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시종장이….”
“왜 힐드온 케트펠 공자의 뺨을 때린 거죠?”
국왕의 시종장이 초대받은 손님의 뺨을 내려치는 일도 경우가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 대상이, 왕비에게 유일하게 인정을 받아 왕족과 대우가 동일한 힐드온 케트펠이라니?
“내 부하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모양이야.”
나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종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시종장은 내게는 한없이 공손하며 예의 바른 표정을 짓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르페브르 영애. 국왕 전하의 심복으로서, 힐드온 케트펠 공자의 말이 너무나 불충하여 차마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충?’
“사실이니? 힐드온 케트펠 생도.”
힐드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꼭, 이 정도는 익숙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심통 난 아이 같은 낯이었다.
사람들이 부채 너머로 속삭이는 게 보인다. 나는 가지고 있던 부채를 접어 힐드온 케트펠의 뺨을 툭툭 쳤다.
“……!”
이것도 대단한 모욕이다. 물론 방금 시종장이 뺨을 때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시종장.”
“말씀하시지요.”
“생도는 내가 잘 가르치지. 군부의 명예를 실추시킨 생도에겐 군법으로 정해진 마땅한 처벌이 있어서. 라파엘?”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데려가 복장부터 똑바로 정제시켜.”
“존명.”
서늘하게 보관한 샴페인과 디저트, 음악 선율만이 가득한 이 완벽히도 귀족적인 공간에서 ‘사령관’이라는 호칭이 얼마나 낯설게 들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힐드온 케트펠이 현재 어디에 속해 있는지 귀를 쫑긋 세운 이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기도 했고.
“시종장. 이 정도는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르페브르 영애.”
다행히 힐드온 케트펠이 군주 모독죄까지 저지르진 않은 모양이군.
하기야 모독죄까지 저질렀으면 시종장이 사적인 감정을 담아 뺨을 칠 수는 없었겠지.
“무슨 불충한 말을 했다는 걸까요?”
“영애가 물어보시겠지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 데서 뺨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생각은 전혀 없는 나는 힐드온 케트펠이 돌아오고서야 그를 데리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하필 또 다 차 있네.’
몇 번의 인사말 정도로 테라스를 양보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테라스 옆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조금 열린 유리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기분을 조금 진정시킨다.
“무슨 말을 했는데?”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좀 전에 들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한 말이 중요하다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힐드온의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워서 참기로 했다.
“그래. 무슨 말을 들었는데?”
“사령관님이.”
“내가?”
“…사령관님이.”
“그래, 내가?”
“…….”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흰 깃털이 달린 부채를 꽉 쥐었다. 라파엘이 서둘러 속닥였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여기 군부 아닙니다. 그렇게 작은 몽둥이 잡듯이 부채를 쥐지 마십시오.”
“경이야말로 오해할 말 작작 해.”
누가 들으면 내가 군부에서 생도들을 몽둥이로 패는 줄 알겠네….
하지만 답답하게 구는 힐드온을 부채로 쾅 때리려던 건 사실이었던지라, 나는 심호흡을 했다.
사실 잘 자고 잘 먹는 척했지만, 나 역시 왕성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빨리 얘기해.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네가 뭘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미안한데 넌 그 정도 능력이 안 돼. 힐드온 케트펠.”
“…….”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듣고서야 힐드온의 꾹 닫혀 있던 입이 조금 열렸다.
“사령관님이 국왕 전하의 정부가 되실 거라… 큭!”
라파엘이 힐드온의 멱살을 쥐었다.
“미친 새끼야, 입조심해.”
“저도 그렇게 들었다는 겁니다.”
“어떤 개새끼가 그랬는데?”
“저 새끼….”
힐드온이 가리키는 곳으로 라파엘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얼마나 악마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는지, 푸른 옷을 입은 공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시선을 피했다.
“여기 군부 아니니까 둘 다 입 좀 다물고 떨어져. 어디까지 소문을 내고 싶은 거야?”
라파엘이 씨근덕거리며 힐드온의 멱살을 놓았다.
“원래 사교계는 온갖 소문의 온상이야.”
“하지만…!”
“경들은 사교계 경험이라곤 쥐뿔도 없으니 모르겠지만, 어디서는 내가 슐로이츠의 정부라서 제1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을 텐데?”
“무슨 그런 역겨운….”
힐드온이 입술을 짓씹는 것과 반대로, 라파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반대가 아니고요?”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정부의 위치가… 아닙니다.”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힐드온 케트펠. 넌 그 소문을 듣고 뭐라고 했는데?”
“사령관님은 군부에 속해 있으니 그딴 더럽고 지저분한 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입니다.”
“……?”
순간 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 말 때문에 시종장이 네 뺨을 때렸다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제까지 시종장이 국왕의 수많은 사생아에게 특별히 무례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 사교계의 동향을 좀 열심히 파악해 둘 걸 그랬나.’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턱을 쥔 채 곰곰이 생각했다.
“이상하네. 꼭 내가 너를 구해 주길 기다린 것 같잖아.”
왜 내가 힐드온을 공식 석상에서 구해 주는 모습을 원한 거지?
