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황자님의 사정 (3/28)

2장 황자님의 사정

제이크 백작은 요즘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황성에 들어오면 언제나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미소를 띠며 인사하곤 했다. 이십 대에 백작위를 받아 팔십이 넘은 지금까지 성에 들락거렸으니, 육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인사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미소가 실로 이상했다. 다들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있었으나, 예를 들면…….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큽.”

“어머, 안녕하셔요, 호호호…….”

“백, 큽, 백작님, 안녕하세…….”

……라는 식으로 다들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했던 것이다.

‘거참. 요즘 것들은 말도 제대로 못 하나.’

제이크 백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걸었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 속도는 느렸으나 아직도 정정한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손에 넣은 약의 효과까지 더해 오늘의 컨디션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그때, 제이크 백작은 저 앞에서 오는 눈부신 금발을 보았다.

보통 때였다면 아픈 허리를 숙여야 하기에 영 그 인물이 달갑지 않았겠으나, 오늘의 백작은 달랐다. 그는 기꺼이 튼튼한 허리를 숙였다.

“개런 제이크가 루카스 리시스트 전하를 뵙습니다.”

“……제이크 백작이군?”

제이크 백작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든 순간, 반짝이는 금발이 시야를 채웠다.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금발과 청량한 하늘을 담은 푸른색 눈.

아무리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준수한 얼굴.

늠름한 어깨와 큰 키.

리시스트의 첫째 황자, 루카스 리시스트가 제이크 백작의 앞에 서 있었다.

“예.”

“여기는 무슨 일로?”

“폐하를 뵈러…….”

제이크 백작은 주름진 눈을 껌벅였다. 웬일로 첫째 황자가 제게 말을 거나 싶어서였다.

작금의 리시스트 제국 귀족들은 두 개의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바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첫째 루카스 황자파와 둘째 노튼 황자파다.

본래대로라면 첫째인 루카스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루카스 황자는 어릴 적 실종되어 십여 년을 야인으로 지내다, 극적으로 황가에 복귀했다.

그가 수도로 왔을 때 황성은 흥분과 당황, 곤란과 야망으로 들끓었다. 그가 진짜 황자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결국 백안을 가진 카멜리아 공작이 나섰다.

카멜리아 공작은 루카스를 보자마자 황제에게 ‘경하드립니다.’ 하고 무릎을 꿇었다.

첫째 황자를 잃어버린 후 한 번도 펴질 날 없던 황제의 이마 주름이 그 말에 쭉 펴졌다.

그리고 귀족들은 두 갈래로 쭉 갈라졌다.

야인으로 살았지만 정통성을 지닌 루카스 황자.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배운 데다가 선하고 정의로운 노튼 황자.

황제의 아래에서 귀족들은 바람 잘 날 없이 싸워 댔다.

제이크 백작은 대표적인 노튼 황자 지지파였다.

자연스레 루카스 황자는 제이크 백작을 봐도 별로 말 붙이지 않았다. 제이크 백작이 굽은 허리를 핑계 삼아 고개를 까딱하면 루카스 황자는 손을 내젓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복도에 서서 제게 두 마디 넘게 말을 붙이다니…….

심지어 루카스 황자는 턱을 어루만지며 제이크 백작에게 재차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흠. 폐하를? 요즘 제이크 백작 바쁘지 않나?”

“……예?”

제이크 백작이 눈을 끔벅였다.

루카스 황자 뒤에 있던 기사들 중 빨간 머리의 기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루카스에게 속삭였다.

“전하.”

“음, 그래. 알아, 알아.”

루카스 황자가 손을 내젓고 제이크 백작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이크 백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웃어? 황자가? 제게?

“미안하오, 백작. 가는 길을 방해했군.”

“아닙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요즘 몸도 건강해졌다고 들었소. 기쁘오.”

킥.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크 백작은 눈에 힘을 주고 황자의 뒤쪽을 살폈으나 기사들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들었나?

그나저나 건강해졌다니…… 제이크 백작이 입을 열려는데 황자가 급히 말을 더했다.

“건강해 보여 기쁘다는 말이었소.”

“……예에…….”

“살펴 가시오.”

“예.”

더 이상 제이크 백작과 굳이 말을 섞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황자가 그를 지나쳐 휘적휘적 복도를 걸어 나갔다. 기사들 셋이 그 뒤를 따랐다.

제이크 백작은 한참이나 그들을 쳐다보다 다시 몸을 돌렸다.

‘오늘따라 황자까지…… 황성에 웃을 일이 뭐가 있기에 다들 만면에 웃음이지?’

하지만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곧 복도를 걸으며 황자의 실없는 미소 따위는 잊어버렸다.

* * *

“……노인을 놀리시면 벌 받습니다.”

백작이 완전히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붉은 머리의 기사-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표정을 굳히고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루카스 황자와 나머지 기사 두 명은 온몸을 흔들며 키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봤어?”

“예, 봤습니다. 사타구니는 별 이상 없던데요. 납작합니다.”

“세상에, 오늘내일할 것 같은 노인이 정력제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방금 전 모습으로 미루어 봐서는 육 개월은 더 살 것 같던걸요.”

루카스 황자가 킬킬거렸다.

아름다운 외모와는 대조되는 경박한 웃음에 키리에는 한숨만 쉬었다.

“전하…….”

“응?”

“제발 부탁이니 품위를 좀…….”

“왜. 내가 백작 사타구니 쳐다본 게 그렇게 거슬렸어?”

“……제국의 첫째 황자가 팔순 노인 사타구니만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 꼴이 그럼 흡족할 것 같습니까.”

“으아, 화났다. 화났다.”

루카스가 다른 기사의 뒤로 슬쩍 숨는 시늉을 했다.

키리에가 말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눈을 부라리자,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요즘 잠을 설쳐서 피곤하다고. 눈에 거슬리는 노친네 놀리는 것 정도는 봐줘.”

“제가 봐 드릴 수 있는 분이기는 하고요?”

흐흠. 루카스가 웃었다.

“그래서, 마법 약 반입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다만?”

“명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배럴 남작을 노튼 황자님이 감싸고 나설 가능성도 있습니다.”

루카스는 턱을 어루만졌다. 경박하게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정력제니 뭐니 하는 마법 약 반입은 노튼의 이미지에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렇지만 배럴 남작은 노튼 황자님의 가장 큰 자금줄 중 하나니까요.”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루카스는 함께 소리를 죽이는 대신, 성큼성큼 걸어갔다. 긴 다리가 쭉쭉 뻗으니 집무실까지는 금방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황성의 2층, 가장 조용한 곳에 있었다.

본디 3층의 대접견실을 그가 써야 마땅했으나, 대접견실은 노튼 황자가 집무실로 쓰고 있었다.

원하신다면 형님에게 얼마든지 양보하겠다며 빙그레 웃는 노튼 황자의 앞에서, 루카스는 환히 웃으면서 ‘아우의 영역을 침범하면 쓰나.’라며 이 집무실을 청했다.

그러길 5년.

이제 황자들의 자리싸움은 슬슬 신경전 수준이 아니게 됐다. 적어도 루카스 황자에게는 그러했다.

루카스 황자는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노튼이 쌓아 온 성실한 이미지가 남작 한 사람으로 무너지지는 않겠지.”

“예. 마법 약을 내깃돈으로 쓴 것도 도박사들의 짓으로 몰아가면 그만입니다.”

“정력제는?”

작은 웃음이 퍼졌다.

