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행의 선도
가을이 깊어가자 리시스트의 담장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색색의 물이 든 담쟁이들이 저택을 장식했고, 멋들어진 타운 하우스를 가진 귀족들은 한 번씩 연회를 열어 으스댔다.
귀족들이 수도에 타운 하우스를 두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했다.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서다. 잦은 연회들이 사교계 인사들의 결혼 상대 물색의 장으로 이용되는 것은 당연했다.
최근 리시스트 제국에 불어온 자유 연애 바람까지 더해지니 가을의 연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떤 작은 연회라도 젊은 귀족들이 그득했다.
그리고 요즘 가장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발레리 백작가의 로티드 발레리였다.
로티드 발레리는 오늘 한 자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한껏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다. 머리카락은 모두 틀어 올린 채였다.
요즘의 유행이 자연스럽게 땋아 내리거나 장식을 섞어 고불고불하게 늘어뜨리는 것임을 감안하면, 퍽 고전적인 패션이었다.
평소 유행에 민감했던 그녀를 생각하고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미소 짓거나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목선을 바라봤다.
[빈틈없이 틀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뻗은 흰 목과 날씬한 어깨선, 그리고 가녀린 쇄골.
로티드 발레리의 고전미는 마치 태양의 홀에 전시돼 있는 올가 황후의 초상화 속 그것을 꼭 닮았다.]
얼마 전 ‘리시스트의 아침’에 실린 문구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티드 발레리 또한 그 신문의 문구를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로티드 발레리가 입은 드레스는 올가 황후가 초상화 속에서 입고 있던 푸른 드레스와 아주 비슷한 색이었다. 디자인은 비교적 최신식이었으나, 모두가 로티드를 보는 순간, 올가 황후의 초상화와 ‘리시스트의 아침’을 떠올렸다.
평소에 다양한 아가씨들과 친목을 쌓는 로티드 발레리는 언제나 주목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는 ‘리시스트의 아침’을 통해 소원을 풀었다. 연회에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목덜미를 쳐다본 것이다.
개중에는 다가와 춤을 신청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평소 그녀를 알던 이부터,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거는 용감한 남자들까지 다양했다. 로티드는 그 주목을 즐기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 로티드가 그 모든 춤 신청을 받아 준 것은 아니었다. 남부 왕국에서 왔다는 베네딕트 보우가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로티드는 고개를 홱 돌렸다.
베네딕트 보우는 잘생기고 옷도 멋진 것을 입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에게 홀리지 않았다. ‘리시스트의 아침’에 실린 그의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니셜 기사를.
[이름에 B가 두 번 들어가는 남쪽의 신사는 멋진 얼굴과는 달리 퍽 쪼잔하다는 소문이네요!
세상에, 그는 연인을 위해 이니셜이 새겨진 보석을 주문했지만, 그 보석이 나오기 전에 연인과 헤어졌대요.
주문된 보석은 어떻게 되었게요? 새긴 이니셜이 아까워, 이니셜이 같은 새 연인을 만나려고 고심 중이래요!]
로티드 발레리는 베네딕트 보우와 최근 헤어진 여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레일라 배즐이었다.
로티드는 배즐 남작가의 아가씨에게 가려던 보석을 자신이 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거절하고 다른 남자와 춤을 추었다.
신문을 본 것이 분명한 몇몇 이들은 거절당한 베네딕트 보우를 두고 몰래 웃었다.
“최근 입으셨던 것과는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로군요.”
“알아보시겠어요?”
로티드 발레리와 춤을 추던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고모님의 초상화에서 본 것과 같은 색의 드레스입니다만…….”
남자의 말에 로티드가 눈을 흘겼고, 남자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입으시니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저도 오래된 것이야말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까? 저도 사실 옛 그림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최근에 발견된…….”
로티드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연회 홀의 입구 쪽이 어수선해졌다.
남자가 힐끗 그쪽을 쳐다봤다.
“누가 온 걸까요? 어째 시끄러운데…….”
“글쎄요. ……아!”
마찬가지로 그쪽을 바라보던 로티드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익숙한 사람을 발견해서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어린 소녀처럼 땋아 내리고, 수국을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꽂은 장식.
멀리서 얼굴까지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수국 장식을 하고 다니는 여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로티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저어…….”
“이런, 아는 분인가요?”
“네.”
남자는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입구 쪽으로 가고 싶어 안달을 하는 그녀를 알아챘다. 그는 선뜻 춤을 추는 무리 사이에서 그녀를 인도해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남자의 에스코트가 아니었다면 로티드는 거의 뛰어갔을 것이다. 간신히 입구 쪽에 도착한 로티드는 연회장을 어수선하게 만든 주인공이 자신이 짐작하던 여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가을에 걸맞은 청량한 하늘색의 드레스를 걸친 여인은 여느 귀족 아가씨들처럼 가냘프지는 않았으나, 가슴 아래쪽에서 주름진 드레스 디자인은 그녀를 충분히 사랑스러워 보이게 했다.
더불어 여인이 걸친 모든 것들은 비싸고 좋았다. 물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여인이 좋고 비싼 것을 걸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로티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여인이 분명히 제 말을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로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카멜리아 양!”
그렇다. 여인은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이 나라의 첫째 황자에게 열렬한 구혼을 받고 있으며,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라는 높은 신분을 가진 아가씨.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조금 놀라 이쪽을 보다가, 곧 그녀 쪽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로티드 발레리는 빠르게 다가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향해 부드럽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카멜리아 양.”
백작가의 아가씨치고는 퍽 경망스럽게 볼 수 있는 인사말이었으나, 그건 다른 측면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로티드 발레리아의 인사는-
“오랜만이에요, 발레리 양.”
-리네트 카멜리아와 꽤 친분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친분은 퍽 근거 있는 것이기도 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발그레한 뺨을 한 채 환하게 웃었다. 로티드 발레리도 마주 미소 지었다.
“그 인터뷰 이후 두 번째 뵙네요.”
인터뷰. ‘리시스트의 아침’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티드는 짐짓 제 목선을 강조하는 듯 부드럽게 귓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모든 사람들이 로티드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리네트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아름다운 목선은 여전하시네요. 역시 제가 틀리지 않았어요. 푸른 드레스도 아주 잘 어울리세요!”
“어머나, 칭찬 고맙습니다.”
로티드가 콧대를 높이자 리네트가 웃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시 한번 되새겼다. 리네트 카멜리아와 ‘리시스트의 아침’의 상관관계를.
그랬다. 저 ‘리시스트의 아침’에 로티드 발레리의 고전미를 다룬 이가 바로 저 리네트 카멜리아였던 것이다.
‘리시스트의 아침’이 수도 리시스트에 등장한 지도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다. 신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리시스트의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갖 재미있는 세상이 그 안에 있었다.
황제 폐하가 최근 했다는 말부터, 요즘 가장 유행하는 드레스 디자인, 그리고 잘생긴 귀족 청년이 뿌리고 다니는 염문까지. ‘리시스트의 아침’에는 다 있었다. 오죽하면 황제 폐하께서도 보신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리시스트의 아침’을 펴낸 이는 베티 예이츠. ‘화분의 준남작’의 딸이라고 알려진 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베티 예이츠보다 더 주목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베티 예이츠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몇몇 아가씨들의 인터뷰에 나섰기 때문이다.
“제 친구의 사업을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어 제가 간청했답니다.”
누군가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이유에 관해 물었을 때, 리네트는 눈을 내리깔며 저렇게 답했다.
모두 납득했다. 그야 베티 예이츠는 중류 귀족이었으니까. 본래대로라면 고위 귀족 여인들은 만나지도 못할 신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베티 예이츠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리시스트의 아침’은 이미 한두 차례 리네트 카멜리아를 다루며 매진을 기록한 바 있었다. 그때의 효과를 잊지 못해 안하무인의 부탁을 한 것이리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황자의 사랑을 받는 리네트 카멜리아라고 한들, ‘리시스트의 아침’이 고위 귀족 여인들을 오래 만나지는 못할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대관절 누가 저런 저열한 지면에 제 얼굴을 싣는 것을 달가워한단 말인가.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가장 먼저 리네트 카멜리아는 본인의 이야기를 적었다. 바로 그녀가 공작저에서 나오게 된 이야기였다.
레미시어 가문이 발란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게 된 일의 전말. 그리고 황족에게 가해를 시도한 에드가 발란과, 상심에 잠긴 알렉사 레미시어의 이야기.
거기 덧붙여 알렉사 레미시어는 직접 ‘리시스트의 아침’에 제 이야기를 써서 보내기까지 했다.
노튼 황자의 약혼녀이자, 수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여인이 당한 무도한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으며, 그녀의 슬픔에 공감했다.
또한 자신의 친구에게 그런 약혼자를 안배한 공작가에게 화가 나 보호를 선언한 알렉사 레미시어의 용기에는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리시스트의 아침’은 또 매진됐다.
그 이후 알렉사 레미시어는 다시 한번 직접 ‘리시스트의 아침’을 통해 리네트와 대담을 나눴다. 말은 근황에 대한 거라지만, 그녀가 어디서 드레스를 맞췄는지부터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진주를 녹여 마시다뇨, 그렇지 않아요! 진주를 개어 바르죠!’란 표제는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그쯤 되니 다른 사교계의 여인이 시험 삼아 리네트의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 그녀는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유명했는데, ‘리시스트의 아침’은 그녀의 손을 일러스트로 그려 실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손을 관리하는 방법도 함께 다뤘다.
그리고 다음 연회에서, 여인의 손을 보고 싶어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남자들이 수십 명은 됐다.
다음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작가의 수줍은 둘째 딸이었던 여인은 ‘리시스트의 아침’에 등장한 이후 한 몸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쯤 되니 모두가 ‘리시스트의 아침’- 아니, 리네트 카멜리아와 한 번쯤 인터뷰하고 싶어 눈을 희번덕거렸다.
정작 리네트 카멜리아 본인이 ‘그저 친구를 도울 뿐.’이라고 겸양을 떠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주목받기 좋아하는 로티드 발레리가 ‘리시스트의 아침’에 실린 것에 관해 몇몇 질투 많은 아가씨들은 ‘발레리 양이 뭔가 구미에 당기는 것을 주고 카멜리아 양을 꾀었을 것’이라고 떠들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리네트 카멜리아의 구혼자는 루카스 리시스트였다. 불미스러운 일로 레미시어 후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머물고 있지만, 그 저택에는 루카스 리시스트가 가져다 바친 귀한 선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는 소문이 가득했다.
게다가 로티드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 * *
어떤 신사가 연 시 암송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로티드가 탄 마차의 마부는 지나가던 마차의 마부와 시비가 붙었다.
그에 로티드 발레리는 엄하게 자신이 귀족 아가씨임을 밝혔으나, 다른 쪽 마부는 정중하게 사죄하기는커녕 발레리가 탄 마차의 바퀴에 발길질을 했다.
안타까운 일은 그다음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마차 바퀴가 그 마부의 발길질 한 번에 부서진 것이었다. 추후에 발레리 가문에서는 바퀴를 점검한 후, 바퀴에 뭔가 좋지 않은 수액이 묻어 나무가 부식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순식간에 푹 꺼진 마차에 로티드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무례한 마부는 달아났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사용인들은 모두 놀란 아가씨를 진정시키느라 마부를 잡지 못했다.