무엇 때문에?
나는 힐드온과 라파엘에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겼다.
오늘따라 파티에는 샴페인들만 즐비할 뿐 독한 술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참석한 귀족들도 수만 많았지 궁합이 영 잘 맞지 않았다. 엉성했다.
당장 르페브르의 직계인 내가 참석했는데, 친르페브르파 귀족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국왕의 파티라고 했으니, 왕비가 준비하는 것보다 섬세함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을 터.
불현듯 옛적의 일이 생각났다.
선대 프로키온 공, 그러니까 슐로이츠의 친부는 꼭 이런 연회에서 왕실 근위대에게 압송당했다.
죄명은 반역죄.
국왕은 선대 프로키온 공이 감히 놓칠 수 없는 달콤한 미끼, 그러니까 그의 정부이자 슐로이츠의 계모를 왕실 연회에 참석시켜 주겠다는 미끼를 던져 그를 왕도로 불러내지 않았던가.
갑자기 사람들의 반짝이는 미소가 전부 돌을 깎아 만든 차가운 가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이 전부 독주로 보였다.
여전히 나를 흘긋거리는 사람들이 염탐하는 쥐새끼들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보일 미소를 머금고 힐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 눈에는 사령관이 부하를 잘 다독이는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라파엘. 혹시 날 감시하고 있는 왕실 기사들이 있니?”
“제가 파악한 건 열 명입니다.”
“왜 말 안 했어?”
“르페브르는 원래 그 정도 보호는 받는 줄 알았습니다.”
라파엘이 쓰디쓴 표정으로 말했다.
“감시였군요.”
“그래. 준비해. 당장 왕성을 빠져나가야겠어.”
“존명.”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라파엘이 짧고 빠르게 대답했다.
“5분 후에 중앙에 있는 샹들리에를 깨겠습니다. 이 궁의 지리는 아십니까?”
“알지. 어머니랑 그래도 자주 왔으니까.”
라파엘이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 역시 샴페인을 새로 고르려는 척 지나가는 시동을 불렀을 때였다.
“국왕 전하 드십니다!”
울림통이 큰 관악기 소리가 귓가를 꽉 메웠다.
“르페브르 영애는 어디 있지?”
파에톤 2세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았다. 관례와 예법에 심하게 어긋나는 행동이라, 내내 조용하던 노귀족들조차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는 게 보였다.
의문이 스쳤다. 저런 행동은 국왕의 평판에 몹시 좋지 않을 텐데.
“숲의 모든 물기가….”
“인사는 됐네, 우리 사이에.”
내 평판을 같이 망치고픈 심술이라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짓은 국왕에게 손해가 훨씬 컸다.
나를 국왕의 정부라고 떠드는 이들도 결국 소수며, 뒷소문으로 씹어 대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그 정도 질시 섞인 소문도 없는 귀족은 왕도 사교계에는 존재도 하지 않았고.
국왕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폐허의 유적에서 흑마법사들의 힘이 가득한 문을 발견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이들은 전부 알고 있을 것이네.”
순간 내 귀가 쫑긋했다.
“그렇지, 르페브르 영애?”
“네, 전하.”
“아까 전 내가 재미있는 보고를 받았다네. ‘기억의 수반’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관의 힘이 필요하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슐로이츠가 없이 홀로 국왕에게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신중함을 요구했다.
“군부의 판단은 그렇습니다.”
“향후 방향에 따라서는 성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인데 왕실도 아닌 귀족 가문의 판단으로 진행을 시켜 달라.”
국왕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것이 왕실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부에서 내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나?”
“수반을 확장하지 않고는 먹통이 되어 가는 금사 기둥을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군부에서는 오로지 왕실과 백성들의 안녕을 생각하여 판단 내린 일입니다.”
“르페브르 영애.”
국왕이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신관은 르페브르의 소관 아닌가? 군부에서도 제1 사령관이었던 영애가 신관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소임으로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지?”
“그렇습니다. 전하.”
국왕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덫 위에 숨죽여 기다리던 사냥감이 올라왔을 때의 희열이 가득했다.
“신관들은 오직 블란데아 르페브르 사령관의 것인데.”
“…….”
“그렇다면 군부에서는 라자크 왕국을 탐내는 것인가?”
순간 연회장이 벌 떼에 쏘인 듯 시끄러워졌다.
“지금 국왕 전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르페브르 부부는 참석하지 않으셨군요.”
“전하! 너무나 억측이십니다!”
이 자리엔 르페브르와는 거리가 먼 귀족들밖에 없었으나, 원성은 어쩔 수 없었다.
방금 국왕의 말은 그야말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차분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오해이십니다. 국왕 전하.”
“오해라고?”
국왕이 손짓했다. 언제 입장했는지 파악할 수 없는 근위대 기사단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국왕에게 건넸다.
“군부에서 짐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극비 제보를 받았다.”
국왕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들고 있던 서류들을 휙 눈앞으로 던졌다.
“나머진 직접 읽어 보게.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로 눈길조차 내리지 않았다.
“주워.”
꼿꼿하게 서서 국왕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했다.
“주워서 내게 보고해. 힐드온 케트펠 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