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7) (182/190)

드르륵.

기사들이 새하얀 천이 덮인 트롤리를 끌고 들어오더니 침실 중앙에 트롤리를 놓은 후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철컥.

문밖에서부터 묵직한 자물쇠로 걸어 잠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궁에 유폐되었다. 아니, 왕족이 아닌 내게 유폐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겠지.

‘…갇혔지.’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이 우아한 침실이 내 임시 감옥이었다.

나는 기사들이 놓고 간 트롤리 쪽으로 걸어가 덮인 흰 천을 걷어 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감금되어 있는 반역 의심자에게 주는 것치고는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르페브르 영애라고 대접은 해 주는 것인지, 하나같이 아름다운 도자기 그릇에 차곡차곡 차려져 있었고.

귀빈을 향한 접대 같은 이 풍성한 저녁이 물론 달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갇힌 탓에 신경은 곤두서 있었고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막연히 배를 비워 놓는 건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드레스에 달려 있던, 진주와 분홍빛 산호로 장식된 브로치를 꺼내 은침으로 빵을 찔러 보았다.

“넓적하게 두드리거나 뾰족하게 갈아 놓은 은의 표면에 음식물을 닿게 하십시오. 그리고 조금 기다리면 이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알려 준 것도 비너스긴 했지만.

은침이 까만색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가만히 노려보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반추했다.

“보통 귀족 아가씨들이 이런 것까지 배워?”

“가끔 보면 아가씨는 말투가 참 특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뭐가 특이해?”

“본인을 꼭 제삼자처럼 지칭하는 부분이요?”

그때는 비너스의 예리함에 찔끔 놀라긴 했었는데.

블란데아 르페브르로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나와 블란데아를 구분해서 보던 것이 남아 있던 시절이기도 하고.

지금은 물론… 아니다.

그래서 내 기사인 비너스 에케로트의 배신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고무처럼 느껴지는 빵을 천천히 씹고 있을 때였다.

똑똑.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

서궁에 갇힌 이후 하루에 세 번 정해진 때가 아니면 절대 들어오지 않던 기사들이 또 들어왔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들은 아무 대답 없이 조용히 침실 문을 닫았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나는 순간 넋이 나가 눈을 깜빡였다.

“…라파엘?”

근위대 제복을 입고, 어디서 구했는지 제법 그럴듯한 가발까지 공수해 와 쓰고 있는 라파엘과 옆에는 심지어….

“아그네스?”

마찬가지로 근위대로 변장한 아그네스가 양 손바닥을 천천히 내보였다.

“그, 블란데아 사령관님. 진정하세요. 들고 계신 물병은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아그네스의 말을 듣고서야 유리 물병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안도감과 비슷한 결이었으리라.

“아니, 같이 갇혔으면서 대체 어떻게 도망을….”

됐다. 나는 이 푼수들이 대단한 기사임을 종종 까먹고는 했다.

“나를 도피시키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아닙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아니라고?”

“저희는 사령관님께 명령을 하달받기 위해 왔습니다.”

“…….”

“저와 아그네스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우습게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무력하게 갇혀 있는 르페브르 영애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군부에 소속된 제1 사령관이었다.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나를 이 왕성에서 구해 주려고 온 게 아니라, 내게 명령을 받아 급박한 현 상황을 타개할 청사진을 그리고자 목숨을 걸고 잠입한 것이다.

슐로이츠는 현재 군부에 있었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당장 연락을 넣을 방도가 없었다.

순전히 나 혼자 판단해야 했다.

“어쩌면 이대로 있는 게 맞는 선택일 수도 있어.”

마음대로 탈출했다가는 국법과 왕명을 어긴 것이 되니까.

조용히 기다리면서, 르페브르가 뒤집어쓴 그 반역죄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국왕은 나를 이 서궁에 가두면서 어마어마한 손실을 안게 됐잖아.”

국왕이 르페브르를 심문하고 싶었다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연회에 초대받은 나만 덜렁 납치하다시피 깊은 별궁에 가두는 게 아니라.

덕분에 국왕은 군주로서 가장 중요하고 여기고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을 평판, 민심, 귀족들의 신뢰, 군주로서의 자질 등….

너무 많은 것을 의심받게 되었다.

