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1) (176/190)

에스핀 왕비의 인사말은 다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했다.

왕자의 짝이라.

몇몇 귀부인들의 표정이 변하는 건 당연지사.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귀부인들은 그저 우아한 공작새처럼 또는 검은색 비단옷을 두른 인형처럼 웃고만 있었다.

진심인지 겉치레인지 쉬이 파악하기 어려운 화법.

왕족들에게는 일종의 상식과도 마찬가지인 고급 화술이었다.

“숲의 모든 물기가 왕실에게 깃들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왕비님.”

귀부인들이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블란데아는 타고난 혈통이 아니더라도, 그녀 이미 본인 스스로가 대단한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군부에서 그녀가 제1 사령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귀부인들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르페브르 부인이 두 눈 뜨고 보는 앞에서, 블란데아 르페브르를 비웃을 만큼 간과 담이 큰 귀부인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방금 전 웃는 소리는 순전히 호의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르페브르 부인께서는 저리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서 참 행복하시겠어요.”

그중에서 특히 블란데아 르페브르에 대한 호감이 깊은 귀부인들이 그녀를 너 나 할 것 없이 칭찬해 주었다.

“영애는 아직도 엄격할 정도로 예법을 딱딱 지킨다니까요.”

왕도 사교계에서는 변화와 유행에 빠르게 반응했고, 그에 따라 왕실 사람들을 향한 딱딱하고 다소 고루한 인사도 조금씩 변형되거나 줄어드는 추세였다.

따라서 아직도 예법서에 적힌 인사법을 정석으로 왕비에게 건네는 블란데아가 왕도의 귀부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게다가 어찌 이렇게 미소가 상냥하고 부드러운지,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어요.”

“프로키온 총사령관님도 이런 모습에 반한 것이겠지요?”

“언제부터 혼인을 약속한 건가요,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왕도 사교계의 모두가 영애와 총사령관님의 결혼에 대해서만 얘기한답니다. 관심이 어마어마하다고요.”

“특별한 비사가 있다면 우리에게만 살짝 알려 줘요, 영애.”

블란데아가 어떤 말을 하든 내일이 오기 전에 왕도의 사교계에 소문이 들불처럼 퍼지겠지만.

블란데아는 일단 대답 없이 시녀장이 손수 채워 주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잎 하나하나를 진주처럼 동그랗게 말아서 그 위에 신선한 재스민꽃을 덮고, 일주일 동안 왕실의 창고에서 재웠지요. 왕비님께서 오늘을 위해 손수 고르신 특별한 차랍니다.”

시녀장은 품위 있게 블란데아가 마실 차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지만 그뿐.

왕비가 나서서 화제를 돌려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왕비 역시 블란데아의 대답을 듣겠다는 고상한 의지 표현이었다.

블란데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발그레한 뺨 위에 어린 미소는 봄꽃처럼 진실하고 수줍게만 느껴졌다.

“제게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셨답니다.”

“네?”

아네사는 하마터면 터질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블란데아와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번갈아 가며 그녀에게 큰 재미를 안겨 준다는 사실을 그 둘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매달리셨다고요?”

“어머!”

“세상에, 그 총사령관님이요?”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귀부인들의 눈이 하나같이 동그래졌다.

“드물게 연회에서나 볼 땐 정말 다가가기 어려운 차갑고 고고한… 인상이었는데!”

귀부인들의 흥분에 응접실이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

‘슐로이츠에 대해선 추측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일 테니까 뭐.’

모든 소문의 중심을 슐로이츠에게 돌려 버린 나는 사실 제법 즐거운 기분이었다.

간 크고 머리는 무식하지만 신분은 제법 높은 어느 영식 하나가 연회에서 다가와, 슐로이츠에게 친한 척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물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존경하는 총사령관님! 소문은 들었습니다. 르페브르 영애께 울며불며 결혼하자고 비셨다면서요?”

그 자리에 꼭 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왕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긴 했지만, 으레 이런 자리에서 주고받는 미소는 황금으로 조각한 아름다운 케이크 조형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에스핀 왕비는 귀부인들이 호들갑을 떠는 동안 한 줌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마 잠들어 있는 와중에도 똑같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즐거움은 없지만 보기에는 흠잡을 것 없는 왕실의 정석적인 가면이라고 할까.

에스핀 왕비는 찻잔을 한 번 기울인 후 말했다.

“르페브르 영애.”

“네, 왕비님.”

“결혼식에 쓸 티아라와 드레스를 미리 보여 주고 싶구나.”

“영광입니다. 왕비님. 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왕비가 보여 줄 티아라와 드레스를 기대하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웨딩드레스는 어머니가 입으셨던 것을 고쳐 입기로 하였답니다.”

“그래?”

