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9) (184/190)

“…….”

네가 괴수라니, 도대체….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말은 듣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런 말이 너무 많았다.

“…아가씨.”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비너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이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뜀박질이 되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왕성에서 막 벗어났을 때.

나는 내가 한참 전부터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무릎을 붙잡고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이고 모자란 숨을 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

“각하! 긴급 보고입니다!”

“인근 치안대에서 병력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왕도에서도 급히 전서구가 왔습니다!”

슐로이츠에게 급히 보고를 하는 보좌관들이 끊이지 않았다.

군부를 비롯한 왕국 전역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불과 몇 분 전.

“아악!”

“치안대! 치안대!”

“저 기사 나리도 변하고 있습니다! 피부가 점점 새까맣게 변하고 피를 토하고 있어요…!”

과거, 괴수에게 상처를 입은 적이 있던 사람들이 끔찍한 몰골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란데아를 데려오기 위해 왕도로 떠나기 직전, 이 유래 없는 재앙을 맞이하게 된 슐로이츠는 차갑고 싸늘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장 지옥이 될 뻔했던 군부는 무사했다.

햇볕을 받아 진하게 빛나는 금발이 시야에 들어온다.

슐로이츠는 잠시간, 엔리코르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보면서 도저히 머릿속에서 떼어 낼 수 없는 한 여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블란데아가 군부에 있었으면, 슐로이츠 그의 곁에 있었으면 필시 저런 모습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변이자들의 입에 오파츠를 물려라!”

“모자라면 머리카락이라도 입에 쏟아부어!”

척 보기에도 턱은 온통 피 칠갑에, 피부까지 거뭇거뭇하게 변하고 있는 기사들은 입에 오파츠를 넣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변이자들의 입에 엔리코르의 잘린 머리카락을 밀어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파츠만큼은 아니었으나 폐수가 천천히 정화되듯 피부의 오염이 점차 느려졌다.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로 놀랍군요.”

“기적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슐로이츠의 뒤를 따라오던 보좌관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르페브르의 직계란 정말이지 살아 있는 오파츠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오파츠를 무한정 사용할 수 없기에 엔리코르 르페브르는 아예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 군부 기사들에게 보급 중이었다.

잘라 낸 황금빛 머리카락은 금세 자라나 허리 아래로까지 흘러내렸다.

블란데아는 모르는 일이지만, 사실 슐로이츠는 엔리코르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었다.

사유는 간단했다. 엔리코르가 블란데아와 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에.

슐로이츠는 가슴께로 치미는 깊은 초조감을 내리눌렀다.

지금 이 드넓은 군부에서 현재 1순위로 보호해야 할 대상은 당연히도 엔리코르 르페브르였다.

“각하. 지금 왕도로 떠나시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할뿐더러 빠듯하기까지 했다. 슐로이츠는 보좌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해. 한 시간 안에 왕도로 출발하겠다.”

“존명.”

슐로이츠가 잠시 군부를 비우기 위해서 당장 처리해야 할 문서들이 적지 않았다.

현재 최고위급 사령관들과 지휘관들이 거의 부재한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이렇게 전시를 파악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진 슐로이츠는 곧장 걸음을 옮겼고, 그때.

“각하!”

구르듯이 뛰어온 기사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디오스 사령관이 귀환했습니다!”

“각하!”

디오스 이젤이 무언가를 업고 슐로이츠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슐로이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헥토르 아이센 공 아닙니까?”

옆에 있던 기사가 중얼거렸다. 디오스는 바람 같은 속도로 달려오더니 슐로이츠의 앞에 헥토르를 내려놓았다.

평소와는 달리 흐트러진 하늘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흐드러진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슐로이츠의 앞으로 엎어진 것이다.

반사적으로 헥토르를 잡은 슐로이츠는 문득, 언젠가 블란데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헥토르 아이센과 친분이 깊었다.

“왜 아이센 공을 자꾸 쳐다보지?”

“머리카락이 하늘색이라서 신기하잖아?”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 산뜻한 대답. 블란데아는 서류를 처리하다가도 종종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하늘만 멍하니 보고 있는 게 재밌나?”

“재밌지는 않아.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있고…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좋아하지. 하늘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슐로이츠는 그때부터 헥토르 아이센의 머리카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잡아 주셔서 감사… 왁!”

휙 던져진 헥토르는 아슬아슬하게 디오스의 부축을 받아 넘어지지 않았다. 헥토르는 슐로이츠가 뭘 하든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디오스 경.”

헥토르는 지금 펼쳐진 끔찍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남들이 피를 토하며 피부가 거멓게 변하든 말든, 그는 그저 웃으면서 품 안에 무언가를 꼭 껴안고 있었다.

겹겹의 천으로 꽁꽁 감싼, 거대한 알 같은 물건이었다.

