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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리시스트의 아침
비가 왔다. 티파티 따위를 개최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날씨가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몇몇 아가씨들에게는.
“소식 들으셨어요?”
“당연하죠!”
발레리 백작가의 장녀인 로티드 발레리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이튿날 티파티를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살롱의 교류회에서 많은 아가씨들과 수다를 떨고 싶었으나, 명망 있는 부인들은 최근 리시스트를 뒤집어 놓은 ‘그 소식’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교류회는 이미 결혼한 부인들이 여는 것이 관행이기에, 결국 로티드는 저와 아주 친한 몇몇 아가씨만 불러 티파티를 연 참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왔지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발레리 백작가로 왔다. 정원 바로 앞의 발코니에서는 곧장 수다 꽃이 피었다.
째잭, 짹 짹. 뱁새 한 마리가 발코니 천정 아래서 지저귀었다.
여느 때였다면 새 지저귀는 소리만 가지고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은 떠들었을 것이나, 오늘의 화제 때문에 뱁새는 잊혔다.
“루카스 황자님이 공작가에 새벽같이 나타나 청혼을 하겠다고 카멜리아 공작에게 말했다면서요!”
“정말요? 저는 황자님이 공작가의 담을 넘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려면 어때요? 그 루카스 황자님이 이런 일을 일으켰다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름답게 차린 아가씨들이 숨죽여 웃었다.
그렇다.
열흘 전 루카스 리시스트가 카멜리아 공작가에 나타나 벌인 대열정쇼에 모두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은 조금씩 결이 다 달랐지만, 요지는 같았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카멜리아 공작가의, 있는지도 몰랐던 리네트 카멜리아를 향해 사랑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다.
사건이 열흘 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느리게 퍼진 소문이기도 했다.
카멜리아 공작은 그날 황자를 본 하인들을 필사적으로 단속했지만, 누군가가 리시스트 기차역에서 소문이 적힌 종이를 무료로 나눠 주면서 이야기는 퍼져 나갔다.
기차역을 지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종이에 관심이 없었으나, 곧 ‘황자’와 ‘카멜리아 공작’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집중됐다.
한두 명씩 종이를 받았다. 종이를 나눠 주던 자는 ‘자, 이건 예고편입니다! 모두 <리시스트의 아침>을 기대해 주세요!’ 하며 신나게 선전을 해 댔다.
기차역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귀족 가문이란 가문에 모두 그 종이가 배달됐다.
배달꾼들은 그것을 ‘신문’이라고 부르며,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거기 적힌 주소로 하인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흥미가 있는 귀족도, 없는 귀족도 모두 종이를 펼쳐 들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졌고, 모두가 기함하며 좋아했다.
사실 평민 출신의 첫째 황자는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뒷면에서는 단 하나의 결점도 보이지 않으려 항상 애쓰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밤을 새서 공부하고, 피부가 그을리는 것도 불사하고 검을 휘두르며, 실무에도 능했다.
예를 들면 ‘곡물 거래 제한’이 그랬다.
그간 모든 곡물들은 영주의 보증 및 허가서가 있어야만 거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주들은 허가되지 않은 곡물들을 사재로 축적했고, 관리들은 매해 허가서를 받기 위해 줄선 평민들에게 웃돈을 받았다.
제국은 세수만 제대로 걷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것을 눈감아 주었으나, 어느 날 루카스가 이러한 곡물 거래의 제약을 풀어 버리자고 건의했다. 대신 곡물 거래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자면서.
그에 온갖 반대가 쇄도했지만, 황제를 등에 업은 루카스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약 3년 후, 곡물 거래소에서 리시스트 제국이 벌어들인 세수는 어마어마했다. 곡물 거래가 늘어나니 다른 시장도 활발해졌다. 바야흐로 경제 활성화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 모든 건 그가 평민들 사이에서 보고 들은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제는 처음에는 의심했으며, 중간에는 머리를 앓았으나, 끝내 기뻐했다.
물론 루카스가 그것 때문에 황태자 후보로 급부상한 것은 아니다. 겨우 노튼과 같은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더군다나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이로 인해 수많은 영지의 영주들에게는 반감을 샀다. 곡물 거래 보증으로 톡톡히 챙기던 수입이 끊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잘생긴 외모 덕분에 처음에는 그에게 마음을 주는 아가씨들도 분명 있었다. 황자는 가끔 그녀들과 춤을 추었고, 다정한 눈인사도 나누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항상 정중하게 거절했다. 돌아오는 말은 언제나 비슷했다.
“부친께서 저를 달가워하실까요?”
그 말도 옳았다. 황성에서 황자와 붙어 있는 모습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경을 칠 것이 뻔했다.
그야 그 많은 부친들 중에는 간혹 황자비에서 대공비로 이어지는 출세를 노리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수도에 있는 이상, 황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는 황성의 모든 것이 노튼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루카스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들에서 죽어 버리지, 그 긴 목숨을 지독하게도 부지한 것이 개탄스럽다.”
황후가 언젠가 자신의 살롱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니 루카스 본인도 더더욱 행동을 조심했다. 어떤 여인들과도 엮이지 않으려 했다. 오죽하면 신년 무도회에서도 파트너 하나 없이 나타났다.
황자의 시중을 드는 것은 모두 남자들이었고, 나중엔 황자가 남색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퍼지기까지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이름은 단숨에 유명해졌다. 모든 아가씨들이 리네트 카멜리아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로티드 발레리가 비 오는 날 티파티를 연 것도 그래서였다.
“아니, 그런 아가씨가 공작가에 있는지도 몰랐다고요.”
“저는 알아요. 예전에 나넬리아 아가씨에게서 얼핏 들은 적 있거든요.”
“아, 나넬리아 아가씨요…….”
비웃음, 혹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 아가씨들 사이로 슬며시 퍼졌다.
나넬리아는 그 대단한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였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선해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 부인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작은 왕국 플로르로 도망치듯 시집갔다.
“플로르라니…… 그런 왕국이 지도에 있는지도 몰랐지 뭐예요.”
“놀랍네요.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들은 모두 존재감 없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걸까요?”
작은 웃음이 한차례 퍼졌다. 악의는 없었다. 단지 그 엄청난 명성에 비해 그녀들이 그렇게나 초라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어찌 보면 우습기도 했다.
“공작 부인은 사석에서 뵈었을 때는 좋은 분이셨는데.”
“뭐, 그렇게 좋은 분이라도 자신의 피가 섞인 아들에 비하면 다른 자식들은…….”
아가씨들이 말을 흐렸다.
“그런데, 어디서 만났대요?”
“그러게. 얘, 내니. 그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다고 했지?”
로티드 옆에 서 있던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적혀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자님이 잠행 중에 담 너머로 보셨다는데…….”
다른 아가씨가 차를 마시다가 코웃음쳤다.
“아무리 수도 귀족가 저택들의 정원이 좁다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자님이 사냥개도 아니고.”
“그렇지요?”
“저는 조금 다르게 들었어요.”
자작가의 아가씨가 의뭉스럽게 소리를 죽였다. 아가씨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리네트 카멜리아도 공작 부인의 미움을 받아서, 어릴 적부터 밖으로 나돌았다더군요. 그야 공작 부인 입장에서는 귀족가 아가씨가 밖으로 함부로 나돌아서 소문이 안 좋으면 도리어 환영할 일이니까…….”
“방관했군요. 세상에.”
한숨 같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말 뭐 하지만, 그 황자님과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라는 이야기가…….”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
아가씨들이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다.
“엄청 예쁘다던데, 그럼…….”
“그러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인데, 귀티가 나지 않았겠어요?”
“어떻게 생겼기에 황자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요……?”
“소문에는 밤하늘을 녹인 듯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금같이 빛나는 밝은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는군요. 가냘프고 사랑스럽다고 하네요.”
“어머나! 궁금해라.”
“레미시어 아가씨만큼 아름다울까요?”
자작가의 아가씨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모두들 그 순간 말을 멈추었다.
알렉사 레미시어.
그 레미시어 후작가에서도 가장 귀하게 자라, 노튼 황자의 약혼자가 된 한 떨기 장미 같은 아가씨였다.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은 손질하지 않아도 언제나 고불고불하게 말려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유리알 같은 초록 눈동자는 한숨 나오도록 크고 아름다웠다.
갈대같이 하늘거리는 몸매는 또 어떻고?
모든 아가씨들은 알렉사를 동경했다. 성격 또한 작은 새처럼 아기자기하고 귀여워 모두가 사랑하는 아가씨였다.
그렇지만 알렉사 레미시어가 사교계의 원 앤 온리로 군림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지금쯤 해서 새로운 스타가 등장할 때도 되었다. 그리고 그게 노튼 황자와 대립하는 루카스 황자의 애인이 된다면!
심지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공작가의 아가씨!
공작가의 천덕꾸러기라고는 하지만, 신분까지 레미시어 아가씨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 아가씨를 과연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다잖아요.”
“아이, 안 치르면 뭐 어때요? 이번 여름 대무도회에서는 젊은 여인과 춤추는 황자님을 볼 수 있겠군요?”
차가 식든 말든 아가씨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떠들어 댔다.
삐로로, 울던 뱁새는 어느새 비가 그친 것을 알아채고 날개를 펴 정원 밖으로 날았다.
* * *
“너 진짜 양심없다.”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 있던 리네트가 그 말에 뱁새를 쳐다봤다.
“밤하늘을 녹인 듯한 머리카락에, 금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가냘픈 몸매?”
“뭐.”
“그거 네가 쓴 거잖아!”
“야, 원래 구전 설화가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리네트가 코 후비는 시늉을 했다. 뱁새는 리네트를 전력으로 비난했다.
“사기꾼!”
“뭐래. 이 뱁새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리네트를 보고 뱁새는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여기 사기꾼이 있어요.”
사람 모습으로 그랬다면 꽤 진상 같은 모습이 완성됐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뱁새 한 마리가 데구루루 구르는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리네트가 중얼거렸다.
“귀여워 죽겠네. 확 입에 집어넣고 굴리고 싶다.”
딱히 협박은 아니었으나 지젤에게는 충분한 협박으로 들렸다. 뱁새는 한숨을 쉬며 리네트에게 자신이 들었던 다른 말들을 늘어놨다.
리네트의 예상대로였다. 모두가 리네트를 주목하고 있었고, 언제 그녀가 황자와 약혼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빼면.
“아가씨.”
애플이 문을 통해 얼굴을 쏙 내밀었다.
“왜?”
“편지가 한 통 왔는데요.”
“가져와.”
리네트는 편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악필로 저주 비슷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천박한 계집!’으로 시작되는 온갖 저주와 악담.
“남자들이란. 진부해 죽겠다. 참신한 욕 없나?”
리네트는 중얼거리며 편지를 구겨 창밖으로 던졌다.
뱁새가 궁금해했다.
“누구야?”
“있어. 술살 찌고 못생기고 나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놈.”
지젤이 방심한 사이, 리네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뻗어 뱁새를 쥐었다.
뱁새는 앗, 하고 신음했지만 방심의 대가로 꽤 혹독한 롤러코스터를 체험해야 했다.
* * *
“지젤. 혹시 마탑의 마법사가 수익 사업을 추구해도 돼?”
“아니. 그건 왜?”
“젠장.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구만, 이놈의 뱁새.”
뱁새의 눈이 뾰족해졌다. 그래 봐야 뱁새지만.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리시스트의 아침’을 누구 이름으로 낼지 고민 중이야.”
“누구 이름이 있어야 해?”
“가십을 낼 거니까. 평민은 안 돼. 여차하면 황제가 바로 손대기 애매한 사람의 소유여야 한단 말이야.”
‘리시스트의 아침’은 리네트가 정한 새로운 정보지의 이름이었다.
리네트와 루카스의 소문을 가장 먼저 다루려면 시간이 관건이었다. 공작저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전에 리네트가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결국 리네트는 호외를 쓰기로 했다. 신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 그것. 본호가 나오기도 전에 호외부터 먼저 쓴 셈이었다.
루카스는 종이값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애플의 동생, 펜플에게 지불했다.
펜플은 리네트의 글이 쓰인 종이를 정확히 1만 장 인쇄했다. 금속으로 된 형틀이 모두 망가졌지만, 효과는 있었다.
펜플이 리시스트 기차역에서 무료로 나눠 준 호외는 만 이틀 만에 모두 매진됐다. 기차역에서 소문이 퍼지자 역 이용객뿐만 아니라 수도의 시민들이 호기심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기차역뿐만이 아니라 배달꾼들을 고용해 수도의 모든 귀족가에도 보냈다.
홍보용이었다.
이 신문이 재미있으면 모두가 구독할 거라는 리네트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당장 다음 날 펜플이 따로 차린 사무실은 귀족들이 보낸 하인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결과, 수도 리시스트는 뒤집어졌다. 어디를 가도 모두 리네트 카멜리아와 루카스 리시스트의 결합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에드가 발란의 편지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결혼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황자와 연애한다, 아니, 정확히는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돌자 퍽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지.
리네트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공작도 너를 그 에드가란 놈하고 바로 결혼시키진 못하겠네?”
“그렇지. 황제 엿이나 먹으라는 말밖에는 안 되니까.”
황제는 루카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과 별개로, 한번 잃어버렸던 황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정도의 염문이 퍼졌다면 황제는 아마 루카스에게 소문을 확인할 것이고, 루카스는 당연히 그 앞에서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고 오만육갑을 다 떨 것이다.
그런 루카스를 놔두고 에드가와 리네트를 결혼시킨다면, 아무리 카멜리아 공작이라도 황제에게…….
“뒤지게 욕을 처먹겠지.”
“야, 넌 좀…….”
뱁새가 삐록삐록 울었다.
“뭐.”
리네트가 눈을 부라렸다.
“황자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을 좀 예쁘게-”
“내가 황제가 된다 해도 말 예쁘게 안 할 거거든?”
뱁새가 뭐라뭐라 쫑알거렸으나 리네트는 잠시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렇다. 황제가 돼도 리네트는 말을 예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황제가 되면 말을 예쁘게 할 필요가 없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모두가 나를 존중할 테니까.
사실 공작이 되게 해 달라는 말은 충동적이었지만, 그 에드가 발란과 결혼해 애를 낳으라는 말을 카멜리아 공작이 했을 때부터 리네트가 계속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나한테 백안이 있는데,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해?’
‘유서에 어머니 이름 쓰고 자살하면 어떨까요?’ 하고 협박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군가에게 옮겨 줄 수도, 남이 대신할 수도 없는 능력.
리네트는 그걸 굳이 남에게 넘겨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공작도 멍청하지 그지없었다. 한몫 챙겨 준다고?
‘그냥 공작가 재산을 내가 다 먹으면 되는데, 대체 왜?’
리네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야, 리네트.”
“어?”
리네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뱁새가 그녀를 불렀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뜻밖의 것이었다.
“베티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아?”
리네트는 입을 약간 벌렸다. 맞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베티는 ‘가엾은 B’. 최근 리네트가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던 이온 세레지의 희생양이었다.
사실상 리네트가 ‘하녀들의 수다’로 이온 세레지와 제레미아 켈론의 약혼을 깨 버린 이유도 사실은 리네트와 지젤의 어릴 적 친구인 베티 때문이었다.
‘리시스트의 아침’은 가십성 신문을 표방했다. 어설프게 동네방네 이런 신문을 팔아 댔다간 당연히 빠르게 판매 금지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당연히 전면에 나서야 했다. 소위 말하는 ‘바지사장’이다.
초반엔 키리에 레미시어의 이름으로 낼까 고민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가십이긴 하지만 민감한 소문도 다룰 것이고, 대부분 노튼을 공격하는 축이 될 것이다.
그런 신문을 첫째 황자파인 키리에가 낸다니, 공신력이 떨어진다.
삼류 가십지라도 공신력은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두 황자들과 연관이 없되, 황제에게 좌지우지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베티는 아주 적절한 사람이었다.
베티는 예이츠 준남작의 외동딸이었다.
사십여 년 전 선대 황제의 머리 위에 커다란 화분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 낸 어린 시종, 즉 베티의 아버지는 덕분에 준남작위를 받았다.
‘화분의 준남작’이라고 놀림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귀족이었다.
순하고 착한 베티의 아버지는 딸인 베티도 그렇게 키웠다. 그리고 이온 세레지 같은 놈에게 유혹당했지.
아무튼, 선대 황제의 은인이니 황제로서도 이래저래 뭐라고 하기 애매한 직위였다.
게다가- 여자다.
리네트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실로 마음에 안 드는 일이지만, 리시스트 제국 남자들은 여자들이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았다.
“여자는 곱게 자라 신부 수업이나 받고 결혼이나 하면 돼.”
그게 이곳 사람들의 한계였다.
물론 귀족 아가씨들 중에서도 제법 열심히 공부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지만, 대부분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 ‘여자가 공부해 봐야 뭐 얼마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 때문이다.
‘리시스트의 아침’은 처음에는 주목받겠지만, 그것을 펴내는 것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모두들 여자들의 별것 아닌 놀음으로 치부할 것이다.
아리따운 아가씨의 드레스, 화장법, 유행하는 보석 같은 것을 다루는 신문에 크게 반응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들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상관없다.
누가 궁정에서 입방아를 찧는다 해도, 루카스에게 시켜서 ‘그깟 여자들이 만드는 종이 쪼가리에 진지하게 대응한단 말이오?’ 같은 소리를 하면 될 일이다.
남자들은 소인배 취급받는 것을 못 견뎌 하니까.
“좋아. 가라, 지젤!”
“……내가?”
“그럼 내가 가리?”
“야. 너 나를 무슨 전서구쯤으로 보는 모양인데…….”
“아니야?”
지젤이 빠르고 높게 지저귀었다. 째재잭짹짹짹!
아니, 얜 왜 사람 말을 안 하고 새 말로 지저귀어. 이제 자기가 진짜 새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한바탕 새소리의 폭풍이 쏟아진 뒤, 결국 지젤은 훌쩍 날아갔다. 예이츠 준남작가로.
이온 세레지의 파혼 소식에 깨소금을 볶고 있던 베티가 리네트의 제안에 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아리따운 알렉사 레미시어 영애의 피부 관리 비법은?
“진주를 식초에 녹여 마셔요.”]
황궁에는 수많은 정원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동쪽 별궁의 정원이었다.
작은 동산 아래 펼쳐진 낮은 풀밭, 싱그럽게 어우러진 들꽃들, 그리고 그 위에는 하얀 가제보 하나가 올라앉아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그 안의 남자였다. 눈부신 은발을 가진 남자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커다란 종이 한 장을 펼쳐 들고 있었다.
최근 보지 않는 이가 없다는 ‘리시스트의 아침’이었다.
남자는 종이를 내려놓고 앞의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자연스레 은발 아래의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둘째 황자, 노튼 리시스트.
첫째 황자 루카스가 동화 속에서 나온 그림 같은 왕자님이라면, 이쪽은 마치 눈에서 태어난 듯한 얼음의 요정 같다는 평이었다.
은실로 자아낸 듯한 결 좋은 은발과 선이 날카로운 얼굴.
노튼을 낳은 낸터킷 황후가 제 아들을 두고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고 평할 정도의 외모였다.
그러나 그 멋진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런 데에 알렉사가 거론된 거지?”
주변의 사용인들이 눈알을 굴리며 한 사람을 쳐다봤다. 황자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는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흰 머리카락이 조금씩 보이는 지긋한 나이의 남자가 젊은 남자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은 언뜻 기이해 보였으나, 동쪽 별궁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레미시어 아가씨는 사교계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고 계신 분이니까요.”
“인기?”
노튼이 눈썹을 꿈틀했다. 남자는 제가 사용한 단어가 황자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채고 답했다.
“……계층을 막론하고.”
“설명해 봐.”
남자가 말을 이었다.
“평민부터 중급 귀족, 고위 귀족을 막론하고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분입니다. 게다가 황자비가 되실 분이죠. 레미시어 아가씨가 새로운 드레스를 맞추면 젊은 아가씨들이 모두 궁금해한다더군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크게 화제가 된다고?”
노튼이 팔짱을 끼었다.
“라베노바 백작. 이게 좋은 일인가?”
“화제 몰이는…….”
“아니. 그거 말고.”
“…….”
“알렉사가 아름답다는 건 나도 알아. 사교계에서 그녀가 화제 몰이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알렉사를 내 배필로 골라 주신 이유는 그녀가 현숙하기 때문이야. 내 옆에서 얌전히 나를 빛내 줄 여자이기 때문이지.”
라베노바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노튼이 하는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가 짜증이 난 이유도 분명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불쾌하군.”
“-레미시어 아가씨 본인이 의도하신 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레미시어 아가씨 본인과 이야기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라베노바 백작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를 짚었다.
[레미시어 아가씨를 오래 모신 하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아침 작은 진주 한 알을 식초에 녹여 마시며…….]
노튼은 표정 변화 없이 그 문구를 읽었다.
“아가씨는 아마 모르셨을 겁니다.”
“그럼 누가 이런 걸 썼단 말이지?”
“베티 예이츠라고 혹시 아십니까?”
“예이츠?”
노튼의 이마가 좁혀졌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해 라베노바 백작은 빠르게 대꾸했다.
“‘화분의 준남작’의 외동딸입니다.”
“아하.”
평민 출신의 1대 준남작. 아들이 없어 작위도 잇기 힘든 집안이다.
“출신 성분이 모든 걸 말해 주는군.”
“부정적인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평민들은 노튼 황자님의 배필이 아름답고 현숙하며, 사교계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지만, 필요 없는 일도 아닙니다.”
“…….”
“일단은 두고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도 제법 재미있게 보셨다더군요.”
“……그렇군.”
“다만.”
“뭔가?”
“……아닙니다. 추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튼은 눈을 돌려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사이 해의 위치가 바뀌어 햇빛이 가제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지. 오늘 점심은 폐하와 들기로 했으니.”
“예.”
사용인들이 서둘러 양산을 펴고 ‘리시스트의 아침’을 치웠다.
그래서 노튼은 구석에 자그마하게 적힌 기사는 보지 못했다.
* * *
“그 소식지, 재미있더군.”
어딜 가나 ‘리시스트의 아침’이 화제였다.
그러나 노튼은 제 아버지인 황제까지도 그 가십지를 언급할 줄은 몰랐고, 조금 당황했다.
오찬은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원 옆에서 이뤄졌다. 길고 휘황찬란한 식탁에서 두 황자가 황제를 사이에 두고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이런, 노튼. 사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래도.”
황제는 루카스가 돌아온 후로 약간 변했다. 저 ‘아버지’라는 우습지도 않은 호칭이 그 증거였다.
루카스가 막 황성으로 돌아와 황제 앞에서 했던 말은 ‘……아버지시라고요?’였다. 황제는 그 말에 거의 눈물을 죽죽 흘릴 뻔했다.
어쨌든 노튼은 제 ‘아버지’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가 그런 것을 원한다면 맞춰 주는 것도 방법이었다.
노튼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예, 아버지께서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래. 오늘 것을 보니 레미시어 후작이 딸을 퍽 아끼는 듯하더구나.”
“후작이요?”
후작의 이야기는 가십지에 없었는데. 노튼이 이마를 약간 좁히려는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진주를 식초에 녹여 마시다니, 어지간한 아가씨들은 좀처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치 아니냐.”
그리고 바로 덧붙였다.
“그야 나의 황후가 하려면 하루에 진주 열 알도 녹여 마실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사치.
노튼은 그 말에 주목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진주를 녹여 마시는 게 사치가 될 수 있나?
황제의 말마따나 리시스트 황가는 엄청나게 부유했다. 진주 따위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그래서 노튼은 그런 것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특이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황제에게도 사치로 느껴진다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노튼은 제 눈앞의 다른 황자를 쳐다봤다.
루카스. 자신과 정반대되는 금발을 가진 황자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아아-’ 하고 웃었다.
“그렇지요. 평민들은 진주 한 알을 사려면 몇 년을 일해야 하니 말입니다. 역시 후작가의 아가씨라고 할 만합니다. 저도 봤는데 대단히 놀랍더군요.”
노튼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평민들 사이에서 십삼 년을 살았다는 제 형님.
그런 것에 일일이 감탄해서야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겠나 싶었다.
“이런, 루카스. 그런 것에 놀라다니, 아직 네 녀석이 여자를 잘 모르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노튼의 속도 모르고 황제가 껄껄 웃었다. 노튼과 꼭 닮은 보라색 눈이 빛났다.
“아니면, 그 카멜리아 공작의 딸이 퍽 검소한가 보지?”
“어휴, 아버지.”
루카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아무려면 어떠냐. 너희와 이렇게 마주 앉은 것도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내 아들의 로맨스를 들어 보자꾸나. 대관절 그 아가씨는 어떻게 만난 것이냐?”
저런 식이다. 노튼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소탈한 척하는 황제와 아무것도 모르고 맞장구치는 경망스러운 루카스 리시스트.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싶었지만…… 노튼도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다. 저 루카스 리시스트의 염문.
루카스 리시스트와 리네트 카멜리아의 염문은 수도 리시스트를 반쯤 뒤집어 놨다.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전해 들었을 때, 노튼도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멜리아 공작에게 두 번째 딸이 있다는 것조차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라베노바 백작 또한 카멜리아 공작에게 서녀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사람을 풀어 알아본 끝에 카멜리아 공작이 외국에서 낳아 온 딸이며, 현재 공작 부인의 미움을 받아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소문에는 하녀의 아이라는 말도 있다고 했다.
‘……천한 자가 어디서 꼭 자기 같은 여자를 골랐군.’
노튼의 속내도 모르고 얼굴을 붉힌 루카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소문이 사실입니다.”
“무슨 소문?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황제가 은근하게 웃으며 루카스를 얼렀다.
“저택 창문이라는 이야기는 과장되었긴 합니다. 아무리 제가 눈이 좋아도 어떻게 창가의 아가씨를 담 너머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황공합니다만…….”
동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황자님이 슬쩍 웃으며 눈을 굴렸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루카스를 재촉했다.
“혼내지 않을 테니 말해 보아라.”
“제가 설마 아버지께 혼날까 싶어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그 아가씨의 명예도 있기에 섣불리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오호?”
이놈 봐라. 황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루카스는 은근히 조르는 말투로 이어 말했다.
“게다가 공인된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공인된 사이.
매번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말하던 놈이 은근슬쩍 ‘아버지, 저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싫어요. 약혼시켜 주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 수더분한 내 아들에게 이렇게 의뭉스러운 말을 하게 만든 것이 대체 누굴꼬?”
아닌 게 아니라 황제는 정말로 궁금했다.
‘리시스트의 아침’의 호외편은 기차역에서 매진되는 데 만 이틀이 걸렸다. 황제는 이틀째에 그 소식을 접했다. 자신의 자랑스런 첫째 아들이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딸을 사랑하고 있노라는 소식.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공작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에 황제는 퍽 재미있어했다.
황제 또한 리네트 카멜리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카멜리아 공작의 숨겨진 둘째 딸.
남자의 허리 아래 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족들 사이의 미덕으로 통용돼 왔기에 황제는 별말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카멜리아 공작가에 관해서는 리시스트 황가가 대대로 빚이 있어 더욱더 그랬다.
작게는 황손의 직계 여부를 감별하는 데에서, 크게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모으는 자들을 가려내는 데까지. 카멜리아 공작가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황가의 곁에서 활약해 왔다.
그런 카멜리아 공작을 황제는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 큰 아들이 그 댁의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한다.
그것도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이.
황제는 오랜만에 카멜리아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황제는 두 황자를 물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호위 기사 둘만을 뒤에 둔 채 일을 보고 있을 때, 시종이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라 하거라.”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황제가 말했다. 곧 문이 열렸다.
금발의 루카스.
