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하녀들의 수다 (2/28)

1장 하녀들의 수다

4년 후.

최근 리시스트 제국의 사교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캔들은 세레지 백작가의 둘째 아들, 이온 세레지가 약혼 직전에 차인 일이었다.

이온은 잘생기고 기품 있기로 유명한 이였다. 우아한 그의 몸짓과 언변에 귀족 아가씨들은 저마다 얼굴을 붉혔다.

켈론 후작가의 고명딸, 제레미아 켈론이 그에게 반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이 없는 켈론 후작가에서 이온을 데릴사위로 들여 가문을 이을 거라는 추측이 만연했다.

그러나 이온을 그렇게나 사랑하던 제레미아는 초여름의 대무도회를 앞두고 그를 찼다.

대무도회에 이온 대신 제 사촌의 팔짱을 끼고 들어온 제레미아를 보고 모두가 입을 닫았다.

덧붙여 대무도회에 이온은 혼자 나타났다. 전날 제레미아에게 차이는 바람에 함께 올 아가씨 하나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도회에서 이온은 항상 인기인이었으나, 그날 잘생긴 이온은 그의 뒤에 선 다른 이들의 키득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명백하게 이상했고, 제레미아가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지나간 후에는 모두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이온은 대무도회에서 돌아와 분노했다.

“어느 가문의 놈들이 나를 비웃었어!?”

쨍그랑!

꽃병이 깨졌다. 하녀들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이온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그는 완벽한 예절과 품위를 지닌 이온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채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으아아!”

이온은 분에 못 이겨 제가 낀 장갑을 벗어 아무 데나 팽개쳤다. 그 장갑의 가격만 해도 근처에 선 하녀들의 세 달치 봉급은 될 것이다.

근처에서 그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은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소리를 냈다가는 그의 타깃이 될 테니까.

이럴 때는 그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예민하고 날카로운 이온 세레지의 화를 피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녀들의 수다’에.

* * *

[몇백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의 잘생긴 A 도련님은 넘치는 기품과 우아한 몸짓으로 사교계에 이름이 드높으나, 사실 그 본색은 그의 하녀들만 알고 있다고 함.

저택에만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지는 그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일을 그만둔 하녀들만 기십 명.

사실 A는 엄청난 호색가라고. 호색가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의 난봉꾼.

하녀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명성을 이용해 사교계 양다리도 서슴지 않는다고.

A의 호색에 최근 가장 크게 당한 피해자는 바로 B양.

B양은 처음 A군이 자신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접근하자 바로 마음을 주었다고.

문제는 B양이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 C양을 소개시켜 주고부터.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 줬고, 그런 만남이 있은 후로부터 우리는 자주 함께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어울렸던 것뿐인데, 그런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B양이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그 어느 날!

A군이 난데없이 D양과 약혼한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졌다고.

게다가 문제는 D양이 B양보다 어마어마한 가문의 따님이라는 것.

준귀족인 B양은 차마 D양에게 말도 못 하고 속앓이만 하고 드러누웠다고.

친구인 C양은 이를 아예 알지도 못하고 여전히 A군에게 목을 매달고 있다는 소문.

D양의 경우는 집안 전체가 A군에게 푹 빠져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함.

과연 A군의 바람기는 D양과의 혼인으로 막을 내릴 것인가?]

‘하녀들의 수다’는 귀족가의 하녀들이 은밀히 돌려보는 소식지였다.

A군, B양 등으로 쓰여 있었으나, 수도의 하녀들이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의 우아한 도련님이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평민들만 해도 귀족들의 사교계를 동경해 아름답다 소문난 여인이 있으면 초상화를 구해 보려 기를 썼다. 하물며 귀족가를 오가는 하녀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하녀들은 제 주인에게 그 소문을 속삭였다. 아가씨들은 기함했고, 신사들은 눈을 찌푸렸다.

와장창-

이온이 또다시 근처에 있던 정교한 도자기 인형을 집어 던져 깼다. 방문은 꽉 잠겨져 있었으나, 사기가 깨지는 소리는 바깥까지 들렸다.

그에 근처를 지나던 하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제 옆의 다른 하녀에게 말했다.

