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쓰레기 분리수거 (7/28)

6장 쓰레기 분리수거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흔한 마법 장난질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의 수국 꽃비가 퍽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단번에 큰 화젯거리가 됐다.

물론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리시스트의 아침’이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라고는 하나, 수십 년 동안 낸터킷 황후의 냉대 속에 방치된 정원을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었다.

여염집의 텃밭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모두 뽑아내야 하건만, 하물며 황성의 정원이다.

(중략)

그러나 루카스 황자의 선택은 꽤 그럴싸한 정치적 퍼포먼스로 보인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과 동시에, 리네트 카멜리아를 푸른 수국의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의 방증인 셈이다.

그러나…….]

찌르르, 뱁새가 울었다. 리네트는 뱁새에게 손을 펴 보였다. 자그마한 뱁새가 고개를 숙여 손안을 들여다봤다가 항의했다.

“내가 정말 뱁새인 줄 알아!?”

“……너 방금 찌르르 하고 울었잖아.”

“그렇다고 내가 쌀겨 따위를 먹을 줄 아냐고!”

지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네트 손안의 쌀겨 몇 개를 콕콕 집어삼켰다. 쌀겨를 삼키고 머리를 팍 쳐드는 몸짓에 리네트는 턱을 괴고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잘 먹네?”

“……아차, 나도 모르게!”

지젤이 파르르 떨었다. 지젤의 말에 의하면 이 뱁새는 지젤에게 가끔 몸을 빌려주는 새라고 한다. 지젤의 연구실 근처에 둥지를 튼 뱁새라는데, 마탑에서 자주 나올 수 없는 지젤은 이 뱁새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다만 가끔 지젤이 통제할 수 없는 새의 본능이 나타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덕분에 지렁이 맛, 흙 맛 같은 걸 알게 됐다던가…….

“그런데 그게 어떻게 방증이 되는 거야?”

“응?”

뱁새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네가 해 달라고 해서 꽃비는 내려 줬는데, 그게 왜 너를 황후로 만들겠다는 방증이 되는 거냐고.”

“그야-”

리네트가 뱁새의 부리에 작은 빵 조각을 대 주며 웃었다.

“상징적인 거지.”

“뭐가?”

“록시온은 황후의 것이고, 그걸 첫째 황자가 받았다는 건…… 사실 지금 시점에선 별 도움이 안 되거든.”

“설명해 줘.”

“넌 마탑에 어떻게 들어갔냐?”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리네트의 말에 뱁새가 삐리리릭 삑삑, 항의하듯 울었다.

“마법은 수학이거든! 머리 아픈 정치 싸움하고 같은 건 줄 알아?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는 아름다운 학문이라고!”

“예에, 예. 아무튼.”

지젤이 콕, 하고 부리로 리네트의 손바닥을 찍자, 리네트가 아야- 신음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황제 폐하가, 결혼한 루카스에게 록시온을 내렸다면 그건 개전 신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루카스를 황태자로 굳히겠다는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을 거야. 황자의 것은 황자비의 것이기도 한데, 황후가 대대로 썼던 궁을 황자비에게 주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황자비가 황후가 될 거란 소리지?”

“그렇지.”

뱁새는 고개를 갸웃했다. 짧고 동그란 머리가 갸웃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더 귀여워, 리네트는 뱁새를 손바닥 안에 가두고 마구 흔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귀여운 것은 그런 것이었다.

“결혼 안 한 황자님한테 주는 건 달라?”

“조금 달라. 이건 미묘한 관례 때문이기도 한데, 황자가 제위에 오르면 직계 황족들은 모두 궁에서 나가야 하거든? 그때 록시온처럼 움직일 수 없는 재산을 취득했을 경우엔 모두 반납해야 해.”

“그렇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록시온은 루카스의 것이지만, 황제 폐하께서 루카스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기 위한 첫 발걸음이라고 보긴 어려운 거야. 어차피 노튼이 황제가 되면 반납해야 하니까.”

“치사해!”

뱁새가 지저귀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그러다 흠칫했다.

“앗, 그러면 수국이 네가 말할 때만 피어나게 만든 건…….”

“그래.”

리네트가 뱁새 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반드시 리네트 카멜리아가 갖게 만들겠다, 혹은 나를 푸른 수국의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세련되고도 간접적인 화법인 거지.”

“어려워…….”

지젤이 투덜거렸다.

“다들 뭐 그렇게 어렵게 말해? 그냥 딱 말하면 되잖아. 첫째를 황태자로 만들겠다! 둘째를 황태자로 만들겠다!”

“나도 어려워.”

“간접 화법 너무 싫어. 우리 탑 노인들도 그런다고. 나한테 맨날 ‘지즈야, 물 먹고 싶지 않니?’ 이런 소리를 해. 자기가 물 먹고 싶으면서…….”

지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리네트는 생각에 잠겼다.

그날 연회가 끝나고 그곳에 참석한 귀부인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꽃다발을 선물로 받았다. 황성의 화훼부 시녀들이 꽃다발을 만들어 귀갓길의 선물로 실어 보낸 것이다.

리네트의 전략이었다.

그녀들이 그 꽃들을 어찌할는지는 모르지만, 돌아가는 길 마차에는 어김없이 그 꽃들이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꽃을 보며 리네트 카멜리아에 관해 떠올리겠지.

물론 리네트에게도 엄청난 꽃들이 주어졌다. 리네트의 방 안에는 커다란 유리 수반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둥둥 뜬 수국 꽃송이들은 참 예뻤다. 마법으로 살려 놨으니 열흘은 갈 거라고 지젤이 장담했다.

“너는 푸른 수국의 주인공이 될 생각은 있고?”

지젤이 물었다.

“응?”

“그렇잖아. 차라리 다른 거라면 모르겠는데…….”

뱁새가 말을 흐렸다. 리네트는 지젤이 하려는 말을 금세 알아차렸다.

어쨌든 지젤은 리네트의 친구였고, 그녀를 항상 걱정했다. 지젤이 리네트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하지만 지금 리네트가 하고 있는 것…… 소문 부풀리기 같은 것이 그녀에게 좋은 일일까? 지젤은 의구심을 가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리네트는 아직도 그녀를 옥죄는 공작가를 벗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주목만 받을 뿐이지, 너한테 도움이 되는 건 아직 하나도 없잖아.”

“음, 그렇지.”

리네트는 눈알을 굴렸다. 지젤의 지적도 맞다. 하지만…….

“어쨌든 내게도 생각은 있으니까, 기다려 줄래?”

“그래, 뭐.”

뱁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네가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다면 다행이니까.”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다 하실까?”

리네트가 뱁새의 부리를 가볍게 튕겼다. 뱁새가 한 발 물러났다가 쫑쫑 다가섰다.

“나 당분간 못 나와.”

“왜!”

“요새 탑 늙은이들이 이상하게 분주해서…….”

뱁새 흉내를 내고 있으나 지젤은 마탑 소속 마법사였다. 더군다나 머리가 좋아 마탑에서도 제법 중요한 일들을 해내고 있는.

탑의 높은 사람들이 바쁘면 대신 도맡아 일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이런, 너한테 이것저것 더 부탁하려고 했는데.”

“뭔데?”

“아냐. 네게 너무 의지하는 것도 안 좋을 것 같고.”

리네트는 뱁새에게 능청스럽게 윙크했다. 뱁새가 흠칫했다.

“너 방금 뭐 했냐.”

“……뭐! 왜!”

리네트의 얼굴이 발개졌다.

“오글거려…….”

뱁새는 파르르 떨었다.

“그 황자한테 이상한 윙크나 옮아 가지고…….”

“아니거든!”

“아무튼 나 없는 동안 사고 치지 말고.”

“야, 내가 없을 때 너나 치지 마.”

파르륵, 뱁새가 날아올랐다. 리네트는 뱁새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툴툴댔다.

어쨌든 친구는 친구였다.

‘이런 식으로 걱정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리네트는 픽 웃으며 제 방의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그곳엔 신문과 수첩이 함께 놓여 있었다.

제 소문이 담긴 신문은 리네트의 작품이었다. 고위 귀족들에게뿐만 아니라 전역에 제 소문을 뿌리기 위해 리네트는 ‘리시스트의 아침’의 여러 면에 걸쳐 제 이야기를 다뤘다.

덧붙여 알렉사의 이름도 조금 빌렸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알렉사 레미시어 아가씨가 본 리네트 카멜리아의 평소 모습, 같은 이야기다.

소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로가나는 ‘모든 살롱이 아가씨와 루카스 황자님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고 고했다. 애플은 ‘하녀들이 요즘 저한테 자꾸 아가씨에 대해 물어봐요!’라고 웃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리네트는 지금 얻은 화제성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물론 그런 것은 의외로 금방 해결됐다.

* * *

루카스가 록시온에 부른 것은 대부분 나이가 있는 고위 귀족들이나 그 따님들 정도였다. 중류 귀족가의 아가씨들은 대부분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데뷔탕트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리네트는 여전히 또래 아가씨들에게는 미지의 존재였다.

그리하여…….

“리네트 양, 혹시 저희 집에 놀러 오지 않을래요?”

“레미시어 후작가예요?”

“네!”

카멜리아 공작가의 정원에서 찻잔을 든 알렉사가 환하게 웃었다. 마주 앉은 리네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알렉사는 데뷔탕트 이후에도 계속해서 카멜리아 공작가를 드나들었다. 당연했다. 잠깐 알렉사에게 배웠다고 해서 리네트가 완벽한 귀족 아가씨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야 상관없죠. 언제 갈까요? 저는 내일도 괜찮은데. 둘이 보는 건가요?”

“으응, 아니에요.”

알렉사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사실 데뷔탕트에 가지 못한 저의 친우들이 리네트를 정말 많이 만나 보고 싶어 하거든요!”

“……아.”

리네트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단 말이지.

연회 이후, 리네트에겐 각 가문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데뷔탕트 이전에야 이멜다를 동반하지 않으면 외부에 나가기 어려웠지만, 이제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그녀 또한 다른 가문의 초대에 정식으로 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대장이 카멜리아 공작가로 도착하는 족족, 이멜다가 그 초대장을 낚아채 버렸다는 것이다.

이멜다는 록시온의 연회 날부터 지금까지 리네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 * *

록시온의 연회 날 아침부터가 리네트에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하녀들에 의해 씻겼다. 잠도 거의 못 잤는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야 했고, 머리가 마르는 동안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였다.

연회에서 가장 높은 여인인 낸터킷 황후는 붉은 드레스를 입는다고 했기에, 리네트가 고른 것은 푸른 드레스였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공단 리본으로 장식되어 리네트의 머리카락과도 잘 어울렸다.

머리카락을 말고, 그 사이사이에 진주를 장식하고. 그러고 나니 기진맥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그랬을지도.

그러나 웃을 기운은 있었던 모양이다. 공작저를 나가기 직전 이멜다를 마주한 리네트는 픽 웃고 말았다. 이멜다의 드레스 또한 푸른색이었기 때문이다. 리네트의 것과는 조금 다른 짙은 파란색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멜다의 표정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갈아입고 오너라.”

“제가 왜요?”

리네트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에 이멜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레미시어 가문의 고명딸이 네게 예의를 가르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어딜 가나 높은 사람에게 낮은 사람이 맞추어야 하는 법이다. 네가 갈아입고 나와.”

“아, 그렇군요.”

리네트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 입술을 연한 핑크빛으로 칠해 놓은 하녀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봤다.

“그럼 더더욱 어머니가 갈아입으셔야겠네요.”

“뭐야? 네가 지금 황자비라도 된 듯-”

그 뒤를 이을 만한 말이라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게 정말로 나를 네 아랫사람으로 깔보고-’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리네트는 손가락을 세우고 흔들었다.

“제가 그런 생각으로 말씀드렸다면 어머니는 정말 신나게 남들에게 제 험담을 하실 수 있으셨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아니고요.”

“이-”

“제가 오늘 입은 옷은 황자님과 맞춘 옷입니다, 어머니.”

그랬다. 리네트가 이날 입은 건 루카스와 색을 맞춘 옷이었다. 루카스는 재단사 팔스에게 리네트뿐만 아니라 제 옷도 맡겼다.

