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20) (175/190)

“총사령관이 거절했다고?”

“예, 왕비님.”

에스핀 왕비는 참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당장 왕궁에 오지 못하는 걸 두고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왕비는 슐로이츠 프로키온이라는 남자가 정말로 아쉽기 그지없었다.

르페브르라는 가문 자체의 배경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영애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인지.

어떤 이유든 그 대단한 총사령관은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에게 푹 빠진 게 보였다.

역시 어떻게든 막내 공주와의 결혼식을 밀어붙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미련이 이렇게 문득문득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가 일주일 후에 왕궁으로 오겠다고 했다니 그건 나쁘지 않구나.”

“왕비님의 초청을 왕국의 그 어떤 귀족이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르페브르라면 다르지.”

픽 웃은 에스핀 왕비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에 오지 않는다면 국왕 전하께서 분노하셨을 텐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구나.”

전혀 아쉽지 않은 어조로 에스핀 왕비가 달칵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사실은 이 모든 게 국왕이 원한 이야기였다.

***

‘왕궁으로 부르는 게 뜬금없다고 생각할 것까진 없지.’

덕분에 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지만.

하필 국왕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가득 차 있을 때, 왕비가 나를 왕궁으로 부르다니. 마음이 편하지 않긴 했지만, 당장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르페브르가 돌연 왕실에 선전 포고를 하지 않는 이상은 왕실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랬다간 이렇게 평화롭게 정리도 못 하고 있겠지만.’

엔리코르는 체류가 길어질 것을 예상하고 미리 가문의 학자들을 군부로 불러 놓은 상태였다.

‘엔리가 미리 와 있어서 다행인가?’

내가 부재해 있는 동안에도 군부에선 끊임없이 오파츠가 필요했다. 헥토르는 이웃 대륙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가호를 내리는 주기를 늘리는 연구에 매진을 하고 있었으니, 아마 곧 성과를 보여 줄 것이다.

‘애초에 지금 내 사령관 자리는 유효 기간이 있었고, 또 군부에 계속 머물 생각도 아니었지만….’

가호를 1년에 한 번 내려 주든 반년에 한 번 내려 주든 계속하기는 해야 할 텐데.

군부에서 어떤 자리로 성의 표시를 할지 기대가 됐다. 평소에도 은은히 압박을 넣는 수밖에.

슐로이츠가 나를 찾아온 건 일을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엔리코르가 오늘 안에 도착할 것 같다는 간단한 소식을 전해 준 그는 내 침대 쪽을 흘긋 보았다.

페니가 준비하고 있는 내 짐이 보였다.

“라파엘과 아그네스를 붙여 줄 테니 데리고 가.”

“둘을 전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군부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잖아. 중요하고 조속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도 산더미인데….”

“내겐 네가 제일 중요해.”

나는 순간 당황해 말문을 잃어버렸다. 슐로이츠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슐로이츠 프로키온의 딱딱한 손끝이, 내게는 이렇게 간지럽게 느껴진다고 말하면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

***

“따라서, 엔리코르 공자님?”

라파엘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저와 아그네스 경이 왕도에서 군부까지 블란데아 사령관님을 수행하게 될 예정입니다.”

“괜찮군요.”

“최선을 다해 호위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제가 총사령관님한테 죽… 는 게 아니라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블란데아 사령관님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서….”

라파엘이 헛기침을 섞어 가며 말했다.

엔리코르는 블란데아를 향한 총사령관의 성의 표시에 만족했다. 솔직히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의 표시 수준이 아니라 과보호….

‘그렇지만 무관심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엔리코르가 보기에 슐로이츠 프로키온의 대단한 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통제하면서도 그로 인해 생기는 업무적 과로는 본인이 전부 감당한다는 거였다.

아무리 체력이 뛰어나고 역대 다시 없을 대단한 성검 능력의 보유자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그 건조한 눈빛의 총사령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어마어마한 업무를 해결하곤 했다.

일 중독자 같은 면모로도 블란데아를 하루에 몇 번은 찾아가는 걸 보면….

‘그마저도 좀 자제를 하는 눈치던데.’

어릴 때 블란데아가 저 총사령관의 입에 특별한 독약이라도 흘려 넣은 게 아닌가 하고 짓궂게 웃다가도, 역시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남자라면 블란데아에게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엔리코르는 생각하곤 했다.

“엔리!”

늘 첫 만남에서만 엔리코르를 잠깐 반가워해 주는 블란데아가 익숙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뒤를 돌아본 엔리코르는 갑자기 머리 위에 툭 얹어지는 장신구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이게 뭐야?”

“내 결혼식 때 쓸 장신구 때문에 마네킹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다며? 선물이야.”

“이거 여성용 장신구잖아.”

“내가 만들었는걸? 오파츠로.”

“…오파츠? 잠시만. 그러네?”

다시 살펴보니 중앙에 달린 메인 보석을 떼어 내고 거기에 오파츠를 달아 놓았다.

엄밀히 말해 블란데아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우아한 귀족 입장에서는 수제품이라고 충분히 생색을 낼 만큼 품이 들었다.

엔리코르는 난연한 빛을 뿜어내는 오파츠를 손가락 두 개로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이마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근데 이게 여성용 장신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

“블란아? 블란데아 르페브르?”