루카스는 제 책상 위에 있던 종이 쪼가리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편 종이 위에는 한 도박장에서 노백작이 정력제를 따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우스운 필체로 쓰여 있었다.

“정력제는…… 소문이 퍼지면 재미있기야 하겠지만, 우스운 이야기로만 소비될 가능성이 큽니다. 백작의 노망 정도에서 끝나고 말겠죠. 노튼 황자님은 어리고 선합니다.”

키리에가 말하다가 이내 다시 고쳐 말했다.

“아니, 적어도 제국민들에게는 어리고 선해 보입니다.”

“쯧.”

루카스가 종이를 내던졌다.

‘하녀들의 수다’였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은 둘째 황자의 큰 정치 자금줄 중 하나였다.

노튼의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루카스 황자의 손에 어느 날 우연히 들어온 ‘하녀들의 수다’는 꽤 재미있는 기회가 됐다.

루카스는 ‘재미있는 건 그게 여느 때와 같은 약이 아니라, 바로 불법 정력제라고 합니다.’라는 문구에 주목했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서는 마법 약이 여상하게 거래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루카스 황자 측의 기사들은 은밀히 움직였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과 거래하는 마법 약 상인을 한 명 잡았으나, 그는 한사코 시치미를 뗐다.

불법 마법 약이라는 것은 거미줄같이 촘촘하게 그 보급망이 이어져 있어, 마법 약 취급자들은 붙잡히면 제 선에서 언제나 꼬리를 잘랐다. 황족의 보복보다 조직의 보복이 훨씬 두려운 탓이었다.

“젠장. 결정적인 뭔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시일을 두고 천천히 준비하시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어차피 배럴 남작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근차근 쌓아 놓고 한 번에 터트려야겠죠.”

“정보원들이 전부 돌아섰다며?”

대번에 키리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루카스는 혀를 찼다.

“괜찮아.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게다가 그 어마마마가 계신데, 당연하겠지.”

“……문제는 저희 쪽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노튼은 루카스와 어미가 달랐다.

현 황제의 첫 황후이자 외국의 공녀였던 루카스의 어미는 루카스가 실종되기도 훨씬 전에 하늘의 별이 됐다.

반면 노튼을 낳은 둘째 황후는 아직도 권력이 막강한 데다 루카스보다 압도적으로 정보전에 능했다. 루카스의 정보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목숨을 잃거나, 노튼 쪽으로 돌아서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이번의 배럴 남작 건 또한 ‘하녀들의 수다’가 아니었다면 꼬투리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루카스의 생각이 다른 곳에 미쳤다. ‘하녀들의 수다’를 쓴 사람이었다.

루카스가 ‘하녀들의 수다’를 접한 것은 다름 아닌 식당에서였다. 그것도 수군거리는 여자애들의 입에서.

기껏해야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 둘이 식당에서 배럴 남작이 어쩌고 떠드는 것을 들은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관심이 안 갈 수 없었다.

귀를 기울인 루카스가 건진 것은 ‘하녀들의 수다’라는 단어였다.

짧은 조사 끝에 ‘하녀들의 수다’가 웬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한 달에 한 번, 하녀들 사이에 푼돈을 받고 배포되는 찌라시.

이전 호는 구할 수도 없었다. 하녀들이 감쪽같이 돌려보고는 이내 찢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한 최신 호에는 퍽 구미가 당기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루카스는 그때 식당에서 본 검은 머리의 여자애를 떠올렸다. 옷을 보아하니 근처의 종업원 같았다. 아니면 누군가의 하녀일 수도 있지.

그녀가 입은 치마는 너무나 평범하고 아무 장식이 없었다. 하지만, 최신 호에 적혀 있던 배럴 남작의 이야기를 분명 그녀들은 먼저 알고 있었다.

루카스는 제 집무실을 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당연히 기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평민으로 십 년 넘게 살았던 사람이다. 긴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외에는 주변에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자신에게 봉사하는 하녀, 종업원, 시종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비밀 이야기를 한다면서 보란 듯이 시중을 받으며 말을 섞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루카스는 어렴풋이 ‘하녀들의 수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 취급 당해 본 적 없는 이들의 입소문이 모인 것이 그것이리라.

다만 걸리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글솜씨였다. 풍자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식으로 작문을 배운 사람의 글이었다.

평민들 중에서도 작문을 배운 이는 흔치 않다.

몰락 귀족일까.

루카스는 ‘하녀들의 수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할 생각도.

잘만 하면 꽤 재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리네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서다.

머리를 빗겨 주던 애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세요? 추우세요?”

“아니. 그냥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이런. 이제 더워질 텐데 왜 그러신대요. 담요라도 덮으시겠어요?”

“귀찮아.”

애플은 어깨를 으쓱하고 리네트에게 덮어 주려던 담요를 밀어 놨다.

하늘이 맑았다.

리네트는 영혼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찾아온 에드가 발란이 창밖의 정원에서 보란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에드가 발란도 공작이 자신을 사윗감으로 찍었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차려입고 와서는 으스대며 차를 마시고 있는 꼴이라니.

그나마 리네트를 가엾이 여긴 중년의 집사가 에드가에게 ‘귀족 아가씨들을 아침부터 찾아오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라며 시간을 벌어 준 참이었다.

그래도 슬슬 내려가긴 해야겠지.

리네트는 애플이 제 머리를 예쁘게 땋아 내려 주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 꼴로 가시게요?”

“쟤 앞에서 예뻐 보여서 뭐 하게. 그냥 대충 살래.”

“하긴…….”

머리만 좀 단정하게 땋았다 뿐이지, 그녀는 그냥 평범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리네트는 나가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따라와야 할 애플이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안 가?”

“그게, 아가씨. 집에서 전갈이 왔는데요…… 오늘 좀 들르라고.”

“그래? 급한 일인가 보네?”

“잘 모르겠어요. 굳이 사람을 보낸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넉넉하게 휴식을 주는 건 좋은 고용주의 필수 조건이다.

리네트는 픽 웃으며 말했다.

“다녀와. 내친김에 내일까지 푹 쉬고.”

“정말요!?”

“응. 대신 올 때 간식 사 와.”

“그럼요!”

애플이 뛸 듯이 기뻐했다.

리네트는 옅게 웃고는 문을 나서 팔자걸음으로 정원 앞에 도착했다.

고상을 떨며 차를 마시고 있던 에드가가 일어났다.

결 나쁜 데다가 슬슬 숱이 옅어지는 게 보이는 갈색 머리, 술과 유흥에 쩔은 남자들만이 갖고 있다는 유흥 살.

‘으, 보기 싫어. 얼굴 조금 반반한 편이면 뭐 하나. 술 몇 번 마시면 저렇게 망가지는데.’

리네트는 이를 악물며 인사했다.

“웬일이세요?”

게다가 에드가는 스물아홉이었다. 리네트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셈이다.

꽃다운 열여덟에게 내년 서른인 남자를 붙이다니, 공작도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고 리네트는 생각했다.

이멜다의 사촌 중에는 이보다 어린 자도 있는데.

……뭐, 아마 이들은 가장 볼품없는 놈을 제게 붙인 것일 테다.

이멜다는 리네트가 불행해지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공작은 리네트가 굳이 잘생기고 똑똑한 놈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러나 에드가는 리네트의 상상보다 훨씬 무례했다.

덥석 리네트의 손을 잡은 것이다.

리네트의 안색이 변했다.

“오, 리네트. 그대가 이렇게 성숙해진지 몰랐군. 공작 각하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걱정했는데, 그 꼬마 아가씨가 이렇게 클 줄이야.”