그러니 리네트의 말인즉슨, 황자와 맞춘 옷이니 네 말대로라면 황자보다 지위가 낮은 공작 부인께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뜻이었다.

시커멓게 죽어 있던 이멜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빡이 쳐서다.

‘우리 아가씨는 무덤 지기가 되면 큰돈을 버실 텐데.’

‘무슨 소리야?’

‘저 세 치 혀로 죽은 사람들도 관 뚜껑을 따고 일어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리네트의 등 뒤에서 애플을 위시한 하녀들이 키득거렸다.

리네트는 이멜다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됐지만, 의외로 그녀는 두말않고 몸을 돌렸다. 다시 이멜다가 나오는 데에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본래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런 일까지 있었으니 감정이 좋을 리 없다. 이멜다는 연회장에 도착해서도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아무 질문도 받고 싶지 않아 하는 서슬퍼런 기세. 이멜다에게 리네트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 하던 귀부인들도 눈치를 보며 슬슬 주변만 맴돌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루카스가 나타나니 다 무용지물이었다. 루카스는 리네트와 약속이라도 한 듯 이멜다를 보고도 그녀를 무시했으며, 리네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리네트의 소개를 해야 할 것은 당연히 이멜다였으나, 이멜다는 그 때문에 리네트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저 사생아의 뒤를 따라가다니! 이멜다에게는 너무나 큰 치욕이었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뒤늦게나마 ‘제가 사랑에 눈이 멀어 공작 부인께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라고 능청을 떨지 않았다면 이멜다가 크게 지적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것도 예상했다는 듯이, 이멜다가 막 뭐라고 하려는 찰나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굽혀 사과했다.

그러니 이멜다로서는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도, 스포트라이트도 모두 리네트에게 빼앗겼다.

옆에 공작만 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을! 그러나 카멜리아 공작은 영지 순회를 한다는 핑계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없는 공작을 찾아봐야 별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멜다는 흥미 넘치는 귀족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따님은 언제 전하를 만나셨다나요?’, ‘저렇게 어여쁜 아가씨를 어째서 지금에야 보여 주시는 것인가요?’ 등등.

리네트처럼 체면 불구하고 남을 깔아뭉갤 만한 배짱은 없고, 사회적 지위는 있다는 것이 이멜다의 비극이었다.

그놈의 공작 부인이 뭔지! 이멜다는 화사하게 웃으며 ‘딸아이가 몸이 약해…….’와 ‘글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를 반복해야만 했다.

덧붙여 리네트가 말할 때마다 꽃이 떨어지는 대목에선 기가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멜다 자신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최악이었다. 저 사생아가 주목받는 것부터, 제가 그만 모두에게 잊혀져 버린 것까지.

주변에 있는 이들은 모두 리네트를 불러 보고 싶어 했다. 여태껏 공작저에서 죽은 듯 살았던 사생아가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는 이유를 이멜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쇄도하는 귀족들의 초대장을 이멜다가 모두 낚아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멜다는 집사를 불러 어느 정도 지위 이상의 가문에는 거절 답신을 쓰게 하고, 그 이하의 초대장은 답장도 하지 말라 명했다.

딸의 초대장을 어머니가 관리하는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거절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사소하게나마 이멜다가 리네트에게 복수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초대장으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 * *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화제 속 인물을 다들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그다음으로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알렉사였다. 낸터킷 황후의 분부로 알렉사가 카멜리아 공작저에 드나들게 된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초대장이 거절당한다면 인편에 초대하면 된다. 간단했다. 게다가 젊은 아가씨들은 더더욱 적극적이었다.

록시온의 연회에는 고위급들만 초대를 받았기에, 그녀를 만나지 못한 여인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연회에서 리네트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눈 여인들은 더더욱 리네트를 궁금해했다.

“제 친구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리네트의 칭찬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타이밍이 이렇게 되었지만…….”

알렉사가 수줍은 듯 웃었다.

“연회 이전부터 모두들 리네트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괜찮다면 제가 여는 티타임에 잠시 놀러 오지 않겠어요? 부담스럽다면 잠깐만 있다가 가도 돼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리네트의 말에 알렉사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리네트는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사가 쾌재를 불렀다.

“좋아요! 빠르게 시일을 정해 리네트를 초대할게요!”

“하지만 괜찮겠어요? 알렉사도 알다시피 저는 예의범절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를 할 수도 있는데…….”

“리네트.”

알렉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예요.”

“…….”

“설사 당신이 실수를 한들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도 당신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을 거예요. 그야 몇몇 아가씨들은 몰래 험담을 할 수도 있겠죠.”

의왼데. 이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하도 선한 것으로만 빚어 놓은 아가씨라서 ‘아무도 그러지 않을 거예요.’ 같은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알렉사가 옅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저는 말을 옮기는 아가씨들은 제 친구로 두지 않아요.”

이게 바로 귀족인가. 리네트는 약간 감탄했다. 과연 그 노튼의 약혼자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상냥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람은 확실히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알렉사는 멋진 사람이네요.”

“……네?”

알렉사가 눈을 깜박였다.

리네트는 두 손을 모으고 살짝 기대감을 얼굴에 띠었다. 이런 건 속으로 생각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직접 입 밖으로 내야 했다. 칭찬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할수록 좋은 것. 아끼지 않아야 할 것.

“저는 솔직히 알렉사가 단순히 마음 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제가요?”

“알렉사가 제게 한 이야기를 생각해 봐요.”

리네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좋아요, 잘했어요! 리네트는 천재군요! 대단해요!’ 같은 칭찬만 항상 제게 하니까요.”

“……제가 그랬나요?”

“항상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딱 두 가지 부류죠. 위선자거나, 바보거나.”

예상외의 날카로운 말에 알렉사가 입을 딱 벌렸다.

리네트는 이쯤 해서 자신을 약간은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 위선을 떨다가 들키는 것보다 나쁜 건 없었다.

좋은 여인인 척, 선한 척, 순진한 척할 순 있겠지. 그러나 평생의 비밀이라는 건 없다. 언젠가 리네트는 더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때 알렉사가 리네트의 독을 접한다면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차라리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터. 리네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렉사는 위선자도, 바보도 아니었군요. 현명하고 선한 사람일 뿐.”

알렉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인가요……?”

“그럼요.”

리네트는 두 손을 펴 보였다.

“제게 정말 좋은 생각을 했으니까 좋은 말을 해 주신 거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겠어요.”

그 말에 알렉사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으나, 리네트는 하던 말을 마저 덧붙였다.

“저는 지금 알렉사의 말을 듣고 당신이 조금 더 좋아졌어요.”

“앗…….”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싫은가요, 알렉사?”

이제 알렉사의 얼굴색은 홍당무라고 불러도 될 만큼이었다.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걸까? 상관없다.

“사람들은 저와 알렉사가 사이가 나쁘길 바라요. 그야 노튼 황자님과 루카스 전하의 사이가 남들 보기에 그러니까, 다들 여자들도 사이가 나쁠 거라고 생각하죠.”

“……솔직히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알렉사는 정말 멋진 사람인걸요.”

리네트는 테이블에 팔을 올린 후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알렉사 쪽으로 몸을 기울여 은근히 속삭였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잖아요. 여자들은 서로 질투나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선입견보다 훨씬 섬세하고 똑똑하며 사랑스러운 사람들 아닌가요?”

“그렇죠…….”

“그리고 서로 투기하고 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요.”

리네트의 미소를 마주 본 알렉사가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싸움이나 질투는 황자님들끼리 하라고 해요. 우리는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아요.”

리네트의 말에 알렉사는 멈칫했으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알렉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네!’ 하고 답했다.

멋진 오후였다.

* * *

“그런데, 알렉사는 그날 왜 오지 않았나요?”

차를 다 마셨을 때쯤 리네트가 물었다.

연회에서 노튼을 봤을 때 리네트는 맨 처음 그 살벌한 아름다움에 놀랐고, 그다음에는 그가 알렉사와 함께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생각해 보면 알렉사는 리네트의 데뷔탕트가 기대된다고는 했지만, 자신이 그곳에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런 자리에 서로를 대동하지 않는다고?

리네트는 레미시어 후작까지도 만난 참이었다. 레미시어 후작은 리네트를 향해 가벼운 인사를 건넸고, 리네트도 그에 응했다. 알렉사는 레미시어 후작과 함께 왔어도 됐을 것이다.

“아.”

알렉사의 안색이 약간 흐려졌다. 리네트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알렉사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이런 말 뭐 하지만…… 사람들은 비교를 좋아하니까요.”

“……아.”

방금 리네트가 알렉사에게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 황자를 두고 꽤나 비교하곤 했다. 하물며 그들의 약혼녀, 혹은 약혼녀 후보임에야.

알렉사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든 없든 리네트와 사사건건 비교당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누가 봐도 알렉사는 아름답다. 그녀는 자신에게 누군가 예쁘다고 칭찬하면 겸양을 표시하고는 했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네트에게 ‘제 얼굴이 예쁘다고 당신이 무시받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망설여졌다. 분명한 사실이라고 해도, 리네트가 충분히 기분 나빠 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그래서 알렉사는 조금 돌려 말했다.

“제가 그 자리에 없어도 사람들은 리네트와 저를 비교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있다면 아주 많이 비교하겠죠.”

“…….”

“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피상적으로 말할 거예요. 제가 조금 더 낫다, 혹은 리네트가 훨씬 대단하다.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비교는 형태를 갖추어요.”

리네트 또한 알렉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한 사람만 자리에 있다면 사람들의 비교는 범박해질 것이다.

누가 더 예쁘다, 누가 더 아름답다, 혹은 누군가 더 현숙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자리에 있다면 비교는 쓸데없이 자세하고 잔인해진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비교하며, 둘 중 하나를 헐뜯을 것이다.

알렉사는 정말이지 리네트의 데뷔탕트 날을 그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아가씨였고, 리네트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전 그날이 리네트의 날이었으면 했어요.”

리네트는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그러나 알렉사는 리네트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창피해졌다. 그녀는 리네트를 배려한 척했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노튼 때문이다.

낸터킷은 알렉사가 그 자리에 오기를 바랐으나, 노튼은 달랐다. 알렉사가 조심스럽게 ‘저는 록시온에 가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노튼은 담담하게 그 제의를 반겼다.

“그래. 모든 것이 너의 우위라고 해도, 사람들은 너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며 그녀와 비교하겠지.”

표면적으로는 알렉사의 이유와 같았으나 그 진의는 사뭇 달랐다.

노튼은 그 자리에서 알렉사가 칭송받고, 주목받고, 나아가 자신보다 더 시선 끌기를 원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언제나 노튼의 그림자 안에 있어야 했으므로.

알렉사는 노튼의 애정은 그 스스로에게만 할애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록시온의 연회에서 리네트가 꽃을 피워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리네트를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아름답다는 광경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황후가 정원을 밀어 버렸다는 것을 들었기에, 그래서 더 리네트가 벌인 일이 약간은 신기하고 속 시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노튼은 리네트를 정말로 싫어하게 되었으리라.

알렉사는 아주 어릴 적부터 노튼을 보아 왔다. 노튼은 루카스의 실종 이후 유일무이한 리시스트의 후계자로 자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루카스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노튼은 언제나 그의 그림자에 시달려야만 했다. 분명 혼자인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노튼은 다른 이들의 관심이 제게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 비뚤어진 마음은 알렉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튼 황자님은 어떤 분인가요?”

그래서 알렉사는 리네트가 그렇게 질문했을 때 흠칫했다. 리네트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알렉사의 초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으나, 리네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다정하신 분이세요.”

“그렇군요.”

리네트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언제나 환하게 웃던 알렉사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 저는 언제쯤 레미시어 후작저에 놀러 갈 수 있을까요?”

“그야 언제든지요! 물론 아가씨들을 부르고 준비를 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 놀러 오시는 건 언제든 괜찮아요.”

금세 알렉사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그러나 리네트는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거기 안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어서 안 될걸요?”

“예? 누가요?”