“야…… 혹시 제레미아 켈론 아가씨가 ‘하녀들의 수다’를 보신 건 아니겠지?”

“설마. 그걸 어떻게 보셔. 우리만 보는 건데. 누가 몰래 귀띔해 줬다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라고 해도, 솔직히 쌤통이다.”

“야,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하녀들이 숨죽여 킥킥 웃었다.

자신들에게는 더럽기 그지없이 구는 데다가 툭하면 엉덩이를 더듬는 도련님이 드디어 망신을 당했으니 꼴좋다 생각했다.

* * *

“리넷 아가씨, 들으셨어요?”

“뭐.”

“이온 세레지 도련님과 제레미아 켈론 아가씨요. 약혼 이야기가 완전히 없는 걸로 됐대요.”

“진짜?”

침대에 누워 있던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결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반동으로 흘러내리다 엉켰다.

퍽 사랑스러운 생김새였다. 갈색 눈동자는 빛을 받을 때면 금색으로도 보였고, 뽀얀 뺨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예쁘장한 모습과는 달리 꽤 거칠었다.

하녀-애플은 웃으면서 그녀의 뒤로 돌아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러곤 엉킨 머리카락을 모아 손가락 끝으로 빗어 주며 말했다.

“후작가의 메리가 말해 줬어요. 글쎄, 제레미아 아가씨가 이온 도련님을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했대요.”

“정말?”

“그럼요. 대무도회에서도 아무도 이온 도련님에게 말을 걸지 않았대요. 벽의 꽃처럼 서 계시다가 백작가에 돌아가자마자 꽃병을 다 깼다나.”

“아, 분해!”

소녀-리네트는 애플의 말을 듣자마자 벌러덩 뒤로 다시 누워 버렸다. 기껏 정리한 머리카락이 엉망이 됐지만 애플은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분하다뇨? 즐거우신 게 아니라요?”

“그 꼴을 내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리넷의 말에 애플이 킬킬거렸다. 리넷도 분하다는 말과는 달리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놈, 온 동네 하녀 다 울리고 여기저기 양다리 걸치고 다니더니, 제레미아에겐 세상없이 조신한 양 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알이 다 꼴렸는데. 꼴좋다.”

“다 아가씨 덕분이죠.”

“무슨 내 덕분이야. 지가 평소에 한 짓 때문이지.”

“그것도 맞긴 해요.”

두 소녀가 숨죽여 웃었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그사이 열여덟 살이 됐다. 가능성 없는 엔딩은 치워 버리기로 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난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 아가씨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를 보면 모두 ‘이게 카멜리아 공작가의 아가씨라고?’ 하며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그녀의 방은 여전히 4년 전 리네트가 살던 초라한 그 방이었다. 크기만 좀 클 뿐 하녀의 방과 다를 바 없었지만, 계모는 그녀에게 좋은 방을 내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카멜리아 공작은 한 번의 외도로 태어나 버린 리네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를 내쫓을 수는 없었다. ‘백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백 개의 눈으로 상대방을 들여다보고,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

카멜리아 공작가가 이백 년 가까이 이 나라에서 절대적 위치에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다.

공작가의 직계 혈족 중 반드시 한 대에 한 명은 그런 백안을 타고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번 대 백안의 소유자는 정실 소생이 아닌 리네트였다.

그녀는 그 생각만 하면 설탕을 아작아작 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보는 공작 부인 이멜다가 생각나서다.

제 아들 갈레안에게 어떻게든 공작가의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이멜다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리네트였고, 리네트는 그 사실을 아주 많이 즐겼다.

‘인생 막살기로 결심했는데, 이런 막장 요소 몇 개쯤 추가돼 있으면 좋지, 뭐.’

리네트는 ‘하나뿐인 책 속 인생, 꼴리는 대로 산다.’는 가치관을 4년째 직접 실천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리네트의 방 안에 놓여 있는 마호가니 책상이었다. 쓰다 만 종이와 잉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책상. 귀족 아가씨의 책상보다는 늙은 학자의 것 같은 그것.

그녀는 그 책상에서, 3년째 정보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다.

‘하녀들의 수다’.