“총사령관님. 블란데아 아가씨는 어디 있습니까?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한 걸 겨우 구해 왔는데….”

블란데아가 반드시 구해 오라고 했다는 말이 귀에 감겼다. 슐로이츠가 막 미지의 물건을 넘겨받던 그때.

“각하!”

슐로이츠의 신경이 순간 곤두섰다. 그가 살면서 저 목소리를 들으며 이렇게까지 동요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라파엘의 목소리 따위에.

기가 막히게 색깔 조화를 이루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눈앞에 다다랐다.

엉망진창인 몰골로 라파엘이 숨을 몰아쉬었다.

블란데아는?

목소리를 내어 묻기도 전에 시선이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블란데아는 보이지 않았다.

고작 한 명의 부재가, 단 한 명의 실종이 사람의 심장을 산 채로 갉아 먹을 수 있는 법이다. 슐로이츠는 이미 단 한 명의 여자로 인해 몇 번이나 체험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늘함. 슐로이츠가 차갑다 못해 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그….”

“어디 있냐고 묻잖아.”

라파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

어떤 얼굴로 르페브르의 기사들을 마주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은 하나같이 참담한 얼굴로 발록 경을 불러와 주었다.

르페브르 저택으로 직접 들어가는 건 위험도가 높아 실행하지 않았다. 이미 왕궁에서 파견한 기사와 병사들로 저택이 포위되어 있었으니까.

“저택 부근에 르페브르 기사들을 비밀리에 풀어놓을 걸 미리 아셨군요.”

“어릴 적부터 신신당부했었잖아. 내가 위험에 빠지면 르페브르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꼭 지켜 줄 거라고.”

나는 발록 경이 쥐여 준 따뜻한 수통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내게 그 말을 해 준 것도 비너스 에케로트이긴 하지만.”

“…아가씨. 괴로우십니까?”

“아니.”

나는 눈을 가만히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끔찍해.”

“…….”

가축의 위장을 도려내 만들었다는 수통은 딱딱했다.

하지만 근원은 말랑한 내장이질 않은가. 이미 성질이 변해버린 것이라도 따뜻한 물을 담고 오랫동안 주무르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비너스의 본래의 모습은 뭐였을까.

오랫동안 한 가문에 봉사하는 척, 밀고할 기회만을 기다리던 배반자?

아니면, 내가 알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년 기사?

그도 아니면… 괴수라든지.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와중에도 마차는 성실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바깥이 많이 혼란스럽습니다만, 대신전의 흔적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응.”

괴수에게 상처를 입은 적 있는 사람들이 마치 괴수처럼 변하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나는 식은 손을 데워 주던 수통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다시 은제 가위를 들어 부지런히 머리카락을 끊어 냈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끊임없이 거미줄을 뽑아내는 거미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오파츠를 내가 당장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르페브르 기사 중에서도 피를 토하고 얼굴이 까맣게 변한 이가 나왔다.

엔리코르와 실험한 내용을 복기한 덕에 내 머리카락을 입에 밀어 넣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체력을 고려해 무작정 머리칼을 자르지는 않았다. 어지럽기 직전까지 머리카락을 수급했을 때, 마차가 멈춰 섰다.

“…왕실의 기사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가씨”

내가 대신전의 흔적에 가야 한다고 할 때부터, 아무 반문도 하지 않던 발록 경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이미 르페브르의 소유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발록 경의 말대로 얼마 전, 대신전의 흔적은 공식적으로 르페브르의 소유가 되었다.

사실 별것 없는 무너진 흔적에 불과했는데도, 라자크 왕실은 이상할 정도로 대신전의 흔적에 집착했다.

‘사실 국왕이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는 소리지.’

이런 소동이 나자마자 왕실 기사를 이쪽으로 보낸 것만 봐도 그 속셈이 훤히 보였다.

“안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응.”

“아가씨는 그 차림으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당장 바꿔 입을 옷이 없는걸.”

나는 여전히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다행히 남는 군복 재킷이 딱 한 벌 있어서 그걸 걸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왕실 기사들이 제법 많은데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까?”

내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르페브르 기사가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응?”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장님이 검을 들면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곤 하니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약 삼십 분 만에 나는 아주 무사히,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대신전의 흔적 중앙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이 대신전의 흔적이 무너져 내릴 때, 국왕 파에톤 2세는 신관들과는 다른 곳에서 매장될 뻔했다.

그날 나는 대신전의 흔적에 있었던 터라 그곳이 어딘지 직접 가 보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올 수도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넓고 휑뎅그렁한 공간.

“아무것도 없군요.”

“그러게… 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가 아닌가?”

별생각 없이 벽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무너져 내립니다, 아가씨!”

다급한 속삭임과 함께 내 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