“항상 딱딱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우고 ‘안 됩니다!’라고 하는 분이 거기 계시거든요.”

알렉사는 대번에 리네트가 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키리에 레미시어.

알렉사는 킥, 하고 웃어 버렸다.

“어머나…… 오라버니가 리네트에게도 그러세요?”

“그러믄요.”

“세상에. 저희 아버지와 황자 전하께만 그러시는 줄 알았어요.”

“제게도 그런답니다.”

“정말요? 어지간하면 여자분들께는 안 그러시는데…….”

“제가 여자로 안 보이나 보죠.”

리네트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알렉사가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물어도 될까요?”

“뭔가요?”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루카스 전하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턱, 뭐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아, 그렇지. 이게 있었군.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푸르르 흔들 뻔했다. 여태껏 까먹고 있었던 것을 알렉사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록시온에서는 아무도 리네트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나마 황자가 록시온을 받은 기념으로 연 연회였고, 리네트의 데뷔탕트는 부가적인 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아직 공식적인 사이가 아니다. 루카스가 온 동네에 요란뻑적지근하게 구혼을 하고 있다고 소문내고는 있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함부로 록시온에서 리네트나 루카스에게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연인도 아닌 사이에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어린 아가씨들이나 좋아할 법한 일이라며 몇몇 귀부인들은 아예 모른 척했다. 그러니 리네트가 숨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티타임이나 작은 파티 같은 곳에서는 꽤 많이 받을지도 모를 질문이었다. 더더욱 알렉사 또래의 아가씨들에게는.

뭐라고 이야기를 하지? 대강의 시나리오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맞추지는 않았다. 그래서 리네트는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다음에 해 드릴게요. 아직까지는 밖에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요. 무엇보다…….”

“아, 그렇죠. 아직 리네트와 전하 사이에는…….”

“네. 게다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고.”

리네트가 싸늘하게 웃었다.

“해결되지 않은 거요?”

알렉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도 다음에. 말해 두지만 알렉사를 못 믿어서는 아녜요.”

“어머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걸요.”

알렉사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면 오늘도 가볍게 운동해 볼까요?”

“……오늘도요?”

리네트의 눈이 흐려졌다. 알렉사는 눈이 부신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춤이라는 건 매일 연습해야 하는 거니까요!”

어째 오늘은 빼먹는다 했다……. 리네트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수다나 떨고 끝나나 했더니 아니구나.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저도 갈아입어야 하니까, 같이 갈까요?”

리네트가 비척거리며 일어섰고, 알렉사가 따라붙었다. 어쨌든 두 아가씨의 모습은 예전보다 사뭇 더 친밀해 보였다.

* * *

‘비 오듯 쏟아지는 수국 사이의 공작가 아가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수도 리시스트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발란가의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에드가 발란은 영 심기가 불편했다. 정확히는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리시스트 제국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득권 위주로 귀족 사회가 흘러갔다. 작금의 황자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는 것은 지극히 특이 케이스다.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는 둘째는 대부분 기사가 되거나, 혹은 사업을 벌였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가 발란은 그중 어떤 것에도 재능이 없었다. 정확히는 재능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게을렀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가문의 혈통을 통해 물려받은 것은 빼어난 외모였으나, 그조차도 성인이 된 후 주색잡기에 빠져 살며 모두 날려 먹었다.

그나마 괜찮은 귀족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술과 도박, 여색에 빠져 산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를 데려갈 가문은 없었다. 간혹 공작 부인인 이멜다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곧 됨됨이를 보고 모두 떠나갔다.

한마디로 되는 게 없는 인생이었다. 카멜리아 공작이 자신을 불렀을 때만 해도 희망을 가졌건만, 그것조차도 갑자기 튀어나온 황자가 가로채 갔다.

‘젠장!’

에드가 발란은 리네트 카멜리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멜다의 이야기 속에서 리네트 카멜리아는 항상 보잘것없는 여자애였다.

볼품도 없고, 성질은 고약한 데다가, 제멋대로인 계집애.

‘그런 계집애가 나를 이렇게 모욕해……?’

리네트가 들으면 기가 막혀 할 생각이었지만, 에드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구제해 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더니, 건방지게도 그것을 뿌리치는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닌다.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었다. 오늘 이멜다는 에드가를 불러 타일렀다. 황자가 리네트에게 흥미를 잃도록 소문을 퍼트리라는 것이다.

“어차피 남자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손댄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지. 물론 그 애는 성격이 독하니 섣불리 손댈 생각은 마렴. 하지만 소문을 퍼트리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을 거야. 내가 그 신문인지 뭔지를 펴내는 곳을 찾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렴.”

‘리시스트의 아침’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니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용감무쌍한 계획이었다.

막 이멜다의 방을 나온 에드가는 화가 끓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그깟 계집애 하나 어쩌지 못해 소문 따위나 퍼트려야 하다니!

그 와중에 리네트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하녀를 찾았으나, 애플이라는 계집 또한 제 주인을 닮아 약삭빨랐다. 잠시만 기다리시라던 하녀는 에드가를 두 시간은 넘게 기다리게 했다.

응접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못해 술을 두 병이나 비운 후에야 에드가는 애플의 수작을 알아챘다. 자신을 일부러 버려 둔 것이었다.

‘에이미 계집애는 어디 갔지?’

그래서 에드가는 화풀이를 하기로 했다. 공작가에서 이미 자신이 몇 번 손을 댄 하녀를 찾기 위해 그는 테라스에서 빠르게 공작가의 정원을 훑어봤다. 주색잡기가 취미인 자에게 달리 화풀이법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뭔가가 눈에 띄었다. 에이미는 아니었다.

그녀가 에드가의 눈에 띈 이유는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정원 건너편, 슈미즈 가운이라고 봐도 될 만큼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은 타는 듯한 붉은색이었다.

에드가는 그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수심이 깃든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는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가 조금만 성실하게 황성에 드나들거나, 귀족들과의 교류를 즐겨 했다면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 * *

알렉사는 리네트와 짧게 춤 교습을 끝낸 후, 제 하녀가 드레스를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리네트와의 교습은 언제나 두 시간 정도였으나, 알렉사는 오늘 교습을 일찍 끝냈다. 두 시간쯤 걸릴 줄 알고 응접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던 하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으나, 알렉사는 신경 쓰지 말라 말했다.

“천천히 다녀오렴. 서두르지 말고.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할 것도 많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리네트와 교습 전에 차를 마시며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잖아요. 여자들은 서로 질투나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선입견보다 훨씬 섬세하고 똑똑하며 사랑스러운 사람들 아닌가요?”

“싸움이나 질투는 황자님들끼리 하라고 해요. 우리는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아요.”

“노튼 황자님은 어떤 분인가요?”

알렉사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 알고 있었다.

낸터킷 황후는 알렉사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뜯어보고, 루카스 황자가 그녀에게 어떻게 접근했는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오기를 바랐다.

물론 낸터킷 황후가 알렉사에게 전문적인 간자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루카스의 동향을 알아내는 정도면 충분했다. 더불어 리네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마 리네트도 자신이 낸터킷 황후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안다고 해서 그게 알렉사의 죄책감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렉사는 처음 리네트를 가르치러 올 때, 차라리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를 바랐다. 재단사 팔스의 아틀리에에 들어설 때부터 그랬다. 루카스 황자가 노튼에게서 황위를 빼앗기 위해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와 결합했을 뿐, 성질이 고약하고 못된 여인이기를.

세상에는 남들이 그어 놓은 관계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적대하는 이들이 많다. 알렉사는 리네트가 자신에게 못되게 굴거나, 서먹하게 대할 것을 각오했다. 누가 봐도 그러기 충분한 관계였다.

황위를 노리고 물밑에서 싸우는 황자들. 그리고 그들의 약혼녀들이 만났다. 질투하고, 헐뜯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만만할 뿐, 리네트는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알렉사가 보기에는 그랬다.

‘황자들의 관계가 좋지 않다 해서, 우리가 대립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알렉사의 속을 지그시 누르는 듯 괴롭혔다.

그렇다.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황자들이 싸운다 해서 그들까지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알렉사는 자신이 리네트와 순탄하게 지내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당장 제 뒤에 있는 낸터킷 황후와 노튼 황자 때문이다.

알렉사가 리네트의 팔짱을 끼고 티타임에 초대하고, 친구들을 소개해 주고, 함께 꽃을 보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두 사람은 알렉사가 부디 그러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서 리네트를 찌르길 바라겠지. 적어도 그녀가 루카스 황자와 결합하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길 바랄 것이다.

낸터킷 황후는 알렉사에게 독을 타는 것도 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시키지 않겠지만,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왔을 때도 그러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알렉사는 작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희게 변했다.

처음에는 리네트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공작가의 천덕꾸러기로 자라 자신에게 귀족들의 예의, 춤, 몸짓을 배워야 하는 그녀를 동정했다.

하지만 옆에서 본 그녀는 동정할 만한 사람이던가?

아니었다. 이제 알렉사는 자신이 정말로 리네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짧은 시간 본 사람이지만, 리네트는 명확했고 남을 칭찬하는 데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알렉사는 자신이 솔직함에 목말랐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릴 적 노튼과 약혼한 이후로 자신은 온통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으니까.

알렉사는 제 아비도 달갑지 않아 하던 둘째 오빠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반갑고 안타까운지도 깨달았다.

선한 알렉사가 둘러싸인 환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괴로운 곳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황후에게 가서 리네트의 험담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까?

하지만 알렉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낸터킷 황후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뭔가 희한한 것을 보듯 자신을 쳐다볼 것이다. 그리고 웃으며 말하겠지.

“무슨 소리입니까, 알렉사. 그녀와 교류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나요?”

알렉사에게 나쁜 일은 시킨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알렉사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것이다.

사실 그런 건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알렉사의 비극은,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튼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낸터킷 황후가 자신에 대해 변변찮고 마음이 약해 쓸모없다 말한다면, 노튼은 어떻게 반응할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얼음으로 만든 것 같은 제 연인이 철저히 쓸모에 의해 자신을 골랐다는 것도 알렉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이 무서웠다.

“……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알렉사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그리고, 불청객과 마주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지?”

알렉사의 초록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빛났다.

물 빠진 밀짚색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뚱뚱한 남자가 제 눈앞에서 이죽거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나? 나를 몰라?”

알렉사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알렉사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건 제가 할 소린데,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알렉사는 머릿속을 빠르게 더듬었다. 카멜리아 공작가에 이 정도 나이 대의, 남에게 하대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있나? 적어도 알렉사가 알기로는 없었다.

갈레안 카멜리아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이 남자는 적어도 서른은 넘어 보였다. 물론 그가 과음과 폭음 때문에 아직 이십 대의 끄트머리임에도 불구하고 겉늙었다는 것을 알렉사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적어도 높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남자가 입고 있는 비싼 옷과 묘하게 건방진 태도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알렉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귀하를 모릅니다만…….”

“모르면 알면 되지!”

“꺅!”

순식간에 손목이 잡혀 끌어당겨졌다. 알렉사는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힘은 대단했고, 그녀는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마주했다. 남자에게 덥석 안겨 버린 것이다.

“무슨 짓이에요? 놓으세요! 이런 무례를……!”

남자에게선 술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알렉사는 사색이 됐다. 원래였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가문의 아가씨인지 말하고 남자에게 엄중하게 경고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사는 이런 상황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자신의 팔을 끌어당겨 추행하는 상황. 누구든 공포에 질리거나, 굳어 버릴 만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알렉사는 피아를 구별할 수 있을 때부터 모든 이들에게 귀히 여겨진 여인이었다. 결과적으로, 알렉사는 굳어 버렸다.

“무례? 진짜 무례한 것들이 누군지나 알아?”

남자가 킬킬거리며 알렉사의 허리를 더듬었다.

알렉사는 그 더러운 감촉에 몸을 빳빳이 굳혔다. 하필이면 댄스 교습 때문에 가벼운 드레스만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얇은 코르셋과 드레스 위로 기분 나쁜 감각이 올라왔다.

알렉사는 기가 막혀 눈물이 났으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것들, 사람을 우습게 보고…… 네년의 방은 어디야?”