삽시간에 마차 바퀴가 부서졌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결국 하녀 하나가 삯마차를 구해 오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때, 의외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마차를 타고 마침 그 길을 지나던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흰 마차는 멈춰 서서 발레리 가문의 마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물었다. 로티드 발레리는 처음엔 다소 경계했으나, 커튼을 걷고 제게 묻는 이가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것을 알고는 반색했다.
“카멜리아 양, 정말로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그리고 리네트 카멜리아는 그 명성대로 총명하고 눈치도 빠른 여인이었다. 로티드가 하려는 말을 곧바로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리네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발레리 양. 혹시 제게 귀하를 잠시나마 보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로티드는 바로 리네트의 청을 승낙하고 흰 마차에 올라탔다. 그 마차 안에서 리네트와 로티드는 퍽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리네트는 특히 로티드의 아름다운 목덜미를 칭찬했다. 마치 올가 황후의 초상 같다는 말은 바로 그 마차에서 나온 말이었다.
발레리 백작저에 가까워졌을 무렵, 리네트는 지나가는 말처럼 로티드에게 물었다.
“제가 아가씨에게 빚 하나를 지웠으니 제 부탁 하나도 들어 주시겠어요?”
“뭔데요?”
“제가 혹시 아가씨의 이야기를 ‘리시스트의 아침’에 적어도 될까요?”
로티드의 눈이 커졌다.
‘리시스트의 아침’이 최근 다룬 아가씨들이 모두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로티드의 가슴이 기쁨으로 떨렸으나, 그녀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애써 입매를 굳혔다. 그러고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귀족 아가씨가 쉬이 감당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은인이시니 이번 한 번만큼은 허락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나쁜 말은 안 돼요.”
“물론이죠!”
리네트는 자못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로티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로티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멋진 것이었다. 로티드가 ‘리시스트의 아침’에 실린 직후 그녀는 한 연회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삶을 통틀어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
연회장에 들어선 직후부터 귀가를 위해 마차에 오를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로티드에게 말을 걸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로티드를 따랐고, 연회장의 젊고 멋진 신사들은 모두 한 번씩 로티드와 춤을 추었다.
관심에 목마른 관심 종자에게는 단비 같은 일이었다. 로티드는 거의 발작적으로 모든 연회에 참석했다. 더 많은 드레스를 주문하지 않은 게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나 주목받는데, 다른 연회에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가야 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발레리 백작가라는 이름이 순식간에 화제로 떠오르니, 영지에 있던 발레리 백작 또한 빠르게 수도로 올라왔다.
엄격한 자신의 아버지가 제 소식을 전해 받자마자 당장 짐을 꾸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로티드는 아차 싶었다.
발레리 백작은 항상 ‘여자아이는 정숙해야 한다.’, ‘숙녀는 좋은 신사를 만나 시집을 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우리 가문의 오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티드가 화제의 중심에 선 것에 대해 아버지가 불쾌해할 것만 같아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막상 발레리 백작저에 도착한 백작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우리 사랑스러운 아몬드가 일을 냈구나!”
‘사랑스러운 아몬드’는 로티드의 어린 시절 백작이 그녀를 부르던 별명이었다. 그녀가 나이를 먹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불린 적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정숙한 귀족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라며 점잖게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던 아버지의 말에 로티드는 귀를 의심했다.
일의 전말은 간단했다. 로티드 발레리에 대한 기사를 읽은 몇몇 지체 높은 가문에서 조심스럽게 청혼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정숙하고 고전미 넘치며 교양 있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결혼을 전제로 한 교류를 청하고자 합니다- 라는 편지였다.
그뿐인가. 로티드 발레리가 즐겨 끼는 토르말린 반지가 발레리 영지의 광산에서 난다는 한 줄의 기사를 보고 광산 투자를 제의한 상인도 있었다.
화제성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발레리 백작은 뜻밖의 일이 가져온 효과에 전율했다. 발레리 영지에서 체감하는 일이 이럴진대, 수도에서는 어떤 난리가 났을지 안 봐도 뻔했다.
발레리 백작은 당장이라도 리네트 카멜리아를 만나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리네트 카멜리아를 단독으로 만나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레미시어 후작가의 보호 아래 있는 데다가, 황자에게 구혼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온갖 초대로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발레리 백작은 노선을 조금 바꾸었다. 루카스 황자를 만난 것이다.
“황자 전하, 리네트 카멜리아 양에게 부디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발레리 백작은 루카스에게 엄청나게 큰 토르말린 외에도, 발레리 영지에서 나는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등 유색 보석을 한 아름 바쳤다.
루카스는 흥미롭게 물었다.
“그 신문에 난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인가?”
“제 딸아이에게 좋은 혼처가 들어오고 있고, 영지의 사업도 덕분에 괜찮은 투자처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루카스는 놀랍다는 듯이 발레리 백작에게 축하를 보냈다.
발레리 백작 또한 쉬이 만나기 힘든 첫째 황자에게 단순히 리네트 칭찬만 하고 물러가지는 않았다.
발레리 백작은 서부의 가문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이 기회에 수도의 정세를 파악해 두고 싶었다. 게다가 슬슬 5년을 넘게 끌어온 황자들의 황위 쟁탈전이 불이 붙는다고도 들었다. 누구 편에 설지도 대강은 정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발레리 백작은 루카스에게 큰 호의를 품게 됐다. 서부의 사업을 모두 꿰고 있는 데다, 거의 다 개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영지민이 부족한 서부의 현실에 루카스는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발레리 백작은 감탄하며 루카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알고 계십니까?”
그 질문에 루카스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내가 레벤튼 영지에서 오랫동안 평민으로 지낸 것은 알고 있는가?”
발레리 백작은 긴장했다. 첫째 황자가 평민들 사이에서 십여 년을 지낸 것은 유명한 일이었으나, 다들 그의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무래도 저어했다. 어떤 황자가 평민으로 살았던 것을 기꺼워하겠는가.
그러나 예상외로 루카스 황자는 퍽 소탈하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레벤튼 영지에서 경비대원으로 일하며, 때로는 다른 영지에도 파견 근무를 나갔으며, 그때 서부 영지의 이야기들을 여행자들에게서 들었노라고.
“그 시절에 내게 서부의 영지들은 꼭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오. 나중에 돈을 벌어 서부로 여행을 가 보겠노라 생각했지.”
“하하! 평민들에게 여행은 꿈 같은 것이니까요.”
황자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 덕분에 발레리 백작은 루카스 황자의 말에 맞장구를 칠 정도가 됐다. 그가 루카스 황자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고, 백작저로 돌아갈 때쯤에는 두말없이 루카스 황자의 곁에 서야겠다고 결심했다.
덧붙여 제 딸에게도 귀띔했다.
“얘야, 꼭 리네트 카멜리아 양과 친해지거라.”
“그래도 되나요?”
“그럼. 그렇게 소탈한 분이 구혼하는 여인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좋은 일의 시작점이 그분이지 않니.”
“하지만 아버지는 소탈함은 미덕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평소 귀족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소탈함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던 발레리 백작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로티드 발레리에게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군주가 가져야 할 미덕에는 소탈함도 필요한 법이지.”
* * *
그러니, 로티드 발레리가 연회에 도착한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필사적으로 다가가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티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리네트에게 미소 지었다.
“카멜리아 양 덕분에 정말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답니다.”
“어머나, 제 덕분에요? 저는 이제 막 연회장에 왔을 뿐인데…….”
리네트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로티드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에 주변 사람들이 물러났다. 그것조차 그녀와 자신이 친하다고들 생각하는 방증 같아 로티드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발레리 양과요?”
“네에. 카멜리아 양은 몸이 약해 최근에 데뷔하셨잖아요.”
그녀가 공작가에서 구박을 받았다는 소문은 워낙 유명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리네트의 체면을 살려 줘야 했다. 로티드는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모두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아가씨들이랍니다.”
* * *
“그나저나 루카스 황자님도 희한한 여인을 마음에 두셨어요.”
“그런가요? 저는 오히려…….”
자작이라고는 하지만 세습 작위를 오래 물려받은 가문의 연회라, 고위 귀족부터 중류 귀족까지 참가한 사람은 다양했다. 자연스레 리네트에게 몰리는 시선도 다양했다.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녀가 꽤 매력 있는 여인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말았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홀린 듯 쳐다보고 있게 된다.
그리고 평범한 것 같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황자이기 때문이다. 리시스트 제국의 황자쯤 되면 눈알 튀어나오도록 아름다운 천하절색을 만나야 하지 않는가, 라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리네트 카멜리아도 그렇게 평범하진 않다. 아마 그녀가 카멜리아 공작 부인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교계에서 제법 이름난 미인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흘끔거리며 그녀에게 말 걸 기회만 노리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이를 증명했다.
“저어…….”
“네?”
한 신사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뺨을 살짝 붉힌 그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마르케 자작가의 첫째라고 밝혔다.
“혹시 오늘 에스코트하신 신사분이 계시지 않다면…….”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라는 이야기였다.
지켜보던 다른 남자들은 속으로 발을 굴렀다. 내가!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리네트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혼자서도 잘 걷고 잘 웃는답니다.”
대부분의 연회에 참석하는 여인들은 에스코트할 신사와 함께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리네트 카멜리아는 언제나 홀로 참석했다. 그 흔한 샤프론조차 없었다.
그야 그 공작 부인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어느 부인이 그녀의 샤프론이 되어 주겠느냐마는. 에스코트 정도는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에스코트 없이 참석하는 바람에, 연회의 신사들은 꽤 열띤 경쟁을 벌였다. 황자가 열렬히 구혼하고 있는 상대이니 그녀에게 감히 말 한 번 거는 자가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였던 것이다.
제법 괜찮은 중류 귀족 남성들에게 리네트는 꽤 센세이션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약혼은 안 했으니 뭐 괜찮지 않나요?”
“그러게요. 아니면 일부러 사람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
근 3개월간 루카스 황자는 리네트에게 끈질기게 구애했으나, 그녀와 황자의 약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백안 때문에 카멜리아 공작가는 그 핏줄에 예민했다.
‘백안’이라는 것은 카멜리아의 핏줄에게만 허가된 마법적 능력이라, 직계가 아닌 방계 핏줄에는 전승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카멜리아 공작가는 딸이 다른 가문에 시집간다 해도 그 핏줄에 ‘백안’이 나타날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도 상대를 고르고 골라 결혼한 것이다.
그런 판에, 카멜리아 공작가의 백안이 만약 황실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카멜리아가 경계하는 바를 황실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시스트 황실은 굳이 공작가의 핏줄을 황실 계보에 섞기보다는, 동반자로서 함께하길 청했다.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봤다는 편이 맞았다.
기록에는 몇 대 전, 공작가 아가씨에게 황자 중 하나가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간에는 카멜리아 공작가가 루카스 황자를 거절할 것이라는 예측이 떠돌았다. 리네트 카멜리아를 뒤늦게나마 데뷔시킨 것도 루카스 황자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하지만 이미 데뷔한 이상 공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신랑감을 공개적으로 골라야 했다. 공작가에서 그녀의 신랑감으로 안배했던 에드가 발란이 벌인 일 때문에라도.
그러니 중류 귀족 남성들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루카스 황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그녀가 고를 만한 남자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어?
사생아인 그녀의 출신이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그 카멜리아 공작가다. 게다가 황자가 떠들썩하게 구혼한 여인이기도 했다. 일종의 트로피 효과마저 부여된 셈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춤을 추지 않는다면서요.”
