하냐고 말한 겁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한 말뜻은 ‘무슨 여자가 나긋나긋하지 않고 이렇게 드세게 구냐.’가 아니라, ‘황자 전하가 왜 이런 뻣뻣한 인간에게 구혼하는 척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리네트는 미간을 좁혔다. 근데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사과한 거 맞아?”

“예. 덧붙여서 여자가 뭐 이렇게 사랑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냐는 뜻도 아닙니다. 여자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잘못 말했습니다. 제국의 모든 여자분들께 죄송합니다.”

리네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키리에의 빨간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키리에가 꽥 소리를 질렀다.

“뭡니까! 사과했잖아요!”

“그게 사과냐! 대머리나 돼라!”

루카스만 하하 웃었다.

“사이가 좋군.”

“황자 전하보다 사실 키리에 경과의 사이가 더 좋은 거 아닙니까?”

프라임 공작도 한 마디 거들었다.

“누가 사이가 좋은데요!”

“치욕스럽습니다!”

“난 수치스러워!”

그렇게 리네트와 키리에가 티격태격하는데, 프라임 공작이 앞쪽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폭포입니다.”

노튼이 말한 장소인 세 번째 폭포였다. 간혹 지형이 변했다 하더라도 그곳은 마치 동굴을 가린 거대한 휘장 같을 테니 틀림없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사람이 백 명은 팔을 벌리고 늘어서야 할 것 같은 커다란 물줄기 아래로 까마득한 높이의 폭포가 있었다. 장관이었다.

그러나 정말 굉장한 광경은 그다음에 볼 수 있었다. 넓은 폭포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휘장처럼, 커튼처럼……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옆으로 걷혔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걷어 내듯이.

아니, 걷어 낸 게 맞겠지. 마법으로.

걷힌 폭포의 가운데에는 사람 두어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 입구가 있었다. 엄청난 폭포의 규모와는 대조적이었다. 모두들 시선을 교환했다.

“저기로 들어오라는 거겠죠.”

“갑시다.”

“하지만-”

리네트가 모두를 저지했다.

“마법사는 저와 프라임 공작을 지목했어요. 물론 두 사람만 오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 인원이 모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럼 카멜리아 양의 다리는 어떻게 합니까?”

토의는 빨랐다. 마법사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결국 루카스가 리네트를 업고, 프라임 공작과 셋이 들어가기로 했다.

호위 기사 셋과 키리에는 동굴 앞에 남았다. 키리에는 안절부절못했으나, 프라임 공작이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마법사에게는 아무리 대비해도 과하지 않다는 말 뒤에 따라오는 말을 혹시 아는가?”

“그런 게 있습니까?”

“그렇다네. 작은 조부께서 하신 말 중 앞부분만 흔히 구전되네만, 사실 뒤의 말이 더 있지.”

“뭡니까?”

이름 높은 기사가 했다는 말에 키리에가 드물게 흥미를 나타냈다. 프라임 공작은 눈을 찡긋했다.

“마법사에게는 아무리 대비해도 과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대비를 해도 범인은 마법 앞에 무력하다.”

“……진짜입니까?”

“그래. 뭣하면 나중에 프라임 영지에 한번 오게나.”

프라임 공작은 말에 그치지 않고 키리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작은 조부께서 남긴 기록들이 제법 있으니.”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했다.

그에 세 사람은 피식피식 웃으며 동굴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리네트가 여태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갈 순 없었다. 동굴의 높이가 낮았기 때문이다.

루카스가 몸을 낮추자 리네트는 팔을 뻗어 루카스의 등에 업혔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거리감이었다. 한나절 동안 산을 탄 루카스의 등은 따뜻했고, 먼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는 땀도 맺혀 있었다. 약하게 땀 냄새가 났지만 역하지는 않았다.

“미안하군.”

저도 모르게 리네트가 킁킁대니 루카스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쾌적하진 않더라도 참아 줘.”

“참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하. 전하가 아니라면 갈 수도 없는데요.”

괜찮아,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입을 열면 왜 이렇게 말이 뾰족하게 나올까.

리네트는 키리에가 한 말도 완전히 헛것은 아니었다는 걸 절감했다. 공작의 앞이 아니었다면 더 험하게 말했을 것이리라.

리네트의 속마음도 모르고 프라임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업는 것보다는 낫겠죠.”

우와, 얄미워……. 여태까지 리네트를 업지도 않았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까 좀 얄미웠다.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굴이 길면 어쩔 수 없이 공작님께도 신세를 져야 하지 않을까요?”