그렇게 말하는 에드가는 리네트의 가슴 쪽을 노골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네트는 소름이 끼쳤다. 목까지 올라오는 실내복이 아니었다면 손이라도 댈 기세였다.

“……놔주세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뭐 어때?”

리네트는 짜증이 나서 에드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에드가는 징글징글하게 웃었다.

“부끄럼 타기는.”

‘이 세계에서 살인 청부는 얼마지?’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가를 노려보다 억지로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어쨌든 여기서 그를 문전박대한다면 자신은 이멜다에게 화를 당할지도 몰랐다.

에드가가 테이블 앞에 도로 앉자마자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저 그쪽 안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이런.”

에드가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럼 제가 기뻐해야 하나요?”

“그렇다기보단…… 나는 우리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거든.”

진짜 염병 천병이다.

‘내가 너랑 겹치는 공통점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쪽이라는 것 외에는 없었으면 좋겠거든!?’

리네트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에드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라고 널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야. 뭐, 남들은 불행한 결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씩이나 돼서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할 리는 없고.”

“…….”

설마 우리 결혼하는 척만 하면서 각자도생하자. 뭐, 그런 감사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리네트의 눈이 약간의 기대로 바뀌었다.

에드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니 나는 네가 나의 매력에 빠지도록 노력하겠어.”

죽인다.

반드시 죽일 거야.

리네트는 에드가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 리네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가는 계속 지껄였다.

“너도 내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을걸? 내가 이래 봬도…….”

개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리네트는 영혼을 누군가에게 흡입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퍼뜩, 희한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발란가의 저택은 공작가보다는 작지만 아름답지. 그곳에 내가 호화로운 신혼 방을 꾸밀 테니, 기대하길 바라.”

“……발란가의 저택이요?”

“그래. 여기서 한 시간만 가면 있지.”

얘 미쳤나.

자기애로 가득한 네놈하고 결혼해야 되는 것도 고려를 해 줄까 말깐데, 시댁에서 살자고?

돌았니?

심지어 놀라운 점은 이 남자는 정말로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리네트의 백안은 뜻하지 않게 제멋대로 발휘되는 능력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거짓 한 점 없이, 리네트가 자신에게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환장하겠네.’

리네트가 자신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에드가는 계속 헛소리를 해 댔다.

“너는 수수하게 생기긴 했지만, 뭐 밤에만 피는 꽃이라는 말도 있으니…….”

리네트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리네트는 정원의 바닥과 테이블 위의 찻잔을 가늠했다.

음. 비싼 찻잔은 아니군. 좋아.

그리고 그대로 리네트는 찻잔을 들어 에드가의 바로 옆 바닥에 던졌다.

와장창!

엄청난 소리가 났고, 에드가는 즉각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아.”

리네트의 폭언에 에드가가 입을 딱 벌렸다.

리네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랑 사느니 자살한다.”

사람 입이 저만큼 벌어질 수도 있다니. 리네트는 에드가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그간 쥐 죽은 듯 살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입 다물고 얌전히 있으면 적당히 괜찮은 음식과 잠잘 공간이 제공됐기 때문이다.

일을 할 필요도, 공부를 할 이유도 없었다.

대충 막살자는 마음가짐 속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이대로 대충 살면서 안빈낙도를 즐기자는 안이함.

그러나 이런 놈과 결혼해야 한다면 두 번 고려할 것도 없었다.

물론 에드가랑 살면서 애만 낳아 주면 백수로 계속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대충 막사는 게 아니라 그냥 막사는 삶이다.

몸 편하자고 지옥 불에 인생을 던져 넣을 수는 없잖나.

“지랄하지 마세요.”

“…….”

“너는 지금 엎드려서 내 발바닥을 핥아도 모자라.”

“너, 너…….”

리네트는 팔짱을 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높은 구두라도 신고 올 걸 그랬다. 눈앞의 남자는 키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너 이따위로 굴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너야말로 그따위로 굴고도 나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

리네트의 말에 에드가가 입을 닫았다.

리네트는 말을 이었다.

“공작님이 너한테도 비슷한 소리 했겠지. 밤낮으로 힘써서 후계자를 안겨 주면 그 잘난 발란 가문인지, 거지발싸개인지 모를 재산 안 물려받아도 될 만큼 돈 준다고. 근데 그건 네가 나랑 결혼했을 때고.”

“……너, 말버릇이…….”

“야. 너너 하지 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니?”

“…….”

“이 결혼에 신랑은 바뀌어도 돼. 근데 신부는 못 바꾸거든.”

리네트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니까 발란에서 사느니, 밤에만 피는 꽃이라느니- 그딴 역겨운 소리, 다시는 입 밖에 낼 생각도 하지 마. 알았어?”

“……너, 이 계집애.”

리네트에게 대답한 것은 에드가가 아니었다. 새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차. 리네트는 입을 닫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멜다였다.

“오셨어요, 어머…….”

짝.

리네트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뺨을 맞았다. 아. 젠장.

리네트의 눈앞에는 기가 막혀 파르르 떨고 있는 귀부인이 있었다.

이멜다 카멜리아.

미모 하나로 카멜리아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40이 넘은 나이에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져 있다. 리네트 때문이다.

“가만히 두고 봤더니 못하는 말이 없더구나.”

“…….”

“네 남편감이 될 사람에게.”

리네트는 심호흡을 하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그녀는 제 어미에게 인사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이멜다는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제 트집을 잡지 못해 안달했다.

리네트는 몸에 밴 기억을 통해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아름답게 인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멜다 뒤에 서 있던 다른 하녀들이 기겁하며 리네트의 빨간 뺨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것이 다 보였다.

괜찮아요, 언니들.

리네트는 옅게 웃었다. 심정적으로는 시집 간 나넬보다 저 하녀들이 제 언니에 훨씬 가까웠다.

이멜다는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마를 한층 더 찌푸렸다.

“에드가는 내가 직접 공작님께 네 신랑으로 추천한 아이야. 신랑이 바뀌다니, 나넬리아 때처럼은 안 될 거다.”

‘그럴 줄 알았지. 저 쓰레기를 나한테 붙여 줄 사람이 대체 누가 있겠어.’

리네트는 아픈 뺨을 문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 에드가. 당황했지? 저 아이가 그리 성정이 괜찮지는 않단다. 다만 여자는 남자하기 나름이라니, 네가 호된 맛을 보여 주면 저 애도 정신을 차리겠지.”

“아니에요, 고모님. 괜찮습니다. 말괄량이들을 길들이는 것도 남자의 즐거움이죠.”

야, 너희 죽 잘 맞는다.

너희끼리 결혼해라.

리네트는 우웩,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식까지는 1년이 채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연애 시절을 즐겨 보렴.”

“기꺼이요, 고모님.”

“날짜도 정해졌어요?”

리네트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언제 너희들끼리 짝짜꿍 다 맞췄냐.

이멜다는 이쪽을 바라보고는 ‘저 돼먹지 못한.’ 하고 혀를 차더니 팔짱을 끼었다.

“그래. 내년 봄에 식을 올릴 거란다. 보잘것없는 너를 그동안 제대로 된 아가씨로 기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애만 낳아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뭐?”

“공작님은 저한테 그러셨거든요. 애만 낳아 오라고.”

리네트는 이멜다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태까지야 죽은 듯이 살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있나?

리네트는 생각했다.

앉아서 안 좋은 성격 죽여 가며 살았던 건 막말로 공작이 먹여 주고 재워 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따위 결혼을 강요한다면 리네트도 그들에게 맞춰 줄 필요가 없었다.

