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주의가 아니었다.
블란데아는 종종 숨이 턱 막히게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실 그녀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아무리 고개를 꺾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높은 해일 같은 혈통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또는 기적으로 칭해지는 오파츠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신의 은총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비단 라파엘뿐만 아니라 기타 기사들도 종종 스멀스멀 넘어가는 경우가 잦았다.
오로라의 황홀함에 홀려 장막 뒤에서 추락하고 있는 신의 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치들이나 다름없이.
“…지도를 보여 주시오.”
아까와는 달리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근위대들을 보자 라파엘은 그냥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웃음이 나와 미칠 것 같았다.
‘와중에도 착각에 빠져 있네.’
부단장은 온 신경이 블란데아에게 쏠려 있었다. 눈치만 살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식견이 짧아서야…. 근위대들은 죽음의 공포를 별로 겪지 못했던 모양이군.’
블란데아는 그나마 말로 끝냈지만 다른 하나. 그러니까 라파엘조차 몇천 번쯤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했던 성격 더러운 남자는 말 따위로 끝낼 만큼 자비롭질 못했다.
***
슐로이츠는 디오스에게 새로운 사실을 보고받고서는 금사 기둥을 확인했다.
국왕이 관심을 더럽게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이제까진 군부에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던 남자가 말이다.
벌써 일주일. 군부에서는 강도 높은 유적 탐험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블란데아는 데려오지 않았다. 슐로이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금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짙은 금발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손끝으로 가볍게 돌려 보았다. 가슴 안에 뜨거운 물이 한가득 차오르는 기분은 언제나 낯설고 조금은 두렵다.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두렵다.
이렇게 종종 질식하겠지.
“각하. 근위대에서 군부의 여로를 공유하길 원합니다.”
“공유?”
슐로이츠는 주웠던 나뭇잎을 군복 안에 넣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명령을 굳이 들을 필요 없다고 전하지 않았나?”
“물론 이미 전했지만….”
“다시 전해. 군부는 군부. 근위대는 근위대. 내 명령 따위 들을 필요 없다고.”
슐로이츠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정 함께 움직이고 싶으면 대기하라고 전달해.”
디오스는 고개를 숙이며 오랜만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췄다.
사실 이 총사령관은 성격이 아주 더러웠다. 정말 가끔은 묵묵한 디오스도 등골이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존명.”
***
“제기랄!”
근위대 부단장이 씨근덕거렸다.
“여로를 공유할 필요 없다고? 같이 가고 싶으면 기다리라고?! 라자크 왕실의 근위대를 한낱 용병처럼 취급하다니!”
우리더러 이 미지의 위험 지대를 알아서 살피란 뜻이질 않은가!
차마 자존심이 상하여 소리치지 못한 말이었다.
“경들도 전부 군부에 주눅 들어 있잖아!”
여로에 끼워 주질 않으니 눈치껏 따라 해야 했다.
기사들 사이에서 ‘눈치껏’ 행동하는 것만큼 서열을 정하게 만드는 행동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부단장님…! 어쩔 수 없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지 않습니까!”
“예, 게다가 저희는 군부 기사들만큼 이 폐허의 유적에 익숙하지 않잖습니까….”
“누구라도 쩔쩔맬 겁니다.”
하나같이 약한 소리였다.
“이딴 식으로 본을 잡아 보겠다 이거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그래 봤자 반역자의 피가 흐르는 놈인데. 그놈의 성검 실력만 아니었어도 제가 감히 왕실 근위대의 부단장인 자신에게 이따위로 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검을 챙겨라!”
정 함께 움직이고 싶으면 충분히 기다리라는 권고를 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리는 국왕 전하를 호위하는 근위대로서의 긍지를 지켜야 한다! 애초에 군부에서도 완벽히 유적의 지도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그들이나 우리나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이냐!”
어차피 모든 금사 기둥이 힘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근위대는 모름지기 고귀한 혈통, 뛰어난 실력, 올곧은 명예를 지닌 최고의 기사들만으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그 어린 프로키온이, 그 아름다운 르페브르 영애의 총애를 받으며 여기서는 작은 왕처럼 군림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부, 부단장님!”
황급히 따라오던 근위대 기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괴수들입니다!”
“괴수‘들’?”
뒤를 돌아본 부단장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순식간이었다. 웃는 얼굴로 달려드는 기괴한 괴수들. 순식간에 생성되는 오파츠의 방어막은 죽기 전 귓가에 울리는 천사의 노랫소리 같았다.
“아악!”
“사, 살려 줘!”
오파츠의 방어막 안에서, 산 채로 뜯어 먹히는 부하 기사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지옥이었다.
“헉, 헉…!”
울컥 올라오는 핏물이 턱으로 줄줄 흘렀다. 부단장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네 마리의 괴수 앞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예감한 통증은 없었다. 부단장이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있는 건 괴수가 아니라 빌어먹게도 키가 큰 남자였다.