“……뭐라-”

“네 방이 어디냐고. 에이미 계집애도 보이질 않으니.”

에드가는 신이 나 있었다. 이런 천하절색이 공작저에 있었나? 술에 취해 두리번거리다 찾은 여인은 멀리서 봐도 아름다웠다. 가까이서 보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어딜 가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면 여태까지 못 봤던 미녀를 발견한 건가.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에드가는 제가 당한 무시에 대한 분을 풀고 싶었다. 그는 놀라 떨고 있는 여인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 네가 내 상대를 해 주어야겠다.”

“당신, 실성한…….”

맹세코 알렉사는 그 말 한 마디를 하는 데 평생의 용기를 다 쥐어 짜내야 했다.

그러나 난폭한 주정뱅이에게 그 말은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에드가의 눈이 음험하게 번득였다.

“실성? 이 계집애가 말조심하지 않으면 그 입을 찢어 놓겠-”

“-말을 조심해야 할 건 너 같은데, 미친 새끼야.”

에드가의 말허리가 잘렸다.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자신을 무시한 계집애가 서 있었다.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에드가는 되물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돼지인지, 사람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새끼야. 말조심하라고 했어.”

“너, 이 계집애…….”

화가 치솟았다. 에드가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여자를 내팽개쳤다.

꺅! 여자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드가가 말을 이으려는데, 뜻밖에도 리네트 카멜리아는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으나, 리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가를 지나쳐 여인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네, 네…… 리네트, 그…….”

“미안해요. 당신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내가 기다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리네트가 고개를 돌려 표독스럽게 에드가를 올려다봤다.

“미친 자식,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뭘 하고 있냐고?”

에드가가 하, 하고 웃었다. 술 냄새가 확 풍겨 리네트는 코를 감싸 쥐려 했다. 품 안의 알렉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가씨!”

뒤늦게 리네트를 따라온 애플이 사색이 된 얼굴로 따라붙어 알렉사를 마저 부축했다.

그게 에드가의 성질을 더 건드렸다. 자신을 작정하고 따돌린 여자들이 지금 여기 다 모여 있는 것이다.

“너 이 빌어먹을 계집들, 잘 만났다. 아주 짜고 날 놀려?”

“널 놀렸다고?”

“아가씨, 제가 설명할게요. 그게…….”

리네트가 되물었고, 애플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에드가는 그것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에드가의 손이 올라갔다. 어느 계집애든 죽도록 패 줄 테다.

여기가 카멜리아 공작가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자신을 잘 봐주는 이멜다라도 일을 치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에드가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문란한 계집이 꾀만 늘어서!”

“꺅!”

에드가의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애플이 소리 질렀고, 리네트는 반사적으로 알렉사를 감싸 안으며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지금쯤 에드가가 자신을 때리고도 남았을 텐데, 여전히 제 품에 끌어안긴 알렉사가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만 났다.

리네트는 조금 후에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익숙한 사람이 에드가의 팔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에는 겨울의 싸늘함이 가득했으나, 그쪽을 올려다보던 리네트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다정함이 들어찼다.

물론 그 눈빛은 제가 붙든 놈팡이를 바라보자 빠르게도 사라졌다.

“뭐야! 이 손 안 놔?!”

눈치도 없는 돼지가 꽥꽥거렸다.

리네트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며 팔을 풀었다. 제 팔 안에 꽉 안겨 있던 알렉사 또한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푸른 눈의 주인- 루카스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뭐야, 이 멍청이는?”

“멍청이? 이놈도 저년도 아주 나를-!”

술이 아직 깨지 않은 에드가가 몸부림쳤다.

그러나 루카스가 질문한 상대는 에드가가 아니었다. 리네트는 그 질문이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깨닫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누구겠어.”

“이런, 나는 아둔해서 그대가 알려 주지 않으면 몰라.”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놔!”

에드가가 다른 쪽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팔은 곧 다른 사람에 의해, 아니, 칼에 의해 가로막혔다.

에드가는 느닷없이 제 시선 앞에 자리한 살벌한 검날을 보고 힉, 소리를 냈다. 그 검을 보고 멈추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에드가의 팔에는 상처가 났을 것이다.

검을 들이댄 것은 키리에 레미시어였다. 그리고 다른 기사 둘도 검을 금방이라도 빼 들 듯이 검집을 움켜쥐고 근방에 서 있었다.

“황족을 의도적으로 해치려 한 자는 사형입니다. 즉결 처분해도 되겠군요.”

“기다려 봐. 얘가 누군지는 알아야지.”

에드가는 ‘황족’이라는 말에 누가 제 머리채를 잡아 한겨울의 얼음 호수에 처넣은 표정이 됐다. 그러나 키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죽습니다.”

“난 상관있어.”

그렇게 말한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여전히 쥐고 있는 에드가의 팔에 힘을 주자, 에드가가 끅-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루카스의 시선은 리네트를 향해 있었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에드가 발란.”

“설마.”

농담하지 마, 라는 얼굴이었다. 리네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내 약혼자의 수준이란다.”

“공작이 딸의 약혼자를 고르는 기준이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루카스의 눈이 에드가 쪽을 향했다.

“묻겠다. 그대가 에드가 발란이 맞는가?”

“……맞, 습니다.”

“좋아. 발란 가문이면…….”

루카스가 힐끗 키리에를 바라봤다. 키리에는 고개를 저었고, 리네트가 대신 답했다.

“백작 가문이지만 3대를 내려온 세습작이고, 네가 쥐고 있는 놈은 둘째야.”

“조언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런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느긋했고, 에드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러나 루카스가 다그쳐 물으니 그 얼굴도 곧 희게 질렸다.

“발란 가문의 둘째 아들.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나?”

“그, 것이…….”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루카스는 에드가의 팔을 놓고 허리를 굽혔다. 에드가가 재빠르게 몸을 거두려 했으나 키리에의 검에 그 시도는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일어나시지요, 레미시어 아가씨.”

“감사합니다, 전하…….”

그때까지 얼이 빠져 있던 알렉사는 간신히 루카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레미시어 아가씨, 라는 말에 에드가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새파래졌다.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 두자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동생을 위협한 죗값은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법에 의해 보호받으며 정식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휘익, 키리에를 향해 루카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보통 때였다면 키리에는 뭐라고 맞받아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키리에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검을 잡은 손은 힘이 몰려 극도로 희게 변해 있었고. 턱 또한 꽉 다물려 있었기에.

루카스는 알렉사를 키리에의 앞까지 인도했으나, 키리에는 에드가에게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허겁지겁 뛰어온 알렉사의 하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알렉사를 부축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리네트의 물음에 설명은 루카스가 대신했다.

“레미시어 아가씨를 데리러 간다기에 재미 삼아 동행했어.”

그 말을 증거하듯 루카스는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공작저에 편지를 보내 일일이 방문 허가를 구하는 건 역시 좀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키리에는 루카스에게 투덜거렸으나, 결과적으로 루카스는 그러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사랑하는 내 아가씨를 보러 왔는데…… 재미있군. 웬 놈이 여자를 때리는 광경을 공작저에서 볼 줄은 몰랐거든. 그런데 그 여자가 내가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히 여기는 여인이로군.”

“그, 황자 전하…….”

그제야 에드가가 목소리를 냈다. 놈이 이 상황에서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제법 놀라운 사실이었다.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이건, 제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설명하라고 했잖나.”

루카스가 웃었으나 그 모양새는 사뭇 살벌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와 약혼한 여자입니다!”

“누가. 레미시어 아가씨가?”

황자는 개미를 눌러 죽이는 만큼의 힘도 들이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에드가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곧 제 아내가 되기로 한 여자가 저를 무시하여, 약혼자로서 교육을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교육, 그래.”

“……게다가 지금의 상황은 자못 불쾌합니다!”

불쾌. 불쾌라고 했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러나 에드가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하셔도 단순히 구혼자일 뿐이지, 저 여자는 저와 약혼할 것이 공인된-”

“……말 잘하셨군요.”

에드가가 흠칫했다. 그의 말을 끊은 것은 다름 아닌 알렉사였다. 알렉사는 그사이 하녀에게 받은 가운을 걸치고 몸을 그러안고 있었다. 그 어깨가 아직도 덜덜 떨렸으나, 알렉사의 얼굴에는 표표한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약혼녀의 저택에서 당신은 어떤 행동을 했지요?”

“아가씨께는 죄송하지만…….”

“아가씨요.”

알렉사는 짐짓 기가 막히다는 듯이 답했다.

“제 방이 궁금하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녀인 줄로만 알고…….”

그 말에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

리네트는 문득 공작가의 하녀 에이미를 떠올렸다. 에드가는 손버릇이 나빴다. 공작가의 하녀들에게도 손을 댈 만큼.

그러나 이 정도로 나쁜 줄은 미처 몰랐다. 눈에 띈다고 해서 아무나 끌어당겨 마구 범하려 할 만큼이었다니.

“제 입을 찢어 놓겠다고도 하셨지요.”

“그것도…….”

“하녀면 방에 끌고 가 입을 찢어 놓는 것이 당연합니까?”

화가 서린 목소리에 에드가가 이를 악물었다.

“제게 당신 상대를 해 주어야겠다고 말씀하셨죠. 그건 제가 알렉사 레미시어임을 알고서도 할 수 있는 말입니까?”

“…….”

“저를 보호한 리네트에게는 어찌하셨습니까.”

알렉사의 목소리가 떨렸으나 그 내용은 분명했다.

“하녀를 보호한 약혼녀에게 손찌검을 날리는 것이 당신의 교육입니까?”

“그-”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발란가의 도련님.”

모두의 시선이 알렉사에게 모여 있었다.

“저야말로 낸터킷 황후께서 안배한 카멜리아 아가씨의 교육 담당입니다. 당신은 그녀를 교육할 자격이 없고, 제 앞에서 교육을 논할 수도 없습니다.”

“남녀 사이의 일이…….”

“당신의 변명을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알렉사는 리네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네트. 저는 이 일을 황후 전하께 정식으로 보고할 거예요.”

“그…….”

“당신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어요. 다만, 당신께 용서를 구해요.”

“무슨 용서요?”

“저는 당신의 약혼자를 강간 미수로 고발할 테니까.”

“……그러니까!”

에드가가 발을 굴렀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내는 소리는 추레했다.

“레미시어 아가씨인 줄 알았으면 안 그랬다고-”

“레미시어 오팔도 모르는 눈알이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었겠나.”

에드가의 말을 잘라 버린 것은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알렉사 쪽으로 고갯짓했다.

모두의 시선이 알렉사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레미시어 가문의 유명한 보석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에드가는 이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교육, 이라고 했다.”

“…….”

“리네트. 그대는 공작저에서의 괴로움을 범박하게나마 내게 호소했으나,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어떤 괴로움을 당한다 말한 적 없다. 그러나 그대가 겪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이런 ‘교육’인가?”

리네트가 눈썹을 꿈틀했다. 루카스는 지금 지나치게 화려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너 나 힘들다는 얘기 못 들은 것처럼 말하네?

그러나 리네트는 찰나의 순간에 깨달았다.

저택에서 일어난 소란에, 제법 많은 시선들이 이곳을 향해 모여 있었다. 공작저의 하녀들이 알렉사의 뒤쪽에 있었고, 정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정원 저편에서 기웃대고 있었다. 그리고…….

“묻겠소, 카멜리아 공작 부인.”

루카스가 몸을 돌린 쪽에는 이멜다도 서 있었다.

황망한 표정의 이멜다는, 방금 도착한 듯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하녀에게 기대어 서 있는 중이었다.

“나는 공작 부인을 비롯한 카멜리아 공작가의 체면을 위해 얌전한 구혼자로 남으려 했소. 부인께서 그녀에게는 혼약을 약속한 청년이 있다고 넌지시 알려 주실 때도 섭섭했으나 별말 하지 않았지.”

“…….”

“그건 대대로 황가와 카멜리아 공작가의 핏줄이 섞인 적 없었던 이유가 공작가의 완강한 입장 때문이며, 동시에 황가가 그 의사를 존중하며 공작가의 고귀함을 존경하기 때문이었소.”