하녀들끼리 숨죽이고 돌려 보는 그 작은 정보지가 바로 리네트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말이 정보지지, 가십 쪼가리, 혹은 ‘찌라시’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지만, 하녀들에게는 매달 나오는 그 정보지가 큰 즐거움이었다.

리네트는 자신이 하녀들 틈에서 들은 소문을 바탕으로 정보지를 썼다. 그 소문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백안으로 구별했다.

이온 세레지의 파혼 또한 리네트가 의도한 것이었다. 제레미아 켈론은 누구보다 많은 하녀를 거느리고 다니는 여인이었고, 리네트는 ‘하녀들의 수다’를 의도적으로 후작가에 흘렸다. 어느 하녀인가가 분명 제레미아에게 속삭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온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앞으로도 쭉.

멍청한 그 남자에게 이를 속삭여 줄 하녀는 그 저택에 없을 테니까.

리네트가 몸을 빙글 돌려 일어났다. 덕분에 머리카락은 한층 엉망이 됐다.

애플이 볼멘소리를 하며 리네트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앉혔다.

“안 돼요. 제대로 빗으셔야죠.”

“뭐 하러?”

“오늘 공작님이 부르셨다고요.”

“……영감이 왜?”

리네트가 놀라서 애플 쪽을 바라봤다. 애플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 게 뭐예요. 화풀이라도 하고 싶으신가 보죠.”

“요 계집애. 말버릇하곤.”

리네트는 애플의 이마를 둘째손가락으로 콕콕 두들겼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애플도 픽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 훑어 쥔 다음 빗을 들었다.

“아무리 안중에도 없는 둘째 아가씨라도, 이대로 공작님 앞에 보내면 저희가 경을 친다고요. 아시겠어요?”

“아, 젠장. 다음 호 써야 되는데.”

“지금은 안 돼요. 저녁에 쓰시든가.”

리네트가 코로 한숨을 쉬고는 얌전히 침대가에 앉자, 애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브러시로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

* * *

지금의 카멜리아 공작 또한 백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공작의 백안은 리네트가 막 동화 속에 들어온 해에 천천히 사라졌다. 리네트가 백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대를 물려 온 능력은, 후계자가 생기면 참으로 냉담하게도 그 전 주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백안의 주인이었던 카멜리아 공작은 자신이 리네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녀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

상대방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능력을 가진 아이 앞에서 거짓을 말해 봐야 금세 간파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넬은 공작가에서 도망치듯 일찍 시집가는 데 성공했으나, 리네트는 그럴 수도 없었다. 공작은 리네트를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았다. 보통 열네 살이 되면 시키는 데뷔탕트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리네트에게 백안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대외적으로 카멜리아 공작가의 백안은 아직 공작의 소유였다.

하지만, 어쩔 셈인 걸까?

리네트는 그것이 항상 궁금했다.

백안은 언제나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언제까지고 백안이 리네트에게 이어졌다는 사실을 감출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불렀대?”

“그야 저는 모르죠.”

리네트는 애플과 말을 주고받으며 실로 씩씩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던 하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쳐다볼 정도였다.

“뭘 봐?”

그나마도 리네트의 일갈에 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도망쳤다.

‘기 센’ 둘째 아가씨는 하인들에게는 유달리 거북한 존재였다.

실제로는 어릴 적 받은 교육이 몸에 조금은 배어 있는 덕분에 사뿐히 걸어 다닐 수 있었으나, 리네트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아가씨 취급도 해 주지 않는 인간들이 널리고 깔렸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하녀들은 조금 달랐다.

리네트는 전생의 기억과 습관 때문에라도 그녀들을 편하게 대하곤 했다. 애초에 현대 사회에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하녀 수백 명에게 고압적으로 대하란다고 곧장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공작가의 하녀들에게는 격 없는 아가씨로 통하곤 했다. 그것조차 이멜다는 싫어했지만.

“너는 그걸 알아 와야 할 거 아냐.”

“제가 왜요.”

애플이 입술을 비쭉거렸다.

“그게 네 일이잖아.”

“아, 그거 알아 온다고 돈 더 주시는 것도 아닌데.”

리네트가 픽 웃었다. 애플도 웃었다.

“아, 귀찮다. 들어가면 또 쓸데없는 소리나 하겠지.”