리네트는 턱을 쳐들며 일부러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1년이요? 그사이에 제가 밖에서 딴 남자 애라도 낳아 오면 재미있겠네요. 공작님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셨으니까.”

시집도 가지 않은 열여덟 공작가 아가씨가 할 말은 절대 아닌지라 이멜다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에드가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애가 저런 되바라진 소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느낀 것 같았다.

“너, 너…….”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다.

리네트는 똑똑했고, 상황 파악을 할 줄 알았다.

제가 백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 집안의 사람들은 저만 멀거니 목 빼고 바라봐야 한다.

백안은 한 대에 하나씩 유전됐으니까.

“너 이 계집애, 결혼할 때까지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면 어머니만 손해죠. 제가 분에 못 이겨 저택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해 보세요.”

리네트가 비웃음을 띠었다.

“어머니 나이에 막내 낳으시긴 힘드실 테니, 아버지는 새 부인을 맞으시겠죠.”

재미있는 건 그 순간 이멜다의 얼굴에 비친 감정이 공포라는 것이었다. 리네트가 이렇게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에드가는 픽 웃었다가 리네트의 시선에 표정을 굳혔다.

‘너도 참 알 만하다. 이게 재밌냐?’

리네트는 비아냥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손을 올렸다. 이멜다가 분에 못 이겨 다시 제 뺨을 날리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탁-!

이멜다의 손은 리네트에게 가로막혔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팔을 휘두르는데 두 번 맞으면 바보지.

“너, 이…… 이…….”

“어머니, 제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제가 유서에 어머니 이름 쓰고 자살할 수도 있거든요.”

리네트가 제 삶에 갖는 감각은 ‘좀 많이 리얼한 동화책 속에 들어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막말로 죽으면 엔딩 아닐까? 같은 생각도 리네트는 매일 매일 했다.

막상 실천할 용기가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을 뿐.

그렇지만 저딴 거하고 결혼하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지. 리네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 유서에 어머니 이름만 잔뜩 쓰여 있으면 진짜 재밌겠어요. 그렇죠? 제가 그거 못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요.”

리네트가 빙그레 웃었다. 맹세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그녀가 지은 표정 중 가장 생기 넘치는 미소였다.

* * *

“아이 씨, 개짜증 나!”

리네트는 제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침대 위를 팡팡 내리쳤다.

그런 식으로 화를 내긴 했지만, 말끔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이멜다는 자신을 쫓아 보내며 이틀간 굶으라고 했다.

기가 막혀서.

리네트는 그 말에 더더욱 이 세계가 동화 속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열여덟 먹은 여자애한테 굶기는 형벌이라니, 유치하고 덧없다.

‘하긴, 뭐. 거기서 나한테 그거 말고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카멜리아 공작은 평소에 이멜다가 리네트에게 패악을 부리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이멜다로 인해 리네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멜다는 공작에게 호되게 혼이 날 것이다. 그건 리네트가 백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리네트는 한숨을 쉬며 제 품에서 수첩을 끄집어냈다. 뭔가 문제가 생길까 싶어 챙겨 간, 지젤이 준 물건이었다.

리네트는 수첩의 맨 첫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자신과 에드가가 한 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글씨들을 어루만졌다.

[오, 리네트. 그대가 이렇게 성숙해진지 몰랐군. 공작 각하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걱정했는데, 그 꼬마 아가씨가 이렇게 클 줄이야.]

[곧 결혼할 사이인데 뭐 어때?]

[부끄럼 타기는.]

역겨운 말들이 수첩에서 흘러나왔다. 수첩의 기능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수첩을 다시 닫자 목소리가 그쳤다.

일단 녹음은 했는데, 어떻게 갖다 쓰지?

녹음 내용을 공작에게 가져다 줘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막말로 진짜로 리네트가 밖에서 시정잡배의 애를 낳아 와도 그 애가 백안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아이의 출신 성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그냥 나를 쓰면 되잖아!

물론 리네트를 싫어하는 이멜다가 있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멜다는 제 자식인 갈레안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싶어 했다. 리네트가 가진 백안까지도.

백안이 리네트에게 와 있다면, 리네트가 낳은 아이를 갈레안의 아이로 입적시키면 된다는 것도 이멜다의 생각이었다.

아, 그나저나 자꾸 애 낳는 소리 하니까 내가 무슨 번식용 동물이라도 된 것 같네. 리네트는 자괴감을 느꼈다.

아, 엿 먹이고 싶다. 어떻게든 먹이고 싶다.

공작부터 이멜다와 에드가까지, 몽땅 엿을 먹이고 싶다.

나 빼고 모두가 세트로 망하는 아름다운 방법 없나?

물론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수많은 아침 복수 드라마 여자 주인공들이 써먹었을 것이다.

눈에 점을 찍나? 아니면 김치로 싸대기를 때리나?

“전부 다 여기서 할 수도 없는 것들이잖아! 아악!”

리네트는 침착하게 머리를 침대에 갖다 박았다. 이성을 잃고 발광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미 하루치 기력은 다 써 버렸다.

그 직후 지젤을 생각했으나 이내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지젤은 그래 봬도 마탑의 마법사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순간 그대로 마탑의 홀에 갇혀 영원히 마력을 봉인당한다.

휴, 그럼 암살은 안 되고.

남들이 기겁할 생각을 심드렁하게 머릿속에서 제끼며 리네트는 옆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 세상아. 망해라.”

리네트가 중얼거리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똑똑.

뭐야. 나 굶기라고 해서 아무도 내 방에 안 올 텐데. 리네트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제가 맞는 걸 본 하녀들 중 한 명이 약이라도 발라 주려고 온 거 아닐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까 신나게 휴가를 받아서 나간 애플이었던 것이다.

“애플? 왜 그래……?”

게다가 심지어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덜컥, 리네트의 심장이 떨어졌다. 얘가 어디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고 온 건 아니겠지.

“애플, 무슨 일이야? 휴가 가다가 사고라도 당했어?”

“아가씨이이…….”

리네트는 서둘러 애플의 상태를 살폈다. 긴 치마도, 양말도 모두 멀쩡하다. 구두는 조금 까지고 흙이 묻긴 했지만, 적어도 어디서 머리채 잡히고 뒹군 행색은 아니었다.

그때, 애플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해요, 아가씨…….”

“왜 그래, 애플. 울지 마.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펜플이요…….”

펜플은 애플의 동생이었다. 정확히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뭐지? 인쇄소에 사고라도 생겼나?

“펜플이 왜?”

“납치당했어요…….”

리네트는 눈을 크게 떴다.

펜플은 지극히 평범한 평민 가정의 청년이다. 납치를 당할 이유가…….

“……설마, 하녀들의 수다 때문이니?”

“아가씨…….”

애플이 울면서 쪽지 하나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휘갈겨 쓴 듯한 메모.

[수다 많은 하녀와 한담을 나누고 싶다. 가급적이면 빨리.]

“펜플이 어제 집에 안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펜플이 술이라도 마시고 인쇄소에서 자고 있는 줄 아셨대요. 그래서 가셨는데…….”

“……그런데.”

“인쇄소는 엉망이고, 이런 쪽지가 문 앞에…….”

리네트의 머리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누가 봐도 쪽지는 ‘하녀들의 수다’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는데.

“진정해, 애플. 그래서?”

애플은 고개를 흔들었다.

“보자마자 아가씨께 가장 먼저 알려야 된다고 생각해서 뛰어왔어요.”

“좋아. 고마워, 애플.”

