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푸른 수국의 록시온
황궁의 살림을 담당하는 궁내부장은 보름 후에 록시온을 열겠다는 루카스 황자의 말에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 그는 루카스를 이해하기로 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받은 이상 황자는 황제에게 감사의 뜻을 화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황자가 궁내부장을 마구 쪼아 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궁내부장에게는 울며 수락하든, 흔쾌히 수락하든 어쨌든 수락하는 선택지뿐이었다.
그나마 황자의 태도가 사뭇 정중했기에 그는 황자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며 체면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단지 일이 많고 바빠서가 아니다. 준비 과정에서 낸터킷 황후의 시녀들이 계속해서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낸터킷 황후는 록시온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궁내부에서 관리하는 접시와 다기들을 모조리 꺼내 갔다.
황후 궁에서 쓰겠다는 명목이었으나, 초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접시들을 하필이면 이 시점에 모조리 차출해 버린 목적은 누가 봐도 뻔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궁내부장은 보름간 제가 해내야 할 일이 뭔지 알아차렸다. 그는 화려하면서도 심플하고, 조촐하면서도 빈틈없는 연회를 만들어 내야 했다.
황후가 트집 잡거나 불쾌해하지 않을 만큼 초라해야 했으나, 황자의 면을 세울 만큼 멋지고 위엄 있는 연회.
궁내부장은 그만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록시온은 근 십 년 넘게 아무도 쓰지 않아 낡아 있었다. 낸터킷 황후가 재수 없다고 말한 궁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눈치가 보일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궁내부장은 록시온의 내부를 모두 뜯어내고 푸른 리넨 위에 금실로 가볍게 자수를 놓은 커튼과 침구를 들여보냈다. 그나마 계절이 가벼워서 다행이었다. 겨울이었다면 꼼짝없이 보름이라는 기한 안에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회를 일주일 남겨 둔 날.
급한 전갈을 받고 록시온에 들어선 궁내부장은 펄쩍 뛰었다.
정원이 몽땅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 * *
“……누가 정원을 밀었다고?”
“……황후 궁의 정원사들이…….”
궁내부장은 몹시 면목없다는 듯, 하지만 억울하다고 강변하는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봤다.
루카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궁내부장이 어제 정원이 당한 참변을 주절주절 늘어놨다.
“요 며칠 밤새서 꽃을 심느라 본성의 정원사들이 녹초가 다 되었던 참에, 황후 궁의 정원사들이 도와주겠다며 나서 주지 뭡니까.”
접시를 다 가져가는 황후의 저열함을 보면서도 궁내부장은 그저 황후 전하가 심술이 좀 과하시다 생각하며 그게 끝이겠거니 했다. 그것이 10년 동안 낸터킷 황후만 모셔 본 궁내부장의 순진함이었다.
어쨌든 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궁내부장과 황후는 대체적으로 꽤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 첫째 황자님의 일이라고 하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황후궁의 정원사들은 밤새 정원을 깔끔하게 정리해 놨다.
너무 깔끔해서 문제였다.
루카스는 록시온의 정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라고 할 만큼 록시온의 정원은 흐드러지는 수국으로 유명했다. 아름다운 수국들이 몇십 년 동안 록시온의 앞을 장식했건만…….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푸른 풀뿐이었다.
궁내부장의 안색은…… 아마 시체를 봤다고 해도 저것보다 더 창백하진 않을 것이다. 꽃도 없고, 나무도 없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은 푸른 잔디의 록시온이 되어 있었다.
아마 마탑에서 파견 나와 있는 황궁 마법사들이 보면 분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연회에 맞춰 수국을 피우기 위해, 새로 옮겨 심은 수국들을 며칠 내내 마법으로 달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국들은 모조리 베였다.
루카스는 혀를 찼다.
“그 많은 나무를 어떻게 다 베었다던가? 아니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군.”
말의 내용과 달리 말투는 꽤 유쾌해서 궁내부장은 조금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첫째 황자는 자신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이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이런 유치한 짓을 하실 줄도 아는 분이었군.”
“그…….”
“됐네. 자네 잘못이 아닌 것을 알아.”
루카스가 손을 내젓자 궁내부장은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제국 황성의 살림을 도맡는 이다. 제 아랫사람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아랫사람이었다.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무리한 일정을 강요한 루카스의 탓이 될 공산이 컸다. 정색하면 그만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그나마 풀은 남겨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가제보라도 어떻게 쳐 보겠습니다.”
“그늘도 없으니 가제보는 쳐야겠지. 꽃은…… 화분을 구해야겠군.”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니만큼 수국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끙,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 계절에 수국을 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나, 이만한 규모의 수국 화분을 대체 일주일 만에 어디서 구해 올지 머리가 아팠다.
그것보다 더 머리가 아픈 것은…….
“혼나겠군…….”
“예?”
그의 혼잣말에 궁내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시간 없으니 정원은 일단 고민해 보는 걸로 하고 다른 것부터 하도록 하지.”
“예에.”
궁내부장은 한숨을 쉬며 바닥재를 바꾸기엔 시간이 없어 카펫을 전부 새로 바꾸겠다는 둥, 깨진 조각상들을 교체하기 어려워 천 장식을 두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갔다.
역시 보름만에는 무리였나, 생각하며 루카스는 정원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형님.”
“……노튼.”
제게 말 건 이는 북쪽 산맥의 겨울 서리가 내린 듯 살벌한 아름다움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신의 배다른 동생, 노튼이었다.
뒤에는 책략가인 라베노바 백작과 호위 기사 두어 명이 함께였다.
루카스는 빙그레 웃었다.
“웬일이지?”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에 찾아와 보았습니다…… 만.”
“그렇군.”
노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는 시린 듯 푸른 기를 띤 보랏빛 눈으로 록시온의 풀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럴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라베노바 백작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수국이…….”
그 말에 루카스는 확신했다. 황후 혼자 저지른 일인가.
동시에 그는 이 상황이 유쾌해졌다. 어쩐지 노튼과 제 표정이 뒤바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웃고 있고, 노튼은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자신은 단순히 어이가 없을 뿐이고, 노튼은 아마 제 어미와 손발이 맞지 않아 이렇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괴리감에 루카스는 이젠 정말로 웃고 싶어졌다. 물론 정말로 지금 웃어 버린다면 눈앞의 두 사람은 별 희한한 광경을 다 본다는 듯 루카스를 쳐다볼 것이기에, 그는 간신히 얼굴을 실룩거리는 데서 표정 바꾸기를 멈추었다.
“그래. 몇 년째 방치한 궁이라 수국 또한 아름답지는 않더군. 그래서 막 들어낸 참이야.”
“형님께서요?”
“음.”
루카스는 노튼의 물음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턱을 어루만지며 노튼 쪽을 바라봤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시일이 부족해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부끄럽군.”