결국 엔리코르는 장신구를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쑤셔 넣고 블란데아와 함께 왕궁으로 가기 전 마지막 일정을 위해 장소를 옮겼다.

르페브르의 요청에 따라 군부에서는 계속해서 괴수를 생포했고, 이제는 살아 있는 괴수를 효과적으로 가둬 놓기 위한 장소까지 따로 마련해 두었다.

엔리코르는 블란데아에게 물었다.

“괴수를 지키는 기사들을 한 시간에 한 번씩이나 교대할 필요가 있어? 조금 과하잖아.”

“혹시 모르잖아? 괴수에게 오염될 수도 있는데 확실히 검증된 것도 아니고.”

블란데아는 창살 안을 살펴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과하다고 해도, 군부에는 넘쳐 나는 게 기사들인걸.”

고민 많은 표정으로 괴수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블란데아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만, 엔리.”

“응? 왜?”

“제1 사령관이 까라면 까야지, 감히 투덜대는 놈들이 있었어? 아니지?”

‘…얘가 이렇게 말투가 난폭해졌다는 걸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기겁하실까….’

엔리코르는 어깨를 으쓱한 후 말했다.

“그래서 블란아. 따로 나한테 할 말이 뭔데? 궁금한 게 있다고 괴수를 보러 가자며? 그것도 오늘 아침에 당장.”

“갑자기 생각이 난 걸 어떡해. 루리 로시에를 간호하다가….”

“로시에 영애를?”

블란데아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루리를 찾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기다렸다.

왕궁에까지 루리를 데려갈 수는 없어서, 로시에 가주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대신 하루에 여섯 시간은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태양이 가까워지면 대지를 감싼 공기가 뜨거워지고, 어두운 밤이 오래 지속되면 창공 아래 선 사람들이 깊은 우울감을 느끼게 되듯이, 블란데아는 루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뜻밖의 일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루리가 비록 잠꼬대뿐이지만 말을 점점 길게 하고 있어. 어쩌면 영원히 단어 몇 개만 읊조릴지도 모른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알 수가 없었다.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이었던 루리 로시에는 도대체 어디를 다쳤던 걸까?

그녀는 목을 다친 것도, 머리가 다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의사가 먼저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루리 로시에는 심각한 내상도 없는 상태로, 그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나아지고만’ 있었다.

르페브르의 이능에 반응해서 그렇게 눈에 띄게 치유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르페브르의 이능은 기본적으로 ‘정화’인데.

그러면 말이 좀 더 이상해졌다. 만약 루리 로시에가 치유가 아니라 정화되는 거라면….

“엔리. 가호는 사람의 입술에 내리는 거잖아.”

“그렇지.”

손등이나 뺨에 가호를 내릴 수 있다고 해도, 르페브르에서는 가호의 기본을 이미 ‘입술’로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럼 괴수에게 가호를 내리면….”

“너나 나나 얼굴이 뜯어 먹혀 죽겠지?”

“응. 그렇겠지. 그럼 괴수의 입 안에 오파츠를 대신 밀어 넣으면?”

엔리코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오파츠를?”

“그러면 어떻게 될까?”

엔리코르는 이미 개발이 끝난 특수한 먹이 안에다가 아름다운 빛깔의 오파츠를 밀어 넣은 후 쇠창살 안으로 던졌다.

괴수는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을 뜯어 먹기 때문에, 저 먹이를 개발하는 것도 힘들었다.

사실 말이 먹이지 먹지도 않고 그저 이빨로 한 번 뜯었다가 뱉어 내곤 했다.

“……?”

가늘게 눈을 뜬 채 괴수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던 엔리코르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왜… 저렇게 되지?”

***

“정말로 오랜만이에요. 르페브르 부인.”

“이리 직접 티 파티에 초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왕비님.”

“인사는 이쯤하고 자, 어서 차부터 들어요. 여러분들도요.”

에스핀 왕비와 아네사 르페브르를 둘러싸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왕비와 친한 귀부인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 응접실.

에스핀 왕비가 손수 골랐다는 타국의 귀한 찻잎이며, 질 좋은 암염. 나무 설탕, 풍미 좋은 우유와 생크림을 듬뿍 사용한 쿠키와 케이크들이 탁자와 트레이 위에 가득했다.

“왕비님.”

물 흐르듯 티 파티가 진행되던 와중, 시녀장이 와서 귓속말을 전했다.

에스핀 왕비가 우아하게 웃으며 어서 데려오라고 일렀다.

귀부인들이 호기심 섞인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오는군요.”

“오늘의 주인공이라면…?”

시종장이 문을 열어 주었고, 안으로 들어서는 금빛 머리카락의 레이디를 본 귀부인들이 놀라서 소곤거렸다.

“최근엔 군복 입은 모습만 봤던지라 잠깐 잊고 있었네요.”

“드레스 입은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지….”

“실로 요정 같은 분위기네요. 역시 르페브르는 르페브르라….”

에스핀 왕비가 웃으며 반겼다.

“어서 오렴,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이토록 아름다운 영애의 모습을 보니 조금 서글퍼지는구나. 역시, 왕자의 짝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