리네트는 쪽지를 뒤집었다. 쪽지 뒤에는 간략한 약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리시스트의 기차역 근처, 창고 지역이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작은 메모.

[반드시 혼자서 올 것.]

“…….”

“아가씨,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리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가야지.”

* * *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이런 날 나가는 거 너무 싫은데.’

그렇지만 펜플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

누가 펜플을 납치했는지는 리네트도 몰랐다.

아마 ‘하녀들의 수다’로 손해를 본 사람이겠지.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녀들의 수다’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귀족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리네트는 맹세코 멀쩡한 사람들이 피해 볼 내용은 쓰지 않았다.

그게 리네트의 철칙 중 하나였다.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볼 내용이 아닐 것.

망신은 주되, 진지하게 대응할 만한 내용이 아닐 것.

한데 납치라니. 어지간히도 제정신이 아닌 놈인 듯했다.

그래서 리네트는 노선을 바꾸었다.

“애플, 내 옷 중에 가장 예쁜 옷 골라 와.”

“예쁜 옷이요……?”

눈물범벅이던 애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다 이유가 있다고.”

아마 펜플을 납치한 이는 ‘하녀들의 수다’ 집필자가 평민이나 하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가 공작가의 둘째 영애라면 어떻게 될까?

리네트는 제 정체를 말끔히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제 아버지의 지위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리네트의 말뜻을 이해한 애플이 눈물을 닦으며 리네트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드레스를 골라 왔다.

그렇다고 해도 유행이 한참은 지난 물건이어서, 리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멜다의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괜찮을까요?”

“어차피 이멜다는 한번 입은 드레스는 다시 안 찾잖아?”

애플은 이멜다의 옷방에서 들고 온 푸른 드레스의 뒷단추를 열면서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리네트는 재빠르게 그 옷을 갈아입었다. 허리가 좀 컸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내친김에 그녀의 보석도 달았다. 이멜다가 알면 제 머리를 쥐어뜯겠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비를 막기 위한 망토까지 두르고 리네트는 빠르게 제 방을 나섰다.

애플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따랐다.

그러나 밖으로 나서던 중 문제가 생겼다.

“너 어디 가니?”

이멜다였다.

마침 다른 곳으로 가던 그녀와 저택 복도에서 마주쳐 버린 것이다.

망했다. 리네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날씨가 이리 험한데…… 음?”

수상하다는 얼굴로 다가온 이멜다의 눈이 치켜떠졌다. 드레스는 망토로 감추었지만, 리네트가 귀에 달고 있던 보석은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멜다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이젠 도둑질까지 하는 거니?”

“도둑질이라뇨. 사정이 좀 있어서-”

“사정? 무슨 사정. 오전에 내게 모욕을 줘 놓고, 내 보석을 훔쳐 달 만한 사정이 뭐가 있니?”

리네트는 한숨을 쉬고는 귀에 달았던 보석을 떼어 내려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멜다가 먼저였다. 콱, 하고 이멜다가 리네트의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틀어쥔 것이다.

“악.”

“네 어미가 도둑질하라고 가르치든?”

“……이거 놓으세요.”

“싫은데?”

이멜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리네트의 머리를 흔들었다. 리네트가 비명을 질렀다.

하녀들이 질린 표정으로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말리지는 못했다.

오전의 일은 이미 저택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고, 지금 상황을 말렸다간 잔뜩 독 오른 공작 부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놓으라고요!”

리네트가 손으로 그녀를 확 밀쳤다.

투둑, 하고 뭐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악!”

이멜다가 뒤로 밀려 하녀들의 부축을 받았다.

남들이 보면 막장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딸이 어머니를 저렇게 밀쳐 버리다니.

그러나 어머니가 딸 머리를 틀어쥔 시점에서 이멜다 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리네트는 이멜다를 노려보며 제 오른쪽 귀를 어루만졌다. 귀가 뜨거웠다. 리네트가 하고 있던 귀걸이가 뜯긴 것이다.

툭.

바닥에 피 묻은 귀걸이가 떨어졌다.

리네트는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나머지 한쪽 귀에서도 귀걸이 하나를 마저 떼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내 어미는 얼굴도 기억이 안 나, 내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쳤는지는 모릅니다.”

“…….”

“그렇지만 댁도 나한테 가르칠 게 없다는 건 잘 알겠네요.”

“너 이리 안 와?”

이멜다가 소리 질렀으나 리네트는 빠르게 등을 돌렸다.

여기서 더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애플이 ‘아가씨! 같이 가요!’ 하고 뒤에서 소리 질렀지만, 리네트는 애플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가운데, 리네트의 걸음마다 물이 튀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공작 부인, 이멜다.

그녀는 왜 나에게만 저렇게 독하게 대할까.

리네트는 빗속을 빠르게 걸으며 생각했다.

이멜다는 하녀들에게도 매섭게 대하긴 하지만, 적어도 상식선이긴 했다. 그녀가 저렇게 유독 교양 없이 구는 건 자신뿐…… 아니다.

나넬이 있었지.

그러나 그 나넬도 없어진 후로 이멜다는 리네트를 쥐어뜯지 못해 안달했다.

동화 속 계모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 개연성 없이 주인공을 물어뜯는.

그렇지만 주인공은 이제 없잖아? 주인공이 없는 세상이라고 해서 내가 대신 쥐어뜯기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아! 짜증 나!”

리네트가 소리 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울 것 같은 표정의 애플이 겨우 그녀를 따라잡아 우산을 받쳤다.

“아가씨…… 몸 상해요.”

“넌 네 동생이나 걱정해.”

리네트는 이를 악물고 애플에게서 우산을 빼앗았다.

애플이 놀라 다시 우산을 받아 들려 했지만, 리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오라고 했어. 혼자 갈 거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지젤을 부를 거니 걱정 마. 공작가의 증표도 챙겼어.”

애플이 그제야 겨우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후자보다는 전자가 압도적으로 믿음직하기에 그럴 것이다.

매번 뱁새의 모습이긴 했으나, 마법사라는 건 그런 존재였다.

“내가 오늘 밤을 넘겨서도 돌아오지 않으면 영감한테 말해.”

“예…….”

리네트는 빠르게 돌아서며 품속의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지젤을 부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수첩을 챙겨 나오기는 했다.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리시스트 기차역까지는 금방이었다. 기차역은 공작의 저택보다 열 배는 컸다. 제국의 수도 중심부에 있는 역이니 그럴 것이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구두는 젖어 발 안쪽까지 차가웠다. 몸이 차가워지니 뜨거운 귓불이 더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리네트는 기차역 건물의 유리창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머리가 엉망이었다.

공작가의 아가씨는커녕, 어디서 몇 대 맞고 나온 여자 같았다.

‘아니, 그냥 그거지.’

제 머리를 휘어잡던 이멜다를 생각했다. 속이 뒤틀렸다.

역 뒤쪽에는 화물 창고들이 수백 개가 있었다. 기차에 실을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평소엔 분주히 창고 건물 사이를 오가는 일꾼들도 비가 오니 거의 없었다.

리네트는 한참을 뒤진 끝에 쪽지에 쓰인 건물 번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독 외진 곳이었다.

언제라고 시간은 쓰여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급적이면 빨리, 라고 했다.

납치범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지금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리네트는 창고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쇠로 된 문고리가 문을 사정없이 때렸다.

답은 없었다. 리네트는 다시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그래도 답이 없어 리네트는 문을 밀었다.

끼이익…….

문은 본래부터 열려 있었는지 손쉽게 열렸다.