“전하께서 부끄러우실 일은 아닙니다.”
루카스의 말에 나선 것은 라베노바 백작이었다.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애당초 황자비를 맞아들이셨다면 비께서 마땅히 챙기셨어야 할 일입니다. 익숙하시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여인들의 일이니 창피해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라베노바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것 또한 조롱이었다.
얼뜨기 놈에게 제 딸을 줄 놈이 어디 있겠어. 여태껏 황자비도 맞지 못해 여자가 할 일을 직접 해야 하는구나, 황자여.
말뜻은 명백했고, 루카스 또한 그 조롱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설마 조롱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라베노바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러나 이어진 루카스의 말에 그의 입매가 굳었다.
“마땅히 여인이 할 일인데도 내팽개친 분도 있는데,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
낸터킷 황후를 빗댄 말이었다. 노튼의 이마도 확 구겨졌다. 하지만 루카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백작.”
“…….”
“어쨌든 황후 전하께는 참으로 감사하다고 전해 주었으면 좋겠군.”
노튼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분명 ‘무엇이-’라고 물으려다가 만 것일 테다. 그야 황후에게 직접 가 물으면 해결될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입을 닫았겠지만.
눈치 빠른 라베노바 백작은 이 정원이 아무래도 황후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줄 것이지? 네게도, 황후 전하께도 록시온이 더 이상 불길한 곳이 아니기를 바라며 열심히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루카스가 문득 뒤를 넘겨다봤다. 무엇 때문인지 다시 이쪽으로 온 궁내부장이 뜻밖의 광경에 곤란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첫째 황자만 해도 부담스러운 참인데, 둘째 황자와 기타 등등까지 서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곳에 끼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이어 말했다.
“……궁내부장이 가장 고생하고 있지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튼은 궁내부장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제 기억 속의 록시온은 항상 폐허였으니까요. 지금 이 모습만 해도 제게는 꽤 새롭습니다.”
“그래. 네게 록시온이 새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남았으면 좋겠구나.”
“제가 기대하는 새로움은 따로 있지만요.”
궁내부장이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형님이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너무나 파다한 나머지, 그날 오신다는 아가씨가 참 여러모로 기대되지 뭡니까.”
“그런가.”
“예.”
“네겐 그녀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많을 텐데. 레미시어 아가씨도 있고.”
노튼이 미소 지었다.
“물론 알렉사가 제게 귀띔해 주기는 했습니다. 아름답고 선한 아가씨라더군요. 영리하고 습득이 빨라 과연 형님께서 반하실 만하다 들었습니다.”
“거참. 기뻐해야 할지, 민망해해야 할지.”
루카스는 머리를 긁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로 저 아름다운 황자가 사랑에 빠졌나 보다, 하고 의심할 만한 얼빠지고 밍숭맹숭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말하던가.”
“하지만 저는 그녀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
“저는 형님이 사랑에 빠진 모습이 지독히도 궁금합니다.”
노튼의 말 또한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라베노바 백작에게 비아냥대는 버릇을 배웠군.’
루카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오 년간 궁정의 어떤 아가씨들도 건드리지 않더니, 이제 와 온 동네에 요란 뻑적지근하게 소문이 나도록 굴고 있으니 그 진의가 궁금하다는 뜻이렷다.
더 고상하게 받아칠 수도 있으나, 그건 루카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 노튼과의 말싸움에 시간을 들이기엔, 록시온의 정원 꼴이 너무나 처참했다. 이쯤에서 루카스는 말버릇 나쁜 동생을 보내 버리기로 했다.
“그래. 걸어서 반 시간은 걸리는 거리인 록시온까지 굳이 네 궁금증을 말하러 올 만큼 나를 사랑하는 걸 보니 과연 그렇구나.”
“…….”
“하지만 노튼. 앞으로는 굳이 내게 그런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단다.”
루카스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네가 별로 안 궁금하거든.”
라베노바 백작에게 나쁜 버릇 물들었다 제가 혀를 찰 처지가 아니었다. 루카스는 아무래도 남작의 도박장에서 그녀와 입 맞췄을 때, 리네트 카멜리아의 혀에 묻은 독이 제게 옮겨 온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물론 노튼의 벌게진 얼굴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 * *
“그래, 내가 그랬답니다.”
황후 궁에 들어가자마자 록시온의 정원에 손댔느냐 묻는 노튼에게 돌아온 황후의 대답은 여상하기까지 했다. 황후는 새로이 손질한 손톱을 내려다봤다가, 느리게 노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을 물으러 여기까지 왔습니까, 노튼.”
“예.”
“뭐가 문젭니까?”
노튼은 이마를 짚고 싶었다. 뭐가 문제냐고? 제 어미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자신을 위해 독단적으로 굴곤 했다. 그 독단들은 대부분 노튼에게 지엽적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눈에 보이는 심술을 부리는 것은 좀 달랐다.
노튼은 꽤 오랜 시간 제 성질을 눌러놓고 살았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큰 다음부턴 언제나 많은 이들에게 자신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황자로 보이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루카스 때문이었다.
노튼이 어릴 적 루카스는 실종됐다. 발단은 황제의 실수였으나, 배경에는 낸터킷 황후가 있었다.
황제는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루카스를 찾았지만 첫째 황자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 그때부터 노튼은 하나뿐인 황자로, 황제의 후계자로 고이 길러졌다.
그러나 가끔 황제가 사라진 첫째 황자에 대해 보이는 집착을 노튼은 알았다.
“착하고 온순한 아이였지.”
온순한 성정은 황태자의 자격으로는 부족했으나, 황제가 실종된 아들을 그리워하기에는 충분했다.
노튼은 그래서 언제나 자신이 온순한 황자로 보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 열댓 개의 왕국을 정복한 제 아비는 노튼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노튼에게 던지는 ‘노력은 지배자의 미덕이 아니다.’ 같은 말들로 미루어 보면.
하지만 루카스가 나타난 뒤, 노튼은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해 감사를 보냈다. 모두가 온순하면서도 현명한 둘째 황자님을 지지했으니까. 그렇기에 노튼은 지금까지도 선하고 온화한 황자님이었다.
한데 낸터킷 황후는 이런 식으로 노튼의 노력을 무너트리곤 했다. 그녀가 루카스에게 눈에 다 보이는 심술을 부리노라면, 사람들은 노튼도 알면서 묵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수군대곤 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황후 궁에서 보낸 정원사들을 부리면…….”
“이달이 가기 전에 록시온의 수국을 모조리 뽑아 버리는 것이 좋다고 내 점복이 조언했답니다.”
노튼의 말에 황후가 대꾸했다. 노튼의 눈썹이 꿈틀했다.
“점복이요?”
“록시온에 무성히 자란 수국 꽃나무들의 푸른 그림자가 똘똘 뭉쳐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거라고 그랬습니다.”