황제는 루카스의 얼굴을 확인한 후 기사들까지 물렸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루카스가 웃었다.
“이 커다란 제국을 아우르는 아버님께서 독대를 해 주시다니, 황공합니다.”
“이놈.”
황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차피 독대는 아니었다. 루카스가 만약 괘씸한 생각을 가지고 제게 칼을 들이댄다면, 루카스는 황제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꿰뚫릴 것이다.
그게 황제라는 자리였다. 루카스 또한 알고 있기에 농담한 것이었다.
“네 작품이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루카스가 미소 지으며 답하자 황제는 코웃음쳤다.
“진주를 녹여 사치하는 그 애의 약혼자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
“맨 처음에는 네 약혼자를 깎아내리려는 수작인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책상 위에 아까부터 올라와 있던 ‘리시스트의 아침’ 한 구석을 짚었다.
그곳에는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숨겨진 약혼자가 있다는 소문이 작게 쓰여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황자인 루카스 리시스트에게 빠진 이유는 비공식적 약혼자가 너무나 쓰레기여서라는 소문이었다.
익명의 약혼자는 리네트 카멜리아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으며, 매일 술과 도박으로 날을 지새운다고.
특히나 모 귀족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마법 약과 변태적 성행위를 일삼는 것이 크게 소문이 나, 리네트 카멜리아는 자신을 데려가 줄 남자라면 아무래도 좋아 결국 황자와 바람이 났고…….
언뜻 보면 황자와 대대적으로 소문이 난 리네트 카멜리아를 헐뜯는 소문이었다.
공작가의 둘째 아가씨. 그것도 공작 부인에게 미움 받는 아가씨를 씹고 뜯고 맛보고, 더욱이 루카스 리시스트까지 깎아내릴 수도 있는 소문.
그러나 황제는 다른 것에 주목했다.
모 귀족이 운영하는 도박장. 마법 약, 변태적 성행위.
수도 리시스트에서 귀족이 운영하는 도박장은 단 한 곳뿐이었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
그곳에서 불법인 마법 약이 성행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소문이었다. 그러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배럴 남작은- 노튼의 오랜 자금줄이었다.
“재미있구나.”
루카스는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불쌍한 척했다.
“가엾은 아가씨입니다. 거기 적힌 소문은 부풀려져 있기는 하지만, 거의 사실입니다. 저는 그녀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남작 얘기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농치는 솜씨가 제법이다. 황제는 웃었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남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제 아들들이 싸우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나, 필연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루카스를 잃어버린 이후, 황제는 어렸던 노튼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노튼 입장에서는 다시 돌아온 루카스가 방해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루카스를 사랑하는 만큼, 황제는 노튼 또한 사랑했다. 자신의 두 아들이 모쪼록 제대로 겨루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길 바랐다.
“내가 뭘 어떻게 해 주면 좋겠느냐?”
“많은 것을 아버지께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그녀와 함께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부디 저의 마음과 그녀가 당한 부당함을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거 안 바랄게.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어 오면 제대로 판 깔아 주세요.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참 능글맞은 아들이었다.
“마땅히 그래야지. 다만.”
“…….”
“그 애에게 약혼자가 있다면 그 또한 귀족일 것이다.”
“…….”
“소문만으로는 귀족을 조사하거나 벌을 내릴 수 없다. 그게 제국법이다. 황제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단다.”
남작 또한 소문만으로 벌할 수 없으니 증거를 가져오라는 소리였다.
노튼의 자금줄을 끊어 놓고 싶니? 그럼 증거 가져와.
루카스가 빙그레 웃었다. 황제도 빙그레 웃었다.
이 애가 처음 성에 들어왔을 때, 그가 황제의 핏줄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카멜리아 공작을 불렀더랬다.
그러나 새삼 그때 왜 그랬을까, 황제는 허탈해졌다. 모로 봐도 음흉한 것이, 제 핏줄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 * *
리시스트 제국법은 오래됐다. 제국 자체가 벌써 사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법전은 엄청나게 두껍고 컸다. 권수로 따지면 스무 권이 넘었다.
그나마도 공작저나 되니까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귀족의 서재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 눈알이 먼저 빠질까, 팔이 먼저 빠질까?”
리네트가 투덜거렸다. 어쨌든 법전에는 신문 관련 조항이 거의 없었다.
귀족의 명예를 해칠 만한 소문을 퍼트린 자는 평민일 경우 재산을 몰수하고 해당 귀족에게 삼대가 봉공하게 한다, 따위의 법만 가득했다.
“삼대가 봉공하다니, 언제 적 이야기야.”
기가 막힌다. 리네트는 턱을 긁으며 법전을 뒤졌다.
게다가 기준도 모호했다. 명예를 해칠 만한 소문의 기준이 뭔지 제대로 명시해 놓지도 않았던 것이다.
즉, 판시하는 놈 맘대로다. 남자 귀족일 경우 결투로 결정했다.
“귀족이 여성일 경우는?”
그런 조항은 없다. 리네트는 혀를 찼다. 이놈의 제국이 사백 년 넘게 굴러온 게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이런 식의 허점투성이 법이 수십 개였다. 그 덕분에 빠져나갈 구멍도 수십 개였지만.
“아가씨, 식사하세요.”
“뭔데?”
“뭘 물어요.”
애플이 끌고 온 트롤리 위에는 빵 쪼가리 몇 개와 수프 정도가 전부였다.
리네트는 코를 찡그렸다.
“공작가 나 모르는 사이에 파산했대?”
“뭐, 마님 분부 아니겠어요?”
수도가 뒤집어졌는데 공작가라고 뒤집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이멜다는 길길이 날뛰었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단단히 단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문을 낸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카멜리아 공작은 좀 다르게 움직였다. ‘리시스트의 아침’을 어디서 찍어 냈는지 알아본 것이다.
리네트가 미리 펜플에게 사무실을 가명으로 알아보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펜플은 꼼짝없이 공작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애플은 딱딱한 빵을 먹기 좋게 수프에 찢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끼니마다 챙겨 주시는 게 어디예요. 본래는 굶기라고 했대요.”
“그래? 근데 밥은 왜 준대?”
“그야 아가씨가 어지간한 놈팡이랑 어울린 게 아니니까 그렇죠.”
리네트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렇다. 황자.
호외 속에서 황자는 리네트에게 목을 매달다 못해 애걸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쓰여 있었다. 보통 때였다면 헛소문으로 치부했겠지만, 그 황자가 무작정 제집에 쳐들어온 것을 공작도, 공작 부인도 본 후다.
절대 헛소문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카멜리아 공작은 속이 뒤집어져 에드가 발란과의 약혼을 당기려고 했으나, 에드가 발란은 아무래도 황자의 엄청난 지위에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제게 저주 섞은 편지를 보내면서도, 그 뒤로 공작가에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확실했다.
‘일단 보기 싫은 걸 치우는 데는 성공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아직이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일이야말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큰일이 일어난다.
치정이라는 게 대개 그렇다. 뭐, 그 에드가란 놈과 제 사이를 일컬어 치정이 어쩌고 운운할 만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무능한 놈이 한몫 쥐는 길은 나밖에 없으니, 나름대로 방법이라도 강구해 보려 하겠지.’
카멜리아 공작도 마찬가지다. 리네트가 황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의 아이를 공작가에 입적시키려는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황가의 핏줄은 귀하여 보호받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의 공작가, 프라임 공작가의 경우는 조금 다르긴 하다. 프라임 공작가는 딸을 황가에 시집보낸 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 딸이 낳은 황가의 핏줄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카멜리아 공작가는 대를 물려 나타나는 능력 때문에, 단 한 번도 황가에 그 핏줄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일부러 내 상대로 못난 남자를 고른 것도 그 이유일 텐데.’
어지간한 가문들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그 정도를 넘어선다. 공작이 에드가 발란을 고른 것은, 만약 리네트가 아들을 낳는다 해도 아이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만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산 넘어 산이었다.
그 전에- 리네트는 법전 끝을 쥐었다. 거친 종이가 리네트의 손가락 끝에서 서걱거렸다.
“빨리 약혼해야 하는데.”
리네트의 혼잣말에 애플이 코로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전 걱정돼요.”
“뭐가?”
“그 황자님, 믿을 수가 있어야죠.”
“믿기 어려워?”
“믿기 어렵다기보단…… 그렇잖아요. 일반적인 분이라면 진작 아가씨를 불경죄로 감옥에 처넣었을 거라고요.”
“너 말에 가시가 있다?”
애플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대놓고 말해 드려요? 미친놈 같아요.”
가차 없었다. 누가 제 친구 아니랄까 봐. 리네트가 키득키득 웃었다. 애플의 평가는 가혹했으나 맞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다. 리네트의 말은 너무나 불경했고, 막말에 가까웠다. 키리에 레미시어가 사사건건 발끈하는 이유가 있었다.
상식적인 황자라면 리네트에게 벌 정도는 내리겠지. 상식선보다 좀 더 가혹한 자라면 리네트를 매질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리네트는 그래서 그 황자에게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권력이라는 건 가진 사람의 감각을 좀 이상하게 바꿔 놓는다. 리네트는 공작 부인과 공작을 봐 왔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릎 꿇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제 말을 들을 줄은 아는 자였다.
그 이멜다조차 가끔은 공작에게 말을 잘린다. 여자의 말은 흔히 들을 가치가 없다고 폄하돼 버리니까. 극도로 예민한 정치적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노튼 황자의 어머니인 현 황후는 위치가 위치임에도 가끔은 여자가 너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족들도 아니고 평민들에게까지.
리네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동시에 황자와 대거리하면서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네트가 막살기로 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나넬의 ‘해피엔딩’ 이후, 도무지 자신은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가에 갇혀서 놀고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리네트는 끊임없이 이 공작가에서 부유했다. 말 그대로 둥둥 떠 있었다는 이야기다.
공작 부인에게 뺨 때리라고 얼굴을 들이밀 정도의 삶이다.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찌라시 따위를 쓰며 잔재미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리시스트가 뒤집어졌다. 어딜 가나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
“전 아가씨를 정말로 걱정한다고요!”
“그래, 고마워.”
리네트는 애플의 말이 진짜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백안 덕분이다.
애플은 자신을 자매처럼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나 주목받게 된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고양감은 두려움은커녕 리네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리네트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이멜다를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제 앞에서 멀쩡하게 행동했던 이멜다.
지금도 이멜다는 자신을 방 안에 가둬 둘 뿐, 와서 폭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았다. 여느 때였다면 찾아와서 분풀이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멜다는 그저 리네트를 가두고 최소한의 식사만 주었다.
처벌의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처분이다. 놀랍지.
‘그 남자가 방법을 찾아 줄 거야.’
리네트는 제게 들렸던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녀는 도저히 그 목소리와 이멜다의 변화를 연관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흥분감과 고양감. 그리고 목소리.
어쨌든 리네트는 루카스를 도울 것이다.
* * *
공작가에서는 리네트의 바깥출입을 빈틈없이 단속했다. 리네트가 드나드는 것을 도와주거나 눈감아 주는 사용인은 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내린 것이다.
반면 리네트는 하녀들에게 당근을 내밀었다. 제가 나갈 때마다 눈감아 주는 자들에게는 은화를 쥐여 주고, 적극적으로 돕는 하녀들에게는 금화를 쥐여 주었다. 자고로 멀리 있는 주먹보다 가까이 있는 돈이 최고다.
덕분에 리네트는 여전히 그 식당에서 루카스와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식당 위의 숙박업소.
치마를 잔뜩 걷어 올리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술에 취한 듯 깔깔 웃으며 두 남자의 팔짱을 끼고 숙박업소에 들어가는 광경은 기차역 근처에서는 흔했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리네트는 풀어헤친 가슴을 정돈하며 탁자 앞에 앉았다. 루카스와 키리에 또한 모자를 벗고, 엉망으로 흘러내린 바지춤을 끌어 올렸다.
서로의 옷차림을 농담거리로 삼지는 않았다. 시간 낭비였다.
리네트가 가장 먼저 쳐 버릴 사람으로 지목한 이는 배럴 남작이었다. 리네트는 노튼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했다.
“왜 내 상황이 아니고?”
“지금 댁한테 상황이랄 게 있어?”
리네트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을 지지하는 자들은 중급 귀족 이하의 젊은이들뿐이야. 논할 가치도 없어.”
루카스가 상처받은 양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지만, 리네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현재 노튼 황자를 지지하고 있는 건 황후를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었다.
황후는 남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낸터킷 가문의 고명딸로, 그녀의 오라비인 낸터킷 후작이 국경에서 군대를 물리는 순간 야만족들이 제국을 위협할 것이다. 그만큼 제국에서 중요한 인사였다.
그나마 국경 방어 때문에 낸터킷 후작이 수도에 올 여유가 없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어쨌든 황후를 필두로 노튼을 미는 귀족들 또한 대부분 남쪽 영지 출신이었다.
날씨가 좋고 부유한 남부 영지들은 대부분 잡스러운 것들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먹고사는 데 별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부유한 축 하나가 배럴 남작이었다.
리네트가 ‘하녀들의 수다’로 은근히 집어냈던 전적이 있는 자.
리네트는 찌라시를 통해 배럴 남작의 도박장을 지목했다. 마법 약과 인신매매, 변태적 성매매가 판치는 곳.
“폐하께 확답은 받았다.”
“무슨 확답?”
“증거를 가져오면 봐주신다더군.”
루카스의 말에 리네트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확답이야. 당신 역시 좀 예민해질 필요가 있겠는데.”
“왜?”
“바꿔서 말하면 확실한 증거 없이는 상대 안 해 주겠다는 얘기잖아.”
“…….”
리네트의 말이 맞았다. 루카스가 입을 닫았다.
리네트는 짜증을 섞어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술 취한 여자인 척하느라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카락만 몇 가닥 뽑히고 말았다.
“뭐, 그 정도 여우니까 황제란 것도 하고 있는 거겠지만, 좀 봐줘라.”
“뭘 봐줘?”
“내가 지금 다섯 살짜리 어린애의 가정 교사가 됐다는 생각은 안 하게 해 달라고.”
“미안하군.”
황자가 웃었다. 리네트는 얼굴 근육을 잔뜩 구겼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든 매번 웃었다.
잘못을 지적당하면 수용하고 사과하는 건 미덕이다. 그렇지만 그저 찌르면 푹푹 들어가는 위인이라면 곤란한데.
“아무튼 제국법을 좀 살펴봤는데,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서 걸릴 만한 건-”
“마법 약은 안 돼.”
리네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루카스가 이어 말했다.
“제국법에 의하면, 마법을 이용한 범죄는 가장 먼저 마탑에 그 처결권이 있지. 마법 약만 가지고는 배럴에게 손댈 수 없어. 발각 즉시 마탑으로 그 권한이 넘어가 버릴 거야. 다른 것으로 얽어야 해. 인신매매라든가.”
“제법인데.”
“황공합니다.”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폈다. 완전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건 인신매매의 피해자, 그리고 중류 귀족 이상의 작위를 가진 자의 증언. 평민의 증언은 무산될 가능성이 많지. 결국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야.”
“…….”
리네트가 입을 다문 동안 키리에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당신은 안 돼.”
“너는 안 돼.”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키리에는 억울해했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네가 말하라는 리네트의 눈짓에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뻣뻣해서 도박장 같은 데 들어가자마자 싹 털리고 인신매매 근처엔 가지도 못할걸.”
“옆에 창녀라도 붙으면 기절할 것 같은데.”
이런 부분에서는 둘의 의견이 맞았다. 리네트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도박장이야, 내가 간다면 백안을 써먹을 수 있겠지.”
“……말도 안 됩니-”
“아, 키리에 경. 내 말 마저 듣고 말해. 아직 당신이 그 말 할 타이밍 아냐.”
리네트가 한 번 손을 내젓고 뒤이어 입을 뗐다.
“당신도 같이 가.”
리네트의 시선은 황자에게 머물러 있었고, 키리에는 이번에야말로 노호성을 터트렸다.
“안 됩니다!”
“좋아, 잘했어. 앞으로도 내 말 끝까지 듣고 반대하도록.”
박수 치는 리네트 덕에 꼴이 우스워졌지만 말이다.
* * *
배럴 남작을 잡으려면 중급 귀족 이상의 작위를 가진 자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어지간한 자들은 모두 노튼 황자를 무서워했다. 루카스 황자파의 젊은 귀족들도 황제 앞에서 대놓고 노튼의 자금줄을 끊을 만한 증언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키리에는 뻣뻣해서 안 되고, 리네트는 혼자 들어갈 수 없다. 그녀는 사기꾼으로 가득한 도박장에서 가장 유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 혼자는 도박장을 출입할 수 없으니까.”
“아무튼 이 나라는. 여자는 뭐, 손발 다 잘린 생물인 줄 아는 놈들뿐이지.”
리네트가 투덜거렸다. 그에 루카스가 웃었다.
키리에는 ‘아무리 그래도 두 분만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라며 맹렬히 반대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결국 도박장에는 두 사람이 가게 됐다.
* * *
“안쪽 분위기는 어때?”
“이런 곳이 그렇듯이 엉망이야.”
도박장이 처음인 리네트와 달리, 내부 인물들과 얼굴을 익히기 위해 4일째 연장 출석 중인 루카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언제나 아름답던 그의 금발은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법 덕분이다. 마탑에서 파는 염색 약을 사면 좋으련만, 요즘 마탑은 마력석이 부족해 염색 약 같은 사치품은 거의 생산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치품이 없어서 그냥 마법을 직접 갖다 쓴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잘 안 나올 텐데.”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지.”
리네트가 픽 웃었다.
“덕분에 호강하네.”
“호강?”
리네트는 지금, 엄청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부유한 여인으로만 보이는 화려한 드레스다. 최신식 유행으로 허리를 가늘게 졸라매고, 목까지 높은 옷깃이 올라와 있으며, 짙은 빨간색의 아름다운 원단에 화려한 꽃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다. 봉긋한 소매산과 팔을 따라 내려오는 흑진주 장식은 어지간한 아가씨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녀가 평범한 귀족 아가씨가 아닌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새카맣고 반투명한 자수 레이스에 덮여 가슴골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앞섶, 그리고 구불구불하게 말아 늘어트린 머리카락이었다.
보통 귀족가의 여성들이 앞섶을 섬세한 원단으로 꽁꽁 감싸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틀어 올리거나 모자 안에 감추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루카스 또한 망나니 귀족 자제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결이 엉망인 갈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실크 리본으로 동여매고, 재킷의 단추는 모두 풀어헤쳤다. 크라바트는 뒤가 다 보이는 반투명한 실크로 엄청난 고급품이었지만 어딘가 조야했다.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도박장 앞에서 내리자마자 모두가 주목했다.
어차피 리네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카스가 조금 걱정됐으나, 머리 모양을 바꾸면서 얼굴도 마법으로 조금 바꾸었다. 코는 낮추고, 입술은 두툼하게. 턱도 좁혔다.
루카스는 바뀐 제 얼굴을 두고 ‘시야가 어쩐지 시원하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제 코가 너무나 높아서 시야에 걸렸다나 뭐라나. 기가 막혀서.
어쨌든, 리네트는 생긋 웃으며 엄청난 크기의 루비 목걸이를 짚었다.
“이런 보석 목걸이는 공작 부인이라도 구입하기 어려울 거예요, 달링. 선물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
도박장 입구의 경비를 의식한 리네트의 말에, 루카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 나의 사랑. 네가 원한다면 이깟 루비보다 훨씬 큰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겠어.”
경비가 그런 루카스를 알아보고 인사한 다음, 응대하는 하인을 붙였다.
루카스는 푸른 눈을 빛내며 리네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허리에 닿아 오는 루카스의 맨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보통 때라면 약간은 마음이 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리네트는 최근 제 남자 얼굴 기준선이 좀 높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사실 루카스를 돕기로 한 이유는 얼굴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루카스의 얼굴을 바꿔 놓으니 도박장이고 나발이고 영 할 맛이 안 났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어떤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류에 대한 죄의식이 조금 커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리네트는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원한다면, 달링?”
“음, 오늘 밤의 네게 달려 있지.”
“아이, 무슨 뜻이야?”
“알면서.”
“자기야말로 잘해.”
오늘 잘해라.
너나 잘해.
깔깔깔, 리네트가 짐짓 큰소리로 웃었다.
둘을 안내하던 하인은 음담패설로밖에 들리지 않는 두 남녀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 * *
리네트는 루카스의 한쪽 무릎에 앉은 채 주변을 돌아봤다.
고풍스러운 내부는 도박장이 아니라 제법 괜찮은 살롱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수십 개의 테이블에서는 저마다의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합법적인 도박만 했기에 내깃돈의 액수는 얼마든 상관없었다.
다만 배럴 남작의 도박장은 제국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인신매매와 성매매, 그리고 마법 약 거래를 모두 했다.
그 증거를 잡아야만 했다.
리네트는 1층을 얼추 둘러본 후, 시선을 위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도박장 입구에서도 봤던 경비들이 어슬렁거리며 지키고 있었다. 간혹 거길 지나가는 이들이 있었으나 확인 과정이 철저해 보였다.
‘아마 2층이나 3층…… 여기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열쇠일 거 같은데.’
“자기야, 재미없어?”
리네트가 계속해서 말없이 주변을 돌아보자 루카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리네트는 빠르게 웃으며 루카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으음, 달링. 로즈는 조금 지루해요.”
“심심해?”
“응.”
“우리 예쁜이가 심심하면 어떡하지? 오빠는 지금이라도 우리 예쁜이랑 나가고 싶은데, 그러면 여기 다른 오빠야들이 화를 낼 거야.”
루카스는 정말로 훌륭하게 연기했다. 허리를 까딱거리며 제 무릎 위에 앉은 리네트를 흔들흔들 흔든 것이다.
“아앙.”
리네트가 교태를 부리면서 루카스의 팔에 매달렸다.
야, 너 좀 놀았나 보다.
제가 좀 놀 줄 알죠, 아가씨.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음과 동시에 나누는 천박한 몸짓에, 테이블에서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남자들이 킬킬거렸다. 창녀를 데리고 도박장에 오는 놈들이 한둘은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익숙했다.
“그럼 로즈도 이거 시켜 주면 안 돼?”
“이거?”
루카스가 곤란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서로 눈짓하더니 픽 웃었다.
“거, 아가씨가 할 수 있겠어?”
“로즈는 쉬워 보이는데. 아니에요?”
리네트가 눈을 깜박거렸다. 팔랑거리는 속눈썹에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이 같이 눈을 껌벅거렸다.
“숫자 맞추기는 쉬워 보이던데…….”
“숫자 맞추기? 아, 베이커 게임을 말하는 거군.”
리네트와 루카스 바로 정면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눈은 리네트의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리네트는 눈웃음치며 가슴을 한층 더 내밀었다. 도박장 안으로 들어오며 목 칼라의 단추까지 끌러 놓은 참이었다.
‘봐라, 이놈아. 그러라고 까놓은 가슴이다. 너 같은 놈들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았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루카스가 무릎을 모아 리네트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자기, 이거 생각보다 어려워.”
그러고는 손을 들어 리네트 목의 칼라 단추를 잠그는 것이 아닌가.
이거 봐라? 리네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샐쭉한 척 루카스의 손등을 쳐 냈다.
찰싹.
“달링은 맨날 나한테만 어렵대.”
그리고 몸을 돌려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저기, 로즈 한 번만 시켜 주면 안 돼요? 응? 한 번만.”
허허허. 낮은 웃음이 테이블로 퍼졌다. 중년 남자는 은근한 눈빛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거, 한번 시켜 주지 그러오?”
“아시지 않습니까. 도박판에서 중간에 새 참가자가 끼어드는 법은 없습니다.”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으나 리네트는 이잉, 하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주변 도박꾼들이 헛웃음을 지으며 한 번씩 권하기 시작했다.
“뭐, 어떻소. 내내 지겹던 참인데, 예쁜 아가씨하고 베이커 게임 한두 판쯤 하는 것도 기분 전환에는 도움이 되지.”
“그래그래. 아가씨가 많이 심심한가 본데.”
모두가 찬성하니 게임 세팅도 빨랐다. 딜러가 곧 와서 베이커 테이블을 깔았다.
베이커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제가 카드 두 장을 나눠 드립니다. 돌아가며 계속해서 카드를 나눠 갖습니다. 멈추고 싶을 때는 멈추시면 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분이 멈췄을 때, 각자 가진 카드를 공개합니다. 카드의 합이 저보다 먼저 21이 되거나 저보다 21에 가깝게 되면 이기고, 21을 초과하면 그분은 베팅한 금액을 모두 잃습니다.”
딜러가 카드를 섞으며 말했다.
카드를 섞고, 베이커 테이블 위에 딜러가 카드 두 장을 올린다. 딜러의 카드 한 장은 오픈되고, 나머지 한 장은 딜러만 안다. 자연스레 딜러 카드의 합은 딜러밖에 알 수 없다.
대신 딜러는 카드의 합이 17 이상이 되면 멈춤을 선언한다. 그때부터는 눈치 게임이다. 도박이라기보다는 운에 의존한 심리 게임에 가까웠다.
‘블랙잭 같은 거군.’
리네트가 테이블 앞에 앉으니 카드 두 장이 나뉘어졌다. 리네트는 받자마자 ‘멈출게요!’ 했다.
순간 테이블의 모두가 긴장했다. 받자마자 멈추는 경우는 높은 수를 두 개 받거나, 그 수가 21에 아주 가까울 때뿐이다.
그러나 루카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자기야, 벌써 멈추면 어떡해.”
“어? 멈추는 거 아니야?”
“나 참…… 이번 판 죽습니다.”
그렇게 말한 루카스는 리네트의 앞에 있던 배팅된 금화를 가운데로 밀고, 리네트의 카드를 오픈했다.
카드의 합은 17.
도박꾼 하나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왜 멈춘 거요, 아가씨?”
“17 이상 되면 멈춘대서…….”
리네트가 어깨를 움츠리자, 딜러가 부드럽게 웃으며 리네트에게 일렀다.
“17 이상 되면 멈추는 건 저만 지키는 룰이랍니다.”
그 판의 승자는 중년 남자였다. 리네트는 이잉, 하고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자기야, 어렵다고 했잖아.”
“로즈가 착각했어. 한 번만 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응? 한 번만!”
리네트가 루카스의 목에 매달렸다. 가슴이 흔들렸다. 남자들의 눈도 흔들렸다.
“그래, 판돈 적게 걸고 한 번 더 하지 그래?”
“아가씨가 잘 몰랐던 모양인데, 슬슬 가르쳐 주면서 하면 되지, 뭐.”
다들 한마디씩 했다. 결국 리네트는 다시 베이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꼭 딸 거예요!”
“그래그래.”
“그리고 달링은 이번에는 로즈가 뭘 하든 끼어들지 마요!”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나는 자기를 걱정한 거라고.”
그에 리네트가 붉은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윙크했다.
“걱정하지 마요, 로즈가 멋지게 1등 할 거니까!”
붉은 옷을 입은 검은 머리의 ‘창녀’는 그날 베이커 게임으로 금화 삼천 개를 땄다.
* * *
리네트가 금화 열 개를 따 갈 때는 모두 ‘아가씨, 운이 좋네!’ 하고 웃었다. 그러다 딴 금화 열 개를 모두 잃은 그녀가 씩씩 팔을 걷어붙이며 금화 열 개를 판돈으로 걸 때는 모두 못 이기는 척하며 게임에 임했다.
리네트가 금화 백 개를 땄을 때, 남자들은 말리는 척했지만 은근슬쩍 리네트를 판 안으로 끌어들였다. 금화 오백 개를 잃은 리네트가 울상이 되어 목에 찬 루비를 테이블에 올렸을 때, 남자들은 눈짓했다.
