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2) (177/190)

시간을 돌려, 조금 전.

“부왕 전하. 부르셨습니까?”

로티스 1왕자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을 호출한 파에톤 2세를 올려다보았다.

“로티스. 이 동쪽 대연회홀이 어떠하냐?”

동쪽 대연회홀은 로티스 왕자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예술적인 나선을 그리며 벽에 장식된 주먹만 한 보석들이 무척이나 찬연한 광채를 뿜어냈다.

로티스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제까진 사교 시즌엔 중앙 대연회홀인 크리스털 룸을 주로 사용했었지요. 이 동쪽 대연회홀은 그간 소문의 중심지답게, 아주 호화롭게 아름답습니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몹시 색달라 하겠군요. 이름이….”

국왕의 시종장이 조용히 도와주었다.

“기억의 대연회홀입니다. 1왕자님.”

“아. 일깨워 줘서 고맙네.”

파에톤 2세는 화려한 대연회홀을 둘러보았다.

“이 기억의 대연회홀을 제대로 보수하고 고치느라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구나.”

라자크 왕궁은 대륙에서도 가장 부유한 왕국의 중심답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황금빛 소문들이 많았다.

동쪽 대연회홀은 아직도 천장과 벽마다 온통 보석을 박아 넣는 대공사를 진행 중이라 어떤 귀족들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왕실의 뒤편에 있는 호수에는 사금이 금빛 먼지처럼 떠다닌다, 본궁 지하에는 죽은 여신을 본뜬 거대한 황금 석상이 잠들어 있다 등….

“왕실을 향한 존경과 신비감을 높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 때로는 압도적인 부와 화려함으로도 잔챙이들은 충분히 눌러 줄 수 있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왕 전하.”

“그렇기에 타국의 사절들을 대접하는 유리의 방은 언제나 백 개의 샹들리에를 밝혀 놓는 법이지. 군주의 얼굴과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빛은 곧 태양이라는 지고한 상징성으로 동일시되는 법이다.”

“예, 부왕 전하.”

“간단한 요령으로 사절들이 군주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몹시 낮아지니 항상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동쪽 대연회홀은 소심한 이라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호화스러운 데다가, 또 로티스는 아비인 국왕이 모처럼 군주다운 가르침을 내려 주자 기분마저 좋아졌다.

“부왕 전하. 올해 건국제 기념식을 여기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들아.”

신선한 기포가 보르르 올라오는 차가운 샴페인을 연거푸 마신 이처럼 들뜬 로티스의 웃음기는 이어지는 파에톤 2세의 말에 그대로 굳었다.

“이 기억의 대연회홀은 슐로이츠 프로키온 총사령관의 결혼식 장소로 내어 줄 것이다.”

***

“블란데아 사령관님. 르페브르 저택엔 언제 귀환하시는 겁니까?”

라파엘이 기회를 틈타 조용히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핀 왕비가 저녁 정찬까지 준비해 두었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돌아가면 언제 초청장을 보내는 거냐며 슬슬 마무리 대화를 하는 귀부인들 사이로, 조금 후 새로운 손님들이 왕궁을 채울 거란 얘기를 들었다.

바로 내 나이 또래의 레이디들이었다.

“왕비가 공주들 또래의 레이디들을 직접 초청해 차와 식사를 대접하려는 모양인데… 그럼 적어도 며칠은 왕궁에 있어야 하는 것 같아.”

“며칠이나요?”

“그게 왕실의 관례라서 말이야.”

“…정확히 며칠입니까?”

“나흘? 그런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하는 거야?”

“저는 블란데아 사령관님이 군부, 르페브르 저택, 르페브르 성, 프로키온 성, 프로키온 저택 외의 다른 곳에 계실 때에는 잠도 안 옵니다. 무섭거든요.”

정말 진심인 듯 라파엘이 한숨을 푹푹 담아 말했다. 아그네스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도 왕궁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아.”

아직도 국왕을 생각하면 찝찝하기도 하고.

에스핀 왕비의 응접실에 로티스 왕자가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나는 라파엘과 아그네스를 등지고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니? 로티스.”

“어마마마.”

초청한 손님들에게 일부러 아들이나 딸을 보이며 자랑하는 건 사교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에스핀 왕비가 1왕자 로티스를 귀부인들에게 자랑하려는 줄 알고 심드렁하게 있었는데….

“부왕 전하께서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제게 직접 데려오라고 명하셨습니다.”

“……?”

군데군데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있던 나는 멈칫했다. 섬세한 레이스가 수놓아져 있는 연분홍빛 치맛자락이 손바닥 아래서 출렁거렸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스핀 왕비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르페브르 영애?”

“네, 왕비님.”

“국왕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는 선물이라니, 비록 내가 초청한 손님이지만 더 붙잡아 놓긴 어렵겠구나.”

