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4) (179/190)

‘순식간에 하루를 더 머물렀네.’

욕조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폴폴 올라왔다. 따뜻한 김을 내뿜는 수면 위로 생동감 넘치는 노란 꽃잎들이 동동 떠다녔다.

‘게다가 파티라니. 왕비도 아니고 국왕의 이름으로 여는 파티?’

내가 아무리 사교계의 출입이 드물었다지만 흔한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충분히 알았다.

“피곤하신 모양이에요, 르페브르 영애.”

“간밤에 잠을 잘 주무시지 못했나요?”

목욕 시중을 도와주던 시녀들이 물었다.

“아무래도 왕궁이니까 편히 잠들기가 쉽지가 않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조금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떨까요?”

“파티는 저녁이니까요. 시간은 충분하답니다.”

사실 왕궁의 시녀들도 내게는 초면이었다. 그런데도 따뜻한 물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틀이나 제대로 자지 못해 혹사당한 몸 상태 탓인지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턱 바로 아래까지 가볍게 출렁이는 수면.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새삼 깨달았다.

왕궁에 들어와서 잠을 잘 자지 못한 이유는 역시 밤에 낯선 곳에 혼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시녀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잠이 잘 오지 않은가?

세 시간을 내리 잔 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개운한 상태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했다.

“그러고 보니 드레스는?”

“영애가 주무시고 있을 때, 이미 르페브르 저택에서 영애의 드레스를 받아 왔습니다.”

“그 드레스의 치수를 재서 이미 가봉도 끝내 놓았고요.”

“가봉을 끝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녀들의 말은 르페브르 저택에서 가져온 내 드레스를 입으라는 게 아니라, 왕실에 있는 드레스를 굳이 고쳐 입으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왕실의 드레스야 최고급품들이긴 하겠지만 르페브르 역시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깃털처럼 스쳤던 내 미묘한 의문은 금세 흩날려 먼지처럼 사라졌다.

에스핀 왕비의 시녀장이 이브닝드레스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피로연 때 입을 걸 지금 미리 입으라는 말씀이신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애.”

시녀장은 예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공손하며 단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니까, 웃는 듯 입술 끝만 올렸다는 소리였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참석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왕비님이 아니라 국왕 전하시기 때문이랍니다.”

“…국왕 전하께서? 왜?”

“말씀드렸지만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내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에스핀 왕비의 시녀장에게서 이브닝드레스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녀장이 돌아서서 나가고, 그 짧은 사이 시녀들은 솜씨도 좋게 드레스를 마네킹에 잘 걸어 두었다.

“바로 입어 보시겠어요?”

“그래. 국왕 전하의 명이라고 하시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시녀들은 야무진 손길로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머리까지 꽃과 보석으로 엮어 땋고 난 다음, 시녀들의 탄성을 들으며 전신 거울 앞으로 걸어간 나는 꼼꼼한 눈길로 드레스를 살폈다.

왕실의 드레스들은 반드시 티가 나는 법이다.

라자크 왕실의 문양이 금실이나 은실, 또는 작은 진주나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로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이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국왕이 내 생각보다 더, 왕실과 군부의 관계를 공고히 다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래위로 재빠르게 굴러가던 눈동자가 천천히 멈춘다.

‘…잠시만, 이 드레스?’

분홍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밝은 베이지색의 드레스는 대체로 부드럽고 차분한 이미지였으나 재질 탓에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디자인이 독특했다. 내가 알기로 사교계에서는 한 번도 유행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영애,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어쩜 이렇게 몸에 딱 맞게 가봉을 했는지 몰라요. 아무리 솜씨 좋은 시녀들이 달라붙었다고는 하지만 꼭 영애를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 같지 않나요?”

“나를 위해 만들어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

“뭐라고 하셨나요, 영애?”

시녀들이 당황하든 말든, 내 두 눈은 그저 거울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머리가 조금 아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고상해 보이는 드레스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목마른 사교계에서 한 번도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내 기준에서는 간단했다는 이야기다.

‘이거 분명히… 루리 드레스잖아?’

바로 여주인공을 위한 드레스였으니까.

작중,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루리 로시에가 이 드레스를 하사받고 정확히 한 시간 후.

라자크 왕국을 비롯한 대륙은 멸망의 신호탄을 아주 거세게 당기게 되는데…?

이런 피의 드레스가 왜 내 결혼식 이브닝드레스로 오게 된 거지?

똑똑.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성장은 끝나셨습니까?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

‘좀 이상하지 않나?’

엔리코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국왕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가.’

물론 엔리코르는 차기 르페브르 가주라서, 귀족으로서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건 나라의 안위였다.

현 국왕은 이상할 정도로 슐로이츠 프로키온에게 관대했다. 여기에 관한 여론이 마냥 좋을 수가 없는데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르페브르에게도 어찌나 너그러운지.

블란데아를 부러워할 귀족들이 거짓말 조금 보태 발에 챌 정도인데, 향후 몇십 년은 그럴 것이다.