“좀 봐주세요. 저는 연약하답니다. 프라임 공작가는 아직도 후계자가 없는데, 제가 죽어 버리면 프라임 영지는 갈기갈기 찢겨 버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라임 공작은 동굴로 명랑하게 앞장섰다.

아직도 후계자가 없다고? 리네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몇 걸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서늘한 기운이 확 끼쳤다.

프라임 공작은 겁도 없는지 열 걸음쯤 앞서 걸었다. ‘괴물이 습격하면 제가 몸으로 막아야 황자 전하께서 도망칠 틈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은 그 내용과는 달리 퍽 태평했다.

사방이 조용했다. 서늘한 동굴 속에서 두 사람이 걷는 소리만 들렸다. 루카스의 걸음은 묵직했다. 리네트를 업고 있으니 그럴 테지.

반면 프라임 공작의 발걸음 소리는 꽤나 가벼웠다. 그는 날 듯이 걷고 있었다.

뒤이어 그가 차고 있는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장검의 검신은 리네트가 팔을 활짝 펼친 것보다 조금 더 길었다. 키가 작으니 장검도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짧게 벼린 것일 테다.

검의 달인이지만 공작가의 후계라 기사 복무를 하지는 않았다던가. 리네트는 문득 저 작은 남자가 어떻게 싸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저를 업은 남자도. 루카스 또한 장검을 차고 있었다. 그야 경비대로 일했으면 검술은 어느 정도는 배웠을 것이다.

루카스는 키도 크고 몸집도 큰 편이라, 차고 있는 검신도 남들보다는 조금 길었다. 레벤튼의 영주가 루카스를 성문 밖에 세워 놓은 이유를 알만했다. 보기 좋으니까.

리네트는 작게 킥킥 웃었다. 숨 때문에 목덜미가 간지러운지 루카스가 흠칫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그의 등에 업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음,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군. 이대로 뭔가 말을 걸면 좋겠는데.

리네트는 루카스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있지, 각하는 후계자가 없으셔?”

“아, 응.”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조금 놀란 루카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 들었어. 아이가 커서 후계자 교육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제국에 단둘뿐인 공작가인데 희한하게 후계 양성에 태평하네.”

카멜리아 공작만 해도 아이가 셋이다. 나넬리아, 자신, 그리고 갈레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가문의 재산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라임 공작은 벌써 서른에 가까움에도 미혼이었다.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건 이유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유가 궁금해?”

“응.”

“음, 좀 실례되는 이야기라 말하기가 망설여지는데…….”

“뭔데?”

“남색을 한다는 이야기가…….”

어머나.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루카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확실한 건 아냐. 아는 사람도 몇 없고. 그야 프라임 공작가의 침실까지 들여다본 이들이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소문은 분명 존재해. 게다가…….”

“게다가 뭐?”

“……프라임 공작의 선대도 남색을 했다는 소문이…….”

가문에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이 아니라, 성벽이란 말인가. 리네트가 이마를 좁혔다.

“그럼 수도에 오지 않는 것도…….”

“소문이 퍼질 것을 염려해서라는 이야기가 있어.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아무래도 묻기는 좀 저어되는군.”

루카스의 목소리는 마지막에는 작아져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본인을 앞에 두고 하기엔 아무래도 껄끄러운 말이기 때문일 테다.

리네트는 루카스의 어깨에 코를 묻은 채 눈만 드러내서, 앞에 가는 프라임 공작을 바라봤다.

남색을 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가 키리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지에 한번 놀러 오라고…… 음…… 리네트는 기뻐하던 키리에의 얼굴을 떠올리곤 킥킥 웃었다.

적어도 키리에 본인은 그 소문을 모르거나, 개의치 않는 것일 테다. 전자라면 좀 귀엽고, 후자라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걷던 루카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에게 업혀 있던 리네트도 눈을 크게 떴다.

앞서 걸어가고 있던 프라임 공작은 어느새 멈춰 서서 앞쪽을 바라보았다. 어둡기만 하던 동굴 안쪽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타박, 타박, 타박.

그리고,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프라임 공작의 발걸음 소리와 무게감은 비슷했으나, 그 분위기는 달랐다.

루카스는 리네트를 업은 손에 힘을 주었고, 리네트는 뭔가를 눈치챘다.

“저기, 루카…….”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 하나가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로브 바깥으로 물결쳤다. 조금 늙은 듯한 얼굴이 로브 바깥으로 보였다. 피부는 희다기보다는 창백했다. 보기 드물게 흉하지도, 엄청나게 아름답지도 않은 생김새였다.