“맞아요. 그녀가 춤추는 걸 본 사람이 별로 없대요. 데뷔탕트 때 루카스 황자와 춤을 추기는 했지만…….”
“그게…….”
한 여인이 숨죽여 속삭였다. 모두 그녀에게 집중했다.
“……사실 그녀가 출 줄 아는 춤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약간의 공백 후 작은 웃음이 퍼져 나갔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그 낸터킷 황후가 알렉사 레미시어를 그녀의 춤 선생으로 보냈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몇 번이나 제 발을 밟는지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리네트에게 춤을 신청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물론 리네트는 그 요청도 받아 주지 않았다. 대신 여인들과 이야기를 섞고, 소개를 받는 데 열중했다. 젊은 아가씨들이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상대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어려서 아직 다들 1차원적이니까.’
사교계에 데뷔한 지 이제 얼마 안 된 소녀들 중에는 리네트가 싫어 어쩔 줄 모르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싫은 나머지 리네트에게 심술 맞은 말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는 인물들.
물론 리네트는 그런 것들도 모두 너끈히 받아넘겼다. 애초에…….
‘말로 때리는 게 뭐 아프다고. 이멜다는 진짜로 뺨을 때렸는데.’
엄청나게 단련되어 있는 그녀에게, 연회에서나 쓰는 말투로 소녀들이 비아냥대 봐야 타격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눈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묻는 것이 낫지. 리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님이 요즘 영지와 공작저를 오가시면서 사교계에 잘 돌아오시지 않는 것 말인데요.”
“예에.”
“혹시 소공작께서 능력을 각성하신 것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리네트는 몸을 약간 굳혔다. 소공작이라는 건 갈레안 카멜리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리네트 앞에 있던 신사가 한가하게 지껄였다.
“요즘 그런 소문이 있는 거 아세요? 사실 카멜리아 양의 데뷔탕트는 갈레안 카멜리아 소공작을 위한 것이라고.”
“소문이…… 그렇던가요?”
“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놈 같으니라고. 리네트가 속으로 욕을 했다.
남자는 리네트의 속마음도 모르고 자신이 퍽 그럴싸한 추측을 하지 않았느냐는 듯, 잘난 척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도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리네트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양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그런 추측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으나 그 이유는 능히 짐작할 만했다.
카멜리아 공작은 최근 몇 년간 등성하지 않고, 수도의 공작저와 영지만 오갔다. 해서 ‘백안’을 각성한 후계자가 공작가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거의 굳어지고 있었다.
‘백안’이 각성 후 성인이 될 때까지 천천히 두각을 드러내는 능력이며, 후계자가 성인이 되는 순간 전대의 능력자는 완전히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백안’의 후계자는 누구인가?
다들 급작스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리네트 카멜리아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네트의 존재조차 몰랐다. 하나 리네트라는 존재가 두각을 드러낸 순간, 몇몇 이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공작은 리네트 카멜리아가 ‘백안’의 계승자여서 여태까지 그녀를 숨긴 것인가?
그녀가 사생아라서 이멜다에게 미움받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세간에는 저렇게 생각하는 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리네트가 데뷔한 지금에 와서는 또 추측이 달라졌다. 갈레안 카멜리아가 능력을 계승했음을 확고히 알리기 위해 그녀를 결혼 시장에 던져 버렸다는 설이 대두된 것이다.
정말 귀에 갖다 붙이면 귀걸이, 코에 갖다 붙이면 코걸이였다.
리네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식으로 오해해 주면 자신이야 고마울 일이었다. ‘백안’의 소유자임이 드러나 봐야 별로 좋을 일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떡밥을 던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리네트는 환하게 웃었다.
“귀하께서는 소문을 좋아하시는군요.”
“앗…….”
“저도 물론 제 친구를 돕고 있으니만큼 그렇게 보이리라는 추측을 아니할 수 없지만-”
리네트가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저는 소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너 내가 ‘리시스트의 아침’에 원고 쓴다고 그런 소문 이야기해 주면 좋아해 줄지 알았어? 유감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 별로 안 좋아해!-라는 뜻이었다.
삽시간에 눈앞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맞아요. 그리고 리네트 양은 몸이 약해 늦게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질세라 바로 뒤에 있던 로티드 발레리가 맞장구쳤다.
그에 리네트는 속으로만 코웃음 쳤다. 여태까지는 퍽 흥미롭게 듣고 있었으면서. 리네트가 면박을 주자 뒤늦게 합세하는 모양새가 참으로 볼만했다.
그러나- 리네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와 틀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관심 종자 기질은 사실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고, 그녀의 아버지인 발레리 백작은 서부 귀족들 중에서는 제법 발언권이 있는 자였다.
루카스는 최근 발레리 백작을 통해 서부 귀족들을 모아 만나기로 했다. 적어도 그가 서부 귀족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로티드 발레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모아 주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게 요 근래 리네트가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회 시작부터 지겹군.’
보통 때였다면 연회 내내 이런저런 잡담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부채를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떠들고 춤추는 일에는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리네트는 오늘 하루 종일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짜증이 났다.
리네트가 관자놀이를 살짝 짚었다.
“아, 약간 머리가 아프군요.”
“어머나, 괜찮으세요?”
“예. 휴게실에서 조금 쉬고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제가 위치를 알아요. 이쪽으로…….”
주변에 있던 아가씨들이 앞다퉈 리네트를 안내했다. 리네트는 옅게 미소 지으며 아가씨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 시각, 리시스트 황성에 카멜리아 공작이 등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맹세코 한가하게 자작가에서 늘어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 *
리시스트 황성은 가을이 깊을수록 그 멋을 내뿜는 곳이다. 오래된 만큼 돌벽에 끼어 있는 이끼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고, 성을 뒤덮은 덩굴들도 붉은색으로 번진다.
오후에 해가 질 즈음 리시스트 황성을 방문하는 이들은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는 성벽을 보며 누구나 감탄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의 방문자는 황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직진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장은 빠르게 성문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보고 긴장했으나, 곧 그가 내민 신분 패를 보고 뒤로 물러섰다.
황제는 영지를 돌아보러 갔던 카멜리아 공작이 기별도 없이 등성했다는 이야기에 ‘호오?’ 하고 웃었다.
“무슨 일이라더냐.”
“용무는 폐하를 만나 뵌 후에 직접 전하겠다 하셨습니다.”
카멜리아 공작의 예민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황제는 시종장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내겠다.’ 언급하자 시종장이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마주한 카멜리아 공작은 시종장이 차를 채 따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제 딸의 신변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음.”
황제는 시종장이 뜨거운 물을 따르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카멜리아 공작이 자신을 노려보거나 말거나, 시종장이 은수저를 넣어 두어 번 젓고, 마법적인 처치까지 하기를 기다렸다. 은수저가 새하얀 것을 확인한 후, 황제는 차를 마셨다.
“뜨겁구나.”
“황공합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 새를 참지 못한 카멜리아 공작이 이마를 찡그리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폐하.”
“드셔 보시게, 공작.”
시종장은 그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느릿느릿하게 공작의 찻잔에도 은수저를 집어넣었다. 카멜리아 공작은 이를 악물고 찻잔을 밀어냈다.
“저는 차를 즐기지 않습니다.”
“그렇구만. 맛이 나쁘지 않은데.”
“폐하.”
황제는 턱을 긁었다.
“불가하네.”
“어째서입니까.”
“공식적으로 카멜리아 양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레미시어일세.”
“그가 황자 전하의 날개 아래에 있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모르지 않는다면 왜 내게 왔는가?”
물론 답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카멜리아 공작이 황제에게 직행한 이유는 뻔하다. 루카스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 해석도 저 카멜리아 공작의 성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좋게 봐준 것이다.
황제는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아가씨는 모르지만, 첫째인 나넬리아는 알고 있었다. 딱 한 번, 리시스트 황성의 무도회에서 공작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상당히 인상 깊은 조우였다. 그 카멜리아 공작이 자식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부모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자식을 대하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다.
그중에서도 유독 자식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자식에게 군림하려는 부모. 카멜리아 공작은 그런 부류의 제일선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자식이 벌인 일이라 한들, 부모의 명령 하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사고로 내게 왔겠지.’
하지만 황제는 그런 종류의 권력적 우위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단 그는 30년이나 제국의 만인지상으로 군림해 온 인물이다. 굳이 자식에게도 군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는 군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신민들 중 하나인 황자들에게도 필요하다면 명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재밌잖아.’
어쨌든 30년이나 군주로 살고 있으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대충 다 가질 수 있다. 황제는 수많은 역사 속 폭군들이 왜 사람을 죽이거나 유흥에 골몰했는지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밌으니까. 사람 다스리는 것에 이골이 나면 사람들을 갖고 놀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황제는 폭군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람을 갖고 노는 것은 관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카멜리아 공작 같은 인간상에게도 온화한 군주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어쨌든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는 적당히 심술 맞은 군주로 남고 싶었다.
“황자 전하이지만, 동시에 폐하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공작, 5년 만에 등성해서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가. 나는 적어도 내 안부라도 물을 줄 알았다네.”
황제의 딴청에 카멜리아 공작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려다가 도로 무표정해졌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강녕하십니까.”
“어째 안부 인사가 욕으로 들리누만. 건강하다.”
“다행입니다. 제 딸을 돌려주십시오.”
황제는 그쯤 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공작. 루카스를 두고 내게 온 이유가, 그 애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예.”
“물론 부모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은 자식의 미덕이기는 하네만-”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식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부모의 미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폐하.”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예전에도 예민하고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황제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이 다 보였다.
황제는 따분한 표정으로 긴 의자의 팔 받침에 기댔다.
“그대가 레미시어 후작도, 내 아들에게도 들르지 않았음을 내 알고 있네. 그것은 그대가 나를 여전히 가장 높이 군림하는 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공작.”
“…….”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네.”
“제가 레미시어 후작과 황자 전하를 거쳐 오면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말한 순서는 조금 다르지. 자네는 딸의 의사를 물어봤는가?”
공작이 멈칫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황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발란가의 망나니가 황자를 가해하려 했다는 일련의 사건을 황제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얻어걸린 것에 가까웠으나, 루카스는 그것을 십분 활용해 제가 사랑한다는 아가씨를 카멜리아 가문에서 빼냈다.
황제는 그 일들에서 한 가지를 유추해 냈다.
아무리 약혼자라 한들, 에드가 발란이 공작저에서 카멜리아의 딸에게 그렇게 날뛸 수 있다는 것. 그건 그녀가 카멜리아 가문에서 그리 대단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모르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눈앞의 공작 또한 그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자네 딸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한다네. 리네트 카멜리아 양이 최근에 수도 사교계에서 꽤 지명도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
“록시온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본 내 신하들은 모두 입을 모아, 화술이 뛰어나고 재치 있는 아가씨라고 평했다네. 자식을 잘 키웠군.”
황제의 말이 단순히 칭찬이 아니라는 것쯤은 카멜리아 공작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재치 있는 아가씨인데, 본인의 의사 한번 먼저 묻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정숙하고 참한 귀족 여인이라면 무릇 그 부친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 부친에게 물어보지.”
황제가 주름이 가득한 눈을 가늘게 접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를 내 아들과 결혼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나?”