리네트가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했다.

옆에선 애플이 쫑알거렸다.

“어쩌겠어요. 지금 안 들어가면 더 귀찮아지실 텐데.”

“네 말이 맞다. 나 왔다고 좀 전해 줘.”

앞의 말은 애플에게, 뒤의 말은 공작의 시종에게 하는 말이었다.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은 리네트의 말투에 이미 익숙한 듯 안쪽에 대고 고했다.

“리네트 아가씨 오셨습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문 앞에 달린 종이 땡그랑, 울렸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쯧. 리네트는 혀를 차고 시종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갔다.

카멜리아 공작의 집무실은 공작저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곳이었다. 그 예민한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꼬챙이같이 비쩍 마른 공작은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서 있었다.

리네트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들고 인사했다. 콧수염을 비틀고 있던 공작이 리네트를 보고 말했다.

“왔군.”

리네트는 생각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 부장 닮았어.’

공작은 그녀가 완전 싫어하던 상사를 닮았다.

‘인종도 다른데 왜일까. 진상들의 관상은 만국 공통인가.’

카멜리아 공작은 리네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앉아라.”

“서서 듣겠습니다.”

공작은 두 번 말하는 취미가 없었다. 리네트와 길게 말을 섞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열아홉 살이 되면 에드가와 결혼하거라.”

“……에드가요?”

“그래. 에드가를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제가 아는 에드가냐고 묻고 싶은데요. 그리고 그 에드가라면 정말 모르고 싶다.’

리네트는 이마를 찡그렸다.

“어…… 머님의 조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에드가 발란을 말하는 거다. 그 애도 장성했으니 너와 좋은 짝이 되겠지.”

이멜다를 어머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심히 속이 좋지 않았는데, 그 에드가 발란과 결혼을 하라니.

미치셨어요?

리네트는 공작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에드가 발란은 이멜다의 조카에다가, 심지어…….

“그 표정은 뭐지? 설마 그 애가 싫은 것이냐?”

미친. 너라면 좋겠어요? 리네트는 잔뜩 찌푸려진 이마를 눌러 펴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예.”

“왜지?”

“제가 말씀드리면 들어주실 건가요?”

리네트는 공작을 또렷하게 쏘아보았다.

공작은 리네트를 응시하다가 짤막하게 답했다.

“말해 보거라.”

“……하녀들을 때립니다.”

“…….”

“발란가의 하녀들이 피가 배어나는 스타킹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뿐입니까. 에드가 발란의 사생아가 벌써 둘입니다. 결혼하지도 않았는데요.”

“상관없다. 널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

리네트는 눈에 힘을 주고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여전히 변화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백안은 그 주인에게서 자녀에게로 이어진다. 아이 하나만 낳아라. 그러면 에드가 발란과 이혼시켜 주겠다.”

“미치셨어요?”

생각만 했던 말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네트는 서둘러 입을 막았으나 이미 늦었다.

공작은 리네트를 노려봤다.

“……천한 핏줄은 어쩔 수 없다더니.”

‘그 천한 하녀와 놀아난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내친김에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리네트는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닫았다.

“백안을 가진 아이를 낳으면 갈레안의 아이로 입적시킬 것이다. 너에게는 평생 먹고 놀 수 있을 만한 재산을 주마.”

공작은 리네트를 종마 취급하고 있었다.

백안 없이 어떻게 하려나 봤더니, 이런 거였어? 리네트는 기함하고 말았다.

공작에게서 없어진 백안을 리네트의 아이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아니, 이 인권도 모르는 놈을 봤나.

말로 다 하기 힘든 굴욕감이 리네트를 감쌌다.

그러나 공작은 리네트가 항의할 틈도 없이 그녀를 내보냈다.

리네트는 어이없이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허, 참. 허, 참. 기가 막혔다.

앞에서 기다리던 애플이 걱정스럽게 리네트를 바라보았으나, 리네트는 애플에게 별말 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리네트는 제 방에 돌아오자마자 드레스에 꽂힌 핀을 뽑아냈다.

“잠시만요, 아가씨. 제가 해 드릴게요!”

애플이 아니었다면 드레스를 찢어 버릴 기세였다.