“…….”
그깟 미신 때문에 이렇게 속 보이는 일을 벌였다고? 노튼은 이를 악물었다. 여자들이란! 점쟁이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그러나 황후는 그런 노튼의 속내를 안다는 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깟 연회가 끝나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없었답니다. 게다가-”
“…….”
“이 정도 심술을 부리는 것은 여자들의 권한이지요.”
노튼이 입을 다물자 황후가 피식 웃었다.
“질투는 여자들의 것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 정도 심술부리는 것이 뭐 어떻단 말입니까. 다들 수군대긴 하겠지만 아랫것들 떠드는 것이 큰 문제나 된답니까.”
노튼도 일부 동의하기는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황후가 노튼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루카스가 사랑한다는 그 계집이 아름다운 풍경 사이에서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베노바 백작은 그제야 약간은 알겠다는 표정이 됐다.
“록시온의 연회는 대부분의 고위 귀족이 모두 초대받았습니다. 귀족들은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 아니라, 살풍경한 잔디 위에 선 미움 받는 공녀를 보겠군요.”
“그래요. 점복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 광경을 상상해 보니 내 마음에 쏙 들었답니다.”
황후는 환하게 웃었다. 스무 살 남짓한 아들이 있는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얼굴은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푸른 수국 사이에 에워싸인 그 계집을 보고, 귀족들이 황후 어쩌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늘 하나 없는 록시온에서 그 공녀를 보며 사람들은 공작가의 골칫덩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겠지요.”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일 뿐이라도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그 계집을 모든 이들에게 미움 받는 황자비 후보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노튼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미워하는 대상으로는 제 이름이 거론되겠지만, 그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한들,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미움 받는다는 표가 나 버리면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그 연회에는 나도 참석할 테니까요.”
“……다음에는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서 노튼은 결국 그 정도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 * *
“정원이 다 밀렸다고?”
공교롭게도 같은 소식을 접한 리네트 또한 손톱 손질을 받고 있었다. 물론 상황은 조금 달랐지만.
리네트는 안가의 의자에 눕듯이 앉아 그녀의 옆에 무릎 꿇고 앉은 로가나로부터 살뜰하게 보살핌을 받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로 살뜰하냐면, 루카스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앞에 앉은 루카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음. 아무것도 없어.”
리네트는 입을 딱 벌렸다.
“꽃도 나무도 아예 없어?”
“그래. 수국만 뽑은 게 아니라, 록시온에 있는 어지간한 나무는 다 밀어 버렸어. 그나마 볼만하게 늘어져 있던 능소화도, 등나무도. 하루만에 그 짓거리를 다 해 버리다니, 황후 궁 정원사들의 능력을 칭송해야 할지.”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록시온은 아무리 폐궁이라고는 하나, 불과 이십여 년 전까지도 황후 궁으로 쓰이던 곳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궁내부장도 결국 록시온을 모두 개방하는 것은 포기했다. 연회에 개방되는 것은 황후 궁 앞의 정원과 궁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작은 중앙 홀이었다.
그러나 그 정원이 정작 싹 밀려 있어서야 영 볼품없는 꼴이 될 것이 자명했다. 정문 앞의 정원을 모두 화분으로 채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 위에 놓인 꽃 화분이라니, 참 없어 보이는 광경이다.
리네트는 그 광경을 상상하다가 결국 아하하 웃어 버렸다. 그 앞에서 루카스는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영 볼품없는 곳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게 생겼는걸. 미안하군. 황후 전하가 이렇게까지 하실 줄 몰랐던 내 실책이다. 성 후문의 소각장에 가니 이미 시든 정원수들만 산더미같이 쌓여 있더군.”
“그런 게 뭐 실책이야.”
리네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어떻게 할지 예상할 수 있는 건, 딱 그만큼 나쁜 사람이나 가능한 거지.”
“용서해 주시니 황공 무지로소이다.”
“시끄럽고, 난 상관없어. 록시온의 푸른 수국이 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 기대해 온 인생도 아니고.”
그 말에 손톱 손질을 하던 로가나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아녀요, 아가씨!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음?”
“아가씨는 가장 좋은 것만 드시고 가장 아름다운 걸 마땅히 누려야 할 분이신걸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로가나와 리네트가 알게 된 기간을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수준의 덕담이었다. 리네트는 애매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카스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우정이 깊어졌는걸.”
“놀리지 마.”
리네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로가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다음부터 정말로 열성적으로 리네트의 종을 자처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택을 쓸고 닦는 것도 모자랐다. 로가나는 리네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한 다음, 그녀의 간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니까…….
“살롱에서도 모두 아가씨의 데뷔를 기대하고 있는걸요. 가장 화려하고 멋진 분이실 거라고요. 살롱에서 아가씨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뿌듯한지 아세요? 웃는 낯을 버리고 아가씨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공주처럼 아름답고 성녀처럼 선한 분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애플이 하녀들 사이의 소문 수집 담당이라면, 이쪽은 한량들이 모이는 살롱의 소문 담당인 것이다.
로가나는 한낮의 살롱에서 귀족들 사이를 누비며 리네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다람쥐처럼 물어 날랐다.
“……고마워, 로가나. 일단 고맙고, 차를 좀 가져다줄래?”
리네트가 영 민망한 얼굴로 로가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로가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리네트의 손톱에 꽃물을 들이던 것을 꼼꼼하게도 마무리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루카스는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볼을 부풀렸다가, 리네트의 뾰족한 시선이 닿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했다.
“언제 저렇게 충성스러운 강아지가 된 거야?”
“……본인은 그 저택에서 나를 만났을 때부터라고 주장하던데.”
리네트가 조금 빨개진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하며 말했다. 루카스는 일부러 리네트 옆으로 다가앉아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뭐야?”
“나는 네가 칭찬 같은 것에는 그리 약해지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건 그냥 내게만 가혹한 건가?”
“내가 네게 다정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이야?”
“이런.”
루카스는 리네트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의뭉스레 웃었다.
“이토록 열성적인 구혼자에게 한 치의 웃음도 허하지 않으시니, 제 가슴이 더욱 불타오르는군요.”
“장난치지 마.”
리네트는 루카스의 가슴을 밀어 버리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안가를 꾸미며 급하게 들여온 의자라고는 하지만 푹신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늘은 어떻게 할 거야?”
한여름의 정원에 나무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루카스는 궁내부장이 가제보를 가져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과연 20여 년 경력의 궁내부장이다. 임기응변이 대단했다.
“한여름이니 꽃들도 금세 지쳐 버릴 테지.”
“그야 마법이 있으니까.”
