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고백을 거절해야 할 때는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할 만한 말들이 있겠지. 많겠지.
가령 미안하다거나, 나는 네가 아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거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먼저 흘러나온 말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아주 예전부터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었다고.
너무 일찍이라서, 나조차도 정확히 언제인지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니까. 정체불명의 신관들이 아무리 내가 알던 모든 것을 헤집어 놓았다고 해도, 일평생을 믿어 왔던 것이 단숨에 사라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내겐 여전히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고, 무지개는 비가 그치고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슐로이츠를 좋아해서….
작은 불씨가 온 산맥을 살라 버릴 만큼 거대해지는 경우는 드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죽었다 태어난 후에도 슐로이츠라는 불씨를 꺼뜨리지 못했다.
나를 빤히 보던 힐드온 케트펠이 시선을 돌렸다.
자존심 빼곤 시체인 힐드온의 성격상, 내 앞에서는 어떤 충격도 내비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나를 다시 응시하는 독특한 빛깔의 눈동자는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내심 놀라고 만다.
“…그래도 아직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힐드온은 인생의 절반을 과격한 혈기로 살아온 주제에 가끔은 이렇게 축 처져 차분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어느 정도 깨달았다.
작중에서 힐드온은 여주인 루리 로시에에게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그 역시 약점을 내보이는 상대가 있긴 했다.
그게 슐로이츠였다.
자신보다 강하고, 어른이며,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누구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자존심 강한 힐드온조차 유사시에는 기꺼이 따라야 한다고 본인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람.
힐드온은 오직 그런 사람 앞에서만 약한 모습을 일부나마 보이곤 했다.
나는 그제야 힐드온이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의 결을 어느 정도 만져 낼 수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것조차 버거운 듯 몇 번이나 눈길을 피했던 주제에, 지금은 또 내 시선을 오기처럼 받아 내는 모습은 울다 지친 어린애처럼 보였다.
나에 대한 힐드온의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의 이상향을 동경해 조각상을 사랑한 조각가와 다르지 않았다.
조각가는 결국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하고서야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으니, 힐드온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는 루리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여자를 만나면 정말로 사랑에 빠지겠지.
동경과 애정을 착각하고 있는 지금 같은 경우가 아니라.
나는 그렇게, 다소 오만한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힐드온.”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정말 그를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피하기 위해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중엔 슐로이츠의 목숨조차 들어가 있었으니, 이미 읽었다는 미래를 내 입으로 조금이나마 읊는 건 내키지 않았다. 조금 섬뜩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내가 힐드온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애초에 많지가 않았다.
“왕실에서 보낸 편지를 언제 받았어?”
“…오늘 받았습니다.”
“정 거절 편지를 쓰고 싶다면 지금 곧장 쓰도록 해.”
힐드온의 마음이 어떻든, 라자크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수많은 예법을 엄격히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예 거절은 어렵겠지만 예의 있게 나중으로 미룰 수는 있어. 네 나이와 퇴단 시기를 고려하면 1년까지는 괜찮겠지. 그 이상은 현실적으로 무리고.”
내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힐드온은 그저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왕비님에게 갖춰야 할 답장 양식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나온 목소리는 평소와 그렇게 다르지 않게 들렸다.
“전 아직 군부에 속해 있으니 케트펠에 갈 수도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쳐 달라고?”
“제 상관이시잖습니까?”
그 정도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말마따나 나는 힐드온의 상관이기도 하고.
나는 힐드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하는 힐드온의 눈가는 조금 더 붉게 변해 있었다.
***
왕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귀환한 슐로이츠는 목까지 올라오는 군복 단추 두 개를 끌렀다.
갑갑했다.
온갖 중요하고 공적인 업무들이 기가 질릴 정도로 쌓여 있는 와중에도, 슐로이츠의 신경을 죄 뺏는 건 따로 있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슐로이츠의 친부인 전 프로키온 공은 진심으로 그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슐로이츠가 열 살 이후에 쫓겨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주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유모나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천대받는 소년을 매질할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는 가정 교사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기는 했다. 아득바득 배워야 살아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귀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나 교양.
다만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가문의 영애, 그래서 슐로이츠 본인조차 심심찮게 ‘공주님’이라고 빈정거렸던 여자와의 결혼식에서는 뭘 어떻게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 것을 배우기 전에 슐로이츠는 정해진 수순처럼 빈민가로 버려졌고, 그 이후엔 프로키온 가문이 아예 풍비박산이 났다.
사실 그때만 해도 번듯한 결혼식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기도 했고.