판돈은 금화 삼천 개. 그리고 커다란 루비 목걸이.
“우리 달링이 오늘 사 준 거예요! 보증서도 있다고요!”
유명한 보석 상점의 보증서까지 담긴 상자를 내건 리네트가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서 카드를 쥐었을 때, 남자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금화 삼천 개는 리네트의 것이었다.
딜러가 무표정하게 선언했다.
“로즈 님이 이기셨습니다.”
판이 커지니 주변 테이블이 모두 구경 와 있었다. 가드들이 판돈으로 올라와 있던 금화 삼천 개를 밀어서 자루에 담았다. 남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사기야!”
“어머, 로즈는 안 그랬어요!”
팔짝팔짝, 제 연인과 손을 잡고 뛰던 로즈는 좋아하다 말고 반박했다.
“아까 보셨잖아요! 오빠가 로즈한테 금화 오백 개 따셨잖아요! 그때 로즈가 사기라고 할 때는 뭐라고 하셨어요!? 로즈한테 베이커 게임은 운으로 하는 거라 사기가 개입할 수 없다면서요!”
운보다는 심리 게임이다.
콜을 하느냐, 스테이하느냐.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들의 얼굴을 리네트는 읽었다. 표정에 서린 거짓을 읽어 내니 백전백승이었다.
그렇게 잃어야 할 때는 적당히 잃었고, 따야 할 때는 땄다.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섰지만, 가드들이 리네트와 루카스를 둘러쌌다. 매니저가 빠르게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잠시 휴식을 가지시는 게 어떨까요?”
리네트는 울먹이며 말했다.
“제 돈은요?”
매니저가 옅게 미소 지었다.
“판돈도 무사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죠?”
리네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자, 루카스가 리네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기야, 쪽팔리게 왜 그래. 여긴 그런 데 아냐.”
“알잖아! 내가 그 사기꾼 과슈 놈에게 얼마를 날렸는지!”
과슈가 누구야?
내가 알아? 장단이나 맞춰.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이 새끼가?’
리네트의 눈이 뾰족해졌으나, 그건 과슈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으로만 보였다.
“자기, 그래서 내가 저번에 진주 반지 사 줬잖아. 진정해. 그리고 우리 술이라도 마시자. 응?”
리네트가 입을 비죽이는 동안 루카스가 매니저에게 말했다.
“발포주 주문되죠? 우리 룸에 발포주도 넣어 줘요.”
“……룸이요?”
“여기 그런 장사 안 해요? 이상하다. 룸도 있다고 들었는데.”
“……휴식 공간 정도는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두 사람은 곧 2층의 작은 방으로 안내됐다.
리네트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사방을 살폈다. 2층은 1층과 달리 개방형이 아니었다. 긴 복도, 그리고 문들. 가운데 큰 문이 있는 걸 봐서는 그곳이 메인인 것 같았다.
방 안은 워낙 작았다. 편히 쉴 만한 소파 하나, 그리고 침대 하나뿐인지라 귀족들이 맘 놓고 뒹굴 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리네트는 침대에 앉다가, 소파에 몸을 기대는 루카스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 해? 이리 와.”
“……왜?”
“그렇게 뻘쭘하게 앉아 있다가 가드들이 돈이라도 들고 오면 ‘아, 사실 저희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서요.’라고 말하려고?”
루카스는 비죽비죽 웃으며 리네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리네트는 어이없는 눈으로 루카스를 한 번 쳐다보고 그의 가슴을 쳤다.
“아야.”
“다리 벌려.”
“……지금 그 말, 굉장히…….”
짓궂게 웃는 루카스를 향해 리네트는 이마를 구기고 일어나 말했다.
“이제 와서 머리를 아랫도리에 사로잡힌 열다섯 살 남자애처럼 굴지 마. 내가 당신 만나자마자 했던 말은 나랑 자자는 이야기였어.”
리네트는 직접 루카스의 무릎을 잡아 벌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침대 위의 남자와, 그 위에 올라앉은 여인.
야릇한 분위기였지만 리네트는 손톱만큼도 동하지 않았다.
“다행이네.”
“음?”
“어지간하면 두근거릴 만도 한데,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 요만큼도 즐겁지 않아. 마법으로 얼굴을 바꾸는데 왜 꼭 못생긴 얼굴이어야 하는 거야?”
리네트가 투덜거렸다.
“누가 당신을 알아보는 게 문제라면 다른 잘생긴 얼굴로 바꾸면 되잖아?”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얼굴이 잘생기면 즐거운가?”
“당연하지.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일하고 있는데, 사소한 복지 정도는 챙겨 주면 어디가 덧나?”
“얼굴이 복지야?”
“증세 없이 가장 큰 복지를 실현하는 방법이지.”
“참고하도록 할게.”
그때, 바깥에서 이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리네트는 빠르게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마.”
“실례했습니다.”
매니저는 놀라지도 않았는지 무표정하게 말을 건넸다. 가드들은 금화가 담긴 상자를 가지고 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돈을 세었다.
개당 금화 백 개로 치는 벨린 금화 서른 개.
리네트가 손을 뻗으려는데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저희 도박장은 그날의 판돈을 모두 가져가실 수도 있고, 도박장에 적립해 다음 도박 판돈으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적립하면 뭐가 좋아요?”
“금화 천 개부터는 천백 개로, 일 할의 이자를 드립니다. 그리고 3층의 도박장에서 최고의 고객들과 함께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드리죠.”
리네트도, 루카스도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지금이 기회라고 직감했다.
루카스가 야아, 하고 웃었다.
“최고의 고객? 어차피 그거 판돈만 키우는 거잖아?”
“그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판돈을 다른 것으로 바꾸실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아! 로즈 들은 적 있어요!”
리네트가 손뼉을 쳤다.
“달링, 우리 여기서 좋은 거 할 수 있다?”
“좋은 거?”
“왜, 있잖아. 그…… 로즈가 전에 하고 싶다고 했던 거. 응응?”
루카스가 비죽비죽 웃었다.
“아하, 그으…… 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는 리네트의 엉덩이 쪽을 보란 듯 더듬었다.
리네트는 역시 제 일이 극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정말 얼굴이라도 절세 미남으로 바꾸라고 말해야겠다.
“좋아, 그럼 금화 삼천 개 모두 적립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성함은?”
“자기 이름으로 할까? 로즈.”
매니저가 고개를 숙였다.
“로즈. 알겠습니다.”
* * *
도박장에 다시 들어온 것은 사흘 후였다. 리네트는 새벽을 틈타 겨우 나왔다. 시간이 촉박해 아름답게 치장하기가 어려워, 대신 잔뜩 흐트러트리기로 했다.
속옷 위에 분홍색 드레스만 하나 걸치고 머리를 헝클어트린 뒤, 뺨에는 붉은 분을 칠했다.
루카스에게 매달려 들어가자마자 바로 3층의 작은 방으로 안내됐다.
루카스가 작게 속삭였다.
“술 한 잔 안 마시고 취한 척 잘한다. 중앙 극장의 여가수 마리아도 그대처럼 연기했다면 이미 대배우라고 불렸을 거야.”
“지금 놀려?”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네트는 술 취한 창녀 흉내를 아주 잘 냈다.
작은 방에서 루카스가 두세 명의 도박꾼과 도박을 시작하자, 리네트는 그의 등에 매달려 술병으로 카드를 짚어 내며 ‘아이, 우리 오빠, 오늘 잘 풀리네?’ 같은 이야기를 했다.
도박꾼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루카스의 돈을 따 갔다. 루카스는 짜증 난 초보 도박꾼 흉내를 내며 리네트를 한쪽 구석으로 처박았다.
리네트는 히히 웃으며 ‘나, 꽃밭 좀 다녀올게요. 알았죠?’ 하고 비틀비틀 방 밖으로 나갔다. 가드들이 리네트를 힐끗 봤지만 그녀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3층 복도로 나간 리네트는 가장 먼저 주변을 확인했다. 3층이 1층, 2층과 다른 점은 가드들이 복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간혹 몇몇 가드들이 돌아다니기는 했으나 뜸했다. 방 안에 누가 있는지 티 내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리네트는 가슴 안쪽에 있는 수첩을 확인했다. 지젤이 준 수첩은 잘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이 물건이 활약할 것이다.
리네트가 찾아야 할 것은 인신매매의 흔적이다. 보통 그런 종류의 시설은 지하에 있겠지만, 이 건물은 지하층이 없었다. 1층에서 루카스가 며칠 죽치며 살핀 결과였다.
그리고, 4층.
저택은 총 4층이었다.
리네트는 본격적으로 술 취한 흉내를 내기로 했다. 가장 편안한 방법이었다. 술병을 손에 들고 비틀비틀 걸으며, 아무 방이나 문을 벌컥 열었다.
“어머! 죄송.”
두 개의 방은 도박꾼들이 패를 돌리다 이마를 찡그렸으며, 방 하나는 가드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리네트는 헤헤 웃으면서 ‘죄송해용.’ 하고 손을 흔든 후 다시 방문을 닫았다.
리네트가 네 번째 방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리네트의 어깨를 잡았다.
“너 뭐야?”
“어머, 가드 오빠네. 미아안-”
방금 전에 연 문 안에서 쉬고 있던 험상궂은 가드였다.
리네트는 비틀거리며 웃었다. 쫓아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유, 가드 오빠. 빙빙 돌지 좀 마. 정신이 없잖아, 내가.”
쫓아 나온 다른 가드까지, 두 명의 가드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모르겠어. 손님이 데려온 여자인가?”
“근데 너무 엉망인데?”
“그럼 여기 애인가?”
“여기 애들이 왜 3층까지 내려와?”
여기 애들. 3층.
리네트는 눈을 부릅뜨지 않으려 무진 고생을 해야 했다. 우연하게도 빙고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가드의 어깨에 기댔다.
“오빠, 나 여기가 너무 아프다. 호- 해 줘.”
“미친 계집애. 어디서 온 거야?”
“모르겠다. 일단 올려다 놓을까?”
“그래.”
가드 두 명이 리네트의 어깨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 한 놈이 은근슬쩍 리네트의 엉덩이를 더듬어서, 리네트는 술 취한 척, 가드의 뒤통수를 후렸다.
퍽-!
“에라, 이놈아!”
“아, 진짜! 술 처먹었으면 곱게 가자, 어?”
“한 대 더 맞아라, 이놈아!”
가드는 신경질을 내며 리네트를 끌고 어딘가에 던져 넣었다. 4층은 아니었다.
문이 쾅, 닫혔고 리네트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는 척하며 일어났다. 음습한 냄새가 났다.
홈런…… 은 아니고 안타쯤 되려나.
바짝 마른 여자 한 명이 벽에 기대 있다가, 이쪽을 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 * *
한편 루카스는 꽤 지루한 상황이었다.
1, 2층과 3층은 다르다고 했지만, 루카스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게임에 따라 방을 고르고, 도박꾼들은 묵묵히 게임만 했다. 판돈이 아래층보다 훨씬 클 뿐이지, 다른 게 없었다.
불법적인 것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루카스는 조금 초조해하며 카드를 던졌다. 눈앞의 도박꾼이 루카스의 카드를 보고 칫, 소리를 내더니 카드를 엎었다.
“이번 판 죽어.”
“오- 케이.”
몇 번째 게임인지 모를 일이었다. 리네트는 술에 취한 척하고 복도로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루카스가 몇 번 문 쪽을 흘깃거리자, 도박꾼들은 ‘형씨, 눈 조심해.’ 하며 짜증을 냈다. 카드 도박은 눈길만으로도 사기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언제까지고 낭비할 수는 없는데.’
낮에는 황자로 살고, 새벽에는 도박꾼으로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리네트는 이번이 두 번째였으나 루카스는 도합 대여섯 번은 됐다. 더군다나 루카스만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키리에는 그를 엄청나게 걱정하여 결국 제 밑의 기사들을 몇 보냈다. 이 시간에도 이곳 어디선가 키리에의 기사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간만 죽이고 있을 것이다.
그중 제대로 된 증거를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몇 시쯤 됐소?”
“라이덱이 떴습니다.”
루카스가 시간을 묻자, 딜러가 친절하게 답했다.
라이덱은 새벽의 첫 별이었다. 새벽 별이라고도 불렀다. 새벽 별이 뜨고 나면 적어도 두세 시간 후에는 해가 뜬다.
오늘은 글렀군. 루카스는 이제 그만 리네트를 찾아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판 오래 걸리겠구만. 나 모래 좀.”
방금 카드를 엎은 도박꾼이 연신 하품을 하다 그렇게 말했다.
‘모래?’
그쪽을 곁눈질하자, 딜러가 문 옆에 서 있던 가드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가드가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오는 게 보였다.
가드가 가지고 온 것은 아주 작은 상자였다.
종이 상자를 받은 도박꾼은 흠, 하고 안을 열어 확인하더니 새끼손가락으로 그 안을 헤집었다.
그리고 루카스는 분명히 봤다. 손가락 끝에 묻은 초록색 가루. 그 위에는 무지갯빛 구름이 떠 있었다.
‘마법 약이군…….’
도박꾼은 가루를 혀로 핥더니 오케이 사인을 한 후, 제 판돈에서 벨린 금화 한 개분의 패를 집어 가드의 손에 올려 뒀다.
가루를 받은 도박꾼이 이내 방구석에 있는 긴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가루를 제 파이프에 채웠다.
담배처럼 피우는 건가? 루카스가 눈을 찡그리곤 제 카드를 엎었다.
“죽습니다.”
“오케이. 셋 남았군.”
루카스의 패는 제법 괜찮았지만, 이길 만한 패도 아니었다. 차라리 카드를 빨리 내려놓고 맘 편히 그쪽을 보는 게 나았다.
그사이 가루를 파이프에 채운 남자가 파이프에 달린 부싯돌 당김쇠를 끌어당겼다 놓았다. 대번에 불이 붙었다.
습- 하. 남자는 연기를 맡으며 뒤로 누웠다.
“……저게 뭐요?”
몰래 알아볼까 했지만 이럴 땐 자고로 차라리 아예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는 것이 낫다.
루카스는 제 뒤에 서 있던 다른 가드에게 물었다. 가드는 남자 쪽을 바라보더니 답했다.
“모래입니다.”
“……그러니까 모래가 뭐냐고?”
“아, 그분 오늘 올라오셨어요.”
딜러가 미소 지으며 가드에게 말하자, 가드가 알겠다는 표정이 되어 설명했다.
“기분을 나른하게 하는 약초입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게임을 하느라 예민해진 신경을 달래는 데 쓰입니다.”
약초는 개뿔, 마법 약이겠지. 루카스는 그 약초라는 것이 대강 뭔지 짐작이 갔다.
핑일 것이다. ‘핑’이라는 식물의 잎을 말려 가루 낸 다음, 마법 효과를 더해 담배로 피우든 음식에 섞든 한다. 그나마 마법 약 중에서는 가장 문턱이 낮은 종류였지만…….
“야.”
그때, 남자가 늘어져서 가드에게 손짓했다.
“나 방 좀, 이히힛.”
그에 가드가 고개를 끄덕이곤 나갔다. 남자는 흐흡, 하고 웃으며 제가 늘어진 소파에 몸을 문댔다.
루카스는 대강 이 시스템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알 것 같았다. ‘핑’은 그냥 먹으면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주는 데 그치지만, 마법적 효과를 가하면 흥분제로도 쓰인다. 도박을 하다가, 마법 약을 하고 성매매로 연결되거나 하는 거군.
따로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이들이 많지 않은 이유도 대강 알 것 같았다. 마법 약을 취한 이들에게 단순하게 방만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카스는 턱을 어루만졌다.
“핑이군?”
웬만하면 애써 돌아가는 것보다는 스트레이트로 던지는 것이 루카스의 취향이었다. 딜러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저희는 모래라고 부릅니다.’라고 정중히 답했다.
“저것뿐이야?”
“필요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됐어. 새벽 별이 떴으니 깰 시간이 없을 것 같구만.”
루카스는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는 왜 안 오는 거지?
그녀가 나가고 나서 두세 게임을 했으니 족히 한 시간은 넘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들겼다. 가드가 나가 문을 열자 또 다른 가드가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 검은 머리 여자분이랑 같이 오신 분 계십니까?”
“어어? 난데?”
루카스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들었다.
“혹 게임 중이십니까?”
“아니야! 그렇잖아도 어디 갔나 했는데!”
루카스가 일어나니 가드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문을 활짝 열었다.
“같이 오신 아가씨이신지 확인을 좀 해 주십쇼.”
그 바람에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루카스에게 눈치를 줬다. 루카스는 어이쿠,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밖으로 나갔다.
거기는 가드에게 업히다시피 한 리네트가 있었다. 귀족 아가씨였다면 손도 못 댔겠지만, 그게 아닌 차림새라 아무렇게나 업은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같이 오신 아가씨가 맞습니까?”
“그래. 그런데 우리 자기가 왜 이래? 너희들 무슨 짓 했어?”
루카스의 말에 가드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희가 무슨 짓을 당했다고 보는 쪽이 맞겠는데요. 아무튼 괜찮으시면 쉬실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됐어. 이대로 가지. 로즈, 자기야. 일어나, 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서 자지 말고 일어나.”
루카스는 리네트를 깨웠으나, 그녀가 좀처럼 깨지 않아 이게 연기인지 아니면 정말로 취하기라도 한 건지 헛갈려 죽을 지경이었다.
겨우 그녀를 부축해서 도박장 바깥으로 나오자, 정문까지 따라 나온 가드들이 도박장 전용 마차를 불렀다.
그에 루카스는 손을 내저으며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작은 마차가 다가왔다.
마차의 마부-키리에는 깊이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으리라.
루카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리네트를 안아 마차에 태우고 문을 닫았다.
다각다각.
말이 움직였다.
“일어나 봐.”
“음냐.”
“혹시 취한 거야?”
“그냥 이대로 자고 싶다. 피곤해.”
내용과는 달리 말투는 멀쩡하게 깨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루카스는 팔짱을 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곧 리네트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녀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고, 흐트러진 옷을 채우며 하품했다.
“피곤해 죽겠네.”
“뭐라도 건졌어?”
“음.”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꽤 괜찮은 거.”
“뭔데?”
리네트는 잠시 망설였다. 루카스에게 제 무기를 내보여도 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제 가슴팍을 뒤집었다.
천연덕스럽게 가슴 안쪽을 헤집는 손길에 루카스가 움찔했으나 뭐라 말을 섞지는 않았다.
그녀가 꺼낸 것은 수첩이었다.
“보여 주기 전에 말해 둘 게 있는데, 이건 증거물로 쓸 수 없어.”
“뭔데?”
“마탑의 시제품이야.”
루카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는데, 마침 마차가 섰다. 세 사람이 묵는 숙박업소였다.
그 숙박업소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으면 좋을 테지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이 벌써 파랗게 변하고 있는 걸 본 리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 공작저에 한 번 더 와.”
“……통보 한 번 안 했는데?”
“한 번 더 올 때가 됐어. 소문 때문에라도 아마 더 이상 못 만나게 하진 못할 거야.”
“……알겠어.”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다시 움직였고, 공작저의 뒷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네트를 내려 주었다. 그때쯤의 리네트는 다시 하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정말로 이 여인이 수치심도 없지만, 제게 요만큼의 마음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리네트는 자신이 입었던 드레스를 펼쳐 놓고 루카스가 마차에 있든 말든 그 안에서 꾸물꾸물 하녀 복장으로 갈아입었던 것이다.
“이따 봐.”
“알겠어. 오후에 찾아가지.”
짧은 대화가 끝났다. 리네트는 길게 하품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매 순간이 놀라운 여자였다.
* * *
공작가의 집사는 정말 황자가 미웠다.
다음에는 꼭 기별을 보낸 후 오겠다던 황자는 약속을 지키기는 지켰다.
다만 당일 새벽에 보냈을 뿐이다.
집사는 새벽 별이 채 지기도 전에 은방울꽃 문양이 찍힌 서찰을 받고, 죽고 싶어졌다. 오늘 오후에 댁에 차 한잔 마시러 갈 것이며, 리네트 카멜리아를 보러 가는 것이니 공작은 나올 필요 없다는 내용을 길고 화려하게도 쓴 황성의 서찰이었다.
공작은 영지의 일을 돌보기 위해 사흘 거리의 영지에 간 참이었다. 자연스레 이멜다의 손에 서찰을 전달해야 했다. 미혼의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모친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예법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집사는 일어나자마자 은방울꽃 편지를 받아야 하는 공작 부인과, 그러한 공작 부인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 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게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할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 부인의 방 밖에서 서성거렸다. 보통 이멜다는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깨어났으나, 황자가 찾아오는 것에 대비하고 공작저를 치우려면 지금 깨워야 했다.
공작 부인의 직속 시녀 몇몇이 집사의 전언을 듣고는 정말 죽기보다 싫은 표정으로 이멜다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집사는 안에서 뭐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공작가의 아침은 그렇게, 또 루카스 리시스트 때문에 지나치게 일찍 시작됐다.
* * *
일어나자마자 황가의 은방울꽃 문양이 새겨져 있는 서찰을 받은 이멜다의 기분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수도에 가뜩이나 리네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난 차다. ‘리시스트의 아침’에는 서출일지도 모르는 리네트를 공작 부인이 퍽 미워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사실 이멜다는 교양과 우아함, 그리고 미모로 카멜리아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에 앉은 여인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소녀 시절부터 남다른 몸가짐으로 뭇 여인들의 본보기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런 그녀가 공작저에 들어앉은 저 사생아만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멜다는 그놈의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황자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바탕 공작 부인의 내실에서 뭔가가 잔뜩 부서져 나간 후, 하인 하나가 부리나케 답장을 들고 황성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이멜다는 당장 리네트를 씻기라고 명령했다.
새벽에 들어온 리네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푹 자다가 일어날 생각이었던 그녀는 채 두 시간도 자지 못하고 뜨거운 물에 그야말로 처넣어져야 했다. 머리를 강제로 감기며 리네트는 맹세했다.
‘죽일 거야, 루카스 리시스트…….’
크고 무거운 타월에 둘둘 감긴 채로 시녀들에게 이끌려 간 곳은 이멜다의 투왈렛 룸이었다. 그곳에는 이멜다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예요?”
“대체 그 황자 놈은 상식이라는 게 없는 거냐?”
이멜다는 연신 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화를 가라앉혔다. 리네트가 씻는 동안 제법 완벽하게 화장도, 드레스도 갖춰 입은 상태였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상식이 있으면 저한테 청혼을 안 했겠죠.”
“……말버릇하곤.”
역시 이상하다. 리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때였으면 제 말대답에 뭐라도 날아왔을 것이다.
이내 리네트의 머릿속에서 모종의 공식이 섰다. 이멜다가 정상적으로 구는 경우는 모두 그 황자가 연관돼 있을 때였다.
동화가…… 생각을 이어 나가려는 리네트의 타월을 시녀들이 벗겼다. 리네트는 순식간에 알몸이 됐다.
“제대로 입혀. 어디서 또 소문이 새어 나갈지 모른다.”
“네.”
공작 부인의 시녀들이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속옷을 입혔다. 리네트의 팔을 들어 올리고, 뷔스티에를 입힌다. 그 위에 코르셋을 가져다 대기에 리네트는 비명을 질렀다.
“코르셋은 안 돼!”
“그 굵은 허리로 황자 앞에 나설 셈이냐?”
“벌써 많이 봤어요! 상관없다고요!”
이멜다의 눈이 험악해졌다. 그제야 리네트는 자신이 퍽 문제가 될 만한 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으나, 주워 담지는 않았다.
“……창피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
“창피한 일이 뭔데요?”
리네트는 턱을 쳐들고 이멜다를 바라봤다. 이번에야말로 이멜다는 정말 화가 난 듯했다.
“너, 설마…….”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궁금하세요?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랍니다.”
그렇지. 술에 취한 척 바닥을 기는 것까지 다 봤지. 거짓말은 안 했다, 나?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르셋을 다시 밀어냈다. 그에 하녀가 난처해했다.
“됐어. 필요 없어. 그런 거 입으면 나 죽어.”
“……제발 죽었으면 좋겠구나.”
오. 제법 험악한 말에 리네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멜다는 부채를 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치심도 없는 계집애. 천한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는군.”
“어머, 제 핏줄 아세요? 전 모르는데.”
“말대답하지 마. 네가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그 황자와의 결혼도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못해.”
이멜다는 리네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네가 어디서 그 놈팡이를 만났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어. 틀림없이 지금 황자와의 소문 덕분에 에드가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이멜다의 부채 끝이 리네트의 턱을 올리자 리네트가 표정을 구겼다.
“-소문이라는 걸 이용할 줄 아는 건 너뿐만이 아니지.”
이멜다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리네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멜다의 눈빛은 평면적이던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 너머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일을 망친 리네트에 대한 미움, 짜증, 상황들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에 대한 답답함과…….
“그래 봐야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애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만이야. 남자들이란 여자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다가도-”
……리네트에게 해코지라도 불사할 것 같은 집요함까지.
리네트는 그 눈동자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이건, 동화책보다 더 나쁘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리네트는 겁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작 부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틀렸어요, ‘어머니’.”
“……뭐?”
이멜다의 경악은 아마 리네트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른 데 대한 것일 테다. 그러나 리네트는 이멜다가 고작 그런 것에 놀라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 정도 생각하셨어요?”
리네트가 이멜다에게로 얼굴을 들이댔다. 이멜다가 흠칫했고 리네트는 씩 웃었다.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애 운운하는 것 따위의 협박이 먹힐 것 같았어요? 왜요. 사람 시켜서 제가 겁탈이라도 당하면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 것 같아요?”
“너 이, 미친…….”
“이럴 때는요, 어머니.”
리네트가 한 발짝 다가갔다. 이멜다는 그 순간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리네트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웃었다.
“죽은 계집애는 시집을 못 간다, 정도는 해야 제가 울면서 매달리기라도 하지 않겠어요?”
리네트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이멜다가 다시 물러서자,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쿵쿵쿵쿵쿵, 소리를 내며 이멜다에게로 빠르게 다가갔고, 이멜다는 결과적으로 벽 끝까지 몰렸다.
리네트가 손을 들어 올리니 이멜다는 눈을 크게 떴다가 꽉 감았다.
퍽.
“악!”
이멜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분명 큰 소리가 났는데, 자신은 아무 충격도 안 받았기 때문이다.
이멜다는 슬쩍 눈을 떴다. 제 눈앞에는 벽에 주먹을 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네트가 있었다.
그녀의 주먹은 새빨갰다. 아마 주먹으로 벽을 내려친 것이리라.
“어머나아, 어머니.”
리네트는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고작 이딴 걸로 놀라시면 어떡해요. 저는 어머니만큼 하지도 않았는데.”
“너, 너…….”
“저만큼 맞았으면 죽었겠네.”
여상한 말투에 이멜다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자고로 미친년은 상대하는 게 아니랬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리네트의 말은 자신을 죽여 버릴 각오 정도는 하라는 뜻이겠지만, 이멜다는 오히려 자신이 잡아먹힐 것 같았다.
인생이 막장 중에서도 끝으로 치달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굴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멜다는 귀하디귀하게 살아온 여인이었다.
이멜다는 겁을 먹었다.
덕분에 리네트는 여유롭게 황자와 독대할 수 있었다.
* * *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찬 후에 방문한 공작저의 분위기가 사뭇 살벌했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집사는 거의 황성 앞에서부터 그를 마중할 기세로 나와 공작의 부재를 알렸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그럼 공작 부인이 나오시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 집사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부인은 몸이 아프셔서…….’라고 얼버무렸다.
