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를 겨우 진압했습니다. 각하.”
라파엘이 젖은 얼굴로 말했다. 슐로이츠가 눈썹을 슬며시 치켜올렸다.
“이제?”
“…계획적인 방화 같습니다. 기이하게도 불꽃이 잘 꺼지지 않았습니다.”
“흑마법이군.”
군부의 총사령관이란 자리는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기밀도 알고 있는 법이다. 다만 슐로이츠는 화재 건에 대한 보고서를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라파엘.”
“예, 각하.”
“블란데아를 불러와. 그리고 엔리코르 르페브르 공자도.”
“알겠습니다.”
라파엘은 다행히 신관들은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도 전하며, 블란데아를 보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신관들이 암살당할 뻔한 것 같습니다.”
흑마법이란 단어는 일부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떤 단어는 파괴적이고 불길한 힘이 있어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니까.
블란데아가 턱을 가볍게 감싸고 중얼거렸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예?”
“혼잣말이야.”
혼잣말… 농담….
그런 종류가 아닌 것 같았는데.
평생 슐로이츠를 보좌하느라 윗사람의 심기를 파악하는 데에 특별히 뛰어난 라파엘은 웃고 있는 얼굴의 블란데아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겉만 웃고 있을 뿐, 표정은 굳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각하께서 호출하십니다. 공자님도 함께요.”
“…오라버니도? 알았어.”
라파엘은 멀어지는 블란데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최대한 빨리 범인을 찾아 질질 끌고 오겠다며 다짐했다.
***
“불이 잘 꺼지지 않았지.”
엔리코르는 붉은빛이 감도는 잿더미를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신관들의 숙소가 전소되고 남은 흔적인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일반적인 잿더미와는 퍽 달랐다.
물론 건물을 살라 먹던 불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 시꺼멓고 불길한 화염은 꼭 인간을 태워 만든 불꽃 같았다. 악몽에 잠겨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 같은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꿈자리는 사납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엔리코르가 잿더미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가까이 가니까 불이 점점 사그라졌단 말이지.”
마치 누군가 계속 연료를 주입하는 것처럼, 잘 꺼지지 않아 기사들이 고전하던 불길이었다. 그런데 화재 소식을 들은 엔리코르가 허겁지겁 달려온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한테 갑자기 불을 끄는 힘이 생긴 것도 아닐 거고. 알고 보니 물의 요정이었다는 건 더더욱 아닐 거고.
엔리코르는 손바닥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르페브르의 이능이 흑마법에 대항할 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다가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라온 블란데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길에 스러지는 건물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때부터 그 새까만 불길이 맥을 추지 못하기 시작했다.
엔리코르는 헥토르가 돌아오는 즉시 해 봐야 할 연구 목록을 머리에 추가하며 자신을 데리러 온 기사를 따라갔다.
총사령관의 집무실에 도착한 엔리코르는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란데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슐로이츠는 책상에 걸터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르페브르의 힘이 흑마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매부.”
생각지도 못한 예리한 추측에 엔리코르는 속으로 당황했다. 일단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엔리코르는 한 박자 늦게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잠깐.’
…내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저 총사령관이 내게 공대를 했나?
공대도 공댄데… 뭐?
매부?
매부라고?
“매….”
“음?”
슐로이츠가 보고서에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엔리코르가 당황해 눈길을 휙 돌렸다. 슐로이츠는 재촉도 하지 않고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저 총사령관의 고압적이고 서늘한 얼굴은, 갑작스러운 사고 탓에 묘하게 곤두선 채였다. 거대한 군부에 군림하는 자로서 피할 수 없을 그 책임감.
다만, 그의 수려한 낯에 드리워진 미묘한 예민함은 아무래도 여자들의 마음을 아주 못되게 술렁이게 할 것 같다는 객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새삼 엔리코르는 블란데아가 슐로이츠의 얼굴만 보고 약혼자를 고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교계에 총사령관을 사모하는 레이디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를 알겠네.’
사교계에 참석은커녕 얼굴도 잘 안 보이는 남자가 이렇게나 오래 인기가 식지 않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질 않은가.
‘뭐, 이젠 블란이 거지만.’
엔리코르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르페브르의 힘이 흑마법을 무력화하는 것 같다고 했지.
아까 전 엔리코르가 했던 추측과 거의 동일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말씀하신 것은… 당장 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저 역시 총사령관님과 같은 추측을 했습니다. 블란이가 도착하는 순간 화마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지요.”
슐로이츠는 가볍게 턱을 끄덕이며 다시 보고서를 넘겨 보았다.
“음, 총사령관님.”
“말씀하십시오.”
슐로이츠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매부란 말 한 번 더 들어 보고 싶은데,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딱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똑똑.