“검을 떨어뜨리면 쓰나. 이런 사지에서.”
툭. 슐로이츠가 걷어찬 부단장의 검이 흙바닥을 굴렀다.
부단장의 얼굴이 시뻘게지는 것도 잠시.
“부단장.”
슐로이츠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 위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귀경 덕분에 아주 많은 부하가 개죽음이나 당했는데, 어떻게 머리는 멀쩡한가?”
순간 부단장의 숨이 턱 하니 막혔다. 누군가가 목을 조른 것 같았고, 그제야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던 나뒹구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목과 얼굴이 분리되어 끔찍한….
속이 엉망으로 뒤집히는 것 같다. 부단장은 견디지 못하고 구토를 시작했다.
“웁, 우읍…!”
“돌아 버릴 것 같다고 자살이라도 하면 곤란하고.”
슐로이츠의 얼굴은 오만하고 냉정했으며 동시에 짙은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라파엘의 표현대로라면 대단히 잘생기고 못돼 처먹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며, 동시에 어떤 한 명의 여자한테만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기도 했다.
“군부의 군의관들이 뛰어나니 귀환하는 즉시 의무실에 처박혀 울기나 해. 이 군부의 총사령관으로서 기꺼이 자비를 베풀어 주지.”
***
“근위대의 손실이 크네.”
“블란데아 사령관님. 혹시 놀라셨다든지….”
집무실에 앉아 착잡한 낯으로 서류를 읽고 있던 나는 라파엘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놀라? 군부는 원래 사상자가 많잖아. 사실 이 정도면 ‘규모’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도 아니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쳐다보자 라파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 어… 생각보다 냉정하시네요.”
“욕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블란데아 사령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르페브르의 오파츠가 보급된 이후엔 이만큼의 사상자도 잘 나오진 않았죠.”
“사지에서 자존심 싸움이나 하니까 그런 꼴이나 당하지. 자업자득이잖아. 슐츠를 잘 따라다니기나 하든가…. 그 부단장은 돌아가는 즉시 지휘관 옷 벗어야겠네.”
풉.
갑자기 라파엘이 웃었다.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아니, 이젠 제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슐츠’, ‘슐츠’ 하시는 게 너무…. 앗. 얼굴 빨개지셨… 시정하겠습니다!”
힘을 잃은 금사 기둥이 밤에는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는 희한한 보고까지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밤은 생도들이 잠을 잘 못 이루겠는걸.”
“아무래도 그렇지요. 블란데아 사령관님은 오늘도….”
“루리 로시에 영애와 있어야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군부에 들어온 시체들은 일곱 구는 되어 보였다.
사령관 관저로 돌아온 나는 늘 그랬듯 루리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가 찾아왔습니다.”
“…티타니아가?”
갑자기 왜? 나는 일단 데려오라고 말했다.
조금 후 페니가 티타니아를 데려왔다. 오랜만에 보는 티타니아는 사교계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살은 조금 빠져 있었지만 전보다 건강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후련해 보인달까….
‘매일 누군가를 갈군 사람의 표정인데.’
설마 힐드온인가?
요즘 바빠서 청색 가호자들에게 신경을 잘 쓰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근위대가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스으읍.”
“드, 들었습니다!”
‘내가 군부 일을 처리하는 동안 페니가 청색 가호자들을 돌본 건 맞는데….’
페니가 숨 한 번 들이켜는 것 가지고도 저렇게 긴장하다니.
“그래서?”
“실은 아버지가 군부에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설마 로시에 가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티타니아더러 루리를 목숨 걸고 지키라는 둥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그날은 루리와 같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왜, 왜냐하면….”
티타니아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야 저도 안전하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셔서….”
순간 맥이 탁 풀렸다.
“크흠….”
티타니아는 아버지의 과보호가 민망한 딸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의 사랑이 굳건하기 때문에.
이젠 누구도 티타니아와 로시에 가주 사이를 양녀니 뭐니 하며 갈라놓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과는 다르게.
페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디 생도 주제에. 제1 사령관님의 관저에서 머물려고. 하지? 계급이 맞지 않다.”
“괜찮아, 페니.”
나는 루리 로시에의 손을 잡고 대충 흔들었다.
“티타니아. 자리는 직접 마련해. 여기 너보다 계급 낮은 사람 없으니까.”
“그, 그건 당연히…!”
티타니아가 서둘러 움직였다.
졸지에 이 좁은 방에서 의사를 포함해 다섯 명이 자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슐로이츠가 찾아왔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군부 제1 사령관이 언제부터 한낱 생도들처럼 다인실을 쓰게 됐지?”
난 민망해져서 턱을 가볍게 긁적였다.
하지만 시체가 많이 들어온 날이니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지. 군부야 당연히 안전하겠지만….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
“블란데아 사령관님! 신관님들이 머무시는 숙소가…!”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전해졌다.