공작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언젠가는 들을 말이었지만 지금 할 줄은 몰랐다-고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할 말이면 빨리 해 버리고 싶단 말이지. 황제는 턱을 괴고 공작의 답을 기다렸다.
“……바깥에 내놓기 부끄러운 아이입니다.”
“하지만 내 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더군.”
공작이 이마를 찡그리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광경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역대 카멜리아 가문의 핏줄이 황가에 섞인 바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네. 하지만 최근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
황제는 습격한 상대가 당황을 수습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낚싯대를 느긋이 드리웠다.
“리네트 카멜리아. 자네 딸이 ‘백안’을 계승했다는 소문 말일세.”
카멜리아 공작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황제는 주의 깊게 카멜리아 공작을 관찰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알다시피 공작이 몸이 아파 오랫동안 등성을 삼가지 않았나? 나는 공작이 아팠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지만, 워낙 그 세월이 오래된 데다 자네 가문의 이력 때문에라도 풍문이 돌더군. 모두들 카멜리아에 리네트라는 딸이 있는지도 몰랐지 않나. 그것이, 다들 자네가 ‘백안’의 계승자를 감추기 위해서 그녀를 저택에 숨겨 놨다고 떠든다네. 그리고 루카스가 그녀를 발견해 버려 상당히 곤란해졌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가 말을 잇는 동안 공작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해졌다. 황제는 그 얼굴의 변화를 제 마음속에 끌로 조각하듯이 천천히 새겨 넣으면서도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나도 그건 헛소문이라고 생각하네. 정말로 그녀가 ‘백안’의 계승자라면, 그녀가 데뷔하도록 자네가 내버려 뒀을 리 만무하지 않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카멜리아 가문에는 툭하면 어린 나이에 사고를 치는 아들들이 있으니까.”
카멜리아 가문은 딸이 백안을 계승한다면, 데릴사위를 들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황제는 카멜리아 가문에, 몇 대에 한 번씩은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해 빠르게 자식을 보는 소공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소공자들은 한결같이 제대로 된 결혼을 하지 못한 누이를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타내는 것은 자명했다. 백안을 가지고 태어난 딸들은 대부분 억지로 아이를 낳아, 제 남자 형제에게 아이를 양자로 빼앗겼을 것이다.
황제는 그 사실을 비꼬며, ‘리네트 카멜리아가 만약 백안을 계승했다면 너 또한 그녀를 종마로 썼을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공작은 이제 완벽하게 평온의 벽을 뒤집어쓴 듯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 평온에 확신을 얻었다.
“역시 갈레안 카멜리아가 ‘백안’을 계승한 것이지?”
“…….”
황제 본인으로서도 퍽 얕은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킬킬거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만약 공작이 갈레안 카멜리아의 계승을 인정한다면, 리네트와 루카스의 약혼에는 별문제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가 솔직하게 리네트의 계승을 인정하는 순간, 리네트 카멜리아는 루카스와 약혼하지 못하고 데릴사위를 들여야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한발만 물러서서 보면 후자가 가장 편한 길이다.
그러나 카멜리아 공작 부부가 갈레안 카멜리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하는 이상, 리네트가 백안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알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리네트를 후계자로 내세울 거라면 진작 그랬겠지. 그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황제가 관심을 둘 만한 거리는 되지 않았다.
어쨌든 황제는 공작이 이제 ‘백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도 ‘백안’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공작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평생 남에게 속아 본 적이 없는 자라 그럴까. 남의 거짓말을 분간하고, 그 표정을 속이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자, 나의 질문에 그대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황제는 흥미진진하게 공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장 대답해 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낚싯대에 월척이 걸렸다.
황제는 펄쩍 뛰어오르고 싶은 기분이 됐다. 공작은 리네트 카멜리아가 백안의 계승자라고 확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작은 평소라면 저렇게까지 멍청한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백안이 없는 지금 상황이 그에게 힘겹거나, 아니면 앞뒤 분간 못할 만큼 리네트 카멜리아가 싫거나.’
공작이 뭐라고 웅얼거렸으나 황제는 더 이상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루카스 네 이놈, 장하구나!’
황가가 ‘백안’의 혈통을 손에 넣는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황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김칫국을 드럼째로 마시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몰랐다.
* * *
황제의 생일 축하연은 신년 연회와 겹친다. 제국의 귀족들이 다 수도로 오는 것은 당연했다. 모두들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했다.
“멋진 드레스와 보석도 당연히 동이 나죠, 그때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빨리…….”
“……지금 가을 아니에요?”
리네트가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은 아직 10월이다. 신년 연회는 1월의 마지막 주에 열린다.
그러나 리네트의 말에 알렉사는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드레스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요!”
아, 그런 거군. 리네트는 가자미눈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론 비싸고 멋진 드레스는 좋긴 하다.
보는 것만.
알렉사는 재단사 팔스의 아틀리에에 빨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야 멋진 드레스를 만들려는 사람이 알렉사와 리네트뿐만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리네트는 그게 그리 내키지 않았다. 드레스는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여자들은 옷을 너무 많이 입었다.
맨몸 위에 슬립, 그리고 드로워즈, 그 위에 페티코트 두세 겹을 걸친 뒤, 슈미즈 가운을 걸친다. 더불어 코르셋을 철갑처럼 둘러 조인 다음에 속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가운을 다시 걸쳐 드레스와 가운을 핀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실로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이었다. 리네트는 그 끔찍한 것들을 굳이 제 옷장에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가 사 준 드레스가 한두 벌이 아니라는 것도 이유가 됐다.
“……저는 전하께서 주신 드레스가 많아서요, 아직도.”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드레스는 없지 않나요?”
알렉사가 물었다. 알렉사는 재단사 팔스의 아틀리에서 리네트 곁에 붙어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맞출지 같이 주문한 사람이다. 리네트가 어떤 드레스를 가지고 있는지 리네트보다 더 잘 알 수도 있다.
옆에서 차를 따르던 애플이 눈에 띄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플 또한 리네트에게 새 드레스를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슬쩍 애플을 향해 눈을 흘겼다.
“뭐, 꼭 새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그거야 그렇지만…….”
알렉사가 말끝을 흐렸다.
리네트는 알렉사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년 연회에서 리네트는 엄청나게 주목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루카스와 약혼을 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화제의 인물임은 여전할 테니.
하지만.
어쨌든 리네트의 지상 목표는 아직도 ‘대충 막사는 것’이었다.
리네트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땅에 발이 닿아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루카스를 만나고, 제가 도와주겠다고 말해 놓고서도 딱히 큰 현실감은 없었다. 재미있는 게임을 한다는 느낌이랄까.
아마 리네트가 신년 연회에서 새 드레스를 입고 온다면 사람들은 그 옷을 뜯어 보며 궁금해할 것이다. 새 드레스가 아닌 기존에 입었던 옷이라면 흉을 볼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결국 사람들은 리네트를 그야말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것이다.
어차피 당할 일인데 내가 새 드레스까지 차려입으며 광대 노릇을 해야 할까?
리네트가 실용적인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이렇든 저렇든 달라질 것이 별로 없는 옵션이라면 굳이 그들을 위해 괜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알렉사를 가엾이 여기거나 깔보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가지는 현실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곳은 리네트에게 동화지만, 알렉사에게는 현실이며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앞으로도 살아갈 곳이다. 알렉사가 새 드레스를 사는 이유는 ‘그게 그녀의 현실이니까’다.
“하지만 여느 때랑 다를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달라요? 뭐가요?”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던 알렉사는 엄청난 폭탄을 리네트에게 던졌다.
“카멜리아 공작님이 등성하셨었다는데…… 그건 신년 연회에서 리네트와 황자 전하의 약혼을 안배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뭐라고요?”
뜻밖의 소식을 접한 리네트는 벌떡 일어섰다. 알렉사는 리네트의 반응을 보고 당황한 얼굴이 됐으나, 리네트는 알렉사에게 제 황당함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알렉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음…… 리네트는 전혀 듣지 못한 일인가요? 어제, 자작가의 연회에 계셨던 때…… 공작님께서 갑작스레 영지 순찰을 끝내고 황성으로 바로 직행하셨다고 해요.”
바로 어제라면 몰랐던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리네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뭔가 꾸미고 있다면 하루는 너무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언의 표정으로 알렉사에게 다음 이야기를 요청하자, 그녀는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이건…… 제가 노튼 황자님께 들은 이야기예요.”
“노튼 황자님께요?”
“네에…….”
선하고 사랑스러운 알렉사는 눈을 귀엽게 깜박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황자 전하와 나눈 대화가 아무래도 이래저래 조심스러워서, 리네트에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거든요.”
“그렇군요.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뇨! 사실 리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알렉사가 슬쩍 눈알을 굴리다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대신 루카스 황자님께는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무슨 이야기이기에 그런가요?”
“음, 리네트의…… 집안 이야기예요.”
리네트는 방글방글 웃는 표정으로 알렉사의 말을 재촉했다.
“황제 폐하의 시종장은 노튼 황자님께 신세 진 것이 있으셔서……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시거든요.”
시종장은 노튼에게 신세 진 게 있다. 시종장 또한 노튼의 간자라는 것이군. 그런 정보들을 리네트는 머릿속에 갈무리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알렉사가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카멜리아 공작님께 물으셨대요. 소공작이 ‘백안’을 계승한 것이 아니냐고…….”
소공작이라는 건 갈레안을 말하는 것이리라. 리네트는 웃겨서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고, 다음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소공작이 카멜리아의 능력을 계승한 것이 맞다면, 리네트 양은 황실에 보내 주어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대요. 그야 루카스 전하께서 열렬히 구혼하신 것에 비하면, 아직도 리네트 양은 루카스 전하께 답을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렇게…… 보이겠죠.”
“예. 저야 그간의 이야기들을 아니까 리네트 양이 마음을 돌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세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알렉사가 보기 드물게 분명하게 답했다.
그렇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열렬히 구애한 지 어느덧 삼 개월이 넘게 지났다. 그간 있었던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엄청났다.
리네트에게 그가 보낸 돈, 그리고 알렉사 레미시어에게 추태를 부린 데다 루카스 리시스트를 해하려 한 에드가의 체포.
그게 지방의 귀족 이야기라고 해도 꽤 재미있는 수다거리가 될 일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황자와 공작가의 아가씨, 그리고 둘째 황자의 약혼녀. 라인업이 화려해도 너무 화려했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은 퍽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황자가 삼 개월이나 구애했으면 이제 콧대를 높이는 것은 그만하고 황송하게 혼약을 받아들이라는 의견도 꽤 많았다.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리네트가 입을 닫고 있는 게 콧대를 높이는 걸로 보인다니.
어쨌든 언젠가 해야 할 약혼이라면 좀 늦게 하는 게 낫긴 했다. 알렉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황자의 약혼녀쯤 되면 이것저것 잡스럽게 묶이는 일이 많았다. 황성에서의 의전과 온갖 문안 인사, 구호 활동이며 사교 활동까지. 알렉사는 하루가 부족하도록 일만 했다. 보통 사람이 보면 기함할 일정이었다.
‘그런데 미쳤다고 약혼을 일찍 해?’
“그래서, 각하께서는 백안에 대해 뭐라셨대요?”
“그게…….”
알렉사는 리네트의 눈치를 봤다. 리네트는 눈치 보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옆에 서 있던 애플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상대가 알렉사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빨리 말해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대답해 드리기 어렵다고 하셨대요.”