궁내부장은 아쉬운 대로 마법사들에게 부탁해 싱싱한 꽃들을 연회장 곳곳에 꽂아 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역시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라는 이름이니만큼, 그 거대한 수국들의 향연이 펼쳐지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수국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 아무리 작게 연다 해도 황궁 연회인 데다, 20여 년만에 열리는 록시온이니 궁내부장의 부담이 대단해.”
“흐음.”
리네트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루카스에게 물었다.
“마법이 있다는 거, 꽃을 연회 내내 싱싱하게 하는 정도야?”
“그래. 꽃을 자라게 하는 건 어렵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더군.”
마법사들이 마탑 밖에서 마법을 쓸 때는 상당한 제약이 걸린다. 특히 생명에 관한 부분이 그랬다. 꽃을 싱싱하게 유지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꽃을 아예 처음부터 틔우는 것은 안 된다.
그 얘기를 듣던 리네트가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 이런 건 어때?”
이윽고 리네트의 이야기를 듣던 루카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리네트.”
“응?”
“그대는 정말-”
그 말에 리네트는 어디 마음껏 칭찬해 보라는 듯 고개를 오만하게 쳐들었다.
루카스가 미소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남 짜증 나게 하는 데는 가히 천재적이군?”
쿠션이 제국의 첫째 황자를 향해 날아갔다. 물론 무예가 출중한 황자는 이를 가뿐히 막아 내고 싱글벙글 웃었다.
제 가짜 연인은 참으로 천재적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청혼하고 싶을 정도로.
* * *
푸른 수국의 록시온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몇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백여 명 정도다.
그러나 그 이백여 명은 수도 리시스트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들의 구성은 다양했지만 관심사는 대부분 비슷했다.
“폐하께서도 심술궂으시지.”
수도 기사단장인 이단 경이 혀를 찼다. 그를 수행하는 것은 키리에 레미시어였다. 원래라면 루카스 옆에 있어야 하겠지만, 오늘만큼은 키리에도 객으로 초대됐기에 이단 경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대관절 황자비도 아직 맞지 않은 황자님께 록시온을 주시는 게 마땅한 일이더냐? 하여간 30년 내내 성에만 처박혀 계시니 심보만 고약해져서는.”
……황제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의 말버릇으로는 심히 대단했으나, 키리에는 이단 경에게 워낙 익숙했기에 입을 닫았다. 이단 경은 그런 키리에가 못마땅한 듯 그를 흘겨보았다.
“황자님께서는 뭐라시든?”
“……항상 같으시지요.”
“그냥 허허실실 또 웃어 놓고 너만 짜증 나게 하시더냐.”
그는 현 황제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황가 곁에서 먹은 짬밥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그 험담의 수준도 어마어마했다.
키리에는 생각 같아서는 제 울분을 다 토해 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록시온의 정문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이단 경은 휘적휘적 걸으며 짜증을 냈다.
“내 그 황자님이 참으로 만만하지 않은 분이라 생각은 했다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귀찮게 하실 줄은 몰랐어.”
“뭐가…….”
“노튼 황자님이야 연회니 뭐니 잘 나다니신다지만, 루카스 황자님이 연회를 여네 마네 할 타입으로는 안 보였거든. 그것도 한여름에.”
키리에는 입을 닫았다.
리시스트는 대체적으로 기온이 일정하지만 여름만은 달랐다. 봄과 가을, 가을과 겨울이 크게 다르지 않으나 여름만큼은 해가 길고 뜨거웠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을 싫어했다. 이단 경도 마찬가지였다.
“거추장스러운 거 싫어하는 줄만 알았더니. 엥이. 연애가 몹쓸 것이지.”
“…….”
이번에는 일부러 입을 닫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잃어서 대꾸하지 못했다. 그야 남들이 그렇게 봐주길 위해 루카스가 그렇게 리네트를 싸고도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키리에는 주변의 이런 평가를 영 견디기 어렵던 참이었다.
이단 경은 슬슬 희게 세고 있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키리에.”
“예.”
“어떻더냐.”
리네트 카멜리아에 대해 묻는 것이다.
키리에는 쉽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키리에가 보는 리네트 카멜리아는 오만불손하고 무례했으나, 영리했다. 이상하고 신경 쓰였다.
그래서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골라야 했다.
“사람의 결이라는 것이 그리 가지런하지만은 않은 일이라…….”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묻는 게냐. 너보다 몰타가 훨씬 말을 잘하겠구나.”
몰타는 이단 경이 키우는 개 이름이었다.
키리에는 코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직접 보시지요.”
“그렇잖아도 내 그럴 참이다. 그나저나.”
“예.”
“너 ‘계곡’ 간다.”
“예!?”
키리에가 고개를 번쩍 들자 이단 경이 혀를 찼다.
“그렇게 황자 뒤만 졸졸 쫓아다니지 말고,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너라.”
“하지만…….”
“이제 와서 계곡의 마법사가 기어 나올 것도 아니고, 가서 한 계절만 쉬다 오라는 거다.”
오랫동안 제국의 골칫거리였던 계곡의 마법사는 몇 년 전 노튼 황자와의 전격적 협상으로 인해 칩거에 들어갔다.
계곡 앞에 상시 주둔하고 있던 기사단들은 3개월 단위로 바뀌어 가며 파견됐다. 얼마 전의 제비뽑기에서 자신은 파견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단 경이 키리에의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곧 황자들이 부딪힐 거다. 황제 폐하도 이제 황자들이 슬슬 신경전만 벌이는 것이 지겨우신 모양이지.”
그걸 알고 계시면서 저를 계곡으로 보내시는 겁니까, 키리에는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단 경은 키리에가 입을 열게 두지 않았다.
“록시온을 내려 준다는 건 그런 거다. 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개전 신호나 다름없지.”
“…….”
“계곡은 수도 기사단이라면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었을 때 추첨돼 계곡으로 보내지느니, 빨리 다녀오는 게 낫다는 소리다.”
키리에는 할 말을 잃었다. 이단 경의 회색 눈이 키리에를 향했다.
“키리에 레미시어. 나는 네가 루카스 황자님을 모시겠다고 말했을 때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쎄.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적어도 말주변 없는 내 부하가 가만히 있다가 손발 잘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지.”
수도 기사단장은 리시스트의 경비를 모두 책임지는 직무다. 게다가 황제의 소꿉친구다.
이단 경은 자신의 민감한 위치를 잘 알고 있었고, 여태까지는 중립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그런 그도 아끼는 부하가 계승 싸움에 휘말렸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루카스 황자가 고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
“부디 내 부하의 주인이 좋은 배필을 고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군.”
안목, 안목이라……. 키리에는 이단 경의 말을 곱씹으며 록시온으로 향했다.
“어쨌든 아름다운 록시온의 정원을 다시 보게 되는 것만큼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약간의 기대감이 서린 말투였다.