리네트가 곧장 진정한 것은 애플이 말려서만은 아니었다. 드레스가 몇 벌 없기 때문이다.

이멜다는 리네트에게 좀처럼 드레스를 사 주지 않았다. 공작의 앞에 입고 간 드레스도 지은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옷이었다. 소매가 짧아져 손목이 다 드러나는 것도 아마 공작은 몰랐으리라.

맘껏 화낼 수도 없다니. 리네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럴 땐 그거지.

* * *

“아악! 열 받아!”

리네트는 상업 거리의 밝은 식당에서 잔을 쾅, 내려놨다.

맥주 잔이었다면 참으로 좋았겠으나, 잔에 든 것은 과실주였다.

평민들이 입을 법한 초록색 원피스는 리네트를 인근 상업 거리의 종업원 정도로 보이게 했다. 앞에 앉은 애플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정말 에드가 도련님하고 결혼시키신다고요…….”

“그래! 내가 무슨 종마인 줄 아나 봐!”

“큰일 났네…….”

에드가 발란은 발란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었다.

공작은 아마 에드가 발란에게도 리네트에게 약속한 만큼의 재산을 쥐여 주리라. 그러면 발란가 따위 이어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공작에게도 말했듯, 그가 역겨운 남자라는 사실이다.

에드가 발란은 아랫사람들을 때렸다. 이온 세레지는 트집이라도 잡아 하녀들을 때렸지만, 에드가 발란은 이유가 없었다.

하인들은 다리가 부러지기 일쑤였고, 하녀들은 손목에 멍이 들고 뺨이 부어서 발란가를 나왔다. 하녀들의 치마를 들추어 낳은 사생아는 벌써 둘이다.

더군다나 그는 도박 중독자였고, 돈을 잃으면 집기를 부쉈다. 실로 최악인 인간이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라니. 리네트는 어이가 없었다.

애플이 주눅 들어 눈치를 봤다.

“아이를 낳으면 이혼시켜 주신다니까…… 어떻게든…….”

“장난쳐, 애플? 애를 낳았는데 걔가 백안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하나 낳았는데 아니면 또 낳아야 한다고. 심지어 그 애가 백안인지 아닌지는 최소 다섯 해는 키워 봐야 아는 거고.”

그러니까, 리네트는 거듭 말하지만 보장 없는 가능성은 허수로 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에드가 발란은 보통 동화책의 해피엔딩 조건에 들어맞지도 않았다.

‘그런 새끼랑 결혼하는 게 해피엔딩이라니. 온 우주를 다 뒤져도 그런 동화는 없겠다.’

“재수 없으면 그놈과 평생 살아야 한다고. 그따위로 술을 처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다녔는데, 그놈의 씨가 온전하리란 법이 있어?”

열여덟 귀족 아가씨치고는 굉장한 말투였으나 그녀는 지금 평민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식당 종업원이 얼핏 뒷부분만 듣고 키들거렸다.

“게다가.”

“게다가요?”

“얼마 전에 들었는데, 놈이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 드나든다고 하더라고.”

“배럴 남작이요!?”

애플이 기절할 듯 놀랐다.

“거기 인신매매도 한다는 얘기 있던데요……?”

“쉿.”

리네트가 주변을 의식한 듯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애플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식당에는 남자 두 명 정도가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거기서 도박하는 분들, 판돈이 사람이라던데…….”

“사람이면 다행이게? 마법 약도 있대.”

“약이요……? 마법 약 유통은 불법이잖아요.”

“응.”

배럴 남작의 도박장은 마법을 이용한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마탑이 지금처럼 쇠락하기 직전에 만들어, 마법을 이용한 온갖 도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지금은 제국에서도 함부로 손대기 힘든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점점 불법적인 도박을 하는 곳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음알음 돈이 있는 자들을 위해 따로 도박장을 만들어, 그 안에서 온갖 일을 벌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 그런 도박장에 드나든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

리네트는 이마를 쾅, 하고 탁자에 박았다.

“죽고 싶다…….”

“에구…… 아가씨, 어떻게 해요?”

“야. 그냥 도망갈까?”

“도망이요? 어떻게요?”