이내 지척에 다다른 여인은 로브를 걷어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눈동자 또한 머리카락처럼 새카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귀족가의 연회에서나 들을 법한 인사말이었다. 뒤이은 자기소개가 아니었다면.

“제가 계곡의 마법사입니다.”

* * *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야 혼자 몇백 년을 살아온 사람이 명랑하다면 그도 이상할 것이다. 마법사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세 분이군요?”

“보시다시피 제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리네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리네트 카멜리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는 정중하나 상황은 애매했다. 루카스가 그녀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그녀와 루카스를 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

“이해했습니다.”

“미하엘 프라임입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프라임 공작이었다. 공작은 실로 멋들어진 태도로 인사했다. 제대로 예법에 맞춰 인사하지 못한 리네트의 몫까지 대신할 만큼.

마법사도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그러면 그쪽분은 루카스 님이시겠군요.”

“저를 아십니까?”

루카스가 조금 멍청한 느낌으로 답하자 마법사가 웃었다.

“계곡 안에 틀어박혀 있다곤 하지만, 저도 수도의 사정에 어둡지는 않답니다.”

“그녀의 이름을 지목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짐작은 했습니다.”

“대화 진척이 빠르겠군요. 들어오시지요.”

마법사가 돌아섰다. 세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은 후 그녀를 따랐다.

동굴 안으로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공기가 다시 한번 달라졌다.

“앗.”

“이건…….”

처음 그들을 덮친 것은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동굴 안의 눅눅한 공기가 아닌, 초원의 바람.

리네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풀밭 위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이 있는 곳은 더 이상 동굴이 아니었다. 밤의 초원이었다.

머리 위로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리네트는 눈이 동그래져서 하늘을 바라봤다. 눈을 비비고 봐도 별이었다. 분명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는 오후였는데. 별이 저렇게 머리 위에서 빛날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과연 마법사의 집이라는 것이군요…….”

프라임 공작이 감탄했다. 루카스도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답습니다. 노튼은 이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노튼 황자라면, 그때는 그의 취향에 맞추어 주었죠.”

“취향이라면…….”

마법사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오싹한 느낌에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루카스에게 몸을 가까이 기댔다.

“우선 다리가 아픈 분에게는 쉴 곳을 드려야겠죠.”

리네트는 둥실, 하고 제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곧 푹신한 것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보니 커다랗고 흰 털가죽 사이에 묻혀 있었다. 정확히는 털가죽이 덮인 소파였다.

“집처럼 편하시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 오신 것 쉬실 수 있길 바라요. 다른 분들도 부디.”

루카스와 공작에게도 각각 비슷한 1인용 소파가 주어졌다. 풀밭 위의 털가죽 소파라니. 모두들 어색하게 둘러앉았다.

앉자마자 어디선가 줄지어 티 세트가 날아왔다. 찻잔이 리네트의 눈앞에서 딸그락거리기에 그녀는 엉겁결에 그것을 쥐었다. 다른 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앞에 선 마법사가 미소 지었다.

“마실 만은 할 겁니다.”

“예에…….”

이거 마셨다가 죽는 거 아니겠지.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 리네트는 눈알을 굴리다가 입술만 적시고 찻잔을 내려놨다.

반면 프라임 공작은 대범하게도 잔째로 들이켰다.

“훌륭합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이제 제 용건을 말씀드리지요.”

엄청난 속도였다. 보통 차를 대접한 후에 용건을 말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건 장난 아닌데. 리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마법사를 바라봤다.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마법사는 얼굴을 굳혔다.

“먼저 이렇게 제가 있는 곳으로, 가장 바쁜 세 분을 불러들여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제대로 된 사람인가. 리네트는 생각하며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짐작하셨듯 제가 세 분을 부른 것은 최근의 마력석 출하 중지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 분 모두 이상 현상을 겪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력석이 힘을 잃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현상에 대한 해결 때문에 저희를 부르신 건가요?”

“맞습니다. 저는 해결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네트는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분명 그 현상 때문에 저희는 매우 곤란을 겪고 있어요. 하지만 마법사님께서 저희를 굳이 불러 그 일을 해결하시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 마법사님께서도 마력석 때문에 곤란을 겪고 계신가요?”

마법사는 리네트 쪽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리네트를 관찰하는 듯했으나, 그 시선 안에는 미묘한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

“비슷합니다. 마탑분들도 아마 마력석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고 계시겠죠. 하지만 마력석 때문에 마법을 부리기 어려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보입니다. 이 공간만 봐도 마법사님께서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군요.”