리네트는 어이가 없어서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답하기 어렵다니, 황당한 노릇이었다. 리네트는 잠시 진정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리네트는 참 재미있어요.”
“제가요?”
“네에.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 매번 보이거든요. 지금은 뭔가 심각한 생각을 하는 거죠?”
“……네, 뭐.”
리네트가 애매한 표정을 짓자, 알렉사는 빙그레 웃었다.
“리네트는 맛있는 것을 먹거나 저와 이야기할 때는 즐거운 것 같다가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 대번에 눈빛이 확 바뀌거든요.”
“앗, 미안해요…….”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고 말하려는 걸까. 그러나 알렉사는 리네트의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리네트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정말 재미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알렉사는 일어나서 생긋 웃었다.
“어차피 타운 하우스 점검을 한 번쯤 하려고 했어요. 식사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으니 저는 타운 하우스의 집사를 만날게요. 리네트는 잠시 앉아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어요.”
“그래요. 여자들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알렉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애플을 바라보고 말했다.
“집사를 2층의 응접실로 불러와 주겠어?”
“앗, 예!”
옆에 서 있던 애플이 화들짝 놀라 뛰었다.
“그럼.”
알렉사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리네트는 사뿐사뿐 걷는 알렉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아가씨였다. ‘귀족’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리네트는 주저 없이 그녀를 꼽을 수 있었다.
칠 때와 빠질 때를 잘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온전히 진심을 다해 상대를 대한다.
‘그 노튼의 약혼녀라는 게 아까워 죽겠어.’
알렉사는 노튼에 대해 ‘냉정한 분’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도,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굳이 백안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사랑에 빠진 눈빛. 그녀는 노튼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네트는 노튼에 관해서도 약간 미지근한 평가를 내리게 됐다. 노튼을 직접 접해 본 일이 거의 없기에 그랬다.
루카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냉철한 혈통주의자라고 했다. 그렇지만 알렉사처럼 상냥한 아가씨가 저렇게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남자다.
‘정말 나쁘기만 한 사람일까?’
리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알렉사에게 들은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떠보는 질문에 그대로 넘어가 버리다니, 머리가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 없었다. 리네트는 이번 일을 통해 공작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절감했다.
공작은 이런 종류의 정치 술수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언제나 남의 거짓말을 분간할 수 있었으니까.
성인이 되는 순간 ‘백안’은 계승자의 손에 쥐여 언제나 원하는 대로 휘둘렸다. 어떤 음험한 자도 공작 앞에서는 진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능력을 거의 다 잃어버린 지금, 그는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가.
리네트는 자신이 성인이 되는 시기를 가늠했다. 보통은 생일 기준이지만, 문제는 리네트가 사생아라 자신의 생일을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제 생일을 알려 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었다.
‘공작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리네트는 이제 열여덟. 그녀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1년도 남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든 제게 능력이 완전히 쥐어지는 순간, 그녀는 승패의 열쇠를 쥘 것이다.
리네트는 눈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식은 찻물을 호쾌하게도 넘기고 나서 흐르는 찻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황제는 적어도 자신이 백안의 계승자라는 점은 눈치챘을 것이다.
황실은 카멜리아 공작가의 능력을 잃을까 두려워 오랜 기간 동안 온갖 권한과 영지를 쥐여 주었다.
하지만 카멜리아의 ‘백안’을 황실의 핏줄에 섞을 수만 있다면…….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루카스와 리네트를 결혼시킬 것이다.
언뜻 보면 황제가 제 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패착은 뒤에서 생긴다.
황제 또한 리네트에게 짝을 지어 주려는 점은 공작과 똑같다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둘 다 좋은 품종의 말에게 짝을 지어 준 후 새끼를 치려는 목축업자일 뿐이다.
그리고 목축업자보다 황제나 공작 쪽이 압도적으로 질이 안 좋다. 목축업자가 말에게서 새끼를 뽑는 건 길어야 몇 달이면 된다. 그러나 ‘백안’은 그 아이가 몇 년은 커야 능력을 계승했는지 가릴 수 있다.
‘황제가 나를 몇 년은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건 자명하고.’
길게 보면 황제도 결국 적이었다.
‘황태자비로 남아 어영부영 시간 보내다가 애를 낳고 매여 버리는 상황은 바라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리네트는 루카스를 꽤 나쁘지 않게 봤다. 목축업자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도, 좋은 품종의 말을 데리고 있으면 ‘새끼를 낳게 해 볼까?’ 하는 생각은 한 번쯤은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카스 리시스트는 정말로 자신을 묶어 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남자 보는 눈이 나쁘지 않다고 할까.
‘……그 얼굴만 아니면!’
리네트는 끙, 하고 신음했다. 어쩐지 요즘 자신이 루카스에게 좀 약해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동화 속에서 나온 왕자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판단력도 흐려지는 기분이다.
웃지 않는 포사에게 홀려서 온 나라의 비단을 찢었다는 유왕의 심정이 그럴까. 비단을 찢어야 비로소 웃어 주는 미인…….
“아니, 오히려 자주 웃어서 문제거든!”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두들기며 소리 질렀다.
그랬다. 루카스 리시스트는 너무 자주 웃었다. 바다처럼 푸른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리네트만 보면 세상에 시름이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키리에와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도, 리네트와 눈만 마주치면 그 눈이 저절로 휘어지고 단단하게 다물렸던 입술이 둥글게 굴려진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다.
치사해!
얼마나 치사한지, 그 얼굴만 보면 뭐라고 험하게 말하려다가도 조금은 망설이게 된다. 물론 잠시만 망설이고 험한 말은 여지없이 내뱉어 버린다는 것이 리네트의 대단한 점이지만.
리네트는 테이블을 몇 차례 더 두들겼다.
‘내가 얼빠라니, 내가 얼빠라니!’
그리고 그대로 머리를 숙여 테이블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짜증이 나서다.
“리네트. 나는 그대가 좋아. 무자비해져야 하는 순간 발휘하는 동정심마저도.”
루카스가 카멜리아 공작저에서 했던 말.
이는 아직도 리네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동정심 때문에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는 마.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거지만.”
루카스는 그 말을 할 때 유일하게 웃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볼 때면 웃고 있는 얼굴에 익숙해졌던 탓일까. 리네트는 그때 진심으로 당황했고, 그가 습격같이 던지는 말에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루카스의 어떤 말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정확히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한심하다, 리네트 카멜리아.”
리네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요즘은 뭘 생각하든 결국 루카스로 귀결됐다.
‘그 얼굴만 아니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까?’
뭐든 그런 얼굴로 생긴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한심한 건 모르겠고요, 식사하세요.”
그때, 리네트의 머리 위로 애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리네트는 고개를 들고 눈을 껌벅거렸다. 애플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리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몇 번이나 불러도 못 들으시는 거예요?”
“그랬어?”
“정원 입구에서 소리쳐 불렀는데도 혼자 중얼중얼하셔서 드디어 아가씨가 실성하셨나 하고 겁을 먹었답니다.”
“왜 겁을 먹어?”
“정확히는 공작가에서도 잘리듯이 나왔는데, 이제 누가 날 고용해 주나 하고 생각했죠.”
리네트가 나올 때 애플은 같이 나왔다. 공작가의 집사는 둘째 아가씨를 따라가겠다는 애플의 말에 눈썹만 하나 까딱하고 ‘계약을 해지해야겠군.’ 말했다고 한다.
그만두는 자의 다음 취직을 위해 으레 작성해 주는 공작가의 추천서는 당연히도 없었다.
그러니 애플의 말은 지당했고, 이 상황에서는 꽤 자학적인 농담이었다.
리네트는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동정심 많은 레미시어 아가씨께서 저를 고용해 달라고 빌어야겠다?”
“됐고, 앞장서.”
리네트가 일어서자 애플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늘 메뉴는 송어 구이래요!”
애플의 말에 리네트가 환호성을 질렀다. 밥 먹는 데 고민을 들고 가는 건 리네트의 취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정원에는 갈 곳 없는 고민만이 남겨졌다.
* * *
하지만 황제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황실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다행이었다. 레미시어 후작이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알렉사는 송어 구이를 먹으며 그 밖의 이야기도 이것저것 꺼내었다.
듣자 하니 카멜리아 공작은 황제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리네트가 레미시어 후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 모양이었다.
“어제저녁에 공작님께서 레미시어 후작가를 찾아오셨대요. 저는 바깥에 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셨다나 봐요.”
“그래서요?”
“아버지께서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셔서…….”
그러니까, 레미시어 후작도 황제가 ‘안 된다.’고 말한 문제에 용감히 나서서 리네트를 내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카멜리아 공작은 ‘자신이 그간 표면적으로 노튼 황자를 지지해 왔으니 같은 편끼리 이러지 말자.’고 슬슬 구슬리는 방법을 택해 본 듯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만약 리네트 양이 루카스 황자 전하와 약혼하면, 공작님 또한 루카스 전하의 편을 들 것 아니겠냐고 받아치신 모양이에요.”
어쨌든 상황은 리네트의 편이었다. 그에 리네트는 미묘한 기분이 됐다.
두 번이나 거절당했으니 카멜리아 공작도 당분간은 별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모두가 온전한 리네트의 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황제도, 레미시어 후작도…… 지금 제 앞에 있는 알렉사도 리네트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편은 아니었다.
‘그냥 막살고 싶었는데, 왜 이런 리얼리티 다큐를 찍고 있는 거냐고.’
리네트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송어 구이 한 점을 삼켰다. 그나마 식사는 맛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송어가 참 맛있네요. 이 타운 하우스의 요리사는 솜씨가 좋아요.”
알렉사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리네트의 말에 미소 지었다.
“그렇지요? 본래 황후 폐하의 주방에서 오랫동안 보조를 하던 사람인데…….”
밥은 맘 편하게 먹고 싶어 화제를 돌렸는데 여기서 또 황후 얘기가 나온다. 이러나저러나 편할 팔자는 아니었다.
* * *
리네트는 록시온의 연회 때 신세 진 마법사들을 만나기 위해 황성에 온 참이었다.
실은 진작에 만나서 감사 인사를 전했어야 하지만,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정말 바빴다. 그야 단둘이서 리시스트 황성의 마법적 보안을 책임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리네트는 가을이 한껏 깊어서야 그들과 간신히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마법사 중 한 명이 급히 마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전에 부랴부랴 시간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지젤도 정말 바쁜가 보네.’
마법사들의 생각을 하다 보니 지젤의 생각이 났다. 당분간 바쁘다는 말만 하고 사라진 그 뱁새는 언제쯤 돌아오려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리네트는 멈칫했다. 황성이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했던 것이다.
리시스트 황성은 크게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황제가 있는 본성, 황후와 황자들의 거주 구역이 있는 궁성, 그리고 황성에서 근무하는 이들과 황성을 방문한 귀족들이 머물고 있는 외성이다.
오늘의 리네트는 외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외성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드나들어 평소에도 어수선했다. 해서 말과 마차는 출입 금지인데, 오늘은 외성의 커다란 문 앞에 짐 마차 몇 개가 멈춰 서 있었다. 도개교가 꽉 막힐 정도다.
“왜 저래?”
“그러게요. 짐 마차는 이쪽으로 못 오게 되어 있지 않나요?”
로가나도 고개를 갸웃하더니 짐 마차 옆을 기웃거리다 도로 돌아왔다.
