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옛날 옛날에 나넬리아라는 착하고 예쁜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생긴 계모는 가문의 재산과 권력을 아들에게 주려고 나넬을 매일 괴롭혔어요.
그나마 다행히도 나넬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공작가의 첫째 아가씨였습니다. 걸레질을 하지도, 울면서 계모의 드레스를 수선하지도 않았죠.
대신 계모는 나넬의 혼처를 주선했습니다.
‘자고로 보기 싫은 딸 치워 버릴 때는 시집보내는 게 최고’라면서요.
결혼 상대는 내로라하는 권력을 가진 남자였지만 나넬보다 30살이나 많았어요. 열일곱의 나넬은 그것도 모르고 매일 자수만 놓았답니다.
그때, 나넬을 구한 건 그녀의 배다른 여동생이었어요.
계모는 그 동생도 미워했지만, 나넬은 동생에게 맛있는 쿠키도 나눠 주고, 몸이 커서 못 입게 된 드레스도 나눠 주었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동생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어요.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요.
동생은 나넬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했답니다.
“언니! 계모가 언니를 할아버지에게 시집보내려고 해요!”
나넬은 너무 놀라 달아났습니다. 그러다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어요.
한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이웃 나라 왕자님이 나타났어요. 왕자님은 아름다운 나넬에게 반하고 말았답니다. 나넬도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왕자님은 나넬을 백마에 태우고 이웃 나라에 돌아가 나넬과 결혼식을 올렸어요.
나넬은 별처럼 아름다운 왕관을 쓰고 왕자님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넬의 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요. 자기를 미워하는 계모랑 공작가에 남았지.
네, 제 이야기예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카멜리아 공작가의 둘째 딸, 리네트 카멜리아.
하녀의 배에서 나왔지만, 공작이 둘째 딸로 입적시켜 버린 열네 살짜리 소녀.
그게 저예요.
저는 동화책의 주인공이었던 나넬 언니를 시집보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더라고요.
전 망했어요.
* * *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동화책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그건 주인공의 이야기다. 리네트 카멜리아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동백꽃 아가씨’라는 제목의 동화책에서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착한 나넬이 행복해지게 되는 열쇠를 제공하게 되는 조연이었다.
‘동백꽃 아가씨’는 어릴 적 그녀의 책장에 항상 꽂혀 있던 동화책이었다.
흔해 빠진 내용인데 묘하게 리얼해서 기분이 나빴던 그 동화책에 들어온 계기는 그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상황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회사의 노예로 살며 매일매일 상사들 눈치를 보고, 강제로 순발력을 키워야 했던 환경은 그녀가 리네트가 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동화책에 들어오고 1년 동안 여주인공 나넬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확히는 동화책에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동화책에는 반드시 끝이 있으니까.
충실하게 리네트 카멜리아의 역할을 해내 나넬의 해피엔딩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넬은 리네트 덕에 정말로 해피엔딩을 맞았다. 이웃 나라 왕자님을 만나 결혼한 것이다.
리네트는 ‘나넬의 결혼식이 끝나면 나는 책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뿔. 나넬이 해피엔딩을 맞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아주 안이했다
나넬의 결혼식이 끝난 지 일주일.
리네트는 여전히 공작가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현실은 변함없이 거지 같은 방이었다. 공작가에 이런 방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나넬은 행복하게 살 테지만, 리네트의 앞길은 아무도 모른다. 동화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빠른 판단력과 순발력은 이런 곳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는 리네트로 살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공작가의 아가씨로 살아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계모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이 좀 걸리지만, 그 때문에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세상에는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계모에게는 그녀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만은 참 다행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리네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아가씨!”
문을 열고 고개를 쏙 내민 것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사과 같은 뺨을 한 귀여운 하녀 여자아이. 그녀의 이름은 애플이었다.
리네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하게 웃었다.
“애플!”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
리네트가 벌떡 일어나 애플을 맞았다.
“뭐 하고 계셨어요?”
“뭐 하긴. 그냥 숨 쉬어.”
애플이 까르륵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넬이 없는 공작저에서 리네트가 의지할 사람은 이제 애플밖에 남지 않았다. 애플도 그것을 알고 리네트를 살피러 온 것이리라.