심호흡을 한 리네트는 우산을 접고 팔에 힘을 주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안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설마 신분을 까발릴 새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진 않겠지.’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몰라. 그렇게 죽으면 엔딩 날지 또 누가 알아?’

사실 자신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캠페인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여자애 혼자 이런 곳에 가면 끔찍하게 살해당해요!

같은 공익 광고의 주인공.

그렇다면 내가 죽어야 엔딩이 나는 게 맞겠지……. 그런 생각이 지금 리네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덕분에 리네트의 표정은 다분히 염세적으로 변했다.

리네트는 하쿠나 마타타, 하고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던가? 케세라세라였나?

철퍽.

물에 젖은 구두가 잡생각을 털어 내고 마른 창고 바닥을 디뎠다.

철퍽, 철퍽, 철퍽.

굽이 낮은 구두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두운 창고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녀가 눈을 찌푸렸을 때였다.

콰당.

뒤에서 느닷없이 문이 닫혔다. 리네트는 놀라 뒤를 돌아봤으나,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륵.

그때, 누군가가 초를 켰다. 리네트는 그쪽을 바라봤다.

남자 세 명이 있었다.

정확히는 한 명은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앉아 있었으며, 한 명은 서 있었다.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찾던 사람인지, 아니면 단순히 비와 폭력을 피할 곳을 찾아 들어온 가련한 아가씨인지 궁금하군.”

리네트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둘 다.”

“…….”

눈을 깜박였다. 차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앞이 상세히 보였다.

리네트의 예상대로 쓰러져 있는 이는 펜플이었다. 그는 기절한 듯 누워 있었다.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남자 두 사람은 긴 망토를 두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둘 다 제법 지위가 있는 자들이라는 것.

제국 수도에서 저렇게 눈에 띄는 장검을 차고 다닐 수 있는 자들은 장검 소지 허가를 받은 자들이거나, 기사였다.

암살자나 거리의 용병들이라면 소지 허가가 필요 없는 다른 무기를 들고 다니겠지.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날 찾았다면서요?”

“당돌하군.”

앉아 있는 남자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보통 남자들이 비호감인 여자한테 쓰는 말이더라고요. 잘됐네요. 저도 그쪽 비호감이니.”

상대는 말이 없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세요.”

“그 전에. ……네가 이걸 쓴 사람이 맞나?”

팔랑, 하고 남자가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질이 낮은 종이에 어설프게 인쇄된 물건. ‘하녀들의 수다’였다.

리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제가 여기 왜 왔겠어요?”

“……여자일 줄은 몰랐는데.”

“네, 저도 납치나 하는 비열한 동물들이 남자일 줄은 줄 몰랐네요.”

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 불쾌함도 담겨 있었다.

두 남자는 즉각 리네트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허- 하고 혀를 찼다.

“제가 왔으니 인쇄소장은 놓아주세요.”

“…….”

“그 사람 저랑 관련 없는 사람이니까 놔 달라고요.”

“글쎄. 관련 없는 사람치고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던데.”

“그야 그 사람은 제가 누군지 모르니까요. 입을 닫은 게 아니라 모르는 겁니다.”

여기서 펜플을 감싸고 도는 순간, 인질의 가치만 높일 뿐이다.

리네트는 방어적인 태도로 팔짱을 꼈다.

앉아 있는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갯짓했다.

서 있던 자가 납치돼 쓰러져 있는 펜플을 흔들어 깨웠다. 펜플은 부스스 눈을 뜨더니 곧 상황을 파악했다.

“……아가씨!”

……파악하긴 개뿔. 저 멍청이가.

리네트의 얼굴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너 잤니?”

펜플이 눈을 껌벅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게…….”

“……됐어. 네 입가에 침이나 닦고 말해.”

펜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리네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본의 아니게 납치의 형태를 취했소만, 가혹 행위는 하지 않았어.”

“납치 그 자체가 가혹 행위죠.”

리네트는 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꼬나봤다. 앉아 있던 남자가 코웃음쳤다.

그때였다. 타닥, 하고 펜플이 잽싸게 뛰었다.

두 사람이 한 마디씩 주고받는 동안 펜플은 눈을 굴리다가 냅다 뛰어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 있던 남자가 즉각 펜플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펜플은 몇 번 반항했으나 곧 소용없다는 걸 알고 축 늘어졌다.

“죄송해요…….”

“됐어.”

네가 진짜 죄송해야 할 건 그게 아닌데.

리네트는 말하는 대신 상대방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앉아 있는 남자가 이 모든 상황의 주도권자인 것 같았다. 그림자 속에서 빛나던 그의 눈이 슬쩍 휘어졌다.

“아무래도 당신 말이 틀린 것 같군. 관련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누고 싶은 말이 그런 건 아니겠고. 뭐가 그렇게 열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뭐?”

“저한테 화풀이하자고 부른 거 아녜요?”

“아닌데?”

리네트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방은 아하,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하녀들의 수다’의 피해자라고 생각했군? 무리도 아니지만.”

“아닌가요?”

“글쎄, 나는 정말 그대를 잠깐 만나려고 했던 것뿐인데.”

“데이트 신청치고는 난폭한데요?”

상대방이 킥킥 웃었다.

“그야 그쪽이 누군지 하도 말 안 하니까. 이 방법이 제일 빠르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바쁜 사람이거든.”

예, 그러십니까. 리네트는 잠자코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그래야 그대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무슨 이야기요?”

“단도직입적으로, 그대의 정보지에 관심이 있어.”

정보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리네트의 눈이 흔들렸다.

상대방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말해 두는데, 나는 그대의 피해자가 아냐. 그저 우연히 이 정보지를 접했지.”

“…….”

“가장 놀라운 점은 공신력이 상당하다는 점이야. 틀린 정보를 다루는 법이 없더라고. 그런 정보들의 가부를 가려내는 데엔 상당히 많은 정보원들이 필요할 텐데. 나는 그래서 그대의 능력을 높이 샀어.”

불쾌했지만 동시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상대방은 리네트의 능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야 백안 덕분이지만, 그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투자하고 싶어. 규모를 키워 주지. 댁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도 가끔 주려고 해. 이런 싸구려 종이에 하녀들에게만 알음알음 판매하지 말고, 모든 평민들이 볼 수 있도록 규모를 좀 더 키워 보자고 제안하는 거야.”

“당신이 얻는 건요?”

리네트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가 마음에 들고, 투자하고 싶고, 정보도 줄 거다.

왜?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복면 아래였지만 그 표정은 아주 잘 보였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끔 실어 주는 것.”

아하. 소문을 퍼트리고 싶으시다?

리네트는 코웃음을 쳤다. 과연. 높으신 분들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돈을 주고 규모를 키워서 소문의 영향력도 키운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소문을 내서 평민들을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애플이 레이스를 되팔아 수익을 본 것과 정확히 같았으나, 스케일은 더 큰 방법이었다.

다행인 건 리네트가 남자의 말이 적어도 거짓은 아니라는 걸 명확히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남자는 펜플을 납치했음에도 그리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침을 흘리는 것도 모르고 잘 정도면 뭐, 뻔하다.

그리고 두 번째.

리네트가 가진 ‘백안’ 덕분이었다. 남의 거짓말을 구별하는 능력.

상대가 말하는 동안 리네트는 몰래 망토 안에서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

백안을 발휘하는 순간, 리네트의 갈색 동공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은빛으로 변했다. 하얀 시야 안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 남자는 진짜야.’

휴, 다행이다. 리네트는 속으로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안이라는 능력은 퍽 제멋대로여서, 제가 원한다고 반드시 발휘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역대 카멜리아 공작들의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다.