물론 리네트는 루카스가 발급해 준 은방울꽃 신분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곧 그녀는 문지기의 경례를 받으며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리네트는 곧장 들어가려다가 문지기에게 물었다.
“마차들이 대관절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예? 아…… 마법사 나리들을 위해 마탑에서 온 짐들인데, 본래는 이쪽이 아니라 짐 마차만 검사하는 문으로 드나들어야 합니다요.”
“그런데?”
“마법사 나리들이 평소보다 짐이 적다고 이쪽으로 부르셔서……. 그런데 이쪽 문은 마력석을 검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왜 그런 거야?”
“글쎄요. 저희가 마법사 나리들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성격이 퍽 급한 것이 마법을 다루는 분들의 공통점이라니까요.”
문지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런가. 리네트도 눈을 깜박이다가 외성 문 안으로 들어갔다. 로가나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마력석은 따로 검사해야 하는 거예요?”
“응. 마법사들이 쓰는 물건이다 보니까 무슨 장치가 되어 있을지 알 수 없거든. 거기에 작정하고 폭발 마법이라든가 남을 해칠 수 있는 마법을 숨겨 놓으면 어지간해서는 알아보기 어렵대.”
“그걸 알고 계신 분들이 왜 굳이 따로 마차를 빼려고 하셨을까요?”
“글쎄. 어차피 지금 만나러 가니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리네트는 볼을 긁으려다가 로가나에게 손등을 가볍게 저지당했다.
“그러다가 볼에 상처 나세요, 아가씨.”
“그래그래.”
“아가씨! 별것 아닌 듯 대하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아가씨의 신변을 걱정하는지…….”
“그래…….”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 하다 보니 마법사들이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
마탑은 리시스트 제국을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마법사들을 황성으로 파견하곤 했다. 그 인원은 많지 않다. 최대 다섯 명 내외다. 지금은 두 명이 황성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마탑에서는 두 마법사 모두의 귀환을 요청했다. 비밀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탑은 세간이 마법사들에게 보내는 편견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음험하거나 공포스러운 자들.
그래서 마탑은 제국과의 교섭에 있어서 항상 투명하게 처리했다.
한데 이번 요청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리시스트의 건국 이후로 단 한 번도 리시스트 황성을 비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탑에서는 대체할 마법사를 곧 보내겠다고 했으나, 황제는 두 사람 모두를 보내는 것은 거절하고 한 사람만 귀환시키기로 했다. 대체 마법사가 온 후에 나머지 한 명을 보내겠다는 것이 황제의 답변이었다.
‘지젤이 오면 좋겠다.’
리네트는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마법이라는 건 고도의 학문이었으며, 배움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황성의 보안 마법을 책임질 만큼 배우려면 중년은 되어야 한다. 실제로 리네트가 만날 두 마법사도 사오십 대는 되어 보이는 중년이었다.
“어서 오세요, 리네트 카멜리아 님.”
“안녕하세요, 고마타 님.”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의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리네트와 로가나를 맞았다.
로가나는 고마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고마타의 얼굴에는 안경이 걸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투명한 마법석을 가공한 물건.
눈이 나쁜 이들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물건이지만, 그 가격이 어마어마해 쓴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물론 리네트는 안경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고마타는 두 사람을 의자로 안내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응접실이 좀 어수선하지요?”
“아녜요. 좀 신기하기는 하지만.”
마법사의 응접실.
언뜻 들으면 음침해 보이는 곳을 상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황성에서 마법사들에게 내주는 방은 아주 환하고 아름다웠다. 한쪽에는 외성의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길고 큰 유리창이 자리하고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엄청나게 쌓여 있는 책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쌓인 마력석이 보였다.
“여염집의 응접실 같지는 않네요.”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하자 고마타가 환하게 웃었다.
“벨렘은 잠시 나갔어요. 사람을 불러 놓고 예의가 아니지만, 필요한 물건을 들여오는데 외성 문에서 문제가 좀 있어서…….”
또 다른 마법사의 이름이 벨렘이었다.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아는 척했다.
“어쩌다 보니 들어오면서 들었어요. 마력석을 들여오다 문제가 생겼다죠.”
“아, 그러고 보니 그쪽 문으로 리네트 님도 들어오셨겠군요.”
고마타가 민망해했다.
“평소에는 저희도 그러진 않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이해해요. 곧 한 분이 마탑으로 돌아가신다죠.”
그때, 시종 둘이 차와 간식을 내왔다.
일반인이 마법사에게 가지고 있는 공포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종들은 사뭇 두려운 눈으로 응접실을 훔쳐보다가 로가나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안심한 표정이 됐다.
그 표정의 뜻을 곧 리네트도 알게 됐다. 그들이 찻물을 따르지도 않고, 찻잔과 간식만 내려놓고 나간 것이다.
로가나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동작은 사뭇 우아했다. 살롱에서 정보원으로 일한 덕일 것이다.
따뜻한 물에 찻잎이 춤췄다. 로가나는 은수저로 찻잔을 두어 번 휘젓고, 수저가 매끄러운 것을 확인한 후 리네트와 고마타에게 잔을 건넸다. 그사이 고마타는 말을 고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두 사람 다입니다. 먼저 벨렘이 가고, 대체 마법사가 오면 저도 곧 돌아가죠.”
사실 오늘의 자리는 그리 친하지 않은 마법사 두 사람에게 리네트가 신세를 졌답시고 선물을 건네고 돌아가는 게 전부다. 그렇지만 예의상 차 한 잔은 마셔야 했고, 리네트는 자연스레 화제거리가 생긴 게 반가웠다.
그녀는 사뭇 궁금한 듯 화제를 언급했다.
“마탑에서 이렇게 마법사들을 소집하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나요?”
“음, 죄송해요. 그 이유는 저희가 발설하기 어렵습니다.”
고마타가 부드럽게 리네트의 질문을 물리치자 리네트는 멋쩍어졌다. 그러나 고마타 역시 리네트와 공통 화제가 많지는 않았기에 말을 이었다.
“오늘 들어오는 마력석은 본래 한 달 전에는 들어왔어야 하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사정상 공급이 늦어지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어머나, 그렇군요. 그러면…….”
리네트가 말을 이으려는 때였다. 콰당! 하고 문이 열렸다.
로가나가 ‘엄마야!’ 하고 작게 소리 지르며 반사적으로 리네트 쪽을 막아섰다. 그러나 곧 필요 없는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벨렘, 그러니까 외성 문에 나갔던 중년의 남자 마법사였던 것이다.
희끗희끗하게 센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가 ‘젠장! 황성 놈들 딱딱…….’ 하고 욕설을 내뱉다가, 리네트를 보곤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벨렘. 오랜만이에요.”
벨렘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리네트에게 인사한 후, 고마타 앞에 놓인 찻물을 한입에 삼켰다. 물론 찻물은 뜨거웠고, 벨렘은 괴성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으웁웁!”
“……로가나, 거기 얼음 좀.”
“예.”
로가나가 옆에 놓인 얼음을 통째로 벨렘에게 건넸다. 벨렘은 죽고 싶은 얼굴로 얼음 하나를 입에 넣은 뒤 와드득 씹어 먹었다.
고마타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을 띠고 벨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언젠가 벨렘이 저 성질 머리 때문에 인생도 말아먹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오늘 마력석 문제도 사실 저 급한 성질을 못 이겨서 그랬죠.”
“야! 너도 급한 건 마찬가지잖아!”
벨렘이 얼음을 삼키자마자 버럭 짜증을 냈다. 벨렘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리네트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최근에 마력석 공급이 늦어져 황성에서 진행하던 마법 실험도 진척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소환 명령이 떨어져서, 빠르게 결과를 내고 홀가분하게 마탑으로 가고 싶다 보니.”
리네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렘은 짜증 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어차피 황성에 들어오는 마력석은 저희밖에 쓰지 않고, 수도에 들어올 때부터 엄청난 양의 검사를 거칩니다. 그래서 외성 문으로 들어오는 건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비대장 입장에서는 아니었나 봅니다.”
“폐하께서 계신 곳이니까요.”
리네트가 답했다.
“예. 결과적으로 수상하다며 며칠 더 성문에서 정밀 검사를 행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내가 그 성질 머리 좀 고치라고 했지? 이게 뭐야. 결국 마탑에는 실험하다 말고 다 접고 가게 생겼잖아.”
고마타가 한숨을 쉬자 벨렘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을 줄 알았지! 우리가 황성에 있었던 게 몇 년인데!”
“그런 걸로 봐줄 것 같니? 며칠씩 잠도 못 자고 기른 나무들도 싹 베어 버리는 곳인데.”
고마타의 말뜻이 록시온의 정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리네트는 겸연쩍게 웃었다. 황후가 자르고 뽑아 버린 수국 나무들에 마력을 주어 기른 것이 고마타와 벨렘이었으니 말이다. 리네트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뭐, 덕분에 저희가 만났다고 생각해요. 고마타.”
“예…… 물론 카멜리아 아가씨께는 감사할 따름이랍니다. 록시온의 연회 이후 저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으니까요.”
중년의 여인이 싱글싱글 웃었다.
기실 마법사들이 황성에서 하는 일이라곤 기존의 보안 마법을 유지, 보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남들 보기엔 그들이 놀고먹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록시온의 연회에서 그들이 리네트에게 부린 깜찍한 마법 덕분일까. 그 뒤로 몇몇 아가씨들이 리네트에게 부린 마법을 자신들에게도 해 줄 수 있냐고 고마타 등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마법사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그들은 이 깜찍한 의뢰가 참으로 달가웠다.
“황성에 매인 몸이라 그 모든 의뢰를 받을 수는 없었지만, 마탑으로 그 의뢰를 넘기면서 제법 뿌듯했습니다. 마법사들의 이미지도 좀 바뀌었달까요. 아가씨께 감사드려요.”
“에이, 뭘요.”
“진짜입니다. 그 전에는 쓸데없는 독살 의뢰 같은 거나 들어왔다니까요.”
벨렘이 투덜거리자 리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예. 다들 마법사를 뭘로 생각하는 건지. 개구리로 만들어 쫓아보내겠다고 위협해도, 꼭 또 다른 멍청이들이 온다니까요.”
웃음이 터졌다. 리네트는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기에 로가나에게 신호했다.
로가나가 바깥으로 나갔다가, 시종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리네트가 가지고 온 선물들도 함께였다.
두 마법사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뭡니까?”
“작은 거지만 제 선물이에요.”
“무슨 선물까지……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 황후님이 짜증을 내셨다는 거 듣고 어찌나 통쾌하던지.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벨렘이 손을 내저으며 시종들이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고마타가 벨렘을 째려본 후, 시종들을 향해 입술에 엄지를 대고 그었다. 입 다물라는 소리다.
마법사들을 무서워하는 시종들은 괜히 움찔해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갔다.
리네트는 슬쩍, 로가나가 특별히 따로 들고 온 상자를 앞으로 밀어 주었다.
“사실 별 뜻 없이 들고 왔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아마 이건 필요하실 걸요?”
“무엇인가요? ……어머.”
선물을 받아 든 고마타는 상자를 열어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으로 다가와 상자를 기웃거린 벨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아가씨. 이걸 어떻게 가져오셨어요?”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은방울꽃 신분패 하나면 짐 검사도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던데요.”
리네트가 상자에 담아 온 것은 마력석이었다. 상자를 가득 메운, 연두색으로 빛나는 마력석 덩어리는 적어도 기차 두어 차량을 너끈히 제국 횡단시킬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받을 수는…….”
