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30) (185/190)

“정말 개판이네요.”

헥토르가 평온한 목소리로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그네스는 헥토르가 다른 의미로 희한해 보였다.

개판인 건 맞는데….

“아주 담대하시군요.”

“매일매일 기적 같은 르페브르와 살다 보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요.”

“이 정도요…?”

피부가 변하고 피를 토하던 기사들은 거의 수습이 끝났다.

군부에서는 이젠 근처 영지로 나와 변하기 시작하는 영지민들의 입에 금빛 머리카락을 쏟아붓고 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언뜻 보기엔 햇살이나 금실을 입에 밀어 넣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다.

기적이란 신성하고 자애로운 단어를 떠올리기 힘든 광경인데, 이 미친 연구학자 눈에는 어쨌든 같은 결로 기적이라고 보이는 모양이었다.

“르페브르가 있어야 산다니까요. 이 모습을 아가씨한테도 정말 보여 드리고 싶어서….”

“블란데아 사령관님 말입니까?”

“블란이 이름이 왜 나와?”

엔리코르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오파츠를 최대한 비축해 놓기 위해, 엔리코르는 쉴 새 없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기력이 달리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블란이 연락이 끊겨서 걱정돼 죽겠는 마당에….”

“아가씨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어떻게 봐? 당장 왕도로 올라가자고?”

엔리코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적으로 무리인 일이다. 그리고 헥토르는 그런 방법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은 것 않았다.

“엔리코르. 로시에 가문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억의 수반’에 관련한 기술을 공유했다며?”

헥토르는 자신이 이웃 대륙에 나가 있는 사이 일어난 일에 아주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었다.

이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당장 연구실에 처박혀 수반을 뜯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호수 위에 얼굴을 비추어 보곤 했지. 그러니까, 수반은 사실 거울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야.”

헥토르는 언뜻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자꾸 지껄였다.

“다시 말해 수반은 모든 걸 비출 수 있다는 소리지.”

“……?”

“예전에 블란데아 아가씨가 하신 말씀이 있거든? ‘영상 공유’라고?”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엔리코르와 아그네스가 각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설명하자면, 음.”

블란데아는 헥토르가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이상한 아이디어를 몇 번 주입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헥토르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범주의 묘안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을 남들의 눈에도 동시다발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라고?”

엔리코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동시다발적…? 블란이가 언제 그런 걸 만들라고 했는데?”

“아가씨가 많이 어릴 때. 아홉 살?”

“너도 고생했구나.”

“육아는 쉽지 않으니까. 아무튼 늦봄이었거든?”

블란데아는 르페브르 성 뒤편에 가득 핀 앨리스 꽃을 좋아했다.

그 꽃을 뜯어 먹고 살아남았으니 당연할 일일 터.

햇살이 가득하던 어느 봄날, 블란데아는 유독 화사하고 사랑스럽게 만개한 앨리스 꽃들을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헥토르에게 말했다.

“엔리한테도 이거 보여 주고 싶어.”

“엔리코르는 지금 왕도에 있잖아요, 아가씨. 공과 부인께서도 왕도 저택에 계시고…. 그래도 금방 돌아오실 테니 같이 보실 수 있겠죠.”

“한 명 더 있는데….”

“한 명 더요? 르페브르에 또 직계가 있었던가….”

“다른 가문이야. 그 애한테도 보여 주고 싶어.”

“그 애요? 그 애가 누군데요?”

블란데아는 근래 매번 갖고 놀던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보석을 눈으로 단 인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헥토르가 모르는 애야.”

“그럼 불러오죠. 르페브르 영애가 초청하는데 왕국의 그 어떤 영애가 거절하겠어요?”

“영애 아닌데.”

“설마 공자인가요? 뭐 그럼 엔리가 좀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몰래 데리고 오겠습니다.”

“안 돼.”

“왜요?”

“걘 이제 죽음보다 날 더 싫어하게 됐을걸,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

“죽음보다 싫어해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헥토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었다.

“혹시 블란데아 아가씨는 인생 2회차쯤 되시는 걸까….”

엔리코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블란데아는 어릴 때부터 별의별 쓸데없는 얘기를 많이 하기는 했다.

“계단 올라가기 힘드니까 알아서 움직이는 계단을 만들면 안 되느냐, 차가운 침대가 싫으니 침대를 데우는 넓적한 카펫을 만들어 주면 안 되느냐…. 진짜 별별 얘길 다 했었지.”

덕분에 어렸던 엔리코르는 블란데아의 작은 서재를 한밤중에 진지하게 점검해 본 적도 있었다.

솔직히 자긴 가짜 천재고 블란데아가 숨겨진 진짜 천재 같아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블란데아를 누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는 건데? 당장 만들어 주겠다는 것처럼….”

“방금 만들었어.”

“뭐? 뭘 방금 만들어?”

“수반의 핵심 기술에 대한 걸 한번 들어 보니까 어렵지 않더라고.”

“…아?”

“그냥 틈틈이 조립만 하면 되는 정말 간단한 일이었어.”

“……?”