록시온에 한창 푸른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시절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대로 황후들이 써 온 장소이니만큼 그 정원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록시온이 열린 지 고작 보름이라지만, 수십 년을 그 자리에 머물러 온 수국나무들은 여전하겠지.
그러나 록시온의 정문 앞에서 이단 경의 기대는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단 경이 황당한 눈으로 록시온을 바라봤다. 당황한 것은 이단 경뿐만은 아니었다. 먼저 록시온에 도착해 있던 귀족들 또한 그랬다.
이 자리에 초대된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록시온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오색 빛깔의 꽃들과 아름다운 푸른 수국이 자리하던 록시온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에는 그저 푸르기만 한 잔디와 흰 가제보뿐이었다.
“꽃이…….”
“없군요.”
어쨌든 연회인지라 잔디 위에는 수많은 가제보와 연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채 보수하지 못한 조각상들은 아름다운 천 장식으로 가려지거나 치워져 있었고, 정원 가운데에는 연회 테이블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한 얼음 조각도 있었고, 구색은 어쨌든 갖추었으나…….
“지나치게 조촐하군. 뭐야, 이게?”
“이단 경.”
때마침 누군가가 이단 경의 옆으로 왔다. 키리에는 움찔했다. 제 아버지였다.
“레미시어 후작. 오랜만입니다.”
“격조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아들을 항상 돌보아 주셔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레미시어 후작은 키리에 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렇게 유유히 읊었다. 이단 경은 눈썹을 조금 꿈틀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응대했다.
“돌본다기에는 키리에 경이 너무나 훌륭하지요. 그런데…….”
“예. 당황하셨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레미시어 후작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랬다. 록시온의 연회는 좋은 쪽으로 말하면 목가적이었고, 대놓고 말하면 단출했다. 당장 꽃이 한 송이도 없는 것도 그렇거니와, 테이블 위의 식기 또한 평범했다.
이단 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소문을 잘못 들은 것인가?”
“소문이라면…….”
“그 루카스 황자가 제 구혼을 위해 사재를 탈탈 털어서 창고의 바닥이 보일 지경이라던데.”
그제야 레미시어 후작의 눈이 키리에를 향했다. 너는 뭐 모르냐고 묻는 눈이었으나, 키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연회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최근 황자님을 뵌 지 좀 되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여기서 제가 설명하며 나설 입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제 아버지가 힐난한다고 해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성격이라면, 애초에 루카스를 지지하고 나서지도 않았으리라.
“놀라셨습니까, 두 분.”
금세 다른 귀족이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키리에도 익히 얼굴을 아는 이였다. 곧이어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술잔이 오가고, 한담이 이어졌다.
“저도 놀랐습니다만…….”
“이건 궁정 살림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루카스 전하의 성향을 나타낸 걸까요…….”
“일설에는 황후 전하가 록시온의 식기 중 쓸 만한 것은 모두 빼돌렸다고도…….”
“식기뿐입니까? 사실 이 정원이…….”
한담 사이에 험담. 험담 사이에 소문.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입을 놀렸다.
이단 경은 그 모든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다른 말을 섞었다. 가끔 맞느냐는 듯 키리에 쪽으로 눈길을 주었으나 키리에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황자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나쁜 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검으로 쥐어 패셨지요.
상관과 부하이자,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한 둘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이단 경은 그런 키리에가 꽤 괘씸한 모양이었지만, 그야 연회가 무르익으면 곧 다 알게 될 일이다.
“루카스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간결하게 루카스의 등장을 알렸다. 어쨌든 록시온의 연회를 연 주인공이니만큼 늦장 부리지 않은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루카스는 천천히 입구부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들어왔다.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다. 이단 경 또한 루카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황자 전하는 더 이상 기사단에는 안 오십니까?”
“이단 경.”
루카스가 환하게 웃으며 수도 기사단장과 악수했다.
“가고 싶은데, 요즘 통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시간을 안 내시는 것은 아닙니까?”
“눈치채셨습니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이는 루카스를 향해 이단 경이 헛기침했다.
“그나저나, 이 정원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을 질문하자, 루카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시원하지요?”
“……이게, 시원한 겁니까?”
“그럼 시원하지 않습니까?”
루카스의 반문에 레미시어 후작이 기가 막히다는 듯 답했다.
“시원하기로 따지면 북쪽 귀라르델 산맥에서 불어 내려오는 눈보라만큼이나 춥습니다.”
“어라, 후작. 의외로 유머 감각이 있으시군요.”
농담 따먹기나 할 때냐. 키리에가 이마를 짚으니 루카스가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입니다.”
“…….”
“사실은 록시온이 이십여 년 만에 빛을 보다 보니, 정리할 것들이 많아 좀 솎았습니다.”
좀 솎은 게 아니라 다 밀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침묵을 이해한 듯이 루카스가 눈을 휘었다.
“뭐, 알다시피 제가 문외한이라-”
“……기엔 너무 과감해 보이는군요, 형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운 등장인물에게로 쏠렸다.
노튼 리시스트. 낸터킷 황후도 함께였다.
언제 온 거야? 자리에 함께한 이들이 급히 무릎을 굽혀 예를 표히자 노튼이 손을 내저었다.
그사이 루카스가 무릎을 굽힌 후, 낸터킷 황후에게로 가 손을 내밀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예, 루카스. 날이 좋습니다.”
황후는 우아하게 제 손을 내밀고는 방긋 웃었다. 황후가 얼마나 루카스를 싫어하는지 아는 이들에게는 무섭도록 온화한 미소였다.
루카스는 평온하게 그 손등에 제 이마를 대었다. 밸도 좋았다.
“록시온은 저도 아주 오랜만에 옵니다만…….”
“예.”
“사뭇 전위적인 풍경이군요.”
황후의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렇습니까.’ 하고 빙긋 웃었다.
“꽃이 없는 계절도 아닌데, 이런 여름 연회는 처음 봅니다.”
“이런 연회라면…….”
“꽃이 한 송이도 없지 않습니까. 삭막하군요.”
익히 소문을 들었던 귀족들 몇몇은 혀를 내둘렀다. 루카스가 록시온을 받은 게 못마땅한 황후가, 식기를 빼고 정원의 꽃을 다 뽑았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황후는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물론 루카스 또한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 꽃이 없겠습니까.”
“…….”
황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루카스는 그런 황후를 흘끗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저도 그 꽃들을 그냥 두어 살려 볼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다른 분이 제 고민을 덜어 주셔서 덕분에 결정이 빨랐죠.”
“무슨…….”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최근 열렬히 구애하고 있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요.”
무슨 개소리야. 그게 지금 정원에 꽃이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는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의아해했다.
루카스의 완벽한 입매가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벌어진 건 그때였다.
“제게는 그 어떤 꽃도 그녀만큼 아름답지 않답니다.”
나 지금 소름 돋았어. 키리에가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팔을 슬쩍 문질렀다. 영 속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키리에뿐만이 아니었다. 황후 또한 그랬다.