웬만한 공주의 결혼식보다도 더 주목받는 아름답고 호화로운 결혼식.

‘덕분에 이 총사령관은 꼼짝없이 군부에 있어야 하기는 한다만.’

그런 쪽으로 머리를 쓴 거라면 국왕은 가히 전략의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엔리코르는 흘긋 옆을 보았다.

벌써 한 시간 째,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흠흠.”

엔리코르는 헛기침을 했다.

“그, 혹시 무슨 용건으로 블란이의 방에 오신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블란데아를 며칠이나 못 봤더니 여기에라도 있고 싶어서 왔습니다.”

엔리코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짓든 말든 뻔뻔히, 그리고 순순히 대답한 슐로이츠는 그녀의 책상에 있는 이상한 천 뭉치를 집어 들었다.

“……?”

“어, 그거….”

엔리코르가 한 박자 늦게 품에 넣고 다니던 머리 장신구를 꺼냈다.

“이걸 만들어 줬는데 실패작이 한 개 더 있었군요.”

“만들어 준 겁니까?”

“예.”

슐로이츠가 이마를 미묘하게 일그러뜨리곤 물었다.

“제 것은 어딨습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블란이가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거거나 아니면….”

네 건 없는 거겠지?

엔리코르는 마지막 말은 예의상 삼켜 주었다.

슐로이츠가 들고 있는 천 뭉치는 가히 대단한 실패작이었다. 오파츠만 얼기설기 달려 있을 뿐이지 나머지 부분은 흡사 괴물의 형상체였다.

‘블란이가 내 걸 열심히 만들어 준 게 맞네.’

엔리코르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슐로이츠의 시선이 잠시 엔리코르를 향한다. 블란데아와 마찬가지로 허리 아래까지 굽이치는 빛나는 금발을 본 슐로이츠가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블란데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에서도 그녀만 생각나니 차라리 온통 블란데아의 흔적으로 가득한 곳에 있는 게 심정적으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일이 없다는 걸, 괜찮을 수 없다는 걸 지난 10년을 처절히 겪어도 또 잊고 만 모양인지.

물끄러미 오파츠를 내려다본다.

슐로이츠는 잠시간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실패해 버린 게 틀림없는 천 뭉치를 품속에 접어 챙겨 넣었다.

***

국왕이 갑작스럽게 연 파티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파티의 초청장은 왕비가 아닌 국왕의 이름으로 보내졌고, 희소성이 조금 더 높았기에 앞다투어 사람들이 참석한 것이다.

귀족들은 이번 파티에 총사령관이 부재했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안도감, 그리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원래도 왕실 연회에 별 관심이 없던 분이잖아요.”

“결혼식을 앞두고 그 무심한 성격도 좀 유해졌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런, 르페브르 영애의 처지가 다소 서글퍼졌는걸요. 그래도 르페브르라는 걸출한 가문의 소생이었는데 앞날이 불투명해졌군요.”

***

‘방금 내 이름을 속삭인 것 같은데. 날 보며 웃는 건가?’

레몬주스 잔을 들고 그쪽을 쳐다보자, 흘긋흘긋 나를 훔쳐보며 웃던 무리가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저들에게 가서 발을 걸까요?”

“멍청한 녀석. 사교계에서는 술잔을 머리에 깨는 게 더 우아한 방식이다.”

“그렇습니까?”

뒤를 돌아보자 아그네스와 라파엘이 각기 그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이 둘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무서워서 피한 건가?’

호랑이 등에 타 우쭐거리는 여우가 된 기분이 들어 잠시 부끄러워졌다.

“괜찮으니 일일이 노려보지 마. 왕도 사교계가 만만한 줄 알아?”

“하지만 너무 건방지잖습니까.”

“예의도 버릇도 없습니다.”

라파엘은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사령관님. 대체 언제 퇴궁하실 수 있는 겁니까?”

“저희 지금 이틀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그네스의 눈에는 핏발이 선명히 서려 있었다.

“오늘 분명히 아버지나 어머니가 참석하실 줄 알았는데… 두 분 모두 오질 않으셨나 봐.”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니.

“그래도 오늘 이 파티까지 순조롭게 참여하고 나면 내 의무는 끝이야. 저녁에 최대한 퇴궁하도록 할게.”

라파엘과 아그네스를 안심시킨 후, 나는 그들에게도 주스를 권했다.

‘앞으로 다섯 시간 정도만 조용히 버티면, 국왕도 더 이상 날 붙잡아 둘 용건이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옮기던 중, 한곳에 고정됐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저 녀석 힐드온 케트펠 생도 아닙니까?”

“힐드온 케트펠?”

왜 저놈이 내 허락도 없이 나와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잠시.

인파에서 나를 발견한 힐드온이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오려다가 제지당했다.

순식간이었다.

찰싹!

국왕의 시종장이 고압적이고 딱딱한 얼굴로 힐드온의 뺨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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