집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엔리코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서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저 총사령관이 시선을 훅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주인의 기척을 감지한 …개?’
겨울 설산이 봄바람에 덧씌워지듯, 놀라울 정도로 눈빛이 확연히 풀어져 있다.
슐로이츠는 아예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슐츠… 엔리? 와 있었네?”
‘이것 봐라….’
슐로이츠가 문을 열자 앞에 서 있던 블란데아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엔리? 표정이 왜 그래?”
넋이 나간 것 같다고, 화재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블란데아가 묻고서야 엔리코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 얘기 들으셨나요? 르페브르 영지의 땅값 근황이 심상치 않더군요.”
“음? 그쪽은 원래부터 지대가 비쌌잖습니까.”
“어머,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요.”
귀부인 중 하나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공작새의 꼬리털이 나긋하다.
“군부령에서부터 금사 기둥이 힘을 잃고 있다잖아요? 듣기로는 나무에 퍼진 전염병처럼 점차 힘을 잃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죠.”
“아?”
군부령과 정반대에 있는 곳은 르페브르 영지였다.
“전염병이 퍼진 곳에서는 가급적 멀어져야 안전하니까요. 저희도 르페브르 영지 쪽에 머무를 별장을 알아보고 있답니다. 이번 사교 시즌이 끝나면 한동안은 그곳에 가 있을까 하고요. 아니면 아이들이라도 보내 놓든지.”
사정이 딱한 영주라면 모를까, 다른 가문도 아닌 르페브르에서 쉽게 땅을 팔 리는 없었다.
하지만 르페브르의 풍요로움을 사랑하는 귀족이 적지 않았기에, 르페브르 영지에서는 수백여 채의 타운 하우스를 별장 개념으로 대여해 주고는 있었다.
어쩌면 왕도의 타운 하우스가 텅텅 비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흘러나왔다.
“르페브르는 황금을 갈퀴로 쓸어 모으겠습니다, 과연 축복받은 가문이라 남다르네요… 라는 말이 사교계에서 떠돈다는군요. 부왕 전하.”
1왕자 로티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도 국왕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흰 담비 털을 댄 호화로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르페브르는 본래 부유하지.”
“예. 부왕 전하.”
“그나마 이번 대에는 자식이 둘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구나.”
근래 들어 로티스가 느낀 것은, 국왕이 조금 변했다는 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난봉꾼에서, 이렇게 간혹 군주 같은 냉철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랫도리를 방종하게 놀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어머니인 에스핀 왕비도 근래는 조금 신경질적인 모습이 덜했다.
1왕자 로티스가 어릴 때부터 평생 꿈꿔 왔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르페브르 부부는 둘째 딸을 몹시 아끼니,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에게도 제법 많은 지참금을 내어 줄 것이다.”
광활한 영토며 광산, 섬….
“그동안 르페브르가 독식하던 것이 조금이나마 나뉜다는 소리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순금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여자의 나긋나긋했던 목소리가 떠오르자 로티스의 목 아래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부왕 전하. 그렇게 갈라져 봤자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곧 슐로이츠 프로키온의 부인이 되질 않습니까?”
“그렇지. 그 총사령관이 그렇게 애달아 하는 건 나 역시 오랜만에 봤어.”
오랜만? 예전에 또 보신 적 있다는 말인가?
그 총사령관이?
사소한 의문을 금세 털어 버리고, 로티스는 입을 열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이미 가진 게 많습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와 결혼을 하게 되면 오히려 거대한 두 가문이 생겨 왕실에 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국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티스와 시선을 맞췄다.
로티스는 스스로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국왕에게도 그렇게 들리기를 빌었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공적인 이익만을 철저히 따져 말했다.
“부왕 전하. 저와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의 결혼을 주선해 주십시오. 그러면, 르페브르의 일부가 왕실에 귀속….”
“안 된다.”
“…제가 모자라다면 부왕, 제 동생들 중에서라도 블란데아 르페브르와 연결시켜 주십시오.”
“네 동생 중 하나라면, 힐드온 케트펠?”
순간 로티스의 얼굴이 굳었다. 국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국익을 생각하는 네 마음이 장하구나, 로티스. 하지만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감히 너희가 소유할 수 없는 여자다. 사실 그 누구도 말이지.”
로티스의 심장이 한순간 달음박질쳤다. 불쾌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
국왕의 지긋지긋한 여성 편력이 떠오른 까닭이다.
설마….
돌처럼 굳어 있는 아들의 빤한 속내를 짐작한 듯, 국왕 파에톤 2세는 체통도 없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부자끼리 대화하니 좋구나. 그러니 특별히 네게만 비밀을 알려 주마.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곧 죽을 운명이란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