어차피 르페브르에 씌워진 죄명이 모함인 걸 안다면 그 끝은 더욱 처참할 것이다.

“이딴 식으로 왕위를 넘겨주고 싶은 낭만적인 군주는 더더욱 아닐 테고.”

낭만을 알았으면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생아나 싸지르진 않았을 테니?

냉소적으로 생각한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말이야. 라파엘, 아그네스.”

“예.”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나는 국왕이 이런 거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

침실에 갇힌 후 내내 서성이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다만 무수한 두려움과 불안함에 제대로 뻗어 가지 못했던 생각의 가지가,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때를 앞두자 고목의 뿌리처럼 끝도 없이 이어져 나갔다.

잠시일지라도 이만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

사람들의 눈을 왕성으로 돌려야 하는 일….

‘아니야. 사람들이 아니지.’

내가 왕성에 갇힌다면, 동요할 집단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하나는 르페브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부.

“아마 조속한 시일 내에 고위 간부로 이루어진 군부 조사단이 왕실로 파견되겠지.”

슐로이츠의 성정을 따져 보았을 땐 이미 출발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혹시 슐로이츠도 왕성으로 직접 오고 있을까 하고 라파엘과 아그네스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순전히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의연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나를 둘러싼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낯설고 무서웠다.

솔직히 그랬다.

이럴 때 의도가 어떻든, 내 스스로 슐로이츠를 찾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굳건한 척 속이고 있는 마음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 강한 척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앞에 선 두 군인에게는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맞았고.

“군부의 조사단이 움직이면 그만큼 유적을 지키는 병력이 줄게 되잖아.”

“그 말씀은….”

“그 틈을 타서 국왕이 파고들어야 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

“예를 들면 유적이라든지?”

순간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꼭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전달받은 기자들처럼 얼굴을 한껏 구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이 굳이 군부의 눈을 피해 폐허의 유적에 병력을 잠입시킬 만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필 거짓말처럼 그쪽 벽에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다.

각도 탓에 내 옆모습만을 절묘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자 유적의 문 아래 누워 있던 거대한 황금 석상이 생각났다.

그곳에 숨겨져 있던 왕실의 문장도.

“경들에게 당장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나는 짐작 가는 게 있어.”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장 4번째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국왕의 근위대가 군부 유적에 몰래 잠입할 수도 있으니 귀환하는 즉시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

“예. 사령관님은 먼저 이 왕성에서 탈출해 르페브르 저택으로….”

“한 가지 더 명령할 게 있는데.”

명령이라는 말에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

아직 나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일이었다.

***

“들었어? 르페브르 공이 정식으로 항의를 했는데 국왕 전하께서 묵살하셨대.”

“그래도 되는 거야?”

“모르지. 안 그래도 르페브르 영지에 별장을 대여한 귀족들만 해도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잖아.”

“그렇지.”

“근데 지금 분위기가 이렇게 돼서 국왕 전하께 불만을 품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쉿. 입조심해!”

왕성 기둥 뒤 그림자에 숨어 있던 나는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떠나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라파엘? 아그네스.”

“예.”

나는 여전히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는 둘에게 시선을 던진 후 말했다.

“왕성 밖으로 나간다고 다가 아니야. 오히려 왕성 안쪽이 몸을 숨길 거대한 건축물이 많아 도망이 쉬웠지.”

대대로 왕실은 반역에 대비하기 위해 왕성을 둘러싼 높디높은 담벼락 주변에는 그 무엇도 심거나 설치하지 않았다.

반역군이 엄폐물로 쓸 것을 두지 않겠다는 전술의 일종이었으며, 또한 나 같은 도망자를 쉽게 내보내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가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령관님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저희가 사령관님 하나 탈출시키지 못할 만큼 유약하진 않습니다.”

“알아, 아는데.”

“…….”

“지금부터 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선을 잡아끌면서 군부로 신속하게 도망쳐.”

“……?”

“내가 없다는 걸 들키지 말라는 뜻이야. 이해했어?”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순간 아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라파엘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이해가 어렵습니다. 납득도 가지 않습니다.”

“국왕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 나를 돌려받고 싶어 하는 건 군부도 그렇겠지만 르페브르도 마찬가지니까.”

외벽까지 겨우 도망치는 내내 의문과 추론이 끝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생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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