“하녀로 위장 취업이라도 해서…… 먼 도시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 나 잡일 잘해!”

애플이 애잔하게 리네트를 쳐다봤다.

“마탑 아직 안 망했어요…….”

그렇다. 마탑이 있다. 동화책 속이니 마법이 존재하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문제는 공작의 재력이라면 리네트를 추적해 끌고 와 매질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잡스러운 추적 마법에 끌려오는 제 모습을 상상한 리네트는 으, 하고 몸을 떨었다.

“게다가, 아가씨가 사라지면 ‘하녀들의 수다’는 누가 써요?”

“야, 쉿.”

“아무도 안 듣는데 어때요.”

애플이 픽 웃었다.

“제 가장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마시라고요.”

“내 불행이 네 즐거움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두 여인이 티격태격하는 것은 그 식당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들을 눈여겨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 *

리네트가 ‘하녀들의 수다’를 만들게 된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어느 날 리네트는 하녀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소문을 별생각 없이 편지에 적어 애플에게 보냈다. 애플은 나넬의 결혼 1주년 기념 파티에 리네트의 선물을 들고 공작저를 떠나 있던 참이었다.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인 하나가 하녀들을 두고 양다리를 걸쳤다가, 그 일을 알게 된 하녀들이 손을 잡고 찾아가 양쪽에서 뺨을 갈긴 후 사타구니를 걷어차 줬다는 이야기를 애플이 어찌나 킬킬거리며 읽었는지, 성의 하녀들이 기웃거렸다.

애플은 기꺼이 리네트의 편지에서 소문 부분만 찢어 건넸고, 모두 그 편지를 돌려 읽었다.

애플이 공작가로 돌아왔을 때, 리네트의 편지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돌려 읽었는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리네트는 자신이 쓴 글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그녀는 몇 가지의 소문을 정리해 또 쪽지로 썼다.

젊은 하녀들 사이에서 점점 쪽지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애플에게 제발 쪽지를 보여 달라고 찾아오는 하녀들도 있을 정도였다.

손바닥만 한 쪽지가 손바닥 두 개만 해지고, 다시 손바닥 네 개만 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네트는 한가했기 때문이다.

방치된 공작가의 둘째 아가씨는 낮에는 하녀들 사이에서 말을 섞었고, 밤에는 글을 썼다.

‘하녀들의 수다’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은 것은 애플이 리네트 덕에 큰돈을 번 후였다.

애플은 리네트가 쓰던 쪽지 중, 한 영지의 수제 레이스가 질이 좋아 영지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싸움이 붙었다는 이야기에 주목했다.

애플은 자신이 모아 온 10년 치 봉급을 그 레이스를 사들이는 데 썼다. 리네트의 적은 용돈도 끌어간 것은 물론이다. 애플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리네트의 쪽지가 돈 후, 모두 레이스를 궁금해했다. 그렇게 하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고, 하녀들은 자신이 모시던 아가씨들에게 그 이야기를 떠들었다.

결국 애플은 자신이 주고 산 값의 10배를 받고 레이스를 되팔았다.

하녀 일을 그만둬도 될 만한 금액이었으나 애플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하녀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대신 애플의 남동생 이름으로 작은 인쇄소를 차렸다. 그리고 그 후부터 ‘하녀들의 수다’는 인쇄소에서 인쇄됐다. 리네트는 애플을 시켜 그것을 하녀들에게 푼돈을 받고 팔았다.

실로 대단한 장사 감각이었다.

고작해야 종이 한쪽이었지만 하녀들 사이에서 ‘하녀들의 수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알음알음 그런 찌라시가 있다는 걸 몇몇 귀족들도 알았지만 입을 닫았다.

리네트의 원칙 때문이다.

1. 모든 인물의 실명을 기재하지 않을 것.

2. 선량한 누군가가 피해 입지 않게 할 것.

3. 어쨌든 재미있고, 웃기게 쓸 것.

‘하녀들의 수다’를 보고 발끈했다가는 자신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유행가에 빗대거나 피식피식할 글을 쓰니 거기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사람이 더 우스워진다.

대외적으로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것도 애플의 남동생이니 누가 발행자인지 새어 나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리네트의 소소한 사업은 3년간 명맥을 이어 왔다.