프라임 공작이 답했다. 마법사는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죠? 제국에 이제 와 도움을 주시겠다는 것은 아닐 텐데요.”

질문한 것은 루카스였다. 마법사는 물끄러미 루카스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찰나였으나 강렬했다. 세 사람 모두 움찔할 정도로.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여태껏 제국의 역사에 제가 개입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제국 쪽에서는 제가 제국을 적대했다고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 자기 집의 앞마당에 개를 풀어놓는 정도는 누구나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계곡을 마법으로 틀어막아 둔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마당에 개를 풀어놓는다니, 제국이 자기 앞마당도 되지 않는다는 걸까. 마법사의 비유에 리네트는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이 정도 마력을 가진 자라면 제국일지라도 단순히 제 앞마당에 핀 잡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는 몇 년 전 노튼 황자를 불렀습니다. 노튼 황자를 부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였죠. 그 대신 약간의 도움도 주었고요.”

“그 ‘약간의 도움’이, 계곡의 결계를 푼 건가요?”

리네트의 질문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만한 규모의 결계를 풀어 마력석 채취를 허할 만한 부탁은 무엇일까.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어쨌든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은 모두 같았다.

프라임 공작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노튼에게 무슨 부탁을 하였습니까?”

“그건 지금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사람 불러 놓고 장난하나.’

프라임 공작의 얼굴에 뚜렷하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긴 시간 그를 봐 온 것은 아니지만, 리네트는 그가 제 표정을 잘 감추는 타입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법사의 앞에서는 그조차도 평정을 잃는 모양이었다.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대화를 위해 그대들을 불렀으니, 긴 여정을 감수하신 분들께 최소한의 대답을 드리는 것은 초대자의 예의겠지요. 말씀하세요.”

리네트의 말에 마법사가 답했다. 리네트는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혹시 지금 마력석이 힘을 잃은 것은 마법사님의 짓인가요?”

기차 사고 직후에 날아온 마법사의 서신. 타이밍을 맞춘 듯 정확한 때에 날아온 전언 때문에라도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이 일이 ‘계곡의 마법사’와 상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특히 노튼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이라는 듯 표현했다.

이로 인해 리네트는 어쩌면 이 마력석의 무력화가 그녀가 한 짓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원인과 결과는 항상 함께 다니는 법이니까.

만약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사를 쳐다봤다.

“아닙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리네트의 질문에 허무할 만큼 간단히 답했다.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리네트는 마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가엾은 애플.

애플은 아직도 침대 위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애플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이가 죽고 다쳤다. 만약 마법사가 인위적으로 마력석을 무력화시키고 기차 사고를 일으켰다면, 리네트는 정말로 화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면 저희들을 불러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리네트는 다시 질문했다.

“저를 일부러 지목하신 것은 어째서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마법사님께서 저를 지목하셔서 정말 놀랐어요.”

“…….”

하지만 마법사는 대답 없이 고요한 눈으로 리네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저는 몇 달 전까지는 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방구석에 틀어박힌 계집애였을 뿐이에요. 그런데 제 이름을 굳이 지목해서 부르신 건 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카멜리아 양.”

프라임 공작이 잠시 그녀를 만류했으나 리네트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사흘이 걸렸어요. 꼬박 말을 달렸지요. 제가 이런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당신이 저를 불러서가 아니에요. 그야 마법사님같이 대단한 사람이 부른다는 걸 알면 한 걸음에 달려올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리네트는 숨을 골랐다.

“저는 가엾은 제 친구 때문에 여기에 왔어요. 마력석이 힘을 잃어서, 기차에 타고 있던 제 친구는 탈선 사고를 당했어요.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죠. 그 애가 왜 그렇게 됐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마법사님은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렇다면 알려 주세요.”

그녀와 마법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를 왜 부르셨는지, 그 일은 왜 일어났는지.”

리네트는 마법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온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다른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상한 시선이었다. 그건 자신에게 함부로 말하는 계집애에 대한 괘씸함이나 경멸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거창한 이야기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심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마법사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 세계의 존립’에 대한 것입니다.”

세계의 존립? 너무나 거창한 말이었다. 동시에 이 자리에서 나오리라 예상한 말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뜸 사람을 불러 놓고 어떻게 말을 골라야 하나 고민했어요. 이해하세요. 저는 사람하고 말하는 데 서투르거든요.”

“서투른 분치고는 너무 거한 화제를 꺼내셨는데요…….”

