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35) (190/190)

***

“여보?”

아네사 르페브르는 떨리는 손으로 레너드 르페브르의 소매를 붙잡았다.

“누, 눈이 왜 그래요?”

레너드 르페브르는 아까부터 묘하게 간지럽게 느껴지던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게 무슨….”

손등 위로 붉은색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 채 닦지 못한 핏물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엇보다 피가 흐르는 붉은색 눈동자가 점점 선명함을 잃어갔다. 확연히 빛을 잃고 흐려지는 눈동자는 얼마쯤 더 있으면 짙은 검은색으로 뒤덮일 것만 같았다.

마치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아네사가 비명처럼 외쳤다.

“어서 주치의를 불러오렴!”

“예, 마님!”

현재 왕도를 포함한 거대한 라자크 왕국 전체가 뒤집어진 상태였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 역시, 오파츠의 영상을 통해 확인한 국왕의 진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와중에 왕성에 대규모의 괴수들이 출몰했으며 군부가 장악 후 처리 중이었으나 상황이 낙관적이지 못했다.

귀족 중에서는 이미 왕도를 떠나 르페브르 영지로 대피하는 이들도 많았다.

귀족들의 동향에 민감한 이하 계급의 이들도 서둘러 짐을 꾸려 떠나느라 라자크 왕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레너드 르페브르는 희미한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피가 주르륵 흐르는 쪽의 시력이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금세라도 완전히 멀어 버릴 것처럼.

“도대체 갑자기 왜 피가….”

***

“…이상해. 눈이 점점 안 보여.”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얼음처럼 굳어 있던 라파엘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일단 앉으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빈혈 증세라도 오면 큰일이니….”

“저런.”

라파엘의 목소리가 싹둑 잘렸다. 동시에 나는 오한이 들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르페브르여.”

“……!”

숨이 턱 막혔다. 파놉테스가 목만 길게 뻗어 내 바로 위에서 시선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내 머리를 스쳐 간 건, 파에톤의 모습이 기괴하게 변형된 괴수와 똑같다는 생각이었다.

오파츠가 안정적으로 보급되기 전, 한 마리의 괴수를 처리하기 위해 군부 기사 열 명이 달라붙어야 했던 암흑기에 종종 보던 종잡을 수 없는 악몽 같은 모습.

검은색 안개 같은 손가락이 내 뺨을 훑었다. 접촉은 하지 못했으나 그만으로도 혹한의 냉기에 뺨이 쓸린 듯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른다.”

파에톤이 속삭이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드디어 이코르를 채울 만큼 채워 흘려내는구나.”

“이코르?”

파에톤의 말을 들은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코르는 성검으로 괴수들을 베어내면 얼마간 수급할 수 있는 성검의 주요 재료 중 하나였다.

“내 눈에서 이코르가 왜 흐른다는 거야?”

“글쎄. 르페브르여. 나는 네게 가능한 한 다정하게 설명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상태가 좋지 못해서. 간단히만 설명해 주자면….”

파에톤이 환하게 웃었다.

“그마저도 내 계획의 일부였단 소리지. 수많은 기사들이 멍청하고 호기롭게 괴수들을 해치웠지만 결국은 내가 르페브르를 삼키기 위한 전초 단계였을 뿐이다.”

“…….”

“르페브르여. 너는 네 이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아느냐?”

파에톤이 킥킥 웃었다.

“괜찮다. 가진 이들은 본래 화원의 나비처럼 그토록 게으른 법이니.”

“…….”

“네 이능은 전부 네 두 눈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그 눈을 빼앗고 싶어서 이코르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이 영혼을 다하여….”

순간 파에톤의 환영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부채를 세차게 부쳐 한순간 안개를 가른 듯 허공에서 잠시 흩어졌던 파에톤의 환영이 금세 원형을 되찾았다.

파에톤은 자신에게 성검을 휘두른 힐드온 케트펠을 보며 희번득 웃었다.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 아들아. 아비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니 제 아버지도 아닙니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도 네 아비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

“그래. 전후 관계는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 아비가 사람이 아니면 괴물의 자식인 너 역시 사람이 아니란 소리지.”

파에톤은 다시 내 눈가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드디어 르페브르여. 네 두 눈에 담긴 것을 전부 갖게 되는구나. 참으로 길었다.”

쾅!