이상했다. 전의 방문에서 부인은 자신을 거치지 않으면 리네트를 만나지 못할 것처럼 굴었는데. 이렇게 쉽게 그녀를 만나게 해 준단 말이야?
게다가 공작저에 들어서자, 당황스러운 시선들이 저를 둘러쌌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 줄은 충분히 예상했으나, 이렇게 무서워하거나 이상한 것 보는 눈으로 볼 줄은 몰랐는데.
리네트는 정원에 앉아 있었다. 미혼 남녀가 만날 때는 사방이 다 보이는 곳에서 만나는 것이 예의였다.
“황자님, 오셨어요.”
하녀들이 사방에 도열해 있는 참이다. 리네트는 방긋 웃으며 일어났다. 루카스 또한 미소 지었다.
항상 흐트러져 있거나, 하녀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만 봤는데 오늘의 리네트는 그럭저럭 귀족 아가씨 같았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와 뜨개 레이스 가운을 걸치고, 머리는 빈틈없이 틀어 올렸다.
이건 또 새롭군.
“언제나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만개한 작약 같군요. 나의 아가씨를 뵙습니다.”
“황자님.”
리네트가 환하게 웃었다.
“예.”
“저희는 오늘 공식적으로는 첫 만남이랍니다.”
“아, 그렇군요. 조심하겠습니다.”
남들이 들었을 때는 누가 봐도 ‘비밀 연애를 상당히 오래했구나-’ 싶은 대화였다. 하녀들이 흥미 넘치는 시선을 주고받았고, 그 가운데서 루카스는 시원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리네트가 얼굴을 옅게 붉히며 장갑 낀 손을 내밀자, 황자가 그 손등에 부드럽게 제 이마를 대 경의를 표시했다. 황족 남자로서는 여성을 대하는 최상의 예였다.
루카스를 안내해 온 집사는 리네트가 차려 놓은 과자를 반쯤 먹어치운 것을 보고 표정을 구겼다.
정말이지, 예의도 모르는 아가씨였다. 부인께 아가씨의 가정 교사를 들이는 게 어떤지 한번 말씀드려 봐야겠다. 그렇지만 허락하시려나…… 하며 집사는 뒷걸음질 쳤다.
하녀들이 찻잔을 내려놓았으나 리네트는 손을 내저었다.
“황자님과 산책이라도 하려 해. 차는 조금 있다 주렴.”
하녀들이 눈치를 봤으나 루카스도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들은 재빨리 리네트 뒤에 붙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샅샅이 보고하라는 이멜다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거절했다.
“황자님과 둘이 할 말이 있단다. 저택에서도 다 내려다보이는 중앙 정원으로 갈 거야. 애플만 따라오고, 먼 발치에서 지켜봐 주렴.”
황자 앞이니 부인의 명이라고 강제하기도 어려웠다. 하녀들이 얼굴을 구겼다.
애플은 혀를 내밀며 양산을 받쳐 들고 두 사람을 따랐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루카스가 물었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살벌해? 부인은?”
“치웠어.”
킥, 루카스가 실소했다. 어쨌든 자신의 어머니에게 치웠다는 표현을 쓰는 여인은 그녀뿐일 것이다.
“오늘 예쁘군?”
“말도 마. 새벽같이 깨워져서. 전갈은 좀 늦게 보냈어도 되는 거 아냐?”
“늦게 보냈으면 또 거절당했겠지.”
어쨌든 황족의 방문이다. 준비할 최소한의 시간은 주어야 한다.
리네트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데 이 분홍색은 너무 어린아이 옷 같은걸. 네 드레스야?”
“그럴 리가 있나. 언니 거야. 이거 봐. 나한테 안 맞아서 뒤는 레이스 가운으로 가렸다고.”
“아하.”
리네트가 돌아서 보여 주었다.
이멜다의 옷은 리네트가 한낮의 햇빛 아래서 입기에는 너무 노숙했고, 결국 나넬리아가 입던 옷을 꺼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넬리아의 옷 또한 리네트에게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리네트에게 어울리는 색도 아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연분홍색 드레스.
루카스는 리네트를 훑어보며 턱을 어루만졌다.
“다음에는 외부에서 만나지.”
“왜?”
“나의 아가씨에게 아름다운 옷과 보석이라도 선물해야 하지 않겠어요? 명색이 구혼자인데.”
“그런 건 미리 말하는 게 아니라 올 때 싣고 오는 거야.”
리네트가 톡 쏘아붙이며 걸음을 옮기자, 애플이 ‘그런 것도 몰라요?’ 하는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며 그 뒤를 따랐다.
“키리에 경은?”
“오늘 바빠. 계곡의 일 때문에.”
“아하…….”
계곡의 마법사와 제휴를 맺은 이후, 제국 기사단은 계곡 앞에 작은 요새를 짓고 매년 다른 부대가 자리했다. 감시 차원이다.
키리에는 그 제비뽑기를 하러 간 참이었다.
“그럼 어제 하려던 말을 할까? 애플, 양산으로 이쪽을 좀 가려 주렴.”
“예.”
애플이 엄청난 크기의 양산을 기울이며 수첩을 건넸다. 리네트는 저택에서 이쪽이 보이는지 가늠한 다음, 수첩을 열었다. 루카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 * *
술에 취한 척 가드들에게 끌려간 곳에는 여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여자의 퀭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촛불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도박장의 건물에는 큰 마법 등들이 켜져 있고,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덕분에 사방 분간은 가능했다.
리네트는 어둠 속에서 겨우 초 하나를 발견했다.
“어유, 어두워. 언니, 자요?”
리네트의 말에도 여인은 리네트를 멍하니 쳐다볼 뿐 답하지 않았다.
어디 문제 있는 사람인가? 리네트는 여인을 힐끗 쳐다본 후 바로 초 옆의 부싯깃으로 촛불을 켰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리네트가 들어온 방은 제법 컸다. 창고 같은 방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초를 켜니 그렇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테이블 없이 의자만 여러 개. 여인도 그중 하나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이 입은 드레스는 벗기기 쉬운 가운 형태였다. 딱 봐도 도박장에서 굴려지는 여자였다.
“언니, 괜찮아요? 말을 못 하네.”
리네트가 손을 휘휘 저었다. 여인은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디 아픈가?
“아파요?”
촛불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리네트는 조금 걱정이 됐다.
“저기…….”
“손, 손대지 마요.”
리네트가 다가갔을 때, 여인이 겨우 말을 내뱉었다. 바짝 마른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나, 목소리에 서린 날카로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리네트는 움찔했다.
“……괜찮아요?”
“빌어먹을, 괜찮겠어요?”
여인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 리네트는 이마를 찌푸렸다. 술 냄새도 아니고, 이상한 풀잎 냄새 같은 게 여인의 숨 안에 섞여 있었다. 마치 여름에 벌레를 쫓기 위해 태우는 약풀 같은 냄새…….
그리고 리네트는 깨달았다. 마법 약이다. 여인은 그걸 복용한 상태였다. 리네트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이봐요, 사람을…….”
그러나 리네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사람을 부르긴 대체 뭘 부른단 말인가.
약과 인신매매, 성매매가 판치는 도박장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약을 자의로 복용했을까? 아닐 것이다.
리네트는 주변을 돌아봤다. 테이블 하나 없이 의자만 가득한 곳. 오로지 앉아서 뭔가 기다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소.
리네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누가 봐도 도박장에서 성매매를 하는 이들에게 여자들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시간은 새벽 별이 뜬 지 오래였고, 의자들은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듯 엉망으로 놓여 있었다. 이런 곳에 여자 하나 남았다고 해도 이상한 시간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법 약은 비쌀 텐데. 이런 이들에게까지 약을 준다고?
답은 금세 나왔다.
“엄마아…….”
여인이 이를 악물고 머리를 제 무릎에 묻었다. 무릎을 감싼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여인은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엄청나게 힘을 주고 있었다.
리네트가 여인의 옆에 달려들어 주먹을 잡자, 여인이 흠칫했다.
“만지지, 흑.”
“……개 같은 자식들.”
리네트는 욕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여인의 손바닥에 온통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이렇듯 남의 접촉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인신매매로 팔려 왔을 것이다.
명색이 귀족들 상대의 도박장이다. 고분고분하지 못한 여자를 방 안에 들여보냈다가는 오히려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누가 당신에게 약을 먹였어? 괜찮아? 약 먹은 지 얼마나 됐어? 뭘 먹은 거야?”
리네트는 정신없이 물었다. 당황한 데다 화가 난 나머지 머리에 피가 몰렸다.
여인이 겨우 무릎 사이에서 얼굴을 들어 리네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표정은 아주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 리네트는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 또한 도박장의 여자인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물, 일단 물이라도.”
리네트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방 안은 잠시 머무르기만 하는 곳이라는 걸 증명하듯 마실 것 따위는 없었다.
리네트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마법 약 같은 것은 잘 모른다. 물을 마셔서 마법 약의 효과가 해결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여자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갈 수 있나? 리네트는 빠르게 다시 그녀의 앞에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로, 로가나…….”
“그래, 로가나. 당신 여기서 있은 지 얼마나 됐어? 계속 혼자 있었던 거야?”
“……많았는데…… 다 끌려 나가고…….”
끌려 나갔다. 리네트는 차분하게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솔직히 말하면 머리에 뭐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녀가 먹은 약은 무엇인지, 하다못해 여기서 그녀와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 리네트의 머리에 다른 생각이 났다.
루카스. 루카스를. 그를 불러야 했다.
물론 그를 소리쳐 부르는 건 멍청한 짓이다. 리네트는 바로 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철컥철컥.
그야 그렇겠지. 이 안에 있는 여자들이 도망이라도 가면 곤란할 테니. 리네트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소리 질렀다.
“자기야! 자기야, 살려 줘!”
쾅쾅쾅.
리네트가 몸을 부딪쳤다. 문에 온몸을 밀고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던 중에도 일부러 제 가슴팍을 뜯어냈다. 진주로 된 단추들이 뜯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머리를 잔뜩 헝클며 문을 걷어찼다.
“누구 없어요!? 살려 줘!”
효과는 빨랐다. 쿵쿵쿵쿵, 남자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리네트는 자신이 아까 들고 들어온 술병을 거머쥐었다. 여인이 그렁그렁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흘깃 보였다. 리네트는 윙크했다.
“뭐야?”
와장창.
리네트는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민 가드의 머리를 술병으로 후려쳤다.
“으악!”
남자가 나뒹굴었다.
“뭐, 뭐야?”
리네트는 눈을 반쯤 게슴츠레하게 뜨고 비틀거리면서도, 문이 열린 저편의 다른 가드들에게 손가락질했다.
“너희, 나를 가두고, 우리 달링한테 돈을 받으려는 거지, 어?”
“……이 미친년 뭐야?”
“이 씨, 다 주욱었어. 달링! 자기야!”
“아까 그 술 취한 계집애잖아? 뭔데?”
“야! 내가 나온 데가, 여기가 아닌데, 우리 달링 어디 갔냐고. 살려 줘! 살려 주세요-!”
리네트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뒹굴었던 남자가 일어나 리네트를 향해 ‘이 미친 계집애가!’ 하고 달려들려고 했으나, 다른 가드가 그를 제지했다.
“야, 야, 잠깐만. 얘 약 먹은 거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고?”
“잠깐만. 거 아가씨, 누구랑 같이 왔어?”
리네트는 술 취한 여자를 연기해 내면서도 자신이 다른 도박꾼과 같이 왔다는 정황까지 가드들에게 납득시키는, 실로 훌륭한 연기를 해냈다.
가드들은 혀를 차며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떤 새끼가 지 깔개를 데리고 와 놓고 이렇게 내팽개쳤어?”
“모르지, 뭐. 아이 씨, 귀찮게 됐네. 괜찮냐?”
제게 얻어맞은 가드 놈이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푸르르 흔드는 것이 보였다. 다른 놈이 리네트에게 등을 들이대자 그녀는 그 등을 뻥 걷어찼다.
“꺼져! 우리 자기 데려와!”
“거, 아가씨. 곱게 갑시다. 예?”
가드들이 눈을 부라렸다.
“술버릇 더러운 게 뭐 자랑이라고, 어?”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리네트는 가드 하나에게 업혔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대로 업혀 나가지 않고, 자신을 업은 가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 왜!”
“쟤 데리고 가…….”
“쟤?”
가드들의 눈이 여인에게로 닿았다. 리네트는 가드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자기가 저런 애 좋아해애-”
“이 미친년, 뭐라는 거야?”
“뭐라긴.”
가드들이 킬킬거리며 천박한 손짓을 했다.
그러나 리네트의 계획은 바로 어그러졌다. 다른 가드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눈을 둥그렇게 떴던 것이다.
“너희 뭐 하냐?”
“뭐 하긴. 미친 계집애 때문에, 아이고.”
그 가드는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여인을 둘러멨다. 흐윽, 여인이 숨을 들이켰다.
“또 너냐? 맨날 마지막에 남는구만. 데리고 나간다.”
“이 시간에?”
“놈들이 시간 가려 가면서 그 짓 하는 거 봤냐?”
들려 가던 여인과 리네트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버거운 감각에 이를 악물면서도 리네트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도, 데려가요.
리네트의 눈이 흐려졌다. ‘쟤 내가 데려간댔잖아.’ 술 취한 척 가드의 머릿가죽을 뽑아 놓을 듯 굴었으나 소용없었다.
“아, 좀! 가자! 너희 오빠가 누구든!”
가드가 짜증을 내며 리네트를 업고 도박장을 돌았다. 리네트는 땀냄새 나는 가드의 등에서 늘어진 척하면서 구역질을 내내 참아 내야만 했다.
* * *
애플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리네트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봐도 개 같았다.
슬쩍 루카스를 올려다봤으나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래서 증거물로 쓸 수 없다고 한 거군.”
“그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뭣보다 마탑의 시제품이다. 마법적인 물건은 마법적 조작도 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물건은 조작 여부를 가장 먼저 의심당할 것이다.
루카스는 건조하게 말했다.
“한 번 더 가야겠군.”
“……그래.”
“도박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도박 따위는 초저녁에 끝내야겠지. 다 잃어서 화가 난다는 식이어야 해.”
리네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는데.”
“그래. 나도…….”
“아니.”
루카스의 단호한 말에 리네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리네트는 루카스가 무표정하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루카스의 푸른 눈 안에는 시퍼런 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만만하게 띠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지독하게 차가운 분노만 있었다.
“저런 여자가 몇이나 될지도 걱정되지만, 글쎄.”
“……무슨 소리야?”
“너는 괜찮나?”
리네트가 눈을 가늘게 뜨자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널 가녀린 공작가의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아. 그런 선입견을 가질 기회도 주지 않았지. 그렇지만 나는 이번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어지는군.”
“…….”
“네가 먼저 들어가자고 했기에 별생각 없었다. 그렇지만 인신매매된 여성이 약에 절어 손을 떠는 광경은 평민으로 살면서 이런 것, 저런 것 다 겪은 나도 속이 뒤집히는 일이야.”
리네트는 한발 물러섰다. 옆에 서 있던 애플이 당황하다가 제 아가씨 쪽으로 양산을 기울였다. 덕분에 저택에서는 양산 밑에 드러난 루카스의 모습이 다 보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너는 무섭지 않나?”
리네트는 루카스를 바라보던 그대로 입술만 가늘게 말아 올렸다.
“무섭지 않아.”
“…….”
“진짜 무서운 건, 갑자기 여기서 당신이 발을 빼 버리는 일 같은 거지.”
그렇다. 그런 것은 무섭지 않았다. 리네트가 정말로 무서워할 만한 일은 루카스가 선을 긋고 ‘즐거웠으니 여기까지만 하지.’라며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었다. 리네트의 모든 건 지금 이 남자의 발걸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리네트가 마법 약에 절은 여자 따위는 상관없이 일신의 안위만 챙기는 자일지라도, 남자는 절대로 발을 빼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푸른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으아아! 이럴 수가, 아버지가 나를 죽일 거야!”
“세상에, 달링. 슬퍼하지 마요. 다음 기회라는 게 또 있잖아.”
잘들 논다. 도박장의 도박꾼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를 데리고 온 애송이는 오늘 자정이 지나기도 전에 금화 오천 개를 잃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애송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달링, 내 목걸이라도 줄까? 이거 판돈으로 한 번 더 할래?”
“으응, 아니, 자기야. 나를 그렇게 쓰레기로 만들지 말아 줘. 아무리 그래도 자기한테 준 선물까지 판돈으로 걸면 내가 어떻겠어?”
도박으로 하룻밤에 금화 오천 개를 잃은 시점에서 이미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도박꾼은 없었다.
덕분에 루카스는 하룻밤 만에 집 한 채 값을 날린 망나니의 연기를 충실히 이어 갈 수 있었다.
망나니는 쉬어 갈 곳을 청했다. 딜러는 가드에게 방을 내 드리라 요청했지만, 그다음 말에는 조금 놀랐다.
“아, 여자도.”
“……실례지만, 신사분……?”
망나니는 같이 온 검은 머리의 여자를 한번 보고 씩 웃은 후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상에는 꼭 둘이 한다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지.”
……이런 쓰레기가 한둘은 아니었다. 딜러는 평온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인 후 가드를 불렀다.
그때, 로즈라는 여인이 남자의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달링, 나 저번에 달링이 좋아할 것 같은 애 봤어. 이름이 뭐라더라. 로가나……?”
“그래? 어떤데?”
여인은 남자의 귓가에 뭐라 뭐라 속삭였다. 남자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남자는 그러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딜러에게 부탁했다.
“로가나라는 여자가 있으면 데려오도록 해.”
“……네.”
남자가 나가며 여인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다 들렸다. ‘정말 그 가문의 아가씨와 닮았어? 착각할 만큼?’ 딜러는 픽 웃을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딜 가나 저런 새끼들이 있다. 멀쩡한 귀족 여자한텐 손을 못 대니 대체품을 찾는 놈들.
* * *
문제는 루카스가 그날 잃은 금액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도박장의 딜러는 제 상관에게 통 큰 고객이 돈을 너무 많이 잃어 달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 딜러의 상관은 액수를 들은 후, 고객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아버지한테 죽을 것 같다던데요?”
“그런 새끼들은 꼭 안 죽고 다시 오지.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해.”
“예.”
딜러의 상관은 곧장 도박장주에게도 그 사실을 보고했다. 도박장주-배럴 남작은 매우 흡족해하며 제 부하를 칭찬했다.
“그렇지. 그런 새끼들은 꼭 다시 오지. 제 아비가 죽이지 않으니 정신 못 차리고 또 온다니까.”
“예. 방은 무상 제공할까요?”
“그래. 그것 말고도…… 아니다.”
“예?”
“내가 직접 가지.”
* * *
그리하여 루카스 리시스트와 리네트 카멜리아는 뜻밖의 거물을 으리으리한 도박장의 숙박 시설에서 만나게 됐던 것이다.
배럴 남작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더불어 고객님의 안타까운 소식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기쁨만 얻어 가셔야 할 곳에서 속상함으로 오늘을 끝맺게 되었으니, 제가 오늘은 귀히 모시겠습니다.”
루카스는 얼결에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질 뻔했다. 얼굴이 제대로 바뀌었나? 싶어서다. 리네트가 그 손을 찰싹 때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실행했을 것이다.
“그…… 래요. 배럴 남작님이시라고?”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손님께서는…….”
배럴 남작은 상대가 귀족으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내려온 참이었다. 하룻밤에 금화 오천 개를 잃을 만큼 부유한 자다. 배럴 남작이 아는 자의 자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운이 좋으면 사이가 나쁜 자의 약점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눈앞의 애송이는 처음 보는 자였다. 누구지? 배럴 남작의 의문에 상대가 답했다.
“커, 커흠. 나는 그…… 동부에서 온 사람이오. 세이벡 자작가라고 알려나 모르겠는데…….”
“세이벡 자작가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상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배럴 남작은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알게 뭐냐. 동부 촌놈 따위.
제국의 동부는 광산 지역으로, 부유한 자들은 많지만 세련된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남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동부 촌놈이라는 말이 모욕으로 쓰일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러나 어쨌든 아는 척하는 편이 나았다. 도박장의 귀한 고객이 되었다는 생각에 틀림없이 또다시 돈을 쓰러 올 테니까.
“반갑군! 바로 내가 세이벡 자작가의 첫째인 한 세이벡이오!”
“그렇습니까. 세이벡 자작가의 귀한 분을 뵈니 기쁩니다. 더불어 고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제가 선물 하나를 준비했답니다.”
“선물?”
남작은 손뼉을 쳤다. 뒤에 서 있던 가드 한 명이 트레이를 들고 와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한 세이백이라는 놈과, 그 옆에 매달려 있던 검은 머리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작은 빙그레 웃었다.
“저희 아이를 찾으셨다고요. 저희 아이들은 모두 고객님들의 만족을 위해 약간의 술을 복용합니다. 아, 물론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술?”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물건이죠.”
트레이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두 개의 자그마한 술잔이었다. 한입에 털어 넣어도 모자라 보이는 작은 술잔 안에는 갈색 술이 담겨 있었다.
술 안에서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뽀그르르…… 두 사람의 안색이 변하자 남작은 후후 웃었다.
“올라오는 아이는 이미 이 술을 복용하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만 기분이 좋으면 안 되겠지요. 하물며 큰돈을 쓰신 다음에야, 최상의 쾌락이라도 맛보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동부에서 오셨다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요즘 수도에서는 이 술이 대유행이랍니다. 사실은 마탑에서 개발하던 것인데, 우연히 이런 효과를 발견하게 되어서…….”
리네트와 루카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것이다. 팔십 먹은 노인-제이크 백작이 먹었다던 약.
이것이었나. 루카스는 허, 하고 혀를 찼다.
“이런 뭔지 모를 것을 먹는 것은 내키지 않아서…….”
“하지만!”
배럴 남작이 루카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은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중독성이다. 한 번으로는 중독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쾌락을 맛본 이들은 쉽게 두 번째를 찾는다.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침내 중독된 이들은 천금을 들고 제 도박장을 찾는다.
“세련된 분들이라면 누구나 드시기 마련이죠.”
동부 촌놈들의 특징은 수도의 유행에 뒤처졌다는 말을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부 촌놈이라는 관용어를 알기 때문에 더 그렇다.
남작이 피식피식 웃었다. 자못 우습다는 듯 흘리는 표정에 남자의 얼굴이 변했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렸다. 가드 둘이 거의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로가나. 리네트가 그녀를 알아보고 루카스의 팔을 쥐었다.
남작이 손바닥을 비볐다.
“말씀하셨던 여자가 맞습니까?”
“어머, 맞아요. 달링, 봐. 내가 그 아가씨 닮았댔지? 그야 저쪽은 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그, 렇군…….”
밝은 곳에서 보는 로가나는 더 비쩍 마르고 볼품없었다. 고생해서 그럴까. 수척한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적인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드들이 저를 붙들고 있는 손을 추켜올릴 때마다 으흑, 하는 소리를 냈는데, 가드들은 반쯤 그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가드들이 로가나를 침대 위에 놓자 로가나는 그대로 쓰러져 침대에서 흐느꼈다.
루카스가 조용히 이를 악무는 동안 남작이 로가나를 보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 다소 마르긴 했으나, 가끔 이런 여인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어머나.”
그때였다.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로가나에게 방 안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리네트가 잔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제 가슴에 쏟아 버린 것이다. 리네트는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렸다.
“실수. 아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런.”
“미안해, 달링. 내가 서비스할게요.”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루카스는 실소했다. 이제 한 잔 남은 셈이다. 그러나-
“아이구, 이런.”
남작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질렀다.
“아깝군요. 아주 비싼 건데.”
“어머. 미안해요, 남작님. 로즈가 좀 돈이 많이 드는 여자야. 아하하!”
리네트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남작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한 잔 더 준비시키지요.”
이런, 젠장.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리네트의 눈에 낭패감이 서렸다. 비싼 거라며, 이 자식아! 아껴야 잘살 거 아냐!
남작이 어울리지도 않게 윙크를 날렸다.
“세이벡 자작가의 도련님이 오셨으니 저로서도 성의를 보이는 거랍니다.”
윙크하지 마! 두 사람 모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리네트는 침착하게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으응, 남작님? 무리하지 마요. 오늘 로즈가 마셔 보고 아주 화끈하게 서비스할 테니까.”
“그-”
“우리 달링은 생각보다 겁이 아주 많거든요. 그렇지?”
루카스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리네트는 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리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한 세이벡이라는 동부 촌놈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로즈라는 여자를 붙잡고 입을 맞춰 버린 것이다.
발정 난 년놈들. 남작은 고개를 돌리며 가드들에게 손짓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던 가드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돌아섰고, 이내 문이 닫혔다.
쾅.
배럴 남작과 가드들이 나가자마자 리네트가 루카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낮게 비명 지르듯 속삭였다.
“당신 미쳤어!?”
루카스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리네트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춘 차였다. 놀랄 틈도 없이 루카스의 혀가 정신없이 얽어 왔다. 그리고 그는 곧 이상한 것을 느끼고 눈을 껌벅였다.
리네트는 기가 막혀 루카스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렸다.
“미친 자식아!”
거친 손길에 루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술, 벌써 삼켰나?”
그가 제게 갑작스레 입 맞춘 이유는 리네트도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리네트가 마신 술을 대신 먹으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리네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멍청아! 그깟 술, 진작 침대에 뱉었어!”
“……아.”
루카스는 그제야 침대 쪽을 살폈다. 어두운 색의 천 위에는 선명한 물 얼룩이 있었다.
그는 얼룩을 살핀 후 멍청하게 신음했다. 리네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내가 미쳤지, 이딴 멍청이를 어떻게 믿고!”
“……미안하군. 나는 정말 당신이 그 술을 삼킬 줄 알고.”
“사과는 됐어. 그럴 시간 없으니까.”
리네트는 루카스의 사과를 막았다.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신음하는 로가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로가나. 내가 너무 늦게 왔죠.”
“흐읍…….”
로가나의 눈이 떨렸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리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여자 하나 정도는 안고 움직일 수 있지?”
“당연한 소리를.”
“그럼 일단 벗어.”
“……이거, 듣긴 했지만…….”
루카스가 난처한 얼굴이 되자 리네트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시간 없어. 멍청한 짓은 한 번으로 족해. 두 번 하면 죽여 버릴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가 곧장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리네트는 거기서 시선을 떼고, 방금 전 루카스에게 했던 날카로운 말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가나, 시간이 없어요. 많은 걸 설명할 순 없지만, 나는 일단 당신이라도 구할 거예요. 그렇지만 조금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텐데, 따라 줄래요?”
로가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네트가 ‘착하다.’ 하고 볼에 입 맞췄다.
그 모습을 보고 루카스는 영 아이러니한 기분이 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크라바트를 풀었다.
리네트가 계속해서 로가나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할 건 하나야. 저 남자가 당신을 안고 갈 거예요. 아, 나쁜 짓은 안 할 테니 참기 힘들어도 소리 내는 것만 참아 줘요. 할 수 있겠죠?”
로가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네트가 옅게 웃었다.
로가나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리네트는 거칠게 여인의 단추를 끌렀다. 리네트의 차가운 손가락이 로가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태까지 빌어먹을 놈들에게 당한 짓과 같았으나, 로가나는 어쩐지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리네트가 들고 온 것은 두 가지였다. 모두 지젤이 준 것이었다. 몸을 투명하게 해 주는 약과 외투.
‘무슨 소용인데!’ 하며 풀숲에 던져 버린 그 약병을 찾느라 리네트는 죽을 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쓰레기 같아도 좀 챙겨 놓을걸.
그러나 가까스로 찾아낸 약병은 1인분뿐이었다.