저도 모르게 리네트가 대꾸하자, 마법사는 리네트 쪽을 보더니 옅게 웃었다.

“카멜리아는 원래 그랬죠. 또박또박 제 말에 전후 따지기를 좋아했어요.”

“…….”

‘원래’라고 말했다. 리네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설마하니 지금의 카멜리아 공작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카멜리아는 원래 성이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리네트의 말에 마법사는 엉뚱하게 대꾸했다. 리네트에게 그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여기서 카멜리아 가문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하나? 그러나 거기에 답한 것은 프라임 공작이었다.

“카멜리아는 리시스트 제국을 건국한 개국 공신의 이름이죠. 저희 가문의 성인 프라임도 그렇고요.”

그랬어? 리네트가 프라임 공작 쪽을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저희 두 사람을 부른 이유가 그쪽과 관련된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몸을 뒤로 기댔다. 마법사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리네트는 위험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마법사의 뒤에 곧장 갑작스레 커다란 나무가 자라났다.

바닥에서부터 줄기를 돋우고, 가지를 뻔은 나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 마법사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

눈앞에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퍼졌다. 그제야 그 나무가 월계수라는 것을 리네트는 알아차렸다.

“부르지는 않았지만 리시스트의 핏줄이 여기에 함께 와 있는 것도 운명일까요?”

루카스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님. 저는 세계의 존립이니 운명이니 하는 건 잘 모르니, 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야 초대되지 않은 객이 이런 말을 드리는 것도 겸연쩍은 마당입니다만.”

“초대되지 않기만 했을까요.”

마법사의 말투가 갑작스레 변했다. 리네트는 조금 전 느꼈던 오싹함이 다시 습격해 왔음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그의 후손이 저를 배반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설마…….

“누구…… 말입니까?”

마법사는 고요히 루카스를 바라봤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 답을 알고 있겠지요.”

세 사람 모두의 머리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나 마법사는 구태여 ‘노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말한 것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프라임 공작을 부른 이유는 당신이 프라임의 후손이기 때문이 맞습니다. 하지만 리네트 카멜리아. 당신은 조금 달라요.”

리네트가 마법사를 쳐다보자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리네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동굴 속에서 이 공간으로 올 때의 이질감과 비슷한…….

시간이 멈췄다.

리네트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이 멈췄다. 바람에 사부작거리던 풀잎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자신과 마법사뿐이었다.

루카스는 몸을 앞으로 내민 채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그 동작은 멈춘 채였다. 프라임 공작 또한 동작 하나 없는 채로 마법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리네트의 당황에 마법사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당신과 따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도리밖에 없었어요.”

리네트는 지금이야말로 데미안 리아가 했다던 말을 절감했다. 마법사에게는 어떤 것을 대비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키는 계곡의 마법사를 만났으니,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을 멈추신 건가요?”

“네.”

마법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네트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것은 굉장히 번거로운 마법입니다. 하지만 그럴 정도로 제가 구석에 몰려 있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제가 이러는 이유는 ‘확인’을 위해서입니다.”

“……무슨 확인요?”

“리네트. 그대는 그대의 언니가 왜 왕자와 결혼했는지 알고 있지요?”

리네트는 몸을 굳혔다. 마법사의 말투는 답을 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을 담담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리네트의 눈이 커졌고,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을 내기 위해서죠.”

“설마…….”

사랑에 빠져서, 계모를 피하기 위해서 따위가 아니었다. 리네트는 마법사의 말 앞에 뭐가 빠져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동화’의 끝을 내기 위해서다.

“그 설마가 맞아요, 리네트.”

“……당신, 이 세계라고 말했던 건…….”

“예. 그래요.”

마법사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제게는 세상의 전부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세계가 동화책일 뿐이죠.”

머리가 어질해졌다.

* * *

“400여 년 전,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었어요.”

“…….”

리시스트 초대 황제와 기사였던 프라임, 그리고 진실의 눈을 가진 카멜리아와, 마탑의 창시자인 그녀.

4명은 어떤 이유에선가 이 세계가 무너질 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사는 이 세계를 유지할 방법을 강구한 끝에, 해답을 찾아냈다.

“그대에게 설명할 필요 없는 기나긴 여정 끝에,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막았어요.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죠. 깨진 항아리를 급한 대로 비슷한 진흙으로 막아 놓은 거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완벽히 막아 내려면 시간이 필요했어요. 400년 정도.”