귀를 찢는 굉음이 아프게 머리를 울렸다. 파에톤이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허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순간 괴수들이 요동을 쳤다. 단단했던 벽 역시 조금은 틈이 생겼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굳어 있는 라파엘과 힐드온, 그리고 엔리코르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방금 전 파에톤의 모습은 그 누구에게라도 충격이겠지. 나 역시 아까 전 알게 된 과거의 기억이 아니었으면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건 파놉테스 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란데아 아가씨.”

내내 버려진 촛대처럼 조용하던 파놉테스 신관이 입을 열었다.

“괴수들을 뚫겠습니다. 길을 확보해 주십시오.”

“내가?”

무섭거나 도망치고 싶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철저히 효율을 따져서 나온 질문이었다.

여기엔 뛰어나고 건장한 기사들이 넘치는 곳인데, 굳이 내게 길을 만들어 달라는 파놉테스 신관의 부탁이 바로 이해가 가진 않았으니까.

“예.”

파놉테스가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아가씨가요.”

“그래, 알았어.”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되물으니까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아….”

파놉테스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제야 그가 조금이나마 사람 같았다. 이미 그는 사람이 아니겠지만.

“감사합니다. 블란데아 아가씨.”

“감사하다니, 뭐가?”

파놉테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그는 내 눈을 한 번 가볍게 손끝으로 훑었을 뿐이었다.

“아가씨. 파에톤은 르페브르의 모든 걸 갖기 위해 흑마법으로 지나친 술수를 부렸습니다.”

“…….”

“그 긴 시간 동안 저 금빛 석상에 이코르를 차곡차곡 채워 당신의 몸과 동기화를 시켰지요.”

“그건 너무 변태 같고 끔찍한데?”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럼 네펠레 영지에 있던 그 원기둥 모형… 드리스가 사실은 이 금빛 석상이었나?’

드리스는 이름부터가 ‘나무’를 뜻했다. 그런 드리스를 나와 치환했다니. 파에톤은 나를 나무로 보기라도 하는 걸까?

“블란데아 아가씨. 저기, 슐츠 경이 보이시지요?”

괴수들의 머리들이 하나씩 날아간 곳을 가리키며 파놉테스가 물었다.

“슐츠 경이 들고 있는 것이 제가 이전에 아가씨에게 부탁한 적이 있는 ‘오파츠’입니다.”

“아. 응.”

슐로이츠는 한쪽 손에는 성검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타조알만 한 것을 들고 있었다.

“저걸 슐츠 경이 직접 꽂으셔야 합니다.”

“꽂는다니 어디에?”

“저 오파츠의 색깔은 붉은색입니다. 블란데아 아가씨.”

“……?”

나는 아직도 파놉테스의 뜬구름 잡는 듯한 화법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래서 어디에 꽂는 건데?”

“이곳에 당당하게 비어 있는 곳이 있잖습니까?”

파놉테스는 턱짓으로 내 뒤를 가리켰고, 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나를 꼭 닮은 금빛 석상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한쪽 눈이 이상했다.

그때에는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지금은 아예 한쪽 눈구멍이 텅 비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엔리코르가.

‘어쩌면 아버지도….’

르페브르의 이능을 타고난 모두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쪽 눈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소리다.

“그럼 제가 가서 총사령관님을 돕겠습니다. 석상 위로 올라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

“아닙니다.”

이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라파엘이 입을 열었으나 파놉테스가 단칼에 잘랐다.

“저건 반드시 슐츠 경이 꽂아야 합니다.”

“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반문이었다.

파놉테스 신관은 미소를 지었다. 민들레 홀씨 같은 연약한 미소였다. 바람결에 곧 사라질 듯한 안개를 마주한 것처럼 괜히 눈이 시렸다.

“조금 있으면 아시게 될 겁니다.”

“……?”

“그저 블란데아 아가씨. 당신은 오래전부터 슐츠 경에게 정말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

“슐츠 경. 반드시 직접 금빛 석상의 눈에 그 오파츠를 꽂아 넣으셔야 합니다. 누구도 그 임무를 대신 하면 안 됩니다.”

슐로이츠는 여기까지 들어오기 전, 파놉테스 신관이 귀에서 피가 나게 했던 말을 복기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저렇게 의뭉스러운 놈한테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똑바로 대답을 돌려줄 리도 없다.

그저 속 터지는 현학적인 말로 사람의 속이나 긁어 놓겠지.