슐로이츠는 생의 거의 대부분을 ‘엔리’라는 소녀를 향한 집착과 분노, 굴욕과 수치감을 되새기는 데 소진했다.
그 당시 느꼈던 적나라한 감정들이 그러했다.
그 서툰 감정 중 단 한 줄기도 차마 털어 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내 본 적이 없었다.
사소한 무언가라도 손에 쥐지 못하고 놓쳐 버린다면, 얼굴도 가문도 진짜 이름도 알려 주지 않은 주제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익사시킨 그 소녀를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슐로이츠는 내내 그런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어릴 적에도 그랬고, 어른이 된 후에도 그 흔적에 짓밟혀 있었다.
그러니까 슐로이츠는 주어진 시간의 거의 전부를 블란데아 르페브르에 대한 갈망에 소진했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군부의 총사령관이 의무와 권력을 동시에 지게 되는 자리라고 해도, 일단은 국왕을 제외하고는 라자크 왕국의 명실상부한 권력자였다.
군부가 평소 정도로만 바빴어도, 슐로이츠는 곧장 프로키온 성과 저택으로 갔을 것이다.
이토록 신경이 쓰여 미치기 일보 직전인 결혼 준비에 매달리기나 했겠지.
하지만 빌어먹게도 상황이 상황이라 슐로이츠는 군부에서의 책임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덕택에 군부와 르페브르 저택, 프로키온 성을 왔다 갔다 하는 전령들만 바빠졌다.
슐로이츠는 깃펜으로 공문서에 서명을 하다 말고 문득 멈췄다.
블란데아가 무슨 꽃들을 좋아하더라?
무슨 꽃을….
어떤 색의 꽃들을 좋아하지?
귀족들이 결혼식을 올리려면 꽃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결혼식장을 장식하는 데 많이 쓰이는 꽃들을 죄 모아 성에 비슷하게 장식해 놓으면 너무 무성의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던가?
그는 정말 난처할 정도로 블란데아에게 온 신경이 쏠린 상태였다.
“…….”
슐로이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블란데아의 어머니인 아네사 르페브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에 도착하는 슐로이츠의 편지를 볼 때마다 남편인 레너드와 함께 소리 죽여 웃는다는 사실을.
***
총사령관 집무실의 불이 밤새 꺼지지 않은 게 벌써 나흘이 다 되어 갔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과 또 여러 가지 보고할 용건도 있고 해서 슐로이츠를 보러 갔다.
아그네스를 비롯해 수많은 보좌관이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나를 본 그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지만 손에 들려 있는 서류 뭉치만 봐도 기가 질렸다.
당장 들어가자니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아그네스에게 물어 그나마 숨을 좀 돌리는 시간을 알아냈다.
“……?”
막상 가니까 이상할 정도로 보좌관들이 없이 집무실이 텅 비어 있었지만.
“앉아, 블란데아.”
나는 슐로이츠의 옆에 앉아 그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슐로이츠는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며칠이나 밤을 새워 몸을 혹사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쌩쌩해 보이기도 했다.
‘사람이 체력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슐츠.”
사령관이라는 자리 덕분에 나는 슐로이츠가 대략 얼마큼의 일들을 합산해 처리하고 있는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급증하는 오파츠 수요로 인해 바쁜 건 매한가지였지만, 적어도 슐로이츠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내가 일을 좀 가져가겠다고 말하자 슐로이츠는 단칼에 거절했다.
“네게 일을 넘길 정도로 바쁘진 않아. 평소 정도고.”
‘도대체 어디가?’
“…아무래도 결혼식을 좀 미룰까?”
“아니.”
“하지만 이렇게 바쁜데, 결혼식까지 신경 쓰려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이딴 일들보다 너와의 결혼식이 더 중요하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쓸데없는 말이라고?”
“그래.”
슐로이츠가 날 배려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진심인지 조금 헷갈렸다.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괜찮아.”
내게 자리를 권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책상 위의 서류를 확인하고, 서명과 반려를 반복하던 슐로이츠의 깃펜이 뚝 멎었다.
그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피로가 가볍게 쌓인 낯으로도 눈빛만은 늘 그랬듯 형형해서 나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전처럼 프로키온 성에 처박히고 싶은 거면 한 번 더 그렇게 말해 봐. 블란데아 르페브르.”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분도 잠시.
관저로 돌아온 나는 뜻밖의 전령을 맞이하게 했다.
“오,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축하드립니다.”
왕궁에서 온 전령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왕비님이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영애에게 티아라와 드레스를 하사하기로 하셨습니다. 함께 왕궁으로 가시지요.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