리네트는 악을 쓰며 지젤을 불렀고, 지젤은 난처한 듯 ‘도마뱀 눈물이 다 떨어졌어.’라더니, 파르륵 날아서 뭔가를 들고 왔다. 마탑의 보물 중 하나라는 투명 외투였다.
리네트는 투명 외투를 받아 들고 정말로 감격했다. 지젤은 머쓱한 듯 지저귀었다.
“그거 없어진 거 알면 나 할배들한테 진짜 맞아 죽어.”
“고마워.”
“아, 근데-”
“응.”
“그거 1인용이야.”
‘X발, 그럼 무슨 소용인데!’라고 소리 지를 뻔했으나 리네트는 참았다. 지젤이 그 정도 노력해 준 것만 해도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어쨌든 여자를 남작의 도박장에서 몰래 데리고 나올 방법은 거의 없었다.
유혈 사태를 각오한다면야 정면 승부도 할 수 있겠지만, 글쎄. 도박장 가득 깔린 가드들과 싸워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아니었다.
결국 리네트는 외투는 로가나를 안은 루카스에게 입히기로 했고, 약은 제가 먹기로 했다.
외투는 루카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덮을 수 있었다. 품도 넓었다. 그러나 로가나가 입은 드레스째로는 어려웠다. 여자의 드레스는 폭이 엄청나게 넓었다.
리네트는 로가나의 드레스를 빠르게 벗겼다. 그러나 로가나는 드레스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속옷을 챙겨 입을 이유가 없었다.
리네트가 칫, 하고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에게 벌거벗은 여인을 끌어안게 할 수는 없다. 리네트도 막가파라곤 하지만, 제정신이라는 게 약간은 남아 있긴 했던 것이다.
그사이 루카스는 투명 외투를 다 입고 리네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네트는 눈을 질끈 감고 약을 들이켰다.
“벌써 마셔?”
“기다려 봐.”
핑, 하고 시야가 잠시 흐려졌다. 그리고 리네트는 눈앞의 남자가 허, 하고 당황한 얼굴이 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손을 내려다보니, 세상에. 손이 흐려져 바닥의 카펫 무늬가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제 몸만 사라졌다.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군.”
루카스가 기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앞에는 몸 주인은 보이지 않은 채, 드레스와 귀걸이만 둥둥 떠다녔던 것이다.
리네트가 혀를 찼다.
“누군 안 웃길까. 댁은 지금 얼굴만 동동 떠 있거든?”
투명 외투를 입고 얼굴만 내놓은 루카스의 모습을 보며 리네트는 빠르게 드레스를 벗었다.
그때 루카스가 다가왔다.
“장신구도 풀어야 해.”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리네트의 귓불에 걸린 귀걸이를 빼 주었다. 리네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어설프게 제 드레스를 벗으며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루카스는 뒤돌아 목걸이도 빠르게 벗겨 냈다. 리네트는 약간 짜증이 났다.
“비싼 목걸이 아닌데도 아깝네.”
“어쩌겠어. 나가서 열 배는 비싼 목걸이를 사 주지.”
“그 말을 들으니 가장 비싼 목걸이를 차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데.”
루카스가 픽 웃었다.
루카스의 손가락이 귓불과 목에 닿는 감촉은 퍽 묘했으나 그런 것에 연연해할 때는 아니었다. 시간은 아낄수록 좋았고, 리네트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 속옷까지 벗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입었던 뷔스티에와 드로워즈를 로가나에게 대강 둘러 입혔다.
뒤이어 루카스는 무표정하게 로가나를 안아 올렸다. 곧 로가나 또한 루카스가 입은 외투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리네트는 머리카락에 감겼던 꽃 장식까지 모두 남김없이 떼 낸 다음 속삭였다.
“나가자.”
“좋아.”
문이 끽 열렸다. 손님들이 숙박하는 방은 상대적으로 가드들이 잘 오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방은 2층. 두 사람은 살금살금 움직였다. 로가나의 숨소리가 거칠었으나,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다.
리네트는 2층 계단에 서서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이었다.
이 저택에서 나가려면 1층 홀을 지나가야 했다. 1층 홀에는 엄청난 수의 도박꾼들이 앉아서 도박을 하거나, 돌아다니며 남의 테이블을 구경하고 있었다. 계단에 즐비한 가드들은 또 어떻고.
리네트는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 약효가 다하면 자신이 당할 상황을 상상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서로 다른 루트를 택했다.
리네트는 1층의 정문. 혼자이니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기도 쉬웠다. 벌거벗은 몸으로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 사이를 누벼야 한다는 것만 빼면.
루카스는 2층에서 뒷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미 저택의 후문 쪽을 알아 둔 차다.
어쨌든 누구도 리네트를 엄호할 수 없었다. 리네트는 이를 악물고 가슴을 가렸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기분상 가리고 싶었다.
다행히도 맨발로 걷는 리네트의 발걸음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중간에 끽, 소리가 잘못 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리네트는 살금살금 1층 홀을 지났다. 도박꾼들이 술에 취해 건들대는 사이를 피했다. 어떤 테이블에서는 그 판에서 엄청나게 돈을 잃은 도박꾼이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는 통에 식겁했지만, 간신히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1층의 정문 앞에 도달했을 때, 리네트는 절망적인 기분이 됐다.
정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저택의 정문 앞에 서 있는 가드들은 네 명.
언제나 도박장의 정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왜지?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어쩌다 보니 우연히 닫힌 것 같았다. 기다리면 가드들이 알아채고 다시 열 것 같았다.
문제는 약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리네트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 나가는 사람 없나?
그러나 아무도 나가는 자가 없었다. 리네트는 눈 딱 감고 자신이 문을 열었을 때, 바람으로 착각당할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
염병. 차라리 공작 부인이 제게 잘못했다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비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리네트는 속으로 욕을 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이 가운데서 벌거벗은 몸으로 도박꾼들에게 목격당할 것이다.
차라리 목격뿐이라면 괜찮다. 조금 창피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 따위 얼마든지 보라지. 문제는 자신이 잡혀가서 일어날 일들이었다.
리네트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쪽문 하나 열린 곳이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때였다.
콰당!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이 밀고 들어왔다. 가드들의 눈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엄청난 소리에 도박꾼들도 그곳을 본 것은 물론이다. 리네트는 숨을 삼켰다.
키리에였다.
모자로 감춘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어색한 몸짓. 키리에는 술병을 한 손에 들고 외쳤다.
“어, 어흐! 취한다!”
……이 새끼 뭐야? 가드들이 눈을 껌벅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리에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삐걱 일어났다.
“어어, 취해. 취해. 어어, 어. 거 뭐냐, 봅시다. 에 또…… 나님이 여기 행차하시니…….”
키리에의 눈이 황망하게 홀을 훑었다.
리네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를 돕기 위해 키리에가 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리네트의 걸음이 빨라졌다. 열린 문 사이로 리네트는 빠르게 뛰쳐나갔다.
탁탁, 작은 소리를 들은 어떤 가드가 문 쪽을 바라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가드는 머리를 긁으며 다시 불청객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 뭐야?”
“나, 는…… 리시스트 제국이라는 커다란 배의, 방랑하는 선원이니…….”
“취한 건가?”
“취한 놈치고는 좀 이상한데?”
“나아가라! 리시스트여! 거센 파도를 뚫고서!”
“미친놈 같다.”
“싸워라! 리시스트여! 힘차게! 나아가라!”
도망치듯 저택을 떠나는 리네트 뒤로 제국 기사단의 군가가 울려 퍼졌다.
리네트는 미친 듯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그녀의 맨발에 모래와 돌이 사정없이 박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로 엉엉 울었을 것이다. 너무 웃겨서.
골목을 돌아서 몇 발자국 뛰자마자 뭔가가 그녀의 머리 위에 푹 뒤집어씌워졌다. 리네트는 놀라 발버둥 쳤으나, 곧 그녀를 감싸 안는 자의 낮은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잠깐만, 나야.”
익숙한 목소리. 루카스 리시스트였다. 그리고 그녀 위에 씌워진 것은 푹신한 망토였다.
“……루카스?”
“갑자기 달빛 아래서 만난 미녀에게 이름이 불리어지니 가슴 설레는데.”
루카스의 얼굴은 그새 돌아와 있었다. 리네트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지금 그딴 농담이 나와? 키리에가-”
“알아. 내가 들여보냈어.”
리네트가 입을 닫자 루카스가 옅게 웃었다.
“안에 기사단 소속 놈들이 도박꾼인 척 몇 남아 있을 거야. 그놈들이 키리에를 거둘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못 나오는 거 알고 있었어?”
“음. 밖으로 안고 나오다 보니 정문이 닫힌 게 보이더군.”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사이에 정문까지 체크하고, 기다리던 키리에에게 당장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리네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루카스는 속삭이며 그녀의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리네트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여?”
“음. 골목을 돌아오자마자 달빛 아래에 알몸의 미녀가…….”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농담이야. 옅게 당신 형체가 돌아오는 게 윤곽만 보이길래 일단 망토로 감싼 거야.”
리네트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제 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 과연 루카스의 말대로 윤곽선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했던 셈이다.
“마차는?”
“저 앞에. 조금만 가면 돼. 그나저나…….”
루카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망토 아래, 리네트의 맨발이 보여서였다. 리네트는 저도 모르게 발을 망토 안으로 숨기곤 턱을 쳐들었다.
“준비성 없긴. 신발도 안 챙겨 왔어?”
루카스가 픽 웃었다.
정말 얼굴이 복지긴 하군. 리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잘생긴 얼굴이 제 앞에서 미소 짓는 모습은 생각보다 더 환상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마법으로 변형된 얼굴을 보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미안합니다, 나의 아가씨. 생각이 짧은 그대의 연인은 미처 신발까지는 준비하지 못했답니다.”
루카스가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리네트는 옅게 웃으며 턱짓했다.
“어쩔 수 없죠. 이번만 봐주도록 할게요. 앞장서요.”
그러나 루카스는 돌아서지 않고 웃었다. 지독히도 푸른 눈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 리네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례를 한 번만 더 눈감아 주겠어요?”
“무례라니…… 꺅.”
리네트가 작게 비명 질렀다가 제풀에 입을 막았다. 누가 듣고 쫓아오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질 것 같아서였다. 리네트는 약간 낮아진 시야에 기겁했다.
그러니까, 루카스 리시스트는 리네트의 등과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그녀를 안아 든 참이었다. 갑작스레 훅 가까워진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미안, 자기야. 뺨은 마차에 가면 때려 줘.”
* * *
마차는 조용하게 가로등 불 밑을 달려 작은 집에 도착했다. 허름한 집은 상업 거리의 변두리에서도 찾기 힘든 골목 안쪽에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살림집으로 보였다. 그 안에 지금 리시스트 제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 둘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 빼면.
2층 방 침대 위에 루카스가 로가나를 내려놨다.
아가씨가 돌아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애플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로가나의 옷을 벗겼다.
“왜 벗기지?”
“체온을 낮춰야 해요. 열이 오르면서 약 기운이 빠르게 돌거든요.”
애플이 능숙하게 그녀의 상반신에 차가운 물수건을 문지르는 것을 루카스는 어쩐지 넋을 빼고 보고 있었다. 옆방에서 들어온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리며 루카스의 턱을 쥐어 다른 곳으로 돌릴 때까지.
“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아니, 음.”
루카스는 그제야 자신이 상당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쓴웃음을 지었으나 조금 늦었다.
“이런 종류의 마법 약 처리에 능숙해 보여서.”
“……아.”
리네트가 그 말에 애플을 쳐다봤다. 애플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당황하자 리네트가 대신 말을 받았다.
“내 하녀를 뭘로 보는 거야?”
“글쎄. 공작가에서 주는 봉급이 너무 적은 나머지 약에 손댄 하녀 아가씨?”
“정치를 하는 놈팡이들은 원래 다 그래?”
“무슨 소리야?”
“상상이 너무 기상천외한 나머지 아무 데나 다 음모론을 가져다 대는 거. 쟤는 그냥 주정뱅이 아가씨의 뒤처리에 능숙할 뿐이니까 그냥 내려와.”
주정뱅이 아가씨가 몸을 돌렸다. 루카스는 머쓱해하다가 애플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네.”
빈말로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꼭 제 주인을 닮았다. 자신이 황자인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대할 수 있는 건 주인이 개방적인 덕분일까? 루카스는 고개를 저으며 허름한 계단을 내려갔다. 낡은 계단이 삐걱거렸다.
작은 집은 1층 전체가 부엌과 응접실로 되어 있었다. 낡은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정갈했다. 가구들도 모두 급히 구한 것치고는 고급이었다.
리네트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루카스가 곧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얘기해 두자면, 아마 좋은 결과를 바랄 순 없을 거야.”
“너와 나의 사랑 이야기?”
루카스가 너스레를 떨자 리네트의 눈이 뾰족해졌다.
“말장난할래?”
“미안합니다. 말씀하세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사과하는 미덕이 없었다면 리네트는 이 남자를 돕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네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결국 4층엔 들어가지 못했잖아.”
“……그렇지.”
두 사람은 남작의 도박장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결국 4층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4층은 수많은 가드들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 일반 손님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투명 외투를 입고 접근해 볼까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리네트는 로가나를 처음 만난 날 가드들에게 업혀 오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4층에는 오로지 마법으로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
결국 두 사람은 계획을 수정했다. 증인만이라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가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 로가나가 보인 반응을 봐서는 퍽 협조적일 것 같지만, 그게 다였다.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폐하는 배럴 남작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을 거야.”
“……확신하나?”
“팔 할.”
첫째 황자가 아무리 배럴 남작의 부정행위를 목격했다 한들, 황제는 배럴 남작을 대놓고 재판정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노튼의 팔을 잘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격자가 첫째 황자인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다만 뒤로는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라고 리네트는 말했다.
“적어도 노튼 황자는 배럴 남작을 지금까지처럼 대놓고 이용하거나, 그의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없겠지. 뒤가 구린 양반인 데다가 황제가 경고할 테니까.”
“…….”
“그렇지만 그걸로도 충분하기는 해. 애초에 실각은 한 방에 가능한 게 아냐.”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이.”
“그래.”
루카스의 말에 리네트가 답했다. 한 방에 노튼 황자를 보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둘째 황자는 리시스트에서 인기가 좋다. 그를 쓰러트리려면 쥐들이 집을 무너트리듯 축대 밑에서부터 야금야금 갉아먹어 들어가야 한다.
문제의 4층을 봤더라면 배럴 남작 정도는 공개적으로 청문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들의 손에 쥐인 것은 증인 하나와 루카스가 본 것. 그리고…….
“이거 챙겨.”
리네트가 휙 뭔가를 던졌다. 루카스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낸 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병에 담긴 것. 아까 리네트가 마신 술이었다.
“이걸 어떻게……?”
“아까 가슴 사이에 뿌리면서 좀 킵했지.”
그리고 로가나의 품에 숨겨 나온 것이다.
“정황 증거 정도는 될 거야. 로가나를 데리고 나갈 필요도 없어.”
“필요가 없다니?”
루카스는 당황하자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리네트도 안다. 자신의 처지에 동정은 사치였다. 지금 당장 멍청한 놈에게 팔려가듯 시집가 종마처럼 애를 낳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리네트는 로가나를 본 순간 그녀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가나를 증인이라며 황성에 데려가면 그녀는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것이며, 남작은 필사적으로 잡아뗄 것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정말이지 그녀를 바깥에 내보내고 싶지 않아. 인신매매의 증거가 된 여자가 이용당한 후 어떻게 쓰이겠어?”
“……노튼이 그녀를 찢어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루카스는 리네트의 말에 납득했다.
“마법 약으로도 남작의 도박장을 점거하고 조사할 수 있는 정황 증거는 될 거야. 폐하에게는 즐거운 일이 되겠지. 그 도박장에 쌓여 있는 돈이 얼마라고 생각해?”
“그런데 마법 약은 마탑의 소관 아닌가? 마법이 들어간 범죄는…….”
“제국 법전 4권 5장 주류법 32항.”
주류법? 루카스는 제국 법전을 달달 외우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에 중요한 힌트가 있음을 직감했다.
리네트는 손가락을 세우고 흔들며 말했다.
“황성 가서 뒤져 보고, 날 새기 전에 문안 인사 핑계로 뛰어가. 빨라야 해. 아침이 되면…….”
“……질펀하게 놀아난 망나니의 방을 열어 보고 뭔가 잘못된 걸 알아채겠군.”
리네트가 짝짝, 짧게 손뼉을 쳤다.
“알아들었으면 움직여.”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시원하게 웃고 일어났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돌아서기 어려웠다.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그 약이 술에 태워져서 나올 줄 알고 있었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리네트가 길게 하품을 하자 루카스는 쓰게 웃었다. 그럼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것까지 생각해 냈단 말인가?
미리 병을 준비해 간 것은 아마 마법 약을 따로 보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제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재빠른 움직임은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대를 만난 게 행운이라던 말이 단순한 자아도취는 아니었군.”
“황자님.”
“그래.”
“난 빈말 안 해.”
공작가의 둘째 아가씨는 나른하게 늘어져서 다리를 꼰 채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건 뭔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혹은 그저 졸린 사람이 잠을 깨기 위해 하는 몸짓 같기도 했다. 어쩌면 약간 멍청한 황자님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루카스에게 그 몸짓은 그 어느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루카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걸어가 소파에 늘어진 아가씨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리네트가 뭐야, 하는 눈으로 내려다보니 루카스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대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싶어서. 손등에 입 맞춰도 되겠나?”
“아니.”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루카스는 고개를 까딱하고 물러났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는 손등을 허락해 주길 기대할게.”
“…….”
“나에게 그대의 다음을 허락해 준다면 말이지만.”
그녀가 준 약병을 품에 챙긴 루카스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문을 닫고 남았다.
혼자만 남겨지자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 잠입한 건 리네트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런 작은 일-물론 애플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라며 대경실색했지만-에서부터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리네트는 망설임 없이 그를 팽개칠 생각이었다.
투명 외투를 받아 들었을 때 리네트는 도망칠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지젤은 지나가는 말로 ‘투명 외투를 입으면 마탑의 추적도 따돌릴 수 있어서 위험하다.’고 말했다. 황자님의 약혼녀가 되기 전에, 공작가의 패물이라도 챙겨서 도망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제법 잘 해내 주었다. 정문이 열렸을 때 자신이 느꼈던 안도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
게다가- 루카스는 단 한 번의 공치사도 바라지 않았다.
남자들이란 제가 작은 일만 해내도 의기양양하게 구는 법이다. 그게 다 그 어미들이 오냐오냐 길러서 그렇다.
그러나 루카스는 단 한 번의 생색도 내지 않고 웃으며 나갔다.
‘나에게 그대의 다음을 허락해 준다면 말이지만’이라는 말.
그건 이 도박장 대탈출이, 리네트가 그를 간본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자기야. 뺨은 마차에 가면 때려 줘.”
리네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솔직히 말하면 깜짝 놀랐다. 휙 들어 올려질 때는 심지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다.
‘그 얼굴로 그런 소리 하면 반칙이잖아!”
리네트는 팡팡, 소파를 때렸다. 화가 난다. 내가 얼빠라니.
기실 리네트는 여태까지 공작가에 살며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야 공작가에 있는 놈팡이들이란 상사 닮은 공작과 양비론자 갈레안, 그리고 못난 하인들뿐이었다. 그녀가 길거리를 하녀 차림으로 다니면서 본 가장 잘생긴 사람도 루카스의 얼굴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못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이라는 수식어가 허수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실로 깔끔하게 그녀를 안아 마차 안에 내려놨다. 게다가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오기까지 했다.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녀에게 말없이 웃으며 팔을 내밀었고, 리네트는 어쩐지 홀리듯 그 팔에 제 몸을 맡겼다.
홀리듯…….
홀리듯은 뭔 홀리듯이야. 그냥 홀렸지.
하지만 남의 얼굴은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그 얼굴 떼서 나 줄 것도 아닌데 왜 나대고 지랄이람, 심장 새끼가. 리네트가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심호흡했다.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에 순간을 허비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리네트는 황제가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였을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를 계산하는 데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 * *
루카스는 감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리네트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문안 인사를 핑계 삼아 황제의 알현실로 쳐들어간 루카스가 가져온 것들을 보고, 황제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고작 이걸 가지고 나에게 남작을 청문하란 말이냐.”
“재판을 위한 모든 요건을 충족했습니다.”
루카스 또한 옅게 웃으며 답했다. 황제의 눈빛에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담겼다.
“마법 약을 탄 술이라니, 이건 마탑의 소관이다. 내가 그를 청문할 일이 아니야. 적어도 네가 데려왔다는 그 인신매매 피해자라도 있어야 하거늘.”
황제가 혀를 찼다.
“피해자는 꽁꽁 숨겨 두고, 나에게 피해자가 있다 하면 어찌하란 말이냐.”
“폐하.”
방만하게 늘어져 있던 황제가 하품을 하며 루카스를 쳐다봤다.
그러나 루카스는 저 방만함이야말로 황제의 무기라는 것을 알았다. 게으른 사자처럼 누워 있는 황제는 소년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시절 즉위해 30년간 침상에서 정복 전쟁을 치렀다.
계곡의 마법사는 결국 쓰러트리지 못했지만, 계곡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왕국이 황제의 앞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가 방만하게 누워 있다고 해서 루카스가 방심한다면 황제는 단숨에 그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제국 주류법에는 허가된 주류 외의 임의 외부적 변형을 금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 법이 있었나?”
처음으로 황제의 눈이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루카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도 사소하게 추가된 법이라 보통은 잘 모릅니다. 다만 다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죠.”
“무엇이냐?”
“리아법입니다.”
리아? 리아……. 황제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픽 웃었다. 그 이름이 생각난 것이었다.
“폭탄주 제조를 금하는 법 아니냐?”
“약을 타는 것도 금하는 법이지요.”
루카스가 싱글벙글 웃었다.
데미안 리아는 선선대 황제가 가장 아끼던 기사였다. 그는 황제의 근위 기사단장으로 10년 이상 복무하는 영예를 안았는데, 술을 엄청나게 마시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성안의 모든 술을 동 내는 것도 모자라 ‘도수가 낮다.’며 온갖 술을 섞어 마셨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가 섞는 수많은 술들에서 새로운 레시피가 창조됐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가 아흔아홉 가지 술을 섞어 만든 폭탄주를 마시고, 선선대 황제의 침실에서 변을 본 아침 이후로, 폭탄주 제조는 금지됐다. 정확히는 주류 생산 신고를 하지 않은 자가 폭탄주를 만들어 팔면 관청에 불려 가 큰 액수의 벌금을 냈다.
결국 도박장을 운영 중인 남작이 변형된 주류를 고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는 정황이 있다면, 적어도 황제는 도박장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조사하고 탈탈 털 수 있을 것이다.
“내 아들이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왔구나.”
“재미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루카스가 허리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황제가 킬킬거렸다.
“하지만 고작 그것 가지고 그를 재판정에 세울 수는 없다.”
“거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럴 거 다 알고 왔어, 라는 태도에 황제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거래 의사가 만만한 태도였다. 황제는 조금 더 재미있어졌다.
제 첫째 아들이 이렇게 능글맞은 놈이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루카스 리시스트가 이제야 정치적 재능을 발견한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답은 하나였다.
어디서 똑똑한 놈 하나 꼬드겼구나!
황제는 박수를 짝짝 치는 대신 은근하게 물었다.
“계획을 짠 것이 누구냐?”
“그야 황제 폐하의 영광된 피를 이어받은 루카스 리시스트지요.”
재미없는 놈.
황제가 뺨을 실룩였다. 그야 처음부터 말해 줄 거라 생각도 안 했지만서도.
어쨌든 제 아들이 이렇게까지 건수를 물어 온 것은 칭찬해 줄 만했다.
적절한 상벌은 군주가 꼭 갖춰야 할 미덕이다. 그것이 공을 인정받고 싶어 아들이 독자적으로 이룬 일이라 해도 변함없다. 적당한 상을 내려야 할 것이다. 황제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혹 필요한 것이 있느냐?”
“황명입니다.”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황제는 코를 훔쳤다. 퍽 볼품없어 보였다.
“어지간한 것은 네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텐데, 내 이름으로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이런, 이미 아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나는 네 속을 짐작도 못하겠구나.”
쇼하지 말고 빨리 말해. 황제의 말에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생겼다.
“제가 사랑에 빠진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잘생긴 아들은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었다.
졸지에 사랑에 빠진 아들을 가진 아비가 된 황제는 멍청한 기분으로 답했다.
“몰랐다고 하고 싶구나.”
“리네트 카멜리아와의 약혼을 황명으로 공표해 주십시오.”
“여염집 사내들도 사랑을 쟁취할 때는 제 힘으로 해내는 법이다.”
쪽팔리게 아비한테 와서 쟤랑 결혼시켜 달라고 할래? 라는 뜻이다.
루카스는 빙그레 웃었다.
“여염집 아가씨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카멜리아가에 하나 남은 딸이다.”
그 말을 하며 황제는 약간 겸연쩍은 기분이 됐다. 하나 남은 딸은 맞지만 그리 귀히 여겨지는 딸은 아닐 것이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사랑에 빠졌다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 아가씨는, 사실 보잘것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이 귀족과 평민들을 막론하고 정설로 통했다.
그러나 황명으로 그 리네트라는 아가씨와 아들놈을 강제로 약혼시킨다면 카멜리아 공작이 반발할 것이다. 애초에 카멜리아는 단 한 번도 황가에 그 핏줄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물론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다. 순순히 그녀를 보내 줄 확률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요즘 황제는 영 카멜리아 공작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 거슬린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몇 년째 공작저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는 황제의 호출에도 아프다는 핑계뿐이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황제가 생각에 잠기거나 말거나 루카스가 답했다.
“대충 치워 버리려던 딸이죠.”
“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수식하는 말로는 퍽 독특하구나.”
“아버지.”
황제가 콧수염을 꿈틀했다. 그는 천 년 묵은 너구리라는 소리를 듣는 황제였다. 이 크나큰 리시스트 제국을 긴 세월 큰 문제없이 다스리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제 친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루카스와 노튼의 대립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장자라고 해서 제위를 물려줄 생각도, 제왕학을 공부해 왔다고 해서 제위를 물려줄 생각도 없었다. 똑똑하고 되바라진 놈이야말로 제 뒤를 이어야 했다. 그래야 그의 노년도 편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가 도무지 부정 (父情)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이럴 때마다 절감하곤 했다. 어릴 적 자신의 실수로 잃어버렸던 아들이 이렇게 그를 아버지라는 참으로 웃기지도 않은 호칭으로 부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찡하고 코가 조금 매웠던 것이다.
“제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입니다.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황제는 황제였다. 그는 성공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자신과 통치자로서의 자신을 분리해 냈다.
“안 돼.”
쳇. 잘생긴 아들이 노골적으로 툴툴대자,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쨌든 돈 나올 구석을 물어 온 것은 칭찬할 만하다. 약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달콤한 사탕을 물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대신이라긴 뭣하지만,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주지.”
“록시온이오?”
“그래.”
루카스가 새파란 눈을 크게 떴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은 황제의 성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별궁이다.
이는 대대로 황후의 여름 별장으로 쓰여 왔으나, 노튼의 어미인 낸터킷 황후는 록시온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카스를 낳은 선대 황후가 록시온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낸터킷 황후는 재수가 없다며 록시온 근처에도 발걸음하지 않았다.
그런 곳을 루카스에게 준다는 것은 다분히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았다. 록시온은 ‘황후’들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약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리네트 카멜리아와의 약혼이 목전이라는 인상을 심어 줄 수는 있을 터. 물론 그것 말고도 퍽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가 보거라.”