“……그래서 록시온의 꽃을 다 뽑았다고요?”
아름다운 첫째 황자는 멋들어진 포즈로 황후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황후의 표정이 한층 더 떨떠름해졌다.
“서운한데요, 형님.”
끼어든 것은 노튼이었다. 어쨌든 표정 관리를 오래 해 온 짬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여전히 서릿발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서 그 아가씨는 꽁꽁 숨겨 두고 보여 주시지 않깁니까? 듣자 하니-”
“그래요.”
그제야 황후가 끼어들었다.
“오늘 그 아가씨도 이곳에 온다지요. 내 루카스가 사랑에 빠진 여인이 대관절 누군지 궁금해 잠도 못 잤답니다. 날이 밝자마자 록시온으로 오고 싶은 것을 어찌나 참았는지.”
“아직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루카스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능청스러움에 황후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릴 뻔했으나, 간신히 몸에 익은 예법 덕에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후와 노튼을 제외한 몇몇 귀족들은 이미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와 있다면 소개를 해 주시지요.”
“그러시겠습니까.”
루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데뷔탕트가 예정되어 있는 아가씨라 해도, 연회를 여는 주체가 아니면 미리 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루카스는 슬쩍 황후의 뒤를 넘겨다보았다. 그 시선에 이번에는 별수 없이 황후도 그쪽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데, 라고 말할 뻔했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황후가 모르는 얼굴은 딱히 없었으니까.
그러나 루카스는 환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루카스가 걸어간 곳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설치된 높고 큰 가제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귀족 여성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황후는 영 표정이 좋지 않은 공작 부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멜다가 있으니 그 근처에 있는 여인들 중 하나가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루카스가 손을 붙잡은 아가씨는…….
‘……애걔.’
황후는 간신히 그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작았다.
첫 인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내민 손끝을 잡은 자그마한 손의 주인은, 첫째 황자가 워낙 키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고 봐도 아주 작았다. 키가 작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존재감이 약했다.
말라서일까? 그렇지도 않았다. 마른 것으로 따지면 주변의 아가씨들이 훨씬 가냘프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푸른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좋은 물건이긴 했지만, 걸치고 있는 본인이 어릴 적부터 관리하고 다듬은 몸매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말아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은 근처의 다른 아가씨와 비교해도 특별히 탐스럽지 않았다. 분을 바른 흰 뺨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당히 예쁘장하긴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단 평범했다.
“……꽃이라고?”
그래서 황후는 비웃음을 띠고 작게 말했다. 주변의 귀족들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파서 공작가에서 싸고 돌았다는 소문이 이쯤 되면 진짜가 아닐까요…….”
“환자에게 코르셋을 입혀 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죠.”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라…….”
황후가 말하자마자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루카스 황자는 그녀가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신중하게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묘한 것이긴 하군요.”
저런 여인을 붙잡고 불면 날아갈까, 부서지면 깨질까 안절부절못하는 루카스 리시스트라니. 개가 웃을 노릇이었다.
황후는 어쩐지 소리 높여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낸 후, 일부러 옆의 레미시어 후작을 바라봤다. 그 또한 저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자가 둘이면 사람들은 황자들을 비교한다. 황자비가 둘이면 황자비들도 비교당하기 마련이다. 알렉사 레미시어의 압승이라고 황후는 생각했다. 누가 봐도 노튼에 비해 보잘것없는 물건을 골랐다.
그러나 레미시어 후작은 적어도 남들 앞에서 그런 것들을 과시하지 않을 만큼의 교양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무표정하게 루카스 황자와 리네트 카멜리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
그래서 황후 또한 입매를 가다듬고 루카스가 제 쪽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천하절색 미인이 나타나면 어찌하나, 하던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윽고 루카스 리시스트가 리네트 카멜리아와 함께 제 앞에 다다랐다. 그 뒤에는 이멜다 카멜리아가 있었다.
보통 때라면 어미인 이멜다가 앞섰어야 마땅하나, 구혼자이자 연회 주최자인 루카스가 에스코트를 청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멜다 카멜리아는 어쩐지 이쪽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황후는 내심 미소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장하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앳된 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은 귀엽긴 했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천하절색, 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생기 넘치는 갈색 눈만은 빛을 받으면 봐줄 만했으나…… 저런 생기는 목동의 것이지, 귀족 아가씨가 가질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보니 가꾸지 않은 몸매도 그러했다.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진주 장식을 한 머리핀을 꽂고 있어 귀족으로 보일 뿐, 옷을 벗겨 놓는다면 들판을 뛰어다니는 평민 소녀나 하녀 쪽이 더 어울릴 법했다.
역시 자라난 환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평민 사이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황자에게는 이런 여자아이들이 끌리는 것인가. 낸터킷 황후는 정말로 소리 내 웃고 싶었다.
이쪽과 눈이 마주친 여자애가 확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겠지. 자신만큼이나 고귀한 여인을 만나는 건 처음일 것이다.
황후는 그녀가 공작의 딸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 어미와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다. 높은 여인들에게 가지는 어려움이 클 것이다.
“전하. 제가 그녀를 소개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세요.”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리네트 카멜리아가 머뭇거리자 루카스가 먼저 소개를 자처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섬브리아의 위대한 선택, 백 개의 눈을 가진 심판자, 카멜리아의 영주이자 리시스트의 신실한 친우인, 카멜리아 가문의 두 번째 동백꽃 리네트 카멜리아입니다.”
저 긴 칭호는 카멜리아 가문의 것이었으나 하도 길어 공식 석상에서나 쓰이는 이름이었다. 잘 불리지 않는 이름.
그러나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들이야 작위도 없으니 데뷔탕트나 결혼식 때나 겨우 그 긴 호칭을 달았다. 덧붙여 이런 자리에서 루카스가 그 이름을 강조한 이유야 뻔했다.
저 모양이라도 공작가의 아가씨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황후는 여자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방이 직접 제 소개를 해야 황후도 그것을 받아 주는 것이 마땅했다. 아무리 소심한 여인이라도 제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지 않으면, 황후는 그 인사를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층 더 이쪽으로 쏠렸다.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리네트…….”
순간 황후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카멜리아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를 쳐다보던 모든 이들은 정확히 황후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검은 머리카락의 처녀는 꽃이 만개하듯 웃었다.
“지고하고 영명하신…….”
아니, 실제로 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리네트라고 불리운 여인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낼 때마다 허공에서 리드미컬하게 꽃이 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푸른 기운이 맴돌다가, 이윽고 형태를 바꾸어 꽃송이가 됐다. 공간을 수놓듯 갑자기 생겨난 꽃송이는 그 모습이 완성되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국 꽃송이였다.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황후는 입을 벌렸다. 물론 그녀가 입을 벌릴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황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한층 더 환하게 웃었다.