실은 ‘하녀들의 수다’가 인기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네트에게 백안이 있으니,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대강은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의 수다’는 사실만 다루는 것으로 알음알음 유명해졌다. 과장된 부분은 있으나, 거짓은 없었다.

그렇다.

공작가의 둘째 영애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유구한 능력을 온전히 찌라시 제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멜리아 공작이 알면 뒷골을 잡을 일이었다.

황가는 결정적인 순간의 판단을 항상 카멜리아 공작가에 맡겨 왔다.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던 루카스 황자가 5년 전 돌아왔을 때, 그가 진짜 황자인지 아닌지 또한 카멜리아 공작이 판별했다. 지금 생각하면, 리네트의 각성 덕에 거의 사라져 가는 능력으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활약했던 셈이다.

‘그렇게 귀중하고도 놀라운 능력이 하녀들의 찌라시에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리네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능력 쓰는 거 내 맘이지.’

* * *

리네트는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다. 배럴 남작의 도박장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였다.

당장 별다른 수가 없으니 글로 화풀이나 하는 수밖에.

[규모가 큰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는 귀족 B가 최근 도박장의 판돈에 힘입어 규모를 늘렸다고.

놀랍게도 도박 판돈이 사람이라는 소문.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마법 약까지 밀매하고 있다고 함.

그러나 유수의 귀족들이 얽혀 있어 황실에서도 쉽게 손을 댈 수 없다는데…….]

거기까지 쓰고 리네트는 잠시 멈췄다.

이런 건 재미가 없었다. 하녀들은 치정 사건을 좋아했다.

도박 판돈이 어쩌고, 마법 약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녀들의 수다’에 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리네트는 입을 삐죽였다. 이럴 때는 그 녀석이 필요한데.

똑똑.

때마침 리네트의 방 창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리네트는 반가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바라봤다. 창문 밖에는 뱁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지만, 리네트는 그 새가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젤!”

지젤이라고 불린 새는 놀랍게도 부리를 열어 말했다.

“내가 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지젤을 지젤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해.”

“나 간다?”

“안 돼! 가지 마!”

리네트는 애타게 새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새는 말과는 달리 폴짝 뛰어 리네트의 손가락에 앉았다. 리네트는 제 주먹만큼 자그마한 뱁새를 소중히 감싸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었어?”

“음, 글 쓰고 있었어.”

“또?”

새가 지저귀자 리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 방에서 할 취미 생활이 그거뿐이잖니.”

“참 나.”

새는 쫑쫑 책상을 뛰어 리네트가 쓰던 종이를 들여다봤다.

“뭐야. 배럴 남작 이야기잖아?”

“으응. 알아보겠어?”

“이렇게 질 낮은 이야기는 그 사람뿐이지.”

새가 짐짓 잘난 체하듯 부리를 치켜들었다.

리네트는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으며 새를 쓰다듬었다.

“마탑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 보네?”

“흥, 멍청이들이나 그런 이야기를 주워섬기지. 나는 그저 어쩌다 들었을 뿐이라고.”

새가 으쓱거렸다. 당연하지만 이 작은 갈색 뱁새는 평범한 새가 아니었다.

바로 어릴 적 리네트의 친구, 지즈 엘란이었다.

공작가 하녀의 아들이었던 지젤은 리네트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다락방까지 공중에 둥둥 떠 가다가 마법사의 눈에 띄어 마탑으로 들어갔다.

늙은이들이 대부분인 마탑에는 당연히 지젤의 또래가 없었다.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면 내게 찾아오지.’

그랬다. 마법사들이 사회성이 없는 건 워낙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지젤은 한층 더 심했다.

지젤은 어릴 때 툭하면 마탑을 탈출했고, 지금은 직접 오는 대신 뱁새나 박쥐, 나비 등을 보내거나 때론 변신해 리네트와 대화하곤 했다.

“그렇지만 마법사들은 이런 것엔 관심 없잖아?”

“왜 없어. 배럴 남작의 도박장에 도는 약이 마탑에서 나온 건데.”

“……뭐라고?”

뱁새는 우쭐우쭐 가슴 털을 부풀렸다.