기분 탓인지 묘한 가시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다만 그 가시의 대상이 내가 아닌 국왕이라는 사실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사교계 경험치가 풍부한 편은 아닌 나조차도 느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관록 있는 귀부인들이라면 충분히 눈치챘을 미묘한 분노였다.

물론 어머니도.

“하지만 영애를 위해 내가 친히 공주와 레이디들을 초청했으니 하사품을 받고 나면 다시 왕비 궁으로 돌아오렴. 시종장과 시녀장을 붙여 줄 테니.”

“황공하옵니다. 왕비님.”

왕비의 배려를 듣고 있자면 내가 같은 왕궁에 있는 다른 곳을 잠시 방문하는 게 아니라, 적진에 드나드는 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군인이 맞긴 하지. 지금은 레이디지만.

왕비에게 인사를 한 후 나는 로티스 왕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경들은 왜 따라오지?”

자연스레 내 뒤를 따라오는 라파엘과 아그네스를 보고 로티스가 물었다.

“오파츠의 가호로 인해 현재 제 중요도가 군부의 총사령관과 동격이 되었습니다. 군법으로 인한 호위이니 이해해 주세요. 1왕자님.”

“…영애는 확실히 귀한 사람이긴 하지. 좋아, 나도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어마마마의 배려 덕에 영애를 따라오는 이들이 줄줄 늘었으니까.”

시종장 이하로 시종 여섯 명. 시녀장 이하로 시녀 여섯 명.

거기에 라파엘과 아그네스.

로티스를 포함하면 총 열일곱 명이 고작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예의 바르게, 그러니까 영혼 없이 웃고는 로티스 왕자에게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 제게 내리실 하사품이 무엇인가요?”

“하사품이 아니야.”

“네?”

“나는 분명 부왕 전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이라고 말했어. 영애.”

“…그럼 그 선물이 무엇인가요?”

로티스 왕자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언뜻 보고 있자니 그는 아주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모든 걸 체념한 무기력한 왕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보면 영애 역시 좋아할 선물이야.”

뭉뚱그린 이야기.

로티스는 선물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걸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더 묻지 않고 얌전히 로티스 왕자를 따랐다.

로티스 왕자는 무언가에 골몰한 듯 걷다가 잠시 발을 주춤했다. 군부에서도 티타니아가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던 터라 익숙한 상황이다. 덕택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로티스의 손목을 잡아 세울 수 있었다. 티타니아보다는 훨씬 뼈대가 굵긴 했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손목을 내려다보던 로티스 왕자가 말했다.

“영애는 걸핏하면 나를 돕는군.”

“잘 보고 다니세요.”

“잔소리 심한 것도 여전하고.”

고작 그걸 도와줬다고, 로티스 왕자는 일전에 내가 그를 괴수에게서 구해 주었던 상황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시종일관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으니까.

“영애는 화려한 걸 좋아하나?”

“화려한 걸 싫어하는 귀족이 있나요?”

“그럼 이번 선물도 마음에 들어 하겠지.”

‘얘기하기 싫어하는 눈치더니 은근히 알려는 주네.’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서 말하자 로티스 왕자가 뚜벅뚜벅 걷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영애의 결혼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네. 왕자님.”

“내 은인이 다른 남자와 이렇게 결혼해 버린다니, 약간이지만 서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고민하다가 되묻는 쪽을 택했다.

“농담이시죠?”

“반은. 그러니까 반은 진담이라는 말이지.”

로티스 왕자는 열 걸음 정도가 더 이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국왕의 근위대들이 보일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영애가 총사령관과 결혼하게 되어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

“영애는 내 은인이니, 최상의 것만 가졌으면 좋겠거든. 아까는 대연회홀을 하필 총사령관에게 주는 그분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대연회홀? 그분이라면 국왕?’

국왕이 슐로이츠에게 대연회홀을 주기라도 하겠다고 했나?

로티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총사령관이 아닌 영애가 그 선물을 기쁘게 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아.”

나는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고분고분 넘어가기도 아쉬운 말이라 입을 열었다.

“그럼 왕자님이 또 저한테 빚을 지신 거네요.”

“…아.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군….”

로티스 왕자는 한숨과 함께 순순히 대답했다.

“나중에 꼭 영애가 원하는 방식으로 갚지.”

로티스 왕자는 알고 있을까? 폐허의 유적, 깊은 동굴에 숨겨져 있던 나를 꼭 닮은 움직이던 황금 석상을.

아마 모르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명하게 찍혀 있던 왕실의 문양을 생각하면, 로티스 왕자도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게 내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로티스 왕자는 그저 나를 은인으로만 보고 있는 눈치여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로티스 왕자는 국왕이 있을 곳까지만 나를 데려다주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단단한 두 다리를 바닥에 딛고 서 있는 근위대들을 뒤로하고, 로티스 왕자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절반의 진심이지만,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영애의 결혼을 축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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