툭. 투둑.
그동안에도 꽃송이 수십 개가 허공에 피어났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애 주변에서 피어나는 수십 개, 수백 개의 작은 꽃송이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영광입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사방에 화악, 하고 두툼한 수국 꽃 무더기 수천 개가 하늘에 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황후와 노튼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리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더불어 노튼 리시스트 황자 전하 또한-”
얼떨떨한 기분이었던 노튼은 제 이름이 불리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이를 드러내고 한껏 미소 지었다.
“-뵙게 되어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쏴아아…….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아니, 마법이었다. 바람 사이로 꽃비가 내렸다.
푸른 수국의 수만 꽃송이가 사람들의 어깨에, 손에, 드레스 자락에 내려앉았다. 모두 그 순간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찌르르,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아무것도 없던 살벌한 정원은 순식간에 푸른 수국들로 퍽 목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 됐다. 노튼조차 한순간 말을 잃었다가 정신이 확 들었다.
루카스만이 거 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노튼은 뒤늦게 얼굴이 시뻘게졌다.
당했다.
분명 마법일 것이다. 마법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없다. 그러나 마법임을 알면서도 모두가 그 장면에는 넋을 놓고 말았다. 연출이라면 허를 찌른 연출이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에 내리는 수국 비라니. 노튼은 애써 태연한 척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수만 송이의 수국들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은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광경 아닙니까?”
“예에…….”
누군가 멍하니 루카스에게 답했다. ‘사랑에 빠진’ 첫째 황자는 말을 이었다.
“저는 늘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된답니다. 수만 개의 꽃송이가 피어나는 기분.”
리네트가 뺨을 발갛게 붉혔다.
“전하…….”
그사이에도 수국 꽃송이 몇십 개가 그녀의 주변에 피어났다. 그 광경에 매료된 몇몇 여인이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오래도록 기억될 리네트 카멜리아의 데뷔였다.
* * *
착한 일을 한 덕분에 말할 때마다 입에서 꽃과 금화를 뱉게 된 아가씨의 동화가 있다. 아가씨는 그 덕분에 큰 나라의 왕비가 된다.
어릴 적 읽었던 그 동화에서 리네트는 힌트를 얻었다.
“그렇지만 입에서 수국을 뱉을 건 아니고.”
“왜?”
“말할 때마다 토하는 것 같잖아. 싫어.”
루카스는 리네트의 말에, 말할 때마다 입에서 수국을 뱉는 그녀를 상상하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쿠션 하나를 집어 던졌다. 물론 그는 쿠션을 얄밉게도 피해 냈다.
“꽃을 다 밀어 놨으면- 뭐, 내가 꽃이 되면 되는 거 아니겠어?”
황궁의 마법사들이 꽃을 신선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응용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리네트의 생각이었다.
리네트는 뱁새를 불러 그 방법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뱁새는 미묘한 말투로 ‘가능은 한데.’ 하고 답했다.
“무슨 대답이 그따위야?”
“비싸.”
“요금이?”
“응. 마법이라는 건 없는 걸 만들어 내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수만 송이의 수국을 어디선가 가져오기는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리네트는 참 쉽게 해결했다.
“베어 낸 수국을 어디다 쓰겠어? 다 태우지도 못해서 소각장에 쌓여 있다며?”
시들어 가는 꽃들을 싱싱하게 유지하던 황궁 파견 마법사들은, 이제 소각장에 쌓여 있는 수국 송이들을 자잘하게 소환해 내는 마법을 부리게 생겼다.
리네트도 그들의 협조를 받는 것에 관해서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해 보겠습니다.”
의외로 파견 마법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루카스에게 답했다.
듣자 하니 삼일 밤낮을 여름 꽃들 피워 올리는 데 투자했던 그들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낸터킷 황후에게 퍽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물론 지젤의 협조도 한몫했다. 꽃들을 되살리는 것은 마법사들이, 리네트 주변을 따라다니며 꽃송이들을 피워 올리는 것은 지젤이 해냈다.
덕분에 연회 내내 리네트가 말할 때마다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그녀의 곁에서 피어났다. 수국이 피어난 후에는 아름다운 능소화 덩굴이 뻗어 나왔다. 능소화 덩굴에 질릴 만하면 향이 짙은 야생 나리 줄기가 떨어졌다.
미리 지시받은 황성의 화훼부 시녀들은 리네트의 뒤를 따라다니며 꽃대를 주워 모아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곤 곳곳에 꽂았다. 수국 송이들은 수반 위에서 물을 머금고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진귀한 광경에 모두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황후가 그녀를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노부인들조차 눈치를 보며 한두 마디씩 리네트와 말을 섞었다. 마법이라는 것을 알아도 퍽 인상적인 광경이기에 당연했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그녀와 말을 섞은 이들은 리네트가 꽤 괜찮은 아가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리네트 카멜리아는 제 장점 중 하나가 화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만 대화를 나눠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 모두 깨닫게 되었다. 찌라시를 만드느라 어떤 귀족이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아가씨가 어느 신사와 약혼했는지 따위를 꿰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찌라시를 만들지 않을 땐 방에 처박혀 책이나 보던 삶은 이럴 때 꽤 쓸모가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에는 모두 대강 인정했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반한 아가씨는 꽤 재미있었다. 그야 춤은 좀 못 췄지만.
* * *
“발 안 아파?”
리네트는 소파에 늘어진 채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휴식이 필요했고, 쉬었다 오겠다며 록시온의 빈 방에 들어앉은 차였다. 그야 남들이 볼 때는 그저 자신들만의 시간이 필요한 연인일 테지만.
그녀는 두 번의 춤을 추는 동안 루카스의 발을 일곱 번이나 밟았다. 그것도 왼발만.
옆에 앉아 있던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리네트의 귀 옆에 고개를 가져갔다.
“나의 아가씨, 그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랍니다. 제 발 따위는 문제도 아니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리네트가 이마를 찡그리며 웃었다. 지젤이 걸어 준 마법은 아직도 유효하여, 작은 수국 꽃송이들이 둘 사이에서 피어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퍽 다정한 연인 같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모두 시인이 된다고 하지.”
“당신이 시인이라면 진작 굶어 죽었겠는걸.”
“너무한데.”
루카스가 투덜거리면서도 리네트의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꽃송이를 털어 냈다.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영 불편하게 느껴지던 차여서, 리네트는 기회를 봐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삽시간에 루카스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금화를 뱉는 처녀의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그야 이곳의 동화는 아니지. 하지만 그런 것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리네트는 손을 내저었다.
“그냥 나도 어릴 때 지나가듯 들은 거야.”
“그래? 지역마다 다른 건가…….”
평민으로 자라면서도 그런 동화는 들은 적이 없는데.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리네트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되지?”
“응?”