에스핀 왕비는 어머니를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대대로 르페브르에 딸이 없었지만 이젠 아니니까요.”

“황공하옵니다. 왕비님. 아무래도 블란데아가 특별하다 보니, 그이도 기대가 많답니다.”

“아쉽기 그지없군요. 아무리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고는 해도, 르페브르 가문의 영애가 결혼을 하는데 왕실이 성의를 보이지 않기도 뭐하고….”

에스핀 왕비는 나를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왕비의 손짓에 따라, 시녀장이 내민 것은 꼭 왕도 거리의 최고급 의류점에서나 내놓을 법한 아름다운 의상 카탈로그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리된 드레스들이 하나하나 역사가 깊은 것들뿐이라는 것.

“라자크 왕실에는 보다시피 이렇게나 귀중한 드레스들이 많으니, 영애가 피로연에 입을 이브닝드레스라도 대신 하사하고 싶군요. 내 성의입니다.”

“황공하옵니다. 왕비님.”

사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내 치수에 맞게 고치고, 좀 더 세련된 장식들로 바꿔 다는 것보다 이브닝드레스를 마련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어머니는 웬만한 귀족가에서도 부르기 힘든 이름 높은 디자이너 한 명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셨다.

왕도의 이름난 디자이너들에게 죄 주문서를 넣어 내가 입을 드레스들을 의뢰했다고 하셨으니까.

덕분에 나는 약간의 의문도 들었다.

‘어머니가 사실은 나를 빨리 르페브르에서 치우고 싶은 게 아니셨을까…?’ 하는.

‘너무 신나신 것 같아.’

어쨌든 이브닝드레스만 아홉 벌을 맞춰 놓으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왕비가 이렇게 직접 이브닝드레스를 하사했으니 관례상 피로연에서 다른 드레스는 입을 수 없었다.

‘피로연에서 못 입게 돼서 아쉽지만, 나중에 입으면 되니까.’

왕비가 하사할, 정확히는 결혼식 날 빌려 줄 왕실의 귀한 다이아몬드 티아라까지 함께 구경하고 나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나는 생각보다 순순히 흘러가는 일정에 속으로 사실 좀 당황한 상태였다.

‘뭔가 내게 시비를 걸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저 두 아름다운 기사는 군부의 간부들이 아닌가요?”

귀부인 중 한 명이 그렇게 운을 뗐다.

나는 시선을 흘긋 던졌다. 왕실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에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단연 눈에 띄었다.

“어느 영애가 군부의 간부를 둘이나 호위 기사로 대동할 수 있겠어요.”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귀부인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걸 알 텐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그저 충실히 서 있기만 했다.

“저 두 기사는 혼약자가 있을까요?”

“제가 알기론 둘 다 없는 걸로 알고 있답니다.”

“영애는 잘 아는군요?”

“제 부하들이니까요.”

왕도 귀족 입에서 ‘부하’라는 말이 나오는 게 낯설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다만 귀부인들은, 내 생각보다 더 라파엘과 아그네스에게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딸들이 두 명 이상씩 있는 가문들인데. 괜찮은 사윗감으로 생각하나?’

군부에서도 지휘관 이상의 자리라면 확실히 탐나는 신랑감이긴 하니….

나는 귀부인들이 다른 화제로 빠져들자 적당히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며, 라파엘과 아그네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둘을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제까지는 슐로이츠 옆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정확히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새삼 라파엘과 아그네스도 적지 않은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만큼 제법 준수한 외양이긴 하구나.

‘근데 왜 저렇게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아깐 괜찮더니?’

귀부인들의 야릇할 정도로 노골적인 눈빛이 쏟아질 때는 완벽히 무표정을 유지하던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내가 좀 훑어보았다고 바로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게 내심 황당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냐고, 타박하는 의미로 가볍게 인상을 찡그려 보이자, 깜짝 놀란 듯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이 나를 참 의식하는 줄 알 것 같았다.

‘군부라면 모르겠는데….’

거기서야 저딴 행동을 해도 내게 겁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해석되겠지만, 여긴 사교계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 곳이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박자 늦게 피하는 귀부인들의 눈길들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늦었네.’

이제 내일쯤, 아니 오늘 저녁쯤일까?

왕도를 들썩이게 만드는 그 전설적인 총사령관인 슐로이츠는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에게 결혼하자고 울며불며 매달리고, 군부의 아름다운 두 기사는 상관의 약혼녀를 짝사랑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 같더라는 달콤한 소문이 왕도 사교계에 쭉 퍼질 것이다.

순전히 전자 정도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후자는 슐로이츠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나 역시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강압적인 분위기도 아니고, 오늘 바로 르페브르 저택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

별달리 문제는 없었다.

에스핀 왕비의 응접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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