마법사는 마력의 극의에 달한 자였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그녀는 다른 세계를 엿봤다. 그리고 이 세계의 생명을 연장할 방도를 알아냈다. 이 세계의 끝을 리네트가 익히 아는 동화책에 연결한 것이다.

“‘아가씨는 왕자님과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말의 끝에, 이 세계가 영원할 수 있는 실마리가 연결돼 있는 거예요.”

마법이라는 것은 말의 힘에 의존한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다른 세계의 동화책에, 마법사는 이 세계의 운명을 연결했다.

그리고 400년 동안 계곡에 틀어박혀 열심히 세계를 보수했다.

“그리고 그 동화 속의 아가씨는 나넬리아. 당신의 언니였어요.”

“……하필이면 나넬리아 언니였던 이유가…….”

“제가 아까 세계의 멸망을 막은 것을 진흙으로 막아 둔 깨진 항아리에 비유했죠? 그것 때문이에요.”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새자, 마법사는 항아리와 비슷한 색을 가진 진흙으로 항아리를 막았다. 마법사가 사용한 진흙은 ‘리시스트’와 ‘카멜리아’라는 이름이었다.

급한 대로 어떻게든 임기응변은 됐다. 하지만 마법사는 세계의 멸망을 막은 후, 당황했다. 임기응변으로 막아 둔 항아리는, 같은 진흙이 아니라면 완전한 보수가 어렵게 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세계를 보수하기 위해서는 리시스트와 카멜리아의 핏줄이 필요했다. 두 이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프라임의 핏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서 4인은 리시스트를 건국했다.

거의 영생을 살 수 있는 마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3인의 핏줄이 400년 동안 이름을 이으며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너무 황당한 얘기라 뭐라고 태클을 걸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리네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황당함으로 따지면 그 동화책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이 가장 황당하다.

그리고…….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그럼…….”

“예. 나넬리아 카멜리아는 노튼 리시스트와 결혼해야 했어요. 저는 노튼을 불러 카멜리아의 첫째 아가씨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죠.”

기가 막혔다.

그러나 마법사는 리네트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항아리는 세계, 진흙은 카멜리아와 리시스트. 아가씨가 왕자님과 결혼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완성되는 순간, 항아리도 완벽하게 막히는 거죠. 다시는 누수 되지 않게.”

그제야 대강의 이야기가 이해됐다.

“……나넬리아 언니는 작은 왕국의 왕자님과 결혼했어요. 그건…….”

“예. 노튼 리시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깨진 부분은 막히지 않고 또다시 누수 된 거죠.”

그제야 로가나가 가져왔던 이야기가 약간 이해가 됐다.

“당시에 노튼 황자를 수행한 귀족 하나가 와서 떠들어 댔어요. 마법사와 독대를 하고 돌아온 노튼 황자의 표정이 안 좋았다고. 그리고 수도에 돌아오며 리시스트의 주변 속국들을 점검해야 한다고 흘리듯이 말했다던데요.”

노튼은 주변 속국에서 나이가 찬 왕족들을 알아봤을 것이다.

나넬리아가 집을 마침내 뛰쳐나간 날, 갑작스레 숲에 홀로 나타난 작은 왕국의 왕자님.

당시를 리네트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동화책이니까 그렇게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알고 보니 노튼이 짜놓은 동선이라면?

“노튼이 제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나넬리아가 어쨌든 왕자님과 결혼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리네트는 뭐라 말을 섞고 싶었지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저는 그때 노튼을 불러 제가 어떻게 세계의 누수를 막아 왔는지, 그 계획의 완성 단계에 노튼이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어요. 하지만 그는 나넬리아와 결혼하지 않았죠.”

마법사의 실수였다. 그녀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마법사의 설명은 두루뭉술해졌다.

그녀는 노튼에게 ‘당신이 왕자이니, 반드시 카멜리아의 아가씨와 결혼해야 한다.’고만 말했다.

결국 노튼은 마법사의 말을 듣지 않고, 나넬리아를 다른 왕자와 결혼시켰다.

마법사는 다급해졌다.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400년 동안 혼자 틀어막고 있었는데, 노튼 때문에 다 말아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루카스가 나타났다. 마법사는 놀랐지만 우선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마법사가 400년 후의 마법에 연결해 둔 것은 카멜리아와 리시스트, 두 핏줄의 결합이었다. 마냥 기뻐하기엔 카멜리아의 핏줄이 부족했다.

그러다 리네트도 나타났다. 이에 마법사는 전율했다.

마치 마법사가 계획해 둔 것을 노튼이 망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역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차례로 나타난 것이다.

