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31) (186/190)

“…….”

“응? 블란데아 르페브르.”

‘진짜 미친 소리를….’

“르페브르는 그 긴 역사 동안 괴수의 멸절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는 국왕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르페브르는 한낱 괴수가 없어도 충분한 영화를 누렸을 가문입니다.”

국왕이 크게 웃었다.

“그래. 알다마다. 네 고고함에 대해 이 내가 설마 모르겠느냐? 그 고고함을 꺾기 위해 몇천 번이나….”

“…….”

말을 잇던 국왕이 고개를 푹 꺾고 킥킥 웃었다.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어서 오히려 의문이 스칠 정도였다.

“이 얘긴 조금 후에 해도 되겠군. 어차피 다 알게 될 얘기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국왕이 나른하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블란데아 르페브르.”

“…….”

“르페브르를 위해 이토록 애를 쓴 군주를 위해 네 아름다운 몸뚱이 정도는 헌납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딴 개소리는 듣지도 마십시오. 아가씨.”

발록 경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물론 나 역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국왕은 내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꼭 바로 옆에 있는 나를 어루만지려는 듯 손을 허공에서 느리게 움직였으니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주 탐욕스럽게 느껴졌다.

국왕은 나를 성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꼭 오래 염원했던 희귀한 수집품을 어루만지려는 광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단검을 한 자루 주워 들었다. 흑마법사의 것인지 날이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그대로 국왕을 향해 힘껏 던졌다. 물론 맞히지는 못했다. 그런 기대도, 그럴 의도도 없었다.

국왕의 발치 아래 구르는 단검. 국왕이 큭큭 웃었다.

“귀족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뜻이군. 그래, 르페브르는 반역을 꾀하겠다는 뜻인가?”

동시에 국왕이 발에 걸리적거리는 시체들을 방석 치우듯 아무렇지 않게 걷어찼다.

말이 시체지, 그중 3분의 1은 아직도 경련하듯 떨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같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너스 같았다. 입에 오파츠를 밀어 넣으니 바들바들 떨며 핏물 같은 액체를 토하던 모습.

그리고 딱딱하게 끊기는 말투 탓인지….

‘페니도 생각나.’

불편한 표정이 자연스레 드러난 모양이었다.

“저런. 그리 슬퍼하지 말거라, 블란데아 르페브르.”

국왕의 목소리에는 짙은 조롱이 묻어나고 있었다.

“비록 르페브르가 동쪽을 수호하는 바람에 서부가 오염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

“그래서 그들을 괴수로 만들었지만, 상관없는 일이지.”

말을 이으며 국왕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발록 경이 곧장 검을 고쳐 잡았다. 국왕의 눈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쾌하게도, 거울 속의 내가 순간 생각날 정도로 르페브르의 눈동자와 닮은 붉은색이었다.

파에톤 2세는 마치 유령처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발록 경을 쓰러뜨렸다.

일전에 유적지에서 전투했던 경험 덕분에 바로 알 수 있었다.

흑마법이었다.

그간 보고 들었던 흑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흑마법. 국왕의 힘과 행동은 이미 내 상식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새 내 앞에 온 파에톤 2세가 내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어차피 남은 것들도 전부 숨이 끊어져 오직 이 나를 위한 거름이 될 테니 말이다.”

국왕은 즐거운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만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항시 입이 찢어져라 웃는 괴수가 생각났다.

***

“저게, 저게 도대체 무슨 괴이한 말씀이신지… 아아….”

“왕비님!”

“왕비님이 혼절하셨다!”

“궁의를 불러오시오!”

오파츠를 공물로 진상 받은 건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핀 왕비는 징그러울 정도로 잔인한 미소를 띠는 국왕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기절했다.

“비켜 주십시오! 궁의를 불러 달라니까 무얼 하고 계십니까?”

왕비의 시녀장이 소리를 쳤으나 귀족들은 차가움과 두려움, 경멸이 혼재된 눈으로 비켜 주질 않았다.

마치 역겨운 괴물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시녀장은 짙은 초조함을 느꼈다.

당장 국왕의 시종장에게 연락을 넣었으나 곧이어 들려온 소식은 더욱 충격이었다.

“힐드온 케트펠, 그 사생아를 데리고 사라졌다고요? 어째서죠?”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지금 왕성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파악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힐드온 케트펠 공자는 서궁 감옥에 갇혀 있었던지라 접근이 더 어려웠고요.”

“하!”

시녀장이 기가 막혀 물었다.

“1왕자님은요? 왕비님도 지금 쓰러지신 마당에…!”

“그게….”