그런 사소한 잡담에 빼앗길 시간도 없었다.

슐로이츠는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수천 번은 확인했던 블란데아의 안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는 파놉테스 신관과 무슨 대화를 나누더니 돌연 괴수들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약간의 전조도 예고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얼마나 서늘하게 내려앉았는지, 슐로이츠는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미쳤냐고. 왜 그 위험한 곳에 뛰어 들어가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라파엘 저 새끼는 멍청하게 뭘 보고만 서 있느냐고.

“블란데아 르페브르!”

이미 슐로이츠는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달려드는 괴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블란데아만이 시야 가득히 담겨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블란데아!”

달려오는 슐로이츠를 본 블란데아가 멈칫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연약하게 허물어졌는지. 슐로이츠는 도대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늘 이런 식이다. 항상 이런 식으로 제 숨통을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아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종종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하고….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달려가는 걸 보았다. 급격하게 좁혀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 탓인지, 꼭 바로 앞에서 그녀를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시장통에서 엄마를 놓쳐 버린 아이처럼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었다고 말하면.

너는 웃을까?

슐로이츠는 몰려드는 괴수들을 정신없이 베어 냈다. 그 와중에도 블란데아가 밟고 지나간 길이 일종의 불가침 구역으로 괴수들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괴수들은 무언가 얇고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슐로이츠의 앞까지 다가오진 못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뚫고 들어왔는지 머리로 인지가 되지 않았다.

슐로이츠는 간신히, 그래. 간신히 블란데아를 붙잡을 수 있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돌려세운다. 와중에도 무섭기는 했던 모양인지 숨을 헐떡이는 블란데아의 뺨이 상기되어 있다.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둘은 서로를 아득히 바라보기만 했다. 꿈속에서 살아 돌아온 망자를 만난 것처럼.

먼저 참지 못한 건 이번에도 슐로이츠였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블란데아.”

미친 듯이 고동치는 그녀의 맥박이 자신의 것 같다. 블란데아가 제 품 안에서 숨을 쉬는 걸 머리로 인지하고서야 제가 죽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숨을 통해서야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니 그 한심함이 한순간 우습게 느껴졌으나 찰나였다.

사실은 그 한심한 기분마저도 숨이 멎을 듯 기꺼웠기에.

“너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지.”

블란데아는 웃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뭐가, 또.”

“…….”

“블란데아.”

“내가….”

“…….”

“내가 널 괴롭게 했잖아.”

“날 괴롭게 했다고?”

“응.”

그녀의 목소리가 물기로 잠겼다.

“널 외롭게 만들었잖아.”

슐로이츠는 물끄러미 블란데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멋대로 널 보낸 거야.”

“…….”

“사실 넌 지금 나한테 화를 내도 모자라다고, 블란데아 르페브르.”

“화를 내도 돼?”

“물론. 하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

“나중에? 왜?”

“네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거울이라도 비춰 주고 싶군. 여기서 기절을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

블란데아가 픽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으나 울 것 같은 얼굴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한쪽 눈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손으로 닦아 냈다. 언제나 루비처럼 선명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국왕이 네게 가지가지 하는군.”

“…그러게.”

블란데아가 약하게 이마를 찌푸리자 아름다운 눈동자 위로 피가 조금 더 넘쳐흘렀다. 슐로이츠의 목 안이 까끌거렸다. 고작 이게 뭐라고, 끝나지 않는 악몽을 산 채로 꾸는 기분이 드는지.

참담한 마음과는 달리 표정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건 슐로이츠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이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

“석상 쪽으로 가야 한대.”

“그래. 네가 앞서야 하나?”

블란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강하게 꽉 껴안은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블란데아는 정말이지 살아 있는 오파츠로 보였다. 현 군부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은 오파츠였으니, 슐로이츠에게는 그녀가 어떻게 보였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 끔찍한 공간을 일부나마 정화하는 것 같았다.

석상 앞으로 그저 달려가는 것에 바빠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그 금빛 머리카락의 여자.

이상하리만치 목 아래가 울렁거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그리울 수 있다는 사실이 슐로이츠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도하는 자세로 굳어 있는 금빛 석상 위를 훌쩍 오르면서도, 슐로이츠는 묘한 괴로움을 떨쳐 내지 못해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슐로이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블란데아와 지나치게 닮은 금빛 석상. 텅 빈 눈구멍 앞에 중심을 잡고 선 그는 여기까지 들고 오는 내내 천에 감겨 있던 오파츠를 꺼냈다.