“예.”
축객령에 루카스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황제의 알현실을 한참이나 벗어난 후에야, 뒤에 있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황제와의 독대라는 것은 없다. 상대가 아들이라 할지라도.
황제는 적어도 열 명은 되는 기사들을 주변에 배치하고 황자를 만났으며, 루카스 또한 키리에를 대동하고 황제를 만났다. 알현실의 문간에 서 있던 키리에는 시종일관 답답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백안을 이었다는 사실을 폐하께 이야기하시면 약혼 따위는 문제도 아니게 될 겁니다.”
“이런, 키리에. 나는 자네가 나와 그녀의 약혼을 반대하는 줄 알았는데?”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몸을 돌려 키리에를 바라봤다. 빨간 머리의 완고한 기사는 루카스의 말에도 민망해하지 않고 몸을 바로 세웠다.
“저는 여전히 그녀와 전하의 결합을 반대하지만, 전하께서 마음을 정하셨다면 빠르게 할 일을 해치우는 것이 맞겠지요.”
“그래. 나도 그러면 좋겠지만, 안 돼.”
“어째서입니까?”
“비밀이잖아.”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했고, 키리에가 이마를 찡그렸다.
“단지 그래서요?”
“물론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지만.”
리네트 카멜리아가 백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그것이 공작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할지라도, 공작저 바깥으로 나간 적은 없는 비밀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리네트에게 그 비밀을 흘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루카스도 이제는 알았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해 배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가진 패가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쓰일지 감히 짐작하지도 못하는 그가, 남에게 그녀의 패를 흘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어째서입니까?”
“허락 못 받았잖아.”
루카스가 자못 순진한 척 눈을 깜박였다.
“친구의 비밀은 말하지 말라고 어릴 때 부모님한테 안 배웠나?”
“……납득했습니다.”
물론 키리에 레미시어는 이런 종류의 놀림이 통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고지식하기 때문에 ‘남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된다.’는 기본 원칙만으로 납득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네 비밀도 밖에다 말 안 하잖아.”
“무엇을 말입니까?”
“레미시어가의 둘째 아들이 술에 취하면 군가를 부른다는-”
“……연기한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키리에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트리자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서 제 친우가 보여 준 충격적인 연기력에 관해, 리네트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사실적이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곁들여 루카스에게 제법 재미있게 설명해 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루카스는 키리에 레미시어를 놀릴 만한 레퍼토리를 하나 얻었다. 그리고 그가 놀릴 때마다 이 빨간 머리의 기사는 노골적으로 풀이 죽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기사의 인생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만한 창피함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에 대해 남의 탓은 하지 않는다. 그게 루카스가 그를 높이 치는 이유였다.
* * *
로가나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리네트였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던 리네트는 로가나를 애플로 하여금 돌보게 했다.
그러나 우연히도 리네트가 잠깐 저택에 들렀을 때 로가나는 눈을 떴다. 애플은 하필 리네트에게 줄 찻물을 끓이러 주방에 간 참이었다.
그래서 로가나는 리네트가 제 땀을 닦아 주고 있는 기막힌 타이밍에 눈을 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지나치게 감격해 버렸다.
리네트는 조금 당황했다. 감격한 로가나가 주섬주섬 일어나 리네트의 앞에 엎드렸기 때문이다.
“저기, 이럴 필요는 없는데…….”
“아니오, 아니에요. 아가씨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로가나는 약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몸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묻지도 않았는데 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녀는 고아이자 거리의 소매치기였다. 도둑들에게 호되게 부려지던 어느 날 누군가에게 팔을 낚여 그대로 잡혀갔다.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죽음보다 더한 일을 겪었다.
도망칠 기회를 수없이 노렸으나 낮에는 꽁꽁 묶여 잠들었고, 저녁에는 억지로 약을 먹었다. 약을 먹은 뒤의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로가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것들이 어떤 일인지 알 정도로는.
그래서 로가나는 리네트가 자신을 믿어 보지 않겠느냐고 할 때도, 반쯤은 믿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는 그 믿음을 재고 따져 볼 겨를도 없었다. 로가나가 매일 저녁 겪는 감각들은 끔찍했고, 거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그 도박장을 벗어났거나, 아니면 차라리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기를 바랐다.
결국 로가나가 리네트를 어미 새를 처음 본 아기 새처럼 따르게 된 것은 당연했다.
“아가씨, 제가 부디 아가씨에게 은혜를 갚게 해 주세요!”
“그러지 마세요.”
리네트는 난처한 기색이었다.
감사를 받는 것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고맙다 할 줄은 알았으나,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바닥에 대는 것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리네트는 그녀를 일으켰다.
“저기, 일단 일어나세요. 당신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리고 로가나는 더더욱 감격해 버렸다.
아가씨가! 내 팔을 붙잡고 일으켜 주시고 계셔! 게다가 경어까지 쓰고 계셔!
저택에서는 급했으니 엉겁결에 그녀를 상당히 난폭한 방법으로 데려왔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니 영 마음이 불편하던 리네트였다.
하지만 로가나가 그런 리네트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래서 로가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도 격렬하게 꿇어 카페트를 깐 바닥에서 퍽, 소리가 났고 리네트는 기겁했다.
“아가씨!”
“당신 무릎이 깨진 것 같은데…….”
“제 무릎은 박살나도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은데…….”
그때 애플이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희한한 대치는 아마 계속됐을 것이다. 애플은 두 사람에게 적당히 합리적인 해답을 내려 주었다.
리네트는 반말하기, 로가나는 이 저택을 관리하기.
어차피 갈 곳도 없고, 아가씨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한 로가나로서는 적절한 처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로가나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가 다시 파르륵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직 몸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플이 쯔쯔 혀를 차며 찻잔에 차를 붓는 동안 로가나는 가쁜 숨을 쉬면서 침대에 간신히 몸을 기대 누웠다.
루카스 리시스트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모르는 남자가 불쑥 들어와 애플이 화들짝 놀랐으나, 리네트는 그쪽을 보고 눈썹 하나만 들어 올렸다.
“내 충고가 먹힌 것 같네.”
“마음에 들어?”
“전의 그 바보 같은 얼굴보다는.”
루카스 리시스트는 리네트의 충고를 받아들여 눈에 띄지 않게 머리와 눈동자 색만 바꾼 참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이라는 평범한 조합이지만, 그래도 비정상적으로 잘생긴 탓에 로브를 두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드릴까요?”
애플이 건성으로 물었으나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무튼 그쪽의 아가씨는 깨어나신 모양이군?”
루카스의 시선이 로가나 쪽을 향하자 로가나는 노골적으로 그를 경계하며 이불 뒤로 얼굴을 숨겼다. 눈만 내놓고 루카스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꼭 고양이 같아 그는 실소했다.
“덕분에. 일은 어떻게 됐어?”
“네 예상대로.”
루카스가 황제와 대면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수도 리시스트는 너무나 조용했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이 느닷없이 문을 닫은 것만 빼면.
남작의 도박장은 일주일 전부터 문을 닫고 침묵하고 있었다. 수도의 도박꾼들이 불평을 터트렸으나, 남작 본인이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아 별수가 없었다. 결국 도박꾼들은 다른 도박장으로 몰려들었다. 어쨌든 도박꾼들은 도박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다만 도박 외의 다른 것에 훨씬 관심이 있던 자들은 아쉬워했지만, 황제가 최근 예상 외의 수입을 올렸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지며 그들도 이내 입을 닫았다.
일주일 전 남작의 도박장에 해가 뜨자마자 황제의 관리 몇이 들어가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는 이야기도 퍼졌으나 곧 사라졌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놀랍군.”
“뭐가?”
“네 말대로 되었다는 게.”
“일 할쯤은 우연에 기대긴 했지.”
“우연?”
“황제 폐하가 예상외의 아들 사랑꾼일 가능성도 있었거든.”
황제가 루카스를 귀애해 전면적으로 남작을 털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그 능구렁이가 그럴 리 있나. 황제는 절대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래서 그 다음은…….”
리네트가 말을 하려는데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한데, 나 먼저 말 해도 돼?”
“음? 시시한 거면 화낼 거야.”
“안 시시해.”
“뭔데?”
“푸른 수국의 록시온.”
의외의 이름에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설마.”
“이제 내 거야.”
“안 돼!”
루카스가 킥킥 웃었다. 정말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주 짧은 순간,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챈 것이다.
그렇지만 안 된다니?
“왜 안 되는데?”
“너무 빠르다고.”
리네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럴 가능성을 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록시온은 대대로 황후의 별궁이라지만, 지금의 황후 낸터킷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건물이 아니었다. 사연으로 치면 1황자인 루카스에게 훨씬 더 애틋하고 의미 깊은 건물이다.
만약 황제가 루카스에게 뭔가 상을 내리고 싶다면 언젠가 록시온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너무 빨랐다.
록시온은 말 그대로 황후의 별궁이다. 낸터킷 황후가 그 점을 거슬려 하지 않을 리 없다. 황자인 루카스와 염문이 도는 상대가 있는 지금, 낸터킷 황후는 그 상대를 점검하려 들 것이다.
낸터킷 황후가 자신을 견제하는 건 약혼 후여야 했다. 약혼도 전에, 거기 록시온까지 얽힌다면 귀찮아진다.
낸터킷 황후는 황제가 루카스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의심할 것이며, 나아가 며느리감이 될지도 모르는 리네트가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간 보기는 상당히 전투적인 일이 되겠지.
“단순히 당신의 약혼자 후보가 아니라, 록시온을 받은 당신의 약혼자 후보가 돼 버렸다고. 황제 폐하께서 아무래도 캣파이트-여자들끼리의 싸움-가 보고 싶으신 모양인데.”
리네트가 투덜거리자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가 퍽 심술궂은 짓을 하신다고는 생각했는데. 흠…….”
“엄청 바빠지겠어.”
“왜?”
“낸터킷 황후가 견제하기 전에 미리 끝내 놔야 할 것들이 있었다고.”
“예를 들면 어떤?”
그야 ‘리시스트의 아침’이다. 리네트는 ‘리시스트의 아침’으로 상당히 여러 가지 판을 깔아 볼 심산이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소식부터 투자 정보까지,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실어 놓으면서도 다들 읽어 보고 싶은 정보지를 만들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문을 만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보도 수집되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셈이었지만…….
“시간이 없겠군.”
“그래.”
리네트가 턱을 어루만졌다. 루카스는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군.”
리네트는 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폐하께 록시온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도.”
“어쨌든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나쁜 일은 아냐. 오히려…….”
“오히려?”
“호재일 수도 있지. 어쨌든 낸터킷 황후가 나를 만나려면 카멜리아 공작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거든.”
“꼭 해야 하는 일?”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대답해 준 것은 리네트가 아닌 애플이었다.
“황자님 다음에 뵐 때는 주머니 두둑하게 오셔야겠어요.”
“……왜?”
“그야 우리 아가씨 데뷔탕트 치러야죠. 저런 옷을 입고 나가게 할 셈이에요?”
“아.”
루카스가 리네트의 소박한 회색 드레스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사교계에 제대로 인사하지도 않은 그녀를 낸터킷 황후가 만날 방법은 비공식적인 루트뿐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초대에 리네트는 응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낸터킷 황후는 카멜리아 공작을 압박할 것이다. 그녀의 데뷔탕트를 치르라고.
“좋아, 내가 나설 시간이군. 리시스트 제국의 사람들을 좀 혼란스럽게 해 볼까?”
“음? 어떤?”
“그야-”
잘생긴 얼굴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루카스 리시스트의 얼굴에 넘어갔는지, 재력에 넘어갔는지 말이야.”
* * *
황제는 선대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두 번째 황후를 고르는 데 큰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낸터킷 황후는 당시 황제의 눈에 든 귀족 아가씨들 중 가장 적당했다. 그녀의 오빠는 세력이 크지만 먼 국경에 있어 견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황제가 그녀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낸터킷 황후는 좀 뻔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야망이 있지만 언제나 황제의 눈치를 봤고,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조아리는 것을 즐겼으나 자신이 악역이 되는 것은 싫어했다.
물론 아들인 노튼에 관해서는 조금 달랐지만, 그야 아이를 가진 부모의 욕심으로 치부될 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작금의 리시스트에서 낸터킷 황후가 노튼에게 왕관을 씌워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 과욕이 아니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주었다고?”
그래서 낸터킷 황후는 황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예상대로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소식을 전한 시녀장이 움츠러들었다.
“예. 오늘 오전에 날이 밝자마자 폐하께서 록시온을 열라 명하셨습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이 갖는 의미는 황궁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았다. 낸터킷 황후는 ‘재수없다.’며 그곳을 쥐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그게 루카스의 것이 된다면 좀 달라진다. 낸터킷 황후는 가장 보잘것없는 장신구도 루카스에게 돌아간다면 울분을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날 황후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서리가 내린 듯 날카롭고 추운 오전을 겪어야 했다.
한바탕 북풍이 지나간 뒤, 낸터킷 황후는 씨근대며 물었다.
“루카스가 요즘 쫓아다니는 아가씨의 이름이 뭐라고?”
“리네트 카멜리아입니다.”
눈치 빠르게 시녀들 중 하나가 노튼 황자파의 책략가인 라베노바 백작을 불러온 참이었다. 라베노바 백작이 희끗한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카멜리아는 안다. 이름이 궁금했던 것이다.”
잔뜩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낸터킷 황후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베노바 백작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라베노바 백작은 노튼파의 구심점 같은 인물이었고, 낸터킷은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노출된 적 없는 인물이라…… 그대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라베노바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얼굴을 본 자조차 극히 드무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알려진 것과 달리 성격이 아주 대단하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엇갈립니다.”
“대단하다?”
“그야 그 집의 사용인들에게 알아본 이야기인지라 크게 믿을 만한지도 의심스럽습니다만…….”
황후가 눈을 찌푸렸다. 라베노바 백작이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어릴 적부터 하도 머리가 비상해 선대 백작의 일을 아홉 살부터 도왔다는 라베노바 백작이다. 그가 저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리네트 카멜리아에 관해 잘 모른다는 뜻이었다.
“공작 부인이 첫째인 나넬리아에게 가혹히 굴었다는 소문이야 워낙 유명했습니다만, 둘째는 더욱 가혹히 굴었다더군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여기까지는 그 댁 사용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비슷합니다만.”
그야 황후도 아는 이야기였다. 라베노바 백작이 말을 이었다.
“리네트 카멜리아가 공작 부인에게 미친개처럼 군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상냥하고 소탈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만, 보통 아랫사람에게는 본성을 여상히 드러내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리네트 카멜리아의 경우, 아랫사람들의 말이 엇갈려 제대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말에는 뼈가 있었으나 황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어떻단 말인가?”
“저는.”
라베노바 백작이 잠시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하녀들에게도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일 거라는 추측이 듭니다. 적어도 무른 성격 같지는 않습니다.”
공작저에 있던 리네트가 들었다면 소름 끼쳐 할 말이었다. 백작의 추측은 두루뭉술했으나 어떤 부분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황후는 턱을 괴고 물었다.
“그 애는 카멜리아 공작의 사생아라지? 내가 따로 불러 볼 방도가 있는가?”
라베노바 백작은 이에 다소 거북한 표정이 됐다.
“초대는 가능하지만, 아마 응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녀는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귀족 가문들에도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는 여인들이 있다. 희귀한 사례는 아니었다.
리네트처럼 사생아여서, 혹은 바깥에 드러낼 만큼 자랑스러운 여식이 아니어서. 용모가 아주 추하거나 문제가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통상적으로 그런 여인들을 만나려면 반드시 보호자의 동반하에 만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모자란’ 여인이기 때문이다.
쯧. 황후가 혀를 찼다. 그런데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루카스는 그런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평민으로 자란 세월이 오래된 자다. 전혀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덕분에 루카스와 리네트 카멜리아 사이의 염문은 세기의 로맨스라도 되는 듯 포장돼 떠돌고 있었다.
‘리시스트의 아침’인지 뭔지 하는 쓸데없는 종이 쪼가리 때문에 더 그랬다. 그 추잡한 이야기가 무슨 구박데기 공녀와 황자의 세기의 로맨스 같은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카멜리아 공작 부인에게 같이 입성하라 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니지…….”
공작 부인은 분명 딸을 싫어한다 했다. 보통 가문에서야 황후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을 테지만, 카멜리아 공작가쯤 되면 또 문제가 다르다. 어쨌든 모자란 여식을 바깥에 내보일 수 없다는 대답이나 돌아올 것이다.
황후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렸다. 라베노바 백작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하여,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만.”
“뭔가?”
“공녀의 됨됨이도 알아보고, 자초지종을 대강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뒤이어 라베노바 백작이 속삭였다. 곧 방도를 들은 황후의 눈이 환해졌다.
“실로 좋은 생각이지만, 받아들일까?”
“아마 거절할 수 없겠지요. 초대가 아닌 호의를 베푸는 일입니다. 게다가 데뷔탕트에의 암묵적인 강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녀가 만약 거절한다면…….”
라베노바 백작의 눈이 빛났다.
“그야말로 만만히 볼 수 없는 여인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 * *
이멜다는 은방울꽃이 싫었다. 그녀가 늘 여상히 여기던 그 은방울꽃 문양은 요즘 들어 그녀의 인생을 짜증 나게 비틀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짜증 나냐면 정원의 은방울꽃을 모두 뽑아 버릴 정도다. 다시는 은방울꽃이 제 인생에 끼어들지 않기를 기원하며 그녀는 정원사들을 부렸다. 그야 루카스 리시스트가 그 사생아에게 목매달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데 또 다른 은방울꽃이 제게 날아올 줄은 몰랐다.
황후인 낸터킷의 서명과 함께 곱게 수놓은 은방울꽃 자수가 새겨진 부드러운 종이 대여섯 장 위에는 오해하려야 할 수도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네 딸이 궁금해서 만나고 싶지만, 사교계에 데뷔한 상태가 아니니 곤란하군. 너까지 데리고 만나면 되겠지만, 너도 그러기는 싫지?
차라리 네 딸을 빨리 데뷔시키렴. 대신 선물을 하나 보낼게. 내 선물을 거절할 수는 없으리라 믿어.]
엄청난 미사여구로 장식했으나, 요약하자면 저런 내용이었다. 이멜다는 황성의 시종 앞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편지를 구겨서 불에 태워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종은 이멜다의 답신을 받기 위해 앞에 버티고 서 있었고, 이멜다는 빠르게 답장했다.
거절은 있을 수 없었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답장하고 나니 시종이 황송한 듯 편지를 받아 든 다음 말했다.
“죄송하지만, 레미시어 아가씨를 위한 서신도 부탁드립니다.”
이멜다는 머리가 아팠다. ‘선물’은 다름 아닌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레미시어가의 아름다운 아가씨. 노튼 황자의 약혼녀.
길고 긴 편지 속에는, 데뷔탕트를 하루빨리 치러야 할 ‘모자란’ 리네트를 ‘도울 만한’ 예의범절과 춤 선생을 보내겠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이멜다도 이게 선물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았다. 낸터킷 황후는 루카스 리시스트가 그렇게나 목을 맨다는 리네트 카멜리아가 궁금할 것이다. 한데 그녀를 직접 만나려면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전에 제 수족 같은 여인을 선생이라는 명목으로 공작가에 보내는 것이다.
미혼의 여인이 다른 여인의 선생이 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게 루카스 황자의 약혼녀 후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알렉사 레미시어는 노튼 황자와 약혼한 지 5년이 넘었다. 그간 노튼 황자가 정계에서 활약하는 동안, 그녀는 옆에서 다양하게 그를 도왔다. 작게는 사교계의 모임 주도부터, 크게는 빈민 구제와 기부까지. 그야말로 모범적인 귀족 여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위치가 될지도 모르는 리네트 카멜리아의 데뷔탕트를 ‘돕는다’는 명목은 나쁠 것이 없었다.
이멜다는 필사적으로 이 선물만은 거절해 보려고 했으나, 거절할 명목이 없었다.
이멜다는 지금 이 순간, 자리를 비운 카멜리아 공작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는 루카스와 리네트 카멜리아가 본격적으로 염문을 뿌리게 되자, 제 영지를 시찰한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졌다.
‘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안’의 핏줄이 루카스 리시스트와 이어져서 아이를 낳아 봐야 하등 좋을 것이 없다. 그 계집애가 황가의 핏줄을 낳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그러나 공작은 자리를 비워 버렸다.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멜다는 신경질적으로 갈겨쓴 서신을 시종에게 건넸다. 동백꽃 문양이 새겨진 편지지 위에 쓰인 부인의 글씨는 척 봐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나, 그런 품위를 챙길 마음의 여유는 이멜다에게 없었다.
‘그 계집애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에 사로잡힌단 말이야.’
이멜다가 한숨을 쉬었다. 시종이 물러가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움직였다. 그 뒤를 하녀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마님.”
“당장 그 계집애를 데려와.”
“어쩌시려고…….”
“어쩌긴!”
이멜다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레미시어 백작가에 그 망나니 같은 계집애를 그대로 보여 줄 수는 없잖니! 양복장이를 불러와. 그 애의 치수를 재게 해!”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제 피를 짜내는 기분이었다. 그 계집애에게 좋은 드레스를 입혀야 한다니! 보석도 달아 줘야 한다니!
“내 디자이너 말고, 그 밑의 견습들에게 시키라고 해.”
그게 그녀의 마지막 심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피를 짜내듯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됐다.
* * *
여성에게 구혼하는 남성이 열과 성과 돈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러니 루카스 리시스트가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보석과 드레스, 꽃을 선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선물이 취향을 탄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드레스는 취향을 탈 뿐만이 아니라 사이즈도 필요하고 시일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루카스 리시스트가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뭘 보냈냐면…….
“전하가 제게 보내신 거라고요?”
주변 사용인들 때문에 존대를 쓴 리네트에게 키리에 레미시어가 삐딱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부디 모든 것을 누리길 원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공작저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 거의 모든 사용인이 몰려 나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대부분 귀족들의 저택이 그렇듯 공작저의 입구는 높은 계단 위에 있었는데, 키리에 레미시어는 그 계단 바로 밑에 은방울꽃 문양이 새겨진 상자들을 산더미처럼 쌓았다. 그리고 그 상자들에는 모조리 황금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황가의 문양에 대해 예의를 갖추려고 도열했던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황금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황금의 주인이 바로 계단 위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초라한 아가씨라는 점이었다.
초라한 아가씨는 천천히 걸어 내려와 눈을 가늘게 뜨고 황금들을 살펴봤다. 리네트 카멜리아의 몸무게로 따지자면 그녀가 열 명은 있어야 될 만한 분량이었다. 그녀가 키리에에게 속삭였다.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그 황자님 정말로 이미지 관리 따위는 안 하는군?”
“당신 때문입니다.”
키리에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자고로 구혼이라는 것은 성의를 최고로 치는 법이다. 보석을 보내려면 단순히 크고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데다가 유명한 보석, 예를 들면 레미시어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레미시어 오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옷으로 치자면 그녀만을 위해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가 한 달 내내 만든 드레스 정도나 되어야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할 수 있다.
꽃? 꽃은 그저 옵션 같은 것이다. 선물로 치면 포장지 같은 거지. 반드시 선물에 함께해야 하지만 그것만 보내면 욕먹어 마땅한.
그러나 루카스 리시스트는 그 모든 것을 건너뛰었다.
“나 때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평민 출신이라는 걸 무기 삼아 휘두르게 되셨단 말이죠.”
그의 출신 성분은 어차피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루카스 리시스트는 그것을 이제 제멋대로 아무 데나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리네트 카멜리아에게 느닷없이 프러포즈하는 것도 오케이. 아무 데나 잠행해서 남작의 도박장을 터는 것도 오케이. 그리고 구애하는 아가씨에게 꽃도 선물도 드레스도 아닌, 돈을 보내 버리는 것도 오케이.
“그러니까 그게 왜 나 때문이냐고.”
“쓸데없이 과감한 누군가에게 영감이라도 얻으셨나 보죠.”
키리에가 투덜대면서도 큰 소리로 고했다.
“벨린 금화로 치면 백오십 개 정도 됩니다.”
사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벨린 금화 백오십 개. 공작저만 한 저택과 근방 부지를 통째로 구입할 수도 있는 돈이었다.
리네트가 눈썹을 꿈틀했다.
“전하의 마음이 아가씨에게 닿길 바라며, 아가씨께서 부디 부담없이 쓰시길 원한다 하셨습니다.”
“고맙군요.”
“덧붙여 전하께서 재단사 팔스를 보내려 하셨으나, 공작저에 느닷없이 방문해 끼친 무례 때문에라도 송구스러운 일이라 하셨습니다. 하여-”
팔스? 그 팔스? 사용인들이 웅성거렸다. 수도 리시스트에서 가장 큰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재단사 팔스는 낸터킷 황후의 결혼식 드레스를 제작한 자였다. 그는 세련되고 과감한 패턴 사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팔스의 아틀리에와 더불어 팔스의 일정을 일주일간 아가씨의 이름으로 묶어 두었으니, 언제라도 편하실 때 방문해 주시기를 바란다 하십니다.”
워후. 하녀들 중 몇이 뒤에서 낮게 숨을 내쉬었다.
“고맙게 받았다 전해 주세요. 전하께서는 섬세한 분이군요.”
“아가씨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키리에가 뒤로 세 걸음 물러나 허리를 숙이자, 그가 데려온 황궁 하인들이 도로 마차에 황금을 싣기 시작했다.
그에 사용인들이 웅성거렸다.
“도로 왜 싣지?”
“준 걸 빼앗으려는 건 아닐 테고…….”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키리에가 말했다.
“모든 황금은 즉시 리시스트 핌 은행에 리네트 카멜리아 아가씨의 존함으로 예치됩니다. 황자 전하께서 내린 선물이니만큼, 사용권은 카멜리아 가문이 아닌 리네트 카멜리아 아가씨 본인에게만 귀속됩니다.”
“그렇군요.”
단순히 황금을 주는 것만으로는 빼앗길 수 있다. 주는 순간 카멜리아 공작가의 창고로 들어가 리네트는 구경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러지 못하게 해야지. 루카스의 생각이었고, 리네트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꼭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예.”
키리에가 물러가는 것과 동시에 몇몇 사용인이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보나 마나 이멜다에게 일러바치기 위해 가는 것일 테다.
리네트는 피식피식 웃으며 제가 입은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봤다. 이멜다가 선심 쓰듯 내려 준 초록색 드레스는 제게 잘 맞지도 않는 데다가 쓸데없이 재질이 바스락거렸다. 벨벳 중에서도 가장 싸구려를 쓴 탓일 테다.
어디 마음껏 배 아파해 보라지. 리네트는 저택 위쪽 이멜다의 방을 올려다보고 픽 웃었다. 그러자 커튼이 확, 하고 닫혔다.
이때만큼은 리네트는 정말 루카스 리시스트가 생각보다는 덜 멍청하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가 모종의 일 또한 무리 없이 해냈음을 리네트는 확신했다.
* * *
팔스라는 여인은 얼굴만 보면 퍽 귀엽게 생겼으나, 그 입은 과묵하기 그지없었다. 리네트가 팔스의 아틀리에에 방문하기 전 상당히 긴장한 것과 달리, 그녀는 지극히 필요한 부분만 질문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팔스는 리네트를 거대한 케이크 틀 같은 곳에 올려 사이즈를 재고, 선호하는 색상과 디자인에 관해 질문했다.
리네트는 유행하는 드레스 같은 것은 잘 몰랐기에, 얌전히 ‘최고의 재단사에게 맡기겠어요.’라고 선뜻 말했다. 팔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신뢰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며 물러갔다.