“정확히는 마탑에서 쫓겨난 놈인데, 사랑의 묘약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물건들을 유통시켰나 봐. 이게 도박판에서 엄청난 판돈 대신 거래되기 시작한 거지.”

“실패한 물건이라면…….”

“정력제.”

“……남자들이란.”

리네트가 혀를 차자 뱁새가 말을 이었다.

“말도 마라. 온 수도의 노친네들이 모두 그 도박장으로 몰려들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도박을 했댄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누가 따긴 땄대?”

“제이크 백작.”

“대박.”

리네트가 눈을 찌푸리고 입을 가렸다. 제이크 백작은 나이가 팔십이 넘은 호호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부인과도 진작 사별했을 텐데…… 리네트의 궁금증을 눈치챈 듯 뱁새가 말했다.

“요즘 새로 들어온 어린 하녀들한테 그렇게 지분댄다던데. 너 쓰는 거에 곁들여 쓰면 되겠네.”

“으, 징그러. 얼른 써서 그 집 하녀들 보라고 해야겠다.”

리네트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뱁새가 날개 한쪽을 사람처럼 들어 올렸다.

“어쨌든 그런 얘기 하러 온 건 아니고, 이거 주러 왔어.”

“뭔데?”

“전에 부탁한 거.”

“아!”

리네트가 반색했다.

뱁새가 허공에서 뿅, 하고 만들어 낸 것은 작은 종이 뭉치였다.

정확히는 종이를 묶어 그 위에 노란 가죽 커버를 씌운…… 책 같지만 훨씬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만든 것.

바로 수첩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지젤! 고마워!”

“뭐, 이쯤 가지고.”

리네트는 수첩을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젤은 이렇게 칭찬해 주지 않으면 삐졌다.

“부탁한 대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했어. 상대방의 모습도 담을 수 있긴 하지만, 오래 담지는 못해. 아주 잠깐이야.”

“잠깐이라면 어느 정도?”

지젤이 파닥파닥 날갯짓했다.

“목소리뿐만이라면 차를 한 잔 마실 시간 정도, 모습이라면 차를 두 모금 삼킬 정도. 귀족 기준.”

귀족 기준이라면 차를 벌컥벌컥 마시지 않을 테니, 한담을 천천히 나눌 시간 정도는 될 것이다. 리네트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것만이라도 고맙지! 멋져, 지젤! 너뿐이야!”

“흐, 흥…… 나 정도나 되니까 네 상대를 해 주는 거라고.”

“그럼, 그럼! 나 못돼 처먹었잖아!”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닌데.”

리네트의 너스레에 지젤이 한 걸음 물러섰다.

“됐고, 간다. 나 오늘은 바빠.”

“그럼, 그럼! 바쁘신 마법사님인데!”

“대마법사라고 불러 줄래?”

“그래, 대마법사님!”

뱁새는 리네트의 배웅을 받으며 창문 밖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리네트는 피식 웃고 수첩을 들여다봤다. ‘하녀들의 수다’를 집필하면서 소문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어 주문한 물건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는 매번 기억을 복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지젤에게 제 결혼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는 자신을 자주 찾아오니 곧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너는 뭐 뾰족한 수 없느냐고 물어봐야지.

‘그나저나, 쓰던 소문이나 마저 써 볼까.’

지젤이 가져다준 것은 수첩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하녀들의 수다’는 제이크 백작의 노망난 정력제 타령으로 더 흥미롭게 바뀔 것이다.

‘어우, 할배. 진짜 노망났다.’

리네트는 비웃음을 입가에 띠고 펜을 들었다. 곧 방 안은 사각거리는 펜 소리로 가득 찼다.

[B씨의 도박장에서 요즘 최고의 판돈은 바로 약이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건 그게 여느 때와 같은 약이 아니라, 바로 불법 정력제라고 합니다.

마탑의 한 마법사가 사랑의 묘약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산물인데, 웃기는 건 이 정력제를 따내기 위해 석 달 열흘 동안 피나는 판돈을 퍼부은 주인공이 바로 백발 성성한 모 귀족이라고 합니다.

할배. 서요?]

그 짧은 글이 가져올 결과를 그때의 리네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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