이 오파츠는 꼭 세팅되지 않은 최고급 루비를 크게 확대한 것 같았다. 장인들이 공들여 커팅한 듯, 다각도로 빛을 난사하는 오파츠는 블란데아의 눈동자처럼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사실 슐로이츠는 붉은 보석만 보면 블란데아의 눈을 떠올리니 객관적이진 않은 표현이었다.

쿵!

언뜻 가늠하기에는 크기가 잘 맞지 않을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도 붉은 오파츠는 텅 빈 눈구멍에 빨려 들어가듯 안착했다.

슐로이츠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 상태로 시선을 내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블란데아의 얼굴부터 확인한다.

쉬지 않고 흘러내리던 피눈물이 천천히 멎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슐로이츠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가볍게 뛰어 내려가려던 찰나, 슐로이츠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슐츠?”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식간이었다. 슐로이츠의 두 눈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흐른 것은. 심지어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 낼 때마다 선혈이 가득했다.

“라파엘? 군의관은?”

“바로 호출하겠습니다.”

서둘러 슐로이츠 쪽으로 달려가려던 나는 문득 강한 힘에 붙잡혔다.

“파놉테스? 왜 그래?”

“블란데아 아가씨.”

파놉테스는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젠 그에게 가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슐로이츠가 오파츠를 금빛 석상의 눈에 안착시킨 것과 거의 동시에 어둡던 시야가 환해졌다.

그래서 더욱 똑똑히 보였다.

당장이라도 슐로이츠에게 달려가야 하는데, 파놉테스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강압적인 힘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안 놔?”

내가 파놉테스를 걷어차려고 하던 찰나.

“블란데아 아가씨.”

파놉테스는 처음 듣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가 정한 겁니다.”

“정했다니? 언제?”

“과거입니다. 슐츠 경이 아가씨를 막 다른 세계로 보냈을 때.”

“…….”

“블란데아 아가씨. 그가 당신을 위해 어디까지 내던질 수 있는 남자인지 이미 아시잖습니까?”

파놉테스의 말이 송곳처럼 박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시야를 차단했다.

“프로키온! 빌어먹을 프로키온! 프로키온! 슐로이츠 프로키온! 아악!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놈 같으니라고!”

파에톤의 괴성이 왕성을 가득 울렸다.

블란데아를 억지로 떠나보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1년이 흘러갔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고작 하루가 지났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슐로이츠에게는 시간을 세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파에톤이 흑마법으로 오염시킨 세계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 르페브르가 가진 정화의 힘을 좀먹으며 간신히 숨을 이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르페브르는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하여 문제였다. 그 고결한 힘에 어울리는, 멍청하고 눈물겹도록 이타적인 그녀의 본성이 슐로이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하면서 떠났지?”

정령처럼 조용히 다가오던 파놉테스 신관이 멈춰 섰다. 파놉테스 신관이 선 자리에 앨리스 꽃들이 몇 송이씩 소담스레 피어났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철저히 르페브르의 이능으로 인해 태어난 존재니까요.”

“그래. 늘 그따위로 지껄였지. 네 마음대로 해.”

슐로이츠는 지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하나만 대답해.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던가?”

파놉테스는 대답이 없었지만 슐로이츠는 충분히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란데아는 끝끝내 이랬다. 자신이 지극히도 사랑한 르페브르다웠다.

그녀가 떠났으니 세계는 가파른 속도로 썩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면 물기를 탐하는 메마른 정글처럼 게걸스럽게 정화의 이능을 흡수하려 들겠지.

아마 저 새끼가 제일 먼저 핥고 탐할 것이고. 무슨 술수를 써도 반드시 쓰겠지.

슐로이츠는 검은 안개로 꽁꽁 휩싸인 왕성을 보며 욕설을 짓씹었다.

블란데아가 그 몸으로 잘도 버티겠다 싶었다.

슐로이츠는 성검으로 손바닥을 죽 그어 피를 냈다.

“슐츠 경은 항상 아가씨의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하시는군요.”

“애초에 이건 블란데아의 짐이 아니야. 멋대로 정화의 이능을 갈구하는 새끼들 때문인 거잖아.”

“당신도 아가씨를 갈구했잖습니까?”

“너희는 항상 이딴 식으로 날 병신 새끼로 취급하더군. 아주 거리낌도 없어.”