역대 백안의 소유자들은 항상 어떤 속삭임에 의해 거짓을 판별해 왔다. 누군가는 그 목소리를 요정이라고 하기도 했고, 여신이라고 하기도 했다. 속삭임의 진정한 정체는 아무도 몰랐다.

분명한 건 그 속삭임이 결코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남자가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진심이로군. 나를 키우고 싶은 것도.’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주먹에 힘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다급하게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 남자가 방법을 찾아 줄 거야…….’

리네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속삭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몇 번 더 주먹을 쥐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백안은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간절히 원할 때는 발휘되지만, 그것도 가끔은 발휘되지 않았다. 그건 리네트가 아직 성인이 아닌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백안은 그 소유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완성되는 능력이기에.

방법? 무슨 방법?

“……무슨 정보요?”

리네트는 혼란에 휩싸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가 팔짱을 끼었다.

“글쎄, 그건 아직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걸. 아직 그대와 나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잖아?”

“사람 묶어 놓고 합의점을 찾는다니 퍽 재미있게 들리네요.”

“내 유머 감각을 높이 사 주다니 영광이군.”

남자가 익살스러운 소리로 웃었다. 리네트는 코웃음쳤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안 믿을 수 없지 않나?”

“당신은 나를 어떻게 믿고요?”

남자는 펜플 쪽에 턱짓했다.

어쨌든 펜플이 상대방에게 붙잡혀 있는 이상 리네트가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는 돈만 가지고는 안 움직여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쥐여 주겠다.”

“사람 우습게 보지 마세요.”

리네트는 망토를 걷었다.

안에서 고급스러운 푸른 드레스가 드러났다. 남자들은 말이 없었지만, 아마 평범한 사람이 입을 만한 옷은 아니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돈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사실 거지 깽깽이의 허세지만.’

리네트는 입을 열었다.

“안전한 곳이 필요해요. 규모를 키우면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나타나겠죠.”

“그 정도야.”

“그리고 사람을 붙여 주세요.”

“사람?”

“저는 미성년자거든요.”

허. 두 남자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리네트는 비에 젖은 데다가 이멜다가 쥐어뜯어 엉망이 된 머리를 짐짓 신경질적으로 빗어 내렸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쉽게 빗겨지지 않았다.

“제 옷 보셨죠. 저 돈 있는 집 애예요. 그런데도 이 꼴을 하고 바깥에 돌아다니는 이유가 뭐겠어요?”

“……돈보다 절실한 게 있군.”

“저를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거야…….”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리네트가 짜증을 섞어 말했다.

“저를 보호해 줄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어야 해요. 왜인지 아세요?”

“왜지?”

리네트는 두말하지 않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서 있던 남자가 앉아 있던 남자 앞을 가로막고 번개같이 검을 빼내어 쳐 냈다.

땡그랑.

리네트가 던진 공작가의 문장은 남자의 검에 부딪쳐 볼품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공작가의 문장을 들어 올렸고, 이내 눈이 커졌다.

“나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리네트 카멜리아니까, 멍청한 놈들아.”

리네트의 말투가 변했다.

“계급장 까고 말하자. 초면에 반말하는 거 아까부터 짜증 났으니까.”

“…….”

“댁이 리시스트 제국인이라면 내 가문을 모를 리는 없겠지.”

허, 남자 둘이 탄식했다. 리네트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투자하겠다는 말, 책임질 수 있어?”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 딸에게 투자하려면 어설픈 규모로는 안 될 거야.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할 거고-라는 뜻이었다.

물론 리네트는 공작가의 힘을 쓸 수 없지만, 지금 이 남자들은 그 상황을 몰랐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앉아 있던 남자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공작가에 둘째 아가씨가 있다는 풍문은 들었지. 그렇지만 우리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여전히 반말이었다. 이 새끼가.

리네트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 맞받아쳤다.

“날 믿지도 않으면서 내게 투자할 생각이었어?”

“…….”

“펜플은 풀어 줘.”

카멜리아 공작가는 리시스트의 어떤 가문보다 위상이 높았다. 제 신분을 밝힌 이상, 상대도 펜플을 더 잡아 두는 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상대방도 그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앉아 있던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 눈짓했다. 곧 풀려난 펜플이 허우적거리며 리네트 쪽으로 뛰어왔다.

“아이구, 아가씨…….”

“미안, 펜플. 내가 너를 고생시켰구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가씨. 제가 못나서…….”

리네트는 펜플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상대방을 쳐다봤다.

남자들은 흡사 관찰하듯이 리네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댁들이 누군지 묻지 않겠어. 밝히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

“자신이 생기면 그 문장을 들고 찾아와. 어설프게 공작가의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마.”

“…….”

“말했어. 돈. 안전한 곳.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

리네트는 마지막을 특히 강조했다.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그 세 가지가 충족되면, 나도 댁들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헛소문이든 뭐든 써 줄게.”

“…….”

“가자, 펜플.”

“예, 예에.”

리네트의 말에 펜플이 허둥지둥 몸을 세웠다.

리네트는 창고를 걸어 나왔다. 여전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펜플은 리네트의 우산을 대신 받쳐 들었다. 리네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 남자가 방법을 찾아 줄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리네트는 곧 알게 됐다.

* * *

루카스는 평민들 사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열일곱의 루카스가 막 황성에 들어왔을 때, 귀족들은 평민들 사이에서 자란 루카스를 백안시했다. 카멜리아 공작이 없었다면 루카스는 황자로 인정받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루카스는 눈물을 흘리는 황제에게 끌어안기고 나서야 제가 진짜 사라진 첫째 황자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그는 제가 황태자가 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에 들어선 자신을 마중 나온 노튼 황자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선량한 인상으로 활짝 웃으며 자신의 앞에서 인사하는 노튼을 보고 루카스는 ‘귀티’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자신과 달리 제왕학을 배우며 길러진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노튼 황자가 루카스를 만나자마자 형님으로 대접하는 모습을 보고 귀족들은 그가 겸손하며 우애를 안다 평했다.

얼떨떨한 루카스를 보고는 야인으로 자라 그 몸가짐이 형편없다 말했다.

누가 봐도 평가는 불공정했으나 루카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리시스트 제국의 모든 이들이 루카스가 황위를 탐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황위에 큰 욕심이 없었다.

루카스가 바뀐 것은 노튼이 얼마나 위선적인 자인지 알게 된 뒤부터다.

노튼은 철저한 혈통주의자였다.

리시스트 제국이 긴 세월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역대 황제들이 평민들을 중용하며 변방의 이종족들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흰 피부를 가지지 않은 자들을 경멸했고, 평민들은 제 제위를 만들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오랜 시간 왕족으로 교육받아 온 노튼은 자신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루카스는 첫 연회에서 자신이 술을 쏟을 뻔했을 때 노튼이 제 앞섶을 닦아 주며 속삭였던 말을 아직도 기억했다.

“이래서 잡종은…….”

루카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루카스의 어머니는 외국의 공녀였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피부가 가무잡잡했다. 루카스에게는 초상화에서만 봤던 어머니지만, 그래도 노튼의 말은 모욕적이었다.

그러한 노튼은 제국민들에게는 선하고 아름다운 황자였다.

그는 수해를 당한 제국민들의 구호에 힘썼다.

식량난에 시달리는 변경에 자신의 사재를 풀어 곡식을 보내 주었다.