“마치 이 세계가 ‘조금만 더 힘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 대역 입장에서 듣기엔 심히 심란한 이야기네요…….”

“물론, 저라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죠. 당신은 ‘부외자’니까.”

마법사의 말에 리네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랬다. 자신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법사는 그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세계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불러온-”

리네트는 말을 골랐다. 그 유치한 단어를 발음하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용사 같은 건가요?”

하지만 마법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은 항아리의 누수 속에 흘러 들어온 이물질 같은 거였어요.”

아, 예. 그렇습니까. 리네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차라리 용사라고 말이라도 해 주든가. 남에게 뭔가 부탁하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시간도 멈출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사람이었다. 리네트는 간신히 참았고, 마법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물론 이물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지만.”

병 주고 약 주냐.

“그러던 차에, 이번 일이 일어난 거예요.”

“…….”

“마력석이 멈췄어요.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 중 마법이 가장 먼저 사라지기 시작한 거죠. 저는 급해졌고, 당신과 프라임 공작을 부른 거예요.”

한데 프라임 공작은 대체 무슨 이유로 불려 왔단 말인가? 리네트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법사가 이어 설명했다.

“프라임 공작은 그 진흙을 개는 도구 같은 용도로 마법에 쓰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신과 리시스트를 잇는 가교 같은 존재라고 제가 앞서 설명했죠? 리시스트를 부르지 않고 당신만 부른 이유는, 그가 당신에게 구혼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알게 돼서예요.”

“그렇군요.”

리네트는 영혼 없이 답했다. 그녀가 앞으로 할 말이 예상돼서다. 지금 흘러가는 대로라면 절대로 ‘예.’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거 같은데.

그리고 마법사는 리네트의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말을 내놨다.

“리네트, 부탁해요. 루카스와 결혼해 줘요.”

제 약혼에 꽤 많은 이의 자리가 걸려 있다는 건 리네트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결혼 하나에 세계의 멸망이라뇨.

막장 드라마도 이렇게 설득력 없지는 않겠다!

“그게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길이에요.”

“제 결혼의 스케일이 그 정도였던가요…….”

노골적으로 성의 없어진 대답에 마법사의 표정이 굳었다. 무표정한 방금 전과 달리, 완전히 딱딱해진 얼굴이었다.

“저는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리네트.”

“예. 저도 알겠어요, 마법사님.”

리네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리를 꼬고 뒤로 기대앉았다.

리네트는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이었고, 마법사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의 애완동물이라도 된 듯 두 손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신의 구도부터 바꾸었다. 상황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다.

마법사는 고요히 리네트를 보고 있었으나, 리네트는 마법사의 속내가 대충 들여다보였다.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제게 거짓을 말하진 않았겠죠. 노튼에게 이미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것 때문에 한 번의 실패를 겪었으니까요.”

“…….”

“하지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마법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으나 이윽고 실패했다.

“세계가 멸망한다고요!”

“그래서요?”

리네트는 제 앞에 선 마법사가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고 유쾌해졌다. 그녀는 ‘세계 멸망’이라는 단어를 듣고 리네트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멸망이 리네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리네트가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며 말했다.

“마법사님도 아시듯, 저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마법사가 처음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리네트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졌다.

“누가 알아요? 이 세계가 멸망하면 저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것만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리네트에게 답하는 마법사의 말에는 약간의 분노, 당황, 그리고 곤란함이 서려 있었다.

난 남이 내 앞에서 곤란해하는 거 좋더라. 특히 그게 나보다 높은 사람일 경우에. 리네트는 자신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음에 놀라면서도 마법사의 말을 경청했다.

“유감이지만, 당신은 돌아가지 못해요.”

하지만 저 말은 조금 절망스럽군.

“왜죠?”

리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저주스러운 노튼. 그자만 아니었어도 제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전부 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당신에게 뭐라도 감췄다가,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올까 무섭군요. 설명해 드리죠.”

“부디 부탁드려요.”

마법사는 생긋 웃는 리네트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크게 한숨을 터트렸다.

“당신은 이미 이곳에 동화됐으니까요.”

“저 공부 못해서 간단한 설명 가지곤 몰라요.”

“……맨땅에 씨앗을 떨어트린 직후에는 그 씨를 다시 집어 올릴 수 있지만, 씨앗이 땅에 파고들어 싹을 틔운 이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은 간단하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마법사는 말을 이었다.

“원래 세계에서의 당신 이름은 무엇이지요?”

리네트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절감했다.

망했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싹을 틔운 씨앗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 모습을 기억할 수도 없지요.”