“전하.”

“하지만 이것이 공작가의 고귀함이오?”

이멜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녀가 큰일이 났다며 달려왔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알렉사가 저 에드가에게 퍼붓는 이야기들을 듣고 이멜다는 금세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단단히 트집을 잡혀 버린 셈이었다.

황자가 말을 이었다.

“레미시어가의 고명딸을 범하려 하고, 황족의 몸에 위해를 가하려 한 자가, 진정 나보다 우위에 서 있을 만한 구혼자입니까? 그리고 리네트 카멜리아는 그 구혼자에게 ‘교육’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고?”

“전하, 오해가…….”

“뭐가 오해란 말이오? 말해 보십시오, 리네트.”

전자는 공작 부인에게, 후자는 리네트에게 주어진 질문이었다. 그 말투는 판이하게 달랐으며 후자가 압도적으로 다정했다. 루카스는 뻔뻔하게도 리네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나는 기껏해야 당신이 겪는 괴로움이, 이미 있는 약혼자와 새로운 구혼자 사이에서의 갈등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지위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죠. 하지만 이런 것이 당신이 겪는 일들이라면, 저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

루카스의 말을 받은 것은 알렉사였다.

약간의 위장과 뻔뻔함을 띠면서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는 루카스와 달리, 알렉사는 차갑게 식은 머리와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무장한 채였다.

“저는 황후가 안배하신 리네트의 교육자로서, 그녀를 보호하겠습니다.”

보호?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리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저 가냘픈 아가씨가 리네트 카멜리아를 보호한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감싸나? 검을 들고 그녀를 지키나?

그러나 적어도 그 ‘보호’라는 말에 대해, 이멜다는 빠르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얼굴빛이 변했기 때문이다.

“보호라뇨, 레미시어 양.”

“부인.”

알렉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이멜다를 바라봤다.

“아시다시피 황후께서 저를 리네트 양에게 보낸 이유는 자명합니다. 황자가 구혼하는 여인입니다. 약혼하지 않았을지라도. 더욱이 먼저 혼인에 대한 말이 오간 상대가 있다 할지라도 그 격은 중요합니다. 황자님이 구혼하는 여인은 온 리시스트가 경애하는 여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노튼 황자님의 약혼자로서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공작가는 그 여인에게 포근한 잠자리가 되기는커녕 아주 위험한 곳으로만 보이는군요.”

알렉사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고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이 이런 남자에게 범해질 뻔해서, 혹은 그에게 맞을 뻔해서가 아니었다. 폭력을 당해서도 아니었다.

리네트가 그의 이런 행동에 너무나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그에게 욕설을 지껄이고, 맞섰다. 알렉사를 감싸면서도 에드가 발란의 행동에 놀라지 않았다. 놀라서 몸이 굳은 알렉사와는 달리 익숙하게 대처했으며, 그녀를 감싸안으며 맞을 것에 대비했다.

알렉사는 대번에 리네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아챘다. 그건 리네트가 똑똑해서도, 명확한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익히 접해 온 상황이니까.

이런 남자의 무례함에, 이 남자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악의에, 폭력에 익숙해서다.

태연하게 ‘돼지만도 못한 새끼.’라고 욕설을 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욕설이라는 건 말하는 자 역시 먼저 듣지 않으면 그 수준이 높기 어렵다. 그만큼의 욕설을 들어 봤기 때문에 리네트는 그렇게나 험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 또한 리네트 카멜리아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루카스가 나섰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아직 미성년이지만, 그 보호자인 부모는 그녀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듯 보이는군.”

“전하. 제가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멜다가 목소리를 내자,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공작저요.”

“…….”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는 부인의 조카이기도 하지. 부인이 고른 그녀의 약혼자이기도 하고.”

“실수입니다!”

이멜다가 부르짖었으나 루카스는 싸늘했다.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퍽 단정적이군요, 부인.”

“…….”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면서 실수라고 말하다니. 그것조차 분별력이 없다는 증거 아닙니까?”

뭐라고? 이멜다는 화가 나 머리가 핑 돌았다.

“무례하십니다!”

“기분이 나쁩니까?”

그러나 황자의 반문에는 당황했다.

“예?”

이멜다가 얼떨떨하게 묻자 황자는 되물었다.

“기분이 나쁘냐 물었습니다.”

“……불쾌합니다! 제게는 공작저에서 카멜리아 영지와 같은 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하실지라도 공작저에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루카스가 하, 하고 웃었다.

“당장 자신의 딸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본인 불쾌한 것만 따지다니. 과연 공작 부인이고 공작 부인의 조카고, 혈연은 혈연인 모양이외다.”

“무슨 말씀을…….”

“어쨌든 부인의 조카는 저를 해치려 했습니다. 그것만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 마땅합니다. 그건 이해하시겠지요.”

그제야 이멜다가 기가 죽어 눈을 희번득거렸다.

키리에 레미시어. 레미시어가의 둘째는 아직도 에드가 쪽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에드가, 저 멍청이가 일을 내기는 정말로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호라, 하신다면…….”

“공작저가 그녀에게 안락한 곳이 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리네트 카멜리아를 이곳에 둘 수 없다는 이야기요.”

헉, 하고 몇몇 하녀가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황자는 지금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또다시 청혼하는 것인가? 황궁으로 가자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멜다도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 애를 데려가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황궁은 아닐 것이고. 안가에라도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저택을 내려 주신다는 겁니까.”

이멜다가 따져 물었다.

황족인 남자가 여자에게 저택을 내려 주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정식 부인이 아닌, 애첩을 들일 때다.

“설마 공작가의 핏줄에게 첩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전하의 보호입니까?”

하지만 루카스는 그렇게까지 멍청이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알렉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알렉사는 한 걸음 나섰다.

“그럴 리가요, 부인.”

“…….”

“리네트 카멜리아 양은 죽은 구혼자 대신 새 구혼자를 찾게 될 겁니다. 레미시어 저택에서요.”

사태를 파악한 리네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기쁨을 표하고 싶지만, 적당한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죽은 구혼자 소리를 들은 에드가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저는 황후 폐하의 대리자로서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호할 것입니다. 레미시어의 그림자 아래에서 지내며 리네트 카멜리아는 안전하고 편안히, 적절한 구혼 상대를 찾으실 테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레미시어 양!”

이멜다는 거의 거품을 물 기세였으나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루카스는 그쯤 해 에드가를 쳐다봤다. 에드가는 거의 시체 같은 얼굴이 돼 있었다.

“키리에.”

“예.”

“황족에게 위해를 입히려 한 자이며, 증인은 알렉사 레미시어다. 더불어 그대의 동생을 모욕한 자이니 그대에게 처분을 맡긴다.”

“예.”

루카스는 좌중을 둘러봤다. 그 표정은 날 때부터 황족이었음을 증명하듯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마는 찡그려져 있었고 눈동자 안에서는 분노가 타올랐다. 그의 얼굴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루카스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알렉사 레미시어의 명예를 위해 이 자리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알렉사 레미시어가 당한 모욕과 위해에 관해 입 밖에 내는 자 또한 강력한 처분을 받을 것이다.”

벌레 한 마리 울지 않았다. 리네트, 이멜다, 알렉사부터 키리에와 에드가, 그리고 정원을 메운 사용인들까지. 누구도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으나 침묵으로 긍정했다.

“공작 부인.”

“……예.”

“본디 그 자식에 대한 권리는 부모에게 있으나, 황족 위해가 관련된 사안에서 부인은 그 분별력의 건재를 입증하지 아니하였소. 이에 부재중인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리네트 카멜리아는 레미시어가와 은방울꽃의 수호를 받을 것이오. 거부권은 없소.”

평소와는 달리 고압적인 말투였다. 이멜다는 죽고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키리에는 턱짓으로 기사들을 불러 에드가의 양팔을 붙들게 한 후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즉결 처분하지 않나?”

“아가씨들이 피를 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발란 가문에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 할 건이기도 하죠.”

“그렇군. 다 끝내면 사형시켜.”

“예.”

마치 ‘다 먹고 쓰레기는 버려.’라고 말하는 듯 여상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무자비한 말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알렉사는 고개를 쳐들고 이멜다에게 말했다.

“공작 부인. 제가 옷을 갈아입을 방을 내주시겠어요?”

이멜다가 입술을 깨물며 알렉사를 쳐다봤다. 알렉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제가 카멜리아 공작가에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이 될 겁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의사 표시였다.

이멜다는 이를 악물고 알렉사를 쳐다보다가, 이제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 에드가를 바라봤다. 그러나 계산은 빨랐다. 여기서 에드가를 감쌀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멍청해서 고른 자신의 조카였으나 그는 제 생각보다 더 아둔해 일을 벌였다.

“……알렉사 아가씨께 빨리 방을 마련해 드리렴.”

에드가의 눈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정신 차린 하녀들이 분주하게 알렉사를 안내했다. 루카스도 입을 열었다.

“리네트.”

“……네.”

“당신을 한시도 이곳에 두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너도 짐 싸. 빨리 나가자, 라는 말이었다.

리네트는 소리 내 웃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답했다.

“예.”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간신히 이멜다가 소리를 내 말했으나, 루카스는 그 말을 싸늘한 눈으로 무시했다. 이어 리네트에게 그가 말했다.

“그렇다는군요.”

“그럼 절차에 따라 전하께서 저를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그럴까요?”

“감사합니다.”

능청을 떠는 리네트의 말에 이멜다의 얼굴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루카스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지만, 리네트의 말에는 대번에 저렇게 반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제 배로 낳지 않았다지만 대관절 왜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잔인한가.

……제가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당장 낸터킷 황후라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루카스는 그제야 자신이 리네트에게 느끼는 애처로움이 비단 동정심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본질적으로 두 사람의 상황은 같았던 것이다.

황태자 자리를 놓고 노튼과 싸우는 자신, 그리고 그것을 견제하는 낸터킷 황후.

공작가의 정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놓으라 종용당하는 리네트, 견제하다 못해 못살게 구는 이멜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군.’

루카스는 리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입은 드레스의 흙먼지를 털고 난 리네트가 싱긋 웃으며 루카스의 팔에 제 손을 올렸다.

그대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루카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영문을 모르고 이쪽을 돌아보는 리네트의 뺨 위에 먼지가 묻어 있어서다.

루카스는 손을 내밀어 리네트의 뺨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보드랍고 안타까운 감촉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먼지는 날아갔으나, 루카스는 손가락을 쉬이 내리지 못하고 리네트를 바라봤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녀를 사랑해 마지않는 황자가 리네트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자신이 록시온에서 그녀를 보고 한 생각이 또다시 겹쳤다. 물론 조금은 달랐다.

네가 제일 예쁘고,

제일 못됐고,

제일 짠해서.

루카스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려 주먹을 꾹 쥐었다.

목구멍 아래, 명치 끝 어딘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뭉클뭉클 진흙 같은 감정은 루카스가 무슨 말을 하는 순간 바로 솟구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리네트의 방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당황한 애플이 두 사람 앞에 나서 걸었다. 정원을 가득 메운 하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렇게, 리네트는 공작저를 벗어났다.

* * *

“죄송해요, 아가씨.”

리네트의 방으로 오자마자 애플이 용서를 빌었다. 리네트는 애플에게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그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애플은 어쨌든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 대해 애정이 컸다. 알렉사와 차를 마시는 리네트에게 에드가가 왔다는 것을 전하지 않을 만큼은.

물론 거기에는 애플의 쓸데없는 오지랖도 한몫했다.

어쨌든 에드가는 애플이 봐도 너무나 수준 떨어지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냥 찾아와도 리네트를 만나게 해 줄까 말까다. 그러나 하필 오늘 리네트가 만나고 있는 이는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그 노튼의 약혼자.

애플 또한 리네트가 루카스와 전략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전략은 전략일 뿐이다.

리네트는 과연 아름답고 집안도 좋고 황자님의 약혼자인 알렉사 레미시어 앞에서, 에드가를 만나고 싶어 할까?