왕비의 기사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로티스 왕자님도 방금 전 실종되셨다는 비밀 급보가 왔습니다.”

***

“영상이 꺼졌습니다!”

라파엘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국왕, 파에톤 2세가 블란데아의 손목을 낚아채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과 동시에, 그녀의 품 아래서 빛나는 오파츠를 깨부순 것이다.

“밖에서 재미있는 술수를 부렸군. 그래, 르페브르에겐 뛰어난 부하들이 많지. 너를 섬기는 게 어디 그 기사 하나뿐이었겠느냐?”

파에톤 2세는 이미 평범한 군주가 아니라 완연한 흑마법사로 보였다.

그 증거로 오파츠의 영상이 꺼지기 직전, 파에톤 2세는 블란데아 르페브르를 데리고 한순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제기랄! 대체 어디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의심되는 장소만 해도 오십 군데가 넘었다. 그때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왕성 서궁 지하입니다!”

내내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슐로이츠가 시선을 옮겼다.

“비너스 에케로트.”

“슐로이츠 공. 아가씨는 왕성 서궁 지하에, 계십니다…!”

본래라면 블란데아의 기사이기 때문에 귀빈급 대접을 받아야 하는 비너스였으나, 그가 르페브르를 배신했다는 소식은 군부에서도 이미 입수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비너스 에케로트는 군부 임시 주둔지에 난입했다.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며 군부 기사들은 거칠게 비너스 에케로트를 제압해 끌고 왔다.

“서궁 지하로 가셔야 합니다!”

와중에도 비너스는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쉬지 않고 헐떡이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맥없이 지는 꽃을 보는 듯했다. 그런 서글픈 기분마저 언뜻 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기사의 상태는 끔찍하게 나빠 보였다.

“각하! 이 자식 말을 믿으십니까? 더러운 배신자입니다!”

하지만 블란데아가 구금되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라파엘은 분노에 가득 차 이를 바득바득 갈고만 있었다.

아그네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각하. 한낱 기사에 불과한 이자가 왕성 서궁 지하를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제보의 신뢰성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슐로이츠는 비너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

몸이 푹 꺾인 비너스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본 슐로이츠가 시선을 옮겼다.

“왕성으로 간다.”

***

파에톤 2세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전혀 다른 장소로 끌려온 나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으나, 파에톤 2세가 내게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일 정도로 거대한 황금색 조각상. 아니, 실제로는 정말로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다가가 그 찬란함을 가늠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또 나였으니까.

폐허의 유적에서 보았던, 내 얼굴을 그대로 본떠 움직이던 조각상….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게 이걸 보여 주니 감회가 새롭군.”

바닥에 반쯤 쓰러져 있는 나와는 달리, 파에톤 2세의 목소리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활력적인 생기가 가득했다.

“네게는 제대로 보이겠지. 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거의 동시에 나는 주춤 물러섰다. 믿을 수 없었다.

“……!”

잠자듯이 누워 있던 황금빛 조각상이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 일어난 조각상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다. 그 모습에 벽과 천장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들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누군가에게 턱이 똑바로 붙잡혀 강제된 듯, 도저히 조각상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

긴 잠에서 깨어난 양 몸을 일으킨 조각상은 무릎을 꿇은 후 두 손바닥을 펼쳐 마주 잡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순례자처럼. 거룩하고 신실해 짐짓 고독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으로.

나를 본뜬 조각상은 다시 천천히, 완전히 굳는다.

벽과 지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이 황금색 조각상을 끔찍하리만치 아름답고 신성하게 비춘다.

나는 멍하니 금빛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깨닫는다. 이 조각상에는 한쪽 눈이 없다. 누군가가 도려내 간 듯 텅 비어 있는 한쪽 눈동자….

나는 반사적으로 내 한쪽 눈두덩을 만지며 내 눈동자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 봤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느냐? 블란데아 르페브르여.”

파에톤 2세의 희열 섞인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며 귓가를 파고든다.

“너는 기억도 못 하겠지…. 아니. 아니, 잠시만.”

파에톤 2세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턱을 움켜쥔다. 굳어 있는 얼굴에 와 닿는 손은 시체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유심히 내 눈을 들여다본 파에톤 2세가 폭소했다.

“아, 르페브르여. 결국 또 이렇게 기억을 해내고 마는군.”

“…….”

“르페브르여.”

파에톤 2세의 머리카락이 마치 내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뇌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그가 내게 어떤 흑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쉽구나.”

“…….”

파에톤 2세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오직 너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반복했던 놈이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그때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한순간 숨이 멎었다.

“너도 궁금하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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