제국의 골칫덩이인 ‘골짜기의 마법사’에겐 기사들을 보내 그가 향후 50년간 골짜기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

노튼이 해 놓은 일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 모든 것이 위선이라는 걸 알았다.

수해를 당한 제국민들의 구호에 힘쓴 것은 제국의 가신들이었다.

변경에 보낸 곡식은 병이 들어 종자를 틔울 수 없는 종류였다.

골짜기의 마법사에게 보낸 기사들은 모두 평민 출신들이었다.

루카스는 노튼이 황제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노튼 이상 가는 공적을 세우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루카스가 평민으로 살아온 십삼 년 동안 노튼이 쌓아 온 것들은 너무 많았다.

노튼의 성은 견고해 빈틈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줄곧 분투해 왔다.

그 가운데 눈에 띈 ‘하녀들의 수다’는 퍽 재미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소문들은 귀족을 타깃으로 했다.

그것도 누구나 분개할 만한 짓을 저지르거나,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귀족들뿐이다.

게다가 모든 정보는 사실이었다.

그게 가장 굉장한 부분이다.

그 찌라시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루카스와 측근들 모두가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빠르게 찾아간 인쇄소의 소장은 생각보다 어렸다.

그 와중에도 소장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루카스는 ‘하녀들의 수다’를 쓴 자가 자신에게 순순히 협조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좋은 식사를 먹이고, 끊임없이 말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소장이 입을 꾹 다문 다음에는 그마저도 소용없었지만.

루카스가 바라는 협조는 간단했다.

지금이야 귀족가의 하녀들 사이에 알음알음 판매되는 정도지만, 아예 규모를 키워 보면 어떨까.

정보는 돈이 된다.

아예 이런 정보들을 모으고,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었다.

루카스는 ‘하녀들의 수다’를 쓴 자가 정보를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헛소문 하나 없는 깔끔한 정보지를 쓸 수 있을 리 없다.

틀림없이 재야의 현자일 거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불운해 능력을 꽃피우지 못한 평민 남자 정도를 생각했다.

글솜씨를 보아하니 중년이 훌쩍 넘은 남자일 수도 있었다.

하녀들 사이의 소문이니 하녀들이 썼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토록 유려한 글솜씨가 여자일 리가…….

……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여인이었다.

머리가 굳은 루카스의 패착이었다.

“하.”

루카스는 창고에서 돌아온 저녁 내내 궁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미성년자, 여자, 그리고…… 모든 것이 놀라웠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카멜리아라는 이름이었다.

카멜리아에 둘째가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은 적 있으나, 리네트 카멜리아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그토록 존재감이 없는 여인이었다.

루카스의 기사들 중 유일하게 귀족 출신인 키리에는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제 친우들을 탈탈 털었다.

“시집간 나넬리아 공녀 밑에 둘째가 있는 걸 다들 알긴 하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답니다. 심지어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루카스는 키리에를 힐끗 쳐다봤다.

“카멜리아 공작가쯤 되는 곳에서 딸의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다고?”

“그게…… 소문에는 서출이랍니다.”

키리에가 루카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루카스도 둘째 황후의 소생인 노튼에 비하면 서출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서출이라고?”

“공작이 어느 날 외국의 공녀에게서 낳아 왔다며 데리고 왔다고 하는데, 하녀의 아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공작 부인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랍니다.”

“굳이 서출을 데리고 온 이유가…… 아냐. 알겠어.”

카멜리아 공작은 루카스가 황자인지 가려낸 뒤 약 1년 후부터 거의 등성하지 않았다.

황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신하를 카멜리아 공작의 저택에 보냈다.

“……그녀가 ‘백안’의 소유자로군.”

뻔했다.

카멜리아 공작의 후계자는 갈레안 카멜리아.

그러나 열 살의 갈레안 카멜리아는 백안을 물려받지 못했다.

“하, 그래서 진짜 정보만 실려 있었던 건가.”

“……아마 그럴 겁니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나 말뜻도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루카스는 그녀를 떠올렸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처음 창고로 들어왔을 때, 험한 일이라도 당해 급히 몸을 피신한 거리의 여자인 줄만 알았다.

잔뜩 쥐어뜯긴 머리와 젖은 망토. 넓은 드레스 밑단은 모두 젖어 흙탕물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솜씨와 태도는 실로 놀라웠다. 그녀의 정보지만큼.

실로 유려하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 이쪽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적의를 아낌없이 내보이던 태도. 꼬박꼬박 지지 않고 쏘아붙이던 대꾸.

온실 속 공작가의 아가씨라기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상인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 자신감의 근간이 신분뿐만은 아니었다. 아마 루카스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는 능력 덕이 컸으리라.

“재미있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냐니. 그녀가 요구한 것은 깔끔하지 않은가. 그걸 충족시켜 주면 되겠지.”

돈과 안전한 곳, 그리고 보호자. 루카스는 빙그레 웃었으나 키리에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카멜리아 공작은 따지고 보면 노튼 황자파입니다.”

“그래서?”

“그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에게 돈을 주고, 안전한 곳에서 보호한다고요?”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조건에 들어맞잖아. ‘그’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를 보호할 만한 사람으로 황자라니. 더없는 보증이 되겠지.”

물론 그 아가씨는 제 정체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루카스는 리네트 카멜리아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떠올렸다.

‘네까짓 게 어디의 불량배인진 몰라도, 감히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에게 더 이상 접근하려는 수작이라면…….’ 운운할 법한 얼굴이었다.

키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카멜리아 공작은 자신의 딸을 안전한 곳에 보호한 것이 아니라 납치라고 주장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될 일이 아닙니다. 정보지는 상당히 아까운 아이템이지만…….”

“이런, 키리에. 납치할 리가 있나. 나는 아주 신사적인 사람이야.”

“그럼요?”

“그 여자, 약혼했나?”

키리에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례지만, 황자 전하.”

“말해.”

“미치셨어요?”

키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리네트 카멜리아가 했던 말을 정확히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루카스도, 키리에도 몰랐지만.

다행히도 키리에는 리네트와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상사를 두고 있었다. 루카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대답해 주면 자네가 상당히 좋아할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냐.”

“…….”

“미혼의 황자가 서출인 공작가 아가씨에게 청혼하다니. 재밌는 스캔들 아닌가?”

“……이런.”

“물론 카멜리아 공작은 엿이라도 먹은 기분이 되겠지. 노튼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겠군.”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공작가가 황가에 카멜리아의 핏줄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역사가-”

“갱신될 수도 있지 않겠나?”

루카스는 영리했다. 제국의 황성에서 5년씩이나 노튼에게 지지 않고 제 입지를 다질 정도로.

이 청혼이 이뤄진다면 퍽 재미있어질 것이다.

노튼은 이미 어릴 적 후작가의 아가씨와 약혼했다.

황후는 루카스에게도 제법 많은 약혼자 후보를 내밀었으나, 루카스는 모두 거절했다. 황후의 말을 듣고 들인 아가씨가 어느 순간 제게 비수를 내밀지 몰랐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아가씨. 그것도 채 알려지지 않은 백안의 소유자. 그런 그녀를 공작은 꽁꽁 싸매 놨다. 데릴사위라도 들일 생각이었겠지.

황후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보호를 요청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귀족 아가씨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다. 머리가 쥐어뜯겨도, 귀에서 피가 나도 아무 말도 못하는 서출 아가씨.

루카스는 잡종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자신을 겹쳐 봤다고 하면 그녀는 화를 낼까?

리네트 카멜리아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그렇지만 눈은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창고가 어두웠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불꽃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 눈빛.

루카스는 그녀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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