게다가-

“……레미시어 아가씨께서 아마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황후께 말씀하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의 수준이 아가씨의 수준으로 비춰지는 게 싫었어요.”

그러니까, 애플은 리네트가 알렉사 앞에서 조금이라도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에드가의 수준이 황성에 알려지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리네트를 비웃을 수도 있다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에드가를 따돌려 버렸다. 에드가가 있는 응접실 근처의 하녀에게는 ‘술을 달라는 대로 줘 버려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술에 만취해서 쓰러진다면 아가씨를 찾아온 것도 잊어버리겠지, 라는 계산이었다.

보통 하녀가 그랬다면 기가 막히다 못해 봉급을 깎아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플은 리네트의 오랜 친구였다.

그래서 리네트는 한숨을 내쉬며 애플의 손을 당겨 잡았다.

“애플.”

“네.”

“내 생각 해 준 건 고마워.”

“……아가씨.”

애플이 눈물을 훌쩍이자 리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이런 건 내게 꼭 이야기하도록 해.”

“……네.”

“결과만 괜찮으면 다인가?”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방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확히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작은 방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리네트가 애플을 용서하는 것은 영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춰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을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애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리네트가 손을 들어 제지했으나, 루카스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그래, 결과는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쯤 되니 나는 당신의 동정심이 너무 많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데.”

“애플. 나가 있어.”

“아가씨, 제가 잘못했으니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게 당연…….”

“나가.”

“……나가서 아가씨 물건을 챙길게요.”

한 번 잘못한 애플은 두 번 선을 넘지 않았다. 애플이 리네트의 말을 듣고는 눈을 내리깔고 뒷걸음질 쳤다. 리네트의 물건이라고는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니 사실상 축객령에 응한 것이다.

애플이 문을 닫자마자 리네트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됐잖아.”

“그러면 된 거야?”

루카스는 책장에 기대섰다가, 허름한 책장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기가 찬 표정이 되어 똑바로 섰다.

“카멜리아 공작저치고는 너무한 수준인데.”

“내 방만 그래.”

“그대가 여기서 나가고 싶은 심정은 아주 잘 알겠어. 저 레벤튼의 공영 마구간과 자웅을 겨룰 만하군.”

레벤튼은 루카스가 평민으로 자란 영지 이름이었다.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닐 테고.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을 간과하지 말라는 거다.”

“애플이 실수하기는 했지만, 나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어.”

루카스가 리네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를 생각해 한 일이면 다 되나?”

루카스의 푸른 눈은 고요했다.

그래서 리네트는 지금 그가 드물게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자의 눈은 언제나 장난기와 생기로 반짝거렸다. 리네트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곤란한 상황을 맞았을 때도 눈 안의 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리네트는 괜히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알렉사가 다칠 것 같았으면 내가 먼저 감쌌을 거야.”

“리네트 카멜리아.”

루카스가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내가 지금 알렉사 레미시어가 다쳤을까 봐 걱정하는 것으로 보이나.”

“……알렉사가 다쳤다면 보통 일로 끝나진 않았을 테니까.”

황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 여자는!

리네트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지금 루카스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보다 더 잘 알 것이다. 이건 일부러 대화를 회피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대가 다쳤다면?”

“다치는 건 우습지도 않은-”

“리네트 카멜리아.”

루카스가 눈썹을 모았다.

“나는 그대가 다치는 게 조금도 우습지 않아.”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렸다.

“나는 이멜다 카멜리아에게 뺨을 하도 맞아 모자를 쓰는 게 습관이 됐어.”

“…….”

“이젠 안 때리냐고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 정도지. 조금 맞는 거, 멍드는 건 괜찮아. 어쨌든 조금만 버티면 끝날 일이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쉽게 말하지 말아 줘.”

황자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리네트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처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안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간과하리라 믿었나?”

“루카스.”

“리네트 카멜리아.”

루카스는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다그치듯 불렀다.

“나는 그대를 좋아해. 그건 그대가 과감하고 대범하기 때문이지.”

“…….”

“그대가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다루는 것들 모두 내 예상을 벗어나.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벗어나는 건 이제 안 돼. 좌시하지 않겠다.”

“무슨 뜻이야?”

대번에 적의가 담긴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너를 통제하고 내 뜻대로 다루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덧붙여 주제 넘게 그대에게 간섭하겠다는 것도 아냐.”

루카스의 푸른 눈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너는 너를 너무 함부로 다뤄. 나는…… 그대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

눈동자 안에서는 스스로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감정과 더불어, 에드가를 향한 분노가 뒤섞여 넘실거렸다.

“그렇게 남에게 기꺼이 맞으러 나서지 말아 줘.”

“……가끔은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멍청한 짓을 해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네가 다치는 결과가 돼서는 안 돼.”

남자는 리네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

“그리고, 나는 네가 동정심이 많은 것 또한 지적하고 싶다. 배럴 남작의 저택에서 우리는 4층을 수색하지 못했어. 그건 왜지?”

“로가나를…….”

“그래. 그 여자를 빼냈기 때문이지. 사실은 4층을 수색할 시간을 번 후, 그녀를 구해 냈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으면!”

리네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루카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래. 그녀가 유린당하는 일수가 더 늘어났겠지.”

“…….”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황제 폐하와 거래할 수 있는 거리는 얻었지만, 그건 네 임기응변 덕분이지.”

그랬다. 남작의 도박장에 리네트는 위험을 감수하고 로가나를 빼냈다. 그러나 그건 사실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압도적으로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을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 이번 일로 네가 원하던 결과를 얻었지. 네 약혼자, 아니…… 그 파렴치한은 이제 내 손에 처분권이 있으니. 그리고 너는 공작저에서 나올 수 있게 됐군. 그래서?”

“…….”

“공작저에서 나온 게 네 시체였다면?”

시체라니. 리네트가 맞받아치려고 입을 벌렸으나 루카스가 더 빨랐다.

“술에 취한 그 남자가, 알렉사 레미시어를 감싼 너에게 더 큰 악의를 발휘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그 남자의 손에 칼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루카스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닦달하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기실 배럴 남작의 저택에서도 자신은 리네트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랐다. 하지만 왜 자신은 지금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대가 똑똑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어. 게다가 범접할 수 없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리네트. 그게 네 일신에 닥치는 위협까지 막아 주진 않아.”

“……그래.”

리네트는 고분고분하게 수긍했다. 루카스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네게 제대로 설명해야겠군. 나는 사실 처음 황성에 들어왔을 때, 황태자 자리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

“내가 황위 자리를 노튼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하나야. 그 녀석은 동정심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정의 여지를 남겨 두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를 좋아해.”

루카스는 보기 드물게 완고한 얼굴로 리네트에게 말했다.

“그리고 네 말도 맞아. 나쁜 것은 가해자지. 그렇지만 주인의 의도를 멋대로 재단하는 하녀를 용서하는 동정심을 매번 발휘해서도 안 돼. 왜인지 알겠나.”

“……주인에게 위험을 끼칠 수 있으니까.”

“그래.”

리네트는 고개를 떨궜다. 루카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을 찔러 오는 기분이었다. 잔뜩 잘난 척해 놓고 손속이 모질지 못해 마무리가 어설프다 지적받는다. 할 말이 없었다.

“대대로 왕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몰이해라고 배웠다, 나는. 왕이라는 자리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지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동정하게 되고, 동정하게 되면 동정받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는 무자비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을 다스리는 만큼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지만, 이해하려고 하지는 마라. 한쪽을 동정해 손을 내밀기 시작하면, 다른 쪽은 피해를 감수하기 일쑤다.

리네트가 발휘한 동정심은 결국 리네트 자신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한 용서다. 하지만 이미 남아 버린 상처는 용서로 치유되지 않는다.

용서하는 미덕은 여유가 있는 자들이나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도저히, 이런 방에 앉아 있는 리네트가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리네트. 나는 그대가 좋아. 무자비해져야 하는 순간 발휘하는 동정심마저도.”

순간 리네트가 흠칫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동정심 때문에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는 마.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거지만. 결과가 아무리 좋아 봐야 네가 다치거나 죽어 버린다면 무의미하니까.”

리네트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래. 죽어서 공작 돼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루카스가 뭐라 다시 답하기도 전에 리네트가 말을 이었다.

“알겠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좋아.”

거기까지 말하고 루카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관자놀이를 비스듬히 기댔다. 그 시선은 리네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리네트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재빠르게 짐을 챙겼다. 애플을 데리고 공작저를 벗어나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 *

소식을 들은 레미시어가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레미시어 가문의 사병들이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공작저로, 한쪽은 발란 백작저로 향한 것이다.

반으로 나뉘었다고는 해도 그 레미시어 가문의 사병이다. 약 오십여 명의 병사가 공작저 앞에 마차를 세운 후 도열했다. 일종의 시위 행위였다.

“적어도 길 가는 사람들이 공작가와 레미시어가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만드는 거죠. 곧 소문이 퍼질 테고요.”

알렉사가 말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빠르게 마차에 올라 리네트를 기다렸다. 리네트는 조심스럽게 알렉사의 눈치를 봤다.

“알렉사, 미안해요.”

“리네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아직도 제 하녀에게 떨리는 한쪽 손이 잡혀 있는 알렉사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리네트는 그런 알렉사를 안타깝게 쳐다보다, 그녀의 다른 쪽 손을 세상 제일가는 보물처럼 꾹 잡아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리네트는 저희 저택에 초대받자마자 오게 되었네요.”

“그런가요…….”

리네트가 미안한 기색으로 주뼛거리자 알렉사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리네트.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그야 아직도 당황스럽고 가슴이 뛰지만, 나쁜 사람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신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나쁜 사람이 사과해야 하는 거죠.”

에드가 때문에 헝클어졌던 붉은 머리를 그새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드레스도 완벽하게 가다듬은 알렉사는 리네트에게 항상 보여 주던 환한 미소와는 사뭇 다른 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귀족의 미소였다.

“황자 전하께서 오셔서 다행이었죠.”

“그렇, 지요…….”

리네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사과하고, 알렉사 자신이 괜찮다고 했다 한들 정말 바로 괜찮아질 리 없기 때문이다. 알렉사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리네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괜찮냐고 캐묻는 건 무례한 일이다. 알렉사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닫으려는데, 리네트가 물었다.

“아,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는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하셨는데…….”

“아, 그랬지요…….”

알렉사가 눈을 깜박거리다가 애매하게 웃었다.

“아마 제 명예를 생각하신 거겠지요.”

“명예라면…….”

“저희 가문이 발란 가문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크게 문제 삼으려면, 그 모든 것은 제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함부로 바깥에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고, 발란 가문은 헛소문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려 할 수도 있죠.”

“그렇군요. 하지만…… 괜찮겠어요?”

리네트가 알렉사에게 물었다. 강간 미수, 혹은 그에 준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에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제가 당한 일보다,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것이 몇 배는 무서워요.”

“…….”

“아마 공개적인 재판이 될 가능성은 낮아요. 애초에 노튼 황자님이 달가워하실 리도 없고…….”

알렉사의 입술이 달싹이자 리네트는 기가 막혔다.

노튼이란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제 약혼녀가 사고를 당했다는데 그런 것에 달가움을 따지고 있을 만한 인간이란 말인가?

리네트는 록시온의 연회 때 자신이 잠시 인사했던 노튼에 관해 떠올리려 애썼다. 눈보라같이 살벌하고도 냉랭한 아름다움을 가진 황자였다는 정도만 기억났다.

여자의 추문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인간으로서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리네트. 나는 그대가 좋아. 무자비해져야 하는 순간 발휘하는 동정심마저도.”

마음이 소란했다.

리네트가 가지고 있는 백안은 제멋대로였다. 아주 예전에 리시스트 제국을 건국할 때, 건국 시조 중 하나인 마법사가 카멜리아에게 부여했다는 능력.

대부분 그 능력은 누군가가 전해 주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려 주었지만, 가끔 예고하지 않은 순간에 나타났다.

리네트는 로가나가 제 손톱을 손질하며 중얼거리는 말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가나가 웅얼거리며 ‘아가씨, 행복하셔야 해요.’라고 말할 때, 백안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너를 정말로 좋아하는걸?’이라고 말했다.

