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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꼭 하나만은 내 마음속을 쉬지 않고 맴돌았는데, 바로 내 손을 잡은 그의 체온이었다.
“아까의 대답이나 마저 들어야겠군. 어쨌든 아직까지는 내가 네 상관이라.”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래.”
나도 슐로이츠처럼 모든 결정을 바로 내릴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밝은 별도 태양 앞에 서면 그저 작은 점 하나로 전락해 버리는 것처럼, 나는 슐로이츠의 냉혹한 단호함이 종종 부러울 때가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이 비참한 자괴감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이 태양 같은 남자가 갈망하는 단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슐로이츠를 무서워했던 과거가 까마득한 예전처럼 느껴진다.
“난 너처럼 바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은 몰라.”
취기가 어린 뺨은 아직도 뜨끈했다.
“사실 자신이 없어.”
내가 왕실 전복을 원하는지, 국왕 살해를 원하는 건지.
둘 다 엄청난 표현들이었지만 현실로 잘 와닿지 않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먼저 길을 터 준 슐로이츠 덕분일지도 몰랐고.
“결론을 내라고 한 적 없잖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쳐. 너는 네 상관을 무시하는 경향도 넘치게 있고. 알고는 있나?”
“도대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기가 막혀 되묻던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슐로이츠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슐로이츠만 졸졸 따라다니던 토벌 때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슐로이츠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그늘에서 사는 삶을 꿈꿨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을 때는 무언가에 휩싸인 듯 단단한 안정감이 드니까. 그런 식으로, 안락한 지휘관으로 살아가는 삶도. 어쩌면 나는 마음에 들어 했을 것만 같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랐어.”
그러니까….
“할 수 있다면 너와 함께.”
귓가를 따뜻하게 만드는 열기가 독한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구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쯤 들뜨고, 꿈속에 있는 기분. 울긋불긋 피부 위로 올라온 발그레한 색깔들.
나는 취기라는 핑계 아래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
“아니, 왕국의 귀족들은 전부 르페브르라고 하면 껌뻑 죽는 거 아니었나?”
라파엘은 씩씩대면서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번 사고의 책임을 은근히 블란데아 사령관님에게로 돌리려고 하잖아?”
방금 전 아그네스와 함께 귀족원의 사절단을 접견하고 온 라파엘은 듣다 듣다 기가 막혔다.
“세상에 사랑만 받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파엘 경?”
“하지만 르페브르는, 블란데아 사령관님은 이능을 갖고 계시잖아?”
넓게 펼쳐진 초원. 맑게 흐르는 냇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깨끗하고 상쾌한 바람을 증오하는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이능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르페브르의 직계와 마주치지 않고 빙 둘러 가는 귀족들의 얘기는 들은 적 있습니다.”
“뭐? 현혹?”
아그네스의 말에 라파엘은 기가 찼다.
“르페브르를 전염병 취급하는 염병 같은 놈들이 있긴 하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에 사랑만 받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라파엘 경.”
“나 참. 뭐… 르페브르가 크긴 하지. 큰 산에는 온갖 짐승이 꼬이는 법이고.”
그나마 르페브르가 정화의 이능을 갖고 있어서 귀족들에게 이 정도로 무해하게 느껴지는 것일 터다.
신관들은 왕궁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블란데아 르페브르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런 신관들이 하필 군부에 와서 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귀족원에서는 사절단을 보내 염려와 의견을 전달했다.
라자크 왕실은 본래 거대한 나라였고, 귀족원 역시 규모가 엄청 났다.
당연히도 르페브르가 중심을 잡고 있는 귀족원에서도 사익을 위해 세력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법이었다.
“빠진 자식들. 다들 블란데아 르페브르라는 사람한테 기합을 받아 봐야….”
중얼거리던 라파엘의 말이 뚝 끊겼다. 습관적으로 창밖을 살펴보던 그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왜 저기에서 연기가 나지?”
라파엘이 바로 벌떡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던 그의 몸이 순간 굳었다.
쾅!
동시에 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신관들이 머무는 별채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
“벌써 두 번째입니다.”
“다행히 이번엔 사상자가 없었으나, 신관 중 두 명이 심각한 화상을 입고 집중 치료 중입니다.”
긴급히 열린 군부 회의에서 아그네스가 죄인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검역을 강화했으나 도대체 어디서 흘러들어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관들의 사고를 핑계로 왕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절단이 내려왔습니까.”
“거기 섞여 있으면 알기가 어렵지.”
“문제는, 이번에 또 사고가 터졌으니 여기저기서 계속 사절단을 보내올 거라는 사실입니다.”