“맙소사, 아가씨. 감사합니다.”
고마타의 말을 가로막고 벨렘이 넙죽 인사했다. 고마타가 벨렘의 등을 때렸지만 벨렘은 꿈쩍하지 않았다.
“딱 이 정도의 마력석이 필요했거든요. 마탑으로는 제가 먼저 돌아가게 됐는데, 일주일 후에 떠나야 하니 실험이 촉박하던 참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벨렘!”
“시끄러워. 너도 필요하잖아?”
“하지만…….”
“아-”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가로막은 건 로가나였다. 로가나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작은 자갈만 한 마력석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것도 가지세요.”
“……로가나?”
이번에는 리네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가나는 눈을 피하다가 이윽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털어놨다.
“아까 황성에 들어오는 마차에 뭐가 실렸기에…… 아가씨가 궁금해하실까 봐…….”
“너…….”
리네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아까 마력석 마차에 기웃거리던 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황성에 들어가는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자칫하면 중죄가 될 수 있다. 이걸 혼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리네트를 가로막은 건 벨렘이었다.
“아이고! 고마워라! 이거 진짜 우리 마차에서 가져온 거야?”
“……네.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왜 죄송해요? 우리는 고맙지! 마력석이라는 건 조금이라도 많으면 좋으니까!”
성질 급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벨렘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로가나가 마력석을 훔친 상황이었는데 필사적으로 꼭 필요했다는 둥, 사실 자신도 훔쳐 오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못 훔쳤는데 아가씨는 아주 용감한 사람이라는 둥 대신 변명을 해 주었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리네트가 안 혼낼 테니 그만하시라고 할 정도였다.
한바탕 소동이 진정된 후에야 고마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이런 물건을 받는 건 규칙에 어긋납니다만…….”
“저도 신세를 진 참이니까 받아 두세요. 그런데 규칙에 어긋나나요?”
“예. 파견 마법사들은 밖에서 은원을 쌓으면 안 됩니다. 마법사들은 그 힘이 강대한 만큼 공정하게 세상을 판단해야 하거든요.”
리네트는 제게 온갖 물건을 가져다주며 자신을 통해 실험해 대던 지젤을 생각했다.
‘야, 너는 마탑에서 높은 사람 되려면 멀었다…….’
고마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험을 마탑에서 이어서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안 받겠다 말씀드리기도 어렵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리네트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마탑에서 마법사가 실험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마탑에서 마법사가 그것 말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리네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물었다.
“요즘 마탑의 상황이…… 뭔가 바쁜가요?”
벨렘과 고마타가 망설이다 시선을 마주쳤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벨렘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뭐, 이렇게 된 바에야. 저희 처지도 들켰고…… 아가씨가 입이 가벼운 분이라고 생각되진 않으니까요.”
리네트가 잠자코 기다리자, 벨렘이 말을 이었다.
“요즘 마력석의 출하량이 부쩍 줄었습니다. 정확히는 순도 높은 마력석을 캘 수가 없게 됐죠.”
리네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리네트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복도로 막 나선 참이었다. 로가나가 슬쩍 눈치를 보며 리네트의 뒤를 따랐다.
리네트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사람들이 없는 기둥 근처를 골라 멈춰 섰다. 로가나도 마찬가지다.
“로가나.”
“……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지?”
로가나의 눈이 대번에 그렁그렁해졌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잘못했어요. 저는 아가씨가 궁금해하실까 봐…….”
“로가나, 궁금한 건 그렇게 해결하는 게 아냐.”
“네. 제가 주제넘었어요. 아가씨가 모르시는 일이라는 건 없는데 제가 감히 아가씨의 혜안을 가늠하고…….”
‘모르는 건 남에게 물어보면 돼.’라고 하려는데 정작 로가나에게서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리네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해서다. 리네트는 가까스로 침착하게 다시 로가나를 타일렀다.
“로가나. 그게 아냐.”
“예?”
“황성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안 들켰으니 망정이지, 들켰으면 어쩔 뻔했니? 너도 나도 바로 경비대에게 끌려가서-”
“죄송해요!”
로가나는 빠르게 잘못을 빌었다.
“아가씨의 안전도 생각하지 못하고 제가 감히……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것도 아냐, 로가나…….”
리네트는 이마를 짚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둑질은 나쁜 거라는 기본적인 상식도, 리네트가 얽힌 일이라면 로가나의 머릿속에서는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위험해져서가 아니라…….”
그러나 리네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가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설마 저를 걱정해 주신 거예요? 아가씨, 저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정말이지…….”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실망하려나……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싶은 것을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가나,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네에, 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키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끌려가서 매를 맞아요…….”
고아로 떠돌던 시절 로가나는 도둑 길드 비슷한 곳에도 몸담은 적이 있다고 하니 이런 것은 자신보다 더 잘 알 것이다. 그래. 끌려가서 매를 맞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들키지 말아야죠.”
“로가나.”
리네트가 엄하게 표정을 굳히자 로가나는 눈치를 보다가 헤헤, 웃었다.
“농담이에요, 아가씨.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그래. 나량 약속하는 거야. 알았지?”
“……네!”
리네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로가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 손을 덥썩 잡았다. 아마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이 무슨 의미의 동작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나. 리네트는 피식 웃었다. 제게 맹목적인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서 도둑질을 한 것일 것이다. ‘아가씨가 궁금해하시니 알려 드려야지!’라며 슬쩍 주머니에 마력석을 집어넣다니.
“정말로 거기 위험한 장치가 있었으면 어쩔 뻔했니?”
리네트는 로가나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로가나는 꼬집히면서도 까르르 웃었다. 묶어 올린 로가나의 갈색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와중에 리네트는 로가나의 머리카락에 달린 초록색 리본이 흐트러진 것을 발견했다.
“아가씨! 제가 지켜 드릴게요!”
황성에 가기 전, 리네트는 로가나가 하는 말이 귀여워 로가나의 갈색 머리에 꼭 어울리는 초록색 리본을 선물했다. 로가나는 자랑스레 그 리본을 달고 등성한 참이었다.
“이건 마음에 드니?”
“그럼요! 아가씨가 사 주신 건데요! 어쩜 이렇게 제 마음에 쏙 드는 걸 골라 주셨어요?”
별 뜻은 없었는데.
“이리 와 봐.”
그렇게 리네트가 로가나의 리본을 다시 묶어 주고 있을 때였다.
“이게 누구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리네트는 로가나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누구긴 누구야. 아리땁고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네 사랑이지.”
“이런. 제가 할 말까지 대신해 주시다니 실로 감사하외다.”
호위 기사 두어 명을 대동한 루카스 리시스트였다.
지나가던 시녀 둘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다가 고개를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리네트는 루카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팔짱을 꼈다.
“뭔가 허전한데.”
“음. 키리에가 없으니까.”
키리에 레미시어는 계곡의 수비에 운 없이 차출되어 현재 리시스트 제국의 극서부, ‘계곡’에서 근무 중이었다.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한다는 계곡이고, 곧 돌아올 테지만 이럴 때 그가 없으니 어쩐지 허전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옆에서 ‘무슨 개소립니까.’ 하고 튀어나와야 하는데.”
“하하.”
루카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리네트도 물 흐르듯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리시스트 제국에서 가장 주목도가 높은 연인 한 쌍의 그림이 완성됐다.
리네트는 외성의 복도를 간간이 지나가는 시녀와 시종들을 의식하며 말을 건넸다.
“오늘따라 멋지시네요.”
그 말에 루카스가 환하게 웃으며 리네트를 내려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따라 유독 얼굴이 보기 좋았다.
‘뭐지.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저 얼굴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잖아.’
리네트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러나 루카스는 벙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그런가? 얼마전에 입었던 그대로 입고 나와서 상당히 가혹한 평가를 받을 줄 알았는데.”
“제국 가난해?”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어지간하면 입던 옷 입는 게 편하더라고. 여기가 레벤튼도 아니고.”
레벤튼은 루카스가 살던 지역으로, 북부에 가까운 데다 계절의 변화가 극심해 겨울이면 엄청난 털옷을 껴입어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리시스트는 가을과 겨울, 봄까지 기온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 기온 때문에 새 옷을 맞추거나 하는 일이 적었다.
“조금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일 많다며.”
리네트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황성에 온 김에 루카스도 같이 보고 가는 게 편했다. 사전에 약속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본래대로라면 리네트는 록시온의 정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곳에서 루카스를 기다렸을 것이다.
“미뤘지, 당연히.”
루카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도 돼?”
“널 만나러 오는데 일 따위가 손에 잡히겠어?”
그러니까…… 이건 주변의 시종들 들으라고 하는 서비스 멘트 아니겠어? 리네트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이지, 이 남자 얼굴은 심장에 별로 안 좋았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리네트는 입을 다물었다.
“황자님께서 사감으로 그렇게 일을 미루시면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어요?”
“글쎄요. 저는 당장 그대와의 미래가 더 급한걸요, 나의 아가씨.”
한술 더 떠서, 루카스는 근처에 고위 귀족 한 명이 지나가자 일부러 보란 듯이 리네트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리네트는 실룩이는 입술을 억누르려고 상당히 노력해야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퍽 알콩달콩한 애정 행각에, 호위 기사들이 황자의 옆에 붙어 있기 민망한 상황이 됐다.
게다가 눈치 빠른 로가나는 기사들에게 ‘이건 뭐냐, 저건 뭐냐.’ 같은 질문들을 쉴 새 없이 해 댔다.
덕분에 록시온의 정원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기사들을 한참 뒤에 떨어트리며 산책할 수 있었다. 기사들은 황자와 리네트가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으면 만족했다.
“키리에 경이 보면 당장 저 기사들의 목덜미를 끌어다 기합을 줄 것 같은데.”
키리에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키리에가 너무 딱딱한 거야. 사실 이게 보통이지.”
“그래?”
“황제 폐하조차 기사들이 두 발자국 안에 있으면 질색을 하시니까.”
그 리시스트 제국의 황제라고 하면 목숨 보전에 온 힘을 다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태평한 타입인가 보다…… 하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그 틈을 타 루카스가 리네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려고 하자, 그녀는 잽싸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루카스가 아쉬운 표정을 했다.
“아, 흐트러졌는데.”
“그런 거 신경 쓰는 사이 아니잖아요, 우린.”
“물론 그대가 제 앞에서 머리카락 한 올이 아니라 머리를 온통 산발을 하고 오신다 해도 저는-”
“그만해. 호위 기사들도 멀리 있는데.”
루카스는 코를 한 번 문지르고는 슬쩍 발걸음을 옮겨 옆의 분수에 앉았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 외에 주변은 조용했다.
“별일 없지?”
“그야 그렇지. 너는?”
“음. 네가 열심히 해 준 덕분에 제법 바쁜 나날이지.”
‘리시스트의 아침’으로 말미암아 루카스와 친한 척을 하게 된 귀족들은 제법 늘었다.
발레리 백작 가문을 위시한 서부 귀족들과 꽤 돈독한 사이가 됐다는 말에 리네트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 외에도 유수의 가문 수장들이 꽤 자주 루카스의 방에 드나든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이어졌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끝?”
“아냐. 할 말 있어.”
리네트의 진지한 얼굴에 루카스가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저의 구혼을 받아 주시나요?”
“장난 칠 기분 아냐.”