그것마저 리네트가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어머나, 장안의 화제인 아가씨가 바로 당신이군요, 어머나, 어머나.’ 하고 지저귀는 타입을 상상했지만, 팔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네트는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반성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지젤 같은 경우도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한 번에 깨부수는 타입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뱁새, 요즘 뭐 하지?’
로가나의 마법 약을 해독시킬 때 한 번 와서 조언한 것 빼고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지젤에게도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리네트가 방문한 이틀째, 팔스는 몇 십 가지의 레이스와 원단들을 들고 나타났다. 리네트는 레이스를 구경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금세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뜨개 레이스는 모두 그게 그거 같았고, 원단은 아무리 팔스가 설명해도 어떤 느낌으로 완성될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녹색 벨벳은 인두로 지져서 털을 태운 다음, 밑에 레이스를 받쳐 넣어 무늬를 낼 것입니다. 하지만 무거우니 몸통에 통째로 쓸 수는 없죠. 아가씨의 상반신에 주름을 넣어…….”
그래서 리네트는 반쯤 풀린 눈으로 팔스가 빠르게 그리는 그림만 쳐다봤다. 솔직히 그거라도 없었으면 정말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리네트는 ‘정말로 그대가 만들어 주는 거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은데…….’라고 말하며 ‘그만 보고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피력했으나, 팔스는 완강했다.
“안 됩니다. 앞으로의 행사에서 어떤 옷을 입으실지는 미리 인지해 두고 계셔야죠.”
“……알아야 하나요?”
“그럼요, 카멜리아 양.”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가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이의 목소리에, 잠이 올 것 같던 리네트의 눈이 반짝 뜨였다.
팔스의 아틀리에는 루카스의 명으로 리네트가 일주일간 전세를 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올 여인이라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물결쳤다. 하녀들이 몇 시간이고 공들여 말았을 그 머리카락은 정말 보기가 좋았다. 구불구불한 앞머리 아래로 자리한 초록색 눈동자는 또 어떠하고.
더불어 핑크빛 뺨과 흰 피부, 옅게 지은 미소는 그야말로 한 떨기 장미 같았다. 체리를 문 듯한 뾰족한 입술이 둥글게 휘어지며 미소를 내보였다.
“낸터킷 황후 전하께서 금빛 드레스를 입으시는 날, 모르고 비슷한 색상의 드레스를 입기라도 한다면 카멜리아 양은 눈 밖에 나고 말 테니까요.”
“그거야, 그냥 그 색만 피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으으음- 아녜요, 카멜리아 양.”
잘 손질된 손톱 위에는 예쁜 보석이 올라와 있었다. 아마 손톱에 올리기 위해 따로 가공한 보석일 것이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손을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성자 알론소의 축연에는 반드시 초록색 옷을 입어야 하죠. 여름의 연회는 더우니까 가벼운 소재의 옷을 입어야 해요.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패리스 후작 부인은 붉은색을 싫어해요. 불길한 색이라고 생각하시거든요. 후작 부인의 차 모임에 갈 때 무심코 붉은색 드레스를 입는다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날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군요.”
“그래서 저는 패리스 후작 부인의 모임에서는 몇 년째 아픈 아가씨로 통한답니다. 패리스 후작 부인 또한 제가 아픈 것을 내심 바라고 계시죠.”
리네트의 앞에 선 아름다운 아가씨가 웃었다.
몇 년째 사교계의 정점으로 통하는 여인.
노튼 황자의 약혼녀이자, 키리에 레미시어의 하나뿐인 여동생.
알렉사 레미시어였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레미시어 오팔이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대대로 레미시어 후작가의 가주들이 지팡이 끝에 박는 레미시어 오팔에는 수호의 마법이 있다고 한다. 지금의 레미시어 후작은 그녀를 너무나 귀애해 자신보다는 막내딸의 안위를 위해 레미시어 오팔을 목걸이로 만들었다.
그 유명한 보석을 보며 리네트는 환하게 웃었다.
“반가워요, 레미시어 양.”
“저도 반가워요, 카멜리아 양.”
다정한 미소가 리네트를 향했다. 루카스는, 그리고 키리에는 정말로 리네트가 부탁한 것을 훌륭하게 해내 주었던 것이다.
* * *
낸터킷 황후가 알렉사 레미시어를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이 리네트에게 전해진 건 황후의 서신이 온 저녁이었다.
리네트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수단에 감탄했다. 황후가 가장 세련되게 리네트를 염탐할 수 있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공작저는 카멜리아 공작이 지배하고 있다. 물론 하녀들은 대부분 리네트의 편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집사가 철저하게 선별해 수상한 자를 쓰지 않도록 하고 있다. 어설픈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낸터킷 황후도 알았던 것이다.
알렉사 레미시어에 관해 리네트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알렉사는 아주 많이 알려진 여인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랬다.
피부는 곱고, 성정은 순하며, 현명하다. 노튼 황자의 옆에 서면 아름다운 한 쌍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리네트는 그녀의 개인적인 일화는 거의 알려진게 없다는 것에 집중했다.
노튼 황자를 따라 구휼에 나섰고, 노튼 황자의 옆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냈으며, 노튼 황자에게 아름다운 보석을 받았다……. 노튼을 빼고 사람들은 알렉사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리네트는 생각 끝에 키리에를 불렀다. 당신 동생은 어떤 사람이냐고.
그리고 키리에는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잘 모릅니다.”
“당신 동생이잖아?”
“저는 상속이 안 되는 둘째입니다. 열 살에 기사단의 종자가 되었고, 열네 살에 기사가 되었지요. 까마득한 예전부터 저는 기사단의 숙사에서 지냈습니다. 레미시어 후작가에 돌아간 것은 열여덟 살때부터입니다.”
열여덟. 그가 루카스를 지지하고 나섰을 무렵이었다.
기본적으로 국왕의 친위 기사단은 대부분 노튼파였고, 키리에 레미시어는 기사단에서 숙식을 해결하기에 영 껄끄러운 상황이 됐다. 그야 그를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리네트는 생각을 멈추고 말했다.
“이미 알렉사 양이 노튼과 약혼한 후였겠군?”
“예.”
알렉사 레미시어는 아주 어렸을 적 노튼과 약혼했다. 루카스를 지지하고 나선 그가 알렉사와 친해지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알렉사는 선한 아이입니다. 저와도 수더분한 사이이기는 하죠. 아마 그 애가 아니었다면 저는 다시 기사단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기사단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후작가에서 지내기로 했으나, 당시의 후작가가 노튼의 반대에 서기로 한 키리에를 반겼을 리 없다. 부친인 레미시어 후작이 키리에를 보고 혀를 차는 와중에, 키리에의 손을 붙잡고 ‘잘 오셨어요.’라고 말한 건 놀랍게도 알렉사였다…… 고 키리에는 말했다.
“위선은 아닐 겁니다. 저는 그런 것이 싫어 노튼 황자의 반대편에 섰으니까요. 그 애가 제게 친절을 가장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아봤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루카스가 턱을 괴고 웃었다. 키리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전하가 좋아할 게 뻔한데 뭐 하러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엑, 모시는 전하의 칭찬이잖아요. 좀 하면 안 돼요?”
차를 내려놓던 애플의 질문에 리네트가 피식피식 웃었다.
“너도 내 칭찬 안 하면서.”
“어머, 똑똑하고 명쾌하고 자기 할 말 다 하시는 우리 리네트 아가씨. 평소에 굳이 칭찬 안 해 드려도 자화자찬 알아서 잘하시니까요?”
애플이 찻잔을 내려놓고 난 뒤 쟁반을 빙글빙글 돌리자, 리네트가 팔짱을 끼며 뒤로 기대었다.
“남이 해 주는 거랑 내가 하는 거랑은 다르니까. 더 해 봐.”
“뭐, 음. 예쁘고요?”
“야, 너 말투가 좀 비아냥거린다?”
“어머, 그야 저의 존경하는 아가씨의 말투를 닮고 싶어서 그대로 따라 한 거랍니다. 닮고 싶을 정도로 멋진 분이셔서요?”
아하하, 하고 루카스가 웃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대화는 좀 더 길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키리에의 설명에 따르면 알렉사 레미시어는 선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노튼 황자의 옆에서 그를 빛내 주는…….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리네트가 머리를 긁었다. 그 바람에 예쁘게 땋아 내린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람이라는 건 어쨌든 공명심이라는 걸 조금은 가지고 있잖아. 근데 이 아가씨는 꼭 의도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원래 그런 아이여서가 아닐까요? 알렉사는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였습니다. 선하고요.”
“소심했어?”
“소심……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키리에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에 리네트가 손가락을 세웠다.
“그거야. 노튼 황자 때문에 열두어 살 시절에 남들보다 빠르게 데뷔탕트를 치렀고,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닌 여자애란 말이야. 소심해서 어쩔 수 없이 다녔다기에는 꽤 적극적으로 다녔지. 구휼 행사 같은 건 사실 다들 하루이틀만 얼굴을 비추기 마련인데, 이 아가씨는 한 달 가까이 나갔다면서.”
“그건 착한 거 아니에요?”
리네트가 팔짱을 끼고 애플의 말에 웃었다.
“착한 거랑 소심한 건 달라. 선한 건 맞을 거야. 자기 남편 될 사람의 반대편에 선 얼뜨기 같은 오빠 손은- 글쎄, 나라면 붙잡기는커녕 발로 차 버렸을 거야.”
“저도 아가씨 같은 동생이 있었다면 후작가로 들어가느니 집을 새로 샀을 겁니다.”
키리에가 의기양양하게 맞받아쳤으나 리네트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렇게나 예쁘다며. 열여덟의 예쁜 여자애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받드는 환경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나는 잘 이해가 안 가.”
“착하고 어여쁘다고 칭찬받는 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글쎄. 노튼 옆에서만 받고 있잖아.”
리네트는 손가락을 두어 번 책상 위에서 두들겼다.
“그게 만족스러울까?”
“…….”
“나는 누가 나한테 ‘어머, 루카스 황자님 옆에 계시니 너무 아름답네요!’라는 소리를 들으면 대번에 받아치고 싶을걸. ‘그럼 저만 있으면 안 예뻐요?’ 하고.”
“그건 아가씨가 성격이 안 좋아서 그렇고요.”
애플이 대꾸했다. 리네트는 ‘그건 맞지.’ 하며 킥킥 웃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일까?”
“…….”
“레미시어가의 반동분자적 성격은 키리에 레미시어에게만 몰빵일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어쩌면 그쪽에 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리네트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물론 큰 기대는 금물이고. 게다가 공작저에 그녀가 직접 온다고 해도 아마 속마음을 물어보거나 친해질 기회는 많지 않을 거야.”
후작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인 데다가 노튼 황자의 약혼녀. 심지어 낸터킷 황후가 직접 보냈다.
두 아가씨의 만남은 적어도 대여섯 명 이상의 사용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질 것이다. 그런 곳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티타임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사람을 물렸다가 경계심만 더 키우게 될 수도 있다.
“그럼 기회를 만들면 되겠군.”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졌다.
“어떻게?”
“뭐, 공작가가 아니라도 만날 수 있는 곳은 많지. 지금 나와 그대처럼.”
리네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애플과 키리에를 비롯한 네 사람은 로가나가 있던 집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설마 그녀를 여기로 부르자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루카스가 싱긋 웃었다.
“팔스의 아틀리에를 빌리기로 했어. 본래 3일이었는데, 좀 더 늘려야겠군.”
“팔스요!?”
애플이 펄쩍 뛰었다. 그 유명한 재단사의 이름을 모르는 여인은 없었다.
리네트 또한 눈을 크게 뜨자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다.
“이런 말을 그대 앞에서 하기에는 뭐 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는 조금 마음이 너그러워지지 않나?”
“사람들은.”
“그래, 사람들은.”
리네트가 루카스의 말을 고쳤고, 황자는 미소 지었다.
“어차피 쓰는 돈. 거기에 내가 아끼는 기사의 동생이지. 그녀의 드레스 몇 벌 정도 더 추가하는 것이 어렵진 않아. 명목은, 글쎄. ‘내가 사랑하는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정도가 되겠군.”
한마디로, 리네트의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빌린 숍에 알렉사도 부르겠다는 이야기다.
덧붙여 공작저 안에서만 십수 년의 세월을 지낸 리네트가 수줍음을 타니,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않고 와 주길 바란다는 정도로.
잠시 생각하던 리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후에게 말하지 않을까?”
“그야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웬일로 머리를 다 굴렸대?”
황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든 말에 키리에가 신음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미소 지었다.
“연모하는 분께서 미숙한 자를 칭찬해 주시니 제 마음이 기쁘군요.”
“그런가요? 저도 황자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에요.”
“손등에 입 맞춰도 될까요?”
“싫은데.”
순식간에 끝나 버린 역할극에 루카스가 입을 비죽였다.
“포상 정도는 달라고.”
“내 손등에 입 맞추는 게 포상이야?”
“그럼 제가 금화를 원하겠습니까, 아가씨?”
리네트는 눈을 껌벅이다가 픽 웃었다.
“무슨 꿍꿍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네트는 손등을 가볍게 내밀었다. 루카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제 이마를 댄 후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이 리네트의 손등에 닿았다. 루카스는 그대로 리네트에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가씨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말이지 제 얼굴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활용하는 황자였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정말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왕자님의 얼굴이었고, 리네트는 하마터면 넋을 놓을 뻔했다. 루카스가 이은 말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자고로 마음을 빼앗는 것이 가장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남는 장사. 맞다. 사람을 쓸 때 돈 같은 것보다는 제게 매혹시키는 것이 가장 빠르다. 루카스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네트는 입매를 굳혔다.
이런 순간에,
‘거짓말.’
제게 속삭이는 백안의 목소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뜻하지 않은 순간 개입한 능력이었지만, 리네트는 굳이 티 내지 않고 조금 싫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 말만 아니었어도 약간 혹할 수 있었는데.”
“정진하겠습니다.”
루카스는 우아한 몸짓으로 물러났다. 키리에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 제가 가서 말을 전하는 것이 나을까요?”
“그래. 하녀를 통하거나 서신을 통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빠르고 간단하겠지. 덧붙여 그녀의 반응도 살필 수 있을 거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렉사 레미시어가 남들의 눈을 피해 하녀 둘만 대동하고 팔스의 아틀리에에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 * *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지만.’
정말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진주를 개어 바른다는 이야기가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분을 바른 뺨은 매끄러웠고, 분홍빛이었다. 눈은 반짝거리는 봄의 호수를 닮은 초록. 그 위를 덮은 속눈썹은 인형처럼 길었다.
키리에가 그녀의 초상화를 구해다 주며, ‘말해 두지만 이런 그림보다는 수십 배 예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리네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정도로 예쁜 얼굴이라니. 그래서 더 놀라웠다. 이런 외모의 여인이 단지 노튼의 옆에서 조용히 있었다고?
일부러 억누른 거 아니야?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리네트는 드레스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알렉사 또한 마주 인사했다.
팔스는 무표정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팔스. 손가락은 좀 괜찮은가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았답니다.”
리네트보다야 그녀가 팔스와 훨씬 잘 알고 있는 사이일 것이다. 알렉사가 미소 지으며 리네트에게 말했다.
“팔스가 얼마 전에 손가락을 다쳤거든요.”
“그렇군요. 레미시어 아가씨는 섬세한 분이네요.”
아무리 인기 높은 재단사라지만 엄연히 평민이다. 리네트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하녀가 절뚝거려도 신경도 쓰지 않는 이멜다를 알고 있었기에, 재단사의 손가락을 챙기는 알렉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게다가 화제에서 리네트를 빼놓지 않기 위해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세상에는 의도적으로 상대와 기 싸움을 하기 위해 일부러 과시적으로 화제에서 상대를 빼놓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알렉사가 팔스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리네트를 소외시켜도, 그녀는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네트는 이를 보며, 적어도 알렉사가 자신을 찍어누르려 들 만한 위인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1황자가 몰래 부른 곳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은 흔하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인데, 인간 같지 않은 것들만 하도 오래 봐 왔더니 그런가. 그런 부분들이 섬세하게 다가왔다.
알렉사가 미소 지었다.
“칭찬 고맙습니다. 보아하니 약간 곤란하신 듯한데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겠네요.”
“그래 주시겠어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많은 옷감과 레이스 사이에서 넋을 놓고 팔을 늘어뜨린 리네트를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알렉사는 빠르게 손가락을 들어 몇몇 옷감을 가리켰다.
“카멜리아 양은 피부가 희고 연한 핑크빛이네요. 저런 옅은 핑크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아요. 저 녹색과 진한 푸른색 실크를 대 보도록 해요. 이 뜨개 레이스들은 목가적이기는 하지만 연회용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비단실로 짠 것을 가져오도록 해요.”
“리네트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도 될까요? 저 역시 알렉사라고 불러 주세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팔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직원이 장갑 낀 손으로 작은 보석함을 가지고 왔다.
“아가씨를 위해 신사분께서 보내신 보석입니다. 이 보석을 참고해 주시면 원단을 고르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검은 나무로 된 보석함은 마감부터가 고급스러웠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작은 진주들과, 번쩍거리는 유색 보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비싼 것들이었고, 드레스에 달거나 혹은 장신구로 만들라고 보낸 것이 뻔했다.
대번에 리네트가 쌍심지를 켰다.
‘아니, 내가 고를 때는 왜 이런 거 안 보여 줬는데?’
리네트의 속마음에 답이라도 하듯 팔스가 말을 이었다.
“어제 원단을 보여 드렸는데 제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원단을 보여 드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으신 듯하여. 죄송합니다.”
한마디로 너 눈 돌아갈까 봐 그랬다는 이야기다. 능숙하게 팔스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는 게 노련한 장사꾼이다 싶었다.
리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런 건 조금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예쁘고 아름답고 섬세한 것들을 보는 건 좋지만, 그 안에서 제게 어울리는 것을 골라내는 건 또 다른 능력이었다. 멋부리는 것도 하던 사람이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사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됐다. 자신의 옷을 짓는 일에 익숙한 여인은 빠르게 리네트에게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연속해서 골라냈다. 보석에 어울리는 색을 골랐음은 물론이다.
수십 개의 진주는 리네트가 데뷔탕트 때 입을 하늘색 드레스의 소매에 달리게 됐다. 최상품의 진주는 그냥 대어 봐도 리네트의 피부색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다면 진주 목걸이를 함께하는 것이 나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알렉사는 손을 내저으며 짙은 푸른색 사파이어를 골랐다.
“미혼의 아가씨는 진주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요.”
“왜요?”
“여인의 눈물이라고 불리니까요. 슬픈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리네트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미신 아닌가?
알렉사는 리네트의 그런 마음을 읽은 듯 미소 지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찜찜한 것은 피해 가고 싶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군요.”
팔스가 메모지에 사파이어를 데뷔탕트 드레스와 매치시켜 적는데, 리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진주가 이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닌 거지요?”
“그렇기야 하지요. 소매에 진주 장식이 들어가니 함께한다면 사랑스러울 것 같긴 해요.”
“그러면 저는 진주를 할래요.”
알렉사가 놀란 듯 이쪽을 바라봤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찜찜하다고 해도 뭔가 일부러 피해 가는 것은 싫어요. 게다가-”
리네트가 진주를 집어 귀에 대었다. 알이 크고 굵은 진주는 리네트의 검은 머리카락 안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한마디로 아주 잘 어울렸다.
“-저한테 이렇게 잘 어울리는걸요.”
“……그렇군요.”
잠시 놀란 듯했던 알렉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로 잘 어울려요.”
팔스가 사파이어 위에 선을 두어 개 긋고, 진주를 드레스에 매치시켜 적었다.
* * *
두 시간 넘게 원단을 봤지만, 겨우 끝마친 것은 데뷔탕트와 티파티용 가벼운 드레스 등 두어 벌뿐이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루카스가 팔스의 아틀리에를 일주일씩이나 빌린 것은 결코 돈 낭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알렉사가 그런 리네트의 옆에 와 앉았다.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그 동작을 보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왜 그러세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알렉사가 너무 우아해서요.”
그 말에 알렉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소 짓는 모습도 한 송이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했다.
“그런가요? 고마워요.”
“황후 전하께서 왜 알렉사를 제게 보내 주셨는지 알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리네트는 정말로 아주 약간은 황후에게 감탄하던 차였다.
리네트는 분명 예쁘고 똑똑하지만, 세상에는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알렉사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이대로 루카스의 옆에 섰으면 아무래도 비웃음은 면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리네트는 귀족 여성의 예의범절 같은 것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니 알렉사와는 기본적으로 몸짓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사는 움직일 때도 춤을 추듯 몸을 사용했다. 성큼성큼 걷는 리네트와 달리 발끝을 들어 사뿐사뿐 걸었고, 소파에 앉을 때도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앉았다. 방금 전 털썩 주저앉은 리네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몸짓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걷지요? 발끝을…….”
“이렇게, 춤추는 것과 비슷해요. 포인해서…….”
알렉사가 드레스를 슬쩍 걷고 발끝을 들었다. 발레를 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리네트는 앉은 채 그것을 흉내 내 보았다.
“그래요, 그렇게.”
알렉사가 손끝을 부드럽게 부딪치며 칭찬했다.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리네트는 춤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지요?”
“네.”
“왜 그랬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야…….”
리네트는 알렉사의 표정을 살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표정. 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리네트가 공작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혹시 그녀가 자신을 괄시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있다면…….
‘그런 마음을 가져 놓고 저런 표정을 할 수 있다면 오스카상을 받아도 아깝지 않을 연기력이지…….’
물론 ‘백안’ 또한 한몫했다. 그녀가 한 말 중 거짓이 있었다면 리네트는 곧 알아챘을 것이다.
리네트는 고개를 흔들곤 답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일단 몸이 좋지 않았어요.”
“저런. 몸이 많이 약한가요?”
알렉사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그건 남들에게 핑계 대기 위한 이유일 뿐이죠.”
“…….”
“부끄럽게도 저는 혼외자이기 때문에 지금 공작 부인의 호의를 받기 어려웠어요. 교육도요.”
재미있는 일이었다.
황제만 해도 황후와 황비를 거느린다. 정부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들도 남몰래 첩을 두었다.
그러나 그런 관계에서 태어난 이들은 부끄럽게 여겼다.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이들은 스스로를 태생부터 창피하게 여겨야 했다.
알렉사는 이런 이야기에 뭐라고 대답할까. 리네트는 알렉사를 똑바로 쳐다봤다.
놀랍게도 알렉사는 입을 약간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직후 리네트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보석이 달랑거리는 손톱이 리네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미안해요.”
“……네?”
“그런 이야기를 하게 해서 미안해요.”
알렉사의 시선이 민망한 듯 바닥을 오갔다.
“……리네트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대강 짐작은 했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줄은 몰랐어요.”
“…….”
“제가 본의 아니게 심술궂게 군 셈이 되었군요. 하지만 맹세코 리네트가 상처를 드러내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리네트는 확신했다.
알렉사 레미시어는 선한 사람이다. 어느 정도냐면, 이런 이야기를 스스로 하는 리네트가 비참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미안해할 만큼. 그 증거로 자신을 쳐다보는 알렉사의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흘러넘쳤다.
‘사실 난 이런 얘기 하는 거 별생각 없는데도 말이지.’
온실 속의 꽃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풍파 없이 모든 이들에게 선하게 대하기만 하는 여인이다. 더욱이 선하기 때문에 온실 바깥의 풍파에 관해서도 안타깝게 여길 줄 안다는 점이 화룡점정이었다.
그러나 알렉사가 선하다고 해서 꿍꿍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리네트는 바보가 아니었고, 제가 하는 말들이 황후에게 들어가리라는 짐작은 물론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래서 황후께서 알렉사를 보내 주셨잖아요.”
“…….”
“제가 부족한 만큼 알렉사처럼 좋은 분이 오셔서 기뻐요. 저는 솔직히 많이 각오했답니다. 제 출신이 이렇기에 경멸받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세상에, 리네트.”
알렉사는 리네트의 손을 고쳐 쥐며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리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녜요. 저도 리네트가 솔직한 사람이라 기쁘답니다. 진주를 고르는 걸 보고 생각했어요. 리네트는 솔직하고…….”
알렉사가 말을 고르는 걸 보고, 리네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조금 거칠기는 하지요?”
“……예…….”
알렉사가 얼굴을 붉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래요.”
뒤에서 턱을 괴고 쳐다보던 애플만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가씨는 역시 연기가 적성에 맞는 거 아닐까?
* * *
“어땠지?”
알렉사 레미시어가 팔스의 아틀리에를 나와 향한 곳은 레미시어 후작가가 아닌 황후 궁이었다.
알렉사는 선하며 충실한 성격이었고, 황후에게 자신이 리네트 카멜리아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이미 고한 참이었다.
성격이 급한 황후는 오래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노튼과의 저녁 만찬을 한다는 구실로 알렉사를 그날 즉시 불러들였다.
알렉사는 물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황후와 제 약혼자를 대면해야 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알렉사가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셨어요.”
흥. 노튼이 코웃음 치자, 알렉사가 움찔했다.
“그대에게 나쁜 사람도 있던가.”
노튼은 선한 알렉사를 가끔 미련하다고 평했다. 누구든 좋은 분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에게나 다정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황후가 ‘노튼.’ 하고 황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알렉사는 계속해서 노튼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낸터킷 황후가 은근하게 물었다.
“소문대로이던가요?”
“소문이라면…….”
“성격이 아주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노튼이 첨언했다. 알렉사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대단하다는 게…….”
“망나니라는 소문이 맞냐고 묻는 것이랍니다, 알렉사.”
황후가 답했다.
“공작가의 사생아인데도 부끄러움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닌다지. 공작 부인에게도 안하무인으로 굴고.”
그랬던가? 알렉사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무릎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말해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최근 수도 리시스트의 거의 모든 귀족 아가씨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여인이 바로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알렉사도 루카스 리시스트라는 남자를 알고 있는 만큼 그랬다.
루카스는 누구에게나 다정히 대하지만 틈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여인들이 루카스에게 다가가 보지 못해 애를 태웠으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런 루카스가 한눈에 반해 공작저에 무례함을 감수하고 쳐들어갈 정도의 여인이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도 당연했다.
한데 망나니라니. 그런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알렉사가 그녀에게 받은 인상은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구설수도 두려워해 모든 것을 피하고 싶어 하는 뭇 귀족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손길이 거칠고, 행동이나 몸가짐이 섬세하지는 않았으나, 무례하지도 않았다.
이쪽을 살피는 모습도 알렉사는 이미 눈치챘지만 흠잡고 싶지 않았다. 알렉사 또한 그녀를 살피기 위해 팔스의 아틀리에에 걸음한 것이 아니던가.
알렉사는 말을 골랐다. 하지만 없는 말을 꾸미는 것도 그녀의 성격은 아니었다.
“……솔직한 분이셨어요.”
“예를 들면?”
황후가 재촉했다.
“미혼의 아가씨들은 진주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만, 자신에게 어울린다며 진주를 집어 들 만큼요.”
“안하무인인가?”
노튼이 끼어들자 알렉사는 미약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 것이 아닌데. 내 설명이 부족했나? 알렉사가 느끼기에 그 순간의 리네트는 자신만만했지만 건방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건방지게 굴었다면 알렉사가 가장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알렉사는 어쨌든 사교계에서 몇 년씩을 보낸 아가씨였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감정에는 예민했다.
“그렇다기보다…….”
“그대는 상냥하니까 아니라고 얼버무려 주겠지. 또?”
노튼이 알렉사의 말을 잘랐다. 알렉사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여기서 자신이 리네트를 두둔한다면 노튼이 화를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노튼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이 헐뜯는 걸 좋아했다. 알렉사는 그런 것이 노튼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제 생각을 입에 담으면 노튼은 으레 알렉사에게 ‘선을 넘으려고 하지 말라.’며 경고했다. 가끔은 정말로 화를 낼 때도 있었다.