“이렇게 쉬운 것도 그동안 못 했다니…. 한심해. 그러니까 아가씨가 내 청혼을 듣는 척도 안 하셨구나 싶더라니까.”

“…….”

“이제 블란데아 아가씨가 보는 걸 우리도 볼 수 있을 거야. 우리 아가씨가 어디 계시려나?”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한 헥토르는 허리띠에 달아 놓은 오파츠를 들어 올렸다.

거의 동시였다.

넓게 펼쳐진 긴급 대피소.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기사와 병사들, 또 일부 영지민들의 품에서 오파츠가 반짝이는 빛을 냈다. 다들 당황해 오파츠를 꺼내 들었다.

엔리코르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오파츠를 바라봤다.

“아, 근데 한 가지는 극초기라 확실히 파악을 못 했어.”

“파악을 못 했다니? 문제가 있어?”

“사소한 건데….”

헥토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가 보는 걸 오파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함께 보게 됐지.”

“뭐?”

“오늘 국경일로 삼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어?”

“…….”

옆에서 듣던 아그네스가 기가 막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진짜 이쪽도 어지간히 사령관님께 미치셨잖아….”

“뭐라고 했습니까? 경?”

“아닙니다. 헥토르 아이센 공. 혼잣말이었습니다.”

오파츠의 표면에서부터 동그랗게 떠오른 희미한 잔상이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물방울들이 뭉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했던 잔상은 이내 거대한 화면으로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헥토르가 뿌듯하게 웃었다.

“자, 그럼 사랑스러운 블란데아 아가씨가 계실 곳을….”

“꺄아아아악!”

“저, 저게 뭔가요?!”

“신이시여…!”

왕도 전역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귀족, 평민 가릴 것이 없었다.

멍하니 선 블란데아의 앞에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

“각하. 저게 다….”

“대신전의 흔적이군.”

하늘 위에 말도 안 되는 핏빛 장면이 떠올라 있는데도, 슐로이츠는 평소보다도 훨씬 냉정하고 건조한 눈빛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보이는 그의 차가운 태도는 종종 낯설었다. 슐로이츠와 함께 오래 있었던 라파엘조차 그리 느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닥쳐와도, 슐로이츠는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과거에 더욱 끔찍하고 역겨운 악몽 같은 일들을 숱하게 견딘 고행자처럼 그저 무던하고 차갑게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블란데아는 르페브르의 기사단장과 함께 있군.”

슐로이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라파엘은 약간이나마 진정을 되찾았다. 슐로이츠의 말대로, 블란데아의 뒤로 굳은 낯의 발록 경이 보였다.

“라파엘. 르페브르에 즉시 연통을 넣어라.”

“각하. 현재 르페브르 저택을 포위하고 있을 왕실 기사들은….”

“국왕이 저 몰골인데 왕명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슐로이츠가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화면을 보면서 냉소적으로 빈정거렸다.

핏빛 시체.

가득한 해골이며 잘려 튀어나온 내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마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각하. 강제적 효력이 있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법제화가 되어 있는 명분이 있어야 근위대를 비롯한 왕도 병력을 장악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아, 그래. 명분이 있어야겠지.”

“예. 유사시 최고 중요 인물인 국왕이 위험한 장소에 있으니, 이걸 명분으로….”

“전시 상황으로 간주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해.”

“예?”

전시 상황?

라파엘은 순간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슐로이츠의 시선은 얼어붙어 있는 블란데아의 뒷모습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아까부터 저 자세였다. 태양을 숭배하는 해바라기도 저 정도는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텄군.’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겠어….

“국법과 군법에 따라 왕실 근위대 이하 모든 기사들 역시 지금 이 시간부로 군부에 소속시킨다.”

그 정도 명분에 불복종을 한다면 즉결 처분이다. 라파엘이 묵례했다.

“존명.”

***

“…사람들의 시체를 수급해 괴수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가씨.”

“…아냐. 발록 경.”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몇은 살아 있기도 해.”

창백한 시체들이 수도 없이 나뒹구는 대신전의 흔적.

몇몇은 살아 있는지 얼굴이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나는 저렇게 얼굴에 금이 간 듯 찢긴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레이….’

언젠가 내 준사관으로 들어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레이가 정확히 저런 몰골이었으니까.

얼굴이 찢긴 시체가 반대편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방금 전 낙사로 인해 쓰러진 흑마법사들과 실험 도구가 가득한 쪽이었다.

“돌아… 가게….”

“돌아… 가게… 해 줘….”

소름이 돋았다. 나는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왜 흑마법사를 동원해 괴수를 만들고 계신지요?”

“…….”

“국왕 전하.”

흑마법사도, 시체도 전부 짓이겨진 악몽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국왕, 파에톤 2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주제에 그의 입가엔 알 수 없는 여유와 초조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문득 머금는 그 미소가 얼마나 역하게 느껴지는지, 핏물에 젖은 생고기를 씹어 삼켜도 이보단 싱그러울 게 분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게 무엇인지 아는가?”

국왕이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해독제다. 괴수가 완전히 없어진 세상에서 르페브르가 지금처럼 대체 불가한 권력자로 살 수 있을 성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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