루카스가 ‘남 짜증 나게 하는데 정말 재능이 넘치는걸.’하고 말할 때 쿠션을 집어 던지면서도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제 재능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사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넬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백안’이 본능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전은 조금 달랐다.

그대를 좋아해.

그것은 호의나 경애의 감정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조금 더 농도 짙은 무언가가 함께 섞여 있었고…….

그녀는 그 감정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루카스가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동정에 가까웠다. 자신은 배럴 남작 건을 터트리기 전 루카스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발을 빼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그건 리네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루카스가 발을 빼면 리네트는 정말 오도 가도 못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루카스는 리네트의 불안감과 공포를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어떤 남자라도 마찬가지다.

루카스가 그녀를 버린다면, 리네트는 종마처럼 아이를 낳기만을 고대하며 동화 속에 고립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가 대체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이토록 복잡다단하고 리네트 자신도 수긍할 수 없는 삶을 대체 어떻게?

그렇기에 리네트는 그가 제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그가 제위에 오른 후, 자신을 그의 삶에서 분리해 내어 끝내 각자의 길을 가기를 원했다.

동화 속에 나올 듯한 왕자님은 황제가 되어 행복한 엔딩을, 자신은 불행에서 벗어나 공작이 되어 적어도 제 뜻대로 인생을 꾸려 갈 수 있기를.

하나 그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막살기로 고심해 봐야 이곳은 동화책 속이라는 것을 리네트는 잊지 않았으니까.

공작이 되는 것,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 나아가 카멜리아 가문을 없애 버리는 것.

그런 건 리네트가 책을 덮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리네트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동화책을 덮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있을까?’

백안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사라지자 리네트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튼 방을 준비했어요.”

“어…… 네?”

그때, 알렉사의 목소리가 리네트의 귓가를 찔렀다. 리네트가 화들짝 놀라자 알렉사가 빙그레 웃었다.

“급하게 준비한 방이니만큼 좋은 곳은 아닐 테지만, 추후에 더 좋은 방으로 옮겨 드리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자신이 레미시어 후작저에서 쓸 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모양이었다. 리네트가 손을 내저으며 어디든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마차의 창문에서 똑똑, 소리가 들렸다.

두 아가씨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뚝뚝한 키리에의 얼굴이 있었다.

“잠시 괜찮습니까?”

“어머나, 오라버니. 물론이죠.”

“저뿐만은 아닙니다. 전하가 잠시 오실 겁니다.”

알렉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혼의 여인들이 있는 마차에 남자 둘이 타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았다. 그러나 그중 하나는 오라버니인 키리에 레미시어고, 나머지 하나는 이 나라의 황자다. 잠시 망설이던 알렉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마차는 좁지 않았다. 육두마차니 안의 공간도 엄청났다. 하지만 기골 장대한 청년 둘이 타니 아무래도 조금 비좁게 느껴졌다.

루카스는 마차에 타자마자 고개를 한 번 기울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의 하녀를 좀 물려 주시겠습니까.”

알렉사의 하녀가 눈치 빠르게 물러났고 리네트의 뒤를 따라 탄 애플도 덩달아 내렸다. 이제 마차 안에는 넷만 남았다.

알렉사가 긴장해 입을 여는데, 키리에가 더 빨랐다.

“기사들은 다섯 걸음 밖으로 물렸습니다.”

“좋아. 알렉사 양. 협조를 좀 구하고 싶은데.”

“예?”

“리네트 카멜리아는 레미시어 후작저로 안 갑니다.”

“……네?”

리네트가 눈을 깜박였다. 이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그에 키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사, 네 이름으로 된 작은 타운 하우스가 있지?”

“예? 어…… 예,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그걸 좀 쓸 수 있겠어?”

알렉사는 당황했으나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답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번화가에 가깝기는 해도 시끄러워서 귀족 아가씨가 머무를 만한 곳은 아닌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루카스가 답했다.

“레미시어 양의 호의에 보답하기는커녕 이렇게 재차 뭔가를 요구하는 모양이 되어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하나-”

“네에.”

“레미시어 후작가의 주인은 후작입니다. 레미시어 후작저에서 그녀가 보호받는다면 아마 달갑지 않은 일이 상당히 많이 일어나겠지요.”

알렉사도, 리네트도 곧장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후작저에서 며칠 지내면서 나갈 궁리를 하려고 했는데.’

리네트는 자신이 후작저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레미시어 후작은 어쨌든 딸인 알렉사와 함께 노튼 황자의 편에 서 있다.

물론 그는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테고, 리네트가 후작저에 들어간다 한들 크게 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이 특이하긴 했으나 부당한 일을 당한 귀족 여인을 유력 귀족이 보호하는 경우는 가끔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낸터킷 황후의 손아귀에 그녀가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리네트는 루카스가 제 구혼자를 눈 뜨고 낸터킷 황후에게 빼앗긴 남자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루카스가 부당한 일을 당할 뻔한 알렉사와 리네트를 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호의적으로 남의 일을 해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타운 하우스는 어디에 있지요?”

“먼 친척분들…… 그러니까 레미시어의 이름을 쓰시는 방계분들이 수도에 방문할 때 쓰는 곳입니다. 그래서 후작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요. 정확히는 리시스트 기차역 근처입니다.”

“아하?”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오히려 더 잘되었는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알렉사는 의아해할 것이다. 리네트가 말을 고르려는데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되었군요. 그러면 중간까지는 함께 가되, 기차역 근처에서 헤어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거긴 아직 정리가 안 되었는데…….”

“그런 것은 괜찮아요, 알렉사.”

리네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레미시어가의 가장 초라한 방이라고 할지라도 제게는 멋지고 으리으리한 궁궐이 따로 없을 테니까요.”

“리네트…….”

그녀의 말에 알렉사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라. 그럼 차라리 황성으로 가자고 할 걸 그랬나?”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리네트와 루카스가 주고받는 말에 알렉사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 * *

알렉사의 타운 하우스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복잡한 곳에 있어,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고위 귀족들에게는 별로 구미가 당기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리네트는 그게 좋았다. 루카스가 처음 준 안가와도 그리 멀지 않은 데다 꽤 컸다. 상주하는 하인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은 청소를 하는 곳이라 더럽지도 않았다.

작은 정원이 있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커다란 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그란 홀이 나왔고, 홀에서는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올려다볼 수 있었다.

“아, 좋다.”

본래 중간에 헤어지기로 했으나 알렉사는 결국 고집을 부려 타운 하우스까지 따라왔다. 레미시어 가문의 아가씨가 들이닥치자 하인들은 대경실색하며 3층을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속도와 솜씨로 청소했다.

가장 높고 좋은 방이 리네트의 것이라고, 알렉사는 상냥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고말고요. 공작저의 제 방은 아마 이 방에 딸려 있는 욕실보다 작을걸요.”

“아하하, 리네트의 농담은 정말로 재미있어요.”

농담이 아닌데. 루카스와 리네트는 시선을 마주했다.

알렉사는 리네트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대강 파악한 것 같지만, 리네트의 방은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공작저에서 리네트가 어떤 방을 썼는지 알면, 저 착한 알렉사는 아마 공작을 고발할지도 모른다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큰 응접실에 딸려 있는 방만 네 개였다. 하나는 침실, 하나는 드레스 룸, 하나는 욕실이고, 나머지 하나는 서재였다. 타운 하우스의 주인이 쓰는 방이란 대개 그렇다.

알렉사는 빠르게 돌아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큰일을 당한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애플이 리네트의 짐을 간략하게 정리했고, 리네트는 응접실의 소파에 한껏 방만하게 늘어졌다.

“하루가 너무 길다…….”

“아직 안 끝났어. 재단사 팔스의 아틀리에에도 사람을 보내서 주문 목록을 이쪽으로 보내라고 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 요리사도 새로 고용해야-”

“하루 좀 끝내게 해 주라. 나 쉬고 싶단 말이야.”

리네트가 웅얼대자 루카스는 이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제 기사를 불렀다.

“키리에 레미시어.”

“예.”

“요새에 파견되기 전까지 그녀의 옆방에서 지내라.”

“왜!”

리네트의 격렬한 거부에 키리에는 뭐 씹은 표정이 됐고, 루카스는 픽 웃었다.

레미시어 후작 때문에 리네트가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사실 그녀 혼자 이곳에서 지내는 것은 퍽 이상한 꼴이었다. ‘레미시어의 보호’라는 말에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적당히 쓸 만한 수단이었다.

키리에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저라고 과히 반갑진 않습니다.”

“그래그래. 내 사랑하는 여인과 둘도 없는 친우가 눈 맞을까 봐 걱정된다고.”

“전하. 전하께서도 목숨은 하나입니다. 말씀 조심하십쇼.”

키리에가 검집을 덜그럭거리자 루카스가 하하 웃었다.

“나의 기사에게 그대의 독이 옮은 것 같군. 이런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리네트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눈 있거든?”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이쯤에서 끝내시죠.”

잠시의 소란이 끝나고 응접실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루카스였다.

“좋아. 이제 겨우 해 볼 만하게 됐군.”

루카스의 말뜻이 어떤 것인지 둘 다 바로 알아들었다.

여태까지 리네트는 공작저에 있었기에 루카스나 키리에가 그녀를 만나려면 너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리네트가 하녀의 옷을 빌려 입고 빠져나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선물을 핑계로 아틀리에로 불러내는 것 또한 여러 번 써먹기 어려웠다.

참으로 적당한 타이밍에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이것만큼은 그놈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리네트는 한숨을 쉬며 에드가를 떠올렸다.

“그놈은?”

“누구? 아.”

에드가에 대한 것이었다. 루카스가 코웃음 치며 키리에 쪽을 쳐다봤다. 키리에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미시어 저택의 지하 감옥에 가둬질 겁니다. 곧 손해 배상을 청구하게 되겠죠. 응하지 않으면 발란 가문도 곤란을 겪을 테니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목숨은?”

“말해 뭐 해. 목숨은 상관없어. 협상이 끝나면 죽을 거야.”

“하지만…….”

리네트가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물론 죽어도 싼 잘못을 했다. 알렉사를 희롱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려고 했다. 게다가 루카스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 일이다.

그러나 리네트는 아무래도 역시 그를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리네트의 기색을 알아차린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두지. 동정심은 이제 슬슬 넣어 두길 바라.”

“……알고 있어.”

리네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루카스는 이곳에 오기 전, 리네트의 동정심에 대해 지적했다. 그녀는 결정적인 곳에서 물렀다. 여태까지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일을 해결했지만, 어느 순간 그 무른 마음 때문에 일을 망친다면 곤란했다.

물론 그 무른 마음 때문에 루카스가 그녀에게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루카스는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미안해.”

이건 좀 의왼데. 루카스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리네트가 양손을 깍지 끼고 무릎에 올려놓은 채 말했다.

“앞으로는 쓸데없는 동정심 때문에 일을 망치는 일은 없을 거야.”

“좋아. 그럼 다음 주제로 넘어갈까.”

참으로 전환이 빠른 황자님이었다. 사과와 확답. 그 이후의 잡담은 건너뛴다. 리네트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 뭘 할지를 고민해 봐야지. 적절한 미래 설계는 풍부한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루카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리네트도 그제야 미소 지었다.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지?”

리네트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답했다.

“개 같지.”

큽, 하고 키리에가 웃었다가 얼굴을 다시 굳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네트는 말을 이었다.

“한번 갈기갈기 찢겼던 제국을 취합한 것이 지금의 황제 폐하야. 정복 전쟁을 30년 동안 치러 냈으니 보통 인물은 아냐. 황자들이 황위 자리를 두고 싸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

“계속해.”

리시스트 제국은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건국 시조였던 초대 리시스트 황제와 카멜리아 공작, 그리고 익명의 마법사와 무예로 이름 높은 프라임 공작 등이 세운 제국은 몇백 년 동안 강대한 통일 제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전대 황제의 치세 말미에 열 개가 안 되는 왕국들이 작당하고 제국의 영토를 갈랐다. 남부에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낸터킷 황후의 오라비인 후작의 활약에 힘입어 정복 전쟁으로 봉합한 게 지금의 황제였다.