르페브르의 이능에서 기원한 앨리스 꽃의 정령답게 파놉테스는 송구해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사람이 아니니 상관없긴 했지만.

슐로이츠는 금사 기둥의 끝에 이슬처럼 피어난 블란데아의 이능을 한 움큼 그러쥐었다.

“그렇게 몇천 번, 몇만 번을 모을 작정입니까?”

슐로이츠가 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외엔 달리 방법이 없잖아.”

정화의 이능은 아침 햇살 아래 사라지는 이슬과도 같았다.

그 연약한 물기를 붙잡아 놓기 위해 슐로이츠는 회귀할 때마다 생명력을 조금씩 깎아 냈다. 그의 피를 응고제로 블란데아의 이능을 조금씩 뭉쳤다.

그는 그만큼 자주 죽었다는 소리와 같았다.

“오파츠군요.”

파놉테스는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커다란 보석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시대에 다시 없을 성물.

누군가의 목숨과 누군가의 염원과 누군가의 그리움을 끝도 없이 삼킨 보석.

슐로이츠는 마지막 핏방울을 삼키는 새빨간 오파츠를 보며 처음 블란데아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가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되었을 때였다.

어둡고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혀 있던 슐로이츠는 온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발이 단단한 밧줄로 묶여 있어서 빠져나갈 길은 요원했다.

옆에는 바로 오늘 아침, 결국 죽어 버린 어린 시체들이 눈도 감지 못하고 슐로이츠의 정신을 좀먹었다.

아직 앳된 입술로 욕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까….

끼익.

머리에서부터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안녕?”

빛 한 줌 없던 지옥에 선명하게 들이차는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았다.

“널 구하러 왔어.”

소녀는 거리낌 없이 제게 손을 뻗는다. 말라붙은 피와 체액으로 가득할 더러운 뺨인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슐로이츠가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귀함이었다.

다른 기사들에게 구조되면서도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흘긋흘긋 훔쳐보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이렇게 어린 기사들이 꼭 필요한가요?”

“하, 하지만 르페브르 아가씨. 흑마법사들의 경계를 풀려면 저렇게 어린 기사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살아 있는 미끼로 썼다고요?”

“아이고, 미끼라니요!”

“고문도 당했는데요?”

“아이고, 아가씨. 전부 부모들이 직접 내준 아이들로만 구성한 기사단이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악!”

비굴할 정도로 손을 싹싹 비비던 단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슐로이츠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단장의 무릎을 걷어차는 소녀는 태어나 처음 봤다.

“이거 아주 제정신이 아니네.”

“르, 르페브르 아가씨! 죄송합니다! 아가씨!”

***

“슐츠!”

조금 더 자란 후에도 블란데아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눈이 부셨다.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을 껴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솔직히,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슴이 빠듯하게 아팠다.

“괜찮아? 괴수들이 많았잖아.”

“잡을 만했어.”

“마기는 어땠는데?”

“괜찮았어.”

블란데아는 슐로이츠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르페브르이니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슐로이츠의 온몸에 가득한 마기를. 성한 곳이 없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이제 익숙했다.

“슐츠.”

블란데아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넌 너에게 너무 잔인해.”

“…네게만 잔인하지 않으면 상관없잖아.”

“정말 괜찮아?”

슐로이츠는 온 진심을 걸고 대답한다.

“너만 있으면.”

***

그래서 네가 없으면 괜찮지 않았다.

사실은 매번 제 앞에서 죽어 가는 그 모습을 볼 때부터 괜찮지 않았다.

세계를 정화할 사명을 타고 태어난 덕에 르페브르는 종종 신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런 여자가 오직 그에게만은 눈 없는 신이었다.

감히 나만은 굽어살피지 못하는.

슐로이츠는 마지막 금사 기둥을 꽂으며 달라질 세계를 조금 그려 보았다.

다른 세계에서의 블란데아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달라져도 좋으니 살아만 있길 바라는데.

슐로이츠는 눈을 감았다 떴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를 소실한 후, 별 하나 뜨지 않게 된 지 오래인 밤하늘에 문득.

기이하게도 금빛 별들이 궤적을 그린다.

한참을 멍하니 보고서야 깨닫는다. 무수한 금빛 머리카락들이 수백만 가닥의 실금을 그으며 깊고 어두운 환영을 깨부수고 있었다.