“금화를 뱉는 아가씨 말이야. 왕비가 됐다고 했잖아.”
“그야…….”
리네트는 잘 기억나지 않는 동화를 떠올렸다.
계모는 의붓딸에게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 오라고 한다. 그러던 중 착한 일을 베풀어 말할 때마다 입에서 금화와 꽃을 뱉게 된 의붓딸은, 왕의 눈에 띄어 시집을 가게 된다. 그리고 계모는…….
“질투가 나 제 친딸도 금화의 축복을 받고 오라고 보내지만, 계모의 성격을 닮은 친딸은 착한 일은커녕 못된 일만 해서, 입에서 말할 때마다 두꺼비가 튀어나오는 저주를 받아.”
“이런.”
입에서 두꺼비가 튀어나오다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리네트는 입에서 금화가 나오는 것도 그리 상쾌한 느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두꺼비가 나오는 쪽은 아닌데.”
“응?”
“왕.”
루카스가 노래하듯 말했다.
“왕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게 아닌가?”
“음? 아마 왕은…… 입에서 금화가 튀어나오는 것에 반한 거일 걸.”
리네트가 턱을 괴고 말했다.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금화 때문에 그녀를 왕비로 맞이한 거라고?”
“그렇겠지?”
“하지만 사랑했겠지?”
리네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음. 단순히 돈 때문이라면 그저 그녀를 가둬 두고 금화만 받아 낼 수도 있잖아.”
“되게 끔찍한 소리 하네?”
그에 동화 속 삽화같이 생긴 황자가 푸른 눈을 휘며 웃었다.
리네트는 가끔 저 얼굴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러지 않지만…… 가끔 어떤 순간엔 어김없이 시선을 빼앗겨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날 비꼰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꼬았다고?”
“우리 이야기랑 조금 비슷하잖아.”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금화를 뱉는 아가씨는 결국 화가 난 계모에게 쫓겨나 숲을 헤맨다. 그러다 숲에서 왕을 만나게 된다. 왕은 그녀가 말할 때마다 금화와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탄해, 그녀를 데려가 왕비로 맞는다.
리네트는 이멜다가 싫어 리시스트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루카스를 만났고, 루카스는 그녀에게 감탄해, 리네트와 약혼을 계획하고….
그게…… 그렇게 되나? 그제야 리네트는 루카스가 집요하게 캐묻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랬어?”
“음, 아니었나?”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닌데. 뭐,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네.”
리네트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분홍빛 장미가 허공에서 피어나 툭, 하고 소파에 떨어졌다.
루카스는 일어나 몸을 굽혀 그 장미를 주웠다. 장미는 방금 피어난 듯 싱그러웠다. 한참 동안이나 장미를 들여다보던 루카스는 리네트와 시선을 맞추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뭐야?”
“나는 어쩐지 그 왕이 궁금해져서.”
루카스는 장미를 든 손을 뻗어, 꽃을 리네트의 머리카락 사이에 꽂았다.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루카스의 푸른 눈은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금화만 필요하다면 앉아서 끊임없이 말만 하게 하면 되잖아. 그 아가씨는 결국 계모에게 쫓겨나 버렸다며.”
“그렇지……?”
“오갈 데 없는 아가씨를 굳이 왕비로 맞은 이유가 뭐겠어?”
리네트는 말문이 막혔다.
말할 때마다 금화가 튀어나오는 것. 그야 좋은 인생이겠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의 금화가 필요하다면 옆에 가둬 두고 금화만 빼내면 그만.
그럼에도 왕이 그녀를 배필로 맞은 이유는…….
사랑에 빠져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동화에서 그보다 더 적합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왕은 소녀의 입에서 금화가 튀어나오는 이유가 궁금했고, 그녀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착한 심성에 반했을 것이다. 꼭 금화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지만- 저런 눈을 한 루카스 앞에서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리네트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 황자는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리네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리네트는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한참 후에야 답했다.
“……되게 가난한 왕이었나 보지.”
제가 말해 놓고도 참으로 어이없는 답이었다. 루카스 또한 그랬는지 푸하, 하고 웃어 버렸다.
노골적으로 회피하는 답.
눈치가 있다면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신호를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
맞다. 이 인간, 일부러 눈치 없는 척하는 게 주 종목이었지.
리네트는 아찔해졌다. 루카스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소파에 기대앉은 리네트 앞에 무릎을 꿇은 루카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청했다.
“리네트 카멜리아.”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말투는 결코 여상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제 이름을 음절 하나하나 꾹꾹 누르듯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뭐야, 갑자기.”
루카스가 웃었다.
“아까 너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지.”
루카스가 황성에 온 지 어느덧 5년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루카스는 이 연회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록시온의 이름, 그리고 그녀의 데뷔탕트가 있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리네트는 루카스에게 익히 말했다. 과정은 느릴 것이며 변화를 속단하지 말라고.
그래서 루카스는 편한 마음으로 록시온으로 왔다.
물론 리네트가 설계한 광경은 과연 기대를 크게 충족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고, 황후와 노튼의 표정은 볼만했다. 그녀와 말을 섞은 귀족들의 눈이 바뀌는 것도 재미있었다.
몇몇 노부인이 열렬하게 박수를 친 것, 함께 춤을 춘 그녀가 제 발을 일곱 번이나 밟은 것. 모두 하나하나 되새길만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아가씨들 사이에 선 그녀를 보며 자신이 생각한 건…….
“가슴이 뛰더라고.”
“……무슨 소리야?”
리네트의 얼굴이 옅게나마 당황으로 물들었다.
루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한 가닥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갑자기 훅 농도가 짙어진 스킨십에 리네트가 당황해 몸을 물렸으나, 그녀는 소파에 앉은 채였다.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제일 예쁘고.”
“…….”
“제일 짠하고.”
루카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제일-”
리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못된 애 같아서.”
흔들리던 눈동자가 딱 멈췄다. 그리고 곧 짜증이 그 안에 가득 차올랐다.
루카스는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아하하! 하고 소리 높여 웃고 말았다.
“야!”
“뻔뻔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고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황후 백 명이 와도 못 당해 낼 만큼 못된 아가씨라니. 세상에, 사람들 시선을 멀쩡한 얼굴로 다 앗아 가는 모양새가 얼마나 얄밉던지…….”
쿠션이 날아왔다. 그는 피하지 않았고, 쿠션은 보기 좋게 루카스의 얼굴 정면에 맞았다. 퍽! 소리가 났다.
이게 날 갖고 놀아, 하고 리네트가 얼굴이 벌게진 채 제 주변의 쿠션을 다 집어 던질 때까지 루카스는 계속해서 소리 내 웃었다.
왕은 아마 그 아가씨에게 반하고 말았을 것이다. 금화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해도, 그 금화에 눈을 가리기엔 아가씨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