“……제가 어째서 두문불출하셨는지 여쭈었더니, 혼외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직접? 자기 입으로 말입니까?”
“예.”
황후가 흥미를 보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고요?”
“정확히는…… 몸이 약했다고 말씀하신 후에, 제가 어디가 아프냐고 여쭈었더니…….”
아하하, 황후가 높은 소리로 웃었다.
“알렉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군요?”
“그런 것이 아니라…….”
알렉사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렉사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리네트는 감추고 싶지 않아 했을 뿐이다.
그러나 황후는 손을 내저었다.
“알아요, 알렉사. 그대는 상냥하지요. 하지만 그 상냥함이 그 카멜리아의 사생아에게는 가시가 되었겠군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황후가 웃었다.
가시가 되었으리라. 알렉사도 알았다. 그래서 사과한 것이다. 자신의 치부를 직접 말하는 것은 싫은 일일 테니까.
그러나 황후는 알렉사가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아주 신나는 일이라는 듯 좋아했다.
알렉사는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됐다. 그런 게 아닌데. 리네트는 자신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말해 주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그래서 사과했습니다…….”
“그러니 뭐라던가요?”
“황후께서, 저를 보내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이게 아닌데. 알렉사는 조금 더 명료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오늘은 조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하면 노튼이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알렉사는 힐끗 노튼을 곁눈질했다. 아름답고 냉랭한 황자는 알렉사와 눈이 마주치자 픽 웃었다. 그 웃음에 저도 모르게 알렉사는 안도했다.
노튼 리시스트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 머리카락이 가진 빛만큼 날카로운 사람. 낸터킷 황후를 꼭 닮은 냉랭한 인상이지만, 그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그가 가끔 제게 화를 낼 때,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얼굴에 이따금 넋을 잃을 정도였으니.
“그게 다인가?”
“그 외에 특별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천을 고르고, 보석을 고르는 대화가 다였어요…….”
그래서 알렉사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원단과 레이스를 고르며 주고받은 대화는 자잘하고 즐거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노튼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노튼은 ‘흠.’ 하고 뒤로 기대앉았다.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느라 하루 나절을 온전히 다 썼다고?”
“예에…… 뭣보다…….”
“뭣보다?”
알렉사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리네트를 헐뜯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눈앞의 두 사람은 아마 그런 것을 좋아할 것이다. 알렉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리네트 양이 가진 옷들은 문제가 많았거든요.”
“이를테면?”
“잘 맞지 않았어요.”
리네트는 칙칙한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두툼한 원단으로 된 물건은 계절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중년의 부인이 입을 법한 물건이었다.
알렉사가 순간순간 원단을 고르다 말고 리네트의 옷에 눈길을 줄 때가 있었는데, 리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옷을 살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것조차 알렉사는 자신이 리네트의 약점을 파헤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공작가의 아가씨인데, 드레스가 채 스무 벌도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카멜리아 공작 부인이 어지간히 그녀를 싫어하나 보군.”
제대로 된 보석 하나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하녀가 깔끔하고 단정하게 치장해 주긴 했으나, 그 모습은 귀족이라기보다는 평민 같았다. 알렉사가 그렇게 에둘러 말하자 황후가 후, 하고 웃었다.
“그 정도면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겠군요.”
“알 만하군.”
하지만…… 알렉사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아무래도 노튼과 낸터킷 황후가 말하는 것과는 꽤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석에 집착하지 않는 부분이 그랬다.
알렉사는 이른 나이에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 많은 여인을 보았다. 후작가쯤 되면, 게다가 노튼 황자의 약혼녀쯤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가난한 중류 귀족부터 엄청나게 부유한 신흥 귀족, 그리고 전통 있는 가문의 귀부인들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재물에도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소유’에 초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배를 스무 척은 거느리고 있다는 부유한 귀부인이 티타임 자리에서 티스푼을 소매에 넣으려다가 떨어트리는 광경을 본 적 있다. 그녀는 티스푼 따위는 백만 개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가난한 귀족 여인은 알렉사가 매달고 온 에메랄드 브로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하나뿐인 티파티 드레스에 와인을 엎질러 울면서 돌아갔다.
알렉사보다 나이가 두 배쯤 많은 늙은 노부인은 제 며느리가 걸친 모피가 질투 나, 그것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을 걸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리네트는 조금 달랐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궁금해하고 아름다운 원단의 광택에 탄성을 내지르면서도, 그것들을 보는 눈은 차가웠다.
뭐랄까. 철저히 이용하기 위한 눈이었다. 예컨대 그녀가 알렉사에게 하는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이 옷이 그런 자리에 적절한가요?”
“황자님께서 주신 보석이에요. 어디에 달아야 적당히 시선을 모을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옷이 어울릴지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는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다.
빛을 받아 아름답게 광채를 흩뿌리는 보석을 보고 황홀해하다가도 다음 순간 그 보석이 어떤 물건인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보다 우월하기 위해서, 탐이 나서, 혹은 제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알렉사가 여태까지 봐 온 타입의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뭐랄까…….
알렉사가 생각에 잠긴 사이, 황후와 노튼은 말을 주고받았다.
“평민 같은 귀족 영애라니……. 루카스 또한 평민 출신 아닙니까.”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평민이었을 때 어디서 아이라도 만들어왔다면 꽤 재미있을 뻔했는데 말입니다.”
“몇몇 애를 뱄을 법한 계집애들을 뒤져 봤지만 다 허탕이었지.”
여상한 대화에 알렉사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루카스 황자 전하의 아이를 가졌을 법한? 그런데, 뒤졌다고? 어떻게?
알렉사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노튼이 픽 웃었다.
“요즘 평민들 사이에는 자유연애가 유행이라더군.”
“…….”
“하지만 우리 기대만큼 문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아쉽게도.”
별일 없었을 것이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알렉사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눈앞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노튼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알렉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나저나, 배럴 남작은 어떻게 된 거지요, 노튼?”
“그것이-”
알렉사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화제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려워…….
모두들 노튼을 대단하고 멋진 남자라고 했다. 사랑에 빠져 마땅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알렉사에게 누군가는 ‘노튼 황자님을 뵙고 있으면 가슴이 막 뛰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가슴이 뛰기는 했다. 그러나…….
알렉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빨리 해가 온전히 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 *
[푸른 수국의 록시온은 루카스 리시스트의 것?]
네 번째 ‘리시스트의 아침’이었다.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는 그 신문의 표제는 대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리시스트 기차역을 지나는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그 신문을 샀다. 귀족들 또한 제 저택에 배달돼 온 그 종이를 보고 당황했다.
푸른 수국의 록시온을 첫째 황자에게 주었다고?
[황궁 관계자는 ‘황제 폐하께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록시온을 루카스 황자에게 내렸다.’며 ‘물론 일시적인 조치일 수도 있지만, 일단 당분간 록시온의 개폐 권한은 첫째 황자님께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록시온이 가지는 상징성은 분명하다. 대대로 황후들이 사용했던 별궁이라는 것이다.
이에 주요 인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황제 폐하께서 실질적인 후계자로 루카스 황자를 낙점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간 폐하께서 드물게나마 루카스 황자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냈던 만큼, 모친인 전 황후가 사용했던 별궁을 내린 정도로만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며 선을 그었다.
이 밖에도 최근 불거진 루카스 황자의 염문도 한몫했다는 의견도…….]
유려한 필체였지만, 그 글이 담고 있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재미있었다. 또한 상황은 복합적이었다.
그간 루카스와 노튼 사이에서 무게를 재며 간을 보고 있던 귀족들의 머리가 미친 듯이 팽팽 돌아갔다.
황제의 마음은 루카스 리시스트에게로 기운 것일까? 최근 첫째 황자가 미친 듯이 쫓아다닌다던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는 연관이 있는 걸까? 첫째 황자의 아내가 누가 되든, 록시온을 주었다는 건 루카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인가?
무엇보다, 이런 정보를 여태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인가?
록시온이 황자에게 갔다는 소식은 커다란 변수였다. 귀족들은 리시스트의 아침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몰랐을 소식을 이렇듯 유려한 글로 써서 찍어 내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가장 먼저 의심이 가는 이는 루카스 황자 측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강이나마 루카스 리시스트의 세력에 관해 알고 있었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그의 주변에는 이름난 이들이 별로 없었다.
키리에 레미시어? 그 무골이 이런 짓을 할 깜냥이 된단 말인가?
혹 루카스 황자 측이 맞다면, 일을 벌인 건 대체 누구지?
평민들은 재미있어했고, 귀족들은 신문을 찍어 내는 자가 누구인지 골몰했다.
노튼파의 간자들은 미친 듯이 날아다녔다. 이런 판을 키울 만한 이가 루카스 황자의 주변에 있는지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청년 귀족들이 모이는 살롱에서도 루카스 리시스트와 붙어먹은 인물이 누구냐에 대한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루카스 황자는 최근 새로 친분을 쌓은 인물이 없잖아?”
“그렇지. 연애하느라 바쁘셔서.”
리시스트 기차역 북쪽에는 고급 살롱들도 제법 있었다. 저택에서 여는 모임들은 부모의 눈을 피할 수 없었고, 그런 것에 염증을 느낀 젊은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시중을 드는 가운데,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툭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주 난리도 아니라던데.”
“무슨 소리야?”
“내 여동생이 루카스 황자 때문에 드레스를 못 맞춘다며 울상이더라고.”
술잔을 기울이던 젊은 청년들이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말을 꺼낸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팔스 있잖나. 유명한 재단사. 그 재단사를 아틀리에째로 일주일 동안 묶어 놨다더군.”
“뭐? 언제?”
“요 며칠 말이야.”
“이런. 다음 달이 여름의 대무도회일 텐데.”
대무도회를 한 달쯤 앞둔 시기였다. 어지간한 아틀리에들은 모두 바쁘기 그지없다. 대무도회에 참가해야 하는 여인들이 앞다투어 옷을 맞출 시기에, 황자는 제가 연모하는 여인을 위해 가장 비싼 아틀리에를 점거해 버린 것이다.
청년들이 허, 탄식했다.
“기가 막히는군.”
“루카스 황자가 그런 성격이었던가?”
말을 꺼낸 청년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야 모르지. 카멜리아 공작의 둘째라며?”
“그러면 뭐 해. 본처 소생이 아니라 홀대받는 아가씨라던데.”
“쯔쯔, 그게 아니지.”
청년이 손을 내저었다.
“카멜리아 공작이 지금 노튼파라지만, 어정쩡한 입지 아닌가.”
그제야 다른 청년들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 카멜리아 공작은 따지고 보면 노튼 황자파로 분류되지만, 사실 낸터킷 황후가 친한 척하는 것 외에는 딱히 노튼 황자와 교류가 없지 않나.”
“몸이 아파서 몇 년간 황성에도 나타나지 않는다지. 명목상 노튼 황자파라고는 하지만, 막상 루카스 황자가 그 딸과 약혼한다면 카멜리아 공작도 모른 척하기 어려울 거란 말일세.”
“카멜리아 공작을 노린 거란 말이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이 나라에서 카멜리아 공작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잔 말이지. 그 딸이 엄청나게 아름다워서 루카스 황자를 홀려 놨다는 것보다, 황자가 사실은 카멜리아 공작가를 유혹하고 있다는 쪽이 더 알맞지 않겠나?”
“하지만 공작가야말로 황가와 가장 먼 집안 아닌가? ‘백안’의 핏줄이 황가에 흘러 들어가는 걸 경계하고 있잖아?”
“게다가 그 후계자인 열 살배기 소공작의 ‘백안’은 아직이니 더 그렇지.”
청년들이 점점 토론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틈타 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틀어 올린 시중 드는 여인이 생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리아주 칵테일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아니, 됐어. 하지만 그 나넬리아도, 둘째 공녀도 진작 ‘백안’이 발현될 시기가 지났는데 조용한 것을 보면…….”
“에라, 이놈아. 그게 아닐 수도 있단 말이지.”
“뭐가?”
“그것이 대대로 카멜리아 공작가의 가계도를 보면 간혹 형제들과 나이 차가 크게 나는 아들들이 있는데…….”
청년들은 여인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자신들끼리 흥분해 카멜리아 공작과 루카스 황자의 결탁 가능성을 셈했다.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총총 걸어 나갔다.
* * *
리네트는 대부분의 남자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멍청하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요즘 온갖 살롱에 위장 취업한 로가나가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더욱더 그랬다.
‘리시스트의 아침’을 본 사람들은 루카스가 최근 영입한 인재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카멜리아 공작과의 연관성만 따졌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도 리네트 카멜리아는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루카스가 최근에 만난 사람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리네트 카멜리아.
그렇지만 사람들은 리네트를 감쪽같이 잊은 듯이 생각했다. 그들이 리네트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같았다. 엄청 예쁘거나, 아니면 이용 가치가 있을 거라는 정도다. 여자니까.
평소라면 리네트는 ‘멍청한 놈들.’ 하고 비웃으며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리네트는 ‘사실 가장 멍청한 건 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끝 포인, 곧게 세워 주세요. 부드럽게!”
짝, 짝. 박수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알렉사 레미시어가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죠. 부드럽게 늘어나는 것처럼 움직이세요. 끊기면 몸동작이 뻣뻣해 보여요.”
공작저에는 놀랍게도 댄스 홀이 있었다. 그야 카멜리아 공작가가 어떤 위치인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은 아니다. 다만 리네트가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어서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뿐이다.
알렉사는 어쨌든 리네트의 춤 선생으로 왔다는 처음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성실한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는 일이 끝난 다음 날부터 매일 공작저로 왔다. 그리고 리네트에게 댄스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리네트가 이전에 춤 따위를 배운 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선한 알렉사는 리네트의 손을 붙잡고 ‘괜찮아요, 기본 동작만 할 줄 알면 된답니다!’ 하고 용기를 북돋워 줬다.
대부분의 동작은 기본 동작의 응용일 뿐이라며 자신 있게 말하는 알렉사 덕분에, 리네트도 그럴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발끝을 세우고 딱 한 발자국 간격으로 세우세요. 그다음 부드럽게 무릎을 굽히고요. 손은 모으되 양손 끝이 맞닿지 않게!”
…….
“어깨선 내려 주세요, 힘 빼고! 다시 무릎을 쭉 펴고, 엉덩이에 힘 주고, 오른쪽 다리를 살짝만 들어요! 그렇죠!”
그렇긴 뭘 그래.
리네트는 댄스 홀의 반투명한 거울에 자신을 비춰 봤다. 간단한 댄스용 드레스를 입은 알렉사가 제 옆에서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자신은 알렉사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으나…….
‘무슨 로봇 같다…….’
부드럽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알렉사와 달리, 리네트는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아주 간단한 동작마저도 두 사람의 차이는 엄청났다.
리네트는 절로 한심한 기분이 됐다. 의욕 넘치는 것은 알렉사뿐이었다.
“좋아요, 그대로! 턴! 잘했어요!”
동작 하나가 끝났다. 시간으로 따져 보면 고작 30초도 안 될 법한 간단한 연속 동작인데도 리네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해 본 적도 없는 동작을 연이어 붙여서 하려니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몇 동작은 틀렸다.
그러나 알렉사는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좋아요!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그런가요…….”
리네트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대신 옆의 바를 잡았다. 알렉사가 요구하는 동작을 하면서 균형을 잡지 못하니 애플이 어디서 가져온 임시 바였다.
알렉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동작을 멈추지는 않았잖아요.”
“그야…….”
리네트는 처참한 기분이 됐다.
알렉사가 가르쳐 준 것은 왈츠의 가장 기본 스텝이었다. 그 스텝을 다 외우지도 못해서 어제는 하다 중간에 멈춰 버리고, 또 중간에 멈춰 버렸다. 그것보다는 낫다고 해서 과연 좋아해도 되는 걸까…….
“이해해요. 저는 10년에 걸쳐 배운 걸 한 달 만에 하셔야 하잖아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차근차근 잘 따라오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리네트는 한숨이 절로 나는데, 알렉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동작이 조금 끊기거나 뻣뻣해도 어차피 드레스 안에서는 잘 안 보이거든요. 멈추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게다가 황자님이 리드해 주실 거잖아요?”
“황자님이랑 춤을요?”
“그럼요! 그럼 황자님 말고 누구와 춤을 추실 생각이셨던 거예요?”
그건 그렇지…… 리네트가 눈알을 굴리자 알렉사가 까르르 웃었다.
“그야 약혼하지 않으셨으니, 황자님에게 딱히 마음이 없으시다면 다른 신사분들과 춤을 추셔도 되겠지만…….”
“그러면 황자님이 꽤 창피해지겠죠.”
“그렇겠지요?”
알렉사는 자신이 다 겸연쩍은 얼굴이 됐다. 리네트는 혀를 내밀었다.
“방금 턴듀 동작 한 번만 더 가르쳐 주세요. 저 그거 잘 안 돼요.”
“아, 턴듀요. 자, 이렇게 무릎을 굽힌 다음에 발을 살짝 떼어서, 치즈가 늘어나듯이 끈적하게 올리세요. 팍 올리면 안 돼요.”
내 다리가 치즈가 아닌데 어떻게 끈적하게 올리라는 거야. 리네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무릎을 굽혔다.
어쨌든 그녀는 뭐든 간에 대충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일단 다른 것은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하자.
오늘은 턴듀, 턴듀.
* * *
루카스 리시스트는 오후 시간에 공작저를 찾았다. 미리 예고를 해 둔 터였고, 집사는 그를 정원으로 아무 말 없이 안내했다.
공작 부인은 황자가 찾아온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자신은 사흘간 친척의 방문을 응대할 예정이니 대접이 소홀해도 양해해 달라는 답장부터 보냈다.
그러니까 안 나가겠다는 이야기다.
상식인의 반응은 ‘황자보다 친척이 소중하다고?’겠지만 어쨌든 루카스는 구혼자의 신분이다. 이멜다는 딸의 구혼자에게 냉랭한 모친의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해 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루카스도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정원에서 리네트 카멜리아를 독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껏 차려입고 등장한 루카스가 본 것은, 정원에 거의 널브러져 있는 리네트 카멜리아였다.
꽃다발과 선물을 대신 들고 온 기사가 당황해 눈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리네트 카멜리아는 정원 의자에 눕다시피 늘어져 있었고, 가벼운 드레스 자락 사이로 속옷이 다 보였기 때문이다.
보통 때였다면 애플이라도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고 있었겠지만, 그녀도 자리에 없었다. 루카스는 웃으며 손을 들어 지시했다.
“물러가게.”
“예.”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선물들을 내려놓은 뒤, 빠르게 뒤돌아섰다. 루카스가 왜 물러가라고 했는지 그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죽었어?”
“가끔은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해…….”
루카스가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알려진 여자는 거의 지옥에서 끌려 올라온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루카스는 싱긋 웃었다.
“새 드레스는 마음에 들어?”
“이 드레스를 입을수록 내가 멍청해 보이는 걸 생각하면, 아니.”
재단사 팔스가 가장 먼저 만들어 보낸 것은 리네트의 평상복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입은 것은 댄스 연습용 드레스였다.
“댄스가 어려운가?”
“넌 쉬웠어?”
“아니. 막 성에 들어왔을 때 춤을 출 줄 몰라서 급하게 배웠는데, 영 볼품없어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됐지.”
루카스 리시스트가 돌아온 후,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대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루카스 리시스트는 십여 년 만에 돌아온 황자로서 모자라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평민으로 자란 사람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긴 어려운 법이다.
루카스는 리네트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경험해 알고 있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런.”
그리고 리네트가 참으로 간결한 애도를 표하는 데에는 웃음이 나왔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루카스가 생각건대, 스스로가 겪고 있는 비극에도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루카스가 재미있어하는 부분이긴 했지만.
“어때? 한심한 기분은 안 들어?”
“한심한 기분?”
루카스의 질문에 리네트는 겨우 몸을 세웠다. 이쪽을 바라보는 뾰족한 눈매를 보며 루카스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이깟 춤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꼭 필요한가 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었어?”
“나는 그랬지.”
영준한 얼굴이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다. 짙푸른 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바다빛,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매끄러운 피부.
이런 얼굴을 하고, 춤을 추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기는 하군. 언제나 세상이 핑크빛인 데다가 모두가 상냥하게 대할 만한 얼굴을 하고서.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막 황성에 들어와서 뭐가 뭔지도 몰랐거든. 지금 내가 여기서 춤추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지.”
“그런 게 중요한 사람도 있지.”
“그래. 몇 달 전까지 변경의 경비대원이었던 사람으로서는 영문 모를 노릇이었지만 말이야.”
잘난 얼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발포주 한 잔도 예의를 따져 가며 마시고, 내가 마셔 봐도 그게 그거인 술인데 모두 다른 잔에 마셔야 한다고 하더라고. 음악에 따라서 모두 다른 춤을 추고, 전주만 들어도 어떤 춤을 춰야 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기를 요구받았어. 변경에서는 돈이 없어서 경비대원 옷 한 벌을 두 명이 돌려 입는데 말이야.”
“…….”
“첫 식사 때 내 앞에는 크리스털 잔이 다섯 개가 놓였지. 그 잔 하나면 경비대원들 제복을 세 벌은 지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자명했다.
그러나- 리네트는 손을 뻗었다. 루카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리네트의 손길에 약간 찡그려졌다. 그녀는 그대로 손가락을 튕겨 루카스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루카스가 킥, 웃었다.
“무엄하다.”
“그럼 황족 모독으로 처형하시든가.”
두 사람만 나눌 수 있는 농담이 오갔다. 리네트는 한심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턴듀 동작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줄 알았는데, 열일곱의 루카스 리시스트가 조금 더 한심한걸.”
“그래?”
“싸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니까. 변경의 경비대원들은 제복을 입고 싸우지만, 나는 경비대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드레스를 입고 발끝을 세워 가며 싸우지.”
리네트는 손가락을 들어 드레스를 한 번 펄럭였다. 그 안으로 드로워즈가 다 보였으나 루카스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뜰 뿐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리네트. 그대는 드레스를 입고 발끝을 놀리는 것보다 더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잖아?”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니까.”
적을 방심시키는 것도 싸움 아니겠어? 리네트가 자신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한숨 쉬듯 말했다.
“오가는 크리스털 잔 속에 얼마나 음험하고 날카로운 것들이 담겨 있는지, 스물두 살의 루카스 리시스트는 이제 알잖아.”
“글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걸.”
루카스가 자연스럽게 리네트의 손목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손을 내저었겠지만 오늘의 리네트는 정말로 피곤한지 루카스에게 그대로 손을 맡겼다.
“그래서 제게는 아가씨가 필요하답니다.”
“기회주의자.”
비난은 양면적이었으나 간결했다.
루카스는 입을 맞춘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리네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루카스의 입술이 손등을 지나 두 번째 손가락으로 향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뭘?”
“오늘 동부 귀족들과 오찬이 있었거든. 다들 내가 요즘 누구와 친분을 쌓고 있는지 궁금해하더군.”
루카스의 말뜻을 리네트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재미있지. 아무도 그대가 내게 조언을 주고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루카스는 리네트의 손가락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말하고 있었다. 동작은 우아했고, 동시에 로맨틱했다.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구혼 활동을 하고 있는데, 왜 아무도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루카스가 투덜거렸다. 리네트는 손을 뺄까 말까 갈등하고 있었다.
“그야 네가 황자님이니까.”
“게다가 기회주의자고요.”
리네트의 비난을 그대로 읊으며 루카스는 손바닥을 뒤집어 엄지와 이어지는 도톰한 부분에 입 맞췄다.
도저히 못 견디겠군. 리네트가 손을 빼냈고, 마음껏 입 맞춘 기회주의자는 별 저항 없이 그 손을 놓아주었다.
“레미시어 아가씨는 어때?”
“좋은 사람이야.”
“정말?”
루카스의 눈이 의심을 띠었다. 리네트는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는 노튼 황자는 본 적이 없지만, 그런 아가씨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그렇군.”
“본 적 없어?”
“나야 키리에와 그리 다를 것 없지.”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졌다.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녀의 가장 원대한 꿍꿍이는 내가 춤의 신이 되는 것인 듯하던데.”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애플은?”
“잠깐 바깥에 보냈어. 네 심부름하러.”
“내 심부름…….”
루카스는 손가락을 툭툭 테이블에 두들겼다.
그때, 타이밍 좋게 집사가 하녀들을 거느린 채 다과를 가지고 나타났다.
리네트 혼자였다면 그냥 그런 물건들이었겠지만, 루카스가 와 있을 때 집사가 내오는 것들은 놀랄 정도로 좋은 것들이었다.
리네트는 들으란 듯이 코웃음쳤지만, 집사는 신경을 쇠심줄로 만든 척하며 애써 모른 척했다. 루카스가 웃었다.
“들어갈 때 저쪽에 있는 내 기사에게서 선물을 가져가도록 하게.”
“선물이라면…….”
“만남을 허락해 주신 공작 부인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지. 본래는 들어올 때 전했어야 하지만, 나의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잊었군.”
집사가 허리를 굽혔다. 하녀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집사만이 자리를 떴다.
리네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음, 동부 귀족들이 가져온 것 중에 좋은 화장품이 있더군. 사업차 가지고 와 본 것이라고 하는데, 동부에서는 꽤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모양이야.”
“흠, 아까운데.”
“뭐가?”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돈을 하늘에 뿌리든 땅에 묻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녀는 내 입에 상한 과자가 들어가도 아까워할 사람이거든. 예전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걸.”
“이런. 엄청나게 좋은 물건은 아니야.”
“네가 강변 모래흙을 퍼다 그녀에게 준다 하더라도 짜증이 나.”
“당신은 정말.”
루카스가 웃자 리네트는 턱을 들어 올렸다.
“새삼스레 내가 못된 게 실감이 나?”
“그래.”
“어쩌겠어. 네가 선택한 건데. 좀 못됐어도-”
“아니, 좀 새로운 취향에 눈뜬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의외의 말에 리네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루카스는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차를 마시는 것은 딱히 뭐든 설명하고 싶지 않을 때 쓸 수 있는 꽤 좋은 방법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벌 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차 한 모금을 넘겼을 때, 루카스는 성공적으로 리네트의 주의를 돌릴 만한 것을 생각해 냈다.
“아, 참.”
“응?’
“공작 부인이 데뷔탕트 날짜를 정했나?”
“그랬을 것 같아?”
리네트가 픽 웃었다.
대부분 귀족 아가씨들의 데뷔탕트는 그 모친이 시일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멜다는 리네트의 데뷔탕트를 미룰 수 있다면 영원히 미루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여름의 대연회 전에는 해야 할 텐데,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 누군가의 티파티 같은 곳 아닐까, 하고 리네트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럼 잘됐군. 보름 후로 하지.”
“뭐? 그걸 왜 네가 정해?”
루카스가 씩 웃었다.
“보름 후에 록시온을 열고 사람들을 불러 적당히 오찬을 할 거거든. 폐하는 오시지 않지만 낸터킷 황후는 올 거야. 공작 부인께도 내가 초대장을 보낼 테니 같이 오도록 해.”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싫으면 공작 부인과 그 친구들만 잔뜩 모인 티파티에서 다소곳이 인사하며 데뷔탕트를 마치든가.”
“록시온으로 가겠습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아하게 응답한 루카스가 찻잔을 들어 올리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리네트는 얄미운 나머지 그의 목젖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정말이지 늘어선 공작가의 하녀들만 아니었다면, 루카스는 그대로 찻물을 뿜어냈을 것이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황실의 스파르타식 예절 교육 덕분이었다.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