단단한 알껍데기가 깨지듯 순식간에 모든 공간이 부서져 내렸다.

***

파놉테스는 블란데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슐로이츠의 오파츠를 깨서 던져 버렸다.

정말 과격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던 빈 눈구멍은 이미 다른 것으로 막혔다.

블란데아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흔들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블란데아가 금빛 석상의 눈구멍에 쑤셔 넣은 것은 다름 아닌 본인의 머리카락이었다. 싹둑 자른 머리카락의 양 끝을 붉은색 모이라 반지들에 묶은 후 눈구멍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끝도 없이 불어나는 금빛 머리카락은 텅 빈 공간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계속해서 늘어났다. 아예 금빛 석상을 둘러 삼킬 만큼.

“그렇게 하시는군요, 블란데아 아가씨.”

파놉테스는 이내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언제나 가장 완벽한 선택을 하는 분입니다.”

블란데아로 인해 완전히 부서진 오파츠가 피처럼 흘러내려 슐로이츠의 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야, 엔리코르.”

헥토르는 점점 무너져 내리는 금빛 석상 아래서 뺨을 긁적였다.

“나 저 반지의 이름을 ‘모이라’라고 지었잖아.”

“그랬지.”

“사실 그냥 지은 건데….”

“알아. 너 그냥 책 뒤지다가 좋아 보이는 이름 있으면 냅다 가져다 붙이잖아.”

“그 이름의 뜻이 ‘운명’이거든?”

헥토르는 쉴 새 없이 불어나는 금빛 머리카락에 잡아먹혀 보이지도 않는 모이라 반지를 눈가로 더듬어 보다가 말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 붙였다는 생각이 들어. 왜지?”

엔리코르도 블란데아에게 다짜고짜 모이라 반지를 빼앗긴 덕에 평소와는 달리 머리카락이 짧았다.

그는 어쩐지 휑하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손으로 주무르다가 깜짝 놀랐다.

“라파엘 경! 저기, 저 자식이!”

“저 미친 새끼가!”

괴수들을 해치우느라 여념이 없던 라파엘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미 힘을 잃고 흐느적대던 파에톤이 슐로이츠에게 날쌔게 날아간 것이다.

파에톤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거대한 안개 뱀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흐느끼며 슐로이츠를 홱 낚아챘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네가 감히! 아아, 나는 그저 르페브르 같은 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쉴 새 없이 웃고 흐느끼는 파에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쿵! 슐로이츠를 칭칭 싸매듯 껴안은 파에톤이 그대로 벽에 몸을 처박는다.

“각하!”

“슐로이츠 공!”

파에톤은 본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힐드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공주님이 내 아들을 몹시 아낀다지. 어때, 슐로이츠. 이 얼굴을 죽이면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몹시 슬퍼하지 않겠나? 나를 해치지 말고 그녀에게 지극히 사랑받는 채로 함께 죽자. 그게 너희가 떠드는 사랑이잖….”

뱀처럼 쉭쉭대던 목소리가 우뚝 멎었다.

“…….”

파에톤이 동공만 소리 없이 움직여 제 등을 보았다.

블란데아가 깨뜨린 오파츠의 일부가 파에톤의 목덜미에 꽂혀 있었다.

슐로이츠가 몇만 번을 죽어 가며 그러모아 놓았던 정화의 이능이 파에톤의 몸에 직격타로 흘러 들어간다.

“네가 그 새끼 얼굴을 하고 있으니 해치지 말라고?”

“…….”

“잘도 그러겠군. 난 그녀 곁을 맴도는 모든 새끼들이 좆같은데.”

“안 돼….”

파에톤이 흐느적거리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목덜미에서 붉은색 오파츠를 끄집어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붉은색 오파츠의 파편을 껴안고 파에톤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한순간이었다.

구멍 난 천장으로 여명의 햇볕이 흘러 들어왔다. 빛을 받은 붉은 오파츠가 잠시간 크고 눈부시게 번쩍였다.

태양을 껴안고 추락하는 모습으로, 이내 파에톤은 지상에 세게 부딪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소멸했다.

***

“괴수가 더 이상 증식하지 않습니다!”

“전군 괴수 사살에 총력을 기울여라!”

“괴물이나 마찬가지인 파에톤 2세가 죽었다!”