상석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던 슐로이츠가 툭 입을 열었다.
“지랄 같게도 악순환이군.”
기사들은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슐로이츠의 바로 오른쪽 자리를 눈동자만 굴려 훔쳐보았다.
제1 사령관의 자리.
이 회의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비어 있는 의자였다.
만약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으면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저런 험한 말을 썼을까?
“흠흠.”
“각하. 이렇게 되면 군부의 인력 낭비가 심해집니다.”
“무엇보다 한 번 더 문제가 생기면 어느 쪽도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
“세상에. 누가 봐도 날 노린 거잖아?”
나는 기가 막혔다.
신관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공간의 책임자는 군부였고, 신관들의 공식적 보호자는 르페브르였다.
군부와 르페브르의 교집합?
당연히 나였고.
“날 뭐 왕도로 압송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면 군부에서 쫓아내려고?”
나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왕실과 르페브르가 반목을 하는 것도 아닌데. 순순히 군부에서 나오기를 바라나?”
“…저기, 죄송하지만 블란데아 사령관님?”
라파엘이 대단히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다가는 군부에서 왕실과 전쟁을 일으킬 겁니다.”
“…….”
“아직 각하의 성격을 좀 덜 파악하신 모양이지요.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봐도 사령관님은 이 왕국, 아니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각하의 성격을 모르셔도 되는 단 하나의 존재….”
라파엘은 슐로이츠를 제외하면, 내가 신관들의 사건에 ‘왕실’을 엮어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슐로이츠의 압도적인 지위와 나의 신분을 생각하면 좀 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비상책은 꼭 필요했으며, 라파엘만큼 적임자가 없기도 했다.
물론 라파엘은 다 아는 건 아니었으나 충실하게도 다른 건 전혀 되묻지 않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라파엘은 참 살리기 잘했어.’
내 독백은 역시 저 물건은 사길 잘했어, 라는 쇼핑 중독자의 흡족함과 닮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쇼핑 놀이와 동일시하는 걸 보니 내 인성도 알 만했다.
그리고 나는 그 좋지 않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수란 같은 인성으로 신관들의 처분을 결정했다.
“신관들은 전부 왕실로 보내야겠어.”
“예, 좋죠. 왕실로…. 예? 왕실요?”
순간 라파엘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왕실입니까?”
“왕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왕실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곳이 왕실 말고 더 있어?”
“그건….”
라파엘은 한 대 맞은 듯한 눈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대외적으로 왕실이 신관들을 보호해야 할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 해. 세간의 압박에 이기지 못해 신관들을 데려가야 하는 일이….”
순간적으로 로티스 왕자가 생각났다. 그는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긴 한데, 어떻게 이용을 해야 하지?
“라파엘 경?”
“아.”
라파엘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이내 정신이 든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상관의 명령은 일단 복종하고 보는 군부의 방식이 참 편하다. 이럴 때는 특히.
그때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본 나는 당황해 말문을 잃었다.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
“…밖에서 다 듣고 말았네요? 블란데아 사령관님.”
순간 황당한 기색이던 라파엘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럴 때의 나는 종종 라파엘이 암살자처럼 느껴지곤 한다.
사실, 슐로이츠 휘하의 지휘관들이 전부 그렇게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가끔 있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온 왕국을 통틀어 이 지옥에서 아득바득 살아남은 대단한 기사들이라 그런 걸까? 생존 욕구가 인생의 동력이었던 이들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 쇠심처럼 느껴질 때가 드물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격자를 해결하겠다며 티타니아의 목에 망설임 없이 철끈을 매달아 졸라 죽일 것 같은데….
티타니아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 문제라면 로시에 가문에서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도와드리겠습니다.”
***
“티티에게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티티? 애칭인가 보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는 끝까지 티타니아에겐 어떤 애칭도 없었는데.
그렇게 건조하고 원망하는 사이로 서로를 증오하다가 파멸로 들어서는 게 결말이었는데.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에 앉은 로시에 가주를 응시했다.
“블란데아 영애. 기억의 수반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300여 년 전 로시에 가문에서 만들어 낸 성물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라자크의 땅을 밟는 귀족들 중 감히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그 수반에….”
로시에 가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목을 한번 내려다보았는데, 누가 보아도 귀족 소녀가 만들어 준 게 틀림없는 애뮬릿 팔찌가 매달려 있었다.
라자크 사교계에서는 보통 딸이 아버지에게 주는 선물인데….
‘실력이 엉망이네.’
“티티가, 아니 티타니아가 만들어 준 겁니다.”
“잘 만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