리네트의 표정에서 그 심정을 읽어 낸 마법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존재인 줄 알아? 아니!

“그래도 결혼은 싫어요.”

“리네트…….”

마법사는 탄식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치기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리네트는 손가락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다 죽어요. 저도 언젠가 죽겠죠. 그런데 그때가 조금 빨리 다가온다고 해서, 제가 ‘어머나, 그럼 저 남자와 결혼하겠어요!’ 하고 말할 줄 아셨어요?”

“…….”

“아실 텐데요. 사람의 삶은, 그중에서도 여자의 삶은 녹록치 않아요. 세계 멸망요?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살다 보면, ‘차라리 세계가 멸망하게 내버려 둘걸.’ 하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어떻게 믿으세요?”

마법사는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저는 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태도도 마음에 안 들어요. 세계 멸망이니 뭐니 하는 소리로 사람 협박하듯 말하면 누가 ‘네, 알겠습니다.’ 하겠어요?”

흥정의 기본은 후려치기다. 마법사도 노튼에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튼이 과연 화를 안 냈을까?

리네트는 노튼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번 일을 망쳤는지는 몰라도, 아마 마법사의 재수 없는 태도가 그의 배반에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네트는 반대로 마법사를 후려치기로 했다.

“제가 노튼이라도 당연히 화가 났겠죠. 배반이라고 하셨죠? 생판 알지도 못하던 여자가 ‘너희를 위해 세계를 지켜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 내 요구는 모르는 여자와의 결혼이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안 듣죠.”

노튼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럴 때는 적당히 둘러대기 좋았다.

곧 마법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가 나서다.

하지만 그래 봐야 리네트를 죽이진 못할 것이다. 마법사는 방금 제 입으로 세계의 멸망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이 리네트라고 말한 차니까.

“그래 놓고 배반이라고 화를 내시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 그런데 마법사도 나같이 생각하면 어떡하지? 리네트는 뒤늦게 생각했다.

세계를 400년 동안 지켜 왔는데 후손이라는 놈이 ‘에벱베붸, 메롱메롱, 세계 따위 내 알 바 아니지롱!’ 하면, 완전 열 받아서 ‘이딴 세계 따위 다 망해라!’ 하고 다 관두고 싶어지지는 않을까?

“……제게 뭘 원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마법사는 그 정도로 막가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휴. 리네트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마법사님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마법사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개 뭔가 원하는 사람들은 말이 길더라고요.”

언니 제법이시네? 리네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마법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제가 400년만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저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답니다.”

“좋아요.”

리네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는 당장 루카스와 결혼하지는 않을 거예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오갔다.

리네트는 처음부터 루카스와 결혼하기로 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마법사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쥐고 있는 패를 내보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

더욱이 마법사는 계곡에서 수도를 내다볼 수는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얽힌 일들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마법사님은 세계가 멸망하는 걸 막고 계신 거죠?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나요?”

본격적인 흥정에 마법사의 관자놀이가 조금 불거지려는 듯 보였다. 리네트는 아아, 하고 손을 내저었다.

“저도 평생 살아야 될 남편감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봐야 할 거 아녜요.”

“이미 알아보려면 진작 알아볼 수 있지 않았나요? 그는 이미 그대에게 한창 구혼하고 있는 모양이고…….”

어딜 슬쩍 마감 기한을 줄여 보려고? 리네트는 흥흥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럼 제가 그 구혼을 몇 개월째 안 받고 있는 것도 아시겠네요.”

마법사는 이번에야말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6개월.”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생각보다 짧네요?”

“이것도 노력한 거예요.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마법은 점점 힘을 잃겠죠. 6개월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렇군요. 좋아요, 6개월 안에 결정할게요. 그런데 제가 루카스와 결혼하면 마력석의 힘은 당장 돌아오나요?”

“세계가 자신을 회복할 기간을 주어야죠. 저도 그 회복을 돕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리네트가 눈을 빛냈다.

“제가 결혼하면 결혼 선물도 있어야겠죠?”

결혼 선물. 노골적인 요구에 마법사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와우. 제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아시고?”

“‘1,000가지 소원을 들어주세요.’ 같은 소원은 안 돼요.”

“정말 저 같은 사람 많이 만나 보셨나 보네.”

리네트의 야유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법사의 말이 이어졌다.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는 것, 죽은 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 시간을 거스르는 것도 안 돼요. 나머지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렇군요. 하나 더.”

리네트는 마법사가 뭐라고 맞받아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제 후견인이 돼 주세요.”

-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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