“와아아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더 이상 눈동자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다. 시야가 흐리지도 않았다.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던 금빛 석상은 형체를 잃었다. 그저 거대한 순금 덩어리일 뿐. 나는 빛나는 석상을 망연히 바라보기다가 툭 던졌다.

“이 거대한 금덩어리는 누구의 소유가 되는 걸까?”

“국법에 따르자면 왕실에게 귀속되는데 지금은 아시다시피 왕족이….”

“그럼 역시 내 건가?”

라파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반박을 못 하겠네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사실 이 시간부로 왕국 전체가 전부 사령관님의 것일 것 같습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어색했다. 문득 휑한 목덜미에 체온이 닿아 온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끌어안긴다.

“블란데아.”

그 짧은 호명에 가슴이 미어져 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 서서 금덩어리의 소유권이나 재고 있었나?”

“…너한테 너무 많은 군의관과 기사들이 달려갔는데 나까지 가면 그렇잖아.”

“그냥 금이 탐이 난 게 아니고?”

난 헛기침을 했다. 슐로이츠가 피식 웃었다.

“아프지 않아?”

“네 말대로 군의관들이 하도 달라붙어 멀쩡해.”

“통증이 바로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기다리면 나아.”

“슐츠.”

“음?”

나는 몸을 돌려 슐로이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푸른빛 눈동자는 종종 장마처럼 느껴진다. 빗방울처럼 마음에 깊게 스미고 만다.

너는 나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 걸까.

그에게 쏟아 내고 싶은 질문은 많은데 어떤 질문도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슐로이츠의 목을 끌어안았다.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왕성이 이따위가 돼서 난감하군. 왕도 전체가 한동안 엉망일 텐데.”

와중에 결혼식을 고민하는 슐로이츠가 한순간 몹시도 귀엽게 느껴져 나는 스스로 당황했다. 껴안고 있는 그의 몸은 이렇게 크고 단단한데 대체 왜지?

헛기침을 삼킨 나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왕도가 아니라 다른 데서 하면 되잖아.”

“마음에 둔 데가 있나?”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아.”

나는 살며시 웃었다.

“르페브르 성.”

아주 먼 과거에도, 슐로이츠는 나를 보기 위해 르페브르 성으로 오곤 했다.

내가 블란데아로 다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곳도 르페브르 성이었지.

앨리스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앨리스 꽃….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놉테스가 이미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파놉테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헥토르가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계속 캐묻고 있었는데 그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몇몇 질문엔 곤란한 듯 입을 다물긴 했지만.

문득 턱이 붙잡혀 앞쪽으로 고정된다. 슐로이츠는 그 짧은 사이 심기가 단단히 상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너는 나 말고 다른 걸 온종일 보는 습관을 좀 고쳐야 해. 블란데아.”

“온종일? 아니, 잠깐 본 건데 무슨 과장을 또 그렇게….”

“내게 할 말 있지 않나?”

“무슨 말?”

“사랑해.”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한 박자 늦게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똑같이 따라 해 봐.”

“…….”

“블란데아.”

“…….”

“블란? 대답해야지.”

나는 잠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 착각에 빠진 채 나는 슐로이츠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슐츠.”

똑같은 말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준다. 아마 그게 내 용기의 크기였을 것이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슐로이츠가 불만족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몸이 홱 끌어안긴다. 맞닿은 가슴으로 슐로이츠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는 게 느껴져 괜히 기쁘고 부끄러웠다.

“결혼해 줘. 블란데아.”

이미 모든 결혼식 일정이 잡혀 있는데도, 그래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슐로이츠는 내게 청혼했다.

심장이 꽉 죄었다. 목이 메었다.

잠시, 싫다고 대답하면 슐로이츠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아, 슐츠.”

나는 그를 구할 수 있는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동이 틀 무렵,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태양은 닿는 곳마다 남김없이 비춘다. 밤의 찬 공기를 밀어내고 식은 몸을 데워 주는 따뜻한 온기.

나는 슐로이츠를 조금 더 껴안고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에게도 이 기꺼운 평화를 전해 주고 싶었다.

“슐츠.”

“음?”

“사랑하는 너를 내가 제대로 구한 걸까? 너무 늦지 않았어?”

슐로이츠가 잠시간 굳었다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조금도 늦지 않았어. 블란데아.”

아름답게 물든 따뜻한 햇볕에도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슐로이츠와 함께 있는 시간도, 공간도. 어쩌면 순간순간까지.

모든 것이 그토록 눈부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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