황제는 낸터킷을 남부에 박아 왕국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북부 귀라르델 산맥 주변 영지들의 단속이 힘겨워 자치권을 내줘야 했지만, 남부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나았다.

황제가 황자들을 계속 비교하며 후계자를 점찍지 않는 이유도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본래 황태자가 됐을 루카스는 네 살 때 실종됐다. 그것은 황제의 휴가 때 일어난 일이었다.

루카스를 말 앞에 태우고 숲으로 놀러 갔던 황제는 맹수의 습격을 받았다. 제국에 내려오는 수호 덕에 황제는 목숨을 건졌으나 루카스는 사라졌다.

시체도 찾지 못했으니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고 몇 년 동안이나 주변 지역을 뒤졌지만, 루카스의 머리카락 한 올 찾지 못했다.

영특하고 온화한 첫째 황자가 사라진 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노튼이었다. 노튼은 철저히 군주로 길러졌다.

그리고 노튼을 황태자로 결정하려는 때, 루카스가 다시 나타났다.

원래는 생득권에 의해 루카스가 황태자를 받아야 함이 옳았지만, 작금의 제국 상황이 문제였다.

겨우 봉합한 남부와, 자치권을 획득한 북부.

황제의 뒤를 이어 원만하게 그 둘에 매달린 실을 조종할 사람이 필요했다. 단순히 루카스가 장자라고 해서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간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해서, 황제는 두 황자를 두고 일단 관찰하기로 했다.

언뜻 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노튼은 제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계곡의 마법사를 치웠다. 루카스는 더 이상 돈 나올 구석이 없던 제국의 조세 제도를 개편해 황성의 창고를 채웠다. 둘 다 똑똑했다.

하지만 어떤 놈이든 더 잘하는 놈이 황위를 가져가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5년이 흐른 것이다.

“폐하도 이제는 슬슬 결정을 내리셔야 할 때가 됐지.”

“슬슬은 무슨. 진작 내렸어야 했지.”

리네트가 뾰족한 말투로 지껄였다.

“이게 무슨 점심에 빵 먹을까, 면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5년씩이나 후계자 문제를 질질 끈 것 자체가 나는 당황스러워.”

“나도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끌게 될 줄은 몰랐어.”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제국 상황이 골치 아프다는 뜻도 됩니다.”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폐하께서 들고 계신 저울추를 기울게 할 만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장 제국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겠죠.”

“지금 제국이 당면한 문제라…….”

리네트가 팔짱을 끼었다.

“남부의 왕국 봉합, 북쪽의 자치권 외에 뭐가 있지?”

“글쎄-”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졌다.

“폐하는 계속해서 마법 범죄에 대한 사법권을 마탑에서 빼앗아 오고 싶어 하셨지만, 그건 어렵고.”

“마법 범죄라는 것도 결국은 마탑에서 구별해 줘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귀라르델에 철도 놓기?”

“철도?”

리네트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카스가 설명했다.

“귀라르델 산맥을 위시한 영지들에서는 ‘탄’이 나.”

탄. 불을 일으키는 검은 돌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차의 연료로도 쓰였다.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그 귀라르델 산맥의 탄을 나르기 위해 철도 사업을 시작했지. 하지만 자치권을 가져간 귀라르델 주변의 영지들이 철도 건설을 결사반대하고 있어.”

“아하…….”

“그래서 아버지 대의 철도 사업은 정작 가장 중요한 귀라르델을 잇지 못하고 있지.”

“하지만 그걸 우리가 바로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군.”

“당신이 없을 때 이미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리네트가 고개를 내젓자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랬어?”

“예. 그래서 저희는 막다른 길에서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아하.”

리네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두 사람이 ‘하녀들의 수다’를 누가 펴냈는지 찾아 헤매고, 펜플을 납치한 것도 결국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했던 행위였던 것이다.

남부와 북부에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해서 두 사람은 소문을 이용해 루카스에게로 저울추를 기울게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실제로 이 교착 상태를 이어 간다면 결국 불리한 것은 루카스다. 루카스의 지지 기반은 진보파 젊은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기반이라는 건, 실제로 영향을 끼치기는 어렵다는 뜻이지.”

정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이 든 귀족들은 낸터킷 황후의 입김을 받아 대부분 노튼의 편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상황이 이어지면 저울추는 자연스럽게 노튼에게로 기울 것이다.

“그 서릿발같이 살벌한 황자님이 패권을 쥐겠군.”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무게추를 더할 방법이 딱히 나오진 않지.”

리네트가 머리를 긁었다.

“음, 소문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 나쁜 방법은 아냐.”

“그런가?”

“어쨌든 처음 이 이야기를 했던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자못 다르니까 말이야.”

재미있었다. 루카스는 눈앞의 여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새 저택에 들어와 드레스를 다시 배달하거나, 요리사를 바꾸는 일에 관해서 그녀는 요만큼도 흥미 없이 굴었다. 빨리 하루를 끝내게나 해 달라고 했지.

하지만 아까까지는 지쳐서 소파에 늘어져만 있던 여자가, 자리를 깔고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니 대번에 눈빛이 바뀌어 반짝이고 있었다.

루카스는 제 멍청했던 머리를 깨 버리고 싶었다. ‘하녀들의 수다’를 쓴 사람이 여자라는 것에 놀랐던 자신은 얼마나 멍청했던가. 놀랄 거리는 얼마든지 있는데.

평민으로 살았던 시절, 주변 여인들과 만나지 않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라고 부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경험뿐이었다.

‘고작 그것 가지고 여자가 어쩌고 하다니, 나도 한심한 종족이군.’

리네트라는 여인 덕일까. 여태까지는 선을 긋고 피상적으로만 굴었는데, 다른 여인도 이럴까 싶었다.

여자들이 모두 이런 사람들이라면, 자신은 퍽 재미있는 자들을 놔두고 멍청한 남자들과만 이야기해 온 것 아닌가.

그때, 키리에가 입을 열어 루카스의 상념을 부쉈다.

“가장 달라진 상황은 아무래도…….”

“그래.”

리네트가 키리에 쪽을 바라보고 웃었다.

“나지.”

“……부정하고 싶습니다만, 그럴 수 없는 게 한입니다.”

생긋 웃는 눈동자를 보며 키리에가 투덜댔다.

“얼마나 좋은 조건이야? ‘리시스트의 아침’을 쥐고 있는 데다가, 거짓을 판별할 수 있지. 진짜 정보만 다루기에도 지면이 모자랄 정도야. 게다가-”

리네트가 노래하듯 말했다.

“완전 귀엽지.”

“누가요?”

“내가.”

“대관절 누구의 의견입니까?”

“안 귀여워?”

“명심하세요. 제 동생은 알렉사 레미시어입니다.”

알렉사를 매일 보고 있는 사람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냐?는 뜻이었다.

단호한 키리에의 말에 리네트가 입술을 비죽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동생을 예뻐하는 오빠였다고 그래?”

“알렉사가 태어날 때부터입니다.”

“내가 귀엽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줄 테야.”

“맘대로 해 보십시오.”

키리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와 당신이 발을 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짜 짜증 나는군, 키리에 경.”

“감사합니다.”

퍽 멋들어지게 인사하는 키리에를 향해 리네트가 짜증 나는 표정으로 성의 없이 박수 쳤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루카스는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여워.”

“…….”

“귀여우니까 계속해.”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가 파스스 깨졌다.

리네트는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와는 사뭇 달라. 가지고 있는 수단이 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당신 앞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판별해 줄 수 있어.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는 대강이라도 알 수 있겠지?”

“물론이지. 덧붙여 소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까지 더하면, 당장이라도 그대 발등에 입 맞추고 싶을 정도지.”

리네트가 도도하게 턱을 쳐들고 손등을 들었다.

“발등은 됐고, 손등에 그대의 입술을 허하겠어요.”

“감사합니다.”

루카스가 연극적으로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셋 다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 손에 쥐어진 걸 어떻게 써야 할까?”

리네트가 소파에서 몸을 폈다.

“로가나를 살롱에 들여보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생각한 게 있지.”

로가나가 가지고 온 소문은 대체적으로 리네트의 이야기였으나, 리네트는 그 밖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로가나를 통해 수집했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판별하고, 진짜는 모아 뒀다.

“이걸 체계적으로 키우는 거야.”

“흠.”

“황자님이잖아. 간자들 정도는 있지?”

“그야 그렇긴 한데…….”

답하던 루카스가 안색을 바꾸었다.

“그렇군. 그대는 진짜를 판별할 수 있는 거군.”

무시무시한 일, 이라고 농담 삼아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였다.

리네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루카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바라봤다.

루카스 또한 간자를 두고 있다. 그 수는 노튼의 것보다는 규모가 적지만, 적어도 제국 전역에 보내 두었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루카스는 리네트로 하여금 그들이 가지고 오는 정보들을 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제국에 단둘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 프라임 공작가는 수도에 진출하지 않은 지 이미 이십 년이 넘었다. 프라임 공작가가 동부에서 꿈쩍하지 않는 진의는 간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자들은 젊은 프라임 공작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보만 끊임없이 물어 올 뿐이었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판단할 수 있었다. 프라임 공작이 사냥을 나간 것은 진짜인가, 아닌가. 그가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진짜인가, 아닌가. 진짜들을 모으다 보면 진의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자명했다.

“그걸로 기관을 만들 거야.”

“기관…….”

“길드라고도 할 수 있지.”

리네트는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웃었다.

“대놓고 당신 직속의 기관인 것이 알려져서는 안 돼. ‘리시스트의 아침’과 같아. 소유주는 가장 공공연한 비밀이 될 거야.”

‘리시스트의 아침’의 소유주가 베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리네트가 그 주인인 것과 마찬가지다.

“애초에 바깥에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소유주를 새삼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냐. 드러낼 거야.”

드러낸다고? 키리에가 의아한 표정이 됐다.

리네트는 이 고지식한 기사님을 역시 미워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제게 퍽 무례하게 굴긴 했으나, 그건 그가 다른 길로 돌아갈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은 편법의 여왕이지.

“정보를 팔아야지.”

“판다고요? 대체 왜…….”

기껏 모은 정보를 돈 몇 푼 받고 판다고? 왜 그런 짓을, 하고 생각하던 키리에가 뭔가에 얻어맞은 표정이 됐다.

리네트는 씩 웃었다.

“그래. 가짜를 팔아야지.”

진짜를 빌미로 가짜를 판다. 편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진짜 정보를 돈푼깨나 받고 넘기고, 적에게는 가짜를 판다.

물론 항상 가짜를 팔 수는 없다. 공신력이 의심받으니까.

열 가지의 가벼운 진짜를 팔고, 정말 중요한 한 가지는 가짜를 판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짜를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타이밍도 중요하고.

키리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퍽 장기전이 되지 않겠나?”

루카스가 물었다.

“아마 그대가 마냥 이곳에만 있지는 못할 거야. 지금은 레미시어 후작가의 보호라는 이름하에 나와 있지만, 자유롭게 활동하기는 어려울 거다. 공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래.”

리네트가 여상하게 답했다. 공작이 없는 공작저에서 에드가의 일이 일어난 이상, 리네트가 받고 있는 보호는 말 그대로 임시 보호일 뿐이었다.

어쨌든 자식을 보호할 권리부터 슬하에 둘 권리는 모두 그 부모에게 있었으므로.

분별력이 없다는 핑계로 이멜다에게서 리네트를 빼앗아 오는 것은 퍽 쉬웠으나, 카멜리아 공작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백안’을 가지고 있다. 카멜리아 공작은 절대 그녀의 이탈을 좌시하지 않으리라.

“괜찮아. 그래서 생각해 놓은 게 있거든.”

“뭔데?”

“황자 전하. 혹시 약혼녀는 얌전한 여자가 좋아?”

루카스는 리네트의 물음에 빙그레 웃었다.

“그걸 왜 묻지?”

“그야 얌전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리네트가 손가락을 세웠다. 그녀의 습관이었다.

“-다음 생에 만나라고.”

루카스는 결국 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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