애플은 리네트가 막 동화 속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이곳이 어딘지 알려 준 고마운 아이였다. 그리고 동화책에는 쓰여 있지 않았던 리네트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동화 속 리네트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리네트의 어머니는 흔히 하녀들이 그렇듯, 엉덩이가 가벼운 미혼모 취급을 받으며 그녀를 길렀다.
그러다 리네트가 다섯 살이 될 무렵,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카멜리아 공작에게 그녀를 데리고 갔다.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것은 카멜리아 공작가의 고유한 능력이었다.
한 대에 단 한 사람, 직계 혈통에게만 이어지는 능력.
사람들은 그 능력을 ‘백안’이라고 불렀다. 백 개의 눈으로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뜻이었다.
리네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공작은 그녀가 틀림없이 제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은 점차 사라지는 데 반해, 딸인 나넬이 백안을 타고나지 않은 것 같아 답답하게 여기던 공작은 리네트를 곧바로 입적시켰다. 바깥에는 외국의 공녀와 여행지에서 만나 낳은 아이라 둘러대고.
나넬의 어머니가 있을 때는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첫 번째 공작 부인은 그녀를 귀애하지는 않았으나, 나넬과 차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공작 부인이 죽은 후, 리네트가 8세 때 두 번째 공작 부인인 이멜다가 공작가에 들어오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멜다는 그녀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하녀의 배에서 나온 그녀를 수치스러워하다 못해 잊어버리려 애썼다.
다만 리네트가 가진 능력 때문에 그녀를 해코지하지는 못했다.
사생아인 리네트는 채 10세가 되기도 전에 차가운 다락방에서 홀로 지내는 데 익숙해져야 했다.
그녀를 다락방에서, 춥고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저택 한가운데 있는 방으로 옮겨 준 것은 나넬이었다.
리네트가 나넬의 해피엔딩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은, 물론 이 동화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나넬이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하녀였던 리네트의 어머니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죽었겠지. 리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플에게 여상히 물었다.
“얘.”
“예?”
“나 앞으로 뭐 하고 살아야 되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뭐, 마사지 받고 손톱 손질 좀 하고, 자수 좀 놓다가 춤도 좀 추면 되겠죠.”
애플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나넬은 그렇게 살았던가? 리네트가 찌푸린 이마를 짚어 보다가 말했다.
“그다음엔?”
“예?”
“그다음엔 뭐 하냐고. 평생 춤추고 마사지 받고 살 건 아니잖아.”
“그야 시집가야죠.”
“……시집?”
“네에. 나넬 아가씨처럼요. 상대가 멋진 이웃 나라 왕자님이면 참 좋겠죠?”
애플이 춤을 추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나넬 아가씨처럼 시골구석 왕자님을 고르진 말고.”
리네트는 피식 웃었다. 애플의 말도 맞았다.
나넬은 왕자님과 행복한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왕자님은 부유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으슥한 숲을 혼자 지나가는 왕자님이 대단한 사람일 리 없지 않은가.
그는 리시스트 제국의 속국인 작은 나라의 왕자님이었다. 그 나라는 어찌나 작은지 카멜리아 공작가의 영지보다 더 작았다.
그럼에도 나넬은 도망쳤다. 카멜리아 공작가에서.
결혼할 상대가 계모가 안배한 노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았을 것이다.
왕자님은 앞으로 평생 나넬을 공주처럼 모시고 살 것이다. 그 리시스트 제국의 명가, 카멜리아 공작가의 첫째 따님이기 때문에. 적어도 나넬은 정말 최고의 엔딩을 맞은 셈이다.
흠.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최고의 엔딩일 수도 있겠네.
리네트는 침대에 모로 누워 생각했다.
나넬의 해피엔딩은 리네트가 동화책을 나가게 해 주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어쨌든 리네트가 엔딩을 맞아야 이 책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만약에 좋은 남자를 골라 시집을 갔는데 엔딩이 안 나면 어떻게 해?
‘나넬은 그 조그만 나라의 왕자님도 왕자라고 엔딩을 봤지만, 나는? 왕자하고 결혼했는데 여전히 이 책 속에서 내 인생이 ING라면?’
그녀는 가능성을 셈하는 데 능숙했다. 보장이 없는 가능성은 허수라고 여겼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막살지, 뭐.”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