리네트가 손을 내저었다.
“마력석 출하가 줄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음?”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햇빛 아래에서 보는 그 얼굴이 또 그림 같아서 아주 잠깐 넋을 잃을 뻔했다.
‘정신 차려, 이 얼빠야.’
제 뺨을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리네트는 말을 이었다.
“고마타 경과 벨렘 경. 알지?”
황성의 보안을 책임지는 마법사들에게 황제는 항상 경의 칭호를 내렸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탑으로 귀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게 왜?”
“그게 보통 심상찮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리네트는 자신이 고마타와 벨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차분하게 늘어놓았다.
“두 사람의 말로는 마력석 출하가 줄은 것은 지난해 초부터라고 해. 한데 제국에 쌓아 놓은 마력석 양이 워낙 많아서 티가 안 났는지 분별없이 써 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력석 창고가 텅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루카스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게 마법사들의 소환과 무슨 관계가 있지?”
“지젤 알지?”
“응.”
배럴 남작의 저택에서 리네트와 탈출할 때 톡톡히 도움을 받은 차다. 리네트의 절친인 뱁새에 관해서는 루카스도 퍽 잘 알고 있었다.
“지젤도 올해 초부터 계속 바쁘다 바쁘다 하긴 했는데,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요즘, 소식이 두어 달째 없어.”
“…….”
“고마타의 말로는, 마법사들이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소집되고 있대.”
“비상사태라니?”
리네트가 팔짱을 끼었다.
“생각해 봐. 마력석이 가장 많이 출하되는 곳이 어디지? 귀라르델을 제외하고.”
루카스가 이마를 찡그렸다. 북쪽의 귀라르델 산맥을 제외하고…… 마력석이 가장 많이 출하되는 곳…….
곧 루카스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그래.”
리네트는 눈썹 한 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계곡’이야.”
노튼과 협정을 맺었던 ‘계곡의 마법사’가 사는 곳.
계곡이었다.
* * *
마력석은 거대한 마법이 행해졌던 곳에서 나는 마력 결정으로, 제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에너지원이다.
철도의 동력원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수도 리시스트의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에 박혀 있는 것도 마력석들이었다.
마력석은 천 년 전 귀라르델 산맥에서 죽은 설룡의 시체에서 가장 많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마력석이 많이 나는 곳이 ‘계곡’이다.
왜 ‘계곡’에서 마력석이 많이 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몇몇 역사학자들은 리시스트의 건국에 이바지한 이들이 ‘계곡’ 근처에서 결의했기에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만 추측하곤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계곡의 마법사’가 들어앉아 있어, 아무도 조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국 서부에 있는 ‘계곡’은 본래의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들 그곳을 ‘계곡’이라고만 불렀다.
‘계곡의 마법사’가 문헌에 언급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약 200여 년 전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계곡에 자리 잡고 소유권을 주장했다. 정확히는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막아 냈다.
그러나 엄연히 리시스트 제국의 땅이었다. 제국은 ‘계곡의 마법사’에 대해 선전 포고를 내리고 계곡 주변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러나 제국 기사단의 공격에 마법사는 날씨 변화로 응했다.
본디 따뜻한 온대 기후인 제국 중서부에 느닷없이 눈을 내려 버리거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폭우를 내려 버리는데 기사단에게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전전대 황제 대에, 그 유명한 기사 데미안 리아가 나선다. 데미안 리아는 항복의 표시인 흰 깃발 대신 흰 갑옷을 입고 홀로 마법사가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미안 리아가 계곡의 마법사에게서 가져온 답변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뭘 기다린단 말인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 대단한 일을 해 놓고서 정작 핵심을 모른다는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하나!”
이후 데미안 리아는 자신의 자서전에, 자신이 황제의 침실에 변을 봤을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분노였다고 당시의 대화와 더불어 기술했다.
어쨌든 데미안 리아는 계곡의 마법사로 하여금, 적어도 제국민들이 계곡의 반쪽 지역에서 마력석을 채취하는 것은 막지 않도록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 뒤로 계곡은 중요한 마력석 공급원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몇 년 전, 계곡의 마법사는 황실로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기다리던 것과 관련해 노튼 황자와 나눌 말이 있으니 그를 보내라고.
그 당시만 해도 루카스가 없던 때였고, 모든 이가 노튼이 계곡에 가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노튼은 기꺼이 계곡으로 가기를 자처했다.
그리고 계곡의 마법사는 노튼과 사흘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나머지 반쪽의 결계도 풀었다. 마력석 공급원이 졸지에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덧붙여 계곡의 마법사는 제국의 기사단에도 더 이상은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이후로 ‘계곡’ 근방의 요새에 주둔하는 기사단들은 사뭇 안정적으로 근무했다. 이제 ‘계곡’ 근무는 제국의 기사들에게 일종의 휴가 기간으로 여겨졌다.
본디 제국 기사라면 ‘계곡’에 1년은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으나, 최근에는 그 기간도 줄어 3개월이면 됐다. 키리에도 그래서 3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겨울에는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마법사들의 말에 의하면 ‘계곡’의 결계가 최근에 다시 펼쳐졌다고 해. 마력석을 캐러 들어갔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변한 날씨 때문에 다쳐서 돌아오는 일이 늘었다더군.”
“……이런.”
루카스가 신음했다.
“왜?”
“짚이는 게 있어. 키리에가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냈거든. 이런저런 소문이 쓰여 있었지.”
“뭔데?”
리네트의 질문에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에 계곡의 마법사가 다시 심술을 부린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지만 현지인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계곡 요새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인물은 곧 3개월의 부임 기간이 끝나서 답사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였지.”
흔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기간만 끝나면 뒷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만한 관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 후임자가 누군데?”
“누구겠어. 지금 거기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지위가 높고, 수도 기사단에서 근무중인 사람.”
“키리에 경이군.”
리네트는 픽 웃었다. 계곡에서 여기까지 편지가 도착하려면, 가장 빠른 마법 전령 새를 써도 통상적으로 일주일은 걸린다.
아마 키리에는 지금쯤 신임 기사단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융통성 없는 자는 기사단장이 되자마자 조사단을 파견했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군.”
“기차가 가장 문제지.”
“그래.”
리시스트의 무역은 이제 철도에 완전히 의존한다고 봐도 좋았다. 넓은 리시스트 전역을 달리는 철도는, 전대 황제가 가장 공을 들인 사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길을 넓히는 것은 지금 황제의 대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마력석이 부족하다면 당장 그 철도 사업부터 제동이 걸릴 것이다.
귀라르델 산맥에서 나는 석탄이 대체 연료로 존재하기는 했으나, 마력석의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았기에 석탄을 태워 이동하는 기차는 거의 없었다.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귀라르델 영지들의 영향력이 더 커지겠어.”
“그게, 그쪽도 문제가 좀 있나 봐.”
“……뭐라고?”
“단순히 계곡의 마력석만 출하가 줄었다면 마법사들이 소환까지 당했겠어?”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고마타와 벨렘이 ‘사실 황제 폐하도 대강은 알고 계신다.’며 털어놓은 사실이다. 귀라르델에서도 마력석 출하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대대적으로 제국 전역에서 마력석 생산량이 줄고 있어. 이게 진짜라면 마법사들도 당장 문제지. 그래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법사들을 모두 소환하고 있다나 봐.”
“이런. 귀라르델에 보낸 간자에게 소식을 융통해 봐야겠군.”
엄청난 일이었다. 리시스트 전역이 마비될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자못 심각해졌다. 하지만 당장 뾰족한 수는 없었다.
루카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알고 계신다면 뭔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겠지. 일단은 지켜볼 일이야. 당장 며칠 후에 기차 개통식이 있으니까.”
“……그렇지, 참.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폐하도 새삼스럽게 개통식을 여신다 했는데.”
일주일 후에는 동부의 광산 지역으로 향하는 새로운 기차 노선 개통식이 있었다. 사실 동부 광산 지역에는 워낙 많은 기차 노선이 있고, 그중에서도 그다지 중요한 노선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개통식에 황제까지 참여한다고 해서 담당 공무원들이 분주하게 굴고 있었다.
“……소식이 전해져도 별일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겠지.”
“그래. 초대받았지?”
“응. 오래 걸리는 일정이라 기억하고 있어.”
기차 개통식은 리시스트 기차역에서 새 노선까지 기차가 운행되는 것으로 진행된다. 역에 도착하면 황제는 그곳에서 새 노선 개통을 선포하고, 연회를 열 것이다.
개통식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모두 리시스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연회가 열리는 기차역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리네트 역시 초대받았고, 그렇잖아도 그녀는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참이다. 그곳에는 카멜리아 공작 부부도 참석하기 때문이다.
한데 리네트에게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머리가 아프네. 본래 귀라르델 쪽을 한번 공략하려고 했지?”
“그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북쪽의 영지에 간자를 보내 둔 이유는 간단했다. 자치권을 얻었지만 철도 개통에는 완강한 북쪽 영지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마력석 출하가 줄어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국 전역의 철도가 쓸모없어질 수도 있겠군.”
“제국 전역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야.”
마력석이 필요한 건 마법사들도 같은 처지다. 뛰어난 마법사들은 자연에서 얻은 힘을 바탕으로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자연에서 힘을 얻지 못하는 이들은 마력석을 이용해 마법을 부렸다.
하지만 마력석이 나지 않는다면 마탑도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니 마법사들을 불러 대책 회의까지 하는 것이겠지.
“어디서부터 짚어 나가야 하는 거지?”
“글쎄. 나의 아가씨, 이리 와 봐.”
“왜?”
루카스의 말에 리네트가 지레 물러섰다.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 같은 반응을 보며 루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린 다음 손을 뻗었다. 리네트가 흠칫했으나, 루카스의 손가락은 리네트의 이마에 머물렀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이마만 찡그리고 있으니 하는 소리야. 좀 펴.”
꾹꾹, 루카스가 이마 주름을 펴 내듯이 손가락을 문질렀다. 손가락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웃기만 해도 아까울 시간에 네가 계속 찌푸리고 있으니 내 마음이 별로잖아.”
“……그런 건 남들 앞에서 하라고.”
결국 리네트는 루카스의 손을 쳐 냈다. 이번에도 웃을 줄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루카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왜?”
“아냐. 아무튼…….”
루카스의 시선이 정원 저편에 닿았다. 슬슬 로가나의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는지 호위 기사들이 이쪽으로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로가나도 뒤에서 부지런히 따라오는 게, 머리 아픈 이야기는 슬슬 끝내야 할 듯싶었다.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다니, 기차 개통식부터 일단은 제대로 끝내자고.”
“개통식…….”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그 카멜리아 공작 부부를 만나야 한단 말이지.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리네트의 생각을 읽었는지 루카스가 속삭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지켜 준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이럴 때는 지켜 준다고 해야지.”
리네트가 쏘아붙이자 루카스는 그제야 픽 웃었다.
“아니, 제가 지켜 드리기에는 너무 대단한 분이셔서 감히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싶었지요. 원하신다면 기꺼이.”
“……말이나 할 줄 모르면.”
리네트는 투덜거리며 치마를 털어 내고 앞으로 걸었다. 록시온의 산책도 슬슬 끝낼 시간이었다.
루카스도 환하게 웃으며 리네트를 따라 한 걸음 뒤, 그녀의 왼쪽에서 걸었